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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24
    독이데 수업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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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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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3/20
    경계도시2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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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알한방으로 참새 백마리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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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스운 이야기와 무서운 이야기의 조합=꺄아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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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타자-사회적 병리현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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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3/14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세계철학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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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9일 경철수고 수업 정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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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03/05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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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이데 수업정리

3월23일 수업

독일이데올로기

1편 포이어바하편 박재희 옮김. 청년사 72페이지까지

 

포이어바하의 유물론이 아닌 맑스의 유물론에 대한 고찰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를 인용하며 감각적 인식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이성에 의해 드러나는 것만이 진리임을 주장하며 감각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전제한다.

플라톤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관념론은 자기‘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으로 본데 반해 포이어바하는 감각과 현실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본다.-유물론적 사고관의 등장

 

여기서 한발자국 더아나가 맑스의 혁명적 사고가 시작된다. 사유는 유(類)의 경험에 의거해 일반화, 보편화되는 ‘과정’이며, 그러한 사유의 과정이 바로 철학이다. 이 지점에서 맑스는 진리와 현실로 양분된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여 사유는 현실로부터 도출되는 결과물임을 고발한다. 순수한 사유, 순수한 진리는 없다.

 

맑스 철학과 경험론과의 관계

철학이 현실의 추상화과정이라는 맑스의 테제는 로크적 테제와 연결점이 있다.

 

 

41페이지

2.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를 위한 전제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여러 전제들은 결코 멋대로 정한 독단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에 실재하는 전제들이며, 이들 전제로부터 이끌어지는 추상은 단지 상상 속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전제들은 오로지 경험적으로만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모든 인간역사의 첫 번째 전제는 두말할 것 없이, 살아있는 인간 개개인들의 존재이다. 따라서 첫째로 설정되어져야 할 것은 이들 개개인들의 물질적 신체 조직 및 그로 인해 발생되는 여타 자연에 대한 그들의 관계이다......무릇 모든 역사서술은 이러한 자연적인 토대와, 역사진행의 과정에서 인간의 활동에 의해 이러한 토대가 변화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인간이 둥물과 구별되는 것은 그들이 신체조직에 의해 규정되는 단계에서, 그들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면서’부터였다........

이 생산의 방식을 단지 개개인들의 육체적 생산을 재생산해 낸다는 측면에서만 고찰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생산의 방식이란 곧 이러한 개개인들의 일정한 활동의 방식이고, 그들의 삶을 표현하는 일정한 방식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일정한 ‘생활양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그들의 생산, 즉, ‘무엇’을 생산하는가 그리고 ‘어떻게’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어떠한 존재인가는 그들이 수행하는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에 따라 좌우된다.

 

 

경험론과 연결되는 듯한 맑스의 테제는 인간과 자연대상과의 관계라는 전통적 테제를 폐기하고 사회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구별점을 드러낸다. 즉 순수관계는 없으며 이는 사회적 삶에 대한 함의를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철학의 독자성은 파괴된다. 철학은 자립적인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과학의 1차적 일반화를 거쳐 얻어진 추상화의 2차적 산물에 불과한 의존적 학문인 것이다.

 

이러한 맑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는 구별된다. 독일고전철학의 종언에서 엥겔스는 기계론적 물질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는듯 하지만(포이어바하와 유사하다.)맑스는 물질개념을 ‘인간이 육체를 갖고 있다.’는 제1원리로부터 이끌어낸다. 즉, 현실적 개인들, 현실적 개인의 생활관계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한다. 이러한 탈형이상학은 이후의 전개에서 차이를 드러내지만 그 출발이 되는 전제는 니체와도 유사한 사유를 보여준다.

 

맑스는 포이어바하의 출발점인 ‘인간 그 자체’라는 개념도 추상적 개념이라고 보고 구체적 개념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맑스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인간을 파악하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의 인간‘이야말로 사변을 벗어던진 구체적 개념이라고 본다.

 

 

47페이지

4. 유물론적 역사관의 본질,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이념, 개념, 의식의 생산은 무엇보다도 직접적으로 인간의 물질활동 및 물질적 교류-현실 생활의 언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인간은 그들의 개념, 관념, 그밖의 것들의 생산자이다. 하지만 현실의 활동하는 인간은 그 발전의 최고 형태에서조차도 그들의 생산력 발전수준과 그에 조응하는 교류의 일정한 발전 수준에 의해 제약된다. 의식이란 의식되어진 존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실제의 생활을 영위한다는 뜻이다........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오히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만이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자신들의 사고와 그 생산물들을 변화시킨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자립적인 철학이란 현실에 관한 기술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존재의 매개물을 상실한다. 자립적인 철학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역사발전으로부터 이끌어낸 추상 즉, 가장 일반적인 결론들을 총괄할 것 뿐이다.

 

 

맑스의 유명한 테제인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의 개념이 여기에서도 엿보이고 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이 명제는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은 상호규정적이다’라는 명제로 보충되어야 한다. 구조와 행위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측면에 주목해야만 우리는 맑스의 ‘실천 철학’을 낡은 것으로 폐기하지 않으면서 인간해방을 위한 사유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문제제기할 수 있는 지점은, 맑스는 경험과 역사를 벗어난 외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보며 인정할 수도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정말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가?

맑스주의와 근대성이라는 글에서 이진경 선생은 ‘사회적 무의식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한 맑스의 재해석을 촉구한다. 이 주장을 올곧이 받아들이는 것은 차후의 문제일테지만 문제의식의 출발이라는 측면은 공유가능하다고 본다. 맑스도 ‘경제학비판’에서 “그렇지만 곤란한 것은 그리스의 예술이나 서사시가 어떤 사회적인 발전과 결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우리들에게 대해서 아직 예술적인 즐거움을 주며, 그리고 또 어떤 점에서는 규범으로서의 도달할 수 없는 규범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점에 있다”고 말했다. 맑스의 혁명적 사고인 실천철학이 여전히 유효하고 그것이 인간해방을 지향한다는 대전제 아래서 맑스의 사유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맑스가 지적한 전통철학의 오류인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흔히 말하는 맑스주의자들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이후 맑스를 ‘죽은 개’ 취급하는 것은 맑스를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천철학이 그 역동적 해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존재’들이 ‘실천’을 유기적으로 끊임없이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고자 할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다시 외부라는 개념으로 돌아와서 논의를 이어가 보자. 현대철학의 가장 큰 위기를 초래하게 만든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난제를 철학에 제기했다. 그리고 이 난제는 맑스철학을 재구성하는데 무척이나 큰 어려움을 주고있다. 하지만 이론적 완결성을 담보하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사회적 존재의 모순을 더 심화시킬 뿐이다.

최근들어 이러한 ‘외부’에 대한 재해석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은 그러한 측면에서 진정한 맑스적 사유의 계승을 위한 노력이라고 보인다. 알튀세나 라캉주의적 맑시즘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 사유노선의 풍부함이 추가적으로 덧붙여진다면 현실의 모호한 모순을 극복하고 해방을 위한 실천적 동력이 지속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맑스가 경계한 기계적 목적론에 대한 구절을 살펴보고 오늘 수업 끝....

 

 

67페이지

공산주의란 우리에게 있어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며, 혹은 현실이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현재의 상태를 폐기해 나가는 ‘현실의 운동’이라 부른다. 이 운동의 여러 조건들 역시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들로부터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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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비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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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2를 보고

경계도시2를 보고

경계도시2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뒤에야 비로소 개봉이 되었다. 물론 다큐멘터리라는 특성상 500개가 넘는 테입을 편집하는 물리적 시간도 많이 필요했겠지만 그보다는 다른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3월18일 대학로에 있는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감독 홍형숙씨와의 대담시간이 상영이후에 주어졌다.

그렇게 힘든 영화를(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었다. 이는 다만 나만 느낀 것은 아닐거 같다.)만든 감독이라는 느낌이 안들정도로 홍감독은 평안해 보였고 동시에 강해보였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다큐영화를 만들지 못했으리라.

평론가 정성일씨는 경계도시1이 송두율교수에 관한 이야기라면 경계도시2는 송두율교수를 통해 한국사회를 말하는 영화라고 평했다.

아마도 그렇기에 한국사회의 구성원인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리라.

 

내가 본 느낌은 이 영화는 대한민국 사회를 ‘관찰’한 영화이다.

관찰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홍감독이 한국 사회의 관용을 호소하긴 하나 감독역시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것이라는 거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선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도덕책을 읽어준다고 해서 윤리의식이 생기는건 아니듯이 관용을 호소한다고 해서 영화를 본 관객의 똘레랑스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감독도 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 영화의 메시지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개인들에게 자기 성찰의 기회를 주기 위해 우리를 관찰한 영화이다.

관찰이라는 관점을 통해 이 영화는 사회적 불의이자 사회적 병리를 고발한다. 만약 이 영화가 도덕책을 읽어주는 영화였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강한 가치관이 내재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이 영화는 그만큼 날 아프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또 왠 개가 짖나부다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리차드 로티는 사회적으로 개인과 특수자를 인지하고 배려하는 능력은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표현했다. 그 능력의 발휘를 통해 사회는 자신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하지만 자신 속에 내재된 불의를 인식하고 점진적으로 그 불의를 제거할 동력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로티의 예술적 민감성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로티의 예술적 민감성이 발현된 이 영화가 사회적 불의를 고발한 것은 사실이나 그 불의를 점진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아도르노도 미메시스적 인식을 강조했지만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도구적 합리성이라는 악마를 극복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지 않았던가....

난 이 영화를 보면서 분노하는 나 자신을 보고 움찔하고야 말았다. 난 송두율 교수가 2003년 당시 마녀사냥을 당할 때 무관심했으며, 이 영화를 보기전까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용산의 비극, 이주노동자의 비극, 사회적 소외계층의 현실적 비극,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의 비극, 아동학대의 비극, 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비극.....

그 비극들을 겪을때 난 ‘아주 잠깐’ 분노했었다....‘잠깐’....

그런 내가 고작 이 영화한편을 매개로 이 사회에 분노하고 일침을 가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가 흔히 비판하는 수구꼴통이라는 이들과 빨갱이들.......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다수 국민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진흙탕물이 조금씩 나오는 물부족 동네가 있다. 대부분은 그냥 몸을 상하게 하는 진흙탕물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만 할뿐 우물을 파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생각따윈 없다. 하지만 어떤 이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우물을 파다가 졸졸 나오던 진흙탕물마저 안나오게 만들었다. 그럴 경우 문제해결에 소극적이고 관심없는 이들은 우물을 파는 이들을 아마도 매장시켜버릴거다. 같이 판다면 새로운 우물을 뚫을수 있음에도.....

 

수구와 빨갱이는 적극적인 소수이고 중간자인 국민은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소수이다.

오류를 저지르는 이들은 적극적인 이들이란 이야기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이들이 나쁜건가....소극적인 이들이 나쁜건가?

좀 더 나은 사회, 서로가 역지사지 할 수 있는 사회.

정말 그런 사회를 원한다면 모두가 치열해져야 할 것이다.

수구꼴통들이 사회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까닭은 다수의 국민들이 우물을 파려고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수위에 군림할 수 있는거다. 자신의 시민권을 권리로 인식조차 하지 않는 수많은 다수중에 나도 포함되지는 않는건지......

 

 

영화내내 송두율 교수는 많은 시간 침묵한다. (강요당한 침묵일 것이다.)대신 그의 부인인 정정희씨는 자신의 원칙을 절규하듯이 외친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위해 전술적 전향을 강조하는 시민운동 진영에게 정정희씨의 절규는 씨알도 안맥힌다.

“우리가 왜 전향을 해야하는가? 우리는 북에 편향적이지 않다. 남북의 평화를 위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경계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문제는 북은 우리의 방북을 허용했지만 남은 우리의 방남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편향적인 친북인사라는 것인가?”

 

갈등의 해결은 어떻게 가능한가? 더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은 희생되어도 가능한가?

파시즘은 우익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좌파들에게도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다. 좌파라고 하는 시민사회계층은 송교수부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왜 당신들만 생각하고 운동진영 전체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건가? 당신들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 곧 있을 총선의 패배에 큰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앞장서 남북화해모드시기를 이용해 초청한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지도 모를 절체정명의 위기는 대의라는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야 만다.

 

 

 

적극적인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플라톤이나 니체가 주장한 것처럼 정말 능력있는 소수에 의해서나 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변화를 위해 개인은 희생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내가 있고 사회가 있는 것이지 사회가 있고 내가 있는게 아니다. 사회를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우리의 관용은 어디서 어디까지의 경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 영화는 그렇게도 어려운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625를 경험하지도 못한 이들이 625를 경험한 이들의 레드컴플렉스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단순히 레드컴플렉스가 기득권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만 비판할 건가?

그리고 그런 이데올로기에 이용되는 어리석은 대중을 욕하기만 할건가?

물론 다수의 대중도 욕먹어 마땅하다.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앞에서 정치니 사회니 하는건 사치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하지만 자신의 생존이 극한까지 몰린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바로 정치가 아닌가.

결국 먹고살만한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게 아니라 먹고사는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참 역설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영화이다. 공동체와 개인의 딜레마....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는 들뢰즈가 이야기 한 것처럼 자유로운 탈주가 가능한 공동체가 결코 아니다. 자유로운 탈주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 혹은 가능해야 하는 건지.....여러 차원에서 이 영화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이 영화를 보고 감정적으로 동요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또는 애써 잊을려고 하는 부분을 감정적으로 건들고 있기는 하지만 감정으로만 접근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하나의 냄비만 끓이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폭력적인 속성이 내재하고 있어 르네 지라르가 말한 것처럼 희생양을 필연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건가?

아니라면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자본주의의 합리주의가 우리에게 이런 속성을 심어주고 있는건가?

 

비판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적 토론의 장이 개방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절차에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는 당위에 그치고 만다.

 

이 영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의 경계를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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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한방으로 참새 백마리 죽이기

학원에서 한 아이가 수업시간에 손을 번쩍 들면서 외쳤다...

 

쌤...재밌는 이야기 해드릴게요....

 

수업도중에....

 

열강중인데....

 

맥락이 안이어지게 생겼는데.....

 

하지만........

 

두둥.......재밌는 이야기라지 않는가.......

 

그래서 꾹 참고......(어차피 지네 공부인데...뭘.......시험도 지네가 보는데.......뭐....ㅡ,.ㅡ)

 

해보라고 했다....

 

그 넘 평소에도 4차원이라.....묘한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그넘왈- 포수가 총알 한방으로 참새 백마리를 죽였어요.....어떻게 한건지 아삼?

 

나-  몰러 이 쉑아...잽싸게 말해......

 

그넘 왈- 참새 이름이 백마리에염.......

 

 뚜비뚜바~~~

 

휘바휘바~~~~~

 

난 서서히 다가가 그넘의 턱을 단디 부여잡고 40대를 때리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느라......죽을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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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이야기와 무서운 이야기의 조합=꺄아악~~!

평소 학원에서 냉철한 카리스마로 아이들을 대하는 본인.....

 

본인의 웃지 않는 모습에 자극받은 아해들이 날 웃겨보겠다고 나섰다....

 

그네들 수준이 거기서 거기인지라.......콧방구만 쓩슝 껴대다......

어느덧 계속 웃지 않고 카리스마로 남겠다는 오기가 생겨서리......좀 웃긴 이바구가 나와도 참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능....

 

참고 참다 드뎌 나도 모르게 빵 터진 이바구가 있어 이 자리를 빌어 소개를......

 

학생1. 쌤 웃긴이바구 하나 해줄게요...

나. 옹야

 

학생1. 옛날에 촉촉한 초코칩이랑 안촉촉한 초코칩이 살았어용...근데 안촉촉한 초코칩이 촉촉한 초코칩을 부러버 했대요,.

             그래서 안촉촉한 초코칩이 촉촉한 초코칩에게 물어봤데요.....어카면 너처럼 촉촉한 초코칩이 될수 있닝?

             그랬더니 촉촉한 초코칩이 안촉촉한 초코칩에게 목욕해라고 대답했대요...웃기죠?

나. 뒤질랜드 가고잡냐? 안 웃겨.....

 

학생1. 그럼 이번엔 무서운 이바구 해줄게요....

나. 옹야

 

학생1. 옛날에 한 부부와 아이가 있었대용...근데 엄마가 우울증에 걸려있었데요...그래서 애기를 너무 싫어했대요...

             그러던 어느날 부부와 아이가 낚시터에 놀러갔는데 우울증 걸린 엄마가 애를 확 밀어버렸데요....

             몇년뒤 우울증에서 극복한 엄마는 다시 애를 낳고 이전의 아픈 기억을 잊고 새로 낳은 애를 잘 키우기로 다짐했대요..

나. 재미없고 안무섭다...

 

학생1. 뷁...기달리삼....

            얼마 뒤에 다시 그 낚시터에 그 가족이 갔대요.....근데 새로 태어난 애가 낚시를 하다가 뭔가가 줄에 걸린거에염....

            과연 걸린것은 무엇일까요?

나. 몇년전에 죽은 애라면 전혀 그럴싸하지 않을것이야....

 

학생1. 안촉촉한 초코칩이래요...

 

나. 푸들푸들.......커험험험..........우캬캬캬캬캬캬캬.....우헬헬헬헬.......

     웃기다 웃겨.....넌 상점10점이다.....

 

그 후로 상점에 자극받은 다른 아해들이 절 웃겨볼려고 수업이 시도를 했지만 그들은 모두 벌점을 먹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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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 호네트 정의의 타자

정의의 타자

하버마스와 탈근대의 윤리적 도전

 

 

탈근대의 문제제기

1. 동일성이념에 반대-인간의 자유확대

2. 단순한 질서파괴에 반대-윤리적 무관심에 반대

대안-형이상학 비판을 인도할 규범적 정치적 지향 필요

 

 

탈근대론의 윤리

특수한 것, 이질적인 것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이념이 출발점.

그러한 윤리는 비동일자를 적절히 다루어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을 충족함

문제점

1. 특수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2. 도덕적 보호의 종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다양한 대답

1. 사회적 평등 실현의 확대

2. 윤리적 민감성의 증대

3. 사람들 사이의 비대칭적 의무

 

호네트는 3번관점이 칸트 전통을 잇는 근대 도덕이론들에 대해 참된 도전을 의미하는 탈근대윤리의 형식이 될수 있다고 봄.

정의의 타자=인간적 배려

 

 

호네트의 이론전개

1. 리요타르의 윤리학은 담론윤리에 포섭됨을 보여주면서 비판

2. 후기 하이데거 사상에 기대는 스테판 케이 화이트의 연구제시. 하지만 이 관점도 담론윤리틀안에 재생산 가능

3.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저작에 기대어 제시한 윤리적 반성이 대안. 데리다의 반성은 구체적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관련해 평등의 이념과 일치하지 않고 긴장관계에 있는 관점을 보여줌.

 

 

1. 리요타르

칸트를 겨냥한 상쟁과 탈근대적 지식이라는 저작.

형이상학의 종말-보편적 이성의 종말=마르크스주의의 거대서사 종말

이성의 우위는 역사철학이 이성에 해방적힘을 부여한다는 상황에 이성이 기생함으로 타당성 확보

 

언어이론을 통한 비판

모든 담론은 독자적 증명논리를 가지는데 그것은 서로간에 불의를 행사하고 있음.

언어체계안에 인간주체 재도입

예: 한 말놀이가 다른 말놀이로 번역되지 않음으로 생기는 불의

1. 노동자의 언어가 경제적 효율성의 언어에 종속

2. 나치 수용소 생존자가 형식법 담론안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않음.

 

리요타르 도덕철학의 핵심

특정종류의 담론이 우위를 보이는 상황을 극복하자

1. 무시와 소외를 겪는 말놀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고발적 윤리학.-결실맺기 어려움

2. 소외된 말놀이의 사회적 의사소통을 개방하자

 

1번은 아도르노식의 자기포기적 한계 때문에 피해야 하는 관점

2번은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에 포함되어 버림.

 

 

하버마스의 윤리학

칸트의 절차주의적 도덕윤리의 계승(정언명법은 고립된 당사자 상정)+인간의 언어적 상호주관성 고려

행위주체가 요구하는 실천적 규범의 보편타당성 여부는 행위주체들간의 공론장에서의 절차적 소통을 통해 확보됨-평등한 의사소통기회의 확보가 전제

 

리요타르의 논의는 억압된 말놀이의 해방이 가능하기 위해 절차적 규범이라는 담론윤리에 포섭됨을 확인할 수 있음.

 

 

 

민감한 도덕적 감수성에 대한 고찰

 

탈근대윤리학 정초를 위해 화이트는 타자의 고유성에 대한 무시를 문제삼는다. 그의 반성의 출발점은 칸트전통의 도덕적 보편주의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

근대의 윤리적 사유는 실천적 결과가 없는 행위는 도덕적 사유에서 배제되고 있음.

비판-칸트는 실상 행위의 도덕적 질을 실천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의 의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행위에 대한 책임개념으로 논박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

 

화이트의 논의는 근대철학의 사태를 고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

화이트 사상의 논거는 아도르노, 니체, 하이데거에서 발견

근대 도덕이론은 행위에 고정됨으로써 잠재적으로 타자의 고유성을 추방한다.

하이데거-초연한 내맡김 Gelassenheit

아도르노-모방적 반응 mimetische Reaktion

화이트에 의하면 두 개념 모두 행위를 억제하고 대립자의 고유성에 주의력을 향상시키는 태도를 가르킴

타자와 그러한 태도를 취함으로 타자를 도덕적 의무충족의 대상이 아니라 그 인격이 지닌 모든 차이를 고려하면서 타자를 인식하게 됨.

개별적 특수성을 지각하는 방식으로 화이트가 제시하는 방안-덕론의 가공=배려

 

덕론의 역할

1. 타자에 대한 민감성의 증대

2. 평등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으로서의 민감성

로티와 유사한 발상. 로티는 한 사회의 도덕적 진보는 규범적 개선의 제도화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불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가능-미학적 감수성의 찬양

로티가 예술가의 감수성만을 신뢰한 반면 화이트는 그런 능력을 개별주체의 인륜적 능력으로 뿌리내리고 싶어함.

하지만 이러한 화이트의 윤리학은 칸트의 상호주관성 도덕이론과 보완관계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상호주관적 논증의 주고받기와 아주 유사

하버마스와 화이트는 모두 개별 개인의 고유성을 규범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기회는 단지 우리가 행위의 문제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직접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도덕적 판단을 내릴경우에만 가능함.

 

즉 화이트는 새로운 도덕원칙을 제시했다기 보다는 평등의 이념을 민감성을 가지고 적용해야 한다는 관점

이러한 윤리학은 덕이라는 관점이 하나의 행동방식으로 규범적으로 높게 평가된다는 점

그렇다면 완전히 중립적이고자 하는 담론윤리와 얼마나 결합이 가능한가하는 문제 발생

이러한 역지사지의 관점은 인지적인 것인가 정서적인 것인가

정서적이라고 한다면 하버마스의 비판이 가해진다. 도덕담론은 우연적 정서적 결속에 의존하고 타당성에 근거한 진리추구라는 기능을 상실함.

 

 

또 다른 쟁점

도덕적 담론이 일정한 행동유형에 의존하는 것은 경험적 방법인가 규범적 방법인가

1.경험적 방법-하버마스

도덕적 논증에 참여하게된 의사소통행위는 역사적 학습과정의결과이다

2.규범적 방법-하버마스 비판=부정합적

그러한 속성은 경험에 의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니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속성

 

어쨌든 화이트의 윤리학은 하이데거에 기대어 윤리적 민감성의 증대라는 것인데 이것은 이미 담론윤리에서는 도덕적 담론에 참여하기 위한 인격적 전제라고 내세울수 있는 의사소통 덕목의 중심요소이다.

 

 

 

데리다의 방법론

리요타르가 사회내의 갈등을 윤리적으로 의식화하려는 것이든, 화이트가 개별적 인격의 개인적 특수성을 강조한 것이든 이 모두는 하버마스가 칸트의 의도를 상호주관성이론적 전제위에 발전시킨 도덕이론의 발상을 못벗어남

왜냐하면 모든 주체가 자신의 개별성을 강제없이 표현할수 있다는 보편적 이념이 전제되어야만 상호적 이해도달의 장애나 타자의 특수성에 대한 정서적 개방을 이야기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평을 데리다는 넘어선다.

 

데리다는 개인적 특수성을 정의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대체하려고 하지 않음.

오히려 평등이념에 생산적 대립의 관계를 가지는 관점만이 타자의 차이를 인지하게 해줌.

긴장관계의 필요-엄청난 윤리학적 부담

데리다 윤리학의 전개를 위한 예시

우정의 정치=우정안에서는 대칭적 의무가 없는 비대칭적 책임원칙이 지배

 

우정의 이중적 역할

1. 비대칭적 의무를 수용하라고 호소할수있는 존재

2. 보편적으로 도덕적으로 존중해야할 존재

=긴장관계의 공존

 

하지만 왜 이러한 관계가 도덕적 경험영역 전체를 규정할 수 있는지 드러나지 않음.

데리다는 근대법의 형식으로 설명을 시도함.

근대법이 구체적 경우에 적용되면서 다루는 반성을 주목

정당한 관점을 구현하는 두 가지 책임원칙이 충돌하는 속성을 우정의 정치와 공유한다고 봄

 

 

데리다의 논증

1. 근대법의 규범적 출발점-법적 주체의 자유를 행사하기위해 평등을 보장한다는 이념에 따라 이해갈등을 규제해야함

문제-매 경우 무엇이 어떤 관점에서 평등해야 하고 또 무엇이 불평등해야 하는지 해명요

언제나 새로울 수 있는 해석상의 문제 등장=법적용은 개방적, 해석학적, 절차적 성격

 

2. 데리다는 법적용의 실천이 지향하는 것은 평등원칙이 아니라 구체적 타자의 무한성에 대한 정의의 이념이라고 본다.

 

우정과의 유사점은 정의는 무한하고 계산할 수 없고 모든 규칙에 반항적이고 대칭에 대해 낯설고 이질적이며 독특하다. 하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법의 적용은 비교할 수 있고 명문화되어 있고 계산할 수 있고, 정리되어 쓰여진 부호화된 조항들의 체계이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개별적 타자성의 정의가 확립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관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우정의 비대칭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근대의 형식적 권리의 체계를 문제삼는 사회적 수준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그러한 사랑의 인정유형에 해당하는가?

여기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사유를 빌려온다.

 

레비나스는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 존재영역에 앞서 실존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존재론과 윤리학의 관계를 거꾸로 세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레비나스 사유의 단계

1. 타자의 얼굴을 통해 무제약적 배려를 경험-무한성에 대한 세계내적 경험

2. 중립적 관찰자의 관점-수많은 배려의무들 사이에서 어떻게 공정하게 처신할지의 판단의 심급이 필요=보편화된 제3자=칸트적 정의와 유사

평등과 배려의 관계에서 상위의 심급은 발견되지 않으므로 긴장관계를 경험한다.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법과 자비라는 두 개의 긴장관계로 본 관점을 평등과 배려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여기서 차이는 레비나스는 법과 자비의 지속적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데리다는 평등과 비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도덕적 지향의 원천이라고 본다.

데리다는 두 개의 도덕적 관점이 폭력적이고 해소될 수 없으며, 그러나 또한 동시에 생산적이기도 한 갈등관계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결론

하버마스 역시도 평등과 배려라는 관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길리건의 비판에 의해서

길리건은 칸트의 담론윤리가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의무를 무시한다고 보았다.

절차적으로 타당한 실천적 담론의 대칭성은 배려를 배후로 밀려나게 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는 도움주기나 이웃사랑이나 자발적 원조와 같은 도덕원칙들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의와 연대라는 논문에서 연대라는 관점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다. 하버마스가 정의의 타자라고 규정한 이 원칙은 다른 인간의 실존적 운명에 대해 정서적 차원까지 포괄하는 관심이라는 특징을 배려와 공유한다.

그러나 이 연대는 개별적 관심이 모든 인간존재에 똑같이, 다시 말해 어떤 종류의 특권이나 비대칭성도 없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배려와 구별된다. 즉 연대는 정의의 또다른 측면인데 왜냐면 연대관계에서 모든 주체는 평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의사소통적 삶의 형식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서로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는 그것이 형성되는 동기나 경험이 불명료하다. 그러한 연대의식이 생기기 위해서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가치공동체를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연대를, 하나의 공동체가 생길 때 어떤식으로든 따라다니는 특수주의의 요소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평등과 달리 연대는 보편적 이념이 아니라 추상적-유토피아적인 것인데 그것은 공동체 성원들이 윤리적으로 설정된 일정한 목표를 위해 통합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또한 특수한 부담의 경험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추상성 때문에 연대는 일방적 배려와 도움주기의 형식으로 언제나 우리의 사회를 초월하는 요소를 형성하고 있는 배려를 대체하는 보편적 이념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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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타자-사회적 병리현상 정리-

호네트 정의의 타자

 

논문 1-사회적 병리현상[사회철학의 전통과 현상황]

 

사회철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호네트는 사회철학의 역할이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잘못된 사회적 발전과정을 규정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에서 호네트는 사회철학의 요구와 과제를 밝히면서 이를 통해 가질 수 있는 인접학문분야와의 연관성을 명확하게 할 것임.

1. 사회철학의 과제를 사회적 병리로 판단하는 사유전통의 윤곽을 밝힘.

출발점은 문명비판을 수행한 장 자크 루소.

2. 이러한 전통이 풍부해진 것은 경험적 연구를 주도하는 사회학의 등장.

사회학 이후 사회철학의 구상이 파시즘과스탈린주의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탐구할 정도로 거대한 구상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논의

3. 결론적으로 역사적 고찰의 성과를 통해 사회철학의 이론적 요구와 특수한 문제가 무엇인지 대략의 윤곽을 그려냄

사회철학은 사회적 삶의 성공적 형태에 대한 척도를 논의하는 반성의 차원으로 이해됨.

 

 

1. 루소에서 니체로 - 사회철학적 문제제기의 등장

루소는 홉스가 관심을 가졌던 시민사회의 존속 조건보다는 시민사회가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원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자본주의적 삶의 조건들이 확장되면서 등장한 사기, 기만, 등의 행위에 기반한 생활방식 전체가 과연 인간이 좋은 성공적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제반조건을 포함하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짐.

루소의 사회철학의 탐구한 것은 새로운 방식의 자기실현을 강요하는 사회적 제약요소.

 

루소는 초기에 개인적 자유와 공적 덕의 상태에 따라 사회적 삶의 윤리적 수준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비판의 준거틀로 작동할 이상사회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루소는 인간이 자족성에 따라 살았던 선사시대를 이상사회로 바라보는 듯 하다.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불평등의 조건의 원인뿐 아니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 생활방식 전체에 대한 비판까지 확장해서 탐구를 한다.

루소는 비판적 진단의 척도로 활용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의 두 가지 속성을 끌어낸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자기보존의 충동과 동점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동정심이 있는 인간은 자기보존이라는 재생산적 필요기능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도덕적 억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즉 루소의 동정심은 이전 폴리스의 인륜적 삶이 수행했던 역할을 인간학적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의 공적인 덕은 자연적 사태가되고 만다. 즉 루소는 시민사회의 병리를 진단하며 자신 그대로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루소가 말하는 자신 그대로의 의미는 자연상태에서의 극단적 고립상태이다. 즉 인간은 상호작용없이 독립된 채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이 상태야말로 루소가 문명비판을 수행하는 윤리적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1. 루소는 자연적 생활방식으로부터의 이탈이 어떤 점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지 묘사한다.

2. 이 이탈이야말로 인간의 자기소외의 과정이다.

 

루소에 의하면 욕구의 확실성에 따른 삶이라는 자연적 존재방식이 붕괴하면서 인간은 규율된 상호관계에 자신을 맡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인간은 그의 행위방향을 외부로 이전케 하는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외부로 이전된 삶의 구조에 의해서 자기표현의 불안도 생기고 동정심과 같은 근원적 덕성도 약해진 것이다.

 

루소를 근대 사회철학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수행한 사회진단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문제제기 방식과 이에 대한 대답의 방법적 형태이다. 루소는 당시의 삶을 인간의 근원적 형태에서 벗어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소외라는 철학적 이념을 창조했다.

루소의 방법론의 의의는 이제 사회적 삶의 형식을 더 이상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의 측면에서만 탐구하지 않고 사회적 삶이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목표에 부과한 구조적 제약에 대해서도 탐구해야 할 가능성을 만들어내었다.

 

루소가 자유의 상실과 덕성의 붕괴로 왜곡과 소외가 발생하는 것은 분리의 결과라고 본데 비해 헤겔은 결코 주관적 자유의 상실이 그 원인이 아니었다.

헤겔은 루소와 정반대로 개인적 특수주의가 무절제하게 강화됨에 따른 파괴적 결과가 사회병리의 원인이었다. 헤겔이 진단한 사회병리는 사회적 개별화, 정치적 무관심, 경제적 빈곤화등이었다.

헤겔에게 있어 핵심문제는 시민들이 단지 법적 규율이라는 협소한 결합을 통해서만 서로 관계하는 사회적 영역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로서 헤겔

헤겔은 인륜적 총체성이 형성된 사회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적 사회를 이상향으로 본다. 하지만 시민사회에서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가 획득되고 교환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인륜성은 파괴된다. 즉 시민사회의 등장은 역사적 분열의 결과인 것이다. 즉 이상적인 보편적 사회(개인적 삶과 공적 덕성이 서로 교차되는, 보편속에서 자신을 구성적 요소로 받아들이게 되는 사회)는 시민의 자유증가와 더불어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루소와 헤겔의 차이

이 둘은 인간의 성공적 삶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을 다르게 본다.

루소에게는 가능한 극단적 자족상태가 성공적 삶의 조건이라면 헤겔에게는 공동선에 기초한 인간 상호간의 의무가 바로 그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적 병리는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목적에 대립되는 사회적 발전과정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비판적 사회진단은 노동을 구조적으로 억압하는 사회적 조건을 자본주의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소외비판이다.

마르크스는 이후 정치경제학에 심취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그 진행법칙속의 구조적 모순이 입증될 때만 적합하게 비판될 수 있다는 통찰이 성장하면서 과학적 모델에 경도된다. 따라서 맑스는 사회적 소외의 논의가 인간의 속성에 대한 사변적 개념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다는 신념을 갖게되면서 자신의 철학적 목표를 과학적 프로그램으로 전환한다.

맑스는 사변적이라는 이유로 소외를 과학으로 전화했던 것처럼, 물화를 좋은 삶에 대한 장애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기실현구조, 즉 인간의 욕구본성에 대한 실체적 가정에 대한 증명도 포기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맑스의 새로운 비판모델이 인간의 자기실현 구조에서 전제한 것은 자기실현의 목적이나 의도가 아니라 그것의 필수적 실현조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이 모든 현상들을 하나의 단일한 그리고 포괄적 위기의 문화적 증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론적 관점에 도달한 것은 니체였다.

니체는 당시의 사회를 전적으로 왜곡된 것으로 보았다. 허무주의는 완전무결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주변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병리현상의 증상적 표출이었던 것이다.

 

니체는 사회적 현상에 관심없음. 니체는 장애를 예증하기 위해 사회적 현상을 일시적으로 끌어들이기만할 뿐. 이 장애의 기원이나 쟁점은 단지 인간의 문화적 영역에 존재하는 것.

이러한 관점전환을 통해 니체는 역사주의나 관념론과 단절할 수 있는 역사적 고찰방식을 얻어냈다. 왜냐면 니체는 과거에 대한 문화적 해석체계에서 바로 현재의 병리적 현상에 토대를 마련한 지적 내용들을 끄집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만든 문화사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 프로그램은 푸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가 보여주듯이 오늘날에도 사회철학적 시대진단을 위한 방법적 모델로 남아있다.

 

니체의 시도에서 처음부터 불분명한 것은 근대 문화비판의 정당한 평가척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 좋은 삶의 조건

 

루소-고립적 자기관계

헤겔-공동체에 살아있는 인륜성

마르크스-노동을 통한 대상화

니체-삶을 긍정하는 가치지평이 실행력있게 존재하는 것.

이것이 가능한 것은 특별한 재능덕에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특권적 능력을 가진 협소한 범위의 개인들

니체가 밝힌 것은 좋은 삶의 윤리적 이상은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루소, 헤겔, 맑스에게도 적용된다. 즉, 윤리적 보편주의의 배후에는 특수한 세계관을 선호하는 가치관이 숨겨져 있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철학의 종말을 고한다.

 

 

 

2. 인간학과 역사철학 사이에서-사회학 등장이후의 사회철학

 

사회학자들의 문제의식-근대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사회적 가치구조는 지금까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목적과 관련해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윤리적 구성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사회학의 과제-윤리적 위기를 실제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그 기원을 설명하는 것.

이것은 헤겔의 문제의식과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점은 내용적 규정에서 발생한다. 즉 현재의 윤리적 위기를 출현케 한 사회적 과정은 더 이상 원자화와 분열의 증대가 아니라 도덕적 방향 상실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1세대 사회학의 영향지점

니체-객관적 가치질서가 붕괴됨에 따라 주체들이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설정할 수 있는 목적 역시 붕괴되고 말았는가?

마르크스-새로운 경제양식이 인격적 유대 대신에 목적합리적 사고에 따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두가지 모델은 이후 혼융되면서 사회학적 시대진단을 지배했던 테제에 도달하기 위해 작은 사고의 진전이 필요하다. - 윤리적 방향상실. 즉 허무주의의 제도적 기원은 자본주의적 경제의 관철속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짐멜-인간관계의 물화지적

퇴니스-사회적 공동체 유대의 해체에 주목

베버-세계의 근본적 탈주술화에 관심

뒤르켐-유기적 연대 형태의 형성 탐구

 

모두에게 문제가 되는 사회화 과정은 새로운 경제질서의 정착이 사회적 생활세계의 도덕적 공동화를 초래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사회학자들의 시대규정이 갖는 이론적 문제는 헤겔이나 맑스보다 훨씬 분명한 문제지점이었다.

1. 사회철학이 사회학과 합체되면서 경험적 검증에 대한 압력이 등장하자마자 사회철학의 역사철학과의 연관성이 조명받게되었다. 그러나 목적론적 역사철학에서 소외진단이 갖는 가치평가적 의미는 역사철학의 서술적 의미 요소 뒤에서 은페된다.

그래서 여전히 병리현상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자신의 평가척도의 정당화를 논증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 점에서 방법론적 장애에 부딪힌 사회학은 니체 문화진단의 연장선상에서 사회가 윤리적 임의성과 같은 허무주의에 놓이게 되었다고 가정하게 되는데, 그렇게 될 경우 사회학은 자신의 가치평가 척도에 대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떠한 정당화 가능성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철학은 자신의 근원적 탐구영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사회학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거의 마련은 역시 철학적 틀 속에서 마련된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새로운 입장은 크게 두가지이다.

1. 철학적 인간학-경험적 연구를 통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기되었던 문제를 해명하려는 것

2. 역사철학적 사고유형에 대한 새로운 관심증대

 

대표적으로 루카치와 플래스너

헬무트 플래스너-공동체의 경계

사회적 병리현상은 자본주의적 산업화과정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에 반대하는 정치적 행동의 결과에 근거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촉발된 구조변동은 인간의 정체성 형성조건과 화해불가능하다. 즉 공동체의 상호작용 유형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인간의 강제없는 자기실현을 가능케 하는 인간학적 전제는 훼손된다는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역사와 계급의식

자본주의가 만든 근대의 병리가 공동체 형성의 사회적 기능을 파괴한다. 플래스너를 비판하면서 루카치는 맑스와 베버를 조합해 자본주의사회에서 물화는 직접적 현실이며 이는 이들의 자유로운 자기실현 조건을 남김없이 파괴한다는 것이다.

 

루카치나 플래스너는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규정 척도를 설정함에 있어 모든 규범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윤리적 상대주의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플래스너는 경험과학연구를 통해 인간의 탈중심적 입장을 자신의 근거로 세우려 했고 루카치는 역사유물론을 객관적 필연성에 대한 예언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후의 사회학적 연구도 인간학과 역사철학이라는 두 가지 준거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플래스너와 같은 단독적 사상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간의 자기실현의 장애로서 자본주의적 경제양식의 일면적 합리화 압력을 분석의 사회적 준거점으로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후 등장한 파시즘도 그 배경을 형성한 원천은 자본주의적 경제양식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연구라 할 지라도 사회철학적 방법론적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계몽의 변증법과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연구 역시 인간학과 역사철학의 근거 중의 하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된 전체주의의 압력,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압박속에서 진보에 대한 역사철학적 희망은 사라져갔고 문화비판적 회의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회철학의 분석과제가 전체주의의 형성을 전권적 주제로 만든 변화의 문턱에 도달하게 되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전체주의적 상황의 원인을 찾기 위한 근거는 문명화 과정 전체의 잘못된 발전결과로 이해될 때만 적절히 해명될 수 있었다. 루소가 잘못된 문명발전의 시원을 인간간의 교류에서 찾았다면 아도르노는 노동에서 찾았다. 즉 마르크스의 인간노동의 긍정성을 전면부정하면서 노동은 단지 도구적 지배에 기여하는 요소로만 파악된다. 즉 주체는 노동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자연적 충동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을 형성하며, 역으로 노동활동을 통해 자연세계는 단지 인간의 목적달성을 위한 조작영역으로 축소된다. 최초의 도구적 지배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연에 대해 자신을 주장할 알게 되었지만, 이제 이러한 행위는 단계적으로 자신의 본능적 삶을 훈육하고, 자신의 감각적 능력을 빈곤화시키고, 사회적 지배관계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루소에게서 타락과정의 끝이 위신을 둘러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통제되지 않은 투쟁이라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게서는 이는 결국 현대사회의 총체적 폭력지배로 흐른다.

 

 

도구적 이성의 발전논리에 대한 두 가지 단점

1. 기술적 합리화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모든 작용요소들이 전체주의의 발생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공백으로 남는다.

2. 전체주의적 지배는 인류의 초기 역사로까지 소급되는 합리화과정의 정점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러한 지배의 문명적 특수위치는 근본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주의라는 사회적 현실 자체가 아니라 문명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병리현상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식에 의하자면 법적 자유의 확장이나, 정치적 결정의 민주화, 개인적 행위영역의 개방과 같은 진보들은 더 이상 전면에 등장할 수 없다.

 

비판의 준거를 헤겔과 같이 역사적 이상론에서 찾는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아도르노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체주의적 폭력지배의 등장이 바로 근대사회 내부에서만 형성될 수 있었던 사회적 병리의 결과로 규정한다.

 

아렌트는 자신의 근거마련을 위해 경험적 증거들을 제시하지만 이를 통해 인간학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강화하는 대신 항상 고대 폴리스에 대한 이상적 서술이라는 방식으로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렌트의 역사철학적 입장을 제거하면 그녀의 사회철학적 진단을 뒷받침하는 인간학적 주장이 드러난다. 즉 인간주체는 그 본성상 공적 영역에서 주목받고 인정받는것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인간주체는 이를 통해 자신의 실존적 문제들과 위험성들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심리적 안정성과 자기의식의 척도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 자유와 공적 실천은 인간에게 서로 얽혀있는 것이므로 정치적 공공성이라는 사회적 영역의 존재만이 인간에게 성공적 삶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이런 테제로부터 도출된 아렌트의 사회적 이상은 이제 전체주의라는 사회적 지배체제를 사회적 병리로 규정하는 척도로 사용된다.

우선 근대 산업사회에세 세계소외Weltentfremdung라는 일반적 경향이 지배하고 있음이 주장되고, 두 번째 단계로 이러한 소외의 특수한 형성과 완성이 전체주의적 지배체제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근대적 세계소외의 개념으로 총괄되는 사회적 행동방식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은 독일에서 비타 악티바Vita activa 라는 제목을 단 연구에서 이루어진다. 그녀의 테제에 의하면 발전하는 산업화조건아래서 생산과 노동의 기술적 활동이 강한 사회지배력을 획득하면서 공적 협의나 의사소통과 같이 자유를 신장하는 실천들이 배제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보편적 소외.

그녀의 저작인 전체주의 연구에서 나오듯이 개인들은 공적 공간이 쇠약해지면서 상호작용을 통한 의미부여 활동에서 단절되고, 홀로 고립되고 자신의 정체성에 불안을 느끼면서 단지 전체주의적 운동 속에서만 자기 이익의 적절한 형식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조직은 개인 내부에 공동의 위기감과 책임감을 형성하기 위해 모든 공격성을 외부로 향햐게 하고 외부의 적에 집중하게 만드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발전을 통해서만 안정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숙명적이고 치명적인 순환과정이 등장한다. 즉 전체주의 운동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점차적으로 대량학살 행위로 변형시킴으로써만 자신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분석은 이성비판 요구에 있어 약소하고 심리학적 차별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근대적 대중매체의 영향 방식과 관련해서는 소박성마저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등장을 사회적 병리현상의 맥락속에서 설명하는 것을 볼 때 아렌트의 주장은 비교할 수 없이 큰 설명력을 갖는다.

즉 기술적 활동의 확장을 통해 자유를 보장하는 행위영역이 제한된다는 것이나, 이를 통해 동시에 정치적 공공성의 붕괴가 동반된다는 것이나, 따라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발견되지 않는 경계가 아렌트에게서는 발견되며 이는 실제 역사과정에 대한 큰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3. 사회적 병리현상 진단에 대한 근거설정 방식들-사회철학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60-70년대 아렌트에 영향받아 하버마스, 테일러, 카스토리아디스가 새로운 형태의 사회철학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어분석철학의 발전으로 인해 철학적 진술의 근거지움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는 것을 통해 사회철학내에서도 방법론적 정당화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따라서 사회철학의 역사에 대한 체계적 종합을 통해 오늘날 사회철학의 근거설정을 둘러싼 문제가 어디 있는지가 가늠될 필요가 있었다.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 소급되는 정치철학의 전통과 단절했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그 구성원의 좋은 삶과 정의로운 삶을 어떻게 동시에 보장할 수 있겠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편적 동의가 가능한 질서가 수립될 수 있겠는가가 홉스가 다룬 유일한 문제이다. 이렇게 문제를 제한함으로써 칸트는 이후 정치철학에서 도덕철학의 정립을 위해 도덕과 윤리를 분리한다. 즉 사회적 행위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만이 철학에 의해 대답될 수 있으며, 좋은 삶의 조건에 관한 문제들은 거의 일반적 규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철학의 틀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소는 윤리적 문제가 사회적 공동생활에서 간단히 제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루소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을 복권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루소는 사회적 생활조직을 과연 그것이 인간의 성공적 삶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또 그조건을 포함하고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고찰하려고 했다.

 

사회철학이 사회적 상태에 대한 비판이라면 이 비판적 지향은 그 이전에 발전한 형식적 윤리관점과 연관되어 있듯이 이제 사회철학은 시작부터 직간접적으로 어떤 개념과 결부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의 자기실현조건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가정들이 존재한다면 이제 우리는 사회적 삶의 병리에 대해 적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정상성의 표상이 필요.

다양한 해석들이 행하고 있는 이상적 상태의 특성이 아니라 그 목적을 준거틀로 끌어들이면 일종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비판개념은 간단히 말해 성공적 삶을 가능케 한다는 특징을 지닌 사회적 조건들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실현의 가능조건에 적합한 사회적 정상성에 대한 윤리적 표상이 사회적 병리현상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이러한 윤리적 배경개념이 형식적인 것은 자기실현의 목적자체가 아니라 그 사회적 전제들만이 규범적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정상적 사회적 관계의 척도를 획득하기 위한 모든 시도들의 준거틀은 개인적 주체의 사회생활 조건이다. 공동체주의이든 개인주의이든 사회철학의 비판적 척도가 되는 좋음에 대한 형식적 개념은 개인의 행복을 향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사회적 삶이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 각 사회철학적 시도들이 겨냥하는 이상적 상태는 개인주의적이거나 공동체주의 둘 중에 하나로 귀결된다. 나머지 차이는 각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구체적 조건을 무엇으로 보느냐이다. 사회적 삶에서 개인의 성공적 삶의 조건이 공동체적 인륜성인지, 개인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공공성인지, 소외되지 않은 노동인지, 자연과의 미메시스적 관계인지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사회철학이 정상적 사회적 삶에 대한 보편적 척도에 의존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학을 통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철학의 존속여부는 형식적 윤리학의 정당화 가능성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점에서 사회철학의 미래는 과연 인간의 삶의 필수적 조건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설득력있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사회철학이 필요로 하는 윤리적 판단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첫 번째 대안은 윤리를 절차화하는 시도이다. 하버마스는 윤리적 문제를 실천적 담론의 과제로 보려는 사고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나 가능했던 것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즉 정상적 혹은 이상적으로 간주되어야 할 사회적 삶은 사회구성원이 민주적으로 조직된 의사형성 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발전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안의 단점은 사회철학의 해석권한이 남김없이 해당구성원들에게 넘겨지고 만다는 것이다.-사회철학이 할일이 엄서..

 

두 번째 대안, 이러한 사회철학의 무력화를 방지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사회이론 자체가 비판적 경계를 설정하는 능력을 갖게되며, 이 경계를 넘어서 체제의 명령이 사회적 생활세계로 침투할 때 이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정상과 병리의 구별을 정당화시키는 논거는 인간의 담론행위를 사회적 재생산의 필수 전제로 증명하려고 하는 보편화용론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약한 의미의 그리고 단지 형식적 의미의 인간학에 기원한다.

 

세 번째 대안, 사회철학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푸코와 일치한다. 사회철학이 사회적 장애를 진단하고 설명할 수 있는 평가척도는 역사적으로 제한된 타당성만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척도는 단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자아의 근원이라는 저서에서 역사적으로 상대화된 근거를 윤리학의 토대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근대의 문화적 자기이해가 기원하는 윤리적 가치를 해석학적으로 되돌아 보는 것은 어떤 사회적 발전과정이 병리로 이해될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회철학은 장차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가치와 이에 상응하는 삶의 이상에 근거하여 사회적 장애를 논의할 수 있는 반성적 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철학의 성공여부는 약하고 형식적인 의미의 인간학적 요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정당화되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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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세계철학사 참고

스피노자의 실체개념-그 자체가 원인이 되는 일자이자 무한자.

하지만 모든 개별자들은 그 안에 신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

능산적 자연=신, 소산적 자연=개별자

신과 개별자를 매개해주는 중간항은 만물

실체가 드러나는 양상이 바로 양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원적 실체를 비판하며 둘은 신의 사유적이고 연장적인 측면을 서로 다른면에서 바라봄으로 발생하는 차이라고 주장

 

 

라이프니츠의 실체

데카르트의 물체적이고 연장적인 실체 비판. 데카르트는 모든 자연현상을 운동과 연장의 개념으로 설명하며 운동보존의 법칙을 제시.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점을 비판하며 운동을 연장으로만 파악하면 운동은 물체들의 위치이동에 불과해진다고 파악. 그럴 경우 운동의 일반의 객관적 확인은 불가능하며 상대적 관찰에 불과해질것이다.

운동은 힘의개념과 분리될 수 없음. 운동보존의 법칙이 아니라 힘보존 즉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주장

라이프니츠는 연장적 실체에 대한 데카르트의견해를 연속성과 분할가능성이란 관점에서도 비판. 물리학적 물질은 기하학적 공간과 다르다. 수학적의미의 연속은 관념적 표상일 뿐이며 실재하는 부분들로 이뤄지지 않음.-현실은 실재하는 부분들로 이뤄지며 분할되지 않음.고대원자론적 사고.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기계론적 자연관을 옹호하면서도 넘어서려함.

라이프니츠는 기계론적 원자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 즉 형상과 영혼을 부여하는 힘의 개념과 결부시키며 이로부터 특유한 개념인 모나드를 이끌어냄.

 

예정조화설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실체를 상정했으나 인간에게서 이 양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밝히지 못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실체는 무한히 많은 모나드다. 그런데 개별적 표상은 각자의 모나드가 발생시킴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명되는가?

모나드들은 서로 조화될수 없는 속성이어서 다양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현실이 되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물음은 모나드를 발생시킨 근본모나드, 즉 신성으로부터만 해명될 수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체계

 

초월적 요소론/초월적 감성학

                            초월적 논리학/초월적 분석학

                                                      초월적 변증학

초월적 방법론

 

 

모든 인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한다. 시간적으로 경험은 모든 인식에 선행한다.

하지만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경험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어떤 복합체, 즉 외부에서 주어진 인상과 우리 자신이 덧붙인 무엇에 의해 합성된 복합체일 수 있다. 이 두요소는 분리되어야 한다.

즉 선험적a priori인 것과 후험적a posteriori인 것은 분리되는 것이다.

그 구별을 가능케 하는 것이 필연성과 보편성이다.

이것은 경험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선험적 근원이 있어야 한다.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별

분석판단은 주어가 술어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종합판단은 오직 경험으로부터만 형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라는 명제를 살펴보자. 이 명제는 종합명제이다.

하지만 경험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의 존재

1. 수학적 판단은 종합판단. 7+5=12

2. 자연과학적 명제

3. 형이상학적 명제

 

문제.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에 의하면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방식을 다루는 모든 인식은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 불린다. 이 개념은 경험을 넘어서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경험에 앞서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이란 의미를 갖는다.

 

 

초월적 감성학

감성적 인식능력에 관한 초월적 연구

감성이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작용을 가해오는 무엇에 의해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우리 안의 능력이다.

오직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한다.

직관이란 개별 대상들에 관한 직접적 표상이다.

비판적 탐구에 의하면 개별표상의 생성에는 이미 두가지가 관여해 있다. 우리의 감각기관, 즉 감관은 단지 감각을 제공할 뿐이며 우리안에는 감각을 정리하는 무엇인가 있다. 감각을 정리하는 특정한 방식은 공간적 시간적 통일의 방식이다.

 

 

공간

우리가 경험적인 것을 배제한다고 해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물체의 연장성이다.

장미에서 후각, 시각을 배제한다고 해도 연장은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공간표상은 선험적 감성 형식이다.

 

 

시간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시간은 우리의 내적감관의 순수형식이다. 즉 우리자신과 우리의 내적 상태에 대한 직관의 순수형식이다.

우리 내부의 감정상태는 시간상으로 진행된다. 시간은 이러한 마음 상태중의 어떤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상태를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조건이다

시간과 공간이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에서부터 수학이 가능해진다

기하학은 공간을 다루는 학문이다.

산술학은 시간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렇게 해서 순수 수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대답된다.

 

 

초월적 분석학

문제

인식은 어떻게 생성하는가?

로크는 감성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은 지성에도 없다고 했다. 라이프니츠는 그 말이 맞으나 지성은 예외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대답

우리의 모든 사유, 즉 개념은 감각에 의해 획득된 직관을 통해 대상들에 결부될 수 있다.

따라서 지성은 직관적 재료를 제공하는 감성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러나 감성도 마찬가지로 지성에 의존한다.

감성은 우리에게 직관, 즉 감성의 선험적 형식인 시간과 공간에 따라 정리된 감각을 제공한다.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고로 인식의 작용을 위해서는 감성과 지성이 서로 협력한다.

 

지성의 두 번째 활동, 즉 결합활동은 지성이 감성으로부터 받은 원료를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또 개념들을 결합하여 판단을 이루어낸다.

지성의 이러한 활동은 논리학의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논리학이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개념들을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였다면 칸트의 논리학의 문제는 우리 지성은 어떻게 개념들에 도달하는가? 즉 특정한 대상과 결부되고 그 대상과 일치하는 개념들을 우리 지성이 어떻게 해서 형성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범주

모든 개념의 형성에는 직관이 제공한 경험적 요소와 지성의 형식부여활동이 결합되어있다.

그렇다면 개념을 탐구할 때 이 두가지를 분리하는 것을 통해 개념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더 나은 방법.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논리학의 발전=개념을 결합시키는 지성활동과 관련해 이미 기본형식을 발견했음.

개념형성=판단

사유에서 통일성을 유지하려면 개념형성의 형식들을 판단형성의 형식들과 일치시켜야 한다.

 

 

 

 

 

 

판단형식의 표

1.판단의 양

-판단의 타당성 범위

2. 판단의 질

=관계의 타당성 여부

3. 판단의 관계

=관계의 종류

4. 판단의 양태

=관계의 타당성 종류

전칭

긍정

정언

미정

특칭

부정

가언

확정

단칭

무한

선언

명증

12가지 형식의 예

1. 전칭판단-모든 인간은 죽는다

2. 특칭판단-어떤 별은 행성이다.

3. 단칭판단-칸트는 철학자이다.

4. 긍정판단-이 장미는 노랗다

5. 부정판단-이 장미는 노랗지 않다.

6. 무한판단-이 장미는 향기가 없다.(향기를 제외한 한에서는 무한히 많은 가능성이 있음)

7. 정언판단-이 삼각형은 하나의 직각을 포함한다.

8. 가언판단-삼각형에서 하나의 각이 직각이면 다른 두 각은 예각이다.

9. 선언판단-삼각형의 각은 직각이거나 예각이거나 둔각이다.

10. 개연판단-오늘은 비가올지도 모른다

11. 실연판단-오늘은 비가 올 것이다.

12. 필연판단-오늘은 반드시 비가온다.

 

이러한 판단형식은 우리 사유의 기본형식을 보여준다.

우리가 이 판단형식들의 이면에서그에 상응하는 개념들을 찾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개념형성의 기본 형식들을 얻는 셈이다. 개념형성의 이러한 기본형식을 칸트는 범주라고 한다.

 

범주표

1.판단의 양

-판단의 타당성 범위

2. 판단의 질

=관계의 타당성 여부

3. 판단의 관계

=관계의 종류

4. 판단의 양태

=관계의 타당성 종류

전칭

전체성

긍정

실재성

정언

실체와

우유성

미정

가능성과

불가능성

특칭

다수성

부정

부정성

가언

원인과

결과

확정

현존성과

비현존성

단칭

단일성

무한

제한성

선언

상호작용

공통성

명증

필연성과

우연성

 

 

대상 개념의 형성과정

1. 감성의 선험적 형식에 의해 감각으로부터 공간과 시간에 의해 직관이 형성

2. 이 직관들을 지성이 열두 범주의 관점에 따라 결합하며 이렇게 해서 경험적 개념이 획득

경험적 개념=직관적 재료를 갖고 형성한 개념

 

 

순수지성개념의 연역

선험적으로 지성에 주어져있는 범주들이 어떻게 경험의 대상들과 결부될 수 있는가?

달리 말해 이런 선험적 형식들의 도움으로 어떻게 대상들을 인식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답을 칸트는 순수 지성개념의 초월적 연역에서 도출한다.

인과성의 예

로크는 우리가 두 현상의 인과적 관계를 지각한다는 것은 실재하는 사물들 사이에 작용하는 하나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다.

흄: 우리는 인과적 관계를 지각할 수 없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계기(繼起)현상 뿐이다.

흄이 옳다. 즉 인과율은 지성에서 유래한다. 그럼에도 인과성은 모든 경험에 대해 보편적이고 타당성을 갖는다. 이런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경험은 감성에 의해 제공된 원료에 지성이 자신의 사유형식들을 각인함으로써 성립된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경험에서 이 형식들과 재차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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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9일 경철수고 수업 정리

맑스는 초기작업인 경철수고에서 인간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꽤나 모호해보이는 입장들이 많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계급중심적 관점을 확고히 하는듯 하다...

특히 그룬트뤼세와 자본론에서 그러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요즘들어 맑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1. 경철초고의 인간주의적 관점을 주목하는 마르쿠제의 해석

2. 자본론 해석은 그동안 인식론적으로 잘못 읽혀져 왔으며, 이제 인간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알튀세...

3. 베이컨적, 프로메테우스적으로 읽혀온 맑스의 인간우월론적인 생산력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이 맑스를 생태적으로 해석하려는 관점...

 

이러한 문제의식을 종합해보니 맑스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현대사회에 걸맞게 새롭게 정리되야할 필요성이 사무치게 느껴진다.

 

먼저 소외된 상태의 극복이란 무엇인가?

정말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극복되면 기계적으로 인간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자기실현이 가능해질까?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고찰이 함께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라캉이 지적한 대로 인간의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하며 상징계진입과 더불어 구조에 의해 형성되므로 영원히 타자의 욕망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자본주의가 극복된다하더라도 물적 토대에 의한 소외는 극복될지언정 진정한 소외의 극복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들뢰즈의 욕망개념을 따른다면 욕망은 생성의 힘이고 서로들간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므로 욕망이야말로 무한한 생성의 힘이고

창조의 원천이 될 것이다.

들뢰즈의 사상은  욕망이 결핍에서 기인한다는 부정성을 극복하긴 했지만 규범적 토대를 마련하진 못한다...

사회적 억압을 철폐하고 홈패인 공간을 통해서 무한대의 욕망이 분출되는 것을 통해 모두의 욕망이 올곧게 실현됨을 지향하지만.....

우리는 이 지점에서 히틀러의 욕망, 만인에 대한 지배욕구에 대한 통제의 근거를 마련하기 힘들게 된다...

 

일단 여기서 욕망의 정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은 더 많은 논거와 연구를 필요로하므로 일단 패스한다..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끝장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으니 출발점을

먼저 제한하기로 한다....

 

 

최근들어 노동패러다임과 탈노동패러다임간의 대결구조가 눈에 띄게 분명해지고 있다.

즉, 다시말하자면 해방의 동력을 어디서 찾느냐의 문제가 될터인데, 노동안에서의 해방을 지향하느냐 아니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느냐의 문제 되시겠다.

 

맑스는 경철초고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지만 후기저작인 자본론에서는 노동의 부정성을 지적한다.

즉 노동을 하지 않을수록 인간의 자기실현이 가능해지리라는 것이다.

두번째 관점에 의하자면 고용노동의 종식이 향유의 노동으로 변환될 수 있느냐의 문제 되겠다..

 

이러저러한 해석의 문제를 분명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맑스 본연의 노동개념을 좀 더 정확히 봐야한다.

 

맑스는 헤겔의 추상적 노동개념을 극복하면서 유물론적 관점을 제안한다.

헤겔의 노동은 고립자인 정신의 자기전개과정 자체이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 고립자의 운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의 사유전개는 논리적일수는 있으나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하는 개념인 것이다.

마치 사회계약론자들이 상정하는 자연상태라는 개념이 실제하지 않지만 논리전개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맑스는 대상과 대상의 관계맺음이야말로 노동의 정체라고 해석한다.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라는 대상으로서 대상과 관계맺는 방식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규정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에 의하면 노동은 다음 두가지로 해석된다.

1. 자기보존행위

2.자아실현행위

 

여기서 어떤 관점이 맑스의 관점인가로 논쟁하는 것은 맑스에 대한 오독일 수 있다.

두 가지의 노동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실상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보존을 위한 수단이 자아실현행위가 되는 것.

즉 자본주의 하에서 분리된 상태를 재결합시키는 것이야말로 맑스가 생각한 올바른 상태가 아니었을까/

 

다시 노동패러다임과 탈노동패러다임의 대결구도로 돌아와보자.

노동패러다임을 주창하는 대표적인 주자는 에리히 프롬과 알렉스 캘리니코스등이 있고, 탈노동패러다임의 선두주자는

비루, 앙드레 고르, 안토니오 네그리등이 있다.

 

두 입장 모두 현실적으로 필요한 대안으로 노동시간단축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필요한 대안에 동의한다는 것이 그것이 문제해결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다.

 

나는 노동시간단축도 현실에서 필요한 단계이지만 더 나아가서 행위주체의 행위에 대한 통제권 귀속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나의 생존을 위해서 억지로 하게된다는 점, 나의 노동행위에 대한 결과가 나에게 귀속하지

않고 타자(일례로 자본가)에게 귀속한다는 점이다.

즉 노동의 소외는 행위주체의 행위지배권 상실인 것이다.

 

나는 사적소유의 철폐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말그대로 공동재산주의로 가게 될 경우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할 것인가?

다같이 못사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맑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주장한 코뮨주의 1단계와 2단계는 사실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필요에 의한 분배와 노동성과에 의한 분배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며(필요에 의한 분배), 동시에 노동의 결과에 대한 사회적 기여에 의해서

추가적 분배도 이루어져하는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노동을 신성성과 부정성이라는 이분법적 틀안에서 사고하는 것은 올바른 노동개념을 정립하는데 장애물로 작동할지도 모른다.

 

물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국민경제학과 칼뱅주의적 관점)에서 노동의 신성성이라는 관념아래서 노동자를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동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노동을 부정성이라고만 바라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오류일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만을 고집한다면 소외된 노동의 극복은 소외된 문화의 향유라는 새로운 문제를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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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을 오시엔에서 봤다......

 

음.....영화 도중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해리포터가 꿈을 통해서 볼드모트의 범행을 예견하게 된다.

 

실제로 그 꿈은 현실로 발생하고 이를 통해 해리포터가 볼드모트와 정신적으로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덤블도어 할배는

내리게 된다..

 

아마 아직 볼드모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볼드모트가 해리와 연결되는 것을 알고 역으로 해리를 조종하기 전에

거기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마법을 배우라는 명령을 덤블도어 할배는 내리게 되는거....

 

근데 하필 그 마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해리를 조낸 싫어하는 스네이프 교수....

스네이프는 영웅취급당하는 해리 아빠를 조낸 싫어하고 그래서 해리도 싫어한다...

 

물론 친절하게 가르칠리가 없지....

 

너무 빡세게 가르쳐서 화가난 해리....

 

스네이프가 정신침입마법을 걸려고 하는 순간 빡돌아서 역마법을 걸어버린다...

 

이를 통해 스네이프의 기억을 훔쳐보게 된 해리.....

 

스네이프는 학창시절 왕따당했고, 왕따를 시키는 주범은 해리 아빠였다....

 

해리가 본 기억에 의하면 스네이프는 심성이 무척 여리고 고운 불쌍한 학생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그에반해 해리아빠는 내가봐도 패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게 스네이프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자 여기서...우리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 인정하면서 산다는 것....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주는것.....

 

서로간에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몰것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중받고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다....

 

하지만 그런 보편성 아래서 침해당하는 개인의 입장도 너무나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이 지녀야 하는 보편적 인권의 존중을  지킬 경우 내 삶이 파괴될지도 모를 경우......그 좌절감과 저항감....

 

어제 산부인과를 보니....다운증후군 아이를 낳는 장면이 나왔다...

노산을 하게 된 산모였다...노산이다 보니 기대도 엄청 크고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온갖검사는 다해본다...

기형아 검사를 해보니 저위험군으로 나와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의사가 한 마디 한다...

 

저위험군으로 나와도 기형아가 나올 확률이 20%정도 되니깐 검사를 해보자고.....

산모는 90만원이라는 검사비용도 아깝고 검사 자체의 위험성도 있어서.....

검사를 제끼자고 한다....

 

근데 하필이면 극히 낮은 확률이 로또처럼 당첨되버린다...

 

다운증후군 애가 태어나 버렸다....

 

보통의 경우 낙태가 불법이긴 하지만 다운증후군일 경우 낙태를 한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건 살인이니깐....다운증후군 애라도 낳아서 키우라고 누가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럼 니가 한 번 키워보고 그렇게 말하라고 할수 있것다....

 

 

모든 인간이 같은 경험을 할 수 없고, 수많은 경험의 파편들을 종합해서 자아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내가 볼때는 당췌 이해할 수 없는 미친짓이지만......그 사람에게는 필연적일 정도로 중요한 이유가 있을수도 있는거쥐.....

 

날아라 펭귄이라는 영화를 보면 최주봉아들래미가 술도 입에 못대면서 심지어 채식주의자인 배우를 연기한다....

그가 채식주의가 된 이유는 어느날 밤 사온 조개가 입을 열고 닫으며 살아보겠다고 용을 쓰는걸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낱 음식으로만 생각했던 조개도 자기의 생명보존을 위해서 그리도 애를 쓴다는 거였다....

 

그 후로 그는 채식을 고집한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회사 회식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된다.

술도 못먹고 고기도 못먹고.....

 

분위기나 망치는 스뤠기..........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그가 홧김에 술을 막퍼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병원에 실려가고 나서야.....

회사 동료들은 술을 정말 못먹는,, 먹으면 죽을수 있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걸 깨닫는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람을 이해할 때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접하지 못하면 서로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이해받고 싶지 이해하기는 싫은법......

 

역시 나하나부터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법이다....

 

타인에게 치명적 피해나 손해를 입히지 않는 경우....를 빼곤 무조건 이해해야 될 듯하다....

 

늘 그럴수도 있지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그래 오늘부터 도를 닦는 마음으로 살아가보자군하......

 

하......어렵다......

 

몸살때문에 죽을거 같아서.....노약자석에 앉았다.....

근데 건강한 할배가 왔다.....

 

비켜줘야돼???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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