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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중간중간 극장에서, 혹은 DVD 로 보았던 영화들에 대한 단상 #1. 스티븐 달드리 감독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2008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영화라서, 풍부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영화라서 좋았다. [타이타닉]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저 예쁜 배우인줄 알았던 케이트윈슬렛은 해가 거듭될수록 진짜 배우임을 스스로 증명해가는 것 같다. 그녀가 있었기에 한나 슈미트에게서 그토록 복잡한 이성과 감정의 딜레마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국에 있는동안 [뉘렌베르크 트라이얼]을 보았더랬다. 그 때도 집단 속의 개인, 자유의지, 인간의 본성 이런 것들에 대해 열띤 토론과 고민들이 오고갔었다 (대화가 영어로 오갔다는 나름 어려운 점이 있었다 ㅜ.ㅜ). 이 영화를 보고나서도 함께 본 친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선/악에 대해 분명한 혹은 단호한 판단을 내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려움... 홀로코스트의 '성실한' 공무원(반인륜적 범죄마저도 성심성의껏 집행한!)이었던 그녀가 20년 동안 수감 생활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었냐는 마이클의 질문에 '읽기'라고 답할 때는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20년만에 얼굴을 맞대자마자 과거를 생각해본적 있냐는 마이클의 질문은, 꼭 저 순간에 저걸 물어봐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 우리가 바로 그 질문을 회피했기 때문에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녀의 자살이 온전히 사적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영화평을 보니 원작에서 그녀는 한나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비롯하여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회고록 등을 읽었단다. 죽음의 의미는 한결 복잡해진다 ㅡ.ㅡ 진지한 영화 속에서 한 가지 옥의 티라면... 독일어 교재라면서 왜 책들이 다 영어로 쓰여 있는지... ㅜ.ㅜ


#2.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그랜 토리노]

영화가 어찌나 훈훈하던지!!! 어찌보면 미국판 [워낭소리]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조금 더 '냉정하게'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어쩜 미국이라는 문화적 거리 때문에 내가 좀더 거리를 두고 영화를 바라보고 있어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바라보는 감정은 정말 특별할 것이다. 그랜 토리노로 상징되는 백인 노동자 계급의 자부심, 집안 가득한 공구 꾸러미, 크지는 않지만 항상 깔끔하게 정돈된 화단과 집안 구석구석, 맥주와 총... 그리고 전쟁영웅... 눈엣가시 같은 다종다양한(!) 이민자들, 부모의 재산만 탐내는 자식들 (거기다 자동차는 일제!), 장례식장에서 휴대전화질에 빠진 개념상실 손주들이라니... 못마땅한 꼴을 마주할 때마다 눈쌀을 찌푸리며 그르렁거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참 그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그만의 모습이다. 느끼한 서부의 총잡이가 저리 변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그의 나레이션과 함께 울려퍼지는 노래 '그랜 토리노'는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희망없는 송가처럼 들렸다. #3. 미셸 공드리 감독 [이터널 선샤인] 2004년

은근 호화캐스팅... 짐캐리에 케이트 윈슬렛... 거기에 커스틴 던스트와 엘리야 우드가 조연으로... 참 독특하고 재기발랄한, 그러면서도 작은 애틋함들이 살아있는 괜찮은 SF 로맨스 영화였다. 이별 후에 그리움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기억을 지웠는데도,다시금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더구나 상대방은 기억이 온전한 상태에서)이건 좀 많이 비극이다. 영화의 주제는, 결국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고 사랑에 빠질 사람은 다시 빠지고야 만다는 숙명론??? 무너지는 기억들 (무너지는 건물로 형상화된) 속에서 소중한 기억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짐캐리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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