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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서의 영화

블로그가 적막강산으로 방치되는 날들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ㅡ.ㅡ

미친듯이 바빴지만, 사실 영화도 보고, 섬진강변으로 나들이를 다녀오기도 했다.

봄 지나가기 전에 매화랑 벚꽂사진 올려줘야 하는데... 흠...

 

#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오멸감독, 2012년 작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영화는 정말 영화다웠다....

화면구성과 영상, 음향, 플롯과 편집, 인물들의 캐릭터와 배우들의 연기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아름답고 꽉 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가 끝나고 났을 때, 감당할 수 없는 먹먹함과 회한, 또 슬픔만이라고도 기쁨만이라고 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는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문학작품으로도, 연극으로도, TV 드라마나 시사다큐, 혹은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이러한 감흥을 만들어낼 수 없었으리라. 예술매체들이 가진 고유한 장점과 유발하는 고유한 감흥이 있을텐데, 이 작품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영화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개봉했던 <남영동>이나 <26년> 을 보지 않았던 것, 그리고 <도가니>나  <공정사회>를 보지 않는 것은 나름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있어서이다.  그저 분노를 촉발하는고발일 뿐이라면, 누군가가 경험했던 고통을 추체험하게 해주는 시뮬레이션일 뿐이라면, 그건 심층분석 기사나 시사다큐 프로그램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일부러 생생한 고통을 느껴보려고 영화관을 찾고 싶지 않다. 혹은 (요즘은 도대체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범진보개혁진영'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 머리 수 하나 채우는 일을 하고 싶지도 않다.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사람도 별로 없기는 하지만,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해서 뭔 말이 많냐고 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믿을만한 필자들의 영화평론은 이런 판단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점을 밝혀둔다).

예술이 무언가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상황은 그닥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세상에 존재한 적도, 존재하지도 않는 '순수'예술을 상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학적 완성도와 영화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대의명분으로 그 흠결을 덮어주는 건 영화를 위해서나, 운동을 위해서나 좋은 일을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면에서, 지슬은 그 아름다움과 완결성을 통해, 그동안 많은 다큐멘터리나 시사고발프로들이 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한다. 

해방직후의 그 시절만 돌아보면, '역사는 리셋이 안 되나요'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뭐가 깔끔하게 정리되고 청산된 것이 없다.  그 유산과 잔재들은 오늘도 현재진행형....

 

 

# <홀리 모터스> Leos Carax , 2012년 작

 

홀리 모터스

 

이 또한 영화로서의 영화, 다른 한편 영화에 대한 영화..

예고편을 볼 때에는 뭔가 싱그럽고 재기발랄한 스피드와 유쾌함을 줄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내가 바보지.... 이 감독이, 배우 드니라방이, 그럴 리가 없잖아... ㅡ.ㅡ)

 

며칠 동안 원고 때문에 피곤에 쩔어 있다가 머리를 맑게 해보려고 갔던 극장에서,

완전 정신집중하고 에너지를 극도로 소모하고 돌아왔다는 슬픈 사연이 있는 영화라고 소개해야 할 것 같다.

 

귀를 쫑긋 세우고 (프랑스어를 알아 들은 건 아니고 ㅋㅋ), 한 시도 영화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머리 속에 오만가지 상상과 억측과 때로는 멘붕과......  이런 복잡다단한 이성적/감성적 감흥은 정말 오랜만의 것이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을 때, 내용만이 아니라 예전 시절의 감상과 주변의 정황이 떠올라 독특한 감흥을 주는 것처럼, 이 영화는 예전 - 소위 시네키드들의 황금 시절이었던 90년대 초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때는 이런 복잡한 감정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참으로 많았었다. 밤새도록 연달아 몇 편의 영화를 보고 종로 거리에서 일출을 맞던 그 독특한 기분도 함께 떠올랐다.

 

이 영화는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호텔인지 아파트 방에 있던 등장인물이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혹은 화면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장면이 전환되고, 드니라방이 교외 부유한 주택단지에서 멀쩡하게 리무진을 타고 출근할 때, 오.. 드디어 저 양반도 저런 역할을? 하면서 흠칫하다가 이어서 흉물스런 구걸 노인으로 변신할 때는 살짝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이건 무슨 빈곤 코스프레여.... 설마 이 감독이 언더커버 류의 홈드라마를 찍은 건 아니겠지...

그랬는데..  역시 감독은 나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줄줄이 이어지는 상황과 설정은 매번 나의 온건한 상상을 벗어나서, 이번엔 또 뭐여 하면서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니라방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광인에서 비련남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변신에 또 변신.....

그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이 영화를 이끌어갈 수 있을까....

영화는 점차 고조되어가고, 그래서 정말 마지막까지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 겐가, 두근두근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니라방의 퇴근과 홀리모터스의 차고 귀환에서 완전 털썩.... ㅡ.ㅡ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식스센스 류의 반전, '이힛, 이건 몰랐지롱?' 하는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가 무엇이어왔고,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영화에 대한 헌사이자 성찰이라는 생각이 든다.

 

IMDB의 평론들을 읽어봐도, 줄거리가 무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말아라,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100% 동의 ㅋㅋ

그렇다. 통상적인 줄거리나 플롯으로 요약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굳이 상징과 연계성을 꼼꼼하게 분석해서 숨은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영화를 보던 내내,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던 순간들에 일어나던 그 복잡미묘한 감정의 물결, 끝없는 호기심,  홀린 듯한 끌림...  이런 것들이야말로, 영화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감흥이 아닌가.... 

 

이런 영화들만이 진정한 예술적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2병 걸린 악당의 등장에 혀를 끌끌 차면서도 <어벤져스> 같은 영화를 재미있게 본다.

나름 시원한 즐거움과 웃음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잘 해결되니 마음도 편하고 ㅋㅋ

하지만, 이런 영화들만 세상에 존재한다면 슬플 것같다.

<홀리모터스>나  <지슬>이 주었던 그 깊은 울림과 복잡미묘한 감동을 경험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다.

다양한 영화들, 기술적 상상력 만이 아니라 가치와 내용 측면에서 전복적 상상력을 갖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소개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영화를 볼 수 있는 나의 시간과 경제력도 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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