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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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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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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나는 과거를 쓰고 있다.

불러내어 오늘을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쓰고 싶다.

그건 아마도.

묻지 못 한 한 마디를 가슴 속에 숨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왜  내 사랑은 실패했을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랑의 서사를 재현하고 인물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 각각의 진실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사실, 그 때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한번도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에겐 자신이 목도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스스로 알아낸 진리를 실현하는 것만이 중요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사정 같은 거 말로는 알았다고 하면서 얼굴로는 이미 결별을 선언하는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서 자기는 버림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제 그녀를 버린 자들은 복수를 감행한다. 누가? 누구를? 두고 갔는가. 떠난 것은 항상 그녀 쪽이었고 우리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현성도 말했다. 나를 비난한다 한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 못 한다. 그 증거로 나는 지금도 교직사회의 퇴임자로 존재하고 있다.

대학생들이라고 달랐겠는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던 동시대의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한에서 정직했다. 그래서 비난한다 해도 할 수 없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지금도 그녀의 주변에서 대작을 해 주고 있다. 외로워진 그녀는 예전보다 더 소심해진 표정으로 비난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비난이라는 것도 뭔가 대안을 갖고 있을 때에나 하는 것이다. 그녀의 비판이란 힘이 없는 것이 - 그녀가 전투적?으로 거리를 뛰어다니고 무한한 인내심으로 현장을 버티고 있을 때에도 - 그녀에게 동조한다는 것은 곧, 그녀를 껴안고 고난의 연대를 건너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것이 그녀의 사랑이었다. 공감을 구하면서 의존하는 것.

그녀가 사랑했던 자들은 노심초사한다. 그녀가 이제 펜을 놓겠다 하면 그 때에는 현실을 살고있는 자신의 도우너들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때, 왜 나를 두고 갔어? "

" 누가 두고 가?"

" 나를 떠났쟎아, 공장거리에 혼자 두고."

" 누구나 그들 각자의 생이 있는 거야. 너는 너의 생을, 나는 나의 생을."

" 너는 맑시스트가 아니야. "

" 그래, 그게 우리의 차이점이지. "

" 너는 레즈비언도 아니지. "

" 맞아, 나는 그렇게 위험한 소수가 될 생각은 없어. "

"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무엇이지? "

" 친구쟎아, 바보, 그때 그런 것처럼 지금도. 우린 향후 오십년을 함께 지내기로 했쟎아. "

 

그녀는 뭐 어차피. 하면서 정리했다.

 

- 향후 오십년은 맑시스트가 탁상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을 꺼야.

- 레즈라는 것도 뭐, 성관계를 안 하면 친구나 다름 없지. 어차피 그는 프리지디티(frigidity)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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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그녀는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 했다.

마치 갈 곳이 없어.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깔끔한 성격이 누구의 것이었냐는 듯 겨울을 핑계로 잘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밥을 지어 먹는 것 외에 청소도 가끔 누울자리를 만드는 정도로만 했다. 빨래도 한참을 두었다가 피치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한 번씩 해서 널고 걷고 개는 일을 분절하여 하루 걸러 하나씩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는 가족들의 일상을 챙기는 외에 다른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살림을 전업하여 거기서 자신의 주체됨을 찾고 능란할 뿐아니라 인간관계에서의 자존감조차 세울 만큼 생활적인 인간도 아니었다.

대체로 일을, 그것이 육체노동이라는 뜻의 생산직이든 다소 정신적이라는 풍의 사무직이든 상관없이 그녀는 일을 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충족감을 느끼지 못 했다. 보람이라던가 흥미나 적성의 문제도 아닌 것이 그저 남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 자체를 소외된 노동으로 "느꼈다. " 따라서 댓가없는 일을 하기 싫어했고 이 말이 남들과 달리 그녀에게 의미했던 것은 원하는 댓가가 없으므로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돈 벌고 싶지도 필요도 없었으므로 일할 이유를 찾지 못 했다. 그건 이전에 가졌던 직업이라 할 만한 모든 일들이 또한 돈 때문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맞벌이를 했던 것도 사무직에 취직했던 것도 그전의 공장생활이나 아르바이트 조차도 그녀는 그때 당시에 만나고 있었던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만나고 싶은 누군가를 갖지 못 하게 되자 집 밖을 나갈 이유를 찾지 못 하는 것이다. 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타인에게 의탁할까?

그건 박애주의자이기 때문이지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믿지 못 해도 할 수 없다면서 웃었지만 다른 이유를 찾기도 어려워보이긴 했다. 그녀에게 지금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아이들이죠. 하고 대답하는 그녀는 이제 아이들이 열 살이 되었으니 한 십년 쯤이면 삶의 이유를 찾기 어려워질텐데, 걱정이다. 하는 것이었다. 살 이유가 없으면 어찌해야 하나?

아프리카로 갈 지도 모르지. 하고 말하는 그녀에게 다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니면 지금 컴퓨터 앞으로  돌아오는 틈틈이 집안일을 하는 것처럼 혼자 사는 집을 건사하는 자잔한 일을 하면서 쓰고 또 쓰고 또 쓰다가 쓰러질지도.

무엇을 쓸 지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소설가들은 방에 콕 쳐 박혀서 대하서사를 써내기도 한답니다. 아세요? 박경리는 평사리에 가 본 적이 없대요. 하지만 소설 속에 묘사된 평사리가 바로 그 곳에 그대로 있더래요.

그녀는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있다.

글을 읽지 못 했던 어린 날부터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고 했다. 그림이 있쟎아요하면서. 만화를 보다가 글을 깨친 방콕소녀가 바로 그녀였다.

사실 지금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나 조차 그녀의 상상이 빚어낸 소설 속의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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