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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대한 존재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배경에 대해서 몇가지 방향으로 생각해볼수 있다.
먼저 신에 대한 불신을 자초하는 무신론이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신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야 편하게 죄를 짓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규범을 따르지 않고, 규율을 벗어버리는 습성이 몸에 배어서,
질서를 무시하는 자유분방한 태도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한다.
그러다보면 무신론의 영향을 받기가 쉬워진다.
또한 사람은 여러가지 동기로 무신론의 철학을 갖게 된다.
부모들의 무신론적인 배경을 통해서,
혹은 조상들의 범죄에 연루되어 자신도 모르게 불의한 삶을 추구하다보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정적인 인간관계(지독한 상처받은 경험이나 비운이나 재난에 가까운 역한 경험)를 통해,
혹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어느 시기에 특정의 사람
(주변에 유독하는 인생관이 부정적인 관점을 가진 인물)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심어진 부정적인 세계관을 통해,
신과의 관계설정에 있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이다.
또 하나는 무신론적인 철학을 습득을 통해 무신론을 익혀가기도 한다.
세계적인 철학자들중에
대표적인 무신론자들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에 빠진다.
복잡한 사상이나 이상한 가르침을 통해 무신론의 세력이 강화된다.
주변에 무신론에 빠진 사람을 보면
반드시 그 배후에는 그 사람에게 영향을 준 무신론적인 가르침이나 사상이 있다.
마지막으로 어둠의 영들의 미혹에 의해 사람들이 무신론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영적인 존재들중에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진리이신 신(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도록 유도한다.
진리와 거짓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며,
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갖지 못한다.
무신론의 영향에는 다음과 같다고 할수 있다.
먼저 무신론적인 태도는 사람을 어리석게 한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태도는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양심적인 기능의 한부분이 마비되는 것이나
혹은 인간속에 있는 인간의 영적인 기능(신과의 접촉을 가능케하는)이 정지된 것처럼
그 의식이 그 마음안에 자리잡고 있어,
자신의 사고시스템에 이상현상이 나타난다.
그런 마음이 사고하는 형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데 대해서도
신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게된다.
그런 어리석은 태도는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여 밝게 사물을 보거나,
사람을 대하지 않게 만들고 자신을 부정적인 시각에 잡히게 한다.
무신론은 사람을 교만(방자)하게 한다.
무신론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속에 고집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자신의 사고나 태도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의견을 절대화하여,
자신을 어리석에 과장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자기를 절대시하게 되면,
자기가 자기인생에 대해 절대자 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신론은 사람을 어둡게 한다.
무신론은 마치 따사롭게 비쳐주는 태양빛의 존재앞에
그 태양을 등지고 지내는 것 처럼 자신의 그림자에 드리워진 상태로
그 그늘속에서 자신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다.
해를 등지고 따스한 햇살이 주는 혜택을 받기가 곤란한 것은
그 해살의 비쳐주는 강인한 따사로움이 사람들을 거동하게 하며,
빛이 주는 능력으로 사람의 몸의 온 구석을 두루 비쳐주어
몸의 세포가 다시 생성되고,
몸의 요소들이 마치 식물이 해빛의 영향으로 광합성 작용을 하여,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듯,
사람도 햇빛의 주는 광선으로 생동있게 존재한다.
그러나 무신론에 빠진 사람은 이런 혜택을 스스로 거부한다.
무신론은 절망하는 인생을 더욱 불안한 모습에 푹 눌려 지내게 하며,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숙명인양,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불안이 주는 마음의 공허나
혹은 공항을 겪으며 살게 되며,
늘 불안한 자신속에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한다.
무신론을 극복하려면, 먼저 유신론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신의 존재와 개입을 인정해야 한다.
신의 존재는 불가지론자의 경우처럼 신을 알수 없다고 가정하지 말고,
신은 언제나 찾는 사람들에게 만나주는 존재이며
다만 신을 구하는 채널이나 창구가 잘못이 되어
다만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신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신은 언제나 누구에든지 골고루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의도를 노출시키고 있는데,
그런경우는 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적이고 기적적인 개입을 통해서,
혹은 개인의 특별한 사건이나, 기이한 순간에 신은 자신을 나타내신다.
때로는 신은 가장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살았던 인물들에 의해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무신론의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볼테르는
자신의 생전에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태도를 갖고 살았는데,
신은 그의 집을 성서(신의 말씀)를 발행하는 집으로 활용하였다.
신의 노출로 인하여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을 믿고 따르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렇게 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갔다.
구약의 아브라함, 그는 무신론적인 고대의 세계에서 믿음의 아버지가 되어,
모든 믿는 이의 조상이 되었으며, 믿는 자들의 표본이 되었다.
그가 발견한 믿음은 그가 믿는 신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이다.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에 따라 질적으로 다르다.
인격신에 대한 믿음, 유일신에 대한 믿음,
자연신에 대한 믿음, 거짓 신에대한 믿음등이 다 다르다.
아브라함이 신의 부름을 깨닫고 자신의 응답을 통해 경험한 신은
바로 인격신에 대한 경험이며,
개인의 역사속에 개입해 들어오는 신의 인도를 따라 가는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유신론적인 사고의 시스템안에서 무신론적인 태도는
얼마든지, 외형적인 신앙적인 형태의 생활에서
전혀 신을 의식하지 않고,
그를 기만하는 태도로 사는 경우도 있다.
외형적인 종교적 지식만으로는 인간의 내면의 일을
다 헤아리는 신의 의도를 다 알수 없다.
오히려 외형적인 종교적인 지식이
더 큰 무신론적인 사고의 형태로 종교인들에게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덜 종교적인 사람이 오히려 신에게 가까이 이를 수 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신에 대한 가장 충실한 인간의 자기표현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낳고 자라게 하며,
젊은 시절의 여러 인생의 노정에서,
베풀어준 부모의 보살핌이나 보호가 있다.
자녀들을 돌봐주는 부모의 마음은 늘 자식에게 있다.
그 부모의 태도는 자녀들이 자신을 믿어주고 신뢰하며,
자라고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처럼 사람과 신과의 관계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의 유형으로 볼수 있다.
그렇지만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은 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에 부모와의 관계가 건강하고, 올바르게 형성된 사람은
자기와의 관계나 타인과의 관계,
더 나아가 신과의 관계에서 좋은 태도와
인생관을 가질수 있는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많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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