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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9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라
    목동
  2. 2009/02/02
    하나님의 씨앗의 도전
    목동
  3. 2009/02/01
    삶과 죽음사이에서
    목동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9-17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사랑과 기쁨의 관계)

사랑은 모든 공동체의 연결고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아버지와 주 예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관계이며 그 사랑의 교제 위에 존재하십니다.

본문의 배경은 그리스도와의 제자들의 연합에 대한 교훈으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나무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과 제자들과의
관계형성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크리스천의 삶의 근본적인 삶의 지침이 됩니다.
영적 생활은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와의 연합 없이는 사실 영적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그분과의 연합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며, 그 관계 위에 교제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분 안에 거하라, 그분의 하신 말씀 안에 거하는 것과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거의 동시적이며, 하나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그분의 계명이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조건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이요.
형제사랑에서도 실제적인 사랑 나누는 것이 없으면 사랑은 없습니다.

거하라 함은 머물러 있음과 남아있음의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남아있어야 함은 요일 2:19에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에게서 나가서도, 그리스도에게서 계속 머물러 있지 않으면 세상에 속한 자입니다.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합법적인 크리스천들입니다.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인이라도 그들이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므로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분의 명령에 따르는 길이
그분과의 합법적인 관계를 유지합니다.
참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요한14: 21,23),
고로 그들은 주님의 뜻에 헌신하며, 그렇게 하므로
그들의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요한14: 13,14)

9,10절에,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유다 21절)은
이것은 감정적이나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순종하라는 주님의 온전한 모습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온전한 순종을 하시는 모습을 본받아 그분의 모범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거하라 함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시이며, 행동의 모범이며, 순종의 표식입니다.
행동적인 순종과 사랑의 순종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11절에, 주님께서 그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통해 열매를 맺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가 오심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케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양으로 기쁨을 얻게 합니다.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그의 기쁨을 가지듯이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므로 그의 기쁨에 동참합니다(요한 17:13. 16:24).

12절에,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함은 서로 사랑함이며, 서로 돌보며, 성장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희생적인 봉사가 필요합니다.
13절에, 예수 사랑의 표현의 증거가 그의 희생적인 죽음에서 보여지듯
크리스천들은 서로 그러한 사랑을 희생적인 사랑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친구 사이의 사랑을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누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신니내티 교회의 교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희생적이며 봉사적입니다.
물질적으로 돕는 손길이나, 희생을 통해 이웃을 돕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나타납니다.

14, 15절에,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표현하셨듯이(대하 20:7, 약2: 23).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인생을 친구라고 여깁니다.
친구 사이는 마음이 통하고, 뜻이 통하고, 말이 통합니다. 삶이 통합니다.
영이 통합니다.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도 서로 영으로 통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모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영을 통해 서로를 알기 때문입니다.

16. 내가 너희를 선택했으니/ 주님의 선택을 통해 신자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택하심은 그분의 소유물이며, 그분의 자녀이며, 그분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고로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는 크나큰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영원하십니다. (딤전 5:21).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선택의 목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영적인 열매들은 먼저는 경건한 품성입니다 (갈 5:22,23).
그 열매는 의의 행위입니다 (빌립보서1: 11), 찬양입니다(히브리서13: 15),
전도하는 일입니다(롬 1:13-16).

종의 의식은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수동적이며, 자원적이지 않습니다. 주인의식이 친구 사이로 발전합니다.
여기에서도 주 예수님께서 따르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주님은 사랑의 원형관계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사랑의 원형입니다. 그분께서는 사랑으로 존재하십니다.
그 분은 사랑이시며, 사랑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사랑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의 본질입니다. 신자의 마땅한 삶의 실천입니다.
사랑함은 제자의 도리입니다. 사랑함은 제자의 모습이며,
모든 일에 있어,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사랑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사랑은 열매를 맺게 하는 길입니다. 사랑은 수고를 합니다. 사랑은 남을 세웁니다.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바라며, 믿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랑은 좋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사랑은 기쁨의 열매를 낳습니다.
사랑의 온전함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사랑의 수고는 마음에 기쁨을 줍니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나, 받는 이들 모두에게 사랑의 열매를 먹으므로, 기쁨을 얻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함으로 성도들은 온전함을 이룹니다.
주님의 사랑에 거하기 위해 주님께서 명하신 서로 사랑함으로 신자들은 늘 힘써야 합니다.
고로 그것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참된 제자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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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씨앗의 도전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막4: 26-32) 비유는 그림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그림으로 보여주는 책은 주로 삽화나 만화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시청각적인 방법으로 하늘나라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 하셨습니다. 어릴 때에 사람들은 만화를 좋아합니다. 그림 있는 만화를 통해 중요한 내용을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비유적인 설명을 통해 사람들에게 쉽게 진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만 성경에 나와있는 비유를 해석할 때에 몇 가지 점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먼저는 비유를 전하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소시민들에게 그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사실적인 사건으로 진리를 설명하십니다. 고로 당시에 비유를 듣는 대상이 있습니다. 듣는 청중들, 제자들이며, 우호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비유를 적대시 하는 자나, 방관자에게는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비유의 가르침이 감추어 져 있습니다. 비유를 말할 때에 먼저 비유의 내용을 생각합니다. 특히 비유자는 강조점이나 과장법으로 진리의 핵심적인 내용을 전하므로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고로 비유에는 강조적인 표현법이 있습니다. 무엇을 강조하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 두가지 비유에는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 강조점은 두 비유가 자라는 것, 커지는 일, 성장에 대한 초점을 맞추어 있습니다. 그 강조점을 보아야 합니다. 이 비유적 설명은 하늘나라의 진리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설명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보여주게 합니다. 먼데 있는 것 같은 진리를 가까운 주변의 것들로 표현하여 실감 있게 받아들이게 합니다. 현대인들은 메스컴의 영향을 쉽게 받는 것은 보여주는 시청각을 활용하므로 그렇습니다. 1. 자라는 씨의 비유/ 이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마가에만 있는 비유로, 은밀히 나서 자라는 씨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씨, 곧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지면 저절로 성장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는 행위로 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설교하는 것이나, 주님을 소개하는 전도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씨를 뿌리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천사도 흠모할 만한 축복이요 성도들의 특권입니다. 주님의 일꾼들의 의무이자 놀라운 천사들도 흠모하는 귀중한 사역입니다. (2)여기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하는 말들 중에 씨앗의 자람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장의 신비를 의미합니다. 바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며 알아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활동의 신비입니다. 고로 때로는 그런 일들은 인간이 할 수 없는 현상으로 진행 됩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개입이 없이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 집니다. 우리가 받은 십자가의 구원이나 영생을 얻는 축복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축복이며 구원입니다. (1)씨앗이 자라고/씨앗이 자라는 행위는 신비롭습니다. 생명력의 힘입니다. 씨앗자체에는 생명의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입니다. 그것도 썩지 않는 씨앗입니다. 수 천 년이 흘러도 씨앗은 생명이 있는 고로 밭에 갖다 심으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2) 우리 성도들 안에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생명의 씨앗이 있습니다. 고로 사단이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의 생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을 받은 성도들은 어두움의 세력이 건들일 수 없습니다. 그 생명의 흔적이 모든 그들의 도전이나 유혹을 이겨 악한 날에 서게 합니다. (3)하나님의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썩지 않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받을 때에 그 생명을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땅은 양질의 양분을 담고 있습니다. 무기질이 있으며, 씨앗을 자라게 하는 여건이 있습니다. 거름이나 퇴비를 주어 땅을 기름지게 합니다. 땅은 씨를 자라게 하는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험악한 땅이라도 땅은 씨앗이 자라는 밭입니다. 돌짝 밭이나 가시떨기에도 자랍니다. 인간의 개입이나 노력이 없이 자랍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열매를 맺는 데 까지 나갑니다. 복음의 역사에는 시작이 있으며, 과정이 있으며 순서가 있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자연의 원리와 동일합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 될 나무나 잎은 시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싹이 건강하게 나와야 생명력 있게 성장합니다. 다음에는 이삭입니다. / 잎이나 가지가 무성하며 이삭이 건장하게 뻗어나야 그 다음에는 거기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립니다. 충실한 곡식입니다./ 건강한 씨앗이 있고, 튼튼한 이삭이 있을 때에 거기에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교회 안에도 믿음 좋은 성도가 있으며, 봉사 잘하는 일꾼이 있고, 새로운 사람이 와서 적응할 수 있는 여건인 화목과 기쁨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추수에 대해서는 먼저는 씨가 땅에 뿌려진 일에 대한추수입니다. 땅은 인간의 마음 밭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들은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열매를 맺어 추수하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인,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의 씨앗을 통해 그들의 개인적인 삶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개인의 신앙의 열매도,그 개인의 신앙의 그릇이나 자라는 과정이나 헌신하는 정도의 여건을 통해 좋은 열매를 가져옵니다. 또 추수의 때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추수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때가 있는 가하면, 그것을 거두는 시기가 있습니다. 종말에는 복음사역의 끝입니다. 자유로이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일 때에 믿어야 합니다. 2. 겨자씨의 비유/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비교합니다. 이 비유에서 겨자로 표현하는 것은 작은 것이나 미미한 것의 성장을 통해 거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은 미미하고 무력하더라도 장차 에는 크게 확장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겨자씨/ 검은 겨자는로 /일년마다 자라서 열매를 맺는 일년생입니다. 그것은 성장이 빠릅니다. 겨자 잎은 야채로 쓰이고, 약으로 쓰이며, 그 씨는 양념으로 쓰입니다. 팔레스틴 땅에서 심겨 지는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입니다. 725-760정도의 씨들이 1 그램입니다. 28 그램이 한 온스입니다. 나물크기의 나무로서는 제법 키가 큰 축에 들어갑니다. 2-6피이트 정도의 높이로 자라는 것이나 혹은. 수주 안에 12-15 피이트로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겨자씨비유는 제자들에게 믿음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예로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기며(마17: 20), 바다에 나무를 심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눅17:6) 믿음의 도전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받기도 하며 주기도 하며 역사하기도 합니다. 치유사역에 있어서, 손을 얹어 기도한 즉 나으리라, 믿음으로 맞춥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바라리라 하셨습니다. 기도사역에 있어서 믿음으로 간구한즉 받으리라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것들을 받습니다. 활동사역에 있어서 주님의 약속하신 말씀 중에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주님께서 k신 사역보다 더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들이 큰 일을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이루어 냅니다. 최근에 저는 무슨 일을 할 때에 자신의 믿음을 갖는 일에 대한 좋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사모님이 저에게 유향과 몰약이 담긴 두 병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기름으로 바르며 기도하면서 주님의 치유를 경험하는데, 몰약이 담긴 병이 그 속에 액이 묻혀져 그 병의 뚜껑이 좀처럼 열리지 않습니다. 육체의 힘이 많이 떨어진 요즘의 저에게는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기로 하고 여러 번 시도하니 결국에는 그 병의 뚜껑을 열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효과에 대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무엇을 계획 할 때에 믿음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나 그런 믿음을 갖지 않고 하는 일의 차이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주님은 다만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말씀하십니다. 그 믿음이 큰 일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에서 겨자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로 강조합니다. 1.예수님의 청중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비교가 상상보다 작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있습니다. 2.성장에 초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 씨가 작아도 큰 나무로 자랍니다. 가든의 나무 중에서 가장 큰 축에 속합니다. 자람에 있어 영향력에 있어서, 누룩의 비유와 함께 상당한 영형력을 가져옵니다. 겨자씨 한 알/ 심길 때에는 가장 작습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무보다 커지는 원리가 있습니다. 공중의 새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되는 나무의 크기를 알려주기 위한 도구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큰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주님께서 이 땅에 심으신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는 곳입니다. 주님의 주권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그의 모든 다스림을 받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1. 미래지향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우리의 주변에서 진취적으로 나갑니다. 어떤 장애에도 그 나라의 백성들이나 믿음의 일꾼들은 전진합니다. 믿음으로 전진하는 사람들에 의해 항상 발전적이며 인생들이 장래의 목적을 향해 나가게 합니다. 2. 성장지향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퇴보지향적이 아니라, 성장지향으로 발전합니다. 작은 것에서 큰 것 에로, 어린 상태에서 장성한 상태에로 나갑니다. 3. 현재진행형입니다. 지금도 진행 중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에서 자라고 있으며,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운데에서 그의 섭리가 이루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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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사이에서

삶과 죽움사이에서


삶이란 사는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감사하다.
생명을 갖고 사는 것은 그 생명을 주신이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삶의 나날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형통할때에 인생의 순간들이 주는 기쁨을 맛보며,
그 시간들을 아무런 가치없이 그저 주어진 대로 살게 한다.

그러나 어떤 어려운 일이나 고통스럽게 하는 일을 만나면,
그것으로 인하여 힘들어 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등을 한다.
병이 들었을때에는 그 병이 주는 불폄함과 괴로움에 자신을 맡기며 생존한다.

잠시의고통이나 힘든 상황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마음속의 급한 기분에 좌우되어 바로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르기도 한다.
그럴때에는 고마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오늘 아침 뉴스에 실직당한 한 미국인 가장이 부인과 10세 미만의 자녀들을 모두 총으로 쏘아 죽이고
본인 자신도 자살하였다. 그 가장은 자신이 실직하여 삶을 살아갈수 없다고 판단하여,
앞으로도 길게살아야 할 어린 아이의 생명에 까지 손을 대어
자신의 좌절과 절망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렸다.
하루 아침에 단란한 일가족이 죽음의 희생자들이 되었다.
그에게는 다른이(자녀)들의 살고 죽는 것의 선택이 마치 자기 권한의 소유인양
전능자처럼 남의 생명에 까지 손을 대었다.
가족의 테두리안에 살아가는 인생들 모두를우울하게 하는 불행한 소식이다.

아무리 삶이 고달프고 힘들게 하여도 나에게 주어진 삶자체를 부인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신에게 깊은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삶의 끝인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오직 자신에게 삶을 살게 한 전능자에게 있는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나 위험이 아니고, 비록 갑작스런 요인들(교통사고나 천재지변등, 순간의 실수나 삶을 위협하는 그 무엇들)이 발생하여도

삶을 끝나게하는 요소가 사람들 자신들에게서가 아니라,
그 삶을 살게하신 그분의 의지나 섭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현명하다.

죽음이란 죽는 것이다.
자시에게 주어진 유일한 생을 포기하는 것으로 의미한다.
삶을 사는 인생들에게 죽음은 넘어야 하는 장벽이며, 삶을 사는 모든 이에게 다가오며,
괴롭게하는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절망감은 언제나 삶을 고통스러워하는 이에게 냉정하게 다가온다.
그 죽음은 우리의 인생에서 보이지 않는 그것이었다가,
언제가는 자신의 삶에 죽음의 현실로 다가오면 누구나 두려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살고 죽는 문제에 있어서, 인간적인 현실에 있는 상황으로 몰려가기 보다는
살고 죽는 문제에서 초월하여,
자신의 확신하는 그 무엇을 위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사명이나
진리가 주는 초월함을 좇아 가야 할 길을 간다면
사나 죽으나의 문제를 벗어날수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가치나 의미보다 더한 인생의 참진리를 발견하면,
사는 것이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런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 다
그 진리안에 있는 조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살고 주는 일에 대해 해결을 받은 신앙인들에게는
사나 죽으나 나는주님의 것이다라는 분명한 명제를 따라 갖고 있다는
자세나 태도는 살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에서 자유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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