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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4/26
    투병기에서
    목동
  2. 2009/02/19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라
    목동
  3. 2008/02/20
    여전히 꿈을 먹고사는 중년
    목동
  4. 2007/07/25
    한인세대들의 정체감과 사고방식
    목동
  5. 2007/06/24
    자녀의 감정교육
    목동
  6. 2007/06/08
    게임인가? 아니면 삶의 선택인가?
    목동
  7. 2007/05/06
    미국인의 고민: 가정과 자녀교육의 문제
    목동
  8. 2007/03/24
    이민의 정체감
    목동
  9. 2007/03/18
    자녀가 이렇게 자라도록
    목동
  10. 2007/03/15
    문화적인 도전들과 가족의 의미
    목동

투병기에서

처음에는 공원을 1.5마일 (3-4 킬로미터)되는
거리를 한번에 걷기도 하였는데, 점점 돌기가 힘들었다,
숨이 차는 고로 몸의 상태는 거의 중간 중간 쉬어야 겨우 한바퀴를 돌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그정도도 하지 못하여,
그저 가서 시원한 공기만 쉬는 정도의 몸의 상태로 약해져 있었다.

심장근육의 기능의 신축성이 떨어져 심장운동이 약해져 충분히 피를 공급하지 못하여,
그 여파로 폐에 물이 차게 되는 악순환으로 인해 온 몸에 물이 차게 되며, 그로 인해
숨이 차게 되어 10미터를 걷고 나서는 쉬워야 하는 몸상태는
자신의 행동반경을 점점 약화시킨다.

이런 몸의 상태에서 정확한 병의 원인을 모르고 증상
(주로 congestive heart failure: 심부전증)만을 완하시키는 약물로 지탱하기를
2년을 보내었다. 그러나 증상은 여전히 차도가 없고,
이 상태로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만 하였다.
최근 11월경에야 주된 병의 원인을 알아냈지만,
(아밀로이드는 희귀성 질병으로 일종의 다양한 혈액암과 같은 것이며,
아직은 완치케 하는 치료법이 없다보니, 연구 개발중이다.

그리고 일반 백인들사이에는 희귀하여, 주로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 미국인들중에서 혹은 외국 유럽의 몇나라에서 환자가 보고가 있음,
내가 가지고 있는 아밀로이드는 primary 성 아밀로이드로,
그 쌓여진 경단백질이 몸 장기 구석에 영향을 주어 그 기능에 이상을 일으킨다.
주로 심장, 신장, 간, 위장, 입, 혀, 손, 발등)
그런데 심장에 영향을 주었을 시는 힘든 치료와 생존율이나 기간이 1년이나 몇년이 되지 않는다.

지난밤에 집에서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물이 차있었다
그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지낸 날들이 몇날이 되었으나,
여전히 오줌이 나오지 않아, 캐디터(오줌을 호수로 빼는 기구)를 통해 오줌을
빼어야 했다. 처음에 이것을 집어넣는데 피가 나온다.
오줌에서 피가 뭉쳐서 나온다. 통증은 가히 견디지 못할 정도로
수없이 오줌이 나올때마다 통증을 느끼곤 하였다.
처음에 캐티터를 집어넣은 간호원의 시술로 피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거의 일주일 동안을 피가 멈추지 않았다.
밤마다 통증으로 인해 잠을 잘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극도의 심리적인 불안정이 찾아와,
어려운 처지에 낙망이 되었으나,
그때마다 천지를 지으신 하늘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수없이 그분으로 부터 위로의 말씀을 들었다.
그 통증을 일주일동안 겪으면서도
주 예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쏟아놓으신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결하지 못하여 혼자서 고통만을 느끼며 아파할 뿐이었다.
나중에야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니 잠시 고통이
나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고통의 고마움을 생각나게 한다.

3일동안 몸무게가 50파운트를 빼어,
거의 몸이 야윈 상태로 3주간을 중환자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여,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2층 아파트를 내려 올수 없었다. 할수 없이
앰브런스를 불러 응급처치하는 대원들에 의해 겨우 차에 몸을 싣고,
병원 응급실로 들어와 그 날밤을 지내며, 점점 자신의 몸은
거대한 용광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몸을 만들기 위한
긴 시간의 여로에 들어 가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그날밤에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가 거기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은몸에 여러 가지 주사로,
약물로 거의 실신 상태의 몸을 회복케 하는
긴 시간의 치료의 날이 시작이 되어 몇날을 지내는데,
처음에 3일간을 부은 몸안에 있는 물을 뺴내는데, 50 파운드를 빼니
몸은 가냘픈 상태로 변화되었다.
스스로 일어나 앉아 있을 수 도 없는 상태였다.
그 때에 마치 꿈을 꾸듯 이틀 동안을 치료에 맡기며,
꿈을 꾸듯,치료를 받으며, 주님에게 간구를 드리는데,
의술로 시술하는 과정안에 주님께서 오셔서 몸안에 역사하시는 경험한다.
주님, 저를 치료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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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9-17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사랑과 기쁨의 관계)

사랑은 모든 공동체의 연결고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아버지와 주 예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관계이며 그 사랑의 교제 위에 존재하십니다.

본문의 배경은 그리스도와의 제자들의 연합에 대한 교훈으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나무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과 제자들과의
관계형성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크리스천의 삶의 근본적인 삶의 지침이 됩니다.
영적 생활은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와의 연합 없이는 사실 영적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그분과의 연합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며, 그 관계 위에 교제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분 안에 거하라, 그분의 하신 말씀 안에 거하는 것과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거의 동시적이며, 하나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그분의 계명이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조건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이요.
형제사랑에서도 실제적인 사랑 나누는 것이 없으면 사랑은 없습니다.

거하라 함은 머물러 있음과 남아있음의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남아있어야 함은 요일 2:19에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에게서 나가서도, 그리스도에게서 계속 머물러 있지 않으면 세상에 속한 자입니다.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합법적인 크리스천들입니다.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인이라도 그들이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므로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분의 명령에 따르는 길이
그분과의 합법적인 관계를 유지합니다.
참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요한14: 21,23),
고로 그들은 주님의 뜻에 헌신하며, 그렇게 하므로
그들의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요한14: 13,14)

9,10절에,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유다 21절)은
이것은 감정적이나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순종하라는 주님의 온전한 모습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온전한 순종을 하시는 모습을 본받아 그분의 모범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거하라 함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시이며, 행동의 모범이며, 순종의 표식입니다.
행동적인 순종과 사랑의 순종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11절에, 주님께서 그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통해 열매를 맺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가 오심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케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양으로 기쁨을 얻게 합니다.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그의 기쁨을 가지듯이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므로 그의 기쁨에 동참합니다(요한 17:13. 16:24).

12절에,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함은 서로 사랑함이며, 서로 돌보며, 성장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희생적인 봉사가 필요합니다.
13절에, 예수 사랑의 표현의 증거가 그의 희생적인 죽음에서 보여지듯
크리스천들은 서로 그러한 사랑을 희생적인 사랑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친구 사이의 사랑을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누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신니내티 교회의 교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희생적이며 봉사적입니다.
물질적으로 돕는 손길이나, 희생을 통해 이웃을 돕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나타납니다.

14, 15절에,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표현하셨듯이(대하 20:7, 약2: 23).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인생을 친구라고 여깁니다.
친구 사이는 마음이 통하고, 뜻이 통하고, 말이 통합니다. 삶이 통합니다.
영이 통합니다.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도 서로 영으로 통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모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영을 통해 서로를 알기 때문입니다.

16. 내가 너희를 선택했으니/ 주님의 선택을 통해 신자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택하심은 그분의 소유물이며, 그분의 자녀이며, 그분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고로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는 크나큰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영원하십니다. (딤전 5:21).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선택의 목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영적인 열매들은 먼저는 경건한 품성입니다 (갈 5:22,23).
그 열매는 의의 행위입니다 (빌립보서1: 11), 찬양입니다(히브리서13: 15),
전도하는 일입니다(롬 1:13-16).

종의 의식은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수동적이며, 자원적이지 않습니다. 주인의식이 친구 사이로 발전합니다.
여기에서도 주 예수님께서 따르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주님은 사랑의 원형관계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사랑의 원형입니다. 그분께서는 사랑으로 존재하십니다.
그 분은 사랑이시며, 사랑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사랑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의 본질입니다. 신자의 마땅한 삶의 실천입니다.
사랑함은 제자의 도리입니다. 사랑함은 제자의 모습이며,
모든 일에 있어,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사랑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사랑은 열매를 맺게 하는 길입니다. 사랑은 수고를 합니다. 사랑은 남을 세웁니다.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바라며, 믿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랑은 좋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사랑은 기쁨의 열매를 낳습니다.
사랑의 온전함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사랑의 수고는 마음에 기쁨을 줍니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나, 받는 이들 모두에게 사랑의 열매를 먹으므로, 기쁨을 얻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함으로 성도들은 온전함을 이룹니다.
주님의 사랑에 거하기 위해 주님께서 명하신 서로 사랑함으로 신자들은 늘 힘써야 합니다.
고로 그것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참된 제자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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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꿈을 먹고사는 중년

사람은 꿈을 꾸며 꿈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비록 자신의 몸이 활기찬 힘을 발휘할 수 없으며,
자신의 인생의 남은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느낌을 가졌을 지라도
나는 지금 꿈을 꾸며 그 꿈속에서 자신의 남은 시간들을 살아가련다.

꿈을 가진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꿈으로 인하여 살 맛을 느끼며, 그리고 살아갈 이유를 갖게 한다.

꿈의 약속을 이루는 것은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며,
꿈을 꾸며, 그 꿈을 먹고 사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며,
꿈의 발자취를 거두며 살아가는 것은 과거를 살아가는 것이다.

어린 날에 나의 꿈은 막연했지만 그 꿈은 큰 지평선에 널린 먼 미래를 향한 것이었다.
아직은 꿈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그 꿈이 보여주는 것을 따라 창공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펼치게 하는 시원함을 선사한다.

젊은 날의 꿈은 모든 가능성을 향한 활기찬 생애의 미래를 열어젖히는
삶의 파워를 형성하게 한다. 그 꿈을 자신의 손안에서 이루어 질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꿈의 전사처럼,
그 꿈은 마음 먹은 대로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간다.

젊음의 사랑과 정열이 불타서 그 사랑의 자유와 젊음의 열정을 마무리 하는
그 끝 날에 도달하여, 사랑의 결실을 이루는 결혼의 날은
자신의 인생의 전반전에서 이룬 꿈을 일시적이나마 이루는 기쁨을 맛본다.

고로 자신은 생각해본다. 오랫동안 결혼을 향해 꿈을 가지고
장차 함께 같은 방향의 인생을 나눌 반려자를 만나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
연인들을 스쳐 흘러 보내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 젊은 날의 사랑과 열정은 결혼을 통해 완성이 되어,
하나의 작품이 되어 자신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추억 속에서 지난날에 나를 기쁘게 하고,
나의 입을 크게 벌려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의 흔적에서 큰 기쁨을 맛보았던 날은
장가가는 날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제 결혼생활을 통해 청년과 중년의 때를 보내면서 자녀들이
커가는 세월의 열매들을 되새겨 본다.
그 결혼이라는 꿈의 환상이 현실로 다가와 그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루는 갈등과 굴곡의 여정에서 반려의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며,
이제는 자녀들의 바라보는 꿈의 약속들을 함께 그들과 기대하며,
자신 앞에 놓여있는 삶의 결산의 때를 향한 발걸음.


다시금 꿈의 시동을 걸어, 남은 인생의 미래를 향해 꿈의 약속들을 세우며,
다시 새로운 도전의 꿈을 꾸며, 그 꿈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그 꿈을 먹으며,
꿈에서 주는 진솔한 삶의 여유들을 나누며 사는 삶의 지혜를 얻고 싶다.
죽는 날까지 꿈을 꾸며 꿈을 먹으며, 꿈을 바라며 살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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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세대들의 정체감과 사고방식

미국에있는 한인사회에서 한인 1세대는 한국어를 쓰고
한국식 사고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기성세대이다.
그들은 미국에서 오래살았어도 여전히 그들의 의식속에는
한국적 문화와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
미국의 다문화권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중시하며 살고 있다.
그들의 의식속에는 늘 고국에 대한 뉴스와 정보에 눈과 귀가 열려 있으며,
고국의 향수에 늘 젖어 있다.
미국안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관심은 늘 고국에 대한 것들이다.
뉴스나 정보에 대한 습득은 주로 한글로 기록된 인터넷, 신문, 그리고 잡지에 의존한다.

이 세대는 한인가정의 주도세력으로 현재의 생활에 금전적으로나 역활적으로도
한인문화권안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나, 한인 문화권을 넘어,
미국주류문화나 타 이민문화권에 깊이 연류되지 못하고 다만 피상적인 접촉을 할 뿐이다.
언어적인 한계로 인하여 미국민들과의 소통에도 한계가 있으며,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2세와의 소통이나
문화적인 사고방식의 차이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며,
그들의 자녀들과의 교제나 의사소통에 일정한 벽을 느끼며
미국의 타문화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한민족 끼리의 한인문화권의 자리매김에 중요한 역활을 하며 영향을 주도 하고 있다

청소년시기중에 미국에 건너온 이 세대는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문화의 기존양식에 이미 젖어있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것은 단지 겉모양만이 그들의 문화에 접할 뿐이다.
그들의 속은 여전히 한국적인 사고태도와 기존전통적인 습성에 젖어지낸다.
이런 한인1.5세는 한국문화와 미국문화를 함께 겪으며,
자신들의 정체감을 새롭게 하는 세대이다.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쓰는 세대로,
그들의 배움에서 영어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면서도,
한국에서 습득한 문화나 사고시스템에 여전히 영향을 받는 세대이다.
이 세대가 2세와 1세를 연결해주는 연결고리로서의 한인문화에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다.
한인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자신들의 정체감을 세우고 적응할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은 양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기세대로서의 갈등을 겪고 있다.
오히려 때로는 이들의 정체감이 가장 미흡하고 불안한 양상을 띠기도 한다.

한인2세들은 미국식문화에 익숙하며, 미국문화와 언어를 배우면서,
그들의 사고방식까지 미국화가 되어 있다.
이들은 미국 땅에서 태어나 그들의 성장이나 배움의 환경은
오로지 미국적인 것만이 있는 세대이다.
이들속에는 체계적이고 깊은 한국적인 사고방식은 없고,
다만 가정안에서 다른 세대의 가족들로부터 피상적으로 경험하는
복합된 한국적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 한국적인 사고는 그들에게는 오히려 이질감을 갖게 한다.
부모세대에서 배운 한국적인 지식은 제한되고
변질된 문화적인 인식으로 그들에게 한국문화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다만 그들의 정체감은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은 미국적 문화체계로 세워져 있다.
이들의 경험하는 세계에서는 미국적인 것이 자연스러우며,
한국적인 것이 이질적일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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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감정교육

부모로서 자녀들을 잘 키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희생과 사랑에 따른 수고가 있어야 한다.

우리 가정에는 두 아들이 있다.

이 아이들이 자라기 까지 아빠인 나는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아이들을 돌보아 왔다.

집사람은 아이들이 자기몸에서 나은 자식이라 그런지,

그들과 일체감이 있고, 집사람은 아이들과 곧 잘 지내곤 한다.

 

그러나 나는 아빠로서 그들과의 사이에 내 몸에서 나오지 않아 그런지,

그들의 내면이나 감정표현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거리감을 느낀다.

그들이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와 아직 유소년기에 있는 아이들로 자라기 까지,

아빠로서 후회스러운 것은 가끔 그들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잘못했을때에 지나치게 꾸중을 하다든지,

아니면 나의 지나친 감정의 발상으로 인해,

그들이 나에게서 감정적인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감정적인 이입내지는

그들의 감정에 쉽게 동화하지를 못하는 한계로 인하여 그런 것이다.

이럴때에 아이들을 어떻게 감정적으로 잘 대할수 있을까를,

아이들 교육에 대해 좀 늦었지만,

다음과 같은 Gottman의 감정적 순화교육을 할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본다.

미국의 결혼상담학자 Gottman이 아이들을 어떻게 올바른 감정적인 교육을 통해

그들을 양육할것인가를 여러단계로 효과있게 할것을 가르친다.

먼저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할때에,

고양된감정보다는 낮은 상태의 감정을 유지하며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어떤 부모들은 웃사람으로 쉽게 높은 감정적인 상태로 나가

바로 그것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때나, 야단을 칠 경우에

부모가 감정을 억제하고 대해야 아이들에게 감정적인 상처를 주지않게 된다.

설사 옳은 일을 훈계하거나 가르치는 경우라도

차분한 교육자의 입장에서 아이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감정적인 문제가 발생할때에,

부모는 화를 내지 않고, 그 감정적인 문제를

아이들과 친분을 나눌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것이다.

부모와 자녀사이에 감정적인 긴장이 있을때에,

부모가 오히려 순화된 감정표현을 유도하여,

아이들과 더 깊은 긍정적인 좋은 감정의 관계로 발전시킬수 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화가 났을때에는

예를들어 부모에 대한 불공정하다고 혹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로 부모에게 대들때에,

그들의 감정을 인정해주어야 그들이 그들의 감정을 자유롭게발산하고,

안좋은 감정을 표현하고도 더 좋은 관계로 발전시키는

대인관계의 기술을 부모와의 관계훈련을 통해 발전시킬수 있다.

또한 그런 불편하고 억울한 감정이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상처로 남지 않을 수 있게 감정을 순화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부모는 구체적으로 아이들이 부모에 대한 억울한 감정문제를

말로서 표현하도록, 부모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아이들의 감정표현을 받아 주어야 할 것이다.

감정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방법도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아이들이 제안하는 방법을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부모는 아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로

나오기 까지 기다려 줄줄도 알아야 할것이다.

아이들의 그릇된 행위나 습관은 받아주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잘못된 감정표현은 될수 있는 한 받아 주어야 할것이다.

그것은 감정표현 자체를 억압하지 않게 하는 부모의 배려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때에 아이들이 남에게 감정이 격하지 않게

부정적인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문제제기를 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한계를 정하여 문제해결에 있어, 어떤 원칙아래에서 자신들을 표현할수 있도록, 선택의 여지를 제공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녀들과 타협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아이들에게 화가 나는 일이 있을때에,

왜 화가 났는지를 설명해주어, 스스로 아이들이 그 좋지 않은 행동을

그만두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모든 감정표현내지는 감정순화교육의 모든 해결의 실마리가

양육과정안에서 진행되도록 아이들을 인도해야 할 것이다.

감정교육에 있어서, 부모는 어떻게 아이들에게 대화 할것인가?

부모는 판단하는 말로 보다는 설명해주는 언어표현으로

아이들의 인격자체를 무시하는 "바보다, 멍청이다, 나쁜애다.게으르다"등을 써서는 안될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감정순화교육을 하는 경우가 안좋은 때는,

다른 외부인이 있을때에든지, 부모가 지쳐있거나 피곤한 경우,

부모가 즉각 감정적인 불만을 아이들에게 발산할때에는 피하는 것이 좋다.

부모가 되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닌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렇지만 부모에게 아이들을 바르게 양육할 책임이 있는 것은

부모에게 자녀들은 가장 값진 선물이며, 보화이기 때문 일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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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인가? 아니면 삶의 선택인가?

지금 자라나는 젊은 세대는 게임(놀이)을 주로 하는세대이다.
게임을 통해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치는 세대이다.
그들은 가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그런 게임에 대한 태도에서 현실감각을 잃고,
그 게임의 세계를 통해 자기만의 영역의 세계를 만든다.
게임하는 세대는 인격대 인격의 인간적인 만남이나,
개인적 관계와 교제의 상태를 무시하며,
상호간의 기계적인 관계로만 유지한다.

게임은 이기고 지는 것이다.
게임에는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으며, 게임으로 스릴을 즐긴다.
그렇지만 일상의 생활은 게임이 아니라,
평범한 일들로 주로 이루어 졌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 대한 괴리감이 생기고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며,
시간을 내어 차분히 생각하는 상상의 세계는
점차로 게임에서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로 채워져 간다.

과거에는 어릴때의 게임은 동네에서 할수 있는 것들이다.
딱지치기, 구술치기, 혹은 동네라는 지역에서
동네아이들이 놀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래서 장차 자기들의 삶의 영역이라는 것이
고작 동네에서 농사를 짓거나, 혹은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삶을 이루어 간다.

그러나 요즘은 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소우주를 만들고,
인터넷을 통해 자기 마음대로 세계여러곳들을 돌아다니며,
혹은 상상의 세계를 가상의 세계로 만든 인터넷의 세계에서 게임을 하곤 한다.
이런 게임을 통해 점점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국제적으로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서
쉽게 세계화로 자신의 삶의 영역을 넓혀간다.

과거의 게임은 인간관계와 개인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지지만,
요즘은 기계와의 만남, 혹은 자기 공간안에서
가상공간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한다.
게임은 엔터테이트먼트의 재미를 주로 하는 동기로 한다.
게임에는 재미를 추구하고 반면에 지루함을 용인할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은 차분히 자기를 돌아볼 시간을 가지 못하게 한다.
게임은 게임하는 대상에 빠지게 하여 자신을 잊게하며,
자신의 현재의 위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한다.

게임이 주는 유익이란 무료한 시간이나
따분한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며,
게임을 통해 인간의 두뇌작용에 도움이 줄수 있으나,
오히려 두뇌의 창조적인 기능을 무력화하는데 쓰인다.
그리고 반복되는 손의 기계적인 놀림을 통해
자칫 단순한 손 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을 통해
인간발달의 조화롭지 못한 상태에 빠지지 않을 까하는 염려가 있다.

우리 주변에 게임문화가 널리 만연이 되어있다.
로또복권 당첨은 말할 것도 없이 뽑기 게임을 통해 당첨이 되며,
신규주택 청약도 추천뽑기 게임에 의해 선정이 된다.
학생들이 학교와 학과를 선택할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의 게임을 활용하여 결정한다.

그리고 사업을 하는 회사에서 신규채용하는 직원을 뽑을 때에는
경쟁률이 심할 때에도
결국 이력서사정 혹은 실력평가의 경쟁게임을 통해 사람을 뽑는다.
요즘은 애인도 인터넷에서 짝맞추기 게임을 통해 구하며,
결혼에 올인하는 것도 게임을 통해 선별하듯 무작위로 착출하여
사람들을 고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게임에서 선별하듯 사람을 찾아 골라 결혼하기 보다는
결혼과 함께 이루어지는 가정은
결코 짝맞추기게임하듯 하는 가벼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될때에 결혼과 가정생활의 실패를 가져올수 있다.

세월을 두고 함께 살아갈 반려자의 선택은
삶을 통해 경험해야 할 진지한 자기결정이나 판단에 의해 좌우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영원을 추구하는 인생도 게임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는가?
이쪽이냐 아니면 저쪽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인생의 길이 결정되는 것인가?

고로 생명을 선택하는 길과 죽음을 택하는 길을
놀이 게임에서 갈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여겨야 할일이 아닌 것같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생명을 얻는 것은
진리를 구하는 심령들이 진지한 삶의 과정안에서
그 진리를 깨닫고 발견할 수 있는 곳에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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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고민: 가정과 자녀교육의 문제

이혼이라는 가정의 문제는
미국인들사이에서는 50년대 이후 부터
베이비부머시대의 사람들이 자라면서
그들의 부모세대가 이혼을 하기 시작하는 가정으로 나타난다.
그전까지 즉 미국은 2차세계대전을 치루기전까지
건전한 가정이라는 국가적인 축복의 자산을 갖고서
세계를 리더하는 국가로서 선진국가혹은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기독교국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 공립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의 장의 상실,
즉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여,
공립학교 교육은 악화일로로 교육을 받는 자녀들이나
교육을 하는 부모세대는 함께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혼란을 거듭하게 된다.
그 배후에는 미국의 실용주의 교육의 영향을
준 죤 듀우이같은 이들의 무신론적인 교육철학의 영향으로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것이다.

공립학교의 교육적인 도덕(기독교교육의 훌륭한 전통)성이 무너지며,
교육의 세속화는 사회적인 가치기준의 역활에서
기독교의 가치나 윤리범주를 벗어나,
그 세대에서 교육을 받은 자녀들은
전세대의 무신론적 교육철학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그 세대에서 이혼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하여
보통 가정에서 이혼이라는
가족문제의 현상이 폭넓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 철학은 현재의 미국의 개인주의적인
철학적인 풍조의 영향과
맛물려, 현재의 탈근대적인 가치(절대주의 가치기준의 상실)로
발전하여 왔다.
그런 교육적 결과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가치기준에 혼선이나타나며,

그 여파로 건전한 많은 미국인의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들을 잃게 되며,
오히려 가정의 이혼하는 현상은 보통가정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혼은 미국인 가정의 보통현상의 하나로
모든 가족관계의 표시란이나,
개인의 가정란에는
이혼을 통한 복잡한 부모와 자녀의 비정상적이고 역기능적인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포괄적인 사회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 현상은 결혼하는 가정의 반이 이혼에 이르며,
이혼하는 부모세대는 이혼하는 자녀세대로
역기능적이고 부도덕한 가정의 유산을 물려주고 있다.
이제 이혼하는 가정의 현상은 사회적인 정착단계를 거쳐
광범위하게 미국사회의 인간관계의 비윤리적인 상태로 빠뜨려,
그런 상태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건전치 못한 복잡한 구조의 가정안에서 자라난다.

이혼한 아버지가 이혼한 어머니와 사는 경우에
양쪽의 가정의 자녀들이 서로 형제간으로 연결되어
서로 얽히는 가운데에 복잡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된다.
스텝파더(의붓아버지)는 부인의 전남편의 자녀들을 돌보며,
그 자녀들은 전혀 생소한
엄마의 사람인 새로운 법적인 아버지를 두게 된다.
정상적인 부모와의 관계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과 더불어 싱글어머니나
혹은 부모가 아닌 제삼자(조부모의 슬하에서)에 의해
자라나게 된다.

자녀들과 스텝파더의 사이의 관계는 그렇지 않아도,
힘든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더 힘들고 복잡한 상황으로 이끌어 간다.
부모와 자식간에 법적인 관계안에서의 가족관계가 성립이 된다.
자연적이고 혈통적인 관계가 아니라,
법적으로 단지 하나건너 엄마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관계는 소원하기만 하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의 부모, 즉 결혼한지
보통 10년을 전후한 부부가 서로 이혼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이혼은 아이들의 상태를 아주 힘든 상태를 만든다.
그 나이에 벌써 남녀관계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배우고,
자녀들을 보호해야 할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무너지며,
고유한 가족이라는 전통적인 관계가 무너지며,
아이들은 허물어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복잡하고 힘든 사회라는 곳으로 방치되어,
아이들은 방황하면서, 반항아로 사회에 대해 울분
혹은 스트레스에 의한 불량적인 자녀로 만들어지기가 쉬워진다.

이제 미국사회에 이혼은 악순환의 고리를 갖고 있다.
부부관계가 극단적인 경우를 넘어서는 것으로
서로의 인간관계의 끝을 보았기에 이혼의 가정은
사회적인 문제의 기본단위로 자리잡아,
자녀의 문제, 혹은 사회적인 범죄의 기본적인 제공처로
역기능적인 가정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앞으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의 가치가 무너지면
건전한 방향의 사회나 국가 건설은 지장을 받기 마련이며,
그것이 또한 사회나 국가 발전에 큰 장애요인으로
전반적인 사회의 이탈문화적인
(사회발전을 역행시키는) 현상이 될 것이다.

(이글은 필자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에 의해 쓴 사견임을 밝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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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의 정체감

성경이야기는 많은 인생들이 한 시대에 태어나,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살든지, 혹은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살았든,
혹은 옮겨다니며 살았던, 모두가 사람들의 이주하거나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는 삶의 이야기로 시작하였다.
처음에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는 시대를 거쳐, 그곳에 삶의 뿌리를 내려 살다가,
다시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는 이민 반복의 역사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신의 부름으로
처음에 자기가 살았던 고향 땅의 사회나 문화를 뒤에 두고,
신이 지시하는 새로운 개척지로 옮겨 다니는 유랑의 생활을 하였다.
그의 후손들도 계속해서 자신들이 살던 지역을 떠나 이주하며,
새로운 지역에 가서 적응하는 법을 배우고 살았다.

아브라함의 이주는 하나님앞에서의 결단과 순종에 따르는 이민의 경험이며,
떠돌이 생활의 인생순례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을 인도하는 하나님앞에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는 일과
그곳에 정착하는 새롭게 지역사회에 적응하는 일을 시작으로,
그는 자신이 있는 지역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 지역에 동화하여,
지역사람들과도 일정한 거리의 사회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라는 지역의 맹주와 일정한 이웃관계를 유지하며 살았고,
그곳 사람들과 매장지를 구입하는 일에 있어서도,
깨끗한 상거래를 하며, 그 곳에서자신의 뚜렷한 사회적인 위치를 갖게되며,
나중에는 그 지역에서 맹주가 되어 살았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젊은 날에 자기가 자라온 지역을 떠나
홀로 어머니의 고향땅을 밟아,
외삼촌 집에서 20년의 청춘의 삶을 지내면서,
거기에서 결혼하여 부인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자산을 함께 일구어 낸 자수성가의 생활을 하고,
다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와서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야곱은 가나안에서 살면서, 전세계적으로 밀어닥친 심한 흉년으로 인하여,
온 땅에 기근이 심하였다.
야곱이 자신의 가족들과 기근으로 인하여,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는 동안에,
당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죽었다고 여겼던 요셉이
이집트땅에서 국무총리가 되어 출세한 위치에 있었다.
야곱의 온 가문의 사람들이 기근을 피해, 그곳에 내려가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이집트땅으로 이민간 야곱의 가족들의 이주에서 오는 경험을 통해
그들의 타국에서의 생활은 자신들의 안전이나,
삶의 우선순위는 자신들의 정체감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스라엘인들은 새로운 이방땅에 갔지만
자신들의 살아온 생활습성이나 문화를 가져갔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자기 정체감을 가지며,
노예로 전락하는 고난의 세월을 살았지만,
나중에는 자신들의 독립적인 정체감을 유지하였고
나중에는 억압된 노예의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민족과 국가건설을 위한 발자취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인들은 새로운 지역이나 사회나 문화에 적응해가는 적응력이 대단하였다.
자신들이 이주해 간 그 지역을 자신들의 고향처럼 여기고,
그곳에서 정착민으로 살아갈수 있었다.
비록 바벨론에서도 유페의 생활을 하였지만,
그곳에서도 독특한 자기들만의 유대문화를 지켜
지역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만의 민족의식과
민족고유 문화적의식응 지키며 살았다.
그후에 그들은 고향땅에 와서는
잃어버린 조국의 땅을 다시 찾아 그곳에 정착하며 새시대를 살았다.

그후 세계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이민자들은
디아스포라는 유대 이민자의 특유의 삶과 문화를 이루며 살았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의 후손들도 그들의 조상들처럼 가는 곳마다,
자신들이 지역에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고 있다.

이민의 정체성은 지역사회에서 나그네로 사는 의식이다.
하지만, 그곳은 자신이 거주해야 하는 지역정서의식이 필요하다.
믿음의 조상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살았지만,
그들은 늘 자신들이 그곳에 있는 자기 정체감
(이중문화인으로 살아가는 양면의식: 하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섬기는 선민의식,
또하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의 사회인)에 대해,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이민자들도 각기 자기들만의 민족의 독특한 문화를 간직하고서,
다문화권적인 미국사회에 적응하고 있다.

이민의 추세는 세계적인 추세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태어난 곳과 고향이라는 정든 곳을 떠나 새로운 기회나,
새로운 문화에 접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취업이나 직업의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해 전혀 새로운 지역에 가기도 한다.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문제에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
이민을 결정하기도 한다.

새로운 사회나 문화에 적응하고 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문화의 차이 나 언어의 극복문제가 생각보다 어려운 이민자의 과제이다.
언어사용에 대한 차별이나 자신만의 가지고 있는 문화적인 충격이나
인종적인 차별등을 극복을 하지 않고서는 이민생활을 성공적으로 감당할수 없다.
주류사회에 대해 주변의식에 갇혀 살게되는 의식은
오랫동안 이민자로 살아도, 자신이 이민을 간 사회에 동화되지 않을수 있다.

즉 그런 사람들은 일차적인 문화권에서 떠나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으로 사는 신세이거나
혹은 이차적인 문화권에서도 오히려,
과거에의 회귀나 향수를 가져 그곳 새로운 지역에적응하지도 못하고,
양문화권 사이에 끼어, 이방인으로 사는 주변인으로 사는 삶으로 사는 경우 도 있다.

그렇지만, 사실 모든 인생은 자신이 이땅에 태어나 살다가,
자기가 온 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모든 인생들이 이민의 삶을 산다고 생각할수 있다.
다만 자기가 태어나 자란 사회나 문화에 조금 익숙할 뿐,
인생이라는 자체는 이민의 정체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영원한 자신이 머물수 있는 곳은 이지구상에 아무데도 없다,
즉 이말은 모두가 이민자의 삶의 정체의식을 갖고 살수 밖에 없으니,
반대로 이민자로 어느 새로운 지역의 사회나 문화에 적응하여 살아갈 때에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의 삶이라는 의식아래에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자리와 현재의 위치에 대해 만족해 하며,
적응하려고 노력하며 사는 처세의 지혜가 필요하다.

새로운 지역에 이주해 가려는 이민자들은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의식이 필요하다.
우선 이민의 삶 그 자체는 도전적이며,
이제까지 살지 않았던 곳을 향해 나가는 개척자정신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착하려는 새로운 지역에서 오는 사회관습이나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적응하는 자신에 대한 충격을 줄이고
그문화에 적응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민을 가서 경험하는 일들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노하우와는
전혀 다른 이질감이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아무리 고향땅에서 살던 지식이나 삶의 경험이 축적이 되어 장성인으로 살았어도,
이민으로 새로운 지역에 가면,
이제 새로운 지역에 대해 모르고 이제 배우며 살아야 하는 학생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민간 지역의 사회적인 관습이나 문화를 익히는 일에
자신의 시간들을 투자해야하는 것이다.
이민으로 가면 그곳에 있는 그곳의 사회적인 관습이나
그들의 문화를 배울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활용해야 할 것이다.

예를들면, 언어 습득하는 지역사회에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든지,
지역사람들이 많이 모여 함께 하는 지역사회의 문화적인 행사나 활동들에 참여하여
자신이 스스로 그 지역사람의 한사람으로 일체감을 갖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빠른 시일내에 현지민을
친구로 사귀는 일을 갖는 일이 필요하다.
친구를 사귀면, 언어나 문화를 익히는 데 제일 빠른 지름길이다.

그리고 그 지역에 현지인들이 보지 못하는(그들은 대개 이제껏 살아온 경험에 대해 신선하지 않고 그런 것들을 지나치는 것등) 이민자들만 볼수 있는(새로운 지역에 대한 호기심 발동을 통한 그 지역사회를 경험하기) 지역사회의 공간이나 기회
(예를들어, 미국에서는 도서관을 주로 많이 이용하기나 박물관 방문이나
지역행사에 참여하기)등을
활용하는 것이 또한 그 지역 사회에 빨리 적응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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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이렇게 자라도록

누가복음2:40, 49, 52

40.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 건강하게 자라셨다. 지혜가 넘치셨다.
49.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점점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아기예수는 아이예수로 건강하게 자라셨다.
메시야는 아기로 오셨다. 주님은 왜 성인으로 오시지 않을셨을 까?
예수님은 성인으로 하늘에서 지상에 임하시지 않고,
낮고 천한 자리에서부터, 인간으로서의 모든 자라나는 과정을 경험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람을 직접 경험하셨다.
인간이 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자란다고 자라는 가?
인간의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안에서라야 정상적으로 잘 자랄수 있다.
자녀들의 성장시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녀들의 성장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돌보시는 사랑안에 머물러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부모에 의해 생명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나는 아이들이
실상 그들의 자라는 과정안에서는 그들의 자람을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없이는 진정으로 건강하게 자랄수 없다.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어도 그것을 자라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려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물러 있도록 부모들이 배려를 해야 할 것이다.

자람에는 육체적인 성장도 있지만, 정신적인 성장이나, 사회적인 성장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자녀교육은 조화있게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면에서 구김살이 없이 잘 자라야 좋은 어른이 된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그의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그가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려주시고 있다.

예수님은 12살에 예루살렘에 부모들과 함께 유월절행사로 올라가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룻만에 부모들이 아이예수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찾았는데,
아이예수는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선생들과 질문을 하며, 대답을 하시며 아이예수님은 토론을 하는 중이었는데,
모두가 그의 총명함에 감탄하며
또 그의 지혜로운 대답에도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고 있었다.
보통 이스라엘의 소년이 성인식에 참여하는 나이가 13세인데,
아이예수님은 이제 앞으로 성인이 되기전에
그는 성전에서 유대교의 선생들과 함께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는줄을 왜 모르십니까?라고
부모들에게 반문을 하는 아이예수님의 대답가운데에
아이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통 청소년시기에 자아의식에 눈을 뜨게 되어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에 대한 정체감을 인지하게 되는 나이이다.

아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는 중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정체감을 갖고 있는 아이예수,
그의 총명함은 탁월하며, 모든 지혜로운 대답등은 그의 정체감에서 비롯된 자의식,
즉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런 그는 탁월한 지혜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

청소년 예수님을 생각할때에,
그의 내면에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의식,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지식은 없으며,
자신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 지혜의 지름길이다.
청소년시기에 자아에 눈을 뜨는 과정은
너무 중요한 자신에 대한 뚜렷한 자각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간파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시기에 자아의식를 찾는 작업이 잘못되게 될때에,
이후에 그의 삶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며,
모든 일에 대해 자아의식에 근거한 가치판단기준에 의해 판단하며
그 자아정체감이 앞날의 자신의 날들을 만들어간다.

아기예수가 자라는 과정과 아이예수가 자라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람은 여러단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기가 자라는 과정은 부모의 배려가 더 필요한 시기이다.
그 만큼 그시기는 인생의 어느시기보다도 더 부모의 영향력을 받아 자라게 된다.
이시기에 아기예수는 하나님의 배려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그의 자람은 온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아기예수는 무럭무럭 자라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자라는 것이란
하나님의 배려와 돌봄으로 자라는 것이다.
인생의 자람에서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배려와 돌봄은
창조주께서 만물을 붙들고 계심을 보여주며
모든 인생들을 돕는 창조주의 보존케하시는 사역하시는 모습이다.

자녀들에게 부모로서 해줄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제대로 잘자랄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대개 많은 경우에 자녀들이 부모들의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녀들에 대해 방임하는 태도로 대하게 될때에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겪게 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연적으로 있는 아이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배려하는 일이 지혜로운 일이다.
아이들이 조물주로부터 받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천성적인 지혜와 재능을 개발되어지도록 도움을 주는 일만 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무엇이 그리고 어떤 교육이 우리 아이에게 가장 적합한가?
그리고 되도록이면 그들의 상태를 존중하고, 그들의 의지를 꺽지말고,
그들의 성장발육과정에 그들의 조언자로 머물러
자녀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모습을 유지하도록 배려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자녀를 부모의 기준으로 당겨서 부모에게 맞추는 교육도 안되며,
반대로 아이들을 매사에 아이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방치하는 태도로 하는 것은
더 나쁜 교육적인 태도이다.

자녀와 부모가 적당한 거리를(부모와 자녀의 인간관계의 거리)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부모의 일관된 교육철학이 어떤 교육적인 대안보다 중요하다.
부모의 일관성인 태도는 아이들을 안정되게 건강하게 자라도록 한다.
만일 자신이 크리스찬 부모라면,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는 기도야말로
부모로서 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신성한 의무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와 배려가 아이들의 자람에서 유지도도록
부모로서 조언의 역활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임을 명심하는 일도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옳은 태도를 갖게 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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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인 도전들과 가족의 의미

결혼과 가족개념에 대한 문화적인 도전들과 그것을 극복하는 가족의 의미

포스트모던니즘의 세계관은
흔히 전통적인 근대의 인간세상에서 받아들이는 상식적인 가치관이나
절대적인 가치나 절대선에 대한 관점을 상실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결혼하기전까지 결혼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순결을 지켜, 결혼에 올인한다면,
행복하고 건강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같은 것이다.

포스트모던니즘은 또한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파편화된 세계관으로서,
개개인을 고독하고 소외된 채 방황하며 살도록 한다.

지금 결혼에 대한 서구화의 관점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이혼하는 등식으로 널리 퍼져있는 영향등이
인기연예인들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는 결혼에 대한 신성한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던니즘적인 세계관은
타인이나 외부인에 대해 예민한 문화적인 단절의식을 느끼게 한다.

예를들어 같은 문화권안에서도 남자와 여자사이에 결혼을 하는데,
그들의 관계는 마치, 서로 다른 인종이나 그의 영향권에 사는 사람들처럼
(아시아들이 백인들과 만나 사는 사람들처럼 같은 문화권의 부부가
서로를 잘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하는 경우)
서로가 전혀 이질적인 상대로 만나지고 이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말은 사회가 그 만큼 복잡하고 단절되어 가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포스트모던니즘적인 접근은 지금까지 결혼과 가족을 지탱하고
이해하였던 전통적인 가치의 변형을 초래하며,
기존의 상식적인 결혼관습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포스트모던니즘적인 관점안에서 가족에 대한 개념은
혈연중심이나 상호관련성의 전통적인 가치보다는
개인주의의 편리함(개인의 확장된 소외의식안에 있음)에 맞추어,
결혼과 가족에 대한 개념들을 가족통합보다는 가족해체의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그런 형태의 가족개념은 절대적가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지며,
절대기준에 대한 준수이완을 조장하는 그런 문화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결혼과 가정안에서 서로의 인간관계를 묶어주는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하며,
가족관계의 이완된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한다.
고로 그런 관점들은 근래에 결혼의 응집력의 문제나
가족개념의 보호해주는 전통(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부부유별이나 부창부수
혹은 장유유서같은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한 가치의 이탈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그 문화적인 접근안에서 자유로운 성문화와 성의 개방성을 촉진하여,
가족의 신성함과 통합성을 해체하며,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변질시킨다.
가족의 구성원간에 이완된 관계와 더 복잡하고
소외되어가는 사회적인 영향의 소통의 문제안으로 유도한다.
탈근대적인 가치관의 범람으로 인하여,
결혼과 가족의 신성시하는 것이 무너지며,
이탈적인 가정의 형태가 가족자체의 존재와 존립를 위협하고 있다.

가족의 개념에 영향을 주고 있는 근래의 사회문화적인 영향은
남자와 여자의 단일 가족으로서의 전통적인 형태에 대한 다양한 의미의 변형을 가져왔다.
여성의 지위향상이나, 여성들의 직업참여로 인하여,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가사의 일만을 하는데서, 사회의 진출이 활발해졌다.
그래서 여성들위주의 싱글가족의 가족개념
(많은 수의 여성들이 결혼을 자신들의 인생의 과정에서 여러개 중에 하나의 선택으로,
아니면 결혼이라는 것 자체를 외면하는 경향)이나,
결혼 대상자의 확대로 기존의 동족간의 결혼에서 국제결혼이 성행하는 풍조도 생겨났다.

작금의 문란한 성문화나 정상에서 변형되어가는 성윤리는
동성애라는 세계적인 현상의 영향에서 우리도 예외없음을 보여준다.
동성애적인 가족개념의 변형은
성의 정상적인 역할을 변질케하는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런 문화적인 성향안에서의
다양한 삶의 조건들안에 있는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경향은
가족의 구성이나, 가치나 의미에 많은 변화와 영향을 주었지만,
그러나 서로 다른 남남의 두사람이 만나 시작하는 가족은
혈연중심의 공동체로
그리고 사회의 냉정한 이기적인 만남이나 관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하는 사회의 기본단위로 존재한다.

가족은 무엇을 위하는가?
가족은 사람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
가족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종족과 가치를 보존하고 계승하며,
자신의 존재를 보호받는다.
가족은 혈연공동체로 부부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를 위해 존재한다.

사람은 가족안에서 자신의 삶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여 간다.
가족은 사람자신을 위하여 사람을 태어나게하며,
자라게 하며, 성장시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만들어 내는 역활을 한다.

가족은 인간자기표현과 자기성취를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통해 자신의 성장과 자기실현의 과정으로
가족안에서의 삶이 대부분 인간의 생활이 주어진다.
가족안에서 사람들은 태어나고 자라고, 성숙한 성인으로 자라서,
나중에 그 자신이 가족을 이끄는 단계에 이르며,
가족안에서 인간존재의 안정과 실현을 추구하는 피난의 공동체이다.

가족은 부부자신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부부자신들의 사랑과 자기실현의 장으로 가족은 존재한다.
부부는 남편이 아내를 로맨틱한 사랑으로 성적인 사랑을 사랑하며,
대등한 인간관계로서, 아내를 대하며,
또한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이끌어가며,
자녀들을 교훈을 가르치고 가족의 모든 일에 대해서 책임을 다한다.
아내는 가정의 화목의 중심에서 가정의 사랑스런 분위기를 위해 사랑으로 헌신한다.
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키우는 일을 한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돕는 베필로서,
매사에 남편과 협조하여 가족의 대소사를 함께 감당해 간다.

가족은 자녀들을 위해 존재한다.
가족은 하나님의 축복과 명령으로 인하여
자녀생산과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을 위해 존재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돌봄으로 일정기간
그들이 성인이 되기까지 가정의 보호와 양육의 테두리안에서 성장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물질적인 공급과 정신적인 안정을 주며,
자녀들이 한 개인의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역활을 한다.

가족은 인간문화와 문명의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존재한다.
가족을 통해 인류는 문화의 발전과 문명의 발달을 이루어냈다.
가족은 사회의 가장 작은 기초단위이지만,
가족안에서 모든 인류문명과 문화의 시작이 되었다고 할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그 가족안에서 농사를 짓는 기술을 만들어 내며,
농경사회의 기술을 주도하였으며,
산업사회에서는 가족개념의 변천의 소용돌이와
복잡한 사회안에서의 소외된 개인들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 갈등하는 개인들을 포용하는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서,
건강한 사회의 건전한 기반을 이루어가는 역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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