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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공원을 1.5마일 (3-4 킬로미터)되는
거리를 한번에 걷기도 하였는데, 점점 돌기가 힘들었다,
숨이 차는 고로 몸의 상태는 거의 중간 중간 쉬어야 겨우 한바퀴를 돌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그정도도 하지 못하여,
그저 가서 시원한 공기만 쉬는 정도의 몸의 상태로 약해져 있었다.
심장근육의 기능의 신축성이 떨어져 심장운동이 약해져 충분히 피를 공급하지 못하여,
그 여파로 폐에 물이 차게 되는 악순환으로 인해 온 몸에 물이 차게 되며, 그로 인해
숨이 차게 되어 10미터를 걷고 나서는 쉬워야 하는 몸상태는
자신의 행동반경을 점점 약화시킨다.
이런 몸의 상태에서 정확한 병의 원인을 모르고 증상
(주로 congestive heart failure: 심부전증)만을 완하시키는 약물로 지탱하기를
2년을 보내었다. 그러나 증상은 여전히 차도가 없고,
이 상태로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만 하였다.
최근 11월경에야 주된 병의 원인을 알아냈지만,
(아밀로이드는 희귀성 질병으로 일종의 다양한 혈액암과 같은 것이며,
아직은 완치케 하는 치료법이 없다보니, 연구 개발중이다.
그리고 일반 백인들사이에는 희귀하여, 주로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 미국인들중에서 혹은 외국 유럽의 몇나라에서 환자가 보고가 있음,
내가 가지고 있는 아밀로이드는 primary 성 아밀로이드로,
그 쌓여진 경단백질이 몸 장기 구석에 영향을 주어 그 기능에 이상을 일으킨다.
주로 심장, 신장, 간, 위장, 입, 혀, 손, 발등)
그런데 심장에 영향을 주었을 시는 힘든 치료와 생존율이나 기간이 1년이나 몇년이 되지 않는다.
지난밤에 집에서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물이 차있었다
그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지낸 날들이 몇날이 되었으나,
여전히 오줌이 나오지 않아, 캐디터(오줌을 호수로 빼는 기구)를 통해 오줌을
빼어야 했다. 처음에 이것을 집어넣는데 피가 나온다.
오줌에서 피가 뭉쳐서 나온다. 통증은 가히 견디지 못할 정도로
수없이 오줌이 나올때마다 통증을 느끼곤 하였다.
처음에 캐티터를 집어넣은 간호원의 시술로 피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거의 일주일 동안을 피가 멈추지 않았다.
밤마다 통증으로 인해 잠을 잘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극도의 심리적인 불안정이 찾아와,
어려운 처지에 낙망이 되었으나,
그때마다 천지를 지으신 하늘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수없이 그분으로 부터 위로의 말씀을 들었다.
그 통증을 일주일동안 겪으면서도
주 예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쏟아놓으신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결하지 못하여 혼자서 고통만을 느끼며 아파할 뿐이었다.
나중에야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니 잠시 고통이
나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고통의 고마움을 생각나게 한다.
3일동안 몸무게가 50파운트를 빼어,
거의 몸이 야윈 상태로 3주간을 중환자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여,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2층 아파트를 내려 올수 없었다. 할수 없이
앰브런스를 불러 응급처치하는 대원들에 의해 겨우 차에 몸을 싣고,
병원 응급실로 들어와 그 날밤을 지내며, 점점 자신의 몸은
거대한 용광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몸을 만들기 위한
긴 시간의 여로에 들어 가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그날밤에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가 거기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은몸에 여러 가지 주사로,
약물로 거의 실신 상태의 몸을 회복케 하는
긴 시간의 치료의 날이 시작이 되어 몇날을 지내는데,
처음에 3일간을 부은 몸안에 있는 물을 뺴내는데, 50 파운드를 빼니
몸은 가냘픈 상태로 변화되었다.
스스로 일어나 앉아 있을 수 도 없는 상태였다.
그 때에 마치 꿈을 꾸듯 이틀 동안을 치료에 맡기며,
꿈을 꾸듯,치료를 받으며, 주님에게 간구를 드리는데,
의술로 시술하는 과정안에 주님께서 오셔서 몸안에 역사하시는 경험한다.
주님, 저를 치료하여 주소서!
사람은 꿈을 꾸며 꿈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비록 자신의 몸이 활기찬 힘을 발휘할 수 없으며,
자신의 인생의 남은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느낌을 가졌을 지라도
나는 지금 꿈을 꾸며 그 꿈속에서 자신의 남은 시간들을 살아가련다.
꿈을 가진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꿈으로 인하여 살 맛을 느끼며, 그리고 살아갈 이유를 갖게 한다.
꿈의 약속을 이루는 것은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며,
꿈을 꾸며, 그 꿈을 먹고 사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며,
꿈의 발자취를 거두며 살아가는 것은 과거를 살아가는 것이다.
어린 날에 나의 꿈은 막연했지만 그 꿈은 큰 지평선에 널린 먼 미래를 향한 것이었다.
아직은 꿈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그 꿈이 보여주는 것을 따라 창공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펼치게 하는 시원함을 선사한다.
젊은 날의 꿈은 모든 가능성을 향한 활기찬 생애의 미래를 열어젖히는
삶의 파워를 형성하게 한다. 그 꿈을 자신의 손안에서 이루어 질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꿈의 전사처럼,
그 꿈은 마음 먹은 대로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간다.
젊음의 사랑과 정열이 불타서 그 사랑의 자유와 젊음의 열정을 마무리 하는
그 끝 날에 도달하여, 사랑의 결실을 이루는 결혼의 날은
자신의 인생의 전반전에서 이룬 꿈을 일시적이나마 이루는 기쁨을 맛본다.
고로 자신은 생각해본다. 오랫동안 결혼을 향해 꿈을 가지고
장차 함께 같은 방향의 인생을 나눌 반려자를 만나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
연인들을 스쳐 흘러 보내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 젊은 날의 사랑과 열정은 결혼을 통해 완성이 되어,
하나의 작품이 되어 자신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추억 속에서 지난날에 나를 기쁘게 하고,
나의 입을 크게 벌려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의 흔적에서 큰 기쁨을 맛보았던 날은
장가가는 날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제 결혼생활을 통해 청년과 중년의 때를 보내면서 자녀들이
커가는 세월의 열매들을 되새겨 본다.
그 결혼이라는 꿈의 환상이 현실로 다가와 그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루는 갈등과 굴곡의 여정에서 반려의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며,
이제는 자녀들의 바라보는 꿈의 약속들을 함께 그들과 기대하며,
자신 앞에 놓여있는 삶의 결산의 때를 향한 발걸음.
다시금 꿈의 시동을 걸어, 남은 인생의 미래를 향해 꿈의 약속들을 세우며,
다시 새로운 도전의 꿈을 꾸며, 그 꿈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그 꿈을 먹으며,
꿈에서 주는 진솔한 삶의 여유들을 나누며 사는 삶의 지혜를 얻고 싶다.
죽는 날까지 꿈을 꾸며 꿈을 먹으며, 꿈을 바라며 살아가리…..
부모로서 자녀들을 잘 키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희생과 사랑에 따른 수고가 있어야 한다.
우리 가정에는 두 아들이 있다.
이 아이들이 자라기 까지 아빠인 나는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아이들을 돌보아 왔다.
집사람은 아이들이 자기몸에서 나은 자식이라 그런지,
그들과 일체감이 있고, 집사람은 아이들과 곧 잘 지내곤 한다.
그러나 나는 아빠로서 그들과의 사이에 내 몸에서 나오지 않아 그런지,
그들의 내면이나 감정표현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거리감을 느낀다.
그들이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와 아직 유소년기에 있는 아이들로 자라기 까지,
아빠로서 후회스러운 것은 가끔 그들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잘못했을때에 지나치게 꾸중을 하다든지,
아니면 나의 지나친 감정의 발상으로 인해,
그들이 나에게서 감정적인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감정적인 이입내지는
그들의 감정에 쉽게 동화하지를 못하는 한계로 인하여 그런 것이다.
이럴때에 아이들을 어떻게 감정적으로 잘 대할수 있을까를,
아이들 교육에 대해 좀 늦었지만,
다음과 같은 Gottman의 감정적 순화교육을 할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본다.
미국의 결혼상담학자 Gottman이 아이들을 어떻게 올바른 감정적인 교육을 통해
그들을 양육할것인가를 여러단계로 효과있게 할것을 가르친다.
먼저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할때에,
고양된감정보다는 낮은 상태의 감정을 유지하며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어떤 부모들은 웃사람으로 쉽게 높은 감정적인 상태로 나가
바로 그것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때나, 야단을 칠 경우에
부모가 감정을 억제하고 대해야 아이들에게 감정적인 상처를 주지않게 된다.
설사 옳은 일을 훈계하거나 가르치는 경우라도
차분한 교육자의 입장에서 아이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감정적인 문제가 발생할때에,
부모는 화를 내지 않고, 그 감정적인 문제를
아이들과 친분을 나눌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것이다.
부모와 자녀사이에 감정적인 긴장이 있을때에,
부모가 오히려 순화된 감정표현을 유도하여,
아이들과 더 깊은 긍정적인 좋은 감정의 관계로 발전시킬수 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화가 났을때에는
예를들어 부모에 대한 불공정하다고 혹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로 부모에게 대들때에,
그들의 감정을 인정해주어야 그들이 그들의 감정을 자유롭게발산하고,
안좋은 감정을 표현하고도 더 좋은 관계로 발전시키는
대인관계의 기술을 부모와의 관계훈련을 통해 발전시킬수 있다.
또한 그런 불편하고 억울한 감정이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상처로 남지 않을 수 있게 감정을 순화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부모는 구체적으로 아이들이 부모에 대한 억울한 감정문제를
말로서 표현하도록, 부모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아이들의 감정표현을 받아 주어야 할 것이다.
감정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방법도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아이들이 제안하는 방법을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부모는 아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로
나오기 까지 기다려 줄줄도 알아야 할것이다.
아이들의 그릇된 행위나 습관은 받아주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잘못된 감정표현은 될수 있는 한 받아 주어야 할것이다.
그것은 감정표현 자체를 억압하지 않게 하는 부모의 배려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때에 아이들이 남에게 감정이 격하지 않게
부정적인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문제제기를 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한계를 정하여 문제해결에 있어, 어떤 원칙아래에서 자신들을 표현할수 있도록, 선택의 여지를 제공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녀들과 타협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아이들에게 화가 나는 일이 있을때에,
왜 화가 났는지를 설명해주어, 스스로 아이들이 그 좋지 않은 행동을
그만두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모든 감정표현내지는 감정순화교육의 모든 해결의 실마리가
양육과정안에서 진행되도록 아이들을 인도해야 할 것이다.
감정교육에 있어서, 부모는 어떻게 아이들에게 대화 할것인가?
부모는 판단하는 말로 보다는 설명해주는 언어표현으로
아이들의 인격자체를 무시하는 "바보다, 멍청이다, 나쁜애다.게으르다"등을 써서는 안될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감정순화교육을 하는 경우가 안좋은 때는,
다른 외부인이 있을때에든지, 부모가 지쳐있거나 피곤한 경우,
부모가 즉각 감정적인 불만을 아이들에게 발산할때에는 피하는 것이 좋다.
부모가 되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닌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렇지만 부모에게 아이들을 바르게 양육할 책임이 있는 것은
부모에게 자녀들은 가장 값진 선물이며, 보화이기 때문 일것 이다.
지금 자라나는 젊은 세대는 게임(놀이)을 주로 하는세대이다.
게임을 통해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치는 세대이다.
그들은 가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그런 게임에 대한 태도에서 현실감각을 잃고,
그 게임의 세계를 통해 자기만의 영역의 세계를 만든다.
게임하는 세대는 인격대 인격의 인간적인 만남이나,
개인적 관계와 교제의 상태를 무시하며,
상호간의 기계적인 관계로만 유지한다.
게임은 이기고 지는 것이다.
게임에는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으며, 게임으로 스릴을 즐긴다.
그렇지만 일상의 생활은 게임이 아니라,
평범한 일들로 주로 이루어 졌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 대한 괴리감이 생기고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며,
시간을 내어 차분히 생각하는 상상의 세계는
점차로 게임에서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로 채워져 간다.
과거에는 어릴때의 게임은 동네에서 할수 있는 것들이다.
딱지치기, 구술치기, 혹은 동네라는 지역에서
동네아이들이 놀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래서 장차 자기들의 삶의 영역이라는 것이
고작 동네에서 농사를 짓거나, 혹은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삶을 이루어 간다.
그러나 요즘은 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소우주를 만들고,
인터넷을 통해 자기 마음대로 세계여러곳들을 돌아다니며,
혹은 상상의 세계를 가상의 세계로 만든 인터넷의 세계에서 게임을 하곤 한다.
이런 게임을 통해 점점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국제적으로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서
쉽게 세계화로 자신의 삶의 영역을 넓혀간다.
과거의 게임은 인간관계와 개인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지지만,
요즘은 기계와의 만남, 혹은 자기 공간안에서
가상공간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한다.
게임은 엔터테이트먼트의 재미를 주로 하는 동기로 한다.
게임에는 재미를 추구하고 반면에 지루함을 용인할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은 차분히 자기를 돌아볼 시간을 가지 못하게 한다.
게임은 게임하는 대상에 빠지게 하여 자신을 잊게하며,
자신의 현재의 위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한다.
게임이 주는 유익이란 무료한 시간이나
따분한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며,
게임을 통해 인간의 두뇌작용에 도움이 줄수 있으나,
오히려 두뇌의 창조적인 기능을 무력화하는데 쓰인다.
그리고 반복되는 손의 기계적인 놀림을 통해
자칫 단순한 손 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을 통해
인간발달의 조화롭지 못한 상태에 빠지지 않을 까하는 염려가 있다.
우리 주변에 게임문화가 널리 만연이 되어있다.
로또복권 당첨은 말할 것도 없이 뽑기 게임을 통해 당첨이 되며,
신규주택 청약도 추천뽑기 게임에 의해 선정이 된다.
학생들이 학교와 학과를 선택할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의 게임을 활용하여 결정한다.
그리고 사업을 하는 회사에서 신규채용하는 직원을 뽑을 때에는
경쟁률이 심할 때에도
결국 이력서사정 혹은 실력평가의 경쟁게임을 통해 사람을 뽑는다.
요즘은 애인도 인터넷에서 짝맞추기 게임을 통해 구하며,
결혼에 올인하는 것도 게임을 통해 선별하듯 무작위로 착출하여
사람들을 고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게임에서 선별하듯 사람을 찾아 골라 결혼하기 보다는
결혼과 함께 이루어지는 가정은
결코 짝맞추기게임하듯 하는 가벼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될때에 결혼과 가정생활의 실패를 가져올수 있다.
세월을 두고 함께 살아갈 반려자의 선택은
삶을 통해 경험해야 할 진지한 자기결정이나 판단에 의해 좌우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영원을 추구하는 인생도 게임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는가?
이쪽이냐 아니면 저쪽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인생의 길이 결정되는 것인가?
고로 생명을 선택하는 길과 죽음을 택하는 길을
놀이 게임에서 갈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여겨야 할일이 아닌 것같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생명을 얻는 것은
진리를 구하는 심령들이 진지한 삶의 과정안에서
그 진리를 깨닫고 발견할 수 있는 곳에 존재하고 있다.
이혼이라는 가정의 문제는
미국인들사이에서는 50년대 이후 부터
베이비부머시대의 사람들이 자라면서
그들의 부모세대가 이혼을 하기 시작하는 가정으로 나타난다.
그전까지 즉 미국은 2차세계대전을 치루기전까지
건전한 가정이라는 국가적인 축복의 자산을 갖고서
세계를 리더하는 국가로서 선진국가혹은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기독교국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 공립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의 장의 상실,
즉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여,
공립학교 교육은 악화일로로 교육을 받는 자녀들이나
교육을 하는 부모세대는 함께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혼란을 거듭하게 된다.
그 배후에는 미국의 실용주의 교육의 영향을
준 죤 듀우이같은 이들의 무신론적인 교육철학의 영향으로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것이다.
공립학교의 교육적인 도덕(기독교교육의 훌륭한 전통)성이 무너지며,
교육의 세속화는 사회적인 가치기준의 역활에서
기독교의 가치나 윤리범주를 벗어나,
그 세대에서 교육을 받은 자녀들은
전세대의 무신론적 교육철학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그 세대에서 이혼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하여
보통 가정에서 이혼이라는
가족문제의 현상이 폭넓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 철학은 현재의 미국의 개인주의적인
철학적인 풍조의 영향과
맛물려, 현재의 탈근대적인 가치(절대주의 가치기준의 상실)로
발전하여 왔다.
그런 교육적 결과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가치기준에 혼선이나타나며,
그 여파로 건전한 많은 미국인의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들을 잃게 되며,
오히려 가정의 이혼하는 현상은 보통가정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혼은 미국인 가정의 보통현상의 하나로
모든 가족관계의 표시란이나,
개인의 가정란에는
이혼을 통한 복잡한 부모와 자녀의 비정상적이고 역기능적인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포괄적인 사회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 현상은 결혼하는 가정의 반이 이혼에 이르며,
이혼하는 부모세대는 이혼하는 자녀세대로
역기능적이고 부도덕한 가정의 유산을 물려주고 있다.
이제 이혼하는 가정의 현상은 사회적인 정착단계를 거쳐
광범위하게 미국사회의 인간관계의 비윤리적인 상태로 빠뜨려,
그런 상태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건전치 못한 복잡한 구조의 가정안에서 자라난다.
이혼한 아버지가 이혼한 어머니와 사는 경우에
양쪽의 가정의 자녀들이 서로 형제간으로 연결되어
서로 얽히는 가운데에 복잡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된다.
스텝파더(의붓아버지)는 부인의 전남편의 자녀들을 돌보며,
그 자녀들은 전혀 생소한
엄마의 사람인 새로운 법적인 아버지를 두게 된다.
정상적인 부모와의 관계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과 더불어 싱글어머니나
혹은 부모가 아닌 제삼자(조부모의 슬하에서)에 의해
자라나게 된다.
자녀들과 스텝파더의 사이의 관계는 그렇지 않아도,
힘든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더 힘들고 복잡한 상황으로 이끌어 간다.
부모와 자식간에 법적인 관계안에서의 가족관계가 성립이 된다.
자연적이고 혈통적인 관계가 아니라,
법적으로 단지 하나건너 엄마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관계는 소원하기만 하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의 부모, 즉 결혼한지
보통 10년을 전후한 부부가 서로 이혼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이혼은 아이들의 상태를 아주 힘든 상태를 만든다.
그 나이에 벌써 남녀관계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배우고,
자녀들을 보호해야 할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무너지며,
고유한 가족이라는 전통적인 관계가 무너지며,
아이들은 허물어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복잡하고 힘든 사회라는 곳으로 방치되어,
아이들은 방황하면서, 반항아로 사회에 대해 울분
혹은 스트레스에 의한 불량적인 자녀로 만들어지기가 쉬워진다.
이제 미국사회에 이혼은 악순환의 고리를 갖고 있다.
부부관계가 극단적인 경우를 넘어서는 것으로
서로의 인간관계의 끝을 보았기에 이혼의 가정은
사회적인 문제의 기본단위로 자리잡아,
자녀의 문제, 혹은 사회적인 범죄의 기본적인 제공처로
역기능적인 가정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앞으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의 가치가 무너지면
건전한 방향의 사회나 국가 건설은 지장을 받기 마련이며,
그것이 또한 사회나 국가 발전에 큰 장애요인으로
전반적인 사회의 이탈문화적인
(사회발전을 역행시키는) 현상이 될 것이다.
(이글은 필자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에 의해 쓴 사견임을 밝히는 바이다.)
누가복음2:40, 49, 52
40.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 건강하게 자라셨다. 지혜가 넘치셨다.
49.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점점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아기예수는 아이예수로 건강하게 자라셨다.
메시야는 아기로 오셨다. 주님은 왜 성인으로 오시지 않을셨을 까?
예수님은 성인으로 하늘에서 지상에 임하시지 않고,
낮고 천한 자리에서부터, 인간으로서의 모든 자라나는 과정을 경험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람을 직접 경험하셨다.
인간이 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자란다고 자라는 가?
인간의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안에서라야 정상적으로 잘 자랄수 있다.
자녀들의 성장시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녀들의 성장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돌보시는 사랑안에 머물러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부모에 의해 생명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나는 아이들이
실상 그들의 자라는 과정안에서는 그들의 자람을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없이는 진정으로 건강하게 자랄수 없다.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어도 그것을 자라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려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물러 있도록 부모들이 배려를 해야 할 것이다.
자람에는 육체적인 성장도 있지만, 정신적인 성장이나, 사회적인 성장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자녀교육은 조화있게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면에서 구김살이 없이 잘 자라야 좋은 어른이 된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그의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그가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려주시고 있다.
예수님은 12살에 예루살렘에 부모들과 함께 유월절행사로 올라가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룻만에 부모들이 아이예수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찾았는데,
아이예수는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선생들과 질문을 하며, 대답을 하시며 아이예수님은 토론을 하는 중이었는데,
모두가 그의 총명함에 감탄하며
또 그의 지혜로운 대답에도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고 있었다.
보통 이스라엘의 소년이 성인식에 참여하는 나이가 13세인데,
아이예수님은 이제 앞으로 성인이 되기전에
그는 성전에서 유대교의 선생들과 함께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는줄을 왜 모르십니까?라고
부모들에게 반문을 하는 아이예수님의 대답가운데에
아이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통 청소년시기에 자아의식에 눈을 뜨게 되어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에 대한 정체감을 인지하게 되는 나이이다.
아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는 중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정체감을 갖고 있는 아이예수,
그의 총명함은 탁월하며, 모든 지혜로운 대답등은 그의 정체감에서 비롯된 자의식,
즉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런 그는 탁월한 지혜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
청소년 예수님을 생각할때에,
그의 내면에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의식,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지식은 없으며,
자신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 지혜의 지름길이다.
청소년시기에 자아에 눈을 뜨는 과정은
너무 중요한 자신에 대한 뚜렷한 자각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간파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시기에 자아의식를 찾는 작업이 잘못되게 될때에,
이후에 그의 삶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며,
모든 일에 대해 자아의식에 근거한 가치판단기준에 의해 판단하며
그 자아정체감이 앞날의 자신의 날들을 만들어간다.
아기예수가 자라는 과정과 아이예수가 자라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람은 여러단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기가 자라는 과정은 부모의 배려가 더 필요한 시기이다.
그 만큼 그시기는 인생의 어느시기보다도 더 부모의 영향력을 받아 자라게 된다.
이시기에 아기예수는 하나님의 배려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그의 자람은 온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아기예수는 무럭무럭 자라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자라는 것이란
하나님의 배려와 돌봄으로 자라는 것이다.
인생의 자람에서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배려와 돌봄은
창조주께서 만물을 붙들고 계심을 보여주며
모든 인생들을 돕는 창조주의 보존케하시는 사역하시는 모습이다.
자녀들에게 부모로서 해줄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제대로 잘자랄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대개 많은 경우에 자녀들이 부모들의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녀들에 대해 방임하는 태도로 대하게 될때에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겪게 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연적으로 있는 아이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배려하는 일이 지혜로운 일이다.
아이들이 조물주로부터 받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천성적인 지혜와 재능을 개발되어지도록 도움을 주는 일만 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무엇이 그리고 어떤 교육이 우리 아이에게 가장 적합한가?
그리고 되도록이면 그들의 상태를 존중하고, 그들의 의지를 꺽지말고,
그들의 성장발육과정에 그들의 조언자로 머물러
자녀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모습을 유지하도록 배려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자녀를 부모의 기준으로 당겨서 부모에게 맞추는 교육도 안되며,
반대로 아이들을 매사에 아이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방치하는 태도로 하는 것은
더 나쁜 교육적인 태도이다.
자녀와 부모가 적당한 거리를(부모와 자녀의 인간관계의 거리)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부모의 일관된 교육철학이 어떤 교육적인 대안보다 중요하다.
부모의 일관성인 태도는 아이들을 안정되게 건강하게 자라도록 한다.
만일 자신이 크리스찬 부모라면,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는 기도야말로
부모로서 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신성한 의무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와 배려가 아이들의 자람에서 유지도도록
부모로서 조언의 역활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임을 명심하는 일도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옳은 태도를 갖게 하는 사실이다.
결혼과 가족개념에 대한 문화적인 도전들과 그것을 극복하는 가족의 의미
포스트모던니즘의 세계관은
흔히 전통적인 근대의 인간세상에서 받아들이는 상식적인 가치관이나
절대적인 가치나 절대선에 대한 관점을 상실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결혼하기전까지 결혼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순결을 지켜, 결혼에 올인한다면,
행복하고 건강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같은 것이다.
포스트모던니즘은 또한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파편화된 세계관으로서,
개개인을 고독하고 소외된 채 방황하며 살도록 한다.
지금 결혼에 대한 서구화의 관점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이혼하는 등식으로 널리 퍼져있는 영향등이
인기연예인들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는 결혼에 대한 신성한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던니즘적인 세계관은
타인이나 외부인에 대해 예민한 문화적인 단절의식을 느끼게 한다.
예를들어 같은 문화권안에서도 남자와 여자사이에 결혼을 하는데,
그들의 관계는 마치, 서로 다른 인종이나 그의 영향권에 사는 사람들처럼
(아시아들이 백인들과 만나 사는 사람들처럼 같은 문화권의 부부가
서로를 잘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하는 경우)
서로가 전혀 이질적인 상대로 만나지고 이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말은 사회가 그 만큼 복잡하고 단절되어 가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포스트모던니즘적인 접근은 지금까지 결혼과 가족을 지탱하고
이해하였던 전통적인 가치의 변형을 초래하며,
기존의 상식적인 결혼관습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포스트모던니즘적인 관점안에서 가족에 대한 개념은
혈연중심이나 상호관련성의 전통적인 가치보다는
개인주의의 편리함(개인의 확장된 소외의식안에 있음)에 맞추어,
결혼과 가족에 대한 개념들을 가족통합보다는 가족해체의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그런 형태의 가족개념은 절대적가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지며,
절대기준에 대한 준수이완을 조장하는 그런 문화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결혼과 가정안에서 서로의 인간관계를 묶어주는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하며,
가족관계의 이완된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한다.
고로 그런 관점들은 근래에 결혼의 응집력의 문제나
가족개념의 보호해주는 전통(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부부유별이나 부창부수
혹은 장유유서같은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한 가치의 이탈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그 문화적인 접근안에서 자유로운 성문화와 성의 개방성을 촉진하여,
가족의 신성함과 통합성을 해체하며,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변질시킨다.
가족의 구성원간에 이완된 관계와 더 복잡하고
소외되어가는 사회적인 영향의 소통의 문제안으로 유도한다.
탈근대적인 가치관의 범람으로 인하여,
결혼과 가족의 신성시하는 것이 무너지며,
이탈적인 가정의 형태가 가족자체의 존재와 존립를 위협하고 있다.
가족의 개념에 영향을 주고 있는 근래의 사회문화적인 영향은
남자와 여자의 단일 가족으로서의 전통적인 형태에 대한 다양한 의미의 변형을 가져왔다.
여성의 지위향상이나, 여성들의 직업참여로 인하여,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가사의 일만을 하는데서, 사회의 진출이 활발해졌다.
그래서 여성들위주의 싱글가족의 가족개념
(많은 수의 여성들이 결혼을 자신들의 인생의 과정에서 여러개 중에 하나의 선택으로,
아니면 결혼이라는 것 자체를 외면하는 경향)이나,
결혼 대상자의 확대로 기존의 동족간의 결혼에서 국제결혼이 성행하는 풍조도 생겨났다.
작금의 문란한 성문화나 정상에서 변형되어가는 성윤리는
동성애라는 세계적인 현상의 영향에서 우리도 예외없음을 보여준다.
동성애적인 가족개념의 변형은
성의 정상적인 역할을 변질케하는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런 문화적인 성향안에서의
다양한 삶의 조건들안에 있는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경향은
가족의 구성이나, 가치나 의미에 많은 변화와 영향을 주었지만,
그러나 서로 다른 남남의 두사람이 만나 시작하는 가족은
혈연중심의 공동체로
그리고 사회의 냉정한 이기적인 만남이나 관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하는 사회의 기본단위로 존재한다.
가족은 무엇을 위하는가?
가족은 사람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
가족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종족과 가치를 보존하고 계승하며,
자신의 존재를 보호받는다.
가족은 혈연공동체로 부부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를 위해 존재한다.
사람은 가족안에서 자신의 삶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여 간다.
가족은 사람자신을 위하여 사람을 태어나게하며,
자라게 하며, 성장시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만들어 내는 역활을 한다.
가족은 인간자기표현과 자기성취를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통해 자신의 성장과 자기실현의 과정으로
가족안에서의 삶이 대부분 인간의 생활이 주어진다.
가족안에서 사람들은 태어나고 자라고, 성숙한 성인으로 자라서,
나중에 그 자신이 가족을 이끄는 단계에 이르며,
가족안에서 인간존재의 안정과 실현을 추구하는 피난의 공동체이다.
가족은 부부자신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부부자신들의 사랑과 자기실현의 장으로 가족은 존재한다.
부부는 남편이 아내를 로맨틱한 사랑으로 성적인 사랑을 사랑하며,
대등한 인간관계로서, 아내를 대하며,
또한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이끌어가며,
자녀들을 교훈을 가르치고 가족의 모든 일에 대해서 책임을 다한다.
아내는 가정의 화목의 중심에서 가정의 사랑스런 분위기를 위해 사랑으로 헌신한다.
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키우는 일을 한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돕는 베필로서,
매사에 남편과 협조하여 가족의 대소사를 함께 감당해 간다.
가족은 자녀들을 위해 존재한다.
가족은 하나님의 축복과 명령으로 인하여
자녀생산과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을 위해 존재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돌봄으로 일정기간
그들이 성인이 되기까지 가정의 보호와 양육의 테두리안에서 성장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물질적인 공급과 정신적인 안정을 주며,
자녀들이 한 개인의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역활을 한다.
가족은 인간문화와 문명의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존재한다.
가족을 통해 인류는 문화의 발전과 문명의 발달을 이루어냈다.
가족은 사회의 가장 작은 기초단위이지만,
가족안에서 모든 인류문명과 문화의 시작이 되었다고 할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그 가족안에서 농사를 짓는 기술을 만들어 내며,
농경사회의 기술을 주도하였으며,
산업사회에서는 가족개념의 변천의 소용돌이와
복잡한 사회안에서의 소외된 개인들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 갈등하는 개인들을 포용하는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서,
건강한 사회의 건전한 기반을 이루어가는 역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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