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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3/14
    결혼과 가족개념에 대한 사회적인 영향들
    목동
  2. 2007/03/13
    가족에 대한 개념들
    목동
  3. 2007/03/05
    결혼 잔치에서 일어난 일
    목동
  4. 2007/01/22
    청소년의 건전한 자아상
    목동
  5. 2007/01/07
    가족의 여행이야기
    목동
  6. 2006/12/21
    최초의 가정이야기
    목동
  7. 2006/12/19
    미련한 신부이야기
    목동
  8. 2006/11/28
    역전의 인생
    목동
  9. 2006/11/12
    결혼과 결혼생활이란?
    목동

결혼과 가족개념에 대한 사회적인 영향들

가족이라는 연합체를 약화시키는 사회적인 요소들은
사회전반의 팽배해있는 개인주의나 자본주의적인 영향등을 통해 나타난다.
결혼에 대해 공격하는 두가지 형태는
경제적인 문제의 접근이해와 사회적인 분위기의 성의 자유로운 역활과
비정상적인 성모랄에 대한 이해가 주류를 이룬다.

개인주의는 인간관계의 우선보다는 자기개인의 권익을 따르다 보니
결혼에 임하는 개인개인이 가족이라는 공동체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개인의 판단이나, 의견에 의해 가족의 관계에 영향을 주어,
가족관계가 통합적인 흐름보다는 느슨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성의 개방이 결혼안에서 유지되어야 하는 성의 오용이나 남용을 불러 일으켜,
결혼의 관계를 위협한다.
혼전정사나, 결혼관계외서 행해지는 성적인 결합처럼
성이 단지 인간의 유희로서만 여겨질때에,
정상적인 성의 역활에 혼란을 초래하며,
결혼의 관계를 위협하는 성적인 남용을 이끌어낸다.

결혼은 계약이 아니라, 서로의 조건에 의한 합의라고 여기는 것이
결혼의 응집력을 약화시킨다.
이런 결혼의 조건의 분위기에서
결혼은 경제적인 조건등 외부적인 요인에 근거한 합의로 이루어져,
결혼의 신성함을 약화시키는 역활을 한다.
즉 결혼의 개념이 결혼당사자의 본인보다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의 조건이나,
환경적인 요인을 더 생각하는 경향은
또한 결혼의 관계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족관계를 강화하는 경우는
가족의 부양의 수가 과거보다 많아서,
부모가 자녀들에 대한 부양의 책임을 감당하기가 용이해졌다.
과거에는 자녀들의 수가 많아서 자녀양육을 소홀히 할수 도 있었으나,
이제는 자녀의 수가 제한이 되어
부모가 그만큼 책임있는 부양을 할수 있게 되었다.

가족관계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또한 결혼연령이 과거보다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결혼에 대해 과거보다는 신중하게 하여, 조기이혼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결혼적령기의 정신연령이 높아져,
그만큼 결혼이 이혼으로 발전할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
조기결혼은 그만큼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은
아직도 육체적인 연령이 되었어도,
정신적인 연령이나 사회적인 연령은
결혼과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가족이라는 배를
항해해가는 바다와 같은 세상이 너무 험악하니,
결혼에 올인하는 결혼연령의 늦추어 지는 것은
결혼과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를 헤치는 데서 보호받을 수 있다.

끝으로 복잡한 사회적인 현상안에서
가족이라는 단위는 인간을 안정과 자기성취를 돕는 기관으로 기여한다.
복잡한 사회구조안에서 인간은 안정과 보호를 갈구한다.
그것의 요구들은 가족이라는 테두리안에서 채울수 있다.
가족관계를 통해 범람하는 사회적인 현상인 개인주의에 맞서서
개인의 안정과 가족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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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한 개념들

가족이란 가장 가까운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관계의 기초 인간공동체라 할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부부를 이루어 가정은 시작된다.
가족은 혈통과 가문을 통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와 교제를 나누는 모임이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가족안에서
인간은 서로 돕는 가운데에 존재하며 살아야 할
기본적인 이기주위보다는 이타적인 사람공동체이다.

그 가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함께 살아가야 할 모임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안에서 태어나 가족의 일원으로 살다가
가족의 보살핌아래에서 죽어간다.
사람은 가족이라는 테두리안에서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은 핏줄을 나눈 혈족이며, 전통적인 가문에서 나오는 연합체이다.

가족은 한 울타리라는 인간의 피와 정을 나눈 집단이다.
이익단체나 다른 인간공동체와는 다른 가족고유의 공동체의 특질이 있다.
인간의 생명은 부모로부터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관계를 맺는 기본적인 경험을 하는 장소이며,
인간상호성을 서로 돕고 유지하는 인간성을 바탕을 둔 모임이다.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인간의 생활문제를 함께 해결하며, 함께 경험하는 곳이다.

성경에서 가족은 하나님의 축복과 창조의 명령으로 인하여 시작된 공동체로,
그는 남자와 여자를 한가정을 이루게 인도하신다.
가족은 신의 명령을 실천하는 곳임과 동시에 가문의 혈통으로 이어가는 체계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 삼사대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12자녀들의 가족이야기를 통해,
가족은 자손의 번영과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과
약속의 실현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이다.

구약에서는 가족은 혈연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대가족위주의 가족개념과
소가족개념의 가족이 공존하면서,
가족은 사회의 구성단위로 문화를 계승하며 전달하는 역활을 하였다.
그리고 사회의 한 부분에서는 일부다처제나,
첩을 인정하는 다양한 부부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혼의 발생이나
가족의 이탈에 대해, 법으로 규정을 하기도 하였다.

신약에서는 가족은 좀더 단일위주의 일부일처제의 가족으로 발전하며,
영적인 의미로의 가족은 하나님앞에서,
신성한 공동체로 이혼을 불가하는 가족의 개념을 성립하였다.
예수님은 가족의 일부일처의 신성한 의미로서의 가족의 정의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신약교회는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일부 일처의 부부개념으로서의 가족개념으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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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잔치에서 일어난 일

요한복음 2:1-12
1. 이틀후에 갈릴리 가나에 결혼식이 있었다. 예수님의 어머님이 거기 계시고
2.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아 갔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이집에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하자
5.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러 주었다.
6. 거기에는 유대인의 정결 의식에 사용되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각각 물 두세통 드는 크기였다
7.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워라” 하시자 그들은 아구까지 물을 가득 채웠다.
8. 그리고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이제 떠다가 잔치 책임자에게 갖다 주어라” 하시자
하인들은 그대로 하였다.
9. 잔치 책임자는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몰랐으나
그것을 떠 온 하인들은 알고 있었다. 잔치 책임자는 신랑을 불러
10. “흔히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당신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군요” 하였다.
11. 예수님이 갈길리 가나에서 처음으로 이런 기적을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12. 그 후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서 며칠 동안 머무셨다.

예수님이 결혼식에 참석하여 거기에서 기적을 베풀어
자신의 가까운 제자들에게 자신이 진정한 메시야이며,
자신이 인간들을 고치는 분으로 오신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신랑신부이야기는 주님과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같다.
성경에는 종종, 하늘나라의 진리를 결혼이야기로 여러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구주 예수님과 그 구세주를 믿는 이들이 신랑과 신부로 함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즉 장차 천국에서 일어날 일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예수님은 손님으로 참석하셨다.
마리아도 하객으로 참석하고, 몇 제자들도 거기에 참석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가나는 갈릴리지역에 있는 곳으로 예수님의 전도활동에 주무대가 되는 곳의 한 마을이다.
가정을 떠나 공생애를 사는 예수님이,
그의 모친과 함께 결혼잔치에 참여하고 있다.

결혼식이나 특별한 예식에 초청받는 일은 정중하게 진행된다.
불청객이라는 말이 있는데, 초청받지 않는 손님이다.
잔치에 가서 별로 흥미가 없고 자신이 없어도 될 자리이면,
구지 그 곳에 있는 곳이 불안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 자신을 불청객으로 여기는 것이다.
(혹여, 교회나 성당에 갔을때에, 이런 느낌을 받는 경험이 있는 지,
그런 경험이 지속되는 것은 자신을 신앙의 무관심에 방치하는 것이다.)

주님은 정중히 인생의 삶의 자리에 노크를 하시는 분이다.
주님은 이세상에 원리를 세우고 그 원리를 따라
세상을 창조하며 다스리며,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인생의 불청객이며, 불법을 행하는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귀신으로 인하여
인생이 힘들고 고달파진다.
그리고 인생들이 범죄하여, 자신들의 삶의 환경이 어두워 지니,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 그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영향하에 살게 된 것이다.

결혼식에 포도주가 하객들에게 흥을 돋우는 것은
중동지역에, 음료수처럼 이용하는 것으로 잔치에 포도주를 내어놓고,
포도주로써 잔치의 규모와 질을 평가할 정도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포도주는 물을 구하기 싶지않는 사막지역에 살고 있는
중동사람들의 일상의 필수품이며, 음식문화이다.

이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그 잔치집에 실물경제가 문제가 된 것이다.
인생의 삶의 많은 문제는 이렇듯 경제문제에서 오는 것이 많다.

경제의 문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붙들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해결을 받을 수 있다.
그분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인생들의 모든 문제에 대해 판단하시고 관여하시고. 그리고 해결하신다.

때로는 어느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삶의 일방적인 메시지로 거부감을 일으킬수 있다.
자신과 무슨상관이 있나?
그 인생자신이 주님에 대해 이질감이나 생소함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해소하는 길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럴 경우, 인간의 근본문제(죄와 죽음의 문제)에 접근하여, 생각하며,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주님이 어느 인생의 삶의 현장에
손님으로 와 있는 주님자신이 그 잔치에 관여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때에,
비로소 주예수님은 그 인생들의 주인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신의 인생안에 손님으로 예수이 주님으로 바꾸어지는 날,
자신은 메시야를 통해 구원받는 날이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인생의 난제들이나
문제들에 휩싸인 삶의 문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잔치의 흥이 깨어질 낭패스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잔치의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가 모자란 것이다.
인생은 공급과 수요의 온전한 가운데에서 넉넉하게 주어진 만물이지만,
인간의 허물은 만물이나 자신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신앙은 무조건적인 순응이나 의존이 필요하다.
이해하고 믿으려는 이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하려는 것과 같은이치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기에는 인간의 두뇌의 인식의 그릇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듯,
하나님에게 인간들이 할수 있는 일은 그분을 시인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신뢰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되려다가, 결국 인생들은 모두가 죄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신뢰의 관계가 깨어졌다.

그러므로 진리를 구하고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를 받아들일때에,
인간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인간자신을 위한 인간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부모의 더 강한 영향이나 짙은 돌봄을 받는다.
그 말은 친밀함은 신뢰에서 비롯되며,
친밀함은 서로 가까운 의존적인 관계와 교제가 이루어 진다.

신앙은 이해하지 못하나, 친밀하게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른이 이성을 사용하나, 그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다 알수 없는고로,
차라리 어린아이로 돌아가, 순수하게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이 필요하다.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올수 없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이
어린아이의 부모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그 수용성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나님을 수용하고, 순종하고, 신앙하는 것으로 바꾸어져야
제대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단계에 접어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그분에게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려고 할때에 그분을 알게 된다.

물을 통해 자신을 씻는 예식,
물을 통해 손발을 씻게하는 것은
중동지역에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대하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손님접대이다.
그리고 당시에 그들의 종교적인 생활에서,
중요한 결례의식에 필요한 물이다.
(이런 의식은 구주 예수님의 사역이 있기전에는 필요했지만
그분이 인간구원을 위해 이루신 십자가사역은
모든 인간적인 종교적인 전통이나 가르침을 넘어가
구원에 이르는 계기를 만들어 내셨다)

종교생활에 늘 자신의 손이나 씻으며,
종교의 의식이나,겉핣기에 머물러 있는 수준에 있다면
그 단계에서 종교가 가져다 주는 유익을 친히 맛보는 수준으로 옮아가야 한다.

이 씻는 물이 맛보고 마실수 있는 포도주로 바꾸어진 것처럼,
종교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이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겉치레로 종교적인 행위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히 그분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분을 알아가며,
교제하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진리를 경험하는 것은, 신앙을 경험하는 것,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종교행사에서 서로 인사나 하고, 자신의 손발이나 씻는 겉치레에서
속으로 경험하는 친히 맛보는 단계까지 가야 할 것이다.
주님은 인생들에게 주어진 영생은 경험하여 아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순종으로 표현되어진다.
주님이 명하시니 하인들이 따라 순종하여, 물을 아구까지 가득 채웠다.
물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기본도리는 다 해야 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 인간구원을 위해 베푸신 구원의 은총과 축복은
인간의 응답과 반응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지는 거이다.
물을 아구까지 채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앙생활도 신앙심이 있고, 다른 종교에서 종교생활하던 사람들이 잘한다.
종교에의 귀이하여, 사람의 도리와 인생의 이치에 대해
가르쳐주는 종교적인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사람들을 구원하지는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종교의 약점이다.
그렇지만 그 종교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을 전해주고 있다.

손을 씻는 물이 사람들의 목을 채우는 음식용으로 용도변경이 이루어졌다.
물을 항아리 아구까지 사람들이 채울수 있으나, 그물을 포도주로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창조하신 이인 창조주만이 사람들 고칠수 있으며,
변화시켜 새사람으로 만들어 쓸모있는 인생, 구원받은 사람들로 만들어 내신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삶을 떠다가
우리네 인생들을 별난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주소로 재파송하신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물을 떠다 잔치책임자에게 갖다주는 일을 통해,
주님안에서 변화받은 사람들은 세상사람들로 부터 인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안에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구주를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내는 일은
인생의 숭고한 일중에 하나이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통해, 자신에 대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다지는 것이다.

사람은 필요하여 이세상에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모든 인생은 우연히 지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그것은 신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인간의 영광과 축복을 받는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하나님의 요구)
의해 생겼으며,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결례에 쓰는 물이 포도주로 바꾸어지는 것은
인생들이 도전받아야 할 메시지로, 인생들은 자신들이 변화받는 것을
주저해서도 안되며, 망설여서도 안된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수 없다.
그것은 우리 몸의 세포도 일주일마다,
그리고 7 년주기로 탈바꿈을 하여 우리의 몸이 지탱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경향은 먼저 좋은 것을 취하려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고로 인간들은 세상에서 소비하는 인생으로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은 소비하고, 하나님은 생산하시는 분이다.

만물을 인간들을 위해 조성하셨다.
만물들을 통해 인간들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래, 인간들을 좋은 인생들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인간의 오만과 허물로 자신의 좋은 것들을 상실하고, 좋은 면들이 변질되어 버렸다.
다시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인생이 바꾸어지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도 만나고 사귀어 갈수록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오래된 친구가 좋은 친구이며, 산전수전다 겪어
그의 여러가지면을 알고 있으니, 이제야 서로 통하는 사이가 아닌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도 그렇다.
평생동안을 섬기고 살아왔던
기독교 교회의 초기역사에 살았던 폴리갑은
자신의 말년에 한번도 자신에 대해
섭섭하게 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구주에 대한 신앙을 위해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

하나님의 경향은 먼저보다낫게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으시다.
훈련을 시키고 사람을 만들어 그 사람에 맞는 직책과 사명을 주신다.
사람을 점점 좋게 만들어 가신다.

이기적이야기는 제자들에게 인상적이었으며,
자신들의 스승이자.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결혼잔치에서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의 구세주역활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맛없는 인생들을 맛나는 인생으로 바꿀어 줄 메시야이다.
살맛이 없고, 맛이 없는 인생살이를
맛있는 인생의 삶으로 바꾸어주는 구주의 사역을 보여준다.

앞으로 전개되어지는 주 예수님과의 공적인 사역에 제자들은
메시야이신 구주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하실 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함께 사역을 이루어 갔다.

이 기적이야기는 하나님에게 찾아오는 인생들에 대해
감격적인 변화와 자기갱신과
인생변화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우리 자신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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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건전한 자아상

사람이 사는 곳에 항상 합리적이지 않고,
서로 상반대 모순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잘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사는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있는 가하면, 선한 사람도 있다.

사회발전에 대한 철학적 개념에 정반합의 원칙이 있듯이,
자신이 겪는 인간관계나 인생의 삶의 과정에도
정으로 나가는 길이 있는 가하면,
반대로 나가는 방향성이 있고,
나중에 서로 조화되어, 새로운 합을 이루어 가는 원리가 있다.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합리적이고,
모순이 없는 사회에서 살지 않게되는 것이 보통 삶의 현실이다.
오히려, 현실은 상호모순된 구조안에서 살때가 많이 있다.
착한 며느리가 못된 시어머니와 산다든지,
악한 며느리가 착한 시어머니를 괴롭히며 사는 경우이라든지 말이다.
착한 사람이 악한 환경안에서 살게 된다든지,
못난 인생이 좋은 환경안에서 지내기도 한다.

그런 불합리와 모순이 주변에 있을때에,
상대적으로 약한 자아상이나 흔들리기 쉬운 인생관을 갖고 있으면,
자기자신에 대해 무너지기 쉽고, 가치관을 잃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자신을 건강하게 세우는 자아상을 정립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릴때에
자기를 세울수 없기 때문에 타의에 의해 자신의 많은 부분이 조성이 된다.
특히 내면의 사고시스템이나 감정시스템의 상당부분은
부모나 가까운 친척이나 형제들 즉 타의에 의해 형성되어지게 된다.

특히 인간은 부모와의 관계안에서, 자신의 자아에 대한 간섭으로 인한 영향을 받아,
자신안에 자신을 조정하는 초자아가 형성되며,
자기자신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갖기전에 부모로부터 좋지않은 영향으로 인하여,
자기혼란과 자기모순을 경험하며,
청소년기에 이르러 자신이 세운 자아상을 세우는데에 많은 도전을 받게 된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영구니를 갖기전에 가졌던 즉 어린아이때 가졌던
어린치아들을 갈아치우는 것처럼,
자신의 자아의식을 깨달아, 부모으로부터 독립적인 객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올바른 자신의 판단과, 바른 가치이해에 따라
자기만의 건전한 세계관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건강하게 자기 자아상이나 가치관을 세우게 되면,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면서 겪는 무수한 삶의 도전이나 위기에 대해 잘 대처하며,
삶의 모든 문제를 극복하는 데 흔들리지 않는 자기 철학이되며,
귀중한 자기 처세술에 기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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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여행이야기

캘리포니나주의 로스엔젤레스시로 향하는 목적지를 향해,
켄터키 주 루이빌시에서 출발하여, 버스로 이틀을 가는 장거리 여행을 나섰다.
연말연시로 사람들의이동이 많아져, 버스는 만원이었으며,
새해를 맞이하여, 사람들이 가족들을 만나거나
혹은 자신의 새로운 직업이나, 일들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나서게 된다.

만원인 고속버스안에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흑인여인들이 있고,
홀로 여행하는 백인남성들이 있으며, 여러 무리를 지어가는 흑인 남성들이 보이며,
여러인종의 히스패닉 남성과 여성들이 보이며,
신병훈련을 마치고 휴가를 즐기는 군인들과,
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이용하여 고향 자기집을 방문하려는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져,
버스를 탈때마다 버스은 늘 자리가 사람들로 꽉차 있었다.

몇해전에 시카고에 갈일이 있어, 그레이 하운드 고속버스로 타고 내려 온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행이 편안하게 9시간이 걸렸지만, 자동차로 6시간을 가는 거리이지만,
중간에 정차하여 쉬는 시간을 포함하였다.
그런 버스여행경험이 장거리로 고속버스를 타는 일을 시도하게 하였다.

승객들중에 어느 흑인 부부가 있는데 조금 이상하게 생겨, 자세히 보니,
두여성이 한여성은 여성이며, 한 남장을 한 여성이 둘이서 함께 부부처럼 행새하며 타고 있다.
어느 히스패닉여성은 아이를 데리고 장난을 하며 몇시간을 타고 간다.
집사람 옆에, 한 흑인 여성이 탔는데,
그 여인과 나누는 대화가운데에 자신은
어느 유명한 여성 설교가 세운 선교단체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집사람은 대화중에 좋은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만난 사람들중에는 우리가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시에 살때에 가까운 곳에
한인 목회자가 담임목회자이며, 부교역자들이 몇명의 백인인 국제적인 교회에 다닌 적이 있는 데,
당시 그 교회는 생긴지 얼마되지 젊은 교회지만,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교회는 활력있게 부흥하며, 예배나 모임이 상당히 활발하였다.
몇해전에 그 교회에 참석하였던 한 백인 노인여성을 같은 버스에서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우리가족같이 남편과 부인,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 여행을 가는 경우를
자주 보지를 못했다. 많은 경우에 홀로 가거나,아니면, 부인과 아이들이 함께 가는 경우였다.
그것은 아마 가족여행이 자동차로 가거나 아니면 좀더 편한 여행기관인 비행기나 기차로 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리고 텍사스주에 이를렀을 때에(아마 멕시코와 국경접경지역인 것같았다)
학생신분인 우리 부부는 국경검문에서(국내여행을 하기때문에
우리는 여권과 비자를 집에다 놔두고 갔기에, 단지 운전면허증과 학생증만 있었음)
검문을 받고, 20분동안 내려서, 신원조회를 검사받았는데,
친절한 상관이 우리에게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무사히 지나오게 되었다.

왕복약 4일간의 장거리 여행길을 버스안에서 이틀밤을 지내며 갔다.
두아들들이 힘들게 생각이 들줄알았는데, 장시간을 버스로 가는데 별로 힘들어 하지 않아,
오랫만에 하는 여행을 즐기고 있다.
게임기를 가지고 게임을 하거나 혹은 둘이서 장난을 치며,
혹은 잠을 자기도 하면서 그리고 책을 보기도하면서 긴 시간의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하였다.

이 여행길에, 루이빌시에서 로스엔젤레스시로 가는 길은 이틀과 4시간이 걸렸으며,
돌아 오는 길에는 이틀과 5시간정도 걸렸다.
그동안 우리가 만난 버스기사만 12명정도이었다.
그들은 자기가 정해진 코스에서 시작하여 자기에게 할당된 지역까지 운행하고는
다시 새로운 기사가 다음 운행시간을 릴레이식으로 이어갔다.
백인기사, 흑인기사, 히스패닉기사,
그리고 흑인 여기사등 다양한 기사들이 자신들의 운행시간을 채워 나갔다.
어느기사는 8시간을, 어느 여흑인 기사는 4시간을 운행하기도 한다.

어느 히스패닉기사는 이중언어로 안내방송을 한다. 그는 유창하게 이중언어로 안내방송을 한다.
버스내에서 담배를 피울수 없다든지, 마약이나,
혹은 타인에게 피해되는 행동을 삼가할 것을 안내한다.
그리고 음악을 듣는 일이 타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며,
핸드폰을 사용할시에 작게 말하며 사용할 것을 주의를 준다.

버스가 운행되는중에 2시간이 혹은 3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주를 거쳐 몇몇 도시에 정차한다, 그때마다 대합실에서 대기하며 버스를 기다리곤하였다.
몇번인가는 버스에서 승객들이 모두 내려, 버스안을 청소하는 시간도 있다.
버스기사는 승객들이 버스에 다시 탈때에 리보딩 티켓을 나누어 주어, 버스를 타게 한다.

주로 우리는 버스터미날에서 기다리며, 책을 읽기도 하였다.
김밥을 만든 것을 먹기도하다가, 맥도날드음식을 사먹기도 하며, 지냈다.
대합실에는 많은 흑인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많은 히스패닉사람들과 가난한 백인들이 모여있다.
가끔 아시안들도 보인다. 그리고 아랍사람들이나, 모슬렘사람들도 보인다.

켄터키주를 지나,인디아나주로, 캘리포니아주까지 밤에도 달리고 낮에도 열심히 달린다.
겨울날씨에 어느 주에는 따뜻한가 하면 어느 주에는 눈이 내리고 있으며,
어느 주에는 긴 황무지가 펼쳐져있어 아직도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들이 널려 있다.

그레이하운드 버스여행은 미국인들중에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주로 이용한다.
그들은 이버스로 전국에 어디나 손쉽게 여행을 하며,
친척집을 방문하거나, 여러도시로 직업을 구하며 떠나는 이들,
일용직장을 찾아 나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생들이 학기가 바뀔때마다, 고향이나 집을 방문하러 가며,
군인들은 훈련을 마치고 집을 방문하기 위해 가는 경우등,
여러가지 사유로 넓은 미국의 각지를 고속버스로 여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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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가정이야기

창세기 1:26-28
하나님의 창조의 특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음,
하나님과 관계의 독특성을 의미,
창조하시고, 말씀하시고, 축복하시며, 다스리게, 정복하게 하셨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인간의 창조의 의미는 남녀의 지음이다.
창2:15-25
하나님께서 남자를 택하사, 에덴동산에 살게 하심,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자유로이 먹되,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의 지식의 열매를 먹지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죽으리라.
하나님께서 남자의 홀로사는 것이 좋지 않으니,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심,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뼈와 살의 관계를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창3:1-7
뱀이 간교하여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더냐?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먹어도 죽지아니하리라, 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리라,
여자가 먹음직한 좋은 것으로 여겨, 눈을 즐겁게하여,
자신을 지혜롭게 할 나무로 생각하였다.
그녀는 그열매를 취하여 먹고, 자신의 남편에게도 주어 그 남편도 먹으니,
둘이 자신들의 몸이 벗은 몸인줄알아, 무화과나누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다.

(최초의 가정이야기)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을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은 하나님과 연결된 자신의 존재임을 알게하는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와서, 신의 생김새를 닮아,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통치아래에서, 사람으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자신의 삶의 목적이다.
인생들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자신의 인생의 관리자로 살뿐 아니라,
자신의 주변의 세계에 까지 돌보는 책임을 받은 자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의 만남이나, 가정이룸은 창조사역중의 중요한 사역으로 사람은 결혼을 통해,
자신이 속한 한 가정을 이루며, 그 가정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따라,
이세상에 대해, 정복하고 다스리는 통치의 역활등을 맡게 된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온 창조의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시사하는바가 크다.
그는 신을 향해 신과의 관계를 설정하며, 신과의 교류안에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가정에서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 관계가 시작할때에,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여자를 통해 자신의 몸의 한부분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여인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한다.
여인들은 자신의 남편을 통해 자신의 삶의 울타리를 세우고,
자신의 안전이 거처하는 곳으로 여겨,
그곳에 안주하며, 만족히 살려는 생각에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품는 사람을 찾게 된다.

가정은 신비스러운 기관이다.
그것은 전혀 성이 다른 남성과 여성이 함께 한지붕밑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때문에,
서로가 질적으로나, 성적으로 아주 다른 사이인데도,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
남편은 여자의 남자편에 있는 여자를 지키는 자이며,
여자는 남자의 안에 있는 남자의 허전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안사람으로 존립한다.

그러므로 서로 안과 밖이 함께 어우려져 둘이 한 몸을 이루어 가는
결혼생활이 신비로울수 밖에 없다.
남들이 볼수 없고, 알수 없는 둘만의 은밀한 세계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자신들이 한몸을 만들어 가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한 몸을 이루어 가는 명제는
평생을 한 지붕아래에 있는 가정에서 이루어 가는 삶이다.

작금의 가정은 너무 쉽게 이가정의 신비로운 면들을 깨뜨리려 하는 현상들이 있지만,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는 남녀의 가정, 결혼 생활은
서로를 서로에게 맞추어 가는 묘한 생활의 연장의 선상에 놓여 있다.
결혼생활을 통해 사람은 다른데서 배울수 없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인생의 깊은 만남과 지속되어가는 인간관계형성과
그로인한 자신의 성품이나, 자질의 개발이 이루어 지게 된다.

물론 부정적인 면으로 부족한 남편과 부족한 아내가
서로의 부족과 허물때문에 서로가 성격이 부딪치고,
상처를 입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자신들은 서로를 통해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간다.

가정은 최초의 이세상에 신으로부터 오는 축복의 기관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정을 통해 인생의 분복을 누린다.
인간의 복의 기관인 최초의 가정의 출발은
하나님의 축복을 통해 주어진 남녀 자신들의 사명의 명령안에서
신랑과 신부가 함께 한 공동체의 운명을 따라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정을 이룬 사람들에게 생육하라 하셨다.
자녀를 생산하는 복을 주시며, 자녀의 출생을 통해
다음세대에 내려가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라는 것이다.
땅에 있는 만물에 대해 관리자로 임명받은 인간들은
가정이나 결혼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들을 넓혀 가는 것이다.
직장을 통해, 인간관계를 통해, 사회생활안에 자신의 삶의 터전을 확장해 가라는 것이다.

땅을 정복하라함은 가정을통해,
외로움과 미움과 두려움이 있는 세상의 어두움을 정복하여,
사람들을 품어주는 좋은 인간관계형성과 사랑과 자신감의 사람들이
가정안에서 많이 나와
이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세상의 비참한 부분들을 향해, 소망과 빛남과 밝음과 맑음으로 나가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의 절망을 소망으로, 주변 사람들의 성격의 어두움을 빛으로,
주변 사람들의 성품의 흐릿함을 밝음으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의 흐림을 맑음으로 바꾸어가는 역활을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결혼생활, 가정생활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검은 머리가 흰머리(파뿌리)가 될 때까지,
생활에서 오는 고민과 고생과, 그리고 고통스런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지만,
변함없이 남자는 밖에서, 여자는 안에서 가정의 테두리를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뜻밖의 일로 격정을 겪으며,
서로에 대해 불신과 상처을 입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재정관계로, 혹은 자녀문제로, 아니면, 자녀교육문제로,
사소한 습관의 차이로, 혹은 몰이해나,
잘못된 의사소통의 문제로 여러가지 일들이 부부사이에 가정안에서 일어난다.

행복한 가정에 불의의 불청객인 뱀이 나타나 여인을 유혹한다.
그 가정에 신이 명령으로 내린 제한에 도전하는, 유혹받지 말았어야,
뱀의 유혹을 받아, 뱀이 충동하는대로,
그 열매를 바라보니, 보기도 아름답게 보이고,
자신을 지혜롭게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먹지 말아야 할 금단의 열매를 보고,
여인은 그것을 따 먹고 그녀의 남편까지 그 열매를 먹어버렸다.
인간의 죄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명령을 어기고, 인간의 제한을 넘어섰을때에,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부조화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자신들이 벌거벗은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모습은 사람이 자신안에서 자신에 대한 불안을 보며,
바로 가까운 부부사이에서 서로의 소외와 비난를 경험하며,
가정이 딛고 삶의 터전이 황량하게 변해가는 것을 경험하며,
평생 삶을 사는 과정이 땀과 고뇌가 섞인 생활을 살아야 하는 것을 감수해야한다).

지난 날에 그들은 신의 통치하에서 순종하며 살때에는,
그 부부 자신들의 가정생활이 행복하며, 즐거운 나날이었으나,
그 행복한 가정에 먹구름이 덮히게 되어,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행복한 가정에 여러가지 불미한 일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부부사이의 순정을 깨는 결혼밖의 간음이나,
혹은 부부간의 부정한 행실로 인한 갈등과
그것의 결과인 별거, 그리고 이혼으로 발전하는 경우이다.

가정을 파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인간의 죄와 연결이 되어있다.
남편의 부정이나 혹은 간음, 부인의 간음이나 혹은 부정
이런 것은 부부간의 정상적인 관계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가정을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작금에 메스콤을 타는 유행어중에,
혼외정사, 혹은 프리섹스 혹은 스와핑부부게임이니,
하는 비정상적인 위험한 부부간의 관계모임이 있다는 뉴스를 접하며,
타락한 사회의 도덕불감증에서 오는
아주 더러운 사람들의 악한 행태들이 주변에 있다.

섹스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소중한 선물이며,
사람들이 결혼과 정상적인 가정생활중에서 누릴수 있는
가장 깊은 단계의 인간의 접촉이며,
인간이 즐길수 있는 신비한 것이다(섹스를 통해 남녀는 서로가
자신들의 영혼들의 통합이 이루어 짐:soul tie,
그러므로 섹스를 할때에 정상적인 관계에서 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행위는 몸만을 섞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악행이란 것, 죄악이란 것은 신이 내린
좋은 도구나, 선물들을 악용이나 남용하여,
인간의 타락한 욕구나,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행태로 나타낸다.

인간이 짓는 죄중에 가장 더럽고, 자신에게 심각한죄중에 하나가,
자신의 몸으로 짓은 성적인 죄들인 것이다.
이죄는 범죄한 인간이 자신의 몸에 짓는 죄로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부정한 성적인 접촉이나, 관계에서오는 동성애로 인한
비정상적인 인간성의 변질과 그로인한 모순된 삶,
성도착적인 행태들, 매독이나 성병, 그리고 에이즈등은
신이 내린 소중한 선물인 섹스의 법칙을 어기는 데서 오는
자신의 몸에 받는 신의 엄중한 심판으로 이어진다.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섹스에 대한 이해와
거기에 대한 자신의 건전한 철학위에 세울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행복한 가정이나 건겅한 가정을
이룰수 있는 요인이 몇가지 더 되는 것은
혼전정조(남녀동일함)에 대한 자기순결을 지키는 것과
결혼후에는 혼외정사에 대한 유혹을 받는
(마치 이브가 자신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금단의 열매를 바라보고 따먹는 것처럼,
혼외정사의 유혹을 받기가 쉽다) 것을 이기는 것들이다.

최초의 가정이야기는 인류시조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혹은 남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바로 우리들 자신들의 이야기이며,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할 그리고 가정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정에 대한 교훈, 인간성에 대한 교훈등을 배울 수 있다.
더 나아가 상한 가정, 병든가정,
그리고 깨어져 가는 가정등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길은
가정을 세운 신에게로 나아가 그의 지혜와 조언을 구하며,
그의 치유와 회복의 힘을 바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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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신부이야기

미련한 신부이야기(마태복음 25:1-13)

그때 하늘나라는 마치 저마다 등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을 것이다.
열 처녀중에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지혜)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졌으나,
기름이 없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에 기름을 채워 두었다.
그러나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자, 신랑이 온다. 맞으러 나오너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처녀들은 다 일어나 저마다 등을 손질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는데 너희기름을 좀주겠니? 하자.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기름을 나눠 주면 우리도 모자라고 너희도 모자랄거야.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지 그러니?’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사이에 신랑이 왔다.
그래서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후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신랑은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

기다림이란 누구에게나 힘든과정이며, 인내가 필요하다.
좋은 일을 앞두고 있을때에는 더욱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다리는 그기간을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것과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차이는 기다리는 약속시간이 다가와서,
일을 만나보고, 직책에 올라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을 알게 된다.
왜 내가 이때를(일을 할때에, 기회를 얻을 때에, 직책에 오를때에)
준비하지 못했나를 후회하게 될것이다.

신랑신부가 서로 약혼을 하고 난후에
결혼하는 날까지 서로 자신의 몸을 지키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약혼을 한 신분이라면 약혼한 사람답게 자신의 몸을 정결하게 지키며,
장차 주어질 결혼에 대한 설계와 더불어 미래를 대비하는 준비성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훨씬 결혼생활을 성공적으로 시작할수 있다.

밤에 신부가 신랑을 맞이할 시간이 가까올수록
그들에게는 힘든 시간이며, 지칠수 있는 기간이다.
누구나 깨어있는 저녁시간에 오면 참 좋을텐데,
모두가 지쳐 잠이 오는 그시각에 신랑이 온다는 소식은 인간에게,
때를 기다리는 것과 준비없이 갑자기 일을 당하면,
더 힘든 경험을 겪는 것처럼,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기다림이란 필요한 것이며,
인생의 일들중에 기다림에서 오는 일들이 많이 있다.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지,
우연히 오는 기회도 있지만,
대개는 준비하고 대기하는 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 주변에 가끔 버스지나가고 난뒤에 버스스톱을 외치며,
손을 흔드는 경험과 같은 일들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왜 천국을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로 비유하였을까?
천국은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준비해야 들어가는 곳인가?
천국은 준비된 자, 혹은 기다리는 자가 갈수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저 인생을 마음대로 살다가 갈수 있는 곳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히 천국을 구하고 거기에 가려는 사람들에게,
결혼식을 준비하는 신부로 비유하여,
신랑을 맞이할 처지의 신부로 둔 것이다.
신부는 결혼으로 자신의 삶과 운명이 신랑에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듯,
신부인 사람은 하나님에게 대한 자신의 준비와
기다리는 과정으로서의 인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있다.

천국은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심정
(결혼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은 자신의 삶의 운명 전체를 내어던지는 마음과 같다.)
으로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본문은 이야기 하고 있다.

필자가 결혼을 하려 할때에, 신랑은 되어 보았지만 신부는 되어 보지 못하는데,
집사람은 결혼할때에, 결혼의 긴장함이나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감정이 북받치고,
부모님에게 눈물을 보일만큼 심각하고 지대한 것이었다.

신랑의 입장이 었던 필자는 남자들이 겪는 결혼에 임하는 경우는
군대에 가는 것이나,입사시험을 치르는 것이나,
비슷한 자신의 일생에 또 하나의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덤덤하였다.

결혼은 남자에게는 여러 일들중의 중대한 일을 치루지만,
결혼은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인생의 전부가 달린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여자들에게 남의 집(가문, 미국인들은 결혼하면 여자는 남자의 성을 따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에 들어간다는 말을 하는것이다.
한가문에 있는 여인이 다른 가문으로 호적을 파서,
새로운 가문의 사람으로 들어가는 결혼은 여자(신부)에게 있어서는
과거에 자신이 살았던 집과는 전혀 다른 가문에 새로운 인생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결혼은 여자에게 중대하고도 소중하며, 진지한 경험이다.

결혼식장에 신랑이 준비하는 것은 간단한 예식복을 입지만,
신부는 신부화장에서부터 신부의 결혼식 옷(드레스)을 입는
상당한 시간이 요하는 준비를 해야한다.
그렇게 신부에게는 결혼식날에 많은 준비와 자신의 몸을 가꾸어야 하듯,
여기서 본문이 주는 교훈은 인생의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
그 분안에서 살려는 이들은
신랑(하나님의 아들로 비유하였음)을 맞이할 마음 준비와
다가올 신랑과의 만남을 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여행을 하거나, 출장을 가려할때에, 준비물을 챙긴다.
어느 사람은 일찍 감치 준비하는 경우,
충분히 시간을 두고, 준비하는 습성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닥쳐서 준비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는 시간까지 준비하려는 게으름이나 지체함이나,
혹은 미리 해놓으면 마음이 불안하여,
시간이 다 되어가는 상태에 준비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늘 약속시간에 늦게 도착하기 마련이다.

코리안 타임이란 것을 겪는 사람들은 준비시간을 약속시간에 맞추어 늦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준비시간을 약속시간을 약속한 시점에 두고 준비하는 경우,
예를들어 내일 등산을 갖자는 약속이 시작하는 때부터 준비하는 경우와
약속시간을 맞추어 준비하는 경우일 것이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준비하는사람은 허둥지둥 시간에 닥쳐 준비할수 밖에 없고,
등산을 가서는 가져와야 할 것을 잊어버리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을 약속하게 되는 시간으로부터
맞추어 준비해가는 사람은 약속시간까지 있는 충분한 준비기간을 갖고
가기에 미비됨이 없이 준비를 잘하여 좋은 등산을 할수 있을 것이다.

지혜는 일을 잘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태도이며, 기술이며,습성이다.
미래의 일을 내다볼 줄아는 태도이다.
여기에 나오는 슬기(지혜)로운 다섯신부는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였다.
지헤로운 신부들은 등불이 밝을때에는 괜찮으나,
불을 밝힐 기름이 다 되어가는 것을 대비하여, 그들을 신랑은 맞이할수 있었다.

두신부들의 차이는 준비하는 것, 지혜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자가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며, 기회가 오기를 대기하고 있다가 기회를 낚아 채는 것이다.

미련한(어리석은)처녀들은 앞에 것만을 보려는 태도,
현재 자신의 손에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어리석은 신부들은 자신의 등불이 지금 밝혀있는 것으로 만족하여,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여,
정작 신랑이 올 시각에 자신의 등불을 밝힐 기름이 다 떨어지고서야
기름준비하느라 부산을 떨어지만,
후회스럽게도 신랑과 결혼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이것은 늦은 막하게 하고 싶은 것다하고나서 나중에 하나님을믿어보게다는 사람이다.
인생의 시간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기름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생에 있어,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힘이며, 열정이다.
인생을 활동적으로 일을 하려면 자신에게 힘이 있어야 한다.
건강이 뒷받침이 되고, 무슨일을 하려고 할때에,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재능이나, 기술이나, 학식이나,
자신의 일을 이룰 여러 요소들이 필요하다.
자신이 할수 있을 힘이 있을때에 못하고
쓸데없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게 되면, 늙어서 후회할 일 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

본문이 주는 크리스챤의 믿음의 예를 든다면,
기름이 자신의 믿음생활을 유지하는 데 왜 필요한가?
하나님을 알고, 배워가고, 경험해 가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나,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함께 살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신앙인의 경력이나 직분이나, 혹은 과거의 경험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모시고 살아가는데에는 도움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신분으로
늘 그분은 신앙인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분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마치 미래를 사는 것과 같아, 앞을 알수 없는 삶을 살아가듯,
자신의 앞길을 밝혀줄,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해야 살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고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주신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부단히 그분에게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지혜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성령님의 도움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과 신앙생활을 유지할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 다음과 같은 경우에, 여기 나오는 미련한(어리석은) 신부와 같은 경우일 것이다.
돈을 갖고 있는 자가 돈을 쓸줄 모르는 것과 같고,
예를 들어, 어느 갑부가 재산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으면서, 남을 도와쥐는 커녕,
자신이 쓸수 있는 것도 못쓰고,그는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미인대회에서 우승했던 이가 남에게 주는 자신의 그 값진 것을 몹쓸 것으로 오용할때에,
그 아름다움은 천박하며, 타락하여 냄새나게 하는 것과 같고,
권투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 자신의 그주먹으로
다른 사람을 때리는 데 잘못활용하는 경우라든지,
혹은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학식으로 남의 유익을 주지 못하고,
자신의 교만의 밑천으로 삼는 것이나,
인기 있던 정치인이 좋은 시절에 국민들에게 바르게 봉사하지 못하다,
인기가 사그라 져, 후회할 날이 있는 경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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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인생

여러사람들중에, 인생반전의 삶이나,
역전의 용사로 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긴 기간을 기다림속에 자신을 연마하며,
하루하루에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땀흘린 열심과
수고의 달콤한 열매를 맺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경우이다.
또한 주위의 반대를 무릎쓰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경우라든지,
안되다고 하는 일이지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여, 자기목표에 도달하는 경우일것이다.

옛날에, 어느 집에 한 남자가 두여인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한 여인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다.
그녀는 제때에 남편에게 필요한 자녀들을 낳고,
자녀들을 통해 남편의 관심과 애정을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 가정에 있는 다른 한 여인도 그 남자를 자신의 남편으로 삼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이란 미운오리새끼 마냥,
자신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불임의 아픔속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 가정의 지붕밑에, 한남자와 두여자의 삶이란,
긴장과 질투의 시샘안에서 바람잘날없는 경쟁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자녀를 셋이나 둔 그 여인은 남부럽지않게,
집안에서 큰소리치면서 살며, 자녀없어 살아가는 그 불쌍한 여인을 무시하고,
구박하고,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
아이들을 내세워 자신을 으시대며,
그녀는 불임의 그여인을 빈정대며, 불쌍한 그여인을 괴롭혔다.
그 가운데에 살고 있는 처량한 여인의 삶속에,
단지 남편의 사랑만이 유일한 낙이며, 희망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마음은 늘 이여인에게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그여인에게 쏟으면서, 그녀를 위로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행복하지 못하다.

자녀를 갖지 못하는 여인의 한은 아무나 이해할수 없듯이, 그녀는
마음대로 아이를 가질수 없는 자신의 몸을 원망해도 소용이 없다.
단지 자신의 운명이라 알고,
한 집안의 원수인 그 못된 여인으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으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날 이 여인은 결심을 한다.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극복할 길을 찾아,
신을 만날수 있는 거룩한 장소인 성소에 나아가,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심과 더불어 그동안 쌓여있던,
한많은 여인의 울분을 쏟아내면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신에게 자신에게도, 아이를 달라고 미친듯이 구하였다.
거기에 있던 멍청한 사제가 그것을 보고,
여인에게 술취하지 않았냐고 다구친다.
그 여인은 답답한 가슴을 안고,
자신의 심정을 미친듯이 신의 가슴에 자신의 응어리를 던지며,
그 선한 신에게 자신의 절실한 소원을 아뢰고 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렇게 인생자신이 지극한 정성으로 무엇을 구하면, 신은 거기에 응하는 분이다.

신은 그녀에게 귀한 옥동자를 선물로 그녀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그녀의 상처투성의 과거의 울분의 덩어리가
이제는 오히려 그 가슴깊이에서 나오는 신에 대한 고마움으로 바뀌어,
자신의 감사를 신에게 표현하지 않고는 보응할 길이 없어,
그녀는 그렇게 소중하게 구하여 얻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아들을
선뜻 신에게 평생을 신의 사역자로 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젖떼기가 무섭게 그아들을 신의 전에 갖다 바쳤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한많은 인생을 반전하는 멋진 홈런을 날리면서,
그녀는 이후에, 세아들들과 두딸들을 낳는 복을 신으로부터 받아,
다복한 인생을 살아갔다.
인생반전의 전형적인 예이며,
고진감래의 기다림속에, 행복한 유종의 미의 복을 받은 칭송받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여인으로 바뀌어 살게되었다.

야구게임에 한 팀이 계속해서 지는 게임을 하고 있는 중에
마지막 공격찬스를 맞은 지는 팀이 투아웃에 이제는 이길 가망이 없는 상태에 있을때에,
그 팀의 마지막 타자가 등반하여,
역전의 홈런을 치는 장면을 보고,
관중들은 감격스런 희열을 맛보며, 야구의 묘미를 만끽한다.
인생에도 역전의 홈런을 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종종 우리주변에 일어나곤 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인생이란 끝까지 경주하듯
마지막순간까지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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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결혼생활이란?

조물주께서 인생을 남자와 여자라는 카테고리안에서 만들어,
서로 각기 다른 독립적인 성의 객체로서,
함께 상호보완하며 하나의 객채(가정단위의 )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였다.
신의 오묘한 의도아래에 사람은 홀로서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로 세상에 보냈다.
물론 여러가지 동기(종교적인이유나 혹은 육체적인이유,
아니면, 불가피하게 홀로 사는 경우)로 혼자살아가는 사람도 주변에 많이 있지만,
창조주의 의도는 한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한 지붕밑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년이되어, 연애할 나이가 되고,
결혼한 연령이 되어 자기가 좋아하는 이상형을 만나, 결혼을 한다.

결혼생활이란 서로 너무나 다른(성적인든지, 혹은 기질이든지,
혹은 세계관 이해에서든지) 남자와 여자가 결혼이라는 계약으로 함께 사는 것이다.
결혼생활이란 청년의 시기를 보낸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상적인 이성의 대상을 찾아 여러가지 동기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어느 경우는 사랑의 동기로, 혹은 성적인 충동을 극복하기위해,
혹은 경제적인 보장을 받으려고,
아니면 자기실현을 위해, 아니면 상대방을 이용하기 위해,
혹은 숫컷이 암컷이 만나듯 동물적인 충동적인 동기,
아니면 막연한 상상의 기대의 동기로,
어떻든 여러가지로 시작하지만,
결혼이란 것을 혼자의 삶이 아니라,
둘이 함께 사는 삶이기에 결코 만만치 않는 삶의 도전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은 집을 옮기거나,
자신의 삶에 중요한 결정을 할때 마다, 진지하게 기도할것을 권면하였다.

망망대해의 바다로 나가는 자신의 삶에 도전이 있고
위급한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를 중대한 일에 한 번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혹은 자신의 목숨이 달린 전쟁을 나갈때에는 두번을 아주 심각하게 기도할 것을 명하고,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기도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결혼에 대한 결정에 대한 기도의 태도이다.
그 세번을 기도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만큼 결혼을 중요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결혼이란 사람에게 일생이 달린 살면서 풀어야 할 숙제이며,
배움이며, 자신과 상대방과의 기나긴 여행이다.

50년대이후에 여러세대를 걸쳐오면서,
미국인의 결혼연령이 어렸을때에,
순진한 젊은이들이 막연한기대와 성급한 결정으로 결혼을 하여,
나중에 얼마 안가 배우자와의 차이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으로 가는 경우들이 많이 있음을 보아 왔다.
요즘 우리나라도 결혼에 대해 진지함이 없이 하다보니,
많은 경우에 별거나 이혼으로 끝나는 경우도 종종 주변에서 듣는다.

대개 결혼은 자기중심인데서 출발하여,
점점 자신의 상대인 부부의 어느 한쪽에 맞추어가는 타인중심의 삶으로 바뀌어 간다.
결혼은 처음에는 성적인 호기심과 탐구에서 출발하여,
성을 정복하려고 시작하였다가,
점점 성을 배우고, 성적인 교제(이교제는 단지 육체적인 접촉뿐아니라, 이성간의 감정교류,
혹은 이성간의 대화나 성의 이해 교류등)의
자기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하여 가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또 결혼이란 시작할시에,
대개 행복의 파랑새를 좇아가듯, 행복을 추구하는 쪽으로 누구든 생각하고,
그것을 실현하기를 바라며, 생활한다.
그런데, 인생의 결혼이란 단지 행복만을 좇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놓여 있다.
환경의 변화, 경제적인 변화,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상대방의 기질이나 혹은 성품의 변화,
사건 사고의 변수, 여러가지 주변인들의 영향으로 인한 변화(시댁, 혹은 처가댁식구, 아니면
가까운 이웃이나 친우, 혹은 불의의 불청객등)으로 인하여
처음의 낭만적인 사랑을 유지하기가 쉽지않다.

그리고 결혼은 서로 배우자에 대한 기대감에서 현실에 대한 만족감으로 변화되어,
어느 정도 살다보면, 오히려 본인이 배우자의 기대나,
현실충족에 부응해야 하는 쪽으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결혼처음시기에 지나친 기대감을 갖기 보다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한 사명의식
(배우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본인이 배우자를 위해 봉사해야지 하는 태도)을 갖는 것이 더 지혜이며,
결혼생활을 마음 편하게 할수 있게 한다.

애당초 신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함께 어울려 살아가도록 하는 의도에 따라가는 것이 훨씬 결혼생활을 잘하는 것이다.
그 남자와 여자가 함께 모여 한 지붕밑에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인간을 사회적인 존제로 만든 신의 의도는 그렇게 함께 살면서,
서로 다른 성, 서로 다른 가정이나 성장배경,
서로 다른 개성이나 기질등을 서로 나누면서
자신을 제대로 가꾸는 옳은사람 되어가라고 하는 신의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왜 나는 팔자가 사나워서 저런 위인을 만나서, 내가 죽도록 고생만 할까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결혼을 제정한 신의 의도를 몰라,

결혼을 단지 자신만을 위한 삶의 안일한 피난처,
혹은 자신만을 위해 배우자를 활용하는 도구처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결혼을 막연한 상상의 기대를 좇아,
낭만의 사랑과 행복인 파랑새를 좇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에 임하거나.,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결혼과 가정생활과 자녀양육을 의한 봉사나
사명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훨씬 부부간 갈등이 사라지고,
오히려 그런 섬김의식을 가지고 살게 되면,
자신이 구하지도 않던 낭만의 사랑과 행복이
자신의 결혼생활과 가정안에 깃들게 되는 것이다.
부디 이글을 읽은 모든 독자들께서
부디 이런 결과를 도출하는 결혼의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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