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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0/27
    저는 누구일까요?
    목동
  2. 2008/10/27
    갈보리 언덕
    목동
  3. 2008/10/27
    스페인 무녀이야기
    목동
  4. 2008/01/27
    기도생활과 영성변화
    목동
  5. 2007/12/10
    주님안에서 소망으로 살기
    목동
  6. 2007/11/08
    예수님의 기도와 나의 기도의 차이
    목동
  7. 2007/08/26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목동
  8. 2007/08/21
    교회는 생명(영혼)살림의 잔치집이다
    목동
  9. 2007/08/19
    영혼의 기쁨
    목동
  10. 2007/07/07
    신앙과 묵상
    목동

저는 누구일까요?

저는 누구 일까요? 저의 외모로 저를 짐작 하지 마십시오. 저의 얼굴로 저를 판단 하지 마십시오. 저는 가끔 마스크를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벗기를 두려워 합니다. 그 마스크는 내게 하도 오래 되어서 제게는 제 2의 천성 처럼 되었지만, 저는 이 마스크를 벗는것이 두렵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행동 하고,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확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러한 나의 두려움에서 오는 외적 노력에 의해 저를 판단 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이 나의 진실을 볼 수만 있다면, 나의 치장에만 의해서 판단 하는 것을 그칠 수 있다면, 나 의 진실을 볼 수 있고, 나의 외로움을 볼 수 있고, 나의 마음의 무거운 짐들을 볼 수 있고, 또한, 그러한 당신의 이해가 나의 스스로 쌓아 올린 벽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사랑도 경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 일까요? 나는 오늘 당신이 만나는 모든 남자, 모든 여자, 모든 아이 입니다. 저를 이해하고 사랑 해주세요, Please. Neil Anderson, “Resolving Personal Conflict”, 에서 발췌,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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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언덕

갈보리 언덕 어느 그리스도인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가 한 언덕을 올라 가고 있는데, 뒤에서 힘겨운 발자국 소리를 듣고 뒤돌아 보니 한 사람이 아주 무거운 짐을 그의 등에 지고 언덕을 올라 오고 있었습니다. 그를 보고 딱하게 여겨 측은히 여긴 나머지 가까이 다가가 좀 도와 줄까 하였습니다. 그의 곁으로 갔던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이 너무나 선명히 눈에 들어와 그는 곧 그 분이 예수님 이시란 것을 알고는 곧 주님께 물었습니다. “ 주님, 지금 온 세상의 죄를 지고 저 언덕까지 오르려 하십니까?” 그때 주님은 대답 하셨습니다. “이 짐은 비로 너의 죄니라”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셨을 때, 나의 모든 죄도 포함 되어 있었읍니다. 그 주님의 행하심을 오늘도 감사의 찬양으로 예배드립시다. 예화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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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무녀이야기

“스페인의 무녀”라는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모델을 찾던 화가 스텐버그는 한 집시 소녀를 보고 모델이 되어 주기를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화랑으로 온 페피타 라는 이름의 소녀는 걸려 있는 많은 그림들 중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는 장면이 그려 져 있는 한 그림에 유독 관심을 보이며, 꼬치 꼬치 캐 묻기 시작 했습니다. “이 사람 누구예요?” “그리스도야”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무엇하고 있어요?” “십자가에 못 박는 거야” “그 사람은 나쁜 사람 이었어요?” 그는 귀찮아 하며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 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비치며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그리스도 라는 분이 아저씨 때문에 저렇게 죽었으니까, 그 분을 무척 사랑 하시겠네요?” 그 소녀가 떠난 후, 그 말은 그에게 계속 여운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불후의 명작인 “십자가”라는 그림을 그리고, 그 아래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였노라.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 하느냐.” 예화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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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생활과 영성변화

올해 새해 정초에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씀이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믿는 자에게 주신 주님의 은총이다.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의 심령에 부딪치는 커다란 반향이 된다.

그 동안 나의 기도 생활은 나의 영성을 유지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성은 영혼의 성품인가? 영혼이 향하는 영적인 경향성인가?
아니면 영혼의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이며,
경험되어지는 영적인 세계의 창문인가?
나는 기도를 통해 어릴 때에 가졌던 인생의 꿈들, 먼 미래에 다가올 새날들에 대한 기대를
바라보는 내일의 창문으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자신은 기도를 하다 언제는 주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싶은 간절할 때가 있다.
내 영혼이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영혼에 흥분되는 그 무엇을 준다.
영음으로 들려오는 내면의 반응은 영혼의 감성을 자극하여
열린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문이 열리는 것을 느낀다.

그동안 많은 나의 기도가 천상에 계시는 창조주에게 올려져 왔다.
나의 무수한 쏟아낸 간구들은 때로는 영혼의 절규가 되기도 하며,
고요하게 내면에 울려 퍼지는 묵상의 언어들,
혹은 하늘을 쳐다보면 나의 마음의 창문으로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들,
그리고 나의 꿈이나 비전을 통해 울려 퍼지는 내면의 마음의 소리들.....

그 동안 신앙생활에 있어서 나의 기도가 얼마나 달라졌는가?
처음에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께 대한 헌신과
구원받음에 대한 감격의 열정을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평신도로 사역을 할 때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할 때에 분반 아이들에 대한 어린 목자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그어린 영혼들을 위해 순수한 목자의 열정을 담은 간구를 뜨겁게 올리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중 고등부 전담 담당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전체 중 고등부의 부흥과 젊은 영혼들의 세상의 쉽게 노출된 유혹을 차단하고
그들을 신앙으로 키우기 위해 열정적인 간구를 드리곤 하였다.

그러다가 나의 영적인 생활은 보다 깊은 영적인 갈망이 솟구쳐 특별 기도나,
산 기도나, 금식 기도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런 기도들은 주님을 찾는 영적인 갈망과
더불어 나의 장래를 부탁 드리는 기도를 드렸으며,
그러다가 나의 인생의 전체에 대한 간구를 드리기도 하며,
나의 삶을 드리는 헌신적인 기도가 드려졌다.

그런 기도를 드렸던 나의 영적 생활에 전환점이 되는 한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나의 영성을 순수의 열정에서 고뇌의 무감각의 영성으로 넘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어느 주일날 젊은 교우의 군입대를 환송하는 곳에 갔는데,
당시 그 젊은 영혼은 세상과 교회의 사이에서
세속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친구였다.
그 친구의 환송은 동네 막걸리 집에서 있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하여
거룩한 나의 몸과 영에 영향을 받게 되어
주님앞에서 나의 영성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은 그 후 주님께 회개를 드리는
10일간의 물만 먹고 하는 금식 기도를 드리는
나의 내면에의 영성에 변화를 가져와
나의 영성은 무감각해 진 영혼의 상태로 나아가
결국 영성의 순도는 무디어져 이어진 군생활 3년 동안의 기도 생활은
더 깊은 영적인 은혜의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영적인 성장이 멈춘 상태로 지나게 되었다.
나의 기도도 신선함을 잃은 상태로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에 군 제대 후에 신학교에 복귀하여,
그 후로부터 교육 전도사로 있을 때에는
중 고등부 아이들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당시 사역자로 나선 처음의 사역시기에
자신의 영혼은 그래도 열렬히 불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심방 전도사로 성도들의 각 가정을 심방하면서
교우들의 가정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그리고 직업이나 사업에 대한 간구를 그들을 위해 드리고 하였다.
이렇듯이 사역자로 혹은 책임 있는 목회를 하면서
나의 기도는 인간적이며 세속적이며,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사역의 도구로서의 기도를 드렸다.
평신도 때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기도는 점점 식으면서,
제도적이고 습관적인 기도의 언어들이 나의 영혼에 메아리 쳤다.

부목사로 있을 때에는 심방을 하면서 늘 교우들의 개인적인 문제나
혹은 교회의 공동체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었다.
어느 때에는 하루에 심방을 하는데 거의 30가정을 다녔던 적도 있다.
심방 대원들과 함께, 잠시 가정에 머물며, 가정의 상황을 듣고는 바로 기도를 드린다.
같이 다니는 대원들에게 꼭 같이 들려지지 않는 기도를 드리려고 했으나,
그러나 나의 기도는 어느 새 공식처럼 가정의 가족들의 평안과
가족들의 축복된 삶과 그리고 그들의 대소사의 문제들을 간구 드렸다.

유학의 시기들을 포함하여 오랫동안 신학교의 신학적인 배움의 길에서는
영혼에의 메마른 상태에 있었고
기나긴 영혼의 고뇌의 시간들과 더불어
더 깊어진 영성의 변화와 함께 몇 번의 내면의 치유와
영적인 깨달음과 넓어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뿌리들을
이루게하는 영성과 경건신학의 배움은 자신의 영성의 형성과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나의 영성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개인 경건의 시간들이 도움이 되나,
과거 처음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가졌던 순수함과 영적인 열정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이렇듯이 자신의 기도의 생활의 변천사는
나의 영성의 변화와 맞물려 나의 신앙생활을 형성하여 왔던 것이다.
당시 주님께 드려지던 기도의 언어는 자신의 신앙에 영향을 주며,
자신의 영성의 변화와 발전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는 가운데에 특히 나의 신앙의 삶의 역사에는
메마른 영혼의 시기였던 신앙의 암흑기와 영적인 굴곡의 나래에서도 기도는
언제나 주님께 드려졌다.
기도의 언어나 내용은 나의 영성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할 수 있겠다.
목양을 하는 요즘은 교회의 목회와
교우들의 목양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역자의 기도이지만,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영성을 깨우치는 기도에의 헌신에 몰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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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안에서 소망으로 살기

이사야 9:1-7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잘 먹고 잘살기, 혹은 오늘보다 내일이 좋아지는 것, 지금보다 나중이 더 발전되는 것등, 우리의 삶에는 희망의 크기만큼, 살 힘과 용기가 있는 것이다. 오뚜기 인생이라는 말들은 듣는다. 제가 군대에서 근무했던 사단이 8사단인데, 그 사단을 오뚜기 사단이라고 부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실전해서 패전을 해도 다시 진격하는 정신을 가진 군대를 말합니다. 오뚜기 인생에게는 누구나 박수를 보내고, 격려를 합니다. 자녀들에게도 오뚜기 정신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이민 생활도 오뚜기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실패해도 다시 성공을 향해, 달음질하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전진하는 정신이 오뚜기 정신입니다.

어려운 시절에는 격려하는 구호가 힘을 줍니다. 옛날 한국에 못살던 때에는 잘살아보세, 새마을 운동등, 어려운 국가나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하여, 힘을 얻게 하고, 전진하게 합니다. 재수하는 공부, 혹은 다시 시작하는 일들에 대해, 다시 해보라, 포기하지 말라, 끝까지 해보라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저는 미국에 유학 와서 친구 목사님 하고, toefl 시험을 공부하는데, 시험을 많이 보았습니다. 점수가 안 나와도, 또 공부를 하고 시험을 쳐, 미국인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예술가나 연주가도 끊임없는 중단없는 노력으로 연습에 연습를 거듭하여, 좋은 작품이나 연주를 합니다.

인생에는 어려운 날들이 있습니다. 이 어려운 것들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며 문제입니다. 그것을 풀려지고, 해결되는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이며, 힘든 일입니까? 그것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가게 하는 힘은 희망이 주는 힘입니다. 한국이 과거에 일제 시대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에 희망을 이야기 하며, 희망을 품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그래도 지금 우리의 조국의 삶이 잘살게 되었습니다. 힘들게 살 때에도 희망을 안고 살면 그 삶은 축복입니다. 잘살아도, 희망이 없이 사는 삶은 저주입니다. 가진 것이 부족한 것이 없는 한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면, 살아갈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도 자살하고,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도 생명을 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나라는 지금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나라는 점점 약해지며, 나라의 미래는 어두워집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아무리 삶이 힘이 들어도 자녀들에게 희망을 말해주는 부모님, 또한 힘든 날들이 있지만, 희망을 품고 희망을 말하며 사는 삶이 보람이 있습니다.

희망이 주는 축복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미래에 대한 강한 기대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목표하는 것이나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간절한 열망입니다. 특히 신앙인들은 하나님앞에서 끝까지 버리지 않고 가져가야 할 것은 하나님과 그의 축복하신 약속에 대한 강한 기대감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기도나 간구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에 대한 강한 열망이나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날, 우리가 기도했던 것, 바라고 희망했던 것등은, 우리의 강한 기대감의 부족에서 얻지를 못했습니다.

소망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 구한 것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통해 얻게 됩니다. 야곱의 신앙과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지나가는 예수님을 향해, 눈을 뜨게 해달라고 소리치며 따라갈 때에 그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나 간구 중에 자신의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꼭 들어주셔야 할 것입니까? 그렇다면 끝까지 밀어붙이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중단하지 말고 계속 구하십시오. 야곱은 그런 끈질김이 있는 신앙인이라, 하나님의 천사를 이긴 사람, 이스라엘이 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간절하고 강인한 정신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귀한 것, 소중한 것, 그리고 중요한 것을 얻으려면 그런 강한 기대감이 필요합니다.

희망이 주는 또 다른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생애 속에서 우리가 귀한 것을 이룰 수 있게 하고 성취하게 하는 비전을 의미합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비전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약속하실 때에 구약의 요엘 예언자를 통해, 요엘서 2:에 성령이 임하시면, 젊은이가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을 꾸리라 하였습니다. 젊은이는 장래에 대한 자기 비전을 갖고 살아서, 결국에는 그 비전대로 이루고 살아갑니다. 다니엘이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도 그렇습니다. 젊은 시절을 보낸 나이든 사람들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자기만의 소박한 꿈이 또한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아 대망 신앙은 나라를 잃고, 정부를 갖지 못해도 그들의 선민 의식의 영적 유산과 민족의 전통 유산을 지켜오는 힘이 었습니다. 그들에게 약속으로 예언하신 메시아 대망은 그들의 굳건한 신앙으로 수백 년을 지탱해 왔습니다. 나라 없고, 정부가 없는 형태에서 오랫세월을 버티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습니다.
메시아 대망 신앙을 예언한 예언자들 중에 이사야가 단연 그는 메시아 예언자라 할만한 많은 부분에서 메시아와 그의 나라에 대해 예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대망 신앙 은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 소망은 자신들의 삶에서 생산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생산적인 일을 할 때에는 신명이 납니다. 특히 농부가 추수할 때에는 기쁘게 춤을 추며 신명 나게 일을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과 백성들은 승리한 기쁨을 누립니다. 로마 시대에도 승전한 장군은 전리물을 몰고, 개선의 승리의 행진을 하며, 백성들의 환영을 받습니다. 승리할 때에는 남는 것 있습니다. 패하면 없습니다. 영적 생활에도 패하면, 영적인 침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승리하셨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길수 없지만,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승리합니다.

메시아 대망 신앙은 메시아 왕국의 통치를 기대합니다. 그의 통치는 의의 통치이며, 그의 온전한 나라의 통치입니다. 진정한 평화가 있고, 그 나라는 쇠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이라는 책을 쓰면서, 망해가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의 승리와 하나님나라의 통치가 영원하리라는 역사 철학을 쓰고 있습니다. 세상나라는 다 망하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세워지리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 나라는 승리하며, 영원 무궁합니다.

메시아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세상에 오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의 소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죄지은 채로 저주받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죄있는 인생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데, 메시아는 그들을 구하려 오셔서 잃어버린 자녀의 지위와 권한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예수님 믿는 큰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죄와 형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용서와 상급과 영생을 바라며 살아가는 자녀의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메시아를 통해 죄와 형벌과 죽음는 뒤로 가고, 앞에는 용서와 상급과 영생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온 인생들은 모두가 죄인의 수치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자녀의 영광을 얻
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일 하나님 앞에서 희망을 안고 살아갈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늘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의 희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삶의 희망과 능력을 얻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소망의 능력을 줍니다. 항상 말씀이 주는 힘 안에서 살면 희망 가운데에 거하게 됩니다.

희망 가운데에 살아가려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내야 합니다. 그분은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희망을 주십니다. 아무리 사방이 막히고, 솟아날 구멍이 없어도 내가 기도하는 한, 하나님을 통해 희망이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이 보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희망을 주십니다. 그의 인도를 따라 살면 희망 가운데에 거합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외부의 핍박 속에 있을 때에, 그들을 격려하고 희망을 주셨습니다.대표적인 경우가 스데반 집사 이야기입니다. 그는 돌로 맞아 죽어가면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천사의 얼굴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희망 속에서 죽음을 이기는 순교자로 살았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크리스천의 유일한 능력이며, 희망입니다.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도울자, 선생님, 지도자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영원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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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와 나의 기도의 차이

나는 그 동안 기도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다.
정작 기도 생활에 대해 주님의 효력 있는 응답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부르짖는 나의 기도 제목이나 내용들이 그에게 상달되어,
그로부터 자신이 기대하는 만큼의 응답의 역사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를 못한 것이 답답하게 느낄 때가 자주 있어 왔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가르침 중에서
주기도문은 주님의 기도의 모델이 담겨져 있으며,
주님의 기도의 정신이 다 나와 있다고 하겠다.
그의 기도는 한가지 목적에 귀착되고 있다.
그것은 그의 기도와 삶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원하셨다.

어느 날 아침에 나는 기도하는 중에 자신에게 깨달음이 온다.
기도는 나의 뜻을 바라고, 나의 바램을 얻어내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작 기도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고, 자신의 뜻이 성립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나는 기도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 나의 기도에 대해 세 가지점을 살펴보면,
먼저는 기도를 통해, 주 예수님의 기도 정신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감 속에서
모든 간구와 기도의 바램이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며, 하나님의 손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주님을 향하여 나가는 믿는 이의 기도는
하나님의 하실 일들을 그의 종들의 간구의 중보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실에 대한 섭리의 역사를 기대하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손을 움직이는 비결이 무엇일까?
그는 온 천지를 그의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그의 말씀을 통한 창조 사역은
그의 하시는 말씀이 나가서 실제적인 역사를 이루어 놓았다.
그것은 그의 사역이 그 말씀의 사실성에
입각한 믿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그의 믿음이 그의 사역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그가 하신 말씀을 통한 믿음의 사역으로 온 우주를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기도하는 나에게는 기도에 공을 들인 시간이나 헌신한 노력보다
더 필요한 것이 내 안에 있는 그 믿음인 것이다.
바로 그분의 섭리의 사역을 움직이게 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기도자 에게는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기도할 때마다
나는 나의 비전이나, 관점을 갖고서 기도에 집중하기 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시각이나 관점을 갖게 되어,
그의 시각이나 관점으로 나의 필요한 부분이나
나의 인생의 모든 상황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인간관계의 문제해결이나 원통한 일을 푸는 것이나,
그리고 나의 열망이나 의욕이 품어대는 바램이나 기대감을 추구하기 보다는
나의 기대나 상황을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시각이나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나가서 자신의 기대나 간구를 올리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모든 기도가 주님의 손에 들려지게 될 것이며,
속히 그의 손이 움직여서 자신의 주변이나 인생 상황에서 섭리로 나타날 것이다.

주 예수님은 늘 자신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저 하시는 열망이 있으셨다.
그는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것을 이루기를 원하셨고,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를 바라며 기도하셨다.
그의 기도는 아버지의 원하시는 것에 대한 열망으로 인하여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열납이 되어,
그의 기도가 상달을 통해 실제적인 기적이나 현실의 응답으로 나가오는 것이다.
나의 기도를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고백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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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성도의 생활속에서 주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성령님의 인도와 역사를 이해하고,
그분의 인도하심과 사역하심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성령은 영이신 하나님으로, 그는 감추어진 분과 같이 은밀하지만,
그러나 주도면밀하게 인간들속에서 사역하신다.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어서 그분은 자신을 인정하고 환영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신다.

선취권을 내어 드려야
먼저 신앙인들은 그분 즉 성령님의 이니셔티브를 존중하여,
그분에게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우선순위의 자리를 내어 드려서
그분이 자신안에서 마음껏 그분의 이성이나 감정적인 흐름이 나타나도록
그분에게 우선적으로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들이나
혹은 감정의 표현에서 선취적으로 행하시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신앙인들은 그분에게 자신의 의지나 선택적 결정에 대해
성령 우선주의의 원칙에서 선취권을 드려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의 바울 사도의 사역가운데에,나타난 증거는 다름과 같다.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한지라. 바울일행이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하였지만,
예수의 영, 즉 성령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성령은 자신의 계획하에, 그분이 선택한 일꾼들을 통해 세계복음화의 전략과
그 전략을 수행하게 하신다.

주도권을 내어 드려야
신앙인의 영적생활의 대부분은 성령의 자발적인 역사로,
신앙인들의 삶을 풍성하며 넉넉하게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로 살도록 인도하신다.
신앙인들이 온 우주의 창조와 보존의 역사속에 빈틈없이 역사하시며
특히 인간구원과 영적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능력과 자녀의 권한을 활용케하는 성령님을 통해
성도들은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생활을 가능하게 하신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진리에로의 길과 분명하고 확신된 미래에로 길)를 받는 길은
우리안에 있는 우리의지의 주도권을 내어 드려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체험속에서 그들은 복음전파에 대해,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주변의 유대땅이나, 땅끝에로 향하는 길에서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속에서 이루어 져 왔다.
지금도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에 의해 개인이나 단체나
혹은 교회를 통해 더나아가 민족들의 헌신을 통해 세계복음화는 이루어 지고 있다.

그분을 통하여 영향력를 나타내는
성령의 영향력은 온우주에 미친다. 그의 영향력은 모든 만물을 조성하며,
만물을 지탱하는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마치 지구가 중력의 힘에 의해 서로 만물이 붙들려 있으며,
만물은 성령의 힘에 의해 지탱하며, 활동하며, 성장하게 한다.
신앙인들의 주변의 세계에서 영향력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가능하다.
성령의 영향력은 신앙인들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난다.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 지식이나 재능이나 사명수행에 있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인 영향력이 나타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 진다.

한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이 주변세게에 미치고 파급되는 효과는
자신안에서 역사하며 자신을 통해 사역하기를 원하시는 성령의 나타나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항상 성령은 우리인간안에 하나님의 능력이나 재능이나 지혜로 다가와
우리를 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우리를 통해 주변세게에 영향력을 미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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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생명(영혼)살림의 잔치집이다

교회는 영적인 잔치집이 항상 열리는 곳이다.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여,
그 잔치안에서 주님의 영이 역사하시며,
성도들에게 분여하시는 그의 은혜와 은사와,
그가운데에 주님의 임재하심과 함께 하심에 참여하여,
그의 활동하심에 노출되어 축제의 영이신 성령의 운행하심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교회생활 혹은 신자들의 영성생활이다.

교회에 오는 이들이 항상 그들이 자신들의 영혼의 문제와 영적인 기갈을 안고 나아온다.
잔치집에 가는 사람들은 잔치에서 먹을 풍성한 음식과 즐거운 먹거리를 예상한다.
그렇듯 교회는 하나님의 영적인 잔치가 매번 열리는 곳이다.
신자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이 베푸신 영적인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실 주님의 은혜와 축복의 말씀들을 영적인 요리사들인
말씀의 대변자나 혹은 영적인 리더들이 내어 놓아야 할 것이다.

하늘나라의 잔치집에는 항상 영혼을 살리는 축제가 열린다.
그것은 생명의 축제로,
거기에 주님과의 생명의 교제를 이루어,
영혼과 마음이 새롭게 되어 날마다 자신의 영성이 성장하며,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으며,
영혼의 기쁨과 만족을 채워주는 영적인 잔치를 늘 배설하고 있다.
믿는 이들은 그 잔치집에서 맛보는 영혼의 기쁨과 채워줌의 은총안에서
자신의 갈급함을 채우며,
주님안에서 약속하신 충만한 은혜의 복을 받는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믿는 이들의 축제로서의 예배가 있으며,
생명의 식탁의 잔치인 성례전의 축복이 있다.
주님의 몸의 지체들인 믿는 이들은
그안에서 자신을 살리는 생명의 나눔을 경험하며,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의 깊은 맛을 경험한다.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하늘나라의 약속을 담은
생명의 주님의 몸을 기념하는 떡을 나누며,
사람들의 죄를 씻기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를 기념하는 잔을 나누며
주님의 생명을 먹고 마시면서,
자신안에 주어진 영생의 생명을 경험한다.

주님의 집안에는 많은 먹고 마시는 것들이 있다.
모일때마다 영혼의 만나인 말씀의 떡을 먹으며,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게 한다.
자신의 영혼의 배에서 나오는 영적인 생명수인 생명의 분출과 같은
성령의 생수의 흐름안에 머문다.
생수의 강에서 흐르는 생수는 목마른 영혼들의 기갈을 축이며,
막히고 답답한 영혼들이 숨을 쉬며 호활기찬 생명의 나눔의 호흡을 지속한다.
더나아가 세상에서 찟들린 이들의 상한심령을 치유하며,
메마르고 병든 영혼을 만지시는 주님의 살리는 능력을 맛본다.

세상에서 돌아온 믿는 이들은 주님의 잔치집에서
생명의 잔치을 통해 영혼의 상함을 회복하여,
자신들의 영혼에 주님의 넘치는 생명의 능력안에서 힘을 얻고, 또 얻어
새롭고 강한 심령이 되어 또 세상으로 내보냄을 받는다.
죽어가는 세상에 생명의 빛을 발하여 상한 심령들을 어루만져주며,
병든 영혼들을 돌보며,
죽어가는 생령들을 살리는 주님의 생명의 에너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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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기쁨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케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가 제자들이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순종하는 가운데에서
맛보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인격속에서 자신의 영혼의 경험하는 만족한 상태를 가르치고 있다.

신앙인들은 때로는 믿음을 세상을 탈출하기 위하한 도구로 생각하여,
자신의 불안과 답답함을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신앙인들은 교회의 신앙적 가르침안에서 더 중한 종교적인 짐을 지고,
영적인 부담감안에서 허우적 거릴때가 종종 있다.

주 예수님은 사람들이 내게로 오는 것은 삶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을 얻고,
쉴수 없는 영혼의 답답함에서 자유를 얻어 진정한 평안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신앙인들은 쉼보다는 얽매임을 더 가질 경우가 있다.
세상의 짐을 지는 것위에 종교적인 짐까지 올려놓는 부담감이 있다면
영혼의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살아야 할 자신이 도리어 영적인 스트레스에 더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신앙인들에게는 많은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다.
신앙을 갖기 전에는 알고 느끼지 못했던 죄의 중압감이나 영혼의 부담감은
신앙안에서 더 자신을 억누르며, 영적인 우울증에 내몰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할 때에 신앙인은 진정한 거듭난 영혼의 평안과
구원받고 은혜받은 심령으로서의 영적인 자유와 희열을 얻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영적인 자유와 기쁨은 먼저 자신의 영혼의 만족한 상태에 있을 때에 경험하게 된다.
신앙인의 자유와 기쁨은 주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아버지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의 테두리안에서
진정한 마음의 자유와 영혼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세상에서 흔히 주장하는 자유를 통한 자유가 아니다.
그런 자유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보장(자기의 독립성이나 주관성)하는 것같으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원칙없는 자유를 통해 자신
(인간의 무는함과 무지함 그리고 선하지 못함 으로 인한 건강치 못한 자아)을
방종하게 하는데로 빠지게 하여, 죄와 그로 인한 좌절과 절망의 나락으로 헤매이게 한다.

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그는 진리를 모르는 인생들이 모든 미망에서 갇혀
결국에는 죄의 속박을 받아 죽음의 세계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진리가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주님은 인생을 자유케 하는 진리로 오셔서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생들을 자유하게 하신다.
그가 죄에 대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죄의 속박에서 풀어 주셨다.

신앙인들은 죄의 무거운 짐을 해결하는 데에서부터
진정한 영혼과 마음의 자유를 맛보게 된다.
신앙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용서받은 자신으로 하나님앞에 용납받으며,
하나님의 의가 주는 혜택을 받아, 영혼의 만족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 영혼의 만족함 속에서 나오는 충만한 상태의 기쁨은
자신의 심령에서 노래(깨달음과 감사함에서 나오는)가 쉴새없이 흘러 나오게 된다.
그것은 결국 신앙인들이 영혼의 기쁨을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하늘의 신비의 경험으로 자신의 생애에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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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묵상

신앙인의 묵상은 그의 신앙에서 나온다.
신앙인은 두차원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갖고 있다.
하나는 나타난 보이는 현상을 보면서 살아간다.
나타난 보이는 현상은 사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경험하는 세계이다.
태어나서, 살고, 살면서 생각하는 습관은 살면서 경험하는 현상세계를
사고의 세계안에서 정리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의 세계안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실체를 음미한다.
그리고 경험의 세계안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신앙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또하나의 사실(하나님과 그분의 약속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현상세계를 넘어가는 또 다른 차원의 삶의 현실이 있다.
그 신앙적인 세계안의 관점은 자신으로 하여금
현실세계에서 살아가는 자신이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엄연한 존재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다.
고로 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영적실체를 늘 묵상안에서 생각하며,
그 실체를 인정하고, 영적으로 깨어 지각하는 상태에서 살아가면,
그의 신앙은 더 역동적인 활력을 얻을 것이다.

신앙은 약속에 대한 보증을 잡고 사는 것이다.
신앙의 활용은 신용카드의 사용에 따라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믿음의 카드를 사용하여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며,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신앙의 현실이나 상태를 묵상이라는 영적인 생각안에서
현실세계와 접목하여 영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삶을 신앙이라는 관점을 살게 한다.

신앙은 자신의 손에 잡힐듯 하면서도 스스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공유되어 있는 속성이 있다.
고로 영적생각이라는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나 그의 역사를 이해하며,
그가 신앙인에게 약속하신 권세와 능력과 성품의 축복들을 음미하며,
그것을 현실세계에 적용하여 그축복의 영역을 확대하며,
그안에서 신앙인의 삶의 자리를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크리스챤의 신앙은 하나님에게서 출발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것도 그의 손에 있어 가능하다.
신앙인은 다만 그 과정안에서 하나님의 제안과 인도와 결과에 대해 수용하고
순응하고 따라 가므로 도달하게 된다.
그 과정안에서 성도의 묵상의 습관은
자신속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약속들과 그의 능력의 범주안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건강한 자아로 세우며,
자신안에 심겨진 그의 성품이 자신안에서 내면화되어 가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날마다 새로와지며,
영적인 건강과 능력안에서 신앙인의 자긍심을 키워 갈수 있다.

요즘 나는 묵상의 세계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기대한다.
신앙인의 묵상이란 막연한 생각의 상상을 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자신의 영성에 잇닿아있는 하나님과
그의 영적세게에 접목되어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펼쳐나가는 힘의 근원을 공급받는다.
자신의 묵상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하나님을 만나며,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며, 보호하며,
인도하시는 그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하는 믿음의 세계로 나가게 한다.

나는 오늘도 자신의 묵상의 세계안에서 새롭게 다가오시는 그분의 자비와 능력을 경험하며,
그가 베풀어 주시는 오늘 내가 삶을 살아가는데 나에게 필요한 은총을 기대한다.
그 은총은 그분의 영의 만져주시는 기름부으심을 통해,
그의 성품안에서 나오는 사랑의 경험을 통해,
온 세상에 편만해 있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자신의 깊은 곳에 까지 임재하시는
그분의 재창조사역의 능력을 통해, 나는 날마다 새로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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