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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18
    시험을 이기는 사람
    목동
  2. 2007/02/17
    3 가지 단계의 구원의 삶
    목동
  3. 2007/02/14
    믿음의 말씀과 성령의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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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2/14
    크리스챤 묵상과 내면의 치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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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2/12
    건강한 영성유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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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2/11
    진리안에서의 인생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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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2/06
    자신의 영성과 자신속에 있는 죄의 문제
    목동
  8. 2007/02/06
    신의 진리와 자비
    목동
  9. 2007/01/30
    주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
    목동
  10. 2007/01/22
    중풍병자의 치유받음
    목동

시험을 이기는 사람

누가복음 4:1-13 예수님의 시험받으심
1.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2.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는 몹시 시장하셨다.
3.바로 그때 마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이 되게 하라.”
4.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사람이 빵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라고 쓰여있다.”
5.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려가 잠깐 사이에 셋상의 모든 나라를 보여주면서
6.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7.그러므로 네가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이 네 것이 될 것이다.”
8.그때 예수님이말씀하셨다.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쓰여있다.”
9.또 다시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려 보아라.
10.성경에는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니
11.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붙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라고 쓰여있다”
12.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에게 “성경에는 ‘주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하고
대답하셨다.
13.마귀는 이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적절한 시기가 올때까지 잠시 예수님을 떠나갔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은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인도를 따라,
선구자였던 요한에게 받으신 것이다.
인간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주님이셨지만,
그는 인간 요한에게 자신을 숙이고, 하나님의 계시적인 드러내심에 순응하셨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자 그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그에게 충만하신 성령의 임재가 함께 하셨다.

그가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서 그가 자신에게 향하는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
성령이 충만하면 자신에게로 집중하는 것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하나님에게로 촛점을 맞추게 된다.
성령이 충만한 상태는 자신안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하나님중심의 태도로 그의 인도를 따르는 상태이다.
성령충만은 자신에게 촛점이 맞추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촛점이 맞추어, 자신이 하나님의 채널에 맞추어 살아가는 상태이다.

사명을 감당하기전에 먼저 자신을 이길수 있는 단계를 거치는 것은
공적인 일을 하기전에 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상태에서
자신을 공적인 일에 맡길수 있는 단계로 나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받은 시험은 사사로운 일이나 자기중심적인 사고태도에서
타인들을 위하는 태도로 나가는 전단계로서
주님은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사명자이심을 보이셨다.

인생에는 여러가지 시험이 있다.
시간을 통해 오는 기다림의 시간들, 혹은 일정기간의 훈련을 거치는 과정들이 있다.
전문적인 일이나 기능을 습득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요하며,
보다 나은 단계에나, 상급의 상태로 옮아가기 위해 여러가지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인생의 삶의 현장에 곳곳에 자신을 훈련케 하는 역경이나, 고난의 기간이 있다.
지도자를 세울 때에도, 사람을 검증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시험을(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 이길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때로는 은혜가 충만한 곳에 여러가지 시험이나 시련이 놓여 있기도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는 편에서 사람들을 돕고, 세우고, 그리고 인도하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편에서 사람들을 훈련하는 과정을 통과하게 인도한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셨다. 금식은 자신을 이기는 지름길이다.
금식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이다.
인간이 금식을 통해 자신(육성)을 이기고 자기한계에 부딪치며,
그안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에 의존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선순위에 맞추어 자신안에 육성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을 접촉하는 영성을 이루게 한다.

반면에 사단은 인간을 시험에 빠뜨리고, 시험에 지게 유도한다.
인간에게 다가와 여러 가지로 인간을 유혹하며 미혹한다.
때로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거나, 혹은 두려움을 주어,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어리석은 가르침이나, 헛된 속임수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미혹한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그의 아들의 신분이나 권위를 걸고 유혹을 한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걸고자 하는 시험제안에는 상당한 전략과 모략을 갖고 접근한다.
고로 사람들은 그런 유혹이나 시험을 이기기가 쉽지않다.
그러므로 시험에 임하는 태도나 자세는 시험의 의도를 잘파악하여,
그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성도들이 시험에 드는 대부분은 자신속에 있는 걸림돌과 같은 편견이나
사로잡힌 생각때문에 그렇다.
예를들어 초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쉽게 세상으로 넘어지는 것은
그만큼 세상적인 유혹이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가치관이나 태도등이 강하게
그들자신에게 다가와 영형을 주므로,
쉽게 세상의 그릇된 습성에 빠져(자신이 알코올에 약한경우에
쉽게 알코올 중독에 돌이키게 되듯이말이다)세상에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금식하신 상태라, 가장 음식에 대한 굶주림이 있는 상태였기에,
빵은 그에게 절실한 육체적인 요구에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예수님에게 그 자신을 위해서는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지 않는다.

아담의 범죄는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앞에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여, 범죄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을 극복하는 것을 통해 시험을 물리친다.

예수님은 사단의 유혹이나 시험의 도전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방어하시며,
시험을 물리치신다.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며, 하나님의 뜻의 선언이다.
그 말씀은 예언되고 약속된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의 사역이 나타난 하나님의 언어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로고스로서의 말씀을
자신의 내면화를 통해(레마의 말씀:자신에게 주어진 말씀)
자신이 당하는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안에 있는 믿음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내면화된 영이요 생명인 말씀)은
자신의 믿음을 받쳐주는 버팀목의 역활을 하며,
여러가지 시험(사단에게서 오는)을 물리치는 공격용무기로 활용이 된다.

마귀는 인간에게 자신의 허구한 것을 과장하여, 유혹하며,
세상의 여러가지 것으로 인간을 이끌어 허왕되게 살도록 유도한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 하루 아침에 출세하려는 이들,
과정없이 목표에 도달하려는 이들이 있다.
마치 그들은 세상의 것을 쉽게 얻을수 있다는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중에는 항상 3가지 시험을 조심해야 하는데,
세상의 물질세계를 세속의 눈으로 보는 안목의 정욕과
자신속에 있는 나약한 육체의 욕구에 쉽게 자신을 충동하게 하는 육신의 정욕과
자신을 허왕된 세상을 바람잡으려듯 자신의 세상영달에
뿌리를 둔 생각이나 태도에서 나오는 자신안에 있는 이생(이세상)의 자랑거리이다.
모두가 세상적인 유혹으로 허왕된 마음에 부딪쳐
자신을 옭아매는 시험의 수단으로 자신에게 다가온다.

헛된 꿈을 갖고 사는 이는 허왕을 좇아가다. 패가 망신한다.
사단은 자신이 교만하여, 저질른 죄의 대가로 그의 아름다운 지위가 박탈되어,
자신의 위치에서 탈선한 자이다.
그는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양 착각하며, 행세를 한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헛된 꿈에 부풀게 하여,
자기와 똑같이 망하게 하는대로 이끌어간다.

주님은 마귀가 거는 시험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인용하셔서 물리치셨다.
말씀은 성령의 인도와 조명을 통해 바르게 인용하며,
해석하며, 적용할때에 말씀의 본뜻이 살아나며,
그 말씀이 자신에게 적용이 되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자신을 변화시키며,
살아있는 주님의 메시지로 자신에게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의 허왕된 꿈을 부추기는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삶의 목적의식이 있다.
성도들 자신의 삶의 목표는 부귀영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자기성공에 도취되어 그것을(세상의 욕망들, 성공, 부귀영화)
좇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인생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데,
그 목적은 자신의 생애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주님의 뜻하심을 이루며, 그안에서 자신의 도달할 자기완성과
자기가 해야할 자기사명을 성취하는 일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가장 쉬운 길(죄를 짓는 일이나
인생을 허비하는 일은 쉬운 일)로 빠지도록 이끌어 간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길은 모두에게 한번 주어진 인생이며,
결코 모두에게 쉬운 길은 아니다.

그리고 지름길보다는 길게 놓여진 마라톤의 경기코스와 같이
시간의 과정을 겪어야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도 시간이 필요하며, 일의 성취도, 노력의 투자가 필요하다.
시간과 노력이 투자함이 없이 성공이나 소득을 얻으려는 것은
헛된 것을 좇아가게하는 것이다.

때로는 마귀는 쉬운 길로 인생들을 인도하여, 망해가는 쪽으로 유도한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장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라는 것을 유혹한다.
사람들이 과대망상(지나친 자기능력과시)이나, 허왕된 꿈
(벼락부자, 헛된 명예와 뱌락출세만을 추구하는 태도)은 추구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건강하게 하며 사는 생활을 이다.
그렇지 않고 그런 헛된 것들을 추구하는 인생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의 손에서 자기가 추구하는 허왕된 것들은 쉽게사라지게 마련이다.

모든 인생에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 있으며,
각자 인생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구체적인 리가 있지만,
동시에 인생자신이 감당해야하는 일들이 있으며,
옳은 것을 선택하며, 결단하여 이루어가는 책임이 있다.

인생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은 당연히 인간이 갖추어야 할 순종과
겸손의 근본적인 태도와
하나님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를 요구한다.
또한 인생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떤 경우라도
자신이 책임지는 태도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신앙인이 빠지기 쉬운 실수는 자신이 편리하게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시도이다.
신앙은 자신이 처한 문제들을 돕는 역활을 한다.
신앙인은 당연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그분의 도움아래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두어야 할 것이다.
목적이 변하여 수단으로 전락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을 목적으로가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는
신앙인 에게 자신이 주님을 믿고 주님을 중심으로 산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기가 주인노릇하는 것과 같다.

그런 태도는 자신의 신앙적인 활동이나 봉사를 조건부적인 신앙의 태도로 일관 하기 쉽다.
조건이 채워지지 않으면 쉽게 낙담하고,
더나아가 신앙의 깊은 단계로 나가지 못하는 얕은 신앙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기복적인 신앙의 맹점은 자신의 조건적인 태도로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신앙을 세우려는 것이며
그런 신앙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항상 성장하지 못하는
어린이와 같은 유아기적인(자기에게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이나 타인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태도) 자아중심의 신앙에 머물게 한다

그외 잘못된 신앙의 폐해중에는
종교적인 오용이나 남용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며,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릇된 영적인 가르침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하게 하기도 한다.
편협적인 신앙관은 자기안에 갇힌 소아적인 이기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신앙형태가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형식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들로 만들어 버린다.

예수님은 예수님 당시에 살고 있었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신앙이나 종교적인 행태에 대해 많은 책망을 주셨다.
당시에 조상들로 부터 받은 하나님의 율법에 철두철미한 종교인들에게
오히려 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책망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지 않고
자기가 우상으로 놓여있어,
모든 종교적인 관습이나 실천을 자기중심으로 이해하며,
자기우상의 테두리안에서 외형적인 종교인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을 저주하셨다.

여기에 주어진 시험의 일을 통해, 첫사람 아담과 하와가 받은 사단의 유혹과 대비된다.
그들은 그 사단의 유혹과 시험에 걸려 자신들이 넘어지게 된 것을 생각케 하지만,
주 예수님의 시험은 그 시험을 통해 자신이 테스트를 넘어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공생애를 살기 시작하게 된다.

인간이 받는 시험은 인간의 욕심과 연결되어 있다.
첫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선악의 열매를 따먹고 싶은 자신들속에 있는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욕심이 결국 자신들을 하나님의 위치에 까지 올려놓는 결과가 되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그들의 욕망은
그들을 더 낮은 인간수준이하의 타락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이 세월에, 하나님을 의심과 불신으로 점철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힘들게 하였다.
결국 그들 출애굽을 한 해방세대는 광야에서 그들이 겪는 환경에서
오는 힘드는 삶의 조건과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못하는 조급함과
자기들의 우상들(이집트의 우상들,
그리고 자기안에 있는 불신이나 불순종의 우상들) 때문에
거의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로부터 자신이 받은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므로써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나 올바른신앙을 가지고저 하는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셨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성도들도 주님과 같이 시험을 이기고 나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힘이나 권한을 추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을 향한 뜻에 있어서나,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으로 시험을 이기셨다.

시험을 통관하는 자만이 합격이나 혹은 일정수준의 자격을 갖춘 일꾼으로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된다.
시험받음은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을 가늠케하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실제 시험에 임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시험을 받아야 하는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공직자가 공직에 나가기전에 후보자를 검증하는 것도
그 사람을 판단하고, 살펴보고, 됨됨이를 파악하는 것이다.

시험을 받는 일중에 자신의 사람됨을 갖추는 시험이 어려운 시험이다.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이 진정한 시험의 합격자인것이다.
자신을 이긴 사람은 세상에 그어떤 것을 정복한 것이나,
무엇을 얻은 것보다도 더 강한 자긍심을 갖게 하며,
자신을 이긴 사람은 어느 일에도 적합하게 일을 추진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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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지 단계의 구원의 삶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의 은총에 대해 살펴보고저 한다.
주님은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성도의 전인구원으로 인도하신다. 

성도들이 받은 구원은 3가지면에서  살펴볼수 있다. 


그것은 신앙고백과 더불어 시작되는 순간부터,
즉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생애적인 기간들을 통해,
구원의 시작에서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영적인 일생이 진행이 되어간다. 
그 과정을 통해 성도가 가진 믿음을 통해 영적생활의 전반에 걸쳐서,
구원의 현재성과 진행형과 미래완성형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받고 믿은 즉시 성도들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은
즉시 현재나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약속이 담긴 축복이 시작된다. 
그 축복에는 죄의 정죄당함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며
(자신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가 사함받아,
자신이 비록 죄를 짓는 육체안에서 살지만, 이미 의인으로 여김을 받으며 살고 있음),
죄의 형벌(죄의 속박과 그 결과에 의한 저주받음, 그리고 절망과 고통에서 사는 상태)
에서 벗어나, 의(주님의 의) 은총안에사는
자녀의 권리안(거지같은 죄인의 모습에서 왕같은 자녀의 신분변화)으로 살게 되며,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나라(위치이동: 자신의 영역이 옮겨져
신앙안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에게 인정을 받고
이후에 천국에서 영생과 상급으로 주어짐)로 옮겨지게 되었다. 

 

자신의 신분변화에 이어 의식변화(저주받은 부정적인 사고시스템에서
축복을 통하는 긍정적인 인생관)를 가져오는 내면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자신의 옛 죄(원죄, 자범죄)를 범한 옛자아(자신이 주인노릇하는 자아)에서
새로운 영적인 자아에 눈을 뜨고,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이루며 커가는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자아(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아)의 성장을 이루어 간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받은 구원은 자신의 영적인 일생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와 교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만남의 삶의 과정이며, 연속이다. 

이 구원에 관해서, 성도들의 생활을 통해 계속적으로 성장케하는 책임이 있으며,
사람들의 삶이 전인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여 믿음으로, 영혼의 생명을 얻어,
그 생명을 풍성하게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앙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로부터 시작이 된다. 
주님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약속하셨다. 
신자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안에서
모든 일이 형통(고난도 실패도, 좌절도, 고통도
자신의 영성의 성장을 형성하는 유익을 가져오므로
주님의 손끝에서 자신이 경험한 모든 일을 합하여,
자신의 완성을 이루어 내는 창조주의 솜씨에 의존함)하게 되며,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시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모든 경험들이 열매를 이루어 간다. 

 

더나아가, 구원의 샬롬의 웰빙(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인)의 상태는
자신의 영혼의 만족과 성장과 그리고 더불어오는
육체의 온전한 (늙어가는 것도 건강한 상태에서)생활에 있으며,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만족한 태도로 살아가는 상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샬롬의 구원의 축복은 전인적인 구원을 가져오는 축복이며,
인간의 상태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이상적인 발전을 가져오며 그분의 손길안에서 자기완성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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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말씀과 성령의 상담

요15:1-8

 

참 포도나무비유에서의 주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교제의 갱신하는 문제가
신앙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되려면, 자신의 믿음이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지속적인 주님과의 산 교제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뿌리깊은 신앙의 터전을 내리도록 힘써야 할것이다.

 

그 뿌리는 자신의 주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산 믿음에서 시작이 되며,
그 살아있는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 

 

믿음으로 발전시키는 들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여 그 말씀을 생각하고,
마음에 감동을 받은대로 자신의 마음속에 되새겨서(반복해서 말씀을 상기하며,
그 구체적인 가르침의 교훈이 자신의 생각의 시스템에 새기도록)
그 말씀의 메시지와 교훈이 자신의 의식속에 의식화
(가치관과 인생관을 정립하는 과정)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실천 되어야 한다. 

 

그 산 믿음은 단지 성경을 문자만이 아니라,
그 기록된 말씀을 자신에게 살아있는 메시지로 받아들일때에,
자신안에 영향을 주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법으로 주어진다. 

고로 자신이 성경을 읽고 듣는 선포되어지고 주어진 말씀안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기록된 성경에 나타난 말씀들을 단지 문자에 매이지 말고,
자신의 영에 부딪히는 살아있는 언어로 받아들인다.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큐티를 안하면 불안해하는 율법적인 태도에 대해
자신의 믿음시스템이 문제라면 아직도 자신의 믿음이
율법주의적 사고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에 위해 자신에게 말씀의 내용을 율법적으로 적용하는 경우는
자신의 영을 죽이는 종교나 관념적이며,형식화된 신앙으로 전락하기 쉬운 것이다. 
그런즉, 문자의 교리에 매이는 것과 종교적인 형식화에 매이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 종교직인 괴로운 짐을 더 얹어주는 경우이다. 

 

위에서 언급한 영적인 문제에 대해 성령께서 지적하는 권면을 듣고
자신의 영성의 흐름에 대해 근본적으로 갱신을 가져오는 .
영혼을 살리는 믿음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씀을 읽고 묵상하든, 혹은 선포된 말씀을 듣든지,
자기자신에게 믿음안에서 자신의 영을 살리는 말씀을 부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신에게 생명력있는 믿음이 생기고,
자신과 남을 용서를 하는 넉넉한 신앙을 갖게 되어,
자신도 살리고 풍성하게 하게 하며,
남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남을 살리는
사람의 눈높이의 영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어
자신도 남도 영적으로 죽게 만드는 문자에 매이는 율법적 신앙에서 벗어나,
영혼을 움직이는 신앙의 영향력아래에 머물러 있게 된다.

 

예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가?
그것은 "내 양은 내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신대로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자신의 영혼안에 확신과 기쁨과 평안으로 다가온다. 

이때에 조심할 것은 주님의 음성외에 두가지의 음성에 주위를 해야 한다. 

마귀의 음성과 자신의 속에서 나오는 음성을 분별하여,

그것으로부터 주님의 음성을 지키며,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구체화(순종하는 자신이나, 설득되는 자신)할수 있어야 한다.  

 

말씀을 듣든지 상고하든지간에 주님의 음성을 들으므로
믿음이 자신의 심성안에서 생겨 난다.
그리고 생겨난 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가져오는 축복이 된다. 
말씀을 통해 얻은 믿음은 자신에게 실상에 대해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자신이 예수님안에서 죄사함을 받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성령충만한 모습을 바라는, 그리고 예를 들면,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중에 하나인,
가족구원을 바라보는  자신의 믿음안에서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중에 “나의 하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말씀으로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생명의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생산하고 창조하는 하나님의 믿음을 창출 한다. 

 

고로 성도는 믿음으로 일을 한다. 
참성도는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하기를 힘쓰며,
더 나아가, 자신의 삶안에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발견한다.

무엇을 바랄 것인가? 지금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첫번째 바라는 것은 예수님과 온전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채널이 강하게 나타나도록 만들어
자신을  상담을 하든지, 혹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갖든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본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사역에 대해서는 바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그 사역에 대해서도 성령으로 역사하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성령의 재충만을 받을 수 있도록, 
성령의 강한 역사가 나타나도록 자신이 열려있으며,
성령의 역사가 자신에게 전달되도록, 성령으로 열려진 말씀에 대해,
항상 마음과 영혼이 아울러 함께 응답하는 열린 자세로 
자신의 영성의 발전을  이루도록 할 일이다.

 

특히 성령이 성도들 자신에게 권면하는 것으로,,
성도들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메시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성령안에서 자기상담을 하여
자신안에서 지속적으로 개선과 치유가 일어나,
전인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재창조하시는 사역에

자신을 열어 놓는 일을 하는 것이다. 

 

성령을 자신의 상담자로 모시고,
자신을 상담하는 일은 항상 지속되어야 할 성도의 거룩한 의무이며,
자신에게 주는 무한한 축복이며,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삶의 과정이다. 

고로 자신이 시간을 정해서,
성령안에서 무릎을 끓고 상담받는 일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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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묵상과 내면의 치유(1)

새하늘, 새땅, 새마음, 새로운 몸

성도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약속으로 주어져 있는 소망을 자신의 마음과 정신, 또한 동기들,그리고 매일의 분별로 실제화하는 것을 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임재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변화를 일으킨다.
세상의 절망과 죽음을 극복하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풍성한 삶을 살도록 초청을 받아,
단순히 영생을 주는 피안의 것이 아니며,
자신의 마음에 실제적으로 경험되어지는 현실로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의 종교적인 전통이나 가르침들은 원래 인간들이
잃어버린 영생을 주는 영향력을 사람들이 힘입고 살도록 돕는 것을 추구한다.
그들은 어떤 확실한 내면의 자각이나 혹은 묵상의 조명을 개발하는 필요성을 통해
자신안에 일어나는 내적인 갈등을 치유하며, 약속되어진 내면의 평안을 추구하기 위해 한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죄책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여왔다.
우리가 어떻게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가?
그것을 현대적인 질문으로 바꾸어 보면, 실존적인 고통에 대한 물음을 갖게한다.
어떻게 역경과 고난의 세상에서 희망을 품고 살수 있을까?
인류의 인재적인 재난이나 혹은 환경적인 소멸이나 재앙에 직면해 있는 세계를
어떻게 희망으로 바꾸어진 미래를 열것인가?
그 인간실존에 대한 희망에 대한 질문은 실존의 다른 문제들
즉 인간들의 죄책, 진정성, 사역등에 대한 문제를 풀기전에 답변을 가져야 할 문제이다.

사람들이 우주적이고 개인적인 위기가운데에 살고 있는 것에도 불구하더라도,
인간생활의 출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난다.
그 패러다임은 개인적이고 우주적인 고통에서 구해줄 만한
하나님의 희망과 더불어 함께 인간문제를 풀어가는
인간의 책임적인 참여를 통해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패러다임의 근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부활에 대한 소망이다.
새로운 생명은 낡은 것으로부터 소생한다.
죽음은 결코 인생에 마지막 답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세상의 존재들을 재창조하며, 갱신하는 것으로 활동한다.
그런 이슈들에 대한 해결책은 개개인적으로
어떻게 영원히 재창조하며 갱신하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자각을 개발 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은
이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을 그들의 신앙안에서 구하며 살아왔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가를 배워 왔으며,
그리고 어떻게 자신들안에 있는 내면의 갈등을 다루는 가를 익혀왔다.
그리고 그들자신안에 하나님 센터의 중심적인 역활이나 활동들을 듣기를 터득해왔다.
우리는 그들이 배운 내면청취의 여러가지 방법들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Dwight H. Judy, "Christian Meditation and Inner Healing"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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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영성유지를 위해


하나님중심의 삶을 살고저 하는 자신의 태도가, 저으기 자기중심적일때에,
그 숭고한 생각이나 묵상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주의로 비쳐질때가 있다. 
신앙인들이 쉽게 빠지는 자기연민이나, 자기도취에 대해
항상 말씀안에서 자신을 비쳐보는 영적인 거울로 자신의 동기와 목적이나,
자신이 하고저 하는 영적인 헌신의 깊은 생각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앙인들이 갖는 일반적인 성도의 목적에 대한 가르침처럼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영광이라는 문구를 내세워
자신의 행위를 거룩으로 포장할지라도 자신안에 있는 숨은 불순한 동기나,
그릇된 방향성은 사람의 깊은 속을 모두 다 헤아려 살피시는 하나님의 안목에 드러나게 된다. 

 

자신이 헌신하는 영적인 시간들, 드리는 몸의헌신들,
주님과 교제하는 순간들속에서 항상 면밀하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다 보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자신의 영성의 성장과 전진에 장애가 될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겪는 여러가지 일들이 오감을 통해
항상 자신에게 두뇌의 인식창고에 이성으로나,
감성으로서 각각 낱개의 정보를 입력하고 있다. 
그 정보들이 모여 자신안에 하나의 사고적 가치관이나
감성적 습성으로 자신을 만들어 간다. 

신앙인은 자신에게 들어오는 모든 정보에 대해 검증할 필요가 있다. 

오감중에서 가장 쉽게 들어오는 감각의 창구는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자신의 정보의 창고에 쌓이게 되어, 자신의 영성의 집들을 이루는 재료들이 되어진다. 

그 재료들중에 어둠에서 온 불순한 것들과, 방종에서 온 악한 것들,
헛된 가르침이나 정보에서 들어온 부정한 것들,
잘못된 윤리나 도적에서 온 그릇된 것들,
영적인 무지로 인하여 들어온 어리석은 것들등을
판단하고 살피는 자신의 영성의 바로미터의 불빛이 켜있어야,
그런 것들을 자신의 내면에서 걸러내어, 마음에 뿌려져
자신의 영혼에 더러운 것들로 남아있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기회개와 내면청소를 해야 건강한 영성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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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안에서의 인생의 자유

요한이 기록한 기쁜 소식 8:31-32
"너희가 내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되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자신에게 멀기만 느껴질때가 있다.
그때는 말씀을 읽어도 마음에 스쳐지나며, 자신의 기억에서 곧 사라진다.
그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마음에 부딪치지 않아 메아리로 남았다가 이내 잊어버리게 된다.
말씀을 붙잡았다고 생각하고 마음안에 되새김질해도 그 말씀의 맛이 둔탁하기만 한다.

자신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머물곳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의식안에는 가득세상의 언어로 꽉차있다.
자신의 생각에는 주님의 말씀을 넣어둘 의식의 창고가 없다.
세상의 잡다한 사상이나, 규칙들이 자신을 얽어매어,
영적으로 맹인이 되게 하고,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육적인 소리에 한눈을 팔아,
말씀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예수님은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세상에 오셨다.
그는 말씀 그 자체이며,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근본 인생에게 생명을 주는 영생의 말씀이시며,
그는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셨다.
그는 하나님이 육신이 된 말씀으로 이세상에 오셔서,
인간세상에 계시되고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임하셨다.

오늘날,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나타나있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말씀의 주제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촛점이 맞추어 져 있다.
성경을 어디나 펴서 읽어도 쉽게 주님의 음성과 흔적을 발견할수 있다.

시초부터 시말까지 전개된 계시된 말씀은
인간세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려주는 메시지로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된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예언들이 때가 되어 이루어 진다.
예수님 그는 또한 선포되어진 말씀으로 세상 어느 곳에 든지 복음의 메시지가 전파되는 곳마다,
선포되어지는 그 말씀안에 주님은 그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나타난다.
말씀이 알려지는 곳에 예수님이 계신다.

그 말씀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경험하는 이에게 생명의 메세지로,
병들고 찌들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부요한 삶을 주는 능력의 언어로,
어둠에 처한 인생들에게 빛의 전파로,
실패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성공에 대한 강한 의욕의 언어로,
낙심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격려의 메시지로,
절망하는 이웃에게는 소망의 닻으로 다가온다.

주님이 계시는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주님의 영이 임하신다.
주님의 영은 선포되어진 말씀을 통해 따르는 표적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자극과 격려와 치유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며,
그의 임재하심을 동반한 말씀의 선포을 통해,
더 명료하고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온다.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말씀에 거하는 자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믿고 그를 인생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이며 그들은 어디서나 언제든지,
주님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모든 일에 대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며,
이 세상속에서 특별하게 주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실천하는 제자가 된다.

진리는 단지 언어이며, 이성이다라고 여기는 경우는
진리를 받은 자신의 신앙이 이성에 따라 움직이고,
이성의 판단을 좇아 신앙의 신비의 부분이 상실된다.
그리고 이성을 좇아 진리를 추구하다보면
자신속에 있는 진리는 자신의 이성의 규격된 틀안에서,
진리의 맛은 잃어지고, 그 진리의 보석의 가치는 화석이 되며,
자신을 율법화된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는 원리이다라고만 여기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자신은 자신이 받은 원칙대로 영적인 원리나
혹은 교훈으로 받은 가르침을 따라 행동을 하지만,
진리에서 나오는 인격적인 관계나 개인적인 교제는 성립이 되지 않고,
더이상 진리와 주고 받는 살아있는 인격인 하나님과의 신앙의 깊은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진리는 과연, 이성이나 원리일까? 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넘어서,
진리는 인격이며, 생명이며, 우주를 말씀(진리)으로 창조한 하나님이며,
우주의 원리를 세운 창조주이며,
인간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교제를 나누며, 대화를 하기를 원하는 주님이다.
그 진리이신 주님을 아는 자가 진리안에 거한다.
진리는 단지 두뇌의 이성이나 지적인 활동으로 아는 것뿐 아니라,
일회적이든 다양하고 다차원적인 경험으로든 자신의 오감에서 오는 경험으로 알며,
인격이신 진리와 의 인격적인교제의
인생경험의 일정한 역사(길든지 짧든지 그러나 대개는 연결되어가는) 인생의 과정속에서 알아가는 것이다.

진리를 알아가려는 사람들은 진리이신 하나님은
늘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해 오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과거에 머물러 그분을 판단하지 말것이며,
과거의 습관이나 패턴으로 오늘의 진리경험을 왜곡하지 말며,
오늘의 경험의 한계에서 미래에 다가올 진리이신
그분의 거대한 역사(이루어지지 않은 많은 예언을 기록된 성경은 포함하고 있다)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를 머물 예언이나 약속에 붙잡힌 채로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는 오늘의 진리이신 주님의 숨결이나
손길이나 발자취를 자신의 삶을 스쳐 지나가는 우연으로 여겨서도 안될 것이다.

신앙은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우연의 일들을 필연으로 해석하여,
진리를 알며 진리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가지가지의 삶의 얽매이는 현장속에서 살아간다.
먼저는 인간의 시조가 범한 원죄의 속박은 인류모두에게 죄의 구속으로 얽어매어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죄의 갇혀진 삶의 환경안에서 살아간다.
그 죄는 인생의 현장에 불합리와 불법과 저주와
형벌을 가져오는 인생의 굴곡안에 인생자신을 갇히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죽음과 멸망으로 달음질하는 처절한 절망하는 삶으로 전락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주님은 인간을 갇히게 하는 모든 것을 해방하기 위해 이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인간을 대신하며 죄의 댓가인 죽음의 형벌을 받아,
모든 갇힘으로부터 인간해방과 자유를 주셨다.
그 진리안에 죄와 그영향력의 모든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을 맛보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가져다 주는 인생의 능력과 삶의 만족이 있다.
진리를 알고 따르는 자들은 인생자체의 무지로부터 자유로울수 있다.
인생의 생사화복에 대한 무지로부터 벗어나 인생이 알수 있는
삶의 비밀의 지식을 알고, 자신이 겪는 모든 인생경험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판단의 지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모든 인생이 겪는 불안과
형벌받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을 받아,
스스로 알수 없는 미망이나 미혹에서 건짐을 받아,
세상의 그 누구로부터에서도 얻지 못하는 마음의 평안함과
자신을 삶의 목적을 두고 세상으로 내어놓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인생의 안식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무능한 인생의 탄식을 바꾸어주는 유능함으로 그분안에서 발견한다.
진리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겪는 여러 종류의 유혹이나 좌절이나,
시련이나 절망에서 자신을 일으키는 진리의 능력을 경험할수 있다.
진리를 품고 있는 사람이 절망적인 인생의 환경을 자신안에 있는 희망으로 다가갈수 있으며,
여러가지 인생자신을 무능하게 하는 요소(자아감상실에서 오는 혼란과 방향상실,
자기무력감에서 오는 불안과 내면의 고통, 혹독한 환경의 역경과 시련,
인생의 쓰디쓴 실패와 좌절,
내면의 분노와 갈등을 일으키는 인간관계의 상처들)들을 극복하게 한다.

유한한 자원의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그 세상의 유한성에서 겪는 모든(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차원들)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진리이신 주님은 부요한 창조주로 그에게 있어서
모든만물을 무에서 유로 이루어놓은 것을 통해
(오늘도 개인이나 인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다)
그는 진리안에 있는 자들에게 그분안에 있는 모든 부요와 풍성함을 맛보며 살도록 한다.
진리를 믿고 따르는 신앙만이 세상의 모든 궁핍
(삶의 왜곡이나 인생고통의 질곡에서 오는 불만족한 인생의 상태)으로부터
진정한 승리를 맛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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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영성과 자신속에 있는 죄의 문제

2007/02/06 오후 11:26 | 영성과 묵상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어두워 져 있는 가를 잘 보지를 못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안목으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바라볼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기고 싶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기가 쉬운 것으로 인해,
자신의 전반적인 성품이나 본성에서 자신의 허물이나 자신의 죄의 처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부주의하여 자신의 영성관리를 소홀히 하기 쉽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눈을 뜨게 되면,
자신의 영성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왜곡되어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이 주님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게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정말,자신에게 많은 해결되지 않은 내면의 문제나
영적인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처리하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지난 날 하나님을 섬기고, 영적으로 기도를 드리지만,
자신에게 변화가 없고 여전히 자신안에 있는 모순이나,
불합리한 내면의 불순물이 있음을 부인하는 자세는
결코 하나님앞에 있는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적으로 바른 상태나 혹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나 교제가 이루어지기전에는
자신의 영적생활이나 기도의 생활에 전진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못한다.
그리고 영적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응답받는 일에 대해서
효과가 없을시에는 진지하게 내면의 모습의 자신의 태도나
사고시스템이나 자신의 영성을 살펴볼 일이다.

자신의 영적 생활을 통해 자신의 영성훈련이나 습관들을 통해
자신의 영성이나 신앙진보에 도움에 효과가 많지않다고 느낄때에
그것은 자신을 대하는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자신이 처리하지 못한 더러운 자신의 죄나
그릇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습성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의 그릇된 습관이나 왜곡되고 굳어진 사고 시스템이 문제라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 마음아파하지 않았으며,
그 죄를 처리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를 반문해 필요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주님과 나사이에 영향을 주며,
영적인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해 왔는가?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무지하며,
자신의 자기열림에 대한 희미한 상태에서, 기도를 많이 해본들, 역사는 없는 것이다.
이문제를 반드시 처리하고 싶다고 다짐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영적상태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 그럴까? 그동안 자신이 드린 많은 영적인 시간이나 기도의 시간을 보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효과적인응답은 적은 것이다.

혹 하나님에게 대한 불신과 어두움의 영향아래에서
자신의 영적인 방향성이 하나님의 방향에 빗나가 있기 때문이며,
자신안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심과 자신의 영의 희미함등은
해결되지 않은 죄로 인한 영적인 상태의 문제가 아닌가?

영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앞에 자신의 영을 밝히는 일은
먼저 하나님앞에서 처리해야 할 구체적인 것등 즉 회개치 않은 것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마음으로 지었던 죄: 불신,반역, 방종, 욕망, 정욕, 영적인 소홀등
입술로 지었던 죄: 적극적인 대응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소극적인 대응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저주하는 말, 미워하는 말등,
생각으로 지은 죄: 부정적인 시스템, 불신, 교만이나 방종적인 태도들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죄들외에, 하나님의 영을 거스리는 육체(영과 반대되는)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릇되게 성적인 죄를 범하거나 상상으로 성적으로짓는 죄,
포르노를 보는 것, 생각으로 부정하고 원망하는 죄등
수많은 죄의 영향들이 자신의 영혼에 미치고 있다.

또한 영적으로 긍정적인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죄,
해야 할일을 하지않은 것: 전도하지 않은 죄, 기도하지 않은 죄,
이런 죄들을 주님의 십자가앞에 나아가, 나의 시커먼 죄의 먼지를 털어내고,
주님의 피로 말끔히 씻어내는 기도를 드리자.
그리고 나서 자신의 영성생활을 재출발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챤의 보다 나은 영적생활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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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진리와 자비

시편117편1-2
신의 진리와 자비는 인간들의 찬양의 주제이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높이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생활하면서 신의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신의 보호의 테두리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고, 올바름을 알려주며,
정의와 진실과 성실로 신은 인간사회에 영향을 준다.
인생들이 바른 길을 걸아가는 것이 신의 바라는 의도이며,
세상에 진리가 결국 승리할 것을 예정해놓은 것도 신의 작정하신 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자녀에게 바른 길을 살아가도록 원하는 것처럼
신이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인생들을 대하며
그들에게 진리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신의 속성에 속해 있으며, 변하지 않는 그의 절대성에 근거한 원칙이다.
그 원칙으로 세상은 창조되었고, 움직여 지며 일정기간 신이 정한 시점까지 보존되어 간다.

신으로 부터 나온 진리의 언어는 세상을 이룬 근간이 되며,
세상을 창조한 그의 능력의 표시이다.
그의 언어에서 나오는 진리는 영원성과 절대성을 소유하고 있다.
신의 절대적인 진리앞에 상대적인 인간은 신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갈때에,
인간이 겪는 혼돈이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신은 인생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며,
진리의 의미와 가치를 알리기를 원한다.
그의 진리는 그의 언어를 통해 나타난 그의 자기표현에 의해 인간들에게 알려진다.

신의 진리는 인간사회에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자연세계의 원리에 영향을 주며,
인간세상의 생노병사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또한 신의 진리는 인간세상을 향한 그의 심판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는 인간의 행위나 삶의 결과에 대해 평가하며,
단 한번의 기회를 좇아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책임있는 태도를 요구한다.

사람들이 신의 진리를 따르면,
그 사람들과 그들이 사회는 정의와 배려가 있는 세상이 되어,
조화를 이루어 그들이 살기에 좋은 환경을 이루어 간다.

신의 자비는 그의 속성의 또 다른 면이다.
그의 자비는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의 자비는 인간을 용납하며,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는 데에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신은 언제나 한없는 사랑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신의 사랑의 기반위에 세워져 있다.
모든 인간의 사랑의 표현은 신의 사랑의 반영의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신은 인간을 만남과 관계들을 통해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살도록 하였다.
인간세상에 언제나 사랑하는 만남이나 관계가 인간들의 관심사이며,
그 사랑이 언제나 인생의 삶의 큰 주제라고 할수 있다.

늘 인생문제를 안고사는 인간 삶의 현장에 신은 그의 사랑을 나타내 보인다.
그의 사랑이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은
그가 자신의 외아들을 이세상의 살고 있는 인생들을 위해 세상에 보내어
그가 사람들의 모든 죄의 짐들을 지고 죄인으로 죽게 만들어
그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었다.

삶에 지쳐있는 인생들은 자신들이 지는 무거운 짐들을
이미 오래전에 신의 아들에 의해 처리되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혜택을 받으며 살면,
모든 인생의 짐들이나 역경을 극복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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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

누가복음4:14-20

세상의 생명으로 오신 주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전도인이나 설교자도 예수님처럼 성령의 힘으로 말씀을 선포하면
그 생명의 말씀이 증거됩니다.
주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말씀이신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런고로 증거의 영이신 성령께서 설교를 통해 주님을 증거하시며, 주님을 드러내십니다.
선포자가 말씀을 선포할때에 성령이 오셔서
그 선언된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려주시며,
주예수님에게 촛점을 맞추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생명이 선포로서 드러나게 될때에,
성령이 오셔서 그 선포되어진 말씀을 조명하며,
듣는 이들에게 그 주어진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듣는 이들이 성령의 능력안에서 말씀을 선포되어지면,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선포되어진 말씀앞에 겸손한 이들은 성령의 능력을 사모합니다.
또한 말씀을 깨닫기를 힘쓰면,
성령이 오셔서 마음을 열고 말씀의 비밀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실때에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분을 말씀의 주님으로 높였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듣는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나를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나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선포되어진 말씀을 가르치며, 말씀을 드러내면,
주님이 알려지며,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들이 듣는 사람들속에서 일어납니다.

이렇듯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만남을 이루며,
그 만남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며, 자신을 치료하며, 자신을 새롭게 합니다.
선포되어진 말씀은 창조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인생도 자신이 하는 말로서 행동과습관이 조성이 되고,
말의 영향하에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갑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 듣는 자 자신들의 인생을 바꿉니다.
그들의 생각을 바꾸고, 뜻을 바꾸고, 꿈을 키워 갑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온 생명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언어는 듣는 사람들의 삶에서 바라는 바의 실상을 이루는 힘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중심의 관점을 이해하며,
그 관점을 통해 인생을 이해하며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안에 갇혀있는 부정적인 사고 시스템이나,
나약하고 무능하게 바라보는 자신에게서
능력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안에서 할수 있는 자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구약 예언자 이사야를 읽었습니다.
성경을 펴고 그가 읽는 곳은 메시야의 사명에 대한 약속이 선포되어진 곳입니다.
메시야의 임하심과 그의 사역에 대해서 예언자들은 오래전에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으로 주어진 것으로 성취되어지는 약속입니다.
성경은 읽혀지는 것이며, 누군가가 가르치며, 누구가에 의해 증거되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럴때에 성령의 조명과 감동으로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게 되어,
듣는 모든 이에게 영향을 주는 말씀이며,
동시에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메시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구세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한량없이 기름부으심을 통해 예수님은 성령의 사역을 하십니다.
그는 이세상에서 성령으로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늘 성령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셨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작정하신 모든 뜻을 이루셨습니다.

더나아가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고, 성령을 사람들에게 보내십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마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고, 주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힘을 받아,
자신의 인생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인치심이며, 하나님 임재의 구체적인 사인입니다.

또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기름부으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그힘으로 살게하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앞에 나오는 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기대합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을 들을때에 성령의 임재하심이 나타납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내게 임하면
나에게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의 능력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 기름부으심은 사람의 마음에 빛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나의 어두운 마음이 밝은 마음으로 변합니다.
나의 감추어진 죄악이 드러나 더럽고 추한자신을 정결케하며,
자신의 어두어진 마음과 헛된생각을 건전하게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은 나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입니다.

또한 자신의 생각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오면 육신의 생각이 영의 생각으로 변화 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불안하며 걱정안에 있는 자신에게 평안과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안에 머물게 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자신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인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복되고 기쁜소식으로 증거됩니다.
주님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복음의 말씀이 옵니다.
자신스스로 가난하고 겸손하게 여기는 자에게 주님의 말씀이 들려집니다.
그 말씀이 자신에게 축복이 되며 능력이 되어, 자신을 축복받게 합니다.
그 기쁨의 축복의 소식은 모든 가난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는 이들을 벗어나게 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삶의 모든 요소에 가난의 상황이 있습니다.
그가난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은
만물의 창조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공급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공급이 우리의 가난을 부요케 합니다.

주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산상수훈의 팔복에 첫번째 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부족한 것을 보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해 자신의 겸손함을 갖게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안에 있는 처지를 바르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앞에 노출시켜,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버려지고 잃어버리고 상처난 자신의 영적상태를 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필요로 하며, 영적으로 왜곡된 자신을 치료하며,
자신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복음의 말씀은 모든 갇힌자에게 놓임을 선포합니다.
인생의 갇힌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생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로 머물러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아래있어, 죄의 영향으로 인하여 저주와 잘망과 죽음을 안고 살아갑니다.
주님은 인간을 죄의노예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이 속박된 경우는 자신안에 있습니다.
육체에 갇힌자, 질병에 갇힌자를 말씀의 치료로 풀어줍니다.
나약에 갇힌자에게 주님의 은혜의 강하게 하심으로 다가옵니다.
말씀을 통해 마음에 은혜를 받으면 자신의 육체가 더 강건하며 강해집니다.
말씀을 통해 생각에 갇힌자 (부정적인 생각에 갇힌자를 긍정적인 생각으로, 저주받았다는 사고시스템을 축복의 사고시스템)를 바꾸어 줍니다.

말씀의 은혜는 마음에 갇힌자 (불안에 갇히고, 걱정에 갇히고,
마음에 답답한 안고)로 살아가는 상태를 풀어 줍니다.
이 불안한 마음에서 평안을 얻습니다.
또한 말씀은 영에 갇힌자 (어둠의 영에 영향을 받음:
이 어둠의 영은 사람들을 가두어 진리를 못보게 하며,
특히 세상의 악을 좇아가게 함)를 진리의 빛을 통해,
그 자신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생명의 빛가운데로 나아오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보통 세상사람들이 못보는 것을 보게 합니다.
먼저는 인생자신에 대해 눈을 뜨게 합니다.
자기자신을 바로 알게 합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상태를 보게 합니다.
인생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 우리 각자에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합니다.
말씀은 지혜의 눈을 뜨게 합니다. 진정한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에 눈을 뜨게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부족을 보고 회개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바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거울을 보아야 자신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남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은 억압당하는 자들을 풀어줍니다.
먼저는 육체의 억압이 있습니다. 육체는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의해 눌림을 받습니다.
삶의 긴장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눌림을 받아, 인간의 육체는 쇠약해 집니다.
현대인은 대부분 정신적인 억압(걱정, 근심이 주는 심리적압박)을 늘 안고 살아갑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인생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믿는 것중에 중요한 것중에
하나는 우리의 삶의 무거운 짐을 그분에게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배려와 인도하에 마음을 가볍게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안에 있는 마음의 불안을 말씀으로 치료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지키며 삽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살지 않을때에 누구나 모두 세상의 영의 억압 (악한 영들의 영향이나 세력 속에서 살아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세상의 악한 영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저주와 불만족한 삶)을 주며,
자신을 정죄하며, 불안과 그릇된 두려움을 심습니다.
그러므로 늘 믿는 이들은 말씀의 영향으로 영적인 자유를 얻도록 힘씁니다.

이스라엘은 50년 마다, 희년을 선포하여, 노예를 풀어주고,
그 땅을 고치며 회복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에 희년을 선포합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축복안에서 모든 것에 대한 회복을 주는 날이며,
서로의 빚을 청산하는 날이며, 노예를 해방시켜주는 날입니다.
억압되고 얽매인 사람들의 상태를 풀어 살려주는 날입니다.
그날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안에서 새롭게 되어지는 날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날은 복음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는 날입니다.
그날에 영원가운데에 자신을 주님의 나라에 속한 자로 삼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죄를 속량하신 날입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의 그 회당에서 예수님을 두루마리 성경을 읽으시고
자리에 돌아가 앉으셨습니다.
그 회당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에게 집중하였습니다.
신앙인의 모든 예배나 신앙적인 모든 활동은 예수님에게 촛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성도들은 세상사람들로부터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예수님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주이며, 우리의 믿음생활의 알파아 오메가 즉 시작과 끝이 주님이 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시작과 끝도 주 예수님으로 되어야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으로 시작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는 첫사랑이나 첫헌신혹은
마음의 변화나 삶의 전환을 통해 늘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종착역에서도 예수님안에 자신의 영혼을 맡겨 드리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촛점은 예수님을 자신의 생활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안에서 그분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정신을 구현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작은 예수로 살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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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의 치유받음

마가복음 2:1-12
1.며칠후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2.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 앞까지 꽉 차서 발 들여놓을 틈도 없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
3.이때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왔다.
4.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가 없어서
그분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렸다.
5.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얘야, 네 죄는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6.그러자 거기 앉아 몇몇 율법학자들은 속으로
7.“이 사람이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다!
하나님 한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8.예수님은 즉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9.중풍병자에게 ‘네 죄는 용서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침구를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10.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특권이 내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하시고 중풍병자에
11.“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침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12.그러자 그는 곧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침구를 걷어 가지고 걸어나갔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놀라 “이런 일은 처음 보았다!”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중풍병자의 치유받음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병자들이 몰려오며, 치료받아야 할 인생들이 밀려온다.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들어가셨을때에,
어느 집에 머물러 계셨는데,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하여 그 집주위는 사람들로 빽빽이 차있었다.

예수님은 세상의 희망이며, 사람들의 구주이다.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다.
죽어가는 세상에 생명을 주러 이땅에 오셨다.

타락한 세상(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는)은 사람들을 방황하게 하고,
허왕되게 하며, 그리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유혹하고,
결국에는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지만,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상담하고,치유하고, 살리며,풍성한 삶으로 인도하며,
결국에는 영원한 영광의 세계로 인생들이 잃었던 낙원으로 앞서서 인생들을 인도하여 가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람들이 구해야 할 생명이다.
죽어가는 인생에 생명의 소식이 가장 필요하다.

죽어가는 중환자에게 소생의 소식은 놀라운 희망이 된다.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치유가 필요하며,
미움이나 분쟁이 있는 곳에 용서와 화해가 필요할 것이다.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바른 길을 제시받는 것이 필요하다.

생명의 소리가 전파되는 곳에 들을 인생들이 몰려오며,
소망이나 구원의 희소식이 알려지는 곳에 뭇 중생들이 생명의 메시지를 목말라 달려온다.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어둠의 현실을 탓하지 말고
할수 있는대로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소리앞으로
자신을 이끌어 오듯 사람들은 듣고 싶어서 예수님에게 몰려왔다.

주변에 병든이들이 많이 있으며, 죽어가는 이들도 멀리 널려있다.
주위에 안타깝게 질고와 고통과 절망가운데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태어날때부터 육체의 질고를 지는 사람들,
우연찮게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반수불수로 생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하고 직장을 잃고,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불안과 허탈속에 살아가는 자신의 속에서 애타게 우는 영혼들,
인생의 실패와 거부된 인생처럼 희망이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남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생존할수 없는 중병의 환자들,
우리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서로 돕고 사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돕는 근치상불능의 사람들의 가족들,
친구의 실패나 고통을 자신의 아픔이나 고통으로 알고 위로하며
도움을 주는 고마운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있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척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버려진 사람들을 거두어.
말없이 소문없이 돕는 자선의 사람들이나 단체의 손길들이 있다.
이렇게 우리들이 모여사는 주변 사회에
인지상정으로 서로 상부상조하며 사는 사람들이 늘 있다.

여기 불행한 중풍병자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돕는 고마운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그 중풍병자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질고로 알고,
어떻게 하든지 친구의 질병을 고쳐
그의 불행한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그들이 그 친구를 치유와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왔다.

중풍병자는 과거에는 잘나가는 인생으로 살았을 것이다.
건강하고 혈기 왕성하게 한때는 자기중심으로 살았을 것이며,
자신의 앞날에 푸른 꿈을 안고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인생의 어려운 일을 만나,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거나, 아니면, 불의의 사고로 척추신경이 마비되었을 것이다.

어쨋든 그는 이제는 육체적으로 무너진 자신의 불행한 상태는
지나온 자신의 삶의 발자취가운데에
숨겨있는 자신이 저지른 죄와 그에 따르는 악한행위가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병들고 못쓰게 되는 인생이 되는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는데,
첫째는 부모의 잘못된 교육이나 영향으로 인하여서 이고,
주변의 좋지 않은 환경이나 나쁜 친구나 주변사람들로 인하여
악한 영향을 받아 그릇된 길로 가기 쉬워진다.

그리고 스스로(인간의 원죄로 인한 타락한 성품이나 악한 성격때문에) 악한 길로
들어서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자신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스스로 악하고
그릇된 자신의 성향으로 인하여 몹쓸 인생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이 건강할때에 자만하거나 방탕하기 쉽고,
잘 나갈때에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오만하게 대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실패나 불행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범죄(사기, 강도, 도둑질)에 연류되었을 수도 있다.

병에는 육체의 병이 있으며,
또한 마음과 정신적인 병도 있다.
먼저, 육체적으로 병이들면 마음도 약해지고, 자신감을 잃게 되기 쉬워진다.
몸이 활동적이지 않으면 마음에 번민이나
쓸데없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점점 부정적인 생각시스템으로 발전하기 쉽고,
심리적으로 불안해져 정신적인 병에 걸리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릇된 가르침이나 철학에 노출되어,
자신의 마음이 허망해지고, 악해지면,
혹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응어리로 품고 있는 사람들도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리기 쉽다.

죄는 인간을 죽이는 독약이다.
독이 몸에 들어가면 서서히 죽어가듯,
우리에게 죄의 씨앗이 있어 우리 자신들을 점점 모든 질병에 노출되어,
병들게 하며 죽어가게 한다.
죄에 대한 치유는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믿음의 차원에서 오는 치유이다.

예수님은 그의 인간의 질병을 담당하신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인 질병에 대해서 치료받기를 원하신다.

그가 가는 곳마다, 육체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치유를 선포하셨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주님은
그 자신이 친히 인간의 병든 것과 연약한 것등을 짊어지고 병을 치유하는 은총을 베푸신다.

본문 2장4절에서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얘야, 네 죄는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질병과 치유의 관계는 죄와 용서의 관계의 비유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인간적인 사랑과
서로 협력하는 믿음을 보시고 용서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중풍병자가 과거에 인간관계안에서
범한 죄를 생각나게 하는 너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의 친구들의 친구살리기의 사랑과 정성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그리고 그들의 우정의 관계를 보시고, 그 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 중풍병자의 질병의 원인이 자신의 죄와 연관이 되어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아마 그 병자는 타인에게 해를 입히거나,
혹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주변인들을 괴롭게 하거나 힘들게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가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병자의 신세로 있지만
그의 마음은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한 마음의 고통이 더 그를 눌러 괴롭혔을 것입니다.
사실 육체적인 질병도 힘들지만,
심리적인 압박이나 마음의 고통이 사람들을 더 괴롭히고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병자는 육체적인 질병보다는 마음의 병으로 인하여 괴로와 했을 것입니다.
그런 병자의 질고의 고통은 그의 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범하는 죄나 악도 모두가 하나님앞에서 범하는 범죄입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것도 또한 그 사람들의 허물입니다.
아마 그 병자의 죄도 그런 종류의 죄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그런 죄로 인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으며,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처받는 사람의 내면에서 느끼는 질병은 다음과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해 미움의 감정이나,
분노하게 하는 악한 감정은 사람의 심정 깊은 곳에 억압의 골을 새겨,
그 깊은 골안에 있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아가 그 상처를 안고
그 악한 감정안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내면을 치유하기 위해,
즉 자신이 과거의 상처로 인한 억압된 감정이나
왜곡된 자신의 상을 새롭게하기 위해
그 상처들을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아의 표현을 통해 자신의 상한 감정이 치유받고,
새롭게 건강한 자아로 발전하게 되어,
현재의 자신의 건강한 모습을 찾으며,
동시에 다가오는 현실의 도전에 대해서도 힘있게 반응하여
자신의 주변에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잘 극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친구들의 병자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의 근본적인 문제를 풀어내 주십니다.
네가 진정 죄에서 용서받았으며, 너의 무거운 짐을 쉬게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형벌과 질병의고통 과 저주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예수님은
항상 당신에게 찾아오는 인생들을 향해
“수고 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인생들을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게 하며,
죄에서 오는 형벌로부터 용서의 복을 받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놀라운 마음의 평안함을 예수님을 통해 소유하게 됩니다.

모든 질병을 극복하는 길은 주님안에 있는 생명의 복과
그의 치유와 축복의 메시지를 통해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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