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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08
    예수의 발견
    목동
  2. 2009/05/07
    두 세계 사이에서
    목동
  3. 2009/05/06
    가능성의 세계를 넘어 믿음의 세계로
    목동
  4. 2009/05/06
    믿음과 기도에 대한 이해
    목동
  5. 2009/05/06
    홀로 설수 없는 인생
    목동
  6. 2009/04/26
    투병기에서
    목동
  7. 2009/02/19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라
    목동
  8. 2009/02/02
    하나님의 씨앗의 도전
    목동
  9. 2009/02/01
    삶과 죽음사이에서
    목동
  10. 2009/01/28
    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의 스타일
    목동

예수의 발견

예수의 발견
요일5:20

나의 영성생활은 어릴때부터 얻은 신앙생활에 근간을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배워온 모태신앙에 의해 습관적으로
혹은 교회생활중심의 영적생활에 치중을 해왔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적이며, 관념적인 신앙에 매이게 되었다.
이런 영적 생활의 습관들이 나로 하여금 개인적이고
역동적인 주님과의 관계를 희석시키며, 나의 영성은 점점 무디어져왔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겪은 육체적인 아픔이나 약함들이 나로 하여금,
다시금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자신의 한계에서 오는 도움의 간절함과 영혼의 절규는
생생한 주님과의 살아있는 인격적인 교제를 불러 일으킨다.

최근 몇년동안 (2-3년)나의 육체적인 무너짐은 그동안 피상적이었던 신앙생활에
한없이 미끌어져내려가는 세상의 이끌림에 방향을 잃고 살아왔으나,
최근에 육체의 한계를 통해 영혼의 불꽃을 불태우면서 주님에게 다가가는 
내면의 소리는 나로 하여금 나의 제한된 신앙생활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하여,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을 하고 있다.

요즘 나는 왜 내가 다시 예수를 찾아야 하는가?  하는 나의 신앙생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잃었던 주님과의 생생한 만남의 교제를 불러 일으키고 싶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로 귀결이 되며,
그 종교는 결국, 인간영혼의 내면의 근본적인 갈급함으로
채워지지 않되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오직 그분만이 길인것이다.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예수가 하나님의 해답이다.
창조주께서 오직 한 이름에게만 그에게 이르는 길을 일러주셨다.
그 이름은 예수, 예수는 신이자, 인간의 몸을 입은 분이다. 그분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다.
그분의 출생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처녀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다.
사람들은 좀 더 그분을 열심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을 통해 인간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현실로 다가갈수 있다.
그분안에는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접촉하는 점이 있다.
그분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며, 인간의 잃었던 위치를 되찾을 수 있다.

왜 내가 그분을 더 열심히 알아야 하는가? 그는 내게 누구이며,
그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분은 나의 구주이며 나의 삶을 다시 새롭게 하신 생명과 부활의 주이다.
근래에 나의 삶에 나타난 인간의 나약함이나 나의 병약함은 나로 하여금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와 생존의 문제에 있어,
나는  한없이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메디칼 치료는 회복할 길이 없는 병약함에 빠져있다.
암보다 더 치료가 힘든 아밀로이드와 그로 인한 심부전증을 순간 겪으며
그리고 폐에 물이차는 육체의 한계속에서 지탱해야 하는
나의 육체적인 상태는 오직 그분만이 나를 만져주셨고, 나의 심장을 새롭게 하셨다.
그는 나의 메디칼 의료의 결과를 통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의 결과를 보고를 의사들로부터 받았을 때에
(아밀로이드가 심장에 영향을 주었을 경우에는 수년내에
나의 육체적생명은 생존의 제한을 받는다는 의학적심판을 받았다)
그 다음 날, 그런 나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구하는 나의 기도(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나는 그의 보혈로 그의 덮으심을 구하며, 7시간을 기돠여 그분의 치료를 받기위해 준비하였다.)
에 응답하여
그는 나의 몸을 어루만져, 나의 심장을 새롭게 만들어 주셨다.
그후에 나는 호흡의 힘을 얻고, 모든 치료의 회복의 시작의 사인으로
그분의 만져주심을 통해 소망의 부활을 얻었다.

이제껏 나의 연약한 육체를 안고  나는 순간마다 외쳤다.
주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힘이 없나이다. 인간의 한계를 경험한 나는 그분의 새롭게 하는 부활의 힘이 아니고는
결코 다시 설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시는가? 그분은 나를 붙드시는분이며,
나를 새롭게 나의 허비된 삶을 이끌어 가신다.
나는 그분의 위로부터의 부르심에 앉힌바 삶을 다시 살아간다.
나의 호흡은 오직 그분의 부활의 힘이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그분을 부단히 찾지 않을 수없는 이유이다.
왜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분을 찾지 않았으며, 그분을 알려고 힘쓰지 않았는가?
후회가 막급이지만, 이제는 그분을 알아야 겠다는 영적인 갈급함이 솟구친다.
그분을 알아야, 세상이 열리고, 인생이 열리고.
그분이 오신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인생들을 풍요롭게 하는 그분의 손길을 경험한다.

아직도 나는 예수를 잘 모른다.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며,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이며,
그분은 모든 성도의 구주이며, 교회의 주인이며, 세상의 주인인 것을 알지만,
그분을 실지로 모른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은 내 장래의 삶에 어떤 분이며, 지금, 다가오는 나의 삶에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는가?
 
예수는 하나님의 비밀이다는 말은 언제나 그분에게는 신비로운 인간의 돌아가야 고향이다.
예수안에서 참인간을 발견하며, 참 하나님을 만날수 있다. 그분은 모든 창조세계의 근본이며,
그분을 통해 우리가 존재하며 세계는 그분을 위해 존재하여, 그분은 세계존재의 이유와 목적이다.

예수를 알자, 예수를 발견하자. 나의 생애의 사전에 그분이 나에게 무엇을 하셨나?
나는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지 않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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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 사이에서

두 세계사이에서
요10:10

세상에는 도적이 오는 어둠의 세계가 있는 가하면, 빛을 전하는 생명의 세계가 있다.

먼저 어둠의 세계는 늘 인간에게 도적이 몰래 접근 하듯 인간이 사는 현실에 다가온다.

그 도적이 오는 것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온다는 말의 내용은
실제적으로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된 인간세상에 영적세력의 영향으로 인하여,
인간은 공격을 받아왔다. 인간을 공격하는 세력은 인간의 존엄과 영화된 위치를 갈아 뭉게,
자신의 하수인혹은 영적인 노예상태로 만들어, 한없이 인간을 지배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

그 배후에는 인간의 가장 큰 원수인 사단이 있는데, 이 영적인 존재가 창조주를 대적하여,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중에 하나가 창조주의 피조물인 인간을 지배하려는 시도이다.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귀신들이나 더러운 영적인 세력들은 대적하는 세력으로
인간을 헤치는 일들을 벌려 놓는다. 인간을 병들게 하고, 상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게 하여, 결국에는 파멸시키려는 일들을 일으킨다. 인간의 역사속에서 나타난 수많은 범죄의 행태나, 전쟁과 고통의 역사뒤에는 이러한 어둠의 영향들이 있어왔다.

어둠의 세력의 인간을 괴롭히는 시작은 세상의 초기에
아담과 하와로부터 인간에게 행한 사단의 유혹으로 인하여
인간은 창조주 앞에서 자신들의 범죄로 인하여 자신의 존엄된 위치를 박탈당하였다.
그후에 그 어둠의 세력은 인간에게 합법적으로 약탈하고 지배하고
멸망시키는 일들을 자행하여왔다.

그런데 인간을 지으신,창조주께서 인간을 다시 그 영화된 위치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분은 그 어둠의 세력들을 무찔러 그 세력들을 무력화시키며,
결국에는 그들이 가야할 멸망의 운명으로 그들을 소멸케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결국 그들 세력의 영향을 무력화하고 그들의 손의 세력
(죄와 죽음으로 통한 노예상태)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값을 치루사, 대신 고통과 죽음을 맛보시고,
다시 살아 부활하사, 인간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셨다.

그분이 이땅에 오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잃었던 지위를 회복케하고 인간을 살려, 인간이 가져야 할
하나님의 영광된 위치에 이르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영생을 얻게 하므로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여,
인간이 누리는 행복과 영화를 얻게 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이 두세계사이에서 고뇌하며, 고민하며, 방황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가야 할 참 길을 찾아 진리를 좇아 사는 생명을 얻는 길위에 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열려 있으며, 생명을 얻게 하는 구원의 소식은 알려져 있다.
귀있는 사람이면, 언제나 자기주변에서 생명을 얻게 하는 소망의 뉴스를 접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혹은 외부의 환경에서 혹은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두세계사이에 살고 있지만,
언제나 생명을 얻게 하고 자신의 삶을 유익하게 하며,
더 나아가 풍성하게 하는 삶으로 인도되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설수 있다.
이 길은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생명의 소식이다.

그 도적들의 세력들이 끼치는 영향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세력과 대적하여,
진리를 따르며,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다.
자신의 삶안에 들어와 자리를 틀고 앉아,
사람들을 헤치는 어둠의 세력은 대젹하여,
우리 자신들이 강하게 될 때만이 그 세력을 물리 칠수 있다.
도적이 오면 더 강한 세력이 그 도적을 제압하듯,
경찰은 더 강한 힘으로 그 도적의 무장을 해제하게 하여, 그 세력을 제거한다.

사람들이 특히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오직 진리안에서 강해질수 있다.
진리이신 예수안에서 그분과 그분의 능력안에 머물러 있을때에,
강하게 되어, 그 어둠의 세력의 영향을 벗어나,
그리고 그 세력을 억제하고 그리고 또한 제압하게 된다.
이렇듯 영적생활을 하는 이들은 영적전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그 분(예수)안에서 강하게 되는 데 그 강하게 되 비결은
진리(예수와 그의 가르침)를 좋아하고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분안에 있는 능력으로 무장하는 데 있다.
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그 아버지가 마련하신 능력의
전신 갑주(의의 흉배, 진리의 허리띠, 성령의 검, 영혼(구원)의 투구,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를 갖추어 입고 있을 때에,
진정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을 하나님의 전신갑주라 한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온전히 도와주기를 좋아하신다.
그분의 도움은 완벽한 도움이 되는데, 그분은 자녀를 보호하되, 피난처가되며,
요새가 되며, 그리고 수시로 현실적인 도움으로 언제나 자녀의 필요에 응하신다.

그분의 도움은 실제적으로 그분의 보내신 영이
사람들 속에서 끊임없이 영혼을 깨우며,
그분과의 생생한 교제가운데에로 인도하여,
늘 그분의 도움아래에서 자녀들이 힘을 강하게 하여,
능히 어둠의 세력을 대적하여 승리하게 하신다.
그의 영은 우리안에서 언제나 탄식과 음성으로 자녀들을 인도하신다.
자녀들은 그분의 영안에서 늘상 호흡하듯, 그분과의 교제안으로 인도한다.

이렇듯,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와
언제나 그분의 영이신 성령안에서 호흡하는 기도를 통하여
그 두세계사이에서 승리하면서 빛가운데로 나가며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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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세계를 넘어 믿음의 세계로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요6:1-5

이 기적이야기는 주님의 복음서중에서 부활에 대한 기사가
4복음서에 다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기적이야기는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창조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메시야적인 기사이적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우리의 일상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믿음의 세계로 발전시켜 주님안에서 문제를 해결해 가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항상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문제의 바다로 던져져 그 문제를 헤엄치고 살아남는 문제로
늘 안고 있는 우리만의 고민이자, 삶의 이유이다. 삶이 있는 곳에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사는 일은 그 문제안에서 우리의 생존의 의미를 찾는 이유이다.

오늘 본문은 메시야 강림시대를 살고 있는 팔레스틴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주변동네를 나니시는 메시야로 향하는 여러가지 소문과
그분의 하신 일로 인하여 온 동네마다 메시야에 대한 뉴스를 넘쳐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누구나 주변에 아픈 이가 있는 하면
본인자신이 질병에 노출되어 인간의 절실한 문제로 누구나 거기에 매여 있는데,
메시야가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인간이 안고 살아가는 생노병사에 대한 고민을 함께 느끼며
그 문제를 진지하게 풀어주는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의 아픔을 알았으며,
그들의 고통이나 고난을 함께 풀어가는 해결사로 그들의 삶의 주변에 머무셨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그분이 행하는 치유의 기적과
기사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아직은 그들은
그 분의 주장하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서성이는
정도의 구경꾼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제는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하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여 사람들은 점점 그분의 말씀의 세계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한끼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빈민이나 가난한 이들로, 날마다 끼니 걱정을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잊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하늘메시지에 심취하여
끼니 걱정을 하지 않으며, 3일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정 그들이 배가 고파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굶주림의 문제가 그들이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분을 따라 다닌 사람들은 유대지역에 있는 사람들 남자어른만 5,000명이나 되었은데
실제인구는 부인과 아이들까지 따지면 족히 2만명이 죄는 거대한 집단이었다.

이들을 먹여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메시아는 직면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삶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셨나?
제자 한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 제자의 대답은 현실적인 눈이 밝은 계산으로
그들을 먹일 돈을 계산해보니 한 노동자가 벌어야 돈이 당시에 1 데나리온인데
그 노동자가 벌어야 할 돈이 200 데나리온을 벌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품삯은 200일간을 일을 해야 한다. 거의 8개월을 매일 가서 벌어야
벌판에 있는 굶주린 민중들을 먹일수 있다.

메시아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다시 제자들을 향해 바라보는데,
그중에 한제자가 평소에 메시아가 하신 기적의 세계를 경험하였던 바,
그 제자는 자기 스승을 보면서 그는 주변에서 한 가능성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군중들 사이에 한 아이가 있는데,
그 어린이 손에 자기 가족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었다.
한가족이 먹는 음식,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인데,
그 음식을 바라보는 제자의 눈은 이미 메시아의 가능성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아이를 데리고 주님에게 다가간다.

아이의 손에 있는 그 음식을 보며, 주님은 하늘을 향해 창조주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그 음식을 축복하신다. 그의 축복은 창조주의 능력을 담고 있어서
그 음식은 이제는 창조주의 손에 놓여있는 도구로 그분의 손에서 옮겨져
제자들에게 옮겨지며, 그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는 창조의 역사로 주변에 있는 많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풍성한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가족단위로 앉아서 나누어 주는 그 음식을 받아
마음 가득한 하늘의 풍성에 놀라움으로 현실적인 배고픔의 문제를
한 제자의 가능성의 제기로 시작된 메시아의 창조의 믿음의 역사는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거대한 음식으로 그들이 당면한 식량의 문제,
즉 일상에서 일어나는 먹고사는 문제, 우리가 매일 안고
살아가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도전을 준다.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는 언제난 해결되어지는 문제라는 것이며,
그 문제의 중심에는 사람들의 필요가 있고, 그 문제해결의 중심에는
창조주의 믿음의 세계가 있다.
오늘날도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주문제로 고민하며,
고통하며, 고난을 겪으며 살고 있다. 갖은 사람들은 더 갖으며,
없는 이들은 더 배고파하는 아픈 현실이 우리 주변에 있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은 그러한 인생의 문제는 그 문제를 창조주의 손에 맡기며,
그 그분에게 문제해결을 요청할 시에 그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현실의 세계이며, 그 현실세계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의식주의 문제, 질병의 문제, 사는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등,
이루 해아릴 수 없는 문제가 쌓여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는 늘 가능성이 있음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내안에 있는 그무엇이 없는가? 나의 주변에 일어날 가능성의 세계를 바라보는
긍정의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으며,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해결의 길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복음이다.

사람에게는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가 있다면 창조주에게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나 권세가 있다. 인간은 현실세계에서 문제를 안고 살아가면서,
창조주가 감추어 놓은 가능성의 세계를 바라보는 긍정의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며, 그 삶의 세계에서 창조주의 차원으로
옮겨가는 믿음의 세계를 바라 볼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은 이세상을 그분의 권능으로 그분의 창조의 권세로 있게 하였으며,
오늘도 그분의 보존하는 능력에 의해 거대한 지구가 움직이며,
이 지구상에 사는 수많은 인생들이 살아가고 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가 주는 현실의 세계에서 가능성의 세계를 거쳐
어떻게 믿음의 세게로 들어가는 가가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다.
가능성을 보는 긍정의 시각에서 한 가지 확실히 잡을 수 있는 확신하는 바가 필요하다.
사실 인생은 불확실한 미래를 살고 있는 자신의 미래나 문제를 조금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수 없는 한계의 존재이다.
그 한계는 자신의 어리석은 태도나, 제한된 관점으로 답답한 삶을 살지말고,
언제나 무에서 유를 있게하며,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분의 손길을 의식하며,
그분을 의지하는데에서 그분과의 신뢰하는 관계에서 동역하는 관계로 살아가면
그분안에 있는 플러스 알파의 창조의 무한한 능력이 나의 삶을 붙들어
감히 자신하며 살아가는 인생을 만들어 줄 것이다. 비록 내일의 세계가 보이지 않으며,
나의 기댈만한 모든 것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 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현실의 문제를 결연히 맞서,
창조주의 믿음의 세계에서 그분의 믿음으로 사는
엄청난 풍성한 자원의 축복을 맛보며 살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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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기도에 대한 이해

믿음과 기도에 대한 이해(약5:13-18)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주님에게 나갈때에 무엇이 필요한가?
나의 존재로 부터 나오는 행위의 결과나 혹은 자질의 유뮤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미 자신은 주님앞에 도달할수 없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으며,
그분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다만 그분에게 나갈때에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대하는 나의 자세인데,
그 자세는 그분을 믿는 일이다.
믿음은 그분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말씀하심에 대한 내용을 신뢰하는 일이다.
천지를 지은 이가 피조물에게 요구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신뢰심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바라는 신뢰심이다.
자녀는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으로 자녀가 취할수 있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분을 자녀가 갖을수 있는 사랑하는 관계에서 나오는 신뢰심이다.
이 신뢰심위에서 기도자가 그 기도를 들으시는 존재에게 나아가 구할 수 있다.
그분앞에서는 우리의 무엇이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에 큰 것이나 우리가 생각컨대
이룰수 없는 바람이라도 그분앞에서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분앞에서는 우리의 신뢰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 신뢰심만 있다면 기도자는 언제든지 무엇이나
그분에게 요구하는 것을 받을 수 잇으리라.

믿고서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알라.
주님에게 기도하는 일은 먼저 그분과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는 일이다.
믿음이 있고서야 그분앞에 나갈수 있다.
기도하고 구하는 자가 기도를 듣는 존재가 들을지
혹은 거절할지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갖지못하면 기도의 효력은 나타나지 않으리라.
고로 믿음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효과적인 응답을 가져오는 것이다.

주님에게는 무엇이나 구하면 무엇이나 하실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는 우리의 구함에 있어서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감히 그것을 응답하실까 하는 의구심을 갖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분이 바라보는 우리의 실제적인 문제는 무엇이나의 문제가 아니고,
동기가 바르다면 우리가 그분을 대하는 신뢰심의 문제인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그분을 대하는 처음의 문제이자
항상 지속되는 우리의 문제의 핵심이며, 우리의 관점을 늘 돌리게 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의 문제에서 오는 딜레마의 문제이다.
우리는 늘 원죄로 인하여 그분과의 사이가 늘 벌어지기가 쉬우며,
그분과 우리가 사이를 이간하는 악한 존재의 방해거리를 제공하게 되어,
우리에게 늘 그분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이나, 태도를 갖게 미혹을 한다.
그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게하는 어둠의 세력의 끊임없는 공격을 생각으로 차단하고,
기도로 방어하는 일은 기도자에게 늘 필요하다.
우리가 왜 그분이 하신 기록된 말씀으로(성경) 돌아가
그분이 하신 약속을 되새김질해야 하는 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갈고 닦아야 (키우며 자라게 하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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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설수 없는 인생

홀로 설수 없는 인생

나는 과거에 스스로 힘을 갖고 살아온 나날들을 생각해본다.
그러나 요즘은 하루 한시간도 그분의 도움이 없이는 존재할수 가 없음을 고백한다.
수없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를 도우시는 그분을 생각한다.
수없이 속으로 외쳐되었다. 힘이 없다고, 뼈가 저리도록 경험한다.
스스로 서서 살아갈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본다.
옆에 있는 가족이나 나를 생각해주는 많은 고마운이들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와
그리고 그들의 영혼속에서 나를 향한 흐느낌속에서 나는
그 흐느낌에서 나오는 신음소리에 나는 힘을 얻는다.

나의 영혼속에서 계속하여 터져 나오는 영혼과 육체의 나약함을 고백하는
나의 절규는 하늘에 닿아서, 그것이 내게는 커다란 창조자의 작은 손길로 다가온다.
우주를 지으신 천상의 존재가 미물보다 못한 나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요즘 나에게 살아서 다가온다. 너무 자상하게
그분의 음성은 나의 내면에 변치 않는 크나큰 힘으로 다가온다.

육체의 약함으로 인하여 나의 힘을 지탱하는 체제가 무너지고,
한없이 약한 자신을 발견한다. 어린아이들이 가져도 될 만한 힘을 유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모든 일상의 삶이 생존의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그때마다 나의 영혼은 절규한다.
언제 부터인가 누군가 나를 누르는 세력이 강한 힘으로 밀어 부쳐
나의 생존에 위기를 불러온다. 그러나 나의 존재를 붙드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새 힘을 얻는다.

아! 힘이 필요합니다. 나의 몸을 지탱할 만한 새힘이 나에게 요구된다.
육체의 약함은 마음의 연약함으로 자신을 가두어 둔다.
일상의 몸짓을 하는 것 조차, 내게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속에서 돕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나의 약함을 겪으며,
한없이 의지하지 않으며 생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배우는 요즘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나의 처지는 나를 한없이 약하게 하지만,
도우미의 삶의 고마움이나 나의 존재를 있게하신 그분의 손길을 너무나 애타게 기다린다.
그러나 언제나 그분은 언제나 거기에 계셨다.
누군가가 이 시를 읊었지 않았는가?

인생의 고생의 골이 깊을수록 더 깊은 그분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나는 홀로 설수 없는 인생이다 라는 것을 절실하게 생각케 하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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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기에서

처음에는 공원을 1.5마일 (3-4 킬로미터)되는
거리를 한번에 걷기도 하였는데, 점점 돌기가 힘들었다,
숨이 차는 고로 몸의 상태는 거의 중간 중간 쉬어야 겨우 한바퀴를 돌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그정도도 하지 못하여,
그저 가서 시원한 공기만 쉬는 정도의 몸의 상태로 약해져 있었다.

심장근육의 기능의 신축성이 떨어져 심장운동이 약해져 충분히 피를 공급하지 못하여,
그 여파로 폐에 물이 차게 되는 악순환으로 인해 온 몸에 물이 차게 되며, 그로 인해
숨이 차게 되어 10미터를 걷고 나서는 쉬워야 하는 몸상태는
자신의 행동반경을 점점 약화시킨다.

이런 몸의 상태에서 정확한 병의 원인을 모르고 증상
(주로 congestive heart failure: 심부전증)만을 완하시키는 약물로 지탱하기를
2년을 보내었다. 그러나 증상은 여전히 차도가 없고,
이 상태로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만 하였다.
최근 11월경에야 주된 병의 원인을 알아냈지만,
(아밀로이드는 희귀성 질병으로 일종의 다양한 혈액암과 같은 것이며,
아직은 완치케 하는 치료법이 없다보니, 연구 개발중이다.

그리고 일반 백인들사이에는 희귀하여, 주로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 미국인들중에서 혹은 외국 유럽의 몇나라에서 환자가 보고가 있음,
내가 가지고 있는 아밀로이드는 primary 성 아밀로이드로,
그 쌓여진 경단백질이 몸 장기 구석에 영향을 주어 그 기능에 이상을 일으킨다.
주로 심장, 신장, 간, 위장, 입, 혀, 손, 발등)
그런데 심장에 영향을 주었을 시는 힘든 치료와 생존율이나 기간이 1년이나 몇년이 되지 않는다.

지난밤에 집에서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물이 차있었다
그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지낸 날들이 몇날이 되었으나,
여전히 오줌이 나오지 않아, 캐디터(오줌을 호수로 빼는 기구)를 통해 오줌을
빼어야 했다. 처음에 이것을 집어넣는데 피가 나온다.
오줌에서 피가 뭉쳐서 나온다. 통증은 가히 견디지 못할 정도로
수없이 오줌이 나올때마다 통증을 느끼곤 하였다.
처음에 캐티터를 집어넣은 간호원의 시술로 피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거의 일주일 동안을 피가 멈추지 않았다.
밤마다 통증으로 인해 잠을 잘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극도의 심리적인 불안정이 찾아와,
어려운 처지에 낙망이 되었으나,
그때마다 천지를 지으신 하늘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수없이 그분으로 부터 위로의 말씀을 들었다.
그 통증을 일주일동안 겪으면서도
주 예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쏟아놓으신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결하지 못하여 혼자서 고통만을 느끼며 아파할 뿐이었다.
나중에야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니 잠시 고통이
나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고통의 고마움을 생각나게 한다.

3일동안 몸무게가 50파운트를 빼어,
거의 몸이 야윈 상태로 3주간을 중환자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여,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2층 아파트를 내려 올수 없었다. 할수 없이
앰브런스를 불러 응급처치하는 대원들에 의해 겨우 차에 몸을 싣고,
병원 응급실로 들어와 그 날밤을 지내며, 점점 자신의 몸은
거대한 용광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몸을 만들기 위한
긴 시간의 여로에 들어 가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그날밤에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가 거기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은몸에 여러 가지 주사로,
약물로 거의 실신 상태의 몸을 회복케 하는
긴 시간의 치료의 날이 시작이 되어 몇날을 지내는데,
처음에 3일간을 부은 몸안에 있는 물을 뺴내는데, 50 파운드를 빼니
몸은 가냘픈 상태로 변화되었다.
스스로 일어나 앉아 있을 수 도 없는 상태였다.
그 때에 마치 꿈을 꾸듯 이틀 동안을 치료에 맡기며,
꿈을 꾸듯,치료를 받으며, 주님에게 간구를 드리는데,
의술로 시술하는 과정안에 주님께서 오셔서 몸안에 역사하시는 경험한다.
주님, 저를 치료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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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9-17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사랑과 기쁨의 관계)

사랑은 모든 공동체의 연결고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아버지와 주 예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관계이며 그 사랑의 교제 위에 존재하십니다.

본문의 배경은 그리스도와의 제자들의 연합에 대한 교훈으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나무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과 제자들과의
관계형성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크리스천의 삶의 근본적인 삶의 지침이 됩니다.
영적 생활은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와의 연합 없이는 사실 영적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그분과의 연합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며, 그 관계 위에 교제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분 안에 거하라, 그분의 하신 말씀 안에 거하는 것과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거의 동시적이며, 하나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그분의 계명이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조건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이요.
형제사랑에서도 실제적인 사랑 나누는 것이 없으면 사랑은 없습니다.

거하라 함은 머물러 있음과 남아있음의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남아있어야 함은 요일 2:19에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에게서 나가서도, 그리스도에게서 계속 머물러 있지 않으면 세상에 속한 자입니다.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합법적인 크리스천들입니다.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인이라도 그들이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므로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분의 명령에 따르는 길이
그분과의 합법적인 관계를 유지합니다.
참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요한14: 21,23),
고로 그들은 주님의 뜻에 헌신하며, 그렇게 하므로
그들의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요한14: 13,14)

9,10절에,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유다 21절)은
이것은 감정적이나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순종하라는 주님의 온전한 모습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온전한 순종을 하시는 모습을 본받아 그분의 모범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거하라 함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시이며, 행동의 모범이며, 순종의 표식입니다.
행동적인 순종과 사랑의 순종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11절에, 주님께서 그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통해 열매를 맺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가 오심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케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양으로 기쁨을 얻게 합니다.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그의 기쁨을 가지듯이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므로 그의 기쁨에 동참합니다(요한 17:13. 16:24).

12절에,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함은 서로 사랑함이며, 서로 돌보며, 성장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희생적인 봉사가 필요합니다.
13절에, 예수 사랑의 표현의 증거가 그의 희생적인 죽음에서 보여지듯
크리스천들은 서로 그러한 사랑을 희생적인 사랑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친구 사이의 사랑을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누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신니내티 교회의 교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희생적이며 봉사적입니다.
물질적으로 돕는 손길이나, 희생을 통해 이웃을 돕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나타납니다.

14, 15절에,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표현하셨듯이(대하 20:7, 약2: 23).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인생을 친구라고 여깁니다.
친구 사이는 마음이 통하고, 뜻이 통하고, 말이 통합니다. 삶이 통합니다.
영이 통합니다.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도 서로 영으로 통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모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영을 통해 서로를 알기 때문입니다.

16. 내가 너희를 선택했으니/ 주님의 선택을 통해 신자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택하심은 그분의 소유물이며, 그분의 자녀이며, 그분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고로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는 크나큰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영원하십니다. (딤전 5:21).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선택의 목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영적인 열매들은 먼저는 경건한 품성입니다 (갈 5:22,23).
그 열매는 의의 행위입니다 (빌립보서1: 11), 찬양입니다(히브리서13: 15),
전도하는 일입니다(롬 1:13-16).

종의 의식은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수동적이며, 자원적이지 않습니다. 주인의식이 친구 사이로 발전합니다.
여기에서도 주 예수님께서 따르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주님은 사랑의 원형관계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사랑의 원형입니다. 그분께서는 사랑으로 존재하십니다.
그 분은 사랑이시며, 사랑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사랑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의 본질입니다. 신자의 마땅한 삶의 실천입니다.
사랑함은 제자의 도리입니다. 사랑함은 제자의 모습이며,
모든 일에 있어,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사랑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사랑은 열매를 맺게 하는 길입니다. 사랑은 수고를 합니다. 사랑은 남을 세웁니다.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바라며, 믿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랑은 좋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사랑은 기쁨의 열매를 낳습니다.
사랑의 온전함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사랑의 수고는 마음에 기쁨을 줍니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나, 받는 이들 모두에게 사랑의 열매를 먹으므로, 기쁨을 얻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함으로 성도들은 온전함을 이룹니다.
주님의 사랑에 거하기 위해 주님께서 명하신 서로 사랑함으로 신자들은 늘 힘써야 합니다.
고로 그것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참된 제자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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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씨앗의 도전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막4: 26-32) 비유는 그림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그림으로 보여주는 책은 주로 삽화나 만화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시청각적인 방법으로 하늘나라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 하셨습니다. 어릴 때에 사람들은 만화를 좋아합니다. 그림 있는 만화를 통해 중요한 내용을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비유적인 설명을 통해 사람들에게 쉽게 진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만 성경에 나와있는 비유를 해석할 때에 몇 가지 점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먼저는 비유를 전하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소시민들에게 그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사실적인 사건으로 진리를 설명하십니다. 고로 당시에 비유를 듣는 대상이 있습니다. 듣는 청중들, 제자들이며, 우호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비유를 적대시 하는 자나, 방관자에게는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비유의 가르침이 감추어 져 있습니다. 비유를 말할 때에 먼저 비유의 내용을 생각합니다. 특히 비유자는 강조점이나 과장법으로 진리의 핵심적인 내용을 전하므로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고로 비유에는 강조적인 표현법이 있습니다. 무엇을 강조하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 두가지 비유에는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 강조점은 두 비유가 자라는 것, 커지는 일, 성장에 대한 초점을 맞추어 있습니다. 그 강조점을 보아야 합니다. 이 비유적 설명은 하늘나라의 진리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설명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보여주게 합니다. 먼데 있는 것 같은 진리를 가까운 주변의 것들로 표현하여 실감 있게 받아들이게 합니다. 현대인들은 메스컴의 영향을 쉽게 받는 것은 보여주는 시청각을 활용하므로 그렇습니다. 1. 자라는 씨의 비유/ 이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마가에만 있는 비유로, 은밀히 나서 자라는 씨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씨, 곧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지면 저절로 성장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는 행위로 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설교하는 것이나, 주님을 소개하는 전도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씨를 뿌리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천사도 흠모할 만한 축복이요 성도들의 특권입니다. 주님의 일꾼들의 의무이자 놀라운 천사들도 흠모하는 귀중한 사역입니다. (2)여기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하는 말들 중에 씨앗의 자람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장의 신비를 의미합니다. 바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며 알아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활동의 신비입니다. 고로 때로는 그런 일들은 인간이 할 수 없는 현상으로 진행 됩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개입이 없이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 집니다. 우리가 받은 십자가의 구원이나 영생을 얻는 축복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축복이며 구원입니다. (1)씨앗이 자라고/씨앗이 자라는 행위는 신비롭습니다. 생명력의 힘입니다. 씨앗자체에는 생명의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입니다. 그것도 썩지 않는 씨앗입니다. 수 천 년이 흘러도 씨앗은 생명이 있는 고로 밭에 갖다 심으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2) 우리 성도들 안에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생명의 씨앗이 있습니다. 고로 사단이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의 생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을 받은 성도들은 어두움의 세력이 건들일 수 없습니다. 그 생명의 흔적이 모든 그들의 도전이나 유혹을 이겨 악한 날에 서게 합니다. (3)하나님의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썩지 않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받을 때에 그 생명을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땅은 양질의 양분을 담고 있습니다. 무기질이 있으며, 씨앗을 자라게 하는 여건이 있습니다. 거름이나 퇴비를 주어 땅을 기름지게 합니다. 땅은 씨를 자라게 하는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험악한 땅이라도 땅은 씨앗이 자라는 밭입니다. 돌짝 밭이나 가시떨기에도 자랍니다. 인간의 개입이나 노력이 없이 자랍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열매를 맺는 데 까지 나갑니다. 복음의 역사에는 시작이 있으며, 과정이 있으며 순서가 있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자연의 원리와 동일합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 될 나무나 잎은 시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싹이 건강하게 나와야 생명력 있게 성장합니다. 다음에는 이삭입니다. / 잎이나 가지가 무성하며 이삭이 건장하게 뻗어나야 그 다음에는 거기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립니다. 충실한 곡식입니다./ 건강한 씨앗이 있고, 튼튼한 이삭이 있을 때에 거기에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교회 안에도 믿음 좋은 성도가 있으며, 봉사 잘하는 일꾼이 있고, 새로운 사람이 와서 적응할 수 있는 여건인 화목과 기쁨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추수에 대해서는 먼저는 씨가 땅에 뿌려진 일에 대한추수입니다. 땅은 인간의 마음 밭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들은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열매를 맺어 추수하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인,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의 씨앗을 통해 그들의 개인적인 삶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개인의 신앙의 열매도,그 개인의 신앙의 그릇이나 자라는 과정이나 헌신하는 정도의 여건을 통해 좋은 열매를 가져옵니다. 또 추수의 때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추수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때가 있는 가하면, 그것을 거두는 시기가 있습니다. 종말에는 복음사역의 끝입니다. 자유로이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일 때에 믿어야 합니다. 2. 겨자씨의 비유/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비교합니다. 이 비유에서 겨자로 표현하는 것은 작은 것이나 미미한 것의 성장을 통해 거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은 미미하고 무력하더라도 장차 에는 크게 확장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겨자씨/ 검은 겨자는로 /일년마다 자라서 열매를 맺는 일년생입니다. 그것은 성장이 빠릅니다. 겨자 잎은 야채로 쓰이고, 약으로 쓰이며, 그 씨는 양념으로 쓰입니다. 팔레스틴 땅에서 심겨 지는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입니다. 725-760정도의 씨들이 1 그램입니다. 28 그램이 한 온스입니다. 나물크기의 나무로서는 제법 키가 큰 축에 들어갑니다. 2-6피이트 정도의 높이로 자라는 것이나 혹은. 수주 안에 12-15 피이트로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겨자씨비유는 제자들에게 믿음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예로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기며(마17: 20), 바다에 나무를 심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눅17:6) 믿음의 도전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받기도 하며 주기도 하며 역사하기도 합니다. 치유사역에 있어서, 손을 얹어 기도한 즉 나으리라, 믿음으로 맞춥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바라리라 하셨습니다. 기도사역에 있어서 믿음으로 간구한즉 받으리라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것들을 받습니다. 활동사역에 있어서 주님의 약속하신 말씀 중에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주님께서 k신 사역보다 더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들이 큰 일을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이루어 냅니다. 최근에 저는 무슨 일을 할 때에 자신의 믿음을 갖는 일에 대한 좋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사모님이 저에게 유향과 몰약이 담긴 두 병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기름으로 바르며 기도하면서 주님의 치유를 경험하는데, 몰약이 담긴 병이 그 속에 액이 묻혀져 그 병의 뚜껑이 좀처럼 열리지 않습니다. 육체의 힘이 많이 떨어진 요즘의 저에게는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기로 하고 여러 번 시도하니 결국에는 그 병의 뚜껑을 열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효과에 대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무엇을 계획 할 때에 믿음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나 그런 믿음을 갖지 않고 하는 일의 차이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주님은 다만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말씀하십니다. 그 믿음이 큰 일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에서 겨자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로 강조합니다. 1.예수님의 청중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비교가 상상보다 작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있습니다. 2.성장에 초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 씨가 작아도 큰 나무로 자랍니다. 가든의 나무 중에서 가장 큰 축에 속합니다. 자람에 있어 영향력에 있어서, 누룩의 비유와 함께 상당한 영형력을 가져옵니다. 겨자씨 한 알/ 심길 때에는 가장 작습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무보다 커지는 원리가 있습니다. 공중의 새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되는 나무의 크기를 알려주기 위한 도구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큰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주님께서 이 땅에 심으신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는 곳입니다. 주님의 주권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그의 모든 다스림을 받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1. 미래지향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우리의 주변에서 진취적으로 나갑니다. 어떤 장애에도 그 나라의 백성들이나 믿음의 일꾼들은 전진합니다. 믿음으로 전진하는 사람들에 의해 항상 발전적이며 인생들이 장래의 목적을 향해 나가게 합니다. 2. 성장지향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퇴보지향적이 아니라, 성장지향으로 발전합니다. 작은 것에서 큰 것 에로, 어린 상태에서 장성한 상태에로 나갑니다. 3. 현재진행형입니다. 지금도 진행 중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에서 자라고 있으며,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운데에서 그의 섭리가 이루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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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사이에서

삶과 죽움사이에서


삶이란 사는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감사하다.
생명을 갖고 사는 것은 그 생명을 주신이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삶의 나날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형통할때에 인생의 순간들이 주는 기쁨을 맛보며,
그 시간들을 아무런 가치없이 그저 주어진 대로 살게 한다.

그러나 어떤 어려운 일이나 고통스럽게 하는 일을 만나면,
그것으로 인하여 힘들어 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등을 한다.
병이 들었을때에는 그 병이 주는 불폄함과 괴로움에 자신을 맡기며 생존한다.

잠시의고통이나 힘든 상황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마음속의 급한 기분에 좌우되어 바로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르기도 한다.
그럴때에는 고마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오늘 아침 뉴스에 실직당한 한 미국인 가장이 부인과 10세 미만의 자녀들을 모두 총으로 쏘아 죽이고
본인 자신도 자살하였다. 그 가장은 자신이 실직하여 삶을 살아갈수 없다고 판단하여,
앞으로도 길게살아야 할 어린 아이의 생명에 까지 손을 대어
자신의 좌절과 절망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렸다.
하루 아침에 단란한 일가족이 죽음의 희생자들이 되었다.
그에게는 다른이(자녀)들의 살고 죽는 것의 선택이 마치 자기 권한의 소유인양
전능자처럼 남의 생명에 까지 손을 대었다.
가족의 테두리안에 살아가는 인생들 모두를우울하게 하는 불행한 소식이다.

아무리 삶이 고달프고 힘들게 하여도 나에게 주어진 삶자체를 부인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신에게 깊은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삶의 끝인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오직 자신에게 삶을 살게 한 전능자에게 있는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나 위험이 아니고, 비록 갑작스런 요인들(교통사고나 천재지변등, 순간의 실수나 삶을 위협하는 그 무엇들)이 발생하여도

삶을 끝나게하는 요소가 사람들 자신들에게서가 아니라,
그 삶을 살게하신 그분의 의지나 섭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현명하다.

죽음이란 죽는 것이다.
자시에게 주어진 유일한 생을 포기하는 것으로 의미한다.
삶을 사는 인생들에게 죽음은 넘어야 하는 장벽이며, 삶을 사는 모든 이에게 다가오며,
괴롭게하는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절망감은 언제나 삶을 고통스러워하는 이에게 냉정하게 다가온다.
그 죽음은 우리의 인생에서 보이지 않는 그것이었다가,
언제가는 자신의 삶에 죽음의 현실로 다가오면 누구나 두려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살고 죽는 문제에 있어서, 인간적인 현실에 있는 상황으로 몰려가기 보다는
살고 죽는 문제에서 초월하여,
자신의 확신하는 그 무엇을 위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사명이나
진리가 주는 초월함을 좇아 가야 할 길을 간다면
사나 죽으나의 문제를 벗어날수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가치나 의미보다 더한 인생의 참진리를 발견하면,
사는 것이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런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 다
그 진리안에 있는 조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살고 주는 일에 대해 해결을 받은 신앙인들에게는
사나 죽으나 나는주님의 것이다라는 분명한 명제를 따라 갖고 있다는
자세나 태도는 살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에서 자유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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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의 스타일

주님을 따르는 길(마태 16:24-28)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나섰습니다. 어느 때는 주님께서 부르시는데 나서는 이가 있는 가 하면, 본인이 주님을 따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주님의 부르심을 통해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서론 각 민족마다 좋은 민족 정신적인 전통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사무라이정신이 있습니다. 무사도의 정신으로 대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을 죽이면서 무사의 전통적인 가치를 지킵니다. 한국에는 한국의 화랑도정신을 통해 민족의 정기를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자기희생을 통해 대의명분을 좇아 자기 사명을 다하는 정신입니다. 미국에는 개척자의 정신이 있습니다. 미개지인 아메리카 대륙에 나라와 문명의 발전을 위해 도전과 모험을 통해 나타나는 국민적 정신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에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제자도의 정신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는 제자도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한 정신아래에 지도자와 제자들의 관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생이 있고, 좋은 가르침이 있으며, 그 가르침을 따르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즉 선생의 삶의 가르침과 원리를 따르려는 제자들입니다. 이렇듯 주님을 따르는 데는 준비가 필요하며, 그를 따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는 한마디로 십자가 스타일 중심의 희생과 사명을 위한 삶의 정신입니다. 그 정신은 주님을 믿고 사는 자의 삶의 일반적인 태도이며, 자신의 신앙생활의 원리에 기본적인 정신과 마음의 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로서의 사역에 대한 사역자의 근본적인 태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론 이 본문의 배경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 세 번을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수제자인 베드로가 먼저 나서서 주님 그러시면 안됩니다. 라고 간청합니다. 그의 간청은 주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며, 주 예수님의 세상에 오신 목적과는 다른 길입니다. 거기에 대해 주님은 제자의 충정 어린 권고가 사단의 속삭임이라고 거부합니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주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그분이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제자도의정신이 본문에 나와있습니다. 1.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세우는 자기확립을 위한 자기 중심적인 태도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통치롸 그분의 주권을 거부하는 원죄의 흔적이 있습니다. 고로 자기 부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 중심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자기 변화를 위한 첫걸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자아상을 세우는 자기부정을 위한 긍정이 아니고 자기긍정을 위한 부정입니다. 세상은 자기 중심적인 우리를 향해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를 나쁜 길로 유도합니다. 우리를 나쁘게 하기 위해 좋은 것처럼 꾸며서 그것을 따라가게 합니다. 그러한 형편에서 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 주님의 생각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란? 자기 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2.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할 일에 대해, 사명에 대한 자세 를 의미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로마시대의 죄수들의 형틀입니다. 가장 치욕적인 사형방법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처참한 십자가를 두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러한 수고와 짐을 담당해야 한다는 원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약에서 유대인이 대망하는 메시야에 대해 이사야 예언자는 두가지 모습으로 알려줍니다. 하나는 이사야 11장에 있는 승리의 메시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53장에 나와 있는 고난의 메시야입니다. 물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인 희망으로, 고난 당하는 민족을 구하는 승리의 메시야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3.주님을 좇는/ 주님을 믿는 일은 주님을 열심히 따라 가는 일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세는 그분을 열심히 배우고, 닮아가며, 그분을 따라가는 제자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9장 23절에서는 날마다라는 말이 덧붙여 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정신을 명심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묵상하고 그분의 정신을 갖고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죽으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제자도의 사역 4.목숨을 위한 투자, 희생이 때로는 필요합니다. 투자는 내일을 위한 준비/혹은 보다 좋은 것을 준비 하기 위한 현실의 투자 대학에 갔더니 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주어져,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자기가 세워가야 합니다. 준비하는 기간에 잘 준비해야 보다 충실한 대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갖 대학에 들어간 학생의 부모는 할게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학생들은 모든 것을 자기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자기가 책임집니다. 영혼을 구하는 사역은 목숨을 거는 사역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남의 영혼까지도 구원하기를 힘씁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의 고백이 유대인을 구하는 한 여인의 희생적이며 용기 있는 신앙고백이 생각납니다. 안이숙 여사의 죽으면 죽으리라, 신사참배에 반대한 고난의 신앙의 흔적을 알려줍니다.일본시대에 가졌던 신앙인들의 인물 중에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의 신앙은 한국교회의 밑거름입니다. 지금도 세계의 크리스천들이 핍박받는 각지에서는 고난 당하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등의 이슬람권의 크리스천들은 직업에서, 가족에서, 그 사회에서 버림받고 매장당합니다. 5.온천하와 자기목숨의 비교는 자기 생명의 구원, 즉 영혼구원의 가치의 중대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혼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한 영혼은 온천하의 가치보다 중요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중에, 주님께서 부자가 자신의 창고에 추수한 것을 가득 보관한 후에, 물질을 모으면서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거의 투자하지 않은 불쌍한 인생이 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 어리석은 부자의 영혼을 데리고 가시는 이야기 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속에서도 영혼의 가치를 발견합니다. 세상에서의 고난은 영원한 세계에서의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가난한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안에서 안식을 얻었습니다. 6.타인의 영혼구원 자기의 영혼구원에 관심이 있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은 남의 영혼도 중요함을 깨닫고, 타인의 영혼구원을 위해 애를 씁니다. 타인의 영혼을 생각한다면 그분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심정이 필요합니다. 가족중에나, 이웃 중에나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영혼을 위한 사역은 자신의 영혼이든지 타인의 영혼에 대해 존중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찰스피니는 젊은 시절에 그가 변호사로 개업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법조인으로 살려는 즈음에 그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그분에게 오셔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왜 변호사를 개업하려니, 네 좋은 직업으로 열심히 하여 물질을 모으고 좋은 미래를 기대하며 살으렵니다. 그러고 나서 무엇을 하니 결혼을 하지요, 그런후에는 자녀들을 낳지요, 그런후에는 사회적인 출세와 부를 갖지요, 그런후에는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지요, 그런후에는 그러다가 자녀를 기르고, 나이가 들어 늙어지겠죠, 그런 다음에는 죽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에 나아가 심판을 받겠지요,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다면 너의 영혼의 가치와 네가 일생을 통해 세상일에 대한 수고한 대가는 어떻게 되겠느냐? 그런 교훈적인 계시를 접한 후에 피니는 자신이 무엇에 투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도전을 받아, 그는 하나님앞에서 온 천하의 가치를 능가하는 한 영혼을 구하는 전도자로서 나서게 되었습니다. 제자도의 목표 7.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인자의 영광으로 아버지의 허락하신 영광으로 오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인 성도들에게 영혼을 위한 그들의 수고한 것에 대해 낡아지지 않는 상급을 얻습니다. 그렇게 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과 상을 얻는 데에는 우리의 삶의 대가를 치릅니다. 그 결과는 자신에게 주님의 영광의 자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반드시 영광스런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부르심, 하나님의 자녀의 반열, 그 나라의 기업에 참여, 그 주님의 영광에 동참합니다. 8.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일한대로 보상을 받습니다. 일꾼에게는 주인의 뜻을 따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일꾼에게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대가나 보상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한 수고는 현세와 내세가 보장되는 귀한 투자입니다. 결론 참 제자도에는 그분을 따르는 것과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즉 그분의 가졌던 삶의 정신을 갖고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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