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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적인 성경교수법
    목동
  2. 2008/11/25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성도
    목동
  3. 200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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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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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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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8/10/27
    음악을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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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8/10/27
    내면의 축복을 위한 간구
    목동

창조적인 성경교수법

성경을 가르칠 때에 교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학생들의 관점으로 연결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교사는 성경의 세계에 대한 건전한 이해와 자기 개념을 가지고
학생들을 성경의 세계로 유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경의 세계에 대한 학생들의 가지고 있는 기존 세계관을 수정하여
성경을 이해하는 세계관으로 성경을 보게 하는
성경적 창조적인 교육 방법을 추구합니다.

교사는 먼저 성경전체에 대한 주제별적인 것들과
성경파노라마적인 계시 발전에 개괄적인 이해와
그 성경적인 개념들에 대한 기본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교수에 대한 개성적인 준비는 말씀에 대한 자기의 신앙과
그리고 평소에 교사가 갖고 있는 성경 다루는 바탕이 되는 기본 개념들을 세웁니다.

그런데 성경을 다루는 교사의 태도는 교사가 전하는 내용이상으로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며,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교사의 접근 방식은 중요한 가르치는 자의 메시지의 도구인 메신저로
교사가 성경책을 대하는 자신의 이해방식에 따라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고 나쁜 영향을 주기도 하며
또 전혀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전달자의 매너리즘(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그릇된 태도)이나
한계상황(자기도 이해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을 전달하는 데서
오는 교사의 미숙)에 빠집니다.

성경을 단지 학문이나 문법이나 문서로만 다루려는
학문적인 접근방법이 있는가 하면, 성경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혹은 철학적인 책으로 여겨, 관념적인 머리로만 이해하는
지식전달위주의 방법 등은 성경이 기록된 말씀의 세계에
넘어 있는 살아 숨쉬는 역동적인 메시지를
건지지 못하는 경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말씀으로 문자 속에 있는 살아계신 말씀이신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그 속에서 그분과 교제하며 대화하여,
그 책 속에 있는 그분의 생명의 기운(성경은 성령의 사용하는 도구로
활용될 때에 메시지가 살아있는 말씀이 됨)을 경험할 때에
비로소 그 책 속에 있는 내용의 말들은
주님의 말씀으로서의 인격적인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교수법의 접근방법: 성경을 대하기 전에 성경교사와 학습자가
삶의 현장에서 이해하고 경험한 것을 나누는 단계,
배울 성경책에 대한 설명적인 단계, 그 책의 내용에 대한 이해력을 돕는 단계,
그리고 그 배운 것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게 하는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교사는 가르칠 교육에 대한 계획적인 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마스터 플랜을 갖고서 사람들을 인도하듯이,
성경교사는 자신의 가르침의 목적이나 내용과 결과에 있어서,
일관된 교안을 세울 것입니다.

가르침에는 네 가지 가르침의 단계들의 성취를 위해 각각의 목적과 방법등을 세웁니다.
서론적인 나눔의 단계에서는 학생들에게 가르칠 내용과
유사한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기존이해와 경험을 나누며
그들의 갖고 있는 선입관을 교사가 이해하고,
교사는 앞으로 가르침을 받을 내용을 통해
그들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파악하는 과정으로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아갑니다.
그 그룹의 수준에서 배워야 할 필요적인 부분들,
그리고 교사를 통해 성경에서 배울 내용에 대한 이해의 준비하는 단계입니다.
학습자들이 왜 그 내용을 배워야 하는 지를 설명해주며
실질적인 성경공부의 단계로 나가게 합니다.

학습자들이 제기했던 질문이나 필요에 대한 그 가르칠 내용에 대한 의미와
그 내용에 나와 있는 용어이해와 그 내용의 문장이나 단락 분석을 통해,
전체적 개괄적 이해를 돕는 자료들을 제공하면서,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흥미를 갖고서 자신들이 알고자 하는
몰입하도록 시청각 교재나 교사의 짧고 명료한 강의나
혹은 학습질문법이나 문장이나 문맥 설문 조사 등으로

학생들이 쉽게 성경의 내용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학생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이해했던 내용들을 정리하여
자신들이 취할 내용과 필요치 않는 것들을 분리하여,
그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거나 자신들이 갖추어야 할
이해의 관점을 갖도록 학습자들을 그룹을 통해서
혹은 개별적으로 케이스 스터디를 하거나,
자기 역할 놀이등으로 그 말씀의 가르침을 실제 적용하는 단계로 나가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학생들의 반응들을 점검하여, 무엇이 문제이며,
혹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과정을 가지면서,
교사는 학생들의 피이드백을 통해, 다시 그 가르침의 내용들을
재차 강조하거나 학생들이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는 실제적인 실행방법이나
적용 사례 등을 구체적으로 적어보면서 정리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가르침에 대한 자기 헌신이나 결단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그래서 그 내용들이 학습자들의 삶의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다짐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학생들을 그 가르침으로 복을 빌어 주며,
그 말씀의 살아서 그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의 삶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격려 합니다.

교사는 이제 전체적인 교수의 흐름이 단계별로 무리없이 진행되었는 지를 점검하며
무엇이 부족 하였는지와 강조한 부분들을 정리하여 다음 성경공부에 도움을 제공하는 자료로 남길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이나 가르침의 방식은 단순 명료하게 진행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교사 자신이 그 가르침을 통해 받은 것들을 자기 스스로 취할 수 있도록 자기발전에 학습점검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서 말씀을 적용하여 신앙이 성숙하여 발전하는 교사에 의해 발전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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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성도

(에베소서 5:15- 6:9)

어둠과 빛으로 비교되었던 크리스천의 삶은 이제는 지혜와 어리석음으로 비교합니다.
어리석음을 따라 사는 자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거슬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기에 자신의 근본에 대한 것이나
현재를 사는 의미를 모르며 더욱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모르고 삽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받지도 못하며 깨닫지도 못합니다.
고로 그가 선택하신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섭리를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인생을 어떻게 지혜를 따라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살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주장대로 삽니다.
세상인들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 우상이며 자기중심적이어서 하나님의 법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런 세상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무엇인가에 빠지지 않으면 살수 없습니다.
술독에 빠진 사람들, 마약이나 도박, 게임등 그리고 성적인 탐닉하는 행위등,
사람들을 쓸모없게 하는 일등에 마음을 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혜자의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인생의 지혜를 배웁니다.
그분을 모시고 사는 인생은 내가 어디서부터 왔으며, 지금 내가 왜 사는 지를,
그리고 내가 앞으로 갈 미래와 영원한 세상에 대한 분명한 길을 찾아 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는 어려운 인생역경에서도 웃을 수 있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유머는 그들의 고난 속에서 나온 유모어로
그들은 그것을 통해 인생의 깊이를 노래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감람산에서 제자들과 찬미하면서 고난을 맞이하셨습니다.
노래가 있는 삶은 즐거움을 주는 삶입니다.
건강하고 좋은 인생마다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어려울 때에도 슬픔의 노래가 아니라,
주어진 인생을 즐겁게 감사를 부르며 살아갈 때에 행복합니다.
늘 탄식과 불안의 체바퀴 돌 듯 절망의 늪 속에서
슬퍼하는 노래를 부르며 사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모든 인생들은 짧은 세월의 삶을 삽니다. 인생이 사는 때는 악한 때입니다.
타락한 인생은 세월이라는 시간 속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세월은 화살시위를 날아가는 활시위처럼,
그리고 쉬 사라지는 바람안개처럼 곧 나의 앞에서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기에 그 시간 속에서 기회를 사고,
선한 일에 무의미하고 헛되지 않은 중요한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런 인생들인 성도들에게 바울은 지혜자가 그 시간 속에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주님의 뜻은 성도들이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의 여러 가지에 도취되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 성도들은 이방세계에 살면서 우상숭배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 우상숭배의 제사는 사람들을 술로 취하게 하여
사람들의 건강한 정신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술취한 인생처럼 살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가져오시는 성령님을 바라보고
바로 그분으로 충만한 성령 충만한 영적인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며, 평안의 영이며, 또한 진리의 영입니다.
그가 오시면 죽은 인생들은 살아나고, 기쁨을 얻습니다.
은혜가 충만하며, 긍정적인 삶의 태도로 건강하게 삽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자세를 갖고 살게 합니다.
성도들이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이 오셔서
그들에게 주님을 알려주시고 주님의 구주이심을 믿게 인도하시며 언제나 내주하십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을 명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의 삶의 특성은 언제나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의 찬미의 제사를 드립니다.
공중예배에서나 마음으로의 개인적인 교제 안에서
주님께 대한 감사나 감격을 늘 찬미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의 삶의 모습이 보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모든 것을 주님의 중심으로 보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모든 일에 주님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자신의 형편이나 처지를 감사하는 삶을 따라 삽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삶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사에 긍정적인 인생을 삽니다.
청교도들은 미국땅에 와서 첫 번 겨울을 넘기면서, 감사절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인생긍정의 삶입니다. 하늘의 순천자는 흥합니다. 역천자는 망하는 삶입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와서 가정중심의 삶,
하나님중심의 삶, 예배중심의 삶을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넘기고 그들은 이곳에 생존하여
그 이듬해에 인디안 원주민들과 함께 한 해를 잘 보낸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추수 감사절의 유래입니다.

또한 긍정적인 삶은 좋은 인간관계에서 나옵니다.
행복은 좋은 인간관계를 통해 이루며 삽니다.
여기서 바울은 근본적인 인간관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부관계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축복의 기관인 가정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그 부부관계는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그것은 신비스러운 영적인 관계임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상전과 하인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21절에 모든 인간관계에서 주님 안에서 서로 순종하고 살 것을 권면합니다.
그런 순종의 삶을 사는데, 먼저가정의 삶에서 부부의 생활을 먼저 생각합니다.
크리스천가정의 부부는 주님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고 인정을 합니다.
그러면 가정의 행복의 밑바탕이 됩니다.

남편과 부부와의 관계를 통해 가정의 행복을 가져옵니다.
부인은 남편을 순종하며 남편은 부인을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부부의 비밀은 몸의 하나 됨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부부의 연결을 끊어지지 않는 영속적인 관계라,
즉 나누어 질 수 없는 관계라 하셨습니다. 그럴 때에 가정의 행복을 유지합니다.
가정을 이루는 데는 부부의 위치와 역할이 있습니다. 남편은 부인을 사랑하고,
부인은 남편을 존중하고 그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로스엔젤레스의 동양선교교회에서 가진 이희돈 박사의 간증테이프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세계무역센터의 부총재로,
2001년 에 9/11에 있었던 쌍둥이 무역회관 테러 당시에 그는 배가 아파서
그 회의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간증하기를 그 부인은 언제나 자기가 하는 말이나 일에 대해
인정을 해주는 일이 너무나 고맙다는 것이며,
그것이 특히 자기가 힘들 때에, 유학와서 처음에 신발장수를 할 때에,
충분히 살 형편이 못될 때에도 그 부인은 늘 남편을 격려하였습니다.
그것이 자기에게는 너무나 큰 힘이 되었고 자신 있게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바울은 신비의 관계라고 언급합니다.
부부관계가 한 몸인 것은 부부가 아닌 다른 이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처럼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도 신비함이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 즉 생명의 피로 맺어진, 사랑의 관계이며, 영원의 관계이며,
지속적인 교제의 관계입니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그분으로부터 삶의 의미와 가치와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주님은 그의 흘리신 보혈로 자신의 몸을 희생으로 교회 즉 신부를 사셨습니다.
주님의 신부인 성도들은 죄에서 구원하신 그의 백성들입니다.
주님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필연적이며 영원한 관계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희생을 통해 드리므로 교회인
그의 신부를 정결케 하며 거룩한 몸으로 세워, 그분께서는 주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며 교회는 그의 신부입니다. 몸은 머리의 지시를 받습니다.
그분의 몸의 지체들인 성도들은 머리의 지시를 받아 생활합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성도들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신부는 영원한 신랑이신 주님을 노래하며 찬송하며 삽니다.
영광된 주님을 향한 어린양의 노래는 계시록의 주제찬송입니다.

부부관계가 하나 됨의 신비한 관계라면
부모자식관계는 생명을 주고 받은 축복의 관계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복종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은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시작하며 배웁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주는 삶의 모델이 됩니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인생의 형통함과 축복됨을 물려 받습니다.
가훈을 통해 유산을 통해 인생을 유익하게 하는 유동자산이든지
혹은 무형의 자산을 물려받습니다.
성경에 아내는 하나님깨로부터 오고 집과 재산은 부모로부터 받는다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말보다는 부모가 하는 행동을 보고 배웁니다.
자식은 부모의 인정과 칭찬으로 건강한 인격의 사람으로 자랍니다.
그리고 남에게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잘 해냅니다.
부모의 입에서 나온 자녀들을 향한 칭찬은 아무리 강조해도 좋습니다.
자녀들은 그것을 먹고 건강하게 자랍니다.

사회는 위계질서가 있는 곳입니다. 한국에는 장유유서라는 말은
젊은이가 노인들을 공경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습니다.
상전을 잘 모시는 사람은 상전의 사랑을 받습니다.
인정을 받습니다. 주종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좋은 상전이 좋은 밑의 사람들을 다룹니다.
대통령이 바뀌면 그 밑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바뀝니다.
임금이 잘하면 국민들이 그 지도자를 늘 노래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칭송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주종의 관계는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강압적이거나 비자율적인 관계가(고로 공산세게에서는
눈가림이나 상관을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함) 아니며,
또한 자기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식의 이기적인 관계추구
(고로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인간이나 인간이 창출하는 모든 것들을
물질적인 수단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음)보다는
모든 관계에서 주님께 대한 신앙인의 자세를 가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 주님께 대하 듯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지혜자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항상 그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살기를 힘씁니다.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으니 모든 일에 자신감이 있고,
매사에 감사를 나타내는 삶을 영위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좋은 상태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감사와 기쁨의 노래 안에서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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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centered life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 5:1-6 바울이 걷는 것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일치, 거룩, 그리고 사랑 안에 살아가야 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남을 사랑하는 것(5:1-2). 각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로서 신자들은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마태5: 48, 누가 6:36). 그리고 라는 말은 즉 말하자면 이라는 것으로 어떤 생각을 표현할 때에 쓰는 것입니다. 2절에서 어떻게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가에 대해 설명하는 데, 그것은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입니다. 이 사랑을 나타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믿는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기꺼이 자신을 포기하셨습니다. (25절, 요10: 11, 15,17-18, 갈 1:4, 히9: 14). 이 희생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었습니다 (레 1:17, 3:16, 이사야 53:10). 이 향기로운 제물은 고후 2:15-16, 빌 4:18에도 언급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죽을 지경에 이를지라도, 타인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요일 3:16). 소극적으로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5: 3-6) 책임(5:3-4) 언어와 행위에 있어서 자기 중심적인 악한 것들은 1-2절에서 언급한 자신을 희생하는 것과는 반대의 것입니다. 이런 악한 행위들은 이기적이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기에 신자들은 그들의 생활에서 어떤 흔적이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성적인 비 도덕적인 것이나 어떤 종류의 불순한 것이나 욕심에서 나오는 것들은 신자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인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4. 언어생활에 있어서 합당치 않은 것, 수치스런 언어 사용, 어리석은 언어, 조악한 언어 등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은 자주 악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신자들은 타인들에게 감사하는 말을 하며, 남을 돕는 격려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유머 자체가 죄라고는 하지 않으나, 그런 유모어라도 남을 상하게 하고 파괴적일 때에는 잘못된 것들입니다. 이유(5:5-6) 악한 자들과는 하늘 나라의 기업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강하게 신자들에게 경고합니다. 그들이 악한 행위들로부터 즉 비도덕적인, 불순한 것, 탐욕적인 것 등을 피하라고 합니다. 고전 6:9-11에서도 언급하는 하늘나라의 기업에 참여할 수 없는 것들 즉 씻음 받거나, 성화되거나 의롭다 여김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아주 분명히 언급합니다. 탐욕자는 우상숭배자와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재물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골 3:5). 크리스천들은 이런 경고가 빈말이라는 생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불순종자들 즉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받는 사람들입니다(엡 2: 2). 죄를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은 심각하게 보십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지, 악한 자들이 아닙니다. 빛 가운데에서 살아가기(5:7-14) 악한 자들과 거리를 두기(5:7-10) 5:7/ 명령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들이지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하늘나라의 기업에 참여치 못하는 어둠의 자식들과 파트너로 있게 되는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5:8/ 악한 자들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이유는 크리스천들은 불신자들과 파트너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두움의 일에 관여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주님 안에서 빛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14-16, 요3:21, 8:12, 롬 13:12, 살전 5:4-5). 그들은 어둠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골 1:13). 이제는 빛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요8: 12). 그들은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가기(5:8-10) 5:8-10 명령/ 성도들의 행위들은 그들이 빛의 자녀라는 위치이기에 영적인 빛 가운데에 살아야 합니다 (롬13: 12). 에베소서 5:19절에 빛의 열매는 선함, 의로움(빌1: 11), 그리고 진실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반사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어둠의 자녀들이기에 반대로 악함, 범죄함, 그리고 거짓됨 등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빛의 자녀들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분별해야만 합니다 (고후 5:9, 골 1:10). 무엇을 발견하기는 즉 그 말은 테스트를 해보기 혹은 분별 하기 등으로 해석합니다(롬 12:2). 악한 자들의 악한 행위와 거리를 두기(5:11-13)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빛 가운데에서 살아 불신자들과는 떨어져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크리스천들이 불신자들의 행위와 같은 것들에 연관이 되지 않기를 언급합니다. 5:11 어둠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나 그것에 노출되는 것에 대한 명령/ 크리스천들은 불순종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금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불신자들의 행위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들의 길들은 어둠의 열매 없는 행위들로 빛의 열매와는 차이가 있습니다(엡5:9). 죄들은 아무 열매도 낳지 않습니다. 그 죄들은 자신이나 타인에게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빛의 자녀들로 이세상에 어둠의 행위들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빛 가운데로 걸어가지 않는 다른 신자들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의 행위들을 드러내고 그들을 판단하십니다.(고전 5:12-13). 신자들은 교회 내에서 다른 크리스천들에게 악한 행위들을 노출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위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생긴 문제들입니다.(고전 5장). 5:12 이유/ 그들의 행위가 부끄럽습니다. 비밀로 하는 그들의 행위는 말로 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불순종하는 자들을 불신자로 여깁니다. 그들의 행위들은 어둠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행위들이 신자들도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5:13 설명/ 빛은 사역들의 진실한 면을 보여줍니다. 빛이 악한 행위들을 밝히 드러냅니다. 그것들은 볼 수 있으며, 그것들이 실지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나타냅니다. 그것들이 악으로 보는 것은 신자가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런 행위들이 자신들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치명적 일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5:14 결론/ 그리스도의 계몽 어둠의 일을 범하는 크리스천들은 깨어나서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악한 자들의 행위에 연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비쳐주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것들을 행하도록 제시합니다. 신자들은 빛 가운데로 살기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열매 없는 일들이 알려지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빛 가운데에 살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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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생활에서 새생활로

에베소서 2:1-10 예수님 믿기 전에의 삶은 세상의 원하는 방식대로 따르는 불신의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그 세계는 공중의 권세 잡은 세력에 의해 이끌리는 세상이다. 그 세계는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역사하는 영에 의해 이끌림을 받습니다. 그 영은 악한 영으로 사단입니다. 불신의 세계는 사단의 지배를 받는 사회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그 권위에 도전하여 죄의 길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크리스천 공동체의 전 몸을 채우십니다. 본문은 믿는 자들이 믿기 전에 허물로 죽은 상태를 언급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가장 불행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믿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인하여 비참한 상태에 빠졌었습니다. 허물이라는 파라프토마이는 도덕성 악과 덕을 구별하는 거룩한 의미로서의 가벼운 위반을 의미합니다. 하말티아는 습관적인 허물로, 알면서 대담하게 죄를 범합니다. 에베소교인들은 우연히 죄를 범하지 않고, 허물과 죄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것은 단지 한곳의 일만이 아니고, 전세계적으로 같은 범죄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의 풍속이란 지속되는 상태로,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으로, 인생의 삶 전체는 죄의 티슈입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인간의 영혼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다. 명목상의 크리스천도 이런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공중의 군세의 왕자는 이미 주님에 의해 현저히 그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불의의 세상에 영향을 줍니다. 그것은 사단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공중이란 악한 영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사단의 영향을 받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사탄은 악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을 합니다. 그는 조직적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법을 무너뜨립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가 그들의 아비이며, 불순종이 그들의 어미입니다. 악한 자의 자식이며, 마태13: 38, 요8:44, 불순종의 자식은 불신, 고집 센, 핍박자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말씀을 거부하고, 공중권세를 잡은 악의 영에게로 이끌림을 받습니다. 한 때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으며, 육체의 본성은 타락하여 죄에 오염이 되었습니 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는 것은 주님의 진노를 살 뿐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행태에 빠져, 육체의 욕심에 이끌립니다. 불신의 인간 생활은 인간 육체의 소욕으로, 마음의 왜곡으로, 불의의 산물을 일으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저주의 자식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자연적인 이성과 양심, 또한 인간의 관습과 습관에 의한 기질, 그것은 인간의 원죄, 마음의 육체의 소욕, 타락한 본성입니다. 그리고 불의의 산물인 저주의 자식은 연옥이나 죽음의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미워하심에 노출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심이 풍성하셔서, 그의 크신 사랑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사랑으로 그의 크신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그의 자비하심은 그의 사랑을 통해 나타나며, 그의 자비는 그의 사랑의 속성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풍부한 자비하심은 타락한 인간에게 충분한 구원으로 임합니다. 인간이 타락하였기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의 자비하심이 요구될 뿐입니다. 그의 크신 사랑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구원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비의 형태로 나타나, 그 자비는 구세주 주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임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이들에게 가져 오십니다. 비록 허물로 죽은 우리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허물로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길은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본성에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옛사람의 본성이 죽고 새사람의 속성이 살아나,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으로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의 상태는 아직 죄에 쌓여있는 자연적이며 거듭나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의 생명과 단절된 상태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없는 상태입니다. 몸의 죽음을 넘어 영원한 죽음은 의식적인 고통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단절된 상태입니다. 이것을 두 번째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비록 죄 안에서 죽었습니다. 영혼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율법에 대해서도 영원한 죽음조차도 노출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살리심은 먼저 주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완전함을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거듭남으로 그분과 함께 사는 출발을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은혜로운 것으로 타당하게 여기는 것으로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의 자리에 앉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사, 주님과 함께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하십니다. 우리를 죽음의 세계에서 부활케 하므로 하늘의 세계로 올렸습니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사,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그가 온전한 구속으로 그의 피로 의롭다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게 우리에게 그의 구속을 받도록 그를 의의 생명으로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죄의 죽음에서 의의 생명으로 옮겨져,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그리고 이 영광을 받은 이 구원의 소유를 행복한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 있습니다. 오는 세대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친절하심 안에 있는 그의 넘치는 풍성한 은혜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친절하심은 그의 은혜를 통해 그의 구원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은 영혼을 살리심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여러분은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의 구원을 받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의 구원은 은혜를 통해 얻습니다. 그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 구원은 우리의 죄가 씻음 받고, 성령에 참여하여, 불멸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대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에 의한 것이며, 구원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사람의 수고로 이루어 지지 않아, 자랑할 수 없으며, 그의 은혜로서, 그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그의 솜씨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선한 일을 하는 것 안에서 우리를 준비케 하십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며, 그의 솜씨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그분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인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어둠의 세계에서 빛에게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놓으신 구원입니다. 거룩의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여, 우리 마음 안에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거룩을 사모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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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에베소서 3:1-13) 서론(3:1)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와 그의 신비를 전하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방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3:2-6) 가 하나님의 은혜의 수여(3:2)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분배자로서의 사명은 이방인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나.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의 계시(3:3-5) 하나님의 은혜가 계시로 알려졌습니다. 이미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에베소에 있는 이방인들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다른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 이 세대에 성령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의 축복에 참여(3:6) 이 신비에 이방인들이 전해진 복음을 통해 상속자로, 혹은 하나님 가족의 한 지체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그 약속에 참여자로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전달의 사역(3:7-12) 가. 신비 전달의 사역의 전진기지(3:7-8) 바울은 복음의 심부름꾼입니다. 이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능력을 부어주시는 주님의 능력에 기초합니다. 자신은 모든 자들보다 부족한 자이나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 전달 사역의 실천(3:8-10)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전하며,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알려주는 이 신비의 사역을 실천합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 사역의 목적(3:10-12) 바울 사역의 목적은 하늘의 존재들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각종지혜를 알리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신 것처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담대하게 확신 있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결론(3:13) 바울의 고난 당함은 복음 전파를 통해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영광을 얻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 로마에서 2년을 갇힌 자로 지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즉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따라, 로마의 정부의 감옥에 갇혔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잡힌 자로 여기며, 그의 주시는 사명을 위하는 삶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은 마치 바울의 일생같이 처음에는 율법에 매달려, 그 율법에 의해 크리스천들을 정죄하고, 핍박하는 그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그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가 있습니다. 바울은 남을 해치는 인생이 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로 이방인 전도자로 택함을 받아, 남을 살리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한 유명한 건축가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있는 왕궁을 짓게 되었는데, 왕궁의 천장과 벽들에 넣을 아름다운 거울을 프랑스에 있는 이름있는 회사에 주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거울들이 먼 여행의 뱃길에 다 부서져서, 거기에 도착하였습니다. 깨진 거울들을 본 건축업자들은 쓰레기통에 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건축가는 깨진 거울과 유리들을 모아, 왕궁의천장과 벽들에 모자이크로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는 기술을 발휘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더 감탄한 건축의 미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망가진 인생이나 구겨진 삶을 회복하고 펴서 새로운 삶을 만들게 하시는 훌륭한 인생의 설계사이십니다. 그의 손에 있는 헝클어진 인생을 사는 사람들 마다, 전혀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그의 신비한 은혜의 경륜으로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들을 위해 주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자로 자신을 여깁니다. 주님의 일꾼은 그의 일을 이루기 위해 그에게 속한 일군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잡힌 자로 인정함은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 정해진 코스를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메섹 도상에서의 해보다 더 밝은 빛을 비추신 주님에게 매여있는 사람입니다. 이방인들을 위해 마련하신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여자로 분배자로 그 은혜를 나누어 주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은혜가 비밀로 여기던 것을 주님께서 계시로 알려주게 되었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로, 그의 구원의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 예수님에게서 선포되며,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분여라는 말은 청지기, 관리, 경영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청지기, 해야 할 일등으로 선택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을 따라, 하나님께서 맡겨진 천직으로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는 일, 즉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4절에 그리스도의 신비/ 비밀/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통해 부분적으로 알려졌고 완전하지 않으나, 신약시대에야 비로소 메시야가 오심으로 알려진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신비가 알려집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비를 알리고 있습니다. 그 신비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복음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복음은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당시에는 물고기로 크리스천들이 믿는 자의 표시를 했습니다. 알려주어야 알고, 보여주어야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신비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그의 비밀로, 주님의 계시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주 예수님 안에 은혜가 충만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신약시대에 주님의 오심으로 온전히 전해졌습니다. 이미 받은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 당신들이 읽은 대로, 주 예수님의 비밀 속에 있는 나의 지식을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주 예수님의 비밀인,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에게 대한 모든 것 등에 대해 알려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령을 통해 주님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의 계시로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을 통해 선택된 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고로 지금 우리의 받는 은혜, 즉 하나님의 비밀의 축복도, 그의 선택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이제 이방인들인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안에 있는 주님의 약속들에 참여한 자들이며, 주님의 같은 몸에 있는 지체들이며, 그의 가족의 동료 상속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방인였던 에베소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에 참여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에 의해 자신을 그릇되게 보거나 주변인들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때에, 우리 자신은 더욱 의기소침하며, 좌절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선한 계기나 혹은 보다 자신의 가능성을 보아주는 사람에 의해 격려를 받을 때에는 새로운 자신있는 삶을 살아갈수 있습니다. 성경학자이며 신학교교수였던 헨드릭슨 목사님은 어린 시절 국민학교 5학년때까지 그는 늘 말썽장이며, 아이들 사이에서 악동으로 취급받아왔습니다. 그도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여기며, 늘 학교에서도 담임선생까지 늘 그에게 너는 이 학교에서 가장 불량한 아이야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해 6학년이 되었을때에 새로운 여선생을 만났는데, 그 여선생은 그아이에게 들은 소문을 무시하고, 헨드릭슨에게 나는 너에 대한 소문을 하나도 믿지 않아, 너는 잘할 수 있어, 그렇게 격려를 해주며, 헨드릭슨을 인정하여, 학교 방과후에 남아 있게 선생님의 일을 돕게 하며,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후 그는 자신의 삶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 모범생으로 공부를 열심히 잘하는 학생으로 변화하였습니다. 그후의 그의 인생은 성실하며 자기 일에 열심하는 좋은 인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8절에서 두 가지 단어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상반되는 의미로 인하여 우리에게 의미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성도들 중에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기는 바울의 겸손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바라봅니다. 그 의미는 작은 것과 엄청나게 큰 것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볼수록 자신을 작은 자로 겸손하게 봅니다. 11절에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 영원한 목적이 있음을 언급합니다. 그 영그 비밀의 교제가 무엇인지, 주 예수님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창조 시부터 감추어 놓으신 그것을 보게 하시려 합니다.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에게 교회를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각종의 지혜를 이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영원한 목적을 따라서 교회의 사명도 주님의 은혜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의 목적을 좇아 복음전파와 사명자들이 존재합니다. 성도들은 신령한 지혜를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를 좇을 때에 얻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그 목적을 따라 삶을 감당합니다. 12절에는 에베소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는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신념이나 확신이나,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13.절에 고난을 당하는 것과 영광을 받는 것의 차이를 말해줍니다. 바울은 복음사역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이며 그것은 도리어 이방인들이 그의 전하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영광을 얻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수고에는 고난이 있지만 반면에 거기에 영광이 있습니다. 고로 바울은 고백하기를 여러분들을 위해 나의 당하는 시련은 여러분에게는 영광이 되며, 그것으로(고난 당함) 인하여 나 자신에 대해 의기소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에게는 고난이지만 성도들은 영광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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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꽃병에서 얻은 교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힘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에베소서 2:: 13-15) 어느 가정에 증조 할머니로부터 받은 귀한 꽃병이 그 가정의 가보처럼 여기며, 어머니가 늘 소중히 다루는 것으로 진열대 맨 꼭대기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섯 살 짜리 그 집의 남자아이가 그것을 만져보고 싶어 건드렸는데, 그만 그 꽃병이 거실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마침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가 달려왔는데, 아이는 자기의 잘못을 알고 울기 시작하였다, 그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엄마에게 “내가 꽃병을 깨뜨렸어 …” 겁을 먹은 얼굴로 간신히 말을 하였다. 그런데 그 때에 엄마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 얘야, 나는 네가 다친 줄 알았어…” 엄마는 우는 아이를 달래며 한참을 안아 주었다. 그녀는 그 아이에게 그 아이가 꽃병보다 자신에게 더 소중한 보물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중에 어른이 된 그 아이는 그때에 엄마가 자기를 소중히 여긴 것을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을 하곤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하여 꽃병이 깨어진 것을 기억하기 보다는 우리를 소중히 여기셔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희생하면서 까지 원수였던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우리를 자신의 소중한 보화처럼 여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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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안에서 우리는 하나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에베소서 2:11-22)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구원받은 가족이 되는 과정)의 원리를 제시한다. 또한 동시에 주 예수님 밖에 있는 불신자의 상태에서 어떻게 주님 안에서 신자의 삶으로 바뀌어 지는 지를 설명한다. 1. 하나됨(구원받음)에 대한 진술(2:11-13) (가) 불신자(이방인)의 문제들: 1.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분리됨. 2. 이스라엘의 시민권에서 제외됨 3. 하나님의 약속의 계약에서 소외됨 4. 구원의 희망이 없음 5. 하나님이 없는 삶 (나) 신자가 되는 기초(2:13) 예수님의 피로 주님 안에서 하나(구원받은 가족)됨 2. 하나됨(화평)의 원리들 (가) 화평의 기초(2:14-16) 주 예수님께서 막힌 담(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적대감)을 허심 (나) 화평의 선언(2:17-18)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화평을 선언하심,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허물 많은 우리를 인도하심 3. 하나됨(구원받음)의 결과(2:19-22) (가)새로운 관계(2:19)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됨,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 됨 (나) 새로운 역사(2:20-22) 하나님의 집의 기초가 되시는 주 예수님 위에 서로 연결되며, 성령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으로 성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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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안에서 하나가 되는 길

(에베소서 2:11-22) 과거에 이방인처럼 살았던 때를 기억하면, 육체의 소욕을 좇는 삶을 살았습니다. 육체에 할례를 받는 것에서 무할례자처럼 살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조차도 따르지 않고, 육체의 본성을 좇아갔던 때입니다. 그 때에는 방향도 모르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이며, 하나님의 약속밖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밖에 있어서, 그의 은총을 받지 못했으며, 이스라엘의 축복으로부터는 멀리 소외된 자였으며, 하나님의 약속의 계약밖에 있어서, 외인처럼 지내는 처지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는 자처럼 살았으며, 희망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은혜를 모르고, 축복을 모르며 살아온 나날들, 단지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무의미하게 살며, 그리고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함을 안고 살았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품 안을 떠나 살았으며,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총을 받지 못하고, 그분의 사람들과 맺은 계약 밖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멀리 있었던 처지에서 주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간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며, 그분의 은총을 입는 상황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멀리 있었을 때에 소외된 자로 버림받은 존재로 살다가 이제는 그분의 아들이며 구세주이신 주 예수님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피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어, 그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로 직접 나올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며,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신 주 예수님의 인도에 따라, 주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님 자신은 우리의 평화가 되십니다. 둘로 나누어진 부조화된 세계를 하나로 묶어 주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나누어 졌습니다. 그 관계가 분리되어 중간에 막힌 담을 가져 왔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단절된 관계를 복원하셨습니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단절도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단절로 파생된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 분리된 관계의 회복 또한 주 예수님의 연결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적대감은 주 예수님의 육체의 사역으로 폐지하시고, 즉 하나님의 법령을 어긴 인간들에게 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새사람으로 만드시는 창조의 사역을 우리 안에서 만드십니다. 고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평화로 연결되는 새로운 형태의 사람을 이루게 하십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의 육체에 계셨을 때에 이루신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한 몸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케 했습니다. 인간은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가 되었는데, 주 예수님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므로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 적대감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사역을 통해 무너져 그 적대감은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활동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통해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화해의 구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주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과 멀리 있었던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셔서,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공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셨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그분에게 의탁하여 주 하나님에게 나아가 그분의 사랑을 통한 화해와 사랑의 구원을 얻습니다. 주 예수님을 통해 그분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해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다가 갈수가 있습니다. 그분의 성령은 믿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주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깨닫게 하시며, 주 예수님에게 여러분에게 다가와 주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알게 하시며,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분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나그네도 아니며, 외국인도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집의 귀한 식구들이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분은 여러분의 구세주가 되시며,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돌보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 기초가 되셔서, 예언자와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가족의 약속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구원의 근거가 되시어, 하나님의 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집을 이루는 건물의 주요한 주춧돌로 그분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집의 식구들을 구성하는 멤버들이 되었습니다. 그 전체의 건물은 서로 주 예수님의 피로 연결되었으며, 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갑니다. 이제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그분을 우리가 주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을 섬깁니다. 그분의 은혜를 받으며, 그분이 마련하신 권세와 영광(우리 인간들이 잃어버린 것들)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건물에 붙어있는 자들로 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에 영원히 머물러 계셔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집의 건물을 이루어가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이 영광은 영원하며, 존귀하며,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부여된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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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들으면서

사람은 오감의 특성에 따라, 어느 경향이나 그 경향을 따라 자신의 취미나 즐기는 엔터멘인트에 심취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보는 눈의 감각에 자극이 되어 보는 것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화를 보거나, 혹은 독서를 하는 경우이며, 청각에 의존하는 취미는 음악을 듣는 것이리라. 청소년 시절에 공부를 하든지 책을 읽을 때에 60,70년 대에 유행하던 미국이나 유럽의 팝송 음악을 들으며, 그 시간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내가 있는 미국의 한 도시에서는 과거 60,70년 대에 유행했던 팝송을 전문적으로 틀려주는 미국의 F.M. 음악 방송 전파 매체도 있다. 가끔 차를 타고 가다 그 방송 매체를 듣다 보면, 옛날 들었던 귀에 낯익은 음악 소리에 어린 청소년 시절의 향수에 젖기도 한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에 나의 다운된 마음을 추수리며, 나의 내면에 강한 반향을 일으키며, 나의 흩어진 마음을 다짐하게 결단의 영음으로 들려올 때가 많다. 젊은 날에는 팝송이나 웨스턴 음악을 들을 때에 젊은 날에 열기에 불을 붙이며, 일상의 평범에서 사는 나의 마음은 먼 미래로 날아가는 나의 영혼의 나래를 펴서 미래에 대한 비전과 이상에 대한 꿈에 대한 열기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하였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클래식 음악을 하는 부인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여 마음의 고요와 마음의 집중에 도움을 주는 음악의 감성의 흐름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클래식 음악은 나의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특히 클래식 음악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보다는 더 음악이 주는 정서적인 혜택을 받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 한다. 그것은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악보를 보고, 자기가 다루는 악기나 음정에서 나오는 멜로디나 들려주는 소리를 만드는 일에 대한 부담감을 갖기 때문이 아닌지… 나는 천성적으로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음악을 듣는 것이 없다면 나의 삶은 삭막하며, 활기차지 않다. 슬플 때도 음악을 듣고, 마음을 달랜다. 그리고 마음이 우울할 때에도 음악을 들으며, 자신을 가다듬으며, 심기일전의 마음을 세운다. 그리고 공부할 때에나, 책을 읽을 때에도 음악을 들으며, 흥에 겹든지, 아니면 음악에 심취하면서, 집중하면 능률도 오르고 긴 시간을 마음을 잡아서 그것에 매달려 머리를 쓰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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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축복을 위한 간구

에베소서 3:10-21 이런 이유로 인하여, 바울에게 그 이유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 에베소 성도들에게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위해, 아버지에게 즉, 그 이방인들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들의 축복을 위해 간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생적인 목회자의 심정으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는 참 목자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기도하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어떤 심정으로 무슨 동기로 구하는 가는 참으로 중요한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하늘 아버지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는 각자에게 맞는 자리나 위치를 세우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가족들은 누구일까? 땅에 있는 가족들은?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그들에게 맞는 은총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자기의 영광에 합당한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에게 각각에게 맞는 자리와 영광을 부여하십니다. 주님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내면의 사람에게 주님의 성령을 통해 능력으로 강하게 하십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이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갖고 게시는 영광은? 우리 모든 존재에게 크나큰 은총입니다. 그의 영광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의 충만함이 십니다. 그 충만함에서 나오는 풍성으로 모든 만물을 충만케 하십니다. 모든 만물 가운데에 그분의 영광으로 충만하십니다. 당연히 성도들에게 부여하신 그분의 영광을 통해 성도들에게 그분의 충만하심의 풍성을 얻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내면의 사람에게 더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그분은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에스겔이나 예레미야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새 마음을 새 영을 부여하신다는 약속하신 대로 지금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을 통해 새롭게 된 성도들에게 성령을 통해 그들의 내면의 사람들을 그분의 영광의 풍성으로 충만하게 채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들 안에 머물러 계신다는 말씀은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 주 예수님께서 마음 안에 거하시는 길은 먼저 그분을 마음의 왕좌에 초청하셔서, 그분에게 거기에 좌정하시도록 모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주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신들이 죄에 대하여 죽고, 그분이 하나님의 의로서,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영향력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여 우리가 원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분을 믿는 믿음이란 그분의 능력과 가르침을 따라, 그분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안에 그분의 사랑을 심으셔서,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깊은 뿌리를 내리며, 그분의 사랑의 영향력 안에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토대로 그 사랑의 세력을 확장하는 삶을 삽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모든 성도들이 알 수 있도록, 즉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이 모두에게 넘치게 되어 그들이 그 사랑에 취할 수 있도록 우리안에 그분의 충만함을 구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열매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내 안에 변화된 그분의 영향력이 모두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자신의 변화됨을 비춰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단지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경험하도록 우리 안에 그분의 영향력에 흠뻑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 이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넘고, 바라는 것을 넘어, 그분은 우리에게 넘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것에 따라 그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부활케 하심과 그 주 예수님을 온 만물 가운데에 으뜸으로 세우시고, 모든 권세가 그분 앞에 무릎 끓게 하신 주권의 영향력에서 나오시는 그분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사망도, 그 어떤 세력도, 그 어떤 존재도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제한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전능하심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 주 하나님께 교회 안에서와 교회밖에 있는 존재에게라도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세대에게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계시는 주 예수님은 만물, 그리고 모든 세대에서도 그분은 주님으로 통치하십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토록 존재합니다. 주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토록 존재하십니다. 아멘.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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