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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5/08
    예수의 발견
    목동
  2. 2009/05/07
    두 세계 사이에서
    목동
  3. 2009/05/06
    가능성의 세계를 넘어 믿음의 세계로
    목동
  4. 2009/05/06
    믿음과 기도에 대한 이해
    목동
  5. 2009/05/06
    홀로 설수 없는 인생
    목동

예수의 발견

예수의 발견
요일5:20

나의 영성생활은 어릴때부터 얻은 신앙생활에 근간을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배워온 모태신앙에 의해 습관적으로
혹은 교회생활중심의 영적생활에 치중을 해왔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적이며, 관념적인 신앙에 매이게 되었다.
이런 영적 생활의 습관들이 나로 하여금 개인적이고
역동적인 주님과의 관계를 희석시키며, 나의 영성은 점점 무디어져왔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겪은 육체적인 아픔이나 약함들이 나로 하여금,
다시금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자신의 한계에서 오는 도움의 간절함과 영혼의 절규는
생생한 주님과의 살아있는 인격적인 교제를 불러 일으킨다.

최근 몇년동안 (2-3년)나의 육체적인 무너짐은 그동안 피상적이었던 신앙생활에
한없이 미끌어져내려가는 세상의 이끌림에 방향을 잃고 살아왔으나,
최근에 육체의 한계를 통해 영혼의 불꽃을 불태우면서 주님에게 다가가는 
내면의 소리는 나로 하여금 나의 제한된 신앙생활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하여,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을 하고 있다.

요즘 나는 왜 내가 다시 예수를 찾아야 하는가?  하는 나의 신앙생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잃었던 주님과의 생생한 만남의 교제를 불러 일으키고 싶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로 귀결이 되며,
그 종교는 결국, 인간영혼의 내면의 근본적인 갈급함으로
채워지지 않되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오직 그분만이 길인것이다.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예수가 하나님의 해답이다.
창조주께서 오직 한 이름에게만 그에게 이르는 길을 일러주셨다.
그 이름은 예수, 예수는 신이자, 인간의 몸을 입은 분이다. 그분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다.
그분의 출생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처녀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다.
사람들은 좀 더 그분을 열심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을 통해 인간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현실로 다가갈수 있다.
그분안에는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접촉하는 점이 있다.
그분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며, 인간의 잃었던 위치를 되찾을 수 있다.

왜 내가 그분을 더 열심히 알아야 하는가? 그는 내게 누구이며,
그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분은 나의 구주이며 나의 삶을 다시 새롭게 하신 생명과 부활의 주이다.
근래에 나의 삶에 나타난 인간의 나약함이나 나의 병약함은 나로 하여금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와 생존의 문제에 있어,
나는  한없이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메디칼 치료는 회복할 길이 없는 병약함에 빠져있다.
암보다 더 치료가 힘든 아밀로이드와 그로 인한 심부전증을 순간 겪으며
그리고 폐에 물이차는 육체의 한계속에서 지탱해야 하는
나의 육체적인 상태는 오직 그분만이 나를 만져주셨고, 나의 심장을 새롭게 하셨다.
그는 나의 메디칼 의료의 결과를 통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의 결과를 보고를 의사들로부터 받았을 때에
(아밀로이드가 심장에 영향을 주었을 경우에는 수년내에
나의 육체적생명은 생존의 제한을 받는다는 의학적심판을 받았다)
그 다음 날, 그런 나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구하는 나의 기도(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나는 그의 보혈로 그의 덮으심을 구하며, 7시간을 기돠여 그분의 치료를 받기위해 준비하였다.)
에 응답하여
그는 나의 몸을 어루만져, 나의 심장을 새롭게 만들어 주셨다.
그후에 나는 호흡의 힘을 얻고, 모든 치료의 회복의 시작의 사인으로
그분의 만져주심을 통해 소망의 부활을 얻었다.

이제껏 나의 연약한 육체를 안고  나는 순간마다 외쳤다.
주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힘이 없나이다. 인간의 한계를 경험한 나는 그분의 새롭게 하는 부활의 힘이 아니고는
결코 다시 설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시는가? 그분은 나를 붙드시는분이며,
나를 새롭게 나의 허비된 삶을 이끌어 가신다.
나는 그분의 위로부터의 부르심에 앉힌바 삶을 다시 살아간다.
나의 호흡은 오직 그분의 부활의 힘이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그분을 부단히 찾지 않을 수없는 이유이다.
왜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분을 찾지 않았으며, 그분을 알려고 힘쓰지 않았는가?
후회가 막급이지만, 이제는 그분을 알아야 겠다는 영적인 갈급함이 솟구친다.
그분을 알아야, 세상이 열리고, 인생이 열리고.
그분이 오신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인생들을 풍요롭게 하는 그분의 손길을 경험한다.

아직도 나는 예수를 잘 모른다.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며,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이며,
그분은 모든 성도의 구주이며, 교회의 주인이며, 세상의 주인인 것을 알지만,
그분을 실지로 모른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은 내 장래의 삶에 어떤 분이며, 지금, 다가오는 나의 삶에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는가?
 
예수는 하나님의 비밀이다는 말은 언제나 그분에게는 신비로운 인간의 돌아가야 고향이다.
예수안에서 참인간을 발견하며, 참 하나님을 만날수 있다. 그분은 모든 창조세계의 근본이며,
그분을 통해 우리가 존재하며 세계는 그분을 위해 존재하여, 그분은 세계존재의 이유와 목적이다.

예수를 알자, 예수를 발견하자. 나의 생애의 사전에 그분이 나에게 무엇을 하셨나?
나는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지 않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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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 사이에서

두 세계사이에서
요10:10

세상에는 도적이 오는 어둠의 세계가 있는 가하면, 빛을 전하는 생명의 세계가 있다.

먼저 어둠의 세계는 늘 인간에게 도적이 몰래 접근 하듯 인간이 사는 현실에 다가온다.

그 도적이 오는 것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온다는 말의 내용은
실제적으로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된 인간세상에 영적세력의 영향으로 인하여,
인간은 공격을 받아왔다. 인간을 공격하는 세력은 인간의 존엄과 영화된 위치를 갈아 뭉게,
자신의 하수인혹은 영적인 노예상태로 만들어, 한없이 인간을 지배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

그 배후에는 인간의 가장 큰 원수인 사단이 있는데, 이 영적인 존재가 창조주를 대적하여,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중에 하나가 창조주의 피조물인 인간을 지배하려는 시도이다.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귀신들이나 더러운 영적인 세력들은 대적하는 세력으로
인간을 헤치는 일들을 벌려 놓는다. 인간을 병들게 하고, 상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게 하여, 결국에는 파멸시키려는 일들을 일으킨다. 인간의 역사속에서 나타난 수많은 범죄의 행태나, 전쟁과 고통의 역사뒤에는 이러한 어둠의 영향들이 있어왔다.

어둠의 세력의 인간을 괴롭히는 시작은 세상의 초기에
아담과 하와로부터 인간에게 행한 사단의 유혹으로 인하여
인간은 창조주 앞에서 자신들의 범죄로 인하여 자신의 존엄된 위치를 박탈당하였다.
그후에 그 어둠의 세력은 인간에게 합법적으로 약탈하고 지배하고
멸망시키는 일들을 자행하여왔다.

그런데 인간을 지으신,창조주께서 인간을 다시 그 영화된 위치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분은 그 어둠의 세력들을 무찔러 그 세력들을 무력화시키며,
결국에는 그들이 가야할 멸망의 운명으로 그들을 소멸케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결국 그들 세력의 영향을 무력화하고 그들의 손의 세력
(죄와 죽음으로 통한 노예상태)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값을 치루사, 대신 고통과 죽음을 맛보시고,
다시 살아 부활하사, 인간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셨다.

그분이 이땅에 오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잃었던 지위를 회복케하고 인간을 살려, 인간이 가져야 할
하나님의 영광된 위치에 이르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영생을 얻게 하므로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여,
인간이 누리는 행복과 영화를 얻게 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이 두세계사이에서 고뇌하며, 고민하며, 방황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가야 할 참 길을 찾아 진리를 좇아 사는 생명을 얻는 길위에 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열려 있으며, 생명을 얻게 하는 구원의 소식은 알려져 있다.
귀있는 사람이면, 언제나 자기주변에서 생명을 얻게 하는 소망의 뉴스를 접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혹은 외부의 환경에서 혹은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두세계사이에 살고 있지만,
언제나 생명을 얻게 하고 자신의 삶을 유익하게 하며,
더 나아가 풍성하게 하는 삶으로 인도되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설수 있다.
이 길은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생명의 소식이다.

그 도적들의 세력들이 끼치는 영향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세력과 대적하여,
진리를 따르며,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다.
자신의 삶안에 들어와 자리를 틀고 앉아,
사람들을 헤치는 어둠의 세력은 대젹하여,
우리 자신들이 강하게 될 때만이 그 세력을 물리 칠수 있다.
도적이 오면 더 강한 세력이 그 도적을 제압하듯,
경찰은 더 강한 힘으로 그 도적의 무장을 해제하게 하여, 그 세력을 제거한다.

사람들이 특히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오직 진리안에서 강해질수 있다.
진리이신 예수안에서 그분과 그분의 능력안에 머물러 있을때에,
강하게 되어, 그 어둠의 세력의 영향을 벗어나,
그리고 그 세력을 억제하고 그리고 또한 제압하게 된다.
이렇듯 영적생활을 하는 이들은 영적전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그 분(예수)안에서 강하게 되는 데 그 강하게 되 비결은
진리(예수와 그의 가르침)를 좋아하고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분안에 있는 능력으로 무장하는 데 있다.
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그 아버지가 마련하신 능력의
전신 갑주(의의 흉배, 진리의 허리띠, 성령의 검, 영혼(구원)의 투구,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를 갖추어 입고 있을 때에,
진정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을 하나님의 전신갑주라 한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온전히 도와주기를 좋아하신다.
그분의 도움은 완벽한 도움이 되는데, 그분은 자녀를 보호하되, 피난처가되며,
요새가 되며, 그리고 수시로 현실적인 도움으로 언제나 자녀의 필요에 응하신다.

그분의 도움은 실제적으로 그분의 보내신 영이
사람들 속에서 끊임없이 영혼을 깨우며,
그분과의 생생한 교제가운데에로 인도하여,
늘 그분의 도움아래에서 자녀들이 힘을 강하게 하여,
능히 어둠의 세력을 대적하여 승리하게 하신다.
그의 영은 우리안에서 언제나 탄식과 음성으로 자녀들을 인도하신다.
자녀들은 그분의 영안에서 늘상 호흡하듯, 그분과의 교제안으로 인도한다.

이렇듯,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와
언제나 그분의 영이신 성령안에서 호흡하는 기도를 통하여
그 두세계사이에서 승리하면서 빛가운데로 나가며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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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세계를 넘어 믿음의 세계로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요6:1-5

이 기적이야기는 주님의 복음서중에서 부활에 대한 기사가
4복음서에 다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기적이야기는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창조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메시야적인 기사이적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우리의 일상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믿음의 세계로 발전시켜 주님안에서 문제를 해결해 가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항상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문제의 바다로 던져져 그 문제를 헤엄치고 살아남는 문제로
늘 안고 있는 우리만의 고민이자, 삶의 이유이다. 삶이 있는 곳에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사는 일은 그 문제안에서 우리의 생존의 의미를 찾는 이유이다.

오늘 본문은 메시야 강림시대를 살고 있는 팔레스틴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주변동네를 나니시는 메시야로 향하는 여러가지 소문과
그분의 하신 일로 인하여 온 동네마다 메시야에 대한 뉴스를 넘쳐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누구나 주변에 아픈 이가 있는 하면
본인자신이 질병에 노출되어 인간의 절실한 문제로 누구나 거기에 매여 있는데,
메시야가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인간이 안고 살아가는 생노병사에 대한 고민을 함께 느끼며
그 문제를 진지하게 풀어주는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의 아픔을 알았으며,
그들의 고통이나 고난을 함께 풀어가는 해결사로 그들의 삶의 주변에 머무셨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그분이 행하는 치유의 기적과
기사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아직은 그들은
그 분의 주장하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서성이는
정도의 구경꾼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제는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하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여 사람들은 점점 그분의 말씀의 세계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한끼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빈민이나 가난한 이들로, 날마다 끼니 걱정을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잊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하늘메시지에 심취하여
끼니 걱정을 하지 않으며, 3일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정 그들이 배가 고파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굶주림의 문제가 그들이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분을 따라 다닌 사람들은 유대지역에 있는 사람들 남자어른만 5,000명이나 되었은데
실제인구는 부인과 아이들까지 따지면 족히 2만명이 죄는 거대한 집단이었다.

이들을 먹여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메시아는 직면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삶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셨나?
제자 한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 제자의 대답은 현실적인 눈이 밝은 계산으로
그들을 먹일 돈을 계산해보니 한 노동자가 벌어야 돈이 당시에 1 데나리온인데
그 노동자가 벌어야 할 돈이 200 데나리온을 벌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품삯은 200일간을 일을 해야 한다. 거의 8개월을 매일 가서 벌어야
벌판에 있는 굶주린 민중들을 먹일수 있다.

메시아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다시 제자들을 향해 바라보는데,
그중에 한제자가 평소에 메시아가 하신 기적의 세계를 경험하였던 바,
그 제자는 자기 스승을 보면서 그는 주변에서 한 가능성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군중들 사이에 한 아이가 있는데,
그 어린이 손에 자기 가족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었다.
한가족이 먹는 음식,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인데,
그 음식을 바라보는 제자의 눈은 이미 메시아의 가능성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아이를 데리고 주님에게 다가간다.

아이의 손에 있는 그 음식을 보며, 주님은 하늘을 향해 창조주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그 음식을 축복하신다. 그의 축복은 창조주의 능력을 담고 있어서
그 음식은 이제는 창조주의 손에 놓여있는 도구로 그분의 손에서 옮겨져
제자들에게 옮겨지며, 그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는 창조의 역사로 주변에 있는 많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풍성한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가족단위로 앉아서 나누어 주는 그 음식을 받아
마음 가득한 하늘의 풍성에 놀라움으로 현실적인 배고픔의 문제를
한 제자의 가능성의 제기로 시작된 메시아의 창조의 믿음의 역사는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거대한 음식으로 그들이 당면한 식량의 문제,
즉 일상에서 일어나는 먹고사는 문제, 우리가 매일 안고
살아가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도전을 준다.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는 언제난 해결되어지는 문제라는 것이며,
그 문제의 중심에는 사람들의 필요가 있고, 그 문제해결의 중심에는
창조주의 믿음의 세계가 있다.
오늘날도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주문제로 고민하며,
고통하며, 고난을 겪으며 살고 있다. 갖은 사람들은 더 갖으며,
없는 이들은 더 배고파하는 아픈 현실이 우리 주변에 있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은 그러한 인생의 문제는 그 문제를 창조주의 손에 맡기며,
그 그분에게 문제해결을 요청할 시에 그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현실의 세계이며, 그 현실세계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의식주의 문제, 질병의 문제, 사는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등,
이루 해아릴 수 없는 문제가 쌓여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는 늘 가능성이 있음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내안에 있는 그무엇이 없는가? 나의 주변에 일어날 가능성의 세계를 바라보는
긍정의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으며,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해결의 길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복음이다.

사람에게는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가 있다면 창조주에게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나 권세가 있다. 인간은 현실세계에서 문제를 안고 살아가면서,
창조주가 감추어 놓은 가능성의 세계를 바라보는 긍정의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며, 그 삶의 세계에서 창조주의 차원으로
옮겨가는 믿음의 세계를 바라 볼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은 이세상을 그분의 권능으로 그분의 창조의 권세로 있게 하였으며,
오늘도 그분의 보존하는 능력에 의해 거대한 지구가 움직이며,
이 지구상에 사는 수많은 인생들이 살아가고 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가 주는 현실의 세계에서 가능성의 세계를 거쳐
어떻게 믿음의 세게로 들어가는 가가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다.
가능성을 보는 긍정의 시각에서 한 가지 확실히 잡을 수 있는 확신하는 바가 필요하다.
사실 인생은 불확실한 미래를 살고 있는 자신의 미래나 문제를 조금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수 없는 한계의 존재이다.
그 한계는 자신의 어리석은 태도나, 제한된 관점으로 답답한 삶을 살지말고,
언제나 무에서 유를 있게하며,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분의 손길을 의식하며,
그분을 의지하는데에서 그분과의 신뢰하는 관계에서 동역하는 관계로 살아가면
그분안에 있는 플러스 알파의 창조의 무한한 능력이 나의 삶을 붙들어
감히 자신하며 살아가는 인생을 만들어 줄 것이다. 비록 내일의 세계가 보이지 않으며,
나의 기댈만한 모든 것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 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현실의 문제를 결연히 맞서,
창조주의 믿음의 세계에서 그분의 믿음으로 사는
엄청난 풍성한 자원의 축복을 맛보며 살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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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기도에 대한 이해

믿음과 기도에 대한 이해(약5:13-18)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주님에게 나갈때에 무엇이 필요한가?
나의 존재로 부터 나오는 행위의 결과나 혹은 자질의 유뮤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미 자신은 주님앞에 도달할수 없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으며,
그분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다만 그분에게 나갈때에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대하는 나의 자세인데,
그 자세는 그분을 믿는 일이다.
믿음은 그분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말씀하심에 대한 내용을 신뢰하는 일이다.
천지를 지은 이가 피조물에게 요구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신뢰심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바라는 신뢰심이다.
자녀는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으로 자녀가 취할수 있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분을 자녀가 갖을수 있는 사랑하는 관계에서 나오는 신뢰심이다.
이 신뢰심위에서 기도자가 그 기도를 들으시는 존재에게 나아가 구할 수 있다.
그분앞에서는 우리의 무엇이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에 큰 것이나 우리가 생각컨대
이룰수 없는 바람이라도 그분앞에서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분앞에서는 우리의 신뢰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 신뢰심만 있다면 기도자는 언제든지 무엇이나
그분에게 요구하는 것을 받을 수 잇으리라.

믿고서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알라.
주님에게 기도하는 일은 먼저 그분과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는 일이다.
믿음이 있고서야 그분앞에 나갈수 있다.
기도하고 구하는 자가 기도를 듣는 존재가 들을지
혹은 거절할지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갖지못하면 기도의 효력은 나타나지 않으리라.
고로 믿음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효과적인 응답을 가져오는 것이다.

주님에게는 무엇이나 구하면 무엇이나 하실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는 우리의 구함에 있어서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감히 그것을 응답하실까 하는 의구심을 갖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분이 바라보는 우리의 실제적인 문제는 무엇이나의 문제가 아니고,
동기가 바르다면 우리가 그분을 대하는 신뢰심의 문제인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그분을 대하는 처음의 문제이자
항상 지속되는 우리의 문제의 핵심이며, 우리의 관점을 늘 돌리게 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의 문제에서 오는 딜레마의 문제이다.
우리는 늘 원죄로 인하여 그분과의 사이가 늘 벌어지기가 쉬우며,
그분과 우리가 사이를 이간하는 악한 존재의 방해거리를 제공하게 되어,
우리에게 늘 그분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이나, 태도를 갖게 미혹을 한다.
그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게하는 어둠의 세력의 끊임없는 공격을 생각으로 차단하고,
기도로 방어하는 일은 기도자에게 늘 필요하다.
우리가 왜 그분이 하신 기록된 말씀으로(성경) 돌아가
그분이 하신 약속을 되새김질해야 하는 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갈고 닦아야 (키우며 자라게 하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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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설수 없는 인생

홀로 설수 없는 인생

나는 과거에 스스로 힘을 갖고 살아온 나날들을 생각해본다.
그러나 요즘은 하루 한시간도 그분의 도움이 없이는 존재할수 가 없음을 고백한다.
수없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를 도우시는 그분을 생각한다.
수없이 속으로 외쳐되었다. 힘이 없다고, 뼈가 저리도록 경험한다.
스스로 서서 살아갈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본다.
옆에 있는 가족이나 나를 생각해주는 많은 고마운이들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와
그리고 그들의 영혼속에서 나를 향한 흐느낌속에서 나는
그 흐느낌에서 나오는 신음소리에 나는 힘을 얻는다.

나의 영혼속에서 계속하여 터져 나오는 영혼과 육체의 나약함을 고백하는
나의 절규는 하늘에 닿아서, 그것이 내게는 커다란 창조자의 작은 손길로 다가온다.
우주를 지으신 천상의 존재가 미물보다 못한 나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요즘 나에게 살아서 다가온다. 너무 자상하게
그분의 음성은 나의 내면에 변치 않는 크나큰 힘으로 다가온다.

육체의 약함으로 인하여 나의 힘을 지탱하는 체제가 무너지고,
한없이 약한 자신을 발견한다. 어린아이들이 가져도 될 만한 힘을 유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모든 일상의 삶이 생존의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그때마다 나의 영혼은 절규한다.
언제 부터인가 누군가 나를 누르는 세력이 강한 힘으로 밀어 부쳐
나의 생존에 위기를 불러온다. 그러나 나의 존재를 붙드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새 힘을 얻는다.

아! 힘이 필요합니다. 나의 몸을 지탱할 만한 새힘이 나에게 요구된다.
육체의 약함은 마음의 연약함으로 자신을 가두어 둔다.
일상의 몸짓을 하는 것 조차, 내게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속에서 돕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나의 약함을 겪으며,
한없이 의지하지 않으며 생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배우는 요즘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나의 처지는 나를 한없이 약하게 하지만,
도우미의 삶의 고마움이나 나의 존재를 있게하신 그분의 손길을 너무나 애타게 기다린다.
그러나 언제나 그분은 언제나 거기에 계셨다.
누군가가 이 시를 읊었지 않았는가?

인생의 고생의 골이 깊을수록 더 깊은 그분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나는 홀로 설수 없는 인생이다 라는 것을 절실하게 생각케 하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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