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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16
    인간의 선택과 신의 섭리
    목동

인간의 선택과 신의 섭리

룻기 1:15-22

이 룻기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하는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이다.
사람이 자신의 걸음을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해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이다.
룻기는 “우정”이라는 뜻이며,
룻기의 배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어려운 사사 시대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당시는 배교와 전쟁과 몰락과 강포와 도덕적 부패와 반란의 시대임을 보여준다.

나오미는 이제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처지에서 며느리들에게
자기의 고국이나 고향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것을 권면한다.
나오미의 며느리들은 모압 여인들이었다.
그 며느리들인 오르바와 룻의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동족이나 신에게로 돌아가라는 시모의 권면에 따라야 할 것인데,
오르바는 시모의 권유를 받아 자신의 동족에게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새로운 남편이나 새 삶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룻은 자신의 선택을 시모인 나오미를 택하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1 모험과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을 선택이다. 룻은 시모가 사는 곳에 자신도 살며,
시모가 죽는 곳에 자신도 그 곳에 죽겠다고 한다.
현실적이지 않고 희망이 없는 시모를 선책한다.
인생에 있어서, 투자를 하거나 선택하는 일에, 신중하게 지혜가 필요하다.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선택도 필요하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의 선택은
현실적이고 보이는 것에 대한 선택하는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룻은 자기 동족에게로 가면, 순탄할 것이다.
그러나 시모를 선택하는 일에는 남편과 자식에 대한 보장이 없다.
이스라엘에 수혼법이 있다. 그 법은 형제가 아내를 두고 죽었을 때에
그 밑에 형제가 대를 잇는 법으로 자녀를 생산하기도 한다.
여인에 대한 자비의 법이면서, 하나님의 축복의 대를 이어가려는
이스라엘의 지혜에서 나온 법이다.
그러나 나오미의 며느리들에게는 이런 기대도 가질 수 없다.
다만 시모를 모셔야 하는 수고만 있을 뿐이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곳을 선택하는 모험이었다.

그녀의 선택은 봉사와 희생의 선택이었다.
시어머니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효성으로 시모를 보호하려는 봉사하려는 생각이며,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따르는 선택이다.
며느리로서 시모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순리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며느리 전성시대라는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도 우리네, 삶에는 인간의 윤리가 중요하다.

룻의 선택은 그녀의 신앙을 나타내는 선택이 었다.
자신의 동족에게로 돌아가는 것과 또 다시 우상숭배의 죄로 가기 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려는 신앙의 동기가 선택의 중심이 었다.
이방인이 개종하려면, 안식일이나, 절삭일들을 지켜야 하며,
113가지의 율레들을 지켜야 하는 수고가 따라야 한다.
이방인에게는 때로는 이스라엘의 법은 엄하며 지키기가 용이하지 않다.
더 나아가 간음한 여인에게는 돌로 쳐 죽인다든지
중한 죄에 대해 목을 매어 사형하는,
엄격한 윤리가 적용되며, 시행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윤리는 세상 사람들의 도덕보다는 높으며,
자신을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룻의 선택이 아름다운 것은 그녀의 선택은 1. 남을 도우려는 선택이며,
2. 순리를 따르는 선택이며, 희생과 모험이 따르는 선택이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이방인 룻은 하나님의 섭리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좇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6번씩이나 어머니라고 부르는
룻은 시어머니에 대한 효정이나 애정이 지극한 것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으려는 의지는 믿음에서 나왔다.
시모와 오랫동안을 살은 며느리는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믿음의 마음이 있었다.

오르바는 결국 우상숭배하는 자기의 동족으로 돌아갔다.
오르바의 선택은 때로는 인간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모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남편을 구하고자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룻은 자기 가족 친척을 버리고,
민족성을 버리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한다.
고로 그녀의 선택은 비장한 선택이 었다.
끝가지 시모를 좇아가려는 아름다운 효의 선택이 었다.
앞으로 남편이나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도 있는 선택이 었다.

그러나 룻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삶을 한 단계를 높이는 귀한 선택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일취월장하게 하는 고결한 선택이었다.

그녀에게는 다만 희생과 봉사만이 요구되는 모험의 선택이었고,
희망이 없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결과를 졸 때에 그녀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이다.
신의 섭리는 시모를 모시려는 그녀에게는 덤으로 잘사고 유력한 남편과
또한 자녀를 낳는 복을 주었으며,
자기 동족과 우상을 버리는 그녀의 결단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으로서 택함을 입었다.
그 뿐아니라 다윗의 증조 할머니로서 왕족의 가문에 들어가며,
장차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가는 위대한 은총과 영광을 얻었다.

룻의 선택의 이면에는 이렇듯이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느끼는 섭리가 있었다.
반면에 이방 땅인 모압지방으로 이민 생활을 선택하고 고국을 떠난 나오미는
그의 이민생활에서 얻은 것은 오직 실패하는 인생뿐인 것이었다.

나오미의 실패는 고통과 우울을 주는 삶이 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쓰디쓴 인생의 맛을 맛본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분명한 이스라엘인의 신앙도
그녀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몰이해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을 가졌을 것이다.
신앙인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다운되는 그런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괴로와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은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이나
다가오는 미래를 제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실패와 고통에서 괴로워하는 그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에 넘어있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의 의도와 계획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섭리신앙에 대한 인간의 한계이며,
오직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순종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나오미는 마치 한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이민의 삶을 살려고 왔지만,
다 잃어버리고, 실망과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쓰디쓴 나날들을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나, 그분에 대한 신앙이나 존경보다는
주님에 대한 섭섭함이나 원망, 그리고 한탄스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없이 울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실패와 자절에서 겪는 상실에서 오는 고통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넘어뜨릴수 있으나,
신의 섭리아래에 있는 인생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 상실을 넘어서는 때에,
자신은 더욱 강한 자로 세움을 입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실패를 딛고 진행된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형제들에게 억울하게 노예로 팔려가,
주인 보디발집에서도 의롭게 충실하게 실력있게, 청지기직을 잘하였으나,
주인의 아내의 유혹을 통해 억울하게 모합을 받아,
국가 범죄인들이 들어가는 지하감옥 같은 곳에 들어가서 수년을 보내었다.
그는 그곳에서 더 힘들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훈련의 때를 보내야만 했다.

거기에서 그는 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의 기도는 즉시 응답을 받지 못하고, 다만 기다리고 체념하며,
그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이 있고,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로 그자리에 머물어 있어야 함 했다.
거기에서 생활은 실망과 한숨이 섞인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곡이 깊은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것 처럼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의롭고 불쌍한 요셉을 하나님은
하루 아침에 가장 높은 자리인 애굽의 총리로 세워주신다.

우리는 늘 인간의 생각이 끝나는 지점에서 하나님은 새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며,
그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좌절하거나 포기하기에 이르게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그분에게 맡기는 믿음을 따라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그분이 움직이시는 때와 방법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고로 신앙인들은 단순히 자신의 현재의 일시적인 현장에 대한 판단이나 생각으로
인간의 역사를 두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장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룻기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의미를 되새겨 주며,
신앙의 선택이 주는 이유와 인생의 삶의 실패와 성공을 보게 하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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