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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믿음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말씀의 유익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기적으로 이루어 진 책입니다.
즉 이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이 없이는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것인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할 때에도 믿음이 없으면
그 봉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물질세계가 그의 말씀으로 지어져서,
믿음의 원리가 적요되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물질세계이며,
모든 물질의 구성이 원자에 의해 이루어져서, 보이는 현상세계를 이루지만,
실상은 나타난 현상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의해 조정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실체가 선과 약의 원인으로 그 실체들에 의해 움직여 집니다.
아무리 악이 횡행하는 때라도 모든 것들이 창조자의 주관 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입니다.
더 나아가 믿는 자가 가야 할 약속의 땅인 천국도 실상은
시편 33:6에 하늘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고백합니다.
신자가 가야 할 천국이 그분의 말씀으로 지어져서,
그 세계 안에서도 믿음의 원리가 적용되는 세계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하여 언급하실 때에 아브라함의 품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천국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통용하는 세계이며, 하나님을 믿은, 그분의 신뢰를 따른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한 믿음의 사람들이 가서 영원히 사는 감격이 넘치는 세계입니다.
이 물질세계는 영화 월리(과거 2,30년 전에는
영화 E.T의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오는 것에 반해
청소 로보트 월리는 먼 미지의 미래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행성으로 찾아가는)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서 살았던 미지의 세계가(거기에는 감격도 없고, 흥분도 없는
자동화된 세계에서 비만으로 생명의 활력을 잃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비쳐지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인 천국은 신앙인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
특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경험과 이해를 갖고,
영원히 또 다른 흥분과 감격이 주어지는 도전이 있는 생명의 활력의 세계입니다.
고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그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합당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그분의 선물입니다.
다만 그분의 선물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자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해당이 됩니다.
고로 사람들의 믿음으로 또한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
그분의 영원한 나라인 영생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하는 믿음(faith)이란 말은 보다 큰 의미가 있는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입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그분의 속성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포괄적인 태도는 믿음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들을 믿었던 것인데,
인간은 그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믿음을 배반하였습니다.
고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나갈 때에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벗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에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신조에 대한 믿음(belief)이 있습니다.
그 믿음에 의해 종교행위나, 종교의식을 따릅니다.
문자에 매여있는 즉 (사도신경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고백)에
대한 믿음(belief)입니다.
또 다른 믿음이란 말 중에는 흔히들, 우리의 믿는 바, 확신하는 것
(신념, assurance, conviction),
말씀에 대한 약속들, 그리고 바라는 것들의 확신 등 입니다.
그러나 믿음(faith)은 그것도 포함하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서의 믿음은 의지하는 바나 혹은 신뢰로서의 믿음(trust)이 있습니다.
믿음(faith)의 세계인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세계는 그 분과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연결되는 원리가 적용되는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의 힘으로도, 종교나 수양의 힘으로도, 권력의 힘으로도,
물질의 힘으로도, 혹은 자력의 힘으로도 들어가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과의 연결(믿음)을 통해서만 들어가는 세계입니다.
본문에서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된 우리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접촉 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밖에 없습니다.
나의 여호와여 내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시편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 볼 때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만남을 이루고 연결이 됩니다.
고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믿음의 원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그분의 창조된 세계인 이곳에서
그 믿음의 원리로서 생명력 있고 활력 있는 삶을 이루고,
특히 모든 일에 하나님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그분을 생각하며
그 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묵상하여 그 말씀이 주는 축복 안에서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보통, 믿음의 원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정의로 바라는 소망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실현한 것처럼 믿고 살아갑니다.
소망에 관해서, 앞으로 이루어 질것을 소망하는,
그리고 미래와 영생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바라는 믿음대로 이루어 집니다.
마치 주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낫게 하실 때마다
병자들에게 낫고자 하는 믿음을 말씀하시고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라고 하셔서 믿음으로 기적을 기대하는 믿는 자가
그 기적을 맛보듯이 믿음으로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더 나아가 그 믿음의 특성은 바랄 수 없는 것들을 바라는 믿음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런 불가능 한 것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되지 않으나, 하나님의 힘으로는 되는 기적을 이룹니다.
그 기적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떠 하나의 믿음의 성격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계는 보이는 물질세계입니다.
나타난 것만 보이고, 보이는 것만을 따르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이는 현상세계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조정을 받습니다고 주장합니다.
그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깨닫고 직시하는 힘을 얻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현상의 세계는 원래의 세계(영적인 세계: 이상적인 세계)에서 비롯되었다는 플라톤의 이원론서 언급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신앙의 선진들은 영적인 세계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들의 삶을 통해 경험으로,
응답으로, 그분의 임재를 느낌으로서 자신들만의 체득한 간증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자기 확증들이 되어 변할 수 없는 믿음의 진리로
우리들에게 그들의 삶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기 체험이나 간증을 통해 그들은 몸소 경험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의 능력을 알고, 그 세계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믿음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고로 믿음의 원리는 인생의 삶의 원리 중에 그들이 깨닫고
경험한 가장 큰 축복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이 지구의 물질세계는
3가지 방향의 원리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3가지의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물질의 힘이면 무엇이든 살수 있다는 유물론적인 세계관입니다.
그 세계관은 보이는 물질을 따라 눈에 보이는 대로 좋은 것을
취하는 모양으로 그래서 보기에 좋은 선악과를 따먹고,
주님께서 그 금단의 열매를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욕심이 가는 대로
취하여 먹고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살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죄와 죽음의 법 아래로 내몰렸습니다.
두 번째는 인간을 신뢰하여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인간 스스로가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 하려는 절대자의 모습으로 살려는 것,
즉 자기 권력의 힘을 의지하여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인생을 좌우하려는 세계관입니다.
그 세계관은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부추켜서,
스스로의 통치로 인한 많은 부작용을 낳으며,
부패한 권력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삶의 쓰레기
(고통, 좌절, 불안, 걱정, 패배감등)를 거두어 들입니다.
세 번째는 선악을 아는 열매를 따먹은 고로, 인간이성의 힘이 주축이 된
지식의 힘을 의지합니다.
그 지식의 힘 이면 정보의 힘이면 모든 것을 좌우 할 수 있다는
정보화의 시대를 맞이한 요즘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의 힘은 인간에게 더 많은 무지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알려 줄 뿐입니다. 인간생명의 병들을 치료하지만
또 다른 불치의 병이 생겨나며,
인간의 생명과 건강 세계를 위협하는 조류독감 같은 신종바이러스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지식의 총체인 과학은 인간세계를 편리하게 할 뿐 아니라,
불안하게 하며, 더 많은 민족이나 국가간에 갈등을 유발하며,
전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발력에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선악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선을 이룰만한 힘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가 믿음의 역사를 이루게 하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으로 출애굽을 하고 나서
광야에서 40년을 살면서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광야는 신앙인생들의 교회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 훈련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천국 등 모든 하나님의 창조된
그리고 통치하는 세계는 믿음의 원리가 통용하는 세계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식생활의 해결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에 들에 나가서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하나님께서 몰아주신 메추라기 고기를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매일 공급하셨습니다.
6일을 들에 나가 만나를 거두어 들였으나 제 칠일 즉 안식일을 위해
6일 쨰 되는 날에 두 배로 거두어 들이게 해
안식일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그들에게 하루에 필요한 양식이었습니다.
아침이슬에 내리는 만나는 해가 뜨기 시작하면
그 햇빛에 의해 녹아내려 더 이상 만나가 아닙니다.
고로 그들은 매일 아침에 들녁에 나가 그것을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이 경험하고 맛본 하나님의 은혜나 자비나 그의 사랑은
우리가 늘 먹어야 하는 마치 육신의 양식인 밥을 먹듯
매일 그분이 공급하시는 은총을 내 영혼이 맛을 보고 먹어야
영혼의 생명이 유지하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영적 생활의 원리인 믿음(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을
따라 살아가는 법을 터득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인들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길을 가다가 마실 물이 없어 불평을 하며 원망을 했습니다.
그때에 불 뱀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구 물었습니다.
불 뱀의 독에 의해 죽어가는 이스라엘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
높은 장대위에 다 놋 뱀을 만들어 놓고 그 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마귀는 우리를 어떻게 뱀처럼 죽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장대에 달린 놋뱀처럼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치유를 받고 고침을 받으며 살아나고 소생하게 됩니다. 매주일 드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입니다.
말씀에 순종한 예배의 자세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선민들은 하나님께서 앞서서 인도하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며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인도했습니다.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상징입니다.
언제나 이스라엘이 행진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빛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말씀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교회가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발자취를 내딛기 위해서 본문에 나타난
믿음의 역사로 살아가는 3사람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사람은 아벨입니다. 최초로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심은 그들의 믿음을 근거로 해서
그들을 옳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벨은 제사를 온전히 드림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사람입니다.
그는 제사를 통해 자신의 정성을 나타냈습니다.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은
온전한 예배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는 자기의 소유중에 가장 귀한 양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그 양을 죽여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생각케 하는 제사였습니다.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께 갈수 있는 방법은
죄를 해결하는 것을 통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죄 있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접촉점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서
그의 제사즉 예배가 하나님께서 열납 하셨습니다
오늘은 아벨즉 의인의 후손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벨의 후손으로 항상 피의 제사를 드립시다.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는 제사를
그래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이루며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벨은 또한 그의 온전한 예배로 인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불신의 사람들은 가인처럼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으나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 삽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의 탐심으로부터 나온 타락한 인간이 범하는
하나님께 불경 하는 죄입니다.
그레서 불신사람들은 보이는 우상도 섬기지만
보이지 않는 우상도 섬기는 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만 섬기기로 주님만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
물질이 우리의 삶의 목표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고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니라
우리에게 넉넉한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 드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하는 사람은 에녹입니다.
에녹은 당대에 무의미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은 땅만을 쳐다보며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사람들이 살았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족보를 보면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몇 백년을 살다가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녀를 살다가
그것으로 자신의 씨만을 퍼뜨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저 인생을 소비하면서 무의미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빛나는 의인으로
그의 인생이 참으로 특이하게 평가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늘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상의하고 늘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았던 에녹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세상에 놔두고 살기에는 너무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를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왜 우리가 이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살아가는 목적은 가나안에 정착하기 위해서 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모시고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살았으므로
그는 살아있는 산사람으로 죽음을 극복하며 천국에 이른 승리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되었던 에녹을 언급할 시에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에녹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리고 자신의 생활의 모든 곳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모시기를 기뻐하며
하나님의 코치를 받으며 그 분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말세에 사람이 쾌락을 좋아하고 자기만을 즐기려는 세태가 점점 심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더 추구하는 세태에서
우리자신들이 늘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에 두고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점점 타락하여 악해져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악한 사람들 중에 노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는 경외하심으로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120년 동안을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자기가족이 구원받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천국에 우리 집을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됩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 대었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드릴 때에
천국에 우리의 집을 건설해 가게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나 생활의 현장에서 그리고 교회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들어갈 때에
그들이 한걸음씩 전진하듯 그렇게 우리 모두 믿음의 전진을 합시다.
요단강을 내디딜 때에 물이 갈라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듯이
앞으로의 우리교회에 하나님의 의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
|
(창세기 12:1-9)
본문 분해
* 하나님의 명령
1. 너는 떠나라/ 믿음은 떠나는 일부터
2. 새로운 시작/ 믿음은 순례의 길을 시작
*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
1.이름을= 창대 하게 하리라
2.축복을=복의 근원이 되라
* 아브라함의 순종의 순례의 시작
1. 하란을 떠남(순례로의 떠남)
2. 부인과 조카와의 여행(가족에 대한 책임을 맡은 지도자)
*참 예배자 인 아브라함
1.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하나님의 계시, 현현)
2. 단을 쌓은 아브라함(자신의 신앙의 유형을 분명히 함)
3. 하나님께 경배를 드림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
본문 이해
1-3 아브라함의 순례/ 이 구절들은 성경을 통해 인간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확대되는 여정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계약이 소개된다.
그와의 계약은 15:18-21에 자세하게 나온다. 17: 1-21에서 하나님께서 그 계약을 재확인하신다.
이삭을 통해 갱신하신다(26:2-5) 그리고 야곱을 통해 다시 갱신하신다(28: 10-17).
그 계약의 요소들은 1. 씨(17:2-7, 갈 3:8, 16), 2. 땅(15:18-21, 17:8),
3. 한 나라(12:2, 17:4), 4. 신적인 축복과 보호(12:3).
이 계약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성취와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관점에서 무조건적이다
(롬11: 1-27). 그러나 그것의 직접적인 성취의 관점에서 조건적이다 (17:4).
구약을 통해 이스라엘의 나라의 중요성은 계속해서 확대하며 반복하여 관련됨을 강조한다
(왕하 13:23, 대상 16:15-22, 느 9:7,8).
그 계약이 영적으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중요한 것을 강조한 이는 바울이다(갈 3:4).
스테반이 행전7: 31에서 인용한다.
1.땅에 대해/ 아브람은 아직 하란에 머물고 있었다 (11:31)
그 부르심이 행전7: 2에 보면 반복하여 가나안으로 부르셨다.
2.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라/ 아브람의 광대한 명성과 전설적인 이름은 물질적으로(13:2, 24:35),
영적으로 (21:22), 그리고 사회적으로(23:6)이루어졌다.
3.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을 저주하는 자들을
멸시를 하며 경멸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거나 신성 모독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의 자비 없는 심판을 자초할 것이다.
그 반대급부로 아브람과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는 사람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
네게 속한 즉 이 지상에 속한 가족들 모두가 축복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이 말씀을 아브람에게 축복을 만민을 구원하는 복음과 동일시 하고 있다.
4. 하란/ 11:31을 보면 그들은 한 그룹의 사람들을(아마 종들이었을 것이다) 모았기
때문에 거기를 떠나기로 하였다.
5.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왔다/ 주전 2090년경이었다.
6. 세겜/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있는 계곡 안에 위치한 가나안의 마을이다. 그곳은
요단강 서쪽의 16마일 가량이며, 예루살렘의 북쪽 30마일 가량에 위치하고 있다.
가나안 족들이 거기에 살고 있었다/ 모세는 아브람이 거기에 들어가던 약 700년
후에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주전 1405). 모세가 기록한 가나안 족들은
이스라엘이 들어갈 무렵에 적대자들로 대치하게 되었다.
7. 내가 이 땅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개인적인 약속으로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장래에 있을 보다 높고 거룩한 관심들을 보이신 것이다.
그 땅은 아브람의 자손인 특별한 민족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씨앗은 모든 인류에게 유익함을 주시기 위해 뿌려진 것이다.
세계를 위한 구원과 신적인 진리의 계시가 임할 것을 가장 적합한 곳으로 선택된 것이다.
하나님께 제단을/ 이 행위를 통해 아브람은 그의 종교(신앙)에 대해 열린 고백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그의 신앙을 선언한 것이며 참 하나님께 옳은 예배를
확립한 것이다. 이것은 약속의 땅에 처음으로 세워진 참된 예배의 곳이다.
후에 이삭도 또한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헌신의 표로 제단을
쌓았을 것이다
(26:24, 25). 야곱도 또한 세겜의 한곳에 제단을 쌓았다(33:18-20).
8. 벧엘…아이/ 벧엘은 예루살렘의 북쪽 7마일에 위치해 있으며,
나중에 아브라함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28:19). 아이는 벧엘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후에 여호수아가 싸웠던 곳이다(수 7:, 8:).
9. 남쪽으로 향하여/ 아브람은 네게브로 옮겨 농사짓기에 덜 좋은
그러나 목자로 방목하기 좋은 곳으로 아마 무역을 하기 좋은 곳을 선택했을 것이다.
1-3절은 하나님의 아브람에 대한 소명이며, 4-9은 아브람의 순종적인 자취이다.
1-3
아브람은 두 가지 명령을 받는다.
하나는 떠나라는 것으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땅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의 떠남에는 반응의 연속의 시작이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은 축복으로 나타난다. 너는 축복(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람의 소명은 목적이 있었다. 그의 순종은 크나큰 축복을 가져왔다.
세가지 약속들은 그의 땅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소명 위에 기초한다.
1. 큰 민족, 2. 아브람을 위한 축복, 3. 위대한 이름. 이 약속들은 그를 복의 근원을 만들었다.
그의 순종은 하나님의 3가지 약속 위에 있다.
1.그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리라, 2.그를 멸시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3.그를 통하여 지구상에 있는 모든 족속들을 축복하리라.
그를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것은 그의 하나님을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불행하게도 하나님께서 자주 그의 백성들을 훈련하기 위해 다른 민족들을 사용하여,
그들을 축복을 받는 데서 멀리 옮기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성취가 담겨있다
(갈 3:8, 롬 9:5). 이 아브라함의 기사는 믿음에 대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아브람은 여러 가지 일들을 떠나었야 했다.
그의 나라, 그의 백성, 그의 씨족 등.
그러나 그는 그가 가야 할 땅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떠남은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는 담대한 행위가 요구되었다.
특히 이 축복과 저주의 주제들이 이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창세기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4-9
이 기사는 단순히 아브람의 복종을 담고 있다. 그의 순종은 두 가지로 하나는 떠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가 축복(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었다.
하란 에서 아브람은 그와 그의 가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어떤 하람 사람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영혼
(자신의 영혼에 눈을 뜨는 사건)에 관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가나안 땅에 제단을 쌓고, 즉 벧엘의 동쪽인 세겜 에서였다.
그리고 두 번째 제단을 쌓은 곳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 우는 곳에였다
(21:33, 26:25).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중심에서 아브람의 증인으로 계셨다.
모레 상수리 나무를 언급한 것은 가나안 인들이 참나무 밑에 신성한 곳으로 여겼는데,
모레는 그들이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것들 중의 한 곳이었다.
세겜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확증하기 위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람의 믿음을 돕기 위해 즉, 너의 후손들에게 이 땅을 주리라.
아브람이 그 땅에 도착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현시하셨다.
사실 아브람은 그의 매장지 정도의 땅만을 갖고 세상을 떠났다 (23:17-20).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확증하신 후 아브람은 그 땅에 머무르면서 그 약속을 기다렸다.
그러나 가나안 인들은 그 땅의 기름지고 좋은 땅을 다 차지 하고 있었고,
아브람은 크지만 불모지와 같은 즉 가나안의 남쪽 사막 지역인 네게브로 향하였다.
나중에 이스라엘 나라는 그들의 족장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따라, 큰 민족, 하나님의 축복, 전능자의 보호하심 등을 늘 상기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아브람 세대에 주신 약속에 대해 후대에도
그 축복의 약속을 나누기 위해 믿음을 요구하셨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가져야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태도),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신학적 가르침
아브라함의 소명/ 하나님께서 이방인이었던 아브람을
이방 세계에서 어떻게 부르셨는가를 보여주며 그에게 뛰어난 약속들을 주시며,
그 약속은 후에 아브라함의 계약으로 알려진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즉 그의 순종하는 믿음을 가르쳐 준다.
아브람은 고대의 세계에서는 중년의 나이에, 부요 하며, 안정된,
그러나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나서
모든 것을 순종적으로 포기하였다.
이것이 왜 성경 안에서 그를 믿음의 표상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롬 4:1-3, 16-24, 갈 3:6-9, 히 11:8-19, 약2: 21-23).
이 기사는 아브람의 소명을 통해 한 새로운 나라의 기초가 된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민족은 믿음으로 반응하여 가나안으로 떠나는
한 개인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생겨나게 된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동하는 믿음의 직면하게 된다.
계약 신학/ 성경에서 계약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맺는 관계의 약속이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과 맺은 계약 등이다.
이 계약들 중에 아브라함과의 계약이 하나님의 구속과 은혜에 입각한 계약이다.
아브라함의 계약의 특성은 그의 순종에 있으며, 그의 믿음이 순종으로 표현되어있다.
그 계약은 순종하는 믿음에의 응답을 요구한다.
이 계약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사람들의 순종에 입각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모레 상수리 나무/ 홀로 자라 서있는 나무로 가나인 들에게 잘 알려졌고,
그들에게 “선생의 참나무”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 나무를 신성시 하였다.
이 야곱이 그 집의 우상들을 그런 상수리 나무 밑에 묻었던 것이다.
신 11:30에는 그런 나무의 지점을 지경표로 쓰여지기도 하였다.
성경 공부안
* 믿음의 순례를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의 부르심을 받은 인생이면 누구에게나 다 해당이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믿음의 순례는 떠나는 일부터 시작이다.
자기 주관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야 하는 것을 의미하며,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사는 데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 살 것을 명하는 것이다.
1. 나의 신앙 생활은 과연 장차 망할(하나님의 심판 받을)세상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발걸음의 신앙 생활인가?
* 믿음의 순례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따라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하며, 너를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복을 주셨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축복의 근원이다.
이 믿음을 따르는 자신의 운명과 팔자를, 그리고 신수를 넘어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삶이다.
2. 나의 신앙의 순례는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믿음의 길인가?
*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그의 믿음의 발자취를 밟아갔다.
그는 가족을 책임진 가장으로서, 그 씨족의 리더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살았다. 인생은 순례의 과정의 연속이다. 그 인생의 한 가운데에 형통한 삶이 있으며,
고난의 세월도 있으며. 기다림의 시간들이 있으며, 방황하는 기간도 있다.
믿음의 순종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하는 삶의 발걸음이다.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도착 지점이 있다. 신앙의 발자취는 시작도, 과정도, 끝도 중요하다.
그의 믿음은 영원한 상급을 바라는 순례의 길이다.
3. 나의 믿음의 발자취는 분명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가?
믿음의 길에서 방황하지는 않는가(세상의 여러 가지의 유혹들)?
*참 예배자 인 아브라함
하나님께서는 참 예배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참 신앙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섬기는 참 예배의 본을 보였다.
그의 진정한 예배는 그의 경외와 순종하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는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았다.
예배를 드리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고상한 일이며, 사람을 참되게 하는 일이다.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참 인간을 목표한다.
참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세상이다.
4.나는 과연 하나님을 진실히 섬기는 참 예배자인가?
그리고 나는 예배 중심의 삶에 성공하고 있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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