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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13
    인생찬가
    목동

인생찬가

갖난아기가 태어날때에, 손을 움켜 지면서 앙앙하고, 일성을 가한다.
이땅에 난 것을 기념하는 자기 표현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이렇게 시작한다.
내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느 가문에 태어나는지, 부자집인지, 가난한 자의 집인지,
그리고 선한 사람인지, 악한 자인지를 모르고
다만 태어난 가정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세상에서 태어나 사는 것이,
신의 혜택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인할수 없다.
생명을 갖고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 고사리같은 손이 자라, 어른이 되어 무엇인가를 이루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무엇이든지 달라질수 있으니,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에게는 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신은 공평하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간을 주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쓰든 우리에게는 한정된 시간이 있다.
이시간에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할수 있으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자, 한계임을 알아야 하겠다.

밥을 먹고, 하루를 살며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행복이다.
각병원마다 중환자실에 가보며, 자신의 병으로 인하여, 시간의 제한에 있음을 느끼며,
제한된 시간안에 무엇인가를 보람있는 일을 하겠노라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생명의 길이를 늘여보겠다고 아둥바둥대는 이도 있으며,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한탄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어쨋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감사하고, 우리에게는 기쁨이다.

인생이 항상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그리고 내게 넉넉한 것만이 있고,
부족함이나, 또한 살면서, 어려움이 없든지,
문제에 쌓이지 않든지 하거나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이 없다면,
인생은 게을러지고,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나, 자신을 낭비하고,
우리 육체가 썩을 몸둥아리만 생각하다,
안일하게 지내다, 끝내지 않을까?

나는 살아있는 연어고기의 헤엄치는 모습를 좋아한다.
살아있는 생명을 갖고,
자기에게 내리 달려오는 물살을 가르고, 계속움직이며,
힘을 써서 달음질하여, 상류로 가고자 하는 자기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얼마나 무수한 인생이 이지구상에 살고 있는가?
그 많은 입들을 누가 다 먹이며, 그 많은 생명들이 다함께 살고 있으며,
가끔 전쟁과, 불합리와, 악이 있지만,
누구나 주어진 환경안에서 자기나름대로 살고 있는 것,
이것은 인간을 위한 신의 배려가 아닌가?

제한된 자원안에서 인생들이 살지만,
동시에, 무한한 자원을 가진 신의 돌봄을 받고 있지 않는가?
누가 이모든 만상을 계획하여, 설계하고, 이루어 놓았는가?
인간이었는가? 저절로 되었는가?
저 넓은 우주에 퍼져있는 행성들을 생명체들의 존재가
우리같은 인생들이 살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지 못했다.

누가 이곳을 사람들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었는가? 그는 신이 아니었던가?
신이 인간을 자연안에서 살게 하여,
신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며, 비록 지금은 곳곳이 공해나,
인생들의 폐해로 지구의 환경이 훼손되어가지만,
그래도 이지구를 붙들고 있는 이가 있어, 우리가 편안히 살고 있지 않는가?

그는 우리 인생안에 소우주를 만들고,
우리안에 있는 내면세계에도, 그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고자 한다.
신의 만든 세계나 역사를 보고, 우리가 이것을 이루어 놓았는가?
그러나 신의 도움이 없다면, 결코 아니다.
그가 있으므로 우리가 있게 되었다.
그가 붙들므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
그가 인도하므로 우리가 따르고저 한다.
왜냐하면 그의 지시하는 길이 바른길이고, 인간의 생명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기에,
사실 우리 모두는 고백해야 만한다.
우리의 미래와 운명이 그의 손에 있다고, 그리고 그에게 나가야만 할 것이라고.

우주여행을 했었던 우주인들로 인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한편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우연인가? 아니다.
신이 그 것을 아름답게 해놓았기에, 그렇다.
우주를 아름답게 이룬 신이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도 그의 만드는 솜씨를 아름답게 나타내고저 한다.
인생이 갖고 있는 자신만이 간직하는 내면의 소우주에 대해
과연 내가 마음대로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을 것인가?

인생들이 가끔, 하루에도 열두번씩 내 마음이 변화하는 것을 경험한다.
오늘은 시내에 나가, 친구를 만날것인가?
아니면 집에 앉아 휴식을 즐길 것인가?
마음대로 결정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실행못하는 것이 인생의 한계이나,

신은 인간에게 그 소우주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생존권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 소우주에 대한 소유권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변함없는 마음의 편안함,
그 소우주의 질서 내지는 행복감은 저절로 내가 이룰 수 있을까?
언제부터 인가 두려움이 자리잡고, 불안함이 있으며,
미혹됨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어둠이 깃들지 않았는가?

신은 인간에게 삶의 기회를 부여했다는 것과
인생이 지금은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인간에게 더 많은 것을 준비해놓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려면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푸른 꿈이 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늙은이나, 젊은이나, 상관없이 아주 필요한 것이다.
내일 자신의 생명이 경각간에 달려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에게도 살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신은 인간이 시간의 제한으로 들어가는 죽음의 때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행한 결과에 의해 그렇게 된 것뿐이다.
이런 제한에서도 신은 인간에 살 만한 인생들의 미래에 대한 생존권을 보장해 주었다.
늙어갈수록 그 생존권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것이,
늙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만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생은 질고, 실패, 병고, 죽음, 절망, 파멸등에 매달려 살지 않고
살수 있기를 늘 희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신은 이런 모든 부정적인 인간경험까지도 유익한 것을 창출해 내고 있으니,
그는 과연 신이 아닌가?
아픔뒤에 회복이 있으며, 갈등이 지나 화해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고,
전쟁뒤에 평화에 대한 간절함이 있고,
죽음뒤에 평화로움과 인생의 완성감을 맛본다.

신은 지금 인간이 누리고 있는
보다 큰 영광과 행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인생처럼 바보인 인생은 없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한치 앞을 볼수가 없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가시권을 가질수 없으니,
다만 신에 대한 신뢰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세계에 대한 신의 배려에 대해 조금 깨달음 바가 있다면,
다가올 신의 주는 혜택에 대해,
깊이 마음으로 부터 환영할 만 하질 않을까?
인생은 신이 제안한 살만한 가치의 세계안에서 살고 있다.
인간은 지금 거기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
다가올 미래는 휠씬 뛰어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지금은 내게 주어지는 삶은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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