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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09
    부활사실에 대한 단상
    목동
  2. 2007/04/05
    십자가를 묵상하는 이유는
    목동
  3. 2007/04/03
    그리스도인의 자기변화
    목동
  4. 2007/03/28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기
    목동
  5. 2007/03/17
    영성변화
    목동
  6. 2007/03/14
    예수는 밥이다
    목동
  7. 2007/02/25
    상한영혼을 회복하는 사역
    목동
  8. 2007/02/23
    꺼져가는 심지
    목동
  9. 2007/02/22
    상한갈대를 향한 예수님의 사역
    목동
  10. 2007/02/19
    인간의 나약함과 회복
    목동

부활사실에 대한 단상

빈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대변한다.
모든 인류는 이땅에 육체를 입고 와서 살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몸을 이룬 육체가 육체의 죽음을 통해, 땅의 먼지로 변하게 된다.
모든 인간들이 자신들이 살았던 육체의 껍테기를 이지상에 남기고,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몸의 DNA의 흔적들을 남기고 이세상을 떠난 것이다.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중에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지상에서 사라진 에녹과 엘리야(성경구약에 나타난 두 인물: 에녹은 신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엘리야는 하늘로 올리움을 받았다)를 제외하고 모두가 육체의 죽음을 통해, 그들은 무덤을 남겼다.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는 무덤에 들어가 시체가 되어 3일간을 그곳에 있었다.
그의 몸에는 상처투성이와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신 상처의 흔적(이것은 인간의 두뇌가 항상 생각하는 것에 죄의 영향하에 있었음에 예수그리스도의 죄의 댓가를 치름)과
두손(손을 짓는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한 댓가를 치름)과
두발(악을 행하고 죄를 범하는 일로 분주했던 인간의 발걸음의 댓가를 치름)에 못을 박히고,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
그 십자가의 예수를 향해 로마의 병사가 옆구리를 찌르니
그곳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내렸다
(예수의 옆구리 상처는 인간의 심장 어딘가에 있을
인간의 마음에 죄를 담았던 흔적들에 대한 댓가를 치름).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일을 다 마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는 죽었다. 그의 육체는 다른 사람들처럼 죽음이라는 세력에 휩싸여 버렸다.

그러나 떠오르는 동녁하늘에 환히 비쳐주는 빛처럼, 죽어있던 그의 육체는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리는 생명의 영의 역사로 십자가의 예수는 다시 살아났다.
그의 몸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생명의 영이 임하므로,
그의 죽은 몸이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죽었던 예수, 즉 그 십자가의 예수가 부활예수로 변화된 것이다.
예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모든 인류를 언제나 무겁게 짓누르고,
억압하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다.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등 3여인은 죽은 예수의 몸에 바를 향료를 구하여,
그 무덤에 갔으나, 예수님을 찾지 못하여 있을때에, 그녀들은 어리둥절해 있었다.
갑자기 빛나는 옷을 입은 두사람이 나타나 그들 곁에 섰다.
여자들이 무서워서 얼굴을 땅에 대자 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왜 살아 계시는 분을 죽은 사람가운데서 찾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전에 갈릴리에 계실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놀람과 경이로움과 큰 기쁨으로
그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통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모든 인류는 죽음앞에 두려워 하며,
항상 죽을까 하는 불안함이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한 댓가로 누구에게난 죽음이 찾아 온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그 죽음에서 생명의 부활을 믿고
그가 약속하신 바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비록 육체의 기간이 끝나 죽음에 이르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믿음으로 언제가는 예수님처럼
그들의 죽어 썩어 흙이 되어 버린 그들의 몸이 다시 살아,
예수님처럼 영광의 몸체를 입을 날이 다가 올것이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생명의 하나님의 영은
예수를 믿는 이들마다의 마음속에 그생명의 약속을 보장하심으로
그들속에 생명으로 역사하신다.
그 영은 믿는 이들속에서 함께 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안고 살게 한다.
그 영은 때로 믿는 이들속에 믿음을 심어 주기도하며,
그들가운데에서 모든 분야에서 그들을 돕는 분으로 함께 하신다.
그 생명의 영은 사람들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혜택안에서 살도록 하며,
죄와 죽음의 권세의 세력으로부터 그들을 풀어주고 자유하게 하며,
비록 육체안에 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복(평안, 목적있는 삶, 영생에 대한 보증을 통한 영혼의 안식등)을 누리며
살게한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그녀의 증거를 믿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인 집에 오셨다.
그의 부활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그 제자들중에 도마라는 제자가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만났다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수님의 손에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며,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의 마음에 가득 의심이 쌓여 있었다.

인간이 소유하는 믿음은 그 믿음을 갖게해 주는 사실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고로 믿음의 대상이나 확실한 사실에 의해 사람에게 믿음이 생성이 되며,
의심을 이기고 자신안에 믿음의 확신에 이르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나 그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로 부터 나타난 증거는
그 증거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엄연한 사실로 이해되며,
그 사실에 대한 자기확신의 경험에 이르게 된다.

8일이 지난후에 다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거기에는 의심하는 도마도 있었다.
예수님이 의심하는 도마를 향해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바닥에 넣어보고 네손을 내밀어 내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말고 믿는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활을 의심하였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그에게는 충격적이고 극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도마는 평소에 사실확인을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실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누가 자기에게 이야기 해준다고 그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신앙의 신비에는 사실이나 이성의 이해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있다.
사람의 두뇌의 이성을 통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인간 삶의 현장에 일어나는 일들은 보통 사람들이 상식을 통해
그 사실을 납득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 상식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신이 평소에 알고 있는 이성활동(감각에서 얻은 정보에 대한 이해)을 통한 지식습득이나 혹은 자기 이해관점안에서의 경험에서
얻은 견해를 자기의 세계관이나 인식관(자기판단)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그런데 인생의 일어나는 일들중에는 그 상식이해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신앙에는 많은 요소들이 그 경계들을 넘은 부분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증명해 보이지 않는 영혼의 존재, 육체의 감각의 눈으로 인지 하기가 쉽지 않는 신의 손길,
죽음넘어의 사후세계, 영원한 차원의 세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의 영향과 현상, 원인을 알수 없는 일어난 현상들,
인간 자신의 두뇌의 활동이나, 자기 내면의 영역안에서의 이해와 활동들(마음, 정신, 영혼)등 많은 것들이 인간의 이해나 경험의 경계들을 넘어서 일어날수 있는 일들이 있다.

무엇이든지 자기경험을 통한 이해방식을 통해, 자기이해에 이르게 된다.
현대인의 세계관이나 이해방식은 증거나 증명에 의해,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 사실에 대한 자기경험의 과정을 통해 확신에 이르게 된다.
더우기 현대적인 사고방식안에서 사람들은 절대적인 원칙이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기의 판단이나 경험이외의 일들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기를 싫어한다.
그렇지만, 상대적인 사람들의 판단이나 기준에 의해
엄연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하신 일들과
그가 인류에게 약속하신 사실이나 내용들은 변치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지구를 비롯한 모든 우주의 질서에 관여하시고 보존하고,
시간의 길이를 정해놓아, 그의 계획에 따라,
모든 인생들은 각자가 자신들의 삶의 길을 살아가고 있으며,
언제가는 정해진 시간에 그들의 삶을 결산하기를 정해놓았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인간 구원을 위해 보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은 변함이 없이 받아들여야 할 사실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고로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의 사실은 모든 인간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그 부활의 사실은 죽음을 향해 가는 모든 인류에게 확실한 소망과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시는 영생과 구원에 대한 약속을 보장하고 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부활한 예수는 지금은 영원한차원(하나님의 세계)의 존재안에서 우주를 다스리고 있으며,
정해진 시간에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하였다.
(누가복음24: 1-6, 요한복음20: 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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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묵상하는 이유는

자신이 죽은 사건,
자신이 죄와 죽음에 대해 죽은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을 묵상하는 것이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분은
이제는 죄와 죽음안에서 신음하는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새생명의 부활하신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내면의 문을 열고 그분을 영접하여,
그분과 함께 하는 영혼의 밀월의 여행을 떠나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멸당당해야 할 자신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부활을 전제하는 사건으로
자신의 옛자아와 옛신분의 사람이 죽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인류의 모두가 참여하여야 할 사건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이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인류의 죄의 문제를 청산하고 해결할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구원얻은 사람으로 날마다
그 곳에 가야만 하는 자신의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자신안에 있는 무수한 허물과 옛사람의 죄성을 바라본다.
십자가에 못박힌 손을 보며, 그 손에 못을 박는 것을 상상하며,
자신의 허물과 죄악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힌 손과 발을 생각하며, 자신의 죄성들을 박는다.
이러한 신앙의 세계에서 상상력의 효력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우리의 상상은 하나님이 우리의 두뇌에 새긴 또 다른 영혼의 세계의 창문의 역활을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자신안에 있는 새로운 이정표의 역활을 한다.
옛자아의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안에서 자신의 내면의 쓴뿌리흔적들을 들추어 내어,
십자가의 도에서 흐르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통해 우리들 자신안에서
새롭게 하는 그런 모습들을 전혀 다른 새로운 자아의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난다.

십자가앞에서 자신안에 있는 연약함을 본다.
자신안에 있는 죄의 나약한 자신의 상태를 보며, 죄의 깊은 영향력을 생각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기억하며,
죄의 영향아래에 있는 죄인의 처참한 죽음을 통해,
자신이 거듭나야 하는 절실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본다.

하나님안에 있는 저주받은 모습을 본다.
자신안에 있는 죽음의 절망을 당하여 고통하는 예수님의 좌절의 모습안에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모습을 본다.
처참하게 찟기신 그분의 몸에서 나의 저주를 대신하여
그분이 그 저주를 지고 저주안에 있는 인간자신들의 죄와
죽음의 찌꺼기들을 불태우며,
절망한 자신들의 내면에 붙어있는 불안의 자아까지도 새로와 지게하는 그분을 본다.

자신안에 형벌받은 모습을 본다.
나 자신이 죄의 몸덩어리로 정과 욕심에 찌들려 있는 상태로 십자가에 나아가,
나대신에 못박히신 그분에게 나의 몸을 위탁한다.
고로 나는 그분을 통하여 자신의 영원한 형벌받음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깊은 안도감과 그분의 형벌받음의 깊이를 느낀다.
그래서 형벌받아야 할 나의 죄성이 전혀 새로운 구원얻은 영성으로 바꾸어져,
나의 옛자아가 그분안에서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
그 분과 함께 하는 십자가의 구원의 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의 십자가안에서 그분의 처절한 사랑과
하나님아버지의 가슴아픈 인간사랑을 생각한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아버지도 울고 아들도 우는
온 우주가 함께 고통하며 슬퍼하는 인간구원에 대한 신의 절규의 구원의 사건이다.
인간들은 그 십자가를 바라볼때마다
그 신의 탄식을 들어야 하며,
그 탄식뒤에 있는 신의 애절한 사랑을 통해,
아무리 절망스런 인간들의 고통이나 절망에서도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영원한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소망을 본다.
그분이 그렇게 인류를 사랑하고, 당신(너)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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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기변화


인생은 끊임없이 자신의 변화를 통해
자신이 도달해야 할 인생의 상태를 발견하려고 되어가는 존재이다.
날때부터 다 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하여 자라며, 변화하며, 자신을 키워가는 존재이다.
이 자람이나, 성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변화를 스스로 인식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변화를 적절히 수용하여 자신을 탈바꿈하여,
자신의 살아가는 인생의 현실에 맞는 자신을 만들어 간다.

사람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먼저 자신이 누구인가하는 신분에 대한 자기개념을 갖고 있게 된다.
자신의 신분은 자아본분을 나타내며,
자신을 표출하는 자기이름이다.
신분에 대한 개념은 자기속에 있는 자아에 영향을 주어,
그자아에 대한 의식으로 나타난다.

신분이 달라지면, 사람은 자신의 의식속에 있는 자신에 대한 의식개념이 바뀌어진다.
의식화가 이루어지면, 그의식화에 따르는 사고 개념을 갖게 되며,
그 사고화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곤 한다.
자기의식속에 있는 자아는 자기에게 자신이 만든 자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처럼,
내면의 의식속에 보여지는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의식이나 사고방식이 달라지면,
그 사람의 습관을 주장하는 자신의 습성이나 체질이 달라진다.
한국에 살던 사람이 미국에 가서 살던지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살게 되면,
그들의 의식이나 체질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체질이나 의식등 사고방식이 적응해가는 지속적인 습관에 의해 서서히 달라진다.
사고방식의 변화는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 적응해가는 생활의 변화를 초래한다.

신분에 대한 변화의식/신분에 대한 자아의식의 전환은
자신에게 중요한 인간변화의 근본적인 상태를 말하며,
자신의 정체감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자신을 자유인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과 자신이 노예로 생각하며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한다.
자신이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변화를 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자기발견이며,
자기 정체감의 근본적인 의식변화이다.

크리스챤의 신분이 하늘나라의 왕자로 혹은
왕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의 차이는 신분의 차이는
봉건시대에서는 절대적인 차이를 말한다.
인간의 신분은 자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신분에 대한 자기정체감을 갖게된다.
신분의 변화는 권한에 대한 변화이며,
자신의 신분을 통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신분에 대한 정체감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자신이 아직도 죄의 노예로 살고 있으며,
죄와 사망의 법아래 살고 있는 세상사람들의 신분에 대한 차이와
별로 다르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럴때에는 자신의 신분에서 오는 권한이나 유익을 활용하지 못하고,
세상의 영향에 갇혀서 진정한 자유인의 신분을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죄의 노예로 사단의 영향권아래에서,
옛자아의 저주와 죄악의 세력아래에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로 하늘나라의 자녀의 신분변화를 가져왔다.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자아로 변화를 받아,
그 자아의 신분변화를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되며,
그 신분성품변화안에서 자기자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받게 된다.
더나아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얻은 하늘나라의 시민이며,
예수와 함께 하는 만국의 통치자가 된다는 상속자의 신분의 의식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세계의 능력과 권한에 동참하게 된다.

크리스챤은 두나라에서 지금 살고 있다.
그 두나라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하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이다.
하늘나라는 지금은 영의 나라로 자신안에 있는 영적인 생활과
하나님의 약속안에 있는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참여에 대한 기대감을 대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지상의 나라는 지구상에 많은 나라들중에 자신의 땅의 조국을 갖고 살며,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책임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크리스챤의 두 나라의 시민의 활동을 정상적으로 산다면,
정비례적인 활동으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와
두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자기역활을 하며 살게 된다.

왕자와 거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하루 아침에 왕자와 거지는 서로 각기 서로의 삶을 살기로 하고,
자신들의 신분을 바꾸는 일을 한다. 왕자는 거지옷을 입고, 거지의생활을 하는데,
영, 거지행세가 어색하기만 한다.
거지는 하루아침에 왕자의 옷을 입고, 왕자행세를 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을 경험한다.
서로 비슷한 아이들이 신분을 바꾸어 생활하는 일이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을 알수 있다.
신분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그 사람의 상태나
근본에 대한 자신이 갖고 있는 삶의 자세에 영향을 준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분확인에서
자신안에 있는 노예나 거지근성에서
하늘나라의 왕자의 신분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자아의식들중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자의식이 있고,
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아 형성된 자신속에 있는 초자아의식이 있다.
그 두 자아의식들이 서로 어울려져 생각하고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자기관점를 연출한다.
그런 자아의식은 생각하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각으로
모든 일들을 자기자신이 갖고 있는 관점(눈)을 통해 해석하고 표현한다.

의식변화는 그 자아의식에 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의식의 변화는 자신의 삶에 대한 전망의 변화와 비전의 변화를 가져온다.
또한 의식변화는 생각의 변화와 정신의 변화와 그리고 영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런 변화들은 지속적인 의식의 시스템의 변화추구
(예를들면 성경의 가르침들의 집중적인 연구로 자신의 의식시스템을 구축함)를 통해
각각의 영역안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그 의식개념의 예를 든다면, 가령 역사성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역사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 사회나 문화에 대한 모든 활동에 대해 해석하며,
자기의 해석에 따라 그 활동들의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성을 갖고 있는 크리스챤의 의식이라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나 문화적인 활동들에 대해
사회적인 참여의식(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가짐/예:세계화와 환경오염의 문제등 )과
혹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나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
(예: 국가를 위한 기도에 대한 책임)을 갖고 살아간다.

체질변화는 자신의 체질, 혹은 기질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호 불호의 경향을 바꾸는 것이며, 인생을 살아가는 습성을 통해
사람은 자신을 새로운 체질로 체질화한다.
사람의 체질은 자기몸에 붙어 있는 자신의 기질을 말한다.
자신에 맞는 기질은 다혈질, 담즙질, 점액질, 우울질등 기본적인 여러 체형의 기질들이 있다.
이런 체질들은 자신의 성격에 의해 만들어 진다.
또한 성격의 표현유형에 따라 외유형이 있으며,
내성적인 성격도 있고, 변형특이성격형도 있다.

그런데, 크리스챤의 신앙체질은 자신안에 있는 내면의 기질보다는
외형적인 경험이나 환경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자신의 신앙의 형성이 별로 어렵지 않은 환경이나
또한 신앙때문에 겪는 인생의 굴곡이 없는 온상에서 자란 경우는
나중에 작은 시련이나 고통에도 쉽게 좌절하고 낙망하기 쉬운 약한 체질의 신앙을 갖기 쉽다.
또한 어느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신앙을 통해
무엇이든 형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특별한 어려움앞에
스스로 신앙을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다.
모태신앙으로 신앙을 갖은 사람은 부모들의 배려와 도움으로 신앙을
자연습득하여 전반적으로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수 있지만,
어려운 시련을 만나면 홀로 서기에 힘이 들때가 있다.
물론 오랫동안 몸에 배인 신앙의 저력으로 극복할수 있지만 말이다.

고로 크리스챤들은 오히려 시련이나 역경을 통해,
더 강한 체질형의 신앙인으로 살아간다.
평소에 시련을 겪은 신앙인들은 자신앞에 다가오는
삶의 시련이나 고통을 잘 견디며, 신앙으로 극복한다.
특히 신앙의 고백이나 표현때문에 핍박받는 지역에
살고 있는 크리스챤들은 가장 강한 체질의 신앙의 소유자들이다.
저들은 웬만한 시련이나 고통에 대해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한다.

끝으로 크리스챤의 생활변화는 자신의 체질변화를 통해
자신의 습관이나 행동의 변화를 통해 자신의 생활의 변화를 생각해본다.
고로 크리스챤의 자기신분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그 의식의 변화는 체질변화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체질변화는 습관의 변화를 가져오며, 또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행동의 변화는 자신만의 특유의 그리스도인 다운 생활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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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기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기
섭리의 신비는 성경적원리들과 역사로부터 엮어진 내용을 포함하며,
추가되는 인용과 실제적인 적용을 통해 알게 된다.
우리가 섭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직접행하신 것을 무시하는 것이며,
우리안에 있는 믿음에서 주는 유익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는 것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퓨리탄의 플레블은 4가지 원리를 제안하고 있다.
먼저 자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기억하며 그것을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일생을 통해 그분의 행하신 발자취를 알아가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축복들을 세워보면서,
물위에 떠있는 오리와 같이 물안에 있지만, 물속에 빠지지 않으며,
수영을 하는 것처럼, 섭리의 바다에서 우리는 그분의 행적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타이밍을 탐구하며,
때때로 정상적이지 아니지만,
이상한 방법으로, 혹은 친구같지 않으며 이방인처럼다가오는
그분의 손길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때에 로마서 8:28의 믿는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들의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그것들(섭리들)을 촉진하는 친우처럼 행하시는 행하심을 이해하는 것이다.
특히 섭리와 기도사이에 있는 관계들을 살펴보고,
섭리가 어떻게 당신의 기도들에 인준되어 응답하는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당신의 인생안에서의 하나님의 섭리와
그의 약속하신 말씀들사이의 연결됨을 추적해보라.
이것은 성경에 대한 신뢰성을 우리의 주어진 환경안에서
채택되어진 하나님의 행동의 과정들을 확증할수 있게한다.
크리스챤의 생활은 성경안에 알려진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고 있지,
그의 섭리안에 있는 비밀스런 뜻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섭리안에서 나타나는 그의 뜻은 하나님이
항상 신실하게 그의 약속을 이루시는 사실을 발견하게 한다.

하나님자신을 인생의 주관자와 제공자로
하나님의 섭리안에 일어나는 사건들이나 환경들을 넘어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성품들과 그의 행하시는 방법들을 생각해는데,
그의 사랑,지혜, 은혜,정중함, 목적들,선함등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안에서 그의 속성들을 통해
섭리가 이루어지는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련받음을 통해
그의 목적들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대해 전능하시며, 은혜로우시고,
지혜로우시며, 신실하시며, 모든 것을 충족시키며,
변개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디에 계시는 지를
우리가 곤란의 힘든 시절들을 당할때에 알 필요가 있다.

합당한 자세로 하나님의 각 섭리의 사건들에 반응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그 반응이 슬플지라도, 크리스챤들이 위로와 기쁨의 요소들을 경험할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의 어떤 요소도 우리를 대적하는 의미로 실행되어지지 않는다.
엄격한 섭리의 때일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크리스챤들은 섭리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안에서
주님이 가까이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약속하신 바와 부합하지 않을때에,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이나?
섭리에 대해 불만족스러움을 거부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를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행하실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바라는 축복을 맛보려는 갈망이 증대되어질 지라도,
우리가 조급하게 요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크나큰 축복을
즉 하나님과 그의 선한 즐거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열려있는 자세로 다가가
그 축복들을 가져다 줄 분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다 소멸될때에
그가 우리에게 기꺼이 다가오신다.
더우기, 우리가 아지 축복받을 준비가 되지않았지만 말이다.
만일 하나님의 모든 자비가 은혜로 주어지며,
우리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지마는, 우리는 그것들을 기다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충분하게 이해한다고 상상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길들과 목적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그것들은 우리를 겸허하게 그리고 정중히 하나님을 공경하게 만든다.
즉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사람이 쉽게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시편73편에서 아삽은 하나님의 길들의 모든 복잡함을 이해하려고 힘쓰다가
그의 우울증이 늘어나게 된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는 감각
즉 어두운 영의 상태로 키워, 우리자신들이 하려고 하는 유혹에 걸려 넘어지게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들은 섭리를 불신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거부하려는 위험에 빠지게 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에 대해 묵상하는 것은
계속적으로 진행하는 하나님과의 소통으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섭리로 그의 백성들중에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그의 속성들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성품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추구하게 하는 크리스챤 생활의 주요한 기쁨이 된다.

그런 묵상들은 또한 당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영향력있는
무신론을 제압하게 한다.
그 자연적인으로 일어나는 무신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를,
즉 어떤 진실한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현존에 대한 의심으로 고통받는 것을 알고 있는
플레블은 참으로 지혜로운 목회자였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묵상들은
우리의 생애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돌봄과
그의 전능한 능력의 길들을 추구하는 것으로 우리를 지켜주는 요새와 같다.
이런 방법으로 과거에 보여진 섭리의 것들을 이해함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강화해준다.
예를들어, 젊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때에
그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섭리에 기억으로 그의 힘의 근원을 삼았던 것이다.
그와같이 찬양의정신은
우리의 생애에 달콤한 멜로디로 호흡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애에서 더 중요한 존재로 여기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의 모든 손길이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의 태도들은 불안정한 세상에서
우리의 내면의 마음들을 강화시키며,
거룩함에 증가하는 헌신을 강화하게 한다.
우리가 다음과 같이 죽음에 직면하게 한다.
즉 플레블가 인식하는 것은
때때로 인간의 상당한 내면의 소동과
사단으로 부터 오는 특이한 유혹들로 인하여 죽음에 직면하게 한다.

믿음의 두가지의 어려운 행위들은,
즉 먼저는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자신이 죽음에 직면하였을때에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크리스챤들은
그 혹은 그녀의 생에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섭리의 축복들을 회상하므로
그들이 죽어갈때라도,하나님의 평화를 확실히 간직할 수 있다.

Sinclair G. Ferguson 의 The Mystery of Providence by John Flavel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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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변화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는 가에 대한 질문은 인생의 중요한 질문중에 하나이다.
인간은 인생의 삶의 변화의 사이클안에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영적인 변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는 인생의 의미있는 여행의 중심이 된다.
우리의 희망이나 두려움을 통해
전적인 절대타자인 신과의 친밀함을 추구함으로 나아간다.
이 관계안에서 변화에 대한 기대가
영성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영적인 변화의 과정은 고통스럽기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적인 발전이 없이 인생이
그저 태어나는 때나 죽는 때가 매일반 다를것이 없다면
그 인생은 무의미한 생으로 끝나는 것이다.

크리스챤의 인간생활의 변화에 대한 역동성연구은
기독교신학의 원리들과 사회과학의 이론들의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영성(spirituality)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영성의 개념은
영성을 해석하는 종교에 따라서
혹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영적인 체험에 의해 나름대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 개념은 모호하고, 다양하기도 하다.

그 다양한 영성에 대해 특히 크리스챤 관점에서의 영성의 연구는
종교와 과학의 원리들로 영성의 경험과 그 영성에 대한 생각들을 통해
변형을 위한 연구의 새로운 기회로 영적지도(spiritual direction)나 목회상담에서 활용할수 있다.

크리스챤 영성연구는 전통적으로 경험과 신비로 이해되어지며
복음적인 신학노선안에서의 영성을 추구한다.
영성화(spiritual formation)는 크리스챤생활의 핵심이며,
영성연구는 기독교신학의 중심에 있다는 전제를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인생안에서의 변화의 역동성에 대한 신학적인 표현들은
성령의 교리와 현대철학과 과학에서 얻은 통찰력과의
명백한 대화를 통해 실천되어질수 있다
(이부분에 대해 기독교입장에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에 대한
복음적인 신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그런 연구들을 대할 필요가 있다).

변형(transformation)
인생안에서 모든 변화(change)가 다 바람직한 변형(transformation)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가족시스템이론자들은(가족의 시스템안에서 인간관계를 통해 변화나 상담을 추구하는)
인생의 바람직한 변화는 두가지측면에서
즉 일차적인 질서안에서 변화가 있고 이차적인 질서안에서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일차적인 것은 주로 인간의 행동에 있으며,
현재의 도전받는 이슈들에 대한 것이며,
이차적인 것은 보다 복잡한 시스템적인 변화와 그 변화에 대한 전략에 대해 다룬다.

종교적인 개종과 영성변화는 자기 정체감의 심오한 변화로서
중요한 긴장과 감정적인 격동을 동반한다.
영적이며 종교적인 변화는 병리학적인것 보다는 적극적인 정신적인 변화로 나타난다.

변형으로서의 변화는 점차적이면서 급진적으로 이루어 진다.
획기적(quantum)인 변화들중에 갑작스런 드라마틱한 인생의 변화는
핵심가치와 감정들, 자세들, 혹은 행동들안에서 깊은 변화가 일어난다.
획기적인 변화들중에 두가지 타입이 있는데, 통찰적인 것과 신비적인 변화이다.
통찰적인 변화는 개인의 이전 발달이론이나
인식적인 과정안에서 연속성을 가지는 변화이며,
신비적인 변화는 외부의 영향에 의해
전개되는 드라마틱한 감각과 연관이 된다.
이런 변화들에 대한 경험들을
이해하는 해석학적인 관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변형의 개념에 대해서, “기능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면, 알코올중독자가 술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을
터득하는 것은 기능적이라는 것으로 자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자아 기능이나 도전하는 전략들은
자신의 행동변화와 연관이 된다.
이것은 인간발달에 있어서 중요하고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차적인 변화나 의미의 존재하는
구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의 흡수화로 제한이 된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이차적인 변화인
시스템적인 변화나 패러다임인 동일화에 인간 자신의 구조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영성변화는 영적인 관점안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나
거룩해 지는 성화되어가는 것을 추구한다.
이 변화는 성례전적인 해석으로
보다 종교적으로 궁극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런 변화는 영성변화로서 웰빙(grace)과, 성숙과,
그리고 샬롬(자신과의 조화)의 상태로 변화되어가는 것이다.

관계성과 상호 훈련성
관계적인 통합성은 인간이 다른 존재와의 연결속에서
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관계적인 영성화는 인생의 관계적인 경험안에서
자신의 내면과 연관된 사역을 추구하는 모델이다.
그 관계성은 영성화나 영성변화를 촉진하든지
혹은 억제하는 제도로서 여겨진다.
그리고 영성의 변화는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상황에서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영적인 내주(indwelling)는 특별한 공동체와전통에 연결되는
종교적인 그룹과 관련이 되고,
영적인 구도(seeking)는 새로운 영적경험의 탐구나 순례로서의
공식적인 종교적인 테두리에 있든지 넘어서든지 새로운 영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영성강화의 역동성과 고전적인 방법들
크리스챤전통의 영성화의 개념의 3가지 방법들은 정화(purgation),
조명(illumination), 그리고 연합하는(union) 것이다.
정화하는 것은 일종의 각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각성은 자신들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영혼의 밤과 같은 상태에서 신비적이며, 명상적인 것을 경험하는데 거기에는 고통이 따른다.

어둠의 긴 터널속에서 새로운 존재에 대한 약속들을 추구하는 경험속에서
하나님임재안에 있는 기쁨과 평안함의 새로움을 경험할때에
조명되는 은혜안에 머물게 된다.
이 조명은 사람들을 변화시킬때에,
하나님의 임재의 빛안에서 사람들과 세계를
이해하고, 감지하고, 해석하는 데로 이끌어 준다.
그 조명안에서 사물을 본다고 해서 완전히 깨달아 지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이 남아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상태로 나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 하나됨은 영성화의 핵심으로 절대자 하나님과
상대적인 존재인 인간의 연합됨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연합됨의 친밀함을 추구하면,
때때로 하나님의 임재의 크신 은혜로 몰입되어가는 상태가 된다.

정화의 역동성은 갈등과 긴장과 자신을 비쳐보기등을 경험하게 한다.
조명의 역동성은 상상력의 조명을 의미하며,
자신이 하나님과 타인과의 관련안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살펴보는 것이다.
연합의 역동성은 관계적인 연합과
친밀함의 새로운 감각에서 인간의 영혼이 자유하며, 열린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영혼의 역동성은 관계성의 질적인 강화화의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
그 강화화의 원리는 집중화, 의도성, 그리고 친밀성으로 인간의 내면인 영성을 강화하여 간다.
집중화는 인간생활에 필요한 관계적인 강화이다.
인간의 의식화에는 의도성이 요구되어진다.
그리고 의식적인 강화는 친밀함을 통해 인격의 친밀화로 개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 크리스챤의 친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친밀함을 통한
지속적인 인격변화를 가져올수 있다
(계속적으로 경험하는 주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자기체험에 근거한 주님과의 친밀함을 통한 자기변화)

영성변화의 도가니: 호되시련 (crucible)
도가니는 심각한 테스트를 받는 것을 의미하며,
불속에 집어넣어 연단하는 것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영성변화는 심한 시험, 시련들, 주도적인 자발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영성변화에 있어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안에서
용광로의 불로 상징되는 것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스가랴 13:9, 말라기 3:2-3).
그 시련의 불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자신의 영성에
“강화화”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영성변화의 일반적인 상징을 의미한다.

크리스챤은 누구나 이런 영성변화의 여행을 하고 있으며,
존번연의 천로역정의 과정처럼,
거듭나서 하늘나라에 도달하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영성변화를 추구하는 사명과 도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F. Leron Shults and Steven J. Sandage’s Transforming Spirituality:
Integrating theology and spirituality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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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밥이다

밥은 인간의 몸을 유지하는 음식이다.
하루도 밥없이 살수 없다.
밥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준다.
먹는 재미와 먹는 기쁨은 인간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내린 축복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나 모두에게 식사를 할수 있는 축복을 주셨다.
음식을 먹음으로 자신의 육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몸이 음식을 요구한다.

밥을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말은 밥보신이 제일 몸에 좋은 보신이 된다는 말이다.
밥에서 주는 영양을 골고루 섭취해야
몸의건강에 좋으며, 자신의 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밥은 육체의 밥이 있지만, 영의 밥도 있다.
영의 양식은 인간의 영혼을 살리며,
인간속에 있는 영성을 일깨우며,
인간의 영을 먹여 살리는 영의 음식이다.
고로 인간의 영혼속에 생명의 밥을 얻어 먹어야 영혼이 산다.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밥을 먹이기 위해 이세상에 오셨다.
그의 육체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찌어지고,
상하고, 고통에 찌들렸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하나님의 심판의 제단에 드림으로써,
자신의 육체가 사람들의 밥이다 라고 말씀을 하신 것을 이루셨다.

자신의 몸을 인류을 위해 내놓은 그는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범한 죄들을 감당하여,
모든 인생들의 죄로 인한 저주와 형벌을 모두 가져가,
자신이 친히 그것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밥이 되셨다.

한번은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늘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광야에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의 설파하는 하늘의 메시지는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양식으로
그들은 들어도 들어도, 듣고 싶어, 음식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넒은 산야에서 굶주려 가면서
말씀을 경청하고 있을때에,
그들을 먹여주어야만 하는 예수님의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보리떡과 물고기로 굶주린 청중들을 먹이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다." 그가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몸이며 살을 먹어야 사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주는 혜택을 받아야
비로소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잘살수 있다.

예수를 먹어야 자신의 영혼이 살며,
비로소 자신안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공급받는다.
예수를 먹는 일이란 그에게 나아가서,
그 분을 대면하여, 그분을 통해 주시는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다시 하늘의 생명을 받아,
앞으로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으로 약속을 보장받는 다.

예수안에 생명이 있다. 반면에 인생안에 죽음이 있음을 본다.
사람들은 죽을까하는 염려때문에 하는 늘 불안함을 안고 살아간다.
이런 죽음에 이르는 절망이 어느 인간속에나 다 있다.
그것은 죄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인간내면에 있는 죽음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다.
죽은 자에게 생명이 필요하며,
죽은자가 죽은 자를 살릴수 없고 오직 살아있는 자만이 죽은 자를 살릴수 있다.

예수님에게 인생을 살리는 생명의 활력이 있어,
비록 인생들이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생활에서도,
그 가운데에서 만족할수 있으며, 그런 시련들을 감당할수 있다.
예수안에 있는 삶에는 즐거운 인생이 있어,
그분과 함께 자기가 겪는 갖은 고난과 이유없는 고통에 대해 해답을 얻으며
그 시련속에서 힘있게 살아간다.

하나님의 집 교회는 밥상공동체로 예수이름으로 모이는 곳마다,
예수밥상을 통해, 생명의 빵을 먹으며, 그의 몸에서 주는 생명의 향취를 섭취한다.
각 나라에 흩어진 한인교회는
고국에 대한 향수와 같은 동포들의 만남이
즐거운 점심식사를 함께 한국식으로 먹는 기쁨과 만족함을 나누며,
주일마다 예배후에 어울려 밥상의 잔치를 맛본다.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예수를 먹으면, 생명을 먹는 것이다.
예수를 먹는 일이란, 예수의 진리의 말씀을
머리와 가슴으로 이해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 의 진리의 가치는 가는 세상, 오는 세상할 것없이 영원하다.
그의 가르침은 인생들이 기대할 만한 생명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인생이 얻을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법이다.
자신의 묵상은 구체적인 대상
즉 그 진리을 생각하고 궁구하고, 또 사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밥을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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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영혼을 회복하는 사역

예수 그리스도는 꺼져가는 심지를 끊지 않으신다.
그것은 아무리 약한 자라도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얻고,
영혼이 회복이 되는 사역을 행하신다.

주님의 사역은 적게 시작할지라도 하늘에서 오며,
그의 영이 상한 심령속에서 그 연약한 영을
그의 사랑의 불꽃을 점화하므로
그의 자비의 사역이 시작이 되며,
또 그 완성을 이루어낸다.

그 사역은 그의 자녀들에게 능력의 은혜의 영광으로 다가와
어두움가운데에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심령들에게 빛을 발한다.
고로, 그의 사소한 은혜의 역사도
절절한 도움을 구하는 사람의 심령속에서는 귀한 것이다.

이사역이 귀한 것은 새술은 새부대에 담는 은혜로,
절망스런 삶을 살아가는 심령속에
마치 온 덩어리에 퍼지는 누룩과 같이 역사한다.
자신의 영혼이 깊은 속에서 매말라가는 가운데에
영적으로 기갈이며, 절망스런 상태에 있지만,
그런 심령에 다가오는 주님의 사역은
병들고 상한 영혼들을 회복케하는 귀한 사역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그런 인생들의 약한 것을 지원하는 것이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성품과 인간의 불순한 성품이 서로 상치된다.
그의 성품은 인간성의 온전함과 신의 성품안에서, 그의 비쳐주는 생명의 빛은
약한 인간의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상태의 영혼에 불을 붙여,
병든 영혼들을 소생케 하는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비참함 가운데에서 시작하신다.

젊은 시작한 크리스챤들이 적은 일부터 시작되지만,
근본적인 가르침안에서 보다 점점 탁월한 방법으로 훈련을 받는다.
처음에 그들을 신임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허물을 감추거나,
어떤 실패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들이 겪는 멍에를 잘 감당하여
그들이 얻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봉사에 도달하기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 중에 약한자들은 무시당하지 않아야 하며,
그들이 만족할 만한 격려를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약한자들에게 대해 그의 은혜로우신 능력으로 임하신다.
그는 겸손히 상한 심령들을 이해하며,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살피시고,
그들을 치료하고 회복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극대화하여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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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는 심지

예수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에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않으시며,
그불꽃이 타오르도록 불을 붙이신다.

은혜는 처음에는 적은 것으로 다가온다.
믿음은 작은 겨자씨와 같은 것이다.
은혜도 처음에는 작으나,나중에는 아주 큰 영광을 인도한다.
위대한 완벽한 것들은 성장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인간은 세계안에 가장 탁월하고 온전한 존재로 자라기 위해 조금씩 성장한다.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듯,
예수 그리스도도 가장 낮은자로 오셨으나, 천국보다 높은 자로 오르셨다.
거룩한 진리들의 결론은 감추어져 있는 원리들이 있다.
성도들의 거룩함과 열정도 처음에는 적은 불꽃에서 시작한다.

은혜의 적은 시작을 실망하지 말고,
거룩하고 흠없는 자로 선택된 것을 기뻐하며,
불완전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함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은혜는 비록 작지만, 그 힘과 가치는 지대한 것이다.
눈의 동공이 작을 지라도 그눈으로 천국의 모든 것을 볼수 있다.
영광의 천사들이 가장 작은 자일지라도 그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은혜의 작은 알곡보다 세상에 가치있는 것은 없다.

은혜는 타락과 함께 역사한다. 은혜는 처음에는 미미하지만,
타락가운데에 있는 우리에게 역사한다.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타락된 부분들을 일시에 없애지 않고,
그들이 남은 타락된 부분들을 싸우기를 바란다.
가장 순수한 자가 순수한 행동을 할지라도
그에게도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에 어떻게 기도하지를 모를때에,
성령은 우리을 위해 탄식하듯 도우신다.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들은 상한 간구를 드릴수 밖에 없다.
심지가 꺼져가는 듯한 어려운 상태는 여러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모세가 홍해바다앞에서 그렇고, 다윗도 외국땅에서 그렇게 되었다.
바울도 자신을 가리켜 곤고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절망스런 고백과 함께
자신의 영혼이 꺼져 가는 듯한 상태를 경험하였다.

자연과 은혜가 서로 어울려져 우리안에서 공존하며 있다.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은 안전과 자만에 기울이지만,
의롭다고 여기다가도 우리안에 허물이(stain)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안에 은혜를 통해 붙은 영적인 불이
우리안에서 남아있는 타락의 흔적인 육의 불에 의해,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Richard Sibbes's the Bruised Reed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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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갈대를 향한 예수님의 사역

의사는 통증이 심한 환자들을 다둘때에,
칼을 들이대고 아픈 부분을 자르지만,
환자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치료한다.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싸매어주시고,
은혜로운 돌보심으로 하나님앞에서 중보자요 구주의 역활을 하신다.
예언자로서 사람들에게 가난한 심령이 복이 있으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면서 양을 돌보는 목자와같이 하신다.
그는 그의 적들에 대해 양무리들을 위해 제사장으로 죽으러 오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따르는 무리들을 위해 우셨으며,
하늘에서 그들을 위해 중보자로 기도하신다.
그는 온유한 왕으로서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왕이었다.
그는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시는 모든 질병을 가진이들의 의사였다.
우리의 죄를 위해 담당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그는 그의 피로서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고자 죽으셨다.

우리자신들을 위하여 우리는 담대히 은혜의 보좌앞에 나가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처를 감추지 말고, 그에게 상처난 자신을 그에게 열어보여야 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니, 하나님앞에 나가는 것을 두려어 하지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왕국에는 평화와 기쁨이 있으며,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신다.
우리의 상처난것을 그리스도에게 가져가 치료받게 된다.
그분은 나를 위해 유혹을 받으시고 시련을 겪으시므로
우리 자신을 깨뜨리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니,
사단이 자신을 삼키려고 깨뜨려고 달려드는 모든 것에서
우리들 자신이 파멸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사단이 망가뜨린 모든 파멸들을 보상해줄 것이다.
특히 그는 약한자들을 돌보신다.
교회안에 가장 약한자라도 그의 돌보는 날개아래에 의존하여,강하게 될 수 있다.

누가 상한 갈대들인가?
어떻게 우리가 자비를 기대하기를 알수 있는가?
상함은 자신의 지는 십자가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한 상처들을 말함이며,
우리의 양심이 죄의 영향력아래에서, 하나님의 분노에 신음하는 우리의 영혼이 신음하며,
모든 타락한 농담들이 병들고 상처난 몸을 만든다.
지난 날의 죄가 자신들을 가두고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고,
주님은 자신의 죄에 대해 심판하셨지만,
이제는 주님은 우리 자신들을 치료하신다.
자신의 죄에 악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의 큰 은혜를 경험한
그는 이제 자신에 대해 겸손하며 타인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며,
성령안에서 가장 행복한 자로서 세상을 살아간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을 대하며,
상한 마음의 내면의 살피는 일을 통해 성화를 이루어 가는 일에 유념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깨닫는 마음의 상태에 도달할 것인가?
우리의 상함에 하나님앞에 우리의 상함의 상태에 대해 인식하며,
우리가 범한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앞에 대적하지 않고 겸손하게 나가면 그는 우리를 배나 어루만져 주실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완고함을 풀고, 우리가 저질은 죄를 적대시하여,
우리의 죄를 위해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령의 감동에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죄는 그저 있게 되고 더이상주님앞에 나가지 못한다.
죄를 시인하는 것은 회개하게 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앞에 서게한다.
우리의영혼에 있는 어둠을 몰아낼 빛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상함의 상태가 어느 정도이지를 묘사할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는 고쳐질 것이며,
비록 우리의 오른손이나 눈을 뽑아야 할 처지일지라도,
우리의 잘못된 것들이 개선될 것이다. 우리의 잘못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거나,
우리 마음의 허물을 가리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공포나 짧은 슬픔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으며,
우리의 머리를 조아려 겸손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회개를 거부하는 거룩한 횡포를 하게되면,
우리의 죄가 우리를 처벌받는 것보다도 더한 악취를 겪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자신이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영적진리의 근본이다.
자신의 영혼이 상처입은 상태에서 천국가는 것이
안일하게 있다가 지옥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우리가 처벌에 대한 것보다 죄자체 대해 슬퍼하면,
우리가 상함을 겪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외부의 불평으로부터 오는 슬픔은
하나님의 기뻐하시지 않게하는 것에 대한 슬픔보다 우리의 영혼을 짓누른다.
왜냐하면 그런 슬픔은 우리의 안과 밖을 아울러 전인에 영향을 주며,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격한 불평때문에 믿음의 효력이 잠시 정지되어진다.

갑작스런 고통(스트레스에서 오는)은 우리의 영혼에 격류와 홍수와 같이 다가오면
영혼과 몸의 연결로 인한 원인때문에 우리의 몸에 병이 찾아온다.
우리의 영혼의 활동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현실에 압도된 믿음은 죄에 대한 슬픔을 통해,
비록 죄로 인한 불행스러움이 있지만,
다시 막혔던 둑에 물이 다시 흐르듯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준다.

상함의 철저한 사역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하게 하는 것같은 시련에서
우리가 인내하면,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는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된다.
우리안에 있는 거룩한 좌절은 참된 소망의 근거가 된다.
도울힘이 없는 자들에게 주님은 진정한 도움이 되시며,
가장 약하고 낮은 영혼까지도 돌보시는 사랑을 가진 분이다.

Richard Sebbes's The Bruised Reed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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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나약함과 회복

청교도의 시대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준 사람중에 하나인 리챠드 시브스는
상한갈대와 같은 인간의 글에서 영적인 회복과 영적인 격려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즉 그의 은혜의 사역안에서 연약한 자신들이 회복할수 있음을 제안하고 있다.

1.갈대와 상함에 대해
구약 이사야예언자은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은혜의 사역을 할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그의 사역은 상한갈대를 꺽지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이룰것을 알리고 있다.

예수님의 소명은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오신 사역을 통해,
고난을 겪는 사역이었지만, 그사역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의 사역이다.
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벌어진 관계를 화해케하는 사역이다.
성도들의 신앙과 구속받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체결된 조약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구주로서의 사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수님사역의 방법에서, 예수님은 화려하게 사역을 하지 않고
겸허하게 그의 사역을 수행하신다.
그의 사역이 마치 상한갈대를 꺽지않고 꺼져가는 심지의 불도 끄지 않는 자비의 사역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약한 존재로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개종이후에 상한갈대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램은 그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상함의 의미에서, 인간의 상함은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할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며,
인간의 죄로인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의 죄와 비참은 인간을 상함으로 이끌어 인간자신에게는 소망이 없다.
오직 가난한 심정으로 구주를 바라보고 자비와
약속된 은총을 갈급해 하고 사모하는 길밖에 없다.

상함의 선한효과에서, 인간이 겪는 상함은
인간자신이 개종하기전에 가지는 것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앞에서 교만하고 높아진 생각들로부터 자신의 상태를 바로 보게하는 요인이 된다.
인간이 자신안에서 방황하며, 나그네로 살던 습성을 좋아하며,
탕자와 같은 상태에 빠진 채 살아간다.
이런모습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데 둔하고, 도피하고픈 심정을 나타낸다.
그런 인간의 마음은 범죄자와 같이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보다는 교묘히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이 인간의 상함은 예수님에게 인간을 향한 높은 댓가를 치르게 한다.
이것은 복음이 복음이 되며 왜 도덕성이 효력이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죄로인한 상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받지 못하게하지만, 그죄와 같은
인간의 벌거벗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보다 감사하게 하며, 오히려 인생을 열매맺게 한다.

인간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불행과 상함은
인간에게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
인간의 타락이나 배교은 처음에 인간에 죄를 정하지 않으나,
개종이전에 인간의 오만한 생각에 대해 법의 채찍을 감당하지 못한다.

성령의 인간을 낮추게 하는 사역은 인간에게 어떤 고통과 함께 죄를 상기시키지만
그가 인간을 성화시킬때에 치유와 정화을 하게 한다.

개종이후에 인간은 자신의 상함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인간자신이 강한 참나무가 아닌 나약한 갈대라는 것을 알게 하기때문이다.
비록 갈대같은 인간에게 상함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자신의 성품안에 있는 교만함을 상기시키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자비를 통해 살아가도록 한다.

그런 상함은 강한 자들이 흔들리고 상하는 것을 볼때에,
나약한 크리스찬들을 좌절하지 않게 해준다.
베드로는 결코 자신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한 자신의 강함보다,
더 큰 시련앞에 당한 비참함에 빠져 쓰디쓴 눈물을 흘렸다.
이런 예는 교회안에 일어나는 좌절이나 상함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이 위로받지 못하는 영웅적인 행위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상함에 하나님께서 더 강하게 인간을 상하게 하는
그의 심판이 행사되면 아무도 그심판을 견디어 낼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그런 심판을 겪으므로,
얼마나 우리가 그와 동일시되어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불경겅한 영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을
모르는 불경건한 영들은 마음을 애통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비참한 존재라 비난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한 사역으로 일을 하신다.
인간이 본성으로 은혜를 받고, 은혜를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이 쉽지 않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불순종과 치유받기 싫어하는 속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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