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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갈대를 향한 예수님의 사역

의사는 통증이 심한 환자들을 다둘때에,
칼을 들이대고 아픈 부분을 자르지만,
환자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치료한다.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싸매어주시고,
은혜로운 돌보심으로 하나님앞에서 중보자요 구주의 역활을 하신다.
예언자로서 사람들에게 가난한 심령이 복이 있으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면서 양을 돌보는 목자와같이 하신다.
그는 그의 적들에 대해 양무리들을 위해 제사장으로 죽으러 오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따르는 무리들을 위해 우셨으며,
하늘에서 그들을 위해 중보자로 기도하신다.
그는 온유한 왕으로서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왕이었다.
그는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시는 모든 질병을 가진이들의 의사였다.
우리의 죄를 위해 담당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그는 그의 피로서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고자 죽으셨다.

우리자신들을 위하여 우리는 담대히 은혜의 보좌앞에 나가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처를 감추지 말고, 그에게 상처난 자신을 그에게 열어보여야 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니, 하나님앞에 나가는 것을 두려어 하지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왕국에는 평화와 기쁨이 있으며,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신다.
우리의 상처난것을 그리스도에게 가져가 치료받게 된다.
그분은 나를 위해 유혹을 받으시고 시련을 겪으시므로
우리 자신을 깨뜨리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니,
사단이 자신을 삼키려고 깨뜨려고 달려드는 모든 것에서
우리들 자신이 파멸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사단이 망가뜨린 모든 파멸들을 보상해줄 것이다.
특히 그는 약한자들을 돌보신다.
교회안에 가장 약한자라도 그의 돌보는 날개아래에 의존하여,강하게 될 수 있다.

누가 상한 갈대들인가?
어떻게 우리가 자비를 기대하기를 알수 있는가?
상함은 자신의 지는 십자가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한 상처들을 말함이며,
우리의 양심이 죄의 영향력아래에서, 하나님의 분노에 신음하는 우리의 영혼이 신음하며,
모든 타락한 농담들이 병들고 상처난 몸을 만든다.
지난 날의 죄가 자신들을 가두고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고,
주님은 자신의 죄에 대해 심판하셨지만,
이제는 주님은 우리 자신들을 치료하신다.
자신의 죄에 악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의 큰 은혜를 경험한
그는 이제 자신에 대해 겸손하며 타인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며,
성령안에서 가장 행복한 자로서 세상을 살아간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을 대하며,
상한 마음의 내면의 살피는 일을 통해 성화를 이루어 가는 일에 유념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깨닫는 마음의 상태에 도달할 것인가?
우리의 상함에 하나님앞에 우리의 상함의 상태에 대해 인식하며,
우리가 범한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앞에 대적하지 않고 겸손하게 나가면 그는 우리를 배나 어루만져 주실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완고함을 풀고, 우리가 저질은 죄를 적대시하여,
우리의 죄를 위해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령의 감동에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죄는 그저 있게 되고 더이상주님앞에 나가지 못한다.
죄를 시인하는 것은 회개하게 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앞에 서게한다.
우리의영혼에 있는 어둠을 몰아낼 빛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상함의 상태가 어느 정도이지를 묘사할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는 고쳐질 것이며,
비록 우리의 오른손이나 눈을 뽑아야 할 처지일지라도,
우리의 잘못된 것들이 개선될 것이다. 우리의 잘못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거나,
우리 마음의 허물을 가리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공포나 짧은 슬픔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으며,
우리의 머리를 조아려 겸손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회개를 거부하는 거룩한 횡포를 하게되면,
우리의 죄가 우리를 처벌받는 것보다도 더한 악취를 겪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자신이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영적진리의 근본이다.
자신의 영혼이 상처입은 상태에서 천국가는 것이
안일하게 있다가 지옥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우리가 처벌에 대한 것보다 죄자체 대해 슬퍼하면,
우리가 상함을 겪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외부의 불평으로부터 오는 슬픔은
하나님의 기뻐하시지 않게하는 것에 대한 슬픔보다 우리의 영혼을 짓누른다.
왜냐하면 그런 슬픔은 우리의 안과 밖을 아울러 전인에 영향을 주며,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격한 불평때문에 믿음의 효력이 잠시 정지되어진다.

갑작스런 고통(스트레스에서 오는)은 우리의 영혼에 격류와 홍수와 같이 다가오면
영혼과 몸의 연결로 인한 원인때문에 우리의 몸에 병이 찾아온다.
우리의 영혼의 활동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현실에 압도된 믿음은 죄에 대한 슬픔을 통해,
비록 죄로 인한 불행스러움이 있지만,
다시 막혔던 둑에 물이 다시 흐르듯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준다.

상함의 철저한 사역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하게 하는 것같은 시련에서
우리가 인내하면,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는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된다.
우리안에 있는 거룩한 좌절은 참된 소망의 근거가 된다.
도울힘이 없는 자들에게 주님은 진정한 도움이 되시며,
가장 약하고 낮은 영혼까지도 돌보시는 사랑을 가진 분이다.

Richard Sebbes's The Bruised Reed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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