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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묵상하는 이유는

자신이 죽은 사건,
자신이 죄와 죽음에 대해 죽은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을 묵상하는 것이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분은
이제는 죄와 죽음안에서 신음하는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새생명의 부활하신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내면의 문을 열고 그분을 영접하여,
그분과 함께 하는 영혼의 밀월의 여행을 떠나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멸당당해야 할 자신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부활을 전제하는 사건으로
자신의 옛자아와 옛신분의 사람이 죽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인류의 모두가 참여하여야 할 사건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이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인류의 죄의 문제를 청산하고 해결할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구원얻은 사람으로 날마다
그 곳에 가야만 하는 자신의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자신안에 있는 무수한 허물과 옛사람의 죄성을 바라본다.
십자가에 못박힌 손을 보며, 그 손에 못을 박는 것을 상상하며,
자신의 허물과 죄악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힌 손과 발을 생각하며, 자신의 죄성들을 박는다.
이러한 신앙의 세계에서 상상력의 효력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우리의 상상은 하나님이 우리의 두뇌에 새긴 또 다른 영혼의 세계의 창문의 역활을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자신안에 있는 새로운 이정표의 역활을 한다.
옛자아의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안에서 자신의 내면의 쓴뿌리흔적들을 들추어 내어,
십자가의 도에서 흐르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통해 우리들 자신안에서
새롭게 하는 그런 모습들을 전혀 다른 새로운 자아의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난다.

십자가앞에서 자신안에 있는 연약함을 본다.
자신안에 있는 죄의 나약한 자신의 상태를 보며, 죄의 깊은 영향력을 생각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기억하며,
죄의 영향아래에 있는 죄인의 처참한 죽음을 통해,
자신이 거듭나야 하는 절실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본다.

하나님안에 있는 저주받은 모습을 본다.
자신안에 있는 죽음의 절망을 당하여 고통하는 예수님의 좌절의 모습안에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모습을 본다.
처참하게 찟기신 그분의 몸에서 나의 저주를 대신하여
그분이 그 저주를 지고 저주안에 있는 인간자신들의 죄와
죽음의 찌꺼기들을 불태우며,
절망한 자신들의 내면에 붙어있는 불안의 자아까지도 새로와 지게하는 그분을 본다.

자신안에 형벌받은 모습을 본다.
나 자신이 죄의 몸덩어리로 정과 욕심에 찌들려 있는 상태로 십자가에 나아가,
나대신에 못박히신 그분에게 나의 몸을 위탁한다.
고로 나는 그분을 통하여 자신의 영원한 형벌받음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깊은 안도감과 그분의 형벌받음의 깊이를 느낀다.
그래서 형벌받아야 할 나의 죄성이 전혀 새로운 구원얻은 영성으로 바꾸어져,
나의 옛자아가 그분안에서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
그 분과 함께 하는 십자가의 구원의 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의 십자가안에서 그분의 처절한 사랑과
하나님아버지의 가슴아픈 인간사랑을 생각한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아버지도 울고 아들도 우는
온 우주가 함께 고통하며 슬퍼하는 인간구원에 대한 신의 절규의 구원의 사건이다.
인간들은 그 십자가를 바라볼때마다
그 신의 탄식을 들어야 하며,
그 탄식뒤에 있는 신의 애절한 사랑을 통해,
아무리 절망스런 인간들의 고통이나 절망에서도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영원한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소망을 본다.
그분이 그렇게 인류를 사랑하고, 당신(너)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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