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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28
    자아의식과 자기연출
    목동
  2. 2007/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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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동
  3. 2007/05/15
    열심히 자라는 아이처럼 거룩함에 이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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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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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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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의 치유와 내면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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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퓨리탄들의 경건과 특성
    목동
  8. 2007/04/28
    영적성장에 대한 도전
    목동
  9. 2007/04/21
    박스터의 목양신학(1)
    목동
  10. 2007/04/21
    박스터의 목양신학(2)
    목동

자아의식과 자기연출

자기자신에 대한 자아의 표현나 행동표출은 자아에 대한 이해에서 근거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는 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 나아가 매일 살아가면서 표현하는 자아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기 실체의 방향타의 역활을 하며 자기성취의 결과를 이루어 간다.

자신을 표현하는 자아의 실체는 무엇인가? 자아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나,
자아의 영향력에 대한 이해는 어떤가?
이런 자아에 대한 사실이나 현상등을 이해하면
자신을 바로 알고 자신을 개선하며 자기발전을 이루어 갈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자라오는 과정안에서 자신을 형성하며,
자기 자아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다.
자아의 이해하는 수준과 판단하는 능력도 나이가 먹으며,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지식을 통하여 건전한 이성의 판단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아표현에 있어 미숙하거나 모호하지 않고
자신의 성장하고 성숙한 자아의 연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자아에 대한 깨달음은 중요한 인간의 자기발견이며 자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불교의 불자가 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통한 득도를 했다거나,
혹은 데카르트와 같이 철학하는 자신을 통해
인간속에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등은
인간의 자아의식에 눈을 뜨는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안에 있는 자기의지의 표현이나 자기연출을 자기(자아)를 통해 나타낸다.

그 자신안에 있는 자아의 종류에는 특히 신앙인의 세계에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의 새자아와 옛자아의 구분이 있고,
자기 성화의 단계에서는 실질적인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등 자신의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표현한다.

또한 사람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중적인 표현양식이나
이율배반적인 모습의 참자아와 거짓자아의 현상들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신안에 있는 거짓된 자아의 영향으로 인하여 혼란되며,
자기기만에 빠지기도 한다.
거짓된 자아위에 세운 지식이나 자기연출등은
마치 사상누각의 건축물처럼 밑바진 독에 물뿌기식으로
자신의 건설적인 자아표현이나 연출에 장애를 가져오며,
자아표현의 헛된 망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앙의 자아의식은 자신속에 있는
자기의 이런 두자아의 모습의 상태를 잘 분별을 하여
건강한 자아형성이나 표현을 이루어 낸다.

대표적인 자신의 자아의 방향성은 두가지로 대변할수 있다.
하나는 영의 사람으로 나가는 자아의 성향은 영적인 기질로,
인간의 깊은 곳에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영적인 존재와의 소통과 교제를 가능케 하며,
그 영적인 자아는 영의 양식을 먹으며 성장한다.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그로 영양공급을 통한
영성의 질과 양의 성장과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의 성품개발을 이루어 간다.

육적인 자아는 육의 사람으로 육의 양식(세상(일시적인)의 추구,
본능적인 욕구, 옛사람의 기질의 죄의 성향)등을 먹는다.
대체로 그 육의 자아는 인간본능의 육체의 욕구를 좇아가 욕망이 추구하는 바를 따른다.
더나아가 육의 자아는 자신의 형성의 배경이 된 비롯된다.
혈통이나 조상적인 경향, 부모들의 기질과
세계관의 영향과 자라면서 경험되어진 교육적인 습득으로 인한 자연적인 본성형성을 이룬다.
또한 죄의 본성아래에 있는 인간의 육적인 상태는
인간성품의 쓴뿌리(부정적인 관점, 상처난 자아관, 왜곡된 판단등)에 뿌리를 두고,
그릇된 기질이나 혹은 자신을 오도하는 어둠의 영향을 받는 곳이다.

사람의 자아는 영혼과 육체의 상관관계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고 인생을 주장한다.
자아는 자기의지의 표현이다. 자아는 인생방향의 키를 갖고서, 사람들을 주장한다.
그런데 자아가 왜곡된 상태로 있는 경우나, 병든 자아도 생각해볼수 있다.
병들고 왜곡된 자아는 자신을 표현하고, 연출할 때에 문제를 일으키고,
그릇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갈 것이다.

영혼은 영과 혼의 관계를 통해, 영이 정신세계를 인도하며,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교제하는 매체로서
인간의 다른 부분인 육을 지배를 할때에
질서있고 조화있는 인간의 자아관을 형성하고 올바른 자아표현을 할수 있으며,
자기성취를 위한 자아발전을 이루어 간다.

신앙안에서 인간이 표현하는 자아의 표현방식은 다음과 같다.
자기자신에 대해 먼저 의식하는 자아를 생각한다.
의식하는 자아는 자아의 자기 깨어남을 의미하며,
자아에 눈을 뜬 상태에서 자기를 인도하는 방향을 바르게 잡아갈수 있다.
그 의식하는 자아는 영적인 거듭남에서 자신의 영의식을 갖게 되지만,
항상 자신의 의식활동에서 그 영의 의식을 좇아가지 않고,
자주 육의 내재적인 자신의 불완전한 자아의식으로 자기를 연출하며,
때로는 혼돈과 고뇌에 쌓이기도 한다.

다음에는 신앙안에서 판단하는 자아를 생각한다.
신앙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자아는 자기가 받은
신앙적인 정보에 대한 판단에 의해 옳고 그릇된 것을 분별하며,
선과 악을 구별하고, 그리고 신앙이란 인간의 이상적인 상태를 지향하는 가치관으로
사람들은 신앙안에서 자신의 세계관이 그릇되거나 왜곡되지 않는 한
세상사람들의 상식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보편적이고 타당성이 있는 판단을 내린다.

다음단계에서는 신앙안에서 결단하는 자아를 생각한다.
믿음의 눈을 통해 모든 사물이나 사건을 보고 판단하고 결단하는데는
신앙의식하는 자아를 통해 형성된 세계관과 가치관을 통해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해 성경적인 견해에 의한 올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올바른 자기결단을 통해 결국
의미있는(신앙의 가치연출을 위한) 자기행동으로 연결되어,
자신의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의 삶에
충실한(신앙을 갖지 않고서는 충실한 인생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앙은 사람들의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가치기준을 갖지 않으면 가치판단의 혼돈이나
가치결정의 모호함에 빠짐) 열매맺는 행동하는 자신을 연출한다.

마지막으로 신앙인의 행동하는 자아를 생각한다.
그 행동하는 자아는 영적인 의식(사람에게 약간의 요구와
부담감이 주는 긴박한 의식)속에서
판단하고 있는 내용을 무시하지 않고
혹은 자신이 신앙안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영적인 일을 게으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신앙의 동기를 통해 주는 행동방식에 의해
자기 성취를 주는 직접행동으로 나타내게 된다.
그런 행동하는 자아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후회없이 할수 있는 결과를 나으며,
자신이 할수 있는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열매를 낳는다.

이렇게 신앙하는 의식의 자아를 좇아 살아가면,
결국 인생의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판단앞에서
자신이 의식하고 판단하고 결단하고 행동하여
온 모든 자아연출에 대해 인정받는 은총을 얻게 된다.
인생의 모든 일에 있어 자아표현(연출)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데 있어
근본적인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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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가운데에 자라는 믿음

데살로니가후서 1:3-12

3.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 대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점점 크게 자라고
여러분이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이 온갖 박해와 고난을 참고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일을 하나님이 여러 교회에서 자랑합니다.
5.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옳다는 증거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알맞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여러분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6.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므로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으로 갚아
주시고
7. 고난을 겪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평안히 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그의 능력있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8.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우리 주 예수님께 대한
기쁜 소식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실 것입니다.
9. 그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고 주님앞에서 쫓겨나 그의 능력있는 영광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10. 그날에 주님이 오셔서 모든 성도들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것이며
여러분도 우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므로 그 성도들 가운데 포함될
것입니다.
1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적합한 사람으로 여기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한 목적과 믿음의 일을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2. 그것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을 통해 크리스챤들 자신의 믿음을 자라게 한다.
고로 그들은 고통받는 현실에 대해 낙심하지 말고,
그 고난을 감수하며, 보다 나은 자신의 내일을 만들어 가게 할 것이다.

고진감래라는 말은 고난스럽고 힘든 일 다음에는 반드시 좋은 일,
달콤한 유익하고 축복된 일들이 다가온다는 의미이다.
인생의 고난을 겪으며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한 도전과 어려운 과업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기 세움이나 성장에 있어 다른 이들보다
더 강한 자기정체감을 갖고 있으며,
다가오는 미래의 어떤 일에도 용감히 대처해 갈수 있다.

고난당하는 과정을 통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믿음은 성장한다.
그리고 그 믿음을 소유한 영혼들을 돕는 일은
그들의 믿음을 키우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그 영혼사역에 있어서, 사역자가 교우들을 위해
항상 그들의 영혼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앞에서 살것은
그의 사역을 통해 귀한영혼들의 추수와 열매맺음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다.
사역자의 영혼사역에 대한 자세는 사역의 질을 만들어 간다.
사역자의 열정과 정성을 통한 사역을 통해 사람의 심령에 접근하여,
그들의 영혼을 돕는 일들을 수행할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영혼에 대한 사역에 대해서도
자신의 영혼에 대한 태도(진지함, 열정혹은 영혼의 가치에 대해 깨어있음의 의식)에 따라
그의 영혼이 살든지 죽든지 혹은 병들든지,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사역에 임하는 사역자의 자세는
이렇듯 사역을 통해 자신이나 타인에게 중대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영혼을 위한 사역은 영혼들의 믿음을 통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 믿음은 어디서 오며,
그것은 어떻게 자라는가?
그 믿음은 영혼에 양식이 되며,
영혼을 가진 사람과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이해와 신뢰심을 심는 말씀을 통해 오게 된다.

그 믿음이 자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믿음이 자라도록 하려면,
그 믿음의 생명력을 유지함이 필요할 것이다.
믿음의 생명력은 믿음의 적응력과 창조력이 함께 어울러져,
그 믿음이 깊이 사람들 속에 뿌리를 내려,
그들의 생활에서 영향력을 나타내게 될때에 그들의 믿음은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 믿음을 갖기 위해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믿음의 역사에 순응하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따라 경험하는 자기헌신이나 희생적인 수고가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성장을 위한 노력은
지속적인 영적생활:자신의 영혼을 키우고 먹이는 것:
말씀의 섭취와 영혼의 호흡(기도)과 영혼의 운동(믿음의 자기증거)등을 추구하는 것일 것이다.

영혼을 맡은 사역자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 해야 할일은 무엇인가?
즉 그는 그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의 수고와 영혼을 움직이고 감동케 하는 사랑의 헌신과
영혼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력을 줄수 있는
열정적인 가르침의 노력등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의 영혼을 돕는 신앙에는 여러종류나, 여러 스타일의 신앙이 있지만,
가장 생명력이 있으며, 살아있는 믿음의 실체는
고난과 박해가운데에서 지켜가는 순교적인 신앙일 것이다.
지금도, 세계 여러나라에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며,
기독교신앙을 가지는 것을 법으로 금하는 나라들이 있다.
그런 어려운 조건하에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의 믿음은
생명이상의 고귀한 신앙의 숨결이 있다.
신앙은 고난가운데에 고귀한 가치를 드러낸다.

고난을 참고 견딘 믿음은 고난을 통한 시련을 겪은
마음의 단련으로 금보다 더 귀한 정결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
믿음을 지키려고 할때에 어려움이 오는 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하나님앞에서 영적으로 훈련을 받는 길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
고난은 신앙을 세련되게 하며, 강화시키며, 성장하게 하며,
자신의 안목의 차원이나 깊이를 넓혀준다.

예수 이름때문에 받는 고난은 자랑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현재의 자신의 영성을 높이며, 자신의 신앙의 정체감을 강화시켜,
신앙의 가치와 효력를 높여준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고난의 흔적이 주님앞에서 자신의 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은 것은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한 위함이며,
자신을 단련하는 시련과 훈련의 기회로 여기게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기에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받을 엄정한 심판의 원인을 제공하게 한다.
그러나 고난을 감당하는
주의 자녀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게하는 영광의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신의 믿음을 강화케하는 고난의 과정과
자신의 성품을 단련하는 시련을 겪는 통과를 거치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훈련된 사람들,특히 고난을 통해 이들이 들어가게 된다.
그들이 받은 고귀한 사명과 영광된 미래의 기업을 위해
현재의 당하는 어려움과 고난은 그들을 더욱 귀한 존재로 세우게 하며,
하나님 나라의 귀하고 좋은 것들을 받기게 부족함이 없는 자들로 만들어 준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공평하게 대하신다.
그는 현재일이나 장래일의 이루어 질 일 가운데에 사람들을 택하며,
혹은 분별하여, 사람들이 행한 대로 공정하게 심판을 행하시며, 상급을 내려주신다.
그의 자녀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을 끼친 자들을 결코 가만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상응하는 형벌과 고통으로 댓가를 치루게 하신다.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언제나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것을 이길 힘을 주시며, 그것을 극복할 만한 힘이나 노하우의 지혜를 주신다.
그후에 또한 고난 뒤에 얻는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평안과
장차 들어갈 고난을 겪는 이들이 얻을 영광에 이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은총을 입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신 주로,
그는 갖은 수모와 고난을 당하시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희생당하시므로,
고난당하는 자의 모델이 되셨다.
그는 고난 당하는 모든 이들을 이해하며,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과 그들을 이끌어 내시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며,
결국에는 그들을 영광의 자리로 올리실 것이다.
그 주님은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상급을 주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에는 영광의 주로 임하시며,
그를 호위하는 많은 권능있는 천사들이 함께 할 것이다.

주 예수의 재림의 날은 모든 일들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때인고로,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게 되며,
하나님앞에서 그분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인생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그를 준비하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고 산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으며,
주 예수의 전파되어진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메시지를 거부한 인생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근거가 없어,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시간은 영원에 속하게 되며,
인간의 모든 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나, 모든 것의 시시비비를 가려,
심판의 저울이 모든 인생에 적용이 된다.

모든 피조물이 다 창조주에게 나왔으나,
그들의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을 거부한 인생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영원한 고통의 벌을 받아,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은총을 받는 것에서 박탈당하여,
영원한 감옥의 형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를 인정하고 그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찬란한 영광의 자리에 초청을 받으며,
그가 준비하신 모든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

주님의 날이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며,
주님과 성도들이 함께 하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때에 주님은 그의 택함입은 성도들로 부터 영광을 받으시며,
세상에서 올곧은 신앙을 지켜온 그의 백성들의 찬양을 받으신다.
그 주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무리가 되어
거룩하신 주님에게 붙어있는 사람들로 그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여,
그들의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현재 그의 성도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그 말씀의 증거를 믿어,
그 말씀과 함께 삶의 운명을 함께 하는 그들이 아닌가?

성도들을 택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이
그들을 온전한 그의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
주님은 마련하신 은혜와 은사의 부르심을 통하여 이루어 가신다.
그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할수 없는
성도들의 영적생활[의인의 상태유지:
날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의 공로(주님의 의의 전가)에 힘입어
주님으로부터 용서와 의의 인정을 받는다.
성화의 삶: 그의 거룩하신 영의 도움을 힘입어
날마다 거룩함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이루어 가는 은혜를 입는다 ]을 가능하게 한다.

더 나아가 그분이 그들에게 주시는 능력과 영향력의 은사들은
그분의 영광의 나타내심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자유롭게 공급이 되어진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사역을 온전하게 하며,
또한 사역의 열매를 맺게 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도구들로 쓰여진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성도들의 온전함과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지향의 삶을 가능하게 하며,
그리고 성도들 자신이나 사역자들의 기도의 협력으로 인하여
언제나 그분의 의도를 따라 살아갈수 있게하는 능력을 힘입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약속과 축복이 보장된 것으로
주님의 자녀들이 기도의 응답이나 효과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그들의 사역에 만족할 만한 성취와 업적을 이룬다.
그래서 그 기도는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고난가운데에 자라는 믿음도
그 고난을 이기려는 강한 의지와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과
그분의 능력을 간구하는 가운데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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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자라는 아이처럼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에 대한 묵상

칭의(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통해
죄인들을 의인으로 여기는 진리의 도)의 의미를 깨달은 날이
자신에게 영적인 생일날이라면,
성화의 과정을 터득하는 시기는 마치 첫 돌맞은 아이가
혈기왕성한 성장을 보여주어
이제 부모님들앞에서 열심히 자라가,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듯,
하나님앞에서 주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변화혹은
개선이나 완성의 사명을 향해,
한걸음씩 그의 발자취를 흠모하며,
그분의 분량까지 나가는 도전적인 거룩한 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성화의 길 그 끝에는 그분과 함께 누릴 영광스러운 미래가 놓여있다.
거룩한 무리들이 도달하여 들어갈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라며,
날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화는 자신속에 배태되어 있는 생명의 씨인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자신의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라 할수 있다.

요즘 나는 기도하는 시간을 갖으면서,
자신의 변화되어가는 성화의 과정이야말로
자신의 임무중에 가장 중요한 업무라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의 어떤 이루어 야 할 업적이나 맡은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자신을 만들어가는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앞에서 평생 자신이 이루어 가야 하는 숭고한 자기 사명이다.

하늘의 생명(주님이 주신 영생)으로 부터 거듭난 자신은 하나님께 구별된 자로,
날마다 죄로부터 벗어나는 회개의 과정을 지내며,
마음을 새롭게하는 말씀의 새창조의 역사에 따라 가는 것이리라.

성화는 초월적인 주님의 사역이다.
사람 자신안에 새사람들을 만들어가는 재창조의 사역이다.
구원된 자신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성품을 이루어 간다.

마음안에 아직도 나는 변화되어야 하는 많은 불순물이 있다.
질투, 시기, 미움, 분노, 걱정등,
바람잘낫없는 세월의 풍상에서 자신의 찟겨지고 상한 모습을 돌아보면,
아직도 하는 생각이 든다.
덜 되어있는 자신의 상태는 생의 과정을 사는 동안은
계속해서 자기변화를 일구어야 할 것이다.

날마다 새롭게 갱신하며 재창조하는 주님의 영적세계안에서
자신의 영적인 변화를 통한 신의 고상한 성품을 점점 닮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날마다 새로와지는 자신이 되기를 소망한다.

성화를 이루는 일에 방해되는 것은
도덕적이고 형식적인 종교행위와 미신적인 요소들에 휩싸여있으며,
그리고 왜곡된 인간적인 신앙인의 모습들이다.
종교인들의 비신앙적인 모습속에서
기독교의 신앙인에 대한 자기회의와 그들의 영적인 퇴보를 극복케하는
새롭게 도전되는 성화의 길을 가련다.

자신의 거룩한 변화의 과정의 사명의 길에서
생명없는 형식적인 종교의 너울들을 벗고,
영성의 알맹이 있는 생명있는 신앙인으로 새롭게 자라갈 것을 생각해본다.

신앙인의 비신앙적인 요소(강신술, 영육분리사상, 변질된 예언및
저급한 영성화에 의한 영매숭배주의,
점괘와 기복만능의 비역사성등)들가운데에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신앙의 변질되고 왜곡된 모습에서
신앙의 맹점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인간적인 종교관(공적주의, 업적주의, 형식주의등)에서
영적인 불순물들을 극복하고
자신의 건강한 영성화를 추구하여
자기사명의 성화를 이루는 일을 위해
이런 장애되는 요소들을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속에 말씀으로의 구체화의 성취를 이루려고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깊이 생각, 또 생각하는, 그리고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는)하여,
그 말씀의 능력과 영향력안에 거하기를 힘쓴다.
자신에게 새겨진 그 말씀이 내게 가까와
그 주어진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말씀과 더불어 주시는 거룩함의 은혜를 통해
성스럽게 변화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성품을 본받으려고, 주님을 묵상하는 중에
그의 흘리신 보혈이 자신의 죄를 깨끗케 하며,
그리고 모든 부정과 불의에서 자신을 구원해주는
죄의 고백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성결의 은총을 받아,
정화된 영성화에 이르려고 한다.

내안에 오신 성령은 날마다 탄식하듯
내영혼이 거룩함의 성품을 닮아가려는 꺼지지 않는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계속해서 내안에서 타오르는 불꽃같은 성령을 통한
거룩함의 과정은 그의 내주와 인도와 충만으로
자신의 점점 그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감을 맛볼수 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은 날마다 주님을 배우며,
주님과 사귀며,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자신이
되어감을 바라며 영적인 땀을 흘리기를 힘쓴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접하는 영적세계의 은혜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자신의 영적인 센스의식이나,
영적인 민감한 기질이 그분의 뜻안에서
그의 인도를 받아 그의 길을 좇아 가기를 힘쓴다.
내 뜻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기도의 노력은
어린아이같은 생각이나 바램에서
점차로 자신의 바램이나 생각이 점점 변화되어,
자신의 뜻이 주님에게 맞추어가는 성장하는 장성인로 변해간다.

무수히 변개되는 자신의 기도제목과
고쳐지는 기도의 바램들이 어느 덧 주님의 뜻을 품는 자로 변화되어
자신의 영성을 강화하며,
자신안에 자라는 그의 거룩함의 성품을 이루어 간다.

귀중한 기도의 파트너나 혹은 영적인 동지들을 만나,
그들의 영성이나 감화력을 배우며,
그들의 삶의 향취를 맡아본다.

그리고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영성의 삶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살아있는 고전의 저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영성과 신앙을 배운다.

예를 들어, 존 번연의 주님의 사랑의 깨달음의 깊이를 보며,
영적인 순례의 길을 발견하고,
존 뉴톤의 주님의 은혜의 폭넓은 영역을 밟아보며
그들의 신앙의 깊이를 맛보고,
리차드 박스터의 영적인 영혼의식의 탁월함에
자신의 영성의 질을 높이는 계기로 삼는다.

이렇듯 먼저 이 세상에 살아간 믿음의 많은 선진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들이 쌓은 영적인 상아탑을 바라보며,
그들이 보여준 신앙의 아름다운 흔적을 좇아
그들과 닮은 꼴로 살려는 의지가운데에
성화하는 믿음의 순결함으로의 승화는 계속 전진되리라.

자신의 거룩한 성품의 개발은 자기의 상한 조각난 모난 성품이라도,
그안에서 주님의 거룩케하심을 바라보며,
그분의 은혜의 역사안에 있는 평생을 통해
자신의 못난 것이라도 귀한 조각품으로 빚어 가시는 창조주의 솜씨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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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인으로 살아가기

칭의에 대한 묵상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안에서 살기로 다짐하는 성도들에게 칭의는
하나님의 자유롭게 베푸시는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믿은 자신에게 주신 그 선물은 내가 예수안에 있을 때에 시작이 되었다.
고로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죄의 용서를 받은 의인이 된 죄인으로 살아간다.
자신은 본성으로 죄를 짓지만,
그의 공로의 은혜로 죄가 용서받으며,
그 용서안에 주시는 의인의 칭호의 특혜를 받으며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그 공로를 믿고 따르는 죄인들을 의인으로 여기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죄인이 자신이 비록 본성은 타락한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로 의롭게 여기심을 받는 은총을 힘입어,
의인의 반열에 세움을 입었다.

이제는 자신은 의인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하나님의 어엿삐 보시는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자아를 온전한 사람이라 여긴다.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 태어난 의인이다.
그리스도의 의의 빛을 받은 죄인은
그와 같이 의인으로 빛된 삶을 살아간다.

칭의는 법적인 용어로 재판정에서 쓰는 것으로
법을 어긴 죄인들을 사면하여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법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사형받은 죄인으로 형벌을 받으셨다.
고로 나는 형벌받는 죄인의 신분에서 형벌을 면한 사면받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 죄인으로 형벌을 받으시므로
하나님은 그의 공로를 통해 죄인들을 용서하여,
의인으로 여기는 복을 예수믿은 내가 받은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고, 그의 죄성이 그대로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의롭게 여기는 행위로 아무리 악한자라도,
그가 예수안에 믿음을 견지하면,
혹은 그의 믿음은 연약할 지라도
믿음의 근거를 통해 죄인들을 하나님은 의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의 효력의 근거는 그분의 칭의의 선언의 약속위에 있다.
그 약속은 자신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 약속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의 선언과 그 칭의의 행위는
절대자 하나님의 법을 통해 이루어 지기 때문에,
한번 의롭게 여김을 받은 죄인들을
결코 그의 의롭게 여겨주심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움을 여김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들로,
그들 속에 하나님의 의로움을 심어,
그의 의로움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분의 성품안에 있는 그분의 거룩하심안에서
사랑, 기쁨, 평안, 인내, 친절, 선, 신실함,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어 간다.

하나님의 의롭게 여기심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달로 죄인들에게 베푼 것으로
하나님의 의의 수준에 도달하게 한다.

칭의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심에 있으며,
또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들을 영광을 주기 위함이다.
칭의는 받은 자들에게 그들의 양심안에 의의 평안을 맛보며,
성화를 이루어가는 근거가 된다.

자신안에 있는 자아의 불안과 상태의 부조화와
신분에 대한 불합리의 모순의 세계는 사라지고,
그분안에 있는 평안과 상태의 조화와
자기 신분에 대한 확신의 세계안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신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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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묵상

사람의 주된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영광을 돌리는 일은 두가지로 생각해보는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그의 속성으로서의 영광의 측면이 있고,
신성으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가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이나 왕은 그들이 법적인 기간동안에 대통령으로서 영광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 자신이 영광의 존재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다른 존재에게 주지 않으며,
영광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돌려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 그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즉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을 높여 드린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는 4가지 측면이 있다
(appreciation, adoration, affection, and subjection)

먼저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인식적인 태도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인간의 숭고한 생각안에서 하나님을 탁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분을 경배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에는 두요소를 생각해볼수 있다.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존경이며, 그리고 그분을 통치자(왕)로 경배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하나님께 대한 감성적인 표현으로 온 마음을 다해,
그리고 온전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거룩한 사랑으로 대한다.
그럴때에 인간은 가장 고귀한 감정의 소유자가 된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 복종하므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을 통해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느 것이다.

그러면 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가?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를 있게하신 분이며,
그를 영화롭게하는 목적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물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만물가운데에서 영광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고유한 가치이며
하나님의 탁월함의 존재의 양식이다.
또한 창조물들은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며,
당연히 그분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드리는 것이
그의 피조물로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영광을 돌릴수 있는가?
1. 사람이 순수하게 자신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을때에
그분을 영화롭게 할수 있다
(여기 그 목적하는 바의 3가지우리의 인식을 가질수 있다.
1. 자신의 삶을 통해 무엇보다 우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식.
2 . 비록 고난이 있어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는 인식.
3.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자질이나, 재능을 통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하려는 의지의 인식)

2.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3. 사람은 자신이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에 있어서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영광을 흠모하므로써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5. 사람이 신실해지므로 즉 인생에서 선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
6.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만족해 하는 것으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7.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8.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으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9. 인생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10. 하나님의 진리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것을 통해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 드린다.
11.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
12.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열정을 갖고 살므로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
13. 우리의 일상의 모든 일(시민으로서, 혹은 사람으로서 하는 일들)에서
하나님에게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 그분을 통해 활동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4.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므로 (전도) 그분을 영화롭게한다.
15.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한다.
16.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17. 우리의 거룩한 생활 (구별된 태도) 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Thomas Watson의 “A Body of Divinity”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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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치유와 내면의 변화

누가 24:13-35(21후-28 빠짐)

13. 바로 그날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11킬로미터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면서.
14.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동행하였다.
16.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17. 예수님이 그들에게 “너희가 길을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멈춰섰다.
18. 그때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최근에 일어난 일을 모르고 계십니까?”하였다.
19. 그래서 예수님이 “무슨 일이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 나사렛 예수님에 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앞에서 행동이나 말씀에 능력있는 예언자였습니다.”
20.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주어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해 주실 분이라고 잔뜩 기대했었는데 말입니다.
29. 그들이 강력하게 권하며 “저녁 때가 되어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묵었다가 가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묵으려고 따라 들어갔다.
30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자
31.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그러자 예수님은 순식간에
사라져 보이지 않으셨다.
32. 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말씀을 설명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속에서 뜨겁지 않더냐?”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날은 주님이 부활하신날,
그 두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마 주님을 따라 나섰던 이들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처형당하시자,
실의와 좌절속에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최근에 일어난 일, 소문이나 뉴스는 사람들사이에 퍼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일은 그들에게 주된 관심이며,
자신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이다.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이 었을 것이다.
십자가 죽음의 처형의 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일,
십자가에서 처형받는 일등,
예수님의 처형소식을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일들을 이야기하며,
사건에 대한 문제들을 토론하며, 열띤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가?
혹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그때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

사람들의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가?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먹고 사는 문제인가 아니면, 자녀들 문제는
혹은 부부간의 문제등, 가족들의 이야기인가?
사업의 문제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어느 일에 흥미를 느끼는 가?
저마다 이야기의 주제는 다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일에 있어 중심이다.
그는 모든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며,
그는 모든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주님이다.
그는 모든 삶의 문제에 있어 중심에서
그 문제들을 바라보며, 해결하신다.
자녀의 학업문제에 있어서도
그가 문제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부활예수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부활예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는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의 부활은 보통사람의 육체를 입음으로
그의 몸은 정상적인 육체를 갖고 있으셨다.
동시에 그의 몸은 영광을 입은 몸체이다.

예수님은 오직 그를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주님으로 나타나신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한낮 스승정도로 생각하기도 하고,
그는 위대한 철학가나 도덕의 교훈가로 생각하지만,
그는 믿는 이에게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신들을 구원하신 능력의 주이시다.
생명과 죽음그리고 사람들의 화와 복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고민하고 걱정하는 문제의 핵심으로 인도한다.
질문법은 답변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그 질문에서 대답을 얻는 것을 전제하고,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관심사가 지금 무엇인가?

관심사는 자신의 인생의 중심에 무엇을 두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 두제자는 자신들의 관심이 온통 십자가의 예수와 그의 부활이야기에 있다.
자신들이 섬기고 따랐던 스승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삶이 온통, 그분에게 맞추어 져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구심점을 잃고, 방황을 하고 있다.
자신들의 관심의 타겟이 사라지자
그들은 절망스러운 인생의 기로에 서있다.
슬픔이 그들의 마음을 누르고 있다.

글로바는 누구일까? 그의 이름이 거명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중에서,
제자들 다음으로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인 것 같다.
글로바는 예수님에게 최근에 소문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문제와 그것의 소문에 대한 답답함으로 질문을 하며 의아해 하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하는 일로 인해 그들의 삶을 볼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세상뉴스에 관심이 많다.
세상의 뉴스는 인생들을 세상으로 관심을 끌게 하여,
그안에서 분주하게 하며, 그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심을 갖게 한다.
슬픔이나, 혹은 안타까움이나, 범죄의 일이나, 고통의 소식들이 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의 뉴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흥미는 그의 나라의 전달이나 실현에 있다.
하늘뉴스은 소망과 기쁨이 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다.
상담가의 질문은 피상담자로 하여금 그이슈에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상담의 재료로 삼게 된다.
그리고 함께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감정이입의 능력으로)
피상담자의 문제를 해결해간다.
많은 경우에 피상담자 자신에게 문제의 해결이 있다.

그들이 보는 예수관은 그들은 스승 예수를
아직은 사람의 지도자나, 선생으로 생각한다.
세상사람들도 예수를 보는 관점에 있어 예언자나,
애국의 지도자로 본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예수님을 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그들의 신앙, 세계관, 처세술이 달라져야 한다.

동족들에 의해 팔려가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모략이나 질투로 인하여
로마의 총독에게 사형판결을 받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다.
이런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인간들의 의도나,
반응이 악의적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죄악이었다.

이스라엘 인들은 당시에 나라잃은 슬픔과 고난의 세월에서 나라의 독립이나
과거에 나라와 민족의 영광을 얻었던 날들을 그리워하며,
그런 날들이 다시 오기를 고대한다.
메시야를 기다림은 그런 나라의 복을 기대하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민족의 해방이나 독립에 목말라 하였다.
예수께서 유대나라에 나타나셨을때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나라의 장래의 희망을 보고 크나큰 기대를 가졌었다.
그러나 그 예수는 오히려 비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자신들앞에서 죽어갔으니.
그들의 실망이나 좌절은 큰 것이었다.
특히 그를 따라 나섰던 따르는 무리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두제자도 그 일로 인하여 깊은 상심과 좌절속에 방황하며,
미래에 대한 암담한 마음을 가눌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일로 인하여 평소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치고 전하셨던
부활의 기대는 전혀 갖지를 않았다.

예수님과 동행하던 그 두제자는 예수님을 함께 동행하기로 생각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의 요청은 예수님에게 받아들여져,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묵으려고 따라 가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영접하고 모시는 인생들에게 오셔서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지상의 예수는 이제 부활하셔서 생명예수가 되어
온 지구에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의 생애속으로 들어 가시며,
그들과 동행하는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누구나 예수님을 통해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간다.
그 시민으로 살기위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애 한복판으로 그를 초청하여 그를 모시고 동행하며 살아간다.

예수님은 부활이후에,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빵을 떼시며,
상징적으로 그의 몸을 생각하는 애찬을 나누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우리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그 구원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그분의 몸의 희생을 기념하는 주님의 성찬에 참여한다.
예수님의 성찬은 예수님의 몸을 기념하면서
그분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미리 맛보는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들 두사람과 함께 어느 하숙하는 집
식당에 함께 앉아서 음식을 나누게 되었다.
타인과의 음식을 나눔은 대화를
한결 부드럽게 하며 깊은 교제가운데로 인도한다.

그들의 식탁에서의 대화와 교제는 예수님의 성찬의 은총으로 나가게 하였다.
예수님이 빵을 들고 과거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앞으로 자신의 몸을
죽음으로 희생제물로 드리는 때를 기다리며, 성찬을 나누었지만
이제는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죄의 희생제사의 제물이 되어,
죽음을 맛보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님으로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눈다.
이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성찬의 식탁은 단순한 애찬이 아니라
주님의 몸을 나누는 기념을 통한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과 함께 하나됨을 경험하며 비로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안에서 주 예수에게 붙은 자들로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한 운명의 공동체가 되어
장차 주님이 누릴영광의 축복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주님의 성찬은 자신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몸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세계, 그분이 영원히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여,
그나라에서 얻는 영생과 영광의 축복을 맛보게 되었다.
성찬을 대할 때 마다 이런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다.
주님의 성찬을 맞이할 때 마다 자신안에 있는 주님의 몸을 경험한다.
주님의 몸은 자신의 몸안에서 녹아들어
예수를 믿는 자신이 그 분의 영생의 공동체의 일부분임을 알게 하며,
그분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를 경험한다.

왜 빵을 받아 먹었는데, 그들의 눈이 열렸을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음식을 먹으면 몸이 힘을 얻는 다.
배고프면 눈이 감긴다.
주님의 몸은 썩어질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생의 양식이며,
생명의 음식이다. 그들이 주님이 주는 빵을 받아 먹을 때에,
그들은 옛날 주님이 자신들에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하늘의 식탁을 맛보았을때에
감격을 되살리며, 그분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그분이 바로 자신들이
애타게 사모하는 주 예수의 얼굴의 모습이 아닌가?
그제야 그들은 주 예수,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갔던 예수가 이제는 부활하여,
제자들과 어디에서나 함께하는 생명예수가 되셨다.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대로 세상 끝날까지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대로
그는 지금도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에 살아계시며, 그들과 동행하신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그들의 시야에서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 사라지셨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생명이 되신 예수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경험하였다.
그래서 그들 마음속에 계신 그분의 영이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경험을 하게 하였다.

이미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세히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세히 풀어 설명하실때에
그들의 마음에서 예수의 영의 역사가 나타나,
그들의 마음이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차디차있는 실망과 좌절의 마음이 따스한 생명의 입김으로 인하여
그들 속에서 희망과 용기와 그리고 열정의 마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성경을 읽거나 공부하거나 듣거나 할때에
그 말씀을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의 차이는 내면의 변화에서 나타난다.

사람의 두뇌를 번뜩이는 놀랍고 영향력이 있는 정보가
자신의 의식속에 뿌리를 내리면,
몸안에 있는 마음의 세계는 요동치며 감격해하는
인간의 마음을 팽창케하고 감격으로 벅차오르게 하는 감성의 시스템이 있다.
그 놀라운 정보의 영향력은 마음전체를
뒤흔들어 놓는 의식과 감각의 종합적인 영향으로
마음을 지배하여, 그 마음 전체에
강력한 천둥이나 번개의 충격과 같이 전달되어진다.

그 제자들은 마음이 뜨겁다라는 것을 인식하여,
그들의 마음이 벅차오르는,
감격적인 깨달음으로 인한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경험 하였다.
그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부흥은 자신의 심령과
삶의 현장안에서의 충격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자신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가 이루어 진다
( 예: 어거스틴의 회개하는 마음의 경험이나 존 웨슬리의 새로운 마음의 영적체험).

이렇듯 말씀을 풀어 강해로 설명하였을때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그들은 사경회의 부흥을 경험하였다.
진정한 영적인 부흥은 말씀의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말씀의 선포는 말씀을 풀어내어
그말씀이 스스로 외치는 바를 드러내는 강해설교의 힘에서 나타난다.

마음이 속에서 뜨겁다라는 경험은
여러 단계의 마음의 경험이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 사람들의 마음이 아닌가?
말씀이 마음밭에 뿌려져 마음이 변해되어가는 과정은
마치 예수님의 네가지 밭의 비유에서 사람의 마음이
사람들이 많이 다녀 땅이 굳어 있는 길가와 같은상태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무관심, 냉담, 저항감)에서
그것을 깨뜨려, 말씀의 씨앗이 내려 꼳히는 상태로 변화되어,
더나아가 마음의 돌짝밭에 있는 거친돌들(교만,고집 부정적
시각)이나 씨들의 뿌리내림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걸러 버릴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밭안에 있는 가시떨기와 같은 자신을
유혹하는 세상에 대한 애착심이나
혹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걱정이나,
자신의 본성 에서 끝임없이 나오는 근심이나, 의심,
그리고 집중력을 방해하는 온갖 찌꺼기
(이중적인 마음의 상태, 정신적인 불안등을 일시에 갈아 엎어,
말씀의 씨앗들이 떨어져 심겨지기 좋은 마음의 옥토로 변하여 가는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감추어져 있다.
자연그대로, 혹은 자신의 본성이 가는 대로 가는
인간의 마음에는 그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그 두제자에게 말씀이 열려 졌다는 강해설교자이신 예수님의 설명을 통해서,
그분의 생명있는 강해설교를 통해,
그들은 말씀이 열려지는 감격의 경험을 하였다.

그가 말씀을 풀어주니, 그들의 마음에 말씀이 착상되었으며,
말씀이 그들의 의식속에서 역사를 일으켜,
그들의 마음이 새로와 지며, 실망에서 희망으로 답답함에서 시원함으로,
냉냉한 그들의 마음이 뜨거운 생명의 열을 받아,
열정적인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렇듯 사람의 심령속에 일어나는 영적부흥은 마음에 말씀의 적용으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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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리탄들의 경건과 특성

퓨리탄들은 영적인 개인저널(영적일기, 혹은 자기고백적 신앙일기등)을 쓰며,
그리고 개인적인 자기고백을 통해 자기지식(자아인식)에 대한 마음의 사역이나
자기조사(영성실험, 테스트), 매일의 자기부족에 대한 매일의 회개,
체계적인 찬양과 기도의 생활등을 통해
그들 자신들의 영성이나 활력있는신앙을 유지한다.

경건(하나님을 닮아 세상에서 거룩한(구별된) 성품으로 살아가는 자질)은
퓨리탄들의 중심개념이다.

그들이 이해하는 경건개념에는 4가지 자질적인 측면이 있다.
1.그들의 겸손함이다. 항상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앞에서
살아가는 죄인된 인간의 개발되어진 낮아짐을 의미한다.
주님앞에 지속적인 용서받음을 구하며, 살아갈수 있다.
2. 그들의 수용성(열린태도)이다.
성경속에 발견되어진 진리들을 가르침이나 자신을 고침이나,
인도됨에 대해 열려있는 영적인 센스안에서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불만족한 어둠(신앙생활에 자신의 뜻대로 안되어,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챤들은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흔들려서는 안될 것이다)과
내면의 버림받음(신앙의 암흑기를 맞이한 것처럼
자신의 내면의 상태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느낌을 갖게 됨/
사단을 이런 상태를 조장하고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를 이간하는 것으로 이용하기도함)에 의해
훈련받음에 대한 자발적인 태도를 갖고 있으며,
행복한 섭리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장래의 영광을 위해 열매맺도록 하시며,
그들 모두(크리스챤)들을 손질하고 다듬은 단계(징계와 단련받음)에서
하나님은 때로는 부드러움보다는 거칠게 다루는 신실하시며,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선한손길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 분을 믿는 신속함(용이함)을 나타낸다.
3. 찬양하는 태도이다.
자신의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해 예배드리는 열정을 내포하며,
자신의 말과 행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일에 노력한다.
4. 에너지이다. 참된 퓨리탄을 이루는 영적인 에너지를 통해,
모든 세계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거룩하게 드러나기를 바라며,
모든 윤리적인 삶에 있어서, 불신앙적이지 않으며,
게으름이나 수동적이지 않게 살아가는 태도이다.

이것들은 퓨리탄들의 가진 신앙적인 태도들로
지속적으로 그들의 마음과 의식체계안에서 상호 작용하여,
자신들의 영성을 높이는 생활을 하였다.
그것들은 퓨리탄의 굴하지 않고, 지칠줄 모르는 내면의 비밀이다.

퓨리탄들의 특성들
1. 퓨리탄들은 위대한 사상가들이다.
그들은 주로 목사들로, 대학에서 공부하였던 뛰어난 박식가들이 많았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당시에 최고의 학문이었다.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며 언급할때에,
그들은 강렬한 사고적인(자신을 반영하여 변화케하는) 연구와
깊은 기도에서 나오는 크리스챤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과
교회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통해 신학적인 연구를 추진하였다.

2. 그들은 위대한 예배자들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위대함과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은혜에 대한 그들의 감격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태도는
넘쳐나는 예배에 대한 영성으로 발전되어,
보통 그들은 3시간이나 4시간씩을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3. 그들은 위대한 소망가들이다.
그들시대에 신앙적인 핍박이나 어려움등을 그들의 신앙적인 저술이나
혹은 설교나,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박스터의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 존 번연의 천로역정등

4. 그들은 위대한 영적인 군인들이다.
그들은 세상, 육체, 마귀에 대해 쉬임없는 불굴의 전쟁을 치루는
뛰어난 영적으로 무장한 전사들이다.
그들은 영적인 긴박감을 늦추지 않았으며,
세속의 물결을 거슬려,
당대에 있는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주는 신앙의 유산을 계승발전시켜
후대에 귀한 영적인 자산들을 남겨준 하늘나라의 군인들이다.

Packer의 "A Quest for Godliness: The Puritan Vision of the Christian Life"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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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성장에 대한 도전

베드로후서 1:3-8

3. 그리스도께서는 신적인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광과 선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분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4. 이것으로 그리스도는 아주 소중하고 중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이 약속을 통해 여러분이 세상의 파괴적인 정욕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은 최선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선을, 선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7.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8. 이런 것들은 넉넉히 갖춘다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욱 풍부해 질것입니다.
9. 그러나 이런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앞 못보는 소경이며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해진 것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거룩한 성도들(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에게는 하나의 주어진 사명이 있다.
그것은 거듭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주님앞에 설때까지
자신이 영적성장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살아있는 다는 것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계속하여 자라고 성장한다.
어른은 성장이 멈춘 상태라고 할수 있으나,
육체적인 성장은 멈추었어도,
정신적인 성장이나 영적인 성장은 계속적으로 자라가야 한다.

성장은 인간생활의 자연적인 활동이다.
성장발육이 되지 않는 것은 성장저해 증후군에 빠지며 성장하지 않고 나이만 먹어간다.
아이어른은 성장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이는 어른인데 자라지를 않아 아이의 상태의 몸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성장저해증후군은 비단 육체의 일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나 영적인 현상에도 같은 현상들이 일어난다.
영적인 성장에도 제대로 성장하지 않으면, 영적저능아의 증후군에 시달린다.
영적인 아이의 상태에서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늘 기대어 살아가는 영적인 지체아들이 있다.
특히,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가는 신앙생활에는
영적인 지체아의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들이 I.Q, E.Q, S.Q. 등 인간의 자체능력의 기능의 지수들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야 비로소 어른으로서 성숙한 사회적인 존재로 생활 할수 있다.
아이큐는 지능적인 활동으로 이성적인 기능이 자라게 된다.
이성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고능력이나, 문제해결의 능력을 개발한다.

이큐는 인간의 감성의 차원에서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을 개발하며,
인간과 인간사이에 전자파와 같이 흐르는 감정적인 흐름을 파악하여,
그 감성의 영향력을 배워가는 능력이다.
에스큐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파악하여,
사람들과의 교제나, 사회생활에 적응해가는 능력을 개발한다.

사실 가장 인간에게 중요한 능력은 Spirituality Quotient (S.Q.: 영성지수)이다.
그것은 영적인 기능의 자질로, 영적인 센스나, 영감있는 능력을 개발하며,
영적인 능력도 인간의 영적인 세계의 감지하는 능력이나,
영적인 세계와 교류하며, 현상세계에 영향을 주는
영적인 존재와의 접촉이나 교제하는 능력의 자질을 개발한다.
이 자질은 그 방향성이 중요하다(영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데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세계가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판단의 경지를 넘어가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의 부르심에 의해 택함을 입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그와 함께 신의 능력안에 참여하는 권한과 능력을 부여받는다.
크리스챤들은 그들의 성품이 인간의 성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권리를
예수, 신의 아들, 즉 하나님을 통해 얻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인간의
신의 자녀로 변화되어 가는 부름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생명이며, 그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살리는
생명을(운명적인 죽음의 세계에서 부활하는 생명을 얻는,
불안의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좌절과 절망의 상태에서 회복시켜주는) 가지고 있다.
그안에서 사람들은 생명을 발견하고 얻고,
생명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

경건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간의 가장 최고의 고상한 성품이다.
경건에의 순례는 하나님의 거룩의 속성을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인간이 도달할수 있는 신의 경지에 나가는 길의 과정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잃었던 인간의 온전한
것들(이상적이고 성장하는 자아에서 오는 믿음, 소망, 사랑등 )을 회복하는
자기 성품 개선내지는 자기 완성 개발의 지속적인 일생의 과정이다.

이렇게 사람이 자신을 개선하고 개발하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져 가는 것이 결국 자신의 자신됨의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는 인생의 일생의 과정의 결과로,
자기가 가야할 영원한 미래의 상태나 위치를 결졍해준다.
그것은 인간에게 더없는 영광이며,
자신이 도달해가는 미래에 갖추어야 하는 진정한 선한 자신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이세상에 썩어질 육신의 것에서
썩지 아니할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늘의 권한을 허락하시며,
잃어버힌 사람들의 명예와 영광을 회복시키신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죄의 후손으로 죄와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운명에서 벗어날길이 없다.
아무리 도의 철학이나 지식의 방법으로 혹은 도덕이나 수양의 능력으로
그러한 인간의 굴레(죄와 죽음의 속박)를 벗어나게 할수는 없다.

다만 그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점점 죽이며,
파괴케하는 세상의 영에 의해,
절망스런 상태에서 연명하며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런 인생은 소망도 없고, 가능성도 없는 자신안에 갇혀
절망과 탄식의 자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인간의 굴레들을 벗을 길을 마련하여 놓으셨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생들의 속박을 풀어내어,
자유롭게 하늘에의 영광에 동참하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사람들은 그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부여받아,
그안에 있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하늘의 영광에 오르게 된다.

이길은 하나님의 생명을 품고 그것을 가꾸고 성장시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라고 성장하듯,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인 생명이 자라간다.
성장의 엔진을 달고, 지속적으로 자기변화와
자기 성장을 그분(예수)의 도달한 상태에 까지 목표를 향하여 부단히 진행한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생명의 날의 풍성을 위해 열심히 주어진 일들을 하는 것이다.
그 분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는 것의 목적이 분명하고,
자신이 해야 할일에 대한 자기사명이 투철하여,
그들은 무엇이든지, 그들 자신을 통하여,
자신들을 영광스러운 자리로 초정하여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럽게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어지는 것을 원한다.

고로 그들 자신이 할일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분명하고,
그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게 된다.
하나님의 길은 차선이 아니라, 항상 최선의 길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것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하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도 당연히 최선을 향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믿음은 잃어버린 인생의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주고,
더 나아가 하나님안에 있는 인생들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고, 그를 따르고 신뢰하게하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믿음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살리고,
영화롭게 하실 하나님과의 연결고리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로 이루어졌으며,
그분이 약속하신 것들을(인간의 회복과 영광의 자리,
그리고 영생과 축복의 권한등) 바라보며,
그것들을 우리 손안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믿음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모든 일들과 경험들을 합력하여,
가장 좋은 상태의 선을 이루어 내는 것을 바라본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때에,그것을 기대하시며,
각 사람을 인도하신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선은
원래 하나님이 사람들을 지으셨을때에 보시기에 좋았던
온전하고 완벽한 상태의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사람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의 모습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선의 상태이다.

그리고 그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이상적인 선을 바라보고,
자기가 하는 일에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가려고 한다.
선을 이루어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궁구하는 여러가지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가게 된다.
그 길을 바로 가려면, 정확한 안내를 받아야 하며,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올바른 지식이 요구된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영생의 생활은 그를 알고
경험하는 지식의 성장에 따라 그분이 부여하신 생명의 풍성을 얻을 수 있다.
그 지식은 계시로 알려진 내용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그 계시의 말씀의 의미와 능력를 깨닫고 체험케 하도록 사람들에게
그 지식의 빛으로 조명해주시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다 유용한 것이 아니다.
개중에는 우리를 그릇되게 인도하는 거짓된 지식도 있으며,
사람들을 허왕되게 하는 어리석은 지식도 있으며,
지식은 지식을 추구하는 방향성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며, 어리석게도 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따라 행하는 일에는 질서가 있으며,
조절된 태도에 의해 좌우되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원자폭탄의 힘을 만들고 생산하는 과학적지식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종교성에의 인도와 안내를 받아야
파괴적이지 않고 유용하게 쓰여질수 있다.

영적생활에도 무모한 영적인 세계의 지식추구는
때로는 위험할수 도 있다 (이상한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경우나
사람의 생명에 도움이 안되고 해로움만을 주는 헛된 영적인 정보).
지식을 얻고 지혜로와 지려고 하는 인간의 시도는
원래 선악과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절제는 질서를 따라 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지식추구에는 절제를 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은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고 한다.

우리들 주변은 요즘 많은 지식이나 정보의 홍수에서 지내고 있다.
우리가 접한 지식들은 우리의 두뇌에 각인도 되기전에
새로운 지식에 의해 우리의 두뇌의 수천억의 두뇌세포에 저장되곤한다.
지식도 정제된 그리고 절제된 지식이 필요하다.
무분별한 지식추구는 사람을 혼란케하고, 피곤하게 한다.
지식이 다 좋은 아닌 것은 우리 모두가 안다.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더럽게 하는 지식도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보면, 자주 인내하기 힘든 일을 만난다.
함부로 운전하다든지, 새치기를 하는 경우, 혹은 신호위반,
그리고 다른 차량이 진로를 방해했을때에
바로 우리의 성질을 표현하여, 상대방에게 불쾌한 감정을 표하곤 한다.
그런 경우에 절제와 인내가 필요할 때가 많다.

사람을 절제하게 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은
인내를 가져야 할 일에도 잘 적응하게 한다.
인내는 절제된 사람을 통해, 모든 일에 인내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나, 일을 추진하는 것에나, 공부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사람이 자신을 통해 이루려는 업적은
인내를 갖지 않고서는 성취할수 없다.

꾸준히 착실하게 무슨일이든 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질수 있다 .
왜냐하면 힘들고 참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지의 활용을 통해 인내를 갖고서 일을 대하기 때문이다.
인내할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수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인생안에서 인내의 법을 배우고,
모든 일에 그 열매를 거둘수 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경건의 생활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믿음을 이끌어주는 지식도 가져야 하며,
선을 이루고저 하는 향한 열정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조절할줄하는 절제와 인내하며,
일을 성취할수 있을때에 참 경건에 이를수 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면
신앙인의 성품속에는 이런 여러요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사람다와 질수 있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때에,
사람의 생명과 인격의 존귀함을 알고
한 사람 한사람의 가치성을 알고, 사람들을 정중히 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누구나
자신안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간의 속성은
가장 인간을 고상하게 하며, 가치있고 품위있게 한다.

이런 영적인 성품들을 사람들 속에 충분히 개발하면,
그 성품들은 더 자신을 성장하고 성숙시키는 길로 나가게 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자기 이상이 있으며, 자기 목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신앙인의 믿음의 주이며,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그는 온 세상인들의 흠모의 대상이다.

요즘은 세상에서는 신문지상을 통해 접하는 뉴스를 통해,
윤리나 도덕의 능력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며,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옳은 사람이 되라는 도덕군자들의 철학이나
인생의 가르침의 지식에 대한 능력을 상실해 가는 세태에 살고 있다.

사람이 사람이 되신 예수를 항상 생각하고 바라보면,
그는 자기 자신을 참 인간됨을 만들어 갈수 있으며,
그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의 참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세상에 많은 지식중에 자신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지식은
예수를 알아가는 지식이다.
예수는 만물의 주인이며, 만물의 중심이며, 모든 인생들의 중심에 존재하신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오며,
우리의 가치를 높이며, 나중에는
결국 우리 자신들을 영광스럽게 할 놀라운 정보인 것이다.

인생의 방향성을(빛으로 나아갈것인지, 아니면,
어둠안에 그대로 주저 앉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회색지대에 머물러 살고 싶은지, 즉 대략 3가지 갈랫길이
인생들 앞에 놓여있는 것같다) 아직 설정하지 못하고,
인생의 시작과 끝과 과정을 모르고,
돌고 돌아가는 지구처럼, 계속하여 방향도 없도 진행도 없이 살아간다면,
아직 그들은 자신의 위치와 방향성 설정에 고심을 해야 할 것 같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그들이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도록 의지할수 있기 때문이다.

빛이 비치는 밝은 세계로 나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둠을 그리워하며, 회색지대에 빛과 어둠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경우는
자신의 영적인 현주소(하늘에 속했는지 아니면 땅에 속했는지)가
어디에 있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경우에 영적인 성장동력엔진(회개나 자기결단등의 충격요법)을 발동하여,
자신을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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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터의 목양신학(1)

박스터의 신학의 개괄적인 이해에 대해

리차드 박스터는 대표적인 퓨리탄의 신학자였으며,
영혼의 치유와 영적인 돌봄을 행하였던 목회상담가였다.
박스터의 목회적인 돌봄은 영혼의 돌봄과
크리스챤 심리학의 목회상담적인 접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의 신학적인 이해와 퓨리탄의 신학과 목회철학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의 인간이해와 영성신학을 통해 목회상담을 시행하고 있다.

박스터는 그의 목회를 영성관리와 심리학적접근에 위한
영성을 돌봄을 주된 목적으로 그의 사역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신학과 심리학적이해는 그의 목회사역의 철학적 근거가 되며,
그의 목회상담학적인 접근은 당시 퓨리탄니즘의 인간이해와
영성이해의 바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박스터는 탁월한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은 당시의 퓨리탄의 대표로 그는 종교개혁의 신학적인 전통과
퓨리탄의 영성중심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다.
박스터는 또한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목양을 하는 목회자로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목회자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며, 그들의 영혼의 문제를 치료하며,
그들의 신앙생활을 성장시키는 영혼사역의 실천자이다.

박스터는 목회상담자이다.
그는 목회에 상담을 접목을 시도하였으며,
퓨리탄의 목회적인 유산을 대표할 만한 목회상담자이며,
그는 영혼을 돌보는 일에 영적인 사역과 동시에
인간의 마음의 병적인 상태를 진단하고,
그것을 치료하는 과정을 상담을 통해 영혼의 회복을 추구한다.

박스터의 인간이해와 영성이해는 근대 목회상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간이해와 영성신학은 그의 목회상담학의 근거가 되며,
그는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과
그리고 인간의 개종과 변화와 성장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목회상담가이다.

그의 목회상담학을 연구하는 것은 그의 영성학이나 인간학을 이해하며,
그리고 퓨리탄의 목회학을 살펴보며,
그의 목회론을 이해하면 퓨리탄의 목회학을 살펴볼수 있다.
그의 질병학을 통해, 그가 인간의 영혼을
마음과 몸의 관계를 통해 이해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런 관점을 통해 목양의 방법이나,영혼치료의 방법들을 사용한다.

그의 목회학의 영적인 유산들을 현대목회에 적용하여,
현대의 목회자들이 진정한 회중의 영혼들을 돌보는 의사로서,
영성과 치료의 목회를 통해 이상적인 목회상담을 실천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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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터의 목양신학(2)

퓨리탄의 신학은 하나님경험의 신학과
영성신학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박스터는 이런 퓨리탄의 신학적인 바탕에
자신의 목회상담을 접근하고 있다.
그의 신학연구는 3가지 분야로 나누어 연구한다.
즉 박스터는 과학, 감성, 실천으로 신학적인 연구를 한다.

목양에 대한 접근은 과학적이며, 심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하며,
신학적인 진리들에 대해 감성과 이성에 대한 상관관계를 통해 이해하며, 그 진리들을 실천하는 실질적인 방법으로 신학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
박스터는 그의 저서에서 가장 첨예하고
센스티브한 치료의 방법들을 만족하게 강구하는 목회자이며
그는 17세기의 의 가장 뛰어난 작가중에 하나이다.
신학자체 다음으로 박스터는 심리학과 모든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물리학을 생각한다.

박스터의 인간학
박스터는 머리를 이해하는 지식과 마음을
이해하는 지식을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박스터는 인간을 두뇌와 마음의 연결을 통해 종합적인 이해를 알고 있다.
물질과 영에 대한 퓨리탄이중개념은
배교의 상태와 은혜의 상태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노력에 기여한다.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이원론에 입각하여 이해하지만,
성속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분명한 영성신학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으며,
퓨리탄들은 그런 관점에서 지속적인 자기표현을 통해
하나님 경험의 신앙을 갖게 되어진다.

박스터는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자신의 마음을 차겁게(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않은 상태로 굳어지는 낳는 지식의 남용의 결과)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의 안좋은(교만이나 편견)
상태로 머물러 있게 하며 새로운 지식(이론)을 받는 것에 거부나 두려움을 갖게 한다.

자기지식은 모든 자기경험이 자신의 삶의 패턴을
결정하는 걱정(관심)에의 표현이다.
퓨리탄들의 관심은 회중들에게 궁극적인 수준
(만족할 만한 영적인 신앙적인 이상적인 상태)에 이르지 못한 영혼들을 돌보는
지속적인 필요에 목양의 응답을 하기를 원한다.

박스터가 이해하는 육체의 자아(영적인 자아의 반대개념)는 무절제하며,
자기중심적인 모든 욕심과 성질의 총체로 유혹하는 의도의 시도를 잡고,
무질서하게 탐욕에 굶주리는 것과
죄로부터 소원된 감성의 마음을 통해 외부의 자기기만의 표현을 하면서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는 영적인 성향은 비이성적인 성향이 아니다 라고 이해한다.
그 성향은 오히려 우리의 이성을 더 밝게하며,
두뇌의 활동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그는 생각한다.

박스터는 또한 크리스챤 윤리는 마음의 일과 함께 한다고 이해하는데,
크리스챤의 생활의 시작에서 끝까지 모든 윤리적인 판단을
그리스도인들의 행동보다는 마음의 상태에 더 유념한다.
이것은 마음의 사역의 만족할 만한 주된 증거로서
박스터의 그리스도의 법의 개념이다.
그는 건전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수 있는것이며,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수 있다고 본다.

그가 이해하는 인간이해는
사람의 몸(수동적인 연합의 실체)과영(능동적인 연합의 실체)의 주된 개념을
자기의식의 자료로 쓰임을 받는다고 이해한다. 즉 그뜻은 영의 능동적인 역활이 잘 이루어지므로, 그 영의 영향을 받는 몸의 수용성의 연합의 조화를 통해 자신의
즉 몸과영의 자기이해는 자기를 알고 인식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
박스터는 영혼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를
사람이 가진 영혼의 목적은 사람속에 있는 자아를 만들어 가는
인간의 인상(자기표현)을 나타내고 자신을 이해하게하는
중요한 성향(종교성이나,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퓨리탄목회학
퓨리탄목회자들은 상담과 조언을 교인들에게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의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마음을 다루는 영적인 상담가로서
회중들에게 상담을 통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며,
그들의 크리스챤 생활에 필요한 권면을 주어,
그들의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간다.
퓨리탄 목회자들은 상한영혼들을 위로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영혼의 고통의 상태의 원인을 죄로 보고 다룬다.

퓨리탄의 그 일반적인 이해에 더나아가
박스터는 사람의 문제를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며
정신적인 이상현상에 대해 사람이 깊은 디프레스(우울증)에 빠지는 것으로 본다.
그 상태를 메라코니상태로 말하고,
그 병적인 심리적인상태에 영적인 치료들을 적용하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퓨리탄목회자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이해는
퓨리탄 자신의 자기실현에 공헌하며 그 자기실현을 통해 목양에 기여하게 된다.
이 말은 목회자가 자신의 정체감을 바로 가지므로서,
목양을 통한 성취에 충실할수 가 있는 것이다.

퓨리탄에게 있어, 자기 시험(이말은 자기를 점점하는 과정, 즉 목회자들이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영혼의 문제나 정신적인 문제에 대한 자기 해결의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하는 것)은
목회자자신의 이전(과거)의 목적하는 바(소명시에 받은 목적)의
자질들을 발견하는 일에 유익하다.
즉 목회자가 자신을 점검하므로써 자신이 목회적인 목적이나,
목양에 대한 거룩한 목표들에 대한 전반적인 자기이해를 갖고
그 목적들을 실현할수 있다.

퓨리탄 목회자들을 확신하게 하는 지속적인 흐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점검의 기술이나,
그들 자신의 필요를 분별하고 처방해주는 역활을 해야 할 것이다.
퓨리탄목회자들은
오늘날 목회적인 심리학이란 불리우는 철저한 영혼의 돌봄이나
심리학적인 사역을 필요로 하는 목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박스터의 목양학
일반적으로 목회자의 사역은 특별한 일들에 대한 것을 다룬다.
즉 확신하게 하는 것, 신앙에 진보를 가져오는 것,
신앙의 보존하는 것, 그리고 신앙을 회복하는 일에 주력한다.
목회자는 성경적인 지식, 진단의 분별,
그리고 상담의 스킬등을 통해,
영적인 전문 의사로서 사람들의 영혼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영혼의 돌봄은 회중들의 영혼들의 신앙에 대한 목회적인 돌봄을 전제하고 있다
회중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도움을 받을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들이 건강하며,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가져온다.
목회자들은 회중들의 영적이고,
육체적인 건강등 전반적인 그들의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목양의 사역의 전반적인 과정은 회중들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목양은 회중들,그들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며,
그들의 최선의 것을 유지하도록 도우며,
그들의 상처들을 살펴주는 것이다.

박스터는 다양한 청중들과 개인적이며,
공식적인 관계를 맺으며,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거나,
혹은 시골에 있는 사람이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성화에 많은 진전을 가진 사람이거나 혹은 아직 개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목회자는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자신은 그런 모든 이들의 목회자로 사역을 담당하였다.

박스터의 교회론
박스터는 어거스틴의 교회적인 전통,
즉교회는 진정한 성화를 이루는 개종자들과 이름뿐인 개종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박스터는 교회를 교화함이 없는 혹은 개종에 대한 노력이 없는
어거스틴식의 교회이해에 대해서 망설여 생각한다.
그것은 교회는 계속적이 교회의 교화의 노력과
지속적인 회중들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박스터는 교회를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승리한 영적인 교회로 이해한다.
보이는 교회안에 속해 있는 회중들 중에 개종하지 않은 자들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받지 못한 자들이며,
오히려 아직도 사단의 노예로 머물러 있는 자들이 많이 있음을 인정한다.
고로 교회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의 이상적인 상태를
목표로 하는 보이는 교회의 회중들로 하여금
진정한 개종과 거룩한 성화의 발전을 도움으로
그들의 보이지않는 교회에 개입하는 수가 늘어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교화(가르쳐서 깨우쳐주는 교육적인 과정)는
퓨리탄의 삶과 신앙에 대한 바울적인 개념이해이다.
설교를 섭취하여 공동체의 믿음을 세우고,
주요한 가르침들을 암송하고,
마음으로 진정으로 기도하는 모임에 참여함과
성도들의 친교에 의해 이상적인 퓨리탄의 회중들을 만들어 내는 일이 교회의 사명이다라고
박스터는 이해한다.

박스터는 또한 다음과 같이 교회적인 확신을 강조한다.
환자들이 육체적인 질병에서 회복되듯이
회중들이 자신들의 고질적인 영적인 병에서
목회상담적인 훈련을 통해 영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
성도들로 하여금, 보다 깊고 성숙한 성도들의 교제를 즐길수 있도록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여긴다.

박스터는 교회의 진정한 변화는 구조적인 변화보다는
개종을 통한 개인들의 변화를 인정한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목회자들의 중요한 사역의 요소들로는
각 개인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공공적으로 말씀진리 (교리문답)의 교육과
일관된 영적인 훈련
그리고 성도들간의 공동체의 일치를 주장한다.

박스터의 개종론
박스터는 개종(칭의의 소유와 성화의 시작의 상태:
진정한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인간변화의 상태)은
교회의 사역의 궁극적인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고 여긴다.
회중들을 진정으로 개종케 하여 자기변화를 이루어
거룩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큰 임무이다.

그런 관점에서 박스터는 교리문답을 교육하는 것이 중요한 목회적인 요소가 되며,
그는 그것이 영혼들의 개종을 도울수 잇는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강조한다.
교리문답의 교육을 통해 개종한 사람들을 질서있게 세워주며,
이미 들은 설교를 통해 얻은 영적인 지식(단편적이고 부분적이기 쉬운 지식)에 대한
회중들의 습득에 대한 보다 더 깊고 나은 이해를 가질수 있도록 한다.

공동체의 개종한 무리들에 대한 목회의 또 다른 부분은
떨어진(신앙의 퇴보나 혹은 배교에 가까운 영적인 좌절을 경험하는 상태)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할수 있는 그들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다.
회중안에 있는 개종한(이미 믿은)사람들중에서 그들을 돌보는 목회의 사역은
특히 영적인 문제에 대해 불안한 자들에게 개선적이고 치료적인 지식의 위로를 주는 것이며,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평화를 주며,
그들에게 안전하고 지속적인 영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목양은 활력있는 영적이 돌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종의 사역은 두부분으로 이루어 진다.
먼저는 종교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필수적인 원리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며,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효용성을 통해
사람들의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타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성도들 자신들에게 많은 도전과
목양자들을 고무시키는 사역이다.

박스터의 성령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긴장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포용하시는 성령충만한 사랑의 표식이다.
영적인 고양된 상태를 긴장으로 유지하는 것과
죄에 대한 승리의 전쟁참여와
그리고 정신차린 상태의 확고한 신뢰와
하나님의 비전과 온전한 순수함에 대한 잘 조성된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은
성령충만한 상태의 사람이 가져야 할 요소들이다.

하나님의 영은 성화의 사역을 이루어가는데,
사람들속에서 사람들과의 연합을 격려함과 사람들의 노력을 자극하여
그 성화의 사역을 이루어간다.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을 유도하여 하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하며,
사람들속에서 죄의 행동들의 진행을 막으며
그것들을 대체하는 은혜들을 사람의 의식이나 마음에 접목하는 일을 하신다.

박스터는 성령이 하나님의 선택된 자에게
임재하시는 교리의 실질적인 중요성은
신자들을 지상에서 하늘의 것들을 맛보게 하는 역활을 한다.
성도들의 주관적인 경험은 성령의 영향을 통해
그 영의 의도적인 변형이 자신들에게 미치는 것으로 증거한다.
그와 같이 그는 성령을 통해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친교할수 있다고 믿으며,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성례전, 영혼의 말씀,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안에서
성도들이 믿은대로,
성령이 자신들안에 생명을 가지고 오는 삶을 살도록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개종은 사람의 마음과 의지의 의식적인 작용으로 복음에 순종하며,
그 궁극적인 원인은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안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성령의 개화(개종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일에 필요한 것이다.
그 변화의 과정에서 성령의 비쳐줌은 사람들의 심령을 밝히며,
사람들을 진리(예수)에게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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