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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들의 경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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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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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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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마음과 신의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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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11/20
    신이 찾고있는 심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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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11/18
    사람들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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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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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11/10
    영혼추구의가치
    목동

여인들의 경외심

출애굽기 1:15-22

15. 그리고 이집트 왕은 히브리산파인 십브라와 부아에게
16. “너희가 히브리여자들을 조산할 때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살려 두어라”라고 명령하였다.
17 그러나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집트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주었다.
18. 그때 이집트 왕이 그 산파들을 불러 “너희가 어째서 내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주었느냐” 하고 묻자
19.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히브리 여자들은 이집트 여자들과 같지 않고 건강하여 우리가 미처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해산하였습니다.”
20-21 그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 자신의 가정을 이룰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 번성하여 강력한 민족이 되었다.
22. 그러자 바로가 자기 백성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은 모조리 강에 던지고 여자 아이들은 살려 주어라.”

그 여인들의 경외심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있었다.
그 요소들은 그녀들의 하나님만을 섬기는 충정의 믿음과
올곧은 소신있는 삶이며,
그리고 그들의 역경의 운명을 극복하는 고난을 동반한 축복의 믿음이었다.

이스라엘의 인구의 번창에는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히브리여인들의 출산을 돕는 산파 여인들의 용기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노예신분으로 있는 동안에 그들은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들은 하나의 독립적인 국가의 탄생을 가져올 만큼의
인구증가를 통한 왕성한 민족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집트왕은 이스라엘의 사람들을 고통을 주는 정책을 세워,
그것을 실천하는 것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는 노예의 생활로,
그들을 혹사시키는 중노동과 삶의 어려운 환경안에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그가운데에서 오히려
자기민족에 대한 양적성장과 하나의 국가로 태어날 능력을 키워냈다.

이집트왕은 이스라엘민족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태어나는 아이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당시에 산파로 아이낳는 일을 돕는 여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이스라엘 남자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내리는 통치하는 왕의 명령은 생명을 걸고 지키지 않으면,
그들은 사형을 당하는 형벌을 면할수 없다.

이스라엘의 남자아기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어도,
산파들은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정신으로 일관하여,
민족의 배신자나 매국노로 변신하지 않고,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여인들의 건강한 출산을 돕는
자신들의 좋은 산파역활을 잘하였다.

위협적인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평소의 믿음을 지켜, 자신들의 역활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사람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갖고,
분명한 직업의식이나 삶의 철학을 따라 소신껏 사는 것이 쉽지않다.

누구나 권위있는 위치에 있는 자가 자신의 지론을 흔들어 놓는 경우를 당할때에,
자신의 소신을 버리지 않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이 여인들은 믿음에서 나온 용기있고 그리고 소신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 섬기는 충정이 그들의 삶의 철학의 중심에 놓여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타락으로 영향을 주는 그릇된 삶의 문화의 흐름에 대해
역행하는 신앙인의 소신은 변치않는 신앙에서 나오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용기는 확신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며, 그 마음의 확신에 기반을 두고 나오는 내면의 힘이다.

여인들은 자신들이 평소에 섬긴 하나님과의 신실한 교제를 통해
그녀들은 위협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자신의 신조있는 삶의 기조를 지켜나갔다.
목숨을 잃을수 있는 위협적인 상황하에서도,
그녀들은 하나님께 지조있는 절개의 신앙을 따라 살았다.

세상은 때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들에게 어려움을 주어,
그 신앙을 포기하기를 종용하고,
세상의 안일함과 타락의 손짓을 통해 신앙이 변질되기를 유혹하기도 한다.
세상은 타락된 문화의 힘으로 혹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권력의 힘으로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빼앗으려 한다.

예를들어, 일본시대에 신사참배의 강요를 받은 조국의 선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과 함께 일본천황을 동시에 섬기도록 강요하는 교묘한 술책을 통해
오는 여러가지 불시험을 이기는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하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

과거의 믿음의 선진들의 고난의 믿음의 발자취를 통해
지금 이시대를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격려와 도전을 주어,
타락케하고 타협하는 부조리한 세상의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의 창조적 소수자로 살게 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며, 새로운 축복의 미래를 열게 되는 신앙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여인들의 용기있는 믿음은 라합이나, 에스더의 용기를 생각나게 한다.
라합이란 여인은 용기있는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적군으로 다가오는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보호함으로써,
악을 자행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라합자신이 사는 악한 나라와 사회에 대해
대항하는 의인의 용기을 보여주었다.
라합은 자기목숨을 담보로 비밀히 정탐꾼을 숨겨주는 담대함을 보여주었다.
그 담대함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의 힘에서 나오는 용기였었다.

에스더의 용기있는 의지는 알량하게 자신만이 안일하게 살려는
자기영달의 안위에 빠지지 않고,
자기민족의 고난의 운명과 생존의 위협의 짐을 함께 지는 결단에서 나온 그녀의 의지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도 얻으려는 민족의 살길을 위해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에서 나오는 거대한 힘의 용기를 통해 믿음을 실천하였다.

에스더, 그녀는 왕의 계율을 어기고 왕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만일, 왕의 허락없이 스스로 왕앞에 나올수 없는 법령을 어기고 나가게 될때에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 위협이 있었지만,
그녀는 민족을 구하기 위한 충정어린 청원을 왕앞에 나아가 왕에게 요청한다.

여인들의 지혜는 위기를 기회를 바꾸는 지혜가 있었다.
그들에게 내려진 위협적인 명령은 자신들의 삶의 기반을 흔드는 지대한 요구였다.
그들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을수 도 있는 처지였다.
그녀들은 다음과 같은 지혜의 대응으로,
"히브리 여자들은 이집트 여자들과 같지 않고 건강하여 우리가 미처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해산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산파들은 남자아이를 낳을수 밖에 없는
히브리여인들의 출산의 변명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사람의 두려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일때에 마음이 혼란되고,
마음을 주체할수 없으며, 쉽게 강요하는 외부의 세력에 쉽게 타협하게 된다.
그렇지만 자신의 소신을 붙드는 믿음과 용기와 지혜를 통해 자신의 소신을 지킬수가 있다.

자녀를 생산하는 히브리여인들의 힘은 민족을 살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노예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백성들은 더욱 강성한 민족으로 번영하여 갔다.
고난이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히브리 여인들은
스스로 아이를 낳을 만한 강한 어머니로서의 모성애를 가졌으며,
또한 그들은 노예의 고된 생활속에서도
어머니로서의 충실한 자녀생산과 자녀교육에 헌신하였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민족에게는 다음세대에 대해 더욱 희망을 주는 민족적인 정기를 이어갔다.

고난을 통해 사람이 강해진다. 삶의 과정에서 겪는 고난이나 시련을 통해
자신이 힘들게 훈련을 받으면, 그것이 그 사람을 더 강하게 단련한다.
군대에 들어가는 젊은이들은 짧은 시간이지만
집중적이고 고된 훈련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강인한 군인정신을 갖춘 군인으로 태어나게 된다.
신앙인의 십자가 군병이라는 의식은 삶의고된 훈련과
고난과 위기중에서 얻은 신앙의 생활화에서 오는 결과로 인하여 생성되며 성장하게 된다.

신앙은 어려움을 당할때에 더욱 빛을 발한다.
빛의 효력은 어두움이 깃들어 있을때에 나타나듯이
어둠을 밝혀주는 가느다란 빛의 힘은 주위를 밝게 해주는 힘을 발휘한다.
자신의 믿음도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있을때에, 흔들리지 않고, 헤쳐나가는 힘을 제공한다.

이스라엘이 고난받는 이집트의 노예생활의 와중에서,
그 히브리 산파여인들은 같은 동족의 용기있는 출산의 도움으로
봉사한 여인들의 신앙은 지혜와 용기를 보여주는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위협이나 삶의 위기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신앙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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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메신저

마가복음 1:1-8
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소식의 시작이다.
2.예언서에는 “보라! 내가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겠다. 그가 네앞에서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3.광야에서 어떤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를 위해 길을 준비하라.
그의 길을 곧게 하라’고 쓰여있다.
4. 이 말씀대로 세례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를 용서받게 하려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5. 그러자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사람이 모두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산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내뒤에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 오신다.
나는 몸을 구푸려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하늘의 메신저
이곳에 설교자와 청중과 있고, 그사이에 생명의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어,
듣는 청중들이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듣고 반응을 하는 것을 본다.
그 설교자의 생활과 메시지를 보니, 한편의 그림과도 같이
세례요한은 야생의 사람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살아있는 소식을 전하는
하늘의 메신저로 나타나있다.

그는 광야의 사람이며, 산과 들의 사람이다.
그는 도시의 사람이 아니라, 산에서 사는 사람이다.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며, 세상의 신이 난무하는 곳이다.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이켜 그곳에서 인간들을 묶어두어,
하늘의 소리를 들을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도시는 사람들을 바쁘게 만든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의 도시의 생활은 사람들에게서 여유을 빼앗아 간다.
그래서 자신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
그가 와서 외치니, 오랫전에 몇백년전에 한 선지자 이사야가 전하는 그 예언자였다.
이사야는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한 예언자이다.
그가 또한 메시야의 메신저에 대해서도 예언을 한대로 그 예언자가 왔다.

사람사는 삶의 주변에서 수없이 들여오는 소리들,
그소리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소리뿐이 아닌가?
쓸데없는 가쉽이나 헛된 소문들을 나누는 무가치한 소리, 시시비비하고 다투는 소리,
시기하고 모함하는 소리, 걱정하고, 분노하는 소리,
욕지거리를 나누는 소리, 음담패설을 내뱉는 소리,
마음을 혼란케하는 요란한 소리들.
이런 소리들은 사람들을 괴롭히며, 병들게 한다.

그 메신저가 나타나, 요단강에서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하늘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강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며 사람들의 삶의 젖줄기이랄수 있는 곳에서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선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강에서 물을 긷고, 빨래를 하고, 목욕을 하며,
강이 있는 곳에 삶의 문명과 문화가 꽃피운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큰 물줄기인 그 요단강에서
하늘에서 온 그 예언자는 어느 날 갑자기 외쳐댄다.
하늘의 오랜침묵을 깨고, 하늘에서 생명의 소리가 들려 오고 있다.
그 생명의 소리는 미워하고 불안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를 선사하는 아름다운 하늘의 소리이며,
인생의 저주와 절망에 우는 인생들에게 구원과 희망을 전달하는 복된 소식이다.

그 메신저의 메시지는 이렇게 선포하는 것처럼 들린다.
당신들,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시는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하시오.
그 메시야를 맞이하려면,
당신들은 잘못된 것(마음과 행동)들을 좀 고쳐져야 만날수 있소.

그 메신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며,
하나님이 마련하신 생명과 구원의 길로 나아오기를 초청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길은
거짓되고 불행한 인생에서, 진정하고 행복된 사람됨의 모습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인류시초부터 인생들은 자기중심의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오고 있다.
하나님의 법의 테두리를 떠나서,
자기중심에서 오는 오만과 아집과 편견들과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인생이 안고 있는 쓴뿌리(불경건한 것이나 불만족 스러운 것들,
어둠의 일들, 인생의 저주나 불행)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중에 살고 있는 사람들사이에서 넘쳐나고 있으며,
그로인하여 사람들은 진리를 찾기가 쉽지 않으나,
인생의 행복과 구원을 가져다 줄 하나님의 길로 돌아오면 거기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유대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며, 민족적인 울분을 참고 살고 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압제와 유페의 생활에서 다시금 민족을 세우고,
진정한 민족해방의 구원의 소식을 기다리며,
로마의 압제에서 식민지 백성으로 고통받는 처지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심과 도덕률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기다리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종교의 변두리에서 사는 목자들이나,
사회에서 천시받고 있는 세리와 천민등은
세례요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들에게 보여주는 구원과 소망이 담긴 생명의 소리를 통해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형식적인 종교적 틀을 찾아볼수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에게로 향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는 순박한 양심밖에는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사람이 되어가는 길은
종교심(인간이 만든 종교의 율례나,
의식의 화석화로 인한 허울뿐인 종교인들의 심성)을 벗어던지고,
자신안에 왜곡된 자아의 눈을 뜨고,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모습에서
인간성의 모순과 나약을 깨닫고,
그가운데에 있는 자신들의 죄와 죄책과
그리고 그것들로인한 고뇌와 불행을 벗어던지고,
자기중심의 삶의 스타일에서
하나님중심의 삶의 패턴으로 나아오는 회개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죄는 인생속에서 자연스레 붙어있는 것으로
원래 태어날때부터 사람들은 그 죄를 자신들의 몸과 운명안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의 영향아래에서
인생의 모순과 불합리를 겪으며 살아 오고 있다.
더나아가, 죄는 사람들을 절망과 죽음으로 몰아가며,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과 몸을 병들게 한다.

상처가 나고, 몸의 어느 한 부위가 썩어가거나,
암덩어리가 퍼진다고 가정을 해볼때에,
우리는 당장 그것을 치료하여 없애려고 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는 영적인 암덩어리이며,
우리의 인생전체를 망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할수 있는대로 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내면의 죄의 쓴뿌리들은 사람들은 원래 인간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죄와 자범죄와,
그리고 유전의 죄나 과거에 지은 조상의 죄의 무거운 짐들을 진채 살아오고있다.
더우기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겪은 부정적인 경험들,
즉 남에게 상처를 입었거나, 원치 않는 해를 입기도하며,
그런 경우를 당했을때에 자신의 마음에 분노를 심어서,
그 분노가 쓴 뿌리가 되어,자신의 마음의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어,
나의 진로와 진취적인 삶의 행위들을 막아서고 있으며,
사람들을 망하게 하고 있다.
그 인간관계로 부터오는 죄가 인간을 옥죄어 죽음으로 몰아가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심판을 면할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회개는 이런 죄들을 뉘우치고 청산하고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죄있는 인생자신의 모습을 바로 직시하며,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죄를 통해 일어난, 하나님과의 차별화를 통한 단절과
구부러진 자신의 관점을 고쳐 바로 잡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속에서 자신이 해결할수 없는 것들을(죄와, 죄책과 그리고 인생의 저주나,
고뇌와 고통)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신속에서
치유와 회복과 평안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여는 작업이며,
그 눈을 통해 구원과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구하는 일이다.

세례는 죄를 씻는 일이다. 물로서 더러운 것을 씻듯이,
인생들에게 묻어 있는 더러운 죄들을
인생의 죄를 담당한 메시야의 흘리신 보혈(십자가에서 죽음으로 흘리신 그의 피)로 씻는 것이다.
자신의 몸이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며,
자신의 죄를 씻는 상징의 세례의 물속에 들어가든지, 물을 뿌리든지 간에,
자신을 새롭게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례는 자신을 위하여, 자신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의 축제의 의식이다.
그 세례를 받음으로 자신이 자신을 위하여 예비해 놓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축복과
구원의 특권에 동참하는 것이며,
자신의 의지로 인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거듭나게 하는 자신의 결단이며,
하나님의 초청의 자신의 응답이다.

사람들에게 두가지 길이 놓여 있는데,
그길은 심판과 멸망에 이르는 것과 구원과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심판과 멸망의 길에서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상황들이 나타난다.
모든 인생들이 맞이할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피할수 없는 육체의 생명이 다하는 이후에 받아야 할 하나님의 평가이며,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날들에 대한 미래의 댓가인 죽음과 멸망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인생들이 그 길에 머물러 거기로 가기를 원치않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복있는 소식을 통해,
그를 믿는 사람들 모두 에게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이끌어 내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일이다.
하늘의 소리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듣고 응답하여 얻는 하나님의 약속된 선물이다.
인생에 있어 사람들에게 극적인 전환점이라 말을 자주 듣는다.

세례요한 으로부터 들려주는 하늘의 이 메시지는
듣는 이들에게 자신의 답답하고 괴로운 인생의 삶에서 즐거움과 희망을 가져다 주어
인생반전을 가져올 복된 소식이다.
무엇인가를 찾아 늘 방황하고 공허한 자신의 인생이나
삶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려는 이들에게 희소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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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인간발달과의 상관관계(1)

신앙은 정적이며 단원적인 것보다는 역동적이며, 다차원적인 인간반응에 관여하고 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신뢰와 동의와 순종과 자기복종으로 묘사된다.
신앙은 또한 하나의 인간의 발달적인 현상이다.
그 신앙은 인간의 개인적인 발달주기에 참여하고 있으며,
개인의 성장기의 발달현상에 따라 그 개인의 신앙형성에 영향을 주고 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궁극적인 은사로 주어지지만,
인간의 응답에 의해 형성이 된다.

에릭에릭슨의 인간발달의 후천적인 경향에 위한 발달이론에 의해 신앙이 형성이 된다.
에릭슨의 인간발달은 8가지 단계로 유아기(신뢰와 불신), 어린시절기(용기와 수치혹은 의심),
놀이아동기(순종과 죄책감) 학령아동기(동의와 불찬성),
사춘기(자아형성과 자아혼란), 초기성인기(자기순응과 자기괴리),
중기성인기(무조건적인 자기헌신과 현세의 욕망),
성숙성인기(무조건적인 자기응답과 자기파멸) 나눈다
(이 단계들을 개인의 영적성장의 단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뢰로서의 신앙
영적인 유아기에는 주로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공조하는 것에 반응하며,
그 욕구가 불만족스러울때에, 타인과의 신뢰가 형성이 잘 안된다.
신뢰하기는 유아기의 특징으로, 자신과 타인에 대해 자신의 신뢰의 욕구가 충족되면,
건강한 인간관계와 성취심을 갖게 된다.

만일 개인의 신앙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차별화된 반응으로 이해되어지면,
신앙이 형성되기 쉽지않으며, 하나님을 이해하는데에도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신앙이 의식적으로 반사적이지 않으며,
자신의 유기적이며, 무조건적인 원시상태의 것이라면(즉 차별화되지않은),
믿음은 신앙의 유아기의 신뢰형성에 큰 밑거름이 된다.

유아기적인 신뢰로서의 신앙은 열림과 수용성의 반응의 특성으로 나타난다.
즉 타인과의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형성이 되며,
신앙유아기의 차별화되지 않은 신뢰의 감정으로 좌절이 아닌 성취되어지는 믿음을 이루게 되며,
인생에 있어 다른 사람과의 신뢰를 쌓을수 있는 본인이 믿을만한 사람이 된다.
이런 유아기적인 신앙의 단계에서 실패하면, 나중에 의심이나,미심쩍은 태도를 갖게 된다.

용기로서의 신앙
에릭슨에 의하면, 두살때의 아이들은 근육시스템의 발달로 인하여,
유지와 소멸의 행동을 통해 자기 중앙집중적인 사회심리학적인 단계로 발전한다.

영적인아이는 자신에 대해 미성숙한 힘을 사회적인 보유(좋은 것을 선택하기)와 해제(나쁜 것들을 버리기)들을 통해, 자신의 중요한 주변인물들에 대한 반응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아이들의 불규칙적인 행동은 자신의 성장하는 힘을 통해
새로운 대안들을 선택하는 타인의 의지나 명령에 대항하는 자신을 지원한다.
이 힘은 어린시절의 자신과 무자아사이의 차별화할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이시기에는 아이들이 자율성과 자기 결정에 대한 능력이 배양이 되는 시기이다.

영적어린이에게 적당한 척도로 자존감의 상실없이 자기결정이 평가되어진다면,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생존하며 성장할수 있는 책임있는 자기단언의 감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타인의 의지에 영향을 받고,
자기조절이 부족할시에는 수치와 의심하는 병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영적 어린이의 자율성에 대한 노력은 두가지 단계로 신앙에 반응한다.
하나는 자아발달의 시작으로 사춘기에 이상적인 자아발달을
가져오는 단순히 주고받는 반응의 처세를 넘어서는 이상적으로 주도하는 능력을 배양한다.
그리고 반응으로서의 믿음은 참인간의 면모와 그에 따르는 개인적인 성장을 가져온다.
이후에 장년이 된 시기의 신앙형성에 핵심적인 역활을 하며,
인간자유의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초월하는 능력을 끌어내는 계기가 된다.

또 다른 하나의 레벨은 아이의 싹나듯 시작되는 자기결정의 감각은
자기단언의 미숙한 능력을 가늠하여,
인간상호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자신을 확립하는 유기적인 체계를 갖추는 능력을 배양한다.

영적어린이시절의 용기로서의 신앙은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용기는 그 시절의 신앙의 기본적인 형태이다.
왜냐하면 용기는 신앙안에 잠재되어있는 모험을 이길만한 요소가 있기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이 완전히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기확증을 갖게하는 삶의 기반을 부수어버리는 위험을 극복하게하기 때문이다.

LeRoy Aden의 “Faith and Developmental Cycle”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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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신학적사고

종교적인 행위는
즉 개인의 신앙적 행위나 종교적 의례를 통한 신과의 접촉을 통한
즉각적인 개인이해나 경험에 입각한 신학과
그것을 다시 생각하는 사려깊게 연구하는 신학은

신학하는 방법이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르다.
개인의 즉흥적인 이해신학과 그것을 재이해하는 신학의 차이는 신학방법의 차이이며,
신학방법의 지향하는 목적의 차이일수 있다.
신학적 방법과 목적에 따라 신학적인 접근법은 달라질수 있다.

인간세상에 신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신학적인 표현하는 방법으로
단편적인 신이해나 경험에 따라,
자신의 믿음에 영감을 주고 자신의 신이해에 즉흥적이지만,
순간성에 따른 순발적인 믿음의 활달성이 따라올것이다.

사변적인 신학적인 이해와 표현방식은 신의 포괄적인 통치와 그의 성품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단편적인 신이해나 경험은 자칫 신을 알고 경험하는 신학적인 추구에
치우친 이해와 편견에 빠질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나 신학의 단체적인 연구나 접근을 통해
신이해나 경험을 추인받으며,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신은 초월자이면서, 세계에 편만한 존재로
인간사회에 모든 분야에 관여하며, 신의 존재와 섭리에 있어서,
신과 인생사이에 놓여있는 모든현상에 대해 신학적해석을 추구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세계에 통치하는 신의 성품이나 역활등을 이해하며,
거시적인 안목에서 전체적인 세계관에 대한 신학적인 관점을 따라 해석해야 할 것이다.

즉흥적인 신학방법은 개인의 인간속에 이해되고 경험되어진 내재적이며,
인격교류적인 신경험을 표현하는 신학적인 방법으로
인간이 이해하고 경험하는 신경험을 표현하는 개인신학의 추구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목표를 통해 신학의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로서 신학적인 표현을 추구한다.

사변적인 신학방법은 즉흥적인 경험가운데에 얻은 정보들을 분류하고, 판단하여,
그 정보들을 체계화하여 그 신학적인 체계안에서

신이해를 종합적으로 세워 갈수 있을 것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그런 즉흥적인 신이해나 경험을
신중한 사고적인 이해를 통해 체계적인 신학관을 세워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학적이해는
경험적인 신학사고와 사변적 신학사고에 따라

서로 상호보완적인 종합적이해를 가질수 있다.
기도를 할때에나, 설교를 들을때에,

받은 평신도들의 신학형성에 주로 영향을 주는 신학방법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접촉하는 신경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이루는데 주된역활을 하게 된다.

섭리는 종합적인 신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신의 성품이나, 신의 통치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여 신의 움직이는 활동이나,
삼위일체 신의 삼위의 성부, 성자, 성령의 각자의
활동이나 역활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요청이 된다.

사변적인 신학은 사람의 신역사의 경험이나 신역사의 이해에 대한 단편적인 것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신학적인 관점을 갖게하는 것이다.
섭리는 신의 통치의 신정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의문이 제시되고 있으며,
악한 세력의 선한 인물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유대인학살들에 대한 이해등도,
신이 과연 살아계시는 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며,
편견이나 일변도적인 주관적인 신이해에 머물게 하는데.
사변적인 신학사고는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게 한다.

즉흥적인 신학관점은 우리들에게 신학적인 영감이나,
실생활에 우리에게 자신의 신이해나 경험에 도움을 주어,
자신의 신의 역사나 섭리를 이해하는데 기여한다.
사변적인 신학관점은 우리에게 진지한 신학추구를 통해 체계적인 신이해를 갖게하며,
신학의 종합적인 관점을 통해 신학의 자신의 신앙수립에 도움을 갖게 한다.

통합된 신학적인 개념은 신에 대한 개인적인 관계나 이해일 뿐 아니라,
신에 대한 대응적이며, 대화적이며, 그리고 공동체적인 신학 사고과정를 통해 형성이 된다.
그 신학적인 사고의 모델은 건강하고 논쟁과 창조적인 긴장이 있는 감상을 허락하는 대화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해를 구하는 믿음을 추구하는 신학은
신학자로서 크리스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는 것과 그 메시지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혹은 계획적이든, 계획적이 아니든,
매일의 셀수없는 접촉에 의한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을 통해 믿음을 배운다.
교회에서 전파되고 교회교인들의 매일의 삶에 의해 이해되는 믿음을
추구하는신학이 즉흥적신학방법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터득하는 주관적인 신학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인 가정과 사회안에서,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주관적인 이해로 자기결정을하게 된다.
크리스챤들은 믿음의 세계가 현실생활과 다르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합당하게 교류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이해한다.

주관적인신학은 예배에서 다른 사람들과 문제제기 함이 없이
자기만의 신앙(신학)적인 말을 갖고 있지만,
자신에게 편안하게 혹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믿음을 형성한다.
사변적인 신학은 주관적인 신학의 확신하는 것들을
다시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사변적인 사고는 제이의 신학적 사고과정으로
자신의 절대적인(자신에 대해서만 그렇게 생각함)

주관적 믿음에 대해 다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개인적인 주관적인 사고관점을 다시 객관적인 사고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변적 사고는 짐짓 하는 사고이지만,
그것은 해석의 대안적인 것으로 가능한 일치적인 것과
분명하게 확인된 믿음의 이미를 구성하는 시도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신학적으로 옳다는 것에 대해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나,
신학이 깊은 신학자들에 의해 강요받는 혹은 감동되는 신학적인 시도가 아니다.
사변적인 신학적 사고는 주관적인 신학의 불분명할때에 시행된다.
진지하든 아니든, 주관적인신학은 실수나 혹은 잘못 알려진 내용들로 그 신학의 위기나, 논쟁을 통한 사변적인 신학사고를 통해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낸다.

믿음안에서의 자극(신학적인 인식)은 사려깊은 신학적사고를 요청한다.
그 자극(인식)은 의식화이다.
그 자극은 신앙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깊은 단계의 감정적인 요소들을 다룬다.
믿음의 깊이에서 감추어져 있는 것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인식되어지는 과정으로 그 자극은 흐릿한 믿음의 이해를 명료하게 하는 역활을 한다.
의식화된 믿음의 자극(인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길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한다.

주관적인 신학관점과 사변적인 신학관점의 구분은 역사(시간)를 통해 검증되며,
새롭게 하는 신학적인 확신들에 위한 힘든 첨예화된 신학검증의 가치를 통해 나누어 진다.

목회자에게 주는 도전은 믿음의 이미를 연구하는 것인데,
신학적인 사변적 사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연결되게 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목회자의 설교는 첫번째 신학사고인 주관적인 신학에서 나오지만,
그러나 두번째 신학사고인 사변적인 사고의 보다 힘든 과정을 통과할 때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변적사고는 주관적인 신학을 검증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아버지와 세상의 아빠의 이메지의 차별화에 대한 믿음의 충분한 이해를 제공한다.

크리스챤들이 믿음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믿음의 확신을 갖게하는 것의
의미하는 것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를 가지게 한다.

어떤 크리스챤의 믿음의 이슈도 신학자의 연구에 참여하게 한다.
즉 믿음에 대한 어느 것도 신학적인 검증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안에 건전한 성장을 하도록 하는 소명을 이루는데는
자신이 이미 이해하고 있는 믿음의 주관적이고 기초적인 이해를 고치고,
깊게하며,확장하는 신학적인 사고 시도를 통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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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발달의 심리학(1)

영성개발의 심리에 대한 책으로,
영성과 심리학을 접목하여,
영적구도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인성개발의 지침으로
영적원리에 대한 심리적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영성생활이란 하나님의 내면의 부르심에 대해 응답하는 사람들의 모든 활동이나,
자기개발의 추구이다. 사람은 신비한 경험으로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유한한 인생이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접촉을 통한 교류에 의해 영적생활을 인도 받는 것이다.
크리스챤의 영적생활에는 하나님자신을 알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삶을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성육화된 말씀을 통한 깨달음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인간의 영성개발은 인간발달에 있어,
영적인 가치들을 통해 계속해서 성장해가는 즉 되어가는 존재에 대한 자기발달이해인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롭게 된 자신이 과거의 잘못으로 벗어나며,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해가는 영적인 단계를 밟아 가는 것이다.

성장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정화되어짐과, 조명되어짐과,
그리고 일치되어 가는 과정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매일의 자기성장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라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영성개발은 인간 발달의 단계에서
생겨나는 중요한 사건이나, 경향들을 통해, 형성되어진다.
어린시절에는 신뢰하는 것을 배우고, 자율성과 주도적인 능력을 개발하는 특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실패하게 될때에,
다음단계에 가서, 감정적인 불안정이나, 혹은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게 된다.
그 다음단계에는 독립적인 인격으로 발전하는 단계로,
이 단계에서 실패하면, 대인관계에서 부끄러움을 자주 느끼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쉽게 의심이 생긴다.
그래서 나중에 무가치한 것들이나, 두려움 같은 것을 자주 느낀다.
영성개발에도, 이런 경향들에 영향을 받아,
영적인 성장에 죄책감에 시달리며,
정신적인 자기 파괴적인 인격소질을 통해,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어린시절에 건강한 어린아이로 자라난 경우는
창의성이나, 개인의 인격성이 발달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다음세대에 대한 책임의식과 관용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자신의 영적인 성장도 성숙한 인격형성과 함께 지속적인 건강한 자기발달을 가져온다.

아이들이 경쟁하는 상태에 빠지거나,
자신의 소질이나, 필요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상태에
(자신의 개성에 대한 확신감을 갖게하지 못하는 경우) 놓여지며,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지나친 스포츠나 아카데믹한 성취에 자기가 내몰리게 될때에 치우친 자기발달에 빠지게 된다.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나중에 그들의 영적인 추구의 생활에도, 조화롭지 못하고,
한쪽으로만 치우친 영성의 특성을 갖기 쉽다 (이성의 역활이 약화된 신비주의중심, 희생과복종등 의지적이지 않은 기복주의중심, 전혀 의지와 감성에 영향을 주지못하는 이성중심적인 신앙관등이다.
반면에 건전한 영성은 지,정,의지적인 조화를 가진 성서적인 신앙관)

복잡한 문화와 사회구조적인 시스템에서,
청소년들은 전반적으로 건강한 영적인 발달을 이루는 것은
어린 시절에서 성년으로 자라는 과정에 중요하다.
청소년시기에 도달해야 하는 인간의 특질은 사회안에서
자신의 독립심이나, 자기를 스스로 돕는 능력이나,
자기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소년기에 제대로 인격이 발달되지 않으면,
그들은 방향감각상실, 오락에 빠지는 자기태만,
삶의 권태나, 자기증오나 죄책감, 그리고 자기파기적인 경향에 빠지기 쉽다.
에릭슨은 청소년의 중대한 갈등은 자기정체성과 자기역활혼돈이라고 한다.

이 청소년시기에 처음과 끝이 모두 영동적인 영적이고
종교적인 발달을 이룰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그 시기는 종교적인 전환이나, 거듭남이나, 자기변화를 통해 개종을 이루기 쉽다. 앞으로의 장년의 영성의 기반을 이루는 기간이다.

반면에, 이시기는 종교적으로 건전하게 발달하지 않으면
(이것은 어느 특정한 종교적인 이해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안에 있는 종교성으로서의 일반적인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임) ,
영적인 무관심에 빠지기도 하며, 비도덕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더나아가 비양심적인 악한 행위에 빠지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그런 경우에 종교적인 무관심이나, 반 종교적인 사상에 심취하기도 한다.

청소년시기에, 처음부터 천천히 진행되어가면서 도달하는 마지막단계까지 발전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친밀함이다.
이것은 앞으로 성년인생의 안정된 서로 상부상조하는 인간관계로 발전하여,
그 친밀함을 통해 보다 강화된 사회성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친밀함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소외적인 성품이 되어,
모든 인간관계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며,
이성을 사귀는것이나, 결혼하는 연령도 늦어지게 된다.

성적인 친밀감은 모든 장년의 생활에 중요한 부분으로 영향을 미친다.
낭만적인 사랑에 치나친 추구는 자칫, 성적인 사랑의 만족을 구하는 경향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그럴때에는 정신적인 사랑을 구하며,
성적인 것만 추구하는 데서, 더 나아가,
이성간에 서로 정서에 호소하는 친밀함을 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비정서적인 성적인 추구에 빠져,
비정상적인 성적관계(난잡한 성행위, 동성애, 음란적인 성적인 추구나 방종)를 추구하게 된다.

친밀함은 젊은 성년들에게 중요한 품성이며, 관심의 대상이다.
이 친밀함은 영적인 발달에도 영향을 준다.
다른 사람과의 친밀함을 추구하는 것은 독자적인 개성있는 인격으로서,
다른 사람과의 보다 깊고, 넓은 인간관계를 가질수 있는데,
이것이, 영적인 세계에서 신을 진지하게 추구하며,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밀도있게 성장하며,
폭넓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게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영성개발의 영적인 깊은 단계에 까지 이르게 한다.

Groeschel, Bebedict J. "Spiritual Passages: the Psychology of Spiritual Development"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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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음과 신의 자비

 

시편 109편 1-4

오 하나님, 내 마음을 정하였나이다. 나의 영광과 함께 당신을 기뻐하며, 노래하기로,

여기 시편의 시인은 자신이 고백하는
신에 대한 믿음과 그분을 높이고저하는 일편담심의 마음이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렇듯이 신앞에서 인간이 소중한 것은
그가 바로 인간이 신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신에 대한 변함이 없는 생각과 마음을 갖는 것이다.

신은 변함이 없다. 그가 말씀하신 것은 이루어지며,
그가 생각하신 바는 실현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며, 태도이다.
때로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가지 관점을 갖지 않고,
너무 자주 인간의 생각과 태도가 바뀐다는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나, 자신에 대한 생각에서도, 변화무쌍한 마음이다.

그런데 여기 시인은 그는 변치 않는 마음으로
신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다해 그분을 섬기고, 찬양하는 태도로 일관하리라,
자신의 마음가짐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이 가진 영화스러움이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신을 향한 정성과 열정을 쏟아,
그분을 섬기고, 그분의 성호를 높이리라고
신에 대해 자신의 감사의 고백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어떠한 경우에서든 변치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한가지 관점,
즉 신에 대한 자신의 변치않는 충정과 열정의 생각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마음 먹은 것이 너무 자주 바뀌어 지는 경험을 한다.
좋은 의도로 뜻을 세우고, 그것을 평생실천의 동기부여로 세우고 나갈때에,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뜻에 대해,
딴지를 걸면, 쉽게 그것을 포기하기 쉬어진다.
그리고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이 자신의 옳은 뜻을 관철하지 못하게 할때에,
쉽게 좌절에 빠지거나,
복잡한 생각에 의해 혼란된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한다.

신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 중에 신을 모시고 섬기고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으나,
그상황으로 인하여, 자신의 믿음이나, 생활태도를 점검할수 있게 된다.
내가 믿고 추진하는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고,
기다림의 태도가 필요할때에, 자신에게 다짐할 필요가 있다.
신을 믿고 따르다 실망할때에 좌절하지 말고,
그분을 계속따르는 것은 그가 신실한 분이며,
그의 자비는 하늘보다 높기에, 그분의 생각을 측량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은 때로는 신을 섬기는 사람자신의 믿음과 태도를 테스트를 하기를 원하기도 하고,
어느 상황에서도 신자신에 대한 변치않는 일관된 태도의 사람의 마음을 기뻐한다.
사람이 지속적으로 신을 따라감은 그의 자비로움이
사람의 생각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한 요소가 있어,
그의 무한한 자비는 인간을 인도하기에 충만한 그의 마음을 담고있다.

신의자비는 하늘들보다 드높다.
신의 자비는 온우주에 편만하며, 충만함이 넘침을 보여주고 있다.
신의 자비는 우주의 구석구석을 두루 비쳐주며,
온우주에 모든 곳에 미치고 있으며,
그의 사랑의 손길은 우주의 조화와 질서가운데에, 뼏쳐있다.
그가 그의 손길로 우주를 붙들고 있으므로,
우주는 안전하게 항해하며, 우주안에 있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삶을 살수 있다.
신의 자비가 한순간이라도 미치지 않는다면,
이세계는 순식간에 혼돈과 무질서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신의 자비가 멈추는 때가 있음을 신의 말씀이 계시하고 있다.
그때에는 인간세계에 대한 신의 심판이 행해지는 때이다.
그때는 천체도, 온 세계도, 혼란속에 머물것이다.
신의 자비는 잠시 우주에서 심판으로 대처될 것이다.
그것은 잠깐이지만,그분의 자비는 영원하다.

그의 진리는 하늘 구름에 닿는다.
이것은 신에 대한 진실의 말씀이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신에게 도달케하는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지는 변할수 있음을 그분의 말씀(성경)에서 알려주고 있듯이,
온 우주가 변하는 순간에도,
그분의 하신 말씀은 변함이 없이 그분의 계획과 생각을 이룰것이며,
그분의 뜻이 결국 영원히 세워 질 것이다.
그분의 말씀이 하늘 구름에 닿음은
그분의 뜻이 그분의 말씀안에서 다 이루어짐을 암시하고 있다.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인간이 사는 이세상안에도 결국 온전히 이루어 질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신의 말씀을 의존하는 근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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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찾고있는 심령들

시편 107편8-10

신에게 감사하는 것은 그가 선하시며,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들을 보실때에, 자비와 선하심으로 살피신다.
그리고 엄마가 자녀들을 돌보듯 하는 것 이상으로 인생들을 돌보신다.
인생의 광야길에서 험악한 일을 만나,
어찌할줄 몰라 할때에,
하늘에 계신 그분은 은밀하게 그 인생들을 도우신다.

그분은 선하시고 착하신 분이시다.
뭇 인생들에게 무시당하지만, 그는 끝까지 참으시고,
그 인생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오늘도 아침에 눈을 떠 밖을 바라보면,
환하게 비쳐오는 그 따스한 햇빛속에서 신의 선하심과 자비를 맛본다.
모든 만물을 향해 골고루 비쳐주는 햇빛은 누가 만드셨나?
저절로 그해가 생겨서,
이지구를 비추게 하고 있는가?
햇빛의 온기와 그 에너지를 힘입지 않고,
흑암가운데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다.
따스한 봄날의 햇빛은 더욱 인생들을 사랑으로 감싸고 있다.

인생들이 그신을 향해 감사할 것은
인생들을 내신이가 그이기에,
그가 계시므로 내가 있게 되었으므로,
그의 존재하심을 감사드린다.
그는 그가 행하신 많은 일들이
우리인생들의 앞서 이루어진 것들을 인하여 감사드린다.
드높은 창공에 펼쳐진 아름다운 구름송이를 바라볼때마다,
창조주의 솜씨를 노래한다.

구름넘어 있는 신비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신의 신비로움과 그의 세계의 오묘함에 놀라,
그분의 영화로움에 덩달아,
우리 인생들도, 그의 영광가운데에서 가장 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니,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의 영광안에 있는 인생의 광명은
아무리 험한골짝같은 인생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나의 인생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손길을 느끼면,
그 모든 어려움도 감히 감당할수 있음은
그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을 감사드린다.

그는 지금도 사랑의 눈으로 인생들을 바라보면서,
신을 구하는 심령들을 바라보며 만족해 하신다.
그 많은 인생들 가운데에,
신을 구하는 구도자들의 심령을 바라보는 기쁨은
한 영혼의 신에게로 돌아오는 발걸음을 향해,
그의 보좌에 온주변에 있는 천상의 존재들과 함께 즐거워 하신다.

그 가련하고 배고픈 심령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는 그들의 굶주림과 갈급함을
그의 충분한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의 은총으로 채우신다.
그들은 어두움에서 신음하고 죽음의 골짜기에서 나온 자들로
인생길에서 깊은 좌절과 절망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생의 깊은 절망과 고통의 수렁에서 허덕이며 헤매다가
신을 찾아 그를 만나,
그에게서 그 은혜와 축복의 깊은 맛을 맛본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도리어 그것을 통해 신에게로 다가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도리어 기뻐하고 있는 심령들이다.

배고픈 심령, 인생을 두고 한탄하는 심령을
지금도 신은 부지런히 찾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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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필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라는 말이 있다.
이말에 따라 사람들은 무엇에 대한 필요를 통해,
자신의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는 것으로 추구하며,
그 필요성은 자기발전과 사회발전을 의한 좋은 동기부여를 하게된다.
사람은 자기 필요를 따라 살다보면,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게되며,
자신의 필요를 의식하여 살았기에,
그 필요의식를 좇아, 자신이 가져야 할 분명한 이유를 확신하게 하며
그 의식을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도록 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 필요의식을통해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명분을 가지고하고,
무엇이든지 그 필요를 이룰 일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를 하게 한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사회적인 동기부여를 하고,
그 동기부여를 통해 사회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여
감추어진 것을 발견하고 혹은 새로운 것을 발명을 하게되어,
인간 사회의 발전과 성장을 이루어 온것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50년이상전에 동족간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으로 온국토가 폐허가 되어,
당시에 살고 있는 한국의 국민들이 가장 삶의 환경에 대한
모든 필요에 대한 절박한 경험을 하였다.
배고픔과 헐벗음과 파괴와 피폐한 환경등 사람들이 살긴 힘든 시대를 거쳐 오면서,
국민들의 마음속에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려는 발전과 성장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가 일어나,
짧은 기간에 국가적으로 혹은 개인의 삶의 조건이나 사회의 환경등에 놀라운 발전을 이룩해 왔다.

이 사회적인필요나 국가적인 필요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수 있다.
옛날 60,70년대의 필요는 잘살아 보세라는 명제로 주로 물질적인 경제적인 부와
잘사는 삶의 양적인 성장환경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였다.
2000년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의 필요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좀더 사회나 세계에 대해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영향을 주며,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대에 살면서,
잘살아보는 일에 대해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정신적인것과 정서적인 (문화활동의 수준높이기나, 혹은 사회보장이나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적인요구나 사회체제의 긍정적인 변화)
잘사는 일을 실제적으로 얻고 살려는 필요를 추구하는 세대일 것이다.
그 두시대의 사람들의 필요는 이렇게 다르다.
그리고 각 시대에 맞는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일이 정부나 개인이나,
그 시대에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을 6,70년대처럼 사는 것은 넌센스일 것이나,
어려운 시절에 살았던 고생하는 정신으로 산다면,
오히려 삶의 질을 잘 높이며,
보다 더 발전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위해 살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해본다.

개인의 필요의식도, 어릴때와 청소년기의 때와 성인이 되어
장년의 필요와 노인의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르며,
그리고 각시기의 강한 필요의식은 그시기마다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동기부여하며,
그시기안에서 자기성장이나 발전을 가져올수 있다.
인생의 지혜중에 하나가 각시기에 가장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그필요를 좇아 집중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그 필요에 충족하고자 하는 것일것이다.
그 시기에 자신의 필요에 민감한 만큼 그 시기를 충실하게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대학생에게 지금 남은 세월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삶을 정리하는 쪽으로 살라고 말하면,
아직 삶을 펼쳐보지도 못한 그들을 모욕하는 것일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기를 그렇게 거꾸로 살아가는 지혜에는 역설적인 면도 있다.
노인이 젊은이처럼 살려고 하면 더 자신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리고 몸을 튼튼히 하려고 열심히 운동하여 뒤받침된 그 건강한 몸으로,
무엇이든지,새로사는 것처럼 젊고 건강하게 생활하게 된다.
예를들면 노인이 대학교에 들어가 노인 대학생처럼 사는 경우일것이다.
이렇듯이 젊은 노인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있게 삶을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반면에, 젊은이가 노인처럼 삶을 아주 소중하게 얼마남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다면,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소중한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순간마다, 여러가지 환경의 삶을 통해 각자의 필요의식를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시인 필요에 민감한 사람이 있는데,
그 필요는 쉽게 이루어져야 할 필요이다.
그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의 생존에 요구되는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필요한 물질을 구하며,
여러가지의 생활의 필요를 얻으려하며,
그 당장에 필요한 것을 얻은 것에 만족하려고 한다.
그런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에게 보다 나은 발전에 대한 기대나 동기를 갖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필요일 것이다.
사람의 가치나 삶의 의미보다는 일시적인 효과적인 결과에 매말리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필요를 그 일시적인 것에만 극대화하려는 경우이다.

단순한 일시적인 필요를 넘어서는 것은
자신의 성장이 나 발전의 필요을 따라 장기적인 필요를 따라 사는 경우이다.
그 장기적인 필요의식은 많은 세월을 기다리며 준비하여,
그필요를 채우려는 동기로 인하여, 자신에게 지속적인 동기부여를 하여,
자신의 성장이나, 발전을 이루어 간다.
어릴때에 어렵게 자란 사람들중에, 어릴때부터 장기적인 필요의식에 대해,
눈을 뜬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환경이나 처지를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공부에도 전념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필요의식가운데에 자신의 노력이나 성취를 통해 성장이나 발전을 이루게 된다.

사람이 사는 데에 무엇이 필요한가? 의식주의 문제인 일차적인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기본적이면서 절박한 필요라 할수 있겠다.
산 입에 거미줄칠정도가 되어버리면,
사람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먹을 것만 찾아가게 된다.
단지 그들의 생존을 위한 음식을 얻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다.
이부분은 어느 사회이든지,
그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의 어느 필요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에만 매달려 사는 것도,
사람을 그것을 넘어서는 사람들 자신들의 필요에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물학적인 요구만 추구하는 인생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것만 가지고 살면, 사람의 삶이 천박하여,
자신의 삶을 낭비만 하는 무의미한 인생에 지나지 않게 된다.

먹는 것이 해결되면, 사람들은 집을 갖추고,
자신의 소유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다. 집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
옷은 유행을 좇아 무엇을 사서 입을까 신경을 쓴다.
사람들 사이에 자신을 나타내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어,
특히 외모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좁은 땅에서는 사람들이 더 심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 만나는 일로 자신의 드러나는 모습에 신경을 쓴다.
이런 필요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자신의 수입을 소비하며,
거기에 충족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필요를 채워가고 있다.
그렇게 외모관리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진정한 자신의 필요를 채울 기회를 소홀히하여,
자신의 삶을 충실과 진정으로 체워줄 내면의 정신적인 필요나, 영적인 필요를 멀리하게 된다.

그 다음단계의 필요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만족해지려는 필요로,
정신적인 필요를 위해,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정신적인 노동을 통한 자기의 필요에 부응하려 한다.

더 나아가 정신적인 필요에는 여러가지 사람에게 필요한 요구들이 있다.
자신의 생존에 대한 안정을 얻으려는 소속감의 요구가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소속감은 가정을 통해 얻게 된다.
경제적인 동기에 의한 여러 단체나,사업체나, 자발적인 동기에 의한 사회기관이나,
종교기관에 소속하는 것이나, 동호인모임이나, 친우모임등에 참여하여 그 필요를 채운다.

그리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인정을 받으려는 필요를 또한 가지고 있다.
이 필요는 다른사람과의 관계에서나,
혹은 자신의 일들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동기로, 자신의 유일성과 객체성을 인정받으려 한다.
이 필요는 자신의 삶의 필연적인 동기를 부여하여,
무엇에든지, 자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하여,
거기에 자신의 생활의 의미와 삶의 만족감을 얻게 한다.
이 자기인정을 받으려는 필요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가 소속한 곳에 필요한 영향을 주기도 하고,
그 단체나 기관을 발전시키는 역활도 하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하는 일들이나,
삶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인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필요가 있다.
자기 성취를 얻으려면 자신의 삶속에 있는 장기적인 시간과 지속적인 자기노력의 투자와,
그것을 얻으려는 단계마다의 과정들이 있다.
단기적인 성취하고자 하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장기적인 성취를 얻으려는 일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일들중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내가 이루어야 할 성취적인 일들을 갖고 사는 것이
인생을 길게 그리고 흔들림없이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자기 성취에 대한 강한 동기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분야에서나
혹은 자신들이 속한 모든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며,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필요의식이 되어 자신의 삶을 보람있고 가치있게,
그리고 생산적인 인생을 만들어 간다.

언제나 사람은 가장 고상한 필요를 따라 살아야 할 명제가 있는 것은
사람이 육체적인 몸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고,
이 몸안에 담고 있는 영혼이나 생명의 가치
(이 가치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는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수 없는 자신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있어야 온 천하도 있기 때문이다) 가
너무 소중하기에 그 영혼이나 생명의 필요에 강한 반응을 보일 동기부여가 있는 것이다.

이 영적인 필요는 일시적이지 않으며, 어리석지도 않으며,
인생을 약화시키지도 않으며, 인생을 헛되게 낭비하지도 않게 한다.
그리고 영적인 필요는 가장 인간적이며, 신앞에 갖추어야 할 사람됨의 도리의 필요이다.
영적인 필요를 제치고, 육체적인 필요나,
정신적인 필요를 아무리 따라가도 사람은
자기자신의 생명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자신의 전체적인 삶의 필요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렇듯 사람에게 필요한 영적인 요구는 평생 사람을 만드는 작업이며,
결국 신앞에서 자신을 구원할 명제의 필요이다.
사람이 신으로부터 나와서 신에게로 돌아갈 운명이라면,
사람은 자신의 소속감이나, 인정감이나, 성취감이 그안에서 만 영원한 가치가 있으며,
그리고 그 필요안에서 자기인생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신은 사람의 마음깊은 곳에 그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영혼의 욕구를 심어 놓았다.

사람이 신을 떠나 살수 없는 것이
신을 없다고 부정하는 무신론자의 의식속에
신의 의식이 뚜렷이 부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신은 자신에게 부정된 존재이나,
그 신은 엄연히 그 사람의 인생중심에 자리잡고 있어,
신에 대한 그릇된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흐리게 하며,
쓸데없고 무익한 일로 자신의 낭비를 만들게 되어,
자신의 진정한 필요를 무시하고 살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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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

사람은 생각(두뇌안에 있는 감정이나, 감각의 흐름과 연관된 논리적인 활동의결과)할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늘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생각을 할 줄아는 인생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기가 겪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할수 있다.
그런데, 생각없이 살아간다고 가정해보면, 상상하기가 조차 싫은 시도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생각이 없이 혹은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생각하는 자신의 두뇌의 기능이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며,
그 기능이 감퇴되어, 영혼이나 정신에서 나오는 생각이 이끄는 대로 살지 않고,
몸의 육체의 본능에서 나오는 원시적인 생각하는 것에만 의존하여 살아간다고 할수 있겠다.

사람은 생각의 능력에 따라, 각기 인생의 성장이나, 성숙도의 차이가 있다.
피아제의 인간발달의 이론에 의하면,
두뇌의 생각하는 능력정도 에 따라 인생의 여러 단계(어린, 청소년, 어른)를 구분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보는 대상을 막연히 보는 것에서 생겨나는 원시적인 생각하는 단계가 있으며,
학교 연령의 나이가 되면, 사물과 대상을 보고 구체적인 생각을 하는 능력의 단계로 발전한다.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한 추상적인 생각이나
추리하는 능력을 배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단계로, 다차원적인 생각을 하는 훈련을 터득하여,
사물에 대해 종합적으로 생각하는 단계가 있으며,
그리고 더나아가 생각을 정리하여,
시스템적인 생각을 할줄 아는 단계와
그리고 역설적인 원리들을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왜 공부를 하는 가 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사람이 공부를 해나가는 중에, 주어진 문제들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
그 문제들을 풀고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두뇌의 암기하는 기능이나 사물을 생각하는 기능의 적용을 통해,
두뇌의 생각하는 작용을 지속적으로 활성화를 시킨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언어 습득이나 확대를 통해
자신의 생각하는 방법을 효과적으로 터득하는 훈련을 하게 되어,
자신의 생각시스템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생각을 조직화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개발하며,
그리고 자신의 생각하는 정신세계를 체계화하여,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생각에는 크게 생각이 어디서 부터 시작되는가에 따라,
즉 생각의 출처에 의해 육의 생각이 있고, 영의 생각이 있다.
육의 생각은 육체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육체의 본능이 욕구하는 것을 추구하는 생각이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가 선한 상태 였으나,
신앞에 죄를 범하므로 그 본성의 기능이 변질, 타락하여, 악한 상태로 있어,
그 본성안에 있는 육체의 생각을 좇아가다 보면,
사람들의 몸을 낭비(소비)하게 하고, 억제하지 않으면,
나쁜 방향으로 인생들을 몰아간다.

영의 생각은 영혼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인간의 육체를 조절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여,
나타난 현상에만 반응하지 않고,보이지 않는 영적세계나,
자신을 보다나은 상태로 발전하게 하는 생각이다.
이 생각에서 신을 생각하고,
영혼의 세계를 생각하고,
도덕적으로나 양심의 기능에 대해 올바른 반응을 하며,
생각하는 결과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며,
인생을 고상하게 하는 생각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차원의 구분에 따라,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있다.
1차원의 생각은 육체가 그 출처가 되며, 본능의 욕구나 나타난
사물이나 현상에 반응하려는 생각이다.
2차원의 생각은 두뇌의 기능이 활동으로 생각하는
정신세계의 여러가지 현상이나 이념들을 생각하는 생각이다.
3차원의 생각은 영적인 세계의 것들을 생각하는 생각이며,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나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단계의 생각으로
사람의 육체나, 정신의 세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생각이다.

생각의 결과의 영향에 따라 나눌수 있는 자신의 삶에 새로운 아이디어나,
삶에 보탬이 되게하는 창조적생각이나 생산적생각이 있고,
반면에 자신의 삶에 해를 가하고, 자신을 파멸케하는 파괴적인 생각이 있다.

다음의 생각들은 병적인 생각들이 있다.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그 자체에 빠지게 하여 생각하는 자신의 주체나
생각의 방향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여
자신의 정신의 상태를 헛되게 하는 공상이 있으며,
생각하는 자신을 혼란시켜,
실제적이지 않은 것들을 좇아가게 하는 망상이 있다.

생각하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능력의 정도에 따라,
생각하는 자신을 강하게 영향을 주어,
자신의 의지를 움직이게는 적극적생각이 있으며,
반면에 생각의 힘이 자신의 의지의 동기에 미치게 하지 못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는 소극적생각이 있다.

생각하는 자신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주는 것에 따라,
생각하는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하는 긍정적 생각과
생각하는 자신에게 전반적으로 안좋은 방향으로 몰아가는 부정적생각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에 느끼는 분위기에 따라 구분되는 생각이 있는데,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에 긍정적인 느낌
(사랑, 기쁨, 담대함, 평안, 확신, 신뢰, 용서등)을 갖게하는 긍정적인 감정의 생각이 있으며,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에 부정적인 느낌(미움, 슬픔, 두려움, 수치, 의심,걱정, 정죄등)
을 갖게하는 부정적인 감정의 생각이 있다

양심의 기능이나 도덕률의 정도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서,
생각하는 자신에게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나쁜 생각이 있는가 하면,
생각하는 자신에게 양심이나 도덕의 정도에 도움을 주는 좋은 생각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릇것인지의 판단력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따라,
생각하는 자신을 그릇되게 하며, 남에게 해를 가하게 만드는 악한 생각이 있으며,
반면에, 생각하는 자신을 도와주며,
자신을 바르게 인도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게 하는 선한생각이 있다.

생각하는 기술이나 능력정도에 따라,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의 기능을 극대화시키게 하여,
생각을 활성화되게 하는 깊은 생각이 있으며,
반면에, 생각하는 자신의 기능을 약화시켜, 더 나은 정신의 생각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낮은 생각이 있다.

그리고 더나아가, 깊은 생각하는단계의 생각들이 있다.
그 생각들 중에 명상의생각은 생각의 집중력에 의해,
자신의 정신에 떠오르는 것에 집중하여, 생각하는 것을 극대화하여,
더 넓고 깊은 생각의 세계로 들어가, 머물게 하는 생각이다.
여기에 종교적인 명상이 있으며,
요가나, 정신의 기나 도를 얻으려는 수련을 하는 명상의 생각도 있다.

또한 그 명상의 생각하는 스타일중에
어느 한 주제나 대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케하는 묵상의 생각이 있다.
종교적인 묵상이 여기에 해당되며,
기독교인의 묵상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신의 성품과 행적들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의 은혜를 맛보게 하며,
신과 인간의 관계의 설정에 도움을 주며,
신과 인간의 교류의 증진에 도움을 주며,
혼란 스러운 사람의 영혼의 상태을 치료하며,
마음의 병든상태를 회복시켜주며,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모든 일에 대해
올바른 결정을 하게하는 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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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추구의가치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향해 할 수있는 생각은
그 영혼이 신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본성안에 있는 육성은 자신의 몸이 감지하는 오감에 따라,
나타난 감각의 충동에 의해 살려고 한다. 그
리고 사람의 이성은 생각을 좇아서, 지식을 추구하고, 철학을 이야기하고,
시를 노래하며, 책을 읽거나, 사상들을 추구한다. 그
래서 육성과 이성은 둘다, 세상의 나타난 법칙을 따라 살기를 희망하지만,
사람안에 있는 자신의 영혼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찾아,
신의 존재를 찾아보고, 자신의 영혼이 신에게서 나왔기에,
자신의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원상복귀에로의 순례의 길을 가려고 한다.

우리의 육성은 순간의 감각의 즐거움을 맛볼려고 하여,
음식을 탐하고 즐긴다든지, 본성안에 있는 감각적 느낌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맛집을 찾아 전국을 순례하며, 맛을 즐기는 미식가들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속에 있는 성적인 경향은 남성은 계속해서,
여성의 미나 매력에게로 끌리고,
여성은 남성의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동경을 하게 된다.
특히 남성에게는 여성의 육체의 미에 쉽게 빨려들어,
그것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남성의 취미나, 관심을 사로잡는다.
여성은 사랑을 사랑하지만, 남성은 여성의 성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이성은 지식을 찾아 끊임없이,
정보를 캐려고 하며,지식에 대한 욕구를 발산하여,
밤늦도록 책을 읽는다는지, 혹은 밤새토록 인터넷의 정보의 바다를 헤매며,
새로운 것을 찾아, 이성의 지식욕구추구에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나서는 뜻이 통하고 말이 서로 통하는 지인들과 함께 모여,
즐겁게 여러가지 이야기와 대화를 나누는 정신적인 활동을 즐긴다.
혹은 지식의 양이나, 정보의 습득훈련을 통해 타인보다,
지적인 재산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동기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영성은 어떤가?
그분야는 사람에게 가장 소홀히 하기도 쉽고,
그것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없이도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도 않고,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추구함이 없이 살아도
별로 자신의 삶에는 상관없는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사람안에 있는 영혼에 대한 갈망이나,
영적세계의 추구에 대한 시도를
우리의 육성이나 이성의 지나친 그것만을 추구하는경향들이 길을 막고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도
영성을 개발하는데 제한을 받기도 한다.

사람의 생명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 가?
사람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의 전체의 몸인가 아니면,
사람안에 있는 모든 기능을 조정하며, 정신적인 활동을 하는 두뇌인가?
아니면 뇌사상태가 되어도, 사람의 생명이 붙어 숨쉬게 하는 심장의 고동소리인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자신의 영혼에 감추어 있다.
모태에서 신으로 부터 받은 영혼이 신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숨을 쉬게 되고, 생명의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며,
세상의 삶을 끝날때에도, 그 호흡이 멈추면서, 사람의 영혼이 떠나면서,
그 사람의 생명이 이세상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생명의 원천지인 그의 영혼은
다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어디로 가든지 간에 가게된다.

바쁘게 살아가는 자신에게 한번쯤은
자신의 영혼의 존재를 인식해보는 것도 후회스럽지 않고
자신의 인생의 삶 속에서, 아주 유익한 추구이며, 자신의 생명을 돌보는 고상한 시도이다.
자신을 향하여 “내 영혼아, 너는 너를 생기게 한 너의 존재의 근원을 향하여, 가고 싶지 않은가”라고 물으면 자신의 영혼은 그 존재를 찾아가는 순례의 길을 나서게 되며,
결국에는 그 영혼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인 신을 찾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신은 사람의 영혼(생명의 원천)을 두고 어떤 혜택을 베풀어,
사람의 영혼에 유익을 얻도록 하였을까?
사람에게는 원래 그 자신의 영혼의 생명이 신과의 교류안에 살아갈수 있도록 하였으나,
인간의 반역으로 인한 죄를 범하므로,
그 자신의 영혼의 눈이 감기어 자신의 생명의 진정한 실체나 상태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신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사회에 신의 존재와 같은 똑같은 신과 인간의 똑같은 두성향을 가진 존재를 보내어
그로하여금, 인간의 문제를(죄와 그 결과인 것들) 해결하여,
신을 만날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또한 신은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설정해 놓았다.
사람이 육체의 욕구에만 따라 가다보면 한없는육체의 탐욕의 도구로 전락되어,
결국에는 육체안에 있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거기에 머물러, 육체가 이루어진 자신의 몸이 결국 사라질 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의생명이 흙안에 담겨있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에,
사람이 흙의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자신의 생명의 원천인 영혼을 발견하여, 육체의 한계를 벗어날수 있도록 하여,
결코 육체가 사라지는 순간에도
자신의 생명의 갈길에 대해 두려움없이 맞이 할수가 있을 것이다.

외모지상주의, 지식만능시대에 살고 있는 인생들이,
육체의 매력에만 이끌려 살기보다는
진정한 자신 속에 있는 매력을가질수 있도록,
자신의 영혼(자신의 생명의 원천)을 위해 관심을 갖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그 자신이 더욱 보배스러운 영혼을 담은 육체의 아름다움 가운데 살게 될 것이며,
또한 지식과 정보의 홍수속에서 끊임없이 지식추구하는 방황에서
혼란스러운 자신의 정신의 세계를 안정되게 정리할 수 있는
영혼의 진리를 추구하는 그 자신에게
이성의 역활도 더욱 자신의 삶을 빛내게 할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영적인 세계의 영향이 건전한 정신세계를 이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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