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용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사람은 어릴때 태어나면서 많은 주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인간관계안에서 자신을 키우며, 성장한다.
자신을 형성하는 부분에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대인관이나, 가치관이 정립이 되어간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가누지 못하며
자아에 눈을 뜨지 않을때에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의식세계에서 보다 무의식세계의 심층에 남아,
자신도 모르게 자아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
그 형성되어지는 자기가 이해하는 인간관계에서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가해자라기 보다는 피해자로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주변인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런 기억들은 자신의 자아의 형성에 뿐 아니라,
현재의 자기표현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왜곡되고 상처난 인간관계의 기억들에 대해
피해자로서 자신은 가해자들에 대해 일정한 자기대응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과거의 상처에 잡힌 자신은 그 가해자를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과 사람과의 용서의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성립되는 사회적인 환경에서 발생이 된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용서하는 것은
잘못된 인간관계의 상태에서 화해와는 것과는 다르지만,
대체로 용서가 안되면 상처난 인간관계의 화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용서에는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화해주도적인 입장에서 필수적이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나 상대방을 용서하는 일에는
반드시 인간관계의 화해가 필수적이지 않다.
이말은 타인에 대해 화해가 이루어질때,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는 상관없이 인간관계를 어느 정도 정상화할수 있다는 의미이다
( 이말을 현실에 적용해서 생각해보면,
자신과 원수관계에 있는 상대방에 대해 용서가 안되지만,
부득이 현실적이고 필연적인 인간관계에서 용서를 접어두고,
그와의 화해를 하게 된다).
자신의 인간관계의 처세에 대해 생각해보면,
과거에 대한 부정적인 인간관계의 기억은
현재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인간관계의 처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고로 현실의 인간관계를 잘 하려면,
과거에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자아가 잡고 있는 그무엇
(holding the negative propensity like anger, rage, etc)을 풀어내어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 쓰이는 용서의 의미를 가진 “샤락”이라는 단어는
“현재를 방해하는 것, 과거의 것들을 옮겨 놓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그것을 잡고 있으면,
자신이 그것의 영향을 받게 되며,
자신의 정신적인 활동이나 혹은 현재의 대인관계의 처세나 성향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극단적인 예도 있다.
어느 나이가 중년이 미국인 주부가 어깨통증과 신경통으로 여러 해를 고생하였다.
그것을 고치려고 약을 먹는다든지
병원에 가서 의사의 처방을 받았지만,
뚜렷한 병명을 알아내지 못하고
그 증세는 점점 더 나빠지게 되어, 고생을 하였다.
그녀는 그문제로 고민을 하게 하다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문 상담인을 찾아가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 문제에 대해 상담하는 중에
그 여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깊은 굴곡의 상처난 흔적이 떠올라,
그것을 생각해보니 오래전에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그 원수같은 사람에 대한 극단의 미움의 감정이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 문제를 끄집어 내어 다루는 중에
그 문제에서 자신이 놓여 나게 되자.
그 통증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자
문제가 해결된 경우이다. 필자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성경신약에는 용서라는 말로 쓰이는 헬라어 “아피에미”라는 말은
“보내는 것,혹은 면제하다.감면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자신안에서 자신을 잡고 있는 그것을 내어 보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스라엘나라에는 7년이 안식년이나 49년이 지나 50년 째되는 희년마다
그 나라에서 서로 빚을 진 사람들을 빚을 탕감, 면제해주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7년마다 혹은 50년마다 상처난 사회적인 상태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런 면제의 은혜를 통해 인간관계를 새롭게하는 일들을 하여
사회를 새롭게하고 민족의 삶을 유쾌하게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보통 부모가 자녀들에게 여러가지 규율을 세워 놓고,
그 규율이나 법칙으로 자녀를 가르치고
혹은 훈련하거나 때로는 매를 대거나 벌을 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녀들이 만족을 하는 그리고 부모에 대해
좋은 부모관을 갖고 있는 자녀들은 자녀들에게 관용하는 부모일 것이다.
때로는 부모된 필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높은 수준이나 엄격한 규율을 적용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규칙의 위반이나, 잘못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쉽게 분노하거나 벌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부모의 정해놓은 규율을 어길 때에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용서를 기대한다.
그리고 자녀들은 항시 부모들이 자신들에게
관용하는 부모가 되어주기를 좋아한다.
이런 용서하는 마음이나 관용하는 태도는
부모가 자녀의 입장만 되어 보면 어렵지 않게 자녀들에게
그런 태도로 대할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시행착오나, 쉽게 오르는 화를 다스리지 못하기도 하지만,
자녀들을 대하는 기본철학에 있어서는
그런 넓은 마음에서 나오는 교육의 정신을 가지면 될 것이다.
멀리 내다보는 부모의 자녀교육의 귀중한 지침이 될수 있다.
원래 인간사회나 대인관계에서 서로 용서해주는 습성은
인간을 지으시고, 정해진 테두리안에서 살도록 되어있는
인간의 현실을 스스로 박차고 나가,
허물을 범하며,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용서를 하였고,
그 용서를 통해 관계회복을 바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하시는 것으로
자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며, 받고 있으며,
앞으로 그 용서를 받을 사람들인 사는 사회나
그들의 인간관계에서의 서로 주고받는 용서의 문제는
언제나 빨리 풀면 좋을 성 싶은
아주 중요한 풀어야 할 인간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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