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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어떤 진행형의 삶인가?

로마서 1:16-17
16. 나는 이기쁜소식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유대인에게만 해당되었으나 이제는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어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17. 이 기쁜 소식에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쓰인 말씀과 같습니다.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며,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만한 놀라운 뉴스라고 할수 있다.
바울은 이 기쁜소식에 대해 즉 자신이 전하는
그 복음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확실한 사실과
자기 경험에서 온 진리의 증거가 있다.

기쁨의 소식이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뉴스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병을 치료할수 있는 약이나 처방에 대한 뉴스는
그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소식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지식의 힘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

자기가 확신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준 그 무엇이 그이의 삶을 받쳐주는 것이 아닌가?
각자는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준 그 무엇을 가지고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의 가르침혹은, 사상이나, 영향력등일 것이다.

자신에 대해, 자신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사람에게는 자신의 학문일수 가 있으며, 어느 경우에는 자신의 재능이나,
혹은 배운 기술일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자질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며,
자신이 세운 인생관은 자신의 삶의 방향에 영향을 준다.

자신의 자질은 자기가 배우고 터득한 좋은 경험들이나
개발된 재능으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실력인 것이다.
자신의 자질은 무엇을 할수 있는 자격이 될만한 능력이나
혹은 무엇을 이룰수 있는 자기의 기본적인 실력이다.
이 능력이나 실력은 사람의 자신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할수 있다.
사람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 타고난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는 자기훈련의 지속적인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인가?
두가지를 다 생각해볼수 있다.

먼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이 중요하다.
자기가 세운 뚜렷한 자기만의 삶의 철학은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버팀목 역활을 해준다.
후회없는 인생은 자신이 확신하는 바를 따라 살아가는 인생일 것이다.
자기가 확신하는 것을 좇아,
자신이 해야 할일을 하면서 살면 그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성품이나 인격에 있어서 자신에 대해 부끄럽지 않게 여기며,
자신이 하는일에 대해서도 흔들림이 없는 자세로 살아가면
그의 삶을 통해 많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것들이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그것이 건강일수 있으며,
어느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성실함이 있을 수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잘하는 한가지 기술이 있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보다 더 중요한 자신이 갖고 있는 놀라운 것은
자신에 대해 확신하는 바를 추구하며,
그 추구를 통해 자신의 삶을 투자하며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타락한 본성으로 인한 인간의 심적상태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것들 중에 죄책감과 수치심이 있다.
죄책감은 구체적인 죄나, 죄짓는 자신의 일면에 대한 것이라면,
인간이 가지는 수치심은 인간의 마음의 전체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그 수치심에는 건강한 수치심이 있는 가하면 해로운 수치심도 있다.
건강한 수치심은 좋은 마음의 기능을 가진 인간의 양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신이 그릇된 일을 할 때에나 자신속에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자신을 고쳐서 바른 일을 하려고 노력을 하게 한다.

해로운 수치심은 행동하는 구체적인 것보다는 행동하게 하는 자아에 치중하는 것으로
지나친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는 자기비하나,
혹은 자기모멸에 가까운 상태의 자아학대에 해당한다고 할수 있다.
그것이 지나치면, 병적인 상태의 자아가 형성이 되어,
무엇이든지 자신의 눈으로 모든 사물에 대하는 자신을
지나칠 정도로 병적으로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하늘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나
더 나아가 이웃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는 태도로 살아가는 인생의 철학을 갖고 산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일 것이다.
여기 복음을 전하는 이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은
이러한 분명한 인생의 방향을 통해,
후회없이 살아가는 자신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시인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럽지 않는 인생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 인하여 그 행복감과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러면그가 가졌던 복음은 무엇인가?
그가 소유하고 전했던 그 복음에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그안에 생명력이 있다.
그안에 죽음을 맛본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죽음을 맛본 사람들 어떤 사람일까?
죽고싶은 심정을 경험한 사람들이며,
죽음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사는 경우일 것이며,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이 되어
무엇이든지 붙잡으려는 다급한 상황하에 있었던 경우일 것이다.

사람은 죽을 운명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의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병으로
인간속에 있는 죄가 인간을 끝임없이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아,
수도 없이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오는 절망,
존재불안에서 오는 절망, 죄의 깊은 영향력으로 인한
절망적인 자신으로 인한 좌절감과 불안감으로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삶에 대한 존재의 불안에서 겪는 위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고 싶은 심정으로 내몰게 한다.

삶의 각종의 스트레스는
시시각각 사람들에게 불안과 우울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기도 한다.
이렇게 어둠속에서 헤매이는 인생들에게
이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절망에서 소망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무의미에서 가치있는 삶으로 바꾸어 가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사람을 살리며,
병든 인생을 고치며, 상한 심정들을 새롭게 하여,
밝은 광명의 빛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하나님안에는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의 힘이 있는 것과 같이
병들고 상하고 망가진 인생들을 고쳐 새롭게 하는 재창조의 능력도 있다.
그안에서는 모든 인생들이 새롭게 변화될수 있으니,
하나님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인생들의 진정한 의사이며,
비틀거리며 시달린 인생살이를 살아가는
수 많은 인생들의 유능한 조련사이다.
그는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며,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내신다.

기쁨의 뉴스는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줄만한 놀라운 사실과
거기에 모두를 기쁘게 해주는 반가운 소식이 담겨있는 것이다.
지난 날에 기뻐하고 즐거웠던 기억들은
우리의 삶에 행복으로 다가오는 일이나 사건이다.
어느 날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 는 것이나,
혹은 고대하고 기다리던 입시합격의 통보나,
혹은 취직시험을 치루고 난후에 입사통지를 받는 소식등이다.

이렇게 지난 세월에 여러가지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소식이 있었다.
나자신에게는 행복해하고 좋아해하며, 그소식에 감격해 하던 기억들,
나에게는 하나님을 만난 일이 가장 자신의 생애에 의미있는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복음은 기쁨을 담고 있는 좋은 뉴스이다.
한국이 지난 날 2002년에 있었던 월드컵에서 준우승(4위)을 한 소식은
모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뉴스였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복있는 소식이다.
그소식은 만인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아름다운 소식이다.
망망대해에서 난파를 당한 조각배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
구원선이 가져다 주는 목마른자에게 시원함을 주는 기쁜소식이다.
누구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죄때문에 죽어야 할 자신에게 형벌과 죽음에서 해방을 얻는 기쁨을 맛본다.

다만 사람에게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할수 있는 믿음이라는 그릇이다.
믿음만이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내세울수 있는 인간의 가치를 인정받는 길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인간을 향한 구원의 약속들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 그분을 찾으며,
그분이 믿음으로 그분을 찾는 인생들에게 당연히 돌아갈 생명과
그에 따르는 축복의 상급을 주시는 분이다.

무엇이 사람을 바르게 하는가?
도덕인가, 인생의 수양이나 혹은 고고한 철학적 가르침인가?
도덕은 인간에게 바른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한다.
도덕이나 율법은 사람의 마땅한 길을 제시하나 인간을 도와 줄수는 없다.
그 도덕률을 지키면, 그 사람은 올바르게 될수 있으나,
그런 것들을 다 따라 행하기에는
인간의 능력이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인생을 바르게 건강하게 수양하는 것으로 극기하며,
자신을 수련하여, 고도의 훈련의 과정을 통해
어느 수준의 고양된 인격은 소유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사람이 온전해 질수는 없다.

또한 고고한 철학적인 지식도 사람에게 희망의 능력을 줄수 없는 것은
그 지식들에 대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어두운 동굴들에 갇힌 사람들이 그 동굴들을 헤쳐나올 지식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그 철학적인 지식은 끊임없이 막연한 우주의 원리의 선상에서
무엇을 잡아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있는 인격신인 하나님과 잇닿을 수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오직 우주를 창조한 신이 인간에게 찾아와 그신을 통해 인간이 가져야 할 진리와
그 진리를 따르는데 필요한 힘과
그것을 통한 인생에게 주어진 진리를 통하여 얻은
결과에 대한 신의 배려로 인하여
모든 것이 순간속에서 사라지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주는 영생의 길과
그 인생길에서 결국 다가오는 인생의 죽음을 이길수 있는 생명의 길만이
사람들을 살리는 진정한 능력이다.
그 능력이 죽음을 이긴 주 예수님에게 있으며,
그의 오심과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
바로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이며, 기쁜 소식인 것이다.

삶이란 다양하게 진행되는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무엇으로 사는 가에 따라 그 진행형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그 진행은 무엇이 지탱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세상의 방식으로 물질의 힘으로 움직여 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인가?
보이는 현상에 의해 존재하는 물질만이 의미이며,
가치있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보이는 육체의 추구하는 것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물질주의, 육체적인 욕구, 현재적인 현상,
그리고 일시적인 상태의 추구등일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든지 사람들에게는 항상 삶의 진행형안에서 존재한다.
그 진행형은 다만 일직선상의 전진만이 있고
후진할수 없는 시간의 한계선의 삶이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와서 미래로 나가지만,
다시는 과거로 돌이킬수 없으며,
그 미래도 자신에게 현재로 다가올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삶의 진행형은 시간이라는 제한 속에 있지만,
그 제한 속에서 제한을 넘어가는 영적인 세계와
영원한 차원의 세계를 따라 움직여 갈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진행형이다.

인생의 삶이란 자신의 인생관에 의해 움직여지며,
자신을 살게하여,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이루어간다.
그리고 장래에 그것의 결과로 결정된 것을 맞이한다.

무엇을 따라 살아가는 가?
어느 경우는 철을 따라 유행을 좇아 살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유행에서 사라지면, 자신이 좇은 그유형이나 스타일은
사람들이 찾지도 않는 옛날 방식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수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유행처럼,
한때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 같은데,
사라지는 시간과 더불어 없어지며
자신의 삶의 종착인 영원한 세계에 잇닿아지는 때에는
그런 것(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이 다 무용지물로 남아있게 된다.

자신의 삶의 진행형에 사라지지 않을 것들을 추구하는 살아가는 방식으로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방식만이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설수 있게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 믿음의 방식만이 사람이 하나님에게 다가가며,
시간과 영원을 잇대으며,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하며,
사라질 물질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가치를
창출하며 살아갈수 있는 근거의 인생의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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