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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예찬

인간사회는 쌍방간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서로 믿고 혹은 서로 믿어 주는 약속의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신용사회라는 말도 특히 경제적 생활에 대해
각 사람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정능력이나 관리에 대한 믿음을 통해,
크레디 이라는 제도를 통해, 거래나 재정 관계에서 믿음으로
서로 거래 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크레디카드를 발행하여 제시하는 회사가
수여자에게 돈을 감당할 재정능력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그를 신뢰하고,
카드를 내주며 그것을 사용하게 한다.
만일 크레디카드 사용자가 지불능력이 없는경우에 파산이 되는데,
미국에서는 자신이 감당할수 없는 재정관계나 부채가 발생시에는
파산신고를 하여 자신을 파산자로 설정하여,
자신이 재정을 감당할수 없는 자로 판정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의 재정능력에 대한 믿음의 상실일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믿음은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버스나 택시를 탈때에도 운전을 하는 기사들의 실력을 믿고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처럼,
모든 일상에 일어나는 일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에 생활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남자들이 이발소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이지만,
이발사에게 자신의 얼굴을 맡기고
수염을 베는 면도를 하게 하는 것도 일종의 신뢰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자들인 경우에는 아이를 출산하는 산모가 산부인과를 의사를 신뢰하고
자신의 몸과 아이의 생명을 그 의사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사는곳마다 필요한 인간의 가져야 할 성품이며,자질이다.
청춘남녀간의 연애를 하고, 혹은 더나아가 서로 뜻이 맞아,
평생의 반려자로 맞이하는 결혼에도 서로에게 믿음과 깊은 신뢰심이 요구된다.
그들의 연애나 결혼관계에 있어 서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서로 상대방의 인격을 맞대어,동등한 관계에서 성립되어있으면,
그 관계는 더 돈독하며, 건강한 남녀간의 관계라고 할수 있겠다.

정부와 국민사이에도 서로 보이지않는 믿음의 관계가 성립된다.
정부는 국민을 믿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며,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그들의 리더쉽을 따를때에,
좋은 국가의 상태를 유지하며, 발전하게 된다.
어느 단체의 리더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서로간의 신뢰의 관계가 필요하다.
리더가 사람들에게 할수 있는 중요한 것중에 하나가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믿을수 있는 사람으로 각인되도록
그들에게 신뢰심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서로를 믿어주는 신뢰의 관계가 가정을 든든하게 세우며,
자녀의 건강한 성장을 통해, 가정의 발전을 이루어 가게 된다.
자녀가 조금 잘못했을때에, 자녀들의 인격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불신의 말을 통해,
부모와 자녀들의 신뢰의 관계가 손상을 입게 된다.
자녀또한 자신들의 부모들을 향해, 끝까지 그 부모들의 사랑과 돌봄을 신뢰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순종하면, 그 가정은 서로 신뢰하는 가정이 되어,
자녀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험한 세파의 여러가지 어려운 일을 겪어도
능히 그 어려움들을 헤쳐나갈 힘을 가정으로 부터 공급받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믿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은 신뢰심을 갖고 있으면,
그는 무엇이든지, 자신에 대한 자질과 능력을 믿고 있기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경우는 자신있게 아무것도 할수 없을 것이다.
어릴때부터 부모가 자녀들에게 그들의 인격을 믿어주는 습성을 통해,
자녀들이 자신에 대해 믿고 신뢰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신뢰의 이메지(자아상)를 가져서,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수 있을 것이다.

믿고 사는 사람과 무엇이든지 의심하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모든일에 있어 믿음은 인간의 삶을 바쳐주는
근본적인 토대의 사람의 가져야 할 성격이며, 특성이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에게 사기를 당했다든가,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고,
혹은 자신의 신뢰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경우에,
모든 것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럴경우에는 정말 자신이 믿을수 있는 사람과의 지속적인 관계나 가르침을 통해,
그런 불신하거나 혹은 모든 일에 의심하는 생태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 태도로 살경우에 현실생활에서 소극적이기 쉬워지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발전하기 쉬어지며,
자신의 미래의 전진적이고, 진취적인 삶에 장애가 된다.

물론 우리가 처음 만난 사람을 무조건 신뢰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살필줄 아는 사려깊은 분별력이 모든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귀어 보는 기간이나 겪어보고 나서 그 사람의 어떠 함을 알게 될 것이다.

서로 믿어주며 서로 신뢰하는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더 발전시켜주는 삶의 환경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신뢰하는 사이가 되려면
자신부터 믿어주는 사람,
그리고 남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이 믿음의 태도는 원래 어디서부터 왔는냐 하면,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이땅을 살권한을 부여하는 가운데에,
그들은 신과 신뢰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신의 돌봄의 테두리안에서 서로 신뢰하며,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의 상태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최초의 사람들이 얼마의 기간을 사는 동안,
삶을 살면서, 신의 의도를 위반하고, 신이 명하는 바를 거역하게 되어,
신과 인간의 믿음과 신뢰의 관계가 깨어져 버렸다.

그래서 그때부터 사람들이 사는 삶의 환경은 믿음이 깨어진 상태에서 살게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태어날부터 이 믿음과 신뢰의 관계를 계속유지하면서 살기란 쉽지않고,
이 믿음이 무너지면서, 인간안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고,
사람들이 사회에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갈등과 투쟁과 전쟁이 야기되어, 사람들이 사는 곳이 험악하게 되었다.

그런 인생들에게 신은 찾아와서,
그들에게 잃어버린 믿음의 힘를 주며,
그들과의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찾아 가는 것에서부터,
신과의 만남을 통하는 것이나,
그리고 더 나아가 신과의 모든 교제안에 살아가는 데에,
사람들이 가져야 할 제일 필요한 것은 이 믿음이다.
사람들이 신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것도
지식을 추구하는 이성의 능력으로는 신을 알수 없으며,
신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도 모호하게 된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더듬어,
자신이 더듬는 대로 인식하는 정도밖에는 안된다.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자아의 눈을 떠야, 신의 본질을 알게되듯이,
신을 추구하는 것은 이성의 도구로 한계가 있으며,
믿음의 단계에 이르러야 신과의 관계설정을 통해,
신과의 신뢰의 교제의 경험을 통해 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을 경험하는 것은
단지 단순히 이성의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신뢰의 관계의 형성과 교제를 통해,
진정한 앎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자가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는 것도 지식의 단계를 넘어서,
확신하는 단계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연구한 이론이나 발견이나 발명이 효력있는 사물이 되는 이치일 것이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그 믿음은 필수적이며,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모든 일을 추진하고자 하는데에,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밑거름이 바로 자신이 가져야 할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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