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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9시 36분인데 하루종일 일한 것 같은 기분이다. 오늘은 고3 아드님의 10월 모의고사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택시를 타고 병원 도착하니 7시.
7시 15분 시작하는 임상과장회의에 참석, 8시부터 검진을 시작했다. 예약접수현황을 전산조회하니 오전중 23명. 한군데 빼고는 비교적 잘 아는 사업장이라 순조로운 하루를 예감했건만.
68세 경비직 남성 노동자가 들어왔다. 가운도 제대로 여미지 않고 이 얘기 저 얘기 하시는 걸 들으면서 오늘의 예감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혈압을 진단받고 10년째 투약중이면서 2년전부터 간헐적으로 수분이상 가슴이 조이는 협심증 의심 증상이 있어 주치의가 3차병원에 가라고 해서 갔다가 정밀검사는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간단한 검사만 하고 응급 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혈관확장제만 받아서 증상 발생시에 투약을 네다섯번 정도 했다고 한다. 24시간 야간근무를 하고 2일 쉬는 형태의 교대근무자이고 야간시간대에 12시~5시사이에 침대가 있는 방에서 수면을 취할 수 있어 근무부담이 높은 편은 아니다. 수면에도 문제가 있는데 소변때문에 푹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한두시간마다 깬다고 했다. 전립선 비대증으로 내과 주치의가 처방해주는 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꾸준히 먹지는 못한다고 하는데 가끔씩 빼먹는 것인지 가끔씩 드시는 것인지 모르겠다. 뇌심혈관질환 가족력은 없는지를 확인하는데 모친이 뇌출혈로 두 번 쓰러졌고 3년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말하는 중간중간에 heart, routine, doctor 등 영어 단어를 섞어서 쓴다. 꼭 야간근무를 하셔야 할 상황인지를 물어보았다. 경비직 노동자들이 대부분은 생계형이지만 더러는 그냥 집에 있으면 더 아프고 늙는 것 같아서 하시는 분들도 있어서 해 본 질문이다. 결국 본인은 원래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사업을 하다가 파산을 해서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꼭 해야 한다고 한다. 심장내과 진료를 보고 필요하면 치료를 받아야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길고 긴 설득과정에서 보고 들은 것은 다음과 같다. 배울 대로 배웠으나 사십살이 되도록 변변한 직업도 없이 얹혀 사는 아들, 심리학 박사과정에 있는 딸, 이산가족 상봉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나 행정상의 착오로 무산되어 기자회견자에서 쓰러진 모친, 심장정밀검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들었으나 검사를 안 한 이유는 사실 돈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희미한 기억. 늙어서 이렇게 살게 될 줄은 몰랐다는 긴 한숨.
대기자 번호표를 보니 다른 수검자를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서 끝까지 듣지 못하고 보냈다. 그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60세 남자로 시설관리업무 교대근무자였는데, 작년 검진결과를 보니 당화혈색소가 8.2였다. 현재 인슐린 투여중인데 23년간 당뇨병 치료를 하면서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지는 잘 알지만 실제로 관리는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큰 병원 작은 병원 여러 병원 다녀보았으나 결국 자신이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는 깨달음으로 동네의원을 다니는데 그간 당화혈색소 검사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야간작업을 한 건 2년 6개월이고 본인도 야간작업이 혈당관리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서 들어온 사람은 40대 방송 송출 작업자. 작년 검진결과 혈당이 살짝 증가되어 있고 재작년에는 수면장애 증상이 심하다가 작년에 완화되었다가 올해 다시 악화되었다. 재작년에는 우울증상이 좀 있어서 수면문제가 더 심했던 것 같고 올해는 우울증상은 없었다. 본인한데 작년검진결과를 아느냐 물어보니 작년 검진결과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교대근무자 수면관리에 관한 자료를 주면서 수면위생에 대해서 설명했다. 근무일정은 '주야비휴'. 수면건강관리를 위해 근무 일정조정을 권고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야간작업자 특수건강진단에 대해서 회의적이라고 왜 하는 지 모르겠다고 한다. 들어보니 첫 해에 기대가 높았다고 한다. 근무조건의 개선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진지하게 설문에 답했는데 두세 번 하게 되니 그냥 대강 설문응답을 하게 된다고 했다. 변화가 이루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겠냐고 답변하면서 보내는데 내년에 뵙겠습니다. 하고 나간다. 나의 답변은 "내년엔 그 종이에 쓰인 것을 실천하고 오세요".
연달아 만난 세 명의 삶의 무게에 잠시 압도당해서 두통이 발생했는데 글을 쓰면서 조금 나아졌다. 오래전 이 블로그에 글를 쓰면서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었다. 아주 가끔씩 블로그를 찾기는 했지만 글을 쓰지는 않았다. 이렇게 오랜만에 와서 무작정 글을 써도 아무말없이 토닥토닥 해주는 블로그...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한 장면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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