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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작

작년 10월부터 12월까지 출장검진은 주 1회만 했고, 올해부터는 최소한 내년 8월까지는 원내검진만 하게 되었다. 원내검진은 내 전공인 직업병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업무이지만 지역사회 주민 건강증진 사업의 일환이니 딱히 관련이 없다고 하기도 그렇다. 주로 동네 노인들을 대상으로 국가 암검진을 하고 가끔 사업장에서 오는 노동자 검진도 한다. 오후에는 직업병 진료, 즉 산재신청을 위한 업무관련성 평가를 가끔 하고, 검진결과 판정을 한다. 하다 보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기록하는 것. 기록을 하다보면 해결방안도 생각이 나고 반복되는 업무에 지친 마음도 추슬러지더라.

 

한편 삼사월에는 여기저기가 좀 아파서 기분도 별로였고, 과연 이렇게 부실한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기가 많이 죽어서 지냈다. 오월 들어 날씨도 좋고 몸도 좀 가벼워지니 지낼 만하다. 그래서 기록할 생각도 난 거겠지. 그러니까 나는 알.고.싶.은. 것이다. 내가 하는 일들의 의미를. 그리고 우리 건강진단 제도의 개선과제에 대해서.

 

아주 멋진 양복을 입은 60세 남자가 진찰실에 들어왔다. 건강에 염려되는 문제가 있냐 물으니 혈당이 좀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다. 우리 과 검진 프로그램에서 과거 검진결과를 조회하니 없다. 그런데 본인은 이 병원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한다. 그래서 병원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확인해보았더니 타 과 진료시에 검사한 결과가 주욱 나온다. 2011년 1월 혈당검사결과는 126 mg/dl 으로, 당화혈색소는 7.9, 2008년에는 공복혈당이 434mg/dl 까지 나온 적이 있다. 당뇨병 치료의 필요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동네 의원에 가시라하면서 지금까지 혈당 검사결과를 적어주었다. 수검자가 밀리지 않는 시간에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5년부터 혈당이 오르락 내리락하는데 정확한 진단과 관리를 하지 않고 지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검진결과에 대한 사후관리를 잘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어떻게 구축되어야 할까?

 

위내시경 검사를 받으러 오신 육십대 초반 남자, 문진표를 보니 매일 소주 한 병씩 드시고 있다. 술을 이렇게 드시는 이유가 뭐냐 묻자 농사짓기 때문이라 하신다. 속이 안 좋아서 걱정이고 올 초에 다른 대학병원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한 결과 염증소견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증상이 계속 되어 검진안내 통보를 받고 또 검사를 받으러 온 것이다. 술을 포함해서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고 생활습관 관리를 하는 게 좋겠다 하자 지난 번 의사는 술 먹지 말라 소리 안 하고 조금씩 먹으라 해서 계속 먹었는데, 먹지 말라 했으면 안 먹었을 것이라 한다. 때로 의사들의 한 마디가 갖는 영향이 아주 크다는 것을 느끼고 말을 정확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내시경 검사상 약간의 염증이 있는 사람에게 식이습관 등 생활습관 개선의 효과는 어느 정도인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중년 여성. 약 먹으면 괜찮았다가 또 생기는 속쓰림, 소화불량을 호소한다. 재작년 검사결과를 보니 위축성 위염. 위축성 위염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잠을 잘 못 잔다고 한다. 음....길어지겠다 싶어 대기자 명단을 보니 시간이 좀 있다.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이야기들을 요약하면, 남편이랑 원룸임대사업을 하는데 매일 술을 먹느라 바빠서 원룸의 화장실 고장시 수리, 전구 갈기 등 유지보수를 위한 업무는 부인이 감당해야 해서 너무 힘들다는 것. 계속 들었다. 어디 가서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못하는 성격이라 풀지도 못하고 더 힘든 것 같다고 하신다. 잘 물어보니 우울감도 몇 개월간 지속되기도 한단다. 계속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첫째, 다른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하면 고통스러울 뿐이다. ( 이 대목에서 다른 사람을 바꾸려는 마음에 괴로워 하는 사람들 얼굴이 잠깐 스쳐갔다. ㅋ) 둘째, 마음의 근육을 좀 키우시라, 셋째, 그래도 힘들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으면 도움이 될 수 있다. 결국 눈시울이 붉어져서 나갔다. 우울증에 대한 선별검사와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눈썹까지 하얀 34년생 할아버지, 위내시경은 힘들어서 못 하시겠다 한다. 위장조영술(기계로 하는 거)을 하려고 했는데 예약을 잘 못해서 오늘 못한다고 속상해하신다. 재작년 위장조영술 검사결과를 보니 장상피화생이 의심되니 위내시경 검사를 해보라는 권고를 받았다. 귀가 어두우셔서 크으게 천.천.히 설명하고 다음에 시간 나면 검사받으시라 했더니, 잠깐만, 하면서 보호자를 들어오라고 한다. 비슷한 나이지만 귀도 밝고 더 총기가 있으신 보호자, 부인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들어오셨다. 슬로우 모션으로. 다시 볼륨을 키워 재방송. 79세 노인은 위내시경 검사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 선택을 의사가 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저런 설명을 하고 선택하시라 하는데, 무엇이 윤리적인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이럴 땐 엄마 생각이 난다. 나이가 들면서 그 대단했던 총기가 약해지면서 엉뚱한 소리도 자주 하시고, 한 번 얘기하면 못 알아들으시기 일쑤이다. 이런 분이 한 번 들어왔다 나가면 배고파진다. 힘 많이 써서. ㅎㅎㅎ. 이래서 열시 반이 지나면 간식을 좀 먹어주어야 하는데, 쩝 오늘은 먹을 게 없다.)

 

 새로운 업무를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건강진단이 과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위에 적은 여러 가지 의문들. 앞으로 기록하면서 답을 찾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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