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05/17

2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5/17
    [미헬스] 과두제 철의 법칙
    솥귀
  2. 2005/05/17
    프랑스 노동총연맹 CGT
    솥귀
  3. 2005/05/17
    아미엥 헌장 - CGT
    솥귀
  4. 2005/05/17
    한겨레21에서 커버로 다룬 아나키즘 - 1999
    솥귀
  5. 2005/05/17
    노동사회 리스트
    솥귀
  6. 2005/05/17
    사회주의와 휴머니즘
    솥귀
  7. 2005/05/17
    유럽 좌파정치 역사와 현황 - 정병기
    솥귀
  8. 2005/05/17
    1차 대전과 대중적 노동운동 - 김금수
    솥귀
  9. 2005/05/17
    노무현 노동정책 평가 - 김성희
    솥귀
  10. 2005/05/17
    중국 아나키즘
    솥귀

아미엥 헌장 - CGT

아미엥 헌장


아미엥에서 개최된 총동맹 회의는 CGT의 규약 제2조를 재확인한다.
"CGT는 모든 정파를 초월하여, 임노동계급과 고용주 계급을 폐지할 목적의 투쟁을 자각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를 결집시킨다."

회의는 이 선언이, 노동자계급에 대해 자본가계급이 강요하는 일체의 도덕적, 물질적인 착취와 억압에 맞서 경제적 영역에서 노동자를 들고 일어서게 하는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이라고 간주한다.

회의는 이러한 이론적 주장을 다음과 같은 점들을 통해 명확하게 한다.

생디칼리즘은 일상적 요구 속에서,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등과 같은 당면 성과물을 쟁취함을 통해 노동자 상호간의 협력과 노동자 복지를 증대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임무는 생디칼리즘의 단지 일측면일 뿐이다. 생디칼리즘은 완전한 해방을 예비하며, 그것은 오직 자본가 계급의 몰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생디칼리즘은 행동수단으로 총파업을 인정하며, 오늘날 저항의 조직인 노동조합이 미래에는 생산과 분배의 조직이자 사회 재조직화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회의는 이러한 이중적 임무, 일상적 임무와 미래의 임무가 임금 생활자의 지위로부터 도출된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지위로 말미암아 노동자계급은 속박당하고 있으며, 정치적, 철학적 주의주장과 지향에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본질적인 조직 - 노동조합에 가입할 자격을 부여받는다.

결과적으로, 회의는 개인에 관하여 조합 외부에서 자신의 정치적, 철학적 관점에 부합하는 어떠한 형태의 투쟁이든 참여할 수 있는 조합원의 완전한 자유를 확인하며, 대신 조합과는 무관하게 가지고 있는 견해를 조합 내부로 도입해서는 안된다는 부탁으로 그 자유를 제한한다.

회의는 조직에 관하여, 생디칼리즘이 최대의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행동이 고용주와 직접적으로 맞서야 하기 때문에 가입조직들은 노동조합인 이상,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노조와는 별개로 혹은 함께 사회이행을 추구하고 있을 수도 있는 당이나 정치단체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결의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회주의와 휴머니즘

보러 가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차 대전과 대중적 노동운동 - 김금수

세계노동운동사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 운동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1917년 무렵 노동자 대중은 극도로 궁핍해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손실된 데다가 생활수준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악화된 것입니다. 게다가 수십 년에 걸친 투쟁으로 획득한 권리와 자유가 박탈되면서 사회적인 적대모순이 확대되고 첨예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나라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 투쟁들은 전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쟁을 유발한 제도에 대해서도 저항한 것이었죠.


마치 먹구름이 폭풍우를 몰고 오듯 자본주의는 전쟁을 몰고 온다고 조레스가 말한 바 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불황의 위기를 가져오고 새로운 영토 정복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만든다. 그리고 각 국가의 사회구성 내 자본주의 발전과 각국 자본주의의 대결이 전쟁을 불러일으킨다(Michel Beaud, 1981: 218). 자본주의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세계를 국가경쟁, 제국주의적 팽창, 갈등과 전쟁의 방향으로 몰고 갔다(Eric Hobsbawm, 1987: 549).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노동자들의 상태
1914년 8월 제1차 세계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914년 6월의 사라예보 사건을 구실로 7월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 그 시작이었죠. 이것이 동맹국들(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과 협상국들(프랑스, 러시아, 영국) 사이의 충돌로 발전하면서 바야흐로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되었습니다. 교전국가들의 독점부르주아지, 군부, 정부들이 이 전쟁을 장기간 걸쳐 준비한 주역들이었어요.
제1차 세계대전은 그 규모나 결과 면에서 미증유의 전쟁이었습니다. 34개에 이르는 국가가 이 전쟁에 관여했고, 직접적인 군사비가 2080억 달러에 달했죠. 이 전쟁에 동원된 군인은 7천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1천만 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고 2천만 명 이상이 불구가 되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전쟁은 많은 나라들에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고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경제관계를 깨뜨렸어요. 많은 산업부문과 교통기관이 파괴됐고, 농업생산이 격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속, 연료, 전력, 면화 등 주요 자원들이 비생산적인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어, 사람들을 살상하는 데 이용되었죠.
전쟁은 자본의 집적·집중을 촉진하고 독점체의 힘을 강화하여, 독점자본이 국가독점자본으로 전화하는 과정을 가속시켰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로 그리고 독점에서 국가화로 나아가게 했죠. 그런 점에서 전쟁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킨 셈입니다. 한편, 제국주의전쟁이 만들어놓은 조건들은 부르주아 국가와 금융과두제 힘의 결합을 바탕으로 '전시국가자본주의'가 성립되도록 했습니다. 전시국가자본주의는 생산·에너지·원료·인적 자원 등 모든 잠재력을 전쟁목적에 동원하고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강력하게 규제했습니다. 이 체제는 자본에게는 이윤을 보장했지만,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족의 투쟁에 대해서는 억압으로 대응했죠.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은 이전에 비해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전쟁에 동원되어 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그들의 가족들도 일시적으로나 영구적으로 생계수단을 상실하게 되었죠. 그리고 군사행동이 행해진 곳이나 적군이 점령한 국가 또는 지역에서는 경제적인 황폐화가 급속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군사행동에 따른 생산력의 파괴, 국민경제 기본부분의 군수부문으로 대체, 생산의 위축 등으로 생활필수품이 심각하게 부족해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세르비아, 발칸 지역 등의 노동자들이 특히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전쟁 중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었고, 노동자계급의 구성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전쟁에 동원된 남성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비노동자층과 여성·청소년들이 메우게 된 것이죠. 광산업과 기계제조 그리고 화학 등의 산업부문에서 일하는 여성과 연소노동자의 수가 나라에 따라서 4배에서 8배까지 증가했습니다. 또, 점령 지역에서 피난해 온 난민, 외국인 노동자, 군사 포로, 군인 등의 노동이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이들은 매우 낮은 임금으로 일에 종사했죠. 어느 교전국가에서든 노동조건이 현저히 악화됐습니다. 기업주들은 '애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서 노동일을 연장하고 노동 강도를 강화했어요. 만성적 식량부족으로 기아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노동 강화와 장시간 노동이 일상적으로 행해졌습니다. 또, 여성·연소노동자와 난민 또는 군사포로들이 산업부문에 활용되면서 산업재해가 급증했고,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1917년 무렵 노동자 대중은 극도로 궁핍해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손실된 데다가 생활수준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악화된 것입니다. 게다가 수십 년에 걸친 투쟁으로 획득한 권리와 자유가 박탈되면서 사회적인 적대모순이 확대되고 첨예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나라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 투쟁들은 전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쟁을 유발한 제도에 대해서도 저항한 것이었죠.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성된 극히 불리한 여건들은 노동운동의 발전을 심각하게 제약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 내부에서도 매우 복합적인 모순들이 형성되도록 만들었죠. 언론·집회의 자유가 억압당했고 파업과 시위의 참가자와 반전 문서의 필자, 출판자, 배포자들이 투옥되거나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런 일은 러시아와 같은 반민주주의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영국과 같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전통을 유지한 국가들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형태나 방법 그리고 강도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교전국들은 모두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했습니다. 사회배외주의자들(Social-chauvinists)이 주장한 노동과 자본 사이 '국내평화' 정책은 공통적인 현상이었죠. 많은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들이 '자국'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옹호함으로써 노동자들을 혼란과 동요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한편, 전쟁 기간 동안 노동자계급 구성이 급격하게 변화한 것도 노동운동 발전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어요. 기존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군대에 동원되고 수많은 소부르주아 층과 여성 및 청소년들이 공업과 운수부문에 유입되면서,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의식이나 노동운동의 수준이 저하되었죠. 그러나 가혹한 전쟁 조건들은 노동자들이 거센 불만과 분노를 품도록 만들었고, 반전 투쟁과 반자본주의적 투쟁을 전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투쟁들이 진전됨에 따라 노동자들은 맹목적 애국주의에서 점점 벗어났지요 그리고 전쟁의 진정한 원인과 성격을 알게 되면서 계급적으로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노동자 대중의 반전의식과 투쟁이 자연발생적으로 고양되면서 사회의 민주주의적 정치역량을 강화했고, 이것은 노동운동의 변혁적 사고와 행동을 촉진했습니다.
이제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주요 국가별로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과정을 살펴봅시다.

러시아
러시아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되는 모습은 두드러졌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탄압 때문에 러시아 노동운동도 일시적으로 후퇴를 경험했죠. 많은 합법적 노동자 조직이 금지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노동조합의 활동도 '특별 감시' 하에 놓여있었습니다. 군사행동이 벌어진 최초의 5개월 동안에는 파업이 70건, 파업 참가 노동자는 4만 명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어요. 그러나 1916년 2월과 3월이 되면서 노동운동이 차츰 활발해졌고, 같은 해 봄과 여름에는 차리즘(tsarism)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전쟁 발발 반년이 된 1915년 2월부터 그 해 7월 사이에는 파업 발생이 574건, 파업 참가자가 24만1천 명에 이르렀죠. 또 전쟁 개시부터 1916년까지 파업건수는 606건에 이르렀고 참가자 수는 43만2천 명이었습니다. 이 파업들 중에서 36%는 정치적 파업이었으며, 정치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수는 전체 참가자의 45%에 달했습니다.
1915년 이후에 일어난 파업들은 전선에서 차르 군대의 심각한 패배와 시기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고양되면서 전국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죠. 특히, 농업이 황폐해진 상황에서 발생한 파업투쟁들은 차리즘과 전쟁에 대한 병사와 농민대중의 투쟁을 촉발시켰습니다. 노동자계급의 과감한 투쟁이 농민들의 자각을 촉진하고 군인들의 전쟁에 대한 의식을 변화시킨 것이죠. 전선의 불안하고 힘겨운 상황, 전쟁에 따른 막대한 희생, 물가 폭등, 기아와 궁핍, 곡물과 가축사료의 태부족 등이 농민과 군인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끔 만들고, 자신들의 정치적 의식을 일깨우도록 한 요인이었습니다. 1915년에 177건이었던 농민투쟁은 1916년에는 294건으로 증가했죠.
노동자 투쟁이 규모가 점점 커지고 완강해지면서 점차 정치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리고 농민운동이 고양되고 군인들의 불만이 갈수록 고조되었습니다. 혁명적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1916년 10월, 세 개의 강력한 정치적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식량위기와 생활필수품 값의 폭등, 그리고 부당이득에 저항한 파업이죠. 6만7천 명이 참가했고, 노동자와 경찰대의 충돌 과정에 군인들이 오히려 노동자 편에 섰습니다. 두 번째는 차르 정부가 볼셰비키 조직에 속한 해군 병사를 탄압한 데 대한 항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50여 공장의 12만 명 노동자가 주축이 되고 거기에 중소기업 노동자와 학생들이 참가한 파업이었습니다. 이렇듯 대규모적인 대중 정치투쟁이었던 10월의 파업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죠.

독일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노동자계급의 투쟁도 군사행동이 시작되면서 크게 위축됐습니다. 이는 사회배외주의자들을 비롯하여 전쟁 옹호자들이 자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국내 평화'를 강조한 결과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도 노동자들은 점점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준비했습니다. 전쟁 조건에서 박탈당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과 반전 투쟁에 참가하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14년 12월2일, 칼 리프크네히트는 당의 결의를 어겨가면서까지 군사예산에 대해 반대 투표를 했습니다. 이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운동의 국제주의 경향 강화와 반전운동 발전에 큰 의의를 갖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베를린, 드레스덴, 브라운슈바이그, 고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등 여러 도시의 사회민주당 조직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죠. 칼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해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제트킨, 프란츠 메링, 빌헬름 피크 등을 중심으로 사회민주주의자 중핵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제국주의 전쟁 정책에 반대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했습니다. 1915년 봄부터 대중적 반전행동이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3월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여성들이 평화와 물가 억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5월에는 시위대 약 1천5백여 명이 제국의회에 몰려들어가 전쟁 반대를 외치기도 했죠.
가을이 되면서 반전투쟁이 한층 더 활성화되었습니다. 1915년 11월 베를린에서 시민 1만여 명이 '빵과 자유', '전쟁 반대' 슬로건을 내걸고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칼을 빼든 기마 경찰대가 군중들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고, 다음 날에도 되풀이되었습니다. 많은 도시에서 물가폭등에 항의하는 저항이 일어났어요. 이것은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집회·시위와 결합된 것이었죠. 켐니츠에서는 이런 성격의 투쟁이 몇 주 동안 진행되면서 경찰과 충돌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라인 지방의 광산 노동자, 함부르크의 조선 노동자와 섬유 노동자들도 저항에 참여했습니다.
대중의 불만이 점점 높아지자 이를 억누르기 위해 경찰은 감시를 확대하고 반전운동 활동가들을 체포했습니다. 정부는 반전운동과 저항운동 참가자들을 전선으로 보내버리기도 했죠. 게다가 17세부터 60세까지 노동능력을 가진 모든 남자의 강제적 노동의무를 규정한, '조국을 위한 보조적 봉사에 관한 법률'이 1916년 말 채택되었습니다. 이 법률은 고용의 자유를 박탈한 것이었고, 사실상 노동자들을 기업주에게 종속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대중적 반전운동이 진전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수가 없었어요. 새로운 노동자들이 투쟁에 참여했죠. 여기서 적극적 역할을 담당한 세력이 여성과 청년들이었습니다. 1916년 4월 예나 지방에서는 칼 리프크네히트의 주도로 '계급평화의 허구'를 거부하고 '국제연대와 계급투쟁'을 첫 번째 의무로 제기하는 혁명적 청년 그룹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는 "모든 힘과 수단을 동원하여 반전을 위해 투쟁할 것이며, 전쟁이 조성한 정세를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를 앞당기기 위해 이용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주도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은 1916년의 메이데이를 겨냥하여 국제연대와 제국주의전쟁 반대를 위한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메이데이를 맞은 베를린에서는 보병과 기마경찰의 경계가 삼엄했죠. 그럼에도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포츠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리프크네히트가 외친 '전쟁 반대', '정부 타도' 구호에 맞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리프크네히트가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도 군중들은 구호를 계속 외쳤죠. 같은 날 독일에서는 여러 도시에서 반전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그 뒤로 2개월 가량 계속된 반전운동의 서곡이었어요. 이와 함께 여러 도시에서 '기아폭동'이 빈발하였는데, 어떤 곳에서는 정부가 계엄을 선포해야만할 정도였습니다.
새로운 탄압이 시행되었습니다. 리프크네히트는 4년 1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고, 룩셈부르크와 메링 등은 구금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대중투쟁은 점점 고양되었습니다. 여름이 되면서 반전투쟁은 최고조에 이르렀어요. 1916년 6월28일부터 30일 사이, 베를린에 사는 노동자 5만5천 명이 정치파업을 벌였습니다. 이 파업은 리프크네히트의 재판과 전쟁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던 것이죠. 스파르타쿠스단은 이 파업을 독일 노동운동 발전의 전환점으로 평가했습니다.
1916년 초 베를린에서는 기계제조, 병기·장비, 항공기 등 군수공장에서 6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전쟁의 참화에 반대하며 정치파업을 일으켰습니다. 1916년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가을에 걸쳐서는 독일 전역에서 반전 시위와 파업 그리고 정부와 노동자 사이의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8월에는 함부르크에서 '전쟁 반대', '정부 타도', '빵을 달라'는 구호를 내건 대중시위가 일어났죠. 그리고 11월2일 드레스덴에서는 노동자 7, 8천 명이 지방정부로 몰려가 식량배급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1916년 한 해 동안 독일에서 일어난 파업 총 건수는 240건이었고, 파업 참가자 수는 12만 4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총칼을 동원한 독재와 가혹한 착취 때문에 쌓인 광범한 대중들의 불만이 전쟁, 기아, 물가폭등에 반대하는 대중행동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이는 전쟁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국내평화'에 대신에 첨예한 사회적 긴장과 대규모적인 계급적 갈등이 확산되고 있음을 여실히 표현한 것입니다.

프랑스
1914년 8월과 9월,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를 침입하여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수도 파리를 위협하자, 프랑스의 지배세력은 '국가 방위'를 강력히 선전했습니다. '국방정부'는 '신성한 거국일치', '계급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노동총동맹(CGT) 지도자들은 노동자 조직의 활동을 부상병과 포로 그리고 난민 등에 대한 사회적 원조에 한정하려 했죠.
1914년 후반부터 1915년 들어서까지, 물질적 상태가 현저히 악화되었음에도 프랑스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동원 때문에 조합원이 절반으로 줄어든 조건에서 노동자 파업이 위력을 갖기 힘들었던 것이죠. 1914년 8월부터 12월에 사이에 모두 18건의 소규모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노동자 1천 명이 참여했습니다. 1915년에는 파업이 98건이었고 파업 참가자수는 9천3백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오래 가지 못 했죠.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현실적 참상이 민중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면서, '국가 방위', '계급 평화' 등의 선전은 위력을 잃게 됩니다. 1915∼1916년에는 반전운동이 점점 확산되면서 대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죠.
프랑스 반전운동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주로 생디칼리즘 신봉자들인, 노동조합 내 좌파세력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항의하기 시작한 것도 그들이었지요. 1915년 5월 금속노동조합연맹 사무총장 메르하임은 신문지상을 통해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라고 자신들의 주장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금속노동조합연맹은 '민중 살육을 그만 두라'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자의 슬로건에 찬성하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금속노동조합연맹은 건설노동자와 토목노동자 노동조합과 더불어 1915년 5월1일 파리에서 국제연대와 병합이나 배상 없는 강화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죠. 그리고 1916년 봄에 결성된 생디카방위위원회(CDS)는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의 '계급평화' 노선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 대중적 투쟁 방침을 선언했습니다. 이들은 파업행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죠.
1916년은 파업이 활발한 시기였어요. 파업 건수가 전년에 비해 3배 이상(315건), 파업 참가자수는 4배 이상(4만1천 명), 파업으로 인한 노동손실일수는 5배 이상(23만6천 일)으로 늘어났고 성격도 한층 완강해졌습니다. 1916년 말 무렵에는 파업투쟁이 확대되어 총파업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죠. 주로 섬유, 운수, 금속, 화학 부문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주도했습니다. 금속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파리의 군수품 공장에서 벌인 12월 파업은 1916년에 일어난 최대의 파업이었습니다. 공장 종업원 6천 명 중 절반 이상이 참가했던 이 파업은 임금인상뿐만 아니라 반전 요구도 내걸었죠. 이렇듯 1916년 들어 전쟁과 지배세력의 전쟁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게다가 전쟁에 대한 항의는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농민, 병사들에게도 확대되어 대중적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영국
영국의 노동당과 노동조합 지도자 대부분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국일치정책과 계급협조정책의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1914년 8월24일, 영국노동조합회의(TUC)는 기업주 측과 이른바 '산업강화'에 조인했습니다. 여기에는 노동조합이 전쟁 종료 때까지 파업을 하지 않기로 하는 약속이 포함되었어요. 영국 노동당 집행위원회도 부르주아 정당들과 전쟁 기간 동안 선거휴전을 하는 것과 병사모집 캠페인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노동조합 운동은 이론적으로는 국제주의자에 동조하고 국내외의 '군국주의'에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는 철두철미하게 운동의 총력을 국가 방침 쪽으로 기울였어요. 열렬하고 정력적인 노동당원들 몇몇과 사회주의 단체인 독립노동당(ILP) 소속의 조합원들 등 평화주의를 확신하는 소수가 있긴 했지만, 모든 산업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커다란 격려와 원조를 받으며 군기 아래 집결했습니다. "독일이 승리한다면, 유럽 민주주의와 자유의 패배와 일소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는 것이 영국 노동자조직 지도자들이 제2인터내셔널의 반전 결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명분으로 내세우는 논리였죠.
1915년 3월, 노동조합 운동 지도자들은 정부조정이 노동쟁의 해결의 주요 방책이 되는 것과 여성과 청년의 고용통제 문제에서 노동조합의 권리를 대폭적으로 삭감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시간외 노동, 심야작업, 일요일 노동의 제한 폐지 등에도 동의했죠. 계속해서 정부는 국가적인 비상사태라는 것을 구실로 노동조합에게 이전보다 더 큰 애국심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호응하여 노동조합은 전쟁 사업에 관련된 구인광고를 금지하고 다른 지역 노동자와 고용계약을 맺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받아들였죠. 업무를 둘러싼 고용주들의 경쟁을 폐기하는 이 법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대한 유례 없는 간섭이었습니다. 그리고 1916년에는 크롬웰 시대이래 처음으로 국민개병제를 뼈대로 하는 병역법을 제정하는 것에 노동당 집행위원회와 영국 노동조합회의(TUC)가 동의했습니다. 사회배외주의자들도 노동자들을 전쟁 봉사의 길로 이끌기 위해 열성적이었죠.
노동당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이러한 적극적인 양보는 영국의 지배층에게 충분히 평가받았습니다. 노동당 사무총장이었던 아서 헨더슨은 연합정부의 일원으로 입각했고 다른 노동당 간부 두 사람이 정부 내부의 책임 있는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계급협조 방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닥치게 되었죠. 1915년 초부터 파업이 급증했고, 1916년 말부터 1917년 초에 걸쳐서는 현장위원(shop steward) 및 노동자위원회가 전국규모에서 조직되어 '현장위원 및 노동자위원회 전국운동'이 결성되었습니다. "직장의 노동조건에 대한 통제와 고용환경에 대한 규제를 획득하고, 노동자들이 승리하는 그 날까지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계급적 기초에 바탕을 둔 노동자조직을 결성한다"는 것이 규약에 명기된 이 운동의 목적이었죠.
1915년 영국의 파업운동은 그 규모가 매우 컸습니다. 1915년에는 627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노동자 44만8천 명이 파업에 참가했으며, 노동손실일수는 295만3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파업들이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915년의 파업들은 151건에 노동자 2만5천 명이 참가했고, 노동손실일수가 14만7천 일이었던 1914년 후반 6개월과 비교하면 그 규모를 어림할 수 있지요. 1916년에는 전년에 비해 파업이 다소 줄어들어서, 파업건수는 532건이었고 파업참가자수는 27만6천 명이었으며, 노동손실일수는 244만6천 일 이었습니다.
1915∼1916년에 일어난 파업 거의 대부분 노조의 통제를 받지 않은 것(wildcat strike)이었습니다. 정부는 그러한 파업들을 빌미로 정부는 일련의 엄격한 정책들을 시행했어요. 1915년 7월에 발효되고 1916년 1월에 보완된 군수생산법은 노동쟁의를 강제조정하고 노동조합의 권리를 중대하게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법령은 사실상 파업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죠. 그리고 애초 기계공업과 조선업종에만 적용되었던 이 법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중요 공업부문 전반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탄압과 노동조합 지도부의 노자협조정책도 노동운동과 민주주의운동이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것을 억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1915년 봄, 여름부터 대중적 반전행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집회에서 전쟁을 침략적·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1915년 겨울에서 1916년 봄에 걸쳐서 전개되었던 병역의무제 시행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반전투쟁은 매우 격렬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치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죠. '반징병제위원회'가 영국의 공업중심지 곳곳에 설치되어, 1916년 초 의회에 상정된 병역의무법안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노동조합이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1916년 1월에는 반징병제운동 전국협의회가 결성됐습니다. 징병제반대운동은 1916년 2월에 병역법이 채택된 뒤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국에서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영국노동조합회의가 총파업을 행사하겠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장기적인 전쟁을 치르기에는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고 지역에 따라 경제발전의 불균등이 격심했어요. 전쟁은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적·민족적 모순의 심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따르는 피해와 손실이 막대해지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국내평화' 선전과 민족적 반목, 그리고 군사·관료적 강제제도의 영향 또한 받지 않을 수 없었죠.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외국 제국주의에 예속화되지 않기 위해" 조국방위 전쟁을 적극 지지해야 한다고 선전했습니다. 노동조합 간부들도 기업과 '국내 평화'에 관한 형식적 협정을 체결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자들의 권익투쟁에 대해서 부정적 태도를 취하면서 계급협조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럼에도 전쟁이 발발한 바로 뒤, 오스트리아의 몇몇 지역에서는 소규모 파업과 집회,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1914년 말과 1915년 초에 걸쳐 임금 인하와 노동일의 연장에 반대하고 물가등귀에 항의하는 파업이 체코와 오스트리아의 광업, 체코의 섬유산업, 빈의 금속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1916년 봄부터는 파업이 더욱 빈번해지고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전에 비해서 노동자들의 요구 관철 정도도 증가했지요. 투쟁들은 경찰이나 군대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점점 반전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헝가리에서는 이미 1915년 봄부터 물가폭등에 항의하는 투쟁과 파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파업투쟁을 주도한 쪽은 군수산업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 시작된 파업이 비교적 평온하였던 지방으로 확산되는 등 1916년의 파업투쟁은 활기를 띠었죠. 같은 해 여름에는 농업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이처럼 전쟁이 발발하고 3년째에 접어들면서 반전 분위기가 고조되었죠.
전쟁이 진행되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의 대립도 날카로워졌어요. 헝가리 의회에서는 양국을 결합시키고 있는 이중제국의 조건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야당 측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헝가리와 제국 전체 사이의 동맹, 즉 독일과의 동맹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는 발언들도 점점 많아졌죠. 1916년 말 군사적으로 큰 패배를 겪고 경제적·정치적 위기가 격화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부르주아 층 안에서는 타협적 강화를 주장하는 경향이 우세해졌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부른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한 1914년 8월부터 이탈리아가 참전한 1915년 5월까지,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은 거의 끊이질 않았습니다. 1914년 8월에는 실업과 물가앙등, 그리고 임금 인하에 반대하는 저항행동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토리노의 자동차공장 노동자와 카탄자로의 전차 종업원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1914년 가을에는 '전쟁을 중지하라', '빵과 일을 달라'는 슬로건을 내건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토리노, 베네치아, 피사, 밀라노, 플로렌스 등의 도시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14년 9월에 열린 이탈리아 노동조합 대회에서는 모든 교전국과 중립국의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전쟁이 초래한 위기를 자본주의제도와 군주제도의 폐지를 위한 계기로 삼자는 주장이 역설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노동자의 반전 움직임과 저항에 단호하게 대응했습니다. 1915년 초 이탈리아의 참전계획에 항의하는 렉지오 에밀리아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경찰이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위 참가자들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쌍방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죠.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서 집회와 시위가 '사회질서에 위협'을 줄 경우, 이를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서장에게 부여하는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노동자의 민주주의적 권리가 경찰의 전횡에 맡겨져 버린 것이지요. 결국 각지의 경찰 당국은 이 법령에 근거해서 반전집회 뿐만 아니라 공동체 조직과 노동조합의 다른 집회까지도 금지했습니다.
1914년 8월4일 이탈리아 사회당(PSI)과 노동총동맹(CGL), 이탈리아 노동조합연맹 지도기관 합동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참전에 반대하며 이탈리아가 중립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러나 1915년 여름에 막상 이탈리아가 참전하게 되자 사회개량주의자들과 노동조합 온건파 간부들은 전쟁을 저지한다는 이전의 결정을 뒤집으려 온갖 노력을 쏟았습니다. 서유럽 다른 나라 사회배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국내평화'정책을 실행하려 열심이었죠. 이들은 이탈리아가 협상국 측과 동일 보조를 취하며 참전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정부와 기업 측에 협력하면서 '산업위원회'에 참가했습니다.
이탈리아가 참전을 결정한 직후 정부는 '산업동원' 포고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군부의 주문을 수행하는 공장 노동자와 직원들에게 군대 의무가 주어졌지요.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파업권을 상실했고 일을 그만둔다든지 또는 자기 마음대로 다른 기업으로 이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부질서의 위반은 전시법규로 규율되었고, 징병유예를 취득해도 기업관리부의 결정으로 취소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소한 과실에 대해서도 벌금이 부과되었는가하면 구속되기도 했죠.
그러나 억압정책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대중운동의 흐름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공장위원회와 같은 새로운 노동자 조직이 생겨나면서 투쟁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런 위원회들은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하여 구성되었죠. 이 조직들은 대중적이고 적극적이었고 노동운동의 변혁적 지향을 잘 반영했습니다.
1915년 후반에는 베네치아, 밀라노, 시칠리아, 기타 지역에서 전시공채에 반대하는 격렬하면서도 자연발생적인 시위와 집회가 열렸습니다. 파업도 빈번했죠. 1915년 6∼7월 파업은 거의 모든 산업에 파급되기도 했습니다. 1915년 한 해 동안 발생한 파업은 53건, 파업 참가자는 13만2천 명, 노동손실일수는 63만3천 일이었습니다. 1916년에는 파업건수와 파업 참가자수는 다소 줄었으나 노동손실일수는 73만7천 일로 증가했습니다.
혹심한 궁핍, 광범한 실업, 식료품의 부족과 가격폭등, 노동강화 등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상황은 '계급적 휴전'을 고수할 수가 없는 것이었어요.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반전과 변혁 지향의 그룹이 형성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탈리아 노동총동맹 내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이 이런 움직임에 대해 동조하였죠.

미국
미국에서도 반전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미국 노동운동의 반전 분위기는 다른 나라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죠. 중립적인 처지에 있는 미국에서 고조된 반전 분위기는 미국노동총연맹(AFL)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참전준비가 진행됨에 따라 미국노동총연맹 지도부는 온건한 부르주아적 평화주의 노선에서 군사력 증강을 꾀하는 부르주아지와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바꾸었죠. 미국노동총연맹 지도부의 이 같은 방침 전환은 지방조직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1915년 열린 미국노동총연맹 대회는 결국 군국주의적 캠페인에 동의했어요. 이런 가운데서도 많은 대의원들의 강한 요구에 따라 대회는 징병제와 학생 군사훈련 도입에 반대하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미국에서 반전운동을 추진한 세력은 주로 사회당의 일부 그룹과 세계산업노동자조합(IWW)이었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참전과 전쟁에 대한 '국민적 준비' 캠페인에 반대하며 집회와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파업투쟁과 반전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산업노동자조합의 활동 자체에 대해서도 엄격한 통제를 가했죠.
전쟁 붐이 일어나면서 파업은 불어났어요. 전쟁 붐으로 인한 경제성장은 생활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노동자 투쟁에 유리한 조건이었죠. 1915년 미국에서는 1천405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노동자 50만4천 명이 파업에 참가했는데, 1916년에는 파업건수는 3천786건으로 증가했고, 파업참가 노동자수는 160만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이에 따라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인상 등 사용자들의 양보를 받아냈죠. 파업투쟁들은 반전 시위, '참전준비 퍼레이드' 참가자들과의 충돌, 의용병 참가 거부, 병역의무제 도입 반대 등을 수반했습니다. 이러한 파업과 반군국주의 투쟁들이 미국의 참전준비를 방해하여, 전쟁'준비' 일정을 지연시킬 수 있었죠.

제1차 대전 중 노동조합의 활동
무장한 수천만 명이 대치하고 있음에도 1916년 당시 주요 전선에서는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선과 후방에서는 수백만 명이 사망했고 식량부족과 기아 사태가 심각해졌죠. 생필품의 부족과 물가등귀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열악하기 그지없는 노동조건이 노동자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가운데 각종 탄압이 강화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이 노동자와 병사 그리고 농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며, 공공연한 반정부적 저항을 야기했습니다.
몇몇 국가에서는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의 정치지도자와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자국 정부의 전쟁기구 속에 완전히 끌어넣기 위해 계급협조 정책을 강행했습니다 노동자 대표를 협력자의 지위에 고정시키려는 이러한 작업은 각 나라의 국내정세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됐죠. 자본가들은 노동운동이 전쟁을 이용해서 위신을 높이거나 일반적 입장을 강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지배계급이 노동운동 관계자를 전시 지배체제의 일부로 이용하면서 기대했고, 또 획득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전쟁에 대한 전면적인 찬성.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이 대량학살을 묵인하도록 할 수 있었죠. 둘째, 전시 중 사회평화의 확보. 즉,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사실상 해소하는 것입니다. 지배계급은 완전히 길들여놓은 노동운동 내부 그들의 종복들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범위에서, '사회평화'를 획득했죠.
1916년에 접어들면서 교전 국가들에서는 계급적 투쟁이 격화되고 각지에서는 파업이 고양되었습니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의 군수공장에서는 장기파업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파업이 총파업으로 전화된 경우도 있었죠. 1917년 초에는 거의 모든 교전 국가들에서 반전운동이 대중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제국주의전쟁을 사회변혁투쟁으로 전화시키려는 움직임마저 있었어요.
변혁을 지향한 노동자들은 사회개량주의자들이 파괴한 인터내셔널과 전쟁반대 투쟁을 되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전쟁 중에 스위스의 짐머발트(1915년 9월)와 키엔탈(1916년 4월)에서 반전과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회의가 열리기도 했죠.

출처 : 노동사회 2004년 1월호, 통권 83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중국 아나키즘

보러가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국노동당 창건자 제임스 키어 하디

노동운동가 평전 영국노동당 창건자 제임스 키어 하디
최재희 (고려대 노동사 박사과정)
광부들의 열악한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하디는 임금향상과 노동시간단축을 목표로 파업을 주도한다. 그러나 6주간 지속된 1880년 라나크에서의 파업을 위시한 여러 광부파업은 파업자금의 부족과 자본가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하디는 해고당한다.


제임스 키어 하디는 1856년 8월 스코틀랜드의 광산 마을에서 한 가난한 노동자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메리 키어는 조선소 목수였던 데이비드 하디와 재혼했고, 하디는 새 아버지를 따라 스코틀랜드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

당시 영국이 세계 최고의 산업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삶은 매우 열악했었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디 또한 8살이란 어린 나이에 직업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교육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첫 직업은 하루 12시간 반을 일하는 빵가게의 점원이었다. 실직한 아버지는 일거리를 찾아 집을 비우고 있었고, 그의 임금이 가계의 유일한 수입이었다. 바로 밑의 동생이 열병으로 죽고 어머니가 다른 동생을 해산하는 어수선함 속에 15분 늦게 가게에 출근했고 그 때문에 급료가 지급되는 바로 그날 해고당한다. 맛있는 음식냄새가 진동하는 주인의 내실에 불려가 처음 보는 화려함에 눈이 부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불성실하다는 비난과 함께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쫒겨난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릴 어머니 생각에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비를 맞으며 거리에서 웅크리고 앉아있어야 했던 아이, 그가 바로 영국노동당의 창건자라 불리는 어린 시절의 하디였다.
몇 가지 직업을 거친 후 하디는 10살에 그가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던 광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아침 6시에 막장에 들어가 해가 진 다음에야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으므로 겨울에는 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라야 했다. 12살에는 막장이 무너져 갇힌 상태에서 지쳐 잠자다 구출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야학에서 글을 배웠고 노동조합의 집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속기법도 익혔다. 사려깊으면서도 반항적인 광부로 성장한 하디는 이런 자질과 더불어 노조활동의 헌신성으로 자연스레 광부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광부들의 지도자

광부들의 열악한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하디는 임금향상과 노동시간단축을 목표로 파업을 주도한다. 그러나 6주간 지속된 1880년 라나크에서의 파업을 위시한 여러 광부파업은 파업자금의 부족과 자본가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하디는 해고당한다. 하디는 파업승리의 열쇠가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에 달렸다는 인식을 갖고, 1886년 에어셔광부연합과 스코틀랜드광부연맹을 조직하면서 동시에 기관지 『광부』(The Miner)를 발간한다. 이 과정에서 하디는 신생조합이 산업내의 분쟁을 통해 스스로의 이익을 보장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설사 간헐적으로 성공한다 하더라도 경기 변화와 자본가의 변덕에 좌우되는 일시적인 이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국가를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며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867년과 1884년의 선거법개정을 통해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지만, 유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던 자유당과 보수당이 의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이 노동자의 표를 얻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 일부 보수적인 노조의 대표가 자유당의 후원을 받으며 자유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지만, 이들 또한 개인적인 출세나 명성에 집착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계급의 이해를 기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디는 기존 정당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노동자 대표만이 진정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디에게 그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온다.
1888년 미드라나크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하디는 노동자의 대표로 의원직에 도전한다. 광부밀집지역인 이곳에 런던출신의 변호사를 공천한 자유당은 하디에게 출마포기를 설득한다. 조건은 그 동안의 선거비용을 보전해주고 일년간 200파운드의 봉급과 다음 선거에서의 공천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하디는 이를 거부했고 곧 이 선거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된다. 각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이 자원봉사를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작가였던 플로렌스 하크니스는 300파운드를 기부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하디는 617표를 얻었고 자유당의 필립스가 3847표로 당선되었다.

노동자 정당 결성을 향해

그러나 하디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선거 직후 8월에 그는 스코틀랜드노동당을 결성했고 이는 영국정치사에서 노동자당의 명칭을 사용한 최초의 정당이었다. 이 당의 강령은 상원의 폐지, 토지와 광산의 국유화, 무상교육, 학생에 무료급식, 철도, 운하의 국유화, 누진세 등을 제시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노동당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산에 사용되는 모든 자본의 국유화였다. 이와 같이 하디는 노조활동과 정치활동을 통해 자연스레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경제문제 등에서 몇 가지 이론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하디의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 출신으로 누구보다 더 노동자의 삶의 현실과 소망을 잘 알고 있던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중간계급 출신의 일부 도그마적인 구호성 사회주의와 달랐고,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전체노동자의 이익을 외면하던 기성노조의 보수적인 태도와도 다른 입장이었다.
하디와 그의 입장이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 될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1891년 총선거에서 그는 런던 사우스웨스트햄의 노동자후보로 지명된다. 이곳은 런던에서 가장 빈곤한 노동자 밀집지역이었다. 선거 결과, 하디는 시장 출신의 보수당후보를 1232표차로 물리치고 의원으로 당선된다. 새로운 의회가 개회하던 날, 그는 노동자의 평상복 차림으로 노동자들에 둘러싸여 의회에 입장한다.
그의 첫 의회연설은 실업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실업이 노동자와 그 가족에 얼마나 큰 정신적, 육체적, 도덕적 폐해를 끼치는 지를 역설하면서 국가차원의 실업구제책을 마련할 것을 주장한다. 실업구제책의 핵심은 8시간 노동법이었다. 노동시간의 법적 규제는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뿐 만 아니라 일자리를 늘려 실업자를 구제하는 방안이었다. 그에게 이것은 노동자들간의 경쟁을 지양하고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넓혀간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했다.
"한사람이 하나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도 좋지만 각 개인에게 하나의 직업은 더 중요하다." 그는 곧 실업자의 의원이란 별칭을 얻게된다. 1894년 알비온 탄광이 무너져 200명 이상의 광부가 사망한 바로 그날 빅토리아여왕의 손자가 태어난다. 의회가 왕위계승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결의안을 논의할 때 수많은 야유에도 불구하고 홀로 서서 왕실을 비난하며 광부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보상하는 것이 국민의 대표인 의회의 역할이라 역설하던 그의 모습은 특이하기까지 했다. 하디는 영국정치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첫 노동자의원이었다.
하디는 당선 이후 곧 새로운 전국정당의 결성에 몰두한다. 그 결과 1893년 독립노동당이 탄생한다. 그는 노동자정당의 건설에 기존 노동조합의 지지가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노조는 자금, 인원, 조직의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당명을 둘러싼 논란에서 나타난 하디의 입장은 이런 인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디는 당명에 '사회주의'를 명기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주의에 거부감을 가진 노조를 배려했고, '노동'이란 명칭을 통해 당의 입장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일치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사회주의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선언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독립'은 계급기반이 다른 기존 정당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독립노동당은 노조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노조는 참여를 거부했고 하디를 포함해 1895년 총선에 나선 당의 모든 후보들은 패배한다. 정치활동이 조합의 기금을 헛되이 소모시키며 조합자체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기존 노조의 인식은 하디의 입장과 큰 차이가 있었다. 조직노동자와 미조직노동자 및 실업자의 이해가 배치될 수 있는 상황에서 노조가 자신들의 자금과 희생으로 전체노동자의 이익과 사회진보를 옹호려는 분위기는 아직 성숙되지 못했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사회문제의 본질이며 사업장 안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단초는 곧 마련된다. 태프 베일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노동당의 결성

1900년 웨일즈남부 태프 베일 철도회사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회사는 소송을 제기한다. 즉 파업이 야기한 손해에 대해 노조의 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법원은 2만 3천파운드의 배상을 결정했다. 이제 파업권은 사실상 부인되었으며 노조의 모든 일상행위도 손해배상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다. 노조는 다시금 법과 정치활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0년 독립노동당을 위시해 노동조합, 노동단체, 사회주의단체들이 결집해 노동자대표위원회를 결성했고, 이는 1906년 영국노동당으로 발전한다. 하디를 위시한 독립노동당은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고 당의 노선과 활동의 결정에서 유일한 준비된 집단이었다. 1900년의 총선에서 하디만이 다시 홀로 노동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당의 세력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1906년에는 29명의 후보가 의회에 진출했고 영국의 정치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혁명과 무장봉기를 주장하던 완고한 사회주의집단과 한줌의 기득권에 집착하던 보수적인 노조 사이에서 양자의 공통점을 찾아내 연결하고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사회진보와 인간해방의 선봉에 서고자 했던 하디의 소망이 다소나마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영국노동당에서 하디의 이름은 절대 부패하지 않는 이상주의와 연대와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1918년 영국노동당은 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국유화를 위시한 사회주의 강령을 선언한다.

제국주의 반대! 전쟁 반대!

하디가 말년에 몰두했던 작업은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보어전쟁을 반대해 곤욕을 치렀던 그는 대륙의 사회주의자와 연대해 전세계적인 총파업으로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이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전쟁을 막고자 했다. 레닌은 그를 "제2인터내셔날의 지도자 중 끝까지 진정으로 전쟁을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라 평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하디는 전쟁반대와 평화를 역설하며 전국을 돌았고 무분별한 애국주의의 분위기에서 그의 집회는 총성과 함께 끝나곤 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하디는 영국의 정치사와 노동운동사에서 특이한 인물이었다. 전쟁이 그의 계급과 당을 분열시키는 것을 보면서 키어 하디는 1915년 9월 26일, 59세의 나이로 자신이 꿈꾸던 이상세계로 떠났다.


출처: 노동사회 1999년 2월호, 통권 30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치적 자립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

* 늑대비님의 [자본주의 발생과 노동자계급의 기원] 에 관련된 글.

세계노동운동사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자들의 투쟁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1830년 프랑스 7월혁명은 정권을 교체한 노동자계급 투쟁의 첫 번째 사건이었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얻은 게 없습니다. 투쟁의 결실을 전유한 것은 부르주아 엘리트였어요.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기심을 확인하게 되었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됩니다.....


"정치적 성숙은, 노동운동이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 제도를 변혁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 대중의 다수가 근본적 개혁이 바로 자신들의 직접적 이익이라는 점을 현실 속에서 깨닫지 않으면, 노동운동은 본래 의미의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A. 스터름탈, 1983: 57)."

1. 영국의 차티즘 운동

차티즘 운동(Chartism)은 1838년 5월에 공포된 인민헌장(the People's Charter)의 실현을 목표로 이십 년 가까이 전개된 노동자계급의 광범한 대중적·독립적·조직적인 운동입니다. 인민헌장이 내세운 여섯 개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 ② 비밀 투표, ③ 평등한 선거구, ④ 매년 선거(의원 임기 1년), ⑤ 후보자에 대한 재산 제한 철폐, ⑥ 의원에 대한 세비 지급 등이 그것이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반란이자, 국제 노동운동의 빛나는 서막이라 표현되는 차티즘 운동의 배경과 동인을 살펴봅시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영국은 18세기 말부터 산업 혁명이 진행되어 세계 최초의 공장 프롤레타리아가 발생했고, 1830년대에는 기계가 대규모로 도입됨으로써 공장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진전과 더불어 자본가들은 자본 축적과 부의 집중을 이룰 수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실업과 저임금, 그리고 무권리 상태에서 격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죠.
정치적으로도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지 못했어요. 1832년에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중산계급의 투쟁으로 선거법이 개정되는데, 이에 따라 부르주아들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토지 귀족층을 압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 인구 1천6백만 명 가운데 유권자는 16만여 명에 불과했어요.

전국노동조합대연합
1832년 정치개혁에서 노동자들의 선거권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1839년 영국 노동자와 자본가의
충돌
이것은 자본가계급 또는 중산계급이 선거제도 개혁 운동을 벌이면서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가 자신들의 요구만 관철하고 노동자들의 선거권과 출판의 자유 확대를 반대한 데 따른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부르주아들의 행위에 반발하면서 노동자들은 계급 의식을 일깨우게 됩니다. 한편, 1834년에는 의회가 새 구빈법(救貧法)을 가결했는데, 이에 따라 종래의 빈궁자 구제제도는 폐지되고, 노역장(勞役場)이 빈궁자 '원조'의 주요한 형태로 됩니다. 새 구빈법은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할 의도로 제정되었고, 그 결과 노동자들은 가족과 떨어져 감옥과 다름없는 규율, 굶주림, 단조롭고 무의미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832년 이후 노동조합 운동은 활기를 띠었고, 노동자는 부르주아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834년에는 전국노동조합대연합(the Grand National Consolidated Trades Union)이 결성되었는데, 이 조직은 건설노동자, 방적공, 도공(陶工), 재봉사, 모직공, 농업노동자의 큰 노조들을 포괄했다. 로버트 오웬이 이 조직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기본 이념은 "노동조합이 사회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산업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대연합은 분산성을 띤 직인조합(craft union)과 달리 전국 단위의 중앙집권적인 계급 조직이었습니다. 대연합은 1834년 조합원 50만 여명을 확보했고, 파업을 조직했으며, 오웬의 '교환시장' 사상을 실현함과 동시에 노동조합을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려 했죠. 그러나 대연합은 지도부의 분열과 지배 세력의 공격, 파업 준비 부족으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개혁 법안에 대한 환멸, 새 구빈법에 대한 분노, 노동조합 사업 부진에 대한 좌절, 오웬의 계획 실현 실패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한층 절박하게 정치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국가 권력에 다가가야 자신들의 곤경을 덜 수 있다는 확신이 커진 것이죠.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이해 관계는 적대적이며,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는 자주적인 행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런던노동자협회
이런 시대 상황에서, 차티즘 운동은 1836년 6월 런던노동자협회(the London Working Men's Association)의 창설로 본격 시작됩니다. 런던노동자협회는 인민헌장을 작성하여 노동자 운동에 '차티즘'이라는 명칭을 주었고, 초기 운동을 주도하면서 차티즘 운동의 산파 역할을 수행합니다. 런던노동자협회를 보면 이전의 급진주의 단체와 구분되는 특징이 발견됩니다. 협회가 노동자 출신만을 회원으로 인정한 점이 대표적입니다.
런던노동자협회는 노동자 자신의 힘과 자각, 그리고 독자 활동을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부르주아적 민주파나 급진적 부르주아와 협조했습니다. 말하자면, 런던노동자협회는 노동자의 독자 활동을 강조했음에도 중산계급의 협조를 소망했고, 또 그들과 맺는 제휴의 가치를 인정했던 것이죠. 런던노동자협회가 1836년 10월18일 채택한 결의안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지금과 같은 갈등상태에서는 이해 관계가 우리와 적대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평등한 권리 및 법률과 정의를 열렬히 주장하는 자비심 있고 열성적인 친우들에게, 의회가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에 함께 할 것을 호소한다", "그런 결함이 모두 해롭고 분파적인 경쟁심을 망각으로 사라지게 하고, 이 나라의 모든 자원을 전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사용하도록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기본 방침에 따라 런던노동자협회는 1834년 해체했다가 1837년 다시 발족한 급진 부르주아 연합 '버밍엄 정치동맹'(the Birmingham Political union)과 연대하여 활동합니다. 1838년 5월 런던노동자연합 지도자들은 인민헌장을 공식화하는 한편, 버밍엄 정치동맹이 '국민청원'을 발표하자 노동자들은 한 손엔 인민헌장을, 다른 손엔 국민청원을 들고 의회 개혁 운동을 활기차게 벌입니다. 런던노동자협회와 버밍엄 정치동맹은 전국 각지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노동자 조직 작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노동자 집회가 열리고, 이들 집회에서 노동자들은 인민헌장을 채택하고, 청원에 서명함으로써 명실공히 차티즘 운동이 전개된 것입니다. 1839년 행해진 제1차 청원은 128만 명의 서명을 받았는데, 이 서명은 214개 도시에서 열린 5백 회가 넘는 집회에서 모아진 것이었어요. 가짜 서명과 선거권 요구에서 제외된 여성들의 서명을 고려한다 해도, 그것은 실제 유권자 보다 훨씬 많은 수의 국민을 대표하는 것이었어요. 청원은 다음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영국은 풍요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다. 그러나 국가의 번영을 약속하는 모든 이런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자신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 우리는 그처럼 고통스럽고 오래 계속되는 참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신중히 고찰해 왔다. 결국 지배자들의 우매함이 신의 섭리를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이 나라의 모든 에너지가 이기적이고 무지한 자들의 권력을 쌓는 데 소비되었고, 그 자원은 그들의 힘을 강화하는 데 낭비되었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지배하고 있다. 다수의 이익이 무시되고, 무지막지하게 짓밟히고 있다.
1837년∼1838년에 걸쳐 노동자들은 런던민주주의협회와 대(大)북부동맹 등의 정치조직을 설립하고, 소부르주아 민주파가 제시한 헌장의 슬로건을 채택합니다. 당시의 차티즘 운동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공장 지대의 산업노동자들, 웨일즈의 광부들, 런던의 저임금 노동자들, 수공업 부문 직인이 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활기를 띠게 되죠.

차티즘의 절정, 전국헌장협회
1839년 2월 런던에서 차티스트 전국회의가 열렸지만, 모인 대표들은 부르주아 급진파를 비롯해 다양한 노선을 주장하는 여러 분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명확한 투쟁 방침을 설정하기 어려웠습니다.
1848년 켄닝턴 코먼에서 열린 차티스트 집회
하지만, 청원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인민헌장을 법으로 채택하도록 만든다는 목표에는 일치했어요. 이런 가운데 노동자 대표들이 차티즘 운동 목표의 실현을 위해 물리적 강제력을 비롯한 '최종 조치'를 취할 것을 제안하자 부르주아 급진파들은 총회에서 퇴장하고 전국회의는 노동자계급의 독자 회의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차티스트들은 명확한 행동계획을 세우지 않았어요. 여기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슬로건은 "가능하다면 평화적으로, 어쩔 수 없다면 폭력적으로"였어요.
1839년 7월 하원은 청원서 심의를 거부하였고, 총파업을 비롯한 최후 조치를 시행하려던 전국회의의 노력은 실패로 끝납니다. 1840년 7월 노동자계급 최초의 대중적 정치조직인 전국헌장협회(the National Charter Association)가 설립되고, 1842년 제2차 국민청원이 시작되면서 차티즘 운동은 절정기를 맞게 됩니다. 1842년 경제 불황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활은 한층 더 곤궁 속으로 빠져들었고, '저주받은 공장제'에 대한, 그리고 억압과 잔인함에 바탕을 둔 사회 제도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중 투쟁이 고양됩니다. 제2차 국민청원은 다음 내용으로 시작되죠.

정부는 모든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생겼으며, 모든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하원은 국민이 선출하지 않았고 무책임한 행동만을 일삼으며, 다수의 비참함과 불만과 호소를 무시한 채 소수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 하원은 국민이 표현하는 희망에 반대되는 법률을 제정하고 비합리적인 수단으로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한편에는 참을 수 없는 독재정치를, 다른 한편에는 점점 몰락해 가는 노예를 만들어내고 있다. 소규모의 직업인과 노동자계급을 전적으로 몰락시키면서 토지와 자본의 이익을 옹호한다. 부정과 부패와 협박과 사기가 모든 선거에서 난무하여 … 세금은 현재 참기에는 너무 과하다. 부와 사치가 지배자들 사이에 만연하는 반면, 피지배자들은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 모든 이런 악폐는 계급 입법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하원은 이를 철폐하기는커녕, 오히려 늘리려 항상 노력하고 있다.
한편, 중산계급 자유무역 주창자들은 1815년에 제정된 곡물법이 지주층의 특권을 유지하게 만드는 커다란 악폐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폐기하기 위해 1839년 반곡물법연맹(Anti Corn-Law League)을 창설했습니다. 자유무역에 호의적인 대부분의 부르주아들이 인민헌장에 정식화된 요구들을 지지했고요. 자유무역주의자들이 의도한 것은 곡물법 반대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그것을 폐지하고, 그 뒤에는 어제까지의 동맹자인 노동자들을 배반하여 보통선거권 요구를 방기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차티스트들은 자유무역주의 부르주아와의 동맹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무역주의자들과 공동으로 추진하는 곡물법 반대 투쟁이 실제로는 차티즘 운동을 자본가의 이익에 종속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곡물법이 폐기되어 곡가가 떨어지면, 자본가들은 이에 따라 임금을 내리게 될 것이어서 노동자들은 곡물법의 폐기로부터 얻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해석에 근거한 것이었죠.
이처럼 계급적 자립을 추구한 차티즘 운동은 전국헌장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노동자 대중은 역사상 처음으로 그들의 공통적인 계급 이익에 정치적 형식을 부여했고, 노동자 당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자립적 정치조직으로 결합하여 행동했습니다.
차티즘 운동의 영향력 증대는 3,317,752명이 서명한 제2차 국민청원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통해 반영되었습니다. 제2차 국민청원서 제출을 위해 5월 2일 하원으로 행진한 사람의 수를 『타임즈』는 5만 명이라고 밝혔으나, 차티스트 신문인 『노던 스타』(Northern Star)는 이보다 열 배는 더 될 것으로 추정했죠. 이 무렵 노조운동 안에서 차티즘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수많은 노조들이 전국헌장협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1842년 8월 총파업
차티즘 운동의 정점을 이룬 것은 아무래도 1842년 8월 총파업이라 할 수 있어요. 8월8일 며칠 전에 일어났던 애쉬톤 하이드 스탤리브리지 지구(랭카셔) 파업이 확대되기 시작했고, 8월10일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파업은 총파업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8월16일까지 파업은 랭카셔, 체셔, 웨스트 요커셔 일부로 크게 번집니다. 노동자들과 정규군 부대의 지원을 받은 경찰부대 사이에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유혈 사태가 빚어지기도 합니다. 영국 산업의 심장부를 형성하는 넓은 지역이 사실상 내전 상태에 들어간 것이죠.
파업이 내건 슬로건은 '인민헌장과 공정한 임금'이었어요.
1848년 라이스터 지역 차티스
트 모임 광고. '때가 찼다'(NO
W IS THE TIME)는 선동문구
가 뚜렷하다
이것은 인민헌장이 사회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공정한 임금'의 원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제도를 수립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표현한 것이었죠. D. H. 코울은 『영국노동운동사』에서 "차티즘 운동은 순수하게 정치적 강령을 갖고 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운동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박지향은 「초기 차티즘 운동과 계급의식」이라는 논문(『노동계급의 형성』, 1989, 느티나무)에서 "인민헌장의 정치적 요구는 사회경제적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든 차티스트들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파업이 대중적이고 전반적인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그것은 대규모 차티스트 시위로 바뀝니다. 8월15일∼16일 맨체스터에서 열린 대집회가 이런 사실을 반영합니다.
이런 사태 진전에도 불구하고, 파업 지도부는 노동자들에게 운동을 '법과 질서' 테두리 안에 한정시킬 것을 호소하면서 실제로 파업을 이끌 어떤 지도 방침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파업을 끝내는 데 동의합니다. 이 무렵 부르주아 시의회는 정규군의 지원을 받아 중심 산업들에서 일어난 파업을 억누릅니다. 8월 20일 이후 파업은 몇몇 지역에서 고립되어 남았을 뿐입니다. 지배계급은 파업 참가자들을 엄격히 처벌했습니다. 노동자 수천 명이 투옥되거나 식민지로 추방되었고, 많은 지도적 차티스트들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어요.

차티즘 운동의 쇠퇴
1842년 패배는 차티즘 운동의 쇠퇴를 가져옵니다. 이는 차티즘 운동 지도자들이 1842년에 야기된 혁명적 긴장을 이용할 능력이 없었고, 차티즘의 이데올로기와 전술 사이에 심각한 내적 모순이 존재했으며(즉, 차티스트들의 계급적 자립 지향과 초계급적 환상 사이의 모순, 투쟁의 혁명적 성격과 '법 일반'에 대한 신뢰 사이의 모순), 1843년∼1845년 사이에 걸친 상공업 붐이 노동자들의 상태를 얼마간 개선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됩니다.
차티즘 운동의 마지막 정치 투쟁은 1848년에 일어납니다. 1847년 영국이 심각한 경제 불황에 빠져든 가운데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시작된 유럽의 혁명적 정세에 고무되어 대중운동이 고양됩니다.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 1848년 4월 570만 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가 의회에 제출되었어요(당시의 영국 인구수는 1,900만 가량이었죠). 정부는 25만 명에 이르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집회와 시위 등을 막으며, 다수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장기간 투옥합니다. 그 뒤 차티즘 운동은 두 서너 해 동안 계속되기는 했으나, 그 위력과 영향력이 회복되지 못한 채 약화됩니다. 차티즘 운동은 1847년 6월 제정된 10시간 노동법, 공장법, 탄광법 등 사회입법을 노동자들에게 성과로 가져다 주었습니다.
차티즘 운동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에릭 홉스봄은 『혁명의 시대』(1999, 한길사)에서 차티즘 운동의 실패 원인으로 지도층의 무능력, 지방 및 부문간의 차이와 의견대립, 그리고 거대한 청원운동 이외에 통일된 전국적 행동을 취할 줄 몰랐던 무능력을 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뒤로 전개된 국제노동운동 역사에서 독특한 하나의 서막 구실을 합니다. 노동자 운동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종속에서 정치적 자립으로, 경제 투쟁과 계급 평화에 바탕을 둔 사회개혁 계획에서 정치적·사회적 혁명으로, 분산적 행동과 분립적 조직에서 전국적 규모의 강대한 운동과 통일된 조직으로 전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차티즘 운동은 노동자 투쟁에서 대규모의 통일성을 이룩함으로써 노동운동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영국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의 발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2. 프랑스 노동자들의 봉기

1830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은 유럽 정치 지형에 큰 충격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이 혁명에서 파리 노동자들은 가장 전투적이고 무서운 세력으로 등장했어요. 부르봉 왕조 권력을 무너뜨린 '영광의 3일'을 쟁취한 것은 노동자들이 힘차게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권을 교체한 노동자계급 투쟁의 첫 번째 사건이었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얻은 게 없습니다. 투쟁의 결실을 전유한 것은 부르주아 엘리트였어요.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기심을 확인하게 되었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됩니다.

리용 봉기
7월 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31년 11월, 프랑스에서 둘째로 큰 도시 리용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납니다. 리용 봉기는 매뉴팩처 방식에 기반한 특유한 산업조직 체계에서 발생했죠. 당시의 생산 방식은 자본가적 매점 상인이 견직 원사를 구입하여 직조공(織造工)을 고용한 소규모 작업장 소유주에게 이를 제공해 제품을 주문하는 방식이었어요. 작업장 소유주와 그 가족들은 노동자와 함께 일하는 것이 보통이고, 이들 소경영주와 노동자들은 합세하여 매점상인에 대항하기도 했어요.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은 열악했습니다.
리용의 견직산업은 1826년 이후 수출 부진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었고, 노동자들의 상태는 더욱 곤궁해졌습니다. 게다가 '7월 왕정'이 새로운 재정법을 만들었는데, 이는 빈곤층의 부담을 한층 더 키웠습니다. 더욱이 매점상인들은 실업을 악용하여 구매단가를 낮추었고, 그 결과 임금은 낮아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상인들이 시 당국의 임금인상 종용을 거부하자,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11월20일 노동자들이 끄롸 루스(Croix-Rousse) 교외 광장에 모여듭니다. 그들은 일을 멈추고 다음날 자신들의 요구를 공동으로 시 당국에 제출하기 위해 시내로 들어갈 것을 결정합니다. 시 당국은 이를 저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부르주아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이 끄롸 루스에서 리용으로 통하는 도로 다섯 개를 모두 점거하여 노동자들을 막았어요.
11월21일 이른 아침,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납니다. 직조공들이 방위군을 밀치자 방위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고, 노동자들은 돌과 몽둥이로 맞서면서 리용 시내로 돌입하여 건물 몇 개를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합니다. 파리에서 바리케이드 봉기의 역사는 적어도 15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830년 7월 파리 혁명에서는 바리케이드를 민중 반란의 상징으로 삼았죠. 그 사이 정규군 대대가 끄롸 루스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전투는 밤늦게까지 계속됩니다. 무기상점과 무기고를 탈취한 노동자들은 재빨리 무장했고, 다음날 아침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죠. 노동자들은 "일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싸우다 죽을 것인가"라는 슬로건이 적힌 검은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11월22일 리용에서 벌어진 전투는 전날에 비해 한층 더 격렬했어요. 끄롸 루스와 리용 지구의 노동자들을 도우러 여러 지역 노동자들이 몰려옵니다. 격렬한 전투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노동자들은 시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죠. 11월23일 군사령부는 리용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시는 노동자들의 손에 들어옵니다. 3일 동안의 리용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엄청났어요.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당국의 보고로는 약 3만여 명이 봉기에 참가했습니다.
군대가 퇴각한 뒤 노동자들은 어떤 형태의 자치정부도 세우지 않았으며, 다만 시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조처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봉기 본부'는 설치했으나, 시장이나 행정장관을 체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수도 파리와 연락하는 것까지 허용했어요. 노동자들의 이런 행동양식은 대체로 봉기에 참여했던 소규모 작업장 소유주들의 타협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어요. 11월24일자로 리용 검사장이 법무부장관 앞으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냅니다.
"주민들의 행동은 여러 가지 대조적인 면들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굶주리고 있지만 약탈하지 않는다. 폭동을 일으켰지만 승리를 남용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정권의 깃발을 끌어내리지는 않고 있다. … 인격과 재산은 존중되고 있다."
11월28일 리용에서 퇴각했던 군대는 증원부대 2만 명과 합세하여 다시 시내로 들어왔고, 시 당국은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놓으라고 명령했어요.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굴복했습니다. 12월1일 군대는 시 변두리를 점령했고, 12월3일에는 정규군 4개 연대가 시내로 진입했어요. 정부는 사건 재발을 두려워한 나머지 대량 유혈보복 조처를 취하지는 않았으나, 노동자 수천 명이 시에서 추방당합니다. 견직공들이 선두에 선 리용 봉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리용 봉기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과 생활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부르주아 소유 체제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음을,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본가계급을 포함하여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전체 사회의 위계로부터 독립해서 행동할 수 있음을 표출한 것이었어요.

두 번째 리용 봉기
리용 노동자들의 다음 봉기가 발발한 것은 1834년 4월9일입니다.
프랑스에서 19세기는 '봉기의 세기'였다. 정
부군과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 민중들
이 때는 노동자들은 공화주의 슬로건을 내걸고 싸웠어요. 이날 아침 공화주의자들이 시내에 뿌린 전단에는 "자유, 평등, 우애 아니면 죽음"이라는 슬로건이 적혀 있었습니다. 또 전단은 단결금지법에 반대해 투쟁할 것을 호소했고요. 노동자들이 시내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오전 10시 무렵 헌병들이 무장을 하지 않은 직조공들을 향해 발포를 했습니다. 리용의 노동자들은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서둘러 무장했고, 봉기자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공화국 아니면 죽음"이라는 슬로건 아래 전투에 참가합니다. 리용 중심부의 주요 지점들을 점거한 봉기자들은 근처에 사는 농촌 사람들에게 봉기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지요.
정부군은 포격을 개시했고 격렬한 전투가 며칠 계속되다가 4월15일 노동자 봉기는 진압되었는데, 정부가 마지막에 동원한 병력은 정규군 3만 명이 넘었어요. 리용 봉기가 계속되는 동안, 생 떼띠엔느(Saint Etienne), 그레노블(Grenoble) 등 다른 도시와 군구들에서도 노동자들이 전투에 참가했어요. 4월13일과 14일에는 파리에서도 봉기가 일어났고, 4월13일 파리는 마치 전쟁 진지처럼 보였고, 4만 명의 장교와 병사가 전투태세를 취했어요. 이틀 동안의 바리케이드전이 일부 지역에서 벌어졌으나, 4월14일 아침나절 봉기자들은 포위를 당했고, 군대는 바리케이드 방어자들을 표적 거리 안에서 발포합니다. 그리고 장교와 사병들은 봉기자들을 숨겨주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총검과 소총으로 잔인하게 살해합니다.
리용 노동자들의 두 번에 걸친 봉기는 지배세력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자립적인 투쟁이었으며,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계급적 성격을 띤 것으로서 세계노동운동사에서도 획기적 중요성을 갖는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3. 독일 노동자들의 투쟁

독일에서 전개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늦은 1820년대에 들어 본격 발전합니다. 1820년부터 1840년까지에 걸쳐 산업생산은 75%가량 증대했고요. 섬유산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석탄생산이 증대되었으며, 철도망이 괄목할 만큼 신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1816년에서 1845년 사이에 2480만 명에서 3440만 명으로 증가합니다. 그러나 독일은 여전히 반봉건적인 농업국가로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는 낙후되어 있었어요.
독일에서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계급 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정치적으로는 무력한 편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점점 강력한 힘을 장악했던 부르주아지가 형성되었고, 노동자계급도 성장했어요. 노동자계급의 핵심 부분인 산업노동자층도 증대합니다. 1832년 약 32만5천 명이 공업과 광업에 종사했는데, 1848년에는 그 수가 약 70만 명으로 불어나죠.
당시 독일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은 매우 열악했어요.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 정도 노동을 했지만, 임금은 기아 수준이었고 형편없는 빈민가에서 생활했으며, 사회보장과 선거권마저 보장받지 못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 공공연한 형태의 계급 충돌이 일어납니다.
당시 독일의 정치 지형은 복잡했습니다. 독일은 하나의 통일 국가가 아니라 38개의 봉건제후국으로 나뉘어 서로에 대해 경제적·정치적 장벽을 구축하고 있었어요. 또한 봉건적 지주의 통치 아래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영주국들도 많았고요. 이런 상황은 시장 확대를 바라는 부르주아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죠.
그래서 독일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본받아 봉건적 통제와 장해를 철폐하려 했어요.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성장하고 있던 노동자계급에 두려움을 느껴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결국에는 프로이센 토지 소유계급인 융커와 비굴한 타협을 합니다. 이 타협으로 융커는 정치적 지배권을 계속 유지했고, 독일의 통일은 실현되지 못하죠.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의 길은 진척됩니다. 이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성과의 하나로 독일에서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 대두합니다.

의인동맹
독일 수공업자와 소(小)부르주아 지식인 출신의 정치적 망명자들이 1832년 파리에서 민주주의적 강령을 내건 최초의 정치조직 '독일 인민연맹'을 결성합니다. 이 연맹은 독일의 영주국가들에 흩어져 있던 지지 그룹이나 개인들과 비합법적인 결합을 가졌고, "성실한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노동으로 빵을 얻지 않고는 먹지 못하리라"를 신조로 내걸었죠.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정이 1834년 4월 결사금지법을 공포함에 따라 해체된 연맹의 구성원들은 비합법적인 '법익박탈자 동맹'(Outlaws' league)을 결성합니다.
1848년 혁명기 독일의 수도 베를린 모습
이 동맹은 엄격한 비밀조직으로서 그 구성은 주로 노동자들이나, 조직을 주도한 사람은 소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이었어요. 법익박탈자 동맹의 본부는 파리에 있었지만, 조직의 지부들은 독일 안에도 있었죠. 법익박탈자 동맹은 자신의 목표를 독일 해방으로 설정했으며, "먼저 독일 언어와 관습이 통용되는 나라들에서, 다음으로 세계 모든 나라들에서 사회적·정치적 평등, 자유, 공공윤리, 국가통일의 확립과 보전"을 선언했어요.
1836년∼1837년 '가장 급진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사람들'이 법익박탈자 동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의인동맹'(Bund der Gerechten, the League of the Just)입니다. 의인동맹 결성 직후 이 동맹의 정치적 핵심은 스위스에서 온 수공업자들로 보충되었는데 그들은 스위스에서 급진적 민주주의 조직 '청년 독일'(1834년∼1836년)의 노동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수공업자는 소부르주아가 아니라, 상인으로부터 재료를 제공받아 제품을 생산하여 납품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람들로서 신분상 직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이 조직이 내세운 주요 목표는 통일된 독일 민주공화국 수립입니다. '청년 독일'의 급진파들은 독일 수공업자 그룹과 결합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이 조직은 정치세력으로 바뀝니다.
스위스의 현(縣) 당국이 독일 연방의 압력을 받아 '청년 독일'의 열성 활동가들을 추방하자, '청년 독일'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수공업자 그룹은 파리로 가게 되었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의인동맹에 참가합니다. 그리하여 주로 직인 중심의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들이 조직의 안정적 핵심을 이루게 되죠.
1839년 5월 무렵에는 프랑스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의인동맹의 구성원 일부가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갑니다. 그들은 런던에서 의인동맹 본부와 '노동자교육협회'(the Workers' Education Association)를 조직했어요. 런던 본부는 파리와 스위스의 지부들뿐만 아니라 독일 지역 내 국가들에 있는 수공업자 비밀조직과도 연결을 맺고 있었습니다.
의인동맹의 활동은 주로 이론적·선전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조직 안으로는 이념의 혼란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의인동맹 결성 초기에는 프랑스의 공상적 공산주의자인 E. 까베와 재산공유제 주창자이면서 통일 민주독일을 지향하는 결연한 투사인 K. 샤프의 주장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어요. 1830년대 말부터 1840년대 초에는 빌헬름 바이틀링의 사상 체계가 의인동맹 안에서 우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바이틀링은 노동자계급을 사회 변혁의 담당자로 보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피압박 계급과 구별하지 않았어요. 그는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을 설명하지 않았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노동자계급의 동맹을 반대했죠. 또 그는 노동자계급이 정치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고 정당 건설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이런 바이틀링의 체계에서 종교적·감상적 구상들이 현저하게 드러나면서 1840년대 중반 들어 바이틀링의 사상이 쇠퇴합니다.
그 뒤를 이어 의인동맹 회원들 상당부분이 '진정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습니다. '진정 사회주의'는 노동자가 추진하는 자립 투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보편적 사랑'의 설교와 불공정에 대한 폭로 등 도덕적 수단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죠. 그리하여 '진정 사회주의'는 감상적 원망과 민족주의적 지향, 그리고 사이비 혁명의 언설로 가득 차 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1845년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 여행을 하게 되고, 이 때 이들은 의인동맹 런던본부 지도부와 만나 유물론적 세계관의 기본 명제에 관해 토론합니다. 그 뒤로 맑스주의가 의인동맹의 이념체계 수립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슐레지엔 반란
1844년 독일에서 최초의 노동자 대중 행동인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19세기 독일은 산업혁명을 겪는다. 사진은 1837년 무렵의 철도
1842년∼1844년에 걸쳐 슐레지엔 직물 산업에서 생산한 면직 피륙 판매가 감소했고, 당시 슐레지엔의 직조공들은 상인들로부터 면사의 공급을 받는 촌리의 수공업자들이었죠. 1844년에는 직조공의 수입은 떨어진 반면에 식료품 가격은 올라갔어요. 슐레레지엔 직조공의 생활은 영국 노동자들 보다 훨씬 열악했죠.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분노를 촉발시킨 사건이 발생합니다. 슐레지엔 상인들 가운데서도 쯔반지거를 비롯한 '탐욕과 나쁜 성향'을 지닌 몇몇 악덕 기업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임금을 내리고 벌금을 부과하는 한편, 노동자들에게 난폭하게 굴었죠. 1844년 5월 들어 페테르스발다우 지역에서 심한 동요가 일어났으며, 슐레지엔 직조공의 '라 마르세이에즈'가 된 '피의 학살'(the Bloody Massacre)이란 노래가 점점 더 자주 들리게 됩니다.
6월3일 쯔반지거 집 근처에서 그 노래를 부르던 한 직조공이 하인들에게 두들겨 맞고 현지 경찰에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다음날 노동자들 한 대열이 쯔반지거의 공장으로 몰려가 서류를 불태우고, 집에 들어가 물건들을 부수었죠. 그 다음날인 6월5일에는 다른 '악덕' 기업주들의 사업체로 몰려갑니다. 이런 사태에 놀란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에게 돈과 식량을 나누어주었고, 이날 낮에 군대가 페텔스발다우에 도착합니다.
그 사이에 노동자들은 대열을 지어 근처에 있는 랑겐빌라우로 행진했고, 기업주들은 돈으로 노동자들을 달래려 했으며, 마을 목사는 노동자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이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했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업주의 수하들을 밀쳐내고 목사들을 개천에 빠뜨렸으며, 악덕 기업주의 공장 건물과 집을 마구 부수었어요. 군대가 도착하자, 노동자와 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 충돌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행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군대는 퇴각하죠.
6월5일 밤부터 며칠에 걸쳐 군대가 반란이 일어난 지역으로 다시 투입되었어요. 정부당국은 압도적인 우세를 확보한 다음 대량 검거에 들어갔고, 이런 상황에서 6월9일 들어 직조공들은 직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슐레지엔 노동자들의 반란은 독일의 다른 지역과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의 투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습니다.
슐레지엔 반란은 많은 역사가들이 말하는 '기아 폭동'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억압자에 대한 저항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억압과 착취 체제에 대한 반란이었죠. 그런 점에서 슐레지엔 반란은 영국에서 일어난 차티즘 운동이나 프랑스 리용 노동자의 봉기 등과 같은 반열에 든다고 볼 수 있어요. (다음호에 계속)


* 더 읽을 책

박지향, 「초기 차티즘 운동과 계급의식」, 이민호·김인중·박지향·안병준·정현백·유경준, 『노동계급의 형성』, 1989, 느티나무.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꼬뮨까지』,1991, 까치.
박남일, 『반역의 역사 상』, 1994, 계백.
A. 스터름탈, 『유럽 노동운동의 비극』, 1983, 풀빛.
W. Z. 포스트, 『세계노동운동사Ⅰ』, 1986, 백산서당.
D.H. 코울, 『영국노동운동사 상』(김철수·김천우 역), 1980, 광민사.
H. 바른케, 『독일노동조합운동소사』(국민문고편집위원회 역), 1970, 日本 大月書店.
헬가 그레빙, 『독일노동운동사』(박경서 역), 1985, 한벗.
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정도영 역), 1998, 한길사.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정도영·차명수 역), 1999, 한길사.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칼 마르크스 전기 1권』(김라합 역), 1987, 소나무.
칼 맑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2001, 박종철출판사.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출판사.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The Institute of The Internationnal Working-Class Movement, 1976,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Ploblems of History and Theory-Progress Publishers Moscow. USSR Academy of Sciences, 1976, volume 1: 312).


출처: 노동사회 2002년 1월호, 통권 61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80년대, 문예계간지 및 무크지의 시대

주제가있는책 (80년대풍향계 )
지난 80년대는 각종 문예계간지와 무크지의 시대였습니다. 선명한 깃발 펄럭이며, 시대의 아픔을 과감하게 담아왔던 이 지면들은 여러 가지의 사정으로 일찌감치 깃발을 내리기도 했으며, 일부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면서 우리 문학과 사상의 지평을 넓히고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어떠한 책들이 창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시대적 고민을 조금이나마 엿보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확보된 자료들이 빈약하여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창간되었던 창간호의 일부만을 소개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준비되는 대로 보완해가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을 주실 분은 언제라도 책이있는 글터 서점으로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녹두꽃 1 (녹두)글쓴이:녹두 1988.09
역사비평 제1집 (형성사)글쓴이:역사문제연구소 1987.09
사상문예운동 (풀빛)글쓴이:풀빛 1989.08
애국의 길 1 (녹두)글쓴이:녹두 1989.04
우리사상 1991 (새벽별)글쓴이:새벽별 1991.03
실천문학 1985년 봄 (실천문학사)글쓴이:실천문학사 1985.04
생활과 문학 (노동자문학학교)글쓴이:노동자문학학교 1988.12
문학과사회 1988년 봄 (문학과지성사)글쓴이:문학과지성사 1988.02
노둣돌 1992 가을 (두리미디어)글쓴이:두리 1992.08
문학동네 (문학동네)글쓴이:문학동네 1994.11
작가세계 1989년 여름 (세계사)글쓴이:세계사 1989.06
노동해방문학 창간호 (1989년 4월) (노동문학사)글쓴이:편집부 1989.03
현대시세계 1 (창간호/1988 겨울) (청하)글쓴이:편집부 1988.12

 

 

 

*출처: 책이 있는 글터서점, [주제가 있는 책] 중에서



제목(원제목) 녹두꽃 1  
절판됨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녹두꽃  글쓴이 녹두  옮긴이  
출판사 녹두   출판년도 1988.09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이 문예지가 비슷한 시기의 것들과 차별화되는 것은 편집자의 포부를 통해서 밝히고 있듯이 그 동안 소시민적인 독자대중을 상대로 한 문예지는 많았으나 문예가 사회발전에 이바지할 길을 모색하는 문예운동가나 창작을 통해 진보의 내용을 살지워 가는 작가. 시인에게 창조적 자유의 폭을 넓혀 주려는 매체를 표방했다는데 있다. 따라서 창간호에서 부터 창작적 성과물에 대한 폭넓은 수용의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목차보기
 

문예통일전선과 80년대 후반기 민족문학의 대오/백진기

대작시선

김남주 옥중서신

문예조직론 시론
  노동운동에서 문예사업이 전개되어야 할 방향/박승옥
  지역문예대중화조직의 건설은 이렇게/정채화
  창작역량의 조직적 운용에 대하여/심산
  학생운동 내의 문학예술투쟁에 대한 제언/김동해

우리시대의 창작방법론과 창작자들의 임무
  왜 민중적 내용에 민족적 형식인가/광주청년문학회
  창작실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광주청년문학회
  오늘의 작가는 무엇을 써야 하는가/장명국
  한국현대사는 대작을 요구한다/류청하

소설


문예조식 운용 사례
  조직활동의 문예적 전망/용봉문학회
  전문창작패의 활동내역/비나리패

창작보고서/김남일/김인숙
문학동향/김진경/김재용/이재현

 

제목(원제목) 역사비평 제1집  
절판됨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역사비평  글쓴이 역사문제연구소  옮긴이  
출판사 형성사   출판년도 1987.09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무크지로 출발하여 이제는 우리 역사학의 핵심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역사비평]의 출발은 당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대중적인 수준에서 폭넓게 탐구하고자 하는 의미있는 것이었다. 1986년 2월에 개소한 역사문제연구소을 중심으로 구성된 필진들의 꾸준한 노력은 왜곡되고 삭제된 우리 역사 연구의 맥을 잇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목차보기
 

역사현실과 역사인식/서중석
실천적 지식인상 정립을 위한 제언/윤대원

미군정의 성격과 민족문제
  8.15직후 한국사회와 미군정의 성격/김광식
  해방 직후 대구지방 정치의 전개과정/정해구
  8.15 직후 광주 지방에서의 정치투쟁/김창진
  8.15 직후의 민족문학관/임헌영

19세기 민중의식의 성장과 민중운동/안병욱
역사소설의 반역사성/이이화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박호성
중국혁명에 대한 스탈린.트로츠기 논쟁/최창남

[한국민중사]사건 증언기록/정창렬.강만질.김진균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를 위한 전제/김남식
식민지시대 한국노동운동사 연구의 성과와 과제/전현수

 

제목(원제목) 사상문예운동  
절판됨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사상문예운동  글쓴이 풀빛  옮긴이  
출판사 풀빛   출판년도 1989.08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끝나고 80년대가 끝나가던 시기에 변혁운동진영의 이론적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왔다. [사상문예운동]은 변혁사상의 현실적 외화형태인 제반 정치 사회 운동의 이론과 문학, 예술, 학술 등 이데올로기 문화전선의 형성과정 및 그 동향에 주목하면서 변혁운동진영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주체적 변혁사상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론적 책임을 맏고자 하였다.

 
목차보기
 

입력된 자료가 없습니다

 

제목(원제목) 애국의 길 1  
절판됨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애국의길  글쓴이 녹두  옮긴이  
출판사 녹두   출판년도 1989.04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한반도 모순의 주범이 분단상황임을 명백히했던 이 잡지는 통일을 극력 방해하는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군정독재를 종식시키는 것인 애국운동의 길임을 선언한다. 또한 이 잡지는 창간사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현실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목차보기
 

입력된 자료가 없습니다

 

제목(원제목) 우리사상 1991  
절판됨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우리사상  글쓴이 새벽별  옮긴이  
출판사 새벽별   출판년도 1991.03   쪽수 448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목차보기
 

1991년 세계정세와 남한 혁명운동 승리의 전망/김승조
노동해장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북한의 "혁명전통론"비판/박종수
필리핀 바안당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최천수

PDR론-민주주의혁명에서의 조편향과 사회주의혁명에서의 우편향/류선종
"종속악화-종속심화"논쟁의 오류와 사회구성체 논쟁의 새로운 방향/김명환

진단과 대안/주택문제의 정치경제학과 민중진영의 대안/이해경
남민전의 안재구/남한변혁은 남한 민중에 의해서/최현숙

남한 사회민주주의의 등장과 제2인터내셔널의 교훈/정민재

학생운동사연재1/혁명적 학생운동의 출발점
민청학련.민학련.전민학련.야비-전망논쟁/김석형

사회구성체논쟁 개막의 주역,박현채/정현주

 

제목(원제목) 실천문학 1985년 봄  
절판됨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실천문학  글쓴이 실천문학사  옮긴이  
출판사 실천문학사   출판년도 1985.04   쪽수 493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70년대 반유신투쟁 속에서 탄생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모태로 창간된 『실천문학』은 모든 지배주의를 거절하는 의로움 싸움으로서의 문화운동에 기여할 것을 명백히 했다. 이후 현재까지 『실천문학』은 일정한 자기의 목소리를 지키며, 우리 시대의 문학적 지향점을 강하게 응시해오고 있다.

 
목차보기
 

민족, 민중 그리고 문학/백낙청/김지하
민중사상의 뿌리를 찾아서/이문구
시대와 형식/한정숙/성민엽/최원식/장선우

연재소설/전쟁과 도시/안정효
연재서사시/백두산/고은

지역 노동운동의 가능성/송정남
이대로 얼마나 갈 수 있겠읍니까/임정남

 

제목(원제목) 생활과 문학  
절판됨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생활과문학  글쓴이 노동자문학학교  옮긴이  
출판사 노동자문학학교   출판년도 1988.12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살아가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적어 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학의 근본정신이라고 믿었던 이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문학, 솔직하고 생생한 문학, 친근한 문학을 일구고자 하였다. 각 지역의 노동자문학회들이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었던 시대적 상황을 증거하는 자료이다.

 
목차보기
 

입력된 자료가 없습니다

 

제목(원제목) 문학과사회 1988년 봄  
절판됨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문학과사회  글쓴이 문학과지성사  옮긴이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출판년도 1988.02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문학과 지성사는 이 창간호를 통해서 80년대 무크운동을 총제적으로 점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이자 대안인 지점에 바로 『문학과 사회』를 놓아두고자 하였다. 그것이 "문학과 사회의 동시적 포괄 관계를 통해 한국 사회의 진정한 변혁의 전망을 추구"하고자 했던 『문학과 사회』의 기반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까지 『창작과 비평』과 함께 우리 문단의 양 산맥을 이루어온 문학적, 사회적 토대가 되었다. 70년 가을에 창간되어 80년 가을 강제 폐간 되기까지 우리 문단의 한 축이었던 『문학과사회』의 뒤를 잇고있다.

 
목차보기
 

『문학과 사회』를 창간하면서       
 권두 주제    사회 변화와 문학적 인식   
         전환기의 문학과 사회 성민엽  
         문학 제도와 문학 홍정선  
         80년대 분단 소설의 새로운 전개 임우기  
         민중문학론의 인식 구조 정과리  
 
기획 서평    80년대 무크 운동의 의미   
         무크지 시대의 종언 혹은 전환기의 문학적 움직임 한기  
         한국 사회의 성격과 민주주의의 전망 허석렬  
         역사의 대중화를 향하여 송기호  
 
비평·논문       
         증오와 폭력 김현  
         풍자(諷刺)의 제의(祭儀)를 넘어서 김주연  
         독일의 분단 문학 안삼환  
         연행 예술로서의 놀이 문학과 민중적 현실 인식 임재해  
         문화와 매스 코뮤니케이션에 대한 기호학적 전망을 위하여 홍석경  
 
시       
 
        귀국 고은  
         까통 외 3편 오규원  
         蓮亭里 이야기 이동순  
         어두워질 때까지 외 4편 이성복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외 4편 최명  
         고향, 다시 강가에서 외 2편 윤중호  
         길목 거대한 숲길 외 4편 정남식  
 
소설       
         전짓불 앞의 방백(傍白) :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2 이청준  
         이미 그를 찾아간 우리의 소설 기행 : 한없이 낮은 숨결 9 이인성  
         풍적(風笛) 김성동

 

제목(원제목) 노둣돌 1992 가을  
절판됨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노둣돌  글쓴이 두리  옮긴이  
출판사 두리미디어   출판년도 1992.08   쪽수 52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시대의 문학적 담론을 이끌어가던 이들이 편집위원으로 포진했던 이 계간지는 지금은 고인된지 오래인 권운상의 [녹슬은 해방구]에 대한 창작보고서를 담을 뿐만 아니라 [역사는 끝났는가](당대)로 독자들에게 익숙한 송두율의 글이나 권순응. 김형수의 글들이 창작의 실천적 근거를 마련해보려는 이 잡지의 희망을 대변하고 있다.

 
목차보기
 

길은 열렸다/창간사
관념성을 극복하고 발을 딛고 있는 곳으로부터 나아가자/권두좌담
(참석자)최원식/김진경/임규찬/백진기
통일을 위해 문학의 길을 걷다보면 어디나 조국이었네/특별기고
만인의 시 만인의 진실/고은
[녹슬은 해방구] 전9권 창작을 보고합니다/권운상
사회주의 변화 이후 전환기의 문화와 그 지평들/송두율
민족문학 논쟁, 그 이론과 실천적 근거에 대한 비판/권순긍
창작자의 입장에서 본 리얼리즘 논쟁/김형수
구체적 전체성을 위한 발돋움/최유찬
진보적 시문학의 어제와 오늘/오성호
시/김규동/이광웅/심호택/이영진/고규태/정해동/김주대/문부식(신인)
소설/남정현/현기영/정해천
지금 누군가 이런 글을 써야 한다/장명국
격동하는 역사 속의 인식의 동요에 대하여/채만수
노동자문학 우리들의 이야기

 

제목(원제목) 문학동네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문학동네  글쓴이 문학동네  옮긴이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년도 1994.11   쪽수 475 
권장도서여부   가격 6,000원 포인트:300(5%) 서적상태:정상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동구권의 몰락과 이념적 공백기에 사회적 합의가 없는 진공상태에서 문학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다. 계간 『문학동네』는 이러한 문단 안밖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보다 좋은 사회를 위한 문학인들의 직간접적인 노력을 촉구하는 동시에 이들과의 동지적 연대감을 확고히 하고 확산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것이 『문학동네』가 세상에 밝힌 약속이었다. 몇 번의 어려움을 겪었고, 아직 『문학동네』의 약속을 지켜보는 독자들의 관심은 지속되고 있다.

 
목차보기
 

 창간사   계간 『문학동네』를 창간하며 

특집 - 문학, 절망 혹은 전망 

황종연   민족을 상상하는 문학 -한국소설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 영 채   환멸의 시대와 소설 쓰기 
류 보 선   전환기적 현실과 민족문학의 운명 
장편소설 

연재 제1회 송 기 원   여자에 관한 명상 
연재 제1회 신경숙   외딴 방 
분재 제1회 김훈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산문 

박상륭   아으, 누가 이 공주를 구해낼 것이냐 -동화(童話) 한 자리 
고 종 석   명교에게 
기획서평 

채호석   역사와 소설이 만나는 네 가지 방식 -최근 발간된 동학관련 대하소설을 읽고 
젊은작가특집 최윤 

작가초상 박해현   텅 빈 중심에서의 즐거움 -최윤 소설을 읽기 위한 대담 
작가론 최 인 자   새장을 든 여인 
자전소설 최 윤   집 방 문 벽 들 장 몸 길 물 -파편 자전 : 공간 
단편소설 

이 청 준   아우 쌍둥이 철만씨 
이문구   더더대를 찾아서 
공 선 옥   내 생의 알리바이 
시인을 찾아서 

이 문 재   중년, 시와의 불화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후 침묵해온 이성복 시인

 

제목(원제목) 작가세계 1989년 여름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작가세계  글쓴이 세계사  옮긴이  
출판사 세계사   출판년도 1989.06   쪽수 440 
권장도서여부   가격 3,800원 포인트:190(5%) 서적상태:정상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다소 경직된 문단 안팎의 상황을 조심스레 살피면서 다양성의 확보라고 하는 측면에서 『작가세계』의 지평을 다지고 있다. 동시에 이들의 창간사를 통해서 또 하나 엿볼 수 있는 것은 작품의 성과를 보다 풍성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지금까지도 『작가세계』는 출발 선상에서 다짐했던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어져오고 있어 우리시대의 젊고 의미있는 작가들을 발굴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제목(원제목) 노동해방문학 창간호 (1989년 4월)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글쓴이 편집부  옮긴이  
출판사 노동문학사   출판년도 1989.03   쪽수 415 
권장도서여부   가격 3,400원 포인트:170(5%) 서적상태:정상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목차보기
 

창간사/새날의 진정한 주인인 노동형제들에게...2
이달의 명언“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7
특집/노동해방투쟁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는 박노해 시인의 신작시 12편...9
이달의 전선...44
이달에 만난 동지...68
집회취재...82
투쟁현장에서...101
정치논평...126
지상논쟁...130
기획대담...147
일터의 하루...164
사진글...169
기획탐방...220
기획문학평론...240
노동해방 시...268
노동해방 소설...285
연재수기...330
문예이론...356
영화비평...368
현장의 목소리...374
설문취재...376
이달의 추천도서...384
노동해방선동대...390

 

제목(원제목) 현대시세계 1 (창간호/1988 겨울)  
로그인안됨
시리즈명   글쓴이 편집부  옮긴이  
출판사 청하   출판년도 1988.12   쪽수 251 
권장도서여부   가격 3,000원 포인트:150(5%) 서적상태:정상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목차보기
 

창간호를 내면서...14
신작시...16
평론...46
시인연구...90
장시...108
나의 삶 나의 시...143
소련 현대시 특집...156
좌담...205
번역평론...220
시집서평...23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