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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05/20

[원전] 맑스 엥겔스의 기념비 제막식에 즈음하여 -레닌

 

맑스 엥겔스의 기념비 제막식에 즈음하여


레닌


  지금부터 세계 노동자혁명의 지도자 맑스와 엥겔스의 기념비 제막식을 올리겠습니다.

  수세기 동안 인류는 한줌도 되지 않는 착취자들의 억압으로 고통받으며 신음해왔습니다. 이 한줌도 되지 않는 착취자들이 수천만의 근로자들을 조롱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 시대의 착취자들-지주-에게 약탈당하고 학대받아 온 자가 뿔뿔이 흩어져 있던 무지한 농노적 농민이었다면 새로운 시대의 착취자인 자본가들은 피억압대중 속에서 이 대중의 선진부대인 도시 공장노동자, 공업노동자를 찾아냈습니다. 공장이 공업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도시생활이 그들을 계몽시켰으며, 공동의 스트라이크투쟁과 혁명적 행동은 그들을 단련시켰습니다.

  맑스와 엥겔스의 위대한 세계사적 공헌은 자본주의가 붕괴하며 그리하여 공산주의로 이행해 가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과학적 분석에 입각하여 증명하였던 일입니다. 이 공산주의 아래에서는 급기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없어질 것입니다.

  맑스와 엥겔스의 위대한 세계사적 공헌은 온나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들의 역할, 그들의 임무, 그들의 사명을 제시하였던 일입니다. 말하자면 자본에 대한 혁명적 투쟁에 곧바로 일어서서 이 투쟁 속에서 자신들의 주위에 모든 근로자, 피착취자를 결집시키는 일,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이 예견이 막 실현되기 시작한 행복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 사회주의혁명의 서광이 많은 나라들에서 비쳐오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각 국민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학살의 형용할 수 없는 참화는 어디에서나 피억압대중들의 영웅적인 궐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해방투재에서 그들의 힘을 수십 배로 높이고 있습니다.

  맑스와 엥겔스의 이 기념비가 수천만의 노동자와 농민에게 우리가 외롭게 투쟁하고 있지 않음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선진 나라들의 노동자들이 계속 일어서고 있습니다. 그들의 앞길에는 또는 우리들의 앞길에는 더욱 격렬한 투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동의 투쟁 속에서 자본의 쇠사슬은 끊어지고, 사회주의가 최종적 승리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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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사회주의자들

[해외논단]되살아나는 사회주의자들
[세계일보 2005-03-23 22:18]
누군가가 사람들을 경멸하고 자기네 정부 손에 수억명이 목숨을 잃게 한 어떤 사상을 옹호한다면 독자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물론 내가 말하는 그 사상은 사회주의와 공상적 사회주의자,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국가사회주의자, 그리고 당연히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그 변종들을 가리킨다.

사회주의는 단지 정부(혹은 공동체)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경제체제를 말한다.

공상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페이비언주의자를 막론하고 지난 200년간 사회주의 실험이 경제적 실패와 개인 자유의 상실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자랑스럽게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회주의 정당들은 여전히 유럽 일부와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 상당 지역에서 인기가 있다. 최근 몇 개월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했다. 미국 대학가에서는 많은 교수와 학생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른바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러시아와 중국, 캄보디아, 그리고 여타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은 1억명 이상의 집단 죽음을 초래했다. 1992년 내가 우연히 크렘린에 있었을 때 러시아 인구학자들은 1923∼53년의 스탈린 통치 기간에 소련에서 6300만명의 ‘과잉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제3세계 사회주의자들은 자기네 나라를 반세기 동안 불필요하게 빈곤에 빠뜨렸다. 영국 민주사회주의자들은 1945년 클레먼트 애틀리 총리 하에서 정권을 잡았고 그 결과 영국경제는 파탄에 빠졌다.

다른 민주사회당 정부들도 마찬가지의 실패를 거듭했으며, 그 결과 80년대에는 경제성장을 재점화하는 데 명백히 필요했기 때문에 민영화가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계속 되살아나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실패를 부인하거나 외면하며 다음 번에는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는 그 실제와 함께 이론 역시 결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실패하고 있고 앞으로 계속 실패할 것이다.

1920년대의 탁월한 경제학자인 루드비히 폰 미제스는 사회주의가 자원을 올바르게 배분할 수 있는 가격체제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인 F A 하이에크도 ‘치명적 자만’이라는 자신의 마지막 저서에서 같은 주장을 폈다.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 실험과 그 잘못된 이론의 실제 역사를 안다면 망상이나 악의에 빠진 경우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계와 언론계 상당 부분이 대대적인 은폐 술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재난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교사들이 교실에서 사회주의적 모델이 실제나 이론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자료를 가르치거나 도입하기를 꺼린다.

미국과 여타 국가들의 조사에서 압도적인 다수의 교수와 공립학교 교사는 정치적 성향에서 좌편향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사회주의 사상이 실패라는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기를 주저하는 것은 놀랄 일이 못된다.

세계적으로 많은 전자매체는 정부의 소유나 통제 하에 있다. 미국에서는 전국공영방송(NPR)이 사회주의 정책의 끝없는 실패의 이유는 물론 그 사실조차 거의 언급하지 않은 채 민간부문의 실패 사례들을 지속적으로 방송하고 있다. 많은 NPR들은 영국 BBC 프로를 중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을 선전하려는 것이다.

대다수 미국인은 정부 소유의 BBC가 영국 방송매체들, 특히 뉴스를 점차 독점하면서 좌익을 편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워싱턴 타임스

정리=권화섭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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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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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가 재미없는 이유 - 토론회 전문기자

[칼럼] 토론회가 재미없는 이유
오창엽     메일보내기
최근 각종 토론회들을 취재하고 있다. 확인해 본적은 없지만 다른 매체의 기자들에게 “국내 유일의 토론회 전문 기자입니다”라고 소개하곤 한다. 프로메테우스 기자들도 그러하지만 토론회를 좋아하는 기자는 드물다.

토론회 취재. 시간 많이 걸리고 골치 아프고 기사로 작성하기도 어렵다. 행사 개요만 소개하고 한두 명 발언을 소개하는 짧은 보도기사라면 모를까, 그 내용과 주제를 독자들에게 적절한 분량으로 그리고 쉽게 전달하려면 무척 많은 시간과 힘이 드는 작업이다. 게다가 독자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도 마치 참석해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하려면 영상으로 녹화하여 보여주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토론회를 담은 몇 시간짜리 인터넷 영상을 몇 명이나 보겠는가.  

말 보다 중요한 건 뜻

나의 토론회 기사 취재 목표는 뚜렷하다. 전문가들이 진지하게 연구하여 토론회 장소에서 치열하게 토론한 내용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고, 그 핵심 주제를 환기시키고, 각각의 주장을 정확하게 전달하되 토론자들의 ‘진단’과 ‘분석’과 ‘대안’의 공통점과 차이점까지도 드러내 주려고 한다. 토론회 현장에서는 발제문으로 대신하고 넘어가는 대목도 많다. 그럴 때는 그 자리에서 발언하지 않았어도 자료집을 참고해서 그의 말과 글을 종합한다. 말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하고자 한 취지와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지한 사회학 분야의 책들과 철학 관련 책들을 비교적 덜 지루해 하며 읽는 편이고 난해한 예술영화들도 인내심을 갖고 보는 편이다. 그래서 자료집을 참고하면서 토론자들의 발제와 토론을 들으며 보내는 토론회 참관 시간이 그리 괴롭진 않다. 그런데 대부분의 토론회가 진지하긴 하지만 열에 아홉은 재미없다. 진지하면서도 재밌는 토론은 MBC백분토론 밖에 없는 듯하다.

토론이란 무엇인가?

보도자료를 보아도 그날 사회자의 소개를 보아도 분명 행사의 이름은 ‘토론’회인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행사가 너무 많다.

토론(討論, discussion / debate)이란 기본적으로 대화다. 무엇에 대해 누구와 대화(discuss)하는 것이며 무엇에 관해 (서로) 이야기하거나 의논하는 것이다. 즉 토론은 옆 사람이든 앞 사람이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각 자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토론은 그 문제의 이해를 높이고 그 주제를 논의해서 진단하고 대안을 찾는 일련의 의사소통 행위다. 대안을 못 찾더라도 제대로 진단이라도 하면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생긴다.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 방백만이

그러나 최근 내가 다녀본 토론회에 ‘대화’는 없고 ‘방백’만이 존재했다. 독백은 연극에서 어떤 ‘배우가 상대역 없이 혼자 말하는 행위 또는 그런 대사’를 말하고 방백은 ‘등장인물이 말을 하지만 무대 위의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 대사’를 뜻한다. 토론회에 참석한 토론자들이 대화를 안 하고 방백을 한다는 게 믿어지는가. 실제로 참석해본 사람들은 무슨 이야긴지 이해할 것이다.

토론회에 초대되어 참여한 토론자들이 다른 토론자의 주장과 발언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서로 박수만 쳐 준다. 주장에 동의해서 박수를 치는 지 떠드느라 고생했다는 건지 속내는 알 수 없다. 출연자들이 다른 토론자의 주장과 내용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이야 말로 차례로 방백을 한 게 아닌가. 요즘 토론회 자체가 요식행사요, 학예회 발표회와 다르지 않으므로 그 전체가 일종의 ‘연극’이라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왜 맨 날 독백과 방백만 있냐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치열한 갈등과 대립이 포함된 논쟁이 있는 그런 연극도 해보라는 말이다.

치열한 토론은 섭외부터 다르다

앞서 백분토론이 재밌다고 했다. 백분토론은 방송국의 토론전문 프로그램이므로 다른 토론회들과 비교하면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백분토론에는 입장의 차이를 가진 이들이 한 토론회에 등장한다.

정치인이든 학자든 반대 되는 입장을 가진 대표자들을 모아 놓고 싸움을 붙인다. 그러다보니 상대의 발언을 자르거나 무시하거나 못 들은 척도 하지만 결국 대화를 기본으로 한다. 토론 내내 긴장감이 넘친다. 사회자도 그런 차이를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토론의 기획자가 진정 치열한 토론을 기획한 것인가 아니면 그냥 사업 가운데 하나이니 관성적으로 그런 행사를 억지로 수행한 것인가에 차이가 있다. 기획자가 토론자들을 섭외하고 적절히 선정할 때부터 토론회의 분위기는 거의 정해진다.

훌륭한 사회자가 제대로 된 토론을 이끈다

그 다음 사회자의 몫이며 스타일이다. 성품 좋은 어른이 후배들 모아 놓고 순서대로 말하라고 해서 토론이 될 리가 없다. 대부분의 사회자들은 시간 배정과 약속도 지키지 못해 나중의 발제자들과 토론자들의 발언 시간을 줄인다. 그들 역시 발언 시간이 줄면 불편해 하는 게 아니라 그걸 핑계 삼아 ‘요점만 간략히’ 발표한다. 말 적게 하고 같은 돈 받으니 뒤에 배치되면 운이 좋은 것인가? 장소를 예약한 시간을 넘기기 일쑤여서 청중 질문과 토론을 반기지 않는다.

90년대 운동진영의 토론회에서는 논쟁하는 장면을 종종 보았다. 그 후로도 총선이나 대선 등 선거와 관련해서는 각 정당과 정치세력을 대변하는 토론자들이 다른 세력을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평소에 그런 논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선거 즉 표와 직결되지 않으면 입 아프게 논쟁하지 않는 것이다. 토론회에서 상대를 압도한다고 해서 대중의 지지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서로를 비판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들

정치적 입장과 평소 사회를 보는 세계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다. 평소에도 친하여 같이 술 먹고 밥 먹는 사람들이 모인다. 표정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들 사이에 무슨 허심탄회한 토론이 필요하겠는가. 늘 비슷한 주제의 토론에 초대받는 사람들끼리 무슨 날선 비판이 되겠는가. ‘빨리 끝내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하지’라는 말을 안 할 뿐 이심전심이다.

토론회에서 망신당하여 학계를 떠났다거나 운동을 접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공개된 자리에서 비판을 받지 않기에 인식이 바뀌거나 그 조직의 노선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잡지의 지상논쟁이라도 활발한가.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이론가들 정책담당자들 학자들이 존재하는데 왜 잘못된 사회를 바꾸는 일은 그리 안 되는 것일까.

노동조합이나 무슨 연맹에서 하는 토론회는 조합비 걷어서 토론회 열고 자료집 찍고 발제자와 토론자들에게 수고비를 주지 않는가. 정당은 당비로 단체는 회비로 그런 행사를 치르지 않는가. 치열하게 진행할 토론회가 아니라면 차라리 그 돈으로 투쟁하는 조합원들 지원하거나 노조도 없는 곳들 지원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게 낫지 않을까.

한국의 토론문화가 수준이 낮다는 지적이 많다. 그럴수록 그러므로 이른바 ‘진보’를 공유하고 있고 ‘운동’과 관련된 단체와 학자들은 치열하게 토론에 임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자신들의 태도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음 글에서는 그 동안 직접 취재하고 지켜보고 기사화 했던 각 토론회들을 되돌아보고 그 내용과 형식을 비교 평가해 보겠다.
2005/05/14 [19:37] ⓒprometh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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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창간1주년 좌담회 중에서

프로메테우스의 편집에 대한 의견

오창엽 : 평소 애독자로서 프로메테우스에 편집방향과 관련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아울러 진보매체 일반에 대한 의견도 궁금합니다.

고남권 : 현장에서 일하는데 북한 핵문제가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기존 언론을 보면 북한의 핵 포기를 이야기 하고 자본의 관점에서만 북한 핵을 다룹니다. 마치 가진 자들이 못 가진자들에 대해 억압하는 것처럼 핵을 못 가진 북한을 억압하는 기사만 나옵니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 프로메테우스에서 한번 다뤄봤으면 좋겠습니다.

세금 문제, 국민연금문제도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임금인상이 돼도 세금으로 떼어 나가면 소용없는 것인데, 사회제도 개선의 문제도 심층적으로 방향을 제시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헌석 : 어차피 인터넷 신문이 연합뉴스가 아니라는 것이죠. 모든 지역의 뉴스를 다룰 수 없고 프로메테우스는 노동과 정치에 관련된 부분에 집중돼 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30대 중반 남성을 타깃으로 하는 신문이 프로메테우스로 보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프로메테우스에서 좀 더 깊은 분석기사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출입처의 문제도 있는데, 진보매체의 기자들이 너무 모릅니다. 환경문제를 보더라도 기자들에게 어떤 문제를 매번 다시 설명해줘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진보매체에서 다루었으면 합니다. 전문성을 갖고 한쪽으로 팠으면 좋겠습니다.

신석준 : 저는 프로메테우스 기사의 절대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질 좋은, 많은 기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웃음) 진보매체 전체적으로 보자면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력이 있어야 하죠. 지금보다 기사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언론으로서 먼저 크게 성장을 해서 유명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층분석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우선 기존 운동의 시각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진보매체 전체적으로는 우선 경쟁력을 가지고 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고남권 : 프로메테우스가 노동 관련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역시 답답한 것 또한 노동 문제입니다. 노동운동의 정책 방향을 놓고 프로메테우스가 오늘과 같은 좌담회를 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층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사건보도는 어디가나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양심상 조선일보를 보지 않는데, 누가 가져오면 봅니다. 경향신문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허전합니다. 조선일보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 기획기사를 꼭 내죠. 자신이 추구하는 논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노동운동 관련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생산해 내는 그런 것들을 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좌담회가 개별 분야에 대해서 진행 돼서 어떤 대안을 만들어 내면 좋겠습니다.

심층분석, 전문성, 기사의 절대량, 조명

원용수 : 얼마 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미디어오늘 기자가 진보언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때 생각을 했죠. 우선 뭐가 진보언론인가? 그것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다릅니다.

지금의 프로메테우스를 보면 일종의 비주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늘 어떤 문제를 중심으로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는데 우리는 비주류의 모습을 다루려고 합니다. 어쨌든 전투적인 자세로 비주류적인 모습을 다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386세대를 보면 그 당시에도 일종의 주류였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그들은 지금 주류가 됐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볼 때 아주 주도면밀히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주류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지점에서 우리는 연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욕심은 끝이 없겠지만 이런 측면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상훈 : 언론이 권력화 되는데, 프로메테우스는 보통사람에게 권력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투쟁을 하지 못하거나 뉴스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은 언론에서도 보도되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하는 것이 진보운동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프로메테우스가 그런 분들을 조명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상계동 쪽에서 중증장애인들에게 활동을 하려 하는데, 힘든 점이 그런 중증 장애인 분들을 발굴 하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실제로 도우려고 노력을 하는데도 그런 분들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런 것을 전국적인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언론에서 해야 하고 기존 언론은 오히려 더 그런 것들을 많이 합니다. 진보매체는 그런 것을 못하고 있습니다. 언론만큼 그런 것에 유리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창엽 : (손으로 고 의장, 신 대표, 이 대표, 정 대표를 가리키며) 결국 프로메테우스가 심층기획을 하고, 기사량을 늘리고, 전문성을 갖고, 찾아가는 서비스를 하면 좋은 신문이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모두 웃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제 인연콘서트에 대해 논해 보죠.  

..........

 

 

5월 18일 창간한 프로메테우스

오창엽 : 이제 모든 좌담이 끝났습니다. 끝으로 오늘 좌담을 마무리 하는 인사말을 듣겠습니다.

이헌석 : 오늘 많은 이야기 나왔는데 뭔가 좀 달라져야 할 때라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내부적인 변화의 기운을 느낍니다. 그것이 어떠한 형식이든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뿌리를 내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올해와 내년에는 정말 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남권 : 노동자에게 사랑받는 프로메테우스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준이라는 노동가수가 명동성당 앞에서 노동복지 재단 설립을 위해서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3천만 원을 모았다고 합니다. 노동가수가 노동복지 재단 설립을 위해 공연하는 것, 정말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좀 취재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연대도 그런 일을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석준 : 사회당의 처지, 외부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2년 정도 있으니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강해졌습니다. 그런 확신이 더 강해지는 올해가 됐으면 좋겠고 프로메테우스에 그런 것으로 자주 등장 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상훈 : 프로메테우스가 여러 차례 행동하는 의사회를 다루어 주어서 고마웠습니다. 부탁드리자면 올해 대중적 연대운동에 대해서 프로메테우스가 많은 비판 바랍니다.

원용수 : 이런 저런 기회로 의견을 나눈 적이 많지만, 이렇게 한 자리에서 이야기 하니 좋습니다. 이런 자리가 많아지면 집중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이야기들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자리를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창엽 : 내일 광주에 가면 보시겠지만 현수막 요청이 왔을 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 2004년 5월 18일 창간한 프로메테우스>와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 2004년 5월 18일 창간한 프로메테우스>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그러한 정신을 놓지 않고 훌륭한 매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05/05/18 [02:40] ⓒprometh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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