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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05/13

2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5/13
    시기별 금서 목록
    솥귀
  2. 2005/05/13
    수사법
    솥귀
  3. 2005/05/13
    진실 보도의 어려움
    솥귀
  4. 2005/05/13
    <핀란드역까지> 중 푸리에와 오웬
    솥귀
  5. 2005/05/13
    쇼의 페이비어니즘
    솥귀
  6. 2005/05/13
    [오세철] 사회주의 역사에서 배우자
    솥귀
  7. 2005/05/13
    [김수행] 영국노동당 100년의 역사
    솥귀
  8. 2005/05/13
    [브리태니커] 사회주의
    솥귀
  9. 2005/05/13
    [노동해방 32호] 제2인터 역사
    솥귀
  10. 2005/05/13
    헌책방 순례(1)
    솥귀

시기별 금서 목록

 

 

미군정 시기

* 김오성, 『지도자군상』, 1946
*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 『조선해방연보』
, 1946
*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의사록』
, 1946
*
박순규, 『조선토지문제논고』, 신한인쇄공사
, 1946
*
이강국 외, 『민주주의 12강』, 문우인서관
, 1946
*
이강국,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 조선인민보사
, 1946
*
정시우 엮음, 『독립과 좌우합작』, 삼의사
, 1946
*
조선인민당 선전부, 『인민당의 노선』
, 1946
*
조선통신사, 『조선연감』, 1947,1948

 

 

 

 

 

 

 

 

1공화국

한국전쟁으로 인한 분단의식과 아울러 이데올로기성의 모든 해외 출판물의 국내 출판이 불허되는 등 정부의 지나치게 경색된 반공문화정책 때문에, 1공화국 시기에는 오히려 금서가 될 만한 책이 별로 없었고, 서적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도 비교적 적었다.

 

미군정 시기제2공화국

4월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붕괴되자, 그동안 억눌려 왔던 표현의 욕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이 시기에는 언론, 출판의 자유가 거의 무제한적으로 보장되다시피 한 시기로, 서적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은 있을 리가 없었다.

 

 

 

 

3공화국 시기

이 시기는 이승만 시대와 같은 원천적인 금서 시대로서, 공산주의계열의 저작물이나, 월북(혹은 납북) 좌익문인 혹은 공산국가 출신 문인들의 문학작품이 금지되었고, 반미의식,계급의식 등의 내용을 담은 저작물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유신 시기(10.26 이전)

* 강춘봉, 『단상단하』
*
구스타브 구티에레즈, 『해방신학』, 분도출판사, 1977
*
권지숙 외, 『반시』 제4, 한겨레
, 1979
*
김경수, 『목소리』, 현대문학사
, 1975
*
김동길, 『가노라 삼각산아』, 정우사
, 1977
*
김동길, 『길을 묻는 그대에게』, 삼민사
, 1978
*
김동길, 『우리 앞에 길이 있다』

*
김병익, 『지성과 반지성』, 민음사
, 1977
*
김용기, 『운명의 개척자가 되어』

*
김우종, 『그래도 살고픈 인생』

*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
김윤환 외, 『한국노동문제의 구조』, 광민사
, 1978
*
김응삼, 『오늘의 민족전선』, 한일출판사
, 1975
*
김정길, 『우리의 가을은 끝나지 않았다』

*
김지하, 『황토』, 한얼문고사
, 1975
*
김홍철, 『전쟁과 평화의 연구』, 박영사
, 1977
*
라이머, 『학교는 죽었다』, 한마당
, 1979
*
마르쿠제 지음,유효종 옮김, 『위대한 거부』, 광민사
, 1979
*
마르쿠제, 『이성과 혁명』

*
문병란, 『죽순 밭에서』, 한마당
, 1979
*
박현채, 『민족경제론』, 한길사
, 1978
*
박형규, 『해방의 길목에서』

*
백기완,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시인사
, 1979
*
브라이덴시타인, 『인간화』

*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 1976
*
송건호,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길사
, 1977
*
신동엽, 『신동엽 전집』, 창작과비평사
, 1975
*
신석상, 『속물시대』, 관동출판사
, 1977
*
싱클레어 지음,채광석 옮김, 『쟝글』, 광민사
, 1979
*
안병욱, A교수 에세이 21장』, 삼육출판사
, 1974
*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 1977
*
염무웅, 『민중시대의 문학』, 창작과비평사
, 1979
*
우인기, 『건국전야의 비화』

*
유동우, 『어느 돌멩이의 외침』, 대화출판사
, 1978
*
이기용, 9대국회 13인전집』

*
리영희, 『우상과 이성』, 한길사
, 1977
*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비평사
, 1974
*
리영희, 8억인과의 대화』, 창작과비평사
, 1977
*
장익 옮김, 『세상에 열린 신앙』, 분도출판사
, 1977
*
장준하, 『죽으면 산다』, 사상사
, 1975
*
전 미카엘, 『노동자의 길잡이』, 가톨릭출판사
, 1977
*
전 미카엘 외, 『한 아이와 두 어른이 만든 이야기』, 새벽사
, 1979
*
정연희, 『갇힌 자유』, 삼익
, 1974
*
조기탁, 『밀 경작』, 삼현출판사
, 1975
*
조용범, 『한국 자본주의의 원점』, 법문사
, 1976
*
조태일, 『국토』, 창작과비평사
, 1975
*
존스 지음, 안재응 옮김, 『제3세계와 인권운동』
, 1977
*
파울로 프레리 지음,성찬성 옮김, 『페다고지』, 한국천주교평신도회
, 1979
*
프란츠 파농 지음,박종열 옮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광민사
, 1979
*
한완상, 『산업선교를 왜 문제시하는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 1978
*
허요석, 『한국의 문제들』, 인간사
, 1975
*
현기영, 『순이삼촌』, 창작과비평사
, 1977
*
황명걸, 『한국의 아이』, 창작과비평사, 1976

 

유신 시기(10.26 이후)

* 강석원 옮김, 『인간없는 학교』, 한마당, 1980
*
강원룡 옮김, 『크리스찬의 정치적 책임』, 대한기독교서회
, 1979
*
김대중, 『내가 걷는 70년대』, 범우사
, 1980
*
김대중, 『조국과 함께 민족과 함께』, 한섬사
, 1980
*
김정준, 『시편 명상』, 기독교서회
, 1980
*
김지명 옮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대화출판사
, 1979
*
김창완, 『새끼를 꼬면서』, 평민사
, 1980
*
박권흠, 『대변인』, 한섬사
, 1980
*
박종화 옮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기독교서회
, 1979
*
송기준, 『송기준 연설문』, 한일출판사
, 1980
*
양성우, 『북치는 앉은뱅이』, 창작과비평사
, 1980
*
이광복, 『사육제』, 대청문화사
, 1980
*
이무영, 『체제와 민중』, 청사
, 1980
*
이문구, 『누구는 누구만 못해서 못하나』, 시인사
, 1980
*
이병주, 『왜 김영삼이냐』, 신태양
, 1980
*
이순기, 『서민이 나의 친구다』, 관동출판사
, 1980
*
이주억 옮김, 『청년과 사회변동』, 대한기독교서회
, 1979
*
이호채, 『한국 외교정책의 이상과 현실』, 법문사
, 1980
*
장동성, 『한글세대론』, 공학사
, 1980
*
장일조, 『사회운동이념사』, 전망
, 1989
*
정을병, 『인동덩굴』, 세광공사
, 1980
*
정 철, 『인간 이상향』, 신기원사
, 1980
*
조태일, 『고여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 전예원
, 1981
*
채선웅, 『맞벌이꾼의 수기』, 관동출판사
, 1979
*
한완상 외, 『다시 하는 강의』, 새밭
, 1981
*
한완상 외, 『이 시대에 부는 바람』, 대양문화사
, 1980
*
한완상, 『불균형시대의 문제의식』, 일월서각, 1980

 

5공화국(정치)

* 편집부, 『현대제국주의와 정치경제학』, 미래사, 1986(원저; 소련 과학아카데미)
*
강석호, 80년대 주변정세』, 거름
, 1985
*
걸리 존 지음,이성희 옮김, 『혁명의 건설자들』, 동녘
, 1986
*
권유론, 『그람시의 마르크스주의와 헤게모니론』, 한울
, 1984
*
그람시 지음,이상훈 옮김, 『옥중수고』 I, 거름
, 1986
*
그루피 지음,최광일 옮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 전예원
, 1986
*
그린, 페릭스 지음,송우영 옮김, 『제국주의와 혁명』, 백산서당
, 1983
*
김동주, 『알기 쉬운 정치 사회』, 한울
, 1985
*
김성윤 편역,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I,II, 거름
, 1986
*
김일산 외, 『희망과 힘』, 청운
, 1985
*
김천영, 『연표 한국현대사』, 한울림
, 1986
*
김학노 외, 『국가,계급,사회운동』, 한울
, 1986
*
네스또파쯔 지음,김명식 옮김, 『동지를 위하여』, 형성사
, 1983
*
노동과 사랑 편집동인, 『정치경제학 사전』, 친구,이론과 실천
, 1984,1986
*
도쿄대학 출판부 지음,윤석인 옮김, 『중국혁명의 해부』, 이삭
, 1984
*
듀커 외 지음,박성식 옮김, 『베트남혁명 연구』, 세계
, 1986
*
드레이저 H. 지음,정근식 옮김, 『계급과 혁명』, 사계절
, 1986
*
레닌 지음,현대평론 옮김, 『레닌이즘』, 청사
, 1985
*
루카치 외 지음,김학노 옮김, 『레닌』, 녹두
, 1985
*
, 킹스턴 지음,고광재 옮김, 『레닌과 농민혁명』, 녹두
, 1986
*
바알 E.M. 지음,김남 옮김, 『군사론』, 녹두
, 1985
*
바쿠닌 지음,하기락 옮김, 『신과 국가 반마르크스』, 형설출판사
, 1982
*
박사월 기록, 『김형욱 회고록』, 아침
, 1985
*
박호진 엮음, 『문화,계급,실천』, 백산서당
, 1986
*
밤비라 바니아 지음,김현식 옮김, 『쿠바혁명의 재해석』, 백산서당
, 1985
*
배종문 엮음,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한울
, 1986
*
브레 드 지음,편집부 옮김, 『혁명 중의 혁명』, 석탑
, 1987
*
블라디미르(레닌) 지음,조자민 옮김,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서울대 자료선 출 판부: 이 출판사의 명칭은 익명이고 비공개로 출판
), 1987
*
비질네이,마오쩌뚱 지음,조영은 옮김, 『유격전의 원칙과 실천』, 사계절
, 1986
*
사쑨 앤 쇼우스타 외 지음,최우길 옮김, 『그람시와 혁명전략』, 녹두
, 1984
*
솔피치오르 외 지음,김정현 옮김, 『국가와 자본』, 청사
, 1985
*
쇼 브루노 지음,편집부 옮김, 『중국혁명과 모택동 사상』 I,II, 석탑
, 1986
*
시몬 로저 외 지음,김주환 옮김, 『그람시의 정치사상』, 청사
, 1985
*
신대아 외, 『대학의 소리』, 공동체
, 1986
*
싱클레어 앤드류 지음,편집부 옮김, 『체 게바라』
, 1984
*
아이마크 지음,이동환 옮김, 1880년대 러시아』, 지양사

*
여현덕,김창진 엮음, 『민주주의 혁명론』, 한울
, 1987
*
연세대 사회과학대 국가론연구회, 『한국에 있어서의 국가와 사회』, 한울
, 1986
*
와다 하루키 외 지음,이동환 옮김, 『러시아혁명과 레닌의 사상』, 지양사
, 1986
*
웨일즈 님 지음,편집부 옮김, 『아리랑』 2, 학민사
, 1986
*
윌슨 에드먼드 지음,김정민,정승진 옮김, 『핀란드 역까지』, 실천문학사
, 1987
*
이와나미 엮음,편집부 옮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한울림
, 1985
*
이재화 엮음, 『레닌』 I,II, 백산서당
, 1986
*
이정훈 외,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거름
, 1985
*
임영일 엮어지음, 『국가,계급,헤게모니』, 풀빛
, 1985
*
정경모, 『찢겨진 산하』, 거름
, 1986
*
조영명 엮어옮김, 『러시아혁명사』, 온누리, 1986(원저: 소련공산당, 『소련공산당사』
)
*
E.H. 지음,김현일 옮김, 『혁명의 연구』, 풀빛
, 1983
*
E.H. 지음,이지원 옮김, 『볼셰비키혁명사』, 화다
, 1985
*
카우츠키 칼 지음,정일교 옮김, 『마르크시즘 수정의 시비』, 형설출판사
, 1982
*
커밍스 브루스 외 지음,박의경 옮김, 『한국전쟁과 한미관계』, 청사
, 1987
*
커밍스 브루스 외 지음,편집부 옮김, 『분단전후의 현대사』, 일월서각
, 1983
*
커밍스 브루스 지음,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청사
, 1986
*
켈리니코스 지음,황석천 옮김, 『마르크시즘의 미래는 있는가』, 열음사
, 1987
*
크루프스카야 지음,김자동 옮김, 『레닌의 회상』, 일월서각
, 1986
*
클리버 헤리 지음,현웅 옮김, 『자본론의 정치적 해석』, 풀빛
, 1986
*
튜록 벤 엮어지음,박영호 옮김, 20세기 혁명사상』, 동녘
, 1986
*
튜린 S.P. 지음,강철훈 옮김, 『러시아 노동운동사』, 녹두
, 1986
*
파농 프란츠 지음,박종열 옮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광민사
, 1977
*
파이크 더글러스 지음,편집부 옮김, 『베트남 공산주의운동사』, 녹두
, 1985
*
편집부 엮음, 『러시아 혁명사』 I,II,III, 거름, 1987(황인평 엮음, 1985년도 판을 개제하여 재출간
)
*
편집부, 『정치경제학 원론』, 녹두, 1986(원저: 소련 과학아카데미
)
*
포스터 W.Z. 지음,정동철 옮김, 『세계노동운동사』 I,II, 백산서당
, 1986
*
프렐리히 파울로 지음,하민영 옮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과 실천』, 석탑
, 1984
*
피셔 에른스트 지음,노승우 옮김, 『레닌주의의 이론구조』, 전예원
, 1986
*
피셔 에른스트 지음,노승우 옮김, 『마르크스 사상의 이론구조』, 전예원
, 1985
*
한수인 지음,김자동 옮김, 『대지의 별』, 일월서각
, 1986
*
황인평 엮음, 『볼셰비키와 러시아혁명』 I,II,III, 거름, 1985,1986(원저: 소련 과학아카데미 편저, 『소비에트연방 공산당사
)
*
今川瑛一 외 지음,강대호 옮김, 70년대 이후 아시아 한반도』, 한겨레
, 1985
*
大森實 지음,편집부 옮김, 『카스트로』, 예맥
, 1983
*
小西誠 지음,이용희 옮김, 『현대정치와 군사』, 동녘
, 1986
*
松田道雄 지음,편집부 옮김, 『러시아 혁명의 기록』, 형성사
, 1984
*
岩田弘川,上忠雄 지음,현대사연구회 옮김, 『현대 국가와 혁명』
, 1986
*
右賀英三郞 지음,최준혁 옮김, 『마르크스 혁명론과 현대』, 한울
, 1987
*
田小惠 지음,이승민 옮김, 『내 영혼 대륙에 묻어』, 백산서당
, 1986
*
眞本實彦 외 지음, 박민 옮김, 『제국주의론』, 한울
, 1987
*
太田勝洪,原田三郞 지음,편집부 옮김, 『호지명』, 성원
, 1986
*
孝橋正一 지음,편집부 옮김, 『로자 룩셈부르크』, 여래, 1983

 

5공화국(경제)

* 김수길, 『이야기 경제학』, 청사, 1985
*
김윤환 엮어지음, 『정치경제학』 1-4, 인간사
, 1986
*
김인철 지음, 『자본주의란 어떻게 움직이는가』, 미래사
, 1985
*
김정로 엮음, 『제국주의론』, 지양사, 1987(원저: 부하린
)
*
김현수 엮어옮김, 『정치경제학 에세이』, 아침, 1985(원저: 소련 과학아카데미
)
*
돕 모리스 외 지음,김대환 옮김, 『자본주의 이행논쟁』, 동녘
, 1984
*
돕 모리스 지음,편집부 옮김,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동녘
, 1983
*
맑스 지음,김영민 옮김, 『자본』 I-1,2,3, 이론과 실천
, 1987
*
맑스 지음,김태경 옮김, 『경제학,철학 수고』, 이론과 실천
, 1987
*
맑스 지음,하기락 옮김, 『도이치 이데올로기,경제학,철학 수고』, 형설출판사
, 1982
*
미야카와 미노루 지음,편집부 옮김, 『자본론 해설』 I,II, 두레
, 1986
*
아민 S. 지음,강희석 옮김, 『가치법칙과 사적유물론』, 민음사
, 1985
*
우리경제연구회 엮음, 『한국민중경제사』, 형성사, 1987(원저: 전석담, 『조선경제사』
)
*
카우츠키 칼 지음,편집부 옮김, 『마르크스 자본론 해설』, 광주
, 1986
*
편집부, 『경제사총론』, 일월서각
, 1985
*
편집부, 『경제학의 기초이론』, 백산서당
, 1983
*
편집부, 『아시아의 농촌과 공업화 현실』, 백산서당
, 1983
*
편집부, 『임금의 기초이론』, 사계절
, 1986
*
편집부, 『임금이란 무엇인가』, 백산서당
, 1983
*
프랑소와 바레 지음,편집부 옮김, 『노동의 역사』, 광민사
, 1979
*
혼마요 이치요 지음,현대평론 옮김, 『현대 자본주의 분석의 기초이론』, 청사
, 1986
*
후버만, 레오 지음,김찬수 옮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동녘
, 1987
*
岡畸發松 외 지음,편집부 옮김, 『해설 자본론』 I, 이론과 실천
, 1986
*
菊本義治 지음,강석규 옮김,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 풀빛
, 1985
*
內海義夫 지음,백원담 옮김, 『세계노동운동 약사』, 화다
, 1984
*
島恭彦 외 지음,유열 옮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세계
, 1986
*
富塚良三 지음,김무홍 옮김, 『경제학 원론』, 전예원
, 1983
*
富塚良三 지음,편집부 옮김, 『경제분석입문』, 형성사
, 1983
*
井野隆一 지음,편집부 옮김, 『레닌의 농업이론』

*
坂本和一 지음,김승태 옮김, 『자본주의의 역사와 구조』, 백산서당
, 1985
*
平田淸明 지음,강석규 옮김, 『경제원론』, 풀빛, 1987

 

5공화국(사회)

* 겔프 베르니 지음,편집부 옮김, 『민중조직론』, 형성사, 1987
*
김청석 외, 80년대 한국사회』, 공동체
, 1986
*
다카지와 고오지, 『전공투-일본학생운동사』, 백산서당
, 1985
*
라이트, 에릭 올린 지음,김왕배 외 옮김, 『국가와 계급구조』, 화다
, 1985
*
마르쿠제 지음,문학과 사회과학연구소 옮김, 『해방론』, 청하
, 1984
*
멀래니 마리 지음,장정순 옮김, 『여성과 혁명운동』, 두레
, 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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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

(필자명과 출판사명 및 발간연도가 미확인된 것은 생략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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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의 지도적 원리』 (『주체사상총서』 제3), 백산서당, 1989(원저: 『위대한 주체사상총서』, 사회과학출판사,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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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자료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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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법

수사법

희망의 문학

square02_red.gif 비유법   square02_red.gif 강조법   square02_red.gif 변화법

 글쓴이의 사상과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표현의 기교, 크게 보아 세 가지로 구분된다.

비유법 : 표현하려는 대상을 그와 비슷한 사물과 비겨서 표현

강조법 : 문장에 힘을 주어 강조함으로써 짙은 인상을 주는 방법

변화법 :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피하려고 변화를 적적히 주는 방법

 1. 비유법 (比喩法): ① 비유란 말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에 빗대어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② 비유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원관념)과 비유하는 사물(보조 관념)의 상관 관계가 성립된다. 즉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 유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③ 대개의 경우 비유는 표현의 구체성, 직접성, 선명성을 높이는 수단이 되며, 일상어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에서 특히 많이 쓰인다.

비유의 효과

 사물을 통하여 시인의 정서를 형상화하고, 대상의 새로운 모습이나 의미의 발견을 유도하며, 추상적 의미를 구체화하거나 가시화함으로써 의미와 정서를 확대하고, 작품 안의 내용과 형식을 긴밀히 연결시켜 작품 전체의 유기성을 강화한다.

원관념과 보조 관념

원관념 : 원래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관념

보조관념 : 빗대어진 사물이나 관념.

비유는 서로 다른 사물에서 유사성과 차이성을 발견하는 데서 출발하고, 이질적인 두 사물이 원관념과 보조 관념으로 결합함.

유사성의 원리 : 비유는 이질적인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원관념은 꽃이고, 보조 관념은 누님으로 유사성은 원숙미]

차이성의 원리 : 비유는 유사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지만 직접 관련이 없는 대상의 결합인 경우가 많으므로 표면적으로는 차이성이 나타난다. 이런 차이성이 클수록 시적 긴장감이 생기고, 표현의 참신성을 획득할 수 있다.

예)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원관념은 바람이고, 보조 관념은 '머리채, 투명한 빨래'로 비가시적인 바람을 가시적인 '머리채', '빨래'에 비유함으로써 참신성을 획득하고 있다. - 김남조 '설일'에서 ]

비유의 유형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에 비유 : 일반적으로 비유는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화하는 경우가 많음

★ 내 마음은 한 폭의 기(김남조, '정념의 기') [추상적인 '마음'을 구체적인 '기'에 비유함]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에 비유 :

 

★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윤동주, '별 헤는 밤')[구체적인 '풀'을 추상적인 '자랑'에 비유함]

★ 내 마음은 어둠이노라(추상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비유)

★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구체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에 비유)

 

원관념이 드러난 경우

 

★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한용운, '님의 침묵')

 

원관념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 : 다른 시어들과의 전후 관계(문맥)에 따라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에 소리없이 흩날리뇨(김광균의 '설야'에서)[원관념인 '눈'이 드러나지 않음, '흩날리뇨'란 표현에서 원관념이 '눈'임을 알 수 있음]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난 경우

 

★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김광섭, '마음'에서)['나의 마음'과 '물결' 사이에 '고요하다'는 유사성이 직접 드러남]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나지 않음

 

★ 내 마음은 호수여(김동명, '내 마음은')[공통성이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경우 '유추'의 방법으로 유사성을 추리하여 시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직유법, 은유법, 의인법, 활유법, 의성법, 의태법, 풍유법, 대유법, 중의법, 상징법, 우화법

(1) 직유법(直喩法) : 원관념을 보조관념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수사법. 이를 명유(明喩)라고 하는데 '마치', '흡사', '∼같이', '∼처럼', '∼양,' '∼듯' 등의  연결어 사용.

★ 확 트인 벌판에 곡선의 부드러움으로 버섯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르고 있는 미륵산이 앞에 보인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박목월 '나그네'에서>

꽃의 둘레에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가 꺼져도···.   <문덕수의 '꽃과 언어'에서>

한밤에 불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조용할 때···.<양주동의 '조선의 맥박'에서>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에서>

(2) 은유법(隱喩法) :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간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A like B"의 형태가 직유라면 "A is B"의 형태가 은유이다.

★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김동명 '파초'에서>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유치환 '깃발'에서>

★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김동명 '내마음'에서>

★ 마음은 한 폭의 기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김광균 '데생')

사은유(死隱喩) : 언중(言衆)들에 의하여 이해가 될 만큼 일상화되어 버린 은유

언제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려나('밤'은 '암담한 상황', '새벽'은 '희망의 상황'으로 통용됨)

(3) 의인법(擬人法) : 사람이 아닌 무생물이나 동식물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여 사람의 의지, 감정, 생각 등을 지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는 대상을 인격화하여 존엄성 있게 나타내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과 같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작품 전체가 의인화된 소설을 '의인체 소설'이라고 한다. 고대 소설의 '장끼전', '섬동지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춘원(春園)의 '파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바다여/ 날이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의 바위는/베에    토벤처럼 귀가 멀었다. <신석정 '바다에게 주는 시'에서>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정비석  '산정무한'에서>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에서처럼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의인법(personification) - 활유

사물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에서 사람과 같은 성질을 부여해서 표현하는 비유로서, 활유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많이 쓰던 이 수사법은 메타포(metaphor)의 한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성난 파도', '시냇물이 소근댄다', '구름이 달린다'등 자연물을 인간화해서 그 성질과 동작을 표현하는 이러한 의인법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의 조선소설 중에는 '장끼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같이 전체가 의인법으로 되어진 작품들이 있다.

(4) 활유법(活喩法) : 무생물에다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살아있는 생물처럼 나타내는 방법이다. 단순히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면 활유이고 인격적 속성을 부여하면 의인법이다.

★ 안개가 날개를 치면서 산 정산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청산이 깃을 친다.

대지가 꿈틀거리는 봄이 소리도 없이 다가오면···

★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생명의 모태로서의 '어둠'의 긍정적 이미지를 활유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5) 의성법(擬聲法) : 어떤 대상이나 사물의 소리를 흉내 내어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사성법' 또는 '성유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청각적 이미지를 살리는 방법이다.

★ 실개천은 돌돌돌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이 골 물이 주룩주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에 열 골 물이 한데 합수하여 천방저 지방저 소크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유산가'에서>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하고, 조팝에 피죽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요, 방울새 떨렁, 물레새 찌꺽, 접동새 접동, 뻐꾹새 뻐꾹, 가마귀 꼴깍, 비둘기 꾹꾹 슬피우니, 근들 아니 경일쏘냐.  <'토끼 화상'에서>

(6) 의태법(擬態法) : 어떤 대상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하여 사물의 형태나 동작을 시늉하여 나타내는 기교로써 '시자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한 방법이다.

★ 마당 한가운데에 모닥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 해는 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어어 내 절믄 가슴에도 붉은 해 떠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김해강 '출범의 노래'에서>

★ 훤하게 터진 눈 아래 어여쁜 파란 산들이 띠엄띠엄 둘레둘레 머리를 조아리고, 그 사이 사이로 흰 물줄기가 굽이굽이 골안개에 싸이었는데, 하늘끝 한 자락이 꿈결 같은 푸른 빛을 드러낸 어름이 동해라 한다. 오늘같이 흐리지 않는 날이면, 동해의 푸른 물결이 공중에 달린 듯이 떠보이고 그 위를 지나가는 큰 돛 작은 돛까지 나비의 날개처럼 곰실곰실 움직인다 한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아침 햇발이 둥실둥실 동해를 떠나오는 광경은 정말 선경 중에도 선경이라 하나, 화식(火食)하는 나 같은 속인에겐 그런 선연(仙緣)이 있을 턱이 없다.            <현진건 '불국사'에서>

(7) 풍유법(諷喩法) :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그 내용을 다른 이야기나 속담, 격언, 문장으로써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다. 나타내려는 내용을 속에 숨기고 그것을 뒤에서 암시하는 방법으로써, 이를 '우의법(寓意法)' 또는 '우유법(寓喩法)'이라고 한다. 풍유로 표현하기 위하여 도입된 비유는 문장전체에 사용되기 때문에 그 본뜻은 추측할 수밖에 없다.

★ 핑계 없는 무덤 없다.

★ ㉠ 남의 잔치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 ㉡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 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뜻을,
㉡은 지식이 없고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 더 아는 체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   다. 때로는 작품 전체가 풍유로 나타나기도 한다.

간밤의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 장송이 다 기우러 가노매라.

하믈며 못다 핀 곳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유응부>

★ 야, 이눔아,

뿌리가 없으믄 썩는 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알아들지 못하는 소리를 혼자 중얼거린다는 속담을 통해, 뿌리(근원)없는 삶을 비판하고 있다.] 허지두 말어.(김진경, '뿌리가 없으믄 썩는 겨')

(8) 대유법(代喩法) : 직접 그 사물의 명칭을 쓰지 않고 그 일부로써 혹은 그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써 이에는 '제유법'과 '환유법'이 있다. 제유법은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어느 한 부분으로써 전체를 알 수 있게 표현하는 방법이고, 환유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이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들은 국토)

☆ 금수강산 - 우리 나라

★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빵 - 음식, 먹거리)

★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 주먹으로 어느 도시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빈주먹 - 가난)

은 '들'은 국토의 일부분으로서 조국을 상징하였으므로 제유법이고 ☆은 금수강산이라는 특징으로 우리 나라를 상징하였으므로 환유법이다.

★ 펜은 칼보다 강하다(펜 - 문학의 힘, 칼 - 무력) - 제유법

★ 금테가 짚신을 깔본다(금테 - 신사, 짚신 - 시골뜨기) - 환유법

(9) 중의법(重義法) : 하나의 말을 가지고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두 가지 의미란 단어가 지니고 있는 파생적인 의미나 유사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과 뜻을 재치 있게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긔 뉘 따해 났다니.  <성삼문>

 ⇒ '수양산'은 중국의 '수양산'과 조선 시대 '수양 대군'을 뜻하고, '채미'와 '푸새엣 것'은 ' 고사리'와 '수양대군의 녹'을 뜻한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 벽계수는 자연인 '푸른 시냇물'과 '왕족 벽계수를' , '명월'은 자연인 '밝은 달'과 '기생  황진이'를 의미한다.

 

★ 깊은 가슴 안에 밧줄[관을 아래로 내리는 데 쓰는 줄, 끊을 수 없는 혈육에의 인연과 정의 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작별을 고했다. 흙을 아래로 떨어뜨렸다라는 말로 동생을 잃은 무너질 듯한 슬픔을 의성어로 나타내어 감정을 절제하고 슬픔을 객관화하고 있다.]했다.(박목월, '하관')

(10) 상징법(象徵法) : 원관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암시에만 그치고 보조관념만이 글에 나타난다. 이는 은유법과 비슷하지만 원관념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원관념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유법이다.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    머서···<박두진의 '해'에서>  이 시에서 '해', '어둠' 등은 상징법이다.

상징의 종류

① 관습적 상징(고정적 사회적 제도적 상징) : 일정한 세월을 두고 사회적 관습에 의해 공인되고 널리 보편화된 상징

          예) 십자가 → 기독교, 비둘기 → 평화

② 개인적 상징(창조적 문화적 상징) : 관습적 상징을 시인의 독창적 의미로 변용시켜 문화적 효과를 얻는 상징

          예) 윤동주의『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의미→윤동주 자신의 희생 정신을 나타냄.

③ 자연적 상징 : 자연물이 인간에게 주는 보편적 의미의 상징

          예) 해 → 희망, 밤 → 절망

④ 우의적 상징 : 풍자적 우희적 통로로 상징하는 것

          예) 빼앗긴 들 → 일제 치하의 조국

⑤ 기호적 상징 : 약속에 의해 정해진 것

          예) 숫자, 문자, 부호, 신호

⑥ 원형적 상징 : 시대와 공간에 관계없이 신화 이후에 문화에 빈번하게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상징    예) 날개에서의 『방』→ 단군 신화에 나오는 '동굴'의 원형 상징.

 

상징과 은유 : 은유는 두 대상간의 유사성을 통한 유추적 결합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상징은 상관성이 먼 상징어를 연결함으로써 의미가 확대, 심화되는 언어 사용의 방법이다.

(11)우화법(寓話法)

 원관념은 나타나지 않고, 보조 관념만으로써 뜻을 암시한다는 점에서는 풍유법과 같다. 그러나 풍유법은 반드시 동물이나 식물이나 식물이 등장하지 않고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화법은 비인격적인 것이 모두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동물이나 식물의 속성과 풍습으로써 인간의 속성과 풍습을 암시하는 방법 등이다. 이솝 우화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2. 강조법(强調法) : 문장에 힘을 주어 강조함으로써 짙은 인상을 주는 방법.

과장법, 반복법, 열거법, 점층법, 점강법, 비교법, 대조법, 억양법, 예증법, 미화법, 연쇄법, 영탄법, 현재법

(1) 과장법(誇張法) : 사물의 수량, 상태, 성질 또는 글의 내용을 실제보다 더 늘이거나 줄여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등의 표현이 과장에 해당하는데, 때로는 "눈물의 홍수"에서처럼 은유와 함께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과장법은 시적 감정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보다 더 크고 강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대 과장(向大誇張)'이라고 하고, 더 작고 약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소 과장(向小誇張)'이라고 한다.

★ 그가 북을 치자,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 쥐꼬리만한 월급 봉투 - 향소과장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향대과장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2) 반복법(反復法) : 같거나 비슷한 단어나 구절, 문장을 반복시켜서 뜻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이는 문장의 율조로써 흥을 돋구어 강조할 때에 사용되는 기교이다.

★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 꽃이 피네 /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금잔디

★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고운 얼굴 해야 솟아라.

(3) 열거법(列擧法) :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계열의 구절이나 그 내용을 늘어놓음으로써 서술하는 내용을 강조하려는 수사법이다. 부분적으로는 각각 다른 자격과 표현가치를 가진 어휘로써 전체 내용을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대체로는 셋 이상을 늘어놓아야 열거법으로 본다. 같은 어구가 놓인 것은 열거법이 아니라 반복법이다.

★ 우리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의 어    머니.... 어머니,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서>

★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 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신석정, '작은 짐승'에서)

(4) 점층법(漸層法) : 어떠한 글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비중이나 정도를 한 단계씩 높여서 뜻을 점점 강하게, 높게, 깊게 층을 이루어 독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절정으로 이끌어 올리는 표현방법이다. 이 방법은 독자를 설득시켜 감동시키는데 효과적이다.

★ 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님을 보지.

★ 유교의 목적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다.

★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풀'에서)

(5) 점강법(漸降法) : 점층법과는 반대로 한 구절 한 구절의 내용이 작아지고 좁아지고 약해져서 고조된 감정으로부터 점점 가라앉게 하는 표현방법이다.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을 가지런히 하여야 한다.

★ 명예를 잃는 것은 모두를 잃는 것이요.

    용기를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요.

    돈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안 잃은 것이다.

 점층이나 점강법은 자연히 열거법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점층이나  점강을 아울러 점층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6) 비교법(比較法) : 성질이 비슷한 두 가지의 사물이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로써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아름답구나.

★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변영로의 '논개'에서>

봄날 뻐꾹새 노래가 이 목소리마냥 가슴 죄게 했을까?

직유와 비교의 차이

비교법과 직유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직유법이 'A like B'의 형태라는 생각에서 '∼같이', '∼처럼' 등의 연결어만 있으면 직유로 생각하기 쉬운데, 예외의 경우가 있다.

㉠ 영희는순희처럼 예쁘다.

      ⓐ        ⓑ

㉡ 영희는꽃처럼 예쁘다.

      ⓐ       ⓑ

㉡은 ⓐ를 ⓑ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직유법이 성립된다. 그러나,㉠은 ⓐ를 ⓑ에 비유한 것이 아니고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서의 비교이다. 비유는 ㉡의 ⓐ와 ⓑ의 관계처럼 전혀 다른 사물끼리 공통적 속성을 연결시켜 나타내는 방법이다.

(7) 대조법(對照法) :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강조하거나 선명한 인상을 주려는 방법이다. 장단(長短), 강약(强弱), 광협(廣狹) 등으로써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의미, 단어, 색상, 감각의 대조 등이 있다.

① 단어의 대조 :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② 의미의 대조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미소(인간성)와 이 커다란 세계(현대의 문명 사회)의 대조]- 정한모 '가을에' -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세상사의 무상함과 불변의 자연과의 대조).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푸른 산빛(님이 있는 존재의 상황)과 단풍 나무 숲(님이 없는 무의 상황)의 대조
★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③ 색상의 대조
★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오(푸른색과 흰색의 대조).
푸른 버들에 노랑 꾀꼬리가 운다(푸른색과 노란색의 대조).

④ 감각의 대조
들을 제난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청각과 시각의 대조).

(8) 억양법(抑揚法) : 칭찬하기 위하여 먼저 내려깎는다든지, 내려깎기 위하여 먼저 칭찬한다든지 하는 표현방법.
 

★ 얼굴은 곱지만, 속이 얕다.

★ 사람은 착하지만 변변치 못해.

★ 세상은 차다지만 나는 찬 줄을 모른다.

★ 한국의 주지시는 반낭만주의적 처지에서 '방법의 지각'을 가지려했다는 것은 시사상(詩史上)의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의 기초가 되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9) 예증법(例證法) :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사물 중의 몇 가지를 예로 드는 수법이다.

★ 예컨데 투구(投球)는 결석병과 신장에 좋고, 사격은 폐와 가슴에 좋으며, 가벼운 보행은 위에 좋고, 승마는 머리에 좋은 것 등과 같은 것이다.

★ 배 사과 감 등은 한국에서 많이 나는 과일이다.

(10) 미화법(美化法) :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대상이나 내용을 의식적으로 미화시켜서 나타내는 방법이다. 현대 문학에서는 이러한 미화법이 미화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화 작업 과정을 거쳐서 예술적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 집 없는 천사(천사 - 거지)       

★ 양상군자(梁上君子→도둑)

★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간 지어내니

    반 간은 청풍이요, 반 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송순>

(11) 연쇄법(連鎖法) : 앞 구절의 말을 다시 다음 구절에 연결시켜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방법이다. 강조를 위한 반복법과 다른 점은, 가락을 통해 글에 변화를 줌으로써 흥미를 일으키게 하는 데 있다.

★ 맛있는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여기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르면 단면이 생기고, 그 단면에는 연륜이 나타난다. 이 연륜을 보면 나무의 자란 햇수와 그 나무의 길이까지도········. <최인욱의 '단편 소설의 특질'에서>

(12) 영탄법(詠嘆法) : 감탄사나 감탄형 어미 등을 써서 슬픔, 기쁨, 감동 등 벅찬 감정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수법이다.

★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 하늘에는 얼 하나가 없구나!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어머나, 저렇게 많아!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 옳거니!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 소리 / 들으며 여물었나니(열매 익어가는 과정을 통해 화자는 자연의 섭리와 그 위대함을 깨닫는다. 이때의 '기쁨'과 '놀라움'을 영탄법으로 나타낸 것이다)

(13) 현재법(現在法) :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일을 과거나 미래 시제를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이다. 미래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미래 지향적인 느낌을 주며, 과거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 영겁의 명상에 잠긴 석가여래를 둘러선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때마다 뻐꾹새가  운다.   <김원룡의 '한국의 미'에서>

★ 궂은 비 개고 날이 아주 맑아 아침의 금빛이 솔밭에 차다. <이광수의 '산중 일기'에서>

3. 변화법(變化法) :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피하려고 변화를 적절히 주는 방법.

도치법, 대구법, 설의법, 인용법, 반어법, 역설법, 생략법, 문답법, 명령법, 경구법, 돈호법.

(1) 도치법(倒置法) : 문장상의 순서를 바꾸어서 내용을 강조하는 기교로서 '환서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의 순서는 〔주어 + 목적어(보어) + 서술어〕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데, 이 순서가 바뀐 형태가 도치법이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에서 주어는 '소녀가'로서 '단발머리를' 앞에 와야 할 말인데 뒤에 왔다.

★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영탄법,은유법) [비애와 탄식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냄]- 유치환 '깃발'-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반어법)

★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역설법)

★ 이제 우리들은 부르노니 새벽을, 이제 우리들은 외치노니 우리를, 이제 우리들은 비노    니 이 밤을 분쇄할 벽력을.

★  정말 아름다웠다. 눈앞에 펼쳐진 우리 강산이.

 

(2) 대구법(對句法) : 비슷한 가락을 병립시켜 대립의 흥미를 일으키는 기교이다. 이는 단순한 자수의 대립만이 아니라, 앞뒤의 내용이 비슷한 성격으로 나타나야 한다. 고대 가사나 한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우법'이라고도 한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은유법, 직유법, 억양법)

瓜田에 不納履하고 李下에 不整冠이라.

★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님은 탄식한다/ - 김억'봄은 간다' -

(3) 설의법(設疑法) : 처음에는 일반적인 서술문으로 표현해 나가다가 결론이나 단정 부분에서 의문형식으로써 강조하는 방법이다. 반어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좀 더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는 표현형식이다. 내용상으로는 의문이 아니며, 정말로 몰라서 의문을 나타내는 것은 설의법이 아니다.

★  이 푸르고 아름다운 한국의 가을 하늘을 그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  한치의 국토라도 빼앗길 수 있는가?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 의문문의 형식만 빌려 독자에게 '생명의 기척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함]

★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  추운 겨울에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장관을 볼 때, 어찌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인가? <박대인(Edward W.POITRAS)의 '온돌'에서>

★  애고,이게 웬말인가, 서방님이 오시다니? 몽중에 보던 임을 생시에 보단 말가? <'춘향전'에서>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가난할지라도 사랑은 안다.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

(4) 인용법(引用法) : 자기의 이론을 증명하거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속담이나 격언,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논지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기교이다.

★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하잖아.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해 봐.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인간 사유(人間思惟)의 본원성을 보인 말이다.

★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 공자는 "나도 말이 없고자 한다(余歌無言)."라고 하였다. 대자연은 그대로 말없는 스승인 것이다.

 

(5) 반어법(反語法) : 겉으로 표현할 내용과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서로 반대로 나타내어 독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기교이다.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꾸짖고, 겉으로는 꾸짖는 척하지만 사실은 칭찬하는 방법으로 '아이러니(Irony)'라고도 한다.
 

★ 얘가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데요? 얘 뒤에 두 명이나 더 있어요.

★ 아휴~~~ 이 얄미운 내 새끼

'자네'라고? 말씀 좀 낮추시지.

규칙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하였으니 시합이 오죽이나 공정했겠소.

밑수로 벼락 부자가 된 위대한 교육자에게 자녀를 맡기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자녀를 버린다.)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마음 속으로는 슬프지만 그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겠다'는 말로 '애이불비'의 자세가 나타나 있다. 이는 너무나 슬퍼 울고 싶은 화자의 심리를 반대로 나타냄으로써 의미를 강화한 것이다. 또한 도치법도 사용되었다.)

★ 말없이 함박눈도 잘도 내리느니. - 국권을 상실한 조국에서의 삶이 힘겨워서, 눈 내리는 겨울에 북극으로 이주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때 '흰 눈'은 축복의 눈이 아닌 앞날의 혹독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잘도 내리느니'는 화자의 내면과는 상반된 표현인 것이다. - (김동환, '눈이 내리느니')

다른 설명 ( 반어 - 겉으로 나타난 말과 실질적인 의미 사이에 상반(相反) 관계가 있는 말을 뜻한다. 기교로서는 어떤 말의 뜻과 반대되는 뜻으로 문장의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는 것을 이른다.)

(6) 역설법(逆說法 : Paradox, 모순형용) : 표면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하나, 실은 그 속에 절실한 뜻이 담기도록 하는 수사법.

★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한용운의 '님의 침묵')

★ 찬란한 슬픔의 봄을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용서한다는 것은 최대의 악덕이다.

★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서정주 '견우의 노래'에서 긴 이별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사랑이 성숙될 수 있다는 역설적 표현)

★ 외로운 눈부심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른 설명 :

역설-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모순되고 부조리하지만, 표면적 진술을 떠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근거가 확실하든지, 깊은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을 뜻한다. 표면적 역설은 보통 서로 반대 개념을 가진, 또는 적어도 한 문맥 안에서 같이 사용될 수 없는 말들을 결합시키는 '모순 어법'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유치환의 '깃발'에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내면적 역설은 표현에 담긴 내용 자체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특히, 종교적 진술 가운데 만유의 본질이나 우주의 섭리에 관하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들이 시의 문맥에 수용될 때, 내면적 역설로 설명될 수 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가 이에 해당한다. 즉, 이 경우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종교적 역설로서 존재의 의미에 관한 초월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내면적 역설이 성립된 것이다.

(7) 생략법(省略法) : 글의 간결성, 압축성, 긴밀성을 위하여 어구를 생략함으로서 여운을 남기는 기교, 생략된 부분은 독자의 판단이나 추측에 맡긴다.

★ 봉네의 눈동자 속에 푸른 하늘이 부풀어 오른다 하는 순간, 따르르 눈물이 뺨으로 굴렀다. "학이………" 봉네는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 캄캄하던 눈앞이 차차 밝아지며 거물거물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귀가 뚫리며 요란한   음향이 전신을 쓸어 없앨 듯이 우렁차게 들렸다. 우뢰 소리가···· 바다 소리가···· 바퀴   소리가……… <이효석의 '돈'에서>

★ (그들이) 도랑 있는 곳까지 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도랑물은)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8) 문답법(問答法) : 글 속의 어느 일분의 문장을 문답형식을 빌려서 전개시켜 나가는 방법. 그러나 단순한 대화를 문답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그것을 변화 있게 강조하기 위하여 자문자답형식으로써 표현하는 방법이다.
 

★ 아희야, 무릉이 어디오,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 그렇다면 그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의 관계이다.

연즉(然則), 차(此) 제국주의(帝國主義)에 저항(抵抗)하는 방법(方法)은 하(何)인가? 왈(曰)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분휘(奮揮)함이 시(是)이니라.

저 궁예가 미륵불의 현신이라고 자칭하였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미래불인 미륵을   숭상함은, 현세적, 실제적인 것을 단순하게 그것만으로써 생각하려는 사상적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박종홍의 '한국의 사상'에서>

(9) 명령법(命令法) : 평범한 서술로 해도 된 것을 더욱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변화를 주기 위하여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

★ 빨리 책을 읽도록 하십시오.

★ 보게나, 저 외로운 하일랜드 아가씨를.

★ 보라 : 문어체(文語體), 보아라 : 구어체(口語體)

(10) 경구법(警句法) : 격언이나 속담에서처럼 엉뚱하거나 재치 있거나 익살스러운 기발한 표현 속에 진리를 내포시킴으로써, 교훈적 효과를 내는 변화법.

★ 시간은 금이다.

★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 유비면 무환이다.

(11) 돈호법(頓呼法) :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키거나 대상의 이름을 불러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편지글에서 이름을 부르거나, 연설문에서 '여러분!'하고 부르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박두진의 '해'에서>

★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청포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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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보도의 어려움

진실 보도의 어려움


송건호

길가에서 택시 운전수들이 다투고 있다. 차가 서로 스쳐 차체가 우그러졌는데 누구에게 잘못이 있느냐로 시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말이 서로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어느 쪽 말이 옳은지 분간하기 어렵다. 우리들이 일상 생활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조그만 광경이다.

신문에는 거의 날마다 몇 건의 교통사고가 보도되고 우리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기사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지금 예에서 본 바와 같이 하찮아 보이는 교통사고 보도에서조차 엄격히 따질 때 진실 보도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무엇이 진실이냐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단순한 교통 사고조차 진실 보도가 이처럼 어렵다면 진실 보도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나 큰 문제일수록 진실 보도가 더욱 어렵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또 신문 기자 자신들조차 진실 보도를 자명한 것처럼 생각하고 또 말하고 있으나 문제를 좀더 파고들어 가 생각해 보면 생각할수록 독자들에게 진실 보도를 하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을 파악하는 방법

'진실' 이란 어느 사건 또는 어느 문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란 무엇인가. 어떤 사실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모든 사실을 그 존재가 다원적이다. 꼭 진실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모든 사실은 그 존재가 다원적이다. 꼭 진실을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일수록 그 존재는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면만 보고서는 그 사실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위에서 인용한 교통 사고의 경우도 시비하는 두 운전사의 말을 이쪽 저쪽 다 듣지 않고서는 공정하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언론에 있어 '진실'이란, 첫째 사물을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따라서 신문이 사건이나 문제를 전체적으로 또는 그 전모를 밝히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확대시켜 과장 선전하기도 하고 불리한 면은 이를 은폐하여 알리지 않거나 보도되는 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정확한 보도는 우선 일방적이며 편파적인 보도임을 말한다.

논평에서도 진실한 논평을 하려면 이런저런 측면을 다 같이 검토하고 거기에서 공정한 판단과 결론을 내려야 한다. 공정한 논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자유로운 활동이다.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문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못 쓴다'거나 또는 '이 문제는 이런 방향, 이런 각도로만 생각해야 하며 그 밖의 각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곧 진실과 반대되는 曲筆 論評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곡필을 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사고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곡필은 어느 선 이상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자유롭게 다각도의 사고를 하면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둘째, 언론에 있어 '진실한 보도와 논평'을 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역사적으로 관찰할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물을 옳게 보도하거나 논평할 수 있으려면 그 사물의 의미 또는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의 가치는 역할의 발전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 가치를 인정받았던 것도 내일에는 부정되고 오늘 부정된 가치라도 내일에는 평가를 받는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란 발전하는 새로운 가치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 치고 누가 발전하는 입장의 가치를 거부하겠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사물을 보는 입장이 서로 달라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긍정적 가치도 어떤 사람에게는 부정적 가치가 된다. 이것은 이해 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의 입장, 자기의 이해 관계의 입장에 서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같은 사물 , 같은 문제인데도 보는 관점이 서로 달라 견해차가 생긴다. 따라서 사물을 볼 때에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퇴보의 가치가 아니라 발전하는 가치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사물을 볼 때에는 어느 면이 더 중요하고 어느 면이 더 중요하고 어느 면이 덜 중요하다는 점을 똑똑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은 그 존재가 다원적이라고 했다 교통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버스가 전복했는데 차체가 어느 만큼 파손됐느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면이 그 사건의 근거가 되고 그렇지 않은 면이 그 사건의 조건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이해하려면 그 사물의 어느 측면이 근거가 되고 또 조건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이해하려면 그 사물의 어느 측면이 근거가 되고 또 조건이 되는가를 예리하게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근거와 조건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한 문제 또는 사건의 이해가 크게 달라지고 이미지가 전혀 달라진다. 보도 기사에는 '리드'라는 것이 있다. 그 보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리드'로 하여 기사를 작성한다. 그런데 기사의 어느 부분을 리드로 잡느냐에 따라 기사가 독자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진다. 사물의 어느 면이 중요한 가는 관심도에 따라 다르며 관심도는 이해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외신을 다루어 보면 같은 사건인데도 입장에 따라, 즉 기자의 국적에 따라 리드가 제각기 달라 사건을 보는 눈에 묘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월남의 최후를 보도하는 각국의 신문을 보면 이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반공 진영의 나라라도 역점을 두는 측면이 나라에 따라 다르다.

가장 주관적인 보도가 진실 보도이다.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보도하려면 기사를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있는 그대로를 조금도 주관을 섞지 않고 기사를 써야만 정확한 보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이라는 표현은 좀 주의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하면, 가장 정확하고 올바를 보도일수록 객관적이기보다 오히려 훌륭한 의미에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사태를 정 가장 정확하게 알리는 보도일수록 주관적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얼핏 납득하기 어려운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구체적 예를 들면서 설명해 보면 조금도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을 것이다.

윤봉길 의사가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시라까와 대장 등을 폭사시킨 테러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정확한 보도라는 것이 주관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은 거울같이 보이는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윤 의사는 일본군의 엄숙한 대식전을 피바다로 물들인 엄청난 살인적 '테러리스트'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문은 마땅히 윤 의사를 규탄하는 보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가 사건을 정확히 알리는 보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없다. 윤 의사의 장거는 우선 역사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식민지 제도라는 것이 인류 역사상 배격, 규탄되어야 할 역사적 遺制라는 판단이 앞서야 하고 이러한 역사적 가치 판단뿐 아니라 윤 의사의 장거 당시 국내의 삼천만 동포가 일제의 착취와 탄압 아래 얼마나 신음하고 있었느냐를 윤 의사의 '테러' 행위와 관련시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건을 전체적 역사적 근거와 조건을 식별하는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판단 위에 서야만 이 사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윤 의사의 테러 행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이 위와 같이 수많은 다른 사실들과 횡적 종적(역사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우선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건을 정확히 보도하는데 만약 이와 같이 풍부한 학문적 지식이 필요하다면 이것은 높은 차원에서 주관적 보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정확한 보도 활동에는 고도의 사회 과학적 소양, 이 밖에 문학적 철학적 소양까지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 대기자 올솝 형제가 '훌륭하고 정확한 보도는 본래 가장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점을 지적해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윤 의사의 '테러' 행위라는 좀 극단적 예를 든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할는지 모르나 가장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실일수록 진실을 전달하려면 오히려 고도의 주관적 보도를 동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해 관계가 진실을 좌우한다

신문이 진실 보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전적으로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양심 문제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기자가 정의감에 불타 있으면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는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양심 문제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기자가 정의감에 불타 있으면 진실보도에 과감하고 그렇지 않으면 곡필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또는 좀 좋게 말해서 취재 기술의 미숙에서 진실 보도를 못한다는 견해가 있다. 어느 편이나 다 같이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는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 쪽에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지극히 피상적 견해임을 면치 못한다.

물론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의 책임이 기자 쪽에 있다는 말 자체에 잘못이 있다고 것은 아니다. 다만 진실 보도가 안 되는 이유를 전적으로 기자들의 윤리 문제로 해소시켜 버리는 것은 신문 제작의 현실을 모르는 불충분한 견해라는 것이다 정확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봐야 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가치의 편에서 봐야 하며 무엇이 근거이며 무엇이 조건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준칙을 강조하는 까닭은, 문제를 전체가 아닌 부분만 보고 새로운 것 대신 낡은 역사적 가치의 측면에서 보고, 근거를 조건을 근거로, 즉 중요한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뒤바꾸어 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신문 방송학과에서 배우는 것처럼, 기사 작성의 기술이 미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특정 문제를 보도하는 데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이해 관계가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진실 보도다 아니다'라고 할 때 그것이 A를 B라고 보도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님을 말할 것도 없다. 현대 신문이 이렇게 졸렬한 거짓말 보도를 하는 예는 지극히 드물다. 사실에 입각해 보도하면서도 어느 특정 면을 특히 확대시킨다든지, 발전적이 아니고 낡고 소수를 위한 전시대적 가치의 편에서 보도한다든지, 중요한 점이 아닌 면을 중요한 것처럼 확대시킨다는지 하는 것은 모두 무엇인가 이해 관계가 깊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서 중요한 문제로 보고 또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기대되는 보도일수록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인 압력을 가하려는 외부세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시정할 것을 시정해야 한다고 보도하고 논평하는 것이 진실한 언론임을 의미한다면 진실한 언론은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다분히 현실 부정적, 현실 지양적 언론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만약 곡필이 부조리한 현실을 추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표면상 온건하고 긍정적이며 따라서 건설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은 '진실의 언론'이라기보다 '곡필의 언론'이며, 그것은 더욱 그럴싸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진실 보도를 하려는 언론은 항상 현실 비판적이며 때로 현실 부정의 모습을 취하기 때문에 진실의 언론일수로 '파괴적 언론'으로 당시의 권력에 의해 탄압받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진실 보도는 일반적으로 수난의 길의 걷기 마련이다. 권력에 저항하여 진실을 위해 살기는 어렵다. 양심적이고자 하는 신문 또는 언론인이 때론 형극의 길과 고독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송건호/서울대 법대 졸업, 주요 일간 신문에서 논설 위원과 편집 국장을 지냈다. 한때 언론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현재 (한겨레 신문)대표 이사 . 발행인 겸 편집인이다. 저서로는 (분단과 민족), (한나라 한겨레를 향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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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역까지> 중 푸리에와 오웬

푸리에와 오웬이 꿈꾸었던 멋진 신세계


에드먼드 윌슨

19 세기의 두 괴짜

샤를르 푸리에 (Charles Fourier)와 로버트 오웬 (Robvert Owen)은 19 세기 전반의 독특한 특성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거의 유사한 생애를 살아갔던, 서로 매우 닮은 인물들이다. 푸리에는 브장송의 포목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행상인으로 세상을 떠돌아 다녔고, 오웬은 웨일즈의 말 안장을 만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포목점 점원으로 일했다. 두 사람 다 당대의 자유주의 정치에 실망하였으며, 당대의 인습적인 문화를 외면하였다. 푸리에는 '과학의 세기인 지난 23 세기 동안' 인류를 '피로 뒤범벅되게' 이끌어 온 유럽 철학의 전통을 끊임없이 비난하였다. 그리고 '거의 반무식쟁이이자 상점 점원'인 샤를르 푸리에 자신을 인류에게 신의 뜻을 설명하는 사람으로 선택한 것은 신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직업적 철학가들을 불신하고 '정치 및 도덕에 관한 모든 서적'을 논박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그는 믿었다. 푸리에의 말에 따르자면 천 여 년 동안의 정치인의 잘못은 오직 종교와 행정상의 폐단만을 다루어 왔다는 점에 있었다. "신의 율법은 우선 근본적인 기능인 산업에 관한 법률로 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 정부가 이 일에 착수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며, 더구나 그들은 '자유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산업상의 분열과 상업적 사기'를 조장하는 그릇된 방향을 취했다는 것이다. 한편, 로버트 오웬은 『정치적 정의에 관한 연구』(1793)의 저자인 윌리엄 고드윈 (William Godwin)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이나 이 비슷한 다른 어떤 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던 적이 없었고, 통계 이외의 다른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뜨인 적도 없었다. 정치 조직을 통해 일해 보겠다는 시도는 실패하였으며 단기간이었을 뿐이다.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곤경으로부터 사회를 구제할 다소 합리적인 '그 무엇'을 급진당, 휘그당, 토리당 혹은 어떤 특수 종교 종파에게서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로버트 오웬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고집스럽고 자주적인 영국인다운 코와, 뺨 둘레까지 뻗어나올 듯한 움푹 들어간 순진스런 타원형의 두 눈과, 달걀 모양의 갸름한 얼굴을 지닌 사색에 잠긴 유순한 큰 산토끼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치켜올려 감고 있는 흰 목도리 위의 푸리에와 얼굴은 비록 굳게 다문 입과 날카로운 콧날과 다소 양미간이 넓지만 또렷하고 자애스런 두 눈이 강인한 옛 프랑스인의 합리주의적 위엄을 갖추고 있기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오웬과 비슷한 기이한 순진성을 풍기고 있다.

오웬과 푸리에는 모두 완전히 세속을 벗어난 솔직 담백한 사람으로 지칠 줄 모르는 끈기를 지니고 있었다. 양자 모두 심원한 인도주의적 연민과 체계적 정확성에 대한 열정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이 둘은 서구 사회를 가속도로 지배해 가는 상공업제도의 가정 추악한 면을 직접 체험하였다. 푸리에는 국민 의회의 혁명군이 리용을 포위 공격했을 때 자신의 가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가까스로 단두대를 면했다. 또 직물 공업의 성장으로 인해 리용 주민의 생활이 극도로 악화되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그의 고용주가 기근이 한창일 때 쌀 매점에 성공하여, 가격을 유지할 목적으로 일부러 쌀을 썩게 만든 뒤 마르세이유항 앞바다에 내다버리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푸리에는 잔혹한 것을 극도로 혐오했고 동정심이 유별나게 강했기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힘이 약한 동무들을 두둔하다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예순 살 때는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다만 주인 마나님이 몹시 학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 어떤 불쌍한 하녀를 위해 무엇인가 도와줄 작정으로 비를 맞아 가며 몇 시간 동안 헤매고 다닐 정도였다. 인간생활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이와 같은 억제할 수 없는 강인한 충동은 그에게 낙관적인 확신을 불어넣었으며, 그를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보상받지 못하는 일들로 몰고 갔다. 이상스럽게 고독한 생활을 해나가며 푸리에는 자신의 이상적인 공동체 사회를 구성할 다양한 집단들의 상호 관계를 구상하고, 그들이 거주할 건물들의 정확한 비율까지 계산해 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우주의 수명이 정확히 8만 년이라는 것을 계산해 내었다. 그의 계산에 따르자면 그 기간 동안 모든 영혼은 분명히 인간이 살고 있다고 그가 간주한 다른 혹성들과 지구 사이를 810번 여행하며, 정확히 1,626번까지의 생애를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푸리에와 마찬가지로 로버트 오웬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매우 민감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어린 시절 그가 다녔던 무용학교에서 어린 소녀들이 자기 짝을 구하지 못해 실망하였던 광경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떠올리곤 했다. 그는 열 살 되던 해에 집을 뛰쳐나와 단시일 내에 출세하여, 20세에는 벌써 5명의 직공을 거느린 면직 공장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새로운 면방직 기계를 초창기부터 이용했던 오웬은 이윽고 '생명 없는 기계에 대한 끔찍스런 정성과 살아 있는 기계에 대한 혹사와 천대'라는 엄청난 모순에 깊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미대륙의 노예제도는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악하고 어리석은 제도일 터이지만, 이 자제할 줄 모르는 시대에 영국의 공장에서 일하는 백인 노예들은 후일 내가 서인도 제도 및 미국에서 보게 된 가정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보다 훨씬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18세기 말의 영국 농촌의 소작인과 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의 본토의 가내 공장에서 학대받던 소년들과 노동자들보다 여러 면에서, 특히 보건て식품て의복 면에서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그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통받던 사람들은 노동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용주 자신도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웬은 말한다. "나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데에만 능숙해진 동료들이 정말 싫어졌다. 이 직업은 우리 본성의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면들을 타락시키고 때로는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온갖 다양한 무역업, 제조업, 상업을 두루 겪어 온 나의 오랜 인생 경험으로부터 나는 이러한 철저히 이기적인 제도 아래에서는 어떠한 훌륭한 품성도 나타낼 수 없음을 깊이 확신한다. 진실, 정직, 미덕은 현재도 그렇고 과거에도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미래에도 오직 명목에 그칠 것이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진정한 문명이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이것은 사람들 간에 대립적인 이해 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모든 사람이 서로 적대하도록, 심지어 서로 파멸시키도록 제도적으로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세상사를 처리해 가는 방식으로서는 저열, 비속, 열등, 무지한 것이다. 인격을 배양하고 부를 창조하는 방식으로서 좀더 나은 방식이 이를 대처하지 않는 한, 항구적이고 전면적이며 실질적인 진보는 이룩될 수 없다."

푸리에는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을 거부했다고 믿었고, 오웬은 관찰만으로 자신의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했지만, 양자 모두 자신들 주장의 토대를 루소의 사상에 두고 있었다. 인류는 천성적으로 선량하며 인류를 사악하게 만들어 온 것은 제도일 뿐이라는 루소의 사상은 당대를 완전히 휩쓸었던 사상이었으므로, 책에서 읽지 않더라도 누구나 물들어 있을 지경이었다. 푸리에는 주장하기를 마치 도구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 보듯이 인간의 천성을 꺼내 보면, 신이 다양한 목적에 쓰라고 인간에게 주신 몇 가지 인간적 '열정'―본능과 기호―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열정'들은 모두 필요한 것들인데, 근대 사회에서 문제는 이들 '열정'이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있을 뿐이요, 적절한 열정이 적절한 방향으로 사용되기만 한다면 '조화'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버트 오웬이 전 생애를 통하여 역설한 원리가 있었다. 즉 자기 스스로는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교육과 어린 시절의 감화가 인간의 됨됨이를 형성하는 것인 바,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나쁜 일 대신에 옳은 일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인간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수학적 정확성'을 띠고 누구나 행복하고 선량해질 수 있다는 원리이다.

절대 평등의 이상 사회

개인의 이해가 전체의 이해와 상충되지 않음을 실례로써 입증하기 위해, 푸리에와 오웬은 모두 대사회 내부에 제한된 규모의 몇몇 자족적 사회를 결성해 볼 것을 주창했다.

푸리에가 요구한 공동체는 개인 자본에 의존하며 완전한 평등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보통 선거제가 실시되며, 부자와 빈자의 자제가 동일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푸리에는 소득 격차가 너무 현격한 사람들을 동일한 공동체 내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소득 격차와 더불어 종래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긴 하나 계급 제도가 존재하긴 한다. 이 계급 제도에서는 자본가가 맨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먼저 공동체 성원의 최저 생활을 보장해 줄 몫을 공제한 뒤)배당제로 소득을 분배한다. 단지 4/12만을 자본량에 따라 분배하며, 5/12는 노동량에 따라 나머지 3/12은 발휘한 기량에 따라 분배한다. 하기 싫은 노동은 편한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고, 필수 노동은 단순 유용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으며, 유용 노동은 사치품 생산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다.

푸리에에게서 문제의 초점은 인간의 노동에 대한 관계를 모든 '열정'이 유익한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화한다는 간단한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하고 싶어하는 몇 가지 일은 있으니, 모든 일이 행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모든 인간적인 충동에는 유용한 용도가 있으니 모든 충동을 만족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 일에 매력을 느끼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일만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권태나 피곤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누구나 제 나름의 취미와 다양한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 각자는 다양한 일에 종사함으로써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산업상의 능률은 다양한 집단 간의 경쟁에 의해 촉진된다. 푸리에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서도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조직을 구상해 내었다. 그의 골치를 썩혔던 두 가지 문제―아이들이 흙장난을 좋아한다는 문제와 공동체 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문제―는 서로가 서로의 해결책이 되었다. 즉 쓰레기를 아이들이 치우게 한다는 것이다.

로버트 오웬이 구상한 공동체는 이와 반대로 절대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 공동체의 유일한 계급 제도는 연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장년층이 통치 평의회를 구성한다. 어린이들은 세 살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나 전문 교육자와 보모 밑에서 양육되고, 교환 수단의 단위는 한 시간의 몫의 노동으로 한다.

푸리에는 자기 계획의 자기 재정을 담당하고 싶은 부자와 기꺼이 상의하기 위해 매일 정오 자기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공고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동안 매일 그 시각 그 장소에서 기다렸지만, 한 사람의 후원자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확고한 신념을 지니긴 했지만 매우 실망한 채로 1837년에 세상을 떠났다.

반면 오웬은 자신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오웬은 한때 자기에게 도움을 기대한 푸리에가 자기에게서 제한된 집단으로 공산주의를 실천하려는 사상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여기서 중심 인물―그리고 그 당시 가장 특출한 인물―은 역시 오웬이다.

꿈을 현실로 바꾼 뉴 라나아크

로버트 오웬의 실제 행적은 오늘날에는 그 당시 소설의 주인공인 칼렙 윌리암스나 프랑켄슈타인만큼이나 기괴하다. 푸리에와 똑같이 사욕을 떠난 사회적 이상주의자인 그의 생애는 헨리 포드의 생애를 연상시킨다. 오웬은 스코틀랜드의 뉴 라나아크에서 최초의 면직 공장을 인수하였을 때, 그 공장 직공들은 더럽고 주정뱅이인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남녀들과―그 당시 어쨌든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고아원에서 실어온 5~10세의 어린이들이었다. 이런 형편없는 인간들을 바탕으로, 또 게다가 모두 스코틀랜드인인데 자기만이 웨일즈인이라는 특히 불리한 조건을 지닌 채, 오웬은 25년 이내에 높은 생활 수준과 상당 수준의 교육을 갖춘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웬 자신은 그 공동체 사람들에게 숭배를 받았다. 오웬은 공동체 성원들에게 다른 어떤 경쟁 상대보다 높은 임금을 주고 짧은 시간 일하게 했으며, 그들과 함께 불황을 이겨냈다. 그는 자기의 동업자들에게 지불할 배당금을 일정액으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모두 공동체의 개량 사업에 돌렸다. 오웬은 사회전체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전세계를 향하여 호소했다. 모든 어린이들을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인수하여 처벌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내가 우리 노동자들의 어린이들 교육하는 방식처럼 교육시키기만 한다면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오웬은 인적 자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혹은 그 인적 자원을 다듬기에 적합한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 어디인지를 우선적으로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인간이란 전반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지와 누구에게 그 시작을 맡길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는 가장 가망성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뉴 라나아크에서 스스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매우 고상한 인격을 지닌 예외적인 인물이며, 뉴 라나아크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만든 것은 질이 나쁜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어린이들의 천성적인 선량함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라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그는 뉴 라나아크가 자기 자신이 건설했으며, 자기가 관리하고 운용해야만 하는 기계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로버트 오웬은 자신의 공장에서 자애롭고 전능한 신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권고만으로는 직공들을 근면하고 정직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 그들을 점검하고 억제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는 일터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머리너머로 작은 사각 나무 패찰을 걸어 놓았다. 이 나무 패찰의 네 변에 각각 다른 색깔을 칠해 놓았는데 각 색깔은 각각 다른 품행 등급을 나타내었다. 이리하여 그는 어느 날이건 공장을 둘러볼 때면 십장이 돌려 놓은 패찰의 색깔을 보고 그 직공이 전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품행 극히 나쁨'이나 '품행 좋지 않음'을 나타내는 색깔의 표찰과 마주칠 때마다 그는 지나가면서 태만한 근로자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이 제도 아래에서 그는 색깔이 점차로 검은색에서 파란색으로, 파란색에서 노란색으로, 마침내는 흰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매일의 등급을 일지에 기록하게 하여, 그가 없었던 동안에 노동자들이 어떻게 처신했는가를 돌아온 뒤 자신이 항상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도둑을 추적하여 찾아내는 전혀 실수 없는 방법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덕적인 세계를 창출해 낸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했던 오웬은 자기가 거느린 교사들이 다른 곳에 가서는 뉴 라나아크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에, 그리고 그의 공동체를 다른 사람이 관리하도록 맡겨 두자 번영하지 못하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후일 오웬과 함께 협동 조합 운동을 벌인 차티스트운동의 한 지도자인 윌리엄 로베트는 오웬이 본래 독재적인 성격이어서 여하한 민주주의적 기반 위에서도 함께 일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의 동업자들이 자신의 방법에 반기를 들 기세가 뚜렷해져서 그가 항상 새로운 동업자를 찾으러 다니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새로운 동업자를 발견한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감에 따라, 그는 점차적으로 자본가들이란 탐욕스럽고 무지한 족속들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의회를 통해 로비 공작을 벌여 온(영국에서는 최초로 제출된) 연소자 노동 금지 법안이 면방업자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가 신뢰해 온 피일과 같은 정치가들에 의해 그 법안 내용의 핵심 조항을 삭제당해 버리자 그의 신념은 한층 더 흔들렸다. 오웬은 기대를 걸고 런던의 경제학자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들이 실제 경험은 조금도 없는 사람들로서, 오웬의 말에 따르자면, 단지 공장주들의 추악한 행위를 합리화할 체계를 만드는데 골몰하고 있음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을 뿐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에 뒤따른 절망적인 경제 사정의 타개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캔터베리 대주교를 의장으로 하여 저명한 경제학자, 박애주의자, 정치가, 실업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그도 초대를 받고 참석했다. 그런데 그 회의에서 그는 당시의 실업 사태의 원인이 제대 군인과 군수 산업의 급격한 붕괴에 있음을 이해하고 있는 참석자가 변변히 교육도 받지 못한 자기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기계로 인해 수백만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렸다고 설명하자 모든 참석자들이 놀랄 정도였다. 젊은 시절 그는 면직 공장의 관리자 노릇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매우 가까이 살고 있던 공장주는 단 한 번밖에 공장을 방문한 일이 없었으며, 그 방문조차도 외국 손님에게 공장을 구경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웬은 이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결론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이제 그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이해시키자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리라는 것을 염려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가혹한 현실

그런데 그럴 즈음에 그들⇬수상, 대주교, 왕 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하류 계급의 불온한 정세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하류 계급을 행복한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오웬은 여전히 그들의 공평 무사함을 신뢰하고 있었다. 엄중한 책임을 떠맡고 있는 그들 같은 사람들이 인류의 전반적인 향상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린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1817년 엑스라 샤펠에서 개최된 열강 회의에 참석하여 그 회의의 간사장인 한 노련한 외교관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 저명 인사에게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덕택으로―만일 인류가 서로 협력하는 것이 인류 자신의 최고의 이익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만 된다면―이제 소수 특권 계급만이 아닌 전체 인류가 훌륭한 교육을 받고, 훌륭한 음식을 먹으며,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여태까지 다종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었다. 그러나 간사장의 대답을 듣고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노련한 외교관은 맞는 말이라고 대답한 뒤, 그들―그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유럽의 지배 세력―은 그것을 다 알고 있으며, 그들이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일반 대중이 잘 살게 되고 자립적이 된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지배 계급이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겠는가? "간사장의 이러한 고백을 듣고 난 뒤, 나는 회의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어버렸다. 장기간에 걸친 험난한 과제가 내게 주어져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과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다툰다는 것이 양자 모두의 진정한 이해와 참된 행복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음을 양자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쳐부수어야 할 편견이 모든 나라 모든 계급에 뿌리 깊이 박혀 있음을 감지했다. 이 편견을 뿌리 뽑자면 무한한 인내와 끈기 이외에도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진함과 사자의 용맹함이 요구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굳은 결의로 시작한 일이니 만큼 단호하게 목표를 향하여 곧장 전진해 나가야 함을 절감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이미 오웬을 파괴적인 이상주의적 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는 공개 연단에서 진리의 주요한 적은 종교라고 단언하였으며, 종교만이 아니라 재산제도와 가족 제도까지 공격했다(이리하여 그는 푸리에보다 훨씬 앞으로 나아갔다. 푸리에는 이 세 가지를 수정한 채로 유지하는 공동체를 계획했었다.). 이제 교회가 그에게 적대감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의 친구들은 그와 어울리기를 꺼려하게 되었다.

그는 유럽은 병들었으므로 새로운 사회를 창건하려면 신선한 땅을 찾아야만 한다고 단안을 내렸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독일계 라파이트 교파로부터 인디애나주 뉴우 하모니의 3만 에이커의 땅을 인수했다. 오웬은 1826년 7월 4일에 인류의 3대 억압자인 '사유 재산て불합리한 종교て결혼'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정신 독립 선언>을 선포하고, '근면하고 선량한 사람은 국적을 불문하고' 그의 공동체에 참가하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유럽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났다. 그러나 미국인은 영국인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뉴 하모니에서 그들은 더욱 형편없었다. 서부인들은 뉴 라나아크의 스코틀랜드 프롤레타리아처럼 온순하지가 않았다. 또 제한 없이 누구나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종 부랑자와 악당이 들끓었다. 오웬은 테일러라는 파렴치한 인물과 동업을 하게 되었는데,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그와 손을 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테일러는 자기도 그 땅 위에 공동체를 하나 세울 생각이라고 하면서 오웬에게 손을 끊는 대가로 한 구역의 땅을 요구했다. 거래가 이루어지기 전날 밤 테일러가 많은 양의 농기구와 가축을 몰래 자기쪽 땅으로 날라 갔기 때문에 그 다음날 거래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그것들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 테일러는 자기 땅에 위스키 제조소를 만들어 오웬의 금주 설교를 조롱했고, 제혁 공장을 세워 오웬의 제혁 공장과 경쟁했다. 뉴 하모니는 3년도 버텨 내지 못했다. 오웬은 마침내 재산을 여럿으로 갈라 팔아 버렸다.

그는 그 뒤에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같은 일을 벌여 많은 돈을 이러한 공동체에 날려 버렸다. 그는 돈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뉴 라나아크 시절의 초창기에는 면직업의 경기가 좋았었고 그가 자신의 최초의 공동체만을 소유하고서 스스로 감독할 수 있었으므로, 돈 관계에서의 약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유지해 나갈 방도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설비와 공장을 사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림으로써 많은 돈을 날려 버리곤 했다.

외로운 죽음

그는 마침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자식들의 부양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이상 부유한 공장주도 아니요, 또한 지배 계급의 호의마저도 잃어버린 그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32년의 개정 선거법은 오직 중산 계층에게만 지지를 얻었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환멸과 반항심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환멸을 느낀 오웬은 노동자계급에 가담했다. 그는 뉴 라나아크마저 포기해 버렸으며 이제는 고용주 신분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제 오웬식 협동 조합 운동과 전국 대통합 노동 조합에 관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너무도 못 견뎌한 까닭에, 즉 많은 경험을 했음에도 여전히 자기 제도의 확신성과 필연성을 너무도 확신한 까닭에, 그는 노동자 계급의 장기간에 걸친 고통스런 투쟁에서는 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조직한 후 1년도 채 못되어 노동 조합 운동은 와해되어 버렸다. 오웬은 차티스트 운동과 곡물법 폐지 운동에는 관심이나 공감을 거의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일거에 대뜸 평등을 확립하는 것이 훨씬 쉬운 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인류가 아직도 너무나 몽매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저승에 간 사람들의 힘에 의지하려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고결한 인물들―생시에 그의 주장을 공감을 갖고 경청하였으며 그의 이상을 정말로 공유하고 있었다고 느껴졌던 사람들로서 이제는 죽어 그의 곁을 떠나간 모든 사람들―즉 셸리, 토마스 제퍼슨, 채닝, 켄트 대공(이 대공이 그에게서 돈을 빌어 쓴 뒤 갚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등이 자기와 여러 가지 약속을 맺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자기와 의논하고 자기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저승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에게 죽은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은 여러 해 전에 그의 머리에 떠올랐으나 지금 세상에서는 아직 확실한 근거를 잡지 못한 몇 가지 생각―"지금의 무지몽매한 인류로서는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을 매우 중대한 어떤 변화가 명백히 진행 중"이라는 생각, "쌓이고 또 쌓이는 엄청난 부 속에서 모든 사람이 빈곤에 허덕이거나 아니면 남의 빈곤 때문에 절박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상호 간의 적대적인 이해 관계에 기초한 제도가 인류를 위해 다행스럽게도 이제 오류와 모순의 극한점에 도달하였다."는 생각, 곧 '단결의 원칙'이 '분열의 원칙'을 대체하게 된다는 생각, 또한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개인의 행복은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행위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확인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큰 돈을 모았다가 깡그리 날려 버린 로버트 오웬은 1858년 웨일즈의 조그마한 마을―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열 살에 사회로 진출하여 꿈같은 출세를 거듭하고, 마침내 면방업계의 개척자가 되었다―로 돌아가 아버지의 말 안장 가게 옆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에드먼드 윌슨/미국의 뉴저지주 출생으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차 대전 이후 신문 기자 등으로 활약했다. 후에 비평에 눈을 돌려 20세기 비평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To the Finland station』, 『Axel's Castle』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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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의 페이비어니즘

* 늑대비님의 [[버나드 쇼] 부르주아 사회주의자] 에 관련된 글. 

쇼우의 페이비어니즘과 사회개혁관 연구

서 윤 교

버나드 쇼우(Bernard Shaw)는 19세기 후반 이후 기존의 극과 유사한 사실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것들을 정치, 사회, 철학의 여러 문제들과 연관시키면서 사회라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체제 내에서 공존하는 인간의 삶과 현실을 다양하고 심도 있게 묘사하여 독창적인 사실주의 극을 확립시켰다. 아울러 그의 극은 사회비판의 주제를 냉소적 어조로 드러낸 사회문제극으로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술가란 현실의 모사 외에 어떤 비젼을 제시해야 하며 그러한 비젼을 통해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 이상세계의 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관점을 지녔던 것이다. 그는 빅토리아조 시기의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인한 정신적 혼란 속에서 사회개선의 필요성과 페이비어니즘(Fabianism)을 선전하였다. 

1880년대 후반에 명료한 특질을 지니게 된 페이비어니즘이란 어휘와 관념은  혁명에 대립되는 점진적 변화, 격변에 대립되는 점진주의, 합헌적이고 의회적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의 달성(현존 정치정당과 지방정부에로의 침투를 통해) 그리고 진보적이고 사회개선적 세력과의 협력(순수한 관념적 입장에 대립되는 실용적 사회주의), 마르크스(Marx)의 프로레타리아니즘에 대립돼는 중산층의 지성주의(지적 존중)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사회학의 역사적 기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페이비언협회의 실행위원으로 쇼우와 같이 활동했던 시드니 웹(Sydney Webb)은 사회적 유기체설(Social organism)의 개념의 후기다윈주의(Post-Darwinism)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의 목표로서의 정적인 유토피아의 개념을 거부하며, “사회적 진화는 모든 생명체의 진화에 대한 현재의 경로로 간주할 수 있고, 전략, 과정, 혹은 목적 -사회정의와 개선된 세계 등 -을 위한 수단으로서 진화는 혁명을 대체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과정이 목적 그 자체가 된 것같이 보인다”1)라고 언급하고 있다. 생명과 제도라는 근본적 모순은 비실제성이라는 한계로 인해 혼란과 억압을 가져왔고 아울러 생명과 제도가 수평적 상호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위계질서의 구조 속에 폐쇄되어 온 것도 역사발전의 장애로 간주되었다. 모순에 대한 균형감각과 진보에의 의지는 현실과 초현실에 대한 인식에 공히 적용되어 그의 독특한 전략을 만들어내었다. 상황개선과 생명의 진화발전은 동시에 추진되어야 할 과업이므로 침투와 점진주의는 그의 사상과 문학활동에 기본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침투와 점진주의가 페이비어니즘의 주요한 핵심사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쇼우의 저서인 ꡔ페이비언논집ꡕ, ꡔ페이비언논집 1908판 서문ꡕ, ꡔ페이비언논집 1931판 서문ꡕ 등을 중심으로 그의 페이비어니즘 사상을 그리고 아울러 그의 일부 극작품을 통해 페이비어니즘과 사회의 점진적 개혁 사상, 마르크스(Marx)주의비판 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검토할 것이다.



 

쇼우의 페어비어니즘, 사회개혁사상과 이러한 사상이 잘 나타나있는 극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살던 시대환경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 페이비언 협회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병폐를 가져왔으며 ,그에 따른 고도 성장은 사회적 부조리의 만연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 그가 활동한 19세기 말은 기존의 절대적 세계관과 사상체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은 사상적 전환기였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이론이 기존의 경제사상 및 체계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고,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ꡔ종의 기원ꡕ(Origin of Species)(1859)은 서구 문명의 정신적 지주인 기독교 사상에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영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중산계층과 노동자들의 자유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 노동자의 시위가 일어나고 경제공항의 조짐이 감도는 등 사회는 일대 변혁을 겪는 시기였다. 1870년 말 미국, 독일 등의 후진 자본주의 국가의 약진에 따라 영국은 불경기를 겪었다. 불황과 더불어 노동조건의 악화와 실업자의 증가로 노동자운동이 빈번했고, 챠티스트운동의 종식이래 사회주의 운동이 1880년대에 급격히 부활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가운데 쇼우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당시 영국 사회가 지니고 있던 갖가지 모순점들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의 능동적이고 낙관적인 사고 방식이 사회 개혁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882년 미국의 사회주의자인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연설을 듣고 감화를 받아 사회주의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저서ꡔ진보와 빈곤ꡕ(Progress and Poverty)과 마르크스(Marx)의 ꡔ자본론ꡕ(Das Kapital)을 읽은 후에는 일생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는 여기서 현실을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낭비적이고 어리석음을 인식하였고 사회주의(Socialism)가 오히려 도덕적이며 지성적이라는 것을 자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마르크스의 사상 중 계급투쟁이라든가 노동가치설 또는 혁명에 의존하는 사회개혁의 방법이 비실제적임을 발견하고 곧 마르크스의 사상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계급투쟁과 노동자의 혁명없이 점진적인 의식의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가 도래해야 한다는 페이비어니즘을 택하게 되었고, 당시 종교와 과학의 갈등,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인한 정신적 혼란과 난민의식이 팽배했던 19세기 후반 영국적 상황에서 1884년에는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에 가입하여 8여년을 사회개선의 필요성과 페이비어니즘을 선전하는 데 주력했다. 이 때의 사회활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어 그는 작가인 동시에 사회사상가로 인식된 것 같으며, 그의 극이 사회주의 사상의 선전 도구라거나 그의 시대의 사회주의사상과 관련된 여러 사상을 수합한 절충주의자라고 간주되었던 것 같다.

페이비언 협회는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의회주의적, 점진주의적 경향의 영국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영국의 지식인 단체였다. 사회주의 단체 중에도 미국의 철학자인 토마스 데비드슨(Thomas Davidson)의 영향을 받아 소수의 젊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최고의 도덕적 가능성이 실천될 수 있는 사회실현을 추진하는 새생활동우회(Following of the New Life)가 조직되었고, 이 단체는 모든 개혁의 기본을 개인의 도덕적 개혁에 두려는 개인주의적 도덕주의자들의 모임이였다. 이 단체가 1880년 1월 4일 새로이 사회문제연구를 위한 단체를 창립하니  이것이 페이비언 협회의 시초가 되었다. 이 페이비언 협회를 설립한 사람들은 작가, 교수, 성직자, 관리 등 다양하게 구성된 지식층의 젊은이였다. 이 페이비언 협회에서 쇼우는 리더로서 활약하게 된다. 페이비언 협회의 활동은 다방면으로 확대되었고, 노동조합, 중산계층, 자유당, 보수당 등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특히 후일 자유당이 1901년에 실시한 양로연금제도 제안하였고, 영국사회보장제도의 기초를 만들었다.

페이비언 협회는 1884년 5월 쇼우와 시드니 웹이 참여함으로써 활발해졌다. 페이비언 협회는 회원의 유입으로 조직화를 시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조사, 연구를 통한 주장을 사회개혁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협회에서 쇼우는 선전자역할을 맡았고, 실행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ꡔ페이비언 에세이ꡕ(Fabian Essays)를 웹 등의 실행위원회의 위원 등과 같이 저술하였다. 한편 연구 결과를 팜플렛 「페이비언 트랙트」(Fabian Tract)와 월간지 「페이비언 뉴스」(Fabian News)에 싣고, 강연과 집회를 통해서 그의 사상을 사회에 알렸다. 이 「페이비언 뉴스」는 모임에서 읽혀진 논문들을 요약하고, 서적에 대한 비평을 활자화하고, 선전에 유용한 사실들을 간행하고, 페이비언에 의해 이루어진 강연일지를 제공하는 등 페이비언 협회의 근황과 활동에 대한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하였다. 페이비언 협회는 회원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협회의 목표인 사회제도의 재건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일련의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페이비언 소책자 중 1884년 발간된 이후 페이비언 협회의 전략에 합치하는 것, 혹은 페이비언 협회의 전략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제5호 「사회주의자를 위한 사실」(Facts for Socialists)이 최초이다. 쇼우와 시드니 웹은 1887년 말 제 7호 「진정한 급진주의 정강」(The True Radical Program)에서 자유당의 선거정강에 대하여 비난하고, 성인참정권, 선거비용에 대한 지불, 불로소득세, 철도의 국유화, 1일 8시간 노동 등을 요구하였다. 1889년의 「런던사람들에 대한 사실」은 대도시 런던에 대한 통계적인 사실들을 열거하고, 사회주의적인 원칙 위에서의 개혁을 제안하고 있다.1) 이 책자는 지방자치 사회주의에 대한 근원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제 14호 「신개혁법」과 제 17호인 「구빈법개혁」은 구빈법에 관한 다양한 계획과 개혁안을 엿 볼 수 있다.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페이비언에 대한 영향은 ꡔ영국의 사회민주주의에로의 발전 과정ꡕ(English Progress towards Social Democracy) 이라는 소책자 제 15호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에 관해 언급한 부분과 매우 유사하다. 역사과정을 제시하고 있는 그 내용은 잉여생산을 위한 투쟁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해결책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전과 집합주의적 소유권으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생산 수단에 대한 개인 지배를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2) 페이비언 소책자를 검토해 보면 관념적인 문제를 취급하거나 추상적인 이론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은 몇 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거의 모든 책자는 정리된 자료에 의해 분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페이비언의 다른 저작에도 공통적이다. 쇼우와 웹의 ꡔ페이비언 논집ꡕ에서의 이러한 경험주의적 요소는 페이비언주의의 저변에 깔려 이 사상의 방법론적 토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이론 전개에 앞서 먼저 정확한 사실에 대한 파악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은 실증주의 사상으로부터의 영향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페이비언 뉴스」는 후일 독립적이고 독립된 회사로 경영되지만, 1913년 5월 이것은 노동당의 기관지가 아니라 페이비언주의의 잡지였고, 어떤 정당의 편견도 지적하지 않았다. 새 잡지에 쇼우는 정기적인 기고자로 활동하게 된다.

1889년에 쇼우 등에 의해 만들어진 ꡔ페이비언 논집ꡕ에 표현된 페이비언 사상의 주요한 특성을 살펴 보면 첫째로 단일지도자를 따르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 중에서 그들 자신의 노선에 적합한 것을 발전시키는 절충주의라는 것과 둘째는, 쇼를 비롯한 페이비언들이 지난 1세기동안 유럽사회를 사회주의로 향하게 하는 주요한 흐름이 경제적인 영향력과 함께 민주주의라고 믿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페이비언의 세 번째 특성인 점진주의를 낳았다. 맥브라이어(A. M. McBriar)는 페이비언들이 점진주의를 선택한 이유를 다음의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의 도덕적 배경이 전체 사회의 구성원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하는 기대를 들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영국의 경험주의적 전통으로 여겨진다. 페이비언들은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도 계약의 자유와 사유재산제도를 그 근간으로 하는 순수한 방임주의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자본주의는 점차 집합주의의 방향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쇼우는 자연과 역사에 대한 진화론인 해석을 수용하여 영국에서 사회주의로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민주적, 점진적, 합헌적, 평화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쇼우는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의 정치적인 대행자이며, 국가의 중앙집권적 기구는 결국에 가서는 민주적인 힘에 의하여 장악된다는 것이다.

쇼우를 비롯한 페이비언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사회주의적 정책의 실현과, 정치적 방법에 의한 사회주의의 목표달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헨리 조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ꡔ페이비언 논집ꡕ에서 쇼우는 모든 경제분석론이 토지경작에서 시작한다고 규정하면서, 사회주의의 시작에 대해 “인간은 자연이 준 이 임의적인 산물들이 그들에 대한 집단적 추구 속에서 각자에 의한 노동에 따라 그들에게 정당하게 배분하는 권력과 성의를 가지고 있는 어떤 기관에 의해서 가로채질 수 있다는 소망에 상당히 도달하게 되었고, 그 소망이 사회주의이다”3) 라고 언급하고 있다. 동일한 노력과 시간을 투여했을 때도 자연이 주는 보답은 균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지역내의 불균등한 생산물을 통괄하여 주민들의 노력에 비례, 배분하는 선의의 강력한 대리기구에 대한 소망이 쇼우의 사회주의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불균등한 생산물 가격에 해당되는 돈은 지대란 명목으로 지주에게 돌아갔다. 인구증가, 기술진보, 산업화에 따른 지가상승으로 지대수입이 증대되자 활성화된 생산력의 과실 또한 지주계급에게 흡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쇼우는 지대에서 자본주의의 특징적 독소를 발견했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창출한 가치가 유한계층에 의해 잠식되는 불합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헨리 조지의 토지단일세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쇼우는 토지공개념을 포함한 사회주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쇼우가 제시한 페이비어니즘의 실천전략은 자본주의 속에 침투하여 자유주의자와 제휴하고 의회에 진출하여 점진적으로 자신의 견해가 확산되도록 노력하고 기다린 후, 시기가 도래하면 변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쇼우는 인간개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전통적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생활양식과 개선된 세계를 창조 운영할 주체로서의 초인상정은 생명력의 진보의지와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쇼우는 기존 종교의 인위적 체계를 공격하고 자신 나름의 종교를 구축한다. 완전한 신 대신 불완전한 초인의 탄생을 통하여 자신의 완성을 원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인간들이 문명 속에서 인위적 삶을 영위하고 생명력으로부터 이탈되어 있고, 개인적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생명을 소모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쇼우는 독자와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자각하고 생명원과의 교류를 회복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으며, 작품활동도 인간과 생명력 사이에 창조적인 교류를 차단시키는 모든 제도와 의식의 틀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다. 점진적 개혁의 현실적 가능성에 주목한 페이비언들은 의회로 진출하여 자유주의자들 속으로 침투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특히 쇼우는 온건한 정신이 광기보다 덜 자극적이고 침투와 점진은 페이비언 정책의 시발이지 목표가 아니란 인식을 하고 있다. 페이비언들은 상대가 있음을 인정하고, 소기의 목적을 최대한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현실적 방법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지적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들의 의회 진출 시도는 그들이 의회주의 신봉자여서 보다는 그 외의 다른 개혁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며 비폭력의 선택도 폭력이 당시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폭력의 사용은 진보세력의 소멸로 인도한다는 역사적 교훈 등을 프랑스혁명 등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쇼우는 그의 저서 ꡔ페이비언논집 1908년판 서문ꡕ(Preface to the 1908 Reprint)에서 “페이비언들은 유산자들이 학살을 주저않는다는 것과 성공할 수 없는 혁명가는 중상, 위증과 무자비한 법적, 군사적 대량 학살을 기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4) 라고 쓰고 있다. 이렇게 페이비언들은 폭력이나 소수 혁명가에 의한 체제의 전복이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페이비어니즘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국민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끔 하였다. 여기에서 페이비언들의 계몽적, 교육적 성격이 뚜렷이 나타난다. 페이비언들에게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은 곧 국민적 자질을 질적으로 높이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쇼우는 인간에게 아무리 원초적인 생명력이 넘친다 할 지라도 페이비언주의자가 될 만큼 지적이지 못하거나 정치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그에게 미래가 없다고 말한 것은 페이비언주의 하에서의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페이비언들에게 있어서 특히 쇼우에게 있어서 사회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국민 전반에 걸쳐 페이비언사상이 보급되고 전파되어 국민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페이비언사상을 국민들에게 보급시키고 확산시키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임무였던 것이다. 쇼우는 페이비언의 본질적인 성격은 타협정신이라고 하고 있다. 타협이란, 한 사람의 신념이 다른 사람의 신념을 누르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패자와 승자가 생기고 강제에 의해서 한쪽이 굴욕적인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타협은 곧 설득이며 토론이다. 이러한 타협과 토론의 강조가 그로 하여금 토론극을 도입하게끔 하게 하는 것이며 ꡔ인간과 초인ꡕ과 같은 극을 통하여 등장인물인 앤과 테너, 램즈던의 심각한 사상적인 충돌을 유도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토론을 통해 모든 인물간의 갈등이 표출되고 긴장감이 더해 가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토론 방식은 결국 인류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담은 교훈적인 내용을 독자나 관객이 수용하도록 하는 한 과정이다. 여기서 쇼우가 강조하는 교육과 계몽을 살펴보면 첫째로 상식을 강조하는데 있다. 페이비언들에 있어서 사회주의는 연약함과 무지함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앞길을 바라보고 선택할 수 있는 계몽의 길로 끊임없이 전진하는 한 단계에 불과하며, 따라서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덕은 상식이외의 덕이 아니었던 것이다. 둘째로 사실과 지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조하였다. 페이비언들은 사실이 중요하며 궁극적으로 사실의 영향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시킨다는 것을 확신했다. 페이비언들은 정확성 부족은 단지 진보를 연기시킬 뿐만 아니라 더 큰 해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과 확실한 권위있는 진술의 꾸준한 투하에 의해서만이 현금 자본주의의 부도덕성, 잔인함, 비효율성이 모든 편견 안에서 축출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쇼우는 ꡔ홀아비의 집ꡕ(Widower's houses)에서 자본주의의 낭만적 이상에 빠진 대중이 사회적 현실을 인식하고, 사회주의로 가치관을 전도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의미는 주인공인 사르토리우스(Sartorius)가 빈민 착취의 도덕성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관습과 현실과 유리된 이상적인 가치관을 부정하고자하는 사회의 개혁에 있다. 쇼우는 낭만적인 이상주의나 관습적 도덕률에서 벗어나 계층 간의 문제를 단절된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사회구조와 그 체계를 수용하는 사회주의적인 의식의 개혁을 강조한다. 쇼우가 이 극에서 전하려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아무도 자본주의의 부패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념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하고자 하는 쇼우의 메시지라는 지적처럼, 이 극에서도 부패한 자본주의를 몰아내서 모든 경제적인 부패상을 제거하는 체제, 즉 페이비언체제로 들어가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 쇼우의 의도이다. 그러나 쇼우는 이 작품에 나타난 사회주의적 개념이 비평가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을 밝힌다.


사회주의를, 마치 빅터 위고(Victor Hugo)의 레미제라블 ꡔLes Miserablesꡕ에서 절정화되어있지만 고통과 부정의에 대한 가난한 자의 항의와 함께 동정의 정신으로 받아드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단계의 사회주의는 슬럼의 공포를 단지 슬럼의 주인에 입장에서 잔혹한 개인적 비행의 결과로 간주하는 나의 작품에 주인공들의 후회에 잘 나타나있다.5)


쇼우가 추구하는 페이비언주의는 빈민의 비참함과 부자의 횡포를 역설하며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의 주체인 중산층을 그 대상으로 중산층의 변화를 촉구하는 부르주아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페이비언주의와 마르크스주의(Marxism)를 살펴보면 페이비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평등, 자유, 그리고 우애라는 근본적인 사회주의 가치를 수용한다는 점에선 유사하지만, 보다 구체적인 문제에 관한 입장에서는 그 차이점이 현저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첫째,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에 강하고 특정한 제안에 약한 반면, 페이비언주의는 이론에는 약하지만 처방에는 강하다. 둘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를 집합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정치기구를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국가를 부인하며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혁명을 시도하는 반면에, 페이비언들은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 국가가 사회개혁사상을 수용해야 하며, 보통선거 기반의 민주정치에서 국가가 언제나 다수파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하며, 의회민주적인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의 진화를 확신했다는 점이다. 이는 페이비언들의 점진주의의 불가피성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셋째, 페이비언들은 복지국가가 시장요소의 자유로운 활동을 수정하는 사회정책을 사용하여 시장경제와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완전히 붕괴되기를 원했다. 넷째, 페이비언들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데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열정적이고, 복지국가를 상당한 성취로 간주하였다. 일부는 복지국가 자체를 목적으로 보았고, 일부는 사회주의를 향한 단계라고 보았다. 반면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복지국가가 노동계급에게 어느 정도 혜택을 주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주요 수혜자들은 자본가계급이라고 주장했다. 노만 존슨(Norman Johnson)은 복지 국가가 자본축척을 지지하고 자본주의체제를 정당화했다고 설명하고 있다.6) 1896년 쇼우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환상을 견지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페이비어니즘 이외의 사회주의론을 프롤레타리아 자유주의의 지적 위장형태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가 지적한 두 개의 환상은 혁명의 날을 황금시대의 시작이라고 보는 종교적 환상과 마르크스주의자적 계급 전쟁 드라마이다. 쇼우는 사회주의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만과 타협에 대한 부단한 저항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쇼우의 자기반항은 변증법적 진화를 위한 행위이지 자기 진영내의 경쟁자를 증오하여 적과 제휴하는 급진주의자의 저급한 전략에서 나온 결과는 아니다. 그의 사회주의 허상에 대한 비판은 좌파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필연성과 가상된 대중의 정치적 우월성에 대한 반발이라 볼 수 있다. 구체적 사실에 대한 쇼우의 판단은 물론 오류의 가능성은 내포하고 있으나 세계에 대한 총체적 분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쇼우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 아니라 노동자와 유한자의 공존이란 모순을 발견하고 그 해결방법으로 구성원 전체가 노동하는 사회구조에로의 전환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 ꡔ페이비언논집 1931년 재판 서문ꡕ(Preface to the 1931 Reprint) 에서 “분배란 단지 물질적 생산물의 분배뿐 만 아니라, 일과 여가의 분배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7)라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제안은 그의 경제학뿐만 아니라 사상의 근간으로 도덕적으로 발전하는 사회에 대한 비젼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쇼우는 엥겔스(Engels)가 쓴 「사회주의, 이상국가 및 과학」(Socialism, Utopian and Scientific)에 대해 그의 저서 ꡔ버나드 쇼우의 서평ꡕ(Bernard Shaw's Book Review)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칼 마르크스와 프레데릭 엥겔스, 1848의 공산당선언의 공동저자로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위한 고전적인 모델이지만 사실상 말하자면 학문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는 거의 실효성은 없다. 아울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둘 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며, 경제학자들의 군주와 같은 존재로써 마르크스는 그 자신과 엥겔스에 의해서 날조된 극적으로 허구적인 것이다.8)


결국 쇼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상에 대한 철학적 취약성이 이러한 퇴화된 가치이론을 아이러니컬하게 만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쇼우는 비록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헤겔(Hegel)을 올바로 정립시키기 위해 시도하였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컨(Bacon)이나 록크(Locke)의 형이상학에 반대되는 헤겔의 변증법의 옹호자가 되었고 일면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어서 가치이론이 실패가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쇼우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억눌린 노동자들의 혁명에 의한 개혁은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믿게 되었고, 중산층 계급의 양심의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중산층이 즐길 수 있는 극무대를 통해 사회주의를 설교함으로써 자연스러운 효과를 거둘 수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는 데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중산계층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이 이기심을 극복하고 인생의 목적을 전체 지역사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두어줄 것을 호소한 것 같다. 쇼우가 이렇게 하게 된 것은 쇼우를 비롯한 페이비언들의 출신이 대부분 중류계층이고 여러 직업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대부분이 중산계층 사상가이며 어느 누구도 하류계급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ꡔ홀아비의 집ꡕ에서 주인공 트렌취(Trench)는 현실의 사회조직을 직시하지 못하는 중산층 이상주의자이지만 나중에 인간의 정의와 도덕 등의 가치관에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마침내 환상에서 벗어나 리얼리스트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트렌취와 같은 중산층 계급의 도덕적 이상인 환상을 타파하는 곳에 쇼우의 문학의 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쇼우가 견지한 사회주의의 가장 중심이 되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욱 열정적으로 부와 힘의 분배가 동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의 동등한 분배계획에 대한 긍정적 이유. 나는 그것이 나의 선호하는 계획이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이 있다. 내가 수입의 불평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수입의 평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검토하도록 도와주고 있을 때, 당신은 내가 공평히 행위하는 것을 신중하게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9)


그의 작품 ꡔ바바라 소령ꡕ에서 등장인물인 언더샤프트(Undershaft)는 무기 제조 공장을 경영하는 백만 장자로 자본주의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종교는 전통적인 기독교에 구속받거나 얽매이는 것이 아니고, 돈과 화약에 의존한다. 이에 반해 그의 딸 바바라(Barbara)는 구세군의 소령으로 전통적으로 제도화된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언더샤프트의 부에 대한 신앙은 물질주의의 상징으로 육의 세계를 나타낸다. 반면 바바라의 구세군 구호소에서의 봉사는 알프레드 터코(Alfred Turco)가 언급하듯이 정신의 세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바바라와 언더샤프트 사이의 대조가 더욱 명확히 그려진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대포 사이의 차이와 같다. 따라서 가장 가능한 용어로는 지혜와 권력사이의 갈등을 양극화했다.10)


언더샤프트는 돈에 그 첫째 가치를 부여하고, 또 돈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긴다. 가난하지만 정직하다는 등의 가난을 합리화하는 그의 말은 모두 거짓인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가난이 축복인 양 내버려두고, 비겁한 자에게 겸손을 가르침으로 비겁한 자가 그의 비겁을 신조처럼 지키게 하라. (85)


여기서 극의 주요 주제인 돈과 도덕성, 즉 현실과 이상은 상호 연결되고, 상호 영향을 미치고 결국 융합한다. 언더샤프트의 공장으로 대표되는 힘의 중심을 향한 커진스(Cusins)와 바바라의 결합은 돈과 도덕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면에서 무력하지만 지적인 인물인 커진스에게 언더샤프트는 힘을 제공하여, 사상을 행동으로 바꿀 기회를 제공한다. 악을 제어하는 힘이 없이는 선을 위한 힘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커진스는 언더샤프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평민에게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식층들에게 대항할 수 있게 하고, 사회의 구조를 개선할 수 있도록 무기공장을 훌륭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그가 지식층들이 보편 선을 위해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할 만한 강한 힘을 일반인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커진스가 언더샤프트의 사회적 진보를 기초로 하여 지혜와 힘, 지성과 실용성을 화합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쇼우가 주장한 사회주의 이상은 동시대의 사회주의와는 달리 자본주의를 이상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상세계의 지향점을 동등한 수입을 바탕으로 한 공동의 복지에 둠으로써 특히 공동체(community)속의 삶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악덕으로 간주하였다. 아울러 쇼우는 결코 물질적인 것이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가난을 미덕으로 여기는 태도를 타파하려고 하고 동시에 부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 사회 하류계층의 환상도 깨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쇼우의 사회주의적 사상을 우리는 물질적인 측면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 요컨대 사회가 전반적으로 상향 발전되고 사회가 개혁되기 전에는 아무도 지신을 개혁할 수 없다는 쇼우의 인식 속에는 깊은 인도주의가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앞에서도 페이비어니즘이라고 하는 것이 일면 마르크스의 프로레타리아니즘에 대립한 중산층의 도덕주의, 지성주의(지적 존중)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쇼우의 이중성은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당시의 급진적인 사고들을 흡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시대의 특징인 점진주의와 낙관주의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데 있다. 사회 변화와 개혁과 관련해 쇼우가 중요시한 것은 체제나 사회 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정신적 도덕적 의식 구조의 변모였다. 쇼우는 페이비어니즘의 평등 이념에 입각해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공격하지만. 실제로 사회주의의 기능은 자유주의가 현실적 존재로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이어서, 자유주의자들은 쇼우의 사회주의가 자유의 방향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라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의 영역확대라는 것은 경제의 빠른 사회화에 비하면 더딜 수밖에 없을 것이며, 진정 자유와 민주주의는 전 인구가 책임을 분담할 때만이 작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쇼우는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은 자신의 생이 사회에 대한 유용성과 연관되어 있음을 각자가 인식하고 깨달을 때 비로소 도덕적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쇼우가 외계에 대한 통제에 인간 자신에 대한 통제도 포함시켜 자신과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책임을 지고 실천할 수 있는 적합한 사회제도로 페이비어니즘을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쇼우는 자본주의 운동법칙이나 역사적 필연성 등의 결정론적 입장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충돌했다. 그는 노사간의 이해 상충이 무산자들을 자발적으로 권력 투쟁에 임하게 할 것이라는 견해나, 역사법칙, 필연성, 불가피성 등의 개념과 용어에 반대했다. 아울러 무노동자가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사회제도는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빈자의 순수성과 부자의 단점을 도식적으로 신봉하지 않았으며, 사회내의 어떤 한 집단에 대한 신념을 갖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쇼우는 교육과 제도개혁을 통해 무산계층을 소멸시키고 그들을 신사계층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사회가 전반적으로 상향 발전되어 가기를 원했다.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의 동인을 물질적, 경제적 여건을 위한 급진적 계급투쟁으로 보았지만, 쇼우는 무엇보다도 평등주의에 기초를 둔 점진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제외시키고 단지 경제적으로만 해석함으로써, 사회주의 그 자체만을 강조하여 민주주의를 이념적으로 크게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마르크스 사회주의이론은 공산주의의 길을 걷게 된 반면, 페이비어니즘에서 나타나는 사회주의는 영국적 전통 하에서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발전 민주주의를 밑거름으로 한 정치토양에서 싹을 틔웠던 것이다. 요컨대 페이비언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회 개혁을 유도한 쇼우의 기여는 문학적 측면 뿐 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크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서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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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f B. Shaw's Fabianism and His Thought

of Social Reform

Suh, Yun-kyo

In the late 19th century when spiritual confusion through social and  economical contradiction and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 and  sufferers consciousness surged in the Britain, Bernard Shaw joined the  Fabian Society and over eight years exerted himself for the propaganda of  the Fabianism and the need of social improvement. Bernard Shaw was one of the leaders as a member of the execution committee in the Fabian  Society. In taking active part in the Fabian Society, Shaw wrote Fabian  Essays with Sydney Webb. Here Shaw expressed his Fabianism well and published Fabian Tract and the monthly Fabian News, too.

Fabianism was formulated from the ethical attitudes obtained from the inversion of capitalistic logic and optional addition of economical knowledge from Marx, Ricardo, and Adam Smith as well as the influence upon J.S. Mill and Robert Owen. Shaw was greatly influenced by Henry George in the  realization of socialistic policy as the criticism of the capitalism and  object  achievement of socialism.

In the Fabian Essays in 1889 Shaw's wish was the formation of  beneficial agency organization which synthesized ill-balanced produce in a  region and distribute it as residents' effort, and he found that the land rent was the capitalistic toxin of the capitalism. Shaw tried gradual reformation  through the permeation into liberalists. Those days he pointed out  socialists' illusion boldly. He recognized that success or failure of a nation's  organization depends on how people operate it and found the realistic method of mass production of gentlemen class. But Shaw recognized that human remodeling needs a considerable time because men are accustomed to the traditional method of life and thinking. The presentation of Shaw's superman as the subject who can create and manage a new way of life and improved world may be connected with the progress will of Shaw's Life Force. He pointed out that the socialism as well as Marxism except Fabianism is the intellectual disguise of proletariat liberalism, criticizing that socialists have a point of view of liberalistic illusion. The illusion he pointed out is a religious one that the revolutionary day would be the beginning of golden age and the Marxist drama of class struggle.

Shaw insisted that the institution of human society must satisfy requirements of flexibility to keep face with the ascending movement of life and suggested that Fabianism would overcome defect of the capitalism and remove the socialistic illusion. It is reasonable that Shaw's socialistic thought is spiritual rather than material. Shaw's recognition that no one can reform himself before the society would develop upwards and reform itself is humanistic and for this reason, as I pointed out previously, Fabianism means moralism and intellectualism of the middle class against Marx's proletarianism. So we can judge that Shaw's Fabianism is conspicuously moral and intellectual.



주제어: 페이비어니즘, 사회개혁, 마르크스주의비판



이름 : 서 윤 교

소속 : 서경대학교

주소 : (집)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한신 Apt. 213-501

Tel : 직장: 02-940-7207 휴대전화: 018-220-1878

E-mail: suhy@unitel.co.kr


원고접수일: 2002년 3월 31일     게재판정일: 2002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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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사회주의

사회주의 社會主義 socialism

자본주의의 시장원리를 반대하고 생산수단을 공유화함으로써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학설 및 정치운동.

개요

영국의 사회주의자 앤서니 크로스런드가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자가 사회기구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는 일련의 가치 또는 열망"이라고 말했듯이 사회주의의 뜻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근대 사회주의 이념의 싹은 플라톤의 〈국가 Republic〉,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와 18세기 계몽주의시대의 풍부한 유토피아 문학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지만, 실제로 근대 사회주의는 산업혁명이 야기한 사회·경제 관계와 전통적인 질서의 붕괴에 반대했던 다양한 작가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야기한 부정·불평등·피해 및 자유방임적 시장경제 체제에 대해 비판의 화살을 쏘았다. 당시의 탐욕스런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그들은 형제적 결속감으로 결합된 새로운 생산자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들은 미래에는 대중이 자본가로부터 생산수단과 정부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세기에 사회주의자로 자칭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같은 생각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주의의 특정한 이념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생산수단의 완전한 국유화만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시켜 줄 것이라고 주장한 사회주의자도 있고, 주요 산업의 선택적 국유화와 상속권자의 사유재산권 통제를 제안한 사회주의자도 있다. 또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와 계획경제를 주장한 반면 그밖의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적 입안자가 시장경제를 주도하는 '시장 사회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법 역시 다양하다. 몇몇 사회주의자는 정부의 지도를 요구하지만 다른 사회주의자는 공공기관, 준(準)공공 위탁기관, 지방자치기관, 생산자의 자치공동체 등의 정책결정기구를 통해 가능한 한 분산·분권화를 주장한다. 노동자의 지배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정부의 계획기구에 의존하는 사회주의자도 있다. 국가수입이 보다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사회주의자가 공통되지만 수입의 절대적 평등을 바라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직업에 따른 차등지불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수입을 보장하는 것에만 목표를 두는 사회주의자도 있다.

"각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부르짖는 구호이다. 그러나 많은 사회주의자는 각자가 사회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자신의 몫을 받는 것이 사실상의 사회유지라고 보며, 사회는 먼저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의·식·주를 보장해야 하고 그들을 교육·건강·교통·오락 등의 기본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자는 또 모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신분차이를 평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의 차이를 완전히 없애야 하는지, 사회주의 사회에서 정책결정의 불평등이 유지되도록 내버려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말이 사용되고 악용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일찍이 1845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인들이 사용하는 사회주의라는 말이 "모호하고 막연하며 정의할 수 없는 용어"라고 토로했다.

엥겔스 시대 이래 사회주의는 이 용어를 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재산과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독일 내의 어떠한 단체도 불법화했던 1870년대 후반 독일의 총리 비스마르크조차도 몇 년 뒤에 "국가는 우리의 제국(帝國)을 위해 사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파시스트와 전체주의적 독재자 등 현대의 궤변적 보수주의자들도 종종 자신들이 사회주의 건설에 종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 이념의 기원

근대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 용어는 1830년경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용어는 프랑스에서는 푸리에와 생시몽주의자의 저작, 영국에서는 로버트 오언의 저작에 적용되었다.

생 시몽과 푸리에

앙리 드 생 시몽 백작(1760~1825)은 풍부하지만 비조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괴짜 천재였다. 그의 사회주의 저작은 사회질서와 교권적 위계질서의 붕괴에서 비롯된 당시의 불건전하고 제멋대로인 개인주의적 사상에 관한 생각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각 시대마다 그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싹을 가지고 있으며 이 싹은 높아지는 과학과 기술 수준 및 이미 새로운 산업질서를 건설하기 시작한 산업가와 기술자들 속에서 자라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적·기술적 지식이 산업주의에 합류함에 따라 전문가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생 시몽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똑같은 능력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가 평등주의적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재능에 어울리는 사회적 지위에 오를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보장받음으로써 잠재능력을 최대한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공무질서를 근절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는 강제적 제도로서의 국가를 사실상 제거할 수 있다. 미래의 사회는 거대한 작업장처럼 운영될 것이며 이 속에서 사람에 대한 지배는 사물의 행정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생 시몽의 추종자들은 생 시몽의 학설을 보다 정확하게 사회주의화하는 데 힘썼다. 그들은 사유재산권이 새로운 산업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고 권력과 재산권의 세습적 양도는 합리적인 사회질서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생시몽주의자들이 생시몽 교회를 세우려는 다소 기묘한 시도를 했다고 해서 그들이 부르주아-자본가들의 재산권이 더이상 신성불가침일 수 없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프랑수아 마리 샤를 푸리에(1772~1837)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고독한 사상가로 거의 정신이상자였다.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영업사원으로 보내면서 경험한 경쟁세계와 낭비적 상업에 대한 혐오감을 통해서 반(反)자본주의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지나칠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을 가졌던 덕분에 그는 다가올 재생된 세계는 사회적 변형뿐 아니라 자연적 변혁과 심지어 우주의 변혁에 의해 특징지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양은 레모네이드로 변할 것이며 야생동물은 인류에게 봉사하는 반(反)사자와 반(反)호랑이로 바뀔 것이라고 했다.

지나치게 세심하고 망상적이었던 푸리에는 자신의 공동체 모델로서, 좋은 미래사회의 발아세포인 '팔랑스테르'(phalanstère)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 공동체 안에서 인간은 더이상 마음에 맞지 않은 일을 강제로 하지 않아도 되며 자신의 기질과 기호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다. 아침에는 양배추를 재배하고 저녁에는 오페라를 부를 수 있다. 푸리에는 인간의 자발성은 불필요한 규정 밖에서 이루어진다는 반(反)율법주의적 견해를 가졌다. 생 시몽이 전문가의 지배를 예언했던 데 반해 푸리에는 사랑과 열정이 조화되어 있고 강제 없는 질서 속에서 인간이 서로 결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언주의

웨일스의 로버트 오언(1771~1858)은 보다 진지한 견해를 피력했다. 처음에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직물업을 경영하면서 모범적인 고용주이자 교육개혁가 및 공장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동료 자본가들에게 절망을 느끼고 신생 노동조합운동을 추진했다. 자신에게 부(富)를 얻게 해준 산업주의의 해악을 날카롭게 의식하면서, 경쟁이 없어지고 교육의 나쁜 결과를 합리적인 계몽에 의해 상쇄시킨다면 새로운 생산력은 인류의 이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산업에 대한 공동협동통제와 '통일과 협동 마을'의 창설을 주장했는데 이 마을에서 주민은 수확고를 증가시키고 더불어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향상시킬 수 있다. 오언식의 공동체는 인디애나 뉴하모니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곳에 설립되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협동에 대한 그의 시도와 '위대한 노동조합' 속에서의 노동조합운동 역시 실패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사회주의 전통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경쟁체제에 대한 비난, 협동과 교육에 대한 강조, '불건전한 환경이 일으킨 어리석은 결과를 없애면 인간은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 메시지는 사회주의 운동이 지속되는 데 이바지했다.

그밖의 초기 사회주의자

1840년대에는 많은 사회주의 학설이 등장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프랑스의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는 급진적 사회주의(그는 이것을 공산주의라 불렀음)를 발전시켰는데 급진적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체제인 자본주의는 곧 협동결사체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믿음과 인민적 민주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론화를 서둘렀고 자발성과 혁명적 행동의 미덕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졌으나 이론적인 공헌보다는 수많은 반란을 기도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에티엔 카베는 자신의 영향력있는 유토피아 저서 〈이카리아 여행 Voyage en Icarie〉(1840)에서 토머스 모어와 푸리에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노동자 조직 L'Organisation du travail〉(1839)으로 가장 유명한 루이 블랑은 이 책에서 정부가 융통해준 자본으로 국유 작업장을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이 작업장들은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노동자들은 그들의 경영자를 선출할 수 있다.

그가 1848년 혁명 이후 파리에 세운 국유 작업장은 부활하는 중간계급에 의해 곧 폐쇄되었으나 그가 '노동조직'을 계획하고 '노동권' 인정을 주장한 것은 근대 복지국가를 예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1809~65)은 무정부주의 전통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사유재산과 사유재산을 근간으로 하는 제도를 비판했는데 상호관계·평등·정의로 이루어진 인간관계가 강탈·착취·탐욕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주장은 사회주의자들의 상상력을 강렬히 자극했다. 또 생산자 공동체에 대한 그의 반(反)국가통제주의적·연방적 시각은 사회주의 전통 내에서 집권적·국가통제주의적 시각과 균형을 맞추는 대안을 제공했다.

19세기 초반 영국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출현하여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공격했고, 저명한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사상을 급진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임금노동을 비난했다.조금 뒤에 일어난 프레더릭 데니슨 모리스와 찰스 킹즐리가 이끄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운동은 경제적 급진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의 결합을 시도했다. 1830, 1840년대의 급진적 차티스트 운동에서는 반(反)자본주의 이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운동은 특정 사회주의 집단의 운동이기보다는 노동계급의 정치운동이었다 (→ 색인 : 차티스트 운동).

마르크스와 사회민주주의의 등장

지성사의 관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 이전의 모든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매우 본질적 가치가 있는 이념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후 사회주의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이념은 19세기 후반에 사회주의 전통을 풍미했던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강력한 조류가 뿌리내리는 데 이바지했다.

공산당선언

카를 마르크스(1818~83)는 정신을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독일의 관념 철학과 영국의 정치경제,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결합했으며(→ 마르크스주의), 평생 동안의 지적 동료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1848)을 집필했다. 마르크스는 사회가 역동적인 대립자의 균형으로 존재한다고 이해했다.

불화가 모든 것의 근원이며 사회갈등은 역사과정의 핵심이다 (→ 색인 : 역사철학).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생계를 빼앗기 위해 자연에 대항해 싸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상호관계를 맺으며 이 관계는 인간이 생산활동에 도달하는 단계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사회에서 출현하는 노동의 분화는 역사 드라마의 주역인 적대계급의 형성을 이끈다 (→ 색인 : 분업) .

전임자들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역사를 단순히 부자와 빈자 또는 힘을 가진 자와 힘을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 투쟁이 주어진 역사적 단계에서 출현하는 특정한 역사적 계급에 따라 크게 다르다고 가르쳤다. 마르크스가 정의한 계급은 생산과정 속에서 공동지위를 공유하며 그들의 상호이익에 대한 공동전망과 실현을 개발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헤겔과 몽테스키외처럼 마르크스는 사회를 구조화한 전체로 생각했다. 법전·교육체계·종교·예술 등 사회의 모든 측면은 상호 관련되어 있고 경제적 생산양식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생산양식이 역사운동의 결정적인 요소임을 강조한 점에서 마르크스는 다른 사상가와 달랐다. 그는 생산관계가 사회 전체의 문화적 상부구조를 세우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이 학설을 전임자들의 학설과 구분해 그들의 학설을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자신의 학설을 과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인간발전을 위한 단순한 관념적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 자본주의의 저작과 역사운동에 대한 과학적 검토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이 학설은 과거역사에 대한 해석일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측이 될 것이다.

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해 형성되며, 자본가의 감독에 대항한 동시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결국 사회주의 사회를 이끌어올 것이고 이 사회에서 서로 결속한 생산자는 자신들의 집단적인 운명을 공동으로 만들어가면서 경제적·사회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은 하나의 목적이 된다.

제1인터내셔널

〈공산당선언〉은 유럽 대륙의 노동자 집단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으로 씌어졌으나 1848년의 유럽 혁명들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마르크스·엥겔스는 영국과 유럽대륙에서 발전하는 노동운동과 완전히 고립되어 살았다. 당시 사회주의는 고립된 분파, 특히 망명자들의 교의였다. 그러나 1864년 런던에서 유럽 대륙 및 영국의 노동자 대표들과 지식인들의 회의가 열린 뒤 국제노동자연합, 즉 제1인터내셔널로 알려진 조직이 출현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단순한 노동조합주의에서부터 무정부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을 포괄했지만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이 조직을 이끌었고 이 조직을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도구로 만들었다. 제1인터내셔널은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었지만 영국의 노동운동이 마르크스주의 혁명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에서 제1인터내셔널은 영향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럽 대륙, 특히 독일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곧 당시 노동운동의 주요학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독일 노동운동의 창시자 페르디난트 라살(1825~64)은 자율적 노동계급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와 의견을 같이했지만 자본가의 지배로부터 노동자를 해방시킬 생산자의 협동조직을 설립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정부가 제공해주기를 바랐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달랐다.

마르크스에게는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어떤 호소도 생각할 수조차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독일에서 라살에 대항해 자신의 추종자를 결집했다. 1869년 그들은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 색인 : 독일 사회민주당). 라살 추종자와 마르크스 추종자 사이의 분열은 1875년 두 분파가 타협안(마르크스는 이 타협안에서 라살의 흔적이 보이는 부분을 강하게 비판했음)을 기초로 연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운동은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반(反)사회주의 입법을 통해 그들을 억압하고 사회개혁을 실시하여 그들의 호소를 근절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성장했다. 1877년 사회당은 독일 제국의회에서 50만 표를 얻으며 1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사회민주당의 당원수는 1881년 31만 2,000명, 1890년에는 142만 7,000명으로 불어났다.

반사회주의 입법이 폐지된 뒤 사회민주당은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했는데, 이 강령은 라살의 국가 보조를 받는 기업을 설립하자는 주장을 묵살하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목표인 '계급지배와 계급 자체의 폐지'를 서약했다.

마르크스 사상은 여러 차례의 발전과정을 경험하면서 여러 유형의 추종집단이 생겨났다. 그들은 각각 마르크스의 구절와 어휘를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정당화했다. 1840, 1850년대 초기에 부르주아 지배에 대한 폭력적인 혁명적 전복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출현에 의해서만 노동계급이 해방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견해는 18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매우 온화해졌다.

상층 노동자 계급에게 유리한 제2차 개혁법(1867)이 통과된 뒤 영국에서 쓴 저서에서 마르크스는 영국이 평화롭게 사회주의로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또 그러한 평화적 방법이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 웅변가처럼 보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점점 의회활동에 익숙해져갔다. 이론가 카를 카우츠키(1854~1938)의 지적 지도를 받으면서 그들은 경제력의 필연적인 발전이 반드시 사회주의를 출현시킬 것이라는 경제결정론을 전개했다. 사회민주당의 공식 강령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여전히 완고했지만 그들의 활동은 점점 실용주의적으로 되어갔다.

한때 엥겔스의 가까운 동료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은 유명한 저서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 Die Vo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1899)에서 사회민주당에게 혁명이라는 짐에서 벗어나 이미 실제로 받아들였던 것을 이론적으로도 인식하라고 호소했다. 즉 독일은 사회주의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혁명적 격동을 겪어서는 안 된다.

독일과 영국의 정치적 상황 차이를 무시하면서 베른슈타인은 의회의 압력을 통해 사회주의 개혁을 이룩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변형시키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의 사회민주당에 영국과 같은 길을 걸으라고 촉구했다. 카우츠키의 정통교리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간의 투쟁은 독일 사회민주당을 동요시켰다. 베른슈타인의 학설은 1903년 공식으로 무효화되었지만 실제로 수정주의는 당 전체에 퍼졌고 특히 당의 의회 지도자와 노동조합 지도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모든 사회민주당 지도자는 자국 정부와 전쟁을 지지했고 따라서 사회민주당의 혁명적 요구는 종말을 고했다.

기타 유럽 대륙의 사회민주당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랑스 노동계급의 역사에 깊게 뿌리박고 있는 사회주의 전통과 경쟁해야 했다. 블랑키와 푸르동의 추종자들은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그뒤 프랑스 사회주의는 갈등에 의해 분열되었다. 1875~76년 쥘 게드가 세운 노동당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으나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은 18세기의 혁명적 유산뿐 아니라 블랑키·블랑·프루동의 영향력을 받아들였다.

1905년 다양한 정당이 합병된 뒤에도 사회주의운동은 혁명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불화로 계속 분열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회주의는 계속 성장했다. 초대 의회 때 3만 5,000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주의 연합당은 1906년 선거에서 54석, 1914년 하원선거에서는 100석 이상의 의석을 얻었다.

그러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도 혁명적인 웅변은 실용적인 활동으로 바뀌어갔고 당은 제3공화국 의회에 노련하게 참여했다. 위대한 사회주의 웅변가이면서 평화선거의 주요지도자였던 장 조레스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날 암살된 뒤 대부분의 사회주의 지도자는 프랑스의 전쟁노력을 지지했다.

19세기 후반에 사회민주당은 유럽 대륙 대부분의 나라에서 불타올랐던 마르크스주의 학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덴마크의 사회민주당은 1870년대에 창당했고 스웨덴의 사회주의 운동은 1889년에 시작되었다. 노르웨이 노동당(처음에는 사회민주당으로 불렸음)은 1887년에 결성되어 20세기 초기에는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중부 유럽에서도 사회민주당은 빠른 속도로 정치적인 세력으로 성장해갔다.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당은 1888년에 결성되어 1908년 의회선거에서 전체 1/3의 득표를 얻으면서 독일 이외의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이 되었다. 1885년 노동조합과 협동조직 등이 합병하여 결성된 벨기에 노동당 역시 빠른 속도로 수천 개의 상호원조결사체를 조직했으며 매우 강력한 노동조합운동을 일으켰고 보다 자유로운 보통선거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수많은 파업을 이끌었다. 1894년에 창당한 네덜란드의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활동하면서 1912년 하원선거에서 20%의 의석을 차지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처럼 덜 산업화한 유럽 지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주로 전(前) 자본가와 농민 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무정부주의 경향과 경쟁해야 했다. 정치세력으로서 유럽의 무정부주의는 매우 유력한 러시아의 자유주의 사상가인 미하일 바쿠닌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의 '무정부주의 연맹'은 제1인터내셔널에 속해 있었으나 마르크스와의 불화로 바쿠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1872년 제1인터내셔널에서 추방되었다.

스페인에서는 1879년 사회노동당이 결성되었으나 바쿠닌주의자를 비롯한 무정부주의 사상의 흐름이 강력했기 때문에 그뒤에도 사회주의 운동은 계속 무정부주의와 경쟁해야 했다. 스페인의 사회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무정부주의를 청산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도 무정부주의가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제1인터내셔널의 이탈리아 대표들은 바쿠닌의 가르침을 따랐다.

189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필리포 투라티의 지도로 독립된 사회당이 형성되었다. 1913년 시민의 선거권이 확대된 뒤 공식 사회당은 의회에서 51석을 얻었고 분열된 다른 2개의 사회당도 31석을 얻었다. 계속적인 내부 불화에 시달리고 있던 보다 후진 지역에서는 무정부주의 경향이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이탈리아의 사회당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마르크스주의 조직의 하나로 성장했다.

제2인터내셔널

제1인터내셔널은 유럽 전체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다양화했다. 제1인터내셔널이 각 나라 나름의 정치체제에 근거하여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국제적 운동은 더이상 단일한 제도기관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876년 제1인터내셔널이 해체된 뒤 마르크스·엥겔스는 사회주의운동이 열렬히 추구하는 바에 대해 자문하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더이상 그 운동을 지도하지 못했다.

이제 사회주의의 역사는 분리된 민족운동의 역사가 되었고 민족운동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형식적으로만 인정하고 점차 수정주의적·비혁명적 노선으로 나아갔다. 20세기 초기에 사회주의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강력한 의회세력으로 부상했다. 귀족정치가 아직도 강력한 러시아를 제외한다면 유럽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기존 체제의 폭력적인 전복보다는 기존 체제의 변형을 추구하는 개혁가였다. 다양한 정당 속에서 단지 소수 좌파만이 혁명적인 정통교의를 고수했다.

1889년에 창설된 제2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운동의 변화된 성격을 반영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제1인터내셔널이 시도했던 통일되고 순수 교의적인 조직이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의 국제적 의회와 같은 것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독일의 당이 주도했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웅변가였던 독일 대표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좌익'노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사회주의자의 정부참여는 빌헬름 황제가 이끄는 독일에서는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독일 대표들은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해 완고한 견해를 펼 수 있었다.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이 문제가 표결에 부쳐졌을 때 독일 대표들은 이에 찬성하는 조레스 등에 대항해 반대편에 섰다. 그러나 조레스는 "당신들의 뛰어난 동지 카우츠키가 제공한 이론적 공식의 확고함 뒤에서 당신들은 죽을 때까지 숨어 있을 것이고……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독일의 대표들을 승복시켰다.

정부 참여 문제와 전쟁 문제에 있어서 독일이 주도하던 제2인터내셔널은 전쟁을 반대하는 많은 선동적인 선언을 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이미 제2인터내셔널은 마비상태임을 드러냈다. 제2인터내셔널의 대표 대부분은 노동계급의 국제적 결속성이라는 이념을 버리고 각 민족정부 편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비밀리에 믿어왔던 생각, 즉 '노동자들에게도 결국 조국은 있다'라는 신념을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여러 사회주의 경향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유럽 대륙의 사회주의운동을 풍미했지만 영국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880년대에 급진적인 언론인 헨리 하인드먼은 엄격한 마르크스주의 원칙에 입각해 '사회민주주의 연맹'을 창설했지만 이 단체는 영국 사회주의운동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었다. 시인 윌리엄 모리스가 자유주의-생디칼리슴의 이념에 입각해 세운 '사회주의자 동맹' 역시 유력한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비(非)마르크스주의 이념에 바탕한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영국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페이비언 협회는 시드니 웹, 베아트리스 웹, 그레이엄 월러스, 시드니 올리비에, 조지 버나드 쇼 등 당시의 유명한 젊은 급진적 지식인들에 의해 1880년대에 조직되었다. 이 협회는 진보적이고 온건한 사회주의 형태로 발전했다. '점진주의의 필연성'을 확신하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대중조직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인간권력에 대한 실제적이고 겸손한 충고를 통해 사회를 변형시키는 활력있는 지식인 집단이기를 원했다.

매우 영향력 있는 기관지 〈페이비언 에세이스 Fabian Essays〉(1889~)에는 사회주의자이건 사회주의자가 아니건 간에 정책형성자에게 영향을 미친 사회입법과 개혁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 쇼가 "사회주의자의 정책을 통과시키기 위한 정부 이면의 공작"으로 정의한 '침투'를 통해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핵심 정치가, 공무원, 노동조합 간부, 지방의 정책형성자들에게 계획적·건설적 개혁입법의 필요성을 확신시키는 데 힘썼다. 비마르크스주의 경제학만큼이나 대륙 사회주의 전통에 근거한 이론을 폈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전체 사회조직의 지속성을 해치거나 급작스럽게 변화시키지 않는' 새로운 질서를 추구했다.

생디칼리슴

프랑스의 노동조합주의에서 나온 생디칼리슴 운동은 파리 코뮌(1871)의 유혈사태가 끝난 뒤 재조직되었다. 의회와 정치활동이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생디칼리스트들은 그들 자신의 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직접행동만이 원하는 사회주의로의 변형을 이끌어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페르디낭 펠루티에의 지도 아래서 '노동조합사무소 연맹'(1892년 설립되어 1902년 노동총회 연맹과 합병했음)은 국가를 마비시키고 조직노동자의 수중에 권력을 장악시키는 '총파업'을 통해서 노동의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념을 제시했다. 노동조합은 생산의 핵세포를 지도·경영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수많은 지식인들을 그들 대열에 끌어들였고 이들 지식인들은 생디칼리슴과 정치적 노선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진입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려 했다. 그들의 저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는 조르주 소렐의 〈폭력론 Réflexions sur la violence〉(1908)은 소렐 자신이 곧 극우파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혁명투사들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길드 사회주의

길드 사회주의 전통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몇 년 동안 영국에서 발전했다. 임금제도와 이윤생산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가진 적대감을 공유하면서 길드 사회주의자들은 생디칼리슴에서 국가에 대한 불신과 생산자의 지배에 대한 강조를 빌려왔다. 그들은 길드로 조직된 독립된 생산자가 자신들의 고용상태를 관리하고 창조적인 일에 참여하는 중세로 거슬러올라갔다. 산업에서의 자치를 목표로 삼으면서 길드 사회주의자들은 산업조직·교회·노동조합·협동결사·지방자치단체에 자율성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또 모든 사회집단은 위로부터의 통제 없이 자신의 특수한 기능을 수행해야 하며, 개인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모든 기능집단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능집단간의 협동은 국가에 의한 관리를 대체할 것이고 경찰의 보호와 같은 국가의 업무를 제한할 것이다. 국가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집단이 될 것이다.

길드 사회주의는 여러 사상가에게 기원을 두고 있지만 성숙한 길드 사회주의 학설을 발전시킨 사람은 뛰어난 옥스퍼드 명사인 G.D.H.콜이었다. 그의 초기저서인 〈노동의 세계 The World of Labour〉(1913)· 〈산업에서의 자치 Self-Government in Industry〉(1917) 등에는 길드 사회주의 이론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길드 사회주의운동은 대중의 지지를 널리 얻지는 못했지만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관료적·집중적 경향과 대비되는 한에서 계속 영국의 노동운동의 근원적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미국의 사회주의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유럽만큼 유력하지 못했다. 그러나 1901년 사회당이 결성되었을 때 1만 명이었던 당원수는 1912년 15만 명으로 불어났고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는 총 득표수의 6%에 해당하는 89만 7,000표를 얻기도 했다. 미국의 사회주의는 유럽 출신의 이민 인구에게 가장 강력한 뿌리를 두고 있지만 19세기의 유토피아적 식민지, 노예제 폐지론자, 노동조합주의자, 농업개혁가, 1880, 1890년대의 소외된 사회주의자 집단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사회당의 전신인 사회노동당은 1877년에 설립되었지만 1890년 언론인이자 논객인 다니엘 드 리온이 참여함으로써 독특한 전망을 펼칠 수 있었다. 드 리온은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적 경향과 프랑스의 생디칼리슴 속에서 발전된 '노동주의'를 결합하려 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노동조합원이 '시시한 판에 박힌 기업' 위로 올라서고 비밀투표와 산업전투를 통해 자본력과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있기를 바랐다.

사회노동당은 하나의 분파로 남아 있었으나 사회당은 유진 데브스의 지도를 받으며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전 노동조합 관리였던 데브스는 투옥기간 동안 다양한 사회주의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사회주의로 전향했다. 데브스가 이끄는 사회당은 중앙집권화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 동질적인 것도 아니었다. 사회당은 개혁주의자, 혁명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그리스도교 목사, 지방자치단체 개혁가, 철도사업·기업활동을 증오하는 인민주의자, 그리고 저임금으로 노동을 착취하는 공장에서 형제애를 꿈꾸는 유대인 피복 노동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사회당은 주요한 이론적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비(非)교조적 방법을 통해 미국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효과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미국 사회당은 제1차 세계대전 뒤에 쇠퇴했는데 마지막의 저명한 지도자는 노먼 토머스였다.

러시아 사회주의의 등장

인민주의 전통

19세기에 러시아를 지배한 급진적 경향은 인민주의였다. 인민주의 학설을 처음으로 전개한 작가이자 편집자 알렉산드르 헤르젠은 농민의 공동사회에서 미래에 다가올 사회주의 사회의 싹을 보았고,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어 고대 농민의 전통에 근거한 협동사회를 건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헤르젠은 농민계급을 이상화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혁명활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인민에게 가라"고 영감을 불어넣었다.

1860, 1870년대에 보다 급진적인 인민주의자들은 농민반란에 대한 신념을 잃고 테러리즘으로 돌아섰다. 소규모의 학생 혁명가 집단은 테러리즘을 통해 차르 체제를 타도하려 했고 이런 그들의 노력은 1881년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바쿠닌이 입수한 저서 속에 있던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혁명가 문답 Revolutionary Catechism〉은 혁명의 유일한 목표가 "모든 기존 목표의 뿌리와 가지를 자르고 러시아에 있는 모든 국가전통·질서·계급을 소멸시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유럽에서는 숙련공과 농민에게 지지를 받으면서 푸르동의 계승자로 출현했던 바쿠닌이 러시아에서는 거의 소외된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엘리트적·테러리스트적 운동이 일어나도록 도왔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꼽힌다. 인민주의의 광범한 흐름 속에서 테러리즘은 대중의 교육과 평화적 선전을 믿었던 진보적 사회주의의 반대를 받았다. 엘리트주의자들이 테러 운동을 추구하는 동안 점진주의자들은 인민 속에서 선전활동에 열중했다.

혁명 전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처음에는 인민주의자였다가 1880년 제네바에 정착했을 때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했고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 노동해방단'(Osvobozhdenie Truda)을 결성했다. 그는 러시아 사회주의가 우선적으로 성장하는 공장 프롤레타리아를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는 예외적이라는 헤르젠의 생각을 거부하면서 그는 혁명은 성격상 유럽적일 것이고 그 속에서 러시아의 자리는 러시아 나름의 노동운동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880, 1890년대의 다양한 저서와 팜플렛을 통해 플레하노프는 인민주의자를 공격했고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의 객관적인 역사적 필연성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사회진보의 법칙은 경멸받을 수 없으며 러시아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은 산업의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이다. 조직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혁명의 이점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를 알 것이다.

독일식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면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1870~1924, 후에는 당 이름인 레닌으로 알려짐)는 혁명에 대해 더욱 호전적으로 접근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1902)에서 그는 자신의 독특한 학설을 공식화했다. 사회주의는 전문혁명가들이 노동자와 농민 대중을 동원·활성화할 때에만 성취할 수 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노동자는 노동조합의식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호전적이고 훈련받은 비타협적인 혁명가 조직이 대중을 행동으로 이끌어야 한다.

레닌의 추종자들은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불법단체) 제2차 대회에서 다른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반(反)레닌주의는 보다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지도자인 L.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마르토프는 "우리가 볼 때 노동당은 전문혁명가의 조직에만 국한될 수 없다. 노동당은 전문혁명가뿐 아니라 활동적·지도적 프롤레타리아의 전체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선언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2개 분파는 처음에는 협동하여 합동회의까지 개최하기도 했으나 1912년에 완전히 갈라섰다. 각 지도자들은 한 분파에서 다른 분파로 전환했다(플레하노프는 원래 레닌편이었으나 1904년 반대파와 제휴했음). 레온 트로츠키 등은 일시적이라도 어느 한 분파에 속하지 않고 자유를 누리려고 했다. 이같은 분쟁은 2개 분파 대부분의 망명 지도자가 살던 서유럽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러시아 내부에서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하층 노동계급을 끌어들인 반면 레닌의 반대집단 멘셰비키는 주로 교육받고 숙련된 노동자와 유대인 지식인을 끌어들였다. 1917년 2월혁명이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유주의적이면서 막연하게나마 사회주의적인 지도력을 형성시킨 뒤 볼셰비키는 도시대중에게로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1917년 4월 레닌이 망명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요구하여 추종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때까지 볼셰비키는 미래에 다가올 혁명의 기회를 준비하는 동안 자신들의 당면과업은 민주공화국의 한계 속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레닌은 그들이 즉시 권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의 즉각적인 종결을 원하는 대중의 바람, 토지에 대한 농민의 갈망, 새로운 정치체제의 허약함이 1905년 볼셰비키 간부들이 이끈 유산된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지 못한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 뒤이어 곧 독일 혁명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고립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르의 권력이 붕괴되었을 때 자발적으로 확대된 소비에트(노동자와 농민의 평의회)는 볼셰비키가 기존 체제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주된 조직기반이었다. 레닌의 슬로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는 주요 도시중심지에서 반응을 얻었다. 1917년 9월 볼셰비키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소비에트들은 공식 정부에 도전하는 '이중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7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트로츠키에게 임시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군사력을 부여했고 레닌이 이끄는 혁명정부체제를 출범시켰다.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

볼셰비키의 권력장악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혁명이 곧 퍼질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착수되었다. 레닌의 관점은 언제나 국제주의적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 지도자 대부분이 1914년 자신들의 민족정부를 지지하고 나섰을 때 레닌은 그들을 새로운 혁명 사회주의자 조직의 토대를 무너뜨리려는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권력을 장악한 뒤 볼셰비키들은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하기로 결심했다.

1919년 모스크바에서 대표들이 모여 있는 동안 베를린에서 일어난 혁명적 봉기가 진압되어 지도자들은 처형당했으며 독일 노동계급의 대다수는 새 독일 공화국의 지도력을 기꺼이 사회민주당에게 넘겼다. 그러나 러시아 지도자들이 꿈꾸는 세계혁명은 여전히 가까워 보였다. 제3인터내셔널 제1차 대회 직후 헝가리와 독일의 바이에른에서는 단명한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모든 유럽의 주요국가에서는 공산당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1920년 7월 제2차 세계대회를 열었을 때 이 조직은 더이상 소분파 개인이나 대표의 소규모 모임이 아니라 12개의 주요공산당에서 파견된 대표들의 연합체였다. 이 대회로 러시아 지도자들은 이제는 사회주의운동과 완전히 분리된 코민테른의 지배권을 얻었다. 또 이 대회는 코민테른의 지지자는 전쟁에서 '사회적 애국자'였던 사회당 지도자와 중도파를 모두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21개 조항의 코민테른 회원규정을 채택했다. 코민테른은 러시아를 모델로 한 훈련받은 군사적 세계혁명조직의 창설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 조직은 러시아의 지도력과 권위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1923년에 유럽에서는 희망적인 혁명의 흐름이 멈췄다. 독일 지역에서 일어난 새로운 봉기는 1923년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소련 적군(赤軍)의 폴란드 침략 기도 역시 저지되었다. 노르웨이의 노동당, 독일의 좌파 공산당, 프랑스와 스페인의 생디칼리스트 등 일시적으로 코민테른에 참여했던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을 탈퇴했고 중앙집권식으로 하달되는 코민테른의 정책을 거절했다. 유럽은 경제적·사회적 안정책을 마련했다. 1924년 레닌이 죽자 모스크바는 그때까지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당을 러시아의 외교정책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 등의 코민테른 지도자는 여전히 세계 혁명을 의제로 삼았지만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더이상 이것을 믿지 않았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사회주의

공산당과의 분열

전 세계에서 공산당은 사회당을 재건하려는 지도자들을 자본주의 유지를 '객관적으로' 조장하는 '사회주의의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공산당은 사회당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보호하면서 전쟁 동안 부르주아와 연합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저버리고 국제사회주의를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사회당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국가의 독재적인 성격을 지적하면서 이에 응수했고 공산당이 민주적인 사회주의 전통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 색인 : 소련).

유럽의 사회당 운동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었다. 독일에서는 다시 연합한 사회민주당의 깃발 아래 대부분의 노동계급이 결집했기 때문에 공산당은 독일 노동운동에서 소수의 위치로 전락했다. 처음에 공산주의가 사회당들의 관심을 끌었던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이 다시 지배권을 차지했고 공산당은 프랑스 좌익에서 소수가 되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는 공산당·좌파사회당·우파사회당으로 분열함으로써 무솔리니의 권력장악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영국의 공산당은 노동당 속에서 거의 성장하지 못했고 급진적 분파 이상의 세력이 되지 못했다. 다른 대륙의 사회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사회주의 역시 제2인터내셔널의 추종자와 제3인터내셔널에서 조직된 공산당 사이의 강한 분열을 드러냈다.

코민테른은 때로는 혁명노선으로 전환하고 또 때로는 호전적인 사회주의 계층과의 연합을 시도하는 등 특이한 노선을 보여주었다. 1929년 경제공황이 엄습한 뒤 코민테른은 자본주의의 '최후 위기'가 모든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리라 기대하면서 극좌편향했다. 코민테른은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을 노동계급의 적인 "사회주의적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 프로이센 주의회에서 공산당은 나치 운동이 하나의 과도적 현상이라는 이론을 근거로, 사회민주당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나치에 찬성표를 던졌다 (→ 색인 : 나치즘).

동시에 사회당은 이론적으로는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혁명교리에 대한 서약을 포기했다. 이제 사회당은 각각의 민족정부로부터 노동계급의 최대이익을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압력단체가 되었다. 독일·영국·스칸디나비아에서 사회당은 정부에 참여했고 프랑스 등지의 사회당은 마음이 맞는 좌파 부르주아 정권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구체적인 사회·경제 활동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세계 경제공황이 서유럽과 중유럽의 경제와 정치체제를 혼란에 빠뜨렸을 때 무능을 드러냈다.

세계 경제공황에 대한 반응

스웨덴과 벨기에를 제외한 지역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경제공황 동안 종합적인 사회주의 계획을 추진하지 못했다.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정통적인 예산행정과 공공재정 정책을 따랐고 권력을 얻지 못했을 때는 더 많은 실업보험을 요구하고 임금감축에 반대함으로써 노동자의 즉각적인 이익을 서로 경쟁적으로 옹호했다. 경제위기의 심화에 따라 공산당이, 특히 공황에 의해 가장 심하게 타격받은 실업자와 미숙련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넓혔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밖의 노동자들에게는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파시즘의 등장

독일에서 히틀러의 출현은 독일의 공산당과 사회당 모두를 붕괴시켰다. 공산당은 나치의 승리가 단지 일시적이고 그뒤에는 자신들이 독일 대중을 승리로 이끌기를 희망했다. 공산당의 구호는 "나치 다음에─우리"였다. 사회당은 경제공황이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그뒤에는 나치라는 열병이 점진적으로 쇠퇴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평상시와 다름없는 정치적 역할을 했다. 분열된 노동운동은 나치의 권력장악을 정지시킬 수 없음을 드러냈다. 이 불행한 사태로 공산당과 사회당은 그들의 이전 정책을 재검토하고 전략과 전술을 수정해야 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가 이끄는 혁명정부에 의해 붕괴될 위협에 놓이자 1934년 2월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이론적 기여와 구체적인 업적이라는 2가지 면에서 오랫동안 모범을 보여왔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거의 모든 노동자의 지지를 받았고 빈 인구 200만 명 중 50만 명에 이르는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은 거의 전적으로 대도시적이었다. 따라서 1934년 2월 유혈싸움은 빈에만 국한되어 일어났고 이 봉기가 4일 만에 진압되자 사회당은 지하로 들어갔다.

정부 속에서의 경험

독일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민주당은 마지 못해 독일 정부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민주당 당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당은 내부적으로 분열해 우파인 '다수 사회당'은 조심스럽고 실용적인 방안으로 나아가려고 했고 카우츠키와 그의 전(前) 베른슈타인 반대자들이 이끄는 '독립 사회당'은 근본적인 구조개혁을 추진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극좌파는 혁명당을 조직하려는 열망에서 독일 공산당을 창당했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능가하는 젊은 극단주의자들은 1919년 초기에 좌익 폭동을 일으켰으나 다수 사회당 정부와 그들의 동료인 우파 장교에 의해 가볍게 진압되었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암살당했고 나머지 지도자들은 코민테른으로 들어갔다. 몇 개월 뒤 바이에른에서 일어난 좌파와 공산당의 폭동 역시 실패로 끝났다.

1920년대 초기에 독립 사회당은 다수 사회당과 다시 연합했다. 1919년 새 국민의회 초대 선거에서 다수 사회당은 대다수인 39.3%, 독립 사회당은 8%의 지지를 얻었다. 사회당 정부는 독점산업 사회화의 필요성을 비롯한 급진적인 조치들을 공표했다. 그러나 1920년 6월 선거로 비(非)사회당 내각이 출범했고, 사회당원이 몇 명 참가하기는 했지만 내각의 성격은 비사회주의적이 되었다. 중간계급이 권력을 잡았고 1925년 에베르트 대통령이 죽자 보수적인 국가주의자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기 혼란상태 속에서 사회민주당은 극우와 극좌 모두에 반대하는 공화국 적법성의 보루였다. 여러 주(州, Länder), 특히 프로이센에서 사회민주당은 정부를 장악했고 많은 개혁주의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국 정치무대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928년 5월 선거를 통해 사회민주당은 제국의회에서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출현했다.

다수득표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지도자 헤르만 뮐러가 총리가 되었고, 그들의 재정전문가가 재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정부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독일도 직면하고 있던 경제공황에 거의 대처하지 못했다 (→ 색인 : 대공황). 사회민주당 정부는 정통 통화수축정책에 입각하여 세금을 저축하기 위해 실업수당을 감축하고 예산적자를 감소하려 했으나 이런 정책은 효과를 보지 못해 1930년 물러나야 했다. 이 정부는 사회민주당이 참여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정부였고, 그 직후부터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923년 총선거에서 5년 앞서 사회주의 계획을 채택했던 노동당이 다수를 얻어 여당이 되었다. 노동당은 자유당의 지지를 얻어 1924년 1월 램지 맥도널드가 이끄는 제1차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노동당 내각은 몇 개의 온건한 개혁조치를 취한 뒤 1924년 10월 선거로 물러났다. 노동당 내각이 단명한 것은 어느 정도는 '볼셰비키주의자 위협'이라는 조작된 공포로 유권자들이 갑자기 우파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1929년 6월 노동당은 2번째 기회를 얻었다. 노동당은 하원의석 총 615석 가운데 288석을 얻었고 자유당의 지지를 얻어 맥도널드가 이끄는 제2차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노동당 역시 불경기, 특히 솟아오르는 실업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노동당은 원대한 사회개혁을 약속했지만 이 개혁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런던으로부터 도피된 자본의 양은 대격변을 불러일으켰고 기업측은 균형예산과 실업수당의 감소를 요구했다. 맥도널드가 기업의 요구 몇 개를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노동조합은 격렬히 반대했다. 이 문제로 분열한 노동당 정부는 보수당과 자유당과의 전국연합을 결성했고 이때문에 노동당은 1930년대에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1919년 선거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은 총 550만 표 중 200만 표를 얻었다. 이탈리아는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대규모 파업, 대중시위, 공장점령, 토지재산의 자발적 몰수 등이 이탈리아 전체로 확산되었다. 1920년 8월 임금협상이 깨진 뒤 북부 산업지역에서는 혁명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50만 명의 노동자가 공장을 점령했고 생산을 계속하면서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극좌세력이 파업 확대를 주장했으나 분열된 사회당 지도자들이 주저하자 노동자들은 이에 실망하여 기세가 꺾였다.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이 노동계급의 모임을 해산하기 시작했다. 1921년 우파 당원들은 사회당과 자유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제안했으나 좌파는 이를 거부했다. 무솔리니의 테러단은 점점 더 산업 중심지로 침투해 들어갔다. 노동조합이 일으킨 총파업은 형편없는 실패로 판명되었다. 그 직후 무솔리니는 로마 행진(1922. 10)을 감행하여 권력을 잡고 총리에 취임했다. 1926년 이탈리아에서 의회제 정부는 완전한 종말을 고했고 사회당은 지하로 들어갔다.

프랑스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정부에 참여하지 못했다. 사회당은 실제로는 점진주의를 택했지만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전전(戰前)의 정책을 고수했다. 1930년대 중반 호전적인 우파집단이 제3공화국을 위협했을 때 사회당은 그들의 정책을 전환했다. 1936년 6월 인민전선의 대표로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인민전선은 사회당 지도자 레옹 블룸이 이끌었으며 좌파 공산당부터 중도파 급진사회당까지 포괄했다 (→ 색인 : 프랑스 급진사회당).

마침내 공산당은 '사회 파시즘' 교리를 버리고 기꺼이 중도파·좌파 정당과 연립했다. 1936년 6월 인민전선의 승리는 공장에서의 연좌농성파업과 함께 일어났다. 이 파업은 레옹 블룸이 이끄는 인민전선 정부를 급진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전까지 프랑스 고용주들이 인정하지 않았던 집단교섭권이 법으로 규정되었으며 사회보장과 전반적인 노동조건도 매우 개선되었고 주 40시간 근무가 의무화되었다.

블룸 정부는 미국의 뉴딜 정책을 프랑스식으로 실시하려 했으나 처음에 가졌던 열정이 퇴색한 고용주들은 정부를 자극해 전통적인 재정·예산 정책으로 돌아가도록 압력을 가했다. 1937년 6월 연립정부의 중간계급 출신 각료들은 블룸의 긴급재정권 요구를 거절했고 블룸은 사임했다. 사회당은 급진사회당이 이끄는 차기 정부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블룸은 별도의 인민전선 정부를 구성했고 이 정부는 1938년 약 1개월 동안 유지되었다. 1939년 프랑스가 독일에 대항한 전쟁에 들어갔을 때 전쟁을 반대했던 공산당은 불법화했다. 1940년 프랑스가 무너진 뒤에 사회당은 비시 프랑스에 의해 해체되었다.

스웨덴에서만이 사회당은 정부정책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스웨덴 노동당 정부는 1932년에 처음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유럽의 사회당과 달리 스웨덴 사회당은 정통 재정정책을 버리고 경제계획에서 정부의 대규모 개입을 강조했다. 광범한 공공업무는 유효자본에서 재정지원을 받아 실업의 감소를 도왔고 경제를 장려했다. 개인소비의 감소에 따른 상쇄효과를 이용해 공공투자가 이루어졌고 1933년에 16만 4,000명에 이르렀던 실업자는 꾸준한 경제팽창정책을 통해 1938년에 사라졌다. 스웨덴의 혁신은 제2차 세계대전 뒤 거의 모든 서유럽 국가가 실시했던 경제정책의 본보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주의

전세계로 퍼진 사회주의 정당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산업화한 국가에서 먼저 사회주의가 출현할 것이라고 항상 주장해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종류의 '사회주의'는 농업사회와 후진국가에 급속하게 퍼졌다. 이런 국가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가 의도했던 바와 상관 없이 산업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식민주의에 대항한 투쟁에서 특히 지식인과 반(半)지식인은 자신들이 사회주의라 생각한 이념을 택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의미있는 민족독립은 국가의 경제통제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들은 소비를 제한하고 국가자원을 생산력 촉진에 이용함으로써만이 급속한 경제성장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생국들은 소련을 급속한 산업화의 본보기로 삼았다. 전체주의 일당지배국가에서부터 군사독재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체제는 그들이 사회주의라고 선언했다. 사회정의·평등·민주주의에 대한 서유럽의 전통 사회주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지배정당은 인도 등 소수국가에 불과했다.

반면 역설적이게도 서유럽의 사회당은 마르크스주의 시각을 포기하고 복지국가 이념으로 전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거의 모든 사회당은 민족 단위의 정부에 참여했다. 곧 그들은 의회제를 따라 권력을 추구하는 대중정당이 되고자 했고 자유당이나 기독교민주당 등과의 연립정부에 기꺼이 참여했다. 완전한 국가소유권만이 좋은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은 공공의 통제와 일정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혼합경제체제가 모두에게 사회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보았다. '점진주의의 필연성'이라 할 수 있는 이 이념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와 독일의 수정주의자가 소리 높여 주장했던 것이다.

서유럽 사회주의의 변형

전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19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방향을 전환했다 (→ 색인 : 독일). 이 선언은 계급투쟁을 비롯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교리를 언급하지 않고 대신 사회민주당이 "경제권을 전체 국민의 손에 넣어주고 자유민들이 평등하게 함께 일하는 공동체를 창설하는 데 목표를 둔다"고 했다. 사회민주당은 경제의 공공통제를 주장했지만 포괄적인 국가의 소유권은 거부했으며, 계획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 계획은 공산주의나 전체주의와 전혀 다른 종류의 민주사회주의적 계획이라고 주장했다.

몇 년 뒤인 1959년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채택된 행동지침 강령에서 사회민주당은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마지막 유산을 버렸다. 이 강령은 생산수단 속에서 사유재산권을 주장했지만 마르크스라는 이름과 '계급'·'계급투쟁' 등의 말은 어디에도 사용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중앙계획경제를 거부했으며 자유경쟁시장 이념과 "가능한 경쟁-불가피한 계획"을 지지했다. '혼합경제'는 이상처럼 보였다.

사회민주당은 더 이상 보편적으로 타당한 학설을 가지려 하지 않았고, 어떤 정당도 전체로서의 사회에 자신의 독특한 철학을 부과하지 않는 다원주의 사회를 지향했다. 그래서 모든 의도와 목적 면에서 독일 사회민주당(1969년 빌리 브란트의 지도 아래 정부를 구성함)은 복지국가 확대를 위해 힘쓰는 개혁주의 정당이 되었다.

영국 노동당은 결코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후 세계의 정치현실에 쉽게 적응했다. 1945년 노동당은 처음으로 의회에서 다수의석을 얻었다. 6년 동안 지속된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이끈 정부는 영국 복지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석탄·철도·교통·철강 등 많은 기간산업을 국유화했고 종합적인 국유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었으며 사회보장이 확대되었고 완전고용이 이루어졌다.

노동당은 1951년 선거로 물러났지만 그들이 이룬 주요업적은 계속 유지되었다. 철강산업은 다시 사유로 바뀌었으나 보수당은 그밖의 복지국가의 성격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애틀리의 뒤를 이어 노동당 당수가 된 휴 게이츠컬은 '당이 대규모 산업의 국유화를 추구한다'는 초기 약속을 버리고 당의 공약을 바꾸려고 했다. 이런 게이츠컬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노동당은 복지국가의 확대와 실용계획의 확대를 목표로 하는 개혁주의를 실제로 받아들였다.

1965년 다시 권력을 잡았을 때 지도자 해럴드 윌슨(1970년 선거 때까지 총리를 지냄)은 신중하게 개혁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내부개혁보다는 지출의 균형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성 때문에 사회주의 성격이 뚜렷한 정책을 택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뒤 재건된 프랑스 사회당이 전후 프랑스 정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사회당은 프랑스 산업, 특히 공공시설·광업 및 은행·보험의 국유화, 경제에 대한 광범한 공공통제 정책, 사회보장분야의 구조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전전(戰前)에 노동자로부터 얻었던 많은 지지를 공산당에게 빼앗겼다. 사회당은 점점 공무원, 전문직 중간계급, 그밖의 화이트칼라 피고용인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었다.

그들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취했던 공약변경을 시도하지 않았고 온건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아래서 권력을 잡았을 때 사회당은 산업·재정 분야의 국유화에 착수했지만 세계적 불경기라는 비상사태와 프랑에 대한 압박으로 매우 온건한 노선을 유지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운동은 수많은 정당으로 분열했다. 가장 큰 조직인 이탈리아 사회당은 피에트로 넨니의 지도로 무솔리니 이전의 좌파 사회주의 전통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사회당은 공산당과의 협동에 의해서 노동계급의 이익이 가장 잘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사회당 중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은 계급갈등과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전전(戰前)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가장 가까웠다.

그러나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사회당은 점차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었고 1963년에는 기독교민주당과의 중도파-좌파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사회당 역시 다른 서유럽의 사회당과 사실상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제2의 사회당은 주세페 사라가트가 결성한 민주사회당이었다. 이 당은 온건한 사회개혁을 추진했고 1947년 이후 거의 모든 이탈리아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1966년에 2개의 주요 사회당이 출현했으나 1960년대 후반에 다시 분열했다.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으로 포기한 정도는 서로 달랐지만 서유럽에서 모든 사회당은 복지국가를 지향했다. 사회당 이론가 중에는 사회주의가 결국 복지국가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계급구분이 사라지고 보다 평등한 부의 분배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것은 그들의 꿈이었을 뿐 더이상 그들의 정치행동이 되지 못했다.

아프리카의 사회주의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 이념은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아프리카 지식인들에 의해 주로 북부 아프리카에서 전파되었다. 또 많은 프랑스 이주민, 특히 교사와 공무원들은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였다. 특히 튀니지와 알제리에서 다양한 민족해방운동은 사회주의 이념을 통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투쟁과 연결되었다 (→ 색인 : 식민주의).

알제리가 독립을 획득했을 때 최초의 지도자 아흐메드 벤 벨라 주변에는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집단 출신의 프랑스 자문관들이 있었다. 농업의 집산주의와 산업의 자영은 알제리 민족정부가 실천해야 할 시급한 과제였다 (→ 색인 : 민족주의). 이 계획이 실패했을 때 벤 벨라는 물러나야 했고 그의 후임인 우아리 부메디엔은 '알제리 사회주의'를 계속 추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국가주도 기업과 토지사유에 입각한 경제체제에 만족해야 했다. 사실상 알제리는 군사독재로 나아갔다.

튀니지에서는 1956년 독립한 뒤 일당체제가 출범해 하비브 부르기바의 주도로 주요기업을 국유화했다. 지배당인 데스투르 사회당은 경쟁 정치조직을 금지했고 계획된 경제발전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밖의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1950, 1960년대에 '아프리카 사회주의'가 확산되었다. 세네갈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은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을 주창했고 기니 대통령 세쿠 투레는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의 공동체적 가치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결합한 '아프리카화한'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했다.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은 가나 정치의 토대가 '양심주의'에 있다고 선언했고 "전체주의 방안만이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966년에 권좌에서 쫓겨났다.

케냐·탄자니아 등 그밖의 아프리카 국가에서 지배엘리트들은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하면서 '아프리카 사회주의' 관점의 고수를 선언했다. 많은 아프리카 사회주의 작가들은 공동 토지소유, 몇몇 부족의 평등주의 관습, 한때 부족사회에서 존재했던 호혜조직 등 아프리카 전통에 입각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 공약은 이상에 가까운 말에 지나지 않았다. 단순한 생계차원에서 시장경제와 산업화로, 보건, 교육, 주택, 공공행정 조직에로의 이동이 시급했다. 자율적 기관에서 인간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정치적·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힘쓸 수 있지만 아프리카에서 이런 기관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에서 강제와 구별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전망은 너무나 먼 일이었다.

아랍의 사회주의

중동의 사회주의운동은 공무원·군대장교·교사 등 신(新)중간계급에 속하는 유럽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주도했다. 계급구분 없이 아랍 인민 전체에 호소하고자 그들은 근대화와 모든 아랍인의 형제애를 위해 힘썼다.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한 것은 보통 바트당이라 불린 아랍 사회당이었다. 시리아에서 결성된 이 당은 종족이나 지역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다. 이 당의 분파들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특정 사회주의 정책이나 구체적인 개혁을 추진하지는 못했다.

1952년 이집트에서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권력을 잡았을 때 중하층 계급 출신의 그의 젊은 장교집단은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나세르는 외국기업의 지배에 대항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도입했다. 1960년대 중반 이집트는 국내외 모든 대규모 산업·재정 기업을 국유화했고 대토지소유자의 땅을 몰수했으며 모든 중요한 경제분야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었다. 그러나 이 권력구조는 군사독재 형태였다.

아시아의 사회주의

아시아 사회당 12개 대표가 1953년 1월 랑군(지금의 양곤)에서 모여 제1회 아시아 사회주의자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표 가운데는 국제적 명성을 얻는 인사도 있었다. 인도·미얀마·스리랑카·인도네시아·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의 정부들은 그들 자신을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나 곧이어 사회당들은 명목상의 권력마저 잃었다. 몇 개의 사회주의 조직이 경쟁하던 인도에서는 지배당인 회의당이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경향을 흡수통일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실상의 전국적 정당이었다.

미얀마 사회당은 몇 년 동안은 연립체제 속에서 미얀마를 지배하기도 했으나 1962년 네 윈 장군이 정권을 잡자 불법화했다. 인도네시아 사회당은 1960년 수카르노 대통령에 의해 폐지되었다.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전후 동남 아시아 사회당들은 1960년대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유럽식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쇠퇴함에 따라 사회주의 형식을 표방한 다양한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등장했다.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카르노는 자신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레소핌'(Resopim:혁명, 인도네시아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이라고 선언했다. 미얀마의 군사독재자들은 미얀마가 사회주의국가라고 공표했다. 북베트남(나중에는 베트남 전체)은 공산당의 지배를 받았다. 나머지 인도차이나 국가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혁명운동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전통주의 세력과 싸웠다. 중국에서는 1949년 이래 인민공화국 공산당 정부가 권력을 잡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사회당들은 독립투쟁에서는 잠시 능력을 발휘했으나 그뒤에는 전국정치 무대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유럽에서 교육받은 지식인인 사회당 지도자들은 유럽의 모델에 뒤지지 않으려 했고 민주주의라는 길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념을 지지했으나 유럽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동남 아시아 국가들은 권위주의 체제를 통해 산업발전을 추구했다. 싱가포르와 인도에서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계획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도 '사회주의'는 근대화와 급속한 산업화를 추구하는 신엘리트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 일본은 확고하게 설립된 전통적인 사회주의 조직을 가지고 있다. 일본사회당은 1901년에 처음으로 결성되었으나 곧 해체되어 지하로 들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이후에 사회주의 조직은 다시 확산되었다. 1936년 사회대중당은 의회에 18명의 의원을 배출했고 50만 표 이상을 얻었다.

사회주의 조직들은 1940년대 이후 다시 출현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뒤 억압받았다. 1946년 사회당은 90석의 의석을 얻어 3번째로 강력한 정당이 되었고 1년 뒤에는 의회에서 최대다수 의석을 얻어 지도자 가타야마 데쓰[片山鐵]는 연립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사회당은 점진주의자와 혁명주의자로 분열되었다.

좌파 혁명주의자는 미국에 극력 반대하며 소련편으로 돌아섰고 우파 점진주의자는 미국과의 밀접한 군사적·정치적 관계를 점진적으로 완화할 것을 주장했다. 2개 파는 1950년대에 완전히 갈라져 좌파는 일본사회당, 우파는 민주사회당을 결성했다. 이 2개의 당은 의회 내에서 1/3 정도의 의석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영원한 소수의 위치에 운명지어진 것으로 보였다. 일본 사회주의는 아직도 전후시대에 유럽 사회주의가 겪었던 것과 같은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밖의 지역과 국가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에서도 사회주의는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이 출현한 1901년에 결성되었고 불과 3년 만에 그 지도자 J.C. 웟슨은 세계 최초의 노동당 출신 총리가 되었다. 1908년, 1910년 5월, 1913년 6월에 노동당은 정부를 주도했으며 그뒤에도 자주 권력을 차지했다.

뉴질랜드의 경우 1893~1906년 뉴질랜드 정치를 지배한 것은 자유당과 노동당의 느슨한 연립이었으나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서 뉴질랜드 노동당이 출범한 것은 1913년의 일이었다. 이 당은 꾸준히 성장하여 1935년 권력을 잡았고 그뒤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노동운동은 처음부터 점진주의와 개혁주의 노선을 따랐다. 그들은 노동조합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원칙상으로는 사회주의 공약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당면문제를 다루는 수단으로서 정부의 통제를 이용하고 사회사업을 확대하는 데 주된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도입한 다양한 사회보장책 덕분에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근대 복지국가와 매우 평등한 사회로 발전했다.

캐나다의 사회주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 비해 느린 속도로 전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캐나다 사회주의 운동은 2개 분파로 갈라졌고 이 2개 분파는 모두 연방의회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1920년대에 캐나다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사회당과 노동당이 번창했으나 역시 연방의회에 거의 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1932년 '협동사회연합당'(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CCF)의 조직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전국적인 중요성을 얻기 시작했다. "대담하고 포괄적인 규모의 사회·경제 계획"의 필요성을 선거운동의 토대로 삼아 CCF는 대부분의 지방선거에서 지지를 얻었고 1944년 6월에는 서스캐처원 지방에서 정부를 구성하여 20여 년 동안 이 지방에서 권력을 유지했다. 1961년 진보적인 노동조합 지도자와 CCF 지도자가 만나 신민주당을 결성했다.

CCF가 성격면에서 농민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데 반해 신당은 산업분야의 지지를 받았다. 계획경제를 주장하면서 신민주당은 사회보장의 확대, 정부의 고용보장, 저임대 주택의 대규모 건설 등을 추진했다. 신민주당의 정책은 전후 서유럽의 사회주의가 추진한 정책과 비슷한 것이었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주의의 역사적 뿌리는 매우 깊다. 1870년대 초기에 아르헨티나에서는 제1인터내셔널의 지부가 몇 개 설립되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적도 있지만 다양한 분열과 이주한 산업노동자의 지지에 주로 의존하는 현실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그들은 농촌지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칠레에서 사회주의자들은 1920, 1930, 1940년대에 여러 연립정부와 인민전선정부에 참여했다. 1958년 선거에서 칠레 사회주의자들은 인민행동전선(FRAP) 후보자인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했다. 아옌데는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고 1964년에도 다시 패배했지만 197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3명의 후보 중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어 공산당에서부터 민주주의 개혁가에 이르는 인민전선의 지지를 받으며 정부 수반이 되었다. 아옌데 정부는 외자산업의 국유화와 국가의 계획적 건설을 약속했으나 경제혼란의 증가와 중간계급의 반대에 부딪혔고, 아옌데가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자 칠레에서 사회주의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L.A. Coser 글 | 이호성(李豪城) 참조집필

참고문헌

이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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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론 : 윤원구, 현대사상연구원, 1990
사회주의 대논쟁 : 한겨레사회연구소 편, 백산서당, 1990
사회주의 인간론 : E. 프롬, 사계절 편집부 편역, 사계절, 1990
사회주의혁명론 : Y. 크라신, 강미숙 역, 과학과사상, 1989
현대사회주의를 생각한다 전2권 : 다이우치 유즈루, 주섭일 역, 탐구당, 1989
과학적 사회주의 : G. P. 체르니코프, 노중기 역, 백두,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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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와 공산주의 : 쿠시넨, 동녘 편집부 역, 동녘, 1989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까치글방 57) : 박호성, 까치, 1989

사회주의와 제반 현상과의 관계

사회주의와 민주화 운동 : G. 루카치, 박순영 역, 한겨레, 1991
프랑스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 느티나무 편집부 편, 느티나무, 1991
중국사회주의 정치개혁의 이론과 실천 : 북경인민출판사 편, 삼광출판사, 1990
동구혁명과 사회주의 : 가토 데츠로, 허태유 역, 하늘땅, 1990
사회주의와 전쟁 외 : V. I. 레닌, 오영진 역, 두레, 1989
서독 기민당과 사민당의 사회경제적 정책이념의 변천과정과 내용(의정연구 제32집) : 한국의회발전연구회 편·발행 , 1988
Democratic Socialism:Theory and Practice : Mihailo Markoviq, Harvester Press, 1982
Essential Works of Socialism : Irving Howe (ed.), 1970
The Origins of Socialism : George Lichtheim, 1969
Der Sozialismus:Vom Klassenkampf zum Wohlfahrtsstaat : Iring Fetscher (hrsg.), 1968
World Communism:A History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 Franz Borkenau Univ. of Michigan Press, 1962
Marxism : George Lichtheim, 1961
A History of Socialist Thought, 5 vol. : G. D. H. Cole, 1953-60
Socialism and Saint-Simon : Émile Durkheim, Routledge & Kegan Paul, 1959
European Communism, : Franz Borkenau, Faber & Faber, 1953
The Tragedy of European Labor : A. F. Sturmthal, 1943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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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순례

 

[마니아의 세계]헌책방 순례

책더미에서
월척을 낚는 묘미

나는 헌책 수집광을 낚시꾼에 비유한다. 강이나 호수나 바닷가의 낚시꾼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이다. 낚시꾼의 재미와 마찬가지로 아스팔트 낚시꾼에게도 같은 묘미가 있다. 가끔은 ‘월척’의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남재희 호남대 객원교수·전 노동부 장관


    이가 들면서 고민이 되었다. 비교적 큰 단독주택에 살지만 언제고 아파트로 이사는 하여야 하겠는데 그 많은 책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답답하여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젊었을 때는 누가 물어보면 사설(私設) 도서관을 차리거나, 네 딸들 집에 골고루 나누어 주거나, 어디에 기증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사설 도서관을 차리기에는 내게 그만한 돈이 없고, 딸들은 아파트 살림이나 외국 살림에 책이라면 손을 내젓고, 그렇다고 기증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내가 평생 극성스럽게 모은 책이 어느새 8만 권이 넘어버렸다. 포켓 북이나 잡지들도 한 권으로 쳐서 말이다. 90평이 약간 넘는 집이 온통 책으로 그득하다. 20년 전 그 반에 반도 못 미치는 양일 때 이사를 하려고 밖에 쌓아놓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집 헌책 장사 하다가 망한 모양이군” 하더란다.

얼마 전 시인 고은 씨와 우연히 만나 이야기하던 끝에 책이 화제가 되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에 머물렀던 그는 “케임브리지의 뒷길을 가다 보면 집 앞에 책을 수북이 쌓아놓고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데도 있더군. 비 오는 날이면 비닐로 잘 가려놓기도 하고…”라며 그곳 소식을 전했다. 대학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케임브리지이니 노년이 된 교수가 많아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대부분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에 살면서 책을 모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갖고 있던 책도 가끔 정리하여 폐기 처분하는 게 사람들의 소일거리가 아닐까 싶다. 그런 책들이 헌책방에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책종이는 산성화 방지처리가 안 되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오래 되면 변색하거나 부식되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마이크로 필름에 담아놓기도 하는데, 오래 전에 미국 잡지에서 도서관 책을 마이크로 필름에 담고 책 자체는 폐기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논쟁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서울서 가장 큰 홍대 앞 온고당


책을 모으는 데 열을 내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다. 그러니 50년이 넘었다. 그 덕분에 서울 장안의 헌책방 주인들 사이에선 책 수집광으로 이름이 난 지 꽤 오래 되었다. 그래서 어렴풋하게나마 그룹이 형성된 그 방면의 사람들한테 가끔 인사를 받기도 한다.

나는 책 이야기를 할 때는 고본(古本)과 헌책을 꼭 구분하여 말한다. 비슷한 말이지만 고본이라 할 때는 오래 되고 희귀한 책이라는 뜻이 담겨 있고, 헌책은 영어로 말하면 유즈드 북(used book), 즉 누군가의 손을 한 번 거친 책들이다. 그래서 고본점이라 해도 될 것을 나는 꼭 헌책방이라고 고집한다.

현재 서울에서 가장 큰 헌책방은 홍익대학교 앞에 있는 ‘온고당’이다. 새로 지은 빌딩을 임대해 1층은 국내서적, 지하층은 외국서적 위주로 파는데 꽤 넓고 책의 유통도 빠른 편이어서 자주 가볼 만하다. 국내서적은 주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아파트 같은 곳에서 사온다. 지하의 외국서적은 약간 값이 높은 것으로 나까마(중간상인을 일본말로 그렇게 부르는데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므로 편의상 이 말을 쓴다)들이 가져온다. 온고당이 제일 큰 책방이다 보니 나까마의 활동이 집중되어 좋은 책이 많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또 미술대학이 유명한 홍익대 근처이고 하여 미대생들이 미술책이나 디자인책을 찾느라고 쑤석대기도 한다.

청계천 복개도로변에 있는 평화시장에도 헌책방이 많이 몰려 있다. 그 가운데서 외국서적만 고집하는 곳이 이름 그대로 ‘외국서적’이다. 내가 다니기 시작한 것만도 30년이 되었으니까 역사가 꽤 길다. 헌책방 집결지의 유일한 외국서적 전문점이어서 전에는 좋은 책이 많이 들어왔다. 비교적 학술서적이 많았는데 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 집이나 교수들의 유족으로부터 나왔으리라고 짐작했다. 요즘은 한산해졌다. 규모가 작은 책방이어서 나까마들이 찾지 않아서인 것 같다.

서울 이태원에 영어로 ‘포린 북’라고 쓴 외국서적 전문 책방이 있다. 미군기지가 있고 외국 관광객이 즐겨 찾는 이태원시장이 있어 그런대로 활발하다.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 특히 중년부인들은 포켓 북을 갖고 와 자주 바꿔가기도 한다. 트레이드(trade)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감축되고 난 후, 특히 징병제가 아니고 지원제가 되고 난 후로는 양이나 질에서 많이 떨어졌다. 예전에 징병제일 때는 대학재학생들이 군대에 와서 수준 높은 잡지들도 제법 흘러나왔는데 요즘은 찾기가 힘들다. 더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더 네이션(The Nation), 더 포린 어페어스(The Foreign Affairs)등 좋은 잡지를 싼값에 많이도 샀다.

연신내에는 ‘문화당’이라는 좋은 헌책방이 있다. 주인 말이 문경의 친구 여럿이 서울에 와서 모두 헌책방을 하게 되었는데 책방 이름은 똑같이 문화당으로 하기로 약속했다나…. 그래서 장승백이나 구로 쪽에 있는 다른 문화당을 일부러 찾아가 보기도 했다. 연신내와 같이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좋은 헌책방이 있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짐작으로는 그 주변의 갈현동 등에 지식인이 많이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1980년대 초 망원동에 홍수가 들었을 때 물이 살짝 스민 책들이 책방에 더미로 나왔고 그 수준이 꽤 높았다. 망원동에도 지식인들이 많이 살 것이라고 짐작했다.

시청 앞 지하도에도 알찬 헌책방이 하나 있다. 거의 모두 영서(英書)이며 일서(日書)도 얼마간 있다. 이곳이 번창까지는 못 가도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것은 근처에 호텔이 많아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다.

 

헌책방 순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씨책방’과 ‘동아서점’


헌책방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공씨책방’과 ‘동아서점’이다. 공씨책방은 새문안교회 건너편에 있을 때 전성기를 누렸다. 서울에서 가장 크다고들 했다. 1층은 작았지만 지하층은 매우 넓었는데, 주인 공씨는 개미굴이라며 거기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재미있어 벗어나기 어렵다고 익살을 떨었다.

주인 공진석씨는 고졸 학력인데 월간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헌책방 이야기로 당선되어 그때 받은 상장을 상점에 자랑스럽게 걸어놓기도 했다. 또 ‘책사랑’이라는 얇은 개인 잡지도 열 번쯤 발행했는데 나도 거기에 수필 하나를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헌책에 재미를 붙여 열성적으로 헌책을 찾아 서울 장안을 헤집고 다녔다. 헌책 이야기를 할 때는 늘 의욕이 넘쳤으며, ‘서울에서 가장 큰 헌책방’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공씨는 어느 날, 나이는 30대 중반쯤이었을까, 여느 때처럼 헌책을 사갖고 오다 버스 안에서 혈압 때문에 숨을 거두었다. 대단히 애석했다. 그의 부인과 여동생은 지금도 신촌에서 작은 헌책방을 하고 있는데 그분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뜻으로 ‘책사랑’ 마지막호를 발행했을 때 나도 정성들여 회고담을 써서 기고했다.

동아서점은 동아일보사 건너편의 지금은 없어진 중부소방서 쪽에 있을 때 활발했다. 주인 강씨는 처음에는 무척 고생을 했단다. 원래 명동 쪽에서 헌책 노점을 하다가 발전하여 번듯한 책방을 차리게 된 것인데 새문안교회 건너편으로 이사하여 영업을 하다가는 출판업에 뛰어들어 좋은 영서를 냈다. 지금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라지는 헌책방들


헌책방은 대체로 사양길이다. 통계를 잡아가며 연구는 안 해보았지만 대충 이런 판단이 든다.

첫째, 시대적 추세가 점차 활자매체에서 시청각매체로 옮겨가면서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더구나 근래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더 심해진 것 같다. 온고당 지하층 책임자는 몇 년째 활자 중심의 책을 찾는 사람은 급감하고, 사진이나 그림 중심의 책을 찾는 사람들이 현저히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나도 그런 느낌이다. 우선 나부터도 좋은 사진이 많이 든 책을 선호하게 되었다.

둘째, 아파트가 주된 주거공간이 되면서 사람들은 책을 간수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아파트에서 책은 천덕꾸러기 신세다. 또 복사술이 발달하여 사람들은 꼭 필요한 부분만 복사하여 보기도 한다.

셋째, 건물 임대료가 다락같이 올라 헌책 장사로는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렵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런 탓인지 헌책방이 사라진 자리에는 호프집이나 밥집이 들어서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영국에서는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헌책방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정보화 혁명시대에 그런 아이디어는 시대착오가 될 것이라 체념하게 된다.

넷째, 주한미군의 감축과 징병제의 폐지로 미국 책의 유통량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다.

용산 삼각지 골목 안에 내가 알기로도 30년이 넘은 양서 헌책방이 있었다. 좋은 책이 많이 나왔는데 5~6년 전쯤부터 시들해지더니, 나로서는 겨우 ‘포린 어페어스’를 살 정도의 효용밖에 없는 집이 되어버렸다. 그 오래 된 집이 작년에 불고기집으로 전업했다. 시대의 변화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집주인은 자녀교육에는 성공하여 그래도 위안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천 헌책방 이야기는 전에 ‘신동아’에 수필로 쓴 적이 있다.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과천의 한 빌딩 2층에 넓은 헌책방이 있어 가끔 갔는데 그 집의 중년 여주인은 “헌책방은 헌책을 버리지 않고 모아 학생들에게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사회 봉사를 하는 것이고, 그에 수반되는 집세 같은 적자는 아래층에서 경영하는 전통찻집의 수입으로 메운다”고 했다.

몇 년 후 찾아가보니 건너편 빌딩 안 슈퍼마켓 구석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 집 역시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 전에 한양대 이영희 명예교수의 칠순 출판기념회에서 그 여주인을 만났다. 그이 역시 지식여성임에 틀림없다.

‘오거서(五車書)’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전철 홍대역에서 가까운 곳에 ‘오거서’라는 좋은 이름의 책방이 있었다. 옛날에 다섯 대의 수레에 실을 정도의 책이라 하면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책이어서 오거서(五車書)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 오거서 책방 주인도 수준이 있는 점잖은 지식인이다. 헌책에 약간의 골동품도 갖추고 하여 책방을 유지해 왔으나 역시 임대료 때문에 이리저리 옮기곤 하다가 지금은 극동방송 부근의 큰길가로 옮겼다. 가끔 들러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나라 서적에 대해 넓게 알고 있으며, 사회문제에 대한 식견도 뚜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좁은 책방에 앉아 있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더구나 지금은 헌책방 쇠퇴기가 아닌가.

지방여행을 갈 때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헌책방에 들러본다. 부산의 대청동 미국문화원 주변은 피난 시절 헌책을 사러 다니던 곳이어서 늘 반갑다. 지금은 그곳엔 책방이 없고 대신동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책방들이 몰려 있다. 거기에 가면 기념으로 여하튼 책 몇 권을 사든다. 대구에서도 헌책방을 찾았다. 그러다 모르던 교수들과 초면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헌책방을 찾는 동류의식이 발동하는 것이다. 광주에서도 헌책방 안내를 받아 가보았다가 역시 방문 기념으로 굳이 몇 권을 샀다.

외국도시에 가서도 며칠 머물게 되면 꼭 헌책방을 찾아간다.

일본 도쿄의 ‘간다(神田)’는 너무 유명한 곳이다. 한국의 헌책방에 비교하면 책의 수집이나 그 배열이 몇 급 위 수준이다. 가보면 이것이 전통 있는 헌책방이구나 싶다. 한국의 헌책방처럼 임대료에 치여 이리저리 이사 다니지 않고 부럽게도 몇십 년씩 한자리를 붙박이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처음 간다에 들렀을 때 가와이(河合榮次郞) 교수의 ‘자유주의의 옹호’ 초판본을 사들고 감격한 기억이 생생하다. 일제 파시즘에 감연히 맞선 가와이 교수가 아니던가. 종이는 재생지로 형편없었지만 매우 소중하게 여겨졌다.

파리에 가서는 유명한 센 강변의 헌책방 노점을 가보았다. 노틀담사원 근처에 노점 서너 개가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문화도시의 풍경에 귀중한 보탬이 되어 보였다. 노점이기 때문인지 헌책인데도 포켓 북조차 투명비닐로 포장하여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미국 하버드대 케임브리지 이야기는 고은 시인 말을 인용했지만 30여 년 전 내가 유학 갔을 때는 하버드 쿱(공제조합이란 뜻) 책방 구석에 헌책 코너가 있어 싸게 살 수 있었다. 또 가끔 책을 ‘세일’하는 곳도 있어 지난 시절의 좋은 책을 헐값에 구입할 수도 있었다.

 

헌책방에서 낚는 ‘월척’의 희열


내가 사는 책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과학책도 좋은 이론서는 모은다. 인문 쪽에 비중을 두는데 문학서부터 철학·종교까지 광범위하다. 그리고 특히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국의 페이비어니즘 관계 책은 기를 쓰고 모은다. 시드니 웹 부처, G.D.H 콜, 해럴드 라스키 등등의 책은 물론 관련 연구서까지 말이다.

요즘은 관심의 초점이 달라졌다. 이제는 나이 탓에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데는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사진으로나마 세계일주를 하려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사진첩, 박물관·미술관 사진첩 등 되도록 컬러이고 영문으로 된 것을 모아 즐겨 뒤적거린다.

그러다 보니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의 사진첩, 블라디보스토크 사진첩, 상해혁명운동사 사진첩 등 재미있는 것도 구했다. 특히 러시아혁명의 시작부터 소련 붕괴까지를 담은 사진첩은 비장하다. 20세기 역사를 손으로 거머쥔 듯 느끼게 하는 좋은, 비극적 사진들이다.

나는 헌책 수집광을 낚시꾼에 비유한다. 강이나 호수나 바닷가의 낚시꾼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이다. 낚시꾼의 재미와 마찬가지로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에게도 같은 묘미가 있다. 가끔은 ‘월척’을 낚는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영어사전으로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유명하다. 거기에는 20여 권으로 된 ‘Oxford English Dictionary’와 그것을 줄여 2권으로 된 ‘Shorter Oxford English Dictionary’가 있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흔히 콘사이스라고 부르는 ‘Concise English Dictionary’가 있다. ‘OED’를 처음 발견하고 용기를 내어 샀을 때의 그 희열감이란…. 나중에 영어를 전문으로 하여야 할 분에게 기증했다. 그리고 훨씬 더 뒤에 OED 20여 권을 2권으로 압축한 사전을 싼값에 사고는 기뻐했다. 2권으로 압축했기 때문에 확대경이 첨부되어 있어 그것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잘 보였다.

그 밖에도 월척이 많지만, 로댕의 에로틱 데생집도 희귀본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훌륭한 조각가에게 주기 위해 지금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하나만 더 이야기하면, 내 월척 중에 소중한 것은 영문으로 된 중국 건축 사진첩이다. 나는 서양 숭배자다. 건축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나 로마의 콜로세움,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 등 서양 건축물을 볼 때마다 항상 압도되어 왔고 거기서 동양의 열등감을 느껴왔다. 그러다가 중국 건축 사진첩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대리석이 없어서 그렇지 중국의 건축은 서양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널리 알려진 건축물이지만 베이징의 천단(天壇)이 그랬다.

 

모으는 재미 못지 않은 주는 재미


나는 멍청하다. 50년 동안 희귀본인 고본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지금 엄청난 희귀본 소장가가 되었을 것이다. 내 지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 그는 국내책 중에도 특히 잡지와 시집의 초판본만 모은다. 그리고 외국책으로는 이집트에 관한 것과 에로티시즘의 수작을 수집한다. 쉽게 말하여 환가(換價)성이 있는 책들이다.

한번은 어느 마음씨 좋은 책방 주인이 내가 희귀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자 최남선의 ‘백팔번뇌’ 시집을 굳이 사두라고 했다. 장정·서문·발문에 노수현·이광수 등 우리나라 명사가 대거 동원된 책이어서 가치가 있단다. 희귀본으로서의 고본이라고 산 것은 그것 정도다.

책은 모으는 재미도 있지만 주는 재미도 그에 못지않다.

앞서 말한 바 있는 망원동에 물이 들었을 때 하베이의 혈액순환에 관한 고전의 한정 복사본을 샀다. 그래서 의학을 하는 권이혁 박사(전 서울대총장)에게 선물로 주었다. 연필로 ‘몇 권 가운데 몇 권째’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 한정판으로 그리 흔치 않은 책이라 한다. 나중에 권박사에게 식사대접을 정중하게 받았다.

한번은 한 교수가 마야나 잉카문명에 큰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듣고는 ‘멕시코’라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옥타비오 파스가 서문을 쓴 결정판이라 할 책을 선물했다. 또 한 교수는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필을 집필하는 데 골몰하고 있어 ‘영혼을 위한 수우프’라는 영문판 책을 선물했더니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고마워 했다.

한 친구는 신학 전공이 아닌데도 성경 공부에 열중하기에 성경에 나오는 일상의 모든 것에 대한 전집(예를 들어 여성·의식 등등)을 읽어 보라고 주었다.

후배 관리들과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는 라켈 카슨의 ‘침묵의 봄’을 한 권씩 선물하며 환경에 관한 명저라고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내가 아끼는 신문사 후배와 만나서는 헨리 키신저의 영문 회고록을 선물하며 공부하라고 했다. 어렵지만 꼭 읽어 안목을 넓히라는 것이다.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는 기자들에게 책을 많이 선물했다.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후배들에게 몇백 권을 주었을 것이다. 노동부에 있을 때도 출입기자들에게 영문 원서를 몇 권씩 주었다. 다른 것을 주는 것보다 내 마음도 편하고 흐뭇했다. 정치를 하면서도 당직자들이나 유권자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했다. 손쉬운 문학전집이나 역사물을 위주로 선물했다. 유권자나 당직자들의 교양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회식만 하는 것보다는 내 마음도 훨씬 편했다.

요즘 대학에 강의를 나가면서는 ‘한 학생에게 한 권의 책’을 목표로 책을 선물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는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 ‘스카레트’ ‘장미의 이름’ 등 영문 포켓 북을 주로 주는데 대부분의 학생이 “영문 아니에요. 읽기 힘들어요” 한다. 그러면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자네들 영어를 잘해야 하네”하고 읽기를 강권한다.

그러면서 내가 고등학교 시절, 대학 초년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심장’, 토머스 울프의 ‘시간과 강’ 등을 영문으로 읽은 경험, 그래서 공부나 인간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왜 헌책을 그리도 많이 모았을까?


헌책을 거의 광적으로 수집한 나의 50년을 가끔은 미련했다고 후회한다. 이제 그 많은 책이 때로는 거추장스럽다. 특히 이사할 때를 생각하면 아찔해지기까지 한다.

나는 왜 헌책을 그렇게도 많이 모았을까? 심리학적인 분석대상이다. 어렸을 때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꼈고 그래서 그 결핍감을 메우려는 탐욕이 생겨난 것만 같다. 모든 것에 만족하며 자랐으면 그런 탐욕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은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책을 사는 데에는 몹시 관대했다. 그래서 책을 산다면 두말하지 않고 돈을 주셨기 때문에 책 모으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가끔 친구들이 무슨 책을 그리 많이 사느냐고 핀잔을 줄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익살을 섞어 이렇게 반문한다. 어느 재벌은 자동차 수집광이지 않느냐, 또 어느 재력가는 여자 수집광(?)이지 않느냐, 거기에 비하면 책 수집은 돈이 덜 드는 것이다. 또 수석을 모으는 취미, 난초를 모으는 취미, 우표를 모으는 취미보다 더 생산적이다, 그렇게 답변하곤 했다.

헌책을 사면 우선 앞뒷면에 있는 추천문을 읽는다. 그리고 목차를 천천히 살피고 서문을 읽는다. 가끔은 결론 부분까지 가는데 그런 ‘대접’을 받는 책은 드물다. 끝까지 독파하는 책은 훨씬 더 드물지만. 그래서 나는 책을 수집하는 것이지 읽는 것은 아니라고 꼭 힘주어 해명한다.

어쨌든 책수집 취미 덕분에 나는 책 세계의 짜임새를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도서관의 사서들이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떤 테마가 나오면 대개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고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선 잡지 편집에 도움이 되었다. 옛날에 ‘서울평론’이라고 하는 주간지를 2년간 편집했는데 그때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지금도 가끔 ‘서울평론’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요즘 계간 ‘다리’의 편집을 책임지고 있는데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내 나름대로 헌책 수집으로 얻은 안목이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를 먹어가니까 감각 면에서 시대변화에 뒤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은 있지만 말이다.

 

나의 헌책방 순례는 치유될 수 없는 병


요즘은 인터넷 시대다. 나는 ‘컴맹’일 뿐만 아니라 인터넷도 외면하고 있다. 스스로 인터넷 시대의 석기시대인을 자처한다. 하기는 나는 항상 유행에 몇 발짝씩 뒤늦게 살아왔다. 대학 시절 사르트르가 휩쓸 때도 그러려니 하다가 10년, 20년 후에 관심을 갖고 좀 읽어보았다. 마셜 맥루한이 여기저기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기는 마르크시즘에 대해서도 그랬다. 젊은 시절 한참 마르크스가 운위될 때도 기본적인 것 몇 가지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고 마르크시즘이 아주 한물 가다시피한 요즈음 가끔 기본적인 이론서를 끄집어내 음미하는 것이다. 아마 인터넷도 유행이 휩쓴 후 멍청하니 따라가려 할지 모르겠다. 나이 든 사람의 완고함이라 할까. 하기는 인터넷 운운하는 것도 속도의 문제, 공간의 문제이지 인간의 근본적인 생각의 문제는 여전히 자신에게 맡겨진, 자신과의 씨름이 아니겠는가.

요즘도 계속 헌책방 순례하느라 용돈의 대부분은 거기에 지출되지만 나는 골프를 안 치니까 그 비용으로 충당한 셈으로 친다. 치유될 수 없는 병이다. 그동안 모은 책들은 대충 정리를 마쳤는데, 다시 사모으니 집안식구들의 눈치가 보일 뿐만 아니라 개과천선(改過遷善) 없이 또다시 골칫덩이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미련함은 죽기 전에는 못 고치는 것인가.

역시 시대의 변화를 말하는 듯 요즘은 중국의 사진집이 많이 눈에 띈다. 나는 오늘도 온고당에 가서, 이미 갖고 있는 것이지만 중국의 자금성·만리장성·이화원 등의 사진집을 살 계획이다. 동네 후배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아할 것인가.

내게 서울에 사는 재미를 묻는다면 그 첫째가 헌책방 순례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재미 때문에 도저히 시골 생활은 못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두 번째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허름한 대폿집이라 해둘까.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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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웹이 만든 세계 최고의 사회과학 도서관

세계 최고의 사회과학 전문도서관  "영국정치·경제학도서관" 웹으로 이용하기

 

열람과 문 정 순(참고자료실 ☏ 810-3609)

 

BLPES 홈페이지

 

  영국 런던정치?경제학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이하 LSE)의 도서관인 "영국정치?경제학도서관(British Library of Political & Economic Science: 이하 BLPES)"은 영국노동운동의 아버지인 시드니 웹(Sidney Webb)이 1896년에 설립한 세계 최고의 사회과학 전문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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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웹의 노동조합 이론과 우리나라 노동조합법의 정의

 

(2) 노동조합의 의의와 기능

① 노동조합의 의의(意義) : 시드니 웹(S.Webb)의 노동조합이론은 그의 조국(영국)뿐만 아니라, 여러 자본주의 국가의 조합이론 및 법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은 가령 우리 나라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상의 노동조합정의(제2조 제4호본문)가 Webb의 정의와 유사한 점을 보아도 명백하며, 이에 의하면 ‘노동조합이라 함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를 말한다’고 하고 있다.

② 노동조합의 기능 : 노동조합은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활동한다. 노동조합의 목적달성을 위한 활동으로 우선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근로조건을 유지․개선하는 경제적기능(단체협약 채결기능)과 공제적 기능 및 산업사회의 발전과 정치․사회제도의 변화에 따른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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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쇼] 부르주아 사회주의자

쇼, Yousuf Karsh가 찍은 사진
 

George Bernard Shaw

1856. 7. 26 더블린~1950. 11. 2 잉글랜드 하트퍼드셔 아이엇세인트로렌스.

아일랜드의 극작가, 문학비평가, 사회주의 선전문학가.

192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청년시절

조지 버나드 쇼는 조지 카 쇼와 루신다 엘리자베스 걸리 쇼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족보상으로는 아일랜드의 지주계급으로서 프로테스탄트계의 '권력층'에 속하지만 현실에 어두웠던 아버지는 처음에 한직인 공무원으로 시작했다가 곡물상 일을 벌여 실패했다. 가난하면서도 귀족행세를 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이는 그에게 단순한 가난 이상의 굴욕이었다. 처음에는 친척 목사에게 공부를 배웠고 그후 학교에 다녔지만, 학교 자체를 거부해서 16세 때 토지중개인 사무소에서 일했다. 쇼는 어머니의 영향과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을 자주 방문한 덕분에 음악·미술·문학의 폭넓은 지식을 갖출 수 있었다. 1872년에 어머니는 1866년 이래로 더블린에서 쇼 일가와 한집에서 살던 그녀의 음악교사 조지 존 밴덜리어 리를 따라 남편을 버리고 두 딸과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1876년 쇼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런던에 자리잡은 어머니와 큰 누나에게 합류했는데 이때 작은 누나는 죽고 없었다. 그는 20대에 계속되는 좌절과 빈곤을 겪어야만 했으며, 어머니가 그녀의 남편에게 받는 용돈과 그녀가 음악교사로 버는 수입으로 생활했다. 오후에는 대영박물관 독서실에서 소설을 쓰고 학생 때 미처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으면서 보냈고, 저녁에는 당시 런던 중류계급 지식인들 사이에 성행한 강의와 논쟁에서 부족한 지식을 스스로 보충했다.

그의 소설은 완전히 실패했다. 반자전적이며 적절한 제목이 붙은 〈미성숙 Immaturity〉(1879, 출판 1930)은 런던의 모든 출판업자에게 거절당했다. 그후에 쓴 4편의 소설과 10여 년 간 언론에 기고한 대부분의 글도 마찬가지로 퇴짜를 맞았다. 그가 첫 문학작품으로 번 돈은 1년에 10실링도 못 되었다. 1887~88년에 씌어졌으나 죽은 뒤인 1958년 출판된 작품〈미완성의 소설 An Unfinished Novel〉은 그의 소설 중 마지막 실패작이었다. 1880년대에 그는 소설가로서는 실패했지만 자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채식주의자, 사회주의자,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가, 논객, 극작가로서의 경험을 했다. 1884년에는 영국 중류계급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이 새롭게 창설한 페이비언 협회의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이 협회는 혁명이 아닌 지적·정치적 생활의 '침투'(시드니 웹의 표현)를 통한 영국 사회의 변화를 목표로 했다. 쇼는 이 협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영국 사회주의의 고전이 된 〈사회주의에 대한 페이비언적 연구 Fabian Essays in Socialism〉(1889)을 편집하고 두 장(章)을 직접 쓰는 등 눈부신 활동을 했다. 1885년 마침내 연극비평가 윌리엄 아처가 쇼에게 고정적인 저널리스트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초기에 잡지에 기고한 글로는〈펠 멜 가제트 Pall Mall Gazette〉에 쓴 서평(1885~88),〈월드 World〉에 쓴 미술평론(1886~89),〈스타 Star〉에 쓴〈바셋 호른 Corno di Bassetto〉등의 재기 넘치는 음악평론(1888~90)과〈월드〉에 쓴〈지 비 에스 G.B.S.〉등의 음악평론(1890~94) 등이 있다. 쇼는 음악, 특히 오페라에 탁월한 식견을 지녔으며, 여기에 재치 있는 여담을 곁들임으로써 그의 평론은 오늘날까지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프랭크 해리스가 그를 〈새터데이 리뷰 Saturday Review〉지의 연극평론가(1895~98)로 임명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치와 언변을 동원하여 빅토리아 시대의 허위와 위선에 찬 무대를 생명감 넘치는 무대로 일신시킬 운동을 전개했다.

 

초기 극

쇼가 희곡을 쓰기 시작했을 당시 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극작가는 A.W. 피네로 경과 H.A. 존스였다. 이들은 근대적 사실주의 극을 개척하고자 했지만 인위적인 구성과 진부한 인물유형에서 벗어날 힘이 없었다. 이러한 극의 빈곤은 입센의 여러 작품이 런던 무대에 소개되면서 분명해졌다. 1890년〈인형의 집 A Doll's House〉, 1891년에〈유령 Ghosts〉이 런던에서 공연되었고, 영국 무대에 새로운 자유와 진지함의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쇼는〈입센주의의 정수 The Quintessence of Ibsenism〉(1891)를 막 출판하려던 참이었는데, 미발표작인 희극〈홀아비의 집 Widowers' Houses〉을 급히 손질해 런던 빈민가의 악명 높은 지주제도를 다룬 '입센풍' 작품으로 고쳤다. 1892년에 공연된 이 극은 당시 대담한 신예 극작가들조차 여전히 자주 사용하던 진부한 낭만적 인습을 흔들어놓았다.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선량한 영국 젊은이가 미래의 장인의 재산과 자신의 수입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결과임을 깨닫는다는 줄거리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비극적 상황이지만, 쇼는 늘 비극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여기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의 사랑이 연민을 일으키지 않는다. 주의를 끄는 것은 낭만적 곤경이 아니라 사회의 악이며, 인물의 행위는 풍자적 희극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893년에 쓴 이와 유사한 경향의 극〈워렌 부인의 직업 Mrs. Warren's Profession〉은 검열관인 궁내부장관의 반대로 1902년에야 공연될 수 있었다. 이 극의 주제는 조직 매춘이며,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가 그 '직업'을 거쳐 유럽 전역 매춘굴의 일부를 소유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극 전환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도 상황을 결정하는 경제적 요인이 강조되고, 당시 성행하던 '타락한 여성들'을 다룬 희극과는 달리 주제가 냉혹하게 다루어진다. 쇼의 여러 작품처럼 이 극도 일정한 범위에서는 관념극에 속하지만, 관념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보면 본질적으로 고급 희극이다.

쇼는 자신의 초기 극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즐겁지 않은 사실에 직면하도록 극적 힘을 사용했기" 때문에 '유쾌하지 않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뒤 그는 이 신랄한 희극들에 감정이 상해 있던 감독과 관객을 새롭게 끌기 위해 '유쾌한' 4편의 극을 썼다. 이 두 부류의 작품들을 개정해서〈유쾌한 극과 유쾌하지 않은 극 Plays Pleasant and Unpleasant〉(1898)으로 출판했다. '유쾌한 극'의 첫번째 작품〈무기와 인간 Arms and the Man〉(1894 공연)에서는 발칸 반도를 배경으로, 사랑과 전투라는 낭만적 소재를 가끔 신랄하기는 하지만 재미있고 쾌활하게 다루고 있다. 2번째 작품〈캔디다 Candida〉(1897 공연)는 영국 연극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된다. 그것은 1904년 이 극이 왕립극장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된 것을 계기로 할리 그랜빌 바커와 J.E. 베드렌이 손잡고 그곳에서 뛰어난 무대를 잇달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 극의 여주인공은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성격이 둔감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인 목사 남편과 그녀를 사랑하는 젊은 시인 사이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녀는 남편이 실제로는 약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만만한 척하는 남편을 선택한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시인은 병적으로 흥분하지만, 예술가로서 더 큰 창조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포기할 만한 아량을 지닌 사람이다. 이것은 쇼에게 중요한 주제이며, 정신적 창조자인 남성과 인류의 생물학적 존속을 이끌어가는 여성 간의 갈등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이 주제는〈인간과 초인 Man and Superman〉의 근간을 이룬다.〈캔디다〉에서 이러한 사변적 주제는 가볍게 다루어질 뿐이며, 이는〈아무도 모른다 You Never Can Tell〉(1899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에서 남녀 주인공은 각각 능란한 호색가와 이성적이고 해방된 여성임을 자처하지만, 자신들이 이러한 관념과는 무관한 생명력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한다.

쇼는 비평서와 정치적 작품을 계속 왕성하게 발표하는 한편 이러한 극까지 쓰느라 겹친 과로로 건강을 해쳐 중병에 걸렸다. 1898년 그는 건강이 회복되면서 베아트리체와 시드니 웹의 친구이자 상속인이며 그의 개인 간호사였던 아일랜드인 샬럿 페인 타운센드와 결혼했다. 표면상 금욕적인 결혼생활은 평생 계속되었으나 엘런 테리, 패트릭 캠벨 부인 등 여러 여성들과의 서신왕래를 통해서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쇼는 다음 희곡집〈청교도들을 위한 3편의 희곡 Three Plays for Puritans〉(1901)에도 희곡 자체뿐만 아니라 그 작품들이 암시하는 주제까지 감동적인 산문체로 다룬 서문을 붙였다.〈악마의 제자 The Devil's Disciple〉(1897 공연)는 미국 독립전쟁중의 뉴햄프셔가 배경이며, 여기서 전통적인 멜로드라마가 전도된다. 쇼의 최초의 대작〈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Caesar and Cleopatra〉(1901 공연)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셰익스피어의〈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Antony and Cleopatra〉에 등장하는 38세의 요부가 아니라 버릇 없고 포악한 16세의 아이이다. 카이사르는 군인의 면모뿐만 아니라 철학자의 면모도 지닌 고독하고 준엄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 극의 빼어난 성공은 카이사르를 무대 위의 초인적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아량과 '본유의 도덕성'을 갖춘 설득력 있는 인물로 다룬 데 기인한다. 3번째 연극〈브래스바운드 대장의 변절 Captain Brassbound's Conversion〉(1900 공연)은 의무와 정의로 위장한 여러 종류의 위선에 대한 설교이다.

 

국제적 명성

〈인간과 초인〉(1905 공연)에서 쇼는 인류는 더 높은 삶의 형태를 향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명력' 운동의 최종 단계라는 자신의 철학을 피력한다. 이 희곡의 주인공 잭 태너는 여주인공 앤 화이트필드의 집요한 청혼을 뿌리치고 이러한 철학에 걸맞게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추구한다. 결국 잭은 인류의 존속과 운명이 앤과 다른 여성들의 생식능력에 달려 있으므로 그녀야말로 '생명력'의 강력한 도구임을 깨닫고 가엾게도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극의 비현실적인 제3막〈지옥에 빠진 돈 주안 Don Juan in Hell〉의 꿈 장면은 가극풍이며, 자주 개별작품으로 무대에 올려진다. 쇼는 유럽 대륙에서 극이 공연됨으로써 일찍이 극작가로서의 자리를 굳혔지만, 이상하게도 영국에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훨씬 뒤에 런던에서〈존 불의 다른 섬 John Bull's Other Island〉(1904 공연)이 공연되면서 에드워드 7세를 위해 특별공연을 한 뒤였다.

쇼는 계속해서 고급 희극을 통해 종교적 자각을 탐구했고 사회와 사회악의 결탁을 파헤쳤다.〈소령 바버라 Major Barbara〉(1905 공연)에서 구세군 소령인 여주인공은 자신과 등을 돌린 군수품 제조업자인 아버지가 죽음을 거래하긴 하지만 그의 원칙과 행동은 가장 높은 차원의 의미에서 종교적인 반면, 구세군은 대개 위선적인 대중의 참회와 자신들이 신랄하게 매도하는 양조업자·무기제조업자의 헌금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의사의 딜레마 The Doctor's Dilemma〉(1906 공연)는 보편적인 직업의 자기 보호의식을 대표하는 의료직에 대한 풍자이자 동시에 예술가 기질과 그것을 예술가의 업적과 구분할 줄 모르는 대중의 우매함에 대한 풍자이다.〈안드로클레스와 사자 Androcles and the Lion〉(1912 공연)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한 철학적 희곡으로, 종교적 찬양의 참과 거짓을 다룬 작품이다. 집단 공개처형을 선고받은 초기 그리스도교 집단을 통해서 보여준 주된 주제는 누구나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반드시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쇼의 걸작 희극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인기 있는 작품은〈피그말리온 Pygmalion〉(1913 공연)이다. 그는 이 작품이 음성학에 관한 교훈극이라고 주장했으며 반영웅적인 주인공 헨리 히긴스는 음성학자이지만, 이 작품은 사랑과 영국의 계급제도를 다룬 인간적인 희극이다. 이 극은 히긴스가 런던 토박이인 꽃 파는 소녀를 훈련시켜 귀부인 행세를 하도록 하는 과정과 이 실험의 성공이 몰고온 결과를 보여준다. 정확한 억양은 익혔지만 예의 바른 대화술은 배우지 못한 엘리자 둘리틀이 상류사회에 등장하는 장면은 영국의 극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 작품은 1938년에 영화화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쇼에게 안겨주었고, 뮤지컬〈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1956, 영화화 1964)로도 각색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작품

쇼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분수령이었다. 처음에 그는 극작을 그만두고 논쟁적인 소책자〈전쟁에 관한 상식 Common Sense About the War〉을 출판해 대영제국과 그 동맹국을 독일과 마찬가지로 비난하면서 협상과 평화를 주장했다. 그는 반전연설로 악명이 높아졌고, 많은 이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상심의 집 Heartbreak House〉(1920 공연)에서는 전쟁 발발 직전의 한 시골집을 배경으로 전쟁의 유혈에 책임져야 할 세대의 정신적 파탄을 폭로했다. '낙담시키는 비관주의의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으려고〈므두셀라로 돌아가라 Back to Methuselah〉(1922)라는 제목으로 쓴 5편의 연작 희곡에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AD 1920년에 걸쳐 진행된 극적 우화를 통해 창조적 진화라는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1920년에 잔 다르크 시성식을 본 쇼는 그녀에 대한 역사극을 쓸 결심을 했다. 이렇게 탄생된 걸작〈성녀 조앤 Saint Joan〉(1923 공연)에서 잔 다르크는 가톨릭 성자와 순교자로서뿐 아니라 실천적 신비주의자, 이교도 성자, 영감을 받은 천재가 결합된 인물로서 다루어진다. 조앤은 '교회와 법률이라는 강력한 힘 사이에서 파괴된' 탁월한 존재로서, 비극적 여주인공의 화신이다. 그녀의 죽음은 인류가 성자와 영웅들을 두려워하고 때로는 살해하기도 하는 모순을 보여주며, 인류가 두려워하는 높은 차원의 도덕성이 진화과정을 거쳐 인간의 보편적 기준으로 될 때까지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성녀 조앤〉에 대한 격찬은 1925년 노벨 문학상으로 이어졌지만 그는 수상을 거부했다.

후기 작품들에서 쇼는 자신의 탐구를 심화시켜 희비극적·비사실주의적 상징주의를 완성시켰다. 그후 그는 5년 동안 희곡은 쓰지 않고 1930~38년에 쓴 작품을 편집하는 한편, 백과사전적 정치 소논문인〈여성을 위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입문 The Intelligent Woman's Guide to Socialism and Capitalism〉(1928)을 썼다. 그뒤 발표한〈사과 수레 The Apple Cart〉(1929 공연)는 미래파 시각에서 쓴 고급 희극으로, 쇼가 평생 동안 지켜온 급진적 정치철학과 보통사람의 자제력을 불신하는 근본적인 보수성향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외 후기 작품들로는〈너무나 진실해서 선할 수 없다 Too True to Be Good〉(1932 공연)·〈바위 위에서 On The Rocks〉(1933 공연)·〈이상한 섬의 바보 The Simpleton of the Unexpected Isles〉(1935 공연)·〈제네바 Geneva〉(1938 공연)·〈선왕 찰스의 황금기 In Good King Charles's Golden Days〉(1939) 등이 있다. 전쟁 동안 극작을 중단했던 쇼는 전후 90대에도 희곡〈부자연스런 우화 Farfetched Fables〉(1950 공연)〈셰이크스 대 셰이브 Shakes Versus Shav〉(1949 공연)를 비롯해 초기에 보여준 날카로움의 흔적만이 엿보이는 백일몽〈왜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Why She Would Not〉(1956 공연) 등을 발표했다.

건방지고 불손하며 항상 자기과시적이던 쇼는 94세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쾌활한 기지를 발휘하여 줄곧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깡마른 체구, 무성한 턱수염, 멋진 지팡이는 그의 희곡만큼이나 전세계적으로 유명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중에 아내 샬럿이 지병으로 죽자 쇼는 더욱 전쟁의 궁핍함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그는 런던의 아파트를 떠나 1906년부터 살았던 고향 하트퍼드셔의 아이엇세인트로렌스에 있는 시골집으로 내려가 1950년 그곳에서 죽었다. 쇼는 17세기 이후 영국의 가장 중요한 극작가로서 당시 가장 뛰어난 희극작가 이상의 역할을 했다.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인간과 초인〉의 일부인〈지옥에 빠진 돈 주안〉,〈소령 바버라〉,〈상심의 집〉,〈성녀 조앤〉 같은 작품들은 당대의 다른 극작가들과는 견줄 수 없는 수준 높은 진지함과 수려한 산문체를 갖추었다. 그는 도덕적 열정과 지적 갈등 및 논쟁이 담겨 있는 극을 발전시켰으며, 풍속희극을 재생시키고, 상징적 소극과 이단적인 극을 과감히 시도함으로써 그의 시대 이래로 연극의 개념을 새롭게 형성했다. 몽상가이며 신비주의자인 쇼의 작품에는 도덕적 열정에 관한 철학이 스며 있다. 쇼는 스위프트 이래로 가장 신랄한 격문의 저자였고,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평론가였으며, 그당시 가장 탁월한 극비평가였다. 또한 정치학·경제학·사회학에 관한 비범한 연사이자 평론가였고, 가장 많은 편지를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대담한 비평적 관점을 많은 다른 관심분야에까지 확장하여 그가 살았던 당시의 정치적·경제적·사회학적 사상 형성에 기여했다.

S. Weintraub J. I. M. Stewart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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