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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05/04

모란공원의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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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논어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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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미국인보다 친미적인 한국인" 발언의 의미?

[안병진]의 제국의 질서 바로보기
필자는 제국적 질서의 핵인 미국의 정치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 창원대학교 국제관계학과에 재직 중이며 동시에 미국 진보의 요람인 뉴스쿨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히틀러를 피해 뉴욕으로 망명한 유럽의 진보적 지성인 한나 아렌트와 같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미국을 새롭게 이해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인보다 친미적인 한국인’ 담론의 숨겨진 함정
미국적 자유주의 내면화한 노무현 대통령
안병진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외교에 대한 사고에서 미국의 시선을 내면화한 정부관리와 지식인들의 한계를 통렬하게 지적한 바 있다. 지극히 당연한 관습헌법처럼 수십 년간 작동해온 미국적 사고방식을 이제 정부의 수장이 비판할 수 있을 만큼 한국 사회는 진보하고 있다. 사실 소위 IMF 위기 시절과 비교해보더라도 이는 눈부신 변화이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미국이 주도한 IMF 의 구조조정안에 대한 재협상론을 잠시 들먹였다가 사회 대부분의 세력으로부터 거의 역적 취급을 받은 바 있다. 반면에 이를 주도한 당시 현직 미국 대통령이던 클린턴은 가까운 측근에게 IMF의 구조조정안은 너무 가혹하고 공정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한 바 있다. 이것이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한국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하지만 노대통령의 통쾌한 지적은 사회과학자의 눈으로 보면 다소 논리적이지 않은 구석이 있다. 노대통령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지만 그가 염두에 둔 미국인의 시선은 사실상 그의 생각처럼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점이다. 복수의 시선들 중 두 가지 예만 들더라도 현재 미국은 부시로 상징되는 군사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 퇴행의 요소마저 있는 경향 대 클린턴으로 상징되는 시장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제국적 네트워크 지향의 경향이 서로 근본적으로 충돌하고 부분적으로는 서로 수렴한다.

바로 이점에서 위 노대통령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도하지 않은 함정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언론이 말하듯이 국제관계에서 현재 한국 사회의 주도적 정치세력 내의 주요한 대립은 노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자주파 대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친미파의 대립이 아니다. 오히려 상징적으로 거칠게 표현하면 부시의 시선을 내면화한 한나라당 대 클린턴의 시선을 내면화한 노대통령의 대립이다.

클린턴의 시선을 내면화한 노대통령은 한국 사회의 지형을 한 단계 진전시킨 자유주의 개혁가이다. 현재 노대통령의 뜻과는 달리 왜곡되게 이해되고 있는 동북아 균형자론은 중국, 북한과의 적대적 갈등을 강조하는 부시에겐 부담이지만 세계를 네트워크적 제국으로 부드럽게 통합하고자하는 클린턴(집권 후반기부터 현재)에게는 아시아에서 연착륙할 수 있는 장기적 전략이다. 아울러 노대통령이 야심 있게 추구하는 동북아 평화공동체와 그 한국 내 하부구조로서 지역혁신전략은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네트워크 전략이라는 점에서 클린턴이 못다 이룬 꿈과 일치한다.

노대통령이 집착하는 것으로 알려진 균형자 개념은 노대통령이 과거의 제왕적 대통령들과 달리 얼마나 미국적 자유주의를 내면화하였는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노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의 국내판 버전은 스스로의 권력까지 헌납해가며 입법, 행정, 사법간의 균형과 견제 논리를 제도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는 한국 사회를 제왕주의에서 공화주의로 바꾸는 획기적 실험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대통령의 국내판 균형자론은 위에서 언급한 신자유주의적 동북아 네트워크론이 그러하듯이 클린턴이 추진했던 신자유주의적 노동, 교육, 의료 정책과 함께 가고 있다.

마치 국제관계에서 자주파 대 친미파의 대립이 허상이듯이 신자유주의라는 보수주의 정책에 노대통령과 한나라당이 기본적으로는 합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 문제에서 주요 대립이 좌파 노대통령 대 우파 한나라당의 대립이라는 담론은 허구적이고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바로 이러한 국내외 문제에서의 뒤틀린 담론 지형에서 보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시선이 절박하게 요구된다. 필자는 사실 노대통령 보다 더 친미적인 지식인이다. 왜냐하면 본인은 미국을 사랑하고 본인이 과거 유학했던 뉴욕에 대한 묘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본인이 말하는 ‘미국’ 또한 단수의 미국이 아니라 복수의 미국 중 그저 하나의 미국일 뿐이다. 본인이 수용한 미국은, 노대통령이 인상 깊게 받아들인 미국적 균형자론이 부시적 제국주의나 클린턴적 제국을 넘어 보다 민주적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미국이다. 지금 이 가능성은 아이러니하게 과거 늙은 구유럽으로 불리던 지역에서 오히려 더 꽃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또한 친유럽적이기도 하다.

과거 80년대 진보를 이끌었던 인사들은 지금 대거 청와대 및 각계각층에서 맹활약하며 한국 사회에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마치 미국의 60년대 혁명이 지금의 강하고 혁신적인 미국을 만들었듯이 이들의 노력은 현재 현기증이 나도록 한국 사회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각성하고 그의 시선을 내면화하며 운동에 뛰어들었던 이들이 지금 21세기 전태일인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서 미국적 시선을 내면화하고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노동 문제뿐 아니라 의료, 정치 개혁, 지역 혁신론, 대학 개혁론, 동북아론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뒤틀린 담론의 지형에서 ‘참세상’ 의 창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신문이 단지 공허한 반대나 일국내 목소리가 아니라 지구적이며 리눅스적인 네트워크의 일부로서 기능하며 새로운 시선을 벼려내는 용광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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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 언론운동론 비판

 

4. 기존 언론운동론 비판 - 레닌주의, 히틀러, 김일성 등


  헤게모니에 대한 이론들이 혁명을 이뤄내지 못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달했다면 혁명에 성공한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구체적인 언론운동론이 발달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언론운동론들이 혁명 후 결과한 모습들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는지, 아니 심지어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부르주아 언론보다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는 적잖이 의심스럽다.


ㄱ. 레닌주의

  남한의 언론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언론운동론이라면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을 빼놓을 수 없다. 레닌이 아니라 레닌주의를 비판하려는 것은, 레닌이 러시아라는 구체적 상황 아래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언론을 활용한 방식 그 자체가 아니라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의 저작들이 경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교조이기 때문이다. 흔히 NPN으로 약칭하는 레닌의 전국적 정치신문론은 수많은 운동 세력들이 반복해서 따라했던 바 있고, 선전/선동의 이분법 또한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일반이 아니라 현실적 적용에서다.

  여기서는 레닌의 언론운동론을 당대의 상황과 연결지어 개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선전”과 “선동”이라는 용어의 차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들을 먼저 분류한 것은 러시아 맑스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플레하노프인데 그 차이는 다음과 같다.


선전 - 많은 내용을 소수의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선동 - 적은 내용을 다수의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그럼 이제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의 변천사로 넘어가자.


서클선전 - 러시아에서 노동운동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사회민주주의자(맑스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서클로 조직하고 선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당대에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있던 노동운동과 거의 결합하지 못했다.


경제선동 - 마르토프 등이 발표한 “선동론”에 힘입어 활발한 경제선동이 일어났다. 경제선동의 성과로 1896년 직물노동자들의 거대한 파업이 일어나게 되고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주의에 빠져든다.


전국적 정치신문 -  레닌은 1901- 1902년 사이에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조직)의 건설을 위한 구상을 했으며, 노동계급 신문의 공적 기능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스크라” 제4호(1901년 3월 13일)의 기고문에서 당과 신문의 연결에 관해서 논했는데, 신문은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주체의 네트웍을 통해서 당의 조직을 형성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즉 조직의 센터로서 신문을 논한 것이다. 당은 지역에서의 강한 정치적 조직을 필요로 했으며,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신문은 지역에서의 직업혁명군 양성에 일조했다. 레닌은 조직자로서의 신문을, 당 조직 구성원 간의 의사소통을 원할히 하며, 작업을 배분하고, 조직화된 노동을 공동의 결과물로 승화시키는 중심기구로 봤다. 지금까지 언론의 집단적 선전자, 선동자 등으로서의 기능에 조직자를 첨가시킨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 민주주의 형성을 3단계로 잡고, 그 가능성을 “종합적 정치의 노출에 관여하는 조직(자)”으로서의 언론에서 찾은 것이다.


신문조직이 당의 하부로 - 신문을 통한 당조직 건설이 어느 정도 이뤄지자 레닌은 신문조직을 당조직의 하부에 둔다. 그러나 신문에 대한 기본적 입장은 그대로 유지되는 데 “당의 신문에 대한 우위”와 “조직자로서 신문”이라는 두 가지 입장은 교조적으로 소련에 적용되면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우리가 비판적으로 살펴볼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소련의 레닌주의 언론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련의 레닌주의 언론관은 소련 민주주의의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 언론이 당의 노선에 따라 인민을 조직하는 기능으로 제한되면서 언론의 자유는 유명무실해졌던 것이다.


둘째, 한국에서 레닌주의 언론운동론 적용의 현실성

  레닌이 운동을 펼쳐나갔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짜리즘 전제정이었으며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로 프롤레타리아가 전인구의 2%에 불과했으며 높은 문맹률과 광대한 영토, 운동의 고립분산성에 의해 고통받던 시기였다. 반면 오늘날의 한국은 87년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했으며 반도체, 자동차를 중심으로 하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로 이미 노동자 계급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는 약 2500만명(노동자는 1300만)이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자해독률과 “한류 열풍”으로 대변되는 동아시아로 수출할 정도로 발전된 문화산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실제로도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이 한국 운동에서 실제 전술로서 구사된 것은 90년대 초반까지이다. 그러나, 여전히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을 고수하고 있는 운동세력이 군소하게나마 존재하고 또한 80년대 레닌주의의 세례를 받은 운동가들의 관념 속에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ㄴ. 나치의 선전론

  히틀러에 대해서 “언론운동”이라는 말을 붙이기는 어렵지만 그의 선전 이론은 가히 전설적이며, 언론운동가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환상을 던져주고 있다. 일단 히틀러,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zialismus:Nazi), 제3제국의 선전정책에 대해 알아보자.

  나치의 선전론에는 선전/선동을 구분하지 않고 선전으로 통칭한다. 일반적으로 나치의 선전에 대한 대중 최면에 주목하는 오해가 나타나곤 하는데, 실제로 나치가 생각한 선전이란 “현재의 경향과 신념을 강화시키는 것”이며 “감정뿐만 아니라 이성에도 호소하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정부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대단히 무능했으며 나치는 그러한 상황을 가장 잘 이용했다. 실제로 나치에 표를 던진 많은 이들은 나치가 자신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나치는 어떻든 물질적인 성과들을 대중들 앞에 내놓았던 것이다.

  물론 나치의 선전론에 있어서 대중최면도 무시할 수 없다. 발터 벤야민은 파시즘을 “정치의 미학화”라 불렀는데 주로 정치행사를 거대한 의식(儀式)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히틀러는 오후6시를 택해 거대한 스타디움을 꽉 매운 군중 앞에 선다. 대중의 시선은 히틀러에게 모이도록 무대가 구성되어 있으며 태양은 마치 후광처럼 히틀러의 머리 위에 드리운다. 군중심리와 함께 이런 연출효과는 청중들로 하여금 히틀러를 광적으로 지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치의 선전에서 중심을 이뤘던 것은 “민족공동체”와 “지도자”였다. 그것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라는 말로 요약되는데 박정희를 경험한 한국에서는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나치가 발흥했던 독일은 민주주의 헌법의 모범적인 사례로 불리우는 바이마르 헌정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때 여전히 한국에서 적용가능성이 존재함은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97년 대선 때 몰아친 박정희 광풍은 나치 선전의 한국적 재판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ㄷ. 김일성주의 선전선동론

  레닌주의 선전선동론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나치 선전선동론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그에 반해 김일성주의 선전선동론은 앞의 둘에 비하면 어느모로 봐도 격이 떨어지나 레닌주의 선전선동론과 나치 선전선동론의 결합이라 볼 수 있다는 점과 한국 운동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비판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주의 선전선동을 아리스토텔레스 수사법을 적용하여 논거발견술, 논거배열술, 표현술로 나누어 알아보자.


  논거발견술 -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김일성주의에서 사회주의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통칭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지배담론으로서 사회주의이다. 북한의 모든 사회적 결정들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목적아래 종속된다. 또한 북한의 사회주의는 일종의 전체주의로서 사회주의인데 이는 수령을 “뇌수”로 하는 사회유기체설에서 극대화된다. 이는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논거배열술 - 동어반복과 신화적 언어

  김일성주의의 논거배열방법은 동어반복적이며 신화적이다. 조금 희화화해서 말하자면 김일성주의의 내용의 절반은 김일성주의가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주체를 강조하지만 실제로 “주체”라는 어휘는 “수령”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언어의 마법적 사용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표현술 - 반복성, 대중성, 민족성

간단히 말하면 한자어보다는 고유어를(민족성), 어려운 말보다는 쉬운 말을(대중성), 같은 말을 계속 반복(반복성)하는 것이 김일성주의 표현술의 특징이다. 특히 반복성에 대해 말하자면 같은 말을 나열하는 것 뿐만아니라 정형화된 어구를 반복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는 월터 옹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서술한 구술문화의 특성과 유사한데 이러한 표현법은 한 마디로 외우기 쉽다는데 특징이 있다.

김일성주의 수사학의 특성은 나치보다 더 강화된 세뇌적 언어이며 언론구조에서는 레닌주의의 집중화된 언론을 보다 더 강력하게 집중화시키고 있다. 김일성주의 선전선동은 언론운동이라 볼 수 없고 독재적 국가권력을 전체주의적으로 유지하는 방식이라 보아야할 것이다.



5. 서유럽의 언론이론

  부르주아 언론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이 진행된 곳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었다. 아직 자본주의가 발달하지도 못한 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혁명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하는데 반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국가들에서는 오히려 노동자 계급이 계급으로 자신을 형성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당대의 보편적 인식에 반하는 이러한 현실은 유럽의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토대에서 상부구조로 경제에서 정치, 언론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고 그 이론적 실천의 성과물들로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 공론장 등에 대한 풍부한 성찰을 남겼다. 여기서는 이 이론들에 대해 개략적으로 알아보기만 하자. 여기있는 내용들은 그람시에서 일부분을 제외하고, 대부분 “제2대학 학술/학회 커리큘럼 자료집 제1판”에서 수정/발췌했다.

 

  ㄱ. 그람시

  “그람시”라고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헤게모니”가 떠오를 정도로 이와 관련된 풍부한 고찰을 남겼지만 실제로 그람시는 단순히 이론가만은 아니었다. 그람시에 대한 해석의 방향에는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그가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어중간함”에서 기인한다. 이탈리아는 서유럽의 국가이면서도 모순적이고 불균등한 자본주의적 발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후진성”에 주목하면 그람시는 “불균등 발전”에 대한 이론가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의 “선진성”을 중심으로 파악하면 그람시는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의 혁명”에 대한 이론가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그의 후기 저작 전체가 “옥중 수고” 즉 감옥에서 작성한 노트로 그것도 검열을 의식해 비유적이고 추상적인 어법으로 쓰여졌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람시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라고 제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그람시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헤게모니 개념부터 살펴보자. 그람시는 부르주아 지배는 단순히 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세계관,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대한 대중의 동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부르주아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헤게모니는 힘과 동의, 지배와 도덕적 지배의 배합을 통해 행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람시가 강제력이 동의의 본질적 구성요소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동의과 강제력이 유동적으로 결합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가는 단순한 억압기구라고 볼 수 없다. 국가는 강제력을 행사하는 기구라고만 볼 수는 없다. 국가는  대중을 문화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적이고 도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국가가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이유는 바로 시민사회의 존재 때문이다. 시민사회는 단순히 경제적인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상부구조이다. 이 상부구조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것뿐만 도덕적이고 지적인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가는 정치사회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다음의 그림을 참조하라.


 

 

외곽호

 

 

 

헤게 

모니 

 

참호

동의

 

힘, 권력

정치권력

강제력

 

시민사회

 

 

 

정치사회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이러한 시민사회의 존재 때문에 혁명의 전략 또한 달라져야 한다. 그람시는 혁명전략을 러시아혁명과 같은 국가권력장악전략인 기동전과 헤게모니에 기반한 혁명인 진지전으로 나눈다. 물론 현대 서구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시민사회가 거의 발달하지 않은 러시아에서는 기동전이 가능했지만, 시민사회가 두텁게 형성되어 있는 서구에서는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식의 진지전만이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었다.

  진지전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이 대중의 지지기반 위에서 최후의 정치적 공격을 가하기 이전 시기에 사회주의적 이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합의의 차원에서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려고 시도하는 단계에 상응한다. 따라서 진지전은 지배그룹과 직접 대결을 회피하면서 헤게모니의 지형 위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단계에 까지 미치지 않는 시민사회와의 전쟁을 의미한다. 즉 외곽호 내부에 있는 참호를 먼저 분쇄하자는 논리이다. 요컨대 단순히 정권과 물리적 권력의 탈취만으로 진정한 혁명이 성취될 수 없고, 먼저 시민사회를 장악함으로써 ― 즉, 헤게모니의 기반을 획득함으로써 ― 만이 사회주의혁명은 성공적 완결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람시의 다음의 말이 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사회 그룹은 정부의 권력을 획득하기 이전에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고, 사실상 이미 행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실로 그러한 권력의 획득을 위한 기본조건들의 하나이다.”


  ㄴ. 알튀세

알튀세는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를 정초하기 위하여 토대환원론, 경제주의, 목적론 등에서 벗어난 역사유물론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반헤겔주의, 반경제주의, 반주의주의, 반인간주의를 표방한다. 이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헤겔적 모순론의 극복이다. 알튀세는 헤겔의 변증법과 맑스의 변증법은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보는 것이다. 헤겔변증법은 ‘모순의 단순성과 보편성’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알튀세는 모순의 복합성과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모순을 하나의 기원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반대한다. 단순한 기원적 통일성에 기반하는 헤겔주의적 표현적 총체성 개념은 모순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며, 하나의 중심과 본질을 남김없이 포괄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는 맑스의 변증법에서 모순은 헤겔주의적 단순성을 넘어, 모순의 불균등 발전과 그들간의 응축과 전치로서 설명된다고 본다. 따라서 하나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여러가지 모순이 중층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중층결정)이다. 또한 사회 역시 여러 심급들이 서로 얽혀있는 복합체이며, 어떤 심급도 다른 심급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어떤 심급도 다른 심급의 본질일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알튀세가 위와 같은 설명이 갖는 상대주의적 위험을 피하기 위해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단서를 집어넣는다는 점이다. 이는 경제는 스스로가 언제나 지배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특정한 사회에서 어떤 요소가 지배적이 될지를 궁극적으로 결정해 준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알튀세는 “최종결정의 고독한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는데, 이는 최종심급이 궁극적인 원인, 실체, 본질은 아니며, 논리적으로 최종결정을 해야하는 그러한 시기가 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알튀세는 초기저작에서 이데올로기적 문제틀과 과학적 문제틀을 비판하면서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취한다(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하지만 후기(1967년 이후)에 들어서는 “주체를 생산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갖는 적극적인 의미를 해명한다. 알튀세는 이데올로기가 물질적 존재이며 주체를 질서에 편입시키는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위한 물리적 장치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ㄷ. 라클라우/무페

포스트맑스주의라는 개념을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맑스주의 이후의 맑스주의를 일반적을 뜻하는 말이겠지만, 일반적으로 포스트맑스주의라고 할 때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견해를 뜻한다. 이러한 이들의 견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담화’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을 그 이론적 배경으로 한다. 소쉬르의 언어이론에 따르면 기호와 실제대상은 자의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책을 책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어떠한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회적 적대와 연결시켜 보면, 사회적 적대라는 것 역시도 ‘실제적인 측면’보다는 ‘담화’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실제로 계급현실이 어떠한지와 실제 그것을 언어적 틀로 담아내는 ‘담화’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또 소쉬르는 기호는 기호사이의 차이값으로 인해 성립한다고 했다. 예컨대, 책이 책인 것은 공책이 아니기 때문에 책이라는 것이다. 이를 응용하면, 사회적 적대는 특정계급들 사이의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급들 사이의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라클라우/무페는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된 생산관계변혁을 위한 투쟁보다는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을 성취하기 위한 사회관계의 변형을 위한 담화적 조건의 창출’이 당면과제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어차피 담화적 투쟁이기 때문에 굳이 노동자계급이 수행해야한다는 필연성은 없다.


  ㄹ. 하버마스

  하버마스의 이론을 모두 살펴보는 것은 조금은 힘겨운 일이다. 그 이유는 하버마스가 자신의 이론으로 수용하는 사상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의 책의 뒤에 있는 참고문헌에는 서구사상의 웬만한 저작은 모두 모아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하버마스의 이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의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언어를 매개로 한 의사소통행위가 왜 사회이론의 출발이어야 하는지만 이해한다면 나머지를 이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하버마스의 이론적 목표를 천박하게나마 정리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언어가 매우 중요하며, 시민들이 언어를 통해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하고,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맑스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맑스가 노동을 중심으로 한 생산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한계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맑스의 생산패러다임을 의사소통행위에 기반한 상호작용패러다임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다양하다. 장은주나 장춘익의 글은 하버마스의 패러다임이 맑스를 대체할 수는 없지만, 그 보완일 수는 있다는 입장이다. 즉 맑스가 주체를 억압하는 물질적 조건(경제적 토대)를 변혁하려고 했다면, 하버마스는 주체의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문화적 조건(의사소통적 조건)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생각이지만, 하버마스의 이러한 생각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니체나 푸코식의 이론이 시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하는 실천적인 물음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반면 하버마스는 좀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것이 꼭 푸코식의 비판과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버마스식으로 경제적 토대의 변혁에 대해 무관심한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이다. 물질적 생산관계를 변화시키지 않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적 구조가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로 두가지 목표(물질적 생산관계의 변혁과 의사소통구조의 확보)를 설정해야 한다는 견해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가장 큰 이유를 ‘민주주의’의의 문제, 주체들의 자율성이 억압되었다는 문제에서 찾는다면 말이다.


6. 마치며

  자평하기에 서론에서 밝힌 목표 즉 대학언론운동의 이론적 과제를 밝히겠다는 이 글의 목표를 온전하게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언론이론 자체가 걸쳐있는 분야가 방대하며 철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언론학 등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요구한다는 말로 변명을 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의 실천이었던 언론운동들은 대중을 자신의 것으로 전취하는데 몰입한 결과,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당대의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는 언론의 현실태를 분석하는데 천착한 이들은 다만 하나의 해석으로만 자신을 자리매김했을 뿐이었다.

  글의 초두에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을 살펴본 것은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이론이 단순히 세상을 바꾼다는 목적합리성에 매몰된 것도, 현실의 분석에만 파묻힌 것도 아닌 고대 수사학에 필적하는 종합적이고 방대한 체계 즉, 오늘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속에서 대안적 세계를 창출할 수 있는 현실적이며 과학적인 운동의 방법들을 정립하는 것이다. 오래 전 어느 실천적 철학자가 남긴 금언은 아직도 우리의 좌우명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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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Karl Marz, F. 뚷딘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에서



 

* 제목설명 : “공산주의 당파의 선언”, 1848년 런던에서 발간된 30페이지 단행본의 제목


하나의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공산중의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이 이 유령을 잡기 위한 성스러운 모리 사냥을 위해 동맹하였다.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관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자신의 적수들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는 비방을 받지 않았을 반정부당이 어디 있으며, 더 진보적인 반정부 인사들과 자신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라고 낙인 찍는 비난을 되돌리지 않았을 반정부당이 어디 있는가?

두 가지 결론이 이러한 사실로부터 나온다.

공산주의는 이미 유럽에 모든 세력들에게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견해, 자신들의 목표, 자신들의 지향을 전세계 앞에 공공연하게 표명하여,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소문에 당 자신의 선언으로 맞서야 할 시기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매우 여러 국적의 공산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랑드르어, 덴마크어로 발표될 다음의 선언을 기초한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봉건 사회가 몰락하면서 생겨난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계급대립을 폐지하지 않았다.”


“수많은 자유를 단 하나의 인정사정 없는 상업자유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무기들을 버려 냈을 뿐만이 아니라, 이 무기들을 지니게 될 사람들도 낳았다. 현대 노동자들, 프롤레타리아들을 낳았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불가피하다.”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자리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는 것을 경멸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질서의 폭력적 전복에 의해 달성될 수 있을 뿐임을 공공연하게 선포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족쇄 말고는 공산주의 혁명에서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1. 선언은 왜 쓰여졌나!


그나마 남아있던 봉건적 잔재들이 하나둘 불타고,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그리고 자본주의가 도래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 자본가 자신들조차 끝없는 경쟁을 위한 끝없는 착취를 일삼아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1837년 프랑스나 스위스에 거주하는 독일 수공업자들이 만든 ‘추방자동맹’에서 급진적인 성원들이 독립하여 바이틀링을 지도자로 추대한 ‘의인동맹’을 조직한다. 이 단체는 독일의 노동자들과 수공업자들의 최초 비밀조직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동맹과 관계를 맺으며, 바이틀링파의 애매한 인도주의 노선과 대결할 필요를 느꼈고, 당시 동맹의 성원들이 우호적으로 생각하던 ‘진정한’ 사회주의 조류의 실체를 드러내 그 유파를 격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47년 동맹에 가입한 맑스와 엥겔스는 동맹을 개조하기로 합의한다.

1847년의 유럽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기근이 있었고, 이 기근은 곡물의 흉작으로 이어졌다. 굶주린 백성들의 항의와 투쟁이 폭발하는 가운데 자유주의적 정치 세력들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선거권 개혁 운동과 함께 다양한 유토피아적 평등주의 경향들이 일었다.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 4세는 주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으나, 의회 내 다수파인 부르주아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의회는 곧 해산하였다. 폴란드, 이탈리아, 아일랜드에서는 민족 해방 투쟁의 물결이 확산되고 있었고, 잉글랜드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이 상당히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집회장으로 불러냈다. 1840년대 말의 유럽의 위기는 자본주의와 함께 생겨난 사회세력들이 이전의 지배 집단인 봉건 세력들에게 저항하며 비롯된 것이었다.

의인동맹 대회는 1847년 6월에 런던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훗날 ‘공산주의자동맹 제 1차 대회’로 불리게 되었으며, 엥겔스의 노력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이 결정되었다. 1. 단체의 명칭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변경한다. 2. 단체의 구호를 ‘만인은 형제다’에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로 바꾼다. 3. 엥겔스가 작성해 둔 ‘공산주의자 신조 표명’을 동맹의 규약으로 삼기 위해 토의에 부친다. 엥겔스는 ‘신조표명’을 수정하여 「공산주의의 원칙들」을 작성했지만, 문답형식으로 된 이 문서는 동맹의 강령으로 삼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었다. 같은 해 11월 29일부터 열린 공산주의자 동맹 2차 대회는 강령 채택을 미루고, 그 집필을 다시 맑스와 엥겔스에게 위임했다.

맑스와 엥겔스가 1847년 말부터 1848년초에 브뤼셀에서 집필한 선언이 ꡔ공산주의 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ꡕ이다. 노동자 계급의 최초의 국제적 조직인 공산주의자 동맹이 무언가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을 예감한 1848년 “자신들의 견해, 자신들의 목표, 자신들의 지향을 전세계 앞에 공공연하게 표명하여,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소문에 당 자신의 선언으로” 맞선 것이 바로 ꡔ선언ꡕ인 것이다.



2. 선언은 무엇을 말했는가!

ꡔ선언ꡕ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운동(혁명운동)의 출현을 바라보면서 부르주아와 권력의 두려운 상태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탄생과 발전과정을 설명하고 자본의 탄생과 함께 태동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적대감의 증폭을 폭로한다. 봉건제와의 투쟁에 함께 했던 부르주아를 반동 계급으로 탈바꿈했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ꡔ선언ꡕ은 자본주의의 속내를 철저하게 폭로한다. 노동자 계급은 잔인하게 착취당하며 사적 소유를 바탕으로 한 모든 사회적 가치를 화폐로 환원시켜 비인간적 사회를 만들고 전쟁의 역사를 야기시켰다고 말한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노동자들을 대공장에 집중하고 분업의 시대를 열면서 생산관계를 더욱 밀착시키는 일정한 토대 위에 생산하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스스로 발전시킨 생산력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을 설명하며 자본주의 체제 전반의 철폐를 위한 길이 도래할 것을 예언한다. 또한 맑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가 자본을 생산하면 할수록 자본주의를 철폐할 혁명 세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창출해 왔다고 단언한다.

마지막으로 혁명을 준비하고 혁명의 시기 공산주의자들의 임무와 역할을 피력하고 반동적 조류에 대한 비판을 잊지 않으며 당당히 공산주의를 선언한다.

우리는 여기서 맑스와 엥겔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착취의 역사는 사적 소유의 역사이다. 다라서 사적 소유는 철폐되어야 한다. -맑스의 사적 소유에 대한 개념은 착취다- 또한 부르주아가 그러하였듯이 소멸해 가는 어떠한 지배계급도 자발적으로 역사의 무대를 떠나지 않는다. 오직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통해서만 타도될 수 있다.



3. 1848년과 2002년


앞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ꡔ선언ꡕ은 19세기 중엽에 역사상 처음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설명하기 위해 쓴 문서이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사람들인지가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고 유령처럼 소문으로만 입에 오르던 상황에 대처하여 그 사상과 사람들을 또렷한 말로 설명할 필요에서 생긴 문서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당시의 정황과 필요에서 ꡔ선언ꡕ을 집필하였다.

주된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유럽에 닥친 위기는 자본주의로부터 나왔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의 폐지’를 통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를 만들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폭력적 전복에 의해 달성될 수 있을 뿐’임을 공공연하게 선포해야 한다.

맑스와 엥겔스가 ꡔ선언ꡕ 집필 이후 죽을 때까지 한 일은 자신들이 도달한 결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노력은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에 개입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러한 사태들을 분석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보충하고 완성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의 폐지가 모든 인간의 자유로운 생활의 기초가 될 수 있는가? ꡔ선언ꡕ이 대결하고자 했던 상황은 지금 사라졌는가? ꡔ선언ꡕ이 발표된 지 15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이 두 가지 질문이 유령이 되어 전세계를 떠돌고 있다. ꡔ선언ꡕ은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가 무엇인지를 “선언”했을 뿐, 이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다.

2002년 현실의 모순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지는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참고 문헌

「공산주의 선언」, 김태호 옮김, 박종철 출판사, 1998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김세균 감수, 박종철 출판사, 1991

「서양사 강의」, 배영수 편저, 한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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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철] 명예퇴임 토론회

오세철 교수 명예퇴임 토론회 - 좌파운동의 반성과 모색

 

http://blog.naver.com/miavenus/60006229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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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이건희 저지 시위' 방어 특별호




http://www.alltogether.or.kr/2005new/newslist/list.php3?tb_name=news&section=news&ho_number=54-1

 

<다함께> 신문 5월 4일자 특별호

 

4면, 총 7개 기사

 

[1면]

 

고려대 당국이야말로 반지성적이고, 삼성재벌이야말로 폭력적이다
- [이 글은 ‘다함께’의 고대모임이 5월 3일 학내 대자보로 붙인 글이다.]

 

[2~3면]

 

삼성은 어떻게 ‘글로벌’ 기업이 됐는가?

 

기업의 대학 투자 - 공짜는 없다

 

대단하신 회장님, 편법 상속까지

 

고려대학생들은 왜 이건희 반대 시위를 했는가

- 삼성의 ‘무노조 신화’

 

[4면]

 

이건희 박사학위 수여 저지는 정당했다

 

민주노동당 논평
청와대·정부, 고려대 학생 꾸짖을 자격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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