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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대중이 돌아온다!> 댄 하인드 지음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080
대중의 지적 무능? 개인 공격 치중하는 언론 탓 (미디어오늘, 박새미 기자 | psm@mediatoday.co.kr, 2012-03-18  08:57:38)
[서평] 대중이 돌아온다
“타인에 대한 당혹스럽고 추잡한 뒷얘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성향은, 아역 스타들의 스캔들이나, 선남선녀의 섹스에 대한 원초적 매혹, 먼 지인의 갑작스런 죽음 같은 것에 몰두하게 만든다. 동료나 가까운 지인들이 주고받는 뒷담화에 비하면 유명인에 대한 가십 기사는 별것도 아니다. 그러나 ‘진지한’ 보도가 계속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상황에서, 언론매체의 다른 요소들이 그 부족한 자리를 대신 메우는 현상은 의외라고 할 수 없다.”
<대중이 돌아온다>의 저자 댄 하인드는 이처럼 말한다. 영국의 경력 10년의 출판인이자 '공공주문취재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언론개혁안 개발에 전념하고 있는 사회운동가인 그는 "전문가들이 국민의 마음에 세상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그려줄 것”이라는 모델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즉 전세계를 금융 위기에 빠뜨린 은행들의 범죄 행위, 대량 살상무기를 빌미로 일으킨 전쟁 등에 맞서 여태껏 우리가 신뢰하던 언론은 아무런 공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전세계인의 삶을 좌지우지할 국제적 의제보다 연예인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기 바쁜 황색 언론의 무기력을 꼬집는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공과 사를 뒤섞는 영미 언론의 경향은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은 폭로하면서 의사결정자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비밀로 덮어둠으로써 이 ‘고질적 실패’에 이바지한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브리트니 스피어스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주요 기사거리”라는 2008년 8월 AP통신 LA부지국장의 언급은 주요 언론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연예인의 공항패션이 매일같이 포털 1면을 장식하는 국내 언론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은 이처럼 엘리트 계급이 공식·비공식으로 행하는 정치적 의사결정의 본질을 국민에게 알리는 데 실패했다. 이는 단순히 연예인 사생활이나 가십거리 보도에 치중하는 경향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만은 아니다. 언론이 정치인 개인의 자질이나 정상회의에서 ‘무대 연출된 순간’에만 초점을 맞추는 동안, 선거운동에 기부되는 돈이 주요 정당의 정치 의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거의 파악되지 않는다고 하인드는 지적한다. 주요 언론이 대규모로 기부된 선거자금과 선출된 정권의 행위의 상관관계조차 진지하게 분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중요한 조정기구들의 본질과 역할이 보도되지 않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는 것이다.
선거자금 기부가 보편화되지 않은 우리나라는 이와는 사정이 조금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영미 언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에 압력을 행사하는 세력과 그런 압력에 취약한 언론의 구조적 특성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대체로 무시되곤 한다.
‘진지한’ 뉴스와 분석이 많은 독자·시청자의 관심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국민 다수가 무관심하거나 이해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진지한’ 뉴스가 세상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저자의 주된 포인트이다. 댄 하인드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진지한 ’보도의 신뢰성이 떨어질 때, 다수 국민은 이를 외면하고 일부는 오락, 연예인 뒷담화, 범죄 사건으로 관심을 돌린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치가와 언론인은 대중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지만, 대중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꼬집는다. 대중이 연예계 소식이나 탤런트 쇼 같은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현상은 그냥 가만히 앉아 남이 들려주는 믿기 힘든 얘기를 듣기 싫어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주류 언론이 전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환경에서 사람들이 하찮은 정보에 매달리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현상"이라고 반박했다.
영국 엘리트의 일부는 언론이 정치인에게 너무 적대적이고 이것이 정치를 불신하는 분위기를 부채질한다고 여긴다. 이 시각에 따르면 언론은 위선이나 허위의 증거를 찾으려고 혈안이 돼있는데, 그 방식이 민주주의에 해가 되거나 정치인 개인에게 지나치게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토니 블레어는 개인의 도덕적·스캔들 영역에 극심하게 경쟁적인 언론문화에 대해 “오늘날 언론은 사냥감을 놓칠세라 떼 지어 사냥하는 경향이 어느 때보다도 심하다. 언론은 포악한 야생동물처럼 사람에게 달려들어 평판을 갈가리 찢는다”고 주장했다.
저자 하인드는 "정치 관련 보도의 상당수가 냉소적이고 빈정대는 어조이며, 정치부 기자들이 직업 정치가를 경멸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기자들은 정치인들이 보도 과정을 조종하려 든다며 정치인의 말을 의심하고 날카롭게 따져 묻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이런 기자의 역할 필요한 측면도 있다. 문제는, 언론이 일개 개인으로서의 정치인은 가차 없이 대하면서 주요 정당들이 널리 알려진 토론과 논쟁에 제약을 가할 때는 이를 거의 반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는 것이라고 하인드는 제시했다.
저자는 또 언론에 대해 "보도 대상 기관의 통제자들이 주장하는 기본 가정의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고 비판했다. 특히 어느 이슈가 정치인 개인의 약점이나 합의된 범위로 한정된 당파적 이익 다툼을 넘어서며 확대되는 경우-즉 정치적 지배계급이 경제나 전쟁의 기본 전제에 관해 단결된 모습을 보일 때- 정치부 기자들은 대개 정치인의 행위나 견해를 국민에게 단순히 전달한다. 안 그러면 언론도 “엉뚱한 음모론”에 속아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 설령 정치권에 실제 음모가 있더라도 그렇다는 얘기이다.
언론은 개인의 능력과 품성에 문제되는 이슈에 관해서는 공격적이고 거칠게 검토하며, 엘리트 내부의 의견 차이에 천착하지만, 지배적인 합의 사항을 순응적으로 수용하는 경향과 공존한다고 저자는 본다. 취재의 대상이 되면서 뉴스거리도 제공해주는 엘리트층의 기본 자질을 거부하는 저널리스트는 경력도 쌓기 힘들고 자신의 작업을 홍보할 수단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은 매우 유약한 개인들이 모여 이루는 매우 막강한 직업”이라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급은 언론의 이런 행태를 잘 포착하고 있다.
저자는 "대중이 스포츠와 연예인에나 관심을 쏟는 것은 어쩌면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을 확보할 확률이 낮다는 이성적 판단에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고 재차 강조한다. 이어 "주류 언론의 편견, 누락, 얼버무리기는 우리의 자치 능력을 중요한 측면에서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람들이 몇 가지 핵심 이슈에 대해 확고한 의견을 갖고 있고, 이런 마음을 돌리려는 언론의 시도에 저항한다"고 봤다.
그럼에도 언론의 입장에선 동료 시민 대다수가 현 상태에 그럭저럭 만족하거나 가십거리에나 정신이 팔려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 손쉬운 일이기 때문에 '대중의 지적 무능'을 탓하고 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언론 보도에서는 국민의 견해는 가치 있는 기삿거리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대중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엘리트층의 편견을 재확인해줄 때나 국민이 엘리트층에 바라는 논의에 적절한 감독 아래 참여하고 있음을 증명할 때"가 아닌 한 말이다.
이에 저자가 내린 처방전은 '공공주문취재 제도'이다. 공공주문취재 제도는 공중이 특정 사안에 대한 취재를 주문하고 후원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취재된 보도는 주요 언론사를 통해 반드시 보도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기자가 1년 동안 평균 3건의 기사만 쓸 정도의 심층보도로 화제가 된 ‘프로 퍼블리카’를 더 확대해 실행하는 것을 떠올리면 쉽다. 선관위 디도스 공격이나 4대강 공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깊이 있고 전문적인 의견들이 트위터에서 140자에 얽매인 채 표류하지 않고 심층 취재 기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말해도 안전한 혹은 덜 치명적인 세상에 살기를 바란다. 공공주문취재 제도는 오류 없는 세상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안적 세상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될 수 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26101.html
바른 언론이 ‘대중’을 입 있는 ‘공중’으로 (한겨레, 장정일 소설가, 2012.03.30 20:04)
<대중이 돌아온다!> 댄 하인드 지음·노시내 옮김/마티·1만8000원 
[토요판] 장정일의 독서일기

시대의 변천과 함께 공중(公衆)은 자주 의미가 바뀌었다. 서양 정치의 기원인 그리스 시대에 공중은 집안 살림이라는 사적 경계를 벗어나 공적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바로 투표권을 가진 남성들 말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공화국의 이상을 내버리고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되면서부터 공중의 외연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제 공중은 한낱 군주의 임명을 받은 신하로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일 뿐이다.
공중의 확장은 영국에서 시작됐다. 찰스 1세를 처형시킨 공화주의자들은 시민들이야말로 세속적 권력의 원천이라면서, 스스로 국가 운영을 떠맡고자 했다. 하지만 200년이나 되는 지루한 영국의 선거 개혁 운동이 보여주듯이, 의회주권을 독차지한 귀족과 지주 계급은 피선거권자와 투표권자의 자격을 엄밀히 제한했다. 여성을 포함한 전 국민의 평등선거가 이루어진 1928년이 되기까지, 영국에서의 공중의 확장이란 일부 남성들만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그리스의 공중을 복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민주주의 국가는 대부분 전 국민의 평등선거를 법제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거권을 가진 투표권자는 자동적으로 공중인 것일까? <대중이 돌아온다!>(마티, 2012)를 쓴 댄 하인드는 미국의 사회학자 라이트 밀스를 따라 공중(the public)과 대중(the mass)을 구분한다. 대중은 자신의 의견을 구현하는 데 무관심하며, 수동적으로 국가 권력이나 언론의 홍보를 받아 삼킨다. 반면 공중은 자신의 의견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적극적으로 공론에 참여한다. 선거철마다 입후보자의 개인사나 매력에 끌려 한 표를 행사하는 것만으로는 공중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입이 없는 대중에게 멍석을 깔아 주는 것으로 입을 단 공중을 창출하는 대표적인 제도는 언론이다. 그런데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사생활을 캐고, 미확인 비행물체나 외계인의 사체를 쫓는 현재의 언론은 공중이 아니라 도리어 대중을 양산한다. 삼성에 단단히 재갈이 물린 우리나라 언론계의 예에서 보듯이, 언론사가 권력 엘리트와 기업 권력에 매수되었거나, 거기에 부합해야만 언론인으로 출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 권력과 기업의 권위를 위협하는 정보나 여론을 생략(묵살)하거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입에 맞는 전문가들의 힘을 빌려 거짓 정보를 퍼뜨린다. 언론이 점점 황색으로 변하는 것은 지적 능력이 낮고 진지한 것을 싫어하는 대중의 요구를 언론이 반영하는 때문이 아니라, “‘진지한’ 보도가 계속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상황”에서 위기에 빠진 언론이 택한 자구책이다.
영국과 미국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이 책을 보면, 언론 개혁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이 ‘공중’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의 견해가 자신에게 다시 정확하게 제시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은이는, 국민 대다수의 견해나 모종의 진실이 언론에서 왜곡될 때 민주(공화)주의의 지반이 붕괴되고 공동체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나아가 공론 형성이 가로막힌 개인은 연대나 정치행동이 자신의 복리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더이상 하지 못하게 되어 자기계발에 매진하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된다. 지은이는 일반 대중이 공중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대안 언론으로 시민이 기자나 자유기고가에게 직접 취재를 주문하는 ‘공공주문취재 제도’를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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