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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진화론과 진보의 패러다임 (진보평론 2009년 가을호,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 기념)

 재미있기는 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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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의 시선에 비친 진화론은?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9-17 오후 06:52:44)
진보평론 가을호 ‘진화론’ 특집
우생학·파시즘에 오용된 진화론 복원
“목적론에 갇힌 진보 ‘다윈’서 출구 발견

 
진보주의의 시선에 포착된 진화론은 어떤 모습일까. 진보의 필연성에 대한 과학적 보증자인가, 우승열패를 정당화하는 약육강식의 정글논리인가. 계간 <진보평론>이 다윈의 <종의 기원> 발간 150년을 맞아 진화론 특집을 선보였다. ‘다윈의 진화론과 진보의 패러다임’이란 주제 아래 5편의 논문을 묶었다. ‘진화’와 ‘진보’의 관계를 규명하고, 진보 담론에 녹아든 진화론적 사고의 빛과 그림자를 성찰하는 글들이다.
 
공교롭게도 진보주의와 진화론의 핵심 개념은 왜곡과 오용의 20세기를 함께 겪었다. 진화는 우생학과 파시즘에 의해, 진보는 스탈린식 생산력주의와 일당 독재에 의해 더럽혀졌다. 세기가 바뀐 지금 진보주의와 진화론이 직면한 처지는 확연히 다르다. 진화생물학이 유전학과 생명공학의 성취에 힘입어 모든 분과학문을 아우르는 통합과학의 중핵적 지위를 넘보고 있는 반면, 진보의 견인차를 자임하던 사회주의는 동구권 몰락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갈라놓았고, 엇갈린 둘의 운명은 또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최종덕 상지대 교수는 진보주의를 타락시킨 목적론과 본질주의를 비판하면서 다윈 진화론에서 진보의 출구를 모색한다. 최 교수에 따르면 진보는 ‘형이상학적 진보’와 ‘자유주의적 진보’, ‘사회적 진보’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한 지향점이 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진보에서는 ‘이데아의 세계’나 ‘종말’ ‘유토피아’가 진보의 목적지라면 자유주의적 진보에서는 자유의 확대가, 사회적 진보에서는 지배와 불평등의 해소가 곧 진보다.
 
문제는 진보가 특정한 목적지를 갖는 이상 언제든 현실 권력에 봉사하는 지배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농민의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던 캄보디아가 생지옥 킬링필드로 변하고, 노동자 천국을 표방하던 소련이 관료의 낙원으로 전락한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진보주의에서 목적지를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진보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게 최 교수의 주장인데, 그는 이 ‘목적 없는 진보’의 가능성을 진화론에서 발견한다.
 
다윈이 말했던 진화론의 핵심은 생명 자체가 지금도 변화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진화론은 기존 서구철학의 전통과 달리 생명종(種)의 고정된 본질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진화론은 반실체주의이며 반본질주의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가 보기에도 다윈의 진화론은 ‘목적론’과 무관하다. 다윈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선택’은 다양한 변이들 가운데 그때그때 환경에 가장 적합한 종이 선택되고 그렇지 않은 종은 점차 사멸하는 과정인데, 선택된 것은 우월한 특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당시의 우연적 환경에 더 적합해서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목적이나 지향점도 없다는 게 홍 교수의 설명이다. 마르크스가 다윈 진화론이 자연세계의 목적론을 일소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인간 사회에 대해선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못한다고 불평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홍 교수는 이런 다윈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한두 가지 이론적 성과에 의존해 사회와 인간의 진보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신중한 태도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회의 진보는 (변화가) 꾸준히 누적되면서 일어날 수 있지만, 진화와 마찬가지로 우연적 변화의 연속일 수도 있고, 진화의 방향이 필연적이지 않듯 사회의 발전 방향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는 다윈 진화론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에 눈길을 돌린다. 그는 150년에 걸친 진화 논쟁에서 드러난 대표적 오류로 우승열패와 직선적 진보의 신화를 꼽는데, 강 교수가 볼 때 다윈 진화론은 인내와 관찰이 이뤄낸 과학적 성과지만, 동시에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지배하던 시대의 산물이기도 했다. 특히 다윈 진화론을 계기로 ‘적자생존’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과학이란 권위의 옷을 입고 전세계적으로 확산됐던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본다. 실제 다윈주의를 사회현상의 해석에 적용한 사회다윈주의자들은 적자가 선택되고 부적자가 도태되는 자연법칙이 구현되기 위해선 모든 인위적 개입이 사라져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펼쳤다. 강 교수는 다윈의 진화론이 겪어야 했던 운명은 “진화론이란 담론이 지닐 수밖에 없는 물질성과 시대적 배경, 그 담론이 사회화되는 사회·정치·문화적 장의 필연적 효과인지도 모른다”며 “경쟁만이 진화의 유일한 메커니즘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생명현상을 경쟁과 협동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할 이론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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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과 이 시대 진보에 대한 사유 (참세상, 진보평론 / 2009년09월18일 11시17분)
진보평론 가을호,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 기념
 
필자들은 철학, 과학기술, 의학, 신학 등을 전공한 분들이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어 주제 접근, 전개, 결론의 차이와 그에 이르는 진지하고 풍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진보평론 특집을 따라가 보자. 근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근대를 만들면서 근대를 벗어났던 동시대의 거장들이 있다. 그들은 ‘진화’-‘진보’라는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다윈은 ‘진화론’의 체계적 대가로, 맑스는 ‘진보’의 급진적 혁명가로, 근대의 진보적 패러다임을 공유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급진화했다. 그러나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항상 그 대가를 요구한다. 텍스트들이 그들의 손을 떠났을 때, 그들 자신이 그러했듯이 지식은 권력 사회적 층위들과 중첩되며 새롭게 읽혀진다. 그러나 소위 대가들의 텍스트는, 그것이 가진 권위와 명성으로 더렵혀져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오해와 오독을 생산한다. 특히,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지적 혁명의 천재들은 그 이름으로 인해, 또는 그 권위로 인해 무수한 지적 사기꾼들과 지식-권력의 설계자들에 의해 인용되며 가공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사상과 문제의식, 지적 고뇌와 성실성을 읽어내는 대신에 그들의 지적 생산물을 주어진 권력 속에 삽입한다. 그래서 후세의 ‘-주의자’들은 위대한 지적 사기꾼들이 된다. 그 지적 사기를 피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특히, 그들이 한 시대를 지배했던 지배적 독단에 대항해 싸우고 지배의 메커니즘에 반기를 든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는 오늘날 누구나 들어서 알고 있는 이름들, 다윈뿐만 아니라 예수와 맑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오늘날 상품화된 사회에서의 ‘상품’이 되듯이, 맑스와 다윈 또한 이 길을 피하지 못했다. 적대자들에게 그들은 그들을 이용하는 자들과 지식-권력의 메커니즘 속에서 오해되고 적용되어 왔던 ‘악명’으로 존재하며 찬양자들에게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이해 속에서 변용되면서 나름의 창조성을 부여하는 ‘힘’이 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게 더럽혀진 이름은 ‘맑스’와 ‘다윈’일 것이다. ‘다윈’은 우생학과 골상학, 사회생물학, 파시즘에 의해 더렵혀졌고 ‘맑스’는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배외주의와 스탈린주의의 노동-생산력주의, 그리고 전체주의적 권력에 의해 더렵혀졌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오늘날 다윈만큼 잘못 이해되고 인용되고 적용되고 있는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윈만이 아니다. 맑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유독 그들의 이름은 더 격렬하게 더럽혀진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가장 분명한 적들, 가장 강력했던 권력의 대항자로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윈은 종교의 적이며 맑스는 자본이라는 새로운 체제의 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윈도 맑스도 언젠가 맑스가 말했듯이 ‘맑스주의자라는 의미에서 그 자신은 맑스주의자가 아니’며 ‘다윈주의자라는 의미에서 그 자신은 다윈주의자가 아닌지’도 모른다.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이면서 그가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종의 기원>이 출판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세계 곳곳에서는 다윈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윈에게 꼭 축복일까? 특히, 오늘날처럼 생물학이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내면서 다른 학문을 주도하고 산업화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윤을 생산하는 학문 영역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생물학자들은 생물학 중심으로 지식의 통합을 주창하고 나서고 있으며 BT산업은 ‘황금알의 낳는 거위’로 GNR혁명을 주도하고 그 흐름 속에서 다윈의 후예들로서 백만장자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다윈’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어쩌면 다윈이 없을 지도 모른다. 마치 오늘날 상업화된 교회에 예수가 없듯이 말이다.
 
다윈을 위대한 학자로 만들었던 것이 ‘진화(evolution)’로 번역된 ‘자연선택’라면 그를 오욕의 역사로 밀어 넣은 것도 ‘진화’로 번역된 ‘자연선택’이었다. ‘진화’와 ‘진보(progress)’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진보평론 41호의 글들은 진화와 진보가 동일한 개념이 아닐 뿐만 아니라 과학과 정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 속에서 착종된 변용들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강신익의 「진화-진보 담론의 빛과 그림자」는 다윈의 진화론이 아담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형성된 “시대의 산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세기 유럽의 시대정신을 이끈 선구”이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진화론의 변형과정을 “적자생존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과학이라는 권위의 옷을 입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과정으로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종덕의 「진보와 진화: 철학사의 조명」, 홍성욱의 「진화와 진보」, 김시천의 「동양학과 진화론-전통 유교담론과 진화론 내러티브의 진보적 재구성」, 이정희의 「헛발질하는 말들의 폭력-다윈을 재판하는 그리스도교의 헛발질에 대해」 등은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을 각기 자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제안을 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진보와 진화를 직접적으로 등치시키는 우리의 일상적 관념이나 맑스와 다윈 사이에 있었던 우화들에 대한 해체는 강신익의 「진화-진보 담론의 빛과 그림자」뿐만 아니라 홍성욱의 「진화와 진보」에서 생물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다루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는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의 이름으로 행사했던 다양한 오욕의 역사뿐만 아니라 진화론 내부에 존재했던 다양한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들을 체계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특히, 홍성욱은 진화와 진보의 관계를 다윈에서 시작하여 현대 생물학자들인 도킨스와 윌슨, 그리고 이에 대항했던 르원틴과 굴드를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홍성욱은 “인간의 본성은 결코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길들여 질 수 있”다고 하면서 “진화는 진보를 위한 한 가지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그의 진화 개념이 사용한 ‘자연선택’이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으로 변용되는 과정일 것이다.
 
강신익은 이 지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미 홍성욱이 보았듯이 유전자와 환경의 관계는 오랜 생물학의 역사, 자연선택(다윈주의)과 획득형질의 유전(라마르크주의)이라는 양자 간의 오랜 분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강신익은 이런 논란을 넘어서 서구제국주의의 논리를 제공했던 사회진화론과 미국과 독일의 우생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던 사회생물학, 그리고 하이예크의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의 논의를 고찰한다. 그리고 “경쟁만이 진화의 유일한 메커니즘일 수는 없다.”고 하면서 “이제 생명현상을 경쟁과 협동의 상보 작용으로 설명할 이론적 접근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곧 사실과 가치 사이의 특정한 괴리를 우리가 인정할 때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자연적 사실, 생존경쟁이나 유전 등을 사회적 현상이나 도덕적 법칙에 곧장 적용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가치는 자연적 사실이나 법칙으로부터 곧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강신익은 “가치는 과학적 사실이 발견되고 적용되는 과정을 제어한다. 과학은 사실과 가치의 관계가 진화하는 양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가치적 개념이 들어가 있는 ‘진보’라는 관념은 진화와 다르며 그 나름의 독특한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
 
최종덕은 「진보와 진화: 철학사의 조명」에서 바로 이런 진보의 역사를 철학사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는 ‘진보’라는 개념이 다면적이라고 주장한다. 진보는 철학사적으로, “형이상학적 시간관으로서 진보”, “자유주의로서의 진보”, “사회적 진보”, “진화론적 진보”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보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목적을 설정하고 있다. 또한, 특정한 목적에 기초한 가치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진화론적 진보를 주장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진화론은 반실체주의이며 반본질주의”이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적 구원관과 유토피아적 세계관’에서 분리된 ‘목적 없는 진화’로서의 ‘진화론적 진보’를 주장한다. 아울러 그는 “동양적 사유구조는 존재 자체가 항상 변화하는 진화존재론의 양상을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특색”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양에서의 진화적 진보의 개념을 모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김시천은 「동양학과 진화론-전통 유교담론과 진화론 내러티브의 진보적 재구성」에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이기주의에 대한 옹호로 읽는 오해를 비판하면서 맹자의 성선설과 생물학적 이타주의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과 도덕-윤리를 일직선으로 연결시키는데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맹자가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서 갈라져 나와 독특한 인간다움(humaneness)을 이루는 그 영역의 세계로부터 인간다움을 규정”하려 했다고 주장하면서 이 간극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옹호를 통해서 굴드나 르원틴과 같은 다윈주의 좌파의 작업을 설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진화, “생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여 보다 복잡하고 우수한 종류의 것으로 되어가는 일, 사물이 보다 좋고 보다 고도의 것으로 발전하는 일”이라는 뜻의 의미는 해체되어야 한다. 사실, 후자는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근대의 패러다임이었던 ‘진보’의 관념이며 이 둘을 연결하고 있는 ‘보다 나은 것, 보다 복잡하고 우수한 것으로 나아감’이라는 뜻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윈에게서 진화는 우연적이며 일직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정희는 「헛발질하는 말들의 폭력-다윈을 재판하는 그리스도교의 헛발질에 대해」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오랜 논쟁을 평가하면서 이 논쟁이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면서 “경전에 바탕을 둔 신학적 창조론은 바로 이 히브리 해방의 매트릭스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해방-정치적 담론이지, 결코 [자연]과학과의 관계 속에서 쟁론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를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의 논쟁이 아니라 “신학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해명”을 통해서 오히려 성서의 창조 서사를 “해방과 저항의 담론”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복적·해방적 상상력의 뿌리로 재영토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창조의 개념은 소외된 인간을 상정하기는커녕 양도할 수 없는 자립성을 인간에게 인정”하는 것이며 “히브리의 해방신학” “신권(身權)선언”으로 인권은 “신체의 권리”이다.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이 겪어야 했던 운명은 진화론이라는 담론이 지닐 수밖에 없는 물질성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그 담론이 사회화되는 사회-정치-문화적 장의 필연적 효과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생물학은 찬란한 성공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BT산업의 성공 속에서도,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관한 연구, 그리고 유전자의 형질이 표현되는 조건으로서 사회적 장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바야흐로 생물학은 우리 시대의 과학에서 전범(典範)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진화와 진보가 같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끊임없이 진화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진보를 묻는다. 급진주의자나 사회다윈주의자들 모두가 다윈의 후예를 자처해 왔으며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것은 어쩌면 다윈의 진화론이 열어주는 새로운 상상력의 공간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은 생물학과 사회학, 윤리학이 끊임없이 상호간섭적 관계를 가진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그들 사이에는 각각의 고유한 영역이나 관점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교섭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호 관계성이 특정한 관점과 분과학문적 가치들에 의해 포섭될 때이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특집의 필자들은 ‘생물학으로 환원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사회학을 생물학으로 환원하는 사회생물학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생물학의 성과와 상호 교섭적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최종덕은 이런 입장에서 ‘목적 없는 진보’로서의 진화론적 진보를 주창하고 있다. 이것은 진화의 목적론적 이념화를 경계하면서도 진화발생학의 성과를 수용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보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진보의 가치가 진화와 무관하다면 진보란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는 다시 가치와 사실, 본능과 양육, 유전자와 그것의 표현 사이에서 생명의 진화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연선택이 우연이라면, 그리고 유전자는 사회적 환경을 통해서 표현된다면, 그리고 이번 호의 특집에서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굴드가 비판했듯이 진화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단속평형斷續平衡’이라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은 어디에서 기원하며 어떤 방향성을 가진 것일까? 아마도 이 지점에서 우리가 사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화의 특이점들 속에서 생명현상을 다루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생명의 진화라는 연속적 내재성 속에서 윤리와 사회, 정치를 사유하면서도 그 특이점의 갈라짐 위에서 또한 고유한 특이성을 사유하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래로 이타주의는 이기주의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생명체의 진화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이 주류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글에서 이타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를 읽는 것은 왜일까? 단순히 오독이라고 해야 할까? 하이에크가 제시하고 있듯이 신자유주의 논리는 이기성 또는 이타성이 아니라 자생적인 질서 그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이기성과 결합된 이타주의를 추구했던 서구의 합리적 자유주의자들의 위험을 본다. 그들은 충분한 이타주의자들이다. 단, 그것이 내게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한에서 그렇다. 그것은 이기주의의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영민한 이기주의는 아닐까?
 
따라서 진보의 가치는 이기주의냐 이타주의냐의 논쟁에서 이타주의를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진화가 생성하는 이타성이 사회문화적인 가치로 전화하는 그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보의 가치, 이념은 이 분열의 지점을 통해서 한편으로 생물학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학이나 윤리학, 정치학과의 소통 속에서 각자의 고유한 층위들을 나누는 방식 속에서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점에서 우리는 진화가 말할 수 있는 진보의 가치와 말할 수 없는 진보의 가치는 무엇이며 진화의 특이점 위에서 생성되는 인간의 가치, 생명의 가치는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생명’이라는 화두 속에서 경계를 넘는, 이 사유의 여행을 이미 시작하였다.
 
특집 이외에도 비정규법과 용산 참사, 쌍용차투쟁을 둘러싼 2개의 다소 상이한 입장의 글을 실었고, 일반논문으로 통합적 학문연구의 필요성, 통섭에 대한 글과 재정은 건강보험에서 지출하고 서비스는 민간기관이 운영하는 장기요양보험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급진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격의 글인 민주주의의 급진화에 대한 글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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