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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와 <촛불, 어떻게 볼 것인가>, <미네르바의 촛불>



‘촛불 1돌’에 프리즘을 대다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4-23 오후 02:10:47)
책 출간·토론회 잇단 준비
대중 낙관론·반정치성 지적
생명정치 의미 높은 평가도

 
1987년 이후 최대의 ‘정치적 동원’으로 기록될 ‘2008년 촛불시위’ 1년을 앞두고 촛불의 의미를 성찰적으로 곱씹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2008 촛불’의 의미와 동학을 분석한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는 가운데, 진보 시민단체와 연구단체를 중심으로 촛불의 성과와 한계를 되짚는 토론회도 준비되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찬양론이 대세이던 ‘촛불 담론’의 폭이 눈에 띄게 넓어졌다는 점이다. 1년이란 시간이 사건의 규모와 스펙터클에 압도돼 있던 연구자들에게 적절한 ‘시점의 거리’를 확보할 여유를 가져다준 덕인지, 체험과 공감에 바탕한 이해적 서술보다는 거리두기를 통한 비판적 논의들에 힘이 실리는 형세다.

  
이런 흐름은 최근 1~2개월 새 출간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와 <촛불, 어떻게 볼 것인가>(울력)에서 확인된다. 앞의 책이 운동론적·정치적 비판에, 뒤의 책이 철학적 성찰에 무게를 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도달하려는 궁극이 ‘탈신화화를 통한 촛불의 전화와 도약’이란 점에서 일치한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가 펴낸 <그대는 왜…>는 촛불시위에 내장된 ‘반(反)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했던 기왕의 비판론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다. ‘촛불의 낙관주의에 대한 어떤 우려’를 쓴 백승욱 중앙대 교수는 ‘광장의 저항’이 대중의 각성과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점을 2008년 촛불의 가장 큰 한계로 꼽은 뒤 “7·8·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진 1987년의 경험만큼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기존 촛불 담론의 ‘대중 낙관론’을 직접 겨냥했다. 촛불은 “이명박 정부와 부르주아를 향해 ‘쾌락의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중간계급의 행동”이었으며, “여기에 불을 붙인 존재는 바로 이들 중간계급의 아들딸들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촛불 시민’들이 요구했던 것은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기에, 촛불 역시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만들고 혁명적 주체를 구성해낸 ‘진리적 사건’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촛불시위의 ‘순수성 강박’을 꼬집은 이상길 연세대 교수는 정치를 ‘불결한 것’ ‘오염된 것’으로 바라보는 정치적 상상력의 경계를 옮겨놓지 않는 한 촛불의 약속은 성취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촛불 주체들의 의지가 투표와 일상적 조직행동으로, ‘순수하지 않은’ 시위들에 대한 지지로, 그리고 ‘시민도 못 되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와 철학 연구회가 엮은 <촛불, 어떻게…>는 촛불에 대한 긍정론과 비판론을 비교적 균형 있게 담아냈다. 촛불의 생명정치적 의미를 높이 평가한 글(김상봉·박병섭 )이 있는가 하면, ‘욕망 정치론’과 ‘다중지성론’에 자리잡은 대중에 대한 지나친 힐난과 신비화를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나종석·박구용), 대중들의 참여가 분산적·일회적으로 이뤄짐으로써 저항의 터전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는 진단(권용혁)도 있다.
 
다만, 선우현 청주교대 교수는 “2008년 촛불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난립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넘어 지나치다 할 만큼 낙관적 기대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며 촛불에서 나타난 참여자의 능동성과 수동성, 성찰과 자기비판을 통해 제어되지 못한 이해관계와 욕망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촛불 1년’을 앞두고 쏟아지는 책들이 촛불의 성과와 한계를 냉정하게 인식함으로써 지리멸렬한 국면을 뚫고나갈 동력을 얻고자 한다면, 시민단체들이 주최하는 토론회에선 ‘촛불 시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려는 시도가 주목된다. 28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참여연대·참여사회연구소가 주최하는 ‘촛불 1년,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토론회에는 ‘촛불시민’ 3명이 발표자로 참석해 연구자, 시민단체 활동가와 함께 집단토론을 한다. 행사를 조직한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시민들은 촛불의 주역이었으면서도 그에 대한 평가의 자리에서는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으로 머물러 왔다”며 “그들이 원한 것이 무엇이었고, 어떤 기대를 품었는지, 1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공유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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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기동전, 촛불의 진지전 (시사IN [85호] 2009년 04월 27일 (월) 16:52:21 시사IN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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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촛불은 어두운 곳을 밝히지 못했나 (시사IN [85호] 2009년 04월 27일 (월) 14:30:34 이오성 기자)
촛불은 기적인 동시에 트라우마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가장 많은 이가 정치적 행위를 벌였다는 점에서 기적이고, 그 에너지가 일순 사그라졌다는 점에서 트라우마였다. ‘촛불은 과연 무엇이었나’를 자문하는 논의가 뜨겁게 분출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서 촛불은 일순 흔들린다. ‘왜 비정규직 문제나 용산 참사 때 촛불은 그렇게 미약했을까?’ ‘왜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공정택 후보가 승리했을까?’ ‘촛불집회의 탈정치적 분위기는 무얼 말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2008년 촛불의 한계를 과감하게 지적하고 나선 이들이 있다. 최근 출간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를 통해서다. 앞다투어 촛불 예찬에 나선 지난 비평들과 달리 촛불에 거리두기를 시도한 책이다.
 
촛불집회의 전개 과정에서 놀라운 점은 그토록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올 수 있었던 점이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와서 저항을 했음에도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담론도 체계적으로 형성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백승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학계에서 운동권, 그리고 저널리즘에서 누리꾼에 이르는 2008년의 불문율 가운데 하나는 ‘촛불을 사랑하라’는 명령이었다. 모두가 촛불을 사랑했다. …그러나 촛불 이후 우리 사회가 진보하기는커녕 촛불이 과연 있기나 했던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더욱 악화되는 현실 앞에서 그저 쓴웃음만 짓게 할 뿐이다.”(정용택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회원)
 
실제로 담론은 물론이고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도 촛불은 그 엄청난 열기를 반영할 만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촛불 지지자들이 가장 좌절했던 사건 중 하나가 지난해 7월30일 치러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공정택 후보가 당선한 일이다. 당시 촛불 시민에게 뜨거운 지지를 얻은 주경복 후보는 근소한 표차로 떨어졌다. 강남구·서초구·송파구 등 강남 3구에서 공 후보가 크게 앞선 탓에 ‘강남 몰표의 승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탈정치’ 징후를 포착한 이들도 있다. 가령 <88만원 세대> 공저자 박권일씨는 “MB는 꼴 보기 싫어하면서도 정작 교육감 선거에는 투표하지 않았던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 그것이 진짜 원인일 듯하다. 건조하게 말해서, 이들에게는 MB를 향한 분노보다 교육감 선거의 기회비용이 더 컸다”라며 정치 냉소주의가 창궐할 것을 염려했다. 실제로 당시 촛불시위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이 20%까지 떨어지는 와중에도 한나라당 지지율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MB OUT’ 구호가 ‘야당 지지’로 이어지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정치 이야기만 꺼내도 회원을 ‘강퇴’시키던 메이저리그 야구 동호회나 패션 카페 등이 촛불집회에 나온 것은 사실 정치적으로 뜻 깊은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런 촛불 시민 상당수가 여전히 현실 정치를 깊이 혐오한다는 점이다. ‘민주당 재수 없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설치지 마라’로 집약되는 다음 아고라 분위기는 오프라인 촛불집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확성기를 통해 집회 참가자를 선동하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민중운동 단체 ‘다함께’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택광 교수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이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립구도는 ‘좋은 정치 대 나쁜 정치’라기보다 ‘정치가 대 국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민이 정당정치 내로 들어가서 자기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와 국민의 힘 겨루기로 촛불집회를 파악하는 경향이 다분했다”라고 분석했다.
 
이런 ‘탈정치화’ 경향은 시위 내내 ‘비폭력’ 구호와 맞물리면서 더욱 깊어갔다. 예컨대 촛불집회에서 드라마틱한 순간 중 하나였던 6월10일 ‘명박산성’ 점령 때만 해도 그랬다. 당시 명박산성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참가자 사이에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산성을 넘는 순간 폭도로 몰릴 테니 그만두자는 쪽과, 산성 자체가 폭력인데 왜 가만히 있느냐는 쪽으로 갈렸다. 격론 끝에 스티로폼을 쌓고 컨테이너 위에 올라가 깃발을 흔드는 것으로 이날 집회의 대미를 장식했지만, 이들에게 명쾌한 정치적 선택지는 없었다. 유영주 인터넷 매체 ‘참세상’ 편집장은 “산성을 넘어야 한다는 절박함은 강렬했지만, 우리에게는 장벽을 넘은 다음 뭘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100만명이 모인 날 밤, 시민들은 대안 부재에 회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토로했다. 6월10일 이후 이명박 정부는 강경 진압을 펼쳤고, 시위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촛불의 또 다른 ‘어두움’은 촛불이 비정규직과 용산 철거민 등 사회 약자가 있는 곳을 밝히지 못했다는 데 있다. “비정규직 이슈가 촛불에 묻히는 걸 보면서 절망스러웠다”라는 김경욱 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의 말은 진보 진영 내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10년 뒤 광우병을 일으킬 수 있는 쇠고기 수입 반대에는 그렇게 열정적인 시민들이 당장 생존권을 박탈당한 비정규직 문제에는 의외로 차가웠다. 촛불은 아름다웠지만 계급 문제에 대해서는 무력하고 둔감했다”라는 이랜드 노조원의 말도 듣는 이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혹자는 이를 통해 촛불 시민의 ‘정체성’을 파악하기도 한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비정규직 노동자 여러 명을 인터뷰한 결과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들을 찾기 어려웠다며 이렇게 말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노동 형편이나 삶의 지위만 한국 사회에서 주변부인 것이 아니다. 촛불집회에 대한 인식이나 참여 역시 주변부였다. 촛불집회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결코 참여할 수 없는 이들도 있다. 내가 촛불집회 참석자 상당수가 중산층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 게 그때부터다.”
 
여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촛불시위의 주된 참가자는 여성이었다. ‘촛불 소녀’가 그랬고, ‘82cook’ ‘소울드레서’ 따위 참여 단체가 그랬다. 하지만 촛불은 여성 내부의 불평등은 비추지 못했다. 은수미 연구위원은 “촛불집회에 나올 수 있는 여성은 하루 12시간씩 일해야 간신히 월 100만원을 손에 쥘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 중산층 여성은 되어야 그 시간에 촛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촛불집회에 여성이 거론되는 건 강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촛불이 비추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어디인가를 보여주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촛불에 대한 이런 염려는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 동의하는 일부 학자의 것만은 아니다. 촛불의 스펙터클을 ‘긍정적으로’ 기록한 책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에서도 차병직 변호사는 “촛불집회 평가 작업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과도할 정도의 상찬 일색이었다. …우리 학자들은 시민권이 발동되는 역사의 현장을 구경하고 감상할 줄만 알았지. 정확히 평가하고 다수가 수긍할 만한 지침이라도 제시했는가”라며 촛불과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지식인들이)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는 대중 자율성의 낙관적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그 자율성이 넘어서지 못하는 경계들을 지적하고 그 한계를 드러냈어야 했다”라는 백승욱 교수의 지적과도 궤를 같이한다. 이런 지적은 결국 2008년 촛불의 의의를 새롭게 환기해준다.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촛불의 양질 전환’을 기대하는 이들이다. 촛불이 비정규직을 외면했다는 지적에 대해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애초 가족 이기주의로 시작한 미국 쇠고기 문제가 정부의 책임을 묻는 공공성 영역으로 확장됐듯이, 비정규직 문제도 사라지고 마는 게 아니라 앞으로 다른 사회 의제와 결합해 큰 이슈가 될 것이다”라며 낙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신진욱 교수 역시 “하나의 저항 행동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짊어진 문제를 다 담으려는 건 무리다.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다. 오히려 쇠고기 문제 때문에 거리에 나온 시민 중 일부가 추후 기륭전자 투쟁이나 미디어 공공성 문제에 대해 후원금을 내는 등 변화된 양상을 보이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라며 촛불시위를 성급하게 재단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신 교수는 특히 촛불집회에 참가한 중산층에 대해 해석을 달리한다. “촛불시위 참여자를 분석한 통계를 보니 지난 선거 때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찍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그들은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뉴타운 공약에 반대했다. 이들에게 이기적 중산층 이미지를 덧씌우는 건 정치적으로 옳지 못하다”라는 게 신 교수의 의견이다. 일부 비평가의 지적처럼 촛불 시민이 ‘부동산’과 ‘내 새끼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소시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촛불은 ‘청산’ 대상이 아니다. 촛불은 보이지 않는 ‘무형 자산’을 많이 남겼다. 윤여일 ‘수유+너머’ 연구원은 지난해 ‘레디앙’에 기고한 글에서 “아고라를 통해 국민이 사회 이슈를 학습하면서 뉴라이트, 조·중·동 등 우리 사회의 권력 관계에 대해 총체적으로 읽어내기 시작한 점이 중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은수미 연구위원도 “불과 2~3년 전만 해도 파업 노동자에게 욕설을 퍼붓던 ‘아고라’ 누리꾼이 지난해 화물연대와 YTN·MBC 노조의 파업이 정당하다며 지지하는 걸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라고 털어놓는다. 민노당의 한 관계자도 “촛불이 아니었다면 의료 민영화나 공교육 문제 등에서 진보 정당이 목소리를 높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김상곤 후보가 당선한 것도 그동안 축적된 촛불의 힘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이택광 교수도 “그동안 정치적으로 배제돼 있던 10대나 직장인 여성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한계를 느끼고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왜 촛불을 들었는지, 그들을 대의하는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게 지식인의 몫이다”라고 지적한다.
 
결국 양쪽의 생각은 비슷하다. 어찌해야 촛불의 힘이 구체적인 정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촛불이 계속 타오르기를 기대하는 이라면 다음과 같은 신진욱 교수의 생각에 희망을 걸어야 할 것 같다. “촛불은 워낙 스펙터클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은 촛불이 꺼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흩어진 것뿐이다. ‘언론소비자주권연대’ ‘진실을 알리는 시민’ 등 촛불집회 이후 새로 생긴 운동단체가 무척 많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흩어진 이들이 ‘촛불 민중’으로 다시 모여 새로운 정치적 힘을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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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패배했다고 말하지 말라 (참세상, 최인희 기자, 2009년05월13일 18시10분)
[새책] <미네르바의 촛불>, 조정환, 갈무리
 
지난 1년 동안 한국사회를 휩쓴 '촛불'은 시위, 축제, 저항으로서만의 촛불은 아니다. '조직적이지 못한' 촛불을 비관했던 일부가 촛불시위의 거대함을 체험하면서 보인 반응은 거칠게 두 가지다. 진정한 민주주의, 혹은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라고 칭송하며 받아들이거나, '도대체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며 머리를 감싸거나. 그리고 1년이 지나 촛불이 수그러들기 시작하면서 이들 일부는 짐짓 냉정하게 '촛불의 모순' 또는 '촛불의 실패 원인'을 평가하고 있다.
 
자율주의 학자인 조정환은 촛불에 과감하게 '봉기'를 붙였다. 이 책에선 직접행동에 대한 찬사와 더불어 촛불 이후 쏟아져 나온 이른바 '냉소주의적 촛불론'을 전면 비판하고 있다. 소위 '진보 엘리트'들이 촛불을 대상화하면서 내리는 해석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경찰, 법정, 감옥을 잇는 국가의 물리적 폭력과 대면해야 했던 촛불은 이제 자신에 대한 정신적 환멸과 해석의 폭력 앞에 직면했다. 그 환멸의 시선과 해석적 단죄가 이른바 '진보'를 자임하는 엘리뜨들로부터 나올 때 촛불은 역사와 사회로부터 총체적으로 추방당하는 셈이다."
 
촛불을 사회정치적 차원과 존재론적 차원으로 나누어 본다면 최소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촛불은 영원하고 승리한다"고 자신한다. "언제나 삶을 인도하는 것은 촛불이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것은 이 존재론적 촛불, 영혼의 촛불을 가시화하고 사회하는 행동이다"라는 찬사도 이어진다. 이의 근거는 이 책이 밝히고 있는대로 맑스의 노동이론, 푸코의 삶권력론, 들뢰즈의 잠재력론, 네그리의 다중론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70년대 재야운동, 80년대 민중운동, 90년대 시민운동과 다른 촛불운동의 특질을 연구한 결과기도 하다.
 
이는 "촛불이 폭발한 지점은 바로 이(FTA, 민영화) 자본순환의 고리에서였다. 촛불은 생명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는 자본의 세계화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쇠고기를 기폭제로 하여 터져나온 것이다"에서도 드러난다. 촛불봉기가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혁명'이라며 지난해의 촛불을 "우리는 아직 아무 것도 쟁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미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고 요약하기도 했다.
 
"촛불은 전 지구적 평화를 갈망하는 삶정치적 성찰의 무기이며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깃든 혁명적 불빛이다. (...) 생명이 영원한 만큼 촛불도 영원하다" 같은 애정과 희망이 일관되게 묻어나는 책. 2008년 3월부터 지난 달까지 하루하루 상세히 기록된 책 말미의 '촛불봉기 일지'도 돋보인다. 저자의 견해대로 촛불이 '혁명의 징조'이자 '자율적 봉기'이건, '실체 없는 환상'이자 '유령이거나 광기'로 불리건, 촛불 1주년인 현재에 다시금 '촛불논쟁'의 중심이 될 조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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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자율적 주체의 봉기” “중간계급의 ‘욕망 정치’”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5-14 오전 10:11:32)
조정환-이택광 온라인 논쟁
조 대표 “진행중인 승리” 이 교수 “실패한 행동”
저서 ‘미네르바의 촛불’ 계기 블로그로 4차례 공방 

 
“촛불이라는 판타지 너머의 실재를 직시하라.” “촛불이 판타지라는 당신 생각이 판타지다.”  
‘2008년 촛불’을 둘러싼 논쟁이 온라인을 달구고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와 도서출판 갈무리의 조정환 대표가 논쟁의 두 당사자다. 촛불의 성격을 각각 ‘욕망의 정치’(이택광)와 ‘자율적 봉기’(조정환)로 규정하는 이들의 견해는 촛불을 둘러싸고 형성된 진보적 담론 지형의 양 극단에 위치한다. 그만큼 이해와 공감의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표면상 싸움을 ‘도발’한 것은 이 교수다. 그는 지난 5일 자신의 블로그(http://wallflower.egloos.com)에 글을 올려 조 대표의 책 <미네르바의 촛불>에 대해 “정교한 분석이라기보다 (자율주의 정치이념의 우월성을 강변하는)정치 팸플릿의 느낌”을 풍긴다고 꼬집었다. 그러자 이틀 뒤인 7일 조 대표가 자기 블로그(http://blog.daum.net/nalsee)에서 이 교수의 비판을 “촛불을 유령이나 광기로 보는 조선일보의 시각과 다를 게 없다”고 반박했고, 이를 계기로 비판과 반비판이 꼬리를 물면서 일주일 새 네 차례의 날선 공방이 두 사람의 블로그를 오가며 펼쳐졌다.
 
12일 현재 논쟁의 초점은 이 교수가 독일 문예비평가 발터 베냐민의 도시경관 분석에서 빌려와 촛불 분석에 활용한 ‘환등상’(phantasmagoria·판타지) 개념이 본래의 현실비판적 함의를 담고 있는지에 맞춰져 있다. 요컨대 베냐민이 근대 도시의 풍경을 ‘환등상’으로 묘사할 때는 ‘허상’이란 의미와 함께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동시대인의 ‘유토피아적 열망’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 교수는 단지 ‘허상’과 ‘환상’이란 의미로만 사용하고 있지 않느냐는 게 조 대표의 생각이다.
 
하지만 대립의 지점들은 이것 말고도 많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촛불 참여자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다. 조 대표는 촛불시민을 ‘내적인 차이를 유지하면서 적극적 소통을 추구하는 자율적 주체들’로 규정한다. 대중들의 능력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 교수는 이들에게서 괴담과 유사과학에 휘둘릴 수 있는 “일정한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본다. 이런 그의 시선에 포착된 촛불의 주역은 이명박 정부를 향해 ‘우리도 부르주아가 누리는 쾌락에 동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중간계급과 이들의 아들딸”이다.
 
촛불의 ‘결과’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세우고 혁명적 주체를 만들어낸 사건으로 보기 어렵다”는 진술에서 드러나듯 이 교수에게 촛불은 사실상 실패한 “중간계급의 행동”이다. 그러나 조 대표가 볼 때 이런 이 교수의 관점은 눈앞의 성과물이 있느냐 없느냐로 성패를 따지는 ‘군사주의적 오류’에 빠져있다. 그에게 촛불은 참여자들이 ‘삶을 가꾸고 갱신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진행 중인 승리’다.
 
각자 의지하는 이론적 배경도 차이가 있다. 대중의 자율성과 자기해방 능력을 신뢰하는 조 대표의 논의가 네그리의 다중론과 집단지성론에 기반하고 있다면, 모든 정치·사회적 실천을 관통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욕망의 정치’에 주목하는 이 교수는 라캉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논쟁은 조 대표가 “틈 나는 대로 쟁점 주제들을 연재형식으로 다루고 최종적으로 그것들을 하나의 글로 묶거나 재서술하겠다”고 밝힌 데다, 이 교수 역시 “필요할 때마다 조 선생의 비판에 답변을 올리겠다”는 입장이어서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관전하는 블로거들 역시 두 사람의 게시글에 질문이나 훈수성 댓글을 달며 선전을 독려하고 있다.
 
이 논쟁에 대해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는 “촛불에 대한 담론이 현상기술의 차원을 넘어 이론적 분석과 효과적 저항 전략을 모색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촛불이 놓여있던 정치·사회적 맥락이나 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경향들에 대한 고려 없이 촛불을 하나의 동질적인 현상으로 몰아가려는 획일성이 엿보인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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