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데이빗 소로, <시민불복종>

   

‘닫힌 귀’에 불복종할 양심 (한겨레, 박혜영 인하대 교수·영문학, 2009-06-19 오후 07:31:43)
시대를 읽는 문학 /
 
조용하고 아름다운 월든 호숫가에서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자급자립의 소박한 삶을 꿈꾸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2년 만에 다시 마을로 내려오게 된다. 당시 미국은 노예제 폐지 논쟁과 미국의 멕시코 침략 전쟁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마을로 돌아온 그는 <월든> 집필에 앞서 중요한 연설문을 먼저 발표하는데, 그것이 바로 1849년에 출판된 <시민 불복종>이다. 톨스토이와 간디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 글은 미국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은 이유로 감옥에 갇혔던 소로의 실제 경험에서 시작된다. 소로는 1846년에 일어난 미국의 멕시코 침략 전쟁에 반대하여 납세를 거부했지만 사실은 이미 6년 전부터 미국 정부의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인두세를 내지 않고 있었다. 비록 하룻밤 감옥생활이었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소로는 정부에 대한 시민의 의무, 정의에 대한 법의 의무,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인간의 의무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미국의 멕시코 침략은 서부를 개척하고 태평양까지 영토를 넓히는 것이야말로 신이 미국에 부여한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이른바 미국식 팽창주의 때문에 일어났다. 미국 이민자들이 많았던 텍사스가 공화국을 선포한 뒤 멕시코에서 독립하여 미국 연방의 28번째 주가 되자 미국과 멕시코 간의 영토분쟁은 본격화했다. 영토확장과 노예제 유지를 주장한 쪽과 전쟁반대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쪽으로 국론은 갈라졌고, 1848년 미국이 무력으로 멕시코 영토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기 전까지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멕시코 대통령도 한탄했듯이 멕시코는 신에게서는 너무 멀고, 미국과는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소로는 미국시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다시 말해 법이 아닌 양심과 정의에 따르기 위해 미국 정부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소로는 “우리는 시민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먼저 개발해야 한다”며 누구든 부당하게 사람을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인이 갈 곳은 감옥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소로는 이 연설문의 제목을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이라고 붙였다. <시민 불복종>이란 제목은 소로 사후에 출판사가 붙인 것이다. 소로는 이 제목으로 비록 선거로 정권을 잡은 시민정부라 하더라도 한 국가가 전쟁을 벌이거나 노예제와 같은 비인간적인 폭력을 휘두를 때는 여기에 저항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임을 분명히 했다. <매사추세츠의 노예제>라는 글에서 소로는 “지금 시급한 것은 다수결의 결정이나 헌법보다 더 상위의 법을 인지할 수 있는 인간의 고결성이다”라며 양심과 도덕을 국가의 법보다 더 우위의 법으로 놓았다. 시민 불복종 정신은 국가권력마저 보편적 인권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정부나 국가체제의 절대적 적법성을 부인한 급진적인 민주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아무리 합법적으로 선출된 국가체제라 할지라도 보편적인 정의와 인권에 어긋나면 그 존립의 적법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로는 일순간이라도 왜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을 입법자들에게 위임해야 하느냐며, 그렇다면 도대체 왜 모든 사람들이 양심을 가지고 있느냐고 반문했다.
 
‘양심’이란 영어 단어는 ‘모두 함께 안다’(con-scienc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곧 양심이란 서로 물어보지 않아도 인간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공통된 생각을 말한다. 인간 공동체가 모든 행위의 판단기준으로 오랫동안 의지해온 공통의 지혜가 바로 양심이기에 양심이란 마치 개별적인 판단처럼 보여도 실상은 사회 내에서 보편적인 도덕적 잣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소로는 자신이 낸 세금이 인간을 상품처럼 사고파는 노예매매에 쓰이거나 아니면 영토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양민을 죽이는 행위에 쓰인다면 시민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위는 보편적 양심에 따라 납세를 거부하고, 그로 인해 감옥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생각한 대로 실천했다.
 
소로는 노예매매와 멕시코 침략 전쟁 모두 오직 이윤만 추구하는 상업주의의 팽창 때문에 생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원칙 없는 삶>이란 글에서 온 세상이 온통 비즈니스로 뒤덮여 있다며 이렇게 한탄했다. “나는 범죄나 다른 그 어떤 것도 끊임없는 비즈니스보다 철학과 시, 아니 나아가 삶 자체에 대해 더 적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법과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오직 사적 이윤만 끊임없이 추구하는 팽창주의가 사회 전역으로 퍼질 때 보편적인 양심과 정의에 토대를 둔 공동체는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물론 그 붕괴는 사회의 가장 약자들부터 덮치게 마련이다. 소로는 월든 호수를 위협하던 벌목의 굉음과 기차 소리, 남부의 흑인 노예와 그보다 더 불쌍하다고 본 북부의 공장 노예들, 스페인에 이어 미국에도 땅을 뺏긴 멕시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다 동일한 붕괴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과연 소로의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을까. 경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비록 정체를 가렸지만 여전히 우리 정부도 시민들이 양심껏 납부한 세금으로 마치 쓰레기처럼 사람들을 쓰다 버리고, 그들이 살던 땅과 집을 빼앗고, 나아가 4대강을 상대로 벌이는 22조원의 개발전쟁에 쏟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들은 이런 일에 세금을 내야 하는가? 소로는 부당한 정부에 불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복종은 시민이 아닌 정부가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했다. ‘복종’(obedience)이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은 ‘귀를 기울인다’(ob-audio)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소로를 읽다보면 철거민들의 분노와 해고자들의 고통에, 그리고 개발의 굉음으로 온 국토를 휘감을 저 강과 계곡의 절규에 정작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정부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귀를 닫을 때 정부권력의 적법성은 사라지고, 마침내 시민불복종은 시작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