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그들의 새마을 운동》 김영미 교수

-------------------------------------
농민의 눈으로 다시보는 새마을운동 (서울, 이순녀기자, 2009-06-10  23면)
 
박정희 정부는 농촌이 낙후된 원인을 게으름과 노름, 미신에 빠져 지내는 농민의 탓으로 돌렸지만 일제 식민치하, 해방, 전쟁 등을 거치며 농촌 근대화의 동력은 농민 사회 내부에서 오랜 시간 축적돼 왔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농촌 사회의 자발적인 노력과 에너지를 국가적으로 동원해낸 그 지점에 박정희의 영도력이 있었고 새마을 운동의 성공이 있었던 것”이라며 “농민의 참모습을 다시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새마을운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고 강조했다.
 
--------------------------------
“새마을운동은 농촌 몰락의 시작이었다”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6-10 오후 09:02:11)
‘그들의 새마을 운동’ 쓴 김영미 교수
   
“새마을운동을 성공한 농촌 근대화운동으로 미화하든 농민에 대한 억압적 동원체제로 비판하든, 정부 정책에 초점을 둔 국가중심적 접근이란 점에선 마찬가지입니다. 농민이란 존재는 철저히 지워져 있어요.”
 
민중 경험 기초로 생활사적 접근
“유신체제 이식위한 농민동원운동”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역사학계의 첫번째 연구서라는 점 말고도, 민중의 경험세계를 통해 사건에 접근하는 생활사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새마을운동 시기 모범 마을로 선정돼 두 차례나 포상을 받은 경기 이천군의 작은마을 아미리와, 새마을운동의 기수가 돼 <대한뉴스>에까지 보도된 농촌운동가 이재영씨가 책의 주인공이다. 책을 쓴 김영미(42) 국민대 연구교수의 논지는 “새마을운동 이전에 ‘새 마을’과 ‘새 농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미리는 1930년대 일제가 펼친 농촌진흥운동에서도 모범 부락이었습니다. 과거부터 근대화를 위한 자발적 노력이 꾸준히 있어 왔던 곳입니다. 이재영씨 역시 1950년대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애향청년회라는 계몽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던 농촌운동가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정부의 정책보다 훨씬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었던 셈이죠.”
 
그런데 이런 자발적 흐름이 박정희 정부 시기 가시적 결실을 맺게 된 데는 정부의 물질적 지원과 평가, 포상이 모두 마을 단위로 이뤄짐으로써 마을공동체의 자치력과 마을간 경쟁심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 하나의 요인은 당시 마을공동체의 주도권을 둘러싼 신구세력간 권력 갈등이다.
 
“이농이 본격화되기 전이라 당시 농촌마을에는 중등교육을 받고 군대를 다녀와 근대성을 내면화한 청년 주체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연장자 중심의 마을 권력과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정부는 발전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충일된 청년들과 손잡음으로써 운동의 자발적 주도 세력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유신체제를 마을로 이식한 존재들이기도 했다. 연장자 중심의 마을공동체를 움직이기 위해선 국가의 권위와 행정력을 등에 업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청년들은 자기 마을을 박정희 정부의 지배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실을 했다는 얘기다. 물론 여기엔 3선개헌을 계기로 뚜렷하게 하락한 도시지역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농촌을 체제 유지의 거점으로 활용하려 했던 박정희 정부의 의지 또한 작용했다. 이런 점에서 새마을운동의 동원 방식은 소외계층의 욕망을 자극해 체제의 자발적 동조자로 포섭한 파시즘의 대중 동원과도 유사하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그런데 정작 농촌 마을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그토록 원하던 발전과 부를 성취했을까? 김 교수는 말한다. “거주 환경이야 나아졌죠. 문제는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농가부채가 급증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정부 시책에 따라 앞다퉈 고수익성 작물 재배에 뛰어들었는데 설비투자 비용은 물론 불투명한 판로와 널뛰는 가격 탓에 피해가 고스란히 농민에게 돌아갔던 것이죠. 80년대가 되면서 청년들은 더 빠른 속도로 고향을 등졌고, 농촌은 희망이 사라진 노인들의 휴식처로 전락합니다. 새마을운동은 역설적이게도 농촌 피폐화의 시작이었습니다.” 
 
---------------------------------------
[저자 초대석] 그들의 새마을운동 김영미 (한국, 유상호기자, 2009/06/13 03:03:15)
"새마을운동, 민중의 이야기로 재구성했어요"
 
김 교수는 "관(官) 주도의 것이나, 진보적 학계의 것이나 새마을운동의 의미를 기술한 기존의 역사는 모두 편향적"이라고 지적했다. '선구적인 농총 근대화 운동'도 '권위적ㆍ억압적 대중 동원'이라는 시각도 모두 단편적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그 오류가 "계몽의 대상으로서든, 동원의 대상으로서든, 민중을 주체가 아닌 무기력한 객체로 파악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이 유신체제의 유지에 이용된 측면이 있지만, 박정희 정권은 농촌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근대화 에너지를 포착한 겁니다. 지금도 농촌 주민들은 '그때가 활기가 넘친 시절이었다'는 향수를 갖고 있어요. 그게 정권의 추진력과 맞물리면서 전국적인 운동이 된 거죠. 물론 문제도 많습니다. 현실에 맞지 않고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투자, 예컨대 서구의 낙농선진국을 흉내내려 했던 것은 현재 농촌이 몰락한 원인이 됐죠."
 
----------------------------------------
[잠깐! 이 저자] 새마을운동 이전에 새마을과 새농민이 있었다 (조선, 이한수 기자, 2009.06.13 09:46)
《그들의 새마을 운동》 김영미 교수
 
"농민들을 만나 심층 인터뷰하면서 근대화를 위한 농민들의 지난한 노력이 새마을운동과 만나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됐어요. 새마을운동은 단지 1970년대의 현상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온 농민들의 노력이 국가주도 운동과 결합해서 나온 산물입니다."
 
김 교수가 출간한 《그들의 새마을 운동》(푸른역사)에서 말하는 '그들'이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개되기 훨씬 이전부터 자신의 마을을 '새마을'로 만들고자 노력했던 농민들을 말한다. 책의 주인공은 '아미리'라는 한 마을과 농촌지도자 '이재영'이라는 한 사람이다. 김 교수는 1999년부터 1년여간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아미리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함께 지내면서 마을 130여 가구를 모두 방문 조사했다. 70~80세 촌로(村老)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식 기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농민들의 경험세계를 파고들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성공마을로 두 차례 표창을 받은 아미리는 이미 1950년대부터 정미조합을 자율적으로 결성하고 마을의 공유재산을 축적하는 등 자발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천과 안성 지역에서 활동한 농촌 지도자 이재영씨는 국가 주도의 새마을운동이 오히려 그의 아이디어를 빌렸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사례다. 1950년대 후반 서울 경복고를 졸업하고 낙향한 후 '애향청년회'를 조직한 이씨는 마을 어른들에게 도박을 하지 마시라고 설득하고 야학에서 농민들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협동조합을 만들어 농기구와 비료를 공동으로 구매하고 공동으로 농산물 판로를 개척하는 '새마을' 활동을 벌였다.
 
그의 활동은 1971년 국가주도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씨는 대통령과 장관들이 월 1회 여는 정책협의회에서 자신의 경험을 직접 브리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농촌 지도자야말로 훌륭한 사람"이라며 그에게 '국민포장'을 수여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내의 새마을운동을 총괄하는 '새마을실장' 자리를 이씨에게 제의하기도 했다. 이씨는 새마을운동을 역설하는 박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유일하게 언급된 농촌지도자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농촌을 어떻게 근대화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없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이미 농촌 근대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이재영씨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죠." 김 교수는 "그런 점에서 새마을운동은 박정희만의 것으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뒤집으면 '새마을운동은 농민만의 것도 아니다'는 말도 된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하고 있던 새마을운동에 박정희라는 인물이 '불꽃'을 댕긴 것이다. 김 교수는 이렇게 균형을 잡았다. "새마을운동 이전에 이미 새마을과 새농민이 있었어요. 가난을 스스로 극복할 동력이 없는 나태하고 무능한 농촌은 아니었습니다. 국가는 이들의 자발성을 효과적으로 끌어주고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죠."
 
-------------------------------------
[요즘 이 책]새마을 운동은 성공한 운동이었을까 (2009 06/30 위클리경향 831호, 최재천<변호사>) 
 
이 책은 정치사·관변사에 익숙해온 우리 사회의 연구방식에,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 일종의 ‘뒤집기 한판승’을 거둔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있었기에 ‘새마을’이 생겨났다. 지금까지 공인된 역사나 통념은 그렇다. 아니다. ‘새마을’이 먼저 있었고, ‘새마을 지도자’가 아닌 ‘농촌 지도자’가 이미 있었다. 그런 다음 정부 주도의 ‘새마을운동’이 있었다. ‘새마을’과 ‘농촌 지도자’와 ‘새마을운동’이 결합하면서 비로소 우리 상식 속의 ‘새마을’이 탄생했다. ‘역사 대중화’에서 ‘대중의 역사화’로 방향을 바꾼 저자 김영미의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의 결론은 그렇다.
 
생경하다. 도발적인 목소리도 그렇고, 연구방법이나 저술방법도 그렇고, 저자의 결론도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새마을운동’ 시대를 살아왔기에 새마을운동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온 지독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1971년 정부는 전국 3만3267개 행정 리·동에 시멘트를 335부대씩 지원하여 전 리·동에서 일제히 새마을가꾸기운동을 추진하게 했다. 이 책의 무대가 된 경기 이천시 부발읍 아미리 사람들도 당시 시멘트 300부대와 리어카 한 대를 받았다. 다른 마을에서는 시멘트 사용법을 몰라서 처음 받은 이 물건을 내다버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아미리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아니고, 내무부 장관도 아니고, 새마을운동중앙회도 아니다. 도서관 공문서보다는 현장을, 정부자료보다는 구술을 택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정치사·관변사에 익숙해온 우리 사회의 연구방식에,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 일종의 ‘뒤집기 한판승’을 거둔다. 저자의 문제의식과 결론을 요약하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마을공동체의 자율적 운동이었을까. “국가의 정책은 효율성과 가시적인 성과를 중심으로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다. (…) 새마을운동에서 농민들이 운동의 자율적 주체였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잘살기운동으로 성공했을까. “새마을운동은 청년들이 농촌에서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데 실패했다. 1970년대 농촌 청년들은 더 빠른 속도로 도시로 유입되어 갔다.”
 
새마을운동은 순수한 사회운동이었을까. “박정희 정부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낙후된 농촌의 근대화, 정치적 위기 타개, 유신체제 지지 기반 마련이라는 세 가지 목적을 수행하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유신독재체제와 무관했을까. “새마을운동은 곧 공화당의 세력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유신체제에 대한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민층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도시 지역의 유신반대 여론을 상쇄시키고 이를 통해 집권을 연장할 수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운동이었을까. “(일제) 식민지 지배당국이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은 한 세대 후 박정희 정부가 주도한 새마을운동의 기원이 된다. (…) 새마을운동의 최고지도자인 박정희뿐 아니라 새마을운동을 주도했던 관료들이나 마을 청·장년들이 모두 농진운동의 유경험자들이라는 점은 두 운동의 직·간접적인 관련성을 유추케 한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이 책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역사학계의 첫 번째 연구서다. 논쟁의 시작인 셈이다. 그럼에도 감히 예언하자면, 이 책은 새마을운동사와 영원히 동행할 것이며, 더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