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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3
    좌파란 무엇인가 (한겨레, 김규항)
    참여예산
  2. 2009/12/03
    나눔의 얼굴 (한겨레, 김규항)
    참여예산

좌파란 무엇인가 (한겨레, 김규항)

 

[야!한국사회] 좌파란 무엇인가 (한겨레,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09-06-24 오후 07:42:47)
 
확실히 좌파적 스타일은 대중적 소구력을 잃었다. 내가 스무 살 무렵 좌파운동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 선배들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와 현실의 무게를 혼자 짊어진 듯한 비장한 표정, 한마디 한마디가 천근만근인 지사적인 말투, 500m 전방에서도 식별되는 무채색의 옷차림. 그러나 그런 모습은 오늘 대중들에게 부담스럽기만 하다. 좌파들은 ‘유연한 좌파’ ‘쿨한 좌파’ ‘상식적인 좌파’가 되어야 한다는 충고를 듣는다.
 
좌파의 일원으로서 나는 그 충고를 달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런 충고가 잃어버린 대중적 소구력을 회복하기 위한 스타일의 변화를 넘어 좌파의 정체성을 흐트러뜨리는 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한다. 안 그래도 지난 10년 동안 극우파들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우파 세력을 좌파라고 지칭해대면서(“좌파에게 잃어버린 10년”이란다, 빌어먹을!) 좌파의 정체성은 한껏 모호해진 상태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의 탄생으로 극우파들이 귀환하면서 좌파는 자유주의 우파가 맡았어야 할 싸움, 즉 이명박과의 싸움에 몰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좌파의 정체성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현실에서도 변할 수 없는 좌파의 출발점, 즉 계급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자유주의 우파는 먹고살 만한 양식 있는 시민들을 대변하지만, 좌파는 시민이라 불리면서도 시민으로서 인간적 사회적 권리를 확보하지 못한 대다수 인민들을 대변한다.
 
좌파가 이명박과의 싸움은 제쳐두고 앵무새처럼 ‘신자유주의 반대’만 외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명박과 싸우되 함께 싸우는 자유주의 우파 역시 신자유주의 세력의 일부라는 걸 똑똑히 기억하자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극우 분파와 싸운답시고 신자유주의 자유주의 분파의 2중대가 되어 그들의 정치에 이용당하진 말자는 것이다. 자유주의 우파에게 이명박과 싸움은 목적이지만 좌파에게 이명박과 싸움은 기본일 뿐이라는 걸 분별하자는 것이다.
 
그런 분별을 잃을 때 좌파는 ‘좌파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로 추락한다. 좌파를 견제하는 제도 미디어는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대표적인 좌파 논객’이라 호명하며, 대중성에 목마른 진보정당은 그들을 상전처럼 받들어 모신다. 그들을 따라 입당한 사람들은 아예 ‘계급을 폐기하자’고 외친다.(계급이 디지털 사회에선 걸맞지 않은 개념이라는 소리가 유행이지만, 신자유주의의 본질이 ‘계급 지배의 강화’라는 것은 오늘 국제성을 가진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그래서 좌파의 정체성은 더욱 심각하게 훼손되고 좌파가 대변해야 할 인민들의 현실은 좀더 말끔하게 배제된다.
 
예나 지금이나 좌파의 존재적 모순은 대개의 좌파들이 자신이 대변하는 계급 자체가 아니라는 것, 그 계급의 인민들의 현실 속에서 실제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좌파는 늘 그 모순에 긴장해야 한다. 먹고사는 일을 고민하지 않는 좌파 인텔리의 관념 속에서 그 현실은 잠시 미루어지거나 생략될 수 있다. 싸우다 지치면 잠시 휴가를 다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민들에게 그 현실은 미루어질 수도 생략될 수도 없다. 그들의 현실엔 휴가가 없다. 
 
‘유연한 좌파’ ‘쿨한 좌파’ ‘상식적인 좌파’ 다 좌파에겐 약이 되는 말들이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좌파를 더이상 좌파가 아니게 하는 것이라면 그 말들은 좌파에게 독일 뿐이다. 오늘 이 ‘개념 없는’ 세상에서 여전히 자신을 좌파라 말하는 사람들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좌파란 무엇인가? 대체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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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얼굴 (한겨레, 김규항)

 

[야!한국사회] 나눔의 얼굴 (한겨레, 김규항〈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09-04-22 오후 09:50:39)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한다. 그 생각은 다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환원된다. 많은 부모들은 제 아이가 부자가 되길 바라는 욕망을 ‘부자가 되어야 불쌍한 사람을 많이 도울 수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적선이나 자선이 금세 굶어 죽을 사람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나눔은 고통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하지만, 연민에만 그칠 때 나눔은 사람을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쇼에 머물게 된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쇼에 참여함으로써 그런 고통스러운 현실에 자신의 안온한 삶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불편을 씻어낸다. 그리고 부자들은 제 재산의 극히 일부를 내놓고 온 세상의 칭송을 받으며 세금을 감면받는다.
 
나눔은 고통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불의한 사회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더해질 때 비로소 그 최소한의 꼴을 갖춘다. 나눔은 어떤 사람은 쉬엄쉬엄 일하면서도 천상의 안락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종일 뼈 빠지게 일하고도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눔은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현실에 닿아 있다.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세상을 ‘나눔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나눔은 단지 공정한 사회에 머물지 않는다. 나눔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노력이자 행동이다. 나눔은 자연도 자원도 돈도 식량도 집도 땅도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것이며, 그래서 누구에게도 사적으로 소유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할 때 모두 함께 풍요롭고 만족할 수 있음을 우리 삶의 이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나눔은 세상의 그 어떤 변혁운동보다 더 근본주의적이며 급진적인 운동이다. 오병이어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바로 그 사실을 장엄한 풍경으로 보여준다.
 
당신에게 나눔의 얼굴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나눔을 설파하는 사람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저리는 굶고 병든 아이의 얼굴을 실은 홍보물을 당신에게 내밀며 그 아이들이 당신에게 꼬박꼬박 감사의 엽서를 보낼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불쌍한 사람’과 ‘훌륭한 사람’의 역할 분담은 바뀌지 않을 것임을 보장하는 하고많은 나눔 단체들의 얼굴처럼 부드럽고 온화하기만 한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그 얼굴에 나눔의 또 다른 얼굴, 혁명보다 더 사납고 성난 얼굴을 보태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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