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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글 (2011년)

 

아이들을 죽이는 사회 (레디앙, 2011년 12월 30일 (금) 10:06:06 박노자 / 오슬로대)
학교폭력, 남한과 소련의 경우…견디게 하는 힘의 차이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대통령을 아키히로(明博)에서 유시민 류의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로 교체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쉬울 수가 있어도, 수십만 내지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가해자들을 뉘우치게 하여 가해/피해 관계를 풀어주는 것은 난제 중의 난제라는 점입니다. 아이들 사이의 가해/피해 관계는 이 정신병적 체제의 병리적인 본질과 직결돼 있는 만큼, 그 어떤 사회적 "약"으로도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술"은 필요합니다. 김영삼 옹의 1996년 "학교폭력 추방" 켐페인부터 지금까지 집권 정치꾼들이 학교에서의 죽음의 행렬을 멈추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정치적 자본을 꾸준히 축적했지만 결과는? 당연히 제로입니다. 남한 같은 사회에서 학교에서 죽음들을 멈추는 것은, 고문실에서 고문 피해자의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게 하는 일 만큼이나 힘든 일일 것입니다. 갈비뼈를 보호하자면 일단 고문실 자체를 철폐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리도 같은 논리로 봐야 할 듯합니다.
슬픈 이야기지만, 착취 아니면 빈곤이나 군사화 등으로 물들여진 모든 사회들에서는 아이들이 폭력화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배우니까요. 제가 성장했던 구소련 같으면 남한과 같은 개념의 착취(개인 자본가에 의한 잉여가치 수취)는 없었지만, 상대적 빈곤과 군사화, 그리고 간부층과 일반인 사이의 권력 향유 내지 생활수준 차이가 있었으며, 그만큼은 아이 사회의 폭력도 없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렇고 제가 무수히 많이 본 다른 완력이 약한 폭력 피해자들도 그랬지만, 자살할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반대로 "힘의 관계"에서 약자로 몰리는 만큼 오기 같은 게 생겨 책을 더 열심히 읽고 취미 동아리에 더 열심히 다녀 커서 사회주의 조국의 좋은 과학 일꾼이 되어 당과 인민들을 위해서 잘 일할 꿈을 더 열심히 꾸었습니다.
저나 그 당시에 저와 같은 처지에 몰렸던 다른 폭력 피해자(그 중의 상당수는 유대인 내지 독일인 등 민족 출신 성분이 불리해 당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들이 특별히 마음이 강해서 그랬던 것인가요? 그게 전혀 아니고 객관적인 현실에 힘입어 폭력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현실 사회주의" 사회는 많은 면에서 전통사회의 민중 공동체 기풍을 이어받는 것인데, 폭력이라는 차원도 그렇습니다. 러시아의 전통적 시골 같으면 농민 아이들끼리의 싸움은 많은데, 패배하는 쪽에서 피를 흘리자마자 바로 멈추는 게 불문율입니다. 한 어린이가 일찌감치 불구자가 되어서 공동체 전체가 인력을 잃고 인화를 해치면 안되니까 일종의 안보이는 "안전 장치"가 있는 거죠.
소련 학교에서 똑같은 불문율이 적용돼 아무리 폭력이 있다 해도 예컨대 몸이 심하게 다칠 확률은 거의 없었습니다. 또, 학교 역시 "공동체"이었던 만큼 폭력이 발생되자마자 누군가가 이를 꼭 말리는 등 "사회"의 긍정적인 영향력은 늘 실감됐습니다. 폭력 희생자는 "혼자" 아니었다는 거죠.
학교 폭력에서 계급적인 "보상" 차원은 역역해서, 그걸 "사회적 정의" 차원에서 피해자가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도 있었습니다. 가해 학생들의 대부분은 집안 학력이 짧은 육체 노동자 자손들이었고, 피해 학생은 대개 인테리 가정 출신들이었습니다.
학교는 아무리 폭력적이라 해도, 피해자에게 여유 시간이나 가정이 있었습니다. 학교는 2시면 끝나는 거고, 그 다음에 마음껏 도서관 책들이 빌려보고 즐길 수 있었던 거고, 부모의 손을 잡아 박물관, 명승지, 자연 탐방이나 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로 4~5시면 집에 오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아이들과 놀 여유가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학교 폭력이라는 부분은 어린 인생의 "다"가 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면, 위에서 열거한 "폭력 피해자 자살 충동 방지 요인"에 비추어보면, 오늘날 남한의 어린이, 청소년의 삶은 어떻게 보이나요? 우리에게 폭력을 그나마 완화라도 시킬 수 있는 공동체 전통이라도 남아 있나요? 북조선 같으면 아주 많이 남아 있는데, 남한은요?
실은 아이의 신체를 부모 몸의 연장으로 보고 그 신체의 훼손을 불효로 간주하는 유교 논리는 조선시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젊은이들의 폭력성을 억제시키는 기능을 맡았습니다. 유교의 긍정적 차원이라면 대체로 그런 것이지만, 우리는 유교의 부정적인 유산, 즉 장유유서(長幼有序)와 같은, 빨리 소각해야 할 과거의 쓰레기 이외에 유교로부터 이어받은 게 있나요?
급우가 폭력 당하는 것을 보면 이를 바로 말릴 정도의 공동체적 "집단 무의식"은 우리에게 남아 있나요? 어른 사회에서 지난 2년 동안 쌍차 해고자 19명이나 사회적 타살을 당한 것을 보고도 아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절대 다수가 방관만 하고 있는데, 과연 이 "방관자들의 사회"를 보고 어린 아이들이 뭘 배워야 하나요?
약자 가정 출신의 아이가 여러 모로 억울함을 갖고 있어 약간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고 포용해줄 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롭고 계급적 차별에 민감한가요? 그랬다면 우리에게 지금과 같은 폭력 천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남한 아이들이 2시에 귀가해서 학교에서의 일을 잊고 독서나 취미활동에 매진할 수 있나요?
맞교대, 특근, 연장근무 등등에 지칠대로 지쳐 맨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대다수 서민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매일 바깥에 가서 자연탐방할 기력은 남아 있나요? 굳이 묻지 않아도 답은 뻔하죠. 어른의 삶도 어린이의 삶도 장시간 고강도 노동의 지옥이 된 사회에서는, 폭력도 악질화되고 폭력의 피해도 극대화됩니다.
아이들은 그저 어르들을 보고 배울 뿐입니다. 군에서의 고참이 신참을 명령지휘하면서 괴롭히듯, 편의점에서 사장이 알바에게 돈도 제대로 안주면서 멋대로 부리듯, 일부 교사들이 학습자 위에서 군림하는 태도를 취하듯, 심지어 부모들이 성적이 내려간 아이를 패고 꾸중으로 볶아먹듯, 아이들끼리도 폭력의 먹이사슬의 틀이 잡히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군사화가 심했던 소련에서 아이들이 흔히 병정놀이를 했듯이, 남한 사회의 아이들이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공동체적 양심이라고 찾아보기 어렵고 약자가 강자의 먹이가 되는 사회를 아주 잔혹한 폭력놀이를 통해서 재현할 뿐입니다. 그들이 우리들의 거울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의미에서는 우리는 다 - 조한혜정 샘의 말씀대로 - (간접적) 살인범입니다.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인간들이 서로를 생각해주고 배려해주는, 그 따뜻한 온기로 폭력성을 완화시켜주고 아이들의 본성적 착함을 살리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아직까지 실패한 것이죠.
<재능교육> 파업 노동자들이 4년이나(!) 투쟁하느라 고생해도 "진보"도 그들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가져다주지 않고 있고, 송경동 동지와 정진우 동지가 아무 죄도 없이 양심수가 되어 감옥에 갇혀도 대다수의 "온건하게 진보적 시민"마저도 아무 일도 없듯 그저 내년 총선이나 대선 생각에 잠겨 있는 사회는 분명 정상적 사회는 아닙니다. 무관심이야말로 폭력의 최악의 형태는 아닌가요? 아이들이 우리들의 폭력성을 배웠을 뿐이죠. 빅토르 최가 1980년대 말에 "엄마야 우리는 다 중병에 걸렸다! 엄마야 우리는 다 미친 지 오래됐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오늘날 남한에 그대로 적용될 만한 명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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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요한 바오로, 노무현 & 나꼼수 (레디앙, 2011년 12월 22일 (목) 08:49:42 박노자 / 오슬로대)
'북조선'은 우리들의 거울?…개인숭배, 상품화, 가족이데올로기
지난 며칠 동안 제게 거의 지옥적이었습니다. 지난 주부터 태심한 독감을 앓았는데, 이번 주 월요일 새벽부터 노르웨이의 각종 매체로부터 막 연락이 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북조선의 김정일 위원장이 돌아갔는데, 북조선의 실상과 미래에 대해서 코멘트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대부분 기자들의 태도이었습니다. 신문 부수를 늘리려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북조선을 더 이국화시켜 "미지의 동양적 전제 왕국"의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팔려고 했던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소위 오리엔탈리즘의 각본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북조선을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쪽 실상은 그렇게 '이상하게'만 보일까요?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들을 비추어주는 거울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북조선이 이상하다면 남한을 비롯한 전세계 전체가 이상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기야 저와 같은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바로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기자들은 북조선 길거리에서의 집단 오열 장면을 매우 '이국적으로' 여겼습니다. 이국시하는 동시에, "독재자를 위해 꼭 울어야 하는" 북조선인들을 또 불쌍히 여기려는 분위기도 강했습니다. 그렇다면 6년 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돌아갔을 때에 그를 위해서 울었던 남한을 위시한 전세계 가톨릭 신도들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합니까?
신화가 아닌 실제의 교황 요한 바오로는 - 김정일 위원장처럼 - 꽤나 모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세계에 대한 넓은 식견, 그리고 북남 교류에 대한 상당한 적극성 등과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강력한 강박관념을 겸비했다면, 요한 바오로는 상당한 상식과 기가 막힐 만한 보수성을 겸비했습니다.
상식이 있었던 만큼 달라이 라마와의 친교를 맺고 미제의 이라크 침략 등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망발들을 비난했지만, 해방신학부터 콘돔 등 피임도구까지 비상하게 사갈시한 나머지 많은 이들에게 적지 않은 상처들을 남기고 또 많은 이들을 희생시킨 바도 있습니다.
물론 북조선과 같은 차원의 개인숭배는 현재 남한에서는 어려울 것입니다. 국회의원직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다 자유로이(?) 거래될 수 있는 우리들의 신자유주의적 낙토에서는, 사람도 상품회된 나머지 이용 대상은 돼도 진정한 '숭배'의 대상은 되기가 힘듭니다.
돈과 '피', '핏줄'은 이 사회의 두 개의 주된 이데올로기죠. '핏줄' 이데올로기가 전사회 차원까지 이르면 바로 혈통적 민족주의가 되는 것인데, 이 이데올로기가 지금처럼 강한 나머지 '다문화 사회'는 영원히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직접 가족들과 '혈족' 사이의 중간단위가 바로 사회적 이익집단이나 보스에 의해서 리드되는 정파 같은 집단인데, 이와 같은 관계에서도 우리는 역시 의사(擬似) 가족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즉, 선배나 보스를 '가족의 어른', '형'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그만큼 비판적 사고는 그 자리에서 마비되고 맙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최근 북조선에서 벌어지는 장면들과 일면 상통하는 장면들은 평양이 아닌 서울에서도 벌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몇년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명에 돌아갔을 적에 전국의 분향소들을 메운 인파들을 생각해보시지요. 그 때에 - 나중에 비판자들에 의해서 "놈현 관 장사"로 표현됐던 - 그 추도의 앞장에 섰던 소위 '노빠'들에게는, 노무현이란 정치인이 이라크 침략과 아프간 침략과 같은 초대형 국제범죄를 적극 방조해 종범으로 나섬으로써 한국역사를 영원히 더럽혔다는 점이나, 노무현이야말로 한미FTA 발안, 추진 과정을 소신껏 주도했다는 점을 설득시킬 수 있었습니까? 물론 없었지요.
'노빠'든 그 어떤 다른 빠든 일단 그 '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사고할 줄 아주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님, 아버지 격인 '짱'은, 그들에게 완전무결한 인격의 소유자죠. 유시민이나 문재인의 노무현 시절 관련 저서를 한 번 정독해보시기 바랍니다. 한 줄의 반성이라도 보이나요?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짱'의 위대한 영도를 받아 한 일에 대해서는, 그들은 원천적으로 자기 비판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평양의 군중들과 달리, 그들이 어떤 사회적 압력을 의식해서 '빠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다 거래되는 자유 대한에서 가신(家臣)의 영광스러운 길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더 한심하나요? 제게는, '가카'를 있는 대로 씹으면서도, 아키히로(明博)의 왕좌를 박원순이나 유시민이 차지한다 해도 이 나라 노동자들이 그대로 죽어날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나꼼수>의 팬들은, 평양의 군중보다 훨씬 더 한심해 보입니다. 김대중과 노무현 치하에 OECD에서 자살율이 제일 높은 사회가 된 나라에서 사는 그들은, 외부적 강제가 그다지 없으면서도 의식이 있는 계급의 구성원, 즉 진정한 의미의 독립적 개인이 되려는 노력을 전혀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핏줄'에 따르는 소속감부터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격차, 각종의 계급적 모순들, 그리고 영어 열풍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들을 북조선 사회도 갖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가난한 만큼 훨씬 더 약해 보이는 그들을 경멸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들의 - 꽤나 볼썽사나운 - 모습을 바로 보는 게 더 도덕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그들은 많은 면에서 우리들의 거울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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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 권하는 사회 (레디앙, 2011년 12월 16일 (금) 08:37:33 박노자 / 오슬로대)
박정희, 김영삼, 김지하, 김문수, 황석영, 진중권…그들은 왜?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 등을 보십시오. 실제 거기에서 활약하는 활동가의 수는, 1990년대 초반에 비해서 줄었으면 줄었지 별로 늘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덜 탄압적으로 되지만, 오히려 '골수' 체제 반대자의 수가 점차 줄어드는 거죠.
그리고 상층 활동가들을 보면, 20년 내지 25년 전에 운동판에서 뛰었던 사람들의 상당수를 그 자리에서 더이상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대신 그들은 국회의사당에 보수정당 의원으로도 가 있고, 도지사 사무실, 청와대 등에 가 있고, 각종 대학의 교수로도 재직돼 있고 보수언론에서 문호 대접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소위 '전향'을 한 것이죠. 전향이라는 정치문화적 코드를 빼고서 한국 사회를 아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향, 즉 일정한 거래를 전제로 하는 획일화된, 자발성이 강한 주류에의 '귀환'은, 극도로 보수적 사회인 한국에서는 하나의 '문화'라면 문화입니다.
조선 토착 사회 지도층의 협력 없이 효율적 통치를 할 수 없었던 일제 지배자들은, 온갖 당근들을 제시하면서 보수적인 양반귀족(민병석, 민영휘와 같은 민씨 척족 출신의 갑부들부터 시작해서)부터 신흥 민족주의자나 온건 사회주의자까지 열심히 자기 편에 끌어들이려 노력했습니다. 비참하게도 일제 말기에 이르러 1919년의 그 유명한 '민족지도자 33인' 중에서는 영양실조로 죽어도 배신을 하지 않은 한용운만 제외하고서 다들 전향하거나 적어도 민족진영에서 이탈했습니다. 인정식, 백남운 등 엘리트 온건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전향 거부자들을 거의 모조리 죽이거나 주변화시킨 사회는, 그 다음에 전향자들을 아주 전면에 배치시켜놓았습니다. 남로당 동료들을 배신해 그 명단을 형리들에게 넘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부터 3당 합당으로 야당 정치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배신한 김영삼이나, 반노동 입법으로 노동변호사라는 자신의 경력을 배신한 노무현, 1965년 한일수교 반대 데모했다가 전향한 아키히로(明博)까지, 대부분의 남한 최고 권력자들은 전향자 출신들입니다.
황석영이나 김지하보다 강도는 훨씬 더 약하지만, 실제로 2000년대에 접어든 박노해의 변신도 일종의 '준(準)전향'으로 볼 여지가 큽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경우지만, 전 진보신당 당원인 진중권씨의 점차적 전향을 우리가 바로 지금, 그의 각종 사회참여적 발언들을 통해 여실히 잘 지켜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향이라는 과정의 연구자 분들께, 트위터와 블로그 글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전향의 과정을 심층적으로 고찰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과거 '전진'그룹 등 좌파 운동가들을 맹비난하고, 귀족화된 예술인 정명훈을 옹호하는 진중권을, 그 누구도 죽이려 하지 않지 않습니까? 1990년대에 이루어진 김지하의 전향과 2000년대에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황석영의 전향도 그 어떤 강제도 개입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대한민국에서는 주류에 속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고생스러운 일입니다. 춥고 배고픈 측면도 있지만, 일단 같은 학력자본을 소유하는 선후배들의 동정적 시선부터 참기가 힘들죠. 그런데 과거 저항이라는 경력을 성공적으로 팔아서 주류에 합류하기만 하면, 세상은 당장 바뀝니다.
그 입신출세를 위해서 딱 한 가지 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철저하게 죽여, 획일화된 대한민국의 '상식/통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민주화를 자랑하는 '자유 대한'에서 절대 다수의 유명지식인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그 공적인 인생을 마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상의 수치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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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사칭 '개혁 사기꾼' 판매전략 분석 (레디앙, 2011년 12월 09일 (금) 08:14:23 박노자 / 오슬로대)
노회찬-심상정-유시민 '세트'의 의미…리버럴에 다시 속아넘어가나?
국내 정치에서는 내년과 내후년에 상당한 변화들이 예상됩니다. 2008년 이후에 권력을 다시 잡은 극우들은, 내년의 총선과 대선 이후에 그 권력을 지속적으로 장악할 가능성은 계속 얕아지고 있습니다. 즉, 극우들이 안정적인 장기집권 체계의 정립에 실패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웬만한 세탁기나 텔레비전보다 국내의 극우 정객은 훨씬 더 빨리 고장나고 맙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격'만의 문제 아니고 구조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극소수 수출 위주의 재벌들과 부동산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정확하게 맞추어진 한국형 극우정치는 기본적으로 변신을 거부합니다.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의 중점적 착취와 중소기업에 대한 착취, 그리고 땅 투기를 기반으로 삼는 현 (주)대한민국의 장사 방식 그 자체가 변화를 거부하듯이 말씀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만큼 민심 얻기에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현 정국 주도 구조가 단명으로 끝난다 해도 과연 (주)대한민국의 피고용자들의 다수를 이루는 하급 노동자들까지 잘 사는 세상은 될까요? 과연 그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표방하는 극소수의 진짜 진보세력들은 그 몫을 크게 확창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 노력에 달려 있는 부분들은 많지만, 극우들이 패배를 향해 달려간다고 해서 민중의 대변자들이 권력을 잡을 일은 자동적으로 가능해지지 않습니다. 그 둘 사이에 한 가지 벽이 있는데, 이는 바로 '진보'를 사칭하고 있는 각종의 리버럴들입니다.
물론 이미 노무현의 시절에 비정규직을 마구 양산하고 지금 커다란 재앙으로 돌아온 한미 FTA를 선구적으로(?) 계획, 추진한 그들에 대해, 민중은 벌써 크게 분노하고 실망한 적은 있었습니다. 지금의 극우집권도 그 실망의 한 가지 결과물이기도 하죠.
그런데 '개혁' 사기로 정치적 자본을 축적한 사람들은 대개 머리가 비상히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있지도 않은 물건, 즉 (자유주의적) '개혁'을 팔자면 정치적 상술 9단 정도 돼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이번에 저들은 이미 우리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판매 전략(?)들을 준비한 것입니다:
1) 섞어서 "세트"로 팔기
민중을 없는 살림에 살인적 학비 등을 내야 하는 비정규직으로 만들어냈던 노무현 정부의 장관을 이미 해본 유시민씨는, 더이상 정치적 장터에서 낱개로 판매되지 않고 노회찬, 심상정 등 친민중적 경력이 있는 우파 사민주의자들과 한 세트로 팔립니다.
낱개 판매면 이미 신선도가 별로 좋지도 않은 이 물건을 사주실 분들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이번에 한진중공업 문제로 장기 단식까지 하신 두 분들과 세트가 되어서 팔린다면? 글쎄, 어쩌면 이러한 세트 판매가 성공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듯한 한 리버럴은, 다시 한번 "경력 세탁"되고 '참신한 친서민 정치인'으로 돌아올 셈이죠.
2) 과거의 리콜 사태에 대한 기억 지우기
실제 2006년 이후에 노무현 정권의 인기는, "놈현스럽다"와 같은 단어들이 등장할 정도로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임기 말기의 노무현과 유시민 등 그 가신들은 진보가 아닌 한미FTA식의 가장 얄팍한 신자유주의의 상징이었지요.
그러나 특히 노무현의 자살 사태가 계기가 되어 그 부정적 기억들은 점차 노무현의 계승자들에 의해서 세탁되기 시작했습니다. 문재인 등의 저서에서는 노무현은 거의 '이상적 인격자'로 보이고, 그 정권 시절은 '실낙원'처럼 묘사됩니다. 아키히로 정권의 '신악'의 추악함에 압도를 당한 수많은 독자들에게 노무현 당시의 '구악'에 대한 기억들을 또 지우기가 쉬우니까 이 판매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둘 위험성은 있습니다.
3) 재포장과 새로운 광고 모델
물건은 그대로겠지만, 간판은 참신한 쪽으로 바꾸고, 그 간판 위주로 포장이 다시 디자인된 셈입니다. 이러한 전략의 대표적 사례는 이번 박원순씨의 당선이죠. 포스코, 풀무원 등 사외이사 출신이며 코오롱 등 재벌의 후원을 따는 데에 수완이 비상한 "재벌가의 친구" 박원순이고, 부하들에게는 거의 '독재자'로 인식되는 스타일의 리더 박원순이지만, 대다수의 중도적 유권자들에게는 그는 '참신한 얼굴'이자 거의 '진보'로 다가왔잖아요.
이유는? 정부나 재벌, 교회, 정계 등등은 그저 '도둑'으로 통하는, 철저하게 냉소적인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시민사회'에 대한 시선은 비교적으로 덜 싸늘하기 때문이죠. 그람시의 말대로, 시민 사회의 '권위'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무형의 방어력 중의 하나입니다. 앞으로는 박원순씨와 비슷한 케이스들이 꽤 있을 것 같고, '개혁' 사기꾼 진영은 그렇게 해서 재정비될 듯합니다.
사기는 영원하지 못하지만, 내년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박원순 류의 "참신하고 깨끗한 리버럴"들에게 속아 넘어갈 게 뻔합니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덜 속게, 진짜 진보는 피나는 노력을 해서 이 사회의 계급적 현실에 대해 소리를 크게 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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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회의한다" (레디앙, 2011년 12월 02일 (금) 01:34:00 박노자 / 오슬로대)
보통선거권, 노동자 체제편입 수단 측면도…진짜 민주주의의 의미
우리에게 흔히 한 가지 '이념적 무의식'이 있는 것인데, 이게 바로 (제도적 의회)민주주의 내지 (절차적)민주화를 어떤 절대선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주류'의 관점에서는 '산업화'와 마찬가지로 '민주화'야말로 대한민국을 북조선 등과 긍정적으로 차별화시키는 어떤 절대적 '우리들의 업적'으로 평가되는데, 이와 같은 지배자들의 의견을 또 알게 모르게 수많은 피지배자들까지 수용하게 됩니다.
노동자들로 하여금 영구적인 장시간 고강도 노동착취 구조에 구속 받게 하고 커다란 불안 노동자층을 만들어놓은 산업화에 대해서는 그나마 회의를 해보는 것이 적어도 진보진영에서 흔히 가능한 일이지만, 민주화만큼은 거의 신성불가침으로 인식되어지는 듯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부르주아 사회의 제도적)민주주의의 그림자, 즉 복잡한 계급적인 함의에 무감각한 것입니다.
물론 권위주의보다 (절차적 부르주아)민주주의라도 좋다는 사실이야 저도 다 체감했습니다. 1991년, 서울에 처음으로 갔을 때에 거리에서 자주 맡았던 메쓱한 최루탄 냄새와 기숙사 동숙생들이 주고 받았던 잡혀간 선배들의 이야기, 프락치로 밝혀진 '가짜 학생' 이야기 등등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제는 최루탄 대용으로 얼음 물대포를 쓰고, 제가 그 때에 갔던 고려대와 같은 '명문대학'에서 잡혀갈 만한 급진운동가도 거의 남지 않아 문제지만, 좌우간 운동권의 투사가 아닌 일반인마저도 부정한 권력에 '쫄지' 않고 살 만큼 (절차적)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돼 천만다행이라는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1991년 같으면 재벌가들의 '사설 기쁨조' 이야기를 그저 입소문으로만 전하고 있었지만,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이종걸 의원처럼 <조선일보> 방모씨에 대해서 "장자연씨를 술/성접대로 결국 자살케 만든 '악마'"였다고 발언해 고소를 당해도 무죄로 풀리지 않습니까?
물론 재벌가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먹이가 돼야 할 수많은 남녀들을 자살로 몰고 있겠지만, 적어도 국회의원 정도의 신분이 되면 이 사회에서 사람들을 생으로 잡아먹는 식인종들이 지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해도 되니 정말 너무나 먼짓 세계입니다. 선진화가 다 됐나 봐요. 좌우간, 씁쓸한 이야기를 그만두고 핵심을 말하자면 분명 (절차적) 민주주의에 쓸만한 면들은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측면도 보자는 말씀이죠.
국내에서는 민주화 과정은 약 50여년 걸렸지만 (소위 '건국'부터 김영삼, 김대중의 집권까지) 유럽 같으면 남녀 구분없는 보편적인 투표권 획득은 한 세기 이상 걸리는 경우들은 수두룩합니다.
영국을 한 번 보시지요. 1832년의 선거법 개혁으로 남성 중에서의 약 12%의 부유층 및 중산층만이 투표권을 얻어 전체 성인 인구 중의 투표권 보유자가 약 6%가 된 것이죠. 그게 하나의 시작이 되어 1918년과 1928년의 두 차례의 국민대표법 채택으로 드디어 재산을 기준으로 해서 투표권을 제한시키는 제도가 폐지되고 보편적 투표권이 획득됐습니다. 거의 한 세기 정도 걸린 셈이죠.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 과정에서 투표권이 '밑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획득된 측면은 큽니다. 예컨대 1830~40년대의 보통선거권 획득 운동인 차티즘 운동은 정치적 노동자 파업과 같은 강력한 민중투쟁의 수단들을 세계사에서 거의 최초로 발견한 셈입니다.
그런데 보통선거권이 밑으로부터 쟁취된 측면도 있지만, 또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영국에서 그때까지 없었던 징병제가 처음으로 실시되는 등 빈민까지도 총동원해야 할 강력한 '전시동원 국가'가 창출된 것이죠. 이 국가의 순량한 국민이 되어서 대륙으로 건너가 같은 노동자, 농민인 독일 병사들의 가슴에 아무 주저없이 총검을 박을 '충군애국의 평민'들을, 국가가 만들어야 했습니다. 평민들을 국가와 자산계급을 위한 살인자로 만들자면, 그들에게 겉으로라도 최소한의 참정권을 주어야 된 것이었고, 이러한 차원에서는 1918년의 '민주화'는 가난한 노동자에 대한 '체제 편입'의 기제이기도 했습니다.
또, 그들에게 최소한의 '국가 사회 구성원의 자격'을 주지 않으면 그들이 볼셰비키를 벤치 마킹해서 자신들을 4년 동안 죽고 죽이게 만든, 그 흡혈귀 같은 국가를 아주 박살낼 우려도 그 때에 컸습니다. 참정권을 얻어 기존의 '온건한' 정당들의 선전의 대상이 되어 기존의 정당 질서 속에 편입된 노동자가 덜 위험할 거라는 건 그 당시 지배자들의 계산이었죠.
아마도 누군가가 저에게 "그러면 수많은 빈민들이 투표권을 얻은 것은, 공산당 등 반체제 투쟁 단체들에게 유익하지 않았겠느냐? 그들이 왜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체제와의 싸움을 진행해 체제를 평화적으로 본격적으로 바꿀 수 없었겠느냐"고 물어볼 것입니다.
글쎄, 제1차대전의 종료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급진화 추세를 타서, 1922년에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최초로 영국 국회의원이 되긴 했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아무리 '민주화'된 나라라 해도 자본주의 국가인 이상 체제의 본격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영국 공산당 같으면 1926년 총파업 때에 '소요선동죄'에 걸려 그 지도자 12명이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하는 등 그 '신사적' 나라 영국에서 온갖 탄압들을 다 맛봤습니다. 그리고 감옥행만은 문제입니까?
"모스크바의 간첩들"이라는 모든 부르주아 신문들의 끝이 안보이는 비방전, 학교, 교회에서의 반공주의적 세뇌, 공산주의자들을 최악의 라이벌로 생각해서 그 배격에 모든 힘을 다 모으는 보수화된 노조 관료들의 악질적 방해... 형식적 민주화가 백 번 돼도, 이미 보수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급진 분자'들이 아무리 '침묵하는 대다수'의 객관적인 이해관계를 표방한다 해도, 절대적으로 지배자들의 이념적 헤게모니의 철사망을 뚫어버릴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급진 분자들은 (의회) 민주주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할수록 그들 스스로가 보수화의 길을 걸어 그 바깥의 사회와 동질화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공산당을 보시지요. 1950~55년간, 즉 제6회 전국협의회까지 무장투쟁의 노선을 걸었지만, 그후에는 (절차적)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 각급 의회 진출에 올인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는? 1972년에 491개의 의석이 있는 국회에 38명의 의원을 보내는 등 꽤 가시적인 "유의미한 정치적 소수자"의 위치를 획득했지만, 그 대가로 포기한 게 한두 가지이겠습니까? 무장투쟁 시기에 생사를 같이 했던 재일조선인 등 종족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거의 버렸다시피 하고, 노조는 관례화된 춘투 등에 안주해 보다 더 공세적인 투쟁을 포기하고,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매우 느슨하게 하는 등 '세계'에 대한 관심도 거의 잃은 듯했습니다.
결국 평화헌법 사수 등 '민주주의 수호'와 복지예산 증가 등의 제한적인 (현 체제 하의) 재분배 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보다 본질적인 사회개혁에 대한 욕망을 접고 만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실망으로 신좌파가 공산당을 버려 독자적 길을 걷게 됐는데, 신좌파의 경우에는 공산당 정도의 대중성마저도 잘 없었기에 결국 대중들과의 유리된 입장에서 극소수 영웅주의, 맹렬 가투주의 등으로 그 혁명적 에너지를 별 효과없이 소모시키고 말았습니다.
공산당과 신좌파의 분열은 일본 진보 운동의 일대 비극이었는데, 그 분열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공산당의 현실 안주, 혁명성 상실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의 적극 참여는 이처럼 과거의 혁명가들을 순치시키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의회)민주주의는 대단히 보수적이며 부족합니다. 직업 정치인들이 기업들의 막대한 정치자금을 이용해 유권자들에게 그 정치적 '상품'을 판매하고, 그 판매가 성공해 금배지만 달면 직업 관료, 기업인들과 하나가 되어서 기존의 체제를 기득권층의 이득을 위해 그대로 운영하는 것은,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라고 보기 힘듭니다.
이러한 의회민주주의를 급진적인 정치적 선전, 민중의 생활개선 투쟁 등을 위해 제한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자로서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수준에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진짜 민주주의는, 우선 착취자들의 선거 왜곡 (정치자금 증여 등)의 완전한 차단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보다 숙련공 정도의 보수를 받고 일절 특권이 없는, 언제나 유권자에 의해서 소환이 가능한 민중의 대표자들이 매순간 유권자들의 감시와 견제, 지도를 받고 유권자들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실행하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서 그러한 진짜 민주주의를, 꿈만 꿀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통상 민주주의라는 부르는 현 제도는 '짝퉁' 물건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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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있는가?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1124 19:30)
요즘 사학계에서 한 가지 파동이 일어나고 있다. 정권은 역사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냉전기 선전 표어를 넣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학자는 이 반역사적 시도에 맞서고 있다. 실은 일반인의 건전한 상식으로 봐도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 기초적 자유도, 민주주의도 없었다. 운동권 전력 때문에 군에 끌려가서 의문사를 당할 ‘자유’(?)는 있어도 국가적 살인의 실체를 밝힐 자유는 없었던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최근 몇십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해서 우리에게 점차 얻어졌다. 그러나 요즘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우리 민주주의가 내실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우리에게 과연 민주주의가 있는가에 대해 자신에게 묻기에 이르기도 한다.
세계인의 절대다수가 사는 계급사회에서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기준은 피지배자 저항권의 유무다. 지배질서에 명분 있는 저항을 벌이는 피지배자를 징벌함으로써 그 활동을 폭력적으로 차단해 버리는 사회는, 아무리 다당제 등 형식적 ‘민주주의’ 요소들은 있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심히 비민주적이다. 예컨대 비록 절차적 ‘민주주의’는 있는 것처럼 보여도 피지배 아랍인들에 대한 가차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이상 이스라엘은 실질적으로는 민주국가가 아니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피지배자의 신체를 구속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적 장식으로 치장된 기득권층의 집단적 독재일 뿐이다.
그러면 한국은 어떤가? 최근에 이 나라의 기존 질서에 가장 의미 있는 도전장을 던진 것은 ‘희망버스’였다. 비정규직과 하도급 노동자, 중소 자영업체 노동자 등 약 800만명의 불안 노동계층을 차별대우하여 초과이윤을 쥐어짬으로써 노동계급 전체를 분리통치하며 약화시키는 사회에서 희망버스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쳤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처럼 목숨을 내놓고 싸워도 정리해고를 철회시킬 수 없는 자본독재 사회에서 희망버스는 “정리해고 박살”을 내자고 호소했다. 지배계급의 두 개의 가장 중요한 이윤 수취 및 노동자 통제 도구, 즉 비정규직 양산과 정리해고를 정면으로 문제화한 것이었다. 거기에다 거의 1년 가까운 장기 투쟁 끝에 희망버스의 핵심적 당면 요구인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의 복직이 쟁취되고, 그 문제의식은 전사회에 퍼져가기까지 했다. 요즘 보수언론들마저도 비정규직 양산을 우려할 만큼 이 문제는 더 이상 노동계만의 이슈가 아니라 전사회적 이슈다. 그러면 한진 자본과의 힘겨루기에서 많은 이들의 연대를 얻어 힘겹게 이기고, 비정규직 문제를 인구에 회자되도록 만든 희망버스에 대한 지배자의 대응은 무엇인가?
아니나 다를까, ‘자유민주주의’ 타령을 일삼는 지배자들은 그들에게 제일 쉬워 보이는 방법을 택했다. 희망버스를 승리로 이끈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노동실장을 구속한 것이다. 담론적 대결에서 희망버스 쪽을 이길 수 없고 복직투쟁에서 여지없이 패배를 당한 지배자들은, 결국 구속이라는 이름의 노골적인 폭력에 호소하고 말았다. 자진해서 경찰서에 출두한 두 사람을 “도주의 우려가 있다”고 잡아간 것도, 한국 노동운동사상 가장 평화적이었던 시위를 이끈 희망버스 조직자들에게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한 것도 지금 한국 지배자들의 ‘민주주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짓밟힌 자의 편에 선 일밖에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은 시인을 잡아간 것은, ‘민주주의적’ 한국에서 행해지는 국가폭력의 하나의 단면에 불과하다. 지난 8월에 그저 동아리 회원들에게 북한 서적 몇 권을 읽혔을 뿐,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지도 않았던 ‘자본주의연구회’ 회장에게 내린 유죄판결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인가? 노동운동 차원에서든 대북문제에 있어서든 지배자들에게 ‘대드는’ 평민이 무자비한 사법 탄압을 받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우리 모두가 억압자들에게 같이 ‘대들어’ 양심수 석방과 사법탄압 중지를 요구하지 않고서는, 이 부끄러운 현실은 과연 달라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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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레프트의 화려한 귀환 or 진화 (레디앙, 2011년 11월 17일 (목) 00:50:20 박노자 / 오슬로대)
[한진중 투쟁 교훈] "도덕적 명분 선취와 폭넓은 연대 성공"
암울하기만 했던 아키히로(明博)의 치하에서 드디어 한 줌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비록 '진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한 때에 학생시절에 저까지도 교재 삼아 공부했던 국가보안법 비판서를 쓰쎴던 박원순씨라는 '양식이 있는 중도보수'가 된 데에 이어, 300여일 동안의 고공농성 이후에 '김진숙'을 상징으로 삼는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의 투쟁은 - 불완전하지만 - 일단 승리로 일단락됐습니다.
이 두 '사건'은 극우 정권의 점차적인 와해를 상징하는데, 특히 후자의 의미는 아주 깊습니다. 2003년 화물연대의 통쾌한 승리 이후로는 신자유주의 시대로서는 아주 보기 드문 노동자의 대대적인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해고노동자의 숫자는 비록 많지 않더라도 이 투쟁의 전례없는 가시성도, 역시 전례없는 각계각층의 지지도, 부산권 경제에서 한진중공업이 차지하는 위상도 이 승리를 매우 특별한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면, 가장 암울한 극우정권의 시대에 가장 전근대성이 심하고 악질적인 재벌을 상대로 한 이 투쟁이 극적으로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요? 40분 후에 제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그 음식과 숙제 등을 챙기느라고 더이상 자판을 두드릴 수 없을 것이지만, 남은 몇십 분 동안 일단 이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인들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둡시다:
1. '올드 레프트'의 화려한 귀환
이번 투쟁의 두 명의 상징적 인물인 김진숙 선생님과 송경동 시인은 대표적인 '1980년대형' 올드 레프트, 즉 정통적 좌파적 노동운동가들입니다. 계급의 이해관계가 몸과 마음에 밴 노동자 출신의 유기적 지식인들이고, 계급의 이름으로 투쟁하시는 분들입니다.
제가 꽤 좋아하는 송경동 시인의 시만 보더라도 당장 아시겠지만, 그 미학은 전통적인 '자연의 미' 등 서정 주제를 노래하는 미학도 아니고, 원자화된 개인의 의식의 심연을 파편화된 시선으로 고찰하는 포스트적인 미학도 아니고, 말그대로 투쟁의 아픔과 절규와 연대적 기쁨 속에서 태어나는, 그런 종류의 미학입니다.
지향은 약간씩 다른 부분도 있지만 송경동 시인은 김남주 시인의 적자, 문학적 계승자죠. 그런데 이 투쟁을 이끈 '올드 레프트'들은 훨씬 더 '소프트'화 되고 인권적 감수성이 성숙된 새 시대의 조건에 알맞게 투쟁을 디자인한 셈이죠.
쇠파이프와 화염병 대신에 그 자리에 '평화 시위'의 절대적인 강조가 들어와 오히려 경찰과 극우 알바 (어버이연합 등등)들의 폭력성을 부각시켰으며, 형식화되고 획일화된 율동과 구호 대신에 그 자리에 다양한 걸개그림, 퍼포맨스, 공연, 아동작가 등 여러 창조적인 지식인들의 참여가 들어온 것입니다.
시청각적 표현을 즐기고,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새 시대의 지향 맞게 투쟁은 재기발랄하고 절대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위 시작할 때에 남녀 간 공개 키스를 하고 다양한 음악을 즐기는 칠레 학생들의 시위, 즉 현재의 세계좌파 투쟁의 중심이 된 남미의 시위 문화의 예술성에 근접한 듯한 느낌입니다. '포스트'의 무의미한 늪에 빠지지 않고도 '올드 레프트'가 잘 진화돼 새 시대와 코드를 맞출 수 있다는 걸, 이번 승리는 잘 보여주었습니다.
2. 도덕적 명분 선취(先取)
이 나라 대한민국의 유일한 진짜 '국시'는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잇속을 챙기고 자기 식구 정도 챙겨주고 나머지 세상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은 이 쪽에서 지독하게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죠.
그런데 또 그러한 사회인만큼, 식구가 아닌 타인을 위해 자율적으로 희생을 하는 사람은 커다란 존경을 받을 수 있고 도덕이 없는 사회의 도덕적 명분을 효율적으로 차지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은 안중근을 존경하는 이유를, 오로지 민족주의로만 봐야 하는가요?
그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얼마든지 일본 유학쯤 하고 통감부, 총독부 밑에서 주사직이니 군수직이니 맡았을 수도 있었던 부유한 지주의 유식한 아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불특정 다수를 위해 목숨까지 던진 것은 우리에게 유쾌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쉽게 보기 드문 일이기에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정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해서, 김진숙 선생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입체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직접적 인연도 없는 동료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로 농성을 하는 드라마틱한 운명의 여활동가 대 부를 세습한 악덕 재벌... 이 대립구도에서 선악이 너무나 분명해 노동운동을 싫어하는 '시민'들마저도 그 압도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폭넓은 연대
임금노동자는 이 사회의 다수(약 70%)지만 조직 노동자는 소수(약 9%)에 불과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전투적인 조직노동자 활동가는 아주 극소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립되지 않고 승리하자면 연대는 생명입니다.
이념과 이해를 약간 달리해도 적어도 이번 싸움에서 우리와 같은 진영에 서줄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그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찾아 우리 쪽에 데려와야 합니다. 이번 운동은 머나먼 미국의 촘스키 선생이라는 전세계적 '운동권'의 거목부터 필리핀에서 한진의 착취를 당하는 이국 동료까지, 국내 야당 정치인부터 미술인, 작가까지,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의 월경적(越境的) 연대를 건설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박원순의 당선으로 표현된 최근의 신자유주의와 극우정권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 반응, 즉 "특권층 1%"에 매우 불리한 국내외의 '분위기'도 작용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적절히 활용한 이번 투쟁의 건설자들에게 정말로 존경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이제 아이가 곧 귀가할 것 같아, 아무래도 마무리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투쟁은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노동자 등 벌써 몇년 간 기록적인 (세계에서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최장기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도 사회 전반의 연대를 필요로 하고, 비정규직 고용 사유 제한의 법제화, 현존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한 투쟁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승리가 자양분이 되어서 개별적 직장의 범위를 넘는 지역적, 전국적 비정규직 투쟁이 조직되어, 노동계의 총체적 공세가 시작되는 것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공세야말로 이번 승리를 최종적으로 의미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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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극우파가 극성인 이유 (레디앙, 2011년 10월 28일 (금) 17:12:02 박노자 / 오슬로대)
신자유주의 복지국가의 귀결…좌파 제대로 하면 사라져
요즘 유럽 정치 현실의 한 가지 불가사의한 화두는 그나마 공황을 비교적으로 잘 비켜가는 나라들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누리는 높은 인기다. “위기가 극우들의 극성을 부른다”는 상식(?)에 완전히 어긋나는 사실은, 국가 파산과 사상 최악의 생활 수준 저하를 맞고 있는 그리스에는 극우보다 각종의 좌파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 국회에서 극우라고 할 수 있는 '민중 정교회 소집'당은 전체 300의석 중의 15의석 밖에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중도 우파(신민주당) 외에는 국회의 주도 세력들은 사민주의자(154의석), 공산주의자(24의석), 신좌파(9의석) 등이다.
고전을 거듭하는 그리스는 '좌경화'돼 있는 것과 정반대로는, 재정 상황은 유럽연합 안에서는 가장 양호한 편에 속하는 핀란드는 지난 2011년 4월 총선에서 전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었다. 극우 포퓰리즘의 전형에 가까운 '진정한 핀란드인'(Perussuomalaiset) 정당이 돌연히 19%의 득표율을 보여 국회 제3당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와 같은 '포퓰리즘의 폭발'은 하필이면 왜 위기에 비교적으로 덜 노출된 유럽 나라에서 터져야 했을까?
핀란드뿐만인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극우포퓰리즘이 가장 극성을 부리는 또 하나의 스칸디나비아 나라는 바로 스칸디나비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제일 높은 (7만9천 달러 정도 되는) 노르웨이다. 노르웨이 같으면 대표적인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소위 '진보당'(Fremskrittspartiet)은 2009년 총선에서 국회의 169 의석에서 41석이나 차지했다.
지난 9월에 치러진 지방자치 단체 선거에서 득표율은 11.4%까지 급락했지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진보당의 전(前) 당원인 아네르스 브레이비크가 2011년 7월 22일에 노르웨이 사상 최악의 대량 살육을 감행하여 70여 명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진보당은 당연하게도 브레이비크의 범행과의 그 어떤 관계도 부인하고 그 범행을 강력 규탄했지만, 진보당 당원 사이에 만연된 반이슬람주의적, 인종주의적 분위기가 브레이비크의 광적인 민족주의적, 배외주의적 세계관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만인이 다 인지하는 사실이다.
문제는, 브레이비크의 범행이 어느 정도 과거 속에 묻혀 망각될 몇 년 후 같으면, 진보당은 얼마든지 그 2011년 초기의 지지율, 즉 25~30%의 지지율을 확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사회에서 극우 정당의 지지율이 이 정도 된다는 것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의아하게 생각하게끔 하겠지만, 그럴 만한 객관적 이유는 분명히 있다.
핀란드나 노르웨이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사회에서 극우주의 지지자들이 이 정도로 많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현실 같지만, 실은 이 두 사회에서 오랫동안 주도적 역할을 해온 온건 좌파의 신자유주의적 변질의 불가피한 결과라 하겠다.
핀란드 같은 경우에는 사민당의 바워 리뽀넨(Paavo Lipponen)은 1995~2003년간 국무총리이었는데, 바로 그 때에는 신자유주의가 핀란드 사회 속으로 깊이 삼투되기 시작했다. 자본의 초(超)국가적 운동에 일체 장벽이 거의 제거돼 핀란드의 10대 대기업들의 해외 피고용자 비율은 2002년에 거의 60% (1982년에는 불과 15%이었다)에 달했는가 하면, 비정규직 고용이 '자율화돼 특히 저임금, 여성 노동자 중심의 비정규 노동이 사회에서 보다 큰 몫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 전체 근로자 중의 비정규직의 비율은 이미 21%에 달했는데, 이는 유럽연합의 평균치(14%)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었다. 70%의 비정규직은 정규직 전환을 희망함에도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불가능해서 비정규직의 자리에 남아야 하는 '비자율적 비정규직'으로 분류되었다. 1980년대 말 같으면 핀란드에 거의 없었던 노동파견 회사들은, 1990년대 말에는 이미 약 15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는데, 이와 같은 업체에서의 평균 고용기간은 50일 정도이었다. 한 마디로, 리뽀넨의 정부는 1990년대 초반의 불황을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강화된 착취 등을 통해서 극복해보려 했던 셈이다.
노르웨이 같은 경우에는, 비록 비정규직의 비율(9% 정도)은 유럽에서 비교적으로 낮은 편에 속하지만, 1990~1997년 온건 좌파인 노동당의 집권 시에 국유였던 대기업의 부분적 사유화를 추진하고 '노동의 유연화'를 장려하는 등 공장을 저임금 국가에 이전하려는 기업들의 해고를 제대로 막으려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불안 심리가 조장되는 동시에, 기업세 인하 정책 등의 효과로 거부(巨富)들의 수는 늘어나기만 했다. 노동당이 다시 정권을 잡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초(超)부자의 수가 두 배 늘어나 지금 180명에 달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유연화에 가장 노출된 토건업 같은 부문에서는 오슬로 지역 같으면 약 25%의 노동자만이 정규직이고 나머지는 국내나 외국에서 파견된 비정규직이다. 한 마디로,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온건 좌파는 복지국가의 골간을 유지하되, 사회의 점차적인 신자유주의화를 상당 부분 허용했으며, 1~2%의 최상층(부유층)과 10~15%의 빈민층, 준(準)빈민층의 극적 성장을 추동하는 과정에서 사회를 상대적으로 불안화시킨 바 있었다.
그리스의 경우 지금 사민주의자들은 민중들에게 매우 아픈 예산 삭감 정책을 집행하는 등 다수와 점차 괴리가 벌어져가고 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기본적으로 민중들에게 그나마 덜 고통스러운 국가자본주의적 기본틀을 간직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지금 예산 삭감 정책에 대한 민중의 투쟁을 이끌어가는 여러 세력 중의 하나다. 즉,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이들은 그리스의 경우에는 대중적 좌파 정당이라는 배를 얼마든지 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핀란드나 노르웨이는 그렇지 않다.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온건 좌파야말로 199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의 전위가 된 셈이다.
노동시장 불안화, 소득 격차 급등 등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은, 노르웨이의 노동당이나 핀란드의 사민당의 문을 두드릴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노르웨이에는 노동당보다 더 왼쪽에 있는 사회주의 좌파당(SV)이나 적색당(Roedt) 등이 있는데, 전자는 노동당의 들러리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으며, 급진적 지식인 중심의 후자는 대중성이 약해 노동계급에 잘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핀란드 좌익동맹당(Vasemmistoliitto)은 사민당보다 왼쪽에 있다고는 하지만, 1995~2003년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해온 사민당의 내각에 참여하는 등 신자유주의 반대 세력으로서의 자격은 심히 모자란다. 결국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미래의 대한 확신을 잃고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저임금 노동자, 영세업자 등은 과연 어떻게 투표하게 될 것인가?
특히 저임금 노동 시장에서 이민자들과의 경쟁을 벌이게 되는 상황에서 이민 제한 정책을 내세우는 극우 포퓰리스트들에게 가버릴 확률은 꽤 높다. 물론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제시하는 배외적인 정책들은 신자유주의적 노동 위기의 그 어떤 진정한 해결책은 될 리는 없다. 이민자들을 배척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에서의 저임금 노동의 불안함이 개선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극우들의 정치담론은 신자유주의로 변질된 온건좌파의 허를 찌르는 부분들은 분명 있다. '진정한 핀란드인'이 핀란드 정당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럽연합을 강경 반대하는 것은 그 사례다. 그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민중의 생계 파괴에 앞장서는 유럽연합에 대한 원칙에 충실한 반대를, 왜 사민당과 좌파동맹당은 못하고 있는가? '온건함'이라는 이름의 그들의 변질과 무능은 결국 극우들의 발호를 가능케 했다.
좌파가 좌파답게 실천하기만 하면 극우들이 극성을 부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좌파답게 한다는 것은, 1990년대 이래 '“주류'가 돼버린 여러 담론들을 과감히 반대하고, '주류'에서 어쩌면 비인기 집단이 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좌파답게 한다는 것은 부유층에 대한 과세 강화, 유럽연합에 대한 반대, 민영화에 대한 절대 반대와 자원과 에너지 등 핵심 부문 대기업과 은행의 국유화 지지, 그리고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대한 우선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간다면 부유층과의 정면 충돌도 각오해야 하고, 독일 등 유럽연합의 중심 국가 지배층과의 충돌 가능성도 각오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고, 계속 우경화해온 노르웨이나 핀란드의 온건 좌파가 결코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길로 가지 않는 이상 '진보당'이나 '진정한 핀란드인' 정당과 같은 부류들이 상당수 노동자의 표를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좌파가 노동계급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기지 않으면, 좌파를 중심으로 해서 뭉쳐진 노동계급의 정치적 정체성 자체가 점차 흔들리게 되고, 어쩌면 부분적으로 해소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계급의 정치적 정체성이 위험에 처해지는 일이야말로 1990년대 이후로 유럽 부국(富國)들의 온건 좌파가 택한 길의 가장 무서운 결과다.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자체가 치명적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에는, 과연 그들이 좌파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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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한겨레,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1027 19:27)
동구권 몰락 이후 최근 20년 동안 국내외에서는 우파와 ‘온건’ 좌파는 한 가지 재미있는 유사성을 보여왔다. 둘 다 ‘실패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심한 거부반응을 보여온 것이다. 우파야 동구권의 몰락을 시장경제에 대한 본질적인 변혁의 원천적 불가능함의 증거로 삼아온 것이지만, 체제 속으로의 편입을 희망하는 주류 좌파로서도, 자본주의의 고칠 수 없는 결함을 강조하고 본질적 변혁의 불가피성을 주장해온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불편할 뿐이었다.
중도좌파 정당들은 복지국가 건설이나 유지 정도의 타협적인 목표를 제시해왔는가 하면, 좌파 지식인들은 계급모순보다 성차·인종·문화의 문제에 집중했으며, 상품생산 과정에서의 착취나 소외보다 ‘욕망생산’의 왜곡 등을 파헤치곤 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최근 20여년 동안의 배타적 태도는 과연 정당한가? 마르크스는 정말 ‘실패한 예언자’였던가? 최근 국내외의 상황으로 봐서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메시지가 그대로 유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이해의 중심에는 무산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모순 관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생산과정에 대한 관리권 없이 그저 관리의 대상물로 전락한 노동자가 결국 상품이 된 그 노동과 함께 자신도 상품화되어 인격체로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빈곤화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상황을 본다면 과연 이 진단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가? ‘다시 한번 무산화된 이중적 무산계급’인 비정규직은 생산과정에 대한 관리권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산의 주체인 회사에 대한 소속감마저 없다. 그 노동이 일회용품처럼 쓰였다가 버려지는 과정에서 그에게는 인격체로서의 하등의 존엄성이 허용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그는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빈곤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는 인간의 신체나 감정부터 신까지 다 상품화되어 교환가치로 환원된다고 이야기했는데, 한국 사회를 한번 봐도 그게 얼마나 타당한 지적이었는지 당장 알 수 있을 것이다. 몸을 말 그대로 상품 삼아 파는 성매매를 2004년 이후로 ‘근절’한다고 이야기해왔지만, 실제로 달라진 것은 수법이 교묘해지고 종사자가 1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해외원정 성매매까지 번창해지는 등 ‘국제화’가 진행되는 것뿐이다. 노동 자체뿐만 아니라 미소나 ‘상냥한’ 태도까지 팔아야 하는 백화점 종업원들의 감정노동은, ‘친절’에 대한 주류사회의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오히려 더 가혹해져 가고 있다. 사찰, 교회 할 것 없이 종교들이 서방정토나 낙원에의 ‘입장권’을 팔아 돈을 버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아무리 최근에 사회적 비판이 거세도 하나도 바뀐 게 없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인간의 모든 것이 물화되어 거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우리 사회의 누구나 볼 수 있는 현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유효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듣는 질문은 “만약 계급적 모순이 일차적이라면 왜 국내 노동자들이 이 모순들을 잘 자각하지 못하고 계급투표를 거의 못하는가, 왜 계급의식의 수준이 그렇게 낮은가”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물적 토대(사회의 계급적 구조)와 상부구조(집단 의식 등) 사이의 연결은 자동적이지 않고 ‘정치’라는 장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이간질해 분리통치하고 노조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켜놓고 보수화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이 사회의 지배자들이 저들의 노동자 계급의식 형성 방지 정책에 여태까지 많이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공은 과연 영구적인가? 오늘날 ‘희망버스’에 대한 폭넓은 지지로 봐서는, 노동문제는 이제 사회의 중심 의제가 돼가는 것이다. 결국 다수의 노동자들이 계급적 연대 없이 상품화와 착취의 지옥을 탈출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것이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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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보이는 손'만 있다 (레디앙, 2011년 10월 21일 (금) 09:48:02 박노자 / 오슬로대)
공황과 민중의 고통…고장 수리 말고 새 체제 상상하자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으로 자기 조절 능력을 완전히 갖춘 것으로 잘못 알려진 자본주의도, 생각해보면 10개월짜리 아이와 본질상 똑같습니다. 실제로는 기본적인 자기 보존 능력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보존, 장기 지속을 보장해주는 것은 그 '보호자'로서의 국가의 정치력과 군사력, 경제 조절 능력이지, '시장' 그 자체는 궁극적으로 자기 조절에 완전히 실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본주의란 기본적으로 이윤 추구를 통한 자본의 지속적인 확대재생산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윤률이란 지속적일 리는 없습니다.
콘드라티에프라는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경제 학자가 묘사한 '장기 주기'(약 70~80년) 동안 이 이윤률이 점차 떨어져 나가는 것인데, 특히 콘드라티에프 주기의 후반기(현재로서는 1973~1980년 이후)에는 제조업 등의 이윤률은 매우 현저히 떨어져 제조업 주요 부문들의 위기를 촉진합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손'은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합니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대응 방법들이 관찰되는데, 이 모든 방법들은 궁극적으로 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더욱더 심화시키는 역효과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저임금 노동의 과도한 착취에 의한 초과 이윤 수취
이 방법은, 중국이나 월남 등 과거 '현실 사회주의' 나라였던 사회에 자본이 침투해 저임금 노동력을 무차별 착취하는 것과, 핵심부/준핵심부 (특히 한국이나 스페인과 같은, 노동자 보호가 잘 돼 있지 않은 사회에서)에서 상당수 노동자들을 비정규화시켜서 그 임금 착취를 강화하는 것 등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자본 증식 속도 가속화의 일시적인 효과를 낸다 해도 결국 벽에 부딪치고 맙니다. 저임금 국가 노동자들의 투쟁에 탄력이 붙어 그 쪽 임금은 결국 꽤 오르기 시작하고, 핵심부/준핵심부의 비정규화된 노동자의 구매력이 떨어져 소비 시장의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이윤 극대화의 효과는 있어도 결국 장기 지속이 불가능한 수법인 셈이죠.
2. 기술 혁신에 의한 신상품 개발, 새로운 상품 시장의 창출
여기에서는 컴퓨터, 인터넷, 소프트웨어, 휴대폰은 대표적 사례가 되지만, 그 신시장의 이윤이 처음에 좋았다가 결국 과잉 생산, 괴잉 경쟁에 의해서 깎아져 궁극적으로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10여년 전에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닷컴' 주식(인터넷 업체 주식)이 일체 떨어지는 등 인터넷 기업 버블이 터져 경제 위기가 조성됐다가 이라크 침략 등의 특수로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군수 업체 주식의 리드에 따라 증시 전체가 올라간 것을 잘 기억하시고 계시지요?신상품 시장의 불가피한 버블 형성과 위기를 모면하는 값은 폭탄, 포탄, 총탄, 수류탄의 연기 속에서 비참하게 죽고 질병, 영양실조로 죽어나간 약 60~70만 명의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체제 안에서는 비서구인의 목숨은 기본적으로 '인명'으로 인정되지 않기에, 이라크 침략을 주도한 부시 등의 전범들은 지금도 이 나라 저 나라를 즐겁게 돌아다니면서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3. 산업부문에서 금융부문으로의 자본의 유출
주택담보 대출, 가계 대출의 미증유의 활성화에 따라 부동산 버블이 생겼다가 터지고, 가계빚의 피라미드 밑에서는 궁극적으로 신용 불량자들이 하늘만 아는 고통을 겪게 되고 소비시장은 결국 위축됩니다. 지금 국내 같으면 가계대출 금액은 가처분 소득의 146% 정도 되는데, 이건 이미 미국, 일본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지금까지는 다수의 가계부채를 늘리면서 은행 자본이 짭잘한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었는데, 머지 않아 파산자의 대량화에 따라 은행 자본도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가계부채의 버블은 한국형 신자유주의 위기의 도화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융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원자재와 자원, 특히 석유 등을 놓고 투기를 벌여 소득을 올리는 수법이 발전되는 것인데, 그 투기의 효과로는 지금 유가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준(배럴당 100불 이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위축되는 것은? 산업부문과 소비자들이죠. 결국 이윤의 최대화를 노리는 투기자본은, 경제 전체의 수익성을 죽이고 마는 것입니다. 도대체, 높은데에 잘못 올라갔다가 결국 거기에서 떨어져 죽을지도 모를 10개월짜리 아이하고는 무엇이 다르단 말에요?
4. 비시장적 부문의 시장화
이는 무엇보다 의료와 교육의 시장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국내 같으면 예컨대 '의료 관광객'의 극심한 유치 정책 등은, 바로 잉여자본들이 의료 부문에 마구 진출하려 하는 상황과 직결돼 있습니다. 사립대학의 실질적인 영리기업화와 등록금의 살인적 급등도 이 경향의 일환입니다. 학생들을 등쳐먹고 비정규직 교원들을 등쳐먹고 청소 노동자까지 등쳐먹어야 대학 자본이 건설 자본에 발주를 해서 필요도 없는 새 건물을 짓게 하는 등 토건 자본주의 기본틀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결과는? 상당수 학생들의 빈민으로의 전락인데, 이것도 - 그 비인간적인 측면들을 차치하더라도 -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소비 시장의 장기 지속에 전혀 기여하지 못합니다. 소비 시장으로서는 여유 있는 고객들이 필요하지, 등록금을 내기 위해 굶다시피 해야 하는 고학생들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이윤률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잉여자본들이 어딜 가도 결국 그 결과는 수백, 수천만, 수억 명의 죽을 고생과 폭사, 병사, 전사, 그리고 궁극적인 경제의 치명적 위기와 공황의 도래입니다. 자본의 부채를 국가가 도맡아도, 결국 국가가 파산 위기를 맞는 것이죠.
그러면, 자본주의를 살리는 궁리를 하느니, 차라리 '자본주의 그 다음' 사회를 상상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 살인적인 체제는 수정자본주가 되든 그 어떤 자본주의가 되든 어차피 결국 고통과 사회적 위기만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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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철폐 혁명에 나서자" (레디앙, 2011년 09월 30일 (금) 09:38:02 박노자 / 오슬로대)
"중고생 과도한 학습 짓눌려 투쟁 나서지 못한 것 아쉬워"
오늘 아침에 갓난 딸을 봐주어가면서 우리 적색당의 소식지를 간간히 봤습니다. 이번 호에서 저에게 가장 흥미로운 기사는 소식지의 말미에 실린 적색당 청년 조직의 수장인 이베르 어스테볼 동지(Iver Aastebøl)의 "숙제 철폐론"이었습니다.
실은 숙제 철폐는 지금 이 조직의 가장 중요한 당면 투쟁 과제로서, 숙제 철폐를 위한 학생들의 시위를 조직하는가 하면, 바로 지금(2011년9월26~30일간) 숙제 철폐를 위한 전국적인 학생들의 동맹 휴업, 즉 맹휴까지도 조직합니다. 맹휴 참여는 한 시간 동안의 수업 참여 거부와 숙제 철폐를 위한 서명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지금 참가 의사를 밝힌 학생들은 700개 학교 4만 명이라고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재미있게 본 기사는 바로 이 운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인 셈이었는데, 그 논리가 정연하여 국내로서 잘 이야기되어지지 않는 부분인지라 여기에서 한 번 논해볼까 합니다.
적색당 청년 조직의 입장에서는, 학생은 기본적으로 학습노동자입니다. 학생에게 의무적인 학습노동을 강요하는 "학교"라는 기관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1) 소년, 소년, 청년들에게 권위와 권력에 습관적으로 복종하는 유순한 심신을 배양토록 유도하는 등 친체제적 방식으로 미성년자들을 사회화하고 2) 학습노동을 통해서 학생들을 주어진 과제를 지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시간 엄수 등에 익숙해진 예비노동자군으로 편성시키고 3) 성적을 매개로 해서 아동 각자의 계급적인 신분상승의 한계를 규정짓는 곳입니다.
말하자면 학생들이 '학습 공장'의 노동자가 되는 셈인데, 노르웨이에서 노동자라면 하루의 8시간 노동을 마치고 일단 그 휴식 시간에는 직장에 대해 아무 생각하지 않고 즐길 것이나 즐기면 됩니다. 그러면 왜 예비노동자인 학생들은, 성인노동자들과 차별돼 그 자유시간까지 학습노동에 바쳐야 하는가, 라는 것은 "숙제 철폐론"의 법리적인 기반입니다.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숙제란 학습노동자의 개인 시간까지 "학교"라는 체제의 기관이 무단 침범해 식민지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물론 아동들의 개인 시간을 식민지화하는 것은 숙제뿐입니까? 체제의 논리를 가장 입체적으로 방법으로 은근히 전달하는 텔레비전부터, 유희를 통해서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을 자연스럽게 배우게끔 하는 컴퓨터게임이라는 소프트웨어 자본의 상품까지, 국가와 자본이 아동들의 시간을 식민지화시키고 그 심신을 체제의 규칙대로 맞추어 개조시키는 매개체들이야 무궁무진합니다.
이들 모두가 당연히 사회주의자들의 투쟁대상이 돼야 하지만, 숙제라는 이름의 아동들에 대한 폭력은 공공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그 투쟁은 보다 시급합니다. 숙제는 추가 학습노동으로서의 성격도 있지만, 무엇보다 계급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제로서의 성격은 강합니다. 고백하자면 저만 해도 저녁마다 아홉살 아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검토해주느라고 꼭 30~40분 정도 보냅니다.
저야 정신노동을 하니까 집에 와서 이런 추가 노동을 할 여력은 그나마 있지만, 8시간 동안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고 붙이고 나서 한 번 아이 숙제를 도와주어보시지요. 파김치된 상태에서 숙제를 도와주다가 그저 자버리고 말 가능성은 높습니다.
거기에다가 예컨대 제 아내만 해도 아들의 노르웨이어 작문 및 문법, 맞춤법 숙제를 도울 능력이 거의 없고, 많은 비서구 1세 이민자 학부모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결국 부모의 "개인 코치"를 받아 숙제해온 아동(저희 아들의 학급에서는 약 3분의 1 정도)들과 그렇지 못한 아동, 특히는 육체노동자, 이민자 가족의 아동들 사이에 적지 않은 "학습능력 격차"가 생기고 맙니다. 그 격차는 나중에 내신 격차로 이어지고, 내신 성적대로 대입이 이루어지는 노르웨이적 상황에서 고인기 학과 진학 가능성의 차이로 또 이어집니다. 노르웨이 사회 상층부의 상당 부분은 법대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법대에 진학하자면 내신은 꽤 좋아야 합니다.
한국도 아닌 노르웨이지만, 저숙련 저임금 육체 노동자의 자녀로서는 법대 가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죠. 숙제를 철폐하면 이와 같은 상류층, 중류 상부층의 아동들만의 "프리미엄"이 사라지고 그나마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기회가 약간 더 주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쓰고 나니 한 가지 반론은 벌써 예상됩니다. 아이들의 학습량을 줄여서 모두들을 바보로 만들 생각이냐는 식의 반론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우리가 바로 봐야 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의 실제적 실효성이 매우 제한돼 있기에, 그 지식의 주입을 조금 덜 받았다고 해서 사회생활에 지장이 생길 일은 전혀 없습니다. 예컨대 일반 기업체 사원 같은 경우에는 영문으로 된 업무상의 편지를 읽고 간단한 영어 서신을 작성할 능력까지는 필요할 수 있지만, 외국 바이어와 구두교섭할 일이라도 있으면 그 자리에 일반 사원이 아닌 외국어 계통으로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쌓은 전문가를 보낼 것입니다.
수학의 원칙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으면 나쁠 일이야 없지만, 계산을 어차피 계산기로 하는 직장에서는 과연 암산부터 고등 함수까지 어느 정도 실용성이 있는가요?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으면 씩 웃고 "주변부형 파시즘을 공연히 미화하는 것이군"이라고 촌평할 정도로 역사를 배운 것도 나쁠 게 없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연도, 사건" 위주의 "국민"과 "민족" 이야기의 한계도 누가 봐도 뻔한 것이죠.
사실 너무나 몸에 가까이 와닿고 재미있을 수도 있는 역사를 무미건조한 "교과서"로 만들어버리고 학생들의 역사에 대한 취미를 애당초 죽이는 것은 정말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좌우간 학교 공부와 우리들의 실생활은 아주 딴판임으로, 학교 공부의 "양"을 적당히 줄인다는 것은 우민화는 절대 아닙니다.
아동들의 해방운동입니다. 아이들이 방과후 과정에 다녀도 4시반에 집에 오는, "학원"이라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노르웨이에서마저도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백베, 천배 더 그렇겠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20세기의 교육대중화의 과정에서 대개 교육내용의 간소화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100년 전의 노르웨이 고등학교 졸업자는 라틴어와 고대 희랍어,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자유자재로 했어야 했고, 성경책의 내용을 꽤나 자세히 알아야 했습니다.
고학력자나 개인 과외 선생을 붙일 만한 여유가 있는 부자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닌 이상, 아주아주 버거운 고난도의 커리큘럼었죠.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은 다 그랬습니다. 실효성은? 1902년에 런던에 처음 온 레닌은 비록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아주 많이 배웠다 해도 영국인들이 말하는 걸 한 마디도 알아먹을 수 없었답니다. 그나마 문법 정도 다 알고 독해력은 있었으니까 그다음에 약 반년 동안 속성으로 다 다시 배운 거죠.
지금 같으면 아이들에게 고전 언어의 학습은 순전히 자율에 맡겨져 있는 문제입니다. 라틴 문학이 좋아서 학습하려는 이들은 (노르웨이 같으면 충분히 있는) 여유시간에 아주 열성적으로 하는 것이고, 관심없는 다수는 라틴어 강제 주입의 악몽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난 것이죠.
저는 이를 일종의 해방으로 봅니다. 강제되어지는 숙제보다는,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 독서에 재미를 붙이게끔 하는 자율적 독서의 지도가 필요하지요.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숙제를 하는 것보다 본인이 알아서 하는 독서에서 훨씬 더 많은 알찬 공부를 하게 됩니다.
물론 특히 교육경쟁에 미칠대로 미친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숙제 철폐의 혁명"은 당장 이루어지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당장의 혁명은 어려워도, 진보세력들은 점차적 학습량, 학습시간의 감소 쪽으로 교육개혁의 방향을 트는 것은 맞는 것이고, 아이들도 조직해서 투쟁을 통해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을 도와주는 게 좋을 듯합니다. 1920년대 조선 같으면 동시대의 노르웨이보다 학생들의 맹휴들은 훨씬 더 치열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과도한 학습에 억눌린 중, 고등학생들이 그러한 투쟁에 잘 나서지 못하는 것은 아주 아쉬운 일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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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종교 제국주의? (레디앙, 2011년 09월 24일 (토) 08:23:22 박노자 / 오슬로대)
영혼 매매는 성 매매보다 치사하다…'종교 업자'의 실체
망국 직후의 혼란과 초과 인플레이션에 의한 상상 이상의 민생고, 영양실조에 시달리기 시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낮에도 길거리 다니기가 무서워질 정도로 악화된 치안상황... 소련 체제와 함께 정의로운, 형제애에 기반하는 사회를 만들어보겠다는 민중들의 수백년 간의 꿈까지 일시적으로 무너져 세상만사가 그저 병리적인 이기주의와 무조건적 생존, 치부의 논리로 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죽은 코끼리의 시체 앞으로 하이에나들이 운집하듯이, 죽은 소련의 시체를 밟으면서 약간의 이득을 취해보려고 온갖 부자나라 '종교단체'들이 이 죽음의 곳에서 비상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물론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장 가시적이었지만, 의외로 한국 선교사들도 많았습니다. 현재 같으면 구소련에서 공식적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선교사들은 577명이나 되지만(등록하지 않고 활동하는 이들까지 포함하면 천여명이 될 것입니다) 20년 전 레닌그라드만 해도 적어도 30~40명으로 기억합니다.
그들의 언행 중에서 지금도 잘 기억되는 것은, 무엇보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심이었습니다. "너네들이 70여년 동안 공산주의를 했기에 지금 이처럼 가난하게 된 것이고, 우리 같으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장사를 잘한 덕에 이처럼 부유하게 되고 복을 받았다"는 대조법 정도는 거의 공인된 레토릭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러시아 같으면 종교인으로서 거의 보기 드문 물질적 '시혜'에 대한 맹신이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음식 등을 제공해주고 돈 벌 기회도 가끔 주고 나중에 한국 단기 유학 기회 정도 마련해주면 '성령'의 내림을 받지 않을 젊은이가 없다는 것 역시 대다수의 확신이었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라는 대한민국의 '우방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너진 구(舊) 적대국에서 저들은 위풍당당한 정복자들이었습니다. 이제 항복한 옛 적들의 과거를 심판하고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돈이라는 무적의 무기를 가진 정복군이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도 그러한 방식으로 처신해서 사회적 분노를 산 것인가요?
이 정복군을 대하는 데에 잇어서 무너진 나라의 '원주민'들은 크게는 세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스리랑카의 경우처럼 민족주의적 신념이 강하거나 공산주의적 이상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저항파'는 모든 유혹들을 뿌리치고 정복자들과의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경향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접근이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완전히 무너진 나라에서는 한국 종교 제국주의에 끝내 맞설 사람들은 너무나 드물었습니다.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의 유리 왕인 교수같이 철저한 공산주의적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스탈린주의적) 세계관의 소유자마저도 '3.1문화센터' 등 선교단체들과의 협력을 거부하지 못할 정도이었습니다. 단, 유리 왕인 교수의 경우에는 북-러 친선단체에서 계속 활동하고 대북교류를 계속하는 등 북조선과의 전통적 친교를 포기하지 않고 유지했다는 측면에서 역시 지조를 지키셨다고 봐야 합니다. 심지어 돌아가시는 마지막 해까지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셨던 제 스승님 미하일 박교수까지 일부 선교사와의 협력을 받아들이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하들까지 먹여주기 위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던 셈입니다.
보다 흔한 두번째 그룹은 저 자신처럼 '면종복배'(面從腹背)로 일관하는 '내키지 않는 협력자'들이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정복군 안내자 노릇을 해도 가면 갈수록 '부역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파도처럼 일어났던 것입니다.
저 같으면 캐나다 출신의 한 한국 목사의 통역 노릇을 몇개월 동안 했는데, 낮에는 통역을 하고 저녁에도 "성금을 많이 내는 것은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과 같은 이야기를 통역해야 했던 제 자신은 과연 어떤 인간인가에 대한 자기혐오적 명상에 잠기곤 했던 것입니다.
정복군들에게 성매매하는 게 더 나쁜가, 아니면 혼(魂)매매하는 게 더 나쁜가, 라는 화두에 대해서 제가 그때에 꾸준히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후자가 더 치사하다는 생각으로 정리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개월 혼매매 업소(?)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주로 관광가이드 등의 아르바이트로 전환했지만, 혼매매 업소에서 보낸 그 몇개월에 대해서는 지금도 가끔 악몽을 꿀 정도입니다.
끝으로는, 세번째 그룹은 정복군에게 아예 항복을 하여 정복군이 강요하려 했던 영적인 '변발변복'(?髮變服), 즉 '신앙고백'하고 "열심히 하나님에게 빌어야 돈도 들어오고 복도 온다"는 정복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아무래도 협력해나가면서 호구지책을 도모하는 것은 그래도 더 쉬웠을 것입니다.
제국주의가 지나가면 남는 것은 부역자로 구성된 무(無)명분의 지배층과 기형적인 대외 지향 일변도의 경제, 그리고 지식인 계층의 매판화와 그 쌍둥이로서의 병리적으로 과장된 일각의 민족주의 등등입니다. 그 트라우마를, 사회는 반세기가 지나도 다 치유하지 못합니다.
한국의 2만여 명의 해외파송 선교사들이 상징하는 종교적 제국주의가 지나가면 무엇이 남는가요? '선진문명'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돈 좀 주면 '원주민'의 내면의 풍경도 바뀔 수 있다는 데에 대한 '원주민' 사회의 마음 아픈 각성과 자기 자신의 끝없는 취약함에 대한 자기혐오의 감정, 종교적 심성이 거래되는 현상에 따르는 허무감, 이 정도일 것입니다. 성매매가 몸의 병을 가져다주듯이, 혼매매는 엄청난 마음의 병을 가져다주는 겁니다.
단 한 가지 기대가 있다면, 종교적 정복군과의 '만남'은 소극적인 자기혐오나 반성 등으로 끝나지 않고 돈이 인간의 내면까지도 바꿀 수 있는, 영혼도 상품화되는 이 저주받을 제도, 즉 자본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증오와 거부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원주민' 피해자들이 자본가로서의 외국 '종교 업자'들의 실체를 파악해야 어떻게 해서 그들에게 저항해야 할 것인지, 나아가서 그 파송국의 피해 대중과 같이 손잡고 이 기형적인 세계적 제도에 어떻게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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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87년 투쟁만큼 중요하다 (레디앙, 2011년 09월 20일 (화) 09:21:53 박노자 / 오슬로대 교원 노동자)
5차 출발을 앞두고…"재벌독재 해체돼야 민주-민생 가능"
5차 희망버스는 10월 8일에 출발한다. 토요일인 그 날에 노르웨이에서 육아노동을 하느라고 국내에 가서 같이 참가할 수 없는 나로서는 그 불가피한 불참이 그저 너무나 미안하고 아쉬울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날 '희망버스' 운동을 24년 전의 독재 타도 운동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 역사적 현장에 있고 싶기 때문이다. 24년 전에 열사들의 자기 희생과 수많은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파시스트적 군사 독재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면, 오늘날 '희망버스' 운동은 어쩌면 군사독재보다 더 위험한 재벌독재를 상대로 싸운다.
이 재벌독재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도 대다수의 생계 보장도 없을 것이다. 이 재벌독재는 노골적인 파쇼성(性)을 과시한 군사독재에 비해 훨씬 더 은근하고 교묘하고, 겉으로는 매우 '선진적'으로, 깔끔하게 보인다. 그만큼 훨씬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국내 총국민생산에서 소위 '10대 기업', 즉 주요 재벌 왕국들이 보유하는 자산의 비율은 약 75%에 이른다. 그들이 한국을 소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이 나라를 소유하기에, 자유주의 정부(김대중, 노무현)가 되든 극우보수주의 정부(이명박)가 되든 그들의 몫이 계속 불어날 뿐이다.
대기업 전체로 봐서는 지난 6년 동안 평균 영업이익률이 6.7%에서 7.6%로 늘어나는 등 “장사가 짭잘해진” 셈이다. 위기다, 공황이다라고 하지만, 이는 대기업들의 세계와 무관한 이야기다. '대기업의 꽃'이라고 할 10대 재벌의 계열사들은 지난 3년 동안 영업이익은 70%나 급증했다.
그 대가를 누가 치르는가? 재벌 이익이 계속 늘어나는 것은, 국내 전체 노동자의 거의 60%에 가까운 비정규직과 25%나 되는 저임금 근로자층, 국내보다 임금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서의 한국 재벌과 그 하청기업들의 수백만 명의 피고용자들에 대한 착취가 그만큼 강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지속적 번영은, 다수에 대한 약탈로 뒷받침된다. 그 약탈이 가능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무리 24년 전에 군사독재가 물러났다고 해도 재벌 독재자들의 '경영 행위', 즉 착취와 이윤 수취 행각에 대해서는 노동자들도 시민사회도 그 어떤 발언권도 없기 때문이다.
정규직을 줄여 대신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수법으로 노동을 불안화하고 약탈을 강화해도, 저임금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하청업체에 단가 내리기 압력을 가해 쥐꼬리만한 노동자 봉급을 더 줄게 해도, 필리핀 같이 절망에 빠진 저임금 노동자들이 많은 곳에서 몇 년 사이에 수십 명이 사고사를 당한 '죽음의 공장'을 차려도, 그곳에다가 물량을 빼돌리고 국내 노동자들을 불법 해고한다 해도, 그 '경영상의 판단'에는 노동자와 시민사회는 물론 국회마저도 개입하지 못한다.
재벌들이 소유하는 나라의 정치구조상 국회가 그러한 개입을 효과적으로 하려는 의지마저도 물론 사실상 없다. 군사독재는 물러나도, 우리는 극소수 약탈자들의 전횡을 전혀 막을 수 없는 끔찍한 독재사회에서 계속 살고 있다.
이번 '희망버스' 운동은 이 기업 독재의 횡포를 막아보려는 의거(義擧)이며, 과거 민주화 운동의 유기적 연장, 즉 기업 독재 타도 운동의 신호탄이다. 지금 이 운동이 통쾌한 승리를 거두어 불법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복직돼야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이 늘어나는 만큼 국민총소득에서의 노동자 총임금의 비율(노동소득분배율)이 계속 줄어드는 이 사회의 퇴보를 막을 수 있을 것이고, 기업 독재를 본격적으로 타도할 수 있는 전망이 열릴 것이다.
이어서 노동자들의 기업 경영 참여권 확보, 비정규직의 양산을 본격적으로 막을 비정규직 고용 사유 제한 관련 법률 통과,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요 기업의 사회화 등을 이루어야 하겠지만, 한진중공업이라는 재벌독재 왕국의 불법 행각과 싸우는 지금의 이 운동은 기업 독재 타도의 중차대한 첫걸음이다.
이 첫걸음을, 아무리 물대포를 동원하고 아무리 무더기 입건, 기소 등 탄압을 자행해도, 재벌의 사병(私兵)으로 전락된 국가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수를 위한 나라, 공공성이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운동은 역사의 커다란 진보의 흐름을 타게 될 것이고, 전두환의 독재가 물러났듯이 결국 이건희와 조남호의 독재도 붕괴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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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정말 행복하십니까" (레디앙, 2011년 09월 16일 (금) 12:39:10 박노자 / 오슬로대)
자본주의는 불행의 체제…극복 위한 일상의 투쟁은 필수적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우주적 생명의 리듬을 느끼는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건 맞고, 단사표음 (簞食瓢飮)의 행복에 대한 조상님들의 이야기도 어찌 틀렸겠습니까? 그것까지 다 맞는데, 저는 가만히 생각해보니 맑은 마음으로 꽃위의 이슬을 즐겨보고 아기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투쟁'이라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즉, 투쟁이란 동심(童心)을 되찾아 천지의 도(道)와 합일되는 일의 반대라기보다는 그 일의 전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표피적으로 봤을 때에는 욕망을 자제해 마음공부에 몰두하는 일(遏人欲處工夫)과 '투쟁'이라는 과정은 거의 정반대로 보이긴 합니다. 혁명적 상황에 처해지거나 폭압적 정권을 상대할 때에는 폭력을 대단히 혐오하는 투사가 불가피하게 바로 그 폭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얼마든지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러시아 혁명운동의 역사만 봐도 대체로 과격한 투쟁 수단에 호소하는 이들은 대개 애당초에 성품이 매우 선하고 폭력의 '폭'자도 입에 올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1878년에 한 정치범을 체벌케 한 상트페테르부르그의 경찰청장을 사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인민주의/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여걸 베라 자술리치(1849~1919)를 보세요.
산파라는 직업상 생명의 탄생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그녀는, 돈이나 배려가 필요한 모든 이들을 아낌없이 도와주고, 천사처럼 착하게 사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며, 재판정의 배심원들이 그녀를 무죄로 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평소의 평판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망명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주로 대중적인 저술 활동을 통한 혁명적인 계몽운동에 남은 인생을 바친, 즉 폭력과 별다른 개인적 인연도 없었던 그녀에게는 운명의 1878년 1월 24일에 경찰청장의 가슴에 권총을 맞추어 쏘는 것은 과연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요?
제정 러시아와 같은 무간지옥에서는 투쟁이란 가끔가다가 본인의 착한 마음을 극도로 억제하고 팔자에 없는 무기를 잡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지만, 노르웨이처럼 보다 개명한 사회 같으면 본인이 속해 있는 적색당(공산당)에서의 투쟁이란 꽤나 시간 소모적이고 심심한 일일 뿐입니다. 회의하고 선전물을 쓰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설득하고, 일간지 <계급투쟁>지를 구독하면서 가끔 거기에 글을 쓰고, 집회에 나가고... 생업, 육아에다가 그저 또 하나의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폭력적이거나 심심하고 시간 소모적이거나 하는 이 '투쟁'이라는 과정은 정말 인성 (人性)에 맞지 않은, 이 광활한 우주의 질서와 무관하고 궁극적으로 인류에도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에게도 필요 없는, '먼지' 같은 일일까요?
황제의 감옥에서 양심수가 채찍을 맞고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사랑스러운 아이의 웃음소리만 들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 수야 있지만, 베라 자술리치처럼 관세음보살과 같이 착한 사람이 그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권총을 잡은 것은 그저 자타의 행복을 빌고 세상이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폭압 통치 하에서 아무리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아기 웃음 소리를 들어도 양심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실은 '정상적' 자본주의 국가도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 질적 차이는 없습니다.
노르웨이만 해도 '정상적인' 삶이란 자신을 노동시장에 내다파는 '임금노예'(wage slave)의 삶이고, 자신의 인간적 본질인 노동을 상품화해 파는 삶입니다. 노르웨이의 '임금노예' 정도면 세계적으로 꽤나 '부유한 노예' 부류에 속하겠지만, 제3세계에서 5초마다 한 아이가 굶어 죽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 옆집의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를 즐겨 들을 수만 있겠습니까? 자본주의가 이 지구별을 1년에 6백만 명의 아이가 굶어죽는 커다란 고문실이자 도살장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정말 개인적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까?
물론 선전물을 쓰고 집회에 나간다고 해서 직접적으로는 한 아이도 구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심심하고 무의미하다고도 느껴질 수 있는 이와 같은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 자본주의 전복을 위한 하나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반자본주의적 정당과 활동가층, 이데올로기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위기가 오더라도 자본주의 극복이 불가능할 것이고, 자본주의 극복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그 어떤 행복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레닌그라드에서 사시는 노년의 친척과 통화하고 나서 제가 결국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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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인신지배 시대에 살다" (레디앙, 2011년 09월 02일 (금) 10:28:12 박노자 / 오슬로대)
"자본주의, 스티브 잡스, 장자연의 31명 악마들이 똑같은 이유"
자본주의란 궁극적으로 보면 폭력 그 자체입니다. 대다수 피고용자들이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무조건 고용을 갈구하고, 해고를 두려워하고, 고용관계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결국 무엇입니까?
한국의 경우에는 고(故) 최고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촤악의 경우에는 실직자, 해고자 등이 아사까지 당할 수 있기에 그러는 것이고, 그나마 굶어죽는 빈민이 없는 유럽 같은 경우에는 내구재 구입이나 휴가 여행 등을 할 수 없는 이등시민인 실업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즉 체제로부터 경제적인 타격을 입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실업자들이 굶어죽을 수도 있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생명 박탈이든 유럽 복지국가식의 '풍족한 삶'의 박탈이든 우리로 하여금 '임금 노예'(wage slave)으로서의 삶을 계속 하게끔 하는 것은 어떤 '박탈'에 대한 공포입니다. 공포에 의거하는 체제는 폭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 폭력의 유형에 있어서는 반(半)봉건적 식민지 자본주의에서 준(準)파쇼 정권 하에서 준핵심부 자본주의 야수로 압축 성장한 대한민국과, 핵심부 국가들은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핵심부 자본주의의 폭력성은 - 적어도 그 사회 안에서는 - 대개의 경우에는 비(非)가시화돼 있고 깊이 내면화돼 있는데다가 '합리적 절차'와 '평등한 시민' 간의 친절로 잘 포장돼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가장 터프한 사업가'로 악명이 높은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를 보세요. 그에 대한 일화들을 보면 직원(임원까지 포함해서)들을 '즉석 해고'한 이야기나 자기 앞에서 감히 칠판에다가 어떤 설명의 글을 쓰려는 부하 직원에게 분노를 터뜨렸다는 일화 등이 유명합니다. 대체로 아집이 강하고 자신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과시하기를 매우 좋아하는 타입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컨대 스티브 잡스가 그 회사 빌딩 앞에서 일인시위하는 해고자에게 '매값 폭행'을 감행한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맞아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잡스와 최철원 사이의 차이라면, 잡스가 제도적 장치(경영자의 무조건적 해고권 등)를 이용(내지 악용)하여 폭력적인 권력 행사 정도만 할 수 있는 반면, 최철원이 그 어떤 제도적인 '매개체'도 없이 '아랫 사람'의 신체를 무조건 폭행해도 되는 것으로, 즉 자신이 적어도 한 순간 동안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사유한다는 것입니다. 즉, 잡스의 폭력성이 어느 정도 제도화돼 있다면 최철원의 폭력성이 직접적이며 물리적입니다. 부하(또한 과거의 부하, 또한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의 신체를 돈주고 소유물처럼 폭력적으로 이용해도 된다는 그의 생각을, 그에게 집행유예형을 내린 법원, 즉 대한민국의 공권력까지 뒷받침해주기에 무슨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잡스의 요구사항(효율성의 최대화, 지시 숙달 등등)을 내면화하면 그가 휘두르는 제도적 폭력의 무기, 즉 해고를 면할 수 있겠지만, 최철원들의 무리들이 휘두르는 물리적 폭력과 폭언의 무기는 아무리 몸을 낮추어 많이 굽실거려도 피하기가 매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서 대학원이나 대기업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아랫사람의 몸과 마음을 위사람이 언제나 술 동무로 이용하거나 손찌검이나 폭언으로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랫사람의 시간과 노동을 윗사람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한국형 인신지배는 어떤 면에서는 참 역설적입니다.
일면으로는 이는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비공식적 행위의 영역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해당 부문의 종사자가 아니면 잘 모를 수도 있는 것이고, 잘 안 알려져 있는 만큼 사회의 공식적인(서구적 자유주의를 표준 준거를 삼는) 윤리 규정과의 충돌을 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절대 다수의 남성들이 군대에 갔다와야 하기에 '원산폭격' 정도면 대한민국 선남선녀의 일반 상식에 속하지만, 고(故) 장자연이 죽으면서 '31명의 악마' 명단을 남기지 않았다면 연예계와 무관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연예계 입문자가 통과해야 할 '통과 의례', 즉 소속사 대표의 폭력과 이 사회 '오야붕'들에게의 술시중/성상납 등에 대해서 과연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요? 물론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인신지배의 실체가 갑자기 노출되더라도 이는 지배자에게 하등의 불편함도 안겨주지 않을 것입니다.
뭐, 장자연을 괴롭혀 결국 간접 살해한 31명의 악마들 중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사법처리됐습니까? 이 땅을 인신지배를 하고 있는 자들이 다스리고 있기에 무엇이 어떻게 폭로돼도 그들은 무사할 것입니다. 일면으로는 저들의 인신지배 관행들은 비공식 영역에 속하지만, 또 일면으로는 이 나라의 '관습법', 즉 성문법보다 어쩌면 더 엄격하게 지켜지는 불문율 수준입니다. 그래서 예컨대 한국 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하려는 외국학생에게 지도교수가 (강)권하는 술을 다 먹을 수 있는 만큼 주량을 키우라는 조언은, 한국어를 배우라는 조언보다 더 절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어 소통은 덜 돼도 상관없지만, 위사람이 아랫사람의 위(胃)까지도 지배하는 미풍양속(?)을 어기면 아주 큰 문제입니다.
과거의 군주들이 '삼대(三代: 요, 순, 유임금 시대의 정치)의 치(治)'나 '백성교화'를 외쳤듯이 요즘 주상이 '선진화'를 외치면서 돌아다니지만, 저들의 그 어떤 구호와도 무관하게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시대에 한국형 인신지배는 구미형 '제도화된, 비(非)노골적 폭력'으로 탈바꿈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일자리 등이 불안화될수록 피지배자들의 안정추구 심리가 강화되는 것이고, 또 지배자들이 그 심리를 이(악)용해서 인신지배 강화를 통한 사적인 및 공적인 착취 강화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대학교에서의 정규직으로서의 취직이 아직도 흔히 가능했던, 거기에다가 운동권까지 아직도 힘이 있었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대학 대학원에서는 지도교수의 성추행부터 대필 강요까지 아주 성행했습니다.
운동권이 거의 죽고 정규직 고용도 바늘구멍처럼 된 지금 같으면? 도미유학파의 지배구조 속에서 국내 학위 그 자체는 의미를 많이 잃었지만, 고용을 갈구하는 이들의 대학실력자에게의 아부의 필요성은 훨씬 더 강화된 셈입니다.
불안화된 세계에서는 아부, 인신지배에의 복속에 의한 개인적 추종관계 형성 등은 그나마 미래에 대한 어떤 '약속'으로 느껴집니다. 신자유주의로 망해가는 사회는 우리에게 더이상 아무것도 공적으로 약속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인신지배 관행을 퇴치시키는 방법은? 우리는 좀 과감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반값' 등록금만도 아니고 민주화된, 전근대적인 찌꺼기가 없는 무상 대학 교육까지 강력하게 요구하는 학생운동부터 부활돼야 되고, 대필 요구 등을 고발할 수 있는 강력한 조교, 강사 노조가 필요합니다. 혁명적 투쟁이 아니면 '매값'과 "아나운서 되려면 다 바쳐라" 등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과거의 이 유령들을, 우리가 장사지내 우리 손으로 무덤으로 보내야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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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혁명을 포섭한다 (한겨레, 박노자 글방, 2011/08/26 07:30)
국내에서 "무상급식 주민 투표"와 같은 수준의 촌극이 연출되는 현재에, 국외에서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계속 이어져 터집니다. 자본주의의 세계적인 공황이 심화되고 미국 달러의 입장이 약화되는 가운데, 세계적인 재벌로 성장(?)하게 된 카다피가(家)는 리비아에서 권력 상실의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리비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분명히 일면에서 "혁명"으로서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나중에 진행이 어떻게 됐든간에, 리비아 사태의 뇌관은 특히 지역적, 부족 소속에 따른 차별 등의 여러 불평등이 부채질한 상당수 기층 민중의 누적된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으로 시작됐지만, 과연 이 사태가 과도국가위원회 (반군의 정부기관)의 집권과 카다피 가문의 완전한 몰락으로 일단락지어진다고 해서, 리비아 민중의 상황이 크게 나아지겠습니까? 민중을 위한 사회민주주의 정도 아니더라도, 과연 형식적 민주주의라도 어느 정도 모양 잡힐 것인가요? 저는 솔직히 회의적 입장입니다. 지금 리비아 상황을 보면 일종의 기시감 (旣視感)이 들 정도로, 상황의 전개가 지난 40여년 동안의 카다피 정권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재현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카다피정권은 세계 지배자들의 주구(走狗) 뿐이었습니다. 리비아 해군은 아프리카 북안을 돌면서 유럽에 가려는 "불법 이민자"들을 단속했는가 하면, 석유 판매로 벌어들이는 정권의 돈은 런던정치경제대학과 같은 신자유주의의 아성을 지탱하는데에 마구 들어갔습니다. 단, 카다피가는 유전의 완전한 사유화와 외국자본에의 완전한 매각을 반대했으니 서방 열강들이 그러한 매각을 할 것 같기도 한 과도국가위원회 측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카다피 정권은 처음부터 그랬나요?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1969년에 집권한 카다피는 원래 자칭 "이슬람 사회주의자"이었으며 이집트의 "진보적 민족주의자" 나세르대통령의 가까운 친구이었습니다. 국내에서 외국 자본의 이권이 몰수되었는가 하면, 국외에서는 각종 반제 급진 단체들은 리비아로부터의 지원을 받게 됐습니다. 유럽의 아일랜드 공화국군부터 아시아의 필리핀 공산당의 게릴라 투쟁 부대, 태양주의 마오리족 급진운동이나 호주원주민의 운동 등 카다피 정권 수혜자의 목록은 1970-80년대 급진 투쟁단체들의 종합 리스트에 가깝습니다. 1986년에 리비아 정부 특무들의 소행으로 추측되었던 서독에서의 나이트클럽에 대한 공격 이후에는 미 제국이 리비아를 (국제법의 관점에서는 봤을 때에 불법적으로) 폭격까지 하는 등 카다피 정부는 거의 급진적 반제국주의 노선의 "대표 주자"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한 때에 각급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전면폐지하고 그 대신에 러어 교육을 시키겠다는 계획까지 성립하는 등 "미제에 맞장뜨는 제3세계 지도자"의 전형에 가까웠던 카다피는, 1990년대에 접어들어 돌연히 전향을 하고 맙니다. 
쏘련 망국과 동구권 붕괴 이후에 가중된 제국주의의 압력 이외에도 그 전향의 이유들은 충분히 있었습니다. 카다피를 중심으로 하는 그 족벌이 제국주의 진영과 화해하고 국내에서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를 어느 정도 사유화시켜야 그들이 가졌던 행정력을 금전 자본으로 맞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국제적인 "큰 손"으로 거듭나기를 원했습니다. 국제적 정의 대신에 점차 이윤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진 지도층의 친자본적 행각을 막을 만한 노동계급의 조직 등은 리비아에 없었기에 동구권 붕괴와 걸프 전쟁 등 미 제국주의의 새로운 세계패권 확립에 따라 카다피는 비교적으로 손쉽게 친미파로 전향하여 약 1994년부터 제국주의와의 화해 공작에 들어갑니다. 대량살상무기 제조 프로그램을 완전 공개하고 폐기한 그의 2003년 결정을, 미국 협상가들은 그 뒤에 오랫동안 북조선 상대자들에게 들이밀면서 똑같이 하라고 마구 압력을 놓을 정도로, "새로워진" 카다피는 서방 측이 좋아할 만한 "모범생"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나 결국 혁명가에서 국제재벌가로의 그의 변신은 바로 그 정권의 주된 패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해외에서 초호화 부동산을 사재기한 카다피가의 "큰 손" 행각은 차별 받는 리비아 동부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부추기고 반(反)카다피 투쟁의 선두에 선 이슬람 급진주의 세력의 명분을 공고화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리비아의 유전들을 전부 사유화하여 해외매각하려 하지 않았던 카다피에 대해서는 구미 지배자들도 끝까지 지지만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국 민중의 지지를 잃은 데도 세계 자본과의 완전한 결탁에 실패한 카다피는, 결국 그 양쪽으로부터 외면을 당해 "팽"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카다피가 패망하고 있다고 해서 리비아 민중의 열망들은 과연 다 충족될 것인가요? 글쎄, 지금 상황의 전개를 보느라면 왠지 그렇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카다피가 전향하는 데에 20여년 걸렸지만, 그 반대편에 서는 과도국가위원회는 이미 지금부터 국제자본의 주구 노릇을 자청하고, 민중에 대한 권위주의적 통치를 계속하려는 듯한 인상입니다. 나토의 폭격 덕분에 비교적으로 손쉽게 카다피 군대의 저항을 꺾을 수 있었던 과도국가위원회의 "지도자"라고 할 마무드 지브릴 이라고 하는 자는 미국에서 정치학 교수와 "아랍 지도자를 위한 훈련"의 전문가로 활동했으며,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카다피 정부의 각료로서 바로 신자유주의적 민유화 정책을 열성적으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 의해서도 선출되어지지 않은 과도국가위원회의 구성을 보면, 카다피 정부 안에서 민유화 등 친서방 정책을 주도했다가 망해가는 카다피를 떠난 자 (알 이싸위 등)나 해외학계 등에서 친자본적 학술 활동을 해온 자 (워싱턴주립대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을 가르쳐온 "석유 장관" 알다르쿠니 등) 등은 당장 눈에 띕니다. 지금 이들 과거국가위원회 위원들에게 영국이나 터키측에서 카다피 정권의 경찰 조직 등을 그대로 유지시켜 이용하라고 적극 권고하고 있는데, 영국 등 나토의 주요국가에 계속 신세를 지고 있는 저들이 이와 같은 방침을 채택하여 카다피 국가의 권위주의적 골간을 어느 정도 유지할 가능성은 농후합니다. 그래야 이들이 원하고 있는 작업, 즉 해외 자본의 무분별한 유치와 국가 자산의 해외 매각 등을 문제없이 잘 진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다피의 전향은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그를 추방하고 있는 민중 운동을 전유하려는 반군 지도부의 요인들 같으면 굳이 전향할 이유도 없을 정도로 이미 국제자본, 서방 열강과 결탁돼 있는 상태입니다. 이 비극의 근본 원인은, 리비아에서 노동계급이 너무나 취약하다는 사실이죠. 숙련공이나 지식노동자, 전문가의 다수는 참정할 수 없는 외국인들이고, 정치 참여가 가능한 리비아인들은 대개 자영업이나 국가관료직, 전통 목축업 등에 종사합니다. 그들에게는 근대적인 계급의식이 거의 없다시피하여, 정부는 그 어떤 반동적인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펴도 이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저지할 만한 힘을 갖지 못합니다. 석유소득 수준에 비해 상당수 민중의 생활수준이 높지 못하다는 사실이나 차별 등에 대한 불만은 많아도 이 불만이 계급적으로 인식화되고 조직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반제국주의적 성향의 지도자가 설령 권력을 장악한다 해도 그 지도자가 꿑에 가서 그 권력을 자본화시켜 자신을 재벌로 탈바꿈시키는 것을 리비아 민중은 안타깝게도 막을 수 없는 것이죠.  
반제국주의 그 자체를 당연히 수긍해야 하고 적극 옹호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이나 아프리카의 각종 사회주의적 경향의 신생정부들을 적극 지원한 1970-80년대의 북조선 같으면, 그러한 차원에서는 분명히 "진보적 국가"로서의 면모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 이는 북조선의 경우에도 해당되지만 - 계급적 내용이 충분치 못한 반제국주의는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합니다. 제국주의를 이기자면 제국주의 국가들의 민중들까지 포함해서 제국주의의 모든 피해자들과 계급적으로 연대해야 하는데, 카다피도 북조선의 지도자들도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반제국주의는 국가 대 국가 대립의 성격을 띠게 됐는데, 그러한 대립에서는 비교적으로 약한 제3세계 국가는 이기기가 힘듭니다. 국가 대 국가 대립이 아닌, 국제적인 계급 대 계급의 대립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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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올바름과 치명적 오류" (레디앙, 2011년 08월 19일 (금) 22:54:47 박노자 / 오슬로대)
"민주주의 가치는 상대적이다…시장주의자들의 자유 제약돼야"
2011년 8월 19일은 1991년 8월 19일에 일어난 소련의 '8월 쿠데타'의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쿠데타', 즉 일부 정통 스탈린주의적 관료들의 거의 절망적인 - 그리고 매우 미숙하고 준비 안된 - 소련 붕괴 방지의 시도 이전에도 소련은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쿠데타'에서 친서방, 친시장 세력(자유민주주의자)들이 완승을 거두자 그 완전한 붕괴는 그저 시간의 문제가 됐습니다.
그 결과? 그나마 서구에 가장 지리적/문화적으로 가까운 구소련 지역들(발틱 공화국들, 몰도바 공화국 등)은 유럽연합을 위한 저임금 노동력의 공급지이자 서구 기업, 은행들의 '행복한 놀이터'가 되고, 어느 정도 자원을 보유한 러시아나 카자흐스탄 등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국제적인 자원 공급자로 전락하고, 구소련의 중앙아시아의 다수의 국가들(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은 '개발 없는 독재', 즉 민생 문제마저도 해결할 수 없는 최악의 독재 정권 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구소련은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지만, 세 가지 커다란 장점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비록 노동자 민주주의가 잘 가동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관료국가는 '지배자'의 노릇을 해왔지만, 일단 개별 기업소 차원의 이윤 추구가 불가능한 전국적 계획경제라는 구조상 장기적인 고(高)기술 개발, 과학연구에 합리적인 집중투자를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지속적 과학발전과 생산력 향상이 가능했던 구조였습니다.
둘째, 노동시장이 아닌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직장 배정 시스템상으로는 완전고용과 각자 전공에 따른 취직은 가능해 행복한 직장 생활은 어느 정도 보장돼 있었습니다.
셋째, 비록 민주적 장치가 태부족했지만, 집권 공산당이 일단 숙련공 집단을 그 정치적 발판으로 삼았으며 민생, 복지에 대한 상당한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 재배치돼 있는 구소련의 후계국가에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는 그저 꿈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소련식의 체제에서는 경제적 모순도 당연히 없지 않았지만(예컨대 냉전적 상황에서는 군수기업들이 지나치게 비대화된 한편, 경공업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저하되는 등 각종 불균형이 심했습니다) 가장 첨예한 모순들은 상부구조의 모순, 즉 사회적 모순이었습니다.
모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계급 형성의 문제였습니다. '현실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일체 생산수단들을 다 소유하는 국가는 사회를 지배한다고 할 수 있었지만, 사회와 유리된 지배계급의 형성은 어느 정도 차단돼 있습니다.
체제의 관리자, 즉 고위직 관료들은 그 위치를 세습시킬 수 없었으며, 지배체제의 중심축인 공산당에서 '출세'를 하자면 일단 일선 기업소에서 일선 노동자로 노동생산성이나 조직능력 등으로 인정 받아 입당하여 맨 밑으로부터 맨 위까지 천천히 '사다리'를 밟아가야 했습니다. 예컨대 그 체제를 무너뜨린 주역 가운데 한 명인 고르바초프만 해도, 농업노동자로서 '모범노동자'가 돼 꽤나 일찍 (고등학교 시절에) 입당을 해 그 다음에는 지역 청년공산당(콤소몰) 위원회 하급 간부직부터 중앙공산당 총서기장까지 약 35년 동안 경력을 쌓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는, 그 위치를 예컨대 그 자녀들에게 물려줄 꿈도 꾸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 무섭디 무서운 스탈린만 해도 딸(스베틀라나)은 일선 영어번역자, 편집자뿐이었고, 두 아들은 다 1941~1945년에 전쟁터에 직접 나가 몸소 참전해야 했습니다(한 명은 포로가 돼 죽었고, 전투기 조종사이었던 또 한 명은 26차례 출격의 경력을 쌓는 등 꽤 위험한 참전생활을 보내야 했습니다). 지배체제는 있어도 뚜렷한 지배계급은 없었던 것은, 바로 혁명과 스탈린의 반동 이후에 성립된 체제의 주요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체제에서는 일선 노동자, 농민 이상의 대다수 유식자나 간부들의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대자적 계급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수많은 간부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자본주의체제를 부러워했으며, 노동자층과 간부층 중간에 있었던 지식인층도 서방 재산가나 고급 지식노동자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선망하는 한편 국제적 냉전이 부과하는 수많은 버거운 제약들(자유로운 출입국의 제약, 해외 취직의 제약)을 혐오하는 나머지 미국과 서방세력에 투항하더라도 냉전을 종식해야 한다는 논리에 동조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러시아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신흥 기업가층의 약 80%는 고등교육 수혜자들을 부모로 갖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현재 러시아 기업가층과 공산주의 시절의 간부층/지식인층의 직접적 계승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지식인층 같은 경우에는 특히 숙련공층을 정치적 기반으로 했던 공산당의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각종 역차별 정책을 혐오했습니다. 예컨대 고(高)인기 대학에 입학하는 데에 있어서는 '노동자들을 위한 예비 과정'을 이수한 노동자, 농민, 전역 군인 출신들이 가산점을 받아 비교적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던 한편, 막 고교를 졸업한 지식인 자녀들은 서로 치열한 입학경쟁을 뚫어야 했습니다.
공산당이 그들로 하여금 대입 이전에 적어도 2년 정도 현장 노동 경험을 쌓도록 유도하려 했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끼리 '고깃덩어리'라고 지칭했던 노동자들과 함께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것은 모욕이자 고역이었습니다. 바로 이들 간부층과 지식인층은 결국 소련 망국의 사회, 정치적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1985년부터 사회에서의 노동생산성 향상의 저조라든가 각종 계층적, 민족적 모순의 첨예화에 착안하여 혁신정책을 선포한 고르바초프 신임 서기장은 처음에는 기본적으로 맞는 노선으로 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 조직의 민주화도, 몇 명의 후보가 한 선거구에서 경합을 벌이는 소비에트 조직의 민주화도, 스탈린 시절의 국가범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희생자들의 명예 복원도, 망국적인 군사비용을 줄이기 위한 미 제국과의 화해모드 조장도 다 소비에트 체제의 내재적 논리상 의미있는 정책이었으며, 이런 노선이 망국의 원인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용서할 수 없는 오류는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그는 1989년경부터 '현실사회주의' 체제 그 자체를 반대하고 노골적으로 친자본주의적, 친서방적 노선을 채택한 분자들의 정치활동까지도 '자유민주주의' 미명하에 허용했는데, 이는 정말 치명적인 오류이었습니다.
결국 발틱공화국 등지에서 민족분리주의 구호하에서 뭉쳐지고, 중앙에서는 친자본, 친서방적 간부층 출신(엘친 등)과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지식인(예컨대 사학자 아파나시에브)들을 중심으로 해서 뭉쳐진 반(反)사회주의 세력들은 '소련 해체'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대표했던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말았습니다.
구공산당 간부들은 새로운 지배계급의 골간이 되는가 하면(일거에 대학 총장이 된 아파나시에브 등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지식인 계층의 상부는 새로운 체제에 매우 좋은 조건으로 기생하면서 그 이념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준지배자의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지배하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것은 무엇보다 노동계급이었습니다. 이미 1994년에 러시아에서 약 4백만 명의 주택 없는 하층민들이 발생됐는데, 절대 다수는 사유화의 과정에서 문 닫은 공장 출신의 직공들이었습니다. 엘친과 아파나시에브의 계급적 입장 공고화의 대가는 바로 이들의 배고픔과 병고, 그리고 때이른 죽음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중요한 가치임에 틀림없지만, 탈(脫)자본주의 과정에서는 이를 절대화하면 안됩니다. 밖에서는 세계 중심부로부터의 각종 파괴 공작과 공격에 노출돼 있고, 안에서는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얼마든지 꿈꿀 수 있는 관리자층, 지식인층의 동요를 막아야 하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의 국가에서는 통상적인 자유민주주의 룰을 적용해 반(反)사회주의적 성격의 정치활동까지 허용해주면 상황에 따라 매우 곤란할 수도 있는 것이죠.
지금 베네수엘라처럼 절대 다수 빈민들의 혁명적 열정이 높은 상황에서는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를 적용한다 해도 혁명의 진전은 가능하지만, 말기의 구소련 상황은 달랐습니다. 대중들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을 보유한 지식인층부터 이미 사회주의적 가치를 많이 이탈한 상황에서는, 반(反)사회주의적 선전선동의 자유까지 허용해주는 것은 사실상 반공주의적 광란을 허해주는 거나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적어도 계획경제의 기본과 근로대중을 위한 복지 등 체제의 골간을 지키자면, 자유주의적 룰의 적용을 다소 유보해 차후 단계적으로 하든지 했어야 했고, 친자본주의적 고위층, 지식인층에 대해 훨씬 더 강경해야 했습니다.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는 자유보다는, 노숙자가 되지 않을 자유나, 노동자 출신임에도 무상으로 고등교육을 받을 자유는 백배 더 중요합니다. 이미 서방의 자유민주주의적 통념에 사로잡힌 고르바초프는 -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열망했던 다수의 간부들이 바람대로 - 이를 외면해 '자유민주주의' 구호를 외치면서 다수의 민(民)이 살인적 상호 경쟁과 가난 속에서 살아야 하는 지옥적 사회로의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기억해야 하고, 다음에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꿀 기회가 생긴다면 그 어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지배계급을 형성하려는 자들에게 그렇게 할 '자유'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결국 다수의 진정한 자유의 유일한 보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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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폭도라고? 봉기의 음악을 들어라" (레디앙, 2011년 08월 12일 (금) 08:36:29 박노자 / 오슬로대)
[영국 사태] 신빈곤층의 정당한 저항…이들 이끌 좌파 없어 아쉬워
피억압자와 억압자 사이의 중요한 투쟁 중의 하나는 바로 언어를 둘러싼 투쟁입니다. 특정 기표들이 특정 이데올로기와 이미 연결돼 있는 특정 담론을 소환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일본 식민주의자들에게는 3.1운동은 '소요'이었고, 전두환/노태우 일당에게는 5.18은 '폭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용어(기표)들을 쓰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명분없는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당연하게도 제 정신 있는 사람에게는 3.1운동은 '소요'가 아니고, 5.18은 '폭동'은 아닙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겨레>와 같은 자유주의 좌파 언론들마저도 지금 영국의 런던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빈민들의 반란/봉기를 고집스럽게도 계속 '폭동'이라고 부르고, '난동', '폭도'와 같은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물론 표피적으로 본다면 정당한 명분에 나름대로 충실했던 3.1운동이나 5.18운동과 달리 지금 런던에서 가게 물건의 약탈 등 우리에게 쉽게 '반사회적 행동'으로 비추어질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에 이와 같은 호명법은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뉘앙스를 잘 봐야 합니다.
3.1운동이나 5.18운동은, 어디까지나 부당한 정치적 권력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적 운동이었던 반면, 지금 영국에서 일어나는 빈민들의 봉기는 '정치' 영역과 직접적으로 무관한,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의 불만의 누적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회적 운동이고, 경제적 갈등을 축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이러한 성격이 강한 운동인 이상, 중산층의 사유재산에 대한 도전(약탈)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이는 있다 해도 피지배자들이 사회적 불의에 맞선다는 의미에서는 이번 영국의 빈민 반란은 아주 기본적으로는 한국의 '전설적인' 여러 민중 운동들과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이해하고 '폭동'과 같은, 적들이 쓰는 용어들을 멀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갈등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신자유주의 도입과 유럽 사회 소외계층들의 '제3세계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빈민층의 출현입니다. 전통적 빈민층인 저임금 노동자계층과 달리, 이들 '신흥 빈민층'은 아예 공식 부문에 진입조차 못합니다. 저임금이든 최저임금이든 아예 '직장' 그 자체를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죠. 반란의 진원지인 토트넘 지역 같으면 어떤 직업이든간에 구인공고가 나타나기만 하면 평균 약 55대 1의 경쟁률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는 신자유주의가 망가뜨린 사회에서 공식 부문으로의 진입장벽이 높습니다.
보다 '나은' 동네로 이사 가자면 런던 중산계층 거주지들의 살인적으로 높은 집세를 감당해야 하고, 고학력 직장을 잡자면 일단 연간 9천 파운드까지 올라갈 수 있는 대학 등록금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체 인구 중에서 최고 부자들의 10%가 가장 가난한 사람 10%보다 약 273배나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그 불평등의 정도로는 이미 제3세계의 수도들을 다 능가한 런던이라는 도시에서는, 저학력 빈민층의 젊은 실업자에게는 정말 갈 데가 아주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그가 백인이 아니라면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일조차 어려워집니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계속 걸려 모욕적인 대접을 계속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란이 일어난 지역 같으면 흑인이 백인보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릴 확률은 26배나 더 높답니다.
불평등과 폭력, 미래와 희망의 절대적 부재를 늘 직면해야 하는 실업자, 공식 부문 진출을 못해 마약거래나 미등록 저임금 노동(계약 없는 아르바이트), 갱의 싸움으로 시간 보내야 하는 젊은 '유색인종'은 결국 그 누적된 분노를 참지 못해 각목을 들고 부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저 당연한 일은 아니겠습니까? 반란 가담자들이 스스로도 이야기하듯이, 그들이 부자들이 여태까지 약탈해온 재물을 그저 '공유'하고 싶어할 뿐입니다.
이번 런던 등지의 빈민 봉기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모순들을 그 직접적 원인으로 합니다. 극소수 부유층의 재산 증식을 최대화하도록 하는 체제는, 상당수 빈민층의 고통을 동시에 최대화하는 것입니다. 왜 빈민층이 이 구조적인 약탈을 가만히 앉아서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에게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의 권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들의 산발적이고 국지적인, 비조직적인 저항을 하나로 연결시켜 조직적인 혁명운동으로 이끌 만한 좌파세력이 영국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회주의노동당 등 '혁명'을 내세우는 일부 정당들은 있긴 하지만, 주로 중산계층 출신의 그 지도자나 활동가들은 지금 반란자들을 이끌 만한 역량을 보유하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조직 노동운동이 이 반란과 손을 잡아 체제 전체를 흔들 수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억압을 참지 못해 일어서게 된 빈민들은 잔혹할 때가 있고, 무의미하다 싶은 폭력을 행사할 때도 있습니다. 그들을 억눌러온 체제가 극도로 잔혹한 만큼, 그들의 행동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죠. 그러한 의미에서는 그들이 가해자로 보인다 해도 실제로는 피해자들이고, 그들의 행동은 총체적으로 볼 때에 정당할 뿐입니다.
억압에 대한 저항은, 그 형태는 어떻든간에 근원적으로는 늘 정당합니다. 1918년에, 러시아 혁명의 "잔혹성"을 비난하는 일부 친우들에게 답하면서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알렉산드르 불르크가 "혁명의 음악을 귀 담아 들으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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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파시스트 살인마가 한국을 좋아한 까닭 (한겨레,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0804 19:13)
2011년 7월22일 노르웨이에서 미증유의 학살을 벌여 세계를 경악하게 한 파시스트 확신범 브레이비크가 한국과 일본을 ‘모범적 국가’로 치켜세운 것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옛말로는 국위선양, 요즘 말로는 ‘글로벌 코리아’를 국내인 다수가 선호하지만, 인면수심의 살인마가 친한파로 알려진다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 놀랄 일도 별로 없다. 브레이비크뿐만 아니고 노르웨이를 포함한 유럽 등지의 극우들의 다수는 대한민국을 대단히 흠모한다. 그들이 이상으로 삼는 ‘혈통에 기반한 국가’, ‘단일 문화 국가’, ‘병영국가’, ‘경쟁력 최대화에 올인하는 국가’는 바로 대한민국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브레이비크가 구체적으로 찬양한 것은 한국의 이민 정책, 즉 피난민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타민족 구성원들의 유입을 막음으로써 사실상 ‘단일민족’의 골간을 억지로 유지시키는 정책이다. 브레이비크뿐만 아니고 수많은 유럽 극우들이 이 정책들을 열렬히 환영한다. 유럽도 한국도 마찬가지로 제3세계 출신의 저임금 노동이 만들어주는 초과이윤으로 자본 축적과 확대재생산의 과정을 촉진하고 있지만, 나름의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잡힌 유럽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도 적어도 그들에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정착과 사회 편입의 기회 정도는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는 내용이 거의 없는 표피에 불과한 한국은 자국 자본이 부담해야 할 간접적 비용들을 최소화하면서 오로지 단기적으로 집중 착취만 하고 3~4년 후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내보내고 만다. 사회 편입의 기회는, 한국에서 혈통주의적 규칙에 따라서 주어진다. 한국인 가정의 일부분이 된 결혼이주자들이나 혈통적으로 ‘우리 민족’ 구성원으로 인식되는 해외 교민, 이북 출신들은 이 기회를 제한적으로나마 누릴 수 있지만, ‘우리’와 혈통 내지 가족관계가 닿지 않는 절대다수의 타자들은 ‘우리’에게 그저 영원한 타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유럽 파시스트치고, 이와 같은 사회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브레이비크는 이민자 이외에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나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그가 이상으로 삼는 사회는 단일적인 보수적 가치들을 완벽하게 공유하며 문화·이념적 ‘이탈’을 잘 방지하는 사회다. 역시 이 부분에서도 대한민국이야말로 그의 선호도 1위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연구회’와 같은 최근 공안 사건에서 보이듯이, 유럽 파시스트들의 ‘모범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탐구했다가 바로 영어의 몸이 되는 게 아직도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남선녀들은 마르크스주의든 수능·취직과 무관한 그 어떤 다른 앎의 영역이든, 두려워서라기보다는 그저 3~4살부터 살인적인 학습노동에 시달려서 탐구할 만한 여력이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남성들의 경우에는, 유럽인들이 가장 흔히 마르크스주의 등 ‘이단 사상’에 빠지는 청춘의 나이에 2년 동안이나 ‘불온서적’을 읽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군대에 갔다 와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시민권을 누릴 수 있다.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이론적으로 여성주의에 동감해도 외모와 상냥한 ‘여성다운’ 태도가 취업과 출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는 결국 대개는 가부장적 사회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위험한 사상’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남자도 여자도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와 마음을 단련시키고 자기 개인의 경쟁력과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데에 올인하는 사회 - 이것이 파시스트의 꿈이 아니면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지금 현재에 유럽 파시스트들의 미래 유토피아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차별과 착취, 병영사회의 규율과 가부장적 질서에 바탕을 둔 사회에 만족할 것인지, 아니면 투쟁과 변혁의 길을 택할지는 결국 우리가 결정해야 할 일이다.

  

자본주의, 공포, 사랑 & 오슬로 학살 (레디앙, 2011년 08월 05일 (금) 23:07:05 박노자 / 오슬로대)
'명분 없는 살인마' 한국 등장도 시간문제…자본주의, 북한보다 위험
우리는 대개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의 경우에는 그가 취하는 극단적 행위를 이해해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그 행위에 명분이라도 있으면 '역지사지'를 해서 "방법론적으로는 좋지 않았지만 이해된다."는 방식으로 판단합니다.
1990년대의 러시아에서는 임금을 악질적으로 체불하여 노동자들을 계획적으로 굶겼던 사용주나 공장 지배인들을 참지 못해 끝내 죽였던 일부 노동자들을 그 당시 사회가 어느 정도 이해했듯이 말입니다. 대부분이 이렇게 저렇게 억울함을 당해본 사회에서는 억울함을 참지 못한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번의 2011년 7월 22일 오슬로 학살의 경우에는 바로 이 요소는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범인 브레이비크는 외교관의 여유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여유있게 회사 직원 내지 중소기업인의 삶을 산 데다가 학교에서 한 번 따돌림을 당한 일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를 내뿜고 있지만, 사실 그가 살았던 오슬로의 부유한 서부 지역에서는 가난한 이민자들의 자손들을 만날 가능성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라온, 가시적으로는 그 어떤 억울함도 당한 것 같지 않은 복지국가의 시민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미증유의 살인마가 된 것이었을까요?
신념 때문이라고요? 신념이야 당연히 중요한 기폭제의 역할을 했지만, 신념만으로는 불가피한 방어가 아닌 상황에서는 인간으로서 가장 어려운 행동, 즉 동류를 죽이는 행동을 하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념적 동기 이외에는 그 어떤 심성적 배경이 있어야 이와 같은 행동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가?"라는 질문을, 브레이비크에게만 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약 1년 전에 아프간 침략에 참여하고 있는 노르웨이 군인의 한 무리가 "전장에서 인간을 죽이는 그 느낌은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섹스보다 훨씬 더 아찔하고 좋다."고 자신만만하게 응답해 노르웨이에서 상당한 충격을 일으킨 적은 있었습니다(http://www.vg.no/nyheter/innenriks/artikkel.php?artid=10036779).
그들에 의하면 방아쇠를 당기고 쓰러진 '탈레반'의 시체를 봤을 때의 느낌은 섹스하면서 느끼는 오르가슴 그 이상이었답니다. 그들의 이런 '살인적인 야담패설'이 문제가 되자 그 군인들의 우두머리, 즉 노르웨이 특무부대의 대장은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우리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못박고 자기 자신도 폭격 등을 하면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태연하게 고백(?)했습니다.
복지국가의 이 자손들은, 억울함을 당해 극도로 흥분된 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유쾌한' 흥분을 일으키기 위해서 '게임' 삼아, 재미로 사람을 죽인다고 도도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아프간이 아닌 오슬로 시내에서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다면 범죄인이 됐을 것이지만, '비인간'으로 취급되는 '탈레반'을 죽였기에 영웅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나름대로의 재분배 메카니즘을 통해 그 나름의 사회정의까지 - 적어도 내부에서는 - 어느 정도 실현하는 사회에서는,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살인마들이 만들어집니까? 독자 여러분, 이해 안되시지요? 하기야 "섹스보다 살인은 훨씬 좋다, 아찔하다"는 류의 명언(?)을, 유교적 예의염치를 아직도 완전히 망각하지 않은 사회에서 하기는 조금 더 어려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인마들을 대량생산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입니다. 비록 '복지'라는 완충 장치에 의해서 완화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생산시키는 기초 심성은 바로 공포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공포 말입니다.
만인은 만인의 경쟁자이기 때문이죠. 경쟁에서 지기만 하면 당장 짓밟히고 마는 것인데, 이를 잘 아는 자본주의 세계 시민들은 낙오에 대한 무서운 공포를 지니면서 삽니다. 이미 어릴 때부터 말입니다. 이미 초등 4학년이 된 제 맏아들이 휴대폰과 개인 컴퓨터를 사달라고 계속 조르는 이유를 따져보면, "급우들이 다 있는데 나한테만 없다.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웃음거리'가 된 것도 아니지만, 미리미리 경계심을 내는 것이죠. '모두들'에게 있는 완구를 갖지 못해 '웃음거리'가 된 아동, 즉 낙오자들을 이미 봤기 때문입니다.
청년 브레이비크도 그랬지만, 왜 돈이 있는 가정 출신의 노르웨이 고교생 다수가 돈을 내면서 운동을 하거나 헬스에 다닐까요? '몸을 만들' 여유가 없는 저임금 노동자 계층 출신으로 오해 받지 않기 위해서, 즉 동류 사이에서 소외당할까 봐서 그렇다고도 볼 여지는 많습니다(물론 다른 동기도 있겠지만요).
왜 특히 브레이비크와 같은 자영업자들은 많은 경우에는 이민자들에 대해서 가장 배타적일까요? 저임금 노동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하다 싶은 방편인 거 같아서 자영업을 택하는, 그리고 악착같이 일하고 쉬지 않는 이슬람계통의 이민자들을 '무서운 경쟁자'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왜 브레이비크가 푸틴과 같은 파쇼적이다 싶은 리더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면서도 러시아를 '적국'으로 취급했을까요? 바렌츠해 유전을 놓고 노르웨이와 러시아가 언젠가 쟁탈전을 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입니다. 그의 세상에서는 '사랑'은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경쟁자와 그들에 대한 공포, 낙오에 대한 공포, 소외에 대한 공포만이 존재했던 모양입니다. 과연 브레이비크의 내면만은 이 정도로 왜곡된 것인가요?
아이가 친구들한테 얻어맞아 집에 오면, "다음에 때리고 오라. 맞고 오지 말라"고 훈계하는 것은 다반사인 대한민국에서는, 적대심과 공포심은 노르웨이보다 많으면 많지 절대 적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가족애와 같은 과거 전통사회 심성의 일부분이 잔존해 그나마 자본주의의 내재적 살인성을 약간 상쇄할 뿐입니다. 집단적 이기주의라는 별로 좋지 않은 방법으로지만 말입니다.
가족마저도 해체되면(그 날은 곧 올 것입니다) 무엇이 남을까요? 만인에 대한 경쟁심라와 공포, 소외감을 빼면. 자본주의 심화의 길로 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바로 지옥으로 행진하고 있을 뿐입니다. 머지 않아 우리에게도 다수의 "명분 없는 살인마"들이 나타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북한 위협'이다 '중국 위협'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야말로 우리를 제일 많이 위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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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시민-노동자 연대 되살아나" (레디앙, 2011년 07월 21일 (목) 15:11:46 박노자 / 오슬로대)
한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노동운동 발전 새로운 이정표"
최근 한진중공업 사태를 보면서 느끼는 부분 하나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이 일이 국내 노동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전환의 계기, 하나의 이정표를 이룰 것이라는 걸 지금 절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어는 '노동운동의 대중성', 그리고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입니다.
1980년대 말에 매우 불완전하게나마 최소한의 제도적 민주주의가 점차 도입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학생 등 '중산계급 예비 구성원'들이 노동운동의 흐름과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서 말한다면 중산계급의 젊은 전위와 노동자 세력의 협공에 군사정권이 무너진 셈이죠. 이승만 정권의 몰락이 오로지 중산계급의 전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부분에서 역사의 상당한 진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학연대'가 통치자들에게 위협적이었던 만큼, 그 연대를 해체시키기 위한 노력도 비상했습니다.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에 상당수 학생운동가 출신으로 구성된 시민사회 단체 등은 국가로부터 프로젝트를 받고 국가 자문기구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상당 부분 '불순한' 반체제적 성격을 잃고 말았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2001년 2월에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의 폭력 진압 등 노동자들에 대한 각종의 야만적인 행각을 주저없이 저질렀지만, 시민단체 활동가 다수에게 김대중은 그래도 '민주주의의 화신'이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주로 수세적 싸움에 밀려 있는 노동계는 점차 고립돼 갔습니다.
공세라기보다는 수세이었던 노동법개악 반대의 1996~97년의 총파업은 그나마 시민사회 상당 부분의 지지를 얻었지만, 김대중 정권의 집권 이후에 '민주주의 화신' 김대중과 그 측근들이 열심히 유포해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시민' 계층, 즉 안정된 직장을 보유하는 대졸들이나 중소기업인 등의 사이에서 깊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노동자의 힘든 투쟁을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보수 언론의 레토릭은 상당 부분 잘 먹혀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민영화에 반대하는 2002년 봄의 발전노조 파업 같으면, 노동계 안에서의 지지를 받아도 시민사회로부터 별로 연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노동자'와 '시민'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민주주의적' 정권이 성공적으로 쌓은 셈이죠.
그때부터 최근까지의 상황은 사실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특히 비정규직들은 처절한 싸움들을 벌였지만 '바깥'으로부터의 지지를 충분히 받지 못한 이 싸움들은 쉽게 패배하거나 매우 부분적인 승리만 거두거나 장기화되곤 했습니다.
국가와 사용자측이 소모전을 통해 분쇄한 KTX 여승무원의 파업이나 6년이나 걸린 기륭전자의 파업은, '시민'의 연대가 미약한 상황에서 불안노동의 투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민'들이 '노동'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연대적이지 못한 만큼, '노동'도 '시민'들의 운동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2008년의 촛불사태는 노동운동과 합쳐지지 않고 오로지 '시민'들만의 투쟁으로 남았다가 결국 국가와의 소모전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1980년대 말의 '노학연대'를 해체시킨 통치자들이 거의 쾌재를 부를 만한 상황이 된 셈이죠. 그런데 이명박 정권의 말기적 위기와 세계공황의 영향까지 가세된 지금에 와서는 상황은 바뀌기 시작한 듯합니다.
지난 홍대 비정규직 싸움에서도 '일반인'의 연대가 가시적이었지만, 특히 이번 한진중공업 사태에서는 대다수의 시민들은 확고히 영도 노동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시민층'의 동향을 잘 반영하는 진보적 신부님들의 가두 미사 봉헌이나 <희망버스>, 그리고 수많은 선남선녀들의 영웅이 된 김진숙 선생님의 압도적인 카리스마 등은, 이제 상황이 과거와 매우 다르게 전개된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
배당금을 늘리면서 노동자들의 생계를 파괴하고 산업기반을 해쳐가는 '주주자본주의'의 약탈성에, 이제 노동계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까지도 눈을 떴습니다. 정리해고, 산업 이전, 주주 배당금 우선주의, 그리고 국가와 언론에 대한 자본의 철저한 통제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 사회에 아무 미래도 없다는 걸, 이제서야 눈치 챈 것입니다. 1996~97년 이후 거의 처음으로 '노동자'와 '시민'은 손을 잡았습니다. 이 연대가 지속된다면, 우리가 이 싸움을 승리로 끝낼 수 있게 된다면, 중기, 장기적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동자와 시민의 연대는 한국형 신자유주의와 결전을 버릴 만한 힘을 보유합니다.
이 결전에서 노동자-시민의 연대가 이기거나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자본주의 자체가 돌연히 몰락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삼성공화국이라는 이 국가의 병리적 현 형태를 해체시킬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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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꿈 혹은 우리들의 악몽 (레디앙, 2011년 07월 15일 (금) 08:46:03 박노자 / 오슬로대)
"평양방송 듣는 줄 알아"…토건, 소매업 등 위한 특단 '부양책'
지난 2011년 7월 8일, "평창이 됐다."는 소식을 저는 택시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나서 거의 파김치 된 몸으로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송국 소식 해설자의 떨리는, 우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해설자의 어투로 봐서는, 피로로 거의 비몽사몽간에 있었던 저는 이게 평창 이야기가 아니고 평양방송인가 싶었습니다. 거기에서도 최고지도자 등 신성시되는 인물이나 그들과 관련된 행사 등에 대해서 그 어떤 거역도 불허하는, 절대적이다 싶은, 감정에 충만한 어투로 보통 소식을 전합니다.
"평창이 됐다."는 이야기의 어조도 마찬가지로 그 어떤 반대도 원천적으로 불허했습니다. 우리들의 힘찬 도약! 일류선진국가의 꿈이 현실로! 세계 4대 스포츠 이벤트 개최국! 강해진 우리 국력! 국민의 힘으로! 이러한 구호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면, 대한민국 국적(國籍)을 박탈당해야 할 국적(國敵), 히코쿠민(非國民) 정도 되는 듯한 분위기이었습니다.
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꼭 경찰의 진압봉과 용역깡패들의 각목, 쇠파이프만으로는 그 반대자들을 때려잡는 것만은 아닙니다. 집단 히스테리 분위기 조장의 차원에서는, 정말이지 괴벨스(1897-1945) 박사에게 몇 수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한국 관변, 친자본 언론들입니다.
이 분위기가 얼마나 압도적이길래, 평소에 그나마 제 정신을 좀 보존하고 있는 <경향신문>마저도 갑자기 "평창의 꿈, 꿈의 축제"와 같은, 그 신문답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겠습니까? <경향신문>마저도 부분적으로 무너질 정도라면, 이제 전 천하가 취(醉)해 정신을 잃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옛 현자의 이야기대로는, 천하 전체가 취했다면 거기에서 취하지 않는 사람만큼 위태로운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평창의 꿈'을 들먹이는 이들은, 서울 88올림픽을 자주 떠올립니다. '88의 꿈'이 한국을 한 순간에서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만들었다면, 평창이 '선진화 도약'의 이정표가 되겠다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글쎄, '88의 꿈'은 자기 자리에서 쫓겨난 수만 명의 노점상들에게 악몽 중의 악몽이었지만, 무엇보다는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야 했던 철거민들에게는 말그대로 최악의 악몽이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올림픽 잔혹사'는 꼭 노점상이나 철거민들에게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평창의 7조원 짜리 그 화려한 경기장 등 여러 시설들을 직접 지을 사람들은, 건설 하청 업체들이 (상당 부분은 구두 계약, 일당 등으로) 고용할 비정규직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 등일 것입니다. 이럴 때에 안전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다반사고 사망사고를 포함한 안전사고들이 빈번합니다. 지금 현재 4대강을 죽이는 과정에서 노동자 20명도 '동반 사망'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비명횡사에 대해서 평창 유치의 꿈을 이루어냈다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해당 장관은 "사고다운 사고가 몇 건 없었고, 대부분은 자기 실수로..."라고 했지만 말입니다.
'평창의 꿈'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과연 몇 명의 노동자들이 "자기 실수로" 압사, 추락사, 감전사, 충돌사 등을 당하겠습니까? '평창의 꿈'을 말씀하시는 분들은, 과연 압사를 당하면서 뼈 하나 하나가 차례로 부러지는 사람이 그 죽어가는 순간에서 뭘 느끼는지 좀 짐작하십니까? 국가와 자본만큼 살인을 많이 벌이는 주체가 없는데도, 그 끄나풀들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울 88올림픽이 한국을 세계적으로 알렸다"고? 맞습니다.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서민들에게 한국을 '선진적인 부자 나라'로 알린 결과, 절망적 빈곤을 탈출하려는 이들의 행렬은 1989~0년부터 한국을 향하게 됐습니다. 이들을 기다린 것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빨리빨리 개새끼"와 같은 우리 아름다운 국어의 진수, 임금체불, 그리고 단속, 단속, 단속... '꿈'이 악몽이라는 그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물론 가난뱅이의 악몽이란 부자들의 길몽인 법. 피해를 보는 쪽이 있다면 이득을 보는 쪽도 분명히 있는 법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같은 경우에는, 그 개최 기간에 '비싼 손님'들을 만족시켜주어야 할 성 산업이 거의 국가적 후원을 받는 결과, 성 산업 대국으로서의 위대한 대한민국은 가까운 일본뿐만 아니라 머나먼 구미에서까지도 그 명성을 떨쳐 많은 국위선양을 하게 됐습니다.
이제서야 일류 선진국가답게 그 성 산업도 수만 명의 필리핀, 러시아, 중국, 북조선 출신들을 다양하게 고용해(혹은 준노예로 부려) '모범 성산업국가'인 일본을 내일이라도 압도할 듯한 기세입니다. 극일(克日)의 쾌거? '평창의 꿈'은 수많은 포주님들에게도 길몽이겠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혈세로 빼앗길 7조원을 공사비로 날리고 그 상당 부분을 폭리로 챙길 건설업자에게도 복음과 같은 소식입니다.
부동산 거품이 이제 곧 꺼질까 말까 하는 요즘 침체 상황에서는 참 대단한 소식이죠. 땅값이나 오르게 말이죠. 이외에도 공식 후원업체들도 살판이 나겠습니다. 삼성과 한진이 후원하는 올림픽 잔치에서는, 누가 백혈병으로 죽은 이들이나 영도에서 최근 비명에 돌아가신 3명의 노동 열사나, 수빅조선소에서 몇년간 사고사를 당한 30여 명의 필리핀 노동자들을 기억하겠습니까? 올림픽의 '꿈'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맙니다. 변칙 상속부터 살인적 노동탄압까지 말입니다.
말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사실, 굳이 지금의 저처럼 말을 많이 남용하지 않아도 올림픽이라는 것이 토건업과 방송업, 소매업, 성산업 등을 위한 국가의 특단의 '부양책'이라는 점도, 동시에 우민화, 즉 민중에 대한 국가, 자본의 포섭의 기제로 활용된다는 점도 그저 자명할 뿐입니다.
저로서는 한 가지만 자명하지 않아요. 도대체 자본 독재의 포로인 우리들은, 왜 우리 혈세로 백해무익의 낭비를 벌일 지배자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투쟁도 벌이지 못하고 있는가요? 4대강 죽이기나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이 있다면, 평창에서의 토건업자들의 큰 잔치를 반대할 투쟁 하나쯤 좀 조직돼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그 정도라도 국가, 자본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단 말인가요? 억울합니다. 참 억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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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을 보면 내가 부끄럽다" (레디앙, 2011년 07월 08일 (금) 11:07:48 박노자 / 오슬로대)
권위 없는 사랑 보여줘…종교가 실천보다 고귀한 행동
이제 곧 200일을 맞을지도 모를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고공농성을 지켜보면서 늘 드는 생각 하나 있습니다. 생각이나 정서를 십분 공유해도 '행동'을 김진숙 선생님처럼 하지 못하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은 과연 의미 있는 삶을 사는가 라는 부분에 대한 회의입니다.
저의 조상 대다수를 길러낸 유대교의 문화도 그렇고 한반도 문화도 그렇지만 대개 '배움'에 대해 거의 절대적이다 싶은 가치를 둡니다. 1970년대의 동일방직 여공들의 외침을 기억합니까? “우리는 배우지 못했지만,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지 못했지만”이라는 전제입니다. 개인 의지의 문제도 아니고 엄격히 사회적 환경의 문제일 뿐이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이 애당초부터 한 수를 접고 “배운 사람들”이 지배하는 이 사회를 대하게 돼 있습니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고급 관료, 기업 소유주와 임원들의 대다수는 국내외 '명문대'의 화려한 학위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을 지성적으로 뒷받침해주고 보필해주는 전임직 교수 집단 중에서는 역시 약 40%가 화려한 '외국산 학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개화기나 박정희 시대의 구호대로 '지식은 국력'이라면, 한국은 벌써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될 만도 합니다. 식민지 모국의 '인증서'가 붙은 지식의 보유와 지배/통치 관계가 정확하게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상전들이 '검증된' 지식을 확고한 지배 명분이자 매우 유용한 지배 도구로 삼지만, 백성들도 이 체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려고 빚을 내서라도 아이들에게 절망적으로 '내지어'를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인 중에서는 그 당시의 내지어였던 일본어의 능통자는 약 15%이었지만, 지금 같이 직접적 식민 통치 없이, '간접 통치'의 상황에서도 거의 그 정도로 새로운 내지어인 영어의 능통자가 늘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배체제가 요구하는) 지식으로 살고 죽고 생사를 가리는 이 대한민국은 과연 덜 폭력적인 사회가 돼갑니까? 최근 경찰이 유성기업의 노동자들을 대하는 방법만 봐도 그게 전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성기업의 경우도 그렇고 한진중공업의 경우도 그렇지만 자본에 '감히' 행동적으로 권리 주장하는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1990년대처럼 원천봉쇄, 묻지마 연행, 초강경 진압, 살인적 손배 소송, 그리고 용역의 무지막지한 폭력입니다.
1980년대와 비교해도, 고문이 없어진 것 빼고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지식으로 가득 찬, 지식이 이제 거의 '잉여'가 될 정도로 지식에 의존하는 사회인데도, 그 폭력성의 수준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식 그 자체만이 사회를 개선시킬 수는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회의 차원도 그렇지만, 개인 차원에서도 지식 그 자체만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체제에 잘 편입되기만 하면, 그 체제가 아무리 악질적이라 해도 '고급 지식'의 보유자들은 대개 군대 졸병 이상으로 잘 순치됩니다.
세계체제 주변부 파시즘의 전형에 가까운 유신 체제 하에서는 송기숙 교수 등 일부 '제도권 지식인'들은 민중의 편에 섰지만 대체로 저항을 주도한 것은 함석헌처럼 '지식' 그 자체보다 독특한 종교적 사고를 지닌, 그리고 '지식 인증서'가 없는 야생마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
저항에 가담한 교수들보다 '교수평가단'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던 교수들은 몇 배 많았습니다. 박정희가 어렸을 때부터 흠모했던 히틀러의 치하에서는 과연 달랐을까요? 지식인의 꽃이라고 할 의료권력자, 즉 의사의 약 절반이 나치 당의 당원이었다는 곳은 파쇼 독일의 실정 이었습니다.
반전 운동을 시발점으로 해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을 시작한 촘스키 교수는, 월남전쟁 한창이었던 1960년대 말만 해도, 미국 대학 교수의 약 7할이 전쟁을 지지했거나 무관심했다고 회고합니다. 미국 대학과 군수복합체의 밀접한 관계까지 생각한다면 결코 놀랄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식 그 자체가 인간을 구제할 수 없다는 걸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 뇌 속에서 축적된 지식은 그저 컴퓨터의 파일처럼 '삭제'되고 맙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지식인이라는 것은 너무나 '유한'한 것이죠. 사회화된 지식, 즉 책 등의 형태로 공동체 전체의 재산이 된 지식은 그것보다 오래 살아도,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고 나면 오늘날 우리의 지식은 그저 역사학자들에게만 관심사가 될 뿐이죠. 지식도 '유효 기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도 '삭제'되지 않고 수백 년, 수만 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것은 김진숙 선생님이 지금 보여주시고 계시는 '동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동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하면 괜스레 종교적 냄새가 느껴지지만, 사실 노동운동판에서 김진숙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실천은 제게 어느 종교가의 실천보다도 더 고귀하게 보입니다. 종교의 '이웃 사랑'에는 늘 권위주의적 상하 관계가 내재돼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진숙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동류 사랑'에는 사랑만 있고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군림하려는 뜻은 없습니다. 김진숙 선생님도 제도가 아닌 자신의 힘으로 '지식인'이 되고, 저도 애독하는 『소금꽃나무』의 저자이기도 하지만, 이 지식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고 '동류 사랑'의 실천 수단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올바른 쓰임 방법일 것입니다. 지식이란 일종의 칼입니다. 누구의 손에 잡히는가에 따라서 해방의 도구도 학살의 도구도 다 됩니다. 그런데 칼을 절대시하는 문화는 '해방'보다 '학살'에 더 가까운 것처럼, 지식을 절대시하는 문화도 전혀 해방적이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못하고 체제에 편입된 지식은 그저 악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김진숙 선생님을 보면서 저 같은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을 전문적으로 다루면서 김진숙 선생님처럼 행동하지 못하면 결국 지배자 무리에 포섭돼 이 지옥을 관리하는 악마들의 유순한 도구가 될 확률은 너무 높습니다. 저도 그렇고 저의 동료인 '직업적 체제 내 지식인'들도 그렇지만, 다 살얼음판을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김진숙 선생님을 보면서 '인간 해방을 향한 지식 축적'은 무엇인지 매일매일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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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거주자 무력감 재확인" (레디앙, 2011년 07월 01일 (금) 10:40:09 박노자 / 오슬로대)
"유죄 추정 범죄 예비군 취급…국가, 무장한 관리자들의 부대"
저는 보통 매년 7월마다 국내로 가곤 합니다. 학회와 강연 등이 보통 방학인 이 때에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가다가 제 가족들도 저와 함께 국내로 일시 귀국하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6개월짜리 신생아인 저희 딸 '사라'를 유모차에 실어 관할 경찰서의 외국인계에 가서 딸의 영주권을 신청했을 때에, 그 계획은 뿌리째 흔들리게 됐습니다. 저희들의 신청서는 접수 후 처리 기간이 "약 4개월 정도"라고 통보됐는데, 그 처리 기간에 해당되는 7월에 신생아인 '사라'가 외국 나들이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원칙상은 안됩니다. 원칙상 영주권 심사처리 기간에 영주권 신청인이 국내에 있어야 하며, 국외로 나갈 경우에는 체류 자격이 없음으로 재입국 보장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암스테르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남한에 가겠다는 것이라고요?
글쎄, 이 경우에는 노르웨이가 가입돼 있는 유럽연합 중심의 솅겐(Schengen) 조약 자유여행권의 외부 국경을 암스테르담에서 넘게 되니 암스테르담 국제공항 여권심사대 심사관의 재량에 맡겨져 있는 것이죠. 원칙상 체류자격이 없는 영아를 체류자격이 있는 일가와 함께, 분명히 영주를 목적으로 하려는 상황에서 그냥 들여보낼 수는 없지만, 어쩌면 영아라고 봐줄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좌우간 책임 못집니다."
노르웨이의 외국인 관리 정책의 차원에서는 외국인 박사과정생이든 제 딸이든 똑같이 "무죄가 판결되기 전에 유죄로 추정되는 범죄자 예비군" 정도입니다. 하자가 없어 체류자격이 부여될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지기 전에는, 관리/통제 대상자뿐인 외국인은 일단 '하자 있는 인간'으로 분류돼 원칙상 입국 불허됩니다.
물론 이것은 철칙은 아닙니다. 여권 검사하지 않는 'Schengen 조약 자유여행권'(유럽연합가입국들과 노르웨이 등 유럽경제구역의 일부 국가) 안에서는 움직여도 현실적으로 큰 장애는 없고, 또 정말 저희와 같은 영아의 경우에는 어쩌면 어머니의 눈물어린 읍소 앞에서는 국경 수비대 대원은 마음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안움직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일단 원칙은 하나입니다. 검증 받지 않은 외국인 거주자는 '적대적 타자'로 추정되며, 국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타자에 대한 제반 검증'(체류자격 심사)은 무제한적으로 긴 시간을 요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 10~11개월 동안 사증 갱신을 기다렸던 외국인도 만난 적은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유럽 국경 안에서 갇힌 '관리 대상자'에게야 미치도록 불편한 일이지만, 국가 입장에서는 관리 대상자의 불편은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습니다. 감시/통제의 대상물에게 그 어떤 인간적 감정들도 인정되지 않는 것이죠.
저희 가족의 거취는 아직 미정입니다. 저야 어차피 국내행해야 하지만, '사라' 어머니는 무거운 심정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신생 손녀를 조국에 계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리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아이 건강에 매우 나쁠 수 있는 강제 송환의 가능성이 있는 한 그저 참고 살아야 할는지, 이민청(http://www.udi.no/) 등 우리들을 관리하는 국가 부서에 전화해서 이것저것 문의를 한 뒤에 책임지고 결정을 해야 할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거취 등 우리의 사적인 문제와 무관하게, 한 가지 공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듯합니다. 요즘 종속이론 등 중심부와 주변부의 불평등한 관계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이론보다 '포스트' 담론에 도취한 학계에서 더 인기 있는 이론은 호미 파파 (http://en.wikipedia.org/wiki/Homi_K_Bhabha) 등의 '혼종성'(hybridity; 混種性, 雜種性, 交配)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식민지적/유사식민지적 상황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만남은 꼭 복종/저항 관계뿐만 아니라 문화 교류, 나아가서 '혼합적 문화의 탄생' 등을 낳으며, 결국 지배자와 피지배자 양쪽을 긍정적으로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이론을 한국사에 적용시키자면 식민지 시기 말기의 아리랑 등 '이색적인 조선의 원한 어린 소리'가 일본 '내지'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나, 조선에서 신파극이나 엔카(演歌)와 계통적으로 유관한 듯한 '뽕짝' 리듬의 트로트가 인기를 얻었던 현상을 주목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이론을 꼭 맹목적으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억압적 상황이라 해도, 두 인간집단의 만남이란 어떤 생산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죠. 억압적 체제와 무관하게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떤 보편성을 내포하니까요. 또한, 억압적 상황을 타파해보려는 시도에서도 대개 어떤 '혼종성'이 포착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날 노르웨이를 봐도 노르웨이와 이민자들 사이의 관계에 어떤 '혼종성'이 포착되긴 합니다. 중동 음식인 케밥을 애호하는 젊은 노르웨이인들도, 노르웨이 국내 유력 논객이 된 이라크 출신의 발린 알 쿠바이시 선생(http://no.wikipedia.org/wiki/Walid_al-Kubaisi) 같은 분들의 존재도, 노르웨이 급진 정당, 사회단체에서의 이슬람권 출신의 큰 역할도 이를 증명합니다.
저희 외국인 거주자들이 노르웨이 국가의 '관리 대상자' 위치에 있어도, 우리의 존재가 어떤 혼합문화를 잉태시키는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호미 파파의 이론을 절대시하여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을 파기하는 것도 금물이라고 봅니다.
'혼종성의 탄생'이라는 한 측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르주아 국가는 이민자들을 관리, 통제하고, 그 노동이 자본에게 무탈하게 제공할 수 있도록 제반 조건을 조성해주는 것이고, 이 상황은 '유사 식민지적 상황'이라고 규정해도 무방할 정도로 상당한 폭력성, 강제성을 띠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국가가 우리를 일종의 '유사 포로'로 삼아 관리, 통제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중무장한 수비대가 관리하는 유럽연합의 국경을 국가의 허락없이 넘나들 수 없기 때문이죠. 관리자들이 중무장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 어떤 무장도 당연히(?) 허용되지 않고, 국가와의 무장 대립을 시도해보려는 이민자는 당장에 '테러리스트'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결국 레닌의 정의대로 국가의 골간이란 '무장한 관리자들의 부대'인 셈이죠. 혼종성이라는 현상은 인정돼도, 기본적으로 이민자 등 수많은 내부 식민지들을 거느리는 자본주의 국가는 폭력에 기반을 둡니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시키고 무계급사회를 건설하는 과정도 아마도 불가피하게 결국 폭력적 측면을 띠게 될 것입니다. 물론 사회주의자의 신성한 의무는 가능한 한 폭력을 제한시키고 인민들의 조직화의 최대화를 통해 비폭력적 혁명의 이상을 달성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이상은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달성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역사적 경험은 단순한 대답을 내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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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여름, 3일 동안의 여행 (레디앙, 2011년 06월 15일 (수) 11:41:58 박노자 / 오슬로대)
진정한 사랑, 시련은 있어도 질투는 없다?…20년 만의 정리
저는 지금도 1991년 여름에 열차를 타고 흑해안 휴양지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아가는 3일을 아주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게 쏘련의 마지막 여름이었다는 사실, 이 후로는 저희와 같은 일선 지식일꾼들이 흑해안 휴양지에 대한 꿈을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불과 1년 후에 가스총을 휴대하지 않고 집을 떠나기가 무서운 준(準)내전적 상황들이 도래할 사실 - 이 모든 사실들을 저는 그 때에 알 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차여행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가스총 없이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마지막 쏘련식 여행이라서는 아닙니다. 흑해 북안을 떠났을 때에 어떤 이름 모를 우크라이나의 철도역에서 우연히 신문가판대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운좋게 사서, 레닌그라드 도착까지 그 책을 열독해 거의 외울 정도가 됐습니다. 지금도 그 여행을 '프롬과의 만남'으로 기억합니다.
신문 가판대에는 황색신문과 에로잡지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늘날 러시아를 염두에 둔다면 20여년 전의 쏘련에서 신문가판대에서 사르트르나 일본 단가집, 도덕경의 러역, 아니면 프롬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믿어지지 않는데, 엄연히 사실이었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절인지라, 냉전기간에 외국사상에 접근 제한 당해왔던 인민들은, 그 때에 '외국 진보 사상'이나 '외국 고전'에 대한 매우 뜨거운 열기를 보였습니다. 참, 프롬의 이 책은 기쁘게도 번안 식의 국역본도 있는데 국내에서 얼마나 읽혀지는지 저로서는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좌우간, 그 때에 불편한 열차 침대에서 그 책을 읽고 얻은 깨달음을, 그 후로 20년 동안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프롬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소유욕'의 정반대로 정의했습니다. '소유욕'이라는 것은 자아 본위적인, 자아 지향적인, 그리고 본질적으로 타자에 대해 배타적인 욕망입니다. 효도를 함으로써 효자/효녀 소리 듣고 싶은 욕망, 자식에의 '투자'를 함으로서 노후에 자식으로부터 '모심'을 받고 싶어하는 욕망, '나의 여자/남자'가 오로지 '나'에게만 속하기를 바라는 욕망 - 이는 이 사회에서 '사랑'으로 오해 받는 각종 소유욕의 종류들입니다.
그 중에서는 아마도 가장 독신(瀆神)적인 것은, 불전(佛錢) 헌납이나 교회 출석, 수천배(數千拜) 올리기 등등을 통해서 '나'나(나의 연속으로 인식되어지는) 부모/친지를 위해 천당/서방정토에서 '한 자리'를 마련하려는 욕망입니다.
정말이지, 부처님/하나님 사랑의 이름으로 신과의 '자아 본위의' 거래를 시도하는 사람보다 차라리 살인의 악업을 지어 지옥에 갈 각오로 억압자를 상대로 수류탄을 투척하는 정의의 테러리스트가 천당/서방정토에 가는 게 더 순리일 것 같습니다. 그는 악업을 짓는다 해도, 적어도 자기자신을 위한 악업이 아니고 타자의 공통적인 업(業)을 향상시키기 위한, 자기 희생적인 악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타자의 입장에 서서 타자에 대한 자신의 배타적인 욕망을 버리고, 타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타자의 욕망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흔적이 없을수록 사랑의 순도가 높아지게 돼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바로 그럴 것입니다. 신이 우리에게 "나를 모시라", "나에게 예배하라"라고 욕망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망 속에서 남의 행복을 건설해주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도 행복해지기를 신은 그저 바랄 뿐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사랑만큼 '무아적'(無我的)이지 못하지만, 일단 이 방향으로 계속 시도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진짜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노후에 자식으로부터 '부양'이나 '효도'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남에게 글 등으로 도움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남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태가 되기 전에 제발 저를 황천으로 보내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방법으로 자식과의 관계를 설정하자면 부자 양쪽이 내면적으로 좀 강해야 하는데, 일단 아동의 자립심을 키우는 것은 '국영수'보다 더 중요한 교육의 목적이지요.
남녀 사랑 같으면, 독점욕이라는 독약이 제일 퍼지기 쉬운 영역입니다. 더군다나 이 미쳐버린 세상의 가장 악질적인 억압장치 중의 하나인 배타적인 일부일처제가 이와 같은 독점욕을 법제화까지 시키니 더더욱도 소유욕을 사랑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제게 (프롬의 정의에 맞는) 진정한 남녀 사랑의 모범은 로서아 혁명시인 마야코브스키와 문학연구자/혁명가 요십 브릭의 부인 릴랴 브릭의 사랑입니다.
1915년, 부인 릴랴가 청년 시인 마야코브스키와의 사랑에 빠졌을 때에 그 남편 요십 브릭은 그저 기뻐했을 뿐이고, 마야코브스키를 초청해 셋이서 하나의 호구를 이루어 같이 살게 됐습니다. 요십 브릭과 마야코브스키는, 질투를 느끼기는커녕 아주 절친한 친구가 된 것이죠.
1923년 이후에 마야코브스키와 릴랴가 더이상 육체적 관계를 거의 갖지 않았지만, 역시 아주 가까운 동무로 지냈으며, 거기에다가 릴랴가 마야코브스키와 새롭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또 다른 여러 여성들과 가까운 친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요십 브릭과 릴랴 브릭, 그리고 마야코브스키 사이에 각종의 '시련'은 있어도, 한 가지 절대 없었던 것은 질투이었습니다. 세계에서 '소유'라는 게 없어지게끔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혁명가들이라서 그런 것인이었던가요?
꼭 혁명가만이 진정한 (비소유적인) 사랑을 할 줄 아는 게 아니지만, 대체로 공산주의적 혁명과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동질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란 사유와 이윤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고, 진정한 사랑은 소유욕과 독점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공산주의자만이 진짜 사랑을 할 줄 아는 게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라면 적어도 자신의 소유욕에 대한 '거리 두기', 상대화, 궁극적으로 소멸 작업을 해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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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들의 도덕성과 국가 (레디앙, 2011년 06월 10일 (금) 09:08:35 박노자 / 오슬로대)
의회 진출 급진주의자 불가피한 관료화 보수화 어떻게 견제하나?
제 아내처럼 혁명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과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반박은 “혁명가들이 과연 일반인들보다 특별히 착하냐?”는 류의 논거들입니다. 이 논거가 구체화될 때에 조선의 최근 역사를 놓고 '혁명가들의 치사한 말로'에 대한 끝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곤 합니다.
사실, 한때 남로당 당원이었던 박정희부터 여운형 계통의 젊은 활동가였던 김대중까지, 남한의 대통령들만 봐도 (준)혁명가로 시작하거나 한때에 '데모꾼'이었던 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대통령급으로까지 가지 않으면 아예 한국 보수계의 절반 가까이 '전향한 혁명가/급진주의자'라는 인상을 받을 만큼 “목숨을 내걸고 운동을 했던” 많은 이들의 말로는 참담합니다.
정말이지 오늘날 손학규나 이재오 등을 볼 때에 위장 취업, 수배 생활, 고문 등의 이미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도, 그들이 그 '이름 값'을 바로 '목숨을 내건 급진 활동'으로 벌었다는 것만큼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전향한 혁명가'들도 수두룩하게 최근의 조선사의 페이지들을 장식하지만, '득의한 혁명가'의 모습이라고 해서 그것보다 꼭 나은 것도 아닙니다. 북조선의 말년의 김일성 주석이나 허정숙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님 등의 모습을 볼 때에도 꼭 중국에서의 목숨을 건 무장항일독립투쟁의 이미지가 쉽게 연상되지 않지요. 여유만만한 귀족의 모습이 보인다고 이야기하면 지나친 혹평이 될 것인가요?
좌우간 전향을 하든 '목적 달성'을 하든 비참한 모습이 되고 만 혁명가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김남주 선생처럼 적의 포로가 되어서 고문과 고문에 준하는 옥고의 후유증으로 이 미쳐버린 세상을 일찍 떠나신 분들이 차라리 제일 행복하셨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제 아내 말대로 “혁명가라고 해서 별 수 없다, 일반인에 비해서 특별히 착하거나 도덕적이지 못하다, 고로 그러한 인간들이 주도하는 혁명도 결국 거기부터 거기까지일 것이고 권력은 바뀌어도 사회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못할 것이다.”는 담론이 성립된단 말인가요?
사실, 이와 같은 반박들을 접할 때에 저는 솔직히 절망보다 오히려 희망을 느낍니다. 왜인가요? 왜냐하면 '혁명가들의 도덕성'을 늘 묻는 만큼 일반인 뇌리에서 “혁명가는 원칙상 도덕적이어야 한다, 혁명가는 도덕가다.”라는 등식이 성립돼 있기 때문이죠.
혁명과 도덕이 당위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 자체는 이미 엄청 중요한 사실이죠. 우리는 혁명가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거의 지나치게 많이 요구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예컨대 현대자동차 자본의 노조 활동 방해에 지칠 대로 지친 노조 활동가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면, 우리는 과연 이 '자본에 의한 사회적 타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분노합니까?
아무리 분노를 해도, 현대자동차를 완전히 버리고 불매 운동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진보적 대통령' 노무현의 치하에서 경찰의 야만적인 과잉진압으로 두 분의 농민(전용철, 홍덕표 열사)이 비명에 횡사를 하시게 됐을 때에 과연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사람들은 많았을까요?
자본과 국가가 다소 살인적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이미 그만큼 익숙해진(?) 셈입니다. 반대로 '급진적인 반대파'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면 사회여론은 당장 급격하게 악화되죠. 1997년에 한총련 활동가들에 의해서 경찰 프락치로 지목된 이석씨의 상해치사 사건에 대한 사회 각계의 반응을 기억해보시지요.
사실, 한총련은 그 때에 매장을 당한 뒤로는 그 위상을 영영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중 잣대'는 일면 불공평하기도 하지만, 또 일면으로는 그만큼 '진보, 급진, 혁명' 세력에 대한 일반인들의 '도덕성' 관련 기대가 크기도 한단 이야기입니다.
그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기만 하면 급진 세력들이 상당한 사회 여론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문제는, “혁명가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그 기대에 어떻게 부응하느냐, '혁명가의 도덕성'을 어떻게 지키느냐 라는 부분입니다.
제 아내의 말은 기본적으로는 맞습니다. 혁명가라고 해서 신도, 태생적 영웅도, 타고난 도덕가도 전혀 아닙니다. 혁명가란,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을 파악하고 피압박 계급의 편에 서서 그 모순들을 행동적으로 바로 잡아보려는 역사적 행위자일 뿐입니다. 혁명가의 자각이나 행동 능력 이상으로 그 모순이 심화되거나 그 모순을 호도하는 국가의 억압체제가 아주 고도화되면, 혁명가도 별 수 없이 활동을 포기하거나 국가에 항복할 가능성은 높습니다. 실제로는 태평양전쟁 시절에 일제의 '고등 안보 국가/총동원 국가'가 다수 민중들의 저항을 완전 봉쇄시키고 상당수 민중들을 '적극적인 침략의 공범'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던 상황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한 수많은 일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전향을 하고 만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혁명가라고 해서, 그 어떤 '초인적 능력'을 보유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또한, 어떤 상황으로 말미암아 권력 체제 안에서 그 나름의 '한 몫'을 나누어 갖게 되는 경우에는 많은 혁명적 경력 보유자들이 거기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1930~40년대의 불굴의 혁명가이었던 미야모토 겐지(宮本?治) 선생이 1950년대 후반 이후로 일본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어서 공산당을 급진성이 결여된 의회주의 정당으로 만들어버리고 만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일례입니다.
단독으로 권력을 독점하게 된 혁명가의 보수화 가능성은 더욱더 농후합니다. '러시아 민족의 우수성' 선전과 '뿌리 없는 세계주의자' (즉, 유대인 등의 소수자 계통의 지식인) 반대 투쟁에 매몰하고 만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의 스탈린의 이념적인 모습을 보면 '혁명가'라기보다는 가장 전형적인 파렴치한 보수 쇼비니스트만이 보이는 것이죠. 정말, 성공적 권력 쟁취 내지 권력 체제 편입보다 '혁명적 도덕성 지키기'가 훨씬 더 어려운 과제로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과제를 그래도 해낼 수 있을 것인가요?
공산 혁명가의 최종 목표는, 국가 권력의 탈취도 아니고, 국가 권력 구조에의 참여도 아니고, 바로 국가 그 자체의 소멸입니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이상, 근대 국가나 '민족', '국민'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열차부터 수력발전소까지의 대량 산업시설들을 계획적으로, 체계적으로 운영해야 하겠지만, 이는 국가 기관이 아닌 지역 사회가 민주적으로 조직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체적으로 생산과 분배를 지구적 차원에서 나름의 계획에 입각해 해나가야 하겠지만, 이것을 지역사회들의 지구적 연합이 해야 할 일입니다.
지역사회든 지구적인 지역사회의 연합이든 민초들로부터 소외된 그 어떤 폭력기구(군대, 감옥, 안보기관 등등)도 갖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정확한 정의는, '세계적 차원의 무(無)국가적인 계획적 생산, 분배의 사회'죠.
그런데 이는 우리들의 최종 목표지이지, 내일 모레 현실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사회는 아니거든요. 국가/자본과 국민, 민족, 군대가 아직도 이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는 오늘날에는, 공산당이라 해도 이들과의 각종 '상호작용'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르주아 신문들과 경쟁하면서 급진진보 신문을 내는 일부터, 부르주아 정치를 폭로하기 위해서라도 국회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일까지, 오늘날 공산주의 활동가의 일상은 자본과 국가 등과의 '관계'를 불가피하게 맺는 것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지만,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처럼 무인도나 황무지 등을 이용해서 '이상적 코뮨'을 만들려 하지 않는 이상 별 수 없단 이야기죠. 또, 부르주아 국가가 심각한 균열의 모습을 보일 경우에는, 언젠가 급진활동가들이 어쩌면 국가를 운영하는 위치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볼셰비키들이 러시아라는 (후진)국가를 운영한다기보다는 세계혁명을 원했지만, 그들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이 권위주의적이며 온갖 모순에 가득 찬 나라의 '관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혁명가가 국가와 '평화공존'해야 하는 것도, 유사시에 '국가 관리자'가 되는 것도 사실 비극입니다. 국가란 최악의 독약이고,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그 어떤 활동을 해도 혁명가의 도덕성에 해(害)가 될 뿐이지 도움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국가가 갖고 있는 각종의 아비투스들(위계질서적 명령체계, 현실추인적인 인간적 태도, 현상유지 위주의 사고 등등)이 '혁명'이 요구하는 부분들(민주성, 자발성,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등등)과 정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의회 정당에 들어간 급진주의자는, 약 10여 년 동안의 의회 활동의 끝에 약간이라도 '관료적 사고'에 감염되지 않으면 기적일 것입니다. 실질적 기능이 있는 의회마저도 불가능한 후진 농업국가에서 권력을 독점하게 된 혁명가 집단 같으면, 약간이라도 과거 귀족지배자들을 닮아가지 않으면 역시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국가와의 '관계 맺기'가 불가피한 세계에서는 과연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바로 국가와의 의식적인 '거리 두기'와 국가와의 '거래'가 불가피한 혁명 집단 지도층에 대한 '밑'의 철저한 감시, 민주적 견제입니다.
일단 우리는 복지국가를 위해서 싸우더라도 이게 당장 불가피하게 필요한 최소강령이지 궁극적 목적지가 전혀 아님부터 잘 기억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민중 언론이라면 무엇보다 국회 등에 진출하게 되는 민중운동의 지도부나 부르주아 언론까지 상대하게 되는 진보 '명망가'들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저처럼 온건파 자유주의자 기관지인 <한겨레>에 글을 쓰는 사람부터 잘 감시하면서 약간이라도 타협적인 냄새가 나면 무자비하게 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글쟁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썩게끔 해줄 수 있다는 것이죠.
만약 혁명가들이 어떤 국가에서 권력을 잡을 경우에는, 그 일차적 목적은 '국가 운영'보다 세계적 혁명운동의 지원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혁명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는 혁명운동 내부에서 그나마 민주성이라도 견지할 수 있지만, '혁명모드'에서 '국가운영모드'로 전환하게 되면 스탈린 대원수나 김일성 주석의 출현은 이미 역사적 필연입니다. 물이 고이면 썩게 됩니다. 혁명의 물은, 계속 흘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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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사람을 죽이는 사회 (한겨레,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0609 19:21)
한국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늘 한 가지 어려움에 봉착한다. 학생들에게 “한국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솔직하게 말문이 막힌다. 한국에 대한 해석을 노르웨이 사회에 제공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이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어 전문성에 회의마저 느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심화에 따른 민중 생계의 불안화’? 꼭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부도가 난 사람들 중에서는 비관자살이 흔한 일로 알려져 있고, 가정 생계에 대한 책임을 본격적으로 지게 되는 30대 중에서는 자살이 주요 사망원인 1위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니, 양극화나 노동의 불안화 등과 자살률의 관계는 의심할 수 없다. 1995년과 1998년을 비교할 때 1997년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의 여파로 자살자 수가 거의 두 배로 껑충 뛴 것도 엄연히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못지않게 신자유주의가 강타한 남아공이나 에스토니아 등 여러 중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살률이 한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즉, 단순히 최근의 민생고만을 탓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강조하는 유교적 사회로서의 특징’? 역시 꼭 틀린 진단은 아니다. ‘민주’(즉, 온건 자유주의) 세력의 지도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책임져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 세상을 하직한 노무현 전 대통령부터, 나쁜 성적 탓에 앞으로 명문대에 들어가 효자·효녀 노릇을 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성적 비관 자살’의 길을 택하는 고교생들까지, 이 사회에서 자살은 흔히 ‘집단에 대한 책임의 표현’으로 통한다. 그러나 ‘책임의 윤리’와 함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스스로 훼손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유교 전통이다. 즉, 전통을 통한 설명도 그 한계를 드러낸다.
필자로서는 사회학적으로 ‘자살 공화국’으로서의 한국의 현실을 해명하기가 지극히 어렵지만, 체험적으로는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경제적 요인도 사회·문화적 요인도 작용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철저하게 내면화돼 있는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 사랑이 불가능한 것이 문제일 것이다. 타인을 위해 아낌없이 자기 자신을 내주는 것이 사랑이지만, 이 사회에서는 자신으로부터의 도피나 소유욕이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교회나 사찰마다 하나님 사랑과 부처님 자비가 외쳐지지만, 그 실상을 자세히 보면 성금이나 불전을 주어서 죄에 대한 면죄부나 이윤추구 정글에서의 성공에 대한 주술적인 보장을 사라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한다기보다는 아이 교육에 ‘투자’해 나중에 아이가 거둘 ‘성공’을 공동 소유하려 한다. 피 말리는 학습 경쟁에 내몰려 부모의 공포와 소유욕의 대가를 대신 치러야 하는 아이는, 살인적 체제의 ‘나사’로 전락하고 만 그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하기가 쉽겠는가? 입시학원이 된 학교나, 등록금을 약탈하고 시간강사나 환경미화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악질적으로 착취하는 악덕 기업이 되고 만 대학에서 앎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키울 수 있겠는가? ‘인건비 절약’이 주된 모토가 된 기업체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노동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필자는 북한 사회의 세습적인 수령주의나 과도한 군사주의, 국수주의 수준의 ‘조선민족 제일주의’에 찬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북한 사회가 지금처럼 ‘현실 사회주의’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폐쇄적 형태로 왜곡되게 성장하지만 않았다면, 필자는 차라리 오늘날 한국보다 북한이라도 선택했을 것이다. 빈곤과 억압은 견딜 수 있어도, 인간을 상품화시켜 사랑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한 이 사회의 분위기를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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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중적 혁명이 가장 비폭력적이다" (레디앙, 2011년 06월 03일 (금) 01:56:44 박노자 / 오슬로대)
혁명적 폭력의 본질…"불교 들먹이는 내가 혁명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
우파는 필요에 따라서 독도 문제 등을 이용하여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또 어차피 한일의원연맹(韓日議員聯盟) 등을 통해 필요한 만큼 연대하기도 하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우파 사이의 한일 연대까지 걱정할 이유는 별로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좌파'에 대한 저의 긍정 일변도의 발언에 반대하여 "좌파를 꼭 이상시할 것 없다. 1972년 산악베이스 사건이나 아사마 산장(?間山?) 사건을 생각해보라"고 제게 강력한 어조로 이야기했습니다.
신좌익은 대중성을 다소 결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교 운영 민주화, 등록금 인하, 지배계급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 '명문대' 학생들의 '착취자로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 베트남 전쟁 반대 등을 위해 벌여온 투쟁의 대부분은 '폭력을 위한 폭력'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공익을 위한 (일부 폭력을 포함한) 맹렬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특히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의 기억에는 그 '공익성 투쟁'보다는 왠지 말기적인 엽기적 '살인사건'들만이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국가와 자본이 좌우하는 교과서, 매체의 내용에 따라 형성되어지는 '집단 기억'은 참 선별적이지 않을 수 없네요.
저와 이야기를 나눈 지식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일반인 머리에서도 '좌파'는 꼭 '폭력'의 이미지를 가집니다. 돌을 던지는 시위자든 총을 든 적군(赤軍) 병사든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좌파의 이미지는 꼭 단순히 투쟁적이라기보다는 꽤 '폭력적'입니다.
급진 좌파를 꽤 혐오하는 제 아내 같아도 저에게 가끔가다 "불교를 들먹이는 당신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급진 좌파를 지지하는 게 자가당착"이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한 번 이 부분을 이론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여기에서 약간의 본격적인 고찰을 해보겠습니다.
계급사회의 질서는 기본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제도적' 폭력이 뒷받침합니다. 학교와 매체가 다수의 대중들의 뇌리에 주입시키는 법과 경찰, 군대가 없었다면 과연 삼성전자는 이씨 왕조와 여타의 대주주의 소유로 남았을까요? '법과 질서'의 강제가 아니었다면 서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대주주 배당금 등으로 들어갈) 이자를 꼬박꼬박 냈을까요? 이 제도가 우리에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물리력으로 지탱됩니다. 그리하여 이 제도를 바꾸는 것도 결국 잠재적인 물리력의 위압이든 적극적인 물리력의 이용이든 어느 정도의 '물리력'을 요구합니다.
전자는 예컨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좌파가 국가 권력을 어느 정도 (불완전하게나마) 장악한 베네수엘라의 경우에 해당되죠. 좌파의 대중성과 민주주의적 선거제 등을 이용하는 기술이 우수하니 우파는 일단 노골적 물리력 대결에서 승산이 낮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여태까지 좌파의 '위압'에 눌려 대규모의 물리적 저항을 자제해온 것이죠. 그런데 역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 다수의 혁명적 시도들은 후자의 부류에 속합니다. 역사적 경험을 분석해보면 좌파의 폭력 이용에 몇 가지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처참한 폭력은, 대중적 기반이 없는 극소수 위주의 '초(超)혁명적' 조직들이 벌이곤 합니다. 고립된 극소수인만큼 늘 위기감이 팽배하고 늘 '패배주의'나 '배신', '적의 스파이' 등에 대한 의심은 끊이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연합적군은 바로 이와 같은 조직의 전형에 가까웠습니다. 그러한 조직들은 - 연합적군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 또 많은 경우에는 (극소수 조직들이 자주 그렇듯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해 장악되고 권위주의적으로 운영됩니다. 이는 무분별한 폭력의 위험성을 높이지 않을 수 없죠.
반대로, 패배의 상황이라 해도 대중성이 높은 좌파투쟁은 '정당방어' 형태의 폭력을 써도 무분별한 '과잉 폭력'을 자제합니다. 예컨대 진정한 의미의 '대중에 의한 민중 정부'인 파리코뮨은 관군에 의해 패배를 당하여 관군의 학살 행위를 직면하면서도 적의 스파이와 반동 분자 63명만을 총살했습니다.
참고로, 관군에 의해서 학살 당한 코뮨의 전사와 파리 노동자의 수는 약 3만 명으로 추산되고, 차후에 1만3천명이 또 사형과 유배형 등을 받았습니다. 파리코뮨의 경우에는 '무장방어'는 있어도 저와 대화를 나눈 국내 지식인이 그토록 반대했던 '과잉 폭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혁명가들의 대중성 여부와 함께 국제적 고립의 여부는 혁명의 폭력성에 큰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예컨대 베네수엘라 등 남미, 중미의 좌파 정권들과 가까이 연대하는 쿠바의 경우에는 '정치범'(주로 반혁명적, 친미적 성향의 정치운동가: http://www.greenleft.org.au/node/42450)의 수는 - 다소 부풀린 보수적 매체의 보도로 봐도 - 167명에 불과합니다(http://www.bbc.co.uk/news/10517497).

이 정도면 '혁명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선에 가까울 것입니다. 반대로 쿠바에 비해서 훨씬 더 보수화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훨씬 더 국가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거기에다가 동북아에서 상대적으로 고립된 북조선의 경우에는 진정한 의미의 '반혁명'과 무관한 수만 명의 정치범들이 갇혀 있다는 보도들은, 비록 현지조사를 통한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일단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됩니다.
고립된 혁명은 보수화, 민족주의화되기도 싶지만, 일단 '포위당한 요새'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적의 간첩'에 대한 피해망상증부터 태심합니다. 소련의 경우에는, 대숙청으로 이어진 집단 히스테리의 피크가 소련이 상대적으로 고립돼 있었던 1937~38년이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은 아닙니다.
1945~49년간의 동유럽에서의 공산주의적 정권 수립, 1949년 중국 혁명의 승리, 1953년 조선전쟁의 종료와 남한을 기지로 하는 미 제국으로부터 소련을 방위할 북조선의 '생존에의 성공', 그리고 1953년 스탈린의 죽음 이후로는 사실상 숙청의 비극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소련은 더이상 일명의 독재자가 보안기관을 통해서 통치하는 고립된 국가가 아니었기에, 제도의 폭력성도 대단히 완화됐습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시면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의 폭력은 소련/동유럽과의 관계 냉각 이후, 그리고 서방과의 관계 정상화 이전에, 즉 고립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국제 고립은 여러 요인 중의 하나의 요인에 불과했지만, 좌우간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완전한 '무혈의 혁명'은 우리의 소망적 사고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단히 좋겠지만, 역사적 경험으로 봐서는 이 꿈의 현실성에는 큰 의문이 제기됩니다. 단, 혁명세력의 대중성, 민중성, 민주성 등은 혁명의 폭력성을 크게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혁명은 가장 비폭력적입니다.
그 다음에, 혁명으로서는 고립은 죽음이니 국제적 고립을 피하고 늘 무산계급 국제주의 노선을 따르는 것은 내부적인 최악의 폭력을 면하는 길입니다. 또한, 초좌파적 성향은 자주 '과잉 폭력'을 부르니 좌파의 현실적 강령은 늘 대중들의 준비 상황과 당면 욕구, 그리고 당면 상황의 현실적인 특징들을 잘 고려해야 합니다.
대중적, 민주적, 현실적, 국제적 성격의 혁명세력이라면 '정당방어'를 해도 적어도 '폭력을 위한 폭력'을 삼가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혁명들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위로일 것입니다. 전쟁 등으로 점철된 우리 현재의 현실로 보자면 어쩌면 이 '끝없는 끔찍함'(마르크스의 표현)에 비해서 혁명은 훨씬 덜 폭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저 같이 '불교를 들먹이는' 사람마저도 혁명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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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 “일제~박정희 미화는 지배권력 담론 만들기” (경향, 황경상 기자, 2011-05-25 21:17:42)
ㆍ최근 출범 한국현대사학회 日 ‘자학사관’ 그대로 베낀 듯
ㆍ한국사회 이슈 된 ‘복지담론’ 이해관계 얽혀 형성 힘들 것

여느 때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올해로 5·16쿠데타가 50년을 맞는 등 한국현대사의 주요 사건들도 되돌아볼 만한 숙성의 시간이 흘렀다. 편향된 이념성향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자는 명분을 내건 한국현대사학회가 출범함으로써 또다시 근현대사에 대한 논쟁이 불붙을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지난 24일 강원 영월군에서 열린 영월연세포럼에서 ‘유럽의 한국학-외부에서 보는 이점’을 주제로 발표하기 위해 입국한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박노자 교수(38)를 만났다. 그간 한국 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각과 통렬한 비판을 선보였던 박 교수는 한국 역사 전공자다. ‘일종의 자기성찰’이라는 이번 발표에서 그는 유럽 등 해외에서의 한국학 연구가 “정치적인 현재성이나 요구에 따른 유행”에 덜 민감하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이제는 한국에서 시들해진 해방전후의 노동운동사 연구가 미국·캐나다 등 북미에서는 아직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되레 ‘정치적인 현재성이나 요구에’ 민감하게 조응하는 한국의 역사연구 상황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해 출간한 <거꾸로 보는 고대사>를 통해 탈민족주의적 한국 역사를 보여준 그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한국사를 보겠다는 한국현대사학회의 출범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지배담론이 필요한 현재의 한국 지배계층은 반제국주의 투쟁의 입장에서 역사를 읽는 현재 사학계의 대다수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 사학계가 일부 의도가 지나치고 사실적 뒷받침이 부족한 부분은 있었지만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건전했죠. 반면 한국현대사학회와 같은 입장은 일제강점기를 제국주의 침략이라기보다 발전의 시대로 해석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 과정을 미화하면서 자본주의 발전 사관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구축하려고 하는 뻔한 의도가 보입니다.”
한국을 지배하는 권력과 자본은 일제강점기부터 총독부의 보호막 아래 세력을 형성했고, 이후에도 친자본적인 이승만·박정희 정권과 궤를 같이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본주의 흐름에 도전하거나 끔찍한 피해를 입은 이들은 폄훼·배제시키고 처음부터 끝가지 긍정적인 발전인 것처럼 꾸미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생각이다.
박 교수는 이런 분위기가 교과서포럼 이래 보수인사들이 비판해온 ‘자학사관’을 넘어 ‘자만사관’을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이는 “잘못한 부분들을 덮고 미화한다는 점”에서 일본 극우들이 말하는 ‘자학사관’과 용어 선택에서부터 베껴온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물론 노르웨이에서도 보수·진보학자들이 견해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노르웨이 보수들은 북부 원주민인 ‘삼’족의 강제동화 정책 등 국가가 저지른 잘못된 일들을 미화·호도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차이다.
복지 선진국이라 불리는 노르웨이에 11년째 거주하고 있는 박 교수에게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복지 담론에 대해 물었다. 그는 “노르웨이에서는 우파 성향의 정당들도 현재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있어 노동당 못지않게 큰 역할을 했다고 자기선전한다”고 말했다. “복지를 축소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어도 대중적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담론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복지는 “자본과 노동의 임시적 타협”이기에 “그 사회의 자본과 노동의 역학관계를 알아챌 수 있는 지점”이다. 한국 사회의 낮은 복지수준은 노동계급의 힘이 약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박 교수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까지 복지를 얘기하고 있지만 전반적인 사회 담론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복지 재원을 마련하자면 법인세, 고소득자의 소득세 등을 올려야 하지만 이 부분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지배계급과 보수언론들이 여론을 이끄는 데 유보적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현재 나오는 복지 담론이 “개인의 행복보다 출산 장려를 통해 국가가 필요한 인력을 어떻게 늘릴 것인가”에 집중돼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한다.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고질적 문제와도 관련돼 있다.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은 멕시코에서도 보기 어려운 노동에 대한 ‘초착취’로 이뤄졌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고된 학습 노동에 익숙하게 만들고 경쟁을 강조해 이를 견디게 만듦으로써 초착취에 자발적으로 응하도록 ‘사육’시키는 거죠.”
결국 모든 문제가 “자본주의 발전을 합리화하느냐, 이면을 들춰내서 문제를 지적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하는 박 교수는 노르웨이의 리비아 폭격 참여에 대해서도 비판적 인식을 드러냈다. 한국 사회의 갈 길도 멀다. “발전한 것 같으면서도 많은 부분이 반동적이며, 특히 대체복무제 도입 등 군대 관련 부분은 놀랍도록 보수적인 것이 현실입니다. 의경들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같은 민중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쓰이면서 부대 내 폭력으로 자살하는 현실을 왜 정리할 수 없을까요.”
 
청년혁명을 위해서 (레디앙, 2011년 05월 26일 (목) 01:09:24 박노자 / 오슬로대)
"대한민국을 흔들 대중행동 불을 지필 세력될 가능성"
우리는 대개 북조선에서 건설부대들이 거의 무급으로 '속도전'을 해서 시설을 짓는 모습에 경악해 '부역 (賦役) 노동'이라고 비판하지만, 이 소위 자유민주주의적 남한에서도 사실상의 무급에 가까운 젊은이들의 노동 제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이젠 특권이 되고 만 자기 노동의 정기적 판매 (즉, 정규직 취직)의 권리를 획득하려 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으로, 어떻게든 간에, 몸을 다 부수더라도 '스펙'을 쌓으려고 다들 죽을 고생들 하시지만, 지푸라기 열 개를 붙들었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의 노도(怒濤)를 어찌 헤쳐나가겠습니까?
지금 34만 명이나 되는 (9년전 만해도 22만이었는데, 노무현/이명박 신자유주의적 정권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이렇게 빨리 성장됐습니다) 대졸 실업자들 중에서는, 국제행사 도우미를 몇 번 해본 사람도, 전교 일등해서 '선진국'에 교환학생이라는 이름의 '순례'를 갔다온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아무리 경력은 우수해도, 이윤추구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비용절감'만을 추구해 가급적이면 새 사람을 덜 뽑고 기존 사원들을 장시간 집중 착취한다든가 인턴, 아르바이트생을 써도 정식 취직을 시켜주지 않다든가 어떤 방식으로든 피고용자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는 기업주들의 우선순위를 바꿀 수 없습니다.
지금 청년실업의 공식 통계는 거의 9%이지만, 아르바이트생 등 극도로 불안한 노동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20% 가까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공식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해마다 이 숫자는 약 0.5%로 올라가는데, 이대로 갈 경우에는 대한민국 청년층의 미래는 뻔합니다.
거기에다가 빚져서 살인적 등록금을 냈다가 천만원 이상의 부채를 안고 백수 신세로 사는 수많은 이들의 형편까지 생각해주시면 지금 대한민국 젊은이의 '절망의 수위'를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젊은층 전체가 벼랑끝으로 몰려 있기에 '국제행사 도우미'라도 잠시나마 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로 보일 정도이겠습니다.
그냥 이윤도 아니고 아주 단기적인 이윤을 위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절대 다수는 '주변 분자' 이상의 그 어떤 미래도 없습니다. 이들을 그나마 부분적으로라도 살릴 수 있는 것은 기업들의 취업정책을 '이윤 위주'에서 '사회정책 위주'로 획기적으로 바꿀 계획경제 요소들의 대대적인 도입일 것입니다. 예컨대 비정규직의 고용 사유가 법적으로 엄격하게 제한되고, 고용 규모를 인위적으로 축소하거나 비정규직 고용을 일정한 수위보다 더 많이 하는 기업들이 국유화된 은행으로부터 대출도 못받게 되고 국가에 (젊은 실업자들을 위한 수당으로 쓰일) 벌금을 내야 한다면 젊은층은 그나마 숨이 트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에게 이윤으로부터의 해방, 즉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사회주의뿐이겠지만,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기간을 요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 일차적으로 이 사막에서 '일'과 '사회에의 편입'에 대한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게 급선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소외되는 젊은이들의 다수를 살릴 수 있는 계획경제의 요소를, 과연 사리사익만을 추구하는 이 사회의 '오야붕'들이 스스로 앞장서서 할 것인가요? 그럴 일이 없는 것이고, 이와 같은 변혁이 이루어지려면 혁명에 준하는 밑으로부터의 운동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이야말로 이 운동의 '주력부대'가 돼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초반의 화두는 '노동자 혁명'이었지만, 오늘날의 화두는 "노동자조차도 되기 어려운, 노동자가 돼도 하급노동자로 영원히 살아야 할 젊은이들이 선도할 혁명"입니다.
젊은이들이 일단 주도를 하면 - 러시아 혁명 그 당시에 도시 숙련공을 상당수 빈농들이 따랐듯이 - 다른 연령층들의 노동자들도 가세하겠지만, 아무래도 젊은이들이야말로 '주력부대' 노릇을 해야 할 듯합니다.
오늘날 젊은 백수들의 아버지, 어머니들 중에서는 특히 저숙련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죽을 고생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에는 '절망'보다는 '체념'의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그들과 달리 그들의 자녀들은 엄청난 돈을 어렵게 들여 고등교육을 받아도 그만한 사회적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해 주변부에서 소외만 당하게 되는 만큼 훨씬 더 강력한 배신감과 좌절감을 느낄 만합니다.
또 윗세대와 달리 젊은이들이 국제적 이동성까지 좋아 다른 산업국가에 비해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복지나 노동정책 분야에서 후진적인지 대체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인터넷과 휴대폰을 통한 '연락망' 구축이 쉽기에 촛불사태 때 확인된 것처럼 기동성이 강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그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흔들 다음의 대중 행동의 불을 지피게 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1968년 파리 젊은이들이 권위주의적 인간관계의 철폐와 자본주의적인 소외의 폐절을 요구하고. 1987년 서울 대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했습니다. 2012년 내지 2013년 한국 젊은이들은 아마도 "직장을 달라", "배고픈 백수로 평생 보내기 싫다", "등록금을 없애라"와 같은 구호를 외칠 듯합니다.
어찌 보면 거의 저수위의 '경제적 요구'에 가까운 것이죠? 그런데 자신의 처절한 요구부터 시작돼 결국 이 운동은 민주주의 확대의 문제,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철폐의 문제로 확장될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배고픈 노예로는 물론 배부른 노예로도 평생 살 수가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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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위에 떡값이 있다?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05-20 오후 04:13:39)
짙디짙은 떡값 의혹은 무혐의 처리, 의혹을 홈페이지에 게재하면 유죄
아주 편하게 ‘떡’을 먹으며 웰빙생활하는 높은 분에게 ‘명예’란

떡값검사를 “떡값검사”라고 바로 부른 그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며칠 전에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가 대법원으로부터 일부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솔직히 웃음부터 나왔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솔직히 그랬습니다. 웃을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저를 몇 분간 폭소하게 한 것은 ‘명예훼손’이라는 노회찬 전 대표의 기소 사유였습니다.
도대체 재벌의 장학생이 된 법조인에게 훼손될 명예가 있는지, 국민의 혈세를 들여 이런 일을 심각하게 논의하는 법원이라는 곳은 도대체 뭘 하는 곳인지, 주로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컷 웃고 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떡값 의혹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한 법관’의 명예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데,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대한민국 ‘법의 세계’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명예’라는 단어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떡값검사’도 법의 세계에서는 ‘무혐의처리’되며 여느 보통 사람과 똑같은 (법적인 의미의) 명예를 보장받습니다.
무죄측정 원칙, 유죄확정판결이 없는 이상 그 누구도 범인으로 지목되지 않는다는 원칙의 취지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떡값 의혹’이 아주 짙어도 이렇게 간단하게 무혐의 처리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단순히 자신의 홈페이지에 의혹 내용을 게재했다는 죄목으로 죄인이 되기도 하는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유죄확정판결’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유죄확정판결’의 기준이 되는 무죄측정의 원칙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저 무의미합니다. 아무런 위험부담도 없이 마음 편하게 ‘떡’을 드시면서 웰빙하실 수 있는 높은 분들의 ‘명예’에 관해서는 말입니다.
판결문의 일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제 웃음이 아니고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예를 들어서 “(X파일상) 대화 시점은 공개시점으로부터 8년 전의 일 [이기 때문에] 이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공익에 중대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하다고 할 수 없으며, ‘공개해 얻어지는 이익 및 가치’가 ‘통신비밀을 유지해 얻어지는 이익 및 가치’를 초월한다고도 볼 수 없다”는 문구는 아마 저뿐만 아니라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주 심하게 분노할 내용입니다. 뇌물 수수가 8년 전에 이루어졌다 해도 뇌물을 줬다는 의혹을 받는 쪽은 계속 한국사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불법적으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는 쪽 역시 계속 ‘법’을 집행하고 있는데, 이 상황이 ‘공익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아니라면, 대법원이 생각하는 ‘공익’이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삼성의 사익(社益)’과 공익을 착각하고 있다는 느낌도 강합니다. 민중의 혈세로 월급을 받는 검찰의 실체가 무엇인지 납세자들에게 알려준 것은 적어도 민중의 입장에서는 ‘공공의 이익과 가치’가 아닐까요?
노회찬 전 대표도 지적했듯이 이 사건을 통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법적 정의’ 사이의 엄청난 괴리가 드러났습니다. ‘X파일’에서 ‘2년 떡값’으로 거론된 ‘5천만원’이 자신의 2년도 아닌 약 5년 소득과 비슷한 수많은 서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자비한 착취로 민중으로부터 약탈한 돈을 뇌물로 펑펑 쓰는 자본도, 이 돈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재벌의 사설 경비대’ 노릇쯤이나 하는 ‘공무원’들도 이미 ‘정의’나 ‘명예’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상식적인 정의의 개념이 법의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결국 대한민국 지배체제의 안정성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 이를 권력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이하기만 합니다.
‘5천만원’을 일회용의 ‘떡값’이 아니라 5~6년간의 밥값, 반찬값, 월세값, 학비로 쓰는 이 세상의 철수와 영희들은 아주 혹독한 계급적 지배의 세계를 몹시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상공인의 소득은 계속 줄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여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월 7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에 왔다갔다하면서 별로 늘지 않고 있지만, 식료품 가격부터 (특히) 교육비까지 전반적인 생활비 부담은 날로 늘어나 ‘GNP 성장률’이 4%가 되든 6%가 되든 삶살이가 딱하기만 합니다. 불경기와 물가인상에 찌든 서민들이 강남족들의 ‘웰빙’이나 ‘몰입영어 열풍’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그나마 덜 분노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사회에 계급지배와 불평등 위에 또 모종의 ‘초(超) 계급적인 통합의 틀’이 존재한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입니다. 서민으로 하여금 분노를 잊고 ‘사회 통합 메시지’를 받아들이게끔 하는 가장 강력한 틀은 내셔널리즘 (국민주의/국가주의)과 ‘초 계급적 법치’에 대한 믿음입니다. 전자에 대해서 나중에 별도로 쓰겠지만, 후자는 더 이상 ‘충효사상’이나 ‘우리는 모두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말로 주민들을 결합시킬 수 없는 오늘날과 같이 개방·민주화된 사회에서 중요합니다. 법의 ‘초 계급적 신비’에 대한 대중적 믿음이 없다면 이 체제가 위기국면에서 아주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을 권력자들도 분명히 알긴 알 것입니다.  
장기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의 위신’을 높여야 하겠지만, 그들은 장기적인 비전보다 단기적인 사리사욕에 얽매인 사람들이라 계속해서 그들의 ‘법’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습니다. 용산참사 때 재개발업자나 경찰에 대한 사법처리가 전혀 없었던 반면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싸웠던 철거민만 수사, 재판의 대상이 된 것도 그렇고, ‘떡값검사’ 사건에서 검사도 삼성도 아닌 도둑을 보고 ‘도둑이야’라고 고함을 지른 기자나 노회찬 전 의원 등만 사법처리 대상이 된 것도 그렇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진리’라는 사실을 다수가 깨닫게 된다면 결국 이는 체제에 대한 치명타로 이어질 것입니다. 문제는 다수의 분노가 다수의 조직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 시간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서민이 강제철거에 쫓기고 부당해고에 생계를 잃고 비관자살로 몰릴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떡값’을 주고 받는 이들은 이 돈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맡을 만한 후각을 잃은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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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사회서 물신화된 SSCI 영어논문 (레디앙, 2011년 05월 13일 (금) 08:32:19 박노자 / 오슬로대)
학술도 아니고 실용도 아니다…논문, 위신 세워주는 도구 돼
특히 고고학이나 고대사 연구에서 '위신재'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위신재는 통치자의 위상을 나타내는, 그러나 실용성이 별로 없는 고급 물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국사 수업에서 들으셨을 것 같은 '세형동검'은 국가 형성 직전 시대의 전형적인 추장층의 위신재였습니다.
통치자의 성격이 바뀌는 데에 따라서 위신재의 모양도 당연히 바뀝니다. 계급사회가 발달될수록, 통치자에게 내재화돼 있는 문화자본의 축약적 표현물이 위신재 노릇을 하는 경우들이 빈번해집니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시대 문민 통치자들의 한시나 사군자 그림은 그랬습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통치계층들이 일단 분화되고 다양해졌기에, 그들에게는 꼭 획일적인 위신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고급관료나 기업임원의 위신을 골프 솜씨가 잘 나타내겠지만, (드물게나마) 소위 '명문대 교수'는 골프를 안치거나 못칠 수도 있습니다. 명문대 교수, 그리고 명문대든 어디든간에 일단 '교수'가 되어서 중급 관료 내지 기업의 중급 임원에 상당되는 '대우'를 받아 '주류'(즉, 중산층 상층부)에 편입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골프보다 더 중요한 위신재 하나 있습니다.
바로 소위 'SSCI (이건 통상적 조선말로 옮기자면 '사회과학 인용색인' 정도 됩니다. 단, 한국 '명문대 교수'들은 이미 통상적 반도어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내지화'된 것입니다) 영어 논문'입니다. 세검과 금관(金冠), 한시, 사군자 그림이나 일제시대의 웅변대회에서의 일본어 연설 등 한반도적 위신재의 전통을 이어, 이 'SSCI 영어 논문'은 인제 한반도 남반부 학자 사회의 하나의 물신(物神)이 된 셈입니다.
머슴 마당쇠의 피땀을 빨아 마당쇠로서는 도대체 읽을 수 없는 한시를 지었던 양반네들처럼, '명문대'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인문한국'과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서 서민들이 낸 혈세를 받아내, 그 혈세로 정상적인 한국 민초로서 읽을 수도 없고 읽을 가치도 별로 없는 글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과거의 모든 부조리와 폐단의 정신을 이어받아 또 새로운 정신병적인 유행을 열심히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한 가지 오해를 미리 방지하고자 합니다. 인구어족의 하나의 언어인 영어로 학문적인 글을 써서 해외 학술지에 게재함으로써 외국 동료에게 읽히는 것 자체는 그 어떤 범죄행위도 아니고 학자, 즉 지식노동자의 노동행위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저만 해도, 영어로 논문을 꾸준히 써왔습니다. 국내 국사학계의 논문작성 기준에 일부러 맞추는 것보다는, 저로서 그게 더 쉽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노동행위의 일종을 물신화하느냐는 것이죠. 한시 이외에도 기(記)부터 제문(祭文)까지 수많은 장르들이 있었듯이, 지식노동자의 일에도 수많은 작업 종류들이 존재합니다. 학술 강연, 대중 강연, 일반 수업, 지도 학생 상담, 대중적인 학술적 글, 대중학술서, 일반 학술서, 고전 번역서...
남들의 혈세로 살 수밖에 없는 인문학자 같으면, 특히 강연류, 대중적 글 등을 통해 민중들에게 진 빚을 갚는 것도 아주 고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작업 종류들이 대중과의 소통 방법이라면, 논문은 동료들과의 소통 방법입니다.
그 둘 중에 어느 쪽이 어려울까요? 원고 1매 당 투입되는 시간으로 봐서는 후자는 더 시간 집약적 작업이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열정과 (강연의 경우) 일종의 '무대 기술', 준비된 내공과 많은 고민들이 들어 있어, 사실 난이도를 가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요? 저 같은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민중들과의 소통도, 서로 지식을 나누면서 더불어살이해야 하는 동료들과의 소통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으니 뚜렷한 우열은 없습니다. 하지만, 귀족화되어버린 한국의 '학자' 사회에서는 논문 이외의 그 어떤 장르도 실제로 인정을 받지 못하며, 논문 중에서도 오로지 '영어 논문'이 최고의 위치를 점합니다. 소통할 동료들의 언어권 소속 내지 언어 구사력에 따라서 덜 고귀하고 더 고귀한 분들이 있는 모양이죠.
진정한 의미의 '실용'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대민행정을 맡아야 할 관료들에게 한시 작성이나 맹자 해석을 요구했던 과거제처럼 아주 '비실용적인' 일입니다. (거의 다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직업적 한국학 연구자가 아니면 아무도 관심이 없는 <황성신문>의 유교관(儒敎觀)에 대해서는 도대체 영어로 써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어가 편한 구미인이야, 그냥 본인이 편한 대로 영어로 쓰는 것은 이해가 돼도, 죽을 만큼 영어가 불편한 사람들까지 연구사업을 다 제쳐놓고 영어 학술논문 작성법을 익히느라 근무시간을 다 보내고 결국 읽기가 너무나 불편한 딱딱하고 인위적인 영어로 몇쪽을 쓰느라고 수개월을 낭비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실용'입니까?
이건 학술과도 실용과도 아무 관계없는 행위입니다. 한시 작성 능력은 조선시대 고급사회로의 '통문'이었듯이, 한국 사회귀족의 언어인 영어로 ('공돌이, 공순이'이 아닌) 동급자 내지 상급자들이 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한국 학계 '주류'에의 관문을 열어주는 '통과증'인 셈이죠. 차라리 '신분증'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태생적으로 '신분'이 좋은 사람에게는 이 '신분증'의 획득은 훨씬 쉬울 것입니다. 출신성분이 좋은 강남족들은 아예 일찍 도미 유학 가서 내면까지 '황민화'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대체로 한국어로 작성한 뒤에 사람이나 사서 얼마든지 '퍼펙트 영어'로 옮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출싱성분이 나쁘고 도항해서 내지에 갈 노자(路資), 학자(學資)도 없고 그렇다고 대필자 내지 대역자(代譯者)를 고용할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맞습니다. 대중과의 소통도 공부도 연구도 다 깨끗이 잊은 채, 오로지 내지어의 완벽한 구사와 'SSCI 학술지' 심사자들의 기호에 대한 심층적 연구에 몰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몰입해봐야 상당수는 계속 밀리고 밀리겠지만, 일단 다들 그렇게 하는 한 지배자들의 주된 목적은 달성됩니다. 대중들에게 이 정신병원이나 강제노동수용소와 같은 재벌왕국에서의 저항의 길을 가르칠 수도 있는 '지식분자'들이 일단 대중과 무관한 일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 목적입니다. 그래야 강남족들의 태평성세는 위협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영어논문'들을 수천개 단위로 작성해 휴대폰처럼 마구 수출해도, 점차 일본과 같은 침체의 길로 가다가 중대 위기를 맞이할 이 왕국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쓸모 없는 짓에 매달리셔야 하는 수많은 국내 동료 분들을, 정말로 적극적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저보다도 이 문제에 대한 훨씬 더 치열한 고민들을 하시고 계시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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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 공격, 전쟁범죄 해당" (레디앙, 2011년 05월 06일 (금) 07:36:41 박노자 / 오슬로대)
"괴이한 미국의 축제분위기…국가 수준의 암살행위"
제국의 성립과 유지는 부단한 대량학살을 필수적 조건으로 하고 있기에, 제국의 지배자들이나 그 지배자들의 심성과 사고를 그대로 내면화한 수많은 '순량한 국민'들은 살인을 이론적으로 긍정할 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 즐기기까지 합니다.
미국 초기사에서 예컨대 서부에서 특별히 '유해한' (즉, 독립심과 저항성이 강한) 인디언 추장의 사살은 큰 축제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태평양전쟁 시절에 많은 미군 병사들이 '적군' 해골들을 기념품(?) 삼아 수집했으며, 애인이나 부모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빈 라덴의 사살이 촉발된 미국에서의 '축제 분위기'(이 분위기는 일각의 미국인 관찰자에게마저 괴이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를 보면 제국다운 '살인의 희열'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은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철저한 법치국가로 이름이 높습니다.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도 분명히 그런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죠. 1,143,358 명(2007년)에 달하는 미국의 변호사 총수는, 노르웨이 총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될 정도입니다. 그들에게 늘 일감이 있는 만큼, 미국은 '소송의 제국'인 셈이죠. 사유제도가 거의 신격화돼 있고, 법이 사유의 보호막으로 인식되는 자본주의 종주국인지라, 사회가 물신화돼 있는 '법'을 중심으로 해서 짜여져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범적 법치 사회인데도, 빈 라덴의 사살을 기뻐하는 오바마나 그 '순량한 백성'들은 한 번이라도 빈라덴 사살의 국제법적 검토를 해보지 않은 셈입니다. 아직도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미국이라 해도, 일단 '합법적' 살인을 하자면 확정된 사형 판결 정도 필요합니다.
빈 라덴의 경우에는 1998년 11월 4일에 뉴욕 남부 법정에서 미국시민 살인 혐의로 기소된 바 있었지만, 궐석 재판이라도 받은 바 없고 더군다나 자기 변호의 기회를 한 번도 얻은 바 없었습니다. 법학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으로서는 놀랍게도 오바마는 빈 라덴을 미국에 데리고와서 정식 재판을 벌이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특수부대에 '약간의 저항이라도 있으면 사살'할 것을 명령한 셈입니다.
사형판결이 없는 이상, 빈 라덴의 사살은 국가적으로 벌인 암살 행각에 불과한데도, 법학박사 오바마도 법으로 죽고 사는 그 '국민'들도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던 듯합니다. 거기에다 보도들에 따르면 빈 라덴 암살의 과정에서 그 측근 중에서는 수 명의 성인 남성과 한 명의 여성, 그리고 한 명의 어린이까지 미군의 흉탄에 쓰러져 죽었는데, 이건 단순한 암살행각도 아니고 민간인 학살, 즉 전쟁범죄에 해당되는 행위입니다(빈 라덴도 객관적으로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주관적으로 자신을 '전사'로 인식한 만큼 약간의 억지를 부리면 '광의의 군인'으로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파키스탄에 가서 암살 및 민간인 학살 행각을 벌인 것은, 거기에다가 외국의 영토주권 침해 행위에 해당되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이미 국가적 범죄의 종합백화점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도 미국 삼부 요인들은 물론, "권력을 견제한다"고 자부하는 그 주류 언론들도 이 범죄 행각에 약간이라도 토를 단 적은 없었습니다. 빈 라덴의 주검을 집단적으로 짓밟느라고, 미국의 주류 전체가 아예 희열 속에서 혼연일체가 되어 비판기능이 마비된 셈입니다. 도대체 변호사들의 왕국에서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실, 이 부분은 근대적 '법' 운영의 기본 원칙과 직결돼 있기도 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국에서 법은 거의 신격화, 물신화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물신화의 배경에는 아주 분명한 목적의식이 존재합니다. 미국의 국체라고 할 사유제가 법으로 지켜지고 있는 한, 법은 신성합니다. 그 국체가 신성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국체를 훼손하려는 비국민'- 그 비국민이 형식상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든 아니든 간에-은 애당초부터 법의 영역 밖으로 하위 배치됩니다. 그들의 표현의 자유나 생명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법은 보호할 일은 전무합니다. 법의 모양은 취해졌지만, 실제 데브스나 힐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법을 가장한 노골적인 물리적 탄압을 받았다고 봐야 합니다.
전쟁을 부정하고 사유재산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법은 더이상 그 보호적인 효력을 상실합니다. 이와 같은 반대자에 대해서는, 평상시에 약간의 똘레랑스가 있을 수 있지만, 유사시에 그저 법과 무관하게, 또는 법을 가장해서 '처분' 되고 맙니다.
원래 CIA의 돈으로 소련과 싸웠던 빈 라덴은, 그 저항의 창끝을 미국에 돌리자 바로 이와 같은 '법외(法外)의 존재'가 됐습니다. 그의 비법적인 암살에 대해서 법학박사 오바마가 아주 무심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은 그 자체로서 신성한 게 아니고 미국 자본가들과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할 때에만 신성합니다.
결국 미국에서 법이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제 확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절대'라는 것은, 이윤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정말 다르다고 생각들 하십니까? 천만의 말씀, 더하면 더할 것이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남북한 무장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이 국내 영토에 있으면서 남한의 민중이 이북 김씨 왕조와 이남 삼성 이씨 왕조 사이의 갈등에서 중립을 지키거나 능력이 되면 전쟁국면을 혁명국면으로 돌려 자본주의 철폐에 노력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면, 당장 감옥에 가거나 '즉석 처분'될 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표현자유고 뭐고간에 말씀입니다.
체제의 존속이 문제가 되면 법은 팽개쳐지고 반대자는 그저 '처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실정입니다. 저는 이걸 아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든간에 민중이 지배자들의 전쟁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계속 하겠습니다. 그 말을 계속 하지 않고서는 저는 존재의 의미를 도대체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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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양심, 민중들과 만나야 빛난다" (레디앙, 2011년 04월 29일 (금) 08:19:56 박노자 / 오슬로대)
후세 다츠지 변호사의 경우…민초들의 투쟁 역사가 중요한 이유
이번에 저는 기내에서 <체벤굴> 대신에 읽은 '치료용 도서'는 3년 전에 지식여행사가 낸 <후세 다츠지: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라는 책이었습니다.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1880~1953)라는 분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 '양심'입니다. 돈을 잘 버는 변호사로서 출발하여 이미 1910년대 말에 동경 법조계의 거물이 된 그는, 3.1운동과 일본 국내에서의 쌀 소동, 그리고 멀리에서는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의 영향을 받아 1920년에 '자기혁명'을 선언하며 본격적인 인권변호사로서의 새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일본 내에서의 파업을 하다 패배 당한 동경 시영전차 노동자와 같은 약자들도 매우 성실하게 변호했지만, 특히 식민화된 조선인과 대만인들과 자신을 거의 동일시하여 그 독립운동의 주요 사건마다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는 전남 궁상면 쟁의 농민도 변호했는가 하면 아나키스트 박열이나 무정부주의 계통 의열단부터 박헌영 등 법정에 선 조선공산당 지도자들까지 다 변론해준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은 사민주의 계열의 일본의 합법적 좌익 정당에 속했지만, 조선에 대한 그의 의견은 차라리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들의 분석에 더 가까웠습니다.
즉, 그는 조선 식민화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조선 민중의 해방 문제를 세계 민중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조선 무산자와 일본 무산자의 연대가 시급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그의 쉬지 않는 무산자 변호 활동으로 그가 몇 번 체포, 구금을 당하고 결국 1930년대 중반 이후 변호사 활동의 기회를 잃어 일본의 패전까지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돈 잘 버는 변호사가 자진해서 무산자들과 연대해 싸웠다가 본인도 거의 무산자가 된 것이니, 정말 진정한 의미의 양심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발생됩니다. 한 때에 지배자 대열 가까이 선 사람이, 어떻게 해서 무산자들의 운명을 같이 하게 된 것이었을까요? 물론 어릴 때부터 유교적 보편주의를 익혀 나중에 톨스토이의 박애주의에 푹 빠진 후세 선생의 개인 특징들이 작용했을 것이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사실, 자진해서 무산자의 투쟁 대열에 합류해 자신의 계급적 위치까지도 거의 희생시키는 것은 유교적 교육을 받고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개명한 유명 지식인 사이에서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닙니다.
계급 사회의 논리로서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단순히 한 유명 지식인의 개인적 신념으로만 해명되는 일은 아닙니다. 진보적 신념을 한 때에 내비쳤다가는 졸지에 <조선일보> 기고자로 전락한 교수들을, 우리가 한국에서도 최근에 수십 명 가까이 보지 못했습니까? 신념도 신념대로지만, 한 유명 유산자 지식인이 '밑의 계급'의 투쟁대열에 합류하게끔 만드는 것은 결국 어떠한 '힘'의 작용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물리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사상체계와 조직체계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배자의 대열에 속하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영혼이 아직 살아 있는 유명 지식인은, '밑에서'는 그 영혼의 이상들을 구체적으로 실천시킬 수 있는 사상 전개의 논리가 있고, 그 이상을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조직적 투쟁 대오가 있다는 것을 보면, 결국 통치자의 측을 훌륭하게 배반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배반해서 합류할 수 있는 대오가 있다는 점을 알면 말씀입니다. 그러나 '밑에서'는 사상체계가 잘 잡히지 않고 투쟁, 조직화 움직임들이 적극적이지 못하면, 지배자 대열에 속하는 지식인으로서는 아무래도 그 양심을 사회적으로 살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후세는 러일전쟁을 반대하는 톨스토이의 글을 이미 1904년에 <평민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즉 그는 일찌감치 평민사라는 초기사회주의자들의 집단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 그는 1911년에 고토쿠 슈수이(幸德秋水) 선생의 공판을 방청하는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사상과 그들에 대한 탄압의 모습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일본에서 노조, 농조들과 긴밀히 협의했으며, 한국에서는 그의 강연회를 사회주의 단체인 북성회가 지원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계급의 투쟁세력이 이미 조직돼 있고 활동하고 있었기에 후세와 같은 명망가로서 민중의 편에 넘어가는 것은 훨씬 더 쉬웠습니다.물론 그의 양심도 한 몫을 했지만, 우리가 그를 생각할 때에 단순히 그의 양심만을 찬송할 것은 아니고 그를 매료시킨 일본, 조선 민중 투사들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부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밑의' 노력이 없었다면 명망가의 '양심'은 그렇게 쉽게 발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보수적인 기독교 자유주의자 함석헌은 과연 씨알의 철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방법론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역사를 보고 평가할 때에 명망가 중심으로 보는 것보다 민중의 조직과 투쟁, 민중 사상의 형성 위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역사가 명망가 '양심'만의 역사가 아니고 무수한 민초들의 싸움의 역사, 즉 진정한 의미의 역사로서 조명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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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들은 왜 자본주의를 찬양할까? (레디앙, 2011년 04월 20일 (수) 11:53:26 박노자 / 오슬로대)
푸틴은 비판해도 '성역'으로 남아…"피착취 계급의 수직 분산"
작년에 레닌그라드를 찾아갔을 때에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러시아 사회의 '격차'의 폭에 계속 경악하기만 했습니다. 제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는 초밥집에 가서 두 사람을 위해 가장 저렴하게 초밥과 김치국만 먹어도 드는 비용은 이미 한화 약 4만원입니다. 서울도 아니고 거의 스톡홀름 수준의 물가죠. 하지만, 중심가인 네브스키 대로를 활보하는 이들 중에서는 한 달 연금이 평균적으로 한화 25~30만원 안팎의 연금생활자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들이나, 한달에 한화 약 12~14만원의 월급을 받는 대학가의 비상근 교원은, 과연 어떤 눈으로 그 초밥집을 바라봐야 합니까?
초밥이야 안먹으면 그만이지만, 한국보다 평균 임금이 거의 두 배 이상 낮은 러시아에서는 무궤도전차나 버스의 승차권이 원화로 거의 1000원, 즉 거의 서울 수준이 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재앙입니다. 연급생활자들에게는 그나마 무임승차권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대학원에 다니거나 비상근 교원으로 연명하는 '학계의 무산계급' 입장에서는 과연 이런 생활은 지옥과 무엇이 다를까 싶습니다.
부자들의 저택들은 거의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농장을 능가할 정도지만, 제가 며칠 다녔던 국립도서관의 아세아 및 아프리카 서적부(OLSAA: http://www.nlr.ru/fonds/vostok/ )는 건물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만큼 보수 공사가 시급하고, 물과 전기가 자주 사고나 끊깁니다. 독자도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지옥적 사회에서 연명해야 하는 이들에게 도서관행은 이미 사치가 된 지 오래인 듯합니다.
흉악한 안보꾼들이 민주주의를 고사시켜 놓고 다스리고 있는, 부정부패가 사회의 모든 구석에 다 스며들고 격차는 이미 중남미 수준에 이른 곳은 오늘날 러시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러시아 지식인들은 - 예의 중남미 지식인들의 상당부분처럼 - 과연 종속이론과 내포적 민중경제이론,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차베스와 같은 '평화적 혁명 지도자'로부터 영감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극소수의 좌파는 당연히 존재하지만, 적어도 제가 만날 수 있었던 제 가족이나 친척, 한국학 동료들 중에서는 급진좌파는 물론 사민주의적 온건 좌파도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경험이 아닌 통계로 보자면, 젊은이(10~20대) 중에서는 정치에 그나마 관심을 두는 이들은 약 8%에 이르지만, 그 중에서도 다수는 각종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경향에 합류하지 좌파를 거의 꺼립니다. 물론 '자주파', '민족좌파'가 있는 한국처럼 러시아에서도 일부의 민족주의자들은 적어도 반미적 지향의 차원에서는 좌파와 약간의 접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특히 중산계층들 사이에서는 좌파는 극소수의 게토에 불과합니다.
물론 '중산계층'이라는 용어 그 자체는 정확성이 떨어져서 문제입니다. 여러 가지 정의가 있는데, 대체로 보면 재산 차원의 중산계층은 안정된 직장과 주택, 자동차 소유, 서방 중산층 수준에 가까운 소비 생활을 누리는가 하면, 신분(학력) 차원의 중산계층은 대도시 고학력자로서 안정된 와이트칼라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전자의 정치적 입장이야 불문가지입니다. 저의 친척 대다수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들도 하나같이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본인들이 무료로 양질의 교육을 받고 편안한 생활을 누려온 ) '현실사회주의'를 극구 비난, 부정합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이죠?
정말 수수께끼 같은 부분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의 가족, 친척 중의 40세 이상의 분들은, 노인의 연금이 초밥집에서 6~7차례만 간단하게 밥을 먹을 만큼 적고, 돈벌이에 지치면서 사는 대다수 서민들이 일을 마친 후에 집에 와서 수준이 있는 책을 펼쳐볼 힘도 없는, 이 지옥적인 현실을 분명히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나라를 극소수의 오만한 갑부, 관벌들과 대다수의 지치고 찌들고 밟히는 서민들이 각자 별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이중적 시공간'으로 만든 자본주의를, 그들이 감히 비판하지 못합니다. 푸틴 독재야 비판할 수 있어도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신성불가침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현실인식과 이념 사이에 이와 같은 엄청난 괴리가 생기나요? 자본주의가 망가뜨리고 만 나라의 비참한 모습을 매일매일 보는 사람들은, 왜 '병인'(病因)에 대한 아무 생각없이 병의 증세에만 한탄하고 있는가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이론적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근본적으로는 극소수의 착취자와 대다수 임금 노동자(피착취자)로 구성돼 있지만, 후자는 또 철저하게 위계서열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학력의 위계질서 (명문대 대 비명문대)부터 다니는 직장 사이의 위계 (대기업 대 중소기업), 직장 안에서의 위계(하급 관리자 대 단순 노동자; 정규직 대 비정규직)까지, 피착취자들은 철두철미하게 분산돼 있습니다.
좌파가 전통적으로 강한, 프랑스 같은 사회에서야 판사나 검사까지도 자신들을 노동자라고 규정하고 같이 파업 내지 시위할 수 있지만, '통상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피착취자라 해도 어느 수위 이상 오르기만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자신의 노동자성에 대한 자아인식이 소멸돼가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국내의 '명문대 출신 대기업 최하급 관리자'는 학술적으로 보면 어디까지나 '노동자'로 분류되겠지만, 그가 노동자 투쟁에 합류할 가능성은 과연 어느 정도입니까? 러시아와 같이 비교적으로 가난하고 불안정된, 사회적 정의도 기초적 합리성도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피착취자 계급의 '수직적 분산'입니다. 피착취자의 상층, 중간 부분이 '작지만 큰' 특권들을 누리는 만큼 현 정권에 비판적이라 해도 자본주의에 감히 토를 달지 않습니다.
이 '작지만 큰 특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학력 자본의 대물림 가능성입니다. 일단 고학력자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대학 교육을 받아 (남자 아이의 경우에는) 군 징집 연기하거나 (박사학위를 받을 경우에는) 면제 받을 가능성은 큽니다. 소련 시대에 태어나 이미 고령이 된 고학력자 부모 본인이야 저임금 화이트칼라직(교수, 교사, 공립병원 의사 등등)에 남아도, 아들이나 딸이 행여나 서방에 나가서 취직하거나 민영회사에서 잘 취직해 돈을 많이 벌 경우에는 온 가족이 그걸로 득을 보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학력자들에게 부수입을 올릴 기회들은 열려 있습니다. 교사나 교수의 과외 등 사교육 분야부터 공립병원 의사의 개인적 진료까지요. 그들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 노동자에 속하지만, 육체노동하는 사람과 별도의 세게에서 살고 별도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분산으로 자본주의가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러시아와 같은 준주변부 국가에서는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부패한 그 지배자들은, 세계 공황의 영향부터 서방 열강들과의 모순 관리까지, 제대로 조절하지 못할 가능성은 다분히 있습니다.
1905년, 일본에 대패를 당한 러시아에서 중산계층까지 가세한 1차 혁명이 일어난 전례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일이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은 큽니다. 단, 중산계층까지 혁명에 가세하고, 적어도 그 전위적 일부라도 공장 노동자, 청년, 이민 노동자들과 손잡기 위해서는 혁명적 전위, 즉 (몇 안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의식적 노력들은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자본이 조작한 우리 계급의 분산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 분산은 어느 정도 극복이 되면, 역사의 흐름은 드디어 바뀌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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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사회주의', 욕만해서는 안된다 (레디앙, 2011년 04월 08일 (금) 08:08:49 박노자 / 오슬로대)
전체주의-국가자본주의 비판을 넘어…긍정적 측면 부활돼야 
이번 미국의 아세아학회에서 저로서 가장 관심이 많이 갔던 부분은 북한초기사에 대한 발표들이었습니다. 그 발표들 중에서는 특히 미국 루트거스(Rutgers)대학의 수지 킴(Suzy Kim) 교수의 이야기는 재미있었습니다. 유명한 수정주의 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제자인 그녀는, 1945~1950년의 북한에서의 대중들의 조직활동상을 분석했습니다.
주된 자료 중의 하나는,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서에 보관돼 있는 소위 '노획문서', 즉 미군이 이북지역을 침공했을 때에 무단으로 약탈해간 북한 관공서의 문서들이었습니다. Suzy Kim교수는, 한 가지 예시로서 노획문서 중에서 그녀가 찾아낸 한 농민의 입당 신청서와 자필 이력서를 보여주면서 분석하셨습니다. 문맹자이자 소작농이었던 그 농민은, 북한 초기의 토지개혁으로 우선 소농으로 그 지위가 향상됐고, 한글을 깨치고, 또 한글을 깨친 뒤에 농민조합련맹에 가입하여 그 열성자로서 적극적인 조직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일자무식의 소작농으로서 사회생활로부터 배제돼온 그는, 북한 초기의 몇 년 사이에 당당하게 공공영역에 발을 들여놓아, 작지만 큰 한 명의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농민의 운명은 나중에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졌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나 그와 같은 무수한 식민지시대의 주변분자들에게 북한의 '현실사회주의'가 공공영역으로의 관문을 열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공공적 주체로서의 '개인'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공공영역은 어디까지나 당의 통제를 받는, 자율적이지 않는 공공영역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착취대상자에서 일명의 작은 '나라 주인'으로 일약 탈바꿈한 수많은 민초들은, 사항별로 이해충돌은 있을 수 있어도 크게 봐서 당의 통제를 반대할 일은 없었습니다. 진정한 (그리고 초기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의 '합의 독재'가 가능해진 상황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 '주체사상'의 선포와 극단적 국수주의, 개인숭배의 만연 이전의 북한은 크게 봐서 동유럽형 '현실사회주의'의 한 갈래에 해당됐습니다. 이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극우파부터 온건 사민주의자들까지 '전체주의'라고 규정하는 현실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개체성 말살, 전체성의 횡포, 국가의 견제되지 않는 폭력, 사회, 정치적 다양성의 부재'를 들어 대체로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추세가 있습니다. 반면 국내에서 '다함께' 등으로 대표되는 트로츠키주의자 등 급진좌파는 '스탈린주의'(현실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 민주주의 부재나 평등성의 붕괴, 관료층의 독재, 그리고 혁명성의 쇠퇴를 들어 "사회주의의 관료주의적 왜곡"부터 아예 "국가 자본주의로의 전락"까지 이야기하여 "사회주의는 아니었다"고 잘라버리고 맙니다.
재미있게도 이 두 가지 부정적 견해는 어떤 경우에는 하나로 통합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원로 중의 한 명인 막스 샤크트만 (Max Shachtman, 1904~1972)은 소련을 "집체주의적 관료 국가"로 보는 관점부터 출발하여 머지 않아 자본주의보다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운동에 더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말년에 그는 우파사민주의자로 개조(?)되어 아예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를 반대할 정도로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습니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의 이론가 중에서는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주의적 본질을 인정해주는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 1923~1995) 같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현실사회주의의 장점보다 그 '관료적 왜곡'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모든 비판들은,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사회주의를 유토피아로 생각한다면 현실사회주의는 분명히 그런 사회주의와 사이가 멀었습니다. 일단 1917년 10월 혁명 이후에 트로츠키파 등 각종 급진파에 대한 관료적 보수파(스탈린파)의 승리를 기반으로 한 현실사회주의의 질서는 분명히 경직된 관료성을 특징으로 한 것은 사실입니다.
노동자들의 소비에트가 레닌의 원래 계획대로 '밑에서부터' 자율적으로 경제기획을 짜고 코뮨형의 '국가 아닌 국가'를 민주적으로 운영했다기보다는, 위계질서적 당 중심의 질서의 하부구조로 편입되고 말았죠. 또한, 세계혁명의 좌절에 따라 자본주의 세계와 군사대립할 수밖에 없는 현실사회주의는 국민(인민)국가 질서를 공고히 하고 상당한 수준의 군사화를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비군 자체를 폐지시켜 노동자들의 자율적 민병대로 대체해야 한다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원래 이상에 비추어보면 엄청난 후퇴이었죠.
자본주의 세계에 괴멸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아주 급격히 공업화 진행해야 했던 현실사회주의는 특히 초고속 공업화 과정(소련의 1930년대 초반~1950년대 초반)에서 자원동원을 위해 상당한 국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습니다. 사실, 그 누명이 높은 스탈린의 대숙청은 대체로 국가 중심의 초고속 공업화 과정의 정치적인 파생물로 봐야 할 듯합니다. 열성과 공포가 뒤섞인 분위기가 아니라면 10년간 파쇼독일과의 대전쟁에서 지지 않을 만큼 공업기반을 닦기 어려웠다는 것이죠.
급진파(트로츠키파 등)가 승리했다면 아마도 공포보다 열성의 비율은 더 높았겠지만, 우리는 유토피아 아닌 현실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극도로 보수적인 농민의 국가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를 거의 '종교화'시킨 스탈린파의 승리는 훨씬 쉽고 자연스러웠습니다.
우파가 이야기하는 현실사회주의의 '집단주의적' 측면들도, 사실 대체로 이와 같은 농민사회의 전통적 보수성에 기인하는 것이죠. 하여간, 혁명은 뜬 구름 위에서 하는 게 아니고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하는 만큼 후퇴, 굴곡, 자기 배반이 없는 혁명은 없을 것입니다. 현실사회주의도 예외일 순 없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역사적 경험을 무조건 '전체주의' 내지 '국가자본주의', '집체주의적 관료 국가'라고 하여 배격만 해야 합니까? 역사 속의 (상당 부분 불가피했던) 왜곡들을 당연히 지적하고 비판해야 하지만, 현실사회주의의 역사를 '왜곡'으로만 보기는 힘듭니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를 통해서 국가를 통치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들의 상대적 지위가 높아지고 고등교육부터 휴양소 등 휴양시설까지의 접근이 쉬워져 노동에 대한 소외를 훨씬 덜 느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1950~60년대를 회상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목소리 (백승욱 편, 『중국 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폴레테이아, 2007)를 들어보면 그 당시에 활짝 웃으면서 밝은 표정으로 출근하고, 공장을 자기 집처럼 여기는 일은 거의 당연했습니다. '국가로부터의 노동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적어도 공장 단위의 차원에서 이윤추구, 개인 자본가의 소유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져 노동자의 상황이 크게 개선됐다는 것입니다.
현실사회주의 학교들이 권위주의나 군사주의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사실, 문화혁명 때의 홍위병의 교사, 교장 린치 사건의 상당 부분은 교권주의적 태도에 대한 '복수'와 같은 성격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체벌과 같은 폐습은 일단 완전히 사라지고, 또 노골적인 성적 경쟁보다 상호협력이 우선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공부 못하는 노동자 출신'들이 적어도 한국과 같은 '초자본주의적' 사회에 비해 훨씬 상처를 덜 입었습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필자가 다녔던 학급에서는 필자를 포함한 '모범생'들은 공부가 어려운 아이들에게 가서 숙제를 도아주고 보살피는 것은 관례이었습니다. 뭐, 성적에 대한 은근한 의식부터 간헐적으로 (아동 사이의) 폭력까지 있었던 것은 필자가 기억하는 소련 말기의 학교 현실이었지만, 체벌부터 수능지옥까지 멀쩡한 구석이 하나 없는 동시대의 남한 학교와는 비교나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현실사회주의란 분명히 유토피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간이 나름대로의 존엄과 긍지를 지키면서 생산적으로, 비교적으로 평등한 환경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사회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북한은 '정통 현실사회주의'보다 아주 경직된, 훨씬 더 유교적이고 군사화된 사회로 나아간 반면, 쿠바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현실사회주의는 자본화를 추구하는 내부 관료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동유럽 노동자들이 현실사회주의의 자멸을 막지 못했다고 해서 그 장점까지 우리가 과연 망각만 해야 할까요?
어떤 왜곡들이 있어도 적어도 인간이 자기 미소까지 팔아가면서, 윗사람에게 부단히 아부하면서 생존을 도모할 필요까지 없었던 사회, 즉 개인의 소외가 오늘날 자본제에 비해 훨씬 적었던 사회를 우리가 부지런히 기억하고, 그 모습을 자꾸 복원하고 이야기해야 우리 투쟁에 힘이 보태질 것입니다.
왜곡된 면까지는 반복할 필요야 없지만, '현실사회주의'의 긍정적 측면들의 부활은 앞으로는 전세계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그래서 앞으로 시간이 나는대로 북한초기사의 공부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반도의 20세기에서 가장 기억 잘 해야 할, 그리고 동시에 가장 많이 망각된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구소련-중국, 계급적 '지진' 중심 가능성 커" (레디앙, 2011년 04월 13일 (수) 08:52:42 박노자 / 오슬로대)
[현실사회주의 글 반응에 답함] "박정희 체제와 같은 거라고? 글쎄요"
'현실사회주의'의 배울 만한 장점에 대한 지난 주의 제 글에 대한 비판적 반응들을 보면, 상당 부분은 "이와 같은 논리로 결국 박정희 등 개발독재까지도 합리화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우려에 기반한 것 같았습니다.
제 의도는 일당(一黨) 독재에 대한 합리화에 있었다기보다는 독재 바깥에서의 사회생활, 그리고 개인적 이윤추구를 배제한 계획경제 등 10월 혁명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부분들에 대한 관심을 불려일으켜보자는 것이었는데, '개발 독재'의 문제가 지금도 시의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적 맥락에서는 제 글이 의도 무관하게 그렇게도 읽혀질 수 있었다 싶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 체제와 박정희 체제의 표피적인 유사점과 본질적인 상이점들에 대한 고찰까지 함께 하지 않았다는 데에 이 잘못이 있었던 듯합니다. 이 잘못을 늦게라도 고치기 위해서는 좌파 계통의 '통제사회'인 과거 동유럽 제(諸)사회와 극우파의 '개발 독재' 체제(박정희 체제 등)를 놓고 대략적이나마 한번 비교라도 해볼까 합니다.
소련이든 박정희 시절의 남한이든, 지금 제가 그럭저럭 굴러다니면서 사는 노르웨이든 모든 근대 국민국가들은 국민국가로서의 공통적 특징들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남한처럼 '국기에 대한 맹세' 등 파쇼적 '국민의례'들이야 하지 않지만, 노르웨이에서도 학교 등 관공서는 물론 개인 단독 주택들까지도 상당수 국기 게양을 하면서 그 애국심을 만천하에 과시합니다.
세상에는 '대한민국주의'만 있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국민국가마다 국기, 국가(國歌) 등 '국민적 소속'의 상징들을 이용/악용하여 '국민의식'의 주입을 통해 계급의식의 전경화(前景化)를 미리 방지하는 등 체제 안정을 도모합니다.
과연 소련은 크게 달랐을까요? 글쎄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한, 소련, 노르웨이 등이 다 같은 '국민국가'의 류에 속한다고 해서는, 과연 그들을 완전히 '같은 존재'로 볼 수 있습니까? 몇 시간 전의 학부형 회의에서 "우리 학교의 핵심적인 과제는, 아이들 사이의 심리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참여와 통합 중심으로 이루어져, 특히 놀 때에 그 어떤 아이도 배제하지 않게 배려해주고 아이들이 동료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거나 동료들과의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미리미리 분위기 조절해주는 것"이라고 밝힌 제 아이의 담임선생의 말부터, 저는 남한의 상황에서는 잘 상상하지 못합니다.
선생에 대한 아이들의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아이마다 하루마다 아침에 꼭 악수하는 관습도 그렇고요. 반대로, '0교시, 우열반, 야자보충' 이야기를 노르웨이에서 누구에게 하면 아마도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주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국민국가'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민주의 국가와 재벌 준(準)독재 국가 사이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죠.
그 다음에, 남한(그리고 대만,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 등등)과 소련(폴란드, 동독 등등)을 놓고 본다면 절차적 민주주의를 배제한 총동원적 정권 하에서 초고속으로 공업화를 이루었다는 점은 분명히 - 표피적으로는 - 유사할 것입니다. 총동원의 분위기 속에서의 초고속 공업화라는 상황은, 또 그외의 여러 공통적 특징들을 파생시켰습니다. 예컨대 박정희식 저곡가 정책이든 스탈린식 저수매가, 트랙터에 대한 고임대료 정책과 식량품 징발 정책이든 도심의 공업화에 대한 부담을 대체로 농업부문이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총동원 분위기는 전사회의 군사화로도 이어져 소련에서든 남한에서든 징병제 군대에서의 복무는 다수 남성들에게 '통과의례'가 되다시피 하고, 고등학생들까지 교련수업을 받느라고 고생해야 했습니다. 저 개인 같으면 특히 그 교련수업이 아주 괴로워, 퇴직 대령급인 교련 선생님을 늘 '이상한' 질문으로 괴롭히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핵 전쟁의 경우에는 아군이 미제 측에 핵폭탄을 투하할 때에 미국 노동자 등 무산계급까지 희생시키는 것은 과연 공산주의 가르침과 합치되느냐? 적국 인민 속의 계급을 가리지 않고 타격을 주는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 무기를, 공산주의적 군대가 이용하는 게 마땅하느냐?"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별다른 답이 없었던 그 대령님은, 제게 복수(?)하는 방법은, 자동총 분해조립을 규정대로 45초만에 하지 못했던 저를 가리켜 "너 같이 자동총도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과연 남자냐? 그런 사람에게 과연 시집올 여성이 있겠느냐? 이상한 생각 말고 자동총을 다루는 솜씨나 키우라! 아가씨들에게 인기를 얻는 묘책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곤 하셨습니다.
물론 학급의 모든 학생들은 파안대소하곤 했죠. 이렇게 해서 "인기 없는 비(非)남자"로 전락하곤 했던 저는, 만약 남한 학교에서 대령급의 교련 선생을 그렇게 대했다면 과연 무엇이 됐을까요? 바로 그 자동총으로 머리나 크게 맞아 '비(非)남자'도 아니고 아예 반주검이나 되지 않았을까요?
'현실사회주의' 학교에서 체벌부터 절대 불가능했던 점부터는 이 두 초고속 공업화 모델 사이의 엄청난 본질적인 갭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 괴리의 근저에는, 양쪽 모델을 실천에 옮겼던 양쪽 정권의 정치, 사회적 발생 경로 사이의 본질적 차이점부터 깔려 있는 겁니다.
박정희와 그와 함께 정변을 일으킨 공범(共犯) 집단은 - 비록 개인적으로 미천한 출신의 자수성가형 출세주의자들이 많이 끼어 있었지만 - 근본적으로 남한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했습니다. 재벌들의 재산을 다 몰수할까 말까 하는 초기의 생각을 그들은 꽤나 빨리 접었으며, 1964년 이후의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철저하게 재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진행했습니다. 관벌과 재벌 이외에 그 '기적적' 발전으로 득을 본 사람들은 1963년부터 지금까지 약 1176배 정도(서울의 경우) 솟아오른 땅값 급등으로 고속 치부한 부동산 소유주, 즉 중산층들입니다.
셋방 살이하는 40%의 대한민국 시민들, 즉 임금노동자들의 중간층과 하층, 그리고 영세민의 경우, 그리고 약간의 부동산을 소유해도 미쳐버린 사교육 경쟁 등에 어차피 패배하게 돼 있는 상당수 중산층 하부, 중부의 경우에는? 이들은 결국 1960년대 초반의 살인적 절대빈곤을 벗어났지만, 상대적 빈곤의 늪에 쭉 빠지고 말았습니다. 상위의 5~10%만이 늘 이기게 돼 있는 과두제(寡頭制) 사회의 '무한 경쟁' 속에서 지치고 병들고, 스트레스로 고생하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대다수의 경우에는 외롭고 불우하게 늙어죽는 것은 그들의 비극적 운명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박정희형(型) 고속성장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반(反)민중적이었으며, 그 특징은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 더욱더 노골화돼 한국을 자살율만이 초고속 성장하는, 살기 무서운 사회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박정희는 기득권층의 일부분이었다면 '현실사회주의' 사회 지도부들은 대체로 사회주의 혁명 세력들 중에서의 보수파에 속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급진파 혁명가들을 숙청해가면서 혁명을 거친 사회를 다시 보수화시킨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었지만, 일단 혁명을 거친 사회인 만큼 혁명의 유산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예컨대 관료집단은 생산수단들을 집단적으로 통제해가면서 노동자의 자율적 일터 민주주의를 배제했지만, 경제적 특권이나 정치적 권력은 세습되지 못하는 등 혁명을 경험한 민중들이 요구하는 기본적 사회정의는 그래도 관철됐습니다. 공장 지배인이 그 공장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 해도 소유하거나 자손들에게 넘길 수 없었으며, 스탈린의 아들은 공군 장교가 되고, 흐루쇼프의 아들이 유명한 미사일 설계사가 되고, 브레즈네프의 딸이 외무부 고문서보관과 중간급 관료가 돼도 그들이 정치권력을 세습할 꿈도 감히 꿀 수는 없었습니다(이 측면에서는 '현실사회주의'는 오늘날 북조선 사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기도 합니다).
개개인의 자본가가 기업을 소유하는 대신, 업적주의적 원칙에 따라 승진이 될 수 있었던 관료들이 전체 국가의 생산시설을 집단적으로 (소유하지는 못한 채) 관리하는 과정에서는 개개인의 치부나 위치세습 등 지대추구적 행동은 나름대로 견제되고 다수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국가운영은 어느 정도 가능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남한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민중 대다수를 위한 복지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능해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비록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적 혁명의 보수화 과정의 산물이었다 해도, 과거 기득권층이 전복되고 새로운 관료층이 민중들의 사회정의 욕구를 어느 정도 고려하면서 사적 이윤추구 배제, 대다수를 위한 복지 정책 추진 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혁명적 에너지'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길도 '현실사회주의'의 길도 같은 초고속 산업화의 길이었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사이에 연출된 역사적 비극의 결말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자본가가 되려고 안달이었던 관료들에 의해서 '현실사회주의'가 자멸되고, 그 영토는 중심부 내지 (남한과 같은) 준중심부 산업자본을 위한 자원 공급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전락됐습니다. 혁명의 유산을 지키지 못한 과거의 '인민'들은, 계급적 적 앞에서 너무나 약했던 죄로 새로운 과두재벌의 권리없는 머슴이 되거나, 저처럼 자기 자신을 중심부에 팔아야 하는 망국노적 신세가 된 것입니다. 계급 투쟁에서 패배한 피착취자를 기다리는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이걸 봐도 좀 아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때에 불완전하게나마 자유의 공기를 들이쉴 수 있는 사람들이 영원히 노예적 형편에 스스로 만족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구소련이나 중국은 앞으로는 엄청난 계급적 '지진'의 중심에 넣여져 있을 가능성은 큽니다. 이를 준비하는 차원에서는, 경직된 관료들에게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개인 자본가와 개인적 이윤추구 없이 자유로이 살았던 '그 시절'에 대한 집단기억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집단기억은, 앞으로는 새로이 화염을 번지게끔 할 수 있는 '휘발유' 역할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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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의 다문화주의 그리고 자본 (레디앙, 2011년 04월 01일 (금) 13:29:25 박노자 / 오슬로대)
자본 이익에 봉사하는 '틈입자'들…민족주의 포기와 반북주의 광풍
저는 지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 아세아학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중입니다. 방금 개회기념식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기념식에서 하와이주립대의 여러 당로자들이 축하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우리 고장 자랑" 정도였습니다. 인구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학교에서 80여개국의 학생들이 재적한다, 50여국 출신의 연구자들이 적을 둔다, 아세아에 있는 유일의 미국 주(州)다 등등,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본주(本州)가 미국에서 요즘 국시 격인 "다문화주의"의 권화라는 요지의 연설이었습니다. 거기에다 더해, 당해 대학의 소위 공자학원이라는 기관의 기관장이란 분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바로 우리 하와이 출신, 여기에서 출생하고 학교에 다녔다"고 자랑스럽게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마바의 손에 묻은 남의 피는 김정일의 손에 묻은 피보다 훨씬 짙은 것입니다. 김정일이 직접 관여했다고 믿을 수 있는 대남 공작이나, 대남 무력 충돌로 (북한의 소행인지 아닌지 극도로 불분명한 대한한국 858편 실종 사건까지 억지로 포함한다 하더라도) 희생된 사람들은 양쪽에서 수백명이 된다 해도, 오바마가 책임져야 할 아프간, 파키스탄, 리비아에서의 미국 침략, 포격, 폭격, 납치, 감금, 고문, 암살의 희생자들은 지난 3년간 분명히 수천 명 이상이 될 것입니다.
무기 생산과 판매를 통한 간접 살인까지 이야기한다면, 아예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오바마의 살인적 실적(?)은 좋아보입니다. 그런데도 그 이름의 언급이 이렇게 환성을 자아내는 걸 보니 인간은 정말 아주 괴상한 동물입니다. "우리 정부는 살인범들의 도당"이라는 생각을 안고 살기가 그렇게까지 버겁고 어려운가요? 글쎄, 저는 지금 리비아 공습까지 참여한다는 노르웨이 정부에 대해서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미국 동료들에게도 용기를 내서 그렇게 해보기를 바라는 것이죠.
오바마에 대한 곡학아세 수준의 아부성은 그렇다 치고, 다문화주의에 대한 하와이 대학 당로자들의 긍정적 확신도 저로서 받아들이기가 좀 어렵습니다. 물론 타자의 인종적 차이부터 언어, 종교까지 폭넓게 환영하는 것이야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낫죠.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에서의 분위기가 타자가 틈입해서 살기에 더 좋다는 것도 수많은 한국인 이민자, 유학생들도 경험적으로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유럽 우파식의 거의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인 "유럽적 가치"나 동화를 방불케 하는 "통합"에의 강조보다 미국, 호주, 캐나다 식의 다문화주의가 진일보한 부분은 있다 해도, 그 저의가 무엇인지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봐야 합니다.
북미주로 틈입하는 타자들은 대체로 육체노동 솜씨(이는 특히 중남미계 이민자들에게 해당됨)나 금전 자본 내지 학력 자본(인도, 동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대표적임) 등을 갖고 들어오는데, 이 모든 요소들은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용가치가 높은 것입니다. 유럽과의 차이라면, 이미 동유럽을 잠식해 유럽연합에 포함시킨, 즉 폴란드 등지의 육체노동자부터 의사까지 폭넓게 이용하고, 러시아 등으로부터 도피해오는 자본을 유입시키고 있는 서유럽으로서는 유럽 바깥으로부터의 "틈입"이 그렇게까지 절실하게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유럽연합의 총인구(약 5억명)는 미국과 캐나다의 총인구(약 3억5천만 명)보다 훨씬 많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본은 유입 인구에 대한 착취를 지향하지 "틈입자"들에 대한 동등 대우를 전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문화주의는 아무리 국시가 돼도 프랑스나 스페인, 포르투갈과 달리 미국은 보통 소위 "불법 이민자"들을 대량으로 사면해주지 않습니다. 천만 명을 넘는 그들을 "불법"으로 계속 묶어두어야 거의 노예처럼 착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케냐와 미국 중산층 부모의 자손인 오바마에게야 다문화주의는 적용되지만, 오바마가 다녔던 고등학교 (푸나후 학교) 밑동네 근방의 식당에서 "불법"으로 일하는 중남미나 한국 등지의 출신들은 다문화주의와 무관하게 평생 단속을 겁내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국계 거주자들의 비율은 유럽연합의 평균치보다 약 3배 낮은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다문화주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여러 측면들은 있지만, 그 중에서의 하나는 분리통치 정책으로서의 다문화주의의 한국적 역할입니다. 단기취업비자로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대다수가 다문화주의 정책 수혜자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돼 있는 반면 결혼 이민자들이나 고학력 이민자 등은 수혜자로 돼 있기에, 이 두 그룹 사이에 한국 권력자들이 담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나 인도계 기술자, 필리핀계 아주머니, 방글라데시계 노동자가 같이 손을 잡고 그들을 착취하고 사실상 계속 따돌리는 대한민국 지배자들과 연대해서 싸울 가능성을 미리미리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측면은, 다문화주의와 연계돼 있는 민족주의 이념 포기 정책이 반북주의 광풍 조장에 나름대로 도움이 된다는 부분입니다.
"민족"보다 (결혼이민자들까지 하위 배치돼 편입될 수 있는) "국민" 내지 "시민"이 우선시되는 상황에서는 탈북하지 않는 이상 "국민화"될 수 없는 북한인들에 대한 이질감은 더욱더 강화되기가 쉽고, 반대로 "국익에 도움된다"는 이념 주입 하에서 외국자본의 유입 등을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 통치자들이 이북 영토에 대한 지배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고, 그 만큼 또 이북 영토의 식민화를 합리화할 민족주의적 이념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당장에서는 그들에게 "무한경쟁" 표어 하에서 이루어지는 월남, 중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의 착취 행각이 훨씬 더 이득이 되는 것이고, 또 증시에 외국계 자금을 끌어들여 주식가격을 높여 이득을 챙기는 일도 재미가 되니 멋져보이는 "탈민족주의"를 약간 더 후원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원색적인 민족주의보다 훨씬 더 뉘앙스가 많고 융통성이 있는 탈민족주의 내지 다문화주의는 "우리 속의 타자"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민족주의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단, 자본과 권력의 손에서는 민족주의든 탈민족주의든 다문화주의든 그 어떤 이념도 결국 약탈, 착취, 이용, 분리통치의 도구가 되어 악용될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일 뿐이죠.
우리가 풀어야 할 궁극적 모순은, 한국인과 비한국인 사이의 모순은 절대 아닙니다. 삼성 이씨 왕조와 백혈병으로 죽어나가는 노동자들 사이의 모순이야말로 이 사회, 이 세계의 기본 모순입니다. 이 모순만이 풀리면 여성문제든 종족적 타자 문제든 나머지의 이차적 모순들은 다 스스로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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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역사의 답답함" (레디앙, 2011년 03월 25일 (금) 01:14:28 박노자 / 오슬로대)
[자본주의연구회 사건] 남북, 억압적 사회정치체제 동질화?
저는 직업상 역사쟁이입니다. 과거의 사실을 체계화, 언어화해, '집단기억'으로 만들어 유포시키는 것은 제 직업입니다. 저 같이 100년 전의 신문들을 애독하는 비정상인들이 없어져버리면 그 속의 사랑과 증오, 열정과 배신, 지배자의 이기심과 민중의 고통, 저항이 다 그저 어디론가 증발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저는 제 직업을 나름대로 애호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역사에 대해서 한 가지 아주 불편한 느낌은 늘 있습니다. '역사의 교훈'이라는 말은 거의 관용구처럼 돼 있지만, 사실 특히 지배자들이 이 교훈에 대한 별 관심이 없어 역사는 - 약간 바뀐 형태긴 하지만 -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반복된다'기보다도, 이미 고정돼버린 어떤 형태들, 어떤 패턴들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계속해서 무서운 '생명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진보'가 전혀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우리의 기대에 비해서 너무 미미해 보이고, 그 대가는 너무 비싸고, 또 기존 패턴들의 반복성은 훨씬 더 돋보입니다. 그러기에 매천 선생의 말을 약간 바꾸어서 쓰자면 "역사를 아는 사람으로서 세상 살기가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아(我)해동에서 일어나는 괴사(怪事)들을 예로 듭니다. 예컨대 며칠 전에 일어난 '자본주의 연구회' 사건을 한 번 보시지요. 주체사상도 아니고 이 대한민국의 국시 격인 자본주의를 연구한다는 일군의 재야 인물들과 청년들은, 졸지에 '북한을 찬양하는 이적 단체'로 둔갑되고, 바로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가 국시인 나라에서 자본주의 연구를 하면 바로 이적, 즉 적을 돕는 범인이 된다 - 아, 이 정도면 우리는 벌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거의 따라잡고 능가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보안법 덕분에 그쪽에 자유로이 갈 수조차 없는 소생(小生)은 자세히 모르지만, 듣는 바로는 그쪽에서도 주체사상연구회나 사회주의연구회를 함부로 만들어서 국시를 함부로 '잘못'(?) 해석했다가는 사회의 관리자들에게 혼날 확률이 좀 높은 편이랍니다.
참, 이번 정권은 아주 고차원적인 통일 의지가 있어서 그런지 남북한 사회정치 체제의 동질화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쪽 토건/수출제일주의자들은 저쪽 조선민족제일주의자들을 일부러 베낄 수고까지 하지 않아도 될 셈입니다.
전자는 일제라는 모태에서 미군이라는 산파의 도움으로 태어난 것이고, 후자의 계보는 훨씬 더 복잡다단하지만 일제와 사투를 벌이면서 일제를 배운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근본적으로 1925년 5월 12일부터 일본열도와 대만, 한반도 전역에서 처음 시행돼 그때부터 실제로 한반도에서 계속해서 그 마력(魔力)을 발휘해온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의 그늘에서 아직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체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나 조직'이라면 애당초부터 '비(非)국민', 무조건 잡아서 옥(獄)에 집어넣어도 될 사람 아닌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남한 같으면 국체의 요체는 일제시절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제'이기에, 치안유지법의 말대로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행위"는 무조건 처벌 대상이 됩니다.
이번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굳이 '부정'하지 않고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듯한 연구'만 해도 벌써 처벌 대상입니다. 뭐, 총독부 경무국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보안기관들이 하는 일들을 저승에서 보고 있다면 아마도 박수를 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국적(國敵)을 취체(取締)하는 법"이라고 하면서요.
치안유지법과 같이 지배자들에게 긴요한 도구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싶었다가 곧바로 바람과 함께 다시 돌아옵니다. 너무나 입체적인 모습으로요. 물론 약간의 '진보'는 없지 않아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연구했다가 대한민국 보안기관의 현황을 현지 조사(?)하게 된 불우한 '국적'(國敵) 들은, 아마도 경무국 시절에 비해서 약간 더 나아진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적어도 고문을 당해서 미쳐버리거나 죽을 확률은 많이 낮아졌습니다. 답답해서 정신병이 발병될 확률이야 그대로 있지만요. 또한 공산주의자의 구금 소식을 전했던 1920년대의 <조선일보>보다는(못믿으시겠지만, 그 때만 해도 <조선.>은 <동아>보다 좌파적이었습니다!) 오늘날 <경향신문>은 이번 '국적 취체 사건' 을 조금 더 대담하게 다룰 자유까지 얻었습니다. 1929년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사를 당한 차금봉 동지(車今奉)와 같은 불굴의 공산 투사부터 김남주 시인, 박종철 열사까지 무수한 지사들이 그 생명과 건강을 바친 대가는 바로 이것입니다. 고문은 거의 없어졌다시피하고, 그나마 얼마 안되는 신문다운 신문들이 보도다운 보도를 할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치안유지법 그 자체를 역사의 쓰레기통에 완전히 버리자면 과연 역사의 잔혹한 여신에게 얼마나 많은 인신제사들을 바쳐야 할까요? 얼마나 긴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시위하고 살수차, 물대포를 맞고 곤봉 밑에서 쓰러지고 경찰 장화에 밟혀야 할까요? 참으로 답답하지 않습니까?
지배자들의 직업병이라는 게 있습니다. 망각증세입니다. 웬만하면 역사가 이미 진보됐다는 사실을, 그들이 잊으려고 하고 늘 '하기 편한' 옛 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만, 미르차 엘리아데의 표현을 빌려서 '영구적 귀환'으로의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19세기 말 군함외교의 수준으로 다시 전락돼 리비아를 공습하는 서방 열강의 퇴보적 행태를 보셔도 무슨 뜻인지 아마도 아실 것입니다. '그 시절'과의 차이라면 함포 대신 폭격기를 사용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 '영구적 귀환', 지속적인 옛 패턴의 반복을 막자면, 들고 일어나고 외치고 반대하고, 밟힐 때 밟히고, 그러나 그러고 나서 계속 일어나서 다시 외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주 답답하지만, 이건 역사에서 꺼낼 수 있는 제알 중요한 교훈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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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살려면 모난 돌이 되자" (레디앙, 2011년 03월 11일 (금) 09:04:18 박노자 / 오슬로대)
'둥글게 둥글게'는 노예 삶…집단행동, 보통사람들의 무기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속담은 있는데, 저는 이것이야말로 소위 '상식'이 꼭 사리에 맞지 않은 하나의 경우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와 같은 류의 속담들이 나온 역사적 배경이야 십분 이해가 돼요. 한반도에서는 - 매우 아쉽게도 - 민이 관에 대해서 완승을 거둔 적은 없었어요.
왕조, 즉 '관' 조직의 교체 경험도, 외세의 영향에 기댄 급진적인 개혁의 경험(해방 직후의 이북 지역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요)도, 1987년과 같은 미완의, 아주 미완의 혁명의 경험도 있지만, '민'은 그래도 한번도 '완승'을 거두지 못하고 만 것에요.
기존의 서열들이 잘 해체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범상'(犯上)을 생각하기가 두렵고, 범상할 것 같은 '모난' 성격이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죠. 거기에다 여태까지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실제로 살아온 환경이란, 도시화 이전의 엄격한 장유유서 질서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마을 사회나, 도시화 이후 개발독재의 문화 정책에 의해서 장유유서 식의 위계를 엄격하게 잡은 학교나 직장 등의 '조직'들입니다.
'조직형(型) 인간'의 최고의 덕목은 "둥글게 둥글게 행동하기"죠. 물론 후배나 부하에게는 꼭 둥글게 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2008년6월에 <이코노미21>에서 나온 한 직장인 여론조사의 자료에 의하면 약 60%가 '후배 군기잡기'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부하에게는 둥글게 하지 않아도, 이 조직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들은 상사에게는 정말 비교할 수 없이 둥글게 대합니다. <이코노미21>의 같은 기사에 의하면 직장인 96%가 상사의 사적인 부탁까지도 들어준다고 하네요. 커피 심부름은 기본이고, 상사가 강추하는 보험에 가입하거나, '가족에 거짓말 대신해주기'까지 별 문제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상사하기 참 좋은 나라, 대한민국', 국제홍보의 좋은 거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둥글게 사는 것은 정말 심신 건강에 좋은가요? 솔직히, 제 개인적 경험으로 봐도 꼭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상사에게 습관적으로 미소를 짓고 '절대적으로 비위에 거역하지 않는' 언행으로 일관하는 것은 당분간 득이 될는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심한 상처를 남겨 평생을 망가뜨릴 수도 있는 것이죠.
제 경우를 소개하자면, '평생'까지는 다행히 망가지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둥근 처신으로 심한 심적 외상을 입긴 했습니다. 약 13년 전에, 국내 한 사립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쳤을 때에 그 대학의 '만능' 총장과 관계가 있다 싶은, 즉 '권세'를 부릴 만한 위치에 있었던 같은 과의 한 교수는 제게 - 본인이 총장의 요구로 번역했어야 할 - 문건의 로역(露譯)을 시켰습니다.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씀입니다. 저는, "나중에 총장이 직접 부탁했으면 하겠다"라고 단서를 달긴 했지만, 그 때 시킨 대로 했습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겠지만, 결과는 좌우간 비참했습니다. 그 뒤로는 그 에피소드를 자꾸 떠오르게 되었고, 그 때마다 자신의 나약한 비겁함에 대한 자기혐오를 느끼곤 했습니다. '둥글게' 하다가는 전형적인 '심적 외상'을 입은 것이죠.
사실, 제가 본 피해(?)는, 어떻게든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 심부름부터 논문대필까지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수많은 동료 비정규직 교수들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걸레 취급'을 받아온 그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악몽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을까요? "둥글게 둥글게" 하는 것은 그들의 심신을 얼마나 파괴했을까요?
단재나 만해처럼 비타협적 '개인 반란'을 잃으키자면 일단 아사(餓死) 쯤을 각오해서 해야 하는데, 이는 범상한 중생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단재나 만해는 사표(師表)지 현실적 모델은 - 아쉽게도 - 되기가 힘들죠. 그런데 '개인 반란'은 어렵더라도, 착취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둥글게 둥글게" 굽실굽실했다가 나중에 화병이 쌓여서 일찌기 건강을 잃어 고통스럽게 죽어나가는 것보다 집단 행동이라도 벌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직장단위 별로 비정규직들끼리 "충성 경쟁을 포기한다"고 서로 서약하고, 관리인들에게 공과 사의 철저한 분리, 사적인 착취의 근절을 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생명을 지키는 방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 교육일 걸요.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가르치는 것보다는, 적당히 모난 돌이야말로 담 쌓기에도 좋고 예쁘게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즉 '상황 파악/대처 능력'과 아울러 강직함, 그리고 인간적 존엄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미리 가르쳐주는 것은 좋지 않겠습니까? 궁극적 차원에서 본다면 "둥글게 둥글게 산다"는 것은 노예로 살다 죽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태생적으로 노예가 아니기에 이렇게 자신의 존엄성을 죽여가면서 산다는 것은 결국 불필요한 고통의 길일 뿐입니다. 인간 존엄성과 주체성을 위주로 하는 참다운 교육을 통해서 이 고통들을 방지해보는 것은 우리들의 책무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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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계 보스들 '행복한 놀이터'된 까닭 (레디앙, 2011년 03월 04일 (금) 07:42:37 박노자 / 오슬로대)
조용기 목사 호통의 배경…'교계 호족' 성공 비결은 낮은 행복지수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지금과 같은, 거의 '성역'에 가까운 위치에 서게 됐는가요? 어떻게 해서 한국의 일부 종교인들은 재벌과 정치인, 그리고 과거 조선 사회의 '山林', 즉 일종의 '사회 지도자'와 같은 기능들을 한 몸에 다 겸비해 기이한 '삼위일체'를 이루었는가요?
우리에게 급이 높은 종교인들이 누구에게도 호통을 칠 수 있는 풍경은 익숙해져 있지만, 이는 사실 조선 내지 동아시아 전통과 상당히 다르기도 하고, 또 세계의 많은 다른 나라들과도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종교인 만능' 차원에서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사실상 조금 독특합니다. 또 어찌 보면 종교적 파벌(종파)들의 우두머리들의 무소불위의 권위/권력은, 재벌 만능주의와 고도의 병영화/군사주의와 함께 남한 사회의 '3대 특색'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풍경은 조선 전통이나 동아시아 전통의 시각에서는 왜 이색적인가요? 정권이 늘 종교가 제공하는 정당성을 필요로 해온 동남아시아와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애당초부터 국가는 이미 그 자체로서의 충분한 정당성을 보유해온 것입니다.
종교란, '王化'에 기여하는 한, 또는 기여하는 만큼 용인되고 장려까지 될 수 있었지만, '왕화', 즉 정권의 정치적/문명적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입장에 전혀 서 있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정권의 요구대로 자기 고유 원칙까지 헌짝처럼 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 징발이나 그 후의 의승(義僧. 국가적 신역身役을 다하는 승려)에 의한 남한산성 축성 같은 걸, 태국이나 스리랑카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동남아에서는 승보(僧寶)에 대한 외호(外護)야말로 왕권 존재의 전제조건입니다.
한데 아조선(我朝鮮)은 정반대죠. 승려든 한양 소격서(昭格署)의 도관(道官)이든 심지어 유림이든 다들 왕조를 보필하지 않고서는 설 자리를 얻을 수 없었죠. 중국, 일본에서의 정교 관계 구조도 그 근본상 이와 상통해, 종교 지도자들이 적어도 사회를 '지도'할 수는 없는 오늘날 중국이나 일본은 바로 동아시아 전통 차원에서는 '정상'에 가깝겠습니다.
일면으로는 유럽과 비교를 해도 한국 종교는 아주 비상하게 비대화돼 있어요. 루터교를 아직도 형식상 국교로 하는 노르웨이에서만 해도, 실제 교회 출석하는 인구는 전체의 형식적 기독교인 중의 약 4%에 불과하며, 기독교적 담론은 소수의 우파 정당(기독교민중당 등) 외에서는 사회에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도 못합니다.
노르웨이에서는 예컨대 오슬로 주교가 조용기 씨와 같은 류의 발언을 했다면 일차적으로는 '월권'(종교인으로서의 부당한 정치 참견) 시비는 일어났겠지만, 결국 대다수는 이를 아마도 '개그'쯤으로 취급했을 것입니다. 오슬로 주교는 인기 있는 방송국 기자나 인기 작가보다 훨씬 권위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면, 대한민국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지역에서도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종교계 보스들의 '행복한 놀이터'가 됐을까요?
한국의 '기독교화'는 미군 점령과 이승만의 반(半)식민지적 정권 수립, 미국의 엄청난 영향으로 시작이 됐지만, 주로 1960~80년대에 이농인구의 교회 유입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최저임금제조차 없었던 '무복지 개발독재'에서는 교회란 '공동체 소속'을 잃은 수많은 이들에게 '대체/유사 공동체'가 되어준 것이었죠. 불교계는 주로 1980년대 이후, 상당 부분 기독교의 선교방법들을 그대로 채택해서 그 세를 넓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도시화 과정이 다 끝나고 적어도 기본적인 복지 서비스들이 이제 교회 밖에서도 점차 생겨나는 시대에 왜 아직까지 조용기가(家) 등 교계 호족(豪族)들의 '하나님 장사'는 이리도 잘 돼갑니까? 도대체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 중독'에 빠지게끔 하는 사회적 요인은 무엇인가요?
제 답은 간단합니다. 교회나 사찰이란 결국 진정한 의미의 개인적 종교의 대체물이기도 하고 (직접 신을 만나고 부처를 만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교회도 사찰도 전혀 필요없습니다), 또한 행복의 대체물이기도 합니다. 행복 지수가 한국만큼이나 낮은 사회에서는 종교 광신의 지수가 지금처럼 높은 것은 절대 우연은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긴밀히 연관돼 있죠. 신이나 부처님에게 성금, 불전의 형태로 (통하지도 않을) '뇌물' 이라도 주어서 풀려고 하는 문제들은, 우리가 평소에 풀 수 없는, 풀 수 없으니까 늘 괴로워하는 문제들입니다.
살인적인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암기로 끝나고 마는 '공부', 보람을 느낄 수는 없어도 불안과 공포를 늘 느끼는 직장, 상호 이용과 충성 경쟁, '하향' 멸시와 '상향' 아부로 압축되는 대인 관계, 일종의 기업체가 되고 마는 가정 등등... 이 무의미의 왕국에서 그래도 살아남으려는 수많은 이들은 결국 조용기들을 매개체로 해서 '최고의 상사'라고 생각되는 신이나 부처님에게 가서 자신들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최종 결재'를 받으려고 하는 셈입니다.
경쟁과 아부의 이 왕국에서 모든 문제들은 개인적으로, 상사에게 잘 접근해서 푸듯이, 행복의 문제도 개인적으로, 공인 받은 매개자를 통해 풀려 하는 것이죠. 그러기에 이 매개자들이 전통상, 그리고 국제관례상 보기 드문 힘을 얻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행복을 얻으려는 이 마음이야말로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맙니다. 미안하지만, 지옥에서는 개인적으로 그 지옥의 불을 도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옥을 타파하자면 염라대왕에게 하소연해도 소용 없고, 명부시왕에게 개인적으로 빌어도 소용없습니다. 서로 손을 잡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도산(刀山)에서 몸이 살점으로 찍혀나갈 각오로 같이 몸부림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바로 이 과정에서 찾아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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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은 남한의 스승이었다? (레디앙, 2011년 02월 18일 (금) 11:18:03 박노자 / 오슬로대)
남북, 한반도적 근대성 성취와 수많은 비극 공유하고 있어
노르웨이 보수 일간지와 국내 보수 일간지를 비교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아무리 같은 보수라 해도, 노르웨이 보수는 파업하는 지하철 노동자들에 대해서 "시민의 발목을 잡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상상하기가 힘들어요. 그런 식으로 나오다가는 지하철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나머지 '시민들'마저도 그 보수 신문을 보지 않을 게 하도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한 가지 차원에서는 노르웨이 보수 신문들도, 국내 보수 신문들도, 그리고 세계 대다수의 '주류' 언론들도 상당한 유사함을 과시합니다. 그들 모두가 북조선을 희화화하는 것을 특기이자 주된 판매 전략 중의 하나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법에 있어서는 또 상당한 차이가 발견됩니다. 남한의 경우에는, 멸시와 희화화는 꼭 증오와 뒤섞여 있는 것이지만, 노르웨이 보수 신문들은 그저 "세계와 담을 쌓아 사는, 옛날 왕과 같은 독재자가 다스리는 아시아 국가"를 이국화시키면서 "재미난 볼거리"로 삼는 것이죠.
정말이지, 배부른 자들의 오만을 목격할 때마다 차라리 극도로 호전적이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북조선식의 민족주의와 반제주의는 더 숭고하게 보이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민족주의에 문제제기할 수 있고 민족주의와 논쟁할 수 있지만, 배부른 자들의 오만을 보면 논쟁할 기분도 안나죠. 그저 역겨울 뿐입니다. 그러나 좌우간, 그 기사에서는 이국화와 오만은 느껴져도 별다른 증오심 따위는 없었습니다. 이 측면에서는 <조선일보>와 상당히 다르다고 봐야 하죠.
그런데 한국을 '최첨단 기술의 나라', '한류의 발상지' 등으로 극찬하고 (그리고 물론 삼성과 엘지의 광고도 많이 많이 받는) 이들 국내외 보수 신문들이 북조선을 증오의 대상이 아니면 그저 단순한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요?
지금이야 상상이 잘 안가는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남한에 비해 분명히 경제력 등 종합 국력이 더 강했던 북조선은 양쪽 분단 국가들 사이의 경쟁에서 리드하고 있었어요. 지금이야 북조선의 연간 국내총생산(약 260억 달러)은 삼성전자 연간 수익의 약 5분의 1에 해당되지만, 적어도 유신시대 말기까지 남쪽 지배자들도 지식인 사회도 은근히 - 그리고 때로는 거의 노골적으로 - 이북을 참고하고 이북을 배우고 또는 이북을 '창조적으로' 모방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렇게 하게끔 만들어주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양쪽 지배 체제의 공고화 과정이 상당 부분 병행했으며 서로 닮았다는 것이죠. 양쪽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유형적으로 비슷한 궤도를 밟아야 한다는 것은 분단 체제의 구조적 특징이라면 특징이죠.
본인이 볼 줄 몰랐던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쓰여진 책들을 참고문헌으로 내세운 '학위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님'이 된 이승만이 '총잡이' 김일성을 멸시했지만, 양쪽 체제는 많은 측면에서는 일란성 쌍둥이이었습니다.
1972년에 이남에서 유신체제가 선포되는 반면 이북에서 주체사상의 '유일화'가 이루어진 것은 과연 우연입니까? 크게 보자면 - 비록 정도의 차이 등은 있지만 - 1995~98년 이북의 대기근에 이은 부분적 시장경제 도입과 1997~1998년 환란 이후의 남한의 신자유주의화도 같은 거시적 과정(한반도에서의 개발국가식 조합주의의 위기와 시장주의로의 전환)의 일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북을 멸시한다면 결국 우리 자신들을 멸시하게 되는 꼴이죠. 더군다나 1950~60년대에 이북이 이남과의 경쟁에서 완전한 리드를 해서 이남으로서 모방의 대상이 됐던 시절까지 생각해보면 더더욱도 멸시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소련,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민족적 자존심'을 살리고, 소련과 중국의 힘을 크게 빌렸던 새 정부의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던 이북은, 이미 1950년대 초반부터 국학 진흥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특히 주요 문헌(<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등등)의 쉽고 정확한 국역과 실학 등 '근대 맹아적' 전통의 '재발견'에 주력했습니다.
뭐, 다산이나 연암에 대해 '근대 맹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근대지상주의적 견강부회의 측면이 강하지만, 좌우간 그 시의성 덕분에 <열하일기> 국역이 아주 잘 나와 지금 남쪽에서도 잘 읽혀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남쪽의 국역보다 <고려사>의 북역은 훨씬 읽을 만하고 정확하죠.
이승만 정권이 이북의 이 성과들을 보면서도 아예 별다른 대응할 능력조차 없었지만 박정희는 겨우 1965년에 민족문화추진위원회를 문교부 산하에 두어 고전국역 사업을 좀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학 '재발견'의 중요성을 남쪽에서도 일찌감치 천관우 선생 등이 주장했지만, 특히 다산에 대한 본격적인 재조명이 이루어진 것은 이북보다 훨씬 늦은 1970~80년대입니다.
1960~70년대의 이남은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면에서 이북을 '따라잡기'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박정희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들은 만주국 경험도 염두에 두었지만, 은근히 이북의 5개년계획을 능가해보자는 속셈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포항제철 건설 등 군수 공업의 기반이 될 철강 산업 진흥은 분명히 철강 생산이라는 전략적 부문에서 북한을 압도해보자는 계산 없이 그 추진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분야에서는 이북이 꼭 먼저 발을 들여놓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이북의 핵무기가 문제된 것과 관련해서 기억해두어야 할 부분은, 김일성이 1959년에 소련과 핵연구 관련 협정을 맺은 것은 1956년 남한과 미국의 핵 협력 관련 협정에 대해 알고 남한에 의해 압도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핵과 원자력의 분야에서는 오히려 남한은 처음에 훨씬 더 많은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컨대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중요한 국학 등 연구를 국가의 직접적 지원 및 통제 밑에 두는 데에 있어서는, 1978년에 창립된 이남의 정신문화연구원은 분명히 이미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이북의 사회과학원을 은근히 벤치마킹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들으면 자존심 상할 사람도 많겠지만, 사실은 사실이죠.
이남과 이북은 한반도적 근대성의 많은 성취(예컨대 문맹 퇴치 등)도, 많은 비극들(특히 전 사회의 병영화)도 같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주고 도와주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데에 서로 지원해주는 게 정상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정상적 세계에서 살지 못하는 것,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정상적 사고를 보유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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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 절망, 그리고 무간지옥 (레디앙, 2011년 02월 11일 (금) 10:01:01 박노자 / 오슬로대)
최고은 작가 죽음과 대한민국…굶어죽는 거 남 일만 아니다
사실, 아사란 인류의 태생적 악몽과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행위들의 바탕에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라는 목적의식이 거의 언제나 깔려 있었습니다. 사실, 자연경제와 같은 상황에서는 '아이'라는 것은 가장 확실한 노후연금의 형태죠. '공동체'도, 그 핵심적 형태로서의 '가족'도 '아사로부터의 도피' 수단이라면, 인간의 윤리도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산 수단을 그나마 소유했던 농민들을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노동자로 만드는 '근대'를, 대중들이 많은 경우에는 왜 환영했습니까? 눈부시는 기술 발전이 아사라는 인류의 영원한 악몽을 퇴치시킬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그 악몽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3.1운동이 지난 뒤에 조선에 '사회', '공공성'이라는 관념이 무대 중심에 서게 되고 나서 대중매체들이 아사 방지의 노력을 사회화했습니다. 예컨대 흉년으로 인해서 1925년 이른 봄에 전남 함평군에 아사의 위험이 발생하자 <동아일보>는 이를 신속히 보도하고(1925년2월10일) '사회'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사회도 나서게 됐지만, 극도로 궁핍한 조선에서 아사가 그래도 비교적으로 드물고 예외적인 일일 수 있는 이유는, '가족', '마을'이라는 핵심적인 '자연적' 복지망이 그래도 여전히 강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원조와 가족이라는 보호막 덕분에, 극도로 무능하고 부패한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전쟁이 황폐화한 한반도 남반부에 그나마 대량 아사 사태라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시적으로 봤을 때에 한국에서 지난 10~20년간 사회는 못 알아볼 정도로 바뀌어도, 자본과 국가는 제 자리에 있거나 오히려 퇴행한 것입니다. 자본도 국가도 수많은 원자화된 개체들의 질환이나 노후, 육아 등을 책임져주고 보장해줄 만한 그 어떤 복지망도 제대로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부모와의 가까운 관계는 이미 없고, 결혼을 아직 안했거나 하려 하지 않고, 가까운 친구 등이 없는 원자화된 개인은, 대한민국에서는 안심하고 살아나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240일 동안 재취직하지 못했다면? 현존하는 제도의 수준에서 이야기하자면 걸인이 되거나 굶어죽는 수밖에 없는 셈입니다. 가족이 해체된 후의 대한민국의 모습이죠. 물론 현실적으로는 대다수의 실업자들이 굶어죽기보다는, 다단계판매를 하든, 노점상을 하든, 공사장 노동을 하든, 몸을 팔든, 몸을 망가뜨려가면서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면서 그 생존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파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최고은 작가의 뒤를 따를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만약 노동을 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아무 기한없이 무상급식과 생존이 가능한 정도의 수당의 지급이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생활보호제도와, 240일이 아닌 취직 이전까지의 실업수당 지급 제도 등 제대로 된 복지망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자신의 학력과 무관하게 착취적인 기업에 가리지 않고 들어가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젊은 인재들, 가족이라는 보호막없이 해고를 당하기만 하면 아사와 같은 끔찍한 미래를 직면해야 할 것이고, 해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 해서 착취자들의 모든 요구를 다 충족시키느라 몸과 마음을 다 망가뜨려야 할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절망은 사회의 지배적인 모드가 될 것이고, 절망으로 인해서 자살, 마약, 범죄 등이 계속해서 경제성장률보다 훨씬 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입니다. 절망적 고국을 피하려는 젊은 고학력 인재 인파들은, 모슨 편법으로든 외국에 나가려 할 것이고, 거기에서도 각종 착취자들의 쉬운 먹이가 될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고학력, 저임금, 불안정 노동력'으로 자본은 계속 이윤을 계속 올리겠지만, 노동자에게는 대한민국은 말그대로 무간지옥이 될 것입니다. 이 무간지옥의 도래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인 이집트의 민중으로부터 권력형 도둑들을 잡아 추방시키는 방법을 늦기 전에 배워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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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대주의자들은 근대형 지능범? (레디앙, 2011년 01월 30일 (일) 11:26:39 박노자)
사대주의의 기원과 역설…근대화보다 '백성' 노예화 우선
우리는 아주 일상적으로 '사대주의'라는 말을 씁니다. 사실, 그 기원은 좀 시원치 않은 말이긴 합니다. 구한말에는 일본인 관료와 언론인, 그리고 일본을 '개화 선배'로 인식한 다수의 친일적 개화주의자들은, 중국을 아직 '종주국'이자 독립운동의 잠재적 후원세력으로 봤던 유림 출신의 의병장이나 위정척사파 같은 사람들을 '사대주의자'로 몰아세우곤 했었습니다.
사대주의의 기원
일본이 사대주의자들을 물리치고 조선에 독립과 (일본과 합방을 하여 계속 개화의 혜택을 받을) 자유를 주었다는 기본적 전제를 깔고 사대주의라는 말을 남발했었습니다. 예컨대 독립협회의 '독립'은 바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지, 서재필부터 시작해서 '초고속 개화의 모범'이라고 봤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독립협회의 계승세력들은 대체로 사대주의자와 '완고파', '수구파' 같은 용어들을 혼용했습니다.
그 다음에 예컨대 이광수는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자들을 '신식 사대주의자'라고 몰아붙이곤 했습니다. 혁명의 후원자가 따로 없는 상황에서 국가로서의 '러시아'도 아닌 세계혁명의 중심세력이라고 인식됐던 국제단체 코민테른을 추종했다고 해서 친일파인 자신보다 더 나쁜, 구식 위정척사파와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라는, 아주 악질적 비방이었습니다.
유신 시절에 '한국적 민주주의' 옹호자들은 김대중과 같은 근대적 합리성을 나름대로 익한 자유주의자들까지도 사대주의자로 비난했지요. 하여간, 근거가 취약한 비난을 위해서 많이 쓰이던 말인지라 왠지 쓰기가 꺼려지지만, 예컨대 영어 공부를 대하는 대한민국 '주류'의 태도를 보면 조선왕조 시대 양반사대부들의 한문과 중국경전에 대한 태도가 연상되긴 하죠. 단, 그 잔혹성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는 보이긴 합니다.
양반 자제들은 대개 6살이나 7살 쯤부터 천자문과 소학을 천천히 익히기 시작했는가 하면, 요즘은 영어로 아이를 괴롭히는 행위는 이미 3~4살부터 시작되는 경우들도 허다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무한경쟁의 시대'에 접어들어 아이들을 경쟁의 도구로 만드는 사람들은 꽤나 빨리 야만화되는 모양입니다.
한문 숭배와 영어 공용화
그런데 이 사회의 지배자들은 정말 과거의 양반 사대부와 같은 형태에 사대주의, 즉 '상국' 문명에 대한 전반적이고 다소 몰주체적 존숭, 그리고 속도 빠른 내면화를 지향한다고 보는 것은 마땅한가요?
저는 여기에서 약간 토를 달고 싶은 부분은 있습니다. 물론 '중심의 언어'를 위신재로 삼는 행위 그자체야 양반사대부들의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맞지만, 지금 국내에서의 영어에 대한 태도는 어디까지나 일제시절의 '내지어', 즉 일본어에 대한 상류층과 중산층의 태도를 계승, 발전한 듯합니다. 그 때의 내지어나 지금의 내지어는 전통 시대의 한문과 마찬가지로 지배자/중간계층과 피지배자들의 '구분짓기' 도구이긴 했지만, 동시에 (전통시대와 달리) 유학을 통한 학력자본 축적과 국제성을 띤 이윤추구적 행위, 그리고 관료로서의 출세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일제말기에 집의 대문에다가 '국어 (즉, 일본어) 상용의 집'이라는 팻말을 걸어놓는 사람들이나, 아이들을 내지화시키겠다고 집에서도 영어를 써대는 열혈적(?) 강남족들이나, 크게 봐서는 목표는 하나죠. 현존하는 패권체제에서의 언어를 통한 치부(致富), 각종 '벼슬길'에서의 성공, 제국적 '국제화' 정도입니다.
외면적으로 봤을 때에는 전통시대의 '한문 숭배'와 통하는 듯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를 간과하면 안됩니다. 한문 숭배는 '중심', 즉 중원 왕조들의 문화에 대한 아주 전반적이고 다면적인 수용, 나아가서 내면화와 동일화를 의미했지만, 식민지시대나 탈식민 과제 실패의 오늘날 지배자들의 '영어 공용화 (내지 恐龍化?)'는 극도로 선별적입니다. 즉, 저들의 위치 공고화, 특권 영구화에 필요한 부분만 뽑아서 이용하는 것이지 '일본' 내지 '서구'를 전체적으로 내면화하려는 것과는 사이가 멀죠.
선택적 친일, 좌파 일본 사상엔 무관심
예를 들어서 일제시대에 (사실, 이미 구한말부터) 일본 근대문학이 조선에 들어와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만엽집>(萬葉集)이나 <원씨물어>(源氏物語)와 같은 일본 고대, 중세의 걸작들에 대해서는 조선의 근대주의적 문학 애호가들은 다소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을 지배자 반열에 올리게 하는 근대화 과제와 무관한 '과거의 유물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고 봐야죠. 마찬가지로 조선의 온건하고 친일적인 개화주의자들은 다소 보수적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나 아주 보수적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를 존숭했지, 그들의 위치를 불안하게만 만들 수 있는 바바 다츠이(馬場辰猪)나 우에키 에모리(植木枝盛)와 같은 자유민권 운동의 좌파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단 말이죠.
후쿠자와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는 최근까지도 다수의 저서는 나오지만, 후자의 두 명의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국내 학계에서는 지금까지도 연구가 비교적으로 없어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친일파'라고 해서 일본의 '모든 것들'에 대해 꼭 무조건적 애정을 보인다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불필요하거나 위험하다 싶으면 취사선택의 과감함도 십분 과시합니다.
국내 지배자들의 서구 추종주의나 친미성도 마찬가지죠. 국내 아이들을 '오렌지 발음'을 완벽하게 익힐 역사적 사명을 띠고 만들어진 학습기계로 취급하고 있지만, 도구성이 강한 언어 이외의 '서양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꽤나 엄격한 선별 기준을 적용하죠. 예를 들어 국내 학계에서는 서양사를 다소 주변적인 과목으로 인식하죠. 적어도 한국사에 비해서 말이죠. 한국사에서는 지배자들의 모든 범죄들을 다 합리화할 초역사적 '민족'도 찾을 수 있고 성웅 이순신과 '기'의 화신인 노비들이 '이'를 체현한 양반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이유를 완벽하게 대준 성현 이황 등등을 다 찾을 수 있지만, 서양사는 공연히 불순하기만 하지요.
서양사가 주변적이 된 이유
특히 프랑스나 러시아 등 큰 혁명을 거친 나라들의 역사를 보면 불순하고 불온한 이야기들이 나올 게 많기에 일단 충신 김유신, 성웅 이순신, 그리고 성현 이황과 율곡을 일차시할 만한 이유들은 충분합니다. 강남족의 귀한 자제들에게 축적하기 좋은 문화자본이 되는 서양 기악이나 발레 등은 분명히 국악이나 전통무용을 압도하고 있지만, 한국 대학의 구조 안에서는 서양 철학은 별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는 것 같은 인상입니다.
한국 철학 같으면 강화도의 양명파와 같은 비주류들이야 있지만 크게 불순한 요소들은 잘 안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양 철학은, 겉은 아무리 얌전하게 보여도 은근히 불순하기가 쉽습니다. 난리 칠 줄 모르는 대학교수이면서도 양보할 수 없는 내면적 양심이나 국민 국가의 부분적 해체를 통한 영구평화를 이야기한 칸트를 보세요.
칸트 연구자 김상봉 교수가 지금 그 내면적 양심의 부름대로 삼성 불매 운동을 하고 있는 게 뭐가 놀라운 일이라도 되나요? 그러니까 양심과 같은, 이 체제에서 어차피 실용성과 현실성이 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할 사람들을, 아무리 독일에서 철학 박사 학위 수십 개를 받고 독일어와 영어에 대단히 능통해도 대학의 문턱 가까이도 오지 못하게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러한 실용적이지 못한 사대주의를 너무 하면 뒷탈이 많단 말이죠.
한 마디로 하면, 지금 이 나라 백성들의 파땀을 쥐어짜는 패거리들은 단순히 '서구/미국'을 '숭배'만 하는 구식 사대주의자라기보다는, 근대형 지능범들입니다. 그들은 예컨대 복종하는 습관을 잘 키우게 하는 단순기계적 어학 학습을 유아들에게까지 시켜도, 공연히 지배자들에게 복종만 하는 인간의 내면적 자기 배신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나 하게 만드는 그 무슨 칸트를 한국의 피지배자들이 널리 알게 되는 걸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의 '전반적 서구화'라기보다는 유순한 노예들의 늘 숙여질 수 있는 머리들과 잘 굽혀지는 허리, 그리고 늘 일에 바쁜 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예농장이 된 이 나라에서 그 어떤 본격적 변혁을 막기 위해서는, 그들은 아주 '서구적이지 못한' 방법들까지 다 동원할 것입니다.

 

[박노자 칼럼] 우리를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나?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01-30 오후 07:05:15)
요즘 진보언론까지 포함해서 ‘아덴만 여명’ 작전의 ‘대성공’에 들떠 있다. ‘아덴만에서의 쾌거’로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군의 위상이 강화됐다”고 기뻐하는 보수언론의 심리를 쉽게 알 수 있지만, 진보언론들까지도 ‘해적 소탕 성공’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우리 국민들이 잘 구출되고 외국 범죄자들이 응징을 잘 받았다”는 데에 대해 긍정 일변도로 반응하는 ‘민심’에 민감한 나머지 ‘주류’와 질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셈이다.
그러나 “외국 범죄자들이 살해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국민이 구출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중요하다”는 순박한 민족주의적 심리를 이용해 ‘아덴만에서의 승리’에 대한 다수의 한국인들의 비이성적인 기쁨을 부추기는 텔레비전과 보수신문들은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른다. 살해당한 이들에 대한 기본적 측은지심도 저버린 이 반인륜적인 ‘국민적 환희’는 앞으로 우리에게 수많은 재앙을 가져다줄 것이다.
같은 국내인이 극단적 궁핍을 이기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인질 범죄를 범하게 된다면 우리는 통상 그 범죄에 대한 당연한 공분과 함께 빈민을 범죄자로 만든 딱한 사정에 대한 일말의 연민을 당연히 느낀다. 그러면 보편적인 인류애의 차원에서는 비록 국내인을 상대로 범죄를 벌인 외국인이라 해도 같은 시각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소련과 중국의 후원을 받아 ‘사회주의적 성향’을 천명한 소말리아 국가는 사실상 1991년에 동구권과 함께 붕괴, 소멸됐다. 그 후로는 전략적 요충지인 소말리아는 1993~1995년간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세력들의 무장 침공부터 시작해서 계속 외세의 간섭에 시달려왔다. 최근 미국의 사주와 후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의 침략(2006~2009) 등으로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 내우외환 속에서 국가재건이 계속 지지부진해 주민들의 생업은 늘 위협을 받아왔다.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해적”이라고 하는 집단들은 붕괴된 국가가 더 이상 외국 어선으로부터 지키지 못하게 된 어장들을 빼앗겨 생계 곤란에 빠진 해안지구의 어민들이다. 이들의 인질 범죄를 당연히 합리화할 생각은 없지만 외세에 시달려본 한국인들은 과연 그들의 아픔을 약간이나마 이해해줄 만한 아량마저도 없는 것인가?
범죄사회학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범죄 근절 전략으로서는 ‘소탕’이 아닌 생계형 범죄 예방 차원의 민생대책이야말로 최적이다.
소말리아의 경우에는, 급한 것은 인질의 목숨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도박형 ‘구출작전’이 아니고 외세 간섭의 차단과 이슬람주의 세력 등 유력 반대파와의 타협, 국가재건과 어업의 부흥일 것이다. 더군다나 ‘소탕 작전’의 과정에서 해적이 살해되는 경우에는, 이는 그 작전을 벌인 국가 소속의 선원들에 대한 차후의 복수를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은 ‘호재’라고 쾌재를 부르고 있지만, 차후에 언젠가 아덴만에서 복수를 당할지도 모를 무고한 해운업 노동자들의 생명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신경을 써주기나 하는가?
피는 피를 부를 뿐이다. 가난과 고용 불안에 시달려 위험천만한 아덴만으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국내 선원이든, 아이를 먹여주려고 호구지책으로 해적선을 타는 소말리아 어민이든 그 생명은 똑같이 귀한 것이고, 똑같이 해치면 안 되는 것이다. 2500년 전에 성인이 “승리를 기뻐하는 것은 살인을 기뻐하는 것과 같다. 승리해서 돌아오는 군을 장례식을 치르듯이 맞이하라”고 했다(<도덕경>, 31장). 이 말에 비추어 볼 때에,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된 가난뱅이 8명을 “성공적으로” 죽였다고 기뻐서 난리 치는 우리를 과연 계속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있어야 할 자비심이나 생명에 대한 경외, 피부색과 무관한 이웃사랑은 우리에게 과연 남아 있는가?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임이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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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사회 대 귀족사회 (레디앙, 2011년 02월 25일 (금) 09:17:53 박노자 / 오슬로대)
북, 스탈린 시대 넘는 권위주의…남, 미국보다 더한 기업국가
영국에서 주로 고대 중동의 역사를 연구, 교수하는 오스트리아계 라이크 교수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죽은 통치자의 묘'의 구조가 갖는 상징성이나, '죽은 통치자 영정'의 상징성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북조선 사례는 여러 모로 특수하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예컨대,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레닌 묘와 비교하면 물론이고, 모택동 기념당이나 손문 선생의 묘와 비교해도 금수산 기념궁전은 확실히 가장 크다는 것이죠.
소련/러시아나 중국이라는 '위압적인 우방'들과 국력을 갖고 겨룰 입장에 있지 않은 북조선은, 적어도 '선왕'에 대한 기념사업의 차원에서는 세계 최고를 기록한 셈입니다.
또 하나는 '선왕'의 표준 영정입니다. 진지한 혁명가 레닌의 그 어떤 (널리 유포된) 사진이나 초상화를 봐도 파안대소하거나 미소 짓는 모습을 별로 볼 수 없습니다. '혁명'이라는 코드는 무엇보다 진지함,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데, 굳이 문화적 계통으로 따져보면 이는 복음서에서 한 번도 웃었다고 기록된 적이 없는 야소 기독의 진지함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대중성이 강한 농촌 출신의 모택동의 일부 사진에서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표준적' 이미지들 역시 진지해 보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희생을 많이 해야 하는 혁명사업은 숭고하면 숭고하지, '우스운'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한데, 김일성의 표준 이미지는 바로 활짝 웃는 이미지입니다. 바로 그 이미지는 금수산 기념궁전에 걸려 있죠. 이는 '진지한 혁명가'라기보다는 차라리 '따뜻한 아버지', 또는 백성을 '어루만질 줄 아는' 유교적 '성군'의 이미지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사실, 이 '유교 코드'를 빼고 북조선을 이해할 수 없다고 봐야죠.
북조선의 사회 경제적 형태는 초강력 중앙집권성을 특징으로 하는 국가 자본주의적 (스탈린주의적) 개발국가인데, 그 정치 문화적 형태는 바로 성리학적 유산을 듬뿍 담아 있는 강경 민족주의적 (주체적) 세습 통치, 즉 일종의 '왕국'입니다.
남한이 개발국가이었던 시절, 그리고 특히 1970년대 유신 시절에, 남한 통치집단도 강경 민족주의적 종신 집권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적은 있었으며, 그 때에 친일파와 친미파에 의해서 세워진, 애당초에 유교적 유산과 꽤 사이 멀었던 남한은 일종의 '2차적 유교화' 과정을 겪은 바 있었습니다.
1950년대나 1960년대초와 달리, 1970년대에 성장기를 보냈던 이들은 현충사를 순례하여 '성웅'의 모습을 마음에 새겨야 됐으며, 텔레비전에서는 <세종대왕>과 같은, 세종을 일종의 '전근대 개발국가 지도자'로 만드는 드라마를 봐야 됐으며, 국책 과목으로 부상되고 1972년 이후에 강화된 국사에서 '김유신 장군의 헌신적 노력에 의한 삼국 통일'과 같은 수준의 이야기를 배워야 됐습니다.
장군, 성군, 성웅들의 세계에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 불우하게도 - 본의아니게 보내야 했던 이들의 일부는 1986년 이후에 운동권 일각에서 유행해진 '주체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과연 우연입니까?
이북 정권의 유교적이다 싶은 외피를 은근히 벤치마킹해서 열심히 베꼈던 박정희의 퇴행적인 독재는, '인자하신 주인님'에 대한 지향성을 몸에 밴 사람들을 길러낸 것이죠. 물론 다들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박정희주의에서 김일성주의로 개종(?)하는 것이 비교적으로 쉽다는 점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뭐, 반대의 경우들도 있죠. 고 황장엽씨나 <조선일보>에서 그 필봉을 휘두르는 강철환씨를 보시면,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일언이폐지하자면, 옛날에 빌헬름 라이히(1897-1957)선생이 이야기하셨던 '권위주의적 인격'이라는 게 실제 존재한다고 봐야겠습니다. 자연의 부름대로 아이들을 15~16세부터 섹스를 하게 놓아두고 부모들의 말에 얼마든지 거역하고 얼마든지 대들 수 있게만 해주면 '새끼 박정희'와 '새끼 김일성'들이 더이상 그리 많이 안나올 터인데, 우리는 라이히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새끼 박정희'들을 계속 대량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경제력 증강 차원에서 김일성을 능가했다 해도 '강경 민족주의 종신통치 수립' 차원에서는 - 다행스럽게도 - 북조선의 수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외향성이 지나치게 강한 경제는 1979년에 과잉,중복 투자와 외부적 쇼크로 심하게 삐딱거리자 그 정권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결국 붕괴되고 만 것이죠. 그 뒤로 무수한 굴곡을 겪은 남한은, 이제 개발국가라기보다는 (1997~1999년부터) 차라리 신자유주의적 기업국가의 모델에 더 가깝습니다. 국가라고 하지만, 공공성은 대단히 취약하며, 실제로는 그저 재벌들의 '심부름꾼' 정도입니다.
오세철 교수 같은 분을 붙잡아 몇년 동안 재판한다면서 괴롭힌 끝에 집행유예 유죄 판결을 내릴 만큼 명시적 반대자들을 끈질기게 탄압하는 '공안형 국가'지만, 믿고 살 수 있는 국민 노후임금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는, 그런 국가입니다.
공교육 제도가 있음에도 유치원부터 40~50대의 나이까지 거의 전국 전국민이 사교육, 즉 학원가의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것은 이 국가의 수준을 단적으로 말합니다. 사적 패거리, 각종 '사회 귀족' 중심의 사회다 보니까 '죽은 통치자' 숭배도 어디까지 사적 패거리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남한이 그 와중에서 전적으로 소멸돼도 어차피 자유세계의 보루인 미국이 남을 터이니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위대한 애국자', '건국 아버지' 이승만을 기리는 소집단이 있는가 하면, 유권자의 적어도 15~20%가 지금도 - 이북인들이 김일성을 마음 속에서 기리듯이 - 박정희를 기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한 현상이 없다면 '공주님 표'들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재벌마다 창업주 '회장님' 중심의 소규모 숭배가 있는가 하면, 또 학맥마다 모 '박사님', 모 '교수님' 등은 열렬한 숭배를 계속 받는 것입니다. 북조선 왕족이 '충성'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인다면, 남한 귀족들은 '효성' 중심입니다. 자기들의 '위대한 조상님'에 대해서 말이죠.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로서는 북쪽 '왕실 조상 숭배'를 흉볼 것도 없습니다. 남쪽의 근대적 합리성의 수준은 그것과 그리 다를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 초강경 중앙집권의 북쪽과 달리 신자유주의적 기업국가인 만큼 권력이 어느 정도 분산돼 있을 뿐이지, 그 어떤 공공성도 합리성도 찾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부하로 하여금 '회장님 어록'을 달달 외우게 하고, 야구방망이로 마구 때리는 남한 사회귀족들은,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대착오적입니다. 그런 유형의 '호족', '권문세가'들은 사실 마땅히 역사박물관에서 박제화돼 전시돼야 합니다.
북조선의 권위주의가 스탈린 시대 소련을 능가했다면, 남한의 기업국가는 어쩌면 미국 수준 이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죠.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민중 본위의 근대가 창출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남쪽과 북쪽이 서로 서로 평화공존하고 대결을 접어야 양쪽 민중이 이 왜곡돼버린 근대성을 바로 잡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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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사회 육아론에서 배울 것들 (레디앙, 2011년 01월 21일 (금) 10:16:15 박노자 / 오슬로대)
"수호믈린스키 교육론, 경쟁교육에 대한 가장 완성도 높은 대안"
우리는 '기업인'처럼 적어도 중립적으로 들리는 듯한 어휘를 자주 쓰지만, 땅투기로 번 돈으로 자동차부품 공장을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백만원 이하의 월급을 주면서 다달이 수천만원의 이윤을 챙기는 이는 분명히 착취자일뿐이죠. 그러나 이 세계는 단순한 착취/피착취 관계로만 설명되어지지 않는 부분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심부 세력들의 침략을 받는 주변부-이라크나 아프간-의 민중들은 직접적 착취를 당한다기보다는 그 땅에 있는 지하자원을 강탈 당하거나(이라크의 경우), 그 땅의 지정학적 위치를 노리는 제국주의자들의 직간접적 지배를 강요당하는 셈입니다.
착취, 강탈, 지배 이외에는 자본주의 세계의 또 하나의 중요한 관계축은 바로 주변화죠. 예컨대 더이상 시장에 내다팔 만한 노동력을 보유하지 않는, 즉 더이상 착취할 만한 가치도 없는 노인들은 폐기물처럼 사회의 주변에 밀려, 가난(한국 노인의 약 40%는 국가가 정한 기준으로 봐도 빈민에 속합니다)과 사회적 괄시 속에서 그 인생의 쓸쓸한 내리막을 걸어야 합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이렇게 많은 '폐기물'들을 스스로 세상을 떠나도록 유도하여 사회의 '망국적인 복지 지출'을 이렇게도 잘 줄여줄게 하는 지배자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의 괴물과 용감하게 싸우는 위대한 우리 지도자들의 기념비적 업적입니다.
착취, 강탈, 지배, 주변화 내지 폐기물화 이외에는 자본주의 세계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관계축은 바로 탈인간화입니다. 이 사회의 상당 부문에서는 정상적 인간의 맨정신으로 도저히 버틸 수 없기에 그 분야의 종사자들을 항시적으로 비정상적 정신상태로 몰아넣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군대는 당연히 탈인간화의 선구적 실험장이지만, 예컨대 스포츠계나 연예계는 이 차원에서 꼭 뒤지지도 않습니다. 구타를 당하거나 술시중, 성상납 강요를 당하는 그쪽 종사자들은, 몸을 망가뜨리더라도 경쟁자를 물리쳐 몸값을 올리는 일, 그리고 자기 섹시한 몸과 사생활까지 상품화시킴으로써 출연 드라마 시청률을 높여 협찬사들의 수익을 올리게 하는 일을 결국 당연한 '일생일'"으로 익혀야 합니다. 탈인간화하지 않는 이상 어려운 것이죠.
그런데 어쩌면 군대나 스포츠계, 연예계보다 더 철저하고 악질적인 탈인간화의 현장은 다름이 아닌 일반 학교입니다. 군대에 끌려가거나 프로 스포츠, 연예계에 몸과 마음을 파는 이들은 적어도 10대 중반 이상이니 비인간적 세계에 소극적으로라도 저항하고, 가장 어렵고 무서운 부분들을 적당히 피해가는 등 나름의 '생존기술'을 익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치원 시절부터 정신병적 '경쟁교육'에 노출돼 있는 아이들 같으면 이와 전혀 다른 입장이죠. 부모를 아직 우주 전체로 아는 10대 이전의 나이에, 그들은 바로 부모의 강요로 알아먹지도 못하는 영어로 아무 뜻도 발견할 수 없는 노래들을 이미 달달 외워야 하고, 친구들을 경쟁자로 생각하면서 경쟁적으로 수학 문제풀이에 몰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주고 예뻐할 줄 배워야 하는 이 나이에 남자아이들은 "인생은 전장, 남자는 전사"라는 적자생존식 철학의 차원에서 벌써 '국기 태권도'를 익혀 '맞는 아이'가 아닌 '때리는 아이'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리고 싶지 않는다면? 그러면, 무수한 시체들을 밟아 '제일 존경하는 기업인'이나 '지지율 1위 정치인'이 되는 '최고'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위대한 선진국에서 '진정한 사나이'로 사는 걸 포기해 낙오자, 주변분자의 삶을 감수하거나 이민 준비쯤을 착수해야 하는 셈입니다. 무간지옥은 따로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 무간지옥 속에서도 아이를 '제일 존경하는 기업인'이 아닌 정상적인 인간으로 키우고자 하는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지금 하나의 희소식이 들리게 됐습니다. 수호믈린스키의 전인교육론인 『선생님에게 드리는 100가지 제안』이 며칠 전에 고인돌출판사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수호믈린스키의 교육이야말로 경쟁교육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완성도 높은 대안인 셈이죠.
반평생을 우크라이나 한 마을의 시골학교 교장으로 보낸 바실리 수호믈린스키(1918~1970, 그의 교육론에 대한 연구 등은 여기에 있습니다 http://www.sukhomlinsky.net/)는 비록 경직성이 높은 스탈린주의 관료체제 속에서 살았음에도, 그의 교육론은 공산혁명 원래의 인도주의적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교육관료들의 상당한 저항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저항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수호믈린스키 교육론이 소련과 동구 등지에서 널리 알려지고 수호믈린스키가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는 등 비교적으로 공식적 인정을 받은 것은, 그의 교육론이 일선교사와 학부모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은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명저 『아이들에게 내 심장을 준다』(그 영역본은 여기)는 일찍부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었죠.
지금 우리 선진적 조국에서의 처세서처럼 말이죠. 단, 그 내용은 우리가 서울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처세서들과 정반대이었습니다. 수호믈린스키는 교육의 요체를 아름다움에 대한 기쁨, 지식에 대한 기쁨, 타자와 연대하는 데에 대한 기쁨을 알고, 그 기쁨을 남들과 나눌 줄 아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적 인간을 키우는 데에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태극기에 대한 경례가 있고 애국조회는 있지만, 수호믈린스키 학교에서의 주된 매일 의례행사는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숲의 들판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아이들은 샘물 소리에서의 위대한 음악을 발견하는 것을 배우고, 날아다니는 나비의 모양새에서 자연 속의 균형과 합리성을 발견하는 것을 배우고 구름과 바람의 심포니를 배웠습니다. 이 '자연 수업'의 결과물은? 아이들은 종이에다가 자연을 접하고 나서 느낀 자기들의 소회를 그림으로 발표하고, 서로의 그림을 보면서 서로서로의 자연사랑을 발견하고 서로서로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죠.
수호믈린스키의 교육은, 공부를 보다 잘하는 아이들이 약간 더딘 아이들에게 개인지도하면서 그들을 돕는 연대주의 교육이었으며, 화학이나 생물학의 추상적 원리들을 자연 속에 나아가서 발견해야 하는 실사구시적 교육이었으며, 이론공부와 함께 비료나 사료를 만들고 비행기나 배 모형들을 손으로 만드는 실기교육이었으며, 철저하게 아이들의 수준과 개인특성, 연령적 특성에 맞추어진 맞춤형 교육이었습니다.
고학년 아이들은 교과서 이외에 대중적 과학 책을 탐독하면서 물리학이나 수학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에 대한 개인적 관심을 갖게 됐는가 하면, 저학년 아이들은 나무와 다람쥐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가를 상상하면서 이를 '창작 동화' 형태로 발표하여 자신의 창조력을 단련했습니다.
일선 농민들의 아이들인 수호믈린스키의 제자들은,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서도 부모들에게 '재미있는 물리학의 원칙'을 대중적으로 설명하면서 배움의 기쁨을 남과 나누는 일까지 배웠습니다. 그들이 자기 개성에 맞는 분야를 선택하고 그 분야에서의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등 철저하게 '개인'으로 컸지만, 동시에 그 창조력으로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즉, 그들에게 개인과 집단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죠. 물론 이와 같은 배움이 가능해진 것은, 비록 관료화되긴 해도 어쨌든 개인 자본가가 존재하지 않으며, 민중의 생계가 보장돼 있는 사회주의 조국이 존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호믈린스키가 서거한지 이미 4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사회주의 조국이 무너진 자리에서는, 밑에서는 마피아에 의해서, 위에서는 안보꾼들에 의해서 각각 관리되는 가장 야만적인 자본주의가 들어서고 원자화돼 공포감에 사로잡힌 개개인들이 각자 살아남으려고 절망적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의 교육이론이 계속 관심을 끌고 학습되는 한,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이 야만의 시대를 뒤로 하여 보다 나은 수준에서 관료제의 폐단이 없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다시 한 번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사회주의 없이 살 수 없는, 사회주의를 공기처럼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성장되면, 옛 혁명 가요의 구절대로 언젠가 "인류의 황금시기"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걸 믿지 않고서는 이 고통의 바다에서 왜 식량을 축내면서 계속 망국 유민의 부끄러운 몸으로 살아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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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성, 최첨단 상품 & 체벌 (레디앙, 2011년 01월 14일 (금) 09:52:37 박노자 / 오슬로대)
국제적 관심사 된 한국의 체벌 관행…노예 양산 위한 '육체훈육'
이번 주초에 저는 노동환경감독청(http://www.stami.no/)의 시선을 과감히(?) 피해서 약간의 직업활동을 했습니다. 동료와 함께 아시아 교육에 있어서의 국민화와 저항 등을 다루는 대형 프로젝트를 마련해서 노르웨이의 학진으로부터 연구비를 신청하려 하는데, 그 예비적 국제 워크샵에 나아가서 제 연구주제에 대한 예비발표를 한 것입니다.
제가 이 프로젝트 속에서 연구하려 하는 것은 한국 교육에 있어서의 군사문화와 체벌 등 육체훈육의 문제인데, 이번에 발표한 것은 바로 한국에서의 '체벌 정치'의 문제였습니다. 이 발표는, 대한민국처럼 번지르르하게 보이고 스마트폰과 같은 최첨단 국제 장사로 돈을 버는 나라가 아직도 체벌을 널리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동료들의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여기에서 그 대강을 서술하여 강호 제현의 질정과 편달을 청하고자 합니다.
어느 계급사회든간에 그 구성원들을 사회화시키는 과정에서 (지배자에게) 복종심 등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늘 훈육 장치들을 다양하게 설정해 이용합니다. 아주 거시적으로 본다면 미셀 푸코의 이론대로 전근대의 훈육은 대체로 육체적 통증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는 반면 근대적 훈육은 시장사회 속에서 경쟁해야 하는 개개인의 경쟁심이라도 유발시켜 스스로를 통제케 하는 '자발성 유도형'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영수는 아무리 국, 영, 수 문제풀이의 천재가 돼도 세습적 비정규직 신세를 벗어날 확률은 극히 낮지만, 아직도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화는 살아 있으니 이와 같은 '자발성 유도형 훈육'은 충분히 가능하죠. 뭐, 이 신화는 당연히 10~15년 후에 죽고 말 터인데, 지금대로 가면 대한민국의 빈민동네들은 이미 그 때에 부에노스아이레스나 리오데자네이로와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대한민국은 위대한 근대적 선진국답게 '자발성 유도형 훈육'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수와 영희들이 졸음과 마려운 오줌통, 답답해서 죽기라도 하고 싶은 자살충동 등을 물리치면서 부모님들을 울리지 않기 위해서, 약간이라도 '인정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낙오자로 전락해 고통스럽게 죽을 일이 없기 위해서 암기와 아부적인 '모범적 품행'으로 하루 14~16시간 동안 승부를 열심히 가립니다.
그런데 장시간 학습노동을 똑같이 강요하는 인접국가 - 일본, 대만, 중국 -와 달리, 대한민국은 거기에다가 영수와 영희들의 학습기계가 된 육체와 정신이 약간이라도 삐딱거리면 가차없이 그들에게 '매'라는 약을 강제 투여합니다. 약간이라도 관리자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덜 열심히 따르거나 인사라도 15도 대신에 5도로만 올려 '건방지게' 보였다가 당장에 볼, 종아리, 허벅지가 아플 것이라는 기억을 뇌에 새기게. 그리고 불복하면 당장 큰 통증이 온다는 등식을 아예 몸으로 기억 잘 하게.
그렇지 않아도 영수와 영희들을 '자발적인' 공포에 이렇게도 잘 빠뜨리는 이 위대한 선진국에서는, 왜 하필이면 매와 같은 다소 단순하고 후진적인 도구는 아직까지 이렇게 인기인가요? 한국형 훈육은 왜 전근대적인 '통증에 대한 공포 유발'과 근대적인 '경쟁심 유발'을 이렇게 조합시키게 됐는가요? 이 질문에 답하자면 대한민국의 위대한 계보부터 쭈욱 추적해봐야 합니다.
한국적 근대성의 원천이라고 할 명치시대 일본에서는, '근대'를 기치로 내걸어 체벌들을 아주 선구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금지해놓았습니다. 1879년의 교육령 46조부터 1941년 국민학교령 13, 20조까지, 명치기부터 소화 시대의 전쟁기까지, 군사주의의 극성에도 불구하고 원칙상 체벌은 계속 금지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번지르르한 근대적 표피뿐이었고, 실제로 일본 '황군'과 별반 다르지 않게 일제시대 학교에서도 매를 가하려는 교실관리자를 말릴 방법이라고는 별로 없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더욱더 그 체벌 관행은 심해, 법률적으로 '내지'에서의 체벌 금지는 '외지'(식민지)에서도 효력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1920~30년대에 교실에서 비명횡사하거나 불구자가 된 조선 아이들의 비극적 이야기를 당시 '민간지'들은 전하곤 했습니다.
일단 체벌로 조선인의 자존감이나 저항하려는 용기를 꺾어서, 그 다음에 겁이 나서라도 유순해진 아이들 사이에서 충성 경쟁과 학습 성과 경쟁을 부추기려는 것은 식민지 교육 관료들의 속셈이었죠. 총독부 조선인 출신의 교육관료와 함께, 이 이중적인(체벌 + 경쟁 유발) 훈육제도는 총독부의 법통(통치권)을 이은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북한의 경우에는 약간의 음성적 체벌 관행은 남아도 공식적으로는 공산주의적 사범학이 도입돼 체벌이 불법화됐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아예 일제시대에 비해 퇴보를 하고 말았죠. 식민지 때에 말뿐이었다 해도 그나마 명시적인 체벌 금지는 있었지만, 한국 교육법 76조는 체벌을 금지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관행' 내지 '사회통념'의 문제로 남기고 만 것인데, 이 사회통념을 사실상 정의하는 것은 체벌 관련 재판에서의 대법원 판결들입니다. 최근까지의 판결들의 논리를 종합해보면 흥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품위 유지'하면서 큰 상처를 내지 않았던 '적당한 체벌'(볼때리기, 종아리 치기 정도) 행사는 거의 '합법'으로 인정돼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식민지적 이중 훈육 체제는 그대로 잔존해온 것입니다.
한국 자본주의에는 단순히 '열심히 하는 근로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제한 잔업 지시를 당해도 저항할 생각을 못하는, 과다 업무와 스트레스로 반주검이 돼도 자살할지언정 '국내 최고'의 무노조 기업을 상대로 투쟁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는 아주 유순하고 아주 충성스러운 노예들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들을 관리할 체제의 성격 자체는 완전히 근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노예들을 훈육하는 방식에도 전근대성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확언컨대 조중동은 끝내 체벌 금지를 반대할 것입니다. 군대 못지 않게 교실 체벌도 저들의 성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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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내리는 날 딸을 얻고, 기록하다" (레디앙, 2011년 01월 07일 (금) 10:47:15 박노자 / 오슬로대)
복지국가의 효능과 남한 진보 투쟁의 도움을 위해서
밑으로부터의 본질적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딸 사라가 살아갈 세계는 고갈돼가는 자원을 놓고 서로 패권싸움을 벌이는 열강들의 세계, 환경 파괴의 본격화되는 세계, 자본이 국제화되는 만큼 노동이 지속적으로 불안화돼가는 세계일 것입니다.
세계가 이렇게 돼가는 데에 대해,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책임부터 무겁죠. 그런데, 아이 탄생은 꼭 경사만은 아니더라도 인생의 분수령과 같은 아주 특별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오슬로에 와서 사라를 챙겨주는 데에 도움주시는 사이에 약간의 망중한(忙中閑)을 얻은 저는, 이제 사라의 탄생을 전후로 해서 저희들이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 묘사해보려고, 이 기문(記文)을 남깁니다. 제 개인의 체험과 기억을 사회화(化)하는 것은 적선(積善)의 방편인데다가, 저희들의 개인 경험을 통해 복지국가의 효능들을 엿볼 수 있기에, 이 기문이 멀리에서 한반도 남쪽의 진보 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임신이 확인되고 나서, 아내는 저희 지역의 보건소(helsestasjon)에 등록돼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초음파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물론 이는 저희 개인 비용 한푼 들지 않았던 일이었죠. 예상 출산 날짜에 앞서 3주전에 음악교사인 아내는 학교에서 유급휴가를 받아 그때부터 완전히 출산 준비에만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체로 노르웨이의 법으로는 출산 관련 유급휴가란 46주 정도입니다. 만약 월급의 80%에만 만족하다 그러면, 56주로 늘릴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10주를 아버지가 받아야 하는데, 언제 받는가는 부부 사이의 합의에 따라 본인이 알아서 결정합니다.
저 같으면, 아마도 금년 9월부터 받을까 지금 계확합니다. 어차피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직장에서 무조건 '복지휴가'라는 이름으로 2주의 유급휴가를 추가적으로 주니까 지금의 급한 불을 충분히 다 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경우에는 출산 이전의 3주와 출산 이후의 6주는 의무적(필수적) 출산 휴가에 속하고 그걸 제때에 받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의 27주를, 본인이 알아서 기간을 정해 받는 것입니다. 제 아내 같으면 바로 봄학기에 받을 수도 있지만 본인의 의향에 따라 약간 뒤에 받을 수도 있고, 또 50% 시간에만 일하면서 그 휴가 기간을 두배로 늘릴 수도 있습니다.
좌우간, 본인 마음만 먹으면, 출산 3주 전부터는 직장 등을 다 잊고 거의 8개월간 아이를 챙기 데에만 전념해도 되는 것이죠. 월급을 그대로 받고 원래의 직장에 당연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을 알면서요. 그러니까 저희들이 아는 현지인 부부 대부분은 아이 2~3명씩이나 키우고,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을 인생의 최고의 낙으로 삼죠.
출산이 임박했을 때에 저와 아내는 저희들이 사는, 오슬로 근방의 위성도시격인 뱌룸(Bærum)군의 중앙 종합병원으로 향하고, 그쪽의 출산과(føden)에서 저희 방을 배정 받았습니다. 이쪽 같으면 절대 다수의 남성 배우자들이 여성의 출산과정에서 꼭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심부름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 출산과에서는 남성 배우자에게까지 음식 등이 제공되는 것은 물론이고, 작은 도서실까지 다 구비돼 있었습니다. 출산을 준비하면서 문화생활하게요. 저희들은 담당 간호사와 담당의사도 배정 받았는데, 간호사는 의사보다 나이와 경험이 꽤 많았습니다. 독특한 것은, 명찰에 명기돼 있는 직급명이 아니었다면 제가 그 둘 중에서는 누가 의사인지 누가 간호사인지 아마도 몰랐을 것입니다. 서로 대하는 것은 철저하게 평등했으며, 오히려 의사는 경험이 많은 간호사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면서 자기 맡은 일을 처리해갔습니다. 제 아내에게도 명령을 했다기보다는, "배에 힘을 실어주는 게 좋겠다", "제발 마지막 몇 분 참아주세요"와 같은 방식으로 제안 내지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아이가 드디어 나온 뒤에 아내가 휴식기에 들어가고 약 한 시간 지나서 저희 두 사람은 식사 제공받았습니다. 탁자에 노르웨이 국기가 꽂혀 있었던 것은 저로서는 국민주의적 의례 일종으로 꽤 흉해보였지만, 그 힘들고 힘들었던 출산 과정에서 의료진이 보인 친절에 많이 감복했습니다.
출산 과정이 끝난 뒤로는, 저희 두 사람은 같은 병원 다른 층의 산후조리과(barselavdeling)의 가족실로 옮겨졌습니다. 역시 담당 간호사가 배정돼 언제든지 수유기술의 문제라든가 분유를 가장 효과적으로 타는 법이라든가 등등을 일대일로 상담 받을 수 있어 정말 초보 부모에게는 '생존 훈련'에 가깝습니다. 음식은 하루에 네번 나오는데, 대개 빵 등 분식 위주라 한국인의 식성에 잘 맞지 않지만, 산모에게 필요한 영량 등이 잘 조절돼 있는 것 같습니다.
배식소에 나가니 대개 부딪치는 이들은 같은 남성들이었습니다. 물어보니 산후조리과의 가족실에서 남성배우자가 산모와 끝까지 같이 있는 것은 여기에서 만인의 통상적 관습이랍니다. 산후조리과에서 만나는 산모들은 물론 대단히 피곤해 보였는데,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여유였습니다.
그들이 출산이라는 인생의 꼭대기에 올라가 그 산행을 즐기고, 사방을 여유롭게 둘러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출산과도 산후조리과도 다 무료였다는 것이죠. 병원에 왕래하면서 쓰게 된 택시요금까지 사회복지사무실(NAV)에서 일부분 보상 받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여기에서 필수적인 단서를 달겠습니다. 저는 노르웨이의 사회제도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할 생각은 없습니다. 노르웨이도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분이고, 노르웨이 사람들이 자동차 대신에 즐겁게 타는 자전거를 만드는 중국 노동자들에게는 노르웨이의 풍요로운 복지제도의 이야기는 그림 속의 떡일 뿐일 것입니다.
그건 그렇다고 치지만, 기업들, 부자들 세금만 제대로 내고 그 세금을 4대강 죽이기와 복한 동포를 죽일 무기의 사재기에 쓰지 말고 민중의 기초적인 복지에 쓴다면, 이렇게 고통이 많을 수밖에 없는 출산도 어느 정도까지 즐겁고 여유로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유라는 것은 계급투쟁에서 나름대로의 성과를 쟁취한 노동자들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급투쟁에서 이기긴커녕 자신들과 착취자들을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착각하는 노동자들에게 돌아올 것은 영원한 불안일 뿐이죠. 복지와 여유라는 것은, 지배자들에게 '하사' 받는 게 아니고 싸워서 얻는 것이죠. 그런데 적의 괴수를 '가장 존경하는 기업가'로 알면서 지내면 그런 싸움이라는 건 가능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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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착한 우리’에 대한 환상 깨기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11-01-02 오후 06:26:38)
근대 동아시아의 위대한 문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폭군을 폭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은, 폭군 이외에 노예들을 노예라고 부르는 일도 심히 위험한 일이다.”
무슨 의미인가? 전통사회에서는 지식인의 가장 위험한 과제는 ‘권력자에게 진실 말하기’였다. 폭군에게 “폭군!”이라고 외쳤다가 귀양 보내져서 쓸쓸하게 죽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권력자들에게 바른소리 한다는 것은 예전과 같은 의미는 없다. 일면으로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당국자들에게, 혹은 당국자들에 대한 바른소리를 하다가 ‘큰코다칠’ 위험성도 줄어들었고, 또 일면으로는 별다른 효과도 더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첫째, 오늘의 극도로 냉소적인 지배자들은 진실을 몰라서 엉뚱한 일들을 벌이는 것도 전혀 아니다. 과연 ‘4대강 죽이기’를 밀어붙이는 이들은 이 프로젝트가 친환경적이고 차후 수익성이 높다는 걸 스스로 믿기라도 하겠는가? 알 것을 다 알면서도 당장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둘째, 지배자들을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도 극도로 냉소적이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은 다수의 유권자들은 과연 그를 ‘도덕군자’라고 믿고 뽑은 것인가? 알 것 다 알면서도 그가 ‘성장’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한 줄의 희망 때문에 표를 던졌을 뿐이다. 권력자들도 오로지 당장의 사리사욕을 좇고, 대중들도 ‘성공’만 한다면 파렴치한 모리배를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볼 준비가 다 돼 있는 사회에서는, 권력자들에게의 직간(直諫)이나 권력자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은 큰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도덕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훨씬 더 의미있는 일은, 모리배들이 매체를 통해 유포하는 환상에 넘어가고 마는 대중들에게 혹은 대중들에 대해서 바른말을 하는 것이다. 전통사회와 달리 대중은 정치화돼 있으며 당당한 정치행위자로서 등장해 있는 상태니까 바른말의 효과는 어쩌면 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도 높다. 달콤한 거짓말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바른말이 늘 소화 못할 정도로 쓴맛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도발자 북한에 대해서 우리가 방어하고 있으며 정당한 응징을 할 권리가 있다”는 권력자들의 말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다른 각도에서 남북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한다면 그 반발은 대단할 수도 있다.
남한 입장과 거리를 두어서 말하자면, 전 정권이 북한에 한 약속들을 무단 취소하고, 나아가서 미국과 ‘북한 붕괴’의 경우 북한 영토를 그 주민의 의사와 아랑곳없이 흡수할 일을 의논하는 당국자들에 대해 아무런 견제도 못하는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야말로 넓은 의미에서 도발자다.
‘나’ 자신이 속하는 ‘우리’야말로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고 있다는 진실은 늘 마음 아프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다. 누구에게나 소속 집단을 긍정함으로써 자기확인을 하려는 욕망은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에 소속돼 있는 악덕업자들이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 이하의 박봉을 주면서 착취만 일삼았다가 결국 노동자들의 봉기를 유발한 판에 ‘우리’라고 해서 무조건 좋게 본다는 것은 단순히 어리석음만은 아니고 ‘우리’와 같은 국적을 갖고 있는 착취자들의 국제적 피해자들에 대한 모독이기도 한다. 실제 일개 국제적 야수일 뿐인 ‘우리’ 국민국가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는 이상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들을 피해자로 만드는 동시에 자신들도 자본 노예의 위치에 지속적으로 안주할 것이다.
비록 듣기 싫고 마음 아픈 이야기라 해도, 이윤만 알고 정의를 모르는 국가인 대한민국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경쟁과 착취에 길들여진 유순한 노예인 우리들의 실제적 상황에 대한 바른말이 대중화돼야 노예 상태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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