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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불평등, 조너선 코졸 지음, 문예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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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美공교육은 실패했을까 (서울, 박록삼기자, 2010-01-23  18면)
【야만적 불평등】조너선 코졸 지음, 김명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뉴욕 할렘과 보스턴의 소외 지역 등 40여년 동안 도심의 빈민 거주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미국의 교육과 사회 정의 문제에 전념했던 교육학자 조너선 코졸의 ‘야만적 불평등’(김명신 옮김·문예출판사 펴냄)은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 등을 구체적 사례와 함께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교육 현장 보고서다. 미국 교육에 대한 것중 대표적 저서이며 한국 교육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던져 준다.
 
1988~1990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워싱턴DC, 뉴욕, 샌안토니오 등 미국의 30여곳을 돌며 학생, 교사, 교육행정 관료 등을 만난 내용을 적은 르포성 보고서다. 이를 통해 미국 사회의 근원적 문제인 빈부의 양극화, 인종 갈등 등은 교육의 불평등성과 계급 종속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코졸이 질타하는 미국 공교육의 모순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교육 재정의 문제다. 미국의 공립학교는 기초 재정을 그 지역 재산세에 의존하고 있다. 빈민층 구역의 학교가 부유층 구역 학교에 비해 교육재정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연방정부 역시 재산세를 세금공제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어 교육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1987년 뉴욕 공립학교 학생 1인당 평균 교육비 지출액은 5500달러(약 630만원)인 반면 뉴욕 교외 지구 학교 학생은 1인당 1만 5000달러였다.
 
둘째, 인종문제다. 코졸이 방문한 도심 지역 학교의 95~99% 학생은 유색인종이었다. 대법원의 인종분리 학교 위헌 판결이 나온 지 30년이 넘었음에도 마틴 루터 킹을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현실이 코졸 보고서 속의 미국이었다. 남학생은 범죄와 마약에 쉽게 노출되고, 여학생의 3분의1은 임신을 하고, 중도 탈락률이 50%를 넘나드는 학교들이 코졸이 접한 충격적인 실상이었다.
 
셋째, 대안의 부재다. 사회계층간 불균형 해소와 우수학생 유치를 위해 마련된 ‘마그넷 스쿨’이 오히려 교육 불균형을 키우고 있다. 마그넷 스쿨 또는 선발제 학교 역시 정보 입수 능력, 추천서 받는 요령 등 입시 정보를 충분히 확인한 부모의 자녀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마그넷 스쿨로 학생과 교사가 몰리면서 나머지 공립학교는 운동장이나 미술, 음악교사도 없이 15년 전 교과서를 갖고 수업하기 일쑤다.
 
현 정부 출범 첫 해인 2008년 1급 이상의 해외파 관료 중 72%가 미국파라는 통계가 나와 입방아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미국식 교육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미국식 교육 제도의 핵심인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은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대학별 본고사와 사실상 기여입학제로 가는 첫 물꼬를 텄다고 좋아하거나, 혹은 심각하게 우려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다. 꼬박 20년 전, 게다가 먼 나라 미국의 얘기임에도 그 울림은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하다. 저자 코졸은 올해 하반기 인문학 독서모임인 ‘인디고 서원’의 초청으로 부산을 방문한다. 한국과 미국 교육의 문제점과 대안이 좀더 입체적으로 얘기될 수 있겠다. 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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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미국 vs 2010년 한국 (프레시안, 선명수 기자, 2010-01-30 오후 12:42:27)
[화제의 책] 조너선 코졸의 <야만적 불평등>
 
한 장의 유명한 사진이 있다. 1957년, 총을 든 군인들이 고등학생의 등굣길을 '호위'하는 모습. 1954년 미국 대법원이 흑백 분리 교육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자, 아칸소주의 리틀록센트럴고등학교는 1957년 '흑백 공학'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입학 원서를 낸 흑인 학생은 고작 17명. 그나마 백인들의 온갖 협박에 못 이겨 8명은 등록을 포기했고, 나머지 9명에 대해서도 백인들은 등교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심지어 주지사가 주방위군과 경찰을 동원해 이들의 등교를 막았다. 결국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은 연방 공수사단 병력까지 투입해 이들의 등교를 보호했다. 그 유명한 '리틀록 나인(Littlerock nine)' 사건이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한 동네는 화려한 주상복합건물과 무허가 판자촌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유명하다. 서울에 이보다 더 '극적인' 곳도 없기에, 이미 언론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이 지역은 1988년 올림픽 전후 철거민들이 이주해 현재까지 무허가 집단촌을 형성하고 있다. 한 쪽의 아이들이 방과 후에도 학원과 과외를 전전하며 쉴 틈이 없는 동안, 다른 한 쪽의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을 하며 시간을 죽인다. 판자촌 안에는 학교가 없어, 큰 길 건너 학교로 등교하는 아이들은 머리가 크면 자신의 거주지를 숨긴다. 두 마을 사이를 갈라놓는 양재천만이 '넘을 수 없는 곳'의 선을 그어주듯 무심하게 흘러간다.
 
50년 전 미국의 흑백 분리 학교와 다를 것 없는, 21세기 형 '게토'. 1950년대 미국에서 엄격한 분리가 이뤄진 기준이 피부색이었다면, 2010년 대한민국의 기준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경제력일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얘기가 옛말이 돼가는 오늘,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춰주는 책 한 권이 국내에 소개됐다. <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로 유명한 교육학자 조너선 코졸의 책, <야만적 불평등>(김명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이 그것이다.
 
'미국의 공교육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저자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미국의 도심 빈민가 30여 곳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미국 교육 현장의 생생한 보고서다. 그는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에서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어떻게 '분리'되고 '배제'되는지 집요하게 추적한다. 숱한 도시를 돌며 저자가 목격한 것은 바로 '공교육 제도의 야만성'이다. 그는 빈부 격차·인종 갈등과 맞물린 교육 불평등의 참혹상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폭로한다. 그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미국 독립선언서의 문구가 유독 적용되지 않는 분야가 교육"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지목하는 미국 학교의 모순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재산세의 불균형으로 인한 공교육의 불평등이다. 미국의 공립학교는 대부분 기초 재정을 그 지역의 재산세에 의존한다. 이에 따라 부유층이 거주하는 교외 지역은 가난한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보다 학생 수 대비 더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빈민 지역의 학교와 교외의 학교는 시설도, 학생들의 생활도, 교육의 질도, 심지어는 교과서조차도 '천지 차이'다.
 
리틀록 나인 사건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인종 문제 역시 거의 모든 곳에서 "경악스러울 정도로 많이" 남아있다. 공립학교에서의 인종 분리는 이미 1954년 위헌으로 결론 났지만, 저자가 방문한 도심 지역 학교의 대부분은 학생 95~99퍼센트가 유색 인종이었다. 마틴 루터 킹에 관한 언급은 조심스러웠고, 킹 목사의 '꿈'은 단단히 봉인된 채 흑인 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팸플릿에서나 확인 가능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당장 통계 수치에서도 드러났다. 1987년 뉴욕시의 학생 1인당 평균 교육비 지출액이 약 5500 달러인 반면, 백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뉴욕 교외 지구의 교육비 지출액은 1만5000 달러였다. 또 흑인 밀집 지역인 도심 학교의 경우, 학생들이 학업을 중도에 탈락하는 비율은 약 50퍼센트에 육박했다. 고학년이 될수록 남학생들은 범죄와 마약에 빠졌고, 여학생의 3분의1은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 그렇듯, 교육을 통해 바랄 수 있는 희망은 "한 줌도 되지 못했다".
 
코졸은 이렇듯 계층과 인종 문제가 얽혀있는 사례로 미국의 선발제 학교인 '마그넷 스쿨'을 지적한다. 마그넷 스쿨은 인종 분리와 사회 계층 간 불균형 해소를 위해 만들어진 공립학교로, 보다 수준 높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우수한 교사와 학생을 마치 '마그넷(자석)'처럼 끌어당긴다는 의미에서 '마그넷 스쿨'이라 불린다. 공립학교에 불만이 있는 돈 많은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거나 공립 중에서도 마그넷 스쿨 같은 선발제 고등학교에 보내려고 애쓴다. 반면, 빈민층 부모들은 입학지원서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입학 시험을 위해 어떤 공부를 시켜야 하는지, 추천서는 무엇을 받아야 하는지 정보가 거의 없다. 자연스럽게 '인종 분리'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그넷 스쿨에 가난한 흑인 입학생은 거의 없다.
 
문제는 더 있다. 마그넷 스쿨에 좋은 교사와 우수한 학생이 몰리면서, 그 인근의 학교들은 운동장이나 미술 교사도 없이 15년 전 교과서를 갖고 수업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도 한 차례 문제가 된 적 있는 외국어고와 자사고 등, 선발제 학교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서울 강북구의 한 중학교는 '한 학교 두 교복'으로 논란이 됐다. 지난해 이 학교에 '국제 특성화 과정', 즉 국제중이 생겨나면서 순식간에 '일반 과정'이 된 재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구역이 하나 늘었다. 일반 과정 학생들은 깔끔하게 새로 지어진 국제중 건물로 출입이 금지됐고, 남학생들은 운동장 구석에 세워 놓은 국제중 학부모들의 외제차에 농구할 공간을 잃었다. 한 학기 등록금도, 받는 교육의 수준도, 심지어 교복조차도 현저하게 다른 '한 학교 두 공간'의 모습이다. 2010년 판 '게토'의 모습이다.
 
책은 꼬박 20년 전, 먼 나라 미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책이 전달하는 울림은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하다.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함께 뛰어노는" 마틴 루터 킹의 '봉인된 꿈'은 일반중 학생과 국제중 학생이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냉혹한 현실로 이곳에도 이어졌다. 코졸은 130년 전 영국의 역사가 액턴 경이 미국에 대해 쓴 글을 읽을 때마다 "아이러니와 슬픔을 느낀다"고 썼다. "계층 간 차별이 없는 나라에서는 아이가 태어날 때 부모의 지위를 물려받기보다 사상과 노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상찬에 대한 무한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는 모든 젊은이에게 가능한 평등한 삶의 조건을 부여하는 평등 이론에 부합되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어느 누구도 어린 시절에 경쟁의 수단을 박탈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코졸이 말하는 '아이러니'는 바로 마지막 문장에 있다. 경쟁 수단이 거부되는 상황, 그것은 "유독 가난한 아이들에게만 제공되는 교육의 가장 일관되고도 유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어느 누구도 어린 시절에 경쟁의 수단을 박탈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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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혁명하라> 김영수, 메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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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상상과 혁명적 실천의 길라잡이 (참세상, 정병기(영남대)  / 2009년09월08일 12시51분)
[서평] <민주주의를 혁명하라> 김영수, 메이데이
 
촛불집회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나라 정치 전반에 대한 상상 혁명을 시도한 책이 나왔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을 꿈꾸던 김영수 박사가 금년에 내놓은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메이데이)가 바로 그 책이다. 책머리에서 저자는 촛불시위가 이 책을 쓴 동기이며 촛불시위 참가 청소년.소녀들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또한 브레히트의 영감을 받은 듯 진정으로 그가 하고 싶었던 정부와 국가의 해산을 통해 새로운 민주 공동체를 구상하였다. 그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현되는, 권리주체들의 민주주의이다.
 
저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다른 표현인 대의민주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통제하는 자치민주주의를 구상한다. 이러한 혁명적 구상은 상상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혁명을 위한 저항권 및 소환권과 관련해 그는 헌법효력정지권, 국가기관업무중지권, 국민헌법재판권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통치구조로서 입법권, 생활안전권, 권력통제권이라는 새로운 3권 분립을 제창한다.
 
또한 이 새로운 세 통치부서는 부문대표, 지역대표, 업종대표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차등투표, 순위투표, 기명투표제 등을 제안하기도 하며, 악법에 대한 비합법성기소제도를 제시하고, 만 명까지 가능한 국회의원 수 증가와 정당국보조금 폐지 및 정치인들의 무보수 봉사를 주장하며, 청소년들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러한 그의 착상은 어디까지나 국민이 국가기관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해야 하며, 모든 국가기관은 집행기관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의 관심은 통일과 평화 구성으로도 이어져 ‘1민족 2체제 3국가 3정부’라는 획기적인 평화동맹국가론을 고안했다. 유럽연합처럼 남북 체제를 유지한 채 평화와 통일만을 추구하는 새로운 연합국가를 창설한다는 이 구상은 실로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설명은 질박하면서도 상상과 논리는 웅숭깊은 텍스트다.
 
그의 상상은 항상 혁명을 동반한다. 혁명적 상상으로 상상은 혁명을 낳는다는 논리가 문장마다 끈끈하게 배어 있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을 요구하며 사람들의 뇌세포를 자극하려는 그의 의도가 훌륭하게 성공할 듯하다. 이 책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의 뇌도 그의 자극에 철저히 노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극 속에서도 상상의 틈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의 새로운 3권분립 구도에서 생활안전권은 행정권과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사법권이 권력통제원에 속한다면 개인이나 비권력기구에 대한 재판권은 어디에 속하는가? 정치인들에게 보수를 주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인은 돈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무엇보다 커다란 틈은 국민을 선하고 단일한 주체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국민은 단일한 의지를 가진 선한 존재인가?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한편으로 지금까지의 국민을 참된 민주주의를 몰랐던 주체로 가정하고 새로운 상상혁명을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국민은 지금까지의 국민과 어떻게 다른가? 이 책의 상상력을 보건대 이러한 과제는 다음 기회에 충분히 풀릴 것으로 기대할 수 있으리라. 혁명적 상상을 꿈꾸는 자와 상상의 혁명적 실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신선한 자극과 희망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자극과 희망에는 가시적 길도 함께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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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도 선거권을…상상력이 민주주의를 바꾼다" (프레시안, 이철호 학벌없는 사회 운영위원, 배문중 교사, 2009-09-13 오후 2:34:33)
[화제의 책] <민주주의를 혁명하라>
 
국민국가라는 단위로 분할되어 있는 지금 시대에 민주주의는 자기 삶에 대한 스스로의 통제라는 기본적인 원칙은 실종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라는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 그것조차도 간접민주주의, 특히 정당과 의회로 상징되는 대의제가 마치 민주주의 그 자체인양 간주되고 있다. 현대사회의 복잡한 구조와 기능 분화로 인민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는 실행이 어려우며 다만 특정한 경우에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논리의 핵심이지만 이야말로 대중을 대상화하는 지독한 엘리트주의나 계급차별의식이다.
 
2008년 촛불 광장에서 진지하게 던져진 물음은 '대한민국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이명박 정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아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광장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광장에서의 촛불이 꺼지고 용산으로 평택으로 사그러들어 가는 지금, 김영수는 '민주주의를 혁명하라'고 민주주의를 다시 상상하자고 진지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 책은 민주주의 자체를 혁명해야 한다고 한다, 기존에 알고 있던 민주주의의 내용을 규정했던 몇 가지 형식들은 잘못이다, 지금 이곳과 이것에 머무르는 한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 없이는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일깨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사회는 위기임에 틀림없으며 그 위기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기성세대의 상상력 고갈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새로운 세대의 상상력조차 봉쇄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상상력이 봉쇄당한 채 죽음과도 같은 입시전쟁과 학습 노동의 지옥에서 인권이 말살당하고 있는 청소년·소녀들에게서 희망을 찾아 낸 데에 있다. 책머리에서 저자는 2008년 여름학교에서 배웠던 자유민주주의를 전복해 버린 그들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헌사를 보낸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꿰뚫고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근거로 상상적 대안을 제출한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형식적인 사고의 틀에 갇혀 있는 독자들에게 상상력의 끝이 어디까지인가를 보여 준다. 형식을 깨는 순간 무한한 창조와 창의의 힘이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그것은 의식혁명이기도 하고 제도혁명이기도 하다. 선언적인 주장에 머물러 버리는 혁명은 우리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지만,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은 곧 내 안에서 꿈틀대는 변화의 욕망을 자극할 것이다. 상상은 몽상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하는 미래의 꿈이다.
  
이 책에서 상상은 네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상상혁명 첫 번째인 헌법에서 글쓴이는 헌법이 정말 국민주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헌법을 분석하고 있다. 김영수는 헌법의 구조 및 주요 조항 등을 근거로 현행 헌법은 국민의 헌법이 아니라 국가와 지배세력의 헌법이라는 점을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헌법 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3국가 통일방안을 제시하면서, 통일헌법이 어떻게 구성되고 만들어져야 하는가를 상상하고 있다.
 
상상혁명 두 번째인 국가에서는 국가가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민이 국가를 위한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3권 분립,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 등의 정부형태 등을 비판하면서 행정부와 사법부를 폐지한 새로운 정부형태를 제시한다. 특히 국민이 직접 국가에 대한 감사 및 평가를 넘어서서 정책까지도 생산할 수 있는 대안적 제도를 상상하고 있다.
 
상상혁명 세 번째인 선거에서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거기까지만 허용하고 있는 선거제도를 비판하고 있다. 1인 1표, 과반수 결정제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제한 등을 비판하면서 저자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제시하고 있는 대안은 차등투표제, 기명투표제, 선호 투표제 등이다. 또한 저자는 국민의 주권을 실질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선거제도를 상상하고 있다. 그리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연령이 왜 분리되어 있는가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15세 청소년·소녀들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상혁명 마지막에서는 특권을 누리는 제도정치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저자의 상상은 국회의원을 1만 명으로 확대, 무료로 봉사하는 대통령, 정당 국고보조금을 폐지하는 대신 그 돈을 국민의 생활안정기금으로 전환, 주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지방자치 등이다. 이러한 상상은 정치의 실질적 주체인 국민을 대상화하고 소외시키고 있는 현 정치를 극복하고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포장으로 법과 제도를 통해 국민들을 조작하고 통제한다. 일상생활이나 관심은 자본의 이해를 충족시키기 위해 욕망이 조작된다. 그리고 개인의 상상공간이 전체의 상상공간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한다. 민주주의는 자기지배의 실현이기에 일상생활과 정치에서 국민 스스로 자신과 국가를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국민주권이란 바로 국민스스로 선의 정치를 일궈내기 위해 권리의 차별을 없애거나 지배세력의 특권을 없애면서 국가 중심의 정치를 소멸시켜 나가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이 과정에서 혁명적으로 진화한다. 국민이 권력과 국가를 지배하는 상상혁명!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혁명하는 국민주권의 희망이라고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필자가 상상하는 것만이 민주주의라거나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거나 현재를 규정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상상력의 공간을 열어젖히는 시도로는 충분하다.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상상과 희망은 언제나 함께하기 마련이다. 불행한 미래를 꿈꾸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억압과 피지배 관계들을 해소, 극복하고자 하는 대중의 모든 직접적인 실천들이야말로 자기지배의 실현을 위한 민주주의 투쟁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새로운 정치는 국민의 자치체제가 지향해야 할 법과 제도를 현실에서 재구성해야 한다.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국민에서 정치의 주체로 다시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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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 '민주주의를 혁명하라' (미디어스, 2009년 11월 27일 (금) 23:58:57 유영주 객원기자)
[주말 그리고 말랑한 미디어] 'Just it book' 
 
과반수는 다수를 결정하는 데 보편적이면서도 손쉬운 방법이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우세하게 결정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 의견의 비중이 비슷한 상황에서는 과반수 결정방식이 등장한다. 의사결정의 주체들을 대부분 홀수로 구성하는 것이나 우리 나라 국회의원 총수가 299명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되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은 다수의 힘을 좌우한다. 만약 3개의 정당이 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2개 정당의 국회의원 수가 각각 149명 동수이고 나머지 1개 정당의 국회의원이 1명일 경우에 문제가 발생한다. 국회의원 총회에서 그 1명의 국회의원이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법률의 향방이 결정된다. 입법권의 절대적인 힘을 1명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정당이 가진다.
이러한 현상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떻게 1명이 298명보다 정당할 수 있느냐는 의식이다. 그 반대의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각각 149명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2개의 정당이 문제투성이인 법률을 놓고 서로 싸울 수 있다. 이때 1명의 국회의원이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악을 저지할 수 있는 경우이다.
뭔가를 선택하는 데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방식 자체가 보편화되고 있다. 정말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수가 결정하면 곧 선이고 소수는 악이고 오류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분법적인 판단의 굴레를 벗어나는 순간 다수가 항상 선인 경우도 없지만 소수도 항상 선일 수 없다. 문제는 다수가 항상 선으로 인정되는 의사결정방식이다. 의사결정방식이 과반수라는 사실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과반수 의사결정도 선을 결정할 수도 있고 악을 결정할 수도 있다. 결정하는 내용이 국민주권을 실현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선과 악으로 규정될 뿐이다. 그렇다면 과반수는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데 유용한 의사결정방식인가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 중략 -
국민주권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들의 대표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의사결정방식이 존재한다. 대표자의 대표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모든 선거에서 전체 유권자의 1/2 혹은 2/3 이상의 득표를 했을 경우에만 당선시키는 방안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종의 선거에서 여러 번 투표해서 결정해야만 할 것이고 투표도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 동안 투표하는 방안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특별결의방식(유권자의 2/3 이상)으로 선출하여 대표자들의 대표성을 강화시키는 대신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대한 탄핵소추나 제명을 1/3 이상의 결의로 하게 하면 된다.
대통령 탄핵 소추 및 국회의원 제명 권한도 국회위원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도 부여할 수 있다. 전체 유권자의 1/3 이상이 탄핵소추나 제명에 서명하거나 동의하면 직무를 정지시키고 국민이 직접선거로 결정하는 것이다. 탄핵이나 제명의 권한을 국민이 가지고 있는 이상, 한번 선출되었다고 거드름 피우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없어질 것이다.
 
‘민주주의를 혁명하라’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김영수 선생은 과반수 다수결 문제에 의문을 달고 더 좋은 의사결정방식이 없는가를 살폈다. 김영수 선생의 제안대로 하려면 헌법, 선거법, 국회법 등 관련 법률의 관련 조항을 죄다 바꿔야 한다. 관련 법률의 관련 조항을 바꾸려면 다시 현행 법률이 규정하는 의결 방식을 따라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이렇게 하자면 정말 민주주의를 혁명해야만 가능하다.
 
사람들은 곧잘 상상력의 혁명 또는 혁명적 상상력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냉대하곤 한다. 하지만 굳어 박제처럼 되어버린 현실을 바꿔낼 마뜩한 방법이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 쉬 절망하곤 한다. 어느 시점에선가 시민들은 스스로 만들고 누려온 민주주의의 족쇄에 갇혀버렸다. 오늘날 절차민주주의가 시민들의 민주주의적 삶을 역규정하는 사건, 사고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유권자 과반에 가까운 지지를 얻은 이명박 대통령과 개헌 저지선을 무너뜨린 보수 성향의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유무형의 폭력들. 입법, 사법, 행정을 관통하는 권력의 작동 메카니즘과 그 효과들... 1월19일의 참사와 7월22일의 희극과 10월29일의 비극...
 
KBS 사장은 제적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득표로 선출한다. KBS노조 등이 특별다수제(2/3 이상)로 사장을 선출하자고 요구했으나 이사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사회 정관을 바꾸는 일인데 다수가 반대하니 뾰족한 수가 나질 않았다. 김인규 씨는 제적 인원 11명 중 과반수인 6명의 표를 얻어 KBS 사장으로 임명제청됐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물으면 어떤 응답이 가능할까.
 
그러니까 지금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는 선동이 아니다. 앞으로 어떤 민주주의를 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인 셈이다.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를 읽으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비현실적인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데, 어느 대목에선가 정신이 퍼뜩 들거나 하면 그런 게 하나의 실마리가 되지 않겠나 싶다. 다만 한국사회 40대 이상의 머리는 대체로 바닥을 보였으니 욕심을 부리지는 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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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 억압받는 자들의 희망 (한겨레21 2009.04.03 제754호, 번역|조은섭)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이라는 책을 읽어본다고 하면서도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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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 억압받는 자들의 희망 (한겨레21 2009.04.03 제754호, 번역|조은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3월호]
프란츠 파농 '흑백, 억압·피억압의 도구로부터 해방' 선언
저서<검은 피부…> 식민주의에 대한 역사적·철학적 성찰

 
"이 책을 쓰는 이유? 물론 그 누구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내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말이다. 글쎄? 이유를 굳이 대라면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아둔한 자들 때문이라고나 할까? 내친 김에 그 증거를 대겠다.
새로운 휴머니즘을 위하여,
인간과 인간 간의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하여,
나의 동포인 유색인종을 위하여,
내가 믿는 인류를 위하여,
인종편견 때문에,
사랑과 이해를 위하여....,"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가면> 서문에서
 
2차 대전 이후 서구 지식인 사회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1952년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흑인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1)이라는 도발적인 내용의 책이 출간됐기 때문이다. 이 저서의 서문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을 피부색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흰색과 검은색 두 진영으로 갈라져 다투기 때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저자 프란츠 파농(1925-1961)은 의사, 정신분석학자, 수필가로서 알제리 독립 운동2)을 지지했으며, FLN(알제리 민족 해방전선)과 함께 정치투쟁을 이끈 투사였다.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마르트니크 출신의 파농은 프랑스가 줄곧 수용하기를 꺼려했던 흑인지식인 집단에 속해 있었다. 그는 급진적인 반식민주의자, '실패한 예언가'3)로 낙인찍힌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탁월한 문학적, 사상가적인 글을 쓴 파농은 우리 시대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우리의 토론과 성찰을 보다 명확하게 밝히는데 기여하였다.
 
파농이 지적한 '두 진영 간'의 마찰은 두 피부색 간의 마찰뿐만 아니라, '억압자'와 '억압받는자'들의 광범위한 마찰을 의미한다. 사실, 식민주의의적 인종차별주의는 여타 인종차별주의와 다르지 않다. 파농의 사상은 강력한 식민지배 아래에서 시적이고 수사학적인 산문으로 표출되었다. 자신에게 금지된 세계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식민지 해방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원주민은 정체된 존재다. 차별정책(apartheid)은 식민지 세계의 구역 나누기의 원칙일 뿐이다. 원주민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것은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원주민들의 꿈은 근육을 쓰는 꿈들이다. 나는 높이 뛰고, 수영하고, 달리고, 기어오른다. 폭소를 터뜨리고, 큰 걸음으로 강을 건너뛰고, 한 무리의 차량들이 날 뒤쫓지만 난 절대로 잡히지 않는 꿈을 꾼다. 식민 시대에, 식민지인들은 저녁 9시에서 새벽 6시 사이에 도주를 부단히 꿈꿨다."
 
이와 관련, 시대는 다르지만 폴 니잔은 "인간은 완벽해지지 않는 한,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주는 땅을 자신의 다리로 자유롭게 딛고 서지 못하는 한, 밤에 꿈을 꿀 수 밖에 없을 것"4)이라고 주장했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백인들이 흑인에게 부당하게 설정한 비정상적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이 책은 비록 그 범위가 다양하기는 하지만 흑인 예찬론자들과 사르트르의 <검은 오르페우스>5)의 텍스트를 연상 시키는 대목들을 담고 있다. 몸과 시선에 대한 은유적이고 분석적인 어휘 계통이 특히 그렇다.
 
파농은 어쩌면 저들보다 더 몸을 가까이서 다루고 있다. 왜냐 하면 그는 "이 책의 초고를 마치 연설자가 자리를 서성이며 외치듯,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몸의 리듬과 숨결의 스타일6)을 딱딱 끊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농은 현실을 은유로 접근한다. "백인을 처음 볼 때, 그는 자신의 멜라닌 색소의 무게를 느낀다."고 했다.
 
흑인들에게 있어 수 세기 동안의 노예생활 및 식민생활이 타인과의 관계와 시선을 고착시켰다. 그래서 그 시선에서 헤어나기란 쉽지 않다. 파농은 이렇게 지적한다. "사람들이 날 좋아할 때는 그들은 내 피부색에도 불구하고 날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들이 날 싫어할 때는 내 피부색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어쨌든 난 악순환의 고리에 갇힌 포로다."
 
인종차별주의는 또한 검은 색을 지칭하는 방식에도 도입된다. 예로부터 검은 색이 암시하는 내용은 분명했다. 그리고 거의 필연적으로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파농은 "검은색은 모호함, 그늘, 어둠, 밤, 대지의 미궁, 심연, 누군가의 명성을 더럽힘 등을 의미하며, 흰색은 순결하고, 밝은 시선, 평화의 흰 비둘기, 천상의 마법의 빛 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언어도 이러한 암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특히 "죄를 검은 색으로, 미덕을 흰색"으로 보는 고도의 종교적인 암시가 그렇다. 이 분석은 이런 저런 책들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파농은 이 문제를 보다 깊이 다루고 있다.
 
그의 마지막 저서 <지상의 저주받은 자들(1961)>7)은 인종차별사회와 식민사회에서의 <구역나누기>는 필연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생산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따금 그는 끝장논리로 "이 흑백논리가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사르트르가 알제리 전쟁8) 당시 지적한 것처럼, "식민 시스템이 '인간 이하의' 시스템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굴절된 식민 시스템의 언어
나아가 파농은 "엄밀히 말해서, 식민 시스템은 인간을 동물화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은 원주민의 비굴한 동작, 원주민 마을에서 풍기는 냄새, 유랑민, 악취, 우글거림, 증식, 꿈틀거림 등을 연상한다. 폭발적인 인구증가, 히스테릭한 대중, 인간성이 말살된 얼굴들, 더 이상 아무 것하고도 닮은 데가 없는 뚱뚱한 몸, 종잡을 수 없는 무리,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 태양 아래 늘어져 있는 나른함, 식물적인 리듬, 이 모든 것들이 식민 사고의 어휘들이다."
 
이 식민사고의 어휘들은 그룹 '제브다'가 노래 '소음과 냄새'9)에서 지적했듯,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힘을 발하고 있다. 원주민의 '인간성 말살'은 그들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규율을 따르게 하고, 조련하고, 두들겨 패고, 그리고 요즘은 평화를 유지토록 하는 것 등이 식민 지배 영토에서 가장 흔히 쓰는 어휘들이다." 알제리 전쟁은 '힘'과 경멸위에 세운 최고의 영속 시스템이다.
 
따라서 파농은 그의 저서 <알제리 혁명 5년(1959)>10) 서문에서 전쟁 초기부터 "프랑스의 식민주의가 공포의 근본주의나 혹은 고문의 근본주의 등 그 어떤 근본주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도약을 깨는 것과는 거리가 먼 억압들이 민족적 양심의 진보를 외치는 오산을 낳고 있다"고 저서<지상의 저주받은 자들>에서 분석했다.
 
"만약 내 삶이 지배자의 삶과 똑같은 무게를 지녔다면, 그의 시선이 날 더 이상 두렵게 하지도, 날 옴짝달싹 못하게 하지도 못할 것이며, 그의 목소리가 날 더 이상 화석화 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그의 면전에서 난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도 않을 것이다. 실상, 내가 그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그의 존재가 날 방해하지 못하는 것만 아니라, 내가 이미 그를 괴롭힐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가 도망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육체적인 해방이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부르고, 몸을 던져 독립투쟁을 하게 만든다.
 
비식민지화 투쟁과 필연적 폭력
어떤 여건에서 독립 투쟁이 이루어질까? <지상의 저주받은 자들>은 "비식민지화 투쟁이 항상 폭력적인 현상을 유발시킨다고" 말했다. 왜냐 하면 폭력이 폭력을 부르기 때문이다. 억압자들의 폭력이 영토의 조그만 틈새만 침범해도, 평화적으로 그것에 대항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페데르브, 리오테, 뷔조, 병장 브랑당 등 정복자들은 하나 같이 "우리는 총검의 힘으로 이곳에 왔다. 우리는 쉽게 정복을 이뤘다"고 외쳐 댔다.
 
피억압자들의 반란은 당연한 것이다. 이 반격은 여타 지배를 받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문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파농이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는 걸까? 그가 모든 운동에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알제리 혁명 5년> 서문에서 그는 "우리는 처참한 심정으로 케케묵은 압제를 지속시키며 거의 생리적인 폭력성을 휘두르고 있는 형제들을 비난한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적어도 파농은 우리에게 폭력의 기원과 피억압자들의 유일한 해방구가 폭력임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한다. 파농은 '군대와 경찰서에서 표시한 국경'이니 '공유 노선'이니 하는 것들과 같은 식민사회의 '구역 나누기'가 우리를 안전지대로 밀어 넣었지만, 그것은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먼 맞서 싸워야 할 '근본주의'를 양산했다고 주장한다.
 
파농의 통찰력은 또한 식민 치하에서 해방된 국가가 온당치 못한 민족부르주아 계층이 권력을 잡고 국민들에게 지적, 기술적 자산을 제공하지 않을 때마다,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분석도 하고 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를 예로 들며, 나라를 서양 부르주아들의 의도대로 요양시설로 전락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고 경고한다. 냉소적인 부르주아 성향의 계층이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있어 국가 통합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인종과 부족들이 이끄는 이 무자비한 투쟁, 즉 외국인들이 떠난 공석을 차지하려는 이 암투가 종교경쟁을 낳고 있으며, 우리는 이슬람과 가톨릭, 이 거대한 두 종교 사이에서 불거지는 갈등을 보게 된다" 결론지었다. 심지어 파농은 국민들을 '잠재우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정당이 "과거 식민시대의 기억을 상기해보라거나, 혹은 여태 걸어온 멀고 먼 길의 길이를 재보라"고 주문하며 과거를 들먹이는 현실을 경고했다.
 
반식민주의적 '탈 유럽' 주창
식민주의의 반사적 개념으로 소위 흑인문화를 유일한 지평처럼 내세워서도 안 된다. 만약 아프리카의 소양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인종적인 것으로 만들고, 민족문화보다는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역사적인 의무'때문이라면, 그것은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것이다.
 
파농의 투쟁은 '흑인운동'을 세계화시키겠다는 의지, 그리고 투쟁의 영역을 분류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파농은 그의 첫 저서에서 "나는 현재와 미래에 의존하며 과거를 예찬하고 싶지 않다."고 자신의 신조를 밝혔다. 그래서 그는 1952년엔 어떤 경우라도 유럽역사에 기댄 식민주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멈출 수가 없다고 못박았다.
 
사실 식민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시 돌이켜 봐야 할 가치위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파농은 "만약 지식이나 혹은 철학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또한 그 이름으로 사람들은 그것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1961년 극렬한 비난이 확산되면서 "인간과 마주치는 곳곳, 모든 거리, 세계 구석구석에서 인간을 학살하며 끊임없이 인간 얘기를 하고 있는 유럽을 떠나자"고 사람들은 외쳤다. 한줄기 구원의 불빛 속에서 프랑스에 맞서야 한다고 외쳤다. 나치즘에서 해방되자마자 나라를 재건하더니 세티프(1945년 5월)와 마다카스카르(1947년 3월)의 대학살을 자행한 프랑스에 대항하자고 외쳤다. 전쟁이 종식되자마자 프랑스가 세네갈과 모로코의 형제 병사들에게 등을 돌렸다고 외쳤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엄연한 이런 진실을 우리는 경청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유럽을 흉내 내고, 유럽을 따라잡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유럽은 광적이고 무질서한 속도에 휩싸여 있다. 그 어떤 기사나 이성도 그 속도를 통제할 수가 없다. 유럽은 현기증을 유발하는 놀라운 속력으로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어, 되도록이면 서둘러 유럽과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다."
 
파농은 자신이 어떤 유럽에 대해 말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던 유대인이나, 사방에서 독립의 이유를 지지했던 프랑스인들에게 경의를 표했던 사람이다. 파농의 행동은 보편적인 것이다. "흑인인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다. 결코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지 않기를 바라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굴종은 영원히 중단되기를 바란다.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그런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바로 '당신'이라는 세계를 건축하도록 나의 자유가 나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희망한다. 이 세계가 나와 더불어 활짝 열린 모든 종류의 의식의 문을 느낄 수 있기를 말이다."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가면>에서
 
1)출판사 Seuil, 파리, 프랑시스 장송이 서문을 씀. 장송은 1965년 재출간 된 이 책의 발문도 썼다. 이 저서는 컬렉션 〈Points essais〉로 만날 수 있다.
2)파농은 1957년부터 FLN의 대변인을 지냈다. 1953년부터 그는 알제리 블리다-조앵빌 병원 정신과 과장을 역임했다.
3)수필가 로타르 베에르의 멋진 텍스트 참조. 출판사 아곤느, 제 33호, 마르세유 2005년 4월.
4)폴 니잔, 앙트완 블로에(1933), 출판사 <그라세>, <붉은 노트>, 파리, 2005년
5)장-폴 사르트르 <검은 오르페우스>,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의 서문<흑인과 마다카스카르인의 시집>, <프랑스 대학 프레스>, 파리 1948년
6)알리스 케르키, <프란츠 파농, 초상화>, 출판사 Seuil, 2000, p.46
7)출판사 프랑수와 마스페로에서 사르트르 서문과 함께 출간되었지만 곧 판금 조치 당함. 백혈병에 걸려 곧 죽게 될 것을 알았던 파농은 매 페이지를 불러주며 적게 했다. 그는 막 출간 된 책 한부를 받았고, 3일 후 미국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다. 그의 시신은 그의 유언대로 해방된 알제리 땅, 튀니지 국경 근처에 묻혔다.
8)참조 '장-폴 사르트르와 알제리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11월 참조
9)이민자들이 유발시키는 '소음과 냄새'에 대한 작크 시락의 성명에서 영감을 따 만든 곡임.
10)출판사 마스페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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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동원된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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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 성장, 저항의 힘을 농축시키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10-01-08 오후 08:07:58)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모순적 이중성
과실 커질수록 비판의식 늘어나 ‘파국’
〈동원된 근대화〉조희연 지음/후마니타스·2만원
 
 
<동원된 근대화>는 박정희 독재체제를 붙들고 숙고해온 사회학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의 야심작이다. 지은이는 2007년 출간한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에서 박정희 시대의 역사를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조망한 바 있다. <동원된 근대화>는 이 역사 서술을 전제로 삼아 박정희 체제의 근본성격과 작동방식을 복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박정희 시대 이해의 지평을 넓혀 놓는다.
 
지은이는 박정희 독재를 규정하는 핵심 용어로 ‘개발동원체제’를 제안한다. 지은이의 설명을 따르면, 개발동원체제는 후발 국가들이 국민을 동원하여, 개발·발전·성장으로 요약되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체제다. 이 체제는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후발 국가들에서 특히 전형적으로 나타나는데, 박정희 체제는 바로 ‘후-후발 국가의 개발동원체제’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 ‘복합적 분석’의 중요함이다. 박정희 체제를 ‘폭압 독재’의 틀로만 이해하거나 반대로 ‘발전국가’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단선적·일면적 시선은 이 시대의 복합적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적 이중성’에서 말하는 ‘이중성’이 이 복합적 성격을 가리킨다. 박정희 체제는 국민을 억누르고 쥐어짜는 ‘수탈국가’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발전국가’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두 성격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돼 상호작용했으며, 이 상호작용을 통해 체제가 작동하고 위기를 겪고 파국으로 나아갔다고 이 책은 말한다.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에서 지은이가 먼저 주목하는 것이 ‘동원’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국민을 동원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때 국가 또는 권력이 국민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심리적 전제가 필요한데, 지은이는 그 전제를 ‘결손국가·결손국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나라가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경제적 종속상태·후진상태에 있다는 국민적 인식이 이 ‘결손’에 담긴 의미다. 그렇다면 어서 빨리 경제를 발전시켜 정상국가·정상국민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심리적 공감대에서 동원체제가 작동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경우, 이승만 시대에 형성된 ‘반공규율사회’가 사회적 조건으로 따라붙었다. 이런 조건 위에서 박정희 체제는 ‘반공주의’와 ‘개발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가동해 국민을 끌어들였다.
 
지은이가 두 번째로 주목하는 것이자 이 책의 몸통에 해당하는 것이 ‘헤게모니 분석’이다. 지은이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재구성해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삼는다. 그람시가 말하는 헤게모니는 지배권력이 순전히 강압으로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피지배집단이 지배에 동의할 때 안정적 지배가 이루어지는데, 이 동의를 이끌어내는 지적·도덕적·문화적 주도권이 헤게모니다. 그람시는 그런 헤게모니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이와 달리 지은이가 눈여겨보는 것은 헤게모니 형성이 아니라 헤게모니 균열이다. 헤게모니란 언제나 분열·갈등·적대를 내적 속성으로 안고 있다. 일시적·잠정적으로 그 틈이 봉합될 뿐이다. 이 봉합이 뜯겨 그 내부의 갈등과 적대가 드러나는 것이 헤게모니의 균열이다.
 
지은이가 볼 때 박정희 개발동원체제는 이 헤게모니가 일시적으로 형성됐다가 이후 봉합이 해체되면서 균열이 드러나고 커지는 과정을 거쳤다. 박정희 체제는 폭력과 강압을 일상적으로 활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절반 정도를 위수령·계엄령·긴급조치 따위로 연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강력한 반공주의·개발주의 이데올로기로 국민을 규합해 동의를 끌어내기도 했다. 박정희 체제는 나라를 준군사적 총력동원체제로 바꾸어 경제성장의 ‘효율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 효율성이 관철되면 될수록 균열성과 파괴성이 함께 커졌다는 데 박정희 체제의 ‘모순적 이중성’이 있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경제가 성장해 그 과실의 일부가 국민에게 돌아가자 생각의 여유, 곧 권리의식이 커졌고, 또 동시에 그 과실이 한쪽에 편중됨으로써 국민의 비판의식이 커졌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국민은 저항주체, 곧 민중이 되어갔다. 1960년대에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부분적으로 얻었던 박정희 개발동원체제는 1970년대에 들어와 그 동의의 근거를 상실했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체제를 세워 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순전한 강압과 폭력이었고, 동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 최종 결과가 박정희 체제의 파국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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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동원된 근대화 (2010 01/19 위클리경향 859호, 정원식 기자)
ㆍ박정희 정권은 ‘능동적 대중 동의’ 못 받았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는 평가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극과 극을 이루면서 정권 붕괴 후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불꽃 튀는 ‘해석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인화성 강한 연료 구실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해석 경쟁 가운데 하나는 2004년 <대중독재론>의 출간 이후 벌어진 학계의 논쟁이다. 한양대 임지현 교수를 중심으로 제기된 대중독재론의 핵심은 박정희 정권이 공권력의 철권에 의존한 폭압적 정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광범위한 동의를 바탕으로 유지된 정권이라는 것이다. ‘사악한 소수 독재 세력 대 선하고 핍박받는 대중’이라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진보 진영의 기존 인식에 충격을 가한 도발적 문제 제기였다.
 
당시 논쟁의 당사자이기도 했던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임 교수의 대중독재론에 일단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기존의 독재 연구 또는 파시즘 분석을 뛰어넘는 새로운 통찰력과 넓은 연구 지평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저자가 보기에 진보적 논의는 “다양한 새로운 연구들을 개방적으로 흡수하고 내포화하지 못해 ‘앙상’해진 측면이 있다.”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2007)를 잇는 조 교수의 박정희 정권 연구서 <동원된 근대화>의 문제 의식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책이 겨냥하는 것은 정권의 폭압적 성격을 강조하는 진보적 관점에서 대중독재론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진보적 재해석’을 위해 저자가 동원하는 수단은 박정희 정권을 ‘개발동원체제’로 규정한 후 그 체제가 헤게모니 형성과 헤게모니 균열이 모순적으로 공존한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헤게모니 형성 과정이 동시에 헤게모니가 균열되는 과정과 중첩돼 있었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 추진’이라는 국민적·민족적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획득한 도덕적 선도성을 바탕으로 사회의 자원을 총동원하는 ‘개발동원체제’였다. 그러나 ‘동원된 근대화’는 근대화된 대중을 낳았고, 이렇게 탄생한 근대화된 대중은 자신을 낳은 체제와 불화하는 관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대중의 동의는 결코 지속적이거나 능동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박정희 체제에는 정치적·경제적 성취와 위기가 공존했다. 개발동원체제는 근대화라는 목표를 성취하는 데는 효율적이었지만 그 강압성으로 인해 위기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국의 산업화가 촉진됐다는 보수적 시각과 박정희 체제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저항에 의해 붕괴했다는 진보적 시각은 모두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저자는 진보든 보수든 박정희 정권에 대한 해석은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 “각자의 시각을 견지하면서 반대 시각이 제시하고 강조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해석적으로 내재화하는 방향으로 풍부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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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체제와 북한이 같을까? (레디앙, 2010년 01월 16일 (토) 09:25:19 이병천 / 강원대 교수)
[서평] 조희연, 『동원된 근대화』…‘개발동원체제’ 개념 불안정
  
1. 박정희 시대의 무게, 진보의 공백에 대한 응답
국민 대중은 단지 보수에 대한 비판 일변도를 넘어, 성공 대 자학의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 열린 진보의 새로운 근현대사론을 요구하고 있다. 그간 우리가 무엇을 성취했고 무엇을 잃었는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떤 새 길을 열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금 새로운 성찰을 기대하고 있다. 사정은 박정희 시대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진보의 재해석에 기여함은 물론, 진보의 한국근현대사관의 새로운 재구성을 위해서도, 나아가 저자가 ‘우리 안의 보편성’이라고 부른 한국적 특수성 속에 존재하는 일반성을 발견하는 작업에서도 새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2. 『동원된 근대화』의 핵심 논지 : 개발동원체제와 그 이중성
이번에 나온 『동원된 근대화』는 저자가 앞서 낸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가 역사서술 방식의 대중서 성격을 갖고 있다면, 『동원된 근대화』는 사회과학적 분석에 주안점을 둔 전문 학술서에 해당한다. 그렇다 해도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 또한 단순한 대중서는 아니었다. 『동원된 근대화』에서 핵심 개념으로 잡은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은 이미 그 책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그 사회과학적인 규정과 분석은 미루어져 있었던 터였다.
 
이제 새 책에서 저자는 ‘개발 동원 체제’ 개념을 과감하게 박정희 체제론의 핵심 개념으로 끌어 올려 체계적으로 장착시키고 있다. 그리고 개발동원 체제가 모순적인 이중성, 또는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고 봄으로써 박정희 체제의 구조적, 역사적 성격과 함께 그 작동 방식, 정치사회적 동학을 진보적 시각에서 해명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개발동원체제는 개발이라는 목표를 향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사회를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다. 그 때문에 이 체제는 국가주의적 체제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저자는 개발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특별히 새롭다 할 의미 내용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다. 성장, 발전, 근대화라는 말과 혼용되기도 한다. 반면 방점을 찍어 강조하는 것은 ‘동원’이라는 말이다. 책의 원제와 부제 모두에서 동원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동원은 개발, 또는 근대화 목표를 압축적 또는 전투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사회를 조직화하는 전략적 행위다. 그리고 개발이 경제적 변화과정이라면, 동원은 경제체제의 정치사회적 작동 양식이다.
 
평자가 보기에, 저자의 개발동원 체제 개념이 갖는 새로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점으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개발 동원 체제 개념을 한국의 박정희 체제를 넘어서 후발 근대화 이행 체제로 일반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와 제 3세계는 물론, 서구 후발 자본주의 근대화 체제도 이에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개발동원체제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에 걸치는 개념으로, 즉 체제 관통적인 개념으로 제시한다. 소련의 스탈린 체제, 북한의 초기건설 체제, 나아가 오늘날 개혁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조차 개발동원체제에 포함된다. 그리하여 박정희 체제는 이렇게 다양한 개발동원체제중 하나의 특수한 케이스로서 후후발,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 파악된다.
 
둘째, 저자는 개발동원체제의 국가중심성을 말하면서도 그간의 국가중심론을 넘어서고자 한다. 저자가 보기에 대표적 국가중심론이라 할 수 있는 개발국가론은 국가 자체의 주도적 개입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개발의 정치사회적 과정 또는 양식인 동원의 지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체제’(regime) 수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체제’라는 개념이 국가와 사회간의 특수한 관계가 작동하는 개발의 사회적 과정의 특성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국가 자체에 내재된 자율성과 개입 능력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계급적, 사회적 조건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하여 구체적으로 박정희 체제에서 그 특수한 조건들을 분석하고 있다.
 
다음으로 『동원된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개발동원체제, 그리하여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서 한국의 박정희 체제가 모순적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이중성’의 테제는 책의 부제로 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이 관점은 저자가 그람시, 제솝, 톰슨, 폴란차스 등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자원에서 길러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이중성론에 섬으로써 저자는 박정희 체제의 구조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역사적 동학도 보여 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모순적 이중성이란, 박정희 체제가 한편으로 경제적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는 성격과 또 다른 한편으로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성격, 그리하여 위기적 성격을 같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중성 또는 복합성은 또 달리 헤게모니적 성격과 ‘헤게모니 균열‘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저자의 모순적 이중성론은 혹시 이런 측면도, 저런 측면도 있다는 식의 병렬적 절충론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대답은 두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이론적 수준인데 저자는 그람시 헤게모니론이 강압과 동의를 상호 배제적으로 보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비판하고 동의와 강압의 통합적 이중성론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지배의 양측면으로서 강압과 동의가 어떤 방식으로 상호 침투하고 통합되는지에 대해 말한다. 또 구체 분석수준에서는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전시기에 걸쳐 동의와 강압, 또는 헤게모니적 측면과 그 균열의 측면이 어떤 역사적, 계급적 사회적 조건위에서 출현할 수 있었고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그 결합이 왜,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그리고 이 이중적 체제가 마침내 어떻게 아래로부터 ‘민중의 주체화’와 정치적 저항에 의해 파국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해 그 모순적 동학을 밝힌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차적으로 주목해 두어야 할 것은 저자의 모순적 이중성론이 박정희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일방적인 보수적 정당화론, 나아가 립셋, 헌팅턴 등이 대표하는 주류적 근대화론, 즉 권위주의적 산업화 연후에 정치적 민주화라는 단선적, 단계적인 진화론과 대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위인 박정희’론은 물론, 국가중심론을 벗어나 지배의 전략 대 저항의 전략, 지배의 동학 대 저항의 동학이 연출하는, 모순에 찬 발전 체제로서 박정희 체제를 파헤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에게 있어 박정희 반공 권위주의적 개발동원체제는 하나의 역사적 헤게모니 체제임을 인정하면서도, 무엇보다 뛰어나게 ‘헤게모니 균열’의 사례가 된다. 저자가 임지현의 대중독재론, 이영훈의 신보수적 근대화론과 논쟁하면서 보여주고자 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3. 토론: 개발동원체제 개념의 불안정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는 몇 가지 토론 지점들을 열어 놓고 있다. 토론점들은 꽤 많지만, 여기서는 아무래도 이 책의 육중한 무게를 떠받치는 핵심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토론해 보고자 한다. 과연 개발동원체제라는 말이 이 책에서 시도한대로 새로운 사회과학적 분석 개념으로서 구성, 정립될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라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다.
 
1). 한국의 박정희 체제, 동아시아와 제 3세계 국가들의 발전체제, 독일 비스마르크 체제를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의 후발 발전체제, 소련의 스탈린 체제, 북한 초기 사회주의 건설체제, 개혁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이 모두를 저자는 한 바구니에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의 개념 바구니에 너무 많은 것, 이질적인 것들을 담아서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개발을 위한 국가 주도의 사회 조직화라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이들을 같은 개념으로 묶을 수 있겠는가. 같이 묶을 수도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같이 묶은 개발동원 체제 개념이 얼마나 유의미한 함축을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2). 개발동원체제 개념의 중요한 난점은 하나의 사회구성에서 공(公)과 사(私), 국가와 사회, 국가권력과 사회 지배세력, 계획과 시장, 공유와 사유의 쌍에서 각각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 양자의 상호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것이 그 사회의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가지며 사회 발전 방식과 경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하는 문제가 너무 간단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발동원체제 개념에서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은 개발보다는 동원이다. 개발은 다분히 중심 과제, 중심 가치로 전제되어 있다. 동원의 측면에 더 조명을 줌으로써 새로운 것도 얻었지만 잃은 것은 없는가. 동원이라는 말은 그 자체 매우 국가중심적인 함축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동원주체는 국가이고, 사회는 동원대상이다. 그 때문에 저자는 국가중심론을 비판하고 국가의 계급적 사회적 조건을 강조하고 있지만, 오히려 의외로 개발주의 체제 개념에서 개발동원체제 개념으로 나아감으로써 국가 중심주의를 훨씬 더 강화시킨 의미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닌가.
 
사실 연구사상 개발국가론, 개발주의론에서도 동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미 개발주의체제가 민족주의적, 반공주의적 동원체제 성격을 중요한 특성으로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결코 동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동원과 같이 가는 협력이 중요하다. 개발주의론은 동원과 협력, 사기업에 대한 규율을 동반한 지원, 그리하여 국가와 사기업, 국가와 시장간 공사 협력의 시너지를 낳는 체제적 특성에 주목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개발동원 체제론에서는 국가중심주의가 한층 더 강화됨으로써 사회의 지배세력의 존재, 그리고 이들과 국가와의 특수한 관계 방식의 문제가 부차화되는 의미 변화 효과를 낳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저자는 국가의 계급적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 그리고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와 동학에서 자본가 계급, 지배 블록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론틀의 수준에서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주의체제론에 비해 국가 주도에 의한 사회동원을 체제의 핵심 골격으로 잡았다고 하겠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의외로 국가중심체제에 내장된 국가물신숭배의 위험, 그 정치적 반동성의 위험, 국가민족주의의 이중성의 위험에 대한 지적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동원된 근대화』에는 정치적 ‘반동성’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반동성’이라는 말보다 ‘작위성’이라는 개념적으로 애매한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3). 개발동원체제에서 공과 사의 위상 및 복합적 상호 관계에 시선을 두게 되면, 대중들이 단지 ’동원‘만 되는 것이 아니라 ’호응’하는 문제, 왜 어떤 방식으로 호응하는지 하는 문제가 퍽 중요해진다. 이 주제는 물론 대중독재 논쟁의 주제이기도 했고 저자 또한 그람시적인 ‘강압과 동의’의 문제틀 위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는 예를 들어 한국 박정희 개발주의의 경우, 국가주도 냉전반공주의, 국가민족주의의 대중 동원력뿐만 아니라 그 동원이 먹힐 수 있는 가족주의 기반의 문제가 별로 거론되고 있지 않다.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고 6.25전쟁 이후 새롭게 재구성된 가족주의와 생존을 위한 강렬한 소유집착주의, 그에 따른 국가동원에 대한 대중들의 호응 문제는 박정희 시대뿐만 아니라 민주화와 세계화시대 한국에서 공적 신뢰의 약함과 그에 따른 복지연대형성의 곤란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 개발주의시대 이후, 87년 민주화 이후 왜 시장주의 시대가 도래했고 진보가 ‘불신의 덫’에 빠지게 됐는가, 이는 다방면으로 심층 연구가 필요한 큰 주제인데, 나는 소유집착적, ‘사민’(私民)적, 경쟁적 가족주의에 오늘의 시장주의와 이어지는 중요한 하나의 연결 고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높은 교육열과 사교육 과열경쟁도 단지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며, 역사적 가족주의와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비대한 사교육은 이전부터 부동산 투자와 함께 복지 안전망이 빈약한 상황 속에서 대중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존, 안위 및 지위 상승을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미래 투자행위에 속한다.
 
4). 앞의 논의를 전제로 이제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의 이론적 계보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국가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저자는 개발동원체제론이 개발국가론, 그리고 평자가 제안한 바 있는 개발자본주의론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명은 너무 소략하고 간단히 처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정작 중요한 것은 내용적으로 그 연관성이 흐릿해 보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개발국가론의 주창자 존슨은 스탈린적 국가독점사회주의와 일본 및 동아시아 개발 자본주의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존슨의 개발국가론에 따르면, 전자는 ‘계획 이데올로기적’ 모델로서 실패한 반면, 후자는 ‘계획 합리적’ 모델, 국가와 시장간, 국가와 사기업간 ‘공사협력’모델로서 성공한 모델이다.
 
개발국가론, 개발주의론에서는 어떻게 그 체제가 공사협력의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기제, 제도형태를 갖고 있는지 하는 것이 핵심 관심사다. 반면에 조희연의 개발동원체제론에서는 존슨이 범주적으로 확연히 구분한 스탈린 모델과 동아시아 모델이 같은 개발동원체제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다. 또 그 체제의 작동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관계없이 모두 개발동원체제로 정의된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개념의 실질적 내용 부분에서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국가론 및 개발자본주의론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의 이론적 계보가 좀 묘연해 진다.
 
에번스의 ‘연계된 자율성’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도 중요한 급소를 찌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자율성‘과 함께 ’연계성‘이 개발국가론의 핵심이라는 대목은 덜 주목한 것 같다. 생각하기에 따라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은 내용적으로, 개발국가론의 계승, 극복론이라기 보다는 전혀 뜻밖에 헌팅턴류의 강한 국가론의 계승, 극복론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흥미로운 논란 지점이 될지 모른다.
 
5). 또 다른 이론적 계보 문제로서 개발동원체제론이 권위주의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동원된 근대화』가 박정희 시대의 정치사회학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중요하다. 저자는 박정희 체제를 개발동원체제의 특수한 사례로서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권위주의 체제라는 것이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적 성격과 동학을 파악함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빠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찍이 권위주의론의 제창자 린츠가 말한 대로, 이 체제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이분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회색지대를 지칭하는데, 제한된, 정치적 다원주의의 존재는 그 필수적 특징이다. 정치적 다원주의의 존재여부, 권위주의의 제도화수준이 낮은지 높은지, 어떤 방식의 제도화인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의 박정희 체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치적 다원주의 제도 그리하여 공적 경합 공간의 존재가 지배연합 대 저항연합의 각각의 능력과 어우러지면서 그 체제에 고유한 내적 모순과 불안정을 투입하면서 역동적 동학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와 대만정치의 차이도 이 지점에서 비교가능하다.
 
한국의 70년대 유신체제는 저자가 말하는 ‘민중의 주체화’뿐만 아니라, 60년대의 제한된 다원주의 공간마저 박정권이 폐쇄하려고 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하고 자기 무덤을 판 측면이 있다. 이렇게 봐야 개발동원체제의 ‘헤게모니 균열’과 그 이후에 대해서도 민중의 주체화와 저항에 의한 붕괴라는 단순 도식을 넘어 다양하게 열린, 복합적 경로를 논의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평자는 그간의 헤게모니적 ‘대중독재’ 대 ‘헤게모니 균열’의 논쟁 구도 이상으로, ‘어떤 균열인가’를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저자가 주장하는 개발동원체제의 모순적 이중성론과 뛰어난, 생동하는 동학론도 다원적 권위주의 체제와 그 다양한 제도화 방식 및 수준에 기반을 둠으로써 이론적, 경험적 분석의 빈틈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개발동원체제론은 전통적인 정치적 힘관계론과 이데올로기론을 벗어나지 못할 우려마져 없지 않다.
 
6). 위와 같이 말함으로써 나는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에서 제도론의 빈곤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개발동원 체제론이 선행한 개발국가론, 개발자본주의론 그리고 권위주의론과 이론적 관계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하고, 그럼으로써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적 성격과 동학을 파악함에 있어 중요한 난점을 갖게 된 데는 <동원된 근대화>에서 사회세력간 타협의 소산이면서도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관계의 ‘제 3항’으로서 제도의 이론, 제도의 정치사회학이 좀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다름아닌 개발동원의 ‘체제’(regime)를 말하면서 그것에 고유한 정치사회적, 경제적 제도 형태들, 그 배치방식과 연관들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개발주의 정치경제학이 그렇듯이,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학 또한 제도론적 전환을 통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제도론이 아니라 갈등과 쟁투의 계기를 삽입한 진보적, 역사적 제도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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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탄생했나? (프레시안, 황병주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2010-01-16 오후 1:37:52)
[화제의 책]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
 
박정희 체제는 현재 진행형
종말을 고한 지 한 세대를 넘겼음에도 박정희 체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것은 사회 현상으로서의 '신드롬'이나 퇴행적 향수 또는 정치 공학적 술수의 차원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의미한다.
 
박정희 체제 18년을 전후한 시기는 한국 근현대사의 결정적 국면이었다. 근대 세계 체제의 시민권은 곧 국민·민족 국가였고 박정희 체제기는 '국가 형성(nation building)'의 핵심 과정을 포함했다. 그 핵심 중의 핵심이 산업화였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재)생산 시스템의 비가역적 전화야말로 박정희 체제를 (재)생산하는 영구기관이다.
 
이른바 '국민 경제'의 구성과 확장은 '국민'의 형식적 포섭을 넘어 실질적 포섭을 가능케 했고 모든 구성원을 '집단 살림'의 식구로 만들었다. 집단 살림의 주기적 경기 변동이 영원한 운명을 대신했고, 이것을 떠난 개체의 삶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요컨대 국민 또는 민족은 운명 공동체를 넘어 생활 공동체가 되었고 공동의 운명이라는 추상적 긴박보다 생활 상의 일상적 구속을 통해 동질적 집단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산업혁명은 사회혁명을 추동했고 한국 사회 전체가 급속한 변화에 휘말리게 되었다. 사회적 유동성은 극단적으로 상승하였고 대중정치의 본격화는 민주주의를 비롯한 정치적 감각의 활성화를 초래했다. 역설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독재의 반정립으로 구성 확산되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조화로운 발전'이라는 김대중 정권의 슬로건은 박정희 체제와 단속적으로 연결될 것이며, 뉴타운은 새마을의 번역이다. 박정희 체제는 그것을 스스로 '조국 근대화'라 불렀다. 그러면 박정희 체제의 조국 근대화는 어떻게 가능했고 또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을 내세운 박정희 체제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박정희 체제='개발 동원 체제'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 발간된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후마니타스 펴냄)는 주목할 만한 책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오랫동안 한국의 진보 학계의 중심 역할을 해온 저자의 최근 고민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 2부 6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박정희 시대의 체제적 성격'을 규정한 다음 2부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대중적 동의 기반'을 집중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이미 2007년에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역사비평사 펴냄)를 통해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도했기에, 이번 책은 이론적, 사회과학적 분석에 집중하고 있다.
 
이 책을 관류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즉 저자는 '진보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보수적 시각에서 강조하는 경제 성장, 대중적 동의를 '진보적 시각의 확장' 속에서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복합적인' 진보적 분석틀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진보적 분석이 근본적으로 '실천의 과학'이기에 현실 '비평'이 아니라 현실 '변화'를 지향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실천의 논리를 위한 현실의 단순화가 초래한 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박정희 체제를 '특수한' 대상이 아니라 '일반적' 특성을 갖는 대상으로 파악하고자 함을 밝히고 마지막으로 '모순적 복합성'과 '헤게모니의 균열' 개념을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분석된 박정희 체제는 한 마디로 '개발 동원 체제'로 정의된다. 그 의미는 '근대화'라는 국민적·민족적 목표를 향해 국가가 위로부터 사회를 강력하게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이다. 이로부터 '동원된 근대화'라는 이 책의 제목이 도출된다.
 
국가-권력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해 중요하게 동원된 것이 곧 '결손 국가'와 '결손 국민'이었다. 서구적 근대 국가 및 국민을 기준으로 하여 스스로를 후진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정상적 국가와 국민 형성이 전사회적 목표로 설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생체적, 도덕적, 국가주의적 훈육 국가로서 결손 국민을 정상 국민으로 전환하기 위한 국민화 프로젝트의 담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발 동원 체제는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동원의 작위성으로 말미암아 위기적 성격을 내재하게 된다. 저자는 박정희 개발 동원 체제의 정치사회적 이중성, 즉 효율성과 위기성의 공존을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표임을 강조했다. 위기성의 핵심은 '민중의 주체화'인데, 민중은 근대적인 권리 주체로서 '시민'적 존재이자, 계급적 저항 주체로 설명된다. 박정희 체제는 경제적 근대화를 지배적인 가치로 하고 개인의 자유와 시민사회의 자율성, 민주주의적 지배와 같은 근대의 또 다른 가치를 무시하는 '예외 국가'적 형태였기에 이를 대표한 것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이었다. 이러한 분석의 결과 저자는 폭압을 뚫고 성장한 한국의 민중과 민주주의는 백인만의 민주주의인 미국, "파시즘의 유산이 질곡하고 있는 일본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아시아의 '모범적인' 민주주의의 전형"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으로 의미 부여했다.
 
박정희 체제의 동의 기반이 협소했던 점은 민족주의와 반공주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박정희 체제는 민족주의를 지배 담론으로 적극 활용했지만, 그것은 '두 개의 국민'을 지향하는 모순적인 기획, 다시 말해 '민족과 대결하는 민족주의'에 불과했다고 한다.
 
결론에서는 '복합적 진보' 분석틀의 정립을 강조하고 한국의 근현대 역사상 재구성 문제를 논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한국 사회 발전의 '진보적 긍정'으로 요약된다. 즉 박정희 독재는 일본이나 독일과 달리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투쟁에 의해 극복되었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발전시켜 간 적극적 진통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안의 보편성'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면서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로부터 도덕적으로 존경받고 모범이 될 수 있는 공동체와 개인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와 연결되는 것으로 상정된다. 
 
박정희 체제 과연 '예외국가'였나?
박정희 체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으로까지 운위되는 만큼 그 실천적, 학문적 중요성은 누차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정치적 주장을 넘어선 진지한 학문적 접근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이 책의 출간은 매우 반가운 일이며 박정희 체제에 대한 학문적 인식 수준을 제고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이 책은 기존의 악무한적 '이항 대립' 구도의 지양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진보와 보수' 간의 극단적 낙차는 박정희 체제에 대한 냉정한 접근을 방해했고, 치밀한 분석과 논증 대신 정치적 주장만이 난무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진보적 시각을 완강하게 견지하면서도 보수적 견해까지 포괄하는 지적 성찰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 실천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다. 이 책은 박정희 체제를 주된 대상으로 삼되, 그에 국한되지 않으면서 한국 근현대사 전반에 대한 인식론적 성찰을 담고 있다. 즉 박정희 체제를 보다 넓은 역사적 맥락에 배치시킴으로써 인식론적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정치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참신한 이론적 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순적 복합성, 헤게모니의 균열, 우리 안의 보편성 등의 개념은 저자의 치열한 학문적 고민의 산물로 박정희 체제 분석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분석적 개념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시도한 분석의 참신성은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우리 안의 보편성'으로 표현된 문제의식이다. 식민주의적 인식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고민은 매우 소중한 것이나 그것이 또 다른 보편성의 구축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도 연결되는데, 미국의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모범이 아닌 것처럼 한국의 민주주의가 여타 사회의 모범으로 제시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세계는 보편이라는 추상 대신 특이성(singularity)으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보편성을 담지한 모범 대신, 특이성 간의 연대가 더 민주주의적이지 않을까?
 
둘째는 '모순적 복합성'이나 '헤게모니의 균열' 등으로 시도된 새로운 접근이 좀 더 명료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오직 하나의 요소로 구성되거나 유지되는 지배 질서는 없을 것이기에 복합성은 지극히 올바른 지적이며, 완벽한 무모순의 지배 질서도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모순의 강조도 이의가 있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순적 복합성을 함께 분석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박정희 체제가 일정한 동의 기반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동의적 강압'이었다고 하면 기존의 분석 패러다임과의 차별성이 선명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셋째는 근대화 담론의 국가적 사회적 확산과 관련된 문제이다. 주지하듯이 근대화 담론은 195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정립된 것이지만, 개항 이래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문명개화, 실력양성, 계몽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해왔다. 박정희 체제 성립 이전에 이미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근대화 담론을 강조했고, 박정희 체제는 그것을 국가적 수준에서 적용한 것일 뿐이었다.
 
'교수 정치'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박정희 체제는 지식인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동원했는데, '지식-권력'의 형성이라 할 만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었다. 지식-권력의 담론적 실천 결과로서의 근대화론은 사회진화론적 도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으며, 서구-근대에 대한 강렬한 콤플렉스와 오리엔탈리즘-옥시덴탈리즘에 사로잡힌 결과였다. 요컨대 근대화 담론의 사회적 확장은 식민화의 결과였다. 박정희 체제가 선동한 '5000년 가난' 운운의 '빈곤의 정치'는 그 정치적 수사였다. 저자는 근대화에 대한 '사회적 준(準)합의'가 존재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합의라기보다는 지식-권력의 담론적 실천 효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한다.
 
넷째는 '전통화된 지배'의 부재와 '평등주의적 전통'의 문제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은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지배와의 철저한 단절'이 이루어져 '전통화된 지배'가 부재했고, '민족적·인종적 동질성에 기인하는 강력한 평등주의적 전통'으로 인해서 박정희 체제에 대한 동의 기반이 협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주장이다. 성리학적 질서와 가치, 관습은 매우 오랫동안, 심지어 현재까지도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승만의 왕족의식은 유명한 것이었고 '부르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한국전쟁 당시 농촌 지역의 갈등은 신분제적 유제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았고 1960년대까지도 농촌 지역의 머슴은 인격적 예속상태에 있었다. 한국에서 철저한 사회혁명의 경험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왕조에서 공화제라는 국가 형식의 변화만으로 전통적 지배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을까 한다.
 
인종적·민족적 동질성에 입각한 평등주의적 전통 또한 역사적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전근대 시기까지 인종적·민족적 동질성은 운위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신분제적 차별 속에서 강렬한 평등주의적 열망이 구성되었다고 보인다. 예컨대, 만적의 난에 등장하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말은 민족적 동질성에 입각한 평등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전근대 조선사회는 남선과 북선의 격차가 매우 컸고 동질적 통합의 정도는 매우 낮았다. 일제시기 안창호가 주장했다고 하는 '일본은 우리를 20여 년간 지배하고 있지만 기호파는 우리를 500년 간 지배했다'는 말은 민족적 동질성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조선왕조 500년 간 서북 출신의 유명인은 홍경래가 유일할 것이다. 요컨대 민족적·인종적 동질화는 근대 이후 문제화된 의제이며 그것도 추상적 본질이라는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다섯째는 '예외국가' 또는 예외적 근대 권력으로서의 파시즘 인식과 관련된 문제이다. 저자는 박정희 체제와 파시즘을 개인 자유, 시민사회의 자율성, 민주주의 등을 부정하고 근대성의 특정 측면만을 극단화하는 예외국가, 예외적 권력으로 파악한다. 월러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술의 근대'와 '해방의 근대'를 구분하고 파시즘과 박정희 체제는 기술의 근대만을 추구했기에 해방의 근대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근대와 해방의 근대가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예외국가라는 규정이 정상국가에 대한 과잉정당화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인다. 전시 총동원체제기 일본의 여성운동은 국가의 해방적 기능에 주목해 전쟁에 적극 협력했으며, 파시즘과 거리가 먼 미국 또한 특정 정세 속에서 예외국가적 특성이 노골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파시즘을 근대의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하고 외과 수술하듯이 제거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라고 보인다. 오히려 파시즘은 근대의 고유한 일부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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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난 : 새로운 빈곤, 오래된 과제>

한국사회의 빈곤에 관한 종합 보고서라... 그러고 보면 외국 사례를 소개한 책은 있었지만, 이런 것은 없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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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가난에 관한 종합 보고서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2010-01-05 07:29)
〈한국의 가난〉 김수현·이현주·손병돈 지음/한울·2만3000원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빈곤에 관한 종합 보고서다. 가난이란 무엇인지, 누가 가난한지,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왜 가난한지, 가난을 이겨낼 방법은 무엇인지 두루 살펴보는 저자들은 "빈곤층이 15%가 넘는 시대에도 가난한 이들이 보호받을 권리는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된다"며 "우리의 가난을 정확히 바라보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들의 근본적인 시각은 가난이 개인적인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원인이 누적된 결과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일을 해도 가난한 근로빈곤층(Working Poor)까지 등장했다. 일을 할 수 없는 노인들이 가난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서구 복지국가에서는 노인이 다른 연령층에 비해 특히 더 가난하지는 않다. 노후소득 보장제도가 미흡해 자녀에게 노인복지를 내맡기는 우리나라에서는 일하지 못하는 노인들과 젊었을 때부터 가난했던 노인들뿐 아니라 자식이 가난한 노인들까지 가난하다. 가난한 노인들은 돈이 없어 주거 환경이 열악하며 건강 상태도 더 좋지 않고, 그 때문에 더 가난해지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21세기 들어 크게 늘어난 빈곤층은 일을 하거나 일할 수 있는데도 가난한 이들이다. 저자들은 근로빈곤층이 등장한 원인을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된 데서 찾는다. 기업이 기존 업무를 외부에 하청 주거나 해외 공장으로 이전하면서 '좋은 일자리'는 줄고 비정규직이 양산됐다는 것. 비정규직은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지위 때문에 일을 하면서도 가난하다.
 
저자들은 '가난은 모인다'는 특성에도 집중한다. 소득이 낮을수록 주거비 부담이 큰데, 설상가상으로 대도시 재개발이 계속되면서 빈곤층이 살 수 있는 저렴한 주택이 사라지고 있다. 재개발 사업 인근의 전ㆍ월세 주택이 품귀로 값이 폭등하고, 빈곤층은 더 열악한 주거지로 내몰린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반이 취약한 동네에 살 수밖에 없는데, 가난한 곳의 자치단체 역시 가난하므로 빈곤층을 구할 복지 혜택도 적다.
 
저자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이다. 이들은 "빈곤 '지역'에 대한 정책적 개입을 시도한 사례가 거의 없다"고 지적하면서 빈곤층과 비빈곤층이 함께 사는 혼합단지를 건설하는 등 지역 발전 격차를 줄이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또, 근로빈곤층 해결을 위해서는 기존 일자리를 여러 개로 나누는 방안, 공공부문에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방안 등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저자들은 "빈곤 대책은 사회, 경제, 문화, 복지 전 분야에 걸쳐 세워져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현행 정책이 3대 사회안전망 가운데 '마지막 안전망'인 공공부조 중심이므로 사회보험과 사회서비스 등 나머지 안전망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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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국격? 똑똑히 보라, 이 가난을 (부산일보, 임광명 기자, 17면 | 입력시간: 2010-01-09 [16:23:00)
 
책은 묻는다. 한국은 가난에서 벗어났는가? '아니올시다'라고 책은 답한다. 현 정부가 "원조 받던 나라로서는 최초"라며 OECD 개발원조위원회 가입을 자랑하는 판에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책이 보여주는 수치는 그 답을 수긍케 한다. 2007년 기준 한국의 가처분소득 기준 빈곤율(중위소득의 50%가 안되는 가구소속 인구의 비율)은 16.5%로 추산됐다. 2007년 한국 인구가 4천850만명 정도였으니, 약 800만명 정도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더욱이 2008년 세계적 경제위기 이후 빈곤율은 현저히 늘어나는 추세다.
 
노인 문제에 이르면 빈곤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2007년 기준 가처분소득 기준 노인 빈곤율은 35.6%로 나타났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부의 사회복지 지원금이나 세금감면 등의 혜택이 고려된 수치다. 이들을 뺀 시장소득 기준으로는 45.5%가 빈곤 노인으로 분류된다. 그런 노인들은 "밤에 불도 한 번 안 켜"고 "지독하게, 그냥 되는 대로" 살고 있다. 거기다 노숙인, 결혼이주 여성, 외국인 노동자, 탈북자 등으로까지 시선을 돌리면 한국 사회의 가난 문제는 "선진국", "OECD", "국격", "비전" 따위 호사스런 말잔치로 덮어질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가난을 정확히 바라보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한데, 책은 "사회적 원인이 누적된 결과"라고 설명한다.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 최근 급속히 양산되고 있는 점이 그 증거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된 것이 그 원인. 정규직은 줄고 비정규직이 양산된 것이다. 비정규직은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지위 때문에 일을 하면서도 가난하다.
 
가난 중 제일 오래고 깊은 고통이 주거 가난이다. 소득이 낮을수록 주거비 부담이 큰데, 설상가상으로 대도시 재개발이 계속되면서 빈곤층이 살 수 있는 저렴한 주택이 사라지고 있다. 재개발 사업을 한다지만 빈곤층은 오히려 더 열악한 주거지로 내몰린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한군데로 몰리게 되는데, 가난한 곳의 자치단체 역시 가난하므로 빈곤층을 구할 복지 혜택도 적다. 결국은 사회적 원인이 가난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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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여는 책]‘한국의 가난’ (내일, 차미례 언론인·번역가, 2010-01-15 오후 12:44:23)
빈곤의 책임 누구에게 물을까
‘비상업적 가난연구서’ … 한국인 관점에서 우리 자신 문제 다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면서 국민의 15%이상이 가난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철거민 노숙자 문제 연구가인 김수현(세종대 도시부동산대학원 ) , 차상위 빈곤층 연구와 빈곤에 관한 기존 논의를 정리했던 이현주(한국보건사회연구원 ), 대학에서 빈곤문제를 가르치며 ‘빈곤과 사회복지 정책’을 펴냈던 손병돈(평택’대 사회복지학과 ) 세명의 저자가 의기투합해서 가난에 관한 책을 냈다.
 
다른 개발도상국이나 선진국의 빈곤 문제를 다룬 책은 더러 출간된 적 있지만 이 책은 한국인의 관점에서 한국의 빈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전문가들의 일부 토론을 제외하고는 가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교재도, 대중적인 빈곤관련 독서물도 없는 판에 이 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고민거리를 전부 한 책에 담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엮었다.
 
한때 ‘잘살아보세’를 구호로 개발연대의 빈곤탈피를 구가하는 듯 하던 한국도 IMF이후 다시 급격한 빈곤층의 증가를 보게 된다. 어느 정도 경제회복이 된 후 2008년 미국발 경기침체를 계기로 빈곤층이 다시 늘어 이제는 15%, 6~7명중 한명 꼴로 빈곤층이다. 굶는 사람은 줄었지만 일을 열심히 해도 가난한 근로빈곤층은 점점 늘었다. 일을 할 수 있는데도 못하거나 안하고 있는 사람도 늘어난다. 외환위기를 겪는 동안 떠오른 ‘양극화’란 용어 뿐 아니라 이제는 ‘ 일하는 빈곤층 (워킹 푸어)’ 또는 ‘신 빈곤층’의 문제가 심각하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빈곤이라고 하는지,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 왜 가난해지며 어떻게 하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연구해야한다.
 
그래서 저자들은 이 책을 빈곤이란 무엇인가 , 가난의 모습, 왜 가난해 지는가, 빈곤 넘어서기의 4부로 나누어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가난의 모습’ 부분에서는 전체 노인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가난한 노인들, 누적된 가난과 소외의 상징인 노숙인들, 결혼이주 여성과 탈북자 등 늘어나는 신종 빈곤층 문제 등을 조명한다. 단순한 학문적 고찰 만이 아니라 저자들의 시각은 우리 대부분이 늘 보면서도 간과하고 있는 분명한 현상을 흥미롭게 포착하고 있어서 매우 창의적이다. 이를테면 ‘가난은 모인다’라는 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동네에 산다, 돌볼 사람이 떠난 농촌의 가난과 노인들만의 고립, 가난한 동네 이해하기, 가정문제를 넘어서는 ‘동네’로의 접근등 신선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가난을 개인과 가구단위 수치로만 보지 않고 지역단위로, 이를테면 ‘가난의 지리학’을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특히 수입이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절대빈곤층 외에도 중위소득의 40~60%이하로 정의되는 상대빈곤층의 개략적인 모습까지 정리한 점은 주목할만 하다. 거리의 노숙인만해도 가족도 집도 없이 떠도는 빈곤층의 극단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쪽방, 고시원, 심야 사우나 등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같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구층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그리 간단히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저자들은 보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수성가 신화는 문제를 올바로 보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가난은 당사자 책임으로 전가되며 그들이 보호받을 권리는 창피한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붕괴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은 더 늘어나는 한국사회 최대의 우려는 가난의 세습이다.  부모가 가난하면 자식도 가난속에서 희망 없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한 선진국의 제도는 재산정도와 관계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사회적 차별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만, 한국에선 어려서부터 가난에 따른 차별과 불이익을 피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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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깔만 고운 한국…‘빈곤의 생얼’ (한겨레, 전진식 기자, 2010-01-15 오후 09:21:51)
 
한국에서 빈곤층은 ‘공식 통계’로 15%에 이른다. 가난한 탓에 질병 치료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는 가구는 12%를 넘는다. 65살 이상 노인의 빈곤율은 50%에 가깝다. 빈곤 극복은 여전히 가장 무거운 과제다. 국제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처음으로 국제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받을 권리가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되는 사회, 여전히 자수성가의 신화가 가득한 사회 아니냐고 지은이들은 묻는다. 40년 전 청계천 노동자 전태일이 ‘나는 두 발로 일어서기가 너무 힘겹다’고 말했던 현실에서 한국은 얼마만큼 달아났는가.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사람의 정신을 잠식하는, 전쟁 같은 가난을 격퇴하는 데 한국 사회는 그동안 어떤 노력을 했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의 가난’을 정확히 바라보자는 지은이들의 주장엔 이런 절박함이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 빈곤문제 가운데,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제구조를 지은이들은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빈곤’이다. ‘고용 없는 성장’은 ‘희망 없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들이 보기에 한국은 ‘빈곤 위험 사회’로 치닫고 있다. 첫째, 빈곤의 위험 범위가 매우 넓어졌다. 경계선에 있는 이들을 더하면 빈곤율이 30%에 이른다는 연구도 있다. 둘째, 가난을 느끼는 영역이 넓어졌다. ‘밥은 먹고 산다’는 식의 생존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로 확장된 것이다. 주거·의료·교육 등에서 개선의 여지가 ‘거의’ 없다면 그것은 빈곤이다. 셋째, 가난의 결과가 물질적 결핍을 넘어 사회적 고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구임대아파트 지역에 사는 아이들을 다른 지역의 아이들이 ‘영구’라고 놀린다. 더 따질 것도 없이 ‘안타까운 상징’이다.
 
넷째,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마저 갈수록 엷어지고 있다. 소득이 기회를 낳는 세상에서 박봉은 박탈을 뜻한다. ‘스펙 쌓기’와 가난의 대물림이 하나의 함수관계로 굳어진 지 오래다. 노부모 봉양도 못하고 자녀 교육도 못한다. 결혼조차 ‘무기한 연장’하는 이들도 늘어난다. 오로지 생존에만 매달리고도 통장은 초라하다. 가족 가운데 큰 병을 앓는 이마저 있으면, 그건 나락으로 추락하는 걸 뜻한다. 불안만 있고 희망이 없는 노동은 이처럼 참혹하다. 사회복지의 현실은 어떤가. ‘가난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원하는’ 대증요법식 정책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느냐는 유행어에는 무시 못할 진실이 있는 셈이다.
 
그러면 해법은 무엇인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공공부조(국민기초생활보장제), 사회보험(국민연금·의료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 사회서비스의 강화다. ‘저인망식 사회안전망’이 절실하다. 일할 기회가 더 많이 마련되고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구조는 필수다. 하나도 새롭지 않지만 유일한 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면서도 복지국가 운운하는 정치인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과연 우리에게 희망은 있을까?” 비록 ‘희망 고문’이 될지언정 포기해선 안 된다고 지은이들은 강조한다. “우리의 꿈을 감히 빈곤 극복이라고 정하자.” 한국 사회 빈곤의 현실을 ‘빈곤이란 무엇인가, 가난의 모습, 왜 가난해지는가, 빈곤 넘어서기’로 나눠 정리했다. ‘슬픈 통계’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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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좋은 대한민국…부자에게만? (프레시안, 전홍기혜 기자, 2010-01-17 오후 5:27:19)
[화제의 책] <한국의 가난 : 새로운 빈곤, 오래된 과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가난의 수천년 인류 역사와 함께 한 가장 '오래된 사회 문제' 중 하나다. 2010년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동시에 '가난'은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어떤 상태가 가난한 건지, 왜 가난해지는지,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고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등은 끊임없이 변한다.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그 사회의 태도에 따라 가난의 규모에서부터 가난이 내포하는 비참함까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최근 발간된 <한국의 가난>(김수현.이현주.손병돈 지음, 한울 아카데미 펴냄)은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한국의 가난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는 책이다. 그동안 가난을 주제로 한 외국서적은 많이 출간돼 몇몇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지만 정작 우리의 가난을 주제로 한 사회과학서적은 많지 않았다.
 
빠른 경제성장으로 세계 13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경제대국이 됐다고 하지만 가난은 여전히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적 문제다. 1997년 외환위기를 포함해 두 번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됐다. 2007년 현재 한국의 빈곤율은 가처분소득 중위 50%(평균 가구소득의 절반)를 기준으로 16.5%다. 100명 중 16명이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빈곤율은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수준이다. 복지국가로 빈곤율이 가장 낮은 그룹에 속하는 스웨덴(2005년 기준)은 5.6%, 핀란드(2004년)는 6.5%로 우리의 3분의 1 수준이다. 프랑스( 7.3%)와 독일(8.4%)은 10% 미만의 빈곤율을 보이고 있고, 영국은 11.6%, 이탈리아도 12.8% 수준이다. 반면 한국경제의 일종의 롤 모델인 미국은 17.3%로 우리보다도 빈곤율이 높았다. 한국의 빈곤율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줄어들다가 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다시 상승했다. 경제성장이 곧 빈곤율과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미국의 빈곤율이 한국보다 높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한국은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의 빈곤율 차이가 1.7%포인트에 불과하다. 정부 정책을 통해 시장소득의 불균형이 거의 교정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이 수치가 7.2%포인트로 20%포인트 안팎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낮다. 정부 정책의 개입 정도가 그만큼 크지 않다는 뜻이다. 빈곤율이 27.3%나 되는 멕시코의 경우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의 빈곤율 차이는 -6.2%포인트였다. 정부 정책을 통해 오히려 시장 소득의 격차가 더 벌어진 셈이다. 정부 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빈곤층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은 노인, 장애인 등 '일을 할 수 없는 이들'이다. 여성가구주 등 일을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저임금인 이들은 가난에 더 쉽게 노출돼 있다. 2007년 노인의 빈곤율은 47.0%였다. 절반 가까운 노인들이 가난을 경험하고 있다. 장애인의 빈곤율은 34.6%, 여성가구주의 빈곤율은 21.8%였다.
 
외환위기 이후 급증하고 있는 문제는 '일하는 빈곤층'이다. '워킹 푸어(근로빈곤층)'이라는 용어는 한국에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일을 할 수 있어도 기회가 없어서('88만 원 세대'로 통칭되는 20대 청년 실업자), 일자리가 불안정해서(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이 낮아서(영세기업 노동자) 등 일을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런 '워킹 푸어'는 대표적인 신빈곤층이다. 이들 외에도 노숙인, 이주노동자, 결혼 이주 여성, 탈북자 등 가난한 이들의 범주는 더 다양해졌다. 이처럼 빈곤층의 구성이 더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은 빈곤 문제의 양상이 더 복잡해졌다는 얘기다. 특히 이주자의 문제는 세계화가 가난의 문제를 얼마나 복잡하게 만들고, 그 해결에도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 나라 안에서 높은 수준의 임금을 줄 수 있는 일자리를 마련하고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고, 낮은 임금으로 다른 나라의 일자리와 경쟁하도록 강요된다.
 
또 과거에 비해 '가난의 대물림'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가난한 어른이 되기 쉽다는 얘기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질병의 위험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노출돼 있고, '배제'라는 사회적 낙인찍기에 시달리며,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교육 시스템에서 패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설사 소위 명문대학에 진학한다 하더라도 1000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감당하기 어렵고, 학자금 대출로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괜찮은 일자리를 갖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만에 하나 취업을 하더라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학자금은 갚다보면 혼기를 놓치기 일쑤고, 어렵사리 결혼을 하더라도 수억 원대에 달하는 집 장만은 은퇴할 연령에나 꿈꿔볼 수 있는 일이 됐다. 이런 모든 관문을 개인의 힘으로 뛰어넘어 대물림되는 가난의 고리를 끊으라는 것은 억지에 가까운 얘기처럼 들린다.
 
6-7명 중 한명이 가난의 언저리에서 살고 있는 한국에서 가난은 여전히 예외적이고 부끄러운 일이며 개인의 게으름 내지는 무능력의 문제인가? 또 애써 무시하거나 외면한다고 사라질 문제인가? 이처럼 갈수록 심각해지는 가난의 문제에서 당신의 삶은 자유로운가?
 
현재의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미 세대의 문제로도 자리 잡은 가난은 그 영토를 더욱 확장시켜나갈 가능성이 크다. 2050년 한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골드만삭스의 전망이 현실이 된다고 하더라도 2010년의 미국처럼 높은 빈곤율에 신음하는 '선진국'이 될 것이다. 가난이라는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앞에서 살펴봤듯이 가난의 규모와 의미는 그 나라의 정책에 따라 얼마든지 재조정이 가능하다. 많은 부모가 자신의 노후의 삶은 포기하는 엄청난 '경제적 부담'과 '가정의 해체' 위험성까지 감수하면서 자녀를 '교육 이민'을 보내거나, 서너살부터 아이들을 영어유치원에 내몰아 입시 경쟁 체제에 편입시키는 상당수 중산층의 삶은 과연 우리 사회의 가난의 문제와 무관할까? 지금이라도 <한국의 가난>에 대해 주목해야할 이유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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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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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인간적인 얼굴의 경제학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2007-12-13 07:06) 
  
"나는 인간에게 뼈대가 없다고 가정한 체조학의 전제조건에 관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학의 전제조건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정통 경제학의 기본 전제를 정면으로 거부한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김석희 옮김.느린걸음 펴냄)는 너무나 인간적인 얼굴을 가진 경제론을 담고있다. 마지막까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인력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노동자에게 국가는 노동에 필요한 교육을 충분히 제공하고 숙련된 노동자는 차별없는 대우를 받는 것이 러스킨이 꿈 꾼 이상 사회였다.
 
그는 강제로 어렵고 힘들고 비천한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일이 싫어서 일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노동자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감시나 높은 보수가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최대한의 애정'을 발휘할 때라고 강조했다.
 
일반적인 경제학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도덕'이나 `정직', `애정', `신뢰', `영혼'과 같은 단어들이 그의 사상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굶주린 어머니와 아들이 한 조각의 빵을 놓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는 않는 것처럼 다른 인간 관계도 무조건 적개심을 품고 경쟁하는 것으로 가정할 수는 없다는 논리를 깔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 7년 먼저 세상에 나온 '나중에…'는 애덤 스미스와 맬서스, 리카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지는 정통파 경제학과 배척점에 섰다는 점에서는 자본론과 동일하다. 그러나 러스킨은 사회주의 경제학에 대해서도 `파괴와 죽음의 경제학'이라고 일갈했다.
 
'나중에…'는 그가 잡지에 연재한 논문 4편을 묶어 펴낸 것으로 연재 당시 세간의 온갖 비난 때문에 서둘러 마무리됐으며 정작 그가 `나중에 논할 작정'이라고 한 중요한 사항들은 끝내 연재되지 못했다. 러스킨은 버나드 쇼가 마르크스보다 더 혁명적이라고 꼽았던 인물로, 간디와 영국 노동당 의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저서중 예술 비평서 등 몇 권만이 번역돼있다.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나 화려한 예술 비평가로서 명예로운 삶을 살다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혁명적이었던 그는 결국 심각한 조울증을 앓다가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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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 (서울, 이문영기자, 2007-12-14  22면)
애정·정직·생명… 인간을 보듬는 경제학
 
다양한 시대를 통해 수많은 인류의 마음을 지배해온 갖가지 망상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기묘한-어쩌면 가장 명예롭지 못한-망상은, 사회적 행동의 규범은 사회적 애정의 작용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결정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소위 경제학이라는 근대의 학문일 것이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느린걸음 펴냄)에 실린 존 러스킨의 첫 번째 논문 ‘명예의 근원’ 첫 문장이다. 러스킨에게 과거부터 지금까지 주류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경제학은 늘 ‘먼저 온 사람들’을 위한 경제학이었다.
 
러스킨은 ‘나중에 온 사람(포도밭 주인이 저녁에 나와 일한 사람에게도 아침에 나와 일한 사람과 동일한 보수를 줬다는 성경 비유에서 따온 말)’을 배제하지 않는 ‘인간적 경제학’을 주창한다. 그에게 먼저 온 사람에게 모든 기회가 집중되는 경제학은 ‘파멸의 경제학’일 뿐이었다. 러스킨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출간 7년 전인 1862년에 이미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펴내 사회·경제적 약자를 옹호했던 선구적 사상가였다. 명망 있는 시인과 예술평론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던 러스킨은 공황, 실업, 빈부격차, 고용불안 등 19세기 당대의 폭발하는 자본주의 이면에 주목했다.
 
‘인간은 언제나 이기적이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이른바 ‘정통 경제학’의 대전제는 그에게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국가적 파멸이 있을 따름”인 ‘가짜 경제학’이었다. 그가 창출한 ‘진짜 경제학’의 근간은 정통 경제학이 외면한 애정, 정직, 정의, 생명 등 인간적 가치들이다.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그리고 파멸로 이끄는 물건을 경멸하고 파괴하도록 국민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러스킨의 ‘비과학적’ 경제학이 과학적 논리로 포장된 오늘의 한국사회에 주는 울림은 적지 않다.“금전적 보수는 그가 오늘 우리를 위해서 쓰는 시간과 노동에 대해 나중에 그가 요구할 때는 언제든지 그를 위해서 그것과 동등한 시간과 노동을 제공하거나 알선해주겠다는 약속.”이란 러스킨 주장에 비춰볼 때 만연하는 비정규노동 체제는 부도덕할 뿐이다. 출간 당시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그의 책은 이후 간디, 버나드 쇼, 톨스토이 등의 삶을 통째로 바꿀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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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경제만 살린다면 도덕성은 없어도? (머니투데이, 머니위크 이재경 기자 | 2007/12/20 11:44)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김석희 옮김/느린걸음 펴냄/223쪽/1만2000원
 
경제만 살려준다면 지도자의 도덕성 따위는 문제삼지 않겠다는 우리 사회의 기묘한 기류에 일침을 놓는 책이 발간됐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느린걸음 펴냄)는 자본주의의 폐해와 정통파 경제학의 모순을 목도한 19세기 한 지식인의 고뇌와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경제사상서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지성인 존 러스킨은 자본주의의 폐해와 정통 경제학의 모순 앞에서 '악마의 경제학' 대신 '인간의 경제학'을 하라고 설파한다. 러스킨은 단호하게 "도덕 없이는 경제도 없다"고 선언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중에 온 사람'은 사회경제적 약자이 또다른 이름이다. 자본주의에서 사회경제적 약자의 소외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일지도 모르며 동시에 사회전체를 와해시킬 수도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러스킨은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먼저 온 사람과 동등한 보수를 지불해야 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인간이 이기심에만 경제시스템을 맡기면 결국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부가 감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경제학에도 인간의 영혼이 담겨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또 위대한 사회개혁 사상가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은 고전이다. 변호사 간디도 이 책을 읽고 마하트마 간디가 됐다. 존 러스킨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현재도 영국 사회사상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오랫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건축이나 예술과 관련해서 간헐적으로 소개된 것이 전부다. 이 책은 예술비평가가 아닌 사회사상가로 러스킨을 국내에 소개하는 최초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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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깊이읽기]‘사람’ 그 자체가 경제 목적 (경향, 손제민 기자, 2007-12-21-16:35:32)
 
성경 구절을 딴 이 책의 제목이 모든 것을 함축한다. 예수가 천국을 비유할 때 나오는 구절(마태복음 20장)이다. 포도밭 주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한 일꾼과 나중에 합류해 조금만 일한 일꾼에게 똑같이 품삯을 쳐주자 아침부터 일한 일꾼이 불평했다. 그러자 주인이 “나는 너를 부정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화폐단위)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약속한 너의 품삯을 받아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게 거슬리느냐?”라고 대답했다.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되는’ 그런 사회가 바로 천국이라는 비유다. ‘합리적 이기주의자’를 가정하는 주류·비주류를 막론한 애덤 스미스 이래의 근대 경제학적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들로는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다. 마르크스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 살며 산업화하는 영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지켜본 저자는 자본론보다 7년 앞서 이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을 논했던 마르크스의 사상과 달리 너무 ‘온건했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아니 온건했다기보다 근본적이었기 때문에, 성공한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을 포함한 당시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그래서 외면받았다. ‘브레이크 없이’ 전진을 거듭하는 중이었던 당시 영국인들은 ‘근대 화가론’를 쓴 바 있는 저명한 예술평론가인 저자의 입을 통해 예의 그 고상한 미술론 같은 얘길 듣고싶어 했다.
 
저자 스스로 이 책을 ‘부(富)의 정의’와 ‘정직의 회복과 유지’를 궁구한 글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의 경제사상의 핵심은 ‘사랑’과 ‘정직’, 곧 ‘사람’이다. 그렇다고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뻔한 말씀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그는 ‘부유함’이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 것인지 묻는다. 경제학은 결국 ‘모두 다 부자가 되기 위한’ 학문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는 상대적이다. 내 주머니 속 1만원의 힘은 내 이웃의 주머니 속에 1만원이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저자는 “보통의 상업적 경제학자가 말하는 부자 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내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해두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상업적 경제학이 타인의 노동에 대한 법률적 청구권이나 지배력을 개인의 수중에 축적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경제학은 단순히 유용하거나 쾌락을 줄 수 있는 사물을 가장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생산하고 보존하고 분배하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건초를 베어 들이는 농부, 단단한 목재에 대못을 단단히 박는 목수, 잘 이긴 회반죽에 양질의 벽돌을 쌓아올리는 건축공… 이들이야말로 궁극적 의미에서 진정한 정치적 경제학자이고, 자신이 속한 국가의 부와 행복에 끊임없이 이바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부’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실제로 욕심내는 것은 부 그 자체보다는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라고 본다. 그것은 “단순한 의미에서는 하인이나 상인이나 예술가의 노동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힘이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대중을 다양한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권위”일 뿐이다.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가르치는 학문”이다. 노동자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 최고의 이익을 내는 것은 결코 강한 압력이나 높은 보수를 받을 때가 아니라, ‘최대한의 애정’이 발휘될 때라고 한다.
 
우리는 근대 경제학과 함께 너무 많이 와버려 이런 얘기에 귀기울이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 ‘애정’ 등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합리적 결정을 교란시키는 우발적인 요인이라고 보는 근대 경제학은 옳은 것인가. 효율적이면 다 좋은 것인가. 우리는 이따금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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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 거부한 애정의 경제학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7-12-28 오후 08:50:47)
영국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의 혁명적 사상
부는 ‘제로섬’…‘정의와 애정’이 최선 낳아
“생명 향한 열망 담아야 진짜 경제학” 역설
 
 
산업혁명으로 최성기를 구가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비평가요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느린걸음)에서 애덤 스미스에서 토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진 자본주의 정통 경제학의 전제조건들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는 고용주와 노동자를 포함한 경제 주체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정의와 애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당사자가 저마다 자기 이익을 꾀한다고 가정”(밀)하면서, 이기적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손”(스미스)의 역할을 낙관한 정통 경제학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정통 경제학자들은 예컨대 집주인은 가능한 한 하인들이 빈둥거릴 짬을 주지 않고 그들이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의 빈약한 음식과 형편없는 방을 주고 다른 데로 떠나가지 않을 한도 내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며 매사에 한계점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주인과 사회, 나아가 하인에게도 최대의 이익을 안겨주는 합리적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스킨은 기계와 달리 “영혼을 동력으로 삼는” 하인이 최대한 많은, 질 높은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은 보수나 강한 압력이 아니라 의지나 정신, 친절과 신뢰, 정의, 공평무사, 한마디로 애정이라고 말한다. 공장주와 노동자, 장교와 병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러스킨은 숙련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에 대한 보수도 같아야 한다며, 의사나 교회 목사에 대해서는 그들 솜씨가 좋든 나쁘든 똑같은 사례를 지불하면서 노동자들에겐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노동력에 대한 대가에 차등을 두게 될 때 미숙련 노동자가 싼 값으로 숙력 노동자의 자리를 빼앗거나 임금을 깎아내리고 무한경쟁에 돌입함으로써 대다수가 망하는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조지 버나드 쇼가 카를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혁명적”이라고 했다는 러스킨 사상의 급진성은 부(富)에 대한 그의 생각에 집약돼 있다. 러스킨은 일정한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누구나 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근대경제학자들의 절대적 개념의 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부는 제로섬과 같다. 누구 주머니에 든 1기니라는 돈의 힘은 이웃의 주머니 속에 1기니가 없다는 사실과 그 이웃이 돈을 원한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부자가 되는 기술은 재산을 모으는 기술일 뿐만 아니라 이웃이 자기보다 적게 소유하도록 획책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인 것이다.”
 
러스킨은 식민지경영과 불평등 교역을 통해 전세계로부터 부를 빨아올리며 자연을 파괴·오염시키며 국가간, 그리고 국가내 차별과 불평등을 심화시켜가던 대영제국의 작동방식과 그것을 뒷받침한 근대경제학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했다. 나라 안팎을 넘나드는 주식투자와 신종 펀드들이 난무하고 부동산 투기 등 ‘재테크’가 일상화한 21세기 한국사회는 당시 영국사회와 닮은 구석이 많다. 그런 재테크는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부의 이전과 집중에 따른 불평등을 창출한다. 그것은 내부 양극화뿐만 아니라 전세계 차원의 국가간·지역간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강자들간의 도박게임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나오기 7년 전에 발간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말하자면 150년 전에 거기에 이의제기를 한 것이다. 근대경제학은 그런 불평등을 긍정한다. 그 바탕 위에서 각자 최대의 이익, 이윤을 짜내는 걸 정당화한다. 오늘날 세계와 한국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그 연장이자 필연적 귀결이다.
 
러스킨에게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그리고 파멸로 이끄는 물건을 경멸하고 파괴하도록 국민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자립적 소농경제 쪽을 지향한 마하트마 간디가 러스킨한테서 큰 영향을 받았던 것도 이 부분일 것이다. 자본도 “생명에 유용한 어떤 물건을 공급하느냐, 생명을 보호하는 어떤 구조물을 짓느냐”를 기준으로 봐야 하며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자본의 증식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그런 자본은 아예 없느니만 못하다. “가장 부유한 나라는 최대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사람을 양성하는 나라이고,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기능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여 그 인격과 재산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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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신동아,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인천대 강사, 2008-02-25 10:3)
 
대학 수업시간에 한 경제학자를 초청해 한미FTA에 관한 특강을 하도록 한 적이 있다. 세계와의 경쟁을 통해 선진 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한미FTA가 경쟁에 살아남은 대기업에만 유익할 뿐, 농업의 피폐와 비정규직 양산 및 사회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두 시간에 걸쳐 강의한 경제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했다. “휴머니즘보다 더 위에 있는 경제학은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가 뒤따른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경제학이 사회적 약자뿐 아니라 사회적 강자를 포함한 사회 전체 구성원 모두에게 유익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완벽한 정답일 수는 없지만, 2003년 ‘Nature’에 소개된 미국 조지아 주립대학의 브로스넌(Sarah F. Brosnan)과 에모리 대학의 왈(Frans B. M. de Waal)이 진행한 실험 하나가 눈길을 끈다. 연구팀은 한 무리의 흰목꼬리감기원숭이(Capuchina)가 태어나자마자 일체의 학습 경험을 차단한 채, 우리에 가둬 사육했다. 원숭이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 일정한 양의 조약돌을 준 다음, 원숭이들이 사람에게 이 돌멩이를 건넬 때마다 그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양쪽 원숭이 집단에 모두 오이를 보상으로 제공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한쪽 집단에는 오이를, 다른 쪽 집단에는 잘 익은 포도를 제공하자 오이를 받은 원숭이 무리 중에서 제 먹이를 땅바닥에 패대기치거나 우리 밖으로 내동댕이치면서 저항하는 개체가 나타났다. 상황을 바꿔 여러 방식의 실험을 해본 결과, 욕심이나 좌절 등 다른 요인이 아닌 ‘차별적 처우’에 대한 불만이 이 같은 행동을 야기한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검증했다. 연구팀은 평등의식이나 정의감이 ‘학습’ 이전에 인류 진화 과정에서 발달한 ‘본능’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애정에 입각한 경제원리
먹이를 공유하는 등 협동적인 종(種)들은 불평등을 혐오하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긴데, 이는 그런 정의로운 개체들의 평등을 구현하는 행위가 공동체 전체 구성원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리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른바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 등을 통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인간에게 불평등을 거부하고 서로 협동하는 이타적 본성의 유전인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고, 경제적 인간형(Homo Economicus)에 대비되는 호혜적 인간형(Homo Reciprocan)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류 경제학 교과서의 ‘자유 경쟁’ 원칙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 분야의 이러한 고민을 누구보다 앞장서 개진한 사람이 바로 ‘존 러스킨’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 1권이 세상에 나오기 7년 전, 일찍이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책에 실린 네 편의 논문을 통해 ‘애정’에 입각한 경제 원리를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 이후 맬서스와 리카도를 거쳐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는 정통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준열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러스킨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러스킨은 시종일관 인간의 영성과 사회적 애정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구별된다.
 
러스킨이 보기에 근대 경제학은 “인간이 뼈대만으로 구성돼 있다 가정하고” 그 토대 위에 진보의 골격을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두개골과 상박골로 기하학적 형태를 수없이 조립하고 뼈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보여준 뒤, 미립자로 이루어진 이들 구조물 사이에 영혼이 다시 나타나면 얼마나 불편한지를 성공적으로 입증해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집 안에 빵이 한 조각밖에 없다고 해서 가족들 간에 ‘적대관계’가 형성되거나, 힘이 제일 센 어머니가 빵을 차지하는 결과가 생기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눈앞에서 벌어지는 “득실의 균형에서 행동의 법칙을 연역하려는 노력”들은 한낱 헛수고가 돼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연적 불평등?
러스킨이 이 책에서 시종일관 관철하려는 것은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이다. 이 책의 제목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신약성경의 천국을 비유하는 설명에서 따온 것으로 현재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인력시장에서 일거리를 구하다가 가장 마지막에 포도밭에 일하러 온 일꾼에게도 다른 일꾼과 같은 품삯을 지급하는 것이 바로 천국의 경제 질서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나중에 온 사람’도 동등하게 대우받는 ‘조화로운 불평등’의 사회가 훨씬 더 큰 사회적 부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 러스킨의 주장이다.
 
“빈자는 부자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주지되고 공언되어왔지만, 동시에 부자 역시 빈자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도 주지되고 공언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나 “북쪽이라는 말이 반드시 남쪽이라는 반대말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부유’라는 말도 반드시 그 반대말인 ‘빈곤’을 연상시키는 상대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 역시 ‘인간적인 얼굴을 한 경제학’의 한 단면이다.
 
자신의 그러한 생각이 극단적인 평등주의라는 비난에 대해서 러스킨은 “대령도 병졸과 같은 봉급을 받아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일을 적게 하는 사람과 같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을 고용하여 부리는 이상 일이 서툴러도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 적은 보수를 주면 안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반박한다. “경제학에 널리 퍼져 있는 오류의 대부분은 이런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경솔하고도 불합리한 억측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러스킨이 150년 전에 한 주장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에 놀랍도록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감탄스럽다.
 
따지고 보면,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을 편드는 지식인들의 주장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도구에는 말하는 도구와 말 못하는 도구가 있다. 노예는 말하는 도구이다. 따라서 병든 노예를 버리는 것은 고장 난 호미를 버리는 것과 같다”는 철학자들의 명쾌한 삼단논법이 귀족들로 하여금 병든 노예를 유황광산 밖에 내다버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데 기여했다. “노예도 같은 인간이다”라는 주장을 편 철학자들은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결국 노예제도는 철폐될 수밖에 없었으니 인류 사회의 변화를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얼굴을 한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러스킨의 말을 감히 흉내 내자면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학’이 타당한 것은 ‘정직’이 언제나 옳은 덕목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호혜적 노사관계
19세기 후반 영국 사회에서 러스킨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영혼을 가진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노동당 국회의원들은 그들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거의 모든 의원이 ‘러스킨의 책’이라고 답했다. 변호사로 일하던 마하트마 간디는 열차 안에서 이 책을 읽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오래전, 백남준의 작품 ‘첼로’가 실제로 한구석에 전시돼 있는 여의도의 찻집 ‘첼로’를 찾은 사람들은 주인의 높은 안목 덕분에 르 코르뷔지에의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물질주의 속에서 익사하는 시대”라고 참혹하게 표현한 르 코르뷔지에 역시 “우리의 어린 시절은 러스킨에 의해 훈육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더욱이 필자에게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인도주의적 경향의 예술평론에 일가를 이룬 러스킨이 노동교육을 통해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경제적 구조와 그 운용의 병폐에 통감하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게 리카도의 글을 읽어주다가 한 여성 노동자가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장면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필자는 27년쯤 전의 필자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이 자신의 최대 유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기업은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임금을 주고 최대한 노동을 시키려고 할 것이고, 노동자는 최소한의 노동만 제공하면서 최대한 임금을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업이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을 보장하고, 노동자는 더 많이 노력해 답하는 선물교환(Gift Exchange) 방식, 곧 ‘인간의 얼굴을 한’ 호혜적 노사관계가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현대 경영학의 귀중한 깨달음 역시 그 뿌리를 러스킨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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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여는 책]러스킨의 인도주의 경제학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내일, 박순철 칼럼니스트, 2009-12-18 오후 12:18:19)
‘불평등 기술’ 가르치는 자본주의 통타
사람 중심으로 부(富) 개념 새롭게 정립 … 양극화 사회 되볼아보게 해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1만2천원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읽기를 포기했다. 20년쯤 전의 일이다. 분배론을 전공한 어느 선배의 연구실을 찾았을 때 그는 얄팍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Unto This Last''''-우선 그 책 제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옮긴이는 이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로 번역했다. 좋은 번역 같다. 이 고풍스런 제목은 이 책이 제사(題詞)로 삼은 성경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포도밭 주인이 일할 사람들을 고용하면서 오후 늦게 부른 일꾼에게도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과 똑 같은 임금을 지불한 이야기다. 주인은 불평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여,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 데나리우스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너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이런 계산법은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도 천국의 우의(寓意)라는 문맥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국부(國富)의 명분 아래 개인의 무한한 탐욕을 정당화한 19세기 영국 지식층의 반감은 당연했다. 잡지에 연재된 러스킨의 글에 대해 비난이 쏟아졌다. 네 편의 논문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을 때 그 초판은 10년 동안 겨우 880 권이 팔렸다.
 
하지만 러스킨은 영혼이 있는 인간을 못 박았던 자본주의 경제학의 밑그림에 지울 수 없는 의문부호를 던졌다. ‘마지막 사람’의 관념은 같은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 디킨즈가 크리스마스 정신과 대조시켰던 수전노, 스크루지를 닮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인)의 통념에 도전한 강렬한 상징이었다.
그러면 그건 상징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임금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것은 러스킨의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다. 그가 수요와 공급이 임금을 결정하는 걸 당연시하지 않았다는 건 중요한 쟁점이다. 다만 그것은 부(富)의 정의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전체에 관한 그의 폭넓은 관점에서 살펴볼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을 보았다.
 
여기에서 잠시 경제학은 가정(假定)의 학문이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명한 농담 가운데 이런 게 있다. 무인도에 표류한 배고픈 사람들이 음식이 든 깡통을 찾았는데 따개가 없었다. 그 가운데 경제학자가 말했다. “자, 깡통따개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경제학의 본질을 짚어낸 통렬한 풍자다.
경제학의 화려한 건물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편리한 가정 위에 서있다. 러스킨은 묻는다. 만일 체조학에서 뼈대 없는 사람을 가정해서 사람을 둘둘 뭉쳐 환약처럼 만들거나 케이크처럼 납작하게 누르거나 밧줄처럼 길게 잡아 늘이면 몸에 좋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걸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에겐 인간의 영혼을 부정하는 가정 위에 전개된 경제학의 이론도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생산자를 대표하는 상인은 이익의 인간일 따름이고 명예나 도덕의 인간은 아니라는 전제에 대해 러스킨은 강력히 반발한다. 그는 설교단만이 아니라 시장에서도 순교가 있을 수 있고, 전쟁만이 아니라 장사에도 영웅적인 행위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군인이나 의사, 목사나 법률가에게는 엄격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에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상인에 대해서는 인간의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베니스 상인’ 같은 역할을 맡기고 만족한다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한 이야기들은 모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정말로 이상한 단 한 가지 점은 이 이야기들이 이상하게 들려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톨스토이는 “러스킨은 가슴으로 생각하는 희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는 시대의 밖에 서서 마취된 시대의 쾌락과 고통을 보았다. 이렇게 해서 가슴으로 생각하는 희귀한 책이 태어났다.
 
이 책에는 한 마디로 선지자의 통찰이 있다.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물질이 아닌 인간의 학문이라는 깊은 울림이 있다. 이 책의 핵심은 러스킨 자신이 밝히듯 부에 대한 정의지만 그것은 인간의 행복에 관한 전인적인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부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러스킨이 주목한 것은 타인에 대한 부의 지배력이었다. 그런데 부가 지배력으로 작용하려면 누군가 자기를 위해 일해 줄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경제학이 가르치는 부자 되는 기술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인 것이다. 행복학이 아닌 불행학의 씨앗이 내재한다.
 
부의 본질이 타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에 있다면 소유한 부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들이 고귀한 사람일수록, 부가 커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야말로 ‘부의 광맥’이다. “모든 부의 최종적인 성과와 완성은 원기왕성하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한 인간을 되도록 많이 생산하는 데 있을 것이다.”
 
러스킨은 자본주의 경제학을 속류 경제학으로, 사회주의 경제학을 파괴의 경제학으로 비판했다. 옮긴이는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경제학의 천하를 삼분하여 그 하나를 차지한 촉나라 같은 느낌을 띠는 것이 러스킨의 인도주의적 경제학일 것이다.” 이 얇은 책의 역사적 의미는 그만큼 무겁다. 많은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했던 성경의 한 장면을 상기시키며 이 글을 끝내고 싶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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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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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정치학자가 바라본 '자본주의의 종말'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2007-09-19 06:01)
 
"재생 가능한 에너지 체제에다 거기에 적합한 사회 형태와 연대적으로 조직된 경제가 갖춰지면 이것이 현행 자본주의의 종말이 된다."(27쪽) 베를린 자유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이며 독일 녹색당의 이론적 지주로 손꼽힌다는 엘마 알트파터는 "자본주의의 종말은 어떤 모습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알트파터의 저서 '자본주의의 종말'(동녘)은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미래는 기본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비판은 가치가 있고, 대안들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부자들의 재산은 계속 불어나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또한 생산성 향상을 위해 필요한 자원들은 고갈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고 있다.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원동력은 세계를 지배하는 유럽의 합리주의, 자본주의적 사회 형태, 화석 에너지라는 삼위일체에서 나온다고 말한다.이 가운데 화석 에너지가 고갈된다면? 저자는 석유의 대안으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제시한다. 이 에너지는 생물 자원의 활용, 풍력과 수력의 이용, 지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기초를 둔 생태학적 정치경제학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해 왔다는 저자는 미래의 모습에 '연대'라는 개념을 더한다. 연대의식은 "실업, 빈곤 혹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문화, 민족, 지역, 계층을 포괄하는 인생 경험에 바탕을 두고" 형성돼 있을 수 있으며, 한 사회에서의 공통성과 내적 결속성에 대한 의식을 전제로 한다. 저자는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미래가 현재와는 달리 비(非)자본주의적 세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새로운 사회 형태는 만들어질 수 있으며 역사는 종말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아간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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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공황, 자본주의 붕괴의 서곡? (프레시안,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2008-09-20 오후 12:05:58)
[길에서 책읽기] 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
 
알트파터는 산의 꼭대기에서 마을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의 금융 위기 실상을 명확히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 오늘날 금융은 실물경제와 철저히 분리되어 별세계에서 따로 움직이고 있으며 사회와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전세계 외환 거래 가운데 실제 상품결제 액수는 2%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른바 OECD 국가들의 수출이란 초국적 대기업들의 기업 내부거래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머지 98%는 실물경제와 관련없는 금융거래이다. 정확히 말하면 투기자본들의 이동이다.
 
전세계 금융자산 규모는 2007년 기준 대략 170조 달러 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가운데 60%가 달러화로 20%가 유로화로 보유되어 있다. 전세계 GDP의 3,5배 가량이다. 자본수지가 무역수지와 경상수지를 과도하게 압도하는 이상비대증의 체제는 수시로 다양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마침내는 경제 자체를 붕괴시키고 만다.
 
실물경제가 어려운데 금융이 잘 나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암세포가 점점 커지다 숙주를 압도할 정도로 성장하면 당연히 암세포 자신과 숙주는 생명을 잃는다. 알트파터는 현재의 금융자본주의는 암세포라고 단언한다. 세계화, 글로벌 스탠다드란 결국 투기꾼들의 돈벌이를 위해 만든 고상한 용어라는 게 알트파터의 지적이다.
 
알트파터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이용하면 자동으로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 차로 변하듯 자본주의도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금융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 붕괴의 서막이다. 머지않아 닥칠 에너지 식량위기의 쓰나미와 함께 자본주의는 어쩔 수 없이 붕괴된다. 그 소리가 북극 빙하가 무너지는 소리처럼 굉음일지 아니면 암환자의 고통스런 신음소리처럼 처연할지는 또 아무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사태를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여기서 알트파터가 제시하는 대안은 태양에너지 사회, 연대경제 협동조합을 비롯한 수많은 네트워크가 결합된 연대사회이다. 태양에너지 체제란 농업사회를 말한다. 그는 공업과 산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심은 농업인 사회를 태양에너지 사회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100년간 서구화, 근대화, 산업화를 죽을 힘을 다해 추구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간신히 국민소득 2만불 시대의 이른바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런 풍요가 지속불가능하고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된다니, 조금은 황당한 예측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사치스런 풍요에 안주해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 잊고 있다. 무엇보다도 석유의 고갈과 함께 식량 고갈, 다른 천연자원의 고갈이 머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본주의 산업문명과 풍요의 원천이었던 석유가 사라진다면 당연히 산업문명과 풍요 또한 사라진다.
 
때문에 우리는 사회 체제 자체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모색과 사색의 단초를 알트파터는 다소 무겁게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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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도의 살풍경…결국 '유령'이 도래한다" (프레시안, 박준영 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009-03-21 오후 12:34:55)
[철학자의 서재] 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
 
유령의 도래는 곧 자본의 종말이라는 것, 도래와 종말은 항상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이 끔찍하거나, 즐겁거나, 소란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속으로 들끓으며 비등점을 향해 가기 때문이라는 것, 잠재성이 곧 현실적이라는 것 말이다. 어리석은 지배계급은 이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사실 지배계급이 자본에 대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자본이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을 때조차, 이 무식한 지배계급은 상황 판단이 전혀 서지 않는다. 다만 두려워할 뿐이고, 대책이 없고, 땅만 판다. 거기 겁에 질린 타조처럼 머리를 묻으려고? 대중들의 봉기에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채로, 한 쪽으로는 눈치를 살피고, 다른 쪽으로는 경찰들을 집결시킨다. 하던 짓이 그 짓이기 때문에 '몽둥이와 삽질' 외에 다른 게 생각나지 않는다. 야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야비함은 두려움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종말'은 '유령의 도래'다. 엘마 알트파터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야만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야만은 미래의 주축이 될 것인데, 이 야만이란 '분명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야만'이라는 것은 오래된 진실이다. 자본의 초기 축적은 온간 탈취와 토지에 대한 강제 귀속, 유랑민들에 대한 학살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이 초기조건은 항상 반복된다. 지금도 그렇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원주민 부대에서부터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선 곳, 이곳 용산에 이르기까지 종말을 유예하기 위한 강박적인 반복이 있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이러한 지옥도가 펼쳐져 왔다는 것을 한번 상기해 보는 것만으로도 '종말'이란 얼마나 당위에 가까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정글의 법칙이며, 따라서 짐승의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종말 너머의 유령은 어떤 조건 하에서 도래할 것인가? 알트파터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을 인용함으로써 유령을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 '내인성(內因性)' 쇠약에 의해 붕괴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외부로부터의 아주 격심한 충격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들과 결합해서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브로델이 말하는 바는 매우 명백하다. 순진한 낙관론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에 의해 붕괴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트파터가 뒤에 또 밝히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외인(外因)'이 단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 의식화인 것만은 아니다. 대안이라는 것이 '혁명 전위대' 뒤에서 대오를 맞추어 가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서글프게도 이 방면에서 만큼은 레닌의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면 내부에서 무르익고 있는 대안들과 외부 원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알트파터는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내부모순 외에 외적 요인들로 에너지 고갈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를 든다. 자본주의란 유럽합리주의와 함께 화석연료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합리주의가 그 본래의 철학적 의미를 폐절하고 효율과 이윤 획득 가능성이라는 논리로 정제되기 위해서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낳은 결과는 명백하다. 합리주의, 다시 말해 이성중심주의란 인간 내부의 모순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해야 하며 그를 통해 질서 잡힌 사유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타락한 합리주의는 이러한 사유체계를 통해 모순을 피지배자의 자율적-내면적 훈육체계로, 생체적 메커니즘으로 바꾸어놓는다. 그것은 질서 속에 안주하며, 그것을 강박적으로 강요한다. 질서를 넘어서는 모든 혁명과 소요는 이제 단죄되어야 하는 '괴물'이 되었다. 이제 이성은 경제적 효율성에 봉사하고, '성장'이라는 최고 목표를 향해 가는 것만을 허용할 뿐이다. 마침내 차가운 이성이 탄생한다. 사실 이 차가운 이성이야말로 '괴물'에 다름 아니다.
 
화석연료란 이 괴물의 거의 유일한 먹잇감이다. 맹렬한 식욕 때문에 생태계와 환경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이는 결국 괴물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건 비단 자본만이 아니다. 알트파터는, 만약 여기에 대안이 있다면 '재생 가능 에너지'가 되리라고 말한다. 즉 현행 자본주의의 종말이란 '재생 가능한 에너지 체제', 이 에너지 체제에 적합한 '사회형태' 그리고 '연대적으로 조직된 경제'의 삼위일체가 갖춰질 때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화석에너지', '합리주의'라는 타락한 삼위일체의 반대쪽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들이 발생할 수 있는 자본주의 내적 요인은 무엇인가? 알트파터는 이를 '사회로부터 시장의 유리'라고 정리한다. 사회적 가치가 더 이상 시장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가 차가운 이성에 의해 구성되고 그것이 '성장'이라는 목표에 정향되었을 때 모든 사회적 가치와 공동체 의식은 괴물의 먹잇감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식의 경제를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알트파터는 이 이념이 이미 낡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긴 2008년에 이르러 월가가 나자빠지고,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이 낡은 이념이 임종을 고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소위 '순수한 시장논리'라는 것은 개나 줘야할 처지가 되었다. 알트파터는 그러한 논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공허한 모의 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본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속 빈 논리를 학자들이 대중들에게 유포한다는 것이다. 알트파터가 말하는 '학자들' 속에는 분명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시카고학파 이데올로그들이 속해 있다.
 
사회로부터 유리된 시장, 또는 자본은 반드시 '자폐증적'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는 글로벌화된 자폐증이다. 사회적 가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 자본은 금융자본이 되면서 그 자폐적 특성이 극대화된다. 눈에 보이는 게 돈밖에 없는 노름꾼처럼 매 순간순간의 배팅에서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배팅의 순간순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는 노름꾼 자신의 욕망에서 기인한다. 도대체가 그 욕망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욕망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배팅의 액수를 높여야 하는데, 깔린 판돈이 이 욕망에 따라 가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제 합리적인 이성이 계산을 포기한 지점에 폭력과 탈취, 다시 말해 초기축적의 반복이 다시 생겨나는 것이다. 포드주의의 종말이란 다른 게 아니다. 네그리라면 이를 '가치론의 붕괴'라고 말했을 것인데, 알트파터는 이를 친절하게 풀이해 준다. 즉 실물자본이 추동하는 잉여가치 창출이 금융자본의 수익률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지점, 실물자본의 불행한 회계사가 손익분기점 위로 치솟는 이자율을 공포에 질린 채로 바라보아야 하는 그 지점에서 합리적 경제 정책은 종말을 고하고, 그 대신에 국가 폭력과 탈취가 횡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강대국, 특히 미국과 같은 나라의 군사력은 정치나 지역 방위 체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경제논리(최대 이윤 달성)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여기서 과연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이 부시의 같잖은 종교적 신념이나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보다 더 추잡한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인지 물어 볼 수 있다.
 
거기에 오바마는 다를 것인가? 사실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 짐승의 논리인 신자유주의가 인간 오바마의 의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정이 이런데, 7%씩이나 경제성장을 이루겠다고 사기를 쳐 대고 대통령이 된 자와 이 경제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애초에 그 사기라는 것이 현실이 되기엔 요원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 대통령은 아예 신자유주의 짐승과 하나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을 말하자면, 인간은 동족의 죽음에 애도를 표할 수 있는 입과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양심이 있고 짐승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와 유리된 자본, 윤리적 양심과 유리된 권력은 이래서 일란성 쌍둥이다.
 
타락한 삼위일체가 자본주의의 내외적 요인이라면 그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위력은 이제 노동과 재생 가능 에너지 그리고 코뮤니즘적 경제체제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유령의 도래가 평화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혁명이란 비둘기 걸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성난 맹수처럼 덤벼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용한 혁명, 그리고 폭력적 변화라는 테제는 대립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알트파터가 홀러웨이를 비판하면서 말하듯이 '권력'을 잡지 못하는 혁명이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권력에 집착하는 혁명도 끝내 파산할 뿐이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권력을 위한 정치혁명이 한 쪽에 있다면, 그 다른 쪽에 화석에너지 자본주의의 종말, 재생 가능 에너지 사회체제의 도래가 있다. 오히려 후자가 더 힘들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 자본주의는 초기의 산업자본주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화석에너지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자본은 이를 하루 이틀 만에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심지어 민중혁명의 당사자들조차 그럴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이 공멸의 욕망을 다른 체제로 대체하지 않는다면, 그 뇌관이 터지는 날에 또 다른 지배계급이 똑같은 과학기술을 가지고, 똑같은 에너지체제를 유지하려할 것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규율이 내면화된 다중(multitude)들은 또 다시 죽음의 사이클을 반복할 것이다.
 
따라서 '시장실패'의 원인을 단지 금융자본의 투기욕망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금융자본이 애초에 폐기해버렸던 그 가치, 즉 '사회적 가치'에서 찾아야 한다. 이 사회적 가치에는 '자연'이라는 매우 중요한 존재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명심하자.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체의 존재조건이라는 것이다. 화석에너지의 무분별한 사용은 이 존재 조건에 대한 침해이므로, 결국은 인간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폭력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알트파터의 말대로, 먼저 경제 과정을 단지 가치창출과정으로만 보지 말고, '원료와 에너지 변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그 어떤 체제도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복수는 반드시 회귀한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재촉한 이 복수가 또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연대적 경제(코뮤니즘)와 함께 자연을 지속가능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혁명의 필수적인 조건인 동시에 그 혁명을 또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필수 조건이 된다. 영구혁명이란 정치에 있지 않고 생태에 있는 것이다. 정치 혁명의 성과는 나날이 이어지는 생태 혁명의 엔진이 없으면 채 한 세기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소비에트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추론할 수 있다.
 
알트파터는 현대 자본주의 내에서 성장하는 이들 프롤레타리아를 '목소리'로 지칭한다. 홀러웨이가 '절규'라는 다소 비관적인 톤으로 지칭한 것을 말이다. 확실한 것은 알트파터나 홀러웨이 둘 모두 프롤레타리아를 더 이상 마르크스가 그렸던 방식으로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지금/여기'와 알트파터의 '지금/여기'는 다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계급과 마찬가지로 알트파터의 계급도 막 성장하고 있으며,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뭐라고 했던가? 가장 강력한 위력은 잠재적인 것이다. 레닌이 다시 산다면 이 잠재성의 동력을 뭐라고 했을까? 분명 러시아 혁명 때와는 달리 말했을 것이다.
 
알트파터의 지성은 매우 비관적이다. 역사상 가장 타락한 자본주의 내부에 살면서 지성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비관주의라면 그것은 매우 합당하다. 그렇다면 역사상 가장 타락한 정권 내부에 사는 기분은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스스로 대중의 역량에 기생하면서도, 그 대중을 탄압하는 권력은 결국 제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유령을 부를 것이다. 야만의 자본주의에 비열한 권력, 2009년 봄 현재 한국 사회가 통과하고 있는 지옥도의 살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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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 세미나11: 정신분석의 네가지 근본개념

 

[메인서평] 라캉 안의 라캉 이상의 것 (2009년 03월 14일 (토) 22:43:11 대학신문, 민승기 교수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자크 라캉 - 세미나11: 정신분석의 네가지 근본개념  
무의식, 반복, 전이, 충동이라는 근본개념으로 ‘프로이트 안의 프로이트 이상의 것’을 추구
『세미나 11』은 언어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의 혼합괴물
 
자크 라캉의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은 보이지 않지만 없다고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욕망한다. 무의식, 반복, 전이, 충동이라는 네 가지 근본 개념은 정신분석 ‘속’에서 정신분석을 ‘능가’하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발생한다. 국제정신분석 협회로부터 대파문을 당해 “완전히 (제도) 안에 있지도 그렇다고 밖에 있다고도 볼 수 없게”(p.14) 되었을 때 라캉은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한다. 제도 속에서 제도로 환원될 수 없는 정신분석의 타자성을 찾기 위해 그는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이 돌아가고자 하는 프로이트는 지젝의 말대로 “프로이트의 말(지식)이 아니라 프로이트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프로이트 역시 인식하지 못했던 불가능한 핵”이다. ‘프로이트 안의 프로이트 이상의 것’을 라캉은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는 네 가지 개념들을 통해 라캉은 “실천으로서의 정신분석”(p.19)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다.
 
실천이란 ‘상징적인 것을 통해 실재를 다루는 행동’(p.19)이다. 실재 역시 ‘상징계 안의 상징계 이상의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p.37)고 말했던 라캉은 지금 “무의식의 위상은 윤리적”(p.57)이라고 주장한다. 윤리적인 것은 언어의 타자를 지시한다. 무의식은 언어나 담론이 재현할 수 없는 간극이며 바로 이 간극을 통해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무의식은 상징적 담론’이라는 진술과 “무의식은 실재와의 만남”(p.40)이라는 주장은 그러나 단절이 아닌 ‘네 안의 너 이상의 것’(p.397)을 욕망하는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 실재는 상징적 담론의 틈, 구멍, 실패이지만 상징계의 결핍을 지시하는 요소들은 상징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나에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지요. 폴, 에르네스트, 그리고 나”(p.38)라고 말하는 꼬마의 셈법과도 같다. 셈하는 자가 이미 셈에 포함돼 있는 구조는 셈의 안이자 바깥인 주체가 셈을 불가능하게 하는 틈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빈 공간임을 보여준다.
 
가능성과 불가능성, 부정과 긍정이 같아지는 빈 공간을 라캉은 원인(Cause)이라 부른다. 원인은 (상징적) 법으로 재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인 동시에 법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손자가 실이 감긴 실패를 던졌다 당겼다 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쾌락원칙을 넘어선 이론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프로이트가 이미 그 장면 안에 들어가 있듯이 (그는 이미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실패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다) 『세미나 11』이 보여주는 것은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의 상호함축 또는 ‘뒤엉킴’이다. 정신분석을 기초짓는 네 가지 개념 모두 같은 표면으로 계속 가다보면 이미 반대편에 와 있는 뫼비우스의 띠의 구조를 갖고 있다.
 
라캉은 무의식을 “공시태의 차원에 위치시켜야 한다”(p.46)고 말하는 동시에 “시간적인 박동 속에서 나타나는 어떤 것”(p.218)으로 제시한다. 시간을 알지 못하는 무의식과 기표를 선행하는 시간적인 박동(p.191)으로서의 무의식이 갖는 간극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다시 뫼비우스의 연결방식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라캉이 재현을 넘어선 위상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외상을 초래하는 실재와의 만남인 투케(tuche)는 기표의 공시성이 단순히 비시간적인 공시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표들의 네트워크인 오토마톤(automaton)은 이미 그것을 중지시키는 시간성으로서의 투케를 포함하고 있다. 상징적 오토마톤은 실재의 충격에 의해 구부러져 있는 것이다. 구부러짐은 투케가 상징계의 만곡을 초래하는 순수한 형식으로 이미 오토마톤 속에 기입되어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재현할 수 없는 빈 공간으로서의 투케와의 만남은 그러므로 항상 ‘어긋난 만남, 상실된 만남’(p.89)이다. 상징계의 연속성을 탈구시키는 이 어긋남이 상징계의 외상적 기원인 투케이다. 상징계의 자동성은 그것을 중지시키는 사건으로서의 투케를 포함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충동(drive) 역시 영원성과 시간성 ‘사이’에서 발생한다. 충동을 이루는 네 가지 요소 중 원천과 압박은 칸트의 예지계처럼 최초 대상의 비시간적 반복을 명령하지만 또 다른 두 요소인 대상과 목표는 충동이 이질적 문맥 속에서 재구성된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원천과 압박이 구성하는 순환적 시간성의 축과 대상과 목표로 이루어지는 무한한 차이의 축이 단순한 대립이 아닌 ‘적대’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우리는 대립항의 강요된 선택이 아닌 내부 속에서 내부를 초월하는 외부를 말하고 있다.
 
주체의 형성을 설명하는 소외와 분리의 관계 역시 내재적 초월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의미를 얻기 위해 기표에 종속되는 소외와 기표 체계 자체로부터 떨어져나감으로써 비로소 자유의 가능성을 얻는 분리는 대립이나 차이 이전에 이미 겹쳐 있다. 라캉은 “주체는 타자의 장에 공시적으로 종속될 때에만 주체일 수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그 곳을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한다.(p.285) 주체의 빠져나옴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타자의 결핍이다. 결국 소외와 분리의 겹침 또는 뒤엉킴은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이 겹치는 이중 결핍의 공간 즉 대상 a의 공간을 열어놓고 바로 여기서 분리의 주체는 대상 a의 위상을 갖게 된다. 의미를 박탈당한 대상, 배설물과도 같은 대상이 바로 주체이다. 그러므로 주체의 진실은 “주체가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조차 주체 자신이 아니라 대상 속에 있다.”(p.17)
 
자연적인 성도 문화적인 젠더도 아닌 성욕은 외상을 초래하는 충동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p.267) “무의식의 현실은 성적 현실이다.”(p.226) “시니피앙이 세상에 도입된 것은 성욕을 통해서이다.”(p.228) 기표의 (불)가능 조건으로서의 성욕은 그러므로 타자의 결핍, 타자의 욕망을 드러낸다. 사실 응시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타자의 눈멂이다. ‘깡통은 자네를 보고 있지 않아’(p.149) 깡통은 내가 그것을 보기 전에 이미 나를 보고 있지만 그러나 응시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대타자의 눈이 아니라 눈먼 부분대상이다. 그러나 바로 이 눈멂이 주체와 타자 모두를 거세시킨다.
 
‘라캉 안의 라캉 이상의 것’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하나의 라캉이다. 기표로서의 라캉은 대상 a로서의 라캉과 겹쳐 있다. 대상a 로서의 라캉은 기표 속에서 기표를 능가하는 잉여물로 남아있다. 이 잉여물과의 만남이 윤리학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의 혼합괴물과도 같은 『세미나 11』의 라캉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물음으로 우리를 혼돈스럽게 한다. ‘정신분석이란 스핑크스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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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대전환 | 샌드라 프레드먼 지음 | 조효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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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권 보장은 국가의 의무”…인권개념 재구성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10-15 오후 06:39:44)
새 패러다임 제시한 ‘인권의 대전환’
 
권리와 권리가 충돌할 때 다툼이 생긴다. 재개발 분쟁도 그런 경우다. 대체로 “내 뜻대로 처분하겠다”는 집주인의 재산권과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세입자의 주거권이 부딪쳐 사달이 난다. 공권력이 투입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번지기도 한다. 이 경우 공권력은 백이면 백, 집주인 편이다. 시민들은 방관한다. 재산권이야말로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지고의 권리라는 게 그들이 학습해온 상식인 까닭이다. ‘용산’에 대한 집단 침묵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것도 바로 이 상식이었다. 소유물에 대한 처분권이 인간다운 삶의 권리에 우선한다는 이 비정한 상식은 대체 어디에 근거하는가.
 
출간 시기가 더없이 적절하다. 샌드라 프레드먼 옥스퍼드대 교수가 쓴 <인권의 대전환>(교양인)이다. 2008년 영국에서 출간된 직후 “인권이론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책”이라 평가받았다. 책을 옮긴 조효제(사진) 성공회대 교수는 “인권 개념을 재구성해 그동안 부차적·파생적 권리로 간주돼 온 사회·경제적 권리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고 소개한다. 인권을 자유권(시민적·정치적 권리)과 사회권(사회적·경제적 권리)로 구분하면서 앞의 권리에 역사적·논리적 우선권을 둬온 기존의 인권 담론을 해체함으로써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사회적 권리에 관한 논의에 새 지평을 열어준다는 얘기다.
 
자유권 침범 않는 소극적 국가 넘어 사회·경제 권리 위해 ‘적극 개입’ 주장
프레드먼 명저…조효제 교수 번역, “용산사건 재판부가 이 책 읽었으면”

 
글쓴이가 볼 때 인권은 권리 주체인 개인 뿐 아니라, 의무의 주체로서 국가의 역할을 동시에 요청한다. 모든 ‘권리’ 개념은 권리의 주체가 의무의 주체에게 어떤 근거에서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 논리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적 인권담론에선 권리 주체인 개인만 강조되고 개인의 권리를 충족시켜야 할 국가의 의무는 제대로 부각되지 않다보니 국가가 말로는 인권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에는 소극적인 경우가 잦았다고 글쓴이는 지적한다. 
 
책은 권리 개념에 동반되는 국가의 의무 개념을 도출한 뒤, 이를 다시 소극적 의무와 적극적 의무로 구분한다. 소극적 의무가 개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것(자기 억제)이라면, 적극적 의무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극적 의무가 전통적인 자유권과 짝을 이룬 것이라면, 적극적 의무는 사회권에 대응하는데, 핵심은 이 두 가지 의무가 현실에서 결코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촛불집회를 예로 들어보자. 시민들이 경찰을 향해 광장을 열라, 때리지 말라 요구하는 건 자유권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나오고 싶어도 배가 고파서 또는 신체의 장애 때문에 못 나오는 시민들이 있을 수 있다. 시민적 권리를 주장하려면 적어도 소리칠 기력과 능력은 있어야 한다는 얘긴데, 이것을 보장하는 게 사회권이다. 옮긴이 조효제 교수의 설명이다.
 
“모든 인권 현안에는 자유권적 속성과 사회권적 속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걸 국가의 의무 차원으로 전환해 말하면 이렇습니다. 광장을 열어주고 물리적 탄압을 않는 것만으로 국가는 인권 준수의 의무를 다하는 게 아닙니다. 시민들이 최대한 자유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권리 주장을 펼칠 수 있게 교통을 통제하고, 화장실과 식수 등 편의를 제공하는 것도 국가의 의무에 포함된다는 얘깁니다.”
 
또 책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원이 담당해야 할 능동적 역할을 강조한다. 국가가 인권을 보장하도록 촉구하고 감시함으로써 민주주의 체제를 보존·지원하는 것이 사법부의 궁극적 역할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일종의 ‘민주적 사법 적극주의’다. 물론 이것은 법원의 판결로 정치를 대체하자는 게 아니다. 사법적 절차를 통해 대의제의 단점을 보완하자는 것, 예컨대 법원은 정부가 국민을 위해 지키겠다고 약속한 것을 위반할 경우 재판을 통해 그에 대한 설명과 시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조효제 교수는 “이 책은 민주주의와 사법부의 역할에 대한 숙고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며 “양심과 법에 의거해 초연하게 판결하는 것이 주어진 책무라고 생각하는 양심적 판사들, 특히 방송법 권한쟁의 소송을 다룰 헌법재판소와 용산사건의 재판부가 이 책을 읽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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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개인의 권리인가 국가의 의무인가 (서울, 심재억기자, 2009-10-17  18면)
 
적어도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마땅히 인간이 누려야 할 보편적 가치로서의 권리와 시장 논리가 충돌할 때, 우리가 믿는 진리적 명제로서의 인권은 아무런 가치도, 구속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인권은 한 정치집단의 사회 장악에 거추장스러운 개념일 뿐이고, 그래서 항상 배제되고 도외시된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특히 과거 전체주의적 발상이 견인했던 개발연대를 거쳐 온 기성세대들)이 이런 사실을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자꾸 시장논리를 기웃거리는 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사회에서 인간이 천부적으로 누려야 할 가치가 항상 효율성의 아래에 놓인 선택적 가치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대중독재’ 시절,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라는 프로파간다적 구호에 밀려 인권이나 자유에 대한 옹호가 지적 호사쯤으로 치부되었듯 지금은 ‘조금만 더 합심단결해서 노력하면 우리도 당당히 선진국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해괴한 논리가 또다시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효율성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개발론자들의 발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효율성 추구에 대한 법원의 입장은 어떤가. 원론적으로 짚자면 ‘소수자들이 정치 과정에서 배제될 때, 그들의 목소리가 조직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할 때, 대의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법원의 민주적 역할이며, 사법의 기능이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사법부가 소수자들 혹은 배제된 다수의 권리를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라는 점에 적지 않은 국민들이 동의하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게 현실이다. 신영철 대법관 파동이 시사하듯 권력은 한사코 사법부를 휘하에 편제하려 들고, 사법부 내부에서도 이런 권력의 역학에 편승하거나 이용하려는 세력이 엄존한다. 그렇다고 사법부의 결정 능력에 회의만 할 수도 없다. 지난 9월 내려진 헌법재판소의 ‘야간 옥외집회 금지 헌법 불합치’ 결정에서 보듯 사법의 역할을 다하려는 노력이 있다는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원론적 논의가 따분하다면 불과 얼마 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 ‘공권력에 의한 집단 살인’으로 각인된 용산 참사를 상기하자. 용산 참사는 국가가 소극적 의무와 적극적 의무를 모두 저버린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개입해서는 안될 상황에서는 무리하게 공권력을 투입해 생존권을 지키려던 시민들을 폭압적으로 진압함으로써 자기억제 의무를 지키지 않았고, 시민의 주거권 보장이라는 국가의 적극적 의무는 뒷짐을 진 채 나몰라라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누가 뭐라든 오늘날 인권은 국가의 존립 목적이자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통용된다. 이런 인권 개념을 체계적으로 재조명한 인권 이론서 ‘인권의 대전환-인권 공화국을 위한 법과 국가의 역할’(샌드라 프레드먼 지음, 조효제 옮김, 교양인 펴냄)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그녀는 현재 영국 옥스퍼드대 법학부 교수이자 영국학술원 정회원이다.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인권은 민주주의의 한 귀퉁이에 놓인 뜨거운 감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둥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인권은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국가의 적극적 인권 보호의무는 모든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인 ‘시민 참여’를 달성하는 데 본질적인 요소”라고 부연한다. 나아가 언제나 발생할 개연성을 가진 공권력의 충동적·의도적 인권 침해에 대한 법원의 책무 범위에 대해서도 명쾌한 견해를 내놓는다. 법원은 언제나 국가에 부여된 적극적 의무의 실현 여부를 감시·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적극적 의무가 민주주의를 장려하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된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선출직도 아니고, 정치적 책임도 없는 판사가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심사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일부 비판에 단호하게 쐐기를 박고 나선 것이다. 프레드먼 교수가 발언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렇다. 노숙자들이 자신과 식솔들의 주린 배를 채우거나 몸을 눕히기 위해 헤맬 때, 노숙자의 존엄성만 훼손되는 게 아니다. 그런 노숙자를 낳은 사회와 국가의 존엄성도 함께 훼손된다. 왜냐면 인권이란 국가와 사회가 포괄적으로 규정만 해주는 선언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적용해야 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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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국가의 의무 (레디앙, 2009년 10월 18일 (일) 07:14:53 정상근 기자)
[새책]『인권의 대전환』…인권의 위기에 읽는 참고서
 
용산참사, 미네르바의 구속, 국정원의 개인사찰의혹,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인권이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수장까지 정부와 가까운 인사를 내세우고 있는 이 정부가 ‘국가’를 빌미로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인권의 문제는 국가와 개인간의 문제 뿐이 아니다. 기업과 개인,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인권이 침해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전문가 샌드라 프레드먼이 귀한 참고서를 내놓았다. 『인권의 대전환』(샌드라 프리드먼, 조효제, 교양인, 29,000원)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권 실천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 의무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규명함으로써 인권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인권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이자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단임을 입증한다. 또한 전통적인 인권 담론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국가’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국가는 인권의 주체로서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권 실현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사법부가 국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성을 강화하고 정치 과정에서 주변화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며 시민들의 온전하고 평등한 참여를 위한 물질적·사회적 전제 조건을 보장하는 한편 궁극적으로 심의민주주의의 촉매 기구로 기능하는 역할 등을 수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저자의 지적은 권력과 이해관계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와 ‘해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권은 시민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그의 지적은 현 정부에서 왜 인권의 위기가 닥쳐왔는지 깨닫게 한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형성하고 그것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적극적인 인권 보호 의무를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권은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국가의 적극적 인권 보호 의무는 모든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인 ‘시민의 참여’를 달성하는 데 본질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또한 인권으로부터 발생하는 국가의 적극적 의무는 더는 무시될 수 없으며, 그것이 각종 권리의 범주를 나눈 인위적인 구분 뒤에 은폐되어서도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인권의 의무’라는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저자는 책에서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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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국가의 의무’ 없이는 인권보장 없다 (2009 10/27 위클리경향 847호, 정원식 기자)
ㆍ인권의 대전환 | 샌드라 프레드먼 지음 | 조효제 옮김 | 교양인 | 2만9000원
 
용산 참사는 한국 사회의 아픈 상처다. 주거권을 보장해 달라는 세입자의 요구는 재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건물주의 요구 앞에 무력했다. 공권력의 논리는 ‘법대로’였다. 우리 헌법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었더라도 그랬을까.
 
(1)모든 사람은 적절한 주거 시설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
(2)국가는 가용 자원의 한도 내에서 이러한 권리의 전향적이고 지속적인 실현을 달성하기 위해 합당한 입법 조치 및 기타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3)누구도 법원이 모든 정황을 고려한 후 내린 명령에 의하지 않고 자신의 주택에서 쫓겨나거나 그 주택이 철거되는 일을 당하지 않는다. 어떤 법률도 자의적인 철거를 허용할 수 없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헌법 26조의 내용이다. 우리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주거권을 보장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아공 헌법 28조는 어린이에게 무조건적 주거권을 부여하고, 토지에 대한 공평한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의료, 복지, 건강에 대한 권리와 함께 기본적인 사회권 범주에 들어가는 주거권이 재산권에 선행한다는 인식을 헌법에 반영한 사례다.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을 혁신적으로 전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내용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법학부 교수 샌드라 프레드먼은 지난해 출간된 이 책을 통해 인권 이론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인권 논의는 권리 주체인 개인만을 강조한 탓에 의무 주체인 국가의 역할을 소홀히 다뤘다. 문제는 공동체의 자원을 동원하고 분배하는 힘을 지닌 국가의 역할 없이 인권을 보장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저자는 국가에 대해 소극적 의무(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보장할 의무)만이 아니라 적극적 의무(경제적·사회적 권리를 보장할 의무)까지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적극적 의무에 대한 강조는 전통적 자유 개념에 대한 성찰과도 맞닿아 있다. 자유에 대한 전통적 논의는 개인이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소극적 자유)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국가는 불간섭을 미덕으로 여기면서 실제로는 사회적 불평등을 방치하는 구실로 삼을 우려가 있다. 이 논리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면서 실제로는 기득권층의 권리만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탄생한다.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국가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이러한 우려에 대해 인권 충족 의무는 “국가에 무제한의 권력을 주자는 말”이 아니라 “인권의 진정한 향유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또 법원도 판결을 통해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요청함으로써 사회적 약자 보호와 민주주의 강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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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게 진짜 국가" (오마이뉴스, 09.11.11 17:16  이주호 (fuun))
[인터뷰] 샌드라 프레드먼 <인권의 대전환> 번역한 조효제 교수
 
인권에 대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인권, 그게 뭐에요?"라고 묻는다면, 민주주의와 인권이 같은 것이라고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알게 된다. 신간 <인권의 대전환>은 2008년도에 영국에서 출간된 책으로 최근에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인권의 대전환>은 인권을 국가 정치 공동체의 핵심 구성 원리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책은 인권 개념을 뿌리째 뒤바꾼 대담하고 획기적인 21세기 인권 교과서로써, 국가의 존립 목적이자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서 인권의 재탄생을 선언한다. 또한 이 책은 이론과 실제를 아우름으로써 지구화 시대 민주주의와 인권의 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한 최고의 인권 이론서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 학계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성취
독일 예나 대학의 에버하르트 아이헨호퍼 법학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진정으로 보편적인 인권 이론의 신기원을 연 책"이라고 평했으며 번역자인 조효제 교수는 "세계 학계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는 격조 높은 인권 이론서"라고 말했다. 옮긴이 해설에서 조효제 교수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개혁, 진보 세력의 새로운 방향 설정을 놓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인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길 모색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 책은 그러한 지적 공백을 채워주는 소중한 자산이 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특히 용산 참사에서 국가의 의무에 대한 이 책의 핵심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용산 참사는 엄청난 인권 유린 사태였음에도 사건 해결이 이토록 요원한 까닭은 무엇인가? 옮긴이에 의하면, 여기에는 인권에 반대하는 세 가지 기제가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통념적 이유, 정치적 이유, 그리고 지적, 이론적 반대이다. 그중에서도 인권에 대한 지적, 이론적 비판은 일곱 가지 범주가 있으며, 이 책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하나하나 답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인권의 대전환>이 앞으로 한국 사회의 모든 사회권 논의의 출발점이자 토대가 되는 논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역자는 말하고 있다.
 
샌드라 프레드먼이 지은 <인권의 대전환>을 한국어로 번역한 조효제 교수(성공회대)를 9일 저녁 전화로 인터뷰했다. 인권 학자가 직접 번역한 이 책에서 최신 인권 이론과 실제를 만나보자. 조효제 교수는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겸 NGO 대학원 교수로, 저서로 <인권의 문법>, 편·역서로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전지구적 변환> 등 다수가 있다. 그는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과 연구위원, 법무부 정책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고, 옥스퍼드 대학 비교사회학 석사, 런던정경대학(LSE) 사회정책학 박사이다.
 
조효제 교수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하버드 대학 로스쿨 인권 연구소의 국제 펠로로 재직하던 중 프레드먼 교수의 새 책 집필 소식을 듣고 깊이 공감하여 한국 독자들에게 알릴 기회를 가진 것이 보람이었다고 얘기한다. 또한 그는 옮긴이 해설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인권 추세에 대해, 개인의 자유를 위해 국가가 자기 억제 의무를 실천해야 할 분야, 예를 들어 집회 및 시위의 자유에서는 함부로 개입하고, 국가가 적극적 의무를 행해야 할 경우, 예를 들어 노동자와 취약 계층의 기본권에는 수수방관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적어도 국가의 존재 의의는 망각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국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이야기한다.
 
- 이 책은 인권에 관한 어떤 내용인가요?
"재미없는 책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인권이라고 하면 민주주의의 일부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국가는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성립되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체제이지요. 이 책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같은 것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권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과 같은 말이고, 반대로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이 인권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지요."
 
- 이 책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나요?
"저도 인권에 관한 책을 직접 쓰고, 또 번역했고, 인권에 관한 책은 많이 나와있습니다만, 이 책은 근래에 나온 인권에 관한 최고의 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일반 민주주의 이론과 인권 이론을 완전히 결부시켰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권 이론을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권리 보장의 의무를 누가 져야 하는가, 국가가 어떤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가, 라는 점에서, 어떤 국가가 진짜 국가냐, 라고 했을 때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진짜 국가다, 라는 것입니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인권의 실현이다, 라는 것이지요. 저자는 자유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국가의 적극적 인권 보호 의무를 가로막는 강고한 이론적 비판들을 하나씩 격파합니다. 소극적 자유를 주장하는 결론의 문제점은 국가가 가치 중립적일 수 있다고 가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가 중립이라는 환상 자체가 국가가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실상을 가리고 있지요. "
 
- 저자는 남아프리카 출신인가요?
"남아프리카에는 원초적 조건의 차별로써 흑인들만 사는 거대한 달동네가 있고, 이 사람들에 대한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신 헌법은 세계적으로 앞서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저자는 남아공 출신으로 요하네스버그의 위츠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전국 최고 졸업상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로즈 장학생으로 뽑혀 가게 됩니다.
2000년에 옥스퍼드 법학부 역사상 최초로 여자 정교수가 되지요. 이것은 옥스퍼드 대학이 12세기에 법학부를 개설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 차별의 현실과 직면해야 했던 경험을 살려 평등과 인권을 공부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지요. 옥스퍼드 대학 법학부 교수이자 같은 대학 엑스터 칼리지의 펠로우이며, 영국 학술원 정회원이에요. 인권, 헌법, 평등, 차별, 노동법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고, 유럽연합, 북아일랜드, 영국, 캐나다 정부를 위해 인권, 평등, 노동 정책 자문역을 수행했지요."
 
- 국가의 의무에 대해 책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국가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실천을 위해 역할을 해야 되고, 이것은 진보, 보수의 문제를 넘어서 국가의 의무에 관한 문제입니다. 국가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의무와 반면에 소극적 의무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더 개입해야 할 때가 있고 덜 개입해야 할 때가 있지요. 용산 참사는 국가가 이것을 반대로 한 것인데요, 용산 참사는 국가의 소극적인 자기 억제 의무와 적극적 의무를 모두 저버린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지요. 개입해서는 안 될 상황에서는 공권력을 투입해 생존권을 지키려는 시민들을 진압함으로써 자기 억제 의무를 지키지 않았음과 동시에, 시민의 주거권 보장이라는 국가의 적극적 의무에서는 뒷짐 지고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요.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극명한 예입니다. 이에 대해 대중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보았을 때 대체로 미온적으로 방관자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 이번 용산 참사에 대해 중학생 조카에게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쉽게 설명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것을 개인들간의 사적인 이권을 둘러싼 분쟁이었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사적인 분쟁이기 때문에 분쟁의 내용에 대해서는 국가는 개입하지 말고, 단지 재산권을 지키거나, 또는 이 집을 재개발을 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그 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나가지도 않을 경우에, 쫒아내는 역할은 국가가 좀 해달라 라는 식의, 국가의 역할을 순수히 일종의 교통정리, 또는 경찰의 역할만 하라, 라고 요구하는 한쪽의 시각과, 또 한쪽에서는 이것이 겉보기에는 사적인 계약이나 상인들간의 어떤 이익을 둘러싼 분쟁처럼 보이지만, 그것의 근본 바탕에는 거주권에 관한 국가 정책의 일반적인 성격이나 거주권과 재개발에 대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와 정부의 관점, 이런 것들이 짙게 깔려있는 상태에서 벌어진 분쟁에다가, 국가가 그 분쟁 내용을 조절하려고 하지는 않고, 단지 그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물리적인 상황만 통제하고 진압하기 위해서, 공권력을 투입해서 해결하려고 했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쉬운 설명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할수록 더 어렵게 되네요."
 
-국가의 적극적 의무준수 메커니즘 모델은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가 굶고 있다고 했을때, 헐벗고 굶주리고 부모도 없는 고아가 된 어린 아이가 있다고 치면, 이 아이에 대해서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인권이론에서는 국가가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것만이 인권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국가가 이 아이에게 아무 일도, 아무 간섭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이 아이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닌거죠. 굶주리고 헐벗고 고아가 된 아이가 있으면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가 이 아이의 자유에 대해서 서울역에 오지마라고 쫒아내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에게 음식도 제공하고, 가정도 제공해주고, 교육도 제공해주고, 사회 안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소극적인 국가의 의무가 아니라 국가의 적극적인 의무라는 거죠."
 
-경제학자 아마티야 센의 자유관도 언급이 되나요?
"왜냐하면, 국가의 억압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기도 하지만, 빈곤, 질병, 저발전, 낮은 교육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저자는 노벨상을 받은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의 적극적 자유관을 토대로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주장합니다.
인권에서 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강압이 없는 상태를 넘어,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나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지요. 이런 관점에 따르면 '폭정뿐만 아니라 빈곤 같은, 조직적인 사회적 박탈뿐만 아니라 부족한 경제적 기회 같은, 탄압 국가의 불관용이나 과잉 간섭뿐만 아니라 공공 서비스의 부족 같은, 반(反)자유의 주요 원천을 제거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 인권에 관한 국가의 적극적 의무는 무엇인가요?
"인권은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국가의 적극적 인권 보호 의무는 모든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인 시민의 참여를 달성하는 데 본질적인 요소이지요. 그렇다면, 국가는 사람들이 민주적 권리를 평등하게 행사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장애물 이를테면 지위, 계급, 성별, 영향력, 정체성 등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제거할 의무가 있지요. 이렇게 볼 때 인권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것은 곧 국가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최대한 확대한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지요."
 
- 공화주의 대의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나요?
"대의제란 결국 현대 민주주의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옛날 아테네처럼 직접 민주주의를 하기는 힘든 것이니까요. 대의 민주주의만으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100퍼센트 보장할 수는 없으므로, 이것을 인권 중심으로 보아 대의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결정이 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인권 원칙에 어긋났을 경우에는 그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을 우리가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과연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인가 라는 것을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위해서 사법부와 시민사회와 각종 비사법적인 기관들, 예를 들어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이런 식의 기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것을 위해서 상승작용적 협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법원과 인권운동과 시민운동과 비사법적인 국가기관 같은 여러 주체들이 함께 협력해서 인권의 향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이런 식의 상승작용적 협동과정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 사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사법부는 정치적 책무성을 가지고 감시자로써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 보완이론입니다. 인도의 공익 소송은 사법부의 문호를 대폭 개방한 혁신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법원은 민주적 압력을 위한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어요. 법원은 시민들을 위해 정부를 법원에 출석시켜 특정 정책을 취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게 하고, 정부에 시민사회와 소통하라고 촉구하는 참여적 윤리의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적극적 인권 보호 문제를 법원에서 심사할 수 있을 때, 사법부는 민주 정치에 간섭하여 민주주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기능을 할 수 있지요. 따라서 특히 인권 관련 소송에서 법원은 가장 약한 집단의 목소리를 보장해주어야만 정당한 민주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권의 대전환>은 법철학과 사회학 분야에서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인권 관련 연구를 집대성한 본격적인 인권 연구서이자, 인권 개념의 대전환을 이끌어낸 대담하고 획기적인 인권 이론서이다. 전통적 인권 담론에서는 권리의 주체인 개인은 강조되었지만, 개인의 권리를 충족시킬 의무가 있는 또 다른 주체인 국가는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다. <인권의 대전환>은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인권 개념의 근본적인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적극적 의무란 무엇인가'에서는 인권을 위해서는 국가의 소극적 의무뿐 아니라 적극적 의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법철학과 사회 이론의 측면에서 규명하고, 인권이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임을 설명한다. 2부 '법의 지배와 사법부의 역할'에서는 법원은 민주적 정치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며, 시민들의 참여를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3부 '인권 실현의 권리와 의무'에서는 이론 틀을 실질적 권리에 적용하여, '인정의 평등'과 사회적, 경제적 권리에 나오는 '분배적 평등'의 상호 작용을 검토하고, 모든 인권 이론을 동원하여 주거권, 교육권, 복지권 영역에서 실제 사례 분석을 시도한다.
 
실제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 소송 사례를 통해 법원과 정치권, 시민운동 등이 힘을 합쳐 적극적 인권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도 제안한다. 저자는 10개국(미국,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아일랜드, 체코, 벨기에, 유럽연합,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의 약 100여 개 인권 관련 주요 판례들과 인권 실현을 위한 각국의 정책적 활동을 소개한다. 북미,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의 주요 사법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은 한국 사법부도 국내 적용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하고 연구해야 할 내용이다.
 
더불어 소개하고 싶은 책은 경제계의 마더 테레사라고 불리우는 아마티야 센의 기념비적 저서인 으로 국내에 <자유로서의 발전>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개발, 또는 발전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개발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증진하기 위한 것이다. 한명숙 전 총리가 감명깊게 읽은 책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 책은 절판 상태이다. 명사가 추천하는 책, 지금까지 가장 나를 움직인 책으로 다시 인쇄를 부활할 수는 없을까? 이 책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왜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출판한 세종연구소의 재원이나 독지가의 기부 또는 로또 기금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투자하면 이 책을 단 1만부라도 인쇄하여 전국의 모든 도서관에 보급할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공짜이고, 도서관에서 이 책을 공짜로 읽으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책 가운데 하나를 공짜로 얻는 것이다.
 
국가가 왜 발전해야 하는지 알고 싶은가? 주거, 교육, 복지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를 잊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지금 '인생 뭐 있어?'라는 노래를 듣고 있는가? 이 책의 도입 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개발은 하나의 과정인데, 사람들이 향유하는 진정한 자유를 증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유에 촛점을 맞추는 개발은 GNP 성장이나 산업화, 기술 진보 같은 좁은 관점의 개발과  대비된다. 자유는 교육, 의료, 정치적 권리, 시민의 권리에 의해 결정된다. 자유로써의 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자유의 주요 원천을 제거해야 한다: 빈곤, 폭정, 부족한 경제적 기회, 체계적인 사회적 결핍, 교육과 의료의 부재, 비관용, 정부의 억압 등이다. 자유는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자 발전이 달성하는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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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경제 디자인>(이정우 외 지음, 바로세움 펴냄)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있을 듯 하지만, 전반적인 내용을 알아두면 좋은 책이라고 본다.
   
"내 아이를 위한 가장 좋은 투자는?" (프레시안,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009-12-26 오전 1:26:06)
[철학자의 서재] <행복 경제 디자인>(이정우 외 지음, 바로세움 펴냄)
 
평소 우리 사회가 '좋은 삶'에 대한 지나치게 획일적인 가치 지평밖에 모른다고 한탄하고 다녔더랬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존중 받고 장려되는 사회를 만들자고 떠들곤 했었다. 그러나 어쩌면 나도 내심으로는 딸아이가 외고에 가고 명문대에 진학해서 좋은 직장을 얻는 그런 수순을 따라 사는 통상적인 의미의 '성공한 삶'을 살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닌 척했지만 사실은 더 지독한 속물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겠지만, 엄살이 아니라 학령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 지방대 교수인 나도 자식들을 언제까지 제대로 교육시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내가 벼락부자가 될 일은 없을 것이고, 무슨 대책을 세우긴 해야 할 텐데 앞이 캄캄하다. 백면서생인 내가 '재테크' 같은 것을 할 줄 알 리도 없고 애들에게 '자발적 가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애비 부담을 덜어 줄 길을 가라고 꼬드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정말 큰일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나 자신도 안쓰럽지만 이놈의 나라가 정말 한심하다. 도대체 입시지옥이니 사교육 광풍이니 하는 이야기가 언제 적 이야기인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해가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유학 시절 경험했던 독일 같은 나라를 떠올려 본다. 대학 등록금이 거의 없었던 나라였다. 지금은 사정이 변해 조금은 등록금을 받는다지만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는 학생들이 단순히 등록금이 아니라 생활비까지 거의 무이자로 국가로부터 대출받아, 원하기만 하고 수학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공부를 할 수 있다. 꼭 대학을 안 가더라도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살 걱정 크게 안 해도 된다. 학생 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돈 한 푼 안내고 무슨 질병이든지 치료받을 수도 있다. '껌 값' 정도만 내면 학생들은 대중교통이나 다양한 문화 및 체육 시설을 거의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당연히 무슨 사교육 같은 것이 판을 칠 리도 없다. 정말 자식 키우기 좋겠다며 부러워해 본다.
 
그러다가 문득 '답'이 아른거린다. 결국 문제는 우리나라를 독일 같은 '복지 국가'로 만들면 해결되지 않을까? 달리 별 다른 재산도 없고 돈 벌 재주도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녀들을 위해 마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책은 바로 우리나라를 교육 문제 같은 것은 크게 걱정 안 해도 되는 그런 나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인 투자 같은 것의 엄청난 리스크를 감안한다면, 지금 당장이야 무슨 수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자녀들을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가 아닐까?
 
무슨 수로? 독일 사람들이 자기네 헌법에다 복지 국가를 뜻하는 '사회 국가'에 대한 지향을 못 박아 놓고 여러 제도들을 정비하기 시작하던 때 그들이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1인당 GNP 같은 것이 훨씬 높아서여서는 아니었다. 복잡한 사정을 단순하게 말하는 감은 있지만, 결국 국가의 의무나 책임 또는 민주적 정치 공동체의 목적 같은 것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이 달라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철학을 실천해 온 성숙한 정치의 힘 덕분에 지금 같은 나라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독일 같은 복지 국가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경제 발전이 충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치가 후진적이라서 그런 거다. 문제는 정치다. 만약 우리나라도 좋은 정치를 할 수만 있다면 우리나라를 독일 같은 나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해법은, 갑갑한 마음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제 석학들의 이야기를 모았다기에 들춰 본 <행복 경제 디자인>(이정우 외 지음, 바로세움 펴냄)의 제목을 이용해 표현해 보자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경제를 디자인해서 그것을 차근차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정치'에 있다.
 
경제를 디자인한다는 발상이 거슬리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왠지 망해버린 소련 식 '계획 경제'가 떠올라서 그럴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도 경제는 그저 시장 논리에 내맡겨 두어야 한다고 귀가 따갑게 세뇌 받아서일 게다. 그러나 이병천이 이 책에서 폴라니를 통해 분명히 해 준 것처럼 '시장 사회'라는 것이 사실은 이미 계획되고 정치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그 자체로 얼마나 강한 정치적 프로그램인지는 부자 감세나 노조 파괴 같은 이명박식 정치의 한두 가닥만 떠올려 보면 너무 쉽게 분명히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역시 나름대로 계획된 경제이고 철저하게 디자인된 경제인 것이다. 문제는 어떤 경제인가 하는 것이지 경제를 디자인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아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경제를 디자인하는 것,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만 살아남고 패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죽이는 경제가 아니라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경제를 설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
 
학문적 배경들이 다 다르고 서로 간에 얼마간의 차이들이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분명하게 또는 은근히 '복지 국가' 또는 (좁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광의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라고 부를 만한 경제 체제를 지금은 무너져 버린, 그러나 우리나라는 여전히 열심히 쫓고 있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이 될 행복 경제의 모습이라고 그리고 있다. 우리가 무슨 급진적인 혁명 같은 것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래도 오늘날의 우리 상황에서 우리가 가진 많은 고통스런 삶의 문제들을 얼마간이나마 해결해 줄 수 있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추구해 봄직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 독일 같은 유럽 나라들에서, 그러나 사실은 더 모범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나라들에서 잘 실현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체제 같은 것이란다. 가령 베네수엘라 식의 사회주의는 참된 대안이 아니다(김수행).
 
다른 문제는 제쳐두고 지금 나와 그밖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교육 문제에만 비추어서 생각해 보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그렇게 칭송해 마지않았다는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무슨 민족성 같은 것과는 무관하고 어쩌면 재미있게도 우리나라가 벤치마킹해 보려고 안달이 난 미국형 자본주의 모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장 만능주의 자유시장 경제 모델에서는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주로 개인의 성공과 책임에만 맡겨 놓고 국가가 감당해야 할 분배나 복지 문제는 아주 등한시한다. 당연히 생존 경쟁은 극한적으로 치열해질 것이고 빈부 격차는 끊임없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어떤 생존 전략으로서의 교육열 같은 것이 비이성적으로 불붙을 수밖에 없다.
 
짐작컨대 미국에서는 그 동안 국가 전체적으로 높은 부의 수준 그리고 빈부 격차와 인종 격차의 중첩 같은 요인 때문에 그에 대한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 하거나 은폐되기는 했을 것이다. 이제 쪽박을 차게 되니까 대통령부터 나서서 뜬금없게도 우리나라를 끌어들이며 좀 더 적극적인 경쟁 적응의 필요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미국과는 사정이 달라 그와 같은 연관이 매우 악성적으로 또 아주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치명적인 효과를 낳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만약 사회적으로 생산된 부가 조금만 더 평등하고 정의롭게 분배된다면, 가령 '블루칼라'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격차가 그리 크게 벌어지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합리적으로 조정되어 노동시장에서 덴마크 식의 '유연 안정성' 같은 것이 확보될 수 있다면, 또 예컨대 누구든 수학 능력이 되고 의지만 있다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공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확립된다면, 그래서 만약 사회의 모든 성원이 극한적인 경쟁 구조의 바깥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마도 교육열이라는 이름으로 고상하게 포장된 온갖 종류의 자녀들에 대한 사디즘을 당장이라도 그만두거나 최소한 크게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교육시킬 일이 걱정이 되어 자녀들을 못 낳겠다는 부모들도 줄어들 것이고, 덕분에 앞으로는 나 같은 지방대 교수들이 '입시 시장'에 뛰어들어 학생 모집한다고 혈안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생존'이라는 실체도 모를 '유동하는 공포'(지그문트 바우만)의 장난에 놀아나 온 인생을 어떻게 경쟁에서 살아남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런 이상을 현실의 제약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거기에서 출발하여 그 현실을 변경하고 개선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 지적으로 고안된 현실 그 자체의 가능성으로 가공해 낼 수 있다면, 문제는 우리가 디자인한 행복 경제가 지닌 현실과의 (보기에 따라서는 엄청난) 간극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런 이상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지침으로 삼아 현실을 바꾸어내려는 집합적 의지와 노력이 진짜 문제다.
 
그런 복지를 위한 재원은 어디서 나오느냐고? 여기서는 원론적인 이야기밖에는 할 수 없지만, 큰 틀의 방향만은 분명하다. 손상익하(損上益下). 조선시대 정조 대왕의 원칙이란다(이정우). 오늘날이라면 부자들에게는 더 많은 세금을 매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기본 소득'이든 '마이너스 소득세'든 또는 그 무엇이든 보장해 주는 그런 원칙이다.
 
열심히 일해 큰돈을 벌었거나 앞으로 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훼손할 것이라고? '좌파'라고? '좌도우기(左道右器)'를 표방하는 김윤상의 '지공주의(地公主義)'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시라. 이 땅에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이 이 땅의 토지에 대해 누구든 공평한 지분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로부터 나오는 이익을 공정하게 분배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만 인정한다면, 시장경제와 경쟁을 한껏 인정하면서, 그러니까 우파적으로, 복지와 같은 좌파적 가치를 실현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가 제안하는 '토지 보유세'의 부과 같은 방식으로 복지를 위한 재원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고. 물론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겠지만, 다른 나라들도 다 하는데 우리라고 복지 국가를 못 만들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나도 안다. 문제는 결국 정치다. 복지 국가든 사회민주주의든 그런 것을 추구해야 마땅함직한 이 땅의 진보 개혁 세력의 현실을 생각하면 다시 한숨이 나온다. 지리멸렬한데다 사분오열 되어 있다.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구체적인 방법론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추구하는 정치 이념은 다들 너무 추상적으로만 여겨지고, 내 놓은 정책들이라는 것도 대개는 한 쪽은 너무 우파적이고 다른 한 쪽은 너무 좌파적이다.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는 진보적 대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예 없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보편성을 지향하면서도 '구체성의 우위'라고 할 만한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너무 모르는 듯하다.
 
사회과학적으로 냉정하게 보면 우리나라는 복지 국가나 사회민주주의 같은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이나 토양을 많이 결여하고 있다. 경제 성장이 덜 되어서가 아니라, 가령 잘 조직된 강력한 노동조합도 그에 기반을 둔 정당도 없다. 민주적 연대를 향한 문화적 토대 같은 것도 매우 약하다. 주류 기득권 세력은 너무 막가파식이어서 조그만 양보도 꺼려한다. 이런 조건에서 추상적이기만 한 좋은 이념을 앵무새처럼 되뇌면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현실의 개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상황을 고착시키고 영속화하는 데만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이 책에서 이정우도 유사하게 지적했지만 우리나라에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시민 정치'의 전통이 있다. 지난 '촛불 항쟁'은 여전히 생생하고 확대된 그 전통의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같은 데서는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적 길' 같은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도 있다. 또 그렇다면 아마도 '정치적 자유'에만 집착하는 '개혁 세력'과 '(재)분배'만 고집하는 '진보 세력'의 구분 같은 것은 전혀 무익하고 해롭기만 한 정치적 악일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상상력, 그러나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 위에서 펼쳐지는 어떤 '엄밀한 상상력'(아도르노)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민주주의 또는 정치적 개혁이야말로 한 나라의 복지 국가성 또는 사회 모든 성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시민권의 확보를 위한 참된 지렛대였음을 알 수 있다. 사회의 모든 성원이 민주적 정치 공동체의 평등한 시민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었기에 그 시민들이 민주적 참여와 자유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물질적 조건을 확보하고 양질의 교육을 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도 자리 잡고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것이야말로 참된 보편성일 것이다.
 
분배가 중요하다고 그 가치만을 중심으로 진보 정치를 하자는 것은 내가 볼 때 현실을 조금도 바꿀 수 없는 낭만적 이상주의일 뿐이다. 그 이상주의자들이 폄훼하듯 말하곤 하는 '절차적 민주주의' 없는 분배 실현에 대한 요구는 한갓 연목구어다. 반면 이른바 개혁 세력은 지난 민주 정부 10년이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어 냈지만 너무 신자유주의에 양보하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소홀히 함으로써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그 결과 오늘의 정치 현실을 낳고 말았다는 식의 이른바 진보 진영의 평가에 깊이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설사 그런 평가가 완전히 옳지는 않다 하더라도 사회의 민주적 연대성을 확보하기 위한 사회경제적이고 법적인 제도들의 정착 없이는 정치적 자유는 그야말로 공허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형 사회민주주의'라고나 할까, 아무튼 보편성에 대한 감각과 지향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새로운 정치의 탄생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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