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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 반대한다-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알피 콘 지음·이영노 옮김/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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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인간 본성? 생존엔 협력이 적합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2009-10-21 16:27)
'경쟁에 반대한다' 번역, 출간
 
인간은 늘 경쟁을 하며 산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자연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므로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경쟁심 역시 자연스러운 본능이자 본성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미국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은 '경쟁에 반대한다'(산눈 펴냄)에서 경쟁심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는 것은 경쟁을 부추기려는 사람들의 핑계일 뿐이지 사실 경쟁심은 오로지 학습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다윈 역시 '생존 투쟁'이란 용어를 다른 생물에 의존하는 것을 포함해 아주 폭넓고 비유적인 뜻으로 사용했다"면서 '자연선택'에서 생존이란 후손을 볼 정도로 환경에 잘 적응하는지가 문제이지 치열한 경쟁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쟁심이 인간 본성이 아니라면 답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학습'이다. 인간은 집에서부터 유치원, 학교, 직장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경쟁하며 자란다. 아주 작은 문제 풀이 하나를 놓고도 다른 사람에 대한 열등감과 우월감에 빠지게 되므로 경쟁 심리는 마음속에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나간다.
 
한국인들은 흔히 국내 학교가 유독 경쟁이 심하며 선진국은 덜한다고 생각하나 이 책에 제시된 사례들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저자는 최근 미국에서도 "더 좋은 유아원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위해 젖먹이에게도 준비학습이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했다"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이미 1등에 대한 압박은 새로울 것도 없고 경쟁이 체계화, 수치화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경쟁이 생존과 관계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치'라고도 말한다. 원시적인 삶에 좀 더 가까운 부족들의 생활 방식을 보면 자연과 생사를 건 투쟁을 할지는 몰라도 사회적 투쟁이라는 '사치'는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쟁을 둘러싼 또 하나의 오해는 경쟁이란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남을 누르려고 애쓰는 것'이 다른 차원이라는 점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예술가들이 경쟁을 중시하면 무대 위에서 탁월한 예술성보다 얄팍한 기술력을 강조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결과가 생기며, 경쟁심은 공장에서 품질을 높이는 역할보다 안정성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경쟁심이 적당한 자극을 넘어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되면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인간을 경쟁 사회로 몰아넣는 '희소성의 가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저자는 희소성이라는 개념도, 경쟁에서 이겼을 때 얻는 보상도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가치일 뿐이지 실재하는 가치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제목 그대로 '경쟁에 반대(원제 No Contest)'하는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협력'이다. 자연으로 돌아가 보면, 각 개체가 서로 싸우기보다 힘을 합치는 편이 오히려 생존율을 높여준다. 학교와 직장에서도 협력은 개개인에게 자신감과 자존심을 높이며,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낸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나 독자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의문이 떠오를 법하다. 이미 이 사회가 경쟁 시스템을 갖춰 놓았는데 경쟁을 포기한다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겠는가.
 
교육심리학자인 저자는 이에 대한 답변을 교육으로 돌린다. "우리가 두 가지 노력을 동시에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아이들에게 사회에 나가서 맞닥뜨릴 일을 준비시키는 동시에, 그 일들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이미 승패의 구조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경쟁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핵심인 경쟁에 대한 더 넓은 안목과 협력적 제도의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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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숭배’ 사회에 구역질을 허하라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9-10-23 오후 07:45:52)
경쟁이 인간본성이라는 ‘거짓 신화’ 해부
‘기득권 재생산’ 합리화 모순구조 한눈에

〈경쟁에 반대한다-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알피 콘 지음·이영노 옮김/산눈·1만5000원/368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도 하는데 미국이 못할 게 뭐 있겠느냐고 했다는 몇 가지 얘기들 가운데 교육문제도 들어 있었다. 그는 한국 학생들의 긴 학과공부시간을 부러워했다는데, 그게 마치 한국 학교교육의 우수성을 검증받기라도 한 양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유포했다. 그가 유독 한국과만 그런 비교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미국 교육체제를 거침없이 비판해온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의 <경쟁에 반대한다>(산눈)를 보면 납득이 가는 구석이 있다. 콘은 미국 학교교육의 근본문제는 책 제목부터 그렇듯이 바로 경쟁제일주의라 지적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동원한 많은 구체적 사실과 비판논리들, 문제의식은 뜻밖에도 한국 교육에 그대로 적용해도 별문제가 없을 정도인데, 그것은 말하자면 한국교육이 그만큼 철저히 미국화돼 있다는 또 하나의 방증이겠다.
 
오바마 대통령이 하필 한국 교육을 거론한 것은 아마도 그게 미국 교육의 판박이여서 단순 평면비교가 가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두 나라 경쟁 위주 교육이 질적으로 큰 편차가 없다면 미국 교육이 한국 교육에 뒤지는 것은 양적 결손, 곧 연간 학업시간이 미국 쪽이 한국보다 월등 짧다는 것이고, 그래서 한국만큼 학교공부 시간과 과목 수만 늘리면 문제는 해결된다는 식의 결론이라도 혹시 내린 게 아닐까. 만에 하나 그랬다면 오바마는 번지수를 영 잘못 짚었다. 미국 교육이 망가진 근본원인은 바로 경쟁제일주의 때문이라는 게 알피 콘의 생각이다. 따라서 콘의 분석이 옳다면, 한국 교육도 조만간 미국 교육의 실패를 뒤따를 가능성이 높다.
 
<경쟁에 반대한다>에 따르면, 경쟁제일주의는 “너무나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근거 없는 “네 개의 신화”를 토대로 삼고 있다. 첫째는 경쟁이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라는 것, 둘째는 경쟁이야말로 우리가 최선을 다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경쟁이 없으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 그리고 셋째는 경쟁하는 게 재미난 삶을 꾸리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 마지막 신화는 경쟁이 인격을 형성하고 자신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기득권 유지에 집착하는 보수세력이 대체로 이런 신화를 열렬히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른바 진보세력조차 과도하고 불공정한 경쟁이 문제지 ‘적당한 균형’만 잡을 수 있다면 경쟁은 생산적이고 즐겁고 활기찬 것이라고 여긴다면서, 그게 아니라고 콘은 말한다. “경쟁의 문제는 경쟁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 연구를 통해 확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콘에 따르면 경쟁이 필연이라는 주장은 검증된 적이 없다. 오히려 인간사회에서 협력은 필수적이며, 경쟁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입·학습되고 사회화된 현상이며 경쟁심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문화적 규범이라는 것이다. 인간세계를 포함한 다양한 자연의 재생산은 투쟁보다는 대부분 평화적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고 콘은 지적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이나 동아시아 민족들과 비교하더라도 경쟁제일주의는 서구문명에 특이한 현상이며 특히 미국에서 과도하다.
 
경쟁이 생산적이라는 신화에 대해서도 협력이 오히려 더 생산적인 현실의 다양한 사례들로 반박한다. 경쟁은 왜 실패하는가? 콘은 존 놀스의 소설 <갈라진 평화>에 등장하는, 볼테르의 <캉디드>를 읽고 빠져들어 볼테르의 다른 저작들을 섭렵한 체트 더글러스와 오로지 1등을 하기 위해 성적 내기에 필요한 것들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댄 주인공 ‘나’를 대비시킨다. 그는 “학생들에게 여러 과목을 학습시키는 이유는 그들의 인생을 돕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그 자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며 성적 따기 경쟁은 공부의 내적 동기 및 정말 꼭 배워야 할 무엇인가를 배제해버린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학생들에게 하찮고 경멸스러운 보상들-‘참 잘했어요’라는 도장, 100점이라는 표시를 한 채 벽에 붙어 있는 시험지, A라고 쓴 성적표, 우등생 명단,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클럽의 열쇠, 곧 간단히 말하면 다른 학생들보다 내가 좀 낫다는 저열한 만족감-을 장려하고 강요하는 것으로 아이들의 그 의지를 꺾어버린다.”(<아이들은 어떻게 실패하나> 존 홀트) 나의 승리와 기쁨은 남의 실패와 비참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고, 오로지 상대를 꺼꾸러뜨려야만 내가 이기는 제로섬 게임인 경쟁은 우주론적으로 보면 허상에 가까운 개별적 자아의 절대성에 모든 걸 기대고 있다.
 
또 그는 경쟁하지 않는 놀이가 더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 경쟁에 기초한 스포츠가 현실의 지배구조와 관료화된 사회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사회화 구실을 하며, 경쟁 없는 게임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런 사회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파헤친다. 그리고 경쟁은 자존심과 인격을 키우는 게 아니라 파괴하며, 경쟁에서의 패배는 실패일 순 있어도 나쁜 일은 아니라는 그럴듯한 얘기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경쟁은 결과 지향성, 양자택일의 흑백논리, 순응적 태도와 획일성을 낳는다. 그 결과 경쟁사회의 탈락자조차 문제의 해결책을 그런 사회를 거부하고 바꾸는 데서 찾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타자들을 패배시키고 자신이 올라서겠다는 불가능한 환상에서 찾고 자신의 실패 원인을 자신의 무능과 불운 탓으로 돌린다. 불공정한 계급재생산 구조는 그렇게 해서 완성된다. 이를 반기며 기뻐할 사람들은 그 구조 덕에 권력과 힘을 영속시킬 수 있는 기득권층이다.
 
전국 일제고사와 수능성적으로 성적순 줄세우기를 하고, 그 상위에 자신들의 자식들을 줄 세우기 위해 특목고를 만들고 위장전입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른바 ‘사회 지도층’의 비열함, 도덕적 저열성이 기득권(계급) 재생산을 겨냥한 것이고, 경쟁제일주의가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수단이 되는 한국사회 모순구조가 알피 콘을 읽으면 한결 명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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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 콘의 제안 “경쟁교육 대신 협력학습”
적극적 상호의존 통해 공동의 목표 갖는 공부법

 
“이젠 병원, 학교, 기업, 그리고 정부도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이는 타인을 이기는 것과 일을 잘하는 것을 전혀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경쟁에 대한 개념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경쟁력을 강화하면 어떤 일을 탁월하게 잘할 수 있느냐고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의 학교는 이제 너무 경쟁적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알피 콘은 <경쟁에 반대한다> 1992년판(초판은 1986년)에 자신의 책 <경쟁 대 탁월성>(Competition vs Excellence)에서 따온 이 구절을 인용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동안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사회 모든 분야에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얘기도 결국 미국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로널드 레이건 정부 이래 30년 가까이 계속된 공화당 주도 신자유주의 정책하의 미국 역대 정부(1990년대 8년간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이 이어졌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한 점에선 공화당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경쟁 제일주의 교육이 재앙을 부를 것이라는 콘의 경고를 무시했고, 이제 무참하게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교육과 비교하며 미국 교육의 실패를 거론한 것이 관심을 끄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오바마는 자신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교육이 경쟁제일주의의 미국제 교육이념을 직수입해 약간 손질한 것이라는 것, 이대로 가면 한국 교육도 결국 미국의 실패를 뒤따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콘이 경쟁제일주의 교육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협력학습’이다. 협력학습이란 “학생들이 짝을 이루거나 작은 그룹을 만들고, 적극적인 상호의존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갖고 함께 공부하는 것”이다. 잠시의 학습 분위기 전환이나 그룹 간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기존 그룹별 수업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협력학습은 그룹 내, 그룹 간 경쟁요소는 배제했으며 잘잘못에 대한 보상과 벌도 없는 완전자율 학습구조다. 단답식 정답을 요구하지도 않고 일치된 의견이나 동의를 구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함께 배우고 경쟁하지 않으면서 구성원의 자존심과 상호의존·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높이고 학업 성취도도 높이는 방법이다.
 
콘은 아이들이 외적 보상 등의 유인 요소가 있을 때만 협력할 것이라는 추정은 인간 본성에 대한 매우 냉소적인 견해라며 배격한다. 제대로 된 환경에서는 남을 돌보는 것이 자신을 돌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쟁제일주의는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구조가 낳은 것이자 그 구조를 확대재생산하는 장치인 셈이다.
 
콘은 여러 연구 결과들을 분석해 협력학습이 경쟁에 의존하는 기존 표준학습방식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낳은 케이스가 수백 건의 검토 사례의 87%에 이른다는 실증자료들도 제시했다. 그는 협력학습을 경쟁문화와 개인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또 교사의 교실 통제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교사들, 그리고 훌륭한 인격체보다는 표준시험지 답안지를 잘 작성하는 학생을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는 그들의 불안감이 협력학습 도입을 막는 견고한 장애물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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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여는 책]‘경쟁에 반대한다’ (내일, 박상주 칼럼니스트, 2009-10-30 오후 12:38:18)
경쟁보다 협력이 낫다
이기기 위한 경주에 낭비하는 삶의 질곡 지적

 
경쟁에 목숨을 거는 사회다. 영어 조기교육 경쟁은 초등학교에서 유치원, 유아 단계를 넘어 서더니 이젠 태아에게 영어교육을 시키는 단계로까지 돌입했다. 뱃속의 아이들에게 영어 동요와 이야기 테이프를 틀어준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어린이들에게 미국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가르치고, 유치원 아이들에게 원어민 회화수업을 시킨다는 소리를 들은 게 엊그제인데, 영어 태교까지 나갔다면 다소 이성을 잃은 단계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자꾸 든다. 초등학교 때부터 국제중학이다 외국어고다 입시준비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고등학교는 소수점 이하까지 계산된 점수대로 서열이 매겨져 신문에 발표된다.
 
아이들만 경쟁에 시달리는 게 아니다. 직장에 다니는 부모들은 승진 경쟁과 구조조정에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해야 한다. 동료를 밟아야 내가 살 수 있는 사회구조다. 토마스 홉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한민국은 ‘만인의 만인에 투쟁’으로 치닫고 있다. 태아 때부터 경쟁을 강요받기 시작한 이 땅의 인생들은 죽을 때까지 경쟁으로 시들고 진이 빠진다. 이처럼 경쟁 속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우리사회에 누군가 화들짝 정신을 들게 하는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
 
미국의 교육심리학자인 알피 콘의 저작인 ‘경쟁에 반대한다’(산눈 출판사)라는 책이 던지는 도발적 질문이다. 한마디로 경쟁은 백해무익하므로 한시바삐 지구에서 몰아내야한다는 게 책의 요지다. 경쟁은 학교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는 데나, 공장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나, 연구소의 연구 실적을 높이는 데나 어디에서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인 것이다. 심지어 ‘건전한 경쟁’ 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순이라는 확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성취와 경쟁과의 연관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한정된 자원이 경쟁을 유발한다는 주장 역시 근거 없는 허구라고 주장한다.
 
“한 사회 안에서 경쟁심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문화적 규범이지 자원의 풍족함이나 부족함에 의한 것은 아니다. 미드가 말했듯이 사회 구성원이 경쟁하여 획득할 것이냐, 협력하여 나눌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그 필요한 재화의 실제 공급량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개인간의 경쟁이나 협력 중 무엇을 더 강화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59쪽)
 
책은 이미 경쟁 이데올로기 속에 깊숙이 세뇌된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다. 책은 묻는다. ‘경쟁은 필연적인가? 그것은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것인가?’ 책은 인간이 경쟁의 속성을 본능적으로 타고난다는 주장은 허구라고 일축한다. 인간은 이기려는 동기나 경쟁하려는 성향을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 경쟁을 학습한다는 것이다.
 
책은 또한 ‘경쟁이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무너트린다. 경쟁은 생산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헬름라이히는 또 다시 두 건의 연구를 진행했는데, 하나는 남성 기업인에 대해 그들의 연봉으로 성취도를 측정했고. 또 하나는 1300명의 남녀 대학생에 대해 그들의 평균 학점으로 성취도를 측정하였다. 그 결과 경쟁심과 성취도 사이에는 서로 부정적인 연관관계가 조재한다는 것을 알아냈다.”(77쪽)
 
헬름라이히는 특히 이 실험을 통해 “보통 성공적인 기업인은 매우 경쟁적이다”라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기업가로 성공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로서 경쟁심을 꼽는 것은 편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책은 경쟁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협력을 제시한다. 생산성을 높이고 성취감을 얻는 데 경쟁보다는 협력이 훨씬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서로 힘을 합쳐 페인트를 칠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요리를 하면서 격려와 배려, 의사소통, 신뢰 등 긍정적인 상호관계가 형성되면서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경쟁과 비교하여 협력체제에서 보상의 분배는 개인과 집단의 생산성, 개인의 학습능력, 인간관계, 자존심, 일을 대하는 태도, 타인에 대한 책임감, 등에 더 좋은 영향을 미친다. (…)일반화된 사회적 관념과는 맞지 않지만, 충분히 연구된, 믿을 만한 결과이다.”(235~236쪽)
 
그렇다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경쟁을 몰아내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책은 구조적 경쟁을 협력으로 바꾸는 데에는 집단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집단적인 행동을 위해서는 교육과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경쟁의 폐해를 확실히 인식하고, 이를 생산적인 협력 구조로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개인 인식의 변화, 그리고 그것을 통한 집단적인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교육을 줄이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정치인들과 교육당국 관계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갈수록 학생들을 무한경쟁 속으로 몰아넣는 방향으로 교육제도는 바꾸면서 사교육을 잡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야말로 병 주고 약주는 이율배반적 행위다. 학생들을 경쟁으로 몰아넣는 점수 줄 세우기 교육을 중단한다면 사교육 광풍은 금방 수그러들 것이다. 그 피 말리는 경쟁을 조금만이라도 누그러트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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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한겨레 2009.10.30 제783호, 구둘래 기자)
[출판] ‘소거법’으로 경쟁의 필요성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경쟁에 반대한다> 
 
교육심리학자인 알피 콘은 지난 10년 동안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 붙잡고 경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결론은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경쟁 완화’라는 당위적 주장일까? 그는 아예 경쟁이라는 물건이 쓸모없다고 말한다. 물고기가 물이 없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듯이, 인간도 단지 ‘경쟁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할 뿐이다. 저자는 ‘소거법’으로 경쟁에 대한 무의식적·의식적 동의를 제거해나간다.
 
먼저 경쟁이란 인간의 본성인가? 수많은 문헌에서 당연시하는 말이지만 경쟁을 본성에서 나왔다고 ‘증명’하는(혹은 증명할 수 있는) 과학 논문은 없다. 일부 사회생물학자는 ‘자연선택’을 ‘적자생존’으로 번안했는데, 이 용어는 다윈이 아니라 스펜서가 사용했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경쟁을 요구하는 진화란 없다고 말한다. “성공을 더 많은 자손을 남기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 목표는 상호부조와 공생을 포함하는 다양한 전략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쟁은 교육현장에서 필수적일까? 마거릿 플리퍼드의 초등학교 5학년 어휘력 학습, 모턴 골드먼의 철자 바꾸기 게임, 어바이네 워키의 카드놀이 연구 등에서 나온 결론은 이렇다. ‘경쟁보다 협력할 때 더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비슷한 122건의 연구 중 이와 같은 결론은 65건, 반대는 8건, 차이가 없다는 36건이었다.
 
그래도 자본주의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경쟁’인데? 경제제도의 경쟁은 희소성의 원칙에서 나왔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유일한 필수품이란 거의 없다.”(에이미 페피톤) 수요·공급 곡선은 ‘완전경쟁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일 뿐이다. 실물경제에서 실제로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는데, 진보학자조차도 ‘불공정 경쟁’만을 문제 삼을 뿐 엉터리 ‘경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포츠는? 승리의 짜릿한 전율이 없다면 무슨 재미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도전과 경쟁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된다.” 오락 활동 요소를 분석하면 대부분이 경쟁과는 관련이 없다. 말하자면, 어제 한국시리즈를 본 뒤 응원하는 팀이 이겨서 기뻐 술을 마신 사람은? 져도 술 마실 사람들이다.
 
‘미쿡 사람’인 저자는 미국이 유난히 더 경쟁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일화를 전한다. 미국인 교사가 영국 초등학교를 방문해 물었다. “이 중 누가 가장 영리하지?” 아이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학습장의 ‘잘했어요’ 도장, 칠판에 나가 문제를 못 풀고 있는 아이 뒤통수에서 “저요, 저요!”라고 외치게 만드는 환경이 “모두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라고 묻는 아이를 바꿔놓는다. 이 미국인 교사가 한국에 와서 물었다면 질문을 받은 아이는 “쟤가 1등이고요, 저는 23등입니다”라고 답했을지도 모른다.
 
경쟁이란 군중 속에서 까치발을 드는 것이다. 한 명이 들기 시작하면 모두 까치발을 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경쟁이란 어디에 쓰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없애야 할 물건이다. “무엇인가 필연적이라는 주장들(특히 인간 본성과 같이)은 전형적으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다.” 현상을 유지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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