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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카스 R 선스타인 지음

1960년대 초 쿠바가 소련의 미사일을 도입하려고 했을 때 미국이 이를 막기 위해 해상봉쇄라는 무모한 정책결정을 내린 사례는 이후 정부 정책결정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사례이다. 이는 집단사고의 폐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며, 이후에 앨리슨(Graham T. Allison)이 쓴 [결정의 에센스](Essence of Decision: Explaining the Cuban Missile Crisis, 1971)에 잘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집단 의사결정이론에서 논의되었던 모형에 정치적 결정을 추가한 것으로 유명하다(합리모형, 조직과정모형, 그리고 정치모형). 
 
사실 더 중요했던 것은 집단사고(group thinking)가 집단 내의 이견이 결여되어 발생했다는 점인데, 정책학에서는 정책결정 모형 자체에 주목했을 뿐, 이견의 건강성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선스타인의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는 이 점에서 앨리슨의 책을 보완하여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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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방부제…그 이름은 ‘No 맨’ (한겨레, 이충신 기자, 2009-11-06 오후 09:10:20)
다수의 폭력 낳는 ‘집단사고’ 고발
편견·통념 뒤집는 이견의 건강성
사회 지키는 ‘딴지’의 중요성 강조
 
 
인간 행동 대부분은 정보와 평판에 따른 사회적 압력의 산물이다. 다른 사람들의 행위와 진술을 통해 전달된 정보와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으려는 보편적 열망 때문이다. 동조는 재판과 같은 사회적 현상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덜 보수적인 판사가 보수적인 두 명의 판사와 함께 판결을 내린다면 그 판사가 보수적인 판결을 내리는 경향은 강화된다. 그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동조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해 이견을 내지 못하게 한다. 사회적 압력은 개인과 조직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은폐, 히틀러에 대한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챌린저호를 발사하겠다는 나사(NASA)의 결정, 1941년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등은 모두 이런 ‘집단사고’의 결과다.
 
동조가 유행처럼 번지면 사회적 쏠림이 일어나고, 더 심해지면 집단 편향성으로 나타난다. 이는 일정한 유행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과장된 사회적 공포, 극단적 견해의 대립, 공황 등을 부른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는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동조 현상의 피해를 지적하고, 이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지은이는 “집단 영향과 그것이 내재하고 있는 유해한 효과를 잘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실마리를 던져 준다”고 주장한다. 집단 간 다툼, 극단주의, 테러, 전쟁, 기업의 실패와 성공, 언론 자유의 중요성과 핵심적 본질, 결사의 자유가 가진 장점과 단점, 법에 대한 순응과 불응, 여론과 헌법 해석 사이의 긴장 관계, 고등교육에서의 적극적 시정 조처를 둘러싼 논란 같은 사례들을 들고 이견의 중요성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기만적인 동조 현상은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쉽게 물리칠 수 없다. 지은이는 “이런 부정의, 억압, 집단폭력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선량한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만약 누군가가 잘못된 관행에 경종을 울리겠다고 집단적 합의에 내포된 모순점들을 밝히고자 한다면 그들은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또 직장을 잃거나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견 없는 사회, 갈등 없는 조직은 없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통념에 자극을 주는 것이 이견이다. 이견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이견을 억압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손실을 낳는다. 억압은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와 인류의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강도질’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다. 만약 이견이 옳다면 억압은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이견이 잘못된 정보라 하더라도, 그 이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켜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히 드러낼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조직이나 국가가 사회적 건강을 유지하려면 이견을 환영하고 개방성을 높여야 한다. 사회가 잘 작동하려면 구성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좀더 활발하게 이견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인의 의견이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과 달라도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미국 오바마 정부 규제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는 지은이는 “잘 작동되는 사회는 이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제도를 갖춰 동조가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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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소리' 참모 있었다면 히틀러는 없었다 (한국, 박광희기자, 2009/11/06 22:15:30)
美 쿠바 침공 실패·나치즘의 집단 망령… 이견 용납 안되는 쏠림이 불행 만들어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카스 R 선스타인 지음ㆍ박지우 등 옮김/후마니타스 발행ㆍ368쪽ㆍ1만5,000원

 
쿠바 침공의 실패와 그것에 대한 후회는 다른 생각을 표출하지 못할 때 한 사회 혹은 한 조직이 얼마나 큰 손해를 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에서 저자인 카스 R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생각이 같은 사회는 위험하고 생각이 다른 사회는 건강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저자가 이견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로 든 것은 투자클럽이다. 투자클럽은 자금을 공동 출자하고 공동 투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수익이 가장 낮은 클럽은 구성원들이 사교적이었다. 공개적인 논쟁을 거의 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만장일치로 처리했다. 반면 수익이 가장 높은 클럽은 구성원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냈고 사교적 관계에 빠지지도 않았다.
 
동조 내지 쏠림 현상은 법원 판결에서도 확인된다. 3명의 판사로 구성된 미국 연방법원 재판부가 1995~2002년 기업가 승소 판결을 내린 비율을 보면 판사 3명이 모두 공화당 지명을 받았을 때는 69%, 2명일 때는 52%, 1명일 때는 44%로 나타났다. 공화당 지명 판사가 모일수록 보수적 판결이 많았고 반대로 민주당 지명 판사가 많을수록 자유주의적 판결을 내리는 경향이 컸다. 이견을 밝히기 어려운 것은 평범한 일반인이나 법적 판단을 내리는 법원이나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견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회는 불행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 사회적 쏠림을 낳고 그 쏠림이 집단편향성을 불러오면 히틀러의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남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다수의 견해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우선 꼽는다. 다수의 그것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대개 인기가 없고 따돌림을 받으며 심지어 사회적으로 위협을 받기도 한다. 게다가 다수 의견에 동조하면 편하게 무임승차할 수도 있다.
 
물론 국가, 기업 등이 굴러가려면 거기에 맞는 시스템이나 논리가 필요하고 동질적 의식이 요구된다. 모든 이견을 다 높이 평가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설령 이견에 문제가 있더라도 이견은 그 자체로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이견 없는 사회 즉 갈등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견과 갈등을 좋은 사회와 좋은 조직의 원리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이 이견을 환영하면 번영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저자는 그래서 이견을 존중하고 장려하기 위한 장치를 일부러라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내부고발자를 환영하고, 잘못된 관행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는 직원을 처벌하지 않으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 보상하겠다고 밝히는 것 등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장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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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자동차의 실패를 기억한다면…" (프레시안, 성현석 기자, 2009-11-07 오전 10:23:36)
[화제의 책]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삼성 그룹이 곧 오너 경영체제로 복귀하리라는 예상이 종종 나온다. 대개는 삼성 관계자들의 희망사항이다. "전문경영인 체제에서는 책임지고 의사결정할 사람이 없다"는 게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다. 이런 주장의 바탕에는 "조직을 이끄는 결정은 최고권력자가 혼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여럿이 모여 토론하는 방식으로는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없다는 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비슷한 생각인 경우가 많다.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 앞에서 옳고 그름을 놓고 따지는 일은 대개 부질없이 끝나곤 한다. 이건희나 박정희와 같은 의사결정방식이 옳지 않다는 점을 입증해도, 이들은 이런 믿음을 고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럿이 모여 토론하는 일이 비효율적이라고 믿는다. 의견이 다양해지면, 조직은 '사공이 많은 배'처럼 돼 버린다는 게다. 이런 믿음이 깨지지 않는 한, 이건희나 박정희와 같은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라는 책이 나왔다. 제목 그대로다. '사공이 많은 배'가 더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운항한다는 내용이다. 이 책에는 이견, 즉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아서 실패한 사례가 가득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CIA가 1961년 추진한 쿠바 피그스 만 침공이다. 쿠바 혁명 지도자 카스트로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지원하려던 이 계획은, 거꾸로 카스트로에게 더 큰 힘을 싣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계획이 실패한 뒤, 당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모들을 탓했다고 한다. 케네디의 참모들은 무능했던 걸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다른 생각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분위기가 문제였다는 게다. 당시 참모들은 대부분 출중한 인재들이었지만, 아무도 피그스 만 침공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지 않았다. 침공 계획에 회의적인 이들이 제법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열린 회의는 실패가 예정된 결정을 내렸다.
 
특정 견해가 세를 불리기 시작하면, 그 방향으로 '쏠림 현상'이 생겨나는 게 한 이유다. 어떤 이들은 정보가 부족해서 남들의 주장에 동조한다. '왠지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속에서 올라와도 그냥 삼키고 만다.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탓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평판' 때문에 '쏠림 현상'의 포로가 된다. 특정 견해가 윤리적으로도 옳다는 믿음은, 선명성 경쟁을 낳는다. 강경한 주장을 낼수록 좋은 평판을 얻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회의적인 목소리를 내기란 쉽지 않다. 이런 주장을 비난하는 게 선명성 경쟁의 한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의적인 목소리를 얼마나 세게 짓밟는지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면, 아예 다른 생각은 싹이 잘려버린다. 케네디 대통령의 참모들은 '온건파'라는 낙인을 두려워 했다.
 
이런 분위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반공 이념이 맹위를 떨치던 시절이 이랬다. 운동권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도 가끔 이런 식이었다. 이건희 전 회장이 자동차 사업에 무모한 투자를 할 때, 삼성 내부 분위기도 비슷했다. 황우석 사태가 한창일 때와도 닮았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군사정부가 철권통치를 하던 때라면, 피그스 만 침공 당시처럼 이념 대립에 따른 냉전이 한창일 때라면, 이견을 무시하는 분위기를 설명하는 게 쉽다. 그러나 이런 시기가 지난 뒤에도 여전히 획일적인 목소리만 나오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책은 투자 클럽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자금을 공동으로 출자하고 주식시장에서 공동으로 투자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어느 투자 클럽은 몹시 사교적이었다. 구성원끼리 자주 만났고 친분이 두터웠다. 그런데 수익률은? 최악이었다.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곳은 사교적 관계가 제한된 모임이었다. 논쟁의 유무가 차이를 갈랐다. 사교적인 모임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른 의견을 냈다가 친분이 깨질 것을 우려한 이들 사이에선 '쏠림 현상'이 생겨났다. 민주적인 사회에서도 획일적인 목소리가 나오는 한 이유가 '친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그렇다면, '친분 쌓기'가 꼭 나쁘기만 한 걸까. 그럴 리는 없다. 다른 생각을 과감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진짜 친한 사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내 생각은 너와 달라"라고 말하길 주저한다. 논쟁을 승부로 여기는 문화 탓이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도전으로 여긴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승자와 패자를 갈라야 한다고 본다. 이러니 친분과 논쟁이 양립하기 어려울 밖에. '사공이 많은 배'를 몰아본 경험이 없는 사회일수록 이런 문화가 두드러진다. 다른 의견과 친분 가운데 하나를 버리기를 강요하면, 대개는 친분을 지키려 든다. 결국 수익률 최악의 투자 클럽 사례는 반복된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히는 과정을 잘 관리하는 일이다. 한 의견이 기각되고 다른 의견이 채택되는 과정이 패배와 승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게다. 그래야만 자존심을 내세워 무턱대고 우겨대는, 소모적인 논쟁을 피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카스 R. 선스타인 미국 하버드대 법학 대학원 교수는 <넛지>의 공저자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올해 여름 휴가 기간에 읽었다는 바로 그 책이다.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해 유독 민감해 하는 이 대통령이 선스타인 교수의 다른 책도 함께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울러 경영복귀설이 나도는 이건희 전 회장에게도. 그가 자동차 사업의 실패를 잊지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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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이견에 귀 기울여라 (서울, 심재억기자, 2009-11-07  18면)
 
사람들은 법치(法治)를 ‘인간이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달리 어떤 경우에도 통치가 법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법 자체가 사람에 의해 운용되며, 법 해석도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를 보자. 모두가 같은 법복을 입고 있지만 어느 정당에서 누가 임명했느냐에 따라 이들의 판결은 크게 달라진다. 당연히 판사 조직에서도 결정의 쏠림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쏠림현상이 집단편향성을 낳고, 이는 사회적 공포의 과장이나 극단적인 견해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이런 사회가 다른 의견을 긍정적인 가치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사회적 이견(異見)에 주목한 새 책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카스 R 선스타인 지음, 박지수·송호창 옮김)가 나왔다.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인 저자는 국가든, 사회든 아니면 기업이나 투자조직 혹은 가정 등 사람의 조직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이견의 가치에 주목한다. 이견을 말하고, 강요를 거부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이런 이견의 관점에서 그는 동조, 다른 사람 따라하기, 복종과 불복종, 무리짓기, 이웃의 생각과 언론의 자유 등 민주주의에서 발현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그렇다고 그가 동조나 (법적 판결에 대한)복종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책이 특히 주목받는 것은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전체주의적 가치 때문이다. ‘총화단결’, ‘국론통일’이 그렇고 ‘모난 놈 정 맞는다.’는 의식이 그렇다. 중요한 것은 이견 없는 사회나 갈등 없는 조직을 만들려 하기보다 이견과 갈등을 좋은 사회, 좋은 조직의 제도적 원리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지금 누구도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보는 대로 말하는 한 소년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외침을 가당찮은 이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처음엔 그 외침이 이견이었고 이단이었지만 이제 그 소리는 진리다. 이렇듯 이견이 항상 ‘턱없는 생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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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다른 의견도 사회 전체에 이롭다 (2009 11/17   위클리경향 850호, 정원식 기자)
 
1961년 4월, 쿠바 혁명 후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 1500여 명이 쿠바 남부 피그스 만을 침공했다. 미국은 이들을 훈련시키고 무기와 물자를 지원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300여 명이 사살되고 1200여 명이 포로가 됐다. 국제적으로 망신살이 뻗친 데다 쿠바와 소련이 더욱 밀착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침공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한 한 관료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계획은 그 어떤 반대도 없이 추진됐다. 단 한 명의 관료라도 반대했다면 케네디가 그 계획을 취소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침묵은 미국의 국익에 해를 끼쳤다. 이처럼 어떤 계획이 실패할 개연성이 명백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별다른 이견이 제출되지 않는 현상은 비단 행정부만이 아니라 모든 수준의 조직과 집단에서 발생한다. 왜 그런 것일까.
 
저자는 ‘동조’라는 키워드를 실마리로 삼아 그 이유를 풀어나간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 가운데 상당수는 집단이 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 달리 말해 사회적 압력의 영향을 받는다. 개인을 사회적 압력의 자기장 안에 묶어 놓는 것은 두 가지 유형의 동조다. 먼저 개인은 다수의 타인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보다 더 많은 정보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에서 타인의 견해에 동조한다. 이를 저자는 ‘정보에 의한 동조’라고 부른다. 다음으로 개인은 같은 집단 내 다른 구성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타인의 견해에 동조한다. ‘평판에 의한 동조’다. 이 두 유형의 동조로 말미암아 개인은 다수의 견해나 지배적인 흐름을 거스르는 견해를 제시하는 일을 꺼리게 된다.
 
동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동조는 사회적 연대를 강화시킨다. 문제는 동조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쏠림 현상과 집단 편향성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드러나는 경우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의 광기가 대표적이다.
 
동조는 일종의 무임승차 행위다. 동조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어떤 것도 보태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의 행위로부터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사회에 필요한 건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정보나 아이디어를 공동체에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득을 준다.”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사회가 절름발이 인식에 사로잡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 주는 방파제 구실을 한다.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따돌림이나 추방 같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견의 허용이 어떤 조직이나 사회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조직과 사회는 이견의 발언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과 직결되는 대목이다.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들은 구성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좀 더 활발하게 이견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이와 같은 노력은 부분적으로는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오히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책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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