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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전국노동자대회에 다녀와서(성준/ 고려대 역사교육과 06)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6가에서 재단사였던 20대 초반의 청년 노동자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로 외치며 근로기준법과 자신의 몸에 신나를 끼얹고 분신 항거하였다. 그러나 30년이 넘게 지난 현재에도 노동 3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특수고용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하청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은 정규직과의 차별, 상대적 박탈감을 몸소 느끼며 일하고 있고, 골프캐디, 학습지교사들은 노동자임에도 사장으로 등록된,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다. 심지어 하중근 열사는 경찰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전국 노동자 대회에서는 바로 이러한 현실의 정세를 파악하고 그에 저항할 수 있는 노동자 대회여야 했다.


2006년 11월 12일, 서울시청 광장으로 향했다. 3시 좀 넘어서 도착했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사람은 적었다. 수많은 조직들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있었다. 노동자 대회에 대해 각 단위들의 생각들이 적혀있었다. 그러나 노동자 대회의 현장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결의를 다지기 위해 동지들의 발언도 있었고 몸짓패의 공연, 노래패의 공연도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형식적인, 그저 연중행사 정도의 하나로 노동자 대회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동자 대회의 분위기는 이상했다. 거기에 민주노총의 총파업 연기는 사회적 합의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 속에서 2006년 현실에 대한 투쟁 의지는 거의 담지 못한 것 같았다. 노동자대회가 끝난 이후 노동자 들은 바로 퇴장했다.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사람들은 몇몇 학생 단위들과 청소하시는 분들이 전부였다. 이것이 노동자 대회인가 라는 회의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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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두 가지 '길들이기'(페다고지 칼럼)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길들이기’라는 말을 섣불리 썼다가는 봉변당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길들이기도 뜻 나름이란 사실을 아는가? 사전에서는 길들이기를 ‘~일에 익숙해지다’라고 정의한다. 경상도 지역의 노인분들은 고어의 영향으로 ‘길’ 대신 ‘질’을 사용하여 ‘질들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길들이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길들이기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익숙해지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길들이기’의 대명사는 뭐니 뭐니 해도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이다. 모 대학교 논술에 나왔다고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일제히 공부를 해야 했던 바로 그 텍스트다. 이 책에서 사막에서 만난 여우는 어린 왕장에게 ‘길들이기’의 의미를 말해준다. 영화 라디오스타에서 쌍팔년도 가수왕을 차지했지만 속된 말로 ‘한물 간 가수’ 최곤(박중훈)이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와 지란지교를 맺는 것 같이. 이런 점에서 길들이기는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 곧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지구 반대 편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길들이기’가 벌어진다.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에게 폭력과 억압으로 인한 공포를 내면화할 때, 우리는 그것을 ‘길들이기’라고 표현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맘에 들지 않으면 ‘죄가 있든 없든 박살낸다.’는 것을 보여줄 때, 우리는 이것을 ‘길들이기’라고 규정했다. 한국도 ‘길들이기’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다. 반세기 동안 미 헤게모니 하에서 한없이 착하고, 모범적인 나라가 되었으니.

한미FTA의 4대 선결조건으로 명성이 높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K모 방송사의 문제아 이강택 PD가 사고를 쳤다. 감히 공장형 쇠고기 농장에서 생산(!)되는 미국산 쇠고기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파헤친 것이다. 한미FTA 앞두고 미국 정부가 미국축산자본의 이익을 대변하여 한국 정부를 길들이려 하는데, 이강택 PD는 딴지를 걸었다.


사실 이강택 PD는 초범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이후 북미지역의 현실을 고발하더니, 그 직후에는 베네수엘라를 찾아 미국이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차베스를 취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축산자본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는 모습을 고발하여 또 한 번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렇게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나보다.


요즘 교육부가 하는 ‘길들이기’는 참 가관이다. 교육부는 예비교사들도 길을 들이려는 것 같다. 얼마 전 교육부에서 교대 총장들 만나서 학생들 반발 그만하게 대책 좀 세우라고 한 모양이다. 중장기 교원수급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달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주기적으로 터지는 교원양성임용 문제가 자신들의 잘못이라는 생각은 안하고, 그저 예비교사들이 길들여지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교육부는 이참에 아예 교원노조 위원장 선거에도 직접 개입한다. 교육부는 장혜옥 위원장 등 3팀이 출마한 전교조 선거에서, ‘장혜옥 후보는 (해직자이기 때문에)교사가 아니므로 조합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아예 전교조 위원장을 자신들이 임명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전교조 선거관리위원회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어이없는 일이 전교조 길들이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사람들은 싸우면서 미운정, 고운정이 든다는데 어찌 된 것이 교육부와 예비교사, 교육부와 교사간에는 별로 미운정, 고운정이 드는 것 같지 않다. ‘옛말에 틀린 것 하나도 없다.’는 말은 어쩌면 틀린 모양이다. 교육부의 ‘목 꼿꼿하게 세우고, 지지 않겠다고 까불어?’라는 식의 태도를 보면 부모님이 하시던 ‘나라에서 하는 일 반대하지 마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로의 회귀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린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다. 호랑이로 태어났으나, 오랜 세월 학교에서 길들여져 고양이로 자라왔다. 우리는 호랑이를 고양이라 착각하고, 고양이는 호랑이라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순응에 익숙해진 예비교사들이여 가끔 길들여지지 않아도 좋다.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길들여지는 것이라면,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자. 우리 안의 우애로운 관계를 맺는 그런 길들이기에 익숙해지자. 두 가지 길들이기, 상반되지만 무척 재미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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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독자편지(강정은/ 전주교대 실과교육과 1학년)

전주교대 실과교육과 1학년 강정은

 

 

사실 Today를 접하기 전에는 사회적 투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지도 못했고, 별다른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책자를 읽고나서 투쟁의 의의, 진행, 목표 등에 대해 많은 점을 생각할 수 있었다. 당장 6월 1일에 투쟁이 있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왜 그날 투쟁이 있는지 왜 서울로 가야만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Today를 읽은 후 우리가 왜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인지, 조금이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고, 투쟁 한번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나도 이제 자랑스러운 대학생이 된지 꽤 지났다. 앞으로는 진보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보고 싶다. 그리고 투쟁뿐만 아니라 사회의 주요한 일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가 더 바람직한 사회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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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독자편지(김상훈/ 대구대 국어교육과 2학년)

대구대 국어교육과 2학년 김상훈 

 

 

바람에 불려 대기가 젖는다.

내가 봄비라고 이름 짓는다.

봄비,

그러나 감자밭을 적시기엔 아직 적다.

                                 - ‘오래된 정원’


 황석영님의 원작 소설로 읽으면서 ‘영화로 만들면 어떤 느낌일까?’라고 상상했었고, 결국 임상수라는 문제적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가장 강하게 남은 건 저 한 구절의 시였습니다. 늦깎이로 시작한 예비교사의 길. 나름 어떻게 고민하고 어떻게 살아야 참 ‘스승’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이었어요, Today라는 잡지를 접한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건 저 위의 시에서처럼 잔인한 봄 가뭄을 겪던 고민을 잠시 씻어준 고마운 단비가 되어주었답니다. 그저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교원양성정책의 개편에 대한 흐름과,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움직임을 ‘뚜렷한 실체를 가진 어떤 것’으로 새겨준 좋은 계기였다고 할까요. 그다지 두껍지 않은 이 활자의 모둠이, 세상을 조금은 더 살만한 것으로 바꾸는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문운동이라는 개념이 활성화 된 것은 그다지 오랜 일이 아니지요. 물론 그런 움직임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당하게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예비교사 운동모임’을 선언하는 페다고지의 모습에서 어쩌면 적당히 타협하고, 돌아가던 저 스스로의 모습을 많은 부분 반성하게 됩니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역시 ‘연대의 틀’이 문제점인 듯 싶습니다. 교원수급의 문제와 학급총량제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저항하는 가운데서, 결국의 ‘내 현장의 문제’로만 귀결시켜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인상도 남습니다. 물론 그러한 투쟁은 당면한 문제이지만, 그것이 일반인들의 눈에 그저 ‘밥그릇 투쟁’으로만 비춰지는 것에는 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원TO에 따른 문제만큼이나 교육의 공공성 확보라는 측면을 고민해야 한다던, 교육행동위 제안서의 마지막 부분이 제일 인상 깊었습니다. 문화주권을 외치며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던 영화인들에게 주어진, 꽤나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비판적 시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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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독자편지(박대성/ 진주교대 신문사 편집국장)

 

진주교대 신문사 편집국장 박대성

2학년이 되어 첫 교생실습을 나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현장의 모습은 초등교육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를 지도하신 선생님은 쉬는 시간에도 아이들을 지켜보느라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발표 하나를 시키면서도 아이들의 정서에 미칠 효과를 고려해서 지명해야 하고, 동기유발 없이 그저 아이들에게 상투적인 방법으로 수업을 해서는 효과적인 수업 진행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우리 초등교육이 발전하기도 했지만, 또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환경이 어려워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취업을 걱정하는 주위 친구들이 나를 부러워하며 초등학생 가르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말하곤 했다. 나는 친구들의 의견을 부정하면서도 조금은 동조하는 마음이 있긴 했었다. 그러나 초등교사는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매우 그릇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지식만을 가르친다면야 초등학교 수준정도는 약간의 교육을 받는다면 누구나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교사는 ‘아이’라는 무궁무진한 세계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의 가정환경을 자연스럽게 파악하고, 아이가 말 못하는 고민을 느끼고 거기에 적절한 지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학업성취를 위해 끊임없이 교재연구를 하고 교구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아이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재능을 찾아내어 그것을 살려주어야 한다.

 교생실습을 다녀온 후, 초등교육에 대한 나의 시선은 확연히 달라졌다. 아이들을 위해 준비하고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아 보였다. 무엇을 배우더라도 아이들이 직접 내 시범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허투루 할 수가 없었다.

 교육은 결국 아이를 잘 알아야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살벌한 경쟁 체제는 결국 교사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 즉 깊이 있는 교육 공부와 아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체험의 기회를 박탈한다. 누군가를 밟고 경쟁에서 이겨야만 인간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준다는 것, 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그렇게 경쟁하고 거기에서 승리해서 교사가 된다면 아이들에게도 경쟁을 가르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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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나의 삶, 나의 길 2부 : 새롭게, 또 새롭게 새로움은 나의 힘(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특집 : 나의 삶, 나의 길] 2부

새롭게, 또 새롭게

새로움은 나의 힘

 

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교실을 떠난 나의 하루는 어색하다. 햇살 가득한 거리에서 편한 자유를 즐기지만 그 시간들이 당황스럽다. 내 존재 조건 그 자체였던 교실을 이젠 세상으로 바꾸어야 했다. 안동에서 해직된 교사는 나 외에 6명, 그들과 함께 전교조의 실체를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는 매일 학교 방문에 나섰다. 작은 차에 꼭 끼어 타고 경북 북부 산골 골골을 돌아다녔다. 전교조 신문과 선전지, 우리들의 말이 무기였다.

그 중 한 분은 울분으로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다. 그가 남긴 시를 읽으며 우린 매일 울었다. 착하고 아름다웠던 또 한 분은 산골 누추한 방에서 연탄가스중독사를 당했다. 배낭에 신문이며 선전지를 가득 담고 산골 학교를 누비던 그 맑은 눈망울이 서럽고 서러워, 최초의 전교조장으로 예를 갖춰 보내드렸다. 하늘에선 비를 뿌렸고 전국에서 모인 해직교사들도 목 놓아 울었다. 해직의 부당함을 외치며 집회, 농성, 시위하는 나날이 월례 행사로 이어졌고 그 때마다 닭장차에 끌려가고 유치장에 갇히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고, 기쁨이고, 위로였다. 그래서 우린 ‘동지’였고, 이름 뒤에 ‘선생님’ 대신 ‘동지’라 붙여 불렀다.


1년 동안 학교 방문을 하며 조합원을 일구고, 후원회원을 조직하는 일을 하며 안동 땅을 섭렵하고 나니 경북 전체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마침 권유도 있어, 경북 지부 정책실장을 맡게 되었다. 경북엔 101명의 해직교사가 대부분 활동하였으며 이미 18개의 지회가 사무실도 갖추고 있었다. 그 때 경북 지부 사무실은 동대구역 근처여서 안동에서 동대구까지 기차로 통근했다. 왕복 4시간의 통근 시간은 고마운 독서 시간이다. 정책실장이란 직책의 엄중함 때문에 독서를 엄청나게 했다. 하루 2-5권은 읽었으니 웬만한 사회과학 책은 그 때 다 읽은 셈이다. 덕분에 눈이 몹시 나빠져 그 해 이후론 차에서 책 읽는 일은 되도록 안 한다. 특별한 학습 소모임도 여럿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공부하고 헤어지는 일도 많았다. 도대체 왜 전교조에 가입했다고 해직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독서와 학습은 하루 10시간씩 투자해도 모자라는 온전한 열망이었다. 경북의 여러 지회를 다니며 만나는 동지들은 사람에 대한 신뢰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준 새로운 힘이었다. 


1년이 지나니 이젠 전체가 궁금해졌다. 전교조는 전국 조직인데 전국은 어떨까? 원하면 통한다던가! 마침 경북 출신의 위원장께서 본부 활동을 권유하여, 본부가 있는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교육선전국원이 되어 어렵기만(?) 한 286 컴퓨터와 씨름하며 실무를 하면서도, 전교조를 키워나가는 훌륭한 지도 동지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큰 자부심이었다. 본부에서 일하는 100여명의 동지들은 나이를 떠나 내겐 모두 선배였고 스승이었다. 정책 지향을 뚜렷이 달리하는 두 그룹이 함께 이룬 통합 집행부여서 더 배울 것이 많았다.

서울 생활의 또 다른 의미는, 독립 선언을 하고 부모님 곁을 떠난 지 16년 만에, 다시 부모님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키워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단식 농성하던 명동 성당까지 찾아오셔 해직의 과정을 따뜻한 긍정으로 받아들여 주신 아버지와 바깥으로 나도는 딸에게 단 한 번도 비난 말씀을 안 하시고 무조건 신뢰해 주신 어머니에게 감사드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본부 해직 교사 중 뜻밖에 ‘지음지기(知音知己)’를 만나, 젠더 마인드 친구로서 인생의 큰 조언자를 얻게 된 것은 하늘의 선물이었다. 이후 우리 마음 맞는 비혼들은 명절이며 휴가 때에 더불어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확대 가족의 기쁨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으로 술도 배웠다. 격렬한 논쟁이 수시로 터졌고, 으레 술자리로 이어졌다. 맥주 1잔으로 시작한 술이 소주 2-3병으로 1년 만에 급성장할 만큼 나는 매일 격렬했다. 그 와중에 여성 동지들과 멘토링을 갖게 된 것은 여성주의 인식을 실천에 옮기는 소중한 과정이었다.

이렇게 날마다 새로운 격정으로 채워가는 1년이 끝날 무렵, 옆집에서 난 불이 옮겨 붙으며 우리 집을 몽땅 태워버렸다. 부모님의 70 평생 재산이 잿더미가 되었고 아울러 내가 가지고 있었던 럭셔리 취향의 모든 것들도 다 사라졌다. 깨끗해졌다. 친구가 사 준 골덴바지와 스웨터 두 벌로 겨울을 나면서 오히려 가벼워진 새로움을 느꼈다. 아버지 병은 깊어지셨고 쓸쓸히 돌아가신 후에야 복직이 되었다.


영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었다. 소백산의 깊은 아름다움과 순후한 풍경, 따뜻한 농촌의 정겨움은 곧 운명 같은 존재의 땅이 되었다. 호주 독립을 하고 호적도 옮겼다. 이제 공문서 상 완전히 독립했고, 영주 ‘풍기 사람’이 되었다. 1학급짜리 작은 학교 아이들은 그냥 ‘꽃’이었다. 그 꽃밭에 어우러져 나도 꽃이 되었고, 아이들 사랑만으로 넘치는 나날을 보냈다.

지부 대의원, 전국 대의원 등을 계속하면서 조직의 의결 구조를 배우고 지회 운영 활동을 하면서 전교조 합법화를 맞이했다. 10년,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다시 인문계 여고로 전근하면서 ‘투쟁할 꺼리’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7차 교육과정이 문제였다. 수준별, 선택형 교육과정은 무한 경쟁의 고리였고 비현실적인 정책들이 교사를 억압했다. 경북지부 ‘7차 교육과정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민주화 정부 교육개혁’의 허상에 저항하는 일선에 서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시장 만능주의’ 정책들이 어떻게 교육과 인간을 유린하는지 공부하고, 교사들에게 알려 나가면서 밀려들어오는 교원정책(성과급 제도 등)들과 맞서며 투쟁의 의지가 높아졌다. 그 사이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남겨준 재산 때문에 형제들끼리 작은 다툼도 생겨 가족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전교조와 만나지 14년, 늘 새롭게 새롭게 배우며 변화해 가는 세월 끝에 이제 권한과 책임을 지는 선출직에 나섰다. 영주 지회장은 나의 첫 선출 ‘관직(?)’으로서 일선 조직의 책무를 감당하는 중대한 지위였다. 겸손할 것과 정성을 다할 것, 사람을 귀히 여길 것을 다짐하며 겨우 1년을 감당했는데, 전교조 10대 수석부위원장 선출직에 나설 것을 제의 받았다. 추천해 주신 동지들이 고마워 겁 없이 나섰고 당선되어 다시 서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서울, 본부에서 책임과 권한을 갖고 투쟁 일선에 선다는 것은 엄격한 각오를 가져야 했다. 끊임없는 독서와 미디어 읽기, 투쟁 전선을 열성으로 지켜가는 것은 절대 임무였다. 기간제 여교사에게 차 심부름을 시킨 교장의 횡포에 저항하다 터진 일명 ‘보성초 사건’으로 이데올로기 폭력을 당하며 시작한 집행부 활동은, 학생 정보 인권을 인터넷에서 유통하려는 ‘네이스(NEIS, 학생정보시스템)’를 교육부가 밀어붙이는데 저항하면서 2년간의 긴 투쟁으로 이어졌다. 긴 농성과 시위, 연가 투쟁이 있었고 공권력은 무섭게 억압하며 들어왔다. 우리 집안 5대 전체에 걸쳐 현재까지 유일하게 ‘법정에 서게 된 경험’은 무척 새로웠다. 

예년과 다른 언론의 관심 속에 여러 차례 미디어 토론에 참여하게 되었다. 미디어 5사(KBS, MBC, SBS, EBS, K-TV 등)에 2-3차례 나가고 각 라디오 방송사에 수없이 출연하면서 길거리에서도 알아보는 이가 생길 만큼 유명(?)해지기도 했다. 각종 타 조직의 지위를 맡게도 되었고, 중앙노동위원회 노동자위원 역할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나누는 소중한 경험으로 쌓여갔다.

네이스 투쟁은 9만 조합원 전원이 실천하며 전선에 서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대중들에게 고통스러웠다. 투쟁을 접자는 요구들이 분출했고, 탈퇴자들에게 명분이 되었다. 그 어려움 속에 11대 선거가 치러졌고, 경북 지부장으로 출마했지만 특히 네이스 투쟁을 어려워했던 경북 동지들은 내 열정을 외면했다. 부끄러운 참패를 대중의 명령으로 알고 돌아온 학교,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빛이고 꽃이었다. 아이들의 모든 일탈을 웃으며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게 되었고, 수업의 노하우는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통합적이고 일관성이 녹아 있었다. 그러나, 동료들과 함께, 교사로서의 자부심이 겸손하게 소통되는 나날 속에 닥쳐온 정부의 ‘교원평가’ 정책은, 교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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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나의 삶, 나의 길 1부 : 가르치는 삶, 그 행복한 나날들(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특집: 나의 삶, 나의 길] 1부 

가르치는 삶, 그 행복한 나날들

 

 

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쌤~~~” 경상도 아이들은 ‘선생님’을 이리 정겹게 부른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부름이지만마음은 늘 부끄러웠다. 어서어서 서른 살이 되길 기다렸다. 적어도 서른 살쯤 나이를 먹으면 내 또래로 보이는 여고생들에게 넉넉히 ‘선생님’으로 대할 수 있을 듯 했다. 23살 어린 나이에 만난 고3 학생들에게 나는 ‘서울내기’ 친구였다. 그렇게 아이들과 친구처럼 어울려, ‘광주’로부터 민주화 운동의 세례를 받아들인 두려움을 숨기며, 20대 젊음을 부끄러움으로 보냈다. 아이들과 헤어지기에 토요병이 생겼고, 월요일 아침엔 설레임으로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10년의 세월, 친구 같은 애정을 지식 수업에 쏟았다. 그 무렵 내가 아이들보다 더 낫게 잘하는 것은 국어 지식 밖에 없었으므로....


30살이 되는 생일날, 아이들은 생일을 맞은 담임 한 명을 위해 42명이 연출한 깜짝무대를 꾸며주었다. 노래, 춤, 연극, 개그, 낭송 등 화려하게 펼쳐진 42개 장면에 감동하며 드디어 당당한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부르면 “오냐! 왜?”라고 넉넉히 답할 수 있는...


교사로서 스스로의 지위는 인정할 수 있었지만, 30대는 시대 고통에서 빚어지는 달뜬 열정으로 흔들리는 나날이었다. 때때로 열사들의 죽음이 온 나라를 흔들 때에도 고작 검은 리본 하나 달고 수업하는 것으로 슬픔을 달래야만 했다.


경상도 안동 지역에서 관습과 일상생활로 뿌리내린 가부장제 의식도 고통이었다. 학급에는 말자, 말숙, 끝숙, 남숙, 남희, 후남, 후자 등 ‘남자를 기대하는’이름들이 즐비했고, 자랑스럽고 능력 높은 여학생들이 오빠와 남동생의 학업을 위해 삶을 포기하는 건 당연했으며, “여자가 왜 대학을 가?” 라며 의아스럽다는 듯 말하는 학부모조차 많았다. 경상도 땅에서 만난 ‘나의 남자’들도 그 기세가 일반이어서 ‘연애’는 번번히 무위로 돌아갔다.

변화가 필요할 즈음, 여중생들을 만났다. 전혀 새로운 신기한 경험이 나날을 행복하게도 두렵게도 했다. 여중생들은 너무도 달랐다. 순수 그 자체인, 정말 막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그 아이들 때문에 열병에 걸리는 듯 했다. 교사가 마음먹기 따라 그 존재 자체가 변화할 수 있는 백지 상태! 빨간 색을 칠하면 모두 붉은 꽃이 되고, 파란색을 칠하면 모두 푸른 하늘이 되는, 웃음이 명랑한 아이들 앞에서 내 철학과 의지, 태도와 가치관 모든 것을 스스로 점검하였다. 진실로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했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사소한 것이 되었다. 교사는 인간으로서 표상이어야 하고, 나침반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지도자여야 했다. 그냥 진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수업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큰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 개개인이 그 그림 속에서 어떻게 자기 길을 찾는지 안내 할 수 있어야 했다.


수업 시간 내내 연예인 사진에 심취해 있어 그 사진을 지휘봉으로 지적하자, 자신을 모욕했다며 대성통곡하는 그 마음에 사과했다. ‘모진 말’을 했다고 1년 내내 엎드려 있는 아이를 1년 내내 참아주며 화해했다. 일진으로서 친구를 하녀처럼 부려먹는 아이를 체벌로 다스리려한 용렬함은 고통스러웠고, 상담을 정성껏 한 아이에게 공개적으로 욕설을 들어야 했던 기억은 참담했다. 고교 입시가 있던 시절, 전교 1등에서 30등까지 도서실에 모아 온갖 이벤트로 입시 지도를 도맡았던 ‘능력’은 더욱 참담한 이력으로 남았다.


그렇지만 여중생을 가르친 2년, 나는 이문세의 노래를 같이 부르며, 달마다 학급 행사를 하고, 날마다 특별 학습 지도를 하면서, 눈 감고 눈 뜰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을 삼삼하게 떠올리면서, 열병에 걸린 듯 지난 10년과는 다른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숨어서 특별한 모임도 했다. 민주화의 바람은 안동 땅 곳곳을 흔들었고, 낯선 사람들과 몰래 모여 불법 도서나 영상물을 돌려 보는 시간들이 긴박하게 흘러갔다. 작은 물결들이 거대한 강물로 흐를 날을 기다리며 숨죽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다시 시작한 학교에서 만난 남자 고등학생들은 별천지였다.


나보다 훨씬 큰 아이들은, 원피스 허리선을 슬쩍 만지며 때론 나를 여자로 대하기도 하고, 안동 특유의 가부장제 의식으로 하찮게 여기는 기색도 보였다. 60여명 남교사 중에 3명의 여교사, 그것도 학교 역사상 첫 담임 여교사라니.... 무엇보다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실력을 과시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지도안이나 메모 없이 완벽 수업하기, 영어나 한자를 거침없이 많이 판서하기, 질문을 많이 해서 겁주기 등 졸렬해졌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웃으면서 수업하고 존댓말을 쓰는 선생님을 처음 봤다고, 체벌 없는 수업도 처음이라고, 대화하는 수업도 처음이고, 아이들 자리 속으로 들어가 참견해주는 수업, 시를 외우고 노래를 하는 수업도 처음이라고 좋아했다. 교사로서 자신감은 더욱 커져 거침없이 사회의식을 가르치는데 까지 나아갔다. 광주의 영혼들이 담긴 사진을 게시하고, 김남주의 시를 해설했다. 저항하는 아이를 칭송하고, 비판하고 문제 제기하면 더욱 이뻐했다. 그러나 학교는 입시 교육의 늪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수능이 생기고 야간 자율학습, 보충수업이 전면화 되었다. 오직 공부, 오직 서열, 오직 일류대학이 생존 목표가 되어가고 자살하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우리 교사들은 참교육을 하고 싶었다. 민주와 인간을, 통일과 평화를, 평등한 사회를 가르치고 싶었고 교사 스스로 주체가 되고 싶었다. 사회 민주화의 열기는 꿈틀거리며 교육 속으로 파고 들어와 교사들을 들끓게 했다. 교사협의회를 조직하고 학교민주화를 진척시켰지만 한계가 있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로 조직을 전환했고, 끝내 1500여명이 해직되었다.


나는 해직이 기뻤다. 민주화운동 속에서 체포, 구금, 고문, 죽임을 당한 열사들에게서 최소한의 부채를 나눠짊어졌다는 고마움 때문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연좌농성, 수업 거부 등으로 맞서주었고 전체 조회를 열어 장엄하게 배웅해 주었다.


14년 동안, 단 한 번도 지겹거나 지루한 적도 없었던 그 행복하기만 했던 교실을 떠나야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삶의 한 축이었던,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도 끝내기로 했다.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세우는 것이 더 소중해졌기 때문에... ‘사랑’은 대상의 제한 없이 무한을 향해가는 무한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사진출처 : 교육희망, 2006년 9월 10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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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내 삶에 있어 페미니즘이란(피넌/ 성신여대 유아교육과, 여성위원회 소리)

내 삶에 있어 페미니즘이란

 

피넌/ 성신여대 유아교육과. 여성위원회 소리

 

 

 

사람들이 여성주의(feminism)이라고 하면 흔히 가지고 있는 편견이 여성이 남성 우위에 서는 ‘남성타도!’ 를 외치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주의는 여,남 모두가 동등하고 똑같을 수 있는, 차별이 없는 세상을 외치는 것이다.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대한민국의 청소년(아이들을 포함하여)들은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학교생활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교사와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교사라는 직업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며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지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렇게 자긍심을 가지고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하는 교사들이 바른 생각을 가지고 바르게 가르쳐야 진정 바른 학생들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바른 생각 중 인간은 그 어떤 이유나 조건에 의해서든지 차별받지 아니하고 평등하다는 생각은 당연한 생각이지만 우리가 잘 실천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성주의는 평등하지 않은 현실에서 진정한 평등을 찾아가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육현장에서 여자인 너와 남자인 니 옆에 사람이 똑같다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에게 여자와 남자에게 있어서 차별이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들었던 말을 기억하게 된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피곤해서 메트 위에 잠깐 누웠을 때 들었던 ‘기집애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벌렁벌렁 눕냐.’ 라는 말,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다는 남자들이 듣는 ‘사내자식이 그깟 일에 울어서 쓰냐.’라는 말, ‘맨날 바지만 입고 다니지 말고 치마도 좀 입고 그래봐.’ 라는 엄마의 말, ‘넌 도대체 남자냐, 여자냐?’ 라는 말을 듣곤 하는 머리 짧고 털털한 여학생과 손톱을 기르고 조용한 말소리를 내는 남학생.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왔기에 자신들의 아이들에게도 강요하는 말들이다. 과연 그것들이 바른 것인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채 말이다. 남자도 슬프면 울 수 있고, 여자도 바지가 편하다면 바지만을 즐겨 입을 수 있는 것이다. 남성다움, 여성다움이란 것은 애초에 그것을 규정짓기 나름이다.

 

아직도 여학생은 치마만을, 남학생은 바지만을 교복으로 만드는 많은 학교들이 있다. 걸핏하면 ‘기집애가 어디서...’를 달고 교육이란 것을 하시는 선생님들이 계시다. ‘동성애자는 태어나기를 정신병자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라고 얘기하는 선생님들이 있다. 동아리에서 여학생이 회장 자리를 맡으면 그 밑에서는 일 못한다고 기분 나빠하는 남학생들도 있다.

 

 아직 어떻게 교육하는 것이 진짜 바른 여남평등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앞으로 교사가 될 우리들이 정말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르게 가르쳐야 하며, 잘못 된 세상에 대해서는 비뚤게 바라보고 고쳐 나가려고도 할 수 있는 실천력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른 것은 바르게, 바르지 않은 것은 고쳐서 바르게 가르치고 싶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자라서 그 세대를 이룰 때에는 억압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내 눈을 고쳐 떠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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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서평 - 지하생활자의 수기(김정훈/ 고려대 국어교육과 06)

[서평] 지하생활자의 수기

 

김정훈/ 고려대 국어교육과 06, 독자

 

 


내가 어느 정도로 도스도예프스키에 미쳐 있는지 이쯤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라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소설'에 있어서 이 작가보다 나에게 더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직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것 같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지하 생활자의 사상이 나오고, 2부에서는 그런 사상이 확립되기 전까지의 그의 비참한 생애가 나온다. 2부를 통해서 1부를 돌아보며, 1부를 통해 2부를 해석하는 이중의 재미가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문학 분석의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1부만 보아도 충분하지 않나 싶다.


여기서 '지하'란 '궁전'과 대비되는 의미다. 궁전이 인간의 이성의 발전의 산물이며 절대선으로서 아름다움을 지닌, 진=선=미가 결합된 근대의 이성과 그에 따른 정상성을 상징한다면, 지하란 비이성적인 제반 모든 것으로서의 비정상성을 상징한다. 즉, 지하 생활자는 이성이 진리이며 법칙이므로 인간이 이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정언적 명제를 과감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매우 복잡한 존재이므로 이성이 인간에게서 차지하는 것은 지극히 미미한 부분이며 그것만으로 인간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에 따른 객관적 법칙 - 책에는 2X2=4로 예시가 되어 있다. - 따위는 모조리 무시되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과 감정이다. 그래서 지하 생활자는 인간의 삶을 규정화하고 이성의 법칙에 따라 발전시키려는 모든 시도들 - 대표적으로는 과학,사회주의 등등 - 을 부정한다. 지하 생활자에 눈에는, 사회주의란 이성에 의존한 절대적 법칙성에 따라 사회가 발전한다는 가정 하에 인간을 몰개성적이고 기계적인, 자유가 없는 노예적 존재로 만드는 '개미집' 따위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비판은 확실히 이성 절대주의라는 근대 철학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한 맑스에게는 유효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놓여진 객관적 조건 하에서 주체적으로 상황을 인식하여 그를 자신의 필요에 맞게 변화시키려 한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유를 추구하려 하므로, 모든 인간이 자유를 누림에 있어서 가능한 한 덜 제한이 가해지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 법칙과 신의 대변인으로서의 이성에 근거한 '절대적 발전'은 없을지 몰라도, 인간의 필요에 근거한 '존재적 발전'은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바로 절대적 발전이 아니라 존재적 발전을 추구하는 운동이며, 이 필요성엔 도스도예프스키가 말한 인간의 여러 다양한 욕망들과 비이성적인 것들도 포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필요에 의한 자유는 아직 불완전하다. 여기에는 객관적 조건에 의한 자유의 제약 외에도,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점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제약 또한 있다. 모든 이는 경험해 온 물적 토대가 다르며, 이에 따라 물적 토대를 인식하는 방식 또한 다르다. 게다가 인간은 자신의 인식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따라서 개인 간의 필요의 자유가, 다른 말로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된다. 인식 공유의 불가능성은 인간이 타인에 의존할 수 없이 독립적으로만 세계를 인식하게 만드는 자유의 토대이기도 하지만,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보편적 의미의 자유를 이룰 수 없게 만드는 규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대' 혹은 '협력'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이의 자유를 최대한도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자유의 실현을 위해 공동체로서 협력해 나가는 방식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는 과도기적으로 '계약'이라는 체제를 사용하여 이것이 유일한 해결책인양 선전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사회 주체 간의 권력 관계가 불평등하며 자유 경쟁이 불가능한 조건이라면,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계약 따윈 존재할 수 없다. 계약이란 계약 당사자들의 입장이 동등할 때나 가능한 것인데, 사실상 자유 경쟁 상태는 절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대와 협력을 통해서 이러한 권력 관계를 무효하고 모든 이가 실질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획득한 가운데, 최대한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게 해야한다. 사회주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다.


만인이 행복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인간의 비합리성, 다른 말로는 인간에 대한 합리적 이해에 대한 어려움은 분명 고려되어야 하며, 개개인의 행복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이런 것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파편화 되어 있었던 개인 간의 연대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을 꿈꾸는 것이다. 공동체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함으로써, 그리고 집단적 발전을 이룸으로써 인간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범위가 확대되는 것. 또한 그리하면서 개인에 대한 공동체에 의한 규제도 점점 소멸해 가는 것, 즉 개인의 복락을 추구하기 위한 공동의 규범을 점차적으로 최소화 해가는 것. 그것이 사회주의로 딱지 붙여진 사회 변혁 이론의 골자다. 이것은 도스도예프스키가 생각하는 개미집이 아니라 수정궁이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주체적 인간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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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FTA 도미노, 한-EU FTA가 몰려온다.(투데이 편집부)

FTA 도미노, 한-EU FTA가 몰려온다.

 

투데이 편집부

 

4월 2일 마감 시한을 연장하면서 가까스로 협상이 타결된 이후 50 여일이 지났다. 지속적인 협정문 공개 요구에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는 등의 핑계를 대던 정부는 5월 25일 협정문을 공개했고 한미 FTA 투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대대적인 분석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성과라고 선전하던 것들의 허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으며 우려되던 지점들은 더 충격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이 확인되어 새로운 쟁점들이 부상하고 있다.

몇 가지 예로 지적 재산권 관련 조항에서 온라인 불법 복제를 방지하기 위해 무단 저작물의 유통이 가능한 인터넷 사이트 자체를 폐쇄하겠다는 내용을 들 수 있다. 기존에는 무단으로 저작물이 유통되었을 때 해당 저작물을 내리거나 사이트 운영자가 삭제하고 저작권 침해가 일어나는 행위를 방지하는 조치들을 취해 왔다. 그러나 협정문에는 국제기준을 훨씬 상회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렇게 적용될 시 한국의 대부분의 인터넷 싸이트가 폐쇄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또한 정부가 FTA의 중요한 성과물로 내세우던 세이프가드 조항 역시도 예외규정과 까다로운 발동 요r="0">하는 조치들을 취해 왔다. 그러나 협정문에는 국제기준을 훨씬 상회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렇게 적용될 시 한국의 대부분의 인터넷 싸이트가 폐쇄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또한 정부

한편 가뜩이나 험난한(?) 길을 가고 있는 FTA 협상은 미국의 재협상 요구라는 또 하나의 변수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미국이 노동권과 환경문제를 이유로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경하게 재협상이 없음을 천명하던 정부는 민망했는지 재협상이 아니라 추가협상이라 주장하며 다시 협상 테이블로 나서게 되었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재협상을 요구하는 미국의 속셈은 다가오는 미국대선을 의식한 재스쳐이자 이것을 빌미삼아 못다 한 요구들을 관철 시키려는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환경파괴를 야기할 것이 자명한 FTA협상을 진행하면서 노동과 환경을 명분삼아 협상을 다시하자는 미국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룰 정도이다.

이제 한미 FTA는 앞으로 양국의 대통령의 협상 체결과 국회 비준 절차를 거쳐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협상 과정에 있어서 철저하게 여론을 통제하고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여 민중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거센 저항에 부딪쳤음에도 정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미국과의 협상문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다른 나라들과의 FTA를 서둘러 추진하고 있다. 도미노로 밀어닥치는 FTA의 붐 속에서 그리고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현재를 분석하고 투쟁을 예비할 수 있을지 활발한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규모 군중시위 없어 EU FTA 협상 대표는 섭섭하다?! 

 

이런 와중에 한편으로 섭섭해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한EU FTA 협상 대표다. 그는 심지어 협상이 시작되는 날 시위대가 6명밖에 모이지 않았다며 한-미 FTA협상 시 대규모 군중시위와 비교하며 그만큼의 관심(?)을 부러워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이런 불만은 비단 이사람 뿐만이 아니다. FTA찬성론자들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반미감정에 휩쓸려 제대로 판단하고 있지 못하다는 주장을 하며 그 근거로 반대 진영이 다른 나라들과의 FTA체결에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다는 점을 지목한다.

물론 한미 FTA 저지 투쟁진영에서는 다른 나라들과의 협상에도 반대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에 반대하는 것은 정세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FTA 투쟁이 진행된 과정을 살펴보면 ‘미국’과의 졸속적이고 굴욕적인 ‘퍼주기’ 협상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 주되게 강조된 논리였다. 한마디로 미국의 강압에 의해 ‘국익’ 보다는 손해가 더 큰 협상을 정부가 주도해서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러한 맥락에 따라 얼마나 피해를 입는지를 부각시키는 방식의 선전을 진행한 것이다. 그래서 반대 여론의 대부분도 조금 더 준비해서 실력을 갖춘 뒤에,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랑 먼저 예행연습한 후에 해야 한다는 식의 내용을 넘지 못했다. 결국 FTA자체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익’을 둘러싼 공방이 진행되면서 한미 FTA협상을 저지하는 투쟁뿐만 아니라 줄줄이 준비되고 있는 다른 나라들과의 FTA협상에 대응하는 것이 무기력해지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목적으로 하는

FTA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FTA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투쟁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선 협상 결과가 다른 협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한미 FTA를 살펴보면서 물음에 답해보도록 하자. 한미 FTA협상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는 정부와 재계는 일부 산업의 피해는 불가피하며 한국의 요구를 전부 관철 시키지 못할 수도 있지만 체결하는 것 자체만으로 이익이 될 것이라고 한다. 벌써부터 재계는 정부에게 해외 업체와의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과도한 규제가 우리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제도를 선진화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과 행보에서 드러나듯이 사실 자유무역 협정이 관세를 낮추거나 무엇을 더 얻어내는 것에 비중을 두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협상을 통해서 한국 사회 전반을 ‘개조’하는데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피해 산업에 대해 기만적 보상을 약속하는 식으로 여론을 무마하려하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재편 전망이 모두에게 장미 빛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장미 빛 전망은 현재의 경제위기를 탈출해 금융세계화에 편입 하려는 재벌 기업들과 지배계급들만의 것일 뿐 민중들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제도 개선은 대부분 노동자로 일하는 민중들을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며 사회 공공성을 파괴하고 초국적 자본의 투기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 위기를 전혀 해결해주지도 못할뿐더러 비정규직 확산과 빈곤의 심화 등을 가속화 시킬 것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로의 편입의 과정이 주가상승을 위한 산업부문별 구조조정을 본격화하기 때문에 실물부문으로의 투자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남한 지배계급은, 초민족화 된 재벌들의 자유로운 이윤추구를 통해서 축적된 부를 나눠 갖지만, 대다수 민중들은 남한 경제의 불안정성을 지탱해주는 역할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이 한미 FTA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본질은 비단 한국과 미국의 협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가 다각도로 추진 중인 유럽과 캐나다 미국 중국 일본 멕시코 등의 15개 국가들과의 FTA협상에도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래서 어떤 나라와의 협상에서 무엇을 얻었고 잃었느냐 또는 피해 산업이 어느 부분이고 어떤 보상이 가능하냐는 식의 논의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한-EU FTA는 공공부문을 주요 협상의제로, 한-일 FTA는 철강과 자동차 등 제조업, 한-중 FTA는 농업분야, 한-ASEAN FTA는 동아시아 시장과 개성공단 원산지 확산이라는 전략적 선택 속에서 이루어 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미진해서 아쉬워했던 부분의 구조조정은 이후 밀어 닥쳐오는 각국별 협상에서 추진되고 진행될 것이다.

하기에 FTA 협상도미노 대해서, 미국이 아니니까 손해도 덜 보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발상이다. 또한 피해 산업을 열거하면서 반대하는 방법도 협상을 저지하는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문제는 누구와 협상을 체결하느냐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목적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모든 FTA에 반대하라!

FTA투쟁을 반신자유주의 투쟁으로!

이제는 새로운 투쟁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지배계급이 한국사회의 유일한 발전 전망으로 내세우며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적 재편, 그리고 그것의 완성판인 자유무역 협상이 민중의 이익과 하등 상관없음을 폭로하고 이에 맞서는 투쟁으로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미FTA 뿐만 아니라 모든 FTA협상이 민중들의 고혈을 착취하며 연명할 수밖에 없기에 모든 협상을 저지하는 투쟁으로, 전 사회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재편에 맞서는 투쟁으로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  

 

 

올해는 87년 민주화 항쟁이 20주년 되는 해이다. 군사독재도 물러갔고 이제는 민주화된 세상이라고 떠들어 대며 저마다 민주화 세력을 자처하는 가운데 노무현 정권도 자신이 진정한 계승자인 듯 한 착각에 빠져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6월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민중들의 정신을, 군부독재와 한 치도 다르지 않게 경찰의방패로 사람을 때려죽인 신자유주의 정권이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향해 투쟁하던 6월의 정신을,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농민은 길바닥으로 여성은 빈곤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로 민중을 기만한 노무현 정권이 가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돌아오는 6월 허세욱 열사의 절규를 가슴에 새기며 모든 FTA에 맞서고 비정규 개악안 시행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통해 진정한 6월 정신을 계승하는 투쟁을 시작하자. 협상문이 작성되었으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투쟁을 예비교사들의 선도적인 투쟁으로 만들어 가자. 아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국면의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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