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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24
    광기의 역사, 발화
    피에로
  2. 2007/07/24
    만덜레이
    피에로

광기의 역사, 발화

지난 밤에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방황 한 가득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의 일상을 한심하다고 비난하고 있었고,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우리의 미래에 대해 한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와 '광기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ㅏ. 그렇지 않아도 지난 열흘여간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고 난 터였다. 친구는 이성과 비이성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다. 그것은 '이성'이 어느덧 체제 안정을 위한 방어의 무기가 되는 언어가 되어버린 현실의 무엇과 연결된 혼란스러움이기도 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비이성에 대해 비난하고 공격한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그러나 그것의 어떤 경계나 어떤 지점에서 우리의 비판이 우리에게 무기가 되는가 아니면 도리어 우린 무엇을 수호하고 있는것인가? 우린 부르주아의 질서의 그 어떤 것도 수호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안에 존재하는, 문화예술이라는 어떤 시스템 안에, 문화산업과 영화산업이라는 시스템 안에 존재하게 될지도 모르는 우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에 종속되어져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답답함으로 가득하다. 난 데모도 않나가고,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한심한 스물다섯이지만, 그거야 어쨌건, 막막한 것이었다. 이성의 언어란 뭐지? 마르크스주의를 좋아하는 어떤 아이가 그리 넉넉하지 못하면서도 철저하게 지배계급의 언어를 따르는 어떤 모순적 삶의 총체를 살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세상이 너무 비이성적이지 않아?"라며 무언가 자신의 가치를 설명하려들었을때, 그것은 의도대로 올바른 효과만을 낳는 발화일까? 아는체하며 말하는 것은 예전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 되었다. 이전보다 책은 많이 읽지만, 이전보다 머릿속이 불확실하며 심장은 들쑥날쑥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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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덜레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미국3부작 두번째 작품 <만덜레이>(2005)를 보았다. 덴마크 영화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라스 폰 트리에는 전세계적으로 독특한 자기 색깔을 지닌 작가주의 영화 작가로 알려져있다. 아쉽게도 그의 <어둠속의 댄서>와 같은 작품들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미국3부작의 첫번째 작품 <도그빌>은 개봉당시 극장에서 본 기억이 난다. 니콜 키드만의 훌륭한 연기와 연극적 요소의 극대화를 통해 미국에 대해 색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풀어낸 그 영화는 당시 칸에서도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고 한다. 아주 넓은 크기의 스튜디오 세트장 안 세팅된 dogville이라는 마을은, 집의 경계, 나무, 심지어 개집까지도 분필로 그려져있고, 저마다 훌륭한 연기자로서의 명성을 알려온 배우들이 자기 위치에서 뛰어난 판토마임 연기를 펼친다. 문을 열고닫을때 존재하지 않는 문이 그/녀들의 연기와 사운드 이펙트에 의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국 문화, 미국적 패러다임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브레히트적 구성으로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이 영화는 이미 만드는 당시부터 감독이 3부작 중 첫번째 작품이라고 밝혀 이후 작품들에 대한 기대도 많은 작품이었다. 또한 라스 폰 트리에는 "도그마95"라는 선언으로도 유명하다. 라스 폰 트리에를 주축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대략 리얼리즘에 대한 질감으로서의 자기 입장, 자기 철학을 지닌 것이었다. 예컨대 영화를 찍을때 모든 사운드는 실제 현장음으로만 해야한다든지, 조명장비는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든지의 규칙들은 이런 방식의 형식적 리얼리즘 선언을 통해 영화적 진정성을 지키려는 하나의 움직임이기도 했다. 과 동기들말로는 한국에서도 변혁 감독 같은 경우 <주홍글씨>를 통해 "도그마95"를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주홍글씨>의 경우에는 그것이 "도그마95"의 정신과 얼마나 어울리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라스 폰 트리에는 이런 흐름의 수장과 다름없었고, 그의 좌파적 기질은 세계 영화계에 여러가지 이슈를 이끌기도 했다. 물론 헐리우드와는 다른 영역의 '영화계'에서 말이다. 어쨌든, 그런 그가 <도그빌>을 통해 이런 도그마95를 스스로 완전히 부정하고 깨부쉈다. 그는 "그때 내가 왜 그랬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만덜레이>는 <도그빌>과 비슷한 형식,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지닌 말그대로 시리즈의 중간단계로서의 영화로 보인다. 극의 캐릭터는 <도그빌>의 '그레이스'(<도그빌>에서 니콜 키드만 분)의 그것과 연결되며 이어져있고, 다만 극의 무대는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남부의 어느 시골 마을 '만덜레이'로 바뀌어져있다. 이곳에서 '그레이스'는 링컨과 북군에 의해 이미 흑인해방이 선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백인 부르주아지 가족의 노예로 살고 있는 '만덜레이'의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대단히 미국적인 무엇이었음이 영화가 진행되면서, (동시에 영화의 종반부에) 드러나는데, 예컨대 어떤 갱집단의 두목인 아버지로부터 분할받은 갱조직 부하들과 함께 총을 들고 위협하며,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자신이 요구하는, 그리고 자신이 알고있는 '정당하고 정의로운' 프로그램을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백인 부르주아지 가족 '마님'의 책에 표시된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레벨1부터 레벨7까지의 여러가지 분할관리 시스템도 파괴하려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지 않고, 이는 그레이스와 만덜레이에 사는 흑인들에게 엄청난 시련으로 이어진다. 영화 종반부에 그레이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스스로 백인 학대자의 모습이 되어 한 흑인 남성에게 채찍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는데 이는 극적 전개와 그레이스의 감정에 따르면 다분히 이해되는 것이면서도, 이런 결말이 그레이스의 목적이나 의도와는 완전히 어긋난 것임이 아이러니하게 드러난다. 방식과 수단으로서 정당하지 못한 시스템이나 구조(이는 즉 미국적 질서, 문화, 통제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필연적으로 비극과 의도와는 다른 비민주주의, 폭력을 낳는다는 식의 에두른 풍자인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오를때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흑인 억압의 역사들이 사진의 연속이라는 형식으로 흘러나온다. 영화적인 작위와 풍자가 현실로 뛰쳐나가며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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