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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발화

지난 밤에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방황 한 가득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의 일상을 한심하다고 비난하고 있었고,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우리의 미래에 대해 한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와 '광기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ㅏ. 그렇지 않아도 지난 열흘여간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고 난 터였다. 친구는 이성과 비이성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다. 그것은 '이성'이 어느덧 체제 안정을 위한 방어의 무기가 되는 언어가 되어버린 현실의 무엇과 연결된 혼란스러움이기도 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비이성에 대해 비난하고 공격한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그러나 그것의 어떤 경계나 어떤 지점에서 우리의 비판이 우리에게 무기가 되는가 아니면 도리어 우린 무엇을 수호하고 있는것인가? 우린 부르주아의 질서의 그 어떤 것도 수호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안에 존재하는, 문화예술이라는 어떤 시스템 안에, 문화산업과 영화산업이라는 시스템 안에 존재하게 될지도 모르는 우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에 종속되어져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답답함으로 가득하다. 난 데모도 않나가고,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한심한 스물다섯이지만, 그거야 어쨌건, 막막한 것이었다. 이성의 언어란 뭐지? 마르크스주의를 좋아하는 어떤 아이가 그리 넉넉하지 못하면서도 철저하게 지배계급의 언어를 따르는 어떤 모순적 삶의 총체를 살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세상이 너무 비이성적이지 않아?"라며 무언가 자신의 가치를 설명하려들었을때, 그것은 의도대로 올바른 효과만을 낳는 발화일까? 아는체하며 말하는 것은 예전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 되었다. 이전보다 책은 많이 읽지만, 이전보다 머릿속이 불확실하며 심장은 들쑥날쑥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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