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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조선 호랑이 사냥 이벤트, 시식회까지 한 달 기록

 
조홍섭 2014. 04. 11
조회수 15364 추천수 0
 

조선 호랑이 포수 총동원 150명이 전국 뒤져, 호랑이와 표범 2마리, 승냥이 사냥

경성과 도쿄에서 요인 불러 호랑이 고기 시식회 열어…제국주의 이데올로기 확산 기여
 

j6.jpg» 원정대가 사냥한 호랑이 두 마리. 왼쪽이 한 마리를 사냥한 최순원, 오른쪽이 원정대 대표인 먀아모토. 그의 손에 사냥총이 들려있지만 실제로 사냥을 하지는 않았다.

 

일본 남아의 담력을 보여 주자
루스벨트 그 무엇이랴
호랑이여 오라
호랑이 덤벼라 표범 덤벼라 늑대도 곰도 덤벼라
안 나오면 쏘겠다 오연발로
호랑이여 오라
올해는 조선 호랑이를 모두 사냥하고
내년에는 러시아의 곰을 사냥하세”

 

한 달 동안 호랑이 사냥을 동행 취재하게 된 기자는 아마도 흥분했던 것 같다. 한 기자가 지은 ‘정호군가’라는 노래는 1917년 11월10일 일본 도쿄역을 출발해 같은 해 12월10일 다시 도쿄역에 도착할 때까지 조선에서 한국 호랑이를 사냥한 원정대의 분위기뿐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그 속내까지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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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기>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지음/ 이은옥 옮김/ 에이도스/ 2만원 

 

<정호기(征虎記)>는 말 그대로 조선 반도의 호랑이를 친 일본 원정대의 수렵기이다. 1918년 출간된 이 책은 사냥 행사 때 찍은 사진과 일기를 모아 놓은 것으로, 이 행사 후원자와 참가자에게 일종의 기념품으로 주기 위해 만든 비매품 한정판이다. 한국범보전기금은 일본의 한 인터넷 고서적 판매상에서 이 책의 원본을 구해 이번에 번역해 냈다.
 

j3.jpg» <정호기> 원본. 참가자와 후원자를 위한 한정본으로 만들었다.

 

사냥 행사를 주관한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는 탄광회사와 선박회사를 소유한 송창양행이라는 회사의 사장으로 당시 식민지 조선의 자원개발과 해운으로 떼돈을 본 사람이었다. 그는 이 행사에 “칠, 팔만 원의 큰돈”을 들였다. 당시 쌀 한 석에 15원 정도였으니 거금이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3억원쯤 된다. 당시 조선은 일제의 쌀 수탈로 쌀값이 폭등해 농민과 노동자들이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던 3·1 운동 직전의 피폐한 상황이었다.
 

야마모토는 이 행사의 취지를 “근래에 점점 퇴패하여 가는 우리 제국 청년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매일신보> 1917년 11월3일치)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 등은 이 책의 해제에서 이렇게 밝혔다.
 

겉으로 내세운 것은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 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해로운 짐승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면의 동기는 개인의 소영웅심의 발로, 부의 과시, 일본군의 사기 진작,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확산 등 복합적인 것이었다.”(18쪽)
 

제국주의 정치가들은 종종 식민지에서 맹수사냥을 벌이곤 했다. 20세기 초부터 조선 땅에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아들인 커밋 루스벨트를 비롯해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 등이 호랑이 사냥을 하러 왔다. 이들이 직접 사냥총을 쥐었다면 야마모토는 사냥꾼과 몰이꾼을 고용하고 자신은 지휘만 하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j8.jpg» 경성 남대문역의 원정대에 동행 취재중인 기자들.

 

사냥대는 24명의 사냥꾼과 약 150명의 몰이꾼으로 구성됐고 매일신보사, 중앙신문, 경성일보, 규슈일보사, 야마토신문 등에서 기자 19명이 동행 취재했다. 사냥꾼은 8개 반으로 나눠 백두산 등 함경남북도와 금강산, 전라남도에 파견한 뒤 사냥물을 한 곳에 모았다. 요즘 많이 하는 팸 투어처럼 언론을 통한 홍보를 극대화하기 위한 기획이 엿보인다.
 

눈길을 끄는 건, 3명을 뺀 사냥꾼 모두가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냥꾼이 모두 동원됐는데, 호랑이 100마리를 쏘아 호랑이 사냥의 일인자로 꼽히던 강용근, 강용근과 함께 조선왕실이 공인한 엽사로 하루에 꿩 106마리를 잡은 기록을 갖는 이윤회 등이 포함됐다. 다른 포수가 화승총을 쓰던 시절이었지만 이 둘은 엽총을 사용했다.
 

j7.jpg» 원산에 집결한 조선인 11명. 두 번째 열 왼쪽에서 네 번째 사람이 조선 호랑이 사냥의 일인자인 강용근, 그 옆 머리에 하얀 두건을 두른 이가 백운학이다.

 

당시 조선의 포수는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사격 실력을 갖춘 것으로 유명했다. 구식 단발 엽총으로 호랑이 같은 큰 맹수를 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급소를 단번에 맞춰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면 역습을 받아 목숨을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조선시대부터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대를 따로 두어 정책적으로 지원한 것도 작용했다. 이들이 정호군의 핵심을 이뤘지만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기에 급급했지 일제에 이용당한다는 한 치의 부끄러움이나 멈칫거림도 이 책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원정대는 조선총독부의 하세가와 총독을 만나는  등 일제 당국의 비호를 받았다. 가는 곳마다 지역 행정당국과 유지가 주최한 성대한 환영행사가 벌어졌다. 
 

j9.jpg» 호랑이 사냥 원정대의 모습.

 

j11.jpg» 함흥에서의 환영회 모습.

 

j16.jpg» 북청 성문밖의 환영 행사.

 

일본인 대부호의 엽기적인 사냥 이벤트는 큰 구경거리여서 조선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해마다 사람 200명 이상, 가축 7000마리 이상이 호랑이 등 맹수의 피해를 입고 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언론의 호의적이 보도가 이어졌다. 사냥꾼들이 호랑이를 잡아 이들의 여망에 부응하려고 경쟁적으로 사냥에 나섰다.
 

j14.jpg» 포수 강용근과 흰옷을 입은 이윤회가 숙소를 방문해 사냥한 산양을 내려놓고 야마모토와 기념촬영을 했다.

 

포수 백운학은 함경북도 성진에 상륙한 뒤 남운령에서 열흘 만에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하고 다른 세 명의 사냥꾼과 함께 산 정상의 목을 지키자 몰이꾼 10여 명이 산 밑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산허리 숲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뛰어나왔고, 백운학이 40보 거리를 유지하며 세 발을 연달아 쏘아 잡았다.
 

j15.jpg» 호랑이를 잡은 백운학과 그의 반에 속한 포수들. 상으로 받은 술잔을 든 이가 백운학이다.

 

다른 포수 최순원도 호랑이를 잡았다. 그는 함경남도 죽암동에서 이틀 만에 상수리나무 숲에서 호랑이를 발견하고 멀리서 쏘았으나 총에 맞은 호랑이가 바위굴에 숨어들었다. 그는 돌을 굴려 굴 입구를 막고 석공과 인부를 고용해 굴 옆에 구멍을 뚫은 뒤 사격을 해 호랑이를 죽였다. 
 

총을 맞고 굴에 뛰어든 지 일주일 만에 호랑이가 잡힌 것이다. 야마모토는 최순원의 무용담에 감동해 은잔에 술을 가득 따라 선물로 주었다.
 

j12.jpg» 호랑이를 잡은 최순원(오른쪽)이 야마모토와 기념촬영을 했다.

 

함경도 일대에서 잡은 호랑이, 표범, 곰, 노루, 산양 등을 기차에 산더미처럼 쌓은 기차가 12월3일 경성에 도착했다. 신문이 매일처럼 사냥 소식을 보도했기 때문에 이들을 구경하려는 인파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폭죽이 터지고 조선 음악대의 떠들썩한 연주가 흐르는 가운데, 카이젤 수염을 한 야마모토는 가슴을 펴고 환영 나온 장관들과 사진을 찍었다.”(70쪽)
 

전라남도 능주 천태산에서는 일본인 포수 곤도가 이틀 만에 산 정상 가까운 곳에서 호랑이 굴을 발견했고 이곳에 숨어있던 몸길이 2.85m의 거대한 표범을 쏘았다. 
 

 j17.jpg» 전남 능주에서 잡은 대형 표범과 사냥꾼들. 붕대를 감은 사람은 포획 과정에서 부상을 당했다.

 

12월6일 사냥 원정대는 남대문 역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기차 화물칸을 가득 채운 포획물은 호랑이 2마리, 표범 2마리, 반달가슴곰 1마리, 멧돼지 3마리, 산양 5마리, 승냥이 1마리, 노루 9마리, 기러기·청둥오리·꿩 다수였다.
 

j18.jpg» 여관 마당에 포획물을 쌓아 놓고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야마모토의 정호군은 사냥감을 그저 가져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2월7일 경성에서는 조선호텔에서 야마가타 정무총감을 주빈으로 경성의 명사 120명을 초대해 호랑이 등 포획물의 시식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호랑이 고기를 채소와 함께 양주를 넣어 익힌 요리 등을 맛나게 먹었다. 이 사냥이 정치적 퍼포먼스임을 보여준 대목이다.
 

호랑이 시식연 참석자들은 방명록에 서명을 했는데, 이 책에 언론인들의 서명이 실려 있다. 사냥 행사를 취재한 기자들의 서명 가운데 한국 이름이 하나 눈에 띈다. 정호군을 따라다니며 <매일신보>에 그 여정을 상세히 기사로 쓴 심천풍(18980~1946)이 그이다. 

j4.jpg» 호랑이 고기 시식연의 언론인 방명록. 오른쪽에 한국 이름 심천풍이 보인다.

 
그의 본명은 심우섭으로 <상록수>를 쓴 작가 심훈의 맏형으로 나중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j5.jpg» 일본 제국호텔에서 열린 호랑이 시식회 모습.

 

‘호랑이 시식회’는 일본에서도 열렸다. 12월20일 도쿄 제국호텔 대연회장에서는 체신 대신, 농상무 대신, 추밀원 고문관, 육군대장 등 정·재계 요인 200여명이 모여 일본에는 없는 이 신기한 고기맛을 보면서 대일본제국의 힘을 만끽했다. 당시 연회의 메뉴판에는 요리 순서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197쪽)
  
 1. 함경남도 호랑이의 차가운 고기(푹 익힘, 토마토케첩으로 마리네 함)
 2. 영흥 기러기 수프
 3. 부산 도미 양주 찜(국물과 함께)
 4. 북청 산양 볶음(야채 곁들임)
 5. 고원 멧돼지 구이(크랜베리 소스, 샐러드 곁들임)
 6. 아이스크림(작은 과자 곁들임)
 7. 과일, 커피
 
그러나 호랑이 원정대 이야기는 시식회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범보전기금은 한국 호랑이의 실체를 유전자 차원에서 규명하기 위해 한국 호랑이의 표본을 추적하던 중 야마모토 원정대가 잡아 내용물을 먹은 호랑이의 표본과 조우하게 된다.
 

야마모토는 호랑이를 비롯한 포획물의 표본을 만들어 자신의 모교인 교토 도시샤 고등학교에 기증했고, 그것들이 지금까지 잘 보관돼 있는 것이다. 표본관을 들른 이항 교수는 ‘조선산’이란 표지가 선명한 호랑이, 표범, 반달가슴곰, 승냥이, 산양, 멧돼지의 표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j1.jpg» 일본 도시샤 고등학교 표본관의 호랑이. 원장대가 포획한 개체이다.

 

j2.jpg» 도시샤 표본관의 조선 표범 표본. 

 

고향에서 이제 맥이 끊긴 호랑이, 표범, 승냥이를 머나먼 땅에서 만난 것은 감상적인 일이었지만, 실질적인 의미도 있다. 이항 교수 등 한국범보전기금 전문가들은 해제에서 이렇게 적었다.
 

어쨌든 한반도에서 멸절된 동물 중 포획한 사람, 장소와 시기, 과정 등 표본과 관련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현재까지 이 도시샤 고등학교의 표본들이 유일하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나마 멸절된 동물에 관한 기록과 표본이 남아 있게 된 것은 정호군 대장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덕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한반도에 와서 호랑이를 사냥해 기록과 표본으로 남겨준 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우리를 씁쓸하게 했다.” (53쪽) 

 

글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사진=에이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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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대박이 ‘토지대박’으로 연결될 수 없는 이유

 

[한반도 현안 톺아보기 2] 조성찬 ‘토지+자유연구소’ 통일북한센터장
조성찬  |  landjustic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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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4.12  13: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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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찬 / 토지+자유연구소 통일북한센터장


북측 지적원도를 둘러싼 논란, 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이 연초에 “통일대박”을 외치자 뜻밖에도 “북한 지적(원)도” 이슈가 튀어나왔다. 필자는 국토교통부가 3월 19일 홈페이지에 올린 “북한 지적도 30만장 디지털화 착수 보도 관련” 보도자료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국토교통부가 디지털화를 검토하고 있는 도면은 북한지역 지적도가 아니라 지적도를 작성하기 위한 기초자료인 측량도면(지적원도)이며, 지적원도는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보도자료 하단에 “통일 대비해··· 북 지적도 30만장 디지털화 착수”라는 <조선일보> 기사 제목이 있는 것을 보니, 이 기사의 내용 일부를 정정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조선일보> 기사를 확인해 보았다. 기사는, 정부는 분단 69년 동안 종이 형태로 보관중인 북측 지적도 30만장을 디지털화하여 영구 보관한다는 내용과, 현재 부산의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는 지적도는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하나의 ‘사실(fact)’로 보도하고 있었다.

국토교통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조선일보> 기사에서 말한 지적도는 정확히 말하면 ‘지적원도’라는 것, 그리고 지적원도가 일반인에게도 공개되고 있다는 것 두 가지 ‘정정된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런데 정정한 내용만 놓고 보면 국토교통부가 기사가 나온 당일 보도자료를 내야 했던 긴박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북한 지적(원)도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적도 디지털화 작업은 이미 10년 전부터 시작된 일

지적(원)도를 디지털화 하는 작업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2004년 8월에 취임한 대한지적공사 공민배 사장은 인터뷰에서, 앞으로 지적공사는 9대 중점 추진방향 중 하나로 전 국토 지적재조사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일제 강점기에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후 아직까지 쓰이고 있는 지적도가 실제 땅의 위치와 모양이 다른 경우가 전체 필지의 30%에 이를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여, 새로 지적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디지털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대한지적공사는 1990년대 중반부터 이 사업을 준비해 왔으며, 2006년부터는 전국 3,600만 필지에 대해 지목과 면적, 경계 등을 새로 조사·측량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지금 추진 중에 있는 지적재조사 사업은 당시 100년이 걸리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여겨졌다(시사포커스, “인터뷰-대한지적공사 공민배 사장, '대한민국을 다시 그린다'”, 2005.1.3.).

그리고 대한지적공사는 지적재조사 사업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2005년 12월 1일에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이 때 통일 관련 기대효과가 강조되었다. 통일 후 북측의 1,242만 필지(지적도 28만매 추정)에 대한 지적조사를 실시하고 현대적인 지적측량 기술 및 토지관리시스템을 수출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한지적공사는 이미 남측의 지적재조사는 물론 통일 후 북측의 지적조사까지 수행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단계로 북측의 지적원도에 대한 디지털화 작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박근혜 정부가 “통일대박”을 외치자, 북측 지적원도 디지털화 작업을 서둘러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은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서 확인된다. 기사는 정부 관계자의 말을 빌려, “북한 출신 실향민들이 갖고 있는 토지대장은 땅 주인이 누구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으나, 지적도는 그 땅이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주는 자료인 만큼 통일 후 토지 소유권 분쟁 해결에 결정적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국토교통부는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을 ‘흡수통일’로 이해하고 실향민들에게 ‘토지대박’을 꿈꾸게 하려던 것인가? 그리고 그게 정말로 가능할까?

지적원도로 토지 소재 파악 가능성 커짐

기사에서 언급한 북한 지적원도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제 강점기 때 제작된 것(임야는 1924년 완료)으로, 가로 70㎝, 세로 90㎝ 크기 종이에 1200분의 1의 축적으로 되어 있다. 모두 30만장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전국의 3분의 2 정도 지적조사 사업이 완료되었으나,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조선총독부 주도 하에 완성된 것이다.

   
▲ 토지조사사업 시기 작성된 평안남도 평양부 관후동 지적원도. [출처 : 조병현 외, 『북한토지론』, 일일사, 2004, 77쪽. 조병현, “통일한국의 국유재산 처리 문제: 북한지역 국유지 실태조사를 중심으로”, 법무부 발제자료(2014.3.)에서 재인용함.]


북측 정부는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1946년에 지적공부를 무효화시키고 등기부를 불태워, 과거의 지적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연구자들은 통일이 되더라도 땅을 두고 토지문서만 가지고 남하한 이들이 실제로 자기 땅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북측 지적원도가 있으면 자기 땅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의 선봉에 조선일보가 나선 것이다. 그러면 땅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지적원도-지적도-토지대장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지적도와 지적원도의 관계를 알아보자. 지적도란 토지를 세분하여 필지별로 구분하고 땅의 경계를 그어놓은 것이다. 지적도에는 토지의 소재, 지번, 지목, 경계, 도면의 색인도·제명 및 축척, 도곽선 및 도곽선수치, 좌표에 의하여 계산된 경계점간 거리 등이 등록되어 있다(지적법 10조, 지적법시행규칙 10조 1항). 반면, 지적원도는 지적도를 작성하기 위한 기초자료인 측량도면이다. 지적원도에는 지번이 표시되어 있다. 대한지적공사 담당자에 따르면, 지적원도를 통해 지적도를 복원할 수 있다.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담당자는 북한 지적원도에 토지소유자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했는데, 조병현(2014)은 그의 논문에서 지적원도에 토지소유자의 이름이 연필로 기재되어 있다고 했다. 아마도 측량자에 따라서 작성 방법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지적도와 토지대장의 관계를 알아보자. 토지대장은 토지의 현황을 명백하게 하기 위하여 토지의 소재, 지번, 지목, 소유자의 주소·성명 및 권리관계의 변동을 등록하는 공부(公簿)이다. 따라서 토지대장에 나와 있는 지번을 통해 지적도상의 실재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북측의 지적원도가 지적도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면 이러한 일들이 가능해진다.

토지문서 진위 여부 확인 불가가 가장 큰 문제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토지문서의 진위 여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공식 장부가 없다는 점이다. 법원행정처가 1997년에 발행한 <북한의 부동산제도>에 의하면 북측은 1946년 농지개혁을 하면서 부동산 등기부를 소각시켰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전의 등기부 등본이나 등기필증 등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발각되면 사형이나 무기징역 또는 특수수용소 수용 등 중형에 처해졌다. 이를 두려워 한 주민들은 관련 자료들을 거의 소각했다. 이처럼 월남자가 현재 소지하고 있는 토지소유 문서를 등기부 원부와 대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법원행정처는 토지문서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서희석, 2006). 따라서 지적원도를 통해 토지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가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 많은 입증자료를 가졌던 통독도 ‘원소유자 반환원칙’에서 선회

지금까지 북한 토지문서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의 관점과 기술적인 확인 가능성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벗어나,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돌려준다는 ‘원소유자 반환원칙’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에 관해 우리와 비교할 때 더 많은 입증자료를 가지고 있었던 통독의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통일 전에 동독은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등기부를 계속 유지해 왔고 일정한 사적 소유가 존재했으며 토지의 거래와 저당권 설정이 가능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통독은 동독의 국유 토지와 협동단체의 소유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되돌려준다는 ‘원소유자 반환원칙’을 채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통일과정 초기에 이러한 원칙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통독은 동독의 사회주의적 소유제도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하나는 당시까지의 사회주의적 소유제도를 인정하는 전제에서 국유재산을 국민에게 매각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적 소유제를 인정하지 않고 분단 이전의 소유제도와 소유권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독일은 후자를 택했는데 바로 구소유자의 손을 들어주는 법적 해결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동독을 불법단체로 규정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소유권 반환원칙은 구동독 지역의 경제 재건과 경제 지체의 최대 요인이 되었다. 재산권의 재사유화 문제는 분단 이전의 역사적 상황, 등기부재 문제,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데다가, 자위단을 통한 ‘주택 사수 투쟁’까지 이어졌다. 결국 반환원칙은 투자 우선과 보상우선 정책으로 전환되었다(서희석, 2006).

따라서 남북한이 통독식의 흡수통일로 가더라도, ‘원소유자 반환원칙’을 추진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러한 원칙이 갖는 가장 큰 문제는 북측 정부를 불법단체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북측 정부를 불법단체로 보려는 태도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민감한 주제다.

가능한 북측 토지소유권 처리 방안

통독 사례에서 알 수 있었듯이, 토지소유권 회복 및 분배는 각종 토지문서를 통해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경제적 관점이라는 보다 큰 논의의 차원에서 결정될 사항이다.

북측 토지소유권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변수는 통일방안이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 등을 통해 남북이 합의한 국가연합으로 가게 되면 북측의 토지소유권 문제는 북측 정부가 자체적으로 처리하게 된다. 따라서 원소유자 반환은 실현 가능성이 없게 된다. 이러한 통일방안으로 가게 되면 북측은 중국 및 베트남의 토지개혁 경험을 토대로 공공토지임대제로 갈 가능성이 크다. 공공토지임대제는 토지를 국유 및 협동농장 소유로 유지하면서 기업과 개인에게 사용권과 경작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UN에 동시에 가입한 북측 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가연합이 아닌 흡수통일로 가게 된다면 토지소유권 처리 방식이 복잡해진다. 그런데 앞에서 논의한 대로 원소유자 반환원칙을 따르기가 쉽지 않고, 따를 수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북측 경제재건을 가로막고 남측의 통일비용을 높이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학계는 ‘보상원칙’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데 합의하였다. 그런데 보상원칙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보상의 증거가 될 만한 자료가 거의 없어, 보상 대상자는 극소수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학계는 보상원칙을 수용하면서, 토지소유권 처리방식으로 크게 네 가지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급진적인 토지사유화, 둘째, 토지사유화와 공공토지임대제 병존, 셋째, 공공토지임대제에서 점진적인 토지사유화로 진행, 넷째, 영구 공공토지임대제 실시 방식이다. 세 번째 ‘공공토지임대제에서 점진적인 사유화로 진행’ 방식은 남측의 여러 학자들과 정책 담당자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고 있다(조성찬, 2013). 그런데 토지사유제가 초래한 심각한 빈부격차를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측 토지소유권도 결국 사유화로 가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한 자기모순이다.

어느 통일방안에서도 선택 가능한 공공토지임대제 방식이 최선

통일방안이 국가연합으로 가건 아니면 흡수통일로 가건 공통적인 토지소유권 처리방식으로 공공토지임대제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즉, 어느 통일방안에서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식은 단순히 교집합의 의미를 넘어선다. 북측 주민들에게 토지공유권을 인정하는 공공토지임대제 방식은 왈라스(Leon Walras, 1834-1910)가 제시한 경제이론 차원에서뿐만 아니라(Studies in Social Economics, 2010), 핀란드나 싱가폴, 중국이 보여준 실제적인 정책차원에서도 설득력을 얻는다(Steven C. Bourassa ets., 2003).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대비 북한 토지제도 개편방향>을 연구한 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통일은 합의통일이 되어야 하며, 흡수통일이라 하더라도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통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토지제도는 남한의 토지사유제가 아니라 공공토지임대제로 개편되어야 할 것이다.(허문영·전강수·남기업, 2009)”

정부가 디지털화 하려는 지적도는 정확히는 지적원도이며, 일반인들도 열람할 수 있다고 정정한 국토교통부의 보도자료는 지엽적인 문제에 과민 반응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휘 하나하나가 북측에 땅을 두고 온 이들에게는 민감한 사안이기에 국토교통부가 신속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토지대박’을 꿈꾸게 한 조선일보 기사의 접근방식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응을 보이지 않았다. 북측 토지에 대한 ‘원소유자 반환 원칙’ 및 더 나아가 ‘토지사유화 원칙’은 행정적인 차원이나 구동독 사례의 시사점은 물론이고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조성찬 (토지+자유 연구소 통일북한센터장) 
 
   
 
중국인민대학교 공공관리학원 토지관리학과에서 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공저인「중국의 토지개혁 경험(부제: 북한 토지개혁의 거울)」(한울, 2011.6.), 「토지정의, 대한민국을 살린다」(평사리, 2012.1.)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 “중국 토지연조제 실험이 북한 경제특구 공공토지임대제에 주는 시사점”, 『한중사회과학연구』(KCI, 2012년 1월, 통권 22호)와 “Introducing Property Tax in China as an Alternative Financing Source”, Land Use Planning(SSCI) 38(2014) 등이 있다.

현재 토지+자유연구소 통일북한센터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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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법 지키는 게 법치 본질"

[인터뷰] 법조 인생 55년 기념 선집 펴낸 한승헌 변호사 
 

기사입력 2014.04.11 11:32:39

 

 

 

 

 

 

 

 

"한 시대가 끝나면 단락을 짓고 역사 청산을 시작해야 하는데, 우리는 1945년 해방이라는 엄청난 전환기를 겪으면서도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과정은커녕 제도적인 청산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지요. 4.19 때도 그랬고, 유신 뒤에도 그랬습니다. 프로그레스만 있지 프로그레시브가 없다고 할까요."

 

대한민국의 어두운 시절 속에서 후에 '시국사건 전문 변호사 1호'로 수식되는 삶의 궤적을 남긴 한승헌 변호사(80)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독재정권 하에서 핍박받고 외면당한 수많은 양심수를 변호했고 그 과정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야말로 삶이 곧 시대인 인물 중 하나다. 권력의 전횡과 그로 인해 나온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동안 그가 가졌을 참담한 감회는 우리의 과거 청산이 이렇게나 미비한 만큼 여전히 강조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이 유별난 고생을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인권변호사' 같은 수식이나 '정의롭다'는 평가에 손사래를 친다. 또 시대의 어두움에 분개하기보다, 그 어두움 속에서 역설의 맛과 희망의 싹을 보라고 권유한다. 유머를 사랑하고 다수의 유머 책을 내기도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에게 있어 유머는 '즐거운 것'이 아니라 역사가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그늘 속에서 시대를 웃으며 감내하는 비법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난해 법조 인생 55주년을 기념하여 네 권의 기념 선집을 발간했다. <피고인이 된 변호사>(범우사 펴냄)는 그가 살아온 시대와 그 시대 속에서 법률가 한승헌, 인간 한승헌으로서 사고한 바를 담은 자전 에세이집이다. <권력과 필화>(문학동네 펴냄)는 남정현의 단편소설 '분지' 사건을 비롯하여 그가 변호를 맡아 온 필화 사건 열일곱 건의 개요와 재판 기록을 통해, 이 땅의 표현의 자유를 향한 싸움을 담은 책이다.

 

<日韓現代史-平和と民主主義を考える(한일 현대사-평화와 민주주의를 생각한다)>(일본평론사 펴냄)는 그가 일본 신문 등에 일본어로 발표한 글로 이루어졌으며, 한일관계를 고찰하는 한편 역사 문제에 있어서 일본의 도발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는 그가 쓴 글 가운데 법치의 본질과 한국 법치주의의 허점과 문제점을 다룬 글을 골라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들은 어두운 시대를 돌파한 한 개인의 기록이자, 여전히 법치주의의 본질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2014년의 한국 정권과 사회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다. 스스로의 법조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최근 사법계를 둘러싼 사건과 문제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정한 사법 독립을 이루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그에게 물었다. 다음은 지난 3월 31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한승헌 변호사와 나눈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인터뷰는 박인규 이사장이 진행했다. <편집자>
 

▲ 한승헌 변호사. ⓒ프레시안(최형락)

▲ 한승헌 변호사. ⓒ프레시안(최형락)

 

 

"다시 태어나도 변호사 할 것"

 

프레시안 : 최근 법조 인생 55주년을 기념하는 선집 4권을 펴내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지난 반세기간 법조인으로서의 활동을 정리하시면서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

 

한승헌 : 사실 저는 본디 법조인을 꿈꿔서 법조인이 되었던 것도 아니고, 법조인이 되고 나서도 아주 평범하고 평온한 법조 생활을 하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제가 법조계에 들어간 50년대 말 이후 곧바로 4.19와 5.16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닥쳤고, 원하지 않게 그 광풍에 휩쓸렸던 것이지요. 그 역사의 한복판에 떠밀려 고생과 보람이 뒤엉킨 세월을 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절 민주주의나 법치주의가 망가지는 과정 속에서, 죄 없는 사람이 죄인이 되고 풀려나야 할 사람이 징역살이를 하는 현실 속에서, 변호사로서 아무리 노력해도 소임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 참담한 심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현장을 떠날 수 없어서 나대로 몰입했던 것은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무력감을 느끼거나 치욕스러웠던 경험도 있었지만, 누군가는 핍박받는 사람들 곁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를 이끌어온 원동력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자기 긍정의 일면을 굳이 숨기지 않겠습니다.

 

프레시안 : 어느 인터뷰를 보니, 다시 태어나도 변호사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한승헌 : 네. 다시 태어나도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변호사로서 다하고자 했던 소임을 다 이루지 못했다는 데 대한 아쉬움입니다. 또 그나마도 변호사로 살 수 있었기에 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의인들과 고통을 나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자신에게 힘과 권능, 기회가 있어야지 남도 도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변호사 재수' 한 번 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다시 태어나서 변호사가 되더라도 민주헌정을 짓밟고 인권을 유린한 그런 군사독재자들은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웃음)

 

생계 위해 걸은 법조인의 길

 

프레시안 : 선생님 약력을 보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려다가 나중에 다시 전주로 올라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다니셨어요.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법조 생활을 하게 되고요. 그 길을 걷게 되신 동기가 무엇이었는지요.

 

 

▲ <피고인이 된 변호사>(한승헌 지음, 범우사 펴냄). ⓒ범우사

▲ <피고인이 된 변호사>(한승헌 지음, 범우사 펴냄). ⓒ범우사

한승헌 : 그렇습니다. 애초에는 중학 진학도 준비하지 않고 아버지 농사일을 도와드리며 살려고 마음먹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중, 고, 대학 진학을 하게 되었지요. 사실 대학서도 법학 전공을 안 했어요. 전북대학교 법정대학에 들어갔는데 과가 정치학과, 법학과 딱 두 개 더라고요. 그 중 법학과는 별로 마음에 없어서 나머지 하나인 정치학과를 간 겁니다. (웃음)

 

 

1,2학년 때는 잡독에 몰두하느라 법률 공부는 안 했어요. 그러다 3학년 올라가면서 대학 졸업 후의 사회 진출, 취직 걱정이 밀려닥치는데 그걸 면하는 길이 고등고시 합격의 길밖에 없더라고요. 그때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간 딱지 놨던 애인을 다시 찾아가듯이 전에 괄시했던 법률 책을 사 모아가지고, 소나기식 공부를 했습니다. 한 번 떨어졌고 다행히 두 번째에 합격한 뒤 대학을 졸업 했습니다.

 

한마디로 제가 법조인이 된 것은 이처럼 생업을 갖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저 하나 믿고 사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신분이나 소득 면에서도 너무 취약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실패한 셈이지요. 입신양명하면 부귀영화가 따라야 한다는데, 변호사를 하면서도 축재는 못 했으니까요. (웃음)

 

프레시안 : 1957년 고등고시 8회 사법과에 합격하시고 군법무관으로 법조인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1960년 11월 부산지검 통영지청의 검사로 임명되었는데요. 검사가 된 것은 희망해서였습니까?

 

한승헌 : 마음속으로는 법관이 되고 싶었지요. 그런데 군에서 3년 반 근무하고 예편한 뒤 현직에 가려고 했더니 이상하게 4.19 직후인데도 법원 검찰에 빈자리가 나지 않았어요. 지금에 비해서 선택의 폭이 좁은 때였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동기들도 법원이나 검찰 쪽에 다 원서를 내고 채용 통지가 먼저 오는 데로 가자고 했지요. 그런데 법무부에서 먼저 임명 통지가 와서 검사 생활을 해보니 적성이나 기질상 잘 맞지 않아서 5년 근무하고 변호사가 된 겁니다. 
 
프레시안 : 검사로 일하는 동안은 죽 통영에서 계셨던 겁니까.

 

한승헌 : 1960년 가을부터 통영에서 근무하다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난 다음 해에 법무부로 옮겼지요. 그리고 1963년에는 서울지검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짧은 시일 안에 지방 근무, 법무부 근무, 서울지검 근무 등 다양한 체험을 한 셈이지요. 

 

프레시안 : 그런데 그 당시 그렇게 빨리 '검사 졸업'한 경우가 없었죠?

 

한승헌 : 주변에서 모두 말렸어요. 검사 5년 경험 가지고는 어디 나가서 밥 먹기 힘들다고요. 사표도 바로 수리가 안 되었지요. 그런 경고를 뿌리치고 나와 보니까, 나 스스로 만용을 부렸다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았어요. 만약 검찰에 더 오래 있다가 간부급으로 올라가게 되면, 검사 체질이 굳어져 더욱 적응 장애를 겪게 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거든요.

 

편 없는 자들 편에 서다보니

 

프레시안 : 변호사 개업 한 달만인 1965년 10월, 소설가 남정현의 단편소설 '분지' 필화사건 변호를 맡으셨습니다. 이게 변호사님이 변호한 필화사건 1호인데요.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에 나온 당시 상황을 보니 대단히 살벌했던데요. 변호를 맡게 된 경위는 어떻게 됩니까?

 

한승헌 : 아마 실제 법정 활동, 즉 재판은 1965년이 아니라 1967년부터 시작됐을 거예요. 맡게 된 계기는 안동림 씨라고, 저하고 문단 친구인 소설가가 있었는데, 남정현 씨가 이 소설 때문에 검찰에 시달리고 있다며 돌봐주지 않겠냐며 절 찾아온 겁니다. 그래서 그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지요.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이게 내가 맡은 필화사건 1호, 시국사건 1호가 됐는데 그 당시엔 계속 그런 시국사건을 맡게 되리라는 건 생각조차 못 했죠. 그저 문단 친구가 걱정하니까 돕게 된 건데요. 그 뒤에 계속해서 필화사건을 포함한 시국사건이 계속 터지니까 도중에 발을 뺄 수가 없어 몇 십 년을 그 '판'에서 뛰게 된 거지요. 

1965년 소설가 남정현은 <현대문학> 3월호에 '분지(糞地)'라는 단편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정신착란을 일으켜 사망한 어머니를 둔 주인공 '홍만수'가 여동생의 동거남인 미군의 아내를 겁탈한다는 줄거리이다. 제목 '분지', 즉 '똥의 땅'은 강대국 미국에 의해 자주권을 잃은 남한의 현실을 상징한다. 북한은 이 소설을 조선로동당 기관지 <조국통일> 5월 8일자에 무단 전재했고, 이를 계기로 남정현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다. 재판은 표현의 자유와 국가 검열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게 되면서 이목을 끌었고, 소설가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선고유예로 끝났다. (위키백과 '분지 필화 사건' 항목 참조)  

 

 

▲ <권력과 필화>(한승헌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권력과 필화>(한승헌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프레시안 : 소설 발표 당시 남정현 씨는 촉망받는 작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는 뚜렷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은데요.

 

 

한승헌 : 안수길 선생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작갑니다. 아주 발랄하고 예리한 작가로 평판이 나 있어서 동인문학상을 받기도 했었지요. 그렇게 유망하던 작가가 이 사건 때문에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유죄 판결까지 받으니 아무래도 위축이 되어서인지, 그 후로도 작품을 쓰긴 썼지만 주목을 많이 받는 작품을 내지는 못했어요.

 

프레시안 : 사실 이 사건은 1965년의 한일회담 반대 정국, 즉 6.3사태를 덮기 위한 박정희 정부의 대책이랄까 반응 중 하나였지요?

 

한승헌 : 그렇습니다. 이 사건이 터진 1965년은 한일회담 반대 범국민투쟁, 베트남 파병 등 국내외로 박정희 정권에게 대단히 곤혹스러운 때였습니다. 분지 사건 같은 공안사건은 대부분 정권이 당면한 정치적 문제나 위기를 덮기 위해, 사람들 관심을 돌리기 위해 나는 거거든요. 그 효과를 보더라도, 분지 사건으로 남정현 한 사람 개인이 피해를 입은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문단 내지는 지식인 사회에 두려움을 줬다는 점에서 정권으로서는 수지를 챙긴 일이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엔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독재정권을 독재정권답게 부각시키는 일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정체를 똑바로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다고 봅니다.

 

프레시안 : 이후로 김지하 오적 사건, 동백림 사건 등 또 다른 공안사건들을 연달아 맡게 됐습니다. 우연히 문단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며 시작된 거라고 하셨는데, 이후로는 자처한 부분도 있겠지요?

 

한승헌 : 어떤 사건은 변호를 자처한 것도 있었지요.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구속된 천상병 시인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누구도 손길을 내밀지 않았던 피고인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건들도 내가 정의감이 남달라서라거나 그런 사건의 변호를 잘 해서가 아니라 당시엔 시국사건을 변호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나라도 나서자' 싶어서 맡았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또 자꾸 내게 의뢰가 왔던 거고요. 그러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조용히 살고 싶었죠. (웃음)

 

출판사를 차린 사연

 

프레시안 : "공 잘 차는 축구선수처럼 동어반복"이라며 '인권변호사'라는 말이 달갑지 않다고 하셨는데, 어쨌건 운명적으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러던 중, 1975년 인혁당 조작 폭로 사건에서 김지하의 변호인으로 나선 일과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각각 옥고를 치르셨고, 급기야 1976년 11월부터 1983년 8월까지 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하셨습니다. 생업의 기반이 사라진데다가 기자가 기사를 쓸 수 없는 것보다 더 큰 고초였다고 생각되는데요. 그 8년간의 세월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한승헌 : 제가 반공법 전문 변호사로 알려졌는데 반공법으로 구속되었으니까, 누가 수상 안전요원이 물에 빠져 죽는 거라고 표현했었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웃음) 그래서 실업자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 하면, 처음에는 아는 분이 하는 법률 잡지에서 주간으로 나가서 얼마간 일했어요. 그 다음에는 '삼민사'라는 출판사를 집사람 이름으로 등록해서 출판 일을 했죠. 자본금도 없고 하니까 전화 응대하고 교정보는 여직원 한 명하고 나하고 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맨 처음 나온 책부터 판금이 되어가지고… (웃음)

 

 

프레시안 : 어떤 책이었지요?

 

한승헌 : 김동길 교수님 책이었어요. '삼민사'란 이름도 그분의 작명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 교수님 글이 아주 인기가 있었거든요. 다른 출판사들이 이 분의 원고 한 번 받으려고 목을 빼고 기를 쓸 때였는데 우리 출판사에 주었지요. 그렇게 해서 <길을 만난 그대에게>라는 책이 나왔고, 2쇄, 3쇄를 찍으며 아주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사들이 서점에 나타나서 법적 근거도 뭣도 없이 다짜고짜 팔지 말라고 했던 거죠.

 

어쨌든 1983년 복권될 때까지 7,8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좋은 저자의 좋은 책을 상당히 많이 냈어요. 김동길 교수 외에도 함석헌 선생님, 김재준 목사님 등이 우리 출판사의 대표 저자였고, 그 밖의 기독교 쪽이나 재야의 학자들, 해직 교수들의 저서도 여러 권 냈지요. 좋은 저자의 좋은 책을 만드는 단계까지는 잘 했는데, 다만 그걸 돈으로 만드는 과정, 요새 말로 '마케팅'이 서툴러서 고전을 했습니다.(웃음)
 
프레시안 : 83년의 복권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한승헌 : 83년이면 전두환 정권 때인데, 8.15 특사 형식으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복역한 사람들 일부를 사면해 준 겁니다. 원래 독재정권은 잡아가는 것도 무단으로 잡아가지만 풀어주는 것도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들 마음대로잖아요. 어쨌든 그렇게 복권이 됐지요.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요? 우리 교회 목사님이 "한 변호사가 복권되었으니 참 기쁜 일이다"라고 말했더니, 어떤 여자 분이 "어머, 얼마짜리 복권이래요?"라고 했답니다. (웃음)

 

더욱 교묘해진 사법계 외부 압력

 

프레시안 :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상임공동대표를 맡으셨지요.

 

한승헌 : 그렇습니다. 전두환의 임기가 끝나고 노태우가 정권을 이어받는 것으로 되어있을 때, 그런 세상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 해서 범국민적인 반대 투쟁을 했던 것이 6월 항쟁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국본이 결성되었고 각계에서 공동대표가 한 명씩 나왔는데, 법조계에서 제가 나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때 변호사 70여 명이 국본에 참여한다는 성명을 내고 6월 10일과 26일, 두 번에 걸친 시민 대행진에 참가했습니다. 
 
프레시안 : 87년 민주화 이후 법조계는 물론이고 언론의 독립성과 자율성도 상당히 회복되었는데요.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 이후 그 독립성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채동욱 검찰총장 사건이나 유우성 간첩 증거 조작 사건, 허재호 황제 노역 건 등 근자에 법조계가 다시 권력의 하수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보수 정부 속에서의 법조계 자율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승헌 : 사실 사법의 독립성이라 하는 것은 권력의 횡포나 압력이 있을 때 진정으로 '본때를 보이는 것'이어야 하는데, 해방 이후 우리나라 사법부를 보면 독재 권력 앞에서는 늘 흔들리고 민주 정권이 들어서 무간섭 상태로 둘 때는 그런대로 독립을 유지하는 기현상이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명박 정부 이후 우리 사법부는 다시 그 옛날 독재정권 시절로 회귀하는 듯한 일면을 드러내고 있어요. 예전의 군사 독재정권 시절과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집권자의 간섭이나 압력이 물리적이거나 노골적인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지능적인 방식으로 그 영향을 떨치고 있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재판에 대한 간섭이 정보기관의 대명사격인 '남산'으로부터 담당 법관한테 바로 미치기도 하는 등 대놓고 요구하는 식이었다면, 지금은 그에 비해서 언론 조작 등 압력의 형태가 더욱 업그레이드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법원이 완전히 자기 신념에 의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지요. 검찰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외풍과 내풍을 모두 견뎌내야 진정한 독립

 

프레시안 : 2012년 MBC 파업 당시 전 MBC 앵커였던 신경민 의원이 공영방송의 독립성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공영방송의 독립성은 방송인 스스로 쟁취하고 지킨 것이라기보다는 정부가 허용한 만큼 누려 온 것이다."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상대적으로 정부가 자율성을 허용해주었기 때문에 방송이 독립성을 확보한 반면, 이명박 정부 이후는 통제 일변도로 나갔기 때문에 지금처럼 공영방송이 망가지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죠.

 

한승헌 : 사법부나 언론이나 그 점에서 공통되는데, 무풍이나 무간섭 상태에서 누리는 독립은 참다운 독립과는 무관한 현상이지요. 외풍이 있을 때 그것을 배제하고 법관이 자기 양심과 신념에 합당한 판결을 관철하는 것, 그게 진정한 독립입니다. 그래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법원이 외부 간섭 없이 재판했다고 해도 그건 '사법부 독립'이라 자랑할 만한 게 아닌 겁니다. 가령 절도사건에 대해서 정권의 간섭이 없었다고 해서 재판부의 독립이 지켜졌다고 말하지는 않잖아요. 문제는 정치적 사건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외부 간섭을 배제하는 것은 사법부 독립의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사법부의 독립을 흔드는 것은 외부의 간섭뿐 아니라 사법부 내부의 사법관료적 위계질서나 정치적 파장에 민감한 영합이나 눈치 같은 것들입니다. 즉, '내풍'이지요. 이런 내풍도 없어져야 온전한 독립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나라의 사법부 독립이 어느 시기에는 지켜졌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부연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사법부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독립이 아니라, 사법부로부터 죄인이라 선고 받고 감옥살이를 했던 그 사람들의 싸움에 의해 얻어진 것이었거든요. 이건 사견이 아니라 지난날의 사법파동에서 나왔던 판사들의 성명에도 명시된 겁니다. 사법부가 나서서 국민의 자유를 지켜줘야 할 때에는 사법부 독립이란 얘기도 못 꺼냈다가, 유죄가 되었던 사람들의 힘으로 민주주의가 이뤄지고 나니까 반사적으로 사법부가 독립을 얻게 됐다고요. 법원이 유죄로 몰아넣은 사람들의 싸움에 의해 법원 독립이 얻어졌다니 역설적이고도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언제든지 외적인 여건이 달라지면 다시금 사법부 독립이 흔들릴 염려가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합니다.

 

프레시안 : 채동욱 총장 사건의 경우, 사법부 전체에 있어 나쁜 전례가 되지 않을까요. 몇 년 전부터 이루어진 검찰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검찰이 나름대로 독립성을 발휘해 중차대한 수사를 맡았다가 모종의 힘에 의해 수사팀이 다 갈아엎어졌다는 느낌입니다. 
  
한승헌 : 채동욱 총장 몰아내기는 현 정권으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악수(惡手)였다고 봅니다. 물론 찍어내기에 '성공'은 했으니까 소기의 목성을 달성한 것처럼 여길 수는 있는데, 착각이지요. 거기에 동원된 권력의 수법을 보면 정말 추리 소설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는 정도거든요. 반복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국가 폭력이 물리력을 바탕으로 '나이브하게' 작용했다면 지금의 수법은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진화했다고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뒤에서 온갖 수를 쓰는 거지요.

 

프레시안 : 한 사회가 올바르게 나아가기 위해 독립성을 갖춰야 할 집단으로 법조계는 물론 대학과 종교와 함께 언론이 꼽힙니다. 신영복 선생은 이들을 '신뢰 집단'이라고 표현했는데요. 그 신뢰 집단이어야 할 언론계가 채동욱 총장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파헤친 <조선일보> 보도에 한국 신문상을 수여했습니다.

 

한승헌 : 난 그 기사를 보고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악의 실체는 그것이 선명할수록 좋은 거거든요. 색깔이나 형태가 애매하면 사람들이 갈피를 못 잡고 혼란을 겪을 텐데, 그렇게 딱 부러지게 드러났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앞서의 시상(施賞) 역시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매사에 화내고 분개만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생각나는 이야기를 하나 할게요. 새 국방장관이 될 뻔했던 이 아무개라는 내정자의 위장전입 사실이 드러나면서, 하룻밤사이에 그걸 백지화시키고 전 정권의 국방장관이 유임을 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 뉴스를 보고, 다른 장관은 몰라도 국방장관은 위장전입을 성공시킨 실적이 있어야 작전에도 성공할 것 아니냐고 그랬어요. (웃음) 내 이야기의 핵심은 여러 가지 마땅치 않은 일에 매사 혈압만 올릴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오히려 역설적이라면 역설적인 의미들을 찾아내자는 거지요. 나아가 악의 현상 속에서 선의 싹을 찾는다고 할까요, 그런 여유도 좀 있어야 합니다. 
 

▲ 3월 26일자 <조선일보>8면

▲ 3월 26일자 <조선일보>8면

 

 

 

법치주의의 본질에서 다시 시작하자

 

프레시안 : 법치의 본질은 일반 국민의 준법이 아니라 "권력자의 준법"에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박근혜 정부의 법치,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한승헌 지음, 범우사 펴냄). ⓒ범우사

▲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한승헌 지음, 범우사 펴냄). ⓒ범우사

한승헌 : 원래 법치라는 것이 '권력자의 자의나 힘에 의한 지배가 아닌 법의 '룰'에 의한 지배'라는 뜻이니까, 법치주의 역시 일차적으로 권력자의 지배 근거와 방식을 법으로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법치주의라는 개념이 전혀 없거나 약한 시대일수록 오히려 '국민들의 준법‘만 강조되어 왔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법치주의는 지배자의 국민을 향한 하향적인 지배 수단이 아니라, 지배자에 대한 상향적인 견제를 통하여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장치입니다. 만약 지금 대통령이 말하는 대로 '국민들이 법과 원칙을 잘 지키는 사회'가 법치주의라면, 히틀러 시대나 유신 시대야말로 법치주의가 가장 잘 관철된 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불성설이지요.

 

 

이건 한승헌 개인 학설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법치주의의 정설입니다. 그런데 법조인 또는 법학자들 중에서도 법치주의가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생겨난 거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의 서문에 "법치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쓴 것도 그래서였지요. 

 

프레시안 : 노무현 대통령은 변호사 출신 정치인입니다. 정치는 타협이 본령인데 법조인은 법적 논리를 중시하다 보니 정치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변호사 출신의 정계 진출이 두드러지는데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한승헌 : 언필칭 법치국가에서 법률 전문가가 법조계 안에서만 맴돌지 않고 정계를 포함해 법조계 울타리 너머 여러 분야로 뻗어나가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법조인이 정계로 진출했을 때 법조인답게 나라의 모든 규범을 존중하고 올바른 법치 민주주의 국가답게 정치풍토를 바로잡았느냐 아니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법조인이 정계로 나가서 법의 논리에만 얽매여 있다면, 여기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법의 논리라도 제대로 존중해주었으면 차라리 좋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실제로는 법의 규정이고 논리고 공약이고 다 팽개치고, 특히 여당의 경우에는 오로지 집권자만 쳐다보는 해바라기 내지 도구적인 존재로 전락해 있어요. 집권자의 의도가 법 이상의 법이 되어 있다고 할까요? 참 개탄스럽고 비참한 일입니다.

 

프레시안 : 결국 다시 법치주의의 본질적 정의로 되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법치주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거고요.

 

한승헌 : 국회의원 중 법조인 출신 비율이 상당히 높은데 왜 국회는 법을 안 지키고 난맥상을 드러내며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법조인이란 자신의 정계 진출, 권력과 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스펙에 불과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줍니다. 그러니 법조인의 신분에 따르는 책무나 헌신을 생각하지 못하는 거죠.

 

한 가지 더, 집권자가 법률가에게 중책을 맡기는 것은 올바른 법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도, 어떤 틀에 순응을 잘 하는 그들의 기질을 원해서가 아닌가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국회의 청문회를 거치는 자리라면 이들이 다른 분야의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준 통과의 어려움이 덜하기도 하고요. 그런 이유에서 법조인을 중용들 하는데, 대단히 걱정스럽죠.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로스쿨, 앞으로도 갈 길 멀어

 

프레시안 : 국제 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에 참여하셨고, 이후 사형제 폐지 등 인권 이슈에 있어서 앞장서 활동하셨습니다. 최근 한국의 인권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또 엠네스티가 한국 인권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한승헌 : 1972년 봄 한국 엠네스티가 출범할 때 창립 이사로 참여한 게 시작이었지요. 1979년, 그러니까 내가 실업자 시절이었을 때는 활동을 꽤 열심히 했어요. 아시다시피 엠네스티는 양심수나 정치범 구제, 사형이나 고문의 폐지, 공정한 재판과 수감자 처우 개선 등 인권의 중요한 거의 모든 분야를 관심사로 삼아 왔는데요. 엠네스티의 활동 목표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이건 대한민국에 맞춤으로 나온 목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목표들이 당시 우리의 급박한 인권상황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어서 초기에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엠네스티가 세계 여러 나라의 인권 문제를 감시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해 온 가운데, 한국의 중요한 문제 상황들을 빠트리지 않고 주시해 왔습니다. 특히 최근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는 문제가 바로 표현의 자유 침해 문젭니다. 국가보안법을 남용해서 표현의 자유를 억제시킨다는 거지요. 또한 노사분쟁에 있어서 정부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문제도 주요하게 지적되고 있습니다.

 

국제엠네스티가 한국 정부에 이런 문제들을 시정하라고 권고하는 활동은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고 실제의 파급력도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성과였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언론 자유 순위를 보면 아프리카의 저개발 나라들보다도 뒤처지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경제 문제든 인권 문제든 국경 안에 가두어 둘 수 있는 문제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 여론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나라의 국격을 생각해서라도, 엠네스티에서 구체적인 사례로 지적받는 문제는 시정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프레시안 : 노무현 정부 당시 만들어졌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 위원장도 맡으셨습니다. 개혁 내용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승헌 : 사법개혁이라는 것은 개혁 주체와 개혁 내용을 준수해야 할 대상이 동일한 어려운 과제입니다. 예를 들어 공판중심주의는 법원이 개혁을 하고 동시에 그 적용을 받아야 합니다. 일종의 자기 개혁이죠. 결국 부담을 끌어안아야 하는 기관더러 개혁안에 찬성하라고 하니까 잘 안 됐던 겁니다. 어쨌든 이명박 정부 들어서 노무현 정부의 웬만한 정책과 성과는 많이 뒤집어졌는데, 그래도 사법개혁만큼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면 잘 된 개혁이었기 때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프레시안 : 그 주요한 내용 중 공판중심주의, 국민 참여 재판과 함께 로스쿨에 의한 법조인 양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 로스쿨 학비가 과도하게 비싸다는 불평과 함께 사법시험제도가 폐지되면서 앞으로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워졌다는 불만도 있습니다만.

 

한승헌 :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는 걱정은 로스쿨 제도를 검토하던 당시에도 나왔습니다. 로스쿨 제도의 취지란 한마디로 몇 과목의 답안지 몇 장에 의한 한판 승부보다는 오랜 교육을 통해 법조인을 양성하자는 것이었는데요. 그 교육기간에 들어가는 학비 부담 얘기가 당연히 나올 만 합니다.

 

'개천'에서 난 사람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메우기 위해, 입안하는 입장에서 내놓았던 것이 장학금 제도였지요. 즉 모든 로스쿨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장학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그 장학금이 어느 정도 마련되었나를 인가 요건에 반영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장학금 제도를 통해 웬만큼 성적이 좋은데 형편이 어려운 법조인 지망생에게도 면학의 기회가 상당 부분 보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 현재 로스쿨 제도의 방향이 당초의 입안 취지에 맞게 잘 가고 있다고 보십니까?
 
한승헌 : 현실적인 문제점이 없지는 않겠지요. 특히 앞으로 로스쿨 합격자가 많이 쏟아져 나올 텐데, 그만큼 경쟁자가 많다는 얘기라서 한마디로 먹고 살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겠지요. 법조인구 과잉에서 오는 그들 각자의 생활여건상의 어려움과 여러 가지 난점은 우리 법조계가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어려운 숙제라고 봅니다. 교육 내용에 있어서는 변호사 시험 과목에 너무 편중된 나머지 다른 과목의 공부가 소홀하지 않나 싶어 걱정입니다. '법조인구의 과잉'이라는 문제의 경우, 법조인들이 활동 분야의 시야를 넓혀서 법정을 드나드는 일만이 아니라 언론이나 기업, 시민단체나 공공기관 등으로 진출하는 것도 한 가지 타개책이라고 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힘이 있어야 남도 돕는다

 

프레시안 : 젊은 시절 시 창작 활동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유머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내셨는데요. 유머는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이며, 법조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한승헌 : 그냥 기쁘고 좋아서 웃는 것이 유머나 해학은 아닙니다. 지극히 역설적인 상황과 반전을 통해 웃음을 터트리게끔 하는 것이 유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내가 살아온 삶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난 지금까지 양지에서 살아왔다기보다 그 반대편에서 살아왔어요. 그리고 유머는 삶의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자라나는 언어 현상입니다. 가난으로 고생할 때, 징역살이로 고생할 때, 혹은 외로울 때 오히려 유머가 많이 나옵니다.

 

 

▲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기행>(범우사 펴냄). ⓒ범우사

▲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기행>(범우사 펴냄). ⓒ범우사

유머는 답답하고 속상한 일 많은 세상에서 잠시라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고, 서로 간에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데 좋은 명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유머가 특히 생동감 있고 독창적이라서 좋지요. 또한 유머는 원가가 별로 안 드는데다 세금도 안 붙습니다. (웃음) 얼마나 좋은가요?

 

 

왜 우리는 사석에선 이런저런 재담을 나누면서 공적인 자리에서는 다른 이들과 공감을 나누고 일체감을 높일 수 있는 유머 활용에 무심할까요? 외국에서는 대통령이나 그의 배우자들까지도 재담이 유려하고, 유머의 스피치 라이터가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그건 그만큼 서로 간의 교감에 유머가 유효하기 때문이지요.

 

우리한테도 그런 풍토가 좀 조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들의 언어 습성이 일반인들의 언어생활과 사고, 인생관에 미치는 영향이 참 큰데, 우리 정치인들의 말솜씨는 막말 중심이고 유머나 해학은 구경도 못해 본 사람들 같아요. 그런 막말 대신 분위기 있는 유머를 활용한다면 정치 그 자체의 품격이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프레시안 : 앞서도 말씀하셨지만 요즘 변호사의 숫자가 많아져서인지 변호사의 위상이 옛날 같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한편으로는 또 취업의 문턱이 어려운 현실도 있지요. 생업을 위해서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든 변호사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한승헌 : 각자의 진로랄까 사적인 목적도 참 중요하죠. 장래의 신분 상승이나 수입을 염두에 두고 법조인을 지망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탓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생업을 얻기 위해 고시에 뛰어든 사람이었으니까요. 처음부터 멸사봉공의 뜻이나 정의감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본인의 보다 나은 생활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열망을 갖고 입신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엔 개인 차원을 넘어서 이 사회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머리에 먹물 든 사람, 사회적 지위를 갖거나 입신한 사람이 다해야 할 사회적 책무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변호사는 인권과 사회 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냥 예쁜 리본 같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남을 도울 수 있는 힘과 권능,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 법조인이라는 업의 큰 장점입니다. 그 자원과 성과를 혼자서만 누려서는 안 되겠지요. 세상은 그래도 남을 위해서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이만큼이라도 나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 스스로 힘을 갖춰야만 사랑도 인정도 남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변호사는 그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의 직업이니까, 입신에서 화살표를 친 다음, 헌신으로 나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너무 과한 주문을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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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뉴스> 한상봉 주간의 꿈

 
조현 2014. 04. 11
조회수 343 추천수 0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한상봉 주간

수도자 꿈꾸다 가톨릭 운동가로

교회본질 고민 홀로 시작한 매체

‘사회교리’ 일깨우며 창간 5돌 맞아

“교회는 그들 아닌 세상 위한 존재”

 

 

한상봉 주간.JPG 

 

 

“교회에 약이 되고 세상에 밥이 되어야지요.” 창간 5돌을 맞은 가톨릭 인터넷 매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catholicnews.co.kr)의 한상봉 주간(51사진)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10일 만났다.

 

그가 2007년 다음 카페에서 홀로 시작한 이 매체는 이제 사제들과 수도자들, 단체들이 가장 ‘즐겨찾는 곳’이 됐다. 재작년까지 옥탑방에서 근근이 꾸려가다 지금은 서울 합정역 근처 사무실에 기자 5명 등 여덟 식구의 어엿한 매체가 됐다. 제도권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많이 쓰다 보니 지원도 받지 못하는 대안매체다. 그나마 이 정도 자리를 잡은 것 자체가 보수성 짙은 가톨릭계에서 기적에 가깝다. 매달 5000원·1만원씩 내는 소액후원회

원 1300여명이 한국 가톨릭의 숨구멍을 여는 데 힘을 보태주고 있다. 한 주간은 “직원들 월급 주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월급을 못 준 적은 한번도 없다”며 ‘하느님의 섭리’를 자랑했다.

 

그는 애초 80년대 후반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수도자가 되고자 예수회 수도회에 지원했다. 그러다 수도를 포기하고 한때는 전북 무주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의 전신인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 연구원을 시작으로 정의구현사제단 사무국장, 종교잡지 <공동선> 편집장, 노동사목협의회 간사 등을 맡아 ‘가톨릭 운동단체’의 핵심으로 활동해왔다.

 

늘 교회와 교인의 본질을 고민하던 그는 노동사목을 하면서 ‘도로시 데이’(1887~1980)라는 멘토를 발견했다. 도로시 데이는 1933년 미국에서 <가톨릭일꾼>이란 신문을 발간해 가톨릭 사회교리를 전파하며, 미국의 경제와 노동 상황을 비판한 가톨릭 여성시민운동가다.

 

“도로시 데이는 노숙자와 빈자에게 음식도 제공하고 시골에 농업공동체도 만들고 노동운동도 하며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어려서부터 성인들을 좋아했던 그는 ‘배고픈 사람에게 밥은 주는 성인은 많은데, ‘왜 가난한 이들이 많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성인은 없는가를 궁금해했다. 그러던 중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라’는 기도 응답을 받았다.”

 

한 주간은 새 매체의 ‘주보성인’으로 도로시 데이를 정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안에 깊숙이 들어가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도로시 데이의 생각대로 교회와 세상의 담을 넘었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아픔을 나누는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사제와 수도자들 뒤엔 늘 <가톨릭뉴스> 기자들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많은 사제 수도자들이 4대강과 밀양, 강정에서 함께하는 물꼬가 트였다. 또한 한국 교회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회적 문제에 대해 다룬 ‘사회교리’가 어떤 교리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도 교회 안팎에 환기시키는 구실도 했다.

 

“교회에서 늘 말하는 ‘이웃 사랑’이라는 게 너무 추상적이어서 자칫 잘못 이해되기 쉽다. ‘이웃 사랑’이 우리끼리만 사랑하고, 우리들만의 천국을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 자세를 위한 존재가 아니고, 세상을 위한 존재다.”

 

그와 기자들은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이처럼 새롭게 깨우기 위한 종소리를 끊임없이 울리고 있다. 11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여는 창립 5돌기념 미사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자리다. 같은 장소에서 11~14일 운영기금 마련을 위한 ‘이철수 판화전’도 열린다. 13일 오후 4시엔 공지영 작가도 이 대안매체에 힘을 보태기 위해 토크쇼를 연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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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조작, 사법 치욕" vs "유우성 거짓 진술"

 
14.04.12 09:44l최종 업데이트 14.04.12 10:45박소희(sost) 
훌쩍이던 여동생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1년 넘는 재판과정은 저희 가족에게는 너무나도 악몽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오빠는 자신의 작은 꿈을 이루고자…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 오빠 너무 불쌍합니다…우리 가족들 너무 억울합니다…."

11일 자정 가까운 시각,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항소심(서울고등법원 형사7부·부장판사 김흥준) 법정에 피고인 유우성씨 동생 유가려씨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재판부 앞으로 보내는 탄원서 녹음파일(아래 첨부파일 참조)에서 "우리 가족의 누명을 벗겨 달라"며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길 무릎 꿇고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물기 젖은 동생의 목소리에 오빠는 고개를 떨궜다. 

간첩 혐의에서 출발, 국가정보원 증거조작사건으로 번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항소심이 곧 막을 내린다. 

재판부는 11일 결심공판을 열어 검찰과 변호인·피고인 유우성씨의 최종 의견을 들었다. 유씨와 변호인들은 1심에서 무죄 판결난 간첩 혐의뿐 아니라 유죄로 인정받은 여권법 등 다른 공소사실도 모두 무죄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끝까지 유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만큼 반드시 실형을 선고해야 한다며 징역 7년을 구형했다. 

[변호인] "증거조작, 사법 역사에 남을 치욕... 법원·유우성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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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원 출석하는 유우성씨 '공무원 간첩사건' 피고인 유우성씨(맨 왼쪽)가 지난 달 28일 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심 결심 공판 출석을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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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들은 국정원의 증거조작, 유가려씨의 국정원 합동신문센터 불법 구금과 그곳에서 벌어진 고문·협박 등을 살펴볼 때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가 조작됐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특히 위조문서로 드러난 자료가 증거로 제출됐던 점 등을 볼 때 "우리 형사사법체계 역사에 남을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평했다. 

국정원과 검찰의 책임도 따졌다. 김용민 변호사는 "법원이 증거조작의 1차 피해자, 2차 피해자는 피고인이고,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 전 국민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라며 "법원이 무죄 선고로 검사의 증거조작행위에 제재를 가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양승봉 변호사는 "대한민국 국가기관이 한 너무나 가혹한 행위 때문에 (유우성씨에게) 국민 한 사람으로서 미안했다"라며 "국가기관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있어서 실망감이 너무 컸다"라고 털어놨다. 

유우성씨는 담담하게 최후진술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해 1월 체포됐을 때부터 현재까지 상황을 돌이켜보며 이따금 감정이 복받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번 재판을 받으며 간첩으로 억울하게 살았던 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과연 제가 21세기에 살고 있는지 아니면 70년대 살고 있는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중간 중간 깊은 한숨을 내쉬거나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저는 그 분(여러 활동으로 알고 지낸 북한이탈주민)들한테 떳떳합니다. 단 한명의 신원도 (북한에) 보낸 적 없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유우성은 간첩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유씨는 이 한 마디를 하면서 검찰을 바라봤다. 이어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믿는다, 제가 서 있는 이 법정과 재판부를 믿는다"며 최후진술을 끝맺었다(유우성 최후진술 전문).

[검찰] "끝까지 혐의 부인·거짓진술한 유우성" 징역 7년 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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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 향하는 '공무원 간첩사건' 담당 검사들 '공무원 간첩사건' 결심공판을 앞둔 지난 달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유우성씨의사건을 맡은 검사들이 재판을 위해 들어서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시원, 이문성, 최행관 검사, 이현철 서울중앙지검 공안 1부장.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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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회를 얻은 검찰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최종의견 발표자로는 1심부터 참여해온 이시원 검사가 나섰다. 그는 원심 판단과 달리 여러 정황들을 볼 때 유씨 여동생 가려씨의 진술은 충분히 믿을만하고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이 검사는 유가려씨가 국정원 조사관들의 고문·협박에 못 이겨 허위진술을 했다는 변호인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며 발표 시간의 상당부분을 할애했다. 

"(유가려 증인의) 검찰조서만 8회 152페이지에 달합니다. 이게 모두 유도진술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유도신문의 예를 한 번 보죠. 변호인은 1심 공판 때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서 확인서와 반성문 중 무엇을 먼저 썼냐고 물었습니다. 유가려 증인이 이야기를 못하자 '저한테 말할 때처럼 편하게 못한다'고도 했습니다. 결국 유가려 증인은 확인서를 먼저 썼다고 했다가 반성문부터 썼다고 바꿨고요. 전형적인 유도신문입니다. 이를 보면 변호인이 유가려 증인과 함께 있는 동안 어느 정도 진술 유도를 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검찰은 이날 유우성씨 죄목에 '사기'를 추가하는 공소장 변경도 신청했다. 재판부는 받아들였다. 이시원 검사는 "피고인은 중국 국적을 보유하면서 북한이탈주민으로 위장, 지원을 받았다, 범의(犯意)와 기망행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재판부에 유씨의 북한이탈주민보호법·여권법 위반과 사기죄 등 모든 혐의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마무리는 이현철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장검사 몫이었다. 이 부장검사는 "피고인은 여동생의 진술을 계기로 범행이 명명백백히 드러난 후에도 부인으로 일관하고, 거짓진술로 책임회피하기 급급했다"고 비난했다. 또 "북한이탈주민들은 자신과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피고인이 탈북자 신상을 북에 넘긴 것은 그들에게 심각한 위협이고, 대한민국 안보상황에도 직접적인 위험을 가할 수 있는 행위"라고 말했다. 검찰은 1심 때와 마찬가지로 징역 7년을 구형했다(관련 기사 :화교 출신 서울시 공무원 간첩 혐의 무죄). 

이날 오전 10시 반에 시작한 재판은 추가 증거조사에 결심절차까지 밟느라 12일 오전 1시쯤에야 끝났다. 검찰과 변호인들은 그 시간 내내 팽팽하게 맞섰다. 재판장 김흥준 부장판사는 "한 사람의 법조인으로서 비록 날선 공방이지만 치열하고 수준 높은 공방을 보게 돼 영광"이라며 "양쪽 의견을 깊이 경청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유우성씨에게도 "재판이 예상보다 지연됐지만 불편함을 감수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유우성씨에 대한 선고공판은 오는 4월 25일 오전 10시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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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 탄도미사일에 문제없다면, 北 위성·로켓 발사도 마찬가지"

 
<北국방위 정책국 대변인 담화> 美에 대북 적대시정책·제제결의 취소 촉구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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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4.11  1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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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1일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 담화를 발표해 미국이 대북 적대시정책을 버리는 용단을 내릴 것을 촉구하고 당면해서 북에 대한 온갖 제재조치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북한 국방위원회 정책국은 11일 '미국은 더 이상 우리에 대해 입을 벌릴 체면도 자격도 없다'는 제목의 대변인 담화를 발표해 이같이 주장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담화는 지난달 23일 한국군이 비공개로 500km 사거리의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을 감행하고 10여 일이 지난 5일 관련 사실을 언론에 공개한 일을 거론하며 "우리가 예상했던 바 그대로 지금 미국은 남조선 괴뢰들의 탄도미사일 발사놀음에 대해 아예 모르쇠를 하면서 일체 함구무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도 그 실체가 존재하는 지 의심할 정도로 입 한번 벌리지 않고 있다"며 "이것은 우리의 인공지구위성 발사나 자위적인 로켓발사 훈련에 대한 대응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꼬집었다.

담화는 "우리 군대가 정상적인 로켓발사 훈련을 진행하자마자 정수리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아우성을 치며 엄중한 '도발'이요,'위협'이요 하면서 역겨운 청을 제일 요란하게 돋군 것도 미국이며, 그 무슨 '제재결의' 위반이라고 벅적 떠들다 못해 이른 새벽 긴급회의라는 것까지 소집해놓고 '규탄'성명을 고안해낸 것 역시 미국과 그 주도하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였다"고 상기시켰다.

담화는 이같은 미국의 침묵으로 인해 "하나의 같은 사실을 놓고 하늘과 땅처럼 극명하게 갈라진 미국의 양면주의적 태도와 이중적이며 파렴치한 행동방식이 다시금 세계앞에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라고  비꼬았다.

이어서 담화는 "우리는 이 기회에 미국이 덩지 큰 나라답게 옳은 정책적 결단을 내릴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미국은 이제라도 우리에 대한 공부부터 착실히 하면서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대조선 적대시정책을 버리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남조선 괴뢰들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에 문제가 없다면 우리의 위성발사나 로켓발사는 더더욱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명분을 잃은지 오래고 구실이 없어진 오늘 우리에 대한 모든 '제재결의'를 취소하는 것만이 현명한 처사로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담화는 "우리는 이미 선포한대로 미국의 강권과 전횡, 날강도적인 이중기준에 따른 대조선 적대시정책이 계속되는 한 그것을 끝장내기 위한 자위적인 대응조치들을 계획한대로 완강히 밀고나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북한은 5일 인민군 전략군 대변인이 <조선인민군신문>기자와 가진 문답에서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한 이후 7일에는 국방과학원이 나서 대변인 성명으로 "미국과 괴뢰패당은 더 이상 우리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시비할 수 없게 됐으며 유엔안보이사회도 할 말이 없게 됐다"며 "누가 뭐라고 하든 미사일 위력과 핵억제력을 가일층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은 더이상 우리에 대해 입을 벌릴 체면도 자격도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담화-- (전문)


지난 3월 23일 남조선괴뢰들이 세상의 눈을 피해가며 500㎞의 사거리를 가진 탄도미싸일발사시험을 감행하고 그에 대하여 뒤늦게 공개하면서 마치 큰 성과나 거둔것처럼 떠들어댔다는것은 내외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동안 세상사람들은 남조선괴뢰들의 숨박곡질과 같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은 어떻게 대하고 유엔안전보장리사회는 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눈여겨 지켜보았다.
우리가 예상했던바 그대로 지금 미국은 남조선괴뢰들의 탄도미싸일발사놀음에 대해 아예 모르쇠를 하면서 일체 함구무언하고있다.
유엔안전보장리사회도 그 실체가 존재하는지 의심할 정도로 입 한번 벌리지 않고있다.
이것은 우리의 인공지구위성발사나 자위적인 로케트발사훈련에 대한 대응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대조를 이루고있다.
우리 군대가 정상적인 로케트발사훈련을 진행하자마자 정수리에 벼락이라도 떨어진것처럼 아우성을 치며 엄중한 《도발》이요,《위협》이요 하면서 역겨운 청을 제일 요란하게 돋군것도 미국이며 그 무슨 《제재결의》위반이라고 벅적 떠들다 못해 이른새벽 긴급회의라는것까지 소집해놓고 《규탄》성명을 고안해낸것 역시 미국과 그 주도하의 유엔안전보장리사회였다.
우리 군대가 사전통고를 하고 진행한 서남해상에서의 포병사격훈련까지 지역평화에 대한 《도발》로 무작정 걸고들던것도 바로 엊그제 일이다.
이러한 미국이 500㎞의 사거리를 가진 탄도미싸일발사가 크게 성공한것처럼 요란하게 광고하면서 다음해에 이 탄도미싸일을 실전배비하게 되면 공화국북반부 전지역을 타격권안에 넣게 될것이라고 함부로 입방아질하며 우리에게 로골적인 도발을 걸어온 괴뢰들의 무분별한 망동에 대해서는 입에 쇠빗장을 지른듯 침묵을 지키고있는것이다.
이 행성에 제 하나밖에 없는것처럼 남들이 하는 일들에 코코마다 간참해나서면서 떠들어대길 좋아하던 미국이 어떻게 되여 그렇게 《과묵》해지고 《진중》해졌는지 묻지 않을수 없다.
미국이 입을 닫아매고있는 리유는 불보듯 명백하다.
삐뚤어진 눈에는 세상만사가 꺼꾸로만 보인다고 비위에 거슬리는 나라들의 정의로운 행동은 불의로 보이고 옷섶을 붙잡고 아양을 떠는 하수인들의 극악한 범죄는 선한 일로 평가되는 그 날강도적인 이중기준과 독선적인 행동방식이 아마 미국으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하고 입을 벌릴 용기조차 앗아간 모양이다.
하나의 같은 사실을 놓고 하늘과 땅처럼 극명하게 갈라진 미국의 량면주의적태도와 이중적이며 파렴치한 행동방식이 다시금 세계앞에 더욱 적라라하게 드러난셈이다.
남조선괴뢰들이 발사한 탄도미싸일에 대하여 말한다면 미국이 사거리를 800㎞까지 늘이도록 승인해주고 핵심기술까지 슬그머니 전수해주면서 비밀리에 발사하라고 떠밀어주어 빚어낸 상전과 주구의 결탁물이다.
우리는 이 기회에 미국이 덩지 큰 나라답게 옳은 정책적결단을 내릴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큰 나라다운 체면을 살리고 그에 맞는 대우를 받으려거든 이제라도 공명정대하게 처신하여야 할것이다.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기준을 자대로 하여 같은 현실을 놓고도 한쪽은 걸고들고 다른 한쪽은 눈감아주는 망녕든 행위에 더이상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어른이 철없는 아이들처럼 편역을 들며 놀아댄다면 《큰 바보짓》을 한다는 비난을 받기가 일쑤라고 하였다.
지금처럼 정정당당한 로케트발사에 대해서는 《도발》과 《위협》으로 걸고들고 진짜 도발성격이 력력한 미싸일발사에 대해서는 눈감아준다면 미국은 《큰 바보짓》을 한다는 내외여론의 지탄을 면치 못할것이다.
이 밝은 세상에 공정성을 잃고 정의를 불의로,불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권모술수에 매달릴수록 미국의 체면은 수습할수 없게 구겨질것이며 헤여날수 없는 궁지에 빠져들게 될것이다.
또한 미국은 끊임없이 바꾸어대는 대조선적대시정책에 머리를 숙일 우리 군대와 인민이 아님을 명심하고 이제라도 제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것이다.
극도의 포만감과 자고자대에 쩌들어있는것이 미국이며 그로 인해 늘 상대를 잘못 알고 덤벼들었다가 매번 랑패만을 보면서 쓴입을 다셔온것이 백악관의 주인들이라는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지금 미국이 범하고있는 최대의 실책은 반세기가 넘는 조미대결사가 남긴 이 엄연한 사실과 교훈을 망각하고있다는데 있다.
미국도 눈이 있고 감각과 리성이 있다면 장구한 세월을 두고 대결해온 우리가 과연 누구이며 어떤 정신력과 기개를 지녔는가에 대해 생각을 가다듬고 똑바로 헤아려보아야 한다.
미국은 이제라도 우리에 대한 공부부터 착실히 하면서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대조선적대시정책을 버리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
당면하여 미국은 지금까지 앞장에서 주도하여 함부로 꾸며낸 우리에 대한 온갖 《제재》조치를 철회하는것으로부터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여야 할것이다.
남조선괴뢰들이 발사한 탄도미싸일에 문제가 없다면 우리의 위성발사나 로케트발사는 더더욱 문제가 없을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자위적억제력강화를 위한 우리의 모든 군사적조치에 대하여 더이상 걸고들며 못되게 놀아대지 말아야 한다.
명분을 잃은지 오래고 구실이 없어진 오늘 우리에 대한 모든 《제재결의》를 취소하는것만이 현명한 처사로 될것이다.
상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대조선적대시정책을 고집하면 할수록,천년이 가고 만년이 가도 실현될수 없는 《고립봉쇄》조치와 《제재》소동에 매달릴수록 저지른 죄행은 배가로 커지게 될것이며 우리 군대와 인민의 가슴속에 맺혀있는 한은 천백배의 복수로 이어진다는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다시금 천명하지만 우리는 이미 선포한대로 미국의 강권과 전횡,날강도적인 이중기준에 따른 대조선적대시정책이 계속되는 한 그것을 끝장내기 위한 자위적인 대응조치들을 계획한대로 완강히 밀고나가게 될것이다.
미국은 더이상 우리를 걸고들 체면도 자격도 없다는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주체103(2014)년 4월 11일
평 양

<출처-조선중앙통신 201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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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친일 다큐 '백년전쟁'이 보안법 위반?

검찰, 이적표현물 배포 등 국보법 위반혐의로 '공안부' 이첩
 
이호두 기자
기사입력: 2014/04/11 [23:52]  최종편집: ⓒ 자주민보
 
 
 
민족문제 연구소가 제작한 이승만의 친일을 다룬 유명다큐 '백년전쟁'이 논란에 휩싸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012년 11월 이승만의 친일 행적 등을 다룬 본편 4부, 번외편 2부 분량의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을 유튜브 등을 통해 공개했다. 이 영상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구세력들로 부터 큰 반발을 샀다.
 
이번 사건은 지난해 5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인수 이승만기념사업회 상임고문(83)이 이 영상을 제작한 김지영 감독 등을 고소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독자들의 알권리를 위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던 해당 영상을 게재한다.

 


이 동영상은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을 사욕을 채우고 독립운동을 핑계로 모금된 하와이 교민들의 성금을 횡령하고, 대통령 병에 걸린 그의 비인간성과 추악함을 고발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동영상 소개에는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 미 CIA 보고서

그는 계절학기로 하버드 학위를 따는 능력남이었고, 돈이 "본성이자 본능"인 갱단 보스 같았으며, 지도자 위치에는 어울리지 않는 코미디의 왕이었다. 

일제강점기, 이승만과 독립운동가의 슬프고도 웃긴 대서사극이 펼쳐진다."
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검찰이 "수사 초기 백년전쟁 제작자에 대해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했지만 조사과정에서 이적표현물 배포 등 국보법 위반 혐의가 드러나 사건을 공안1부로 이첩했다"고 밝힌 가운데
 
민족문제 연구소 http://www.minjok.or.kr 는 
"사료와 증거를 바탕된 역사다큐멘터리에 국가보안법은 납득할 수 없다" 며 민족문제연구소와 <백년전쟁>에 대한 공안 탄압 기도 중단을 요구하고 항의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갖는다.
 
일자는 14일(월)오전 11:00로 장소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동문 삼거리다.
 
참고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으로 유명한 역사단체로, 박근혜의 남동생 박지만 씨가 이 사전에서 등재된 박정희의 이름을 빼달라 소송을 했으나 2009년 11월6일 기각당했던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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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도 보는 것을 한국인만 못 보는 것

일본인도 보는 것을 한국인만 못 보는 것

-일본 집단 자위권 용인의 위험성 간과

이하로 기자

일본이 아닌 동맹국 공격 받을 시 반격할 수 있는 권리
한국은 일본의 동맹국, 한국 공격 받을 시 일본군 자동 참전

asahi_0409_2014

9일자 아사히신문 영문뉴스 캡처 사진

9일, 많은 일본 언론들과 외신들은 도쿄에서 일어난 대규모 집회에 주목했다. 이 집회는 집단 자위권을 행사하려는 아베 정권의 헌법 해석 변경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집회였다. 이 집회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작가 오에 겐자부로를 비롯해 시이 가즈오 공산당 위원장, 요시다 다다토모 사민당 당수, 곤도 쇼이치 민주당 중의원 등 헌법 해석에 반대하는 주요 인사들과 100개 이상 시민단체가 대거 참석했다고 한다. 그런만큼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 교토통신 등 일본의 유력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하고 나섰다. 서울 도심에서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를 전혀 모르쇠로 일관하는 한국의 언론들과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도 ‘”아베는 평화 민주 파괴” 도쿄 5천명 규탄집회’라는 제목으로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를 보도했다. 그러나 어느 신문도 이번 아베 정권이 추진하려는 헌법 해석변경을 통한 집단자위권 행사의 위험성을 지적하지 않았다. 필자는 2월과 3월 ‘일본군의 군화발 소리가 한반도에 울려 퍼질 수 있다’는 내용의 칼럼으로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한미일 동맹의 위험성과 숨겨진 배경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이번 헌법 해석의 변경을 통한 집단자위권 행사와 동북아시아에서의 한미일 동맹은 같은 연장선 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베의 헌법 해석변경을 통한 집단 자위권 행사의 내용은 이렇다. 현재까지 일본 평화헌법 상에 일본 자위대는 전수방위 원칙, 즉 ‘방어를 위한 무력만 행사한다는 원칙’ 하에 놓여 있었다. 자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에 자국을 방어하는데만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명문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베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집단자위권은 방어만을 위한 원칙을 버리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아베 정권은 헌법 개정이 사실상 어렵고 일본 국민들의 반대가 심할 뿐 더러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주변국들의 반발을 의식해 노골적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 아닌 각의(국무회의)의 의결만으로 이 헌법의 해석 변경을 통해 슬그머니 집단자위권을 추진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일본에게는 자국이 공격받지 않아도 공격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집단자위권이란 일본이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일본의 동맹국이 공격을 받았을 경우 자국이 공격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반격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태평양 전쟁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일본이 인류사에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어 종전 후 평화헌법은 일본이 자국을 벗어난 군사력 사용을 금지시켜 놓았고 이러한 평화헌법 개정은 일본 우익들에게는 꼭 이루어야할 숙원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은 일본 국민들은 대다수가 평화헌법을 지지하며 아베 정권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반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베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집단자위권 행사가 이루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일본의 동맹국이 공격을 받았을 경우 일본은 자국이 공격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여 군사력을 동원하여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가장 큰 동맹국은 미국이다. 미국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시아로의 귀환’ 정책 이후 동북아에서 미일 동맹을 축으로 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한미 동맹을 미일 동맹의 하부구조로 놓아 동북아에서 한미일 동맹을 통해 중국에 맞선다는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구도 속에서 한국은 일본의 동맹국이 되는 것이다.

만약 한국이 북한이나 또는 중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경우 일본이 공격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여 한국의 동의를 받지 않고 자동적으로 한국과 북한의 전쟁, 또는 중국과의 전쟁에 일본이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해 일본군이 한반도에 참전하여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한반도 진주가 현실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길을 열어 놓는 것이 바로 이번 아베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헌법해석 변경을 통한 집단자위권 행사인 것이다. 그리고 한미일 동맹의 추진은 바로 이러한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의 큰 틀인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지 1백여 년이 지난 후, 한민족을 말살하려했던 극악한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패전으로 물러난 지 75여 년 만에 다시 일본군이 한국의 동의 없이 한반도에 진주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한국의 언론들은 이러한 위험성을 지적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양식있는 일본인들이 이를 경고하고 반대하며 대규모 집회를 열어 목소리를 낸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씨는 “우리는 전쟁에 패하고서 평화주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방침을 만들었다”며 “지금의 정부는 그 정신을 부수려 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또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공산당 위원장은 “‘일본을 죽이고 죽는 나라로 만들어도 좋은가’라는 질문이 제기됐다”며 “국민으로서 용납할 수 없다는 목소리를 아베 정권에 던지려 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일본인들은 이번 집단자위권 행사를 위한 헌법 해석변경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있는데도 한국민들은 이를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하긴 이에 대해 언급하는 한국 언론은 없으니 국민이 알 리가 없다. 박근혜와 그 정부가 이런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고 적극적으로 일본에게 항의하고 이의 위험성을 알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감추기에 급급하는데 어느 국민이 그 위험성을 알 수가 있겠는가? 아직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도 받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독도가 자기 영토라고 교과서에 게재하는 등 한국에 대해 반성없이 끝없이 도발을 일삼은 일본의 군대가 동맹국 군대라고는 하지만 한반도에 진주하는 것을 허락할 한국인이 그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러한 사실은 지난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의 방한 시 박근혜와 한국 정부에 통보됐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통성을 상실한,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와 그 정부는 이에 저항할 그 어떤 힘도 국민들의 지지도 갖고 있지 않다. 겨우 한다는 짓이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안면몰수나 하는 몰상식한 행동으로 국민들의 인기나 끌려하는 박근혜가 외교를 어찌 알 것이며 친일파 독재자의 딸인 박근혜가 일본에 어떻게 저항한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다면 우리의 두 눈으로 일본군의 군화소리가 한반도에 울려 퍼지는 치욕을 보게 될지 모른다.

이때쯤 되어 이에 격렬한 저항을 한다면 그때는 반미를 외치면 종북으로 몰렸듯이 반일을 외치면 빨갱이로 몰리게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국민으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은 정권이 이래서 더욱 필요하다. 온 국민이 부정선거 무효와 박근혜 타도를 외치는 동안 한반도의 지역적 상황은 1백여 년 전 항일병탄의 시절로, 가쓰라 테프트 조약의 시절로 돌아가 버리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제대로 된 정권을 세워 일본의 야욕에 대처하는 자주적인 정권을 시급하게 세워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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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의 세월을 견뎌온 ‘어머니의 노래’

 

4.9재단.4.9사업회, 4.9통일열사 39주기 추모제 개최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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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4.10  14:5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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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세웅 신부가 우홍선 열사의 부인 강희순 여사에게 39년전 자신에게 무어라고 했냐며 마이크를 들이대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만일 바뀌어서 여성들 여덟 분이 사형당하셨고 남편들 여덟이 남아있었다면 그 남편들이 돌아가신 아내, 여성들을 위해서 10년, 20년, 30년, 40년 싸우면서 목숨을 바쳤을까?”

함세웅 신부의 엉뚱한 질문에 엄숙하던 추모식장이 갑자기 웃음바다가 됐다. 함 신부는 “생명력의 원천인 어머니들의 강인함”을 예로 들며 인혁당 사건으로 남편을 잃고 39년의 세월을 견디며 싸워온 여성들을 위로했다.

4.9통일평화재단과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는 9일 오후 6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대성당에서 ‘4.9통일열사 39주기 추모제’를 열어 고인들을 추모하고 특별히 남겨진 부인들을 위로했다.

39년 전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사제’였다는 함세웅 신부는 우홍선 열사의 부인 강순희 여사와의 일화도 소개했다.

“저보고 뭐라고 하셨어요?”
“그 당시 함 신부님은 정복 입은 유치원생 같다고 했어요.”

이제는 칠순을 넘긴 함 신부는 “이수병 선생 부인이 29살로 갓난아이 업고 다니고 그랬는데, 유일하게 저보다 어렸다”고 회고하고 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당시 외국 선교사들과 열사들의 부인들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치하했다.

   
▲ 9일 프란치스코교육회관 대성당에서 열린 '4.9통일열사 39주기 추모제'에서 이해동 목사가 추도사를 읽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8명의 열사들이 사형당한 다음날인 1975년 4월 10일 목요기도회장에서 사회를 보았던 이해동 목사는 경찰들이 시신마저 탈취한 과정을 생생히 증언하고 “다시는 억울한 죽임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해동 목사는 “한평생 한 맺힌 삶을 굽힘 없이 꺾임 없이 훌륭히 이기며 살아오신 유족들에게 깊은 경의와 위로를 드린다”고 인사했다.

인혁당 사건은 32년 만인 2007년에서야 대법원 재심에서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아직도 현실은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4.9통일평화재단 상임이사인 김형태 변호사는 “처음 1,2심에서 옛날부터의 이자를 우리가 받았는데, (대법에서) 지금부터 이자를 주라고 해서 (보상금이) 팍 줄어서 거꾸로 토해내야 할 상황”이라며 “세월이 오래가면 이자를 지금부터 주라는 것은 법에도 없는 이야기다. 명확히 불법이고 위헌이다”고 지적했다.

김형태 변호사는 “대법원이 과거사 정리에 관해 어거지로 후퇴해 가는 것에 관한 여론형성이나 헌법재판을 통한 법적 공격을 빠른 시일 내에 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국회에서 과거사법을 다시 되살리자는 입법활동을 추진하고 정부에게는 법원의 부당한 판결이 나오더라도 이미 지급된 보상금의 환수를 집행하지 않도록 항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는 “박근혜 정권이 등장하자마자 그 아버지가 했듯이 공안탄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며 “4월 19일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청년학생, 모든 시민들이 모여서 박근혜 유신부활 독재정권을 끝내기 위한 10만 시민 촛불대행진을 진행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한충목 공동대표는 “열사들의 희생이 기념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 계승되는 것은 투쟁 속에서 부활할 때 가능하다”며 “선배 열사들의 뜻을 받들어 박근혜 독재정권 퇴진의 범국민 투쟁을 강력히 진행하겠다”고 다짐했다.

   
▲ 연극인 김미경, 신여정 씨가 아이를 업고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이수병 열사와 얼굴만 마주친 채 영영 이별하게 된 이정숙 여사의 사연을 담은 상황극 ‘어머니의 노래’를 공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핸된 이날 추모제에서 연극인 김미경, 신여정 씨가 아이를 업고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이수병 열사와 얼굴만 마주친 채 영영 이별하게 된 이정숙 여사의 사연을 담은 상황극 ‘어머니의 노래’를 공연했고, 평통사 청년들이 어머니들을 위한 노래를 공연했다.

추모제에는 백기완 선생, 박중기 추모연대 의장, 이부영 전 의원, 유인태 의원, 열사들의 가족들과 황현승 선생 등 사건 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석했지만 4.9통일평화재단 이사장인 문정현 신부는 지난 7일 제주 해군기지 투쟁현장에서 체포돼 함께하지 못했다.
 

   
▲ 추모제를 시작하며 열사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올리고 있는 유가족과 참석자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사)4.9통일평화재단이 실시하는 2014년도 공모사업에 선정된 단체와 개인들에게 김형태 상임이사(오른쪽)가 협약서를 교환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평통사 청년들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유가족과 관계자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합창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이날 추모제는 특별히 열사들의 부인들을 위로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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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남은 5개 마을... 이 어르신들을 지켜주세요

 
고립되는 밀양 어르신들... 12일 밀양으로 달려와 주시길
14.04.11 08:39l최종 업데이트 14.04.11 08:5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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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가 3월 22일 저녁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에서 139번째 개최한 '송전탑 반대 촛불문화제' 모습.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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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는 심오하고 가장 매력적인 의식으로서 삶의 자리에서 역사를 만드는 하나의 길이 된다." – 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75세 윤여림 어르신이 오늘 몫의 3000배를 올리고 있을 것이다. 지난 주말, 윤 어르신이 대책위 사무실로 찾아와서 상경 계획을 밝혔을 때, 특유의 말간 웃음까지 머금으시며"'대책위가 좀 도와도고~" 하시는데, 가슴이 콱 막혀왔다. 

'어르신, 참으세요. 어르신 마음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근데요, 74세 노인이 음독 자결을 해도 눈도 깜짝 않고 하던 공사 계속 하는 놈들 아닙니까? 저놈들 어르신이 6000배가 아니라 6만배를 해도 미동도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여론이 움직일까요? 이제, 기자들 밀양 문제에 관심도 없습니다. 몸도 성찮으신 어르신이 외롭게 절하시는 모습, 너무 처절합니다. 저놈들한테 그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우리 마음만 아플 뿐이에요.'

차마 어르신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르신 면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어르신도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내가 거절하니, 당신이 직접 기획사 찾아가 몸자보를 제작했다. 마지막 설득을 위해 댁을 찾아가 사모님과 함께 자리에 앉았을 때, 어르신은 "이거라도 안 하면 내가 병이 날 것 같다"고 하셨다. 달리 도리가 없었다. 

윤 어르신의 마음이 지금 밀양 주민들의 마음이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만 같은 마음. 3000의 병력이 매일 노인들을 들어내고 고착 감금했지만, 주민들은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전력이 던진 '돈'이 사람들을 갈라세웠고, 분열의 공포가 주민들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한전은 "공사 끝날 때까지 합의 안 하면 당신 마을과 당신 앞으로 배정해 놓은 돈을 회수하겠다"는 노골적이고도 참담한 간계를 공문으로 띄웠다. 이 협박이 철옹성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지금 마지막까지 버티는 마을은 전체 30개 중에서 5개 마을, 개별보상금 수령을 거부하는 주민은 전체 3700여 명 중에 10% 남짓이다. 

며칠 전에는 꿈을 꾸었다. 보라마을 어르신들이 보였는데, 그분들과 다른 마을 주민들은 아무 표정 없이 조용히 식사만 하고, 나와 젊은이들은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꿈이었다. 내 마음자리가 그렇고, 어르신들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4주 전, 산외면 보라마을 주민이 한전과 합의했다는 소식이 준 충격은 컸다. 라디오 뉴스를 듣고 움막 농성장을 나가 한 시간 동안 대성통곡을 한 할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눈에 띄게 힘들어하기 시작했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한창 때는 4개 면에 걸쳐 있는 주민활동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로 마을 소식과 정보를 공유했다. 

소식을 알려주고 의견을 구하는 전화를 하루에 서너 통씩 받은 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전화가 뜸하다. 대신 각자의 내면들로 침잠해 간다. 마을에는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찬성파들이 씩씩하게 돌아다닌다. 남은 마을들도 위태롭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도울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하겠습니다." 어르신들에게 던지는 대책위의 약속은 듣는 자리에서는 힘이 나겠지만, 홀로 남겨졌을 때 찾아드는 번민 앞에서는 깃이 젖은 햇닭처럼 초라해질 것이다. 

한전 집계로는 열세 번째라는 이번 공사 재개. 그 이전 열두 번째까지 주민들은 헬기장으로 뛰어들어가 헬기에 몸을 묶거나, 맨땅에 드러누워 레미콘 차량을 막거나, 굴착기 바가지에 들어앉거나, 한전 지사 앞마당으로 쳐들아가 거기에 자리잡고 한 달을 버티면서 공사를 중단시켜왔다. 기자회견, 촛불집회, 토론회, 문화제, 단식 투쟁, 합치면 천 번을 너끈히 넘어갈 투쟁들을 거치며 주민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국가를 상대로는 못 이긴다.' 모두가 알고 있을 폭력국가 대한민국의 상식을 당사자인 주민들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 이야기가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면서 주민들은 고통스러운 선택 앞에 마주 서 있다. 

외롭고, 지치고, 힘들고...

그렇게 해서라도 밀양 송전탑을 세워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데, 노인들 하나 제대로 '단도리' 못하고 공권력과 공기업이 질질 끌려다니는 이 사태야말로 비정상 중의 비정상이었을 것이다. 고리의 노후원전을 계속 연장가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리지역을 세계 최대의 원전 밀집지역으로 등극시킬 원전 증설 계획은 중단없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UAE를 시작으로 잇따를 원전 수출 계획까지 수십 조 원이 움직이는 대박의 시나리오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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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의 봄' 희망콘서트 포스터.
ⓒ 밀양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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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대한 포부가 고작 송전탑 50기를 꽂지 못해서, 한 줌 노인들을 제압하지 못해서 좌초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사업자 한전의 환경영향평가법 위반도, 수십 개 마을들이 보상 문제로 갈라져 싸우고, 쑥대밭이 되어도, 두 노인이 분신과 음독으로 세상을 버려도 저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밀양 송전탑 싸움은 지금 가장 힘든 고비를 지나고 있다. 주민들이 직접 공사 부지를 점거하고 움막을 지어 놓은, 그러니까 주민들이 최후의 거점으로 여기고 있는 4개 농성장에는 4월 14일 이후 철거하겠다는 한전의 계고장이 날아들었고, 경찰과 한전 직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주민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다. 작전 계획을 짜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밀양의 현장으로 다시 한 번 걸음해 달라는 것이다. 더 좌절하지 않도록, 혹여나 발생할 수도 있을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도록, 밀양 주민들의 손을 잡아달라는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어르신들을 대신한 우리들의 항의, 우리들의 연대, 우리들의 감시, 그리고 그 힘에 바탕한 '대화와 중재' 뿐인 것이다. 

또 하나, 어르신들이 스스로를 향해 던지는 질문들에 응답해 달라는 것이다. 어르신들의 질문이란 이런 것이리라. '되지도 않을 싸움,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그들이 생애 처음으로 종주먹을 쥐고, 어깨띠를 두르고 "물러가라!"고 외치고, "백지화하라!"고 부르짖었을 때, 경찰에 팔목이 비틀린 채 들려나오고, 서울 국회로 한전 본사 앞으로 원정을 다니고, 전국에서 찾아드는 손님들을 먹이고 재웠던 지난 몇 년 동안의 풍찬노숙은 다 부질없는 것이었을까? 어차피 안 될 일, 헛고생으로 끝나고 남은 뒷 설거지를 남은 생애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인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을 물을 때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 당신은 무엇을 하였던가? 밀양의 어르신들이 자결하고, 들려 나오고, 분열의 고통을 뒤집어쓰고, 돈 몇백 만 원으로 잔인하게도 '전향'을 강요당할 때, 그들의 고통을 깔고 앉아 누리던 휘황찬란한 전기문명의 수혜자, 당신은 무얼했던가? 이 질문 앞에 마주 서는 날이 올 것이다. 

밀양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마지막 불씨를 지키기 위해 어르신들은 한전이 빨간 줄을 묶어 놓은 공사 부지 안 농성장으로 모여든다. 어르신들은 지금껏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고, 지금도 그 몫을 다하고 있다. 그들 어르신들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투쟁, '국가에 맞선 노인'들로서 지난 10년간 정의로웠으며, 떳떳했다. 어르신들은 지금도 10년 전과 다름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시늉만 말고, 마음을 다해 들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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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26일 밀양 영남루 맞은편 둔치에서 열린 '2차 밀양 희망버스' 마지막 행사를 마친 뒤, 문규현 신부가 밀양 송전탑 반대 주인인 강순자(84. 단장면) 할머니를 부둥켜 안으면서 "꼭 이깁니다. 힘 냅시다"고 말하며 인사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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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손을 잡아주십시오

이번 주 토요일, 4월 12일에는 이 어르신들을 위로하는 문화제가 열린다. 송경동 시인이 앞장을 서고, 한국대중음악상 3관왕에 빛나는 음악의 구도자 윤영배, 그리고 '안치환과 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밀양할매합창단이 또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다. 

일주일 전, 보라마을 이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내가 이장님을 생각하며 쓴 신문칼럼을 어느 기자가 알려주었던 모양이다. 이장님은 말씀 끝에 또 "미안하다"며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아, 이 "미안하다"는 말을 당신은 남은 생애 내내 얼마나 하셔야 할까. 도대체, 누가 미안해야 하는가? 한전, 경찰, 청와대, 산업부, 당신들은 미안하지 않은가? 이장님의 전화를 받으며 나는 또 눈물이 났다. 아무 때라도, 자리만 주어진다면, 문을 걸어 잠그고 펑펑 울고 싶은 사람들이 지금 밀양에는 너무 많다. 

여러분, 밀양의 손을 잡아주시오!

☞ 바로가기 [10만인클럽 765 캠페인] 내가 담은 '햇빛', 밀양으로 쏜다

덧붙이는 글 | 이계삼 기자는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 사무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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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최고인민회의에 대한 오판과 오만

北 최고인민회의에 대한 오판과 오만
데스크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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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4.11  03: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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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국회 격인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제13기 1차 회의의 9일 결과에 우리 당국과 언론이 머쓱해졌습니다. 애초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번 회의를 통해 ‘김정일 시대’의 통치시스템을 개편하고 그에 따른 세대교체를 하거나 또는 장성택 숙청 이후 인적쇄신이 필수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예상과 크게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퇴진과 박봉주 내각 총리의 경질이 점쳐졌습니다. 김 상임위원장은 86세의 고령이고 박 총리는 경제난 해결 부진의 책임을 진다는 시나리오였습니다. 특히, 김영남의 경우 우리 당국은 지난 3월9일 북한이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 선거 결과를 공표한 직후 그가 대의원에 뽑히지 않았다며 퇴진 가능성을 거론했을 정도입니다. 그것도 ‘김영남’이라는 이름으로 뽑힌 대의원이 있는데 동명이인일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유임됐으며, 김영대․양형섭 부위원장과 김영주 명예부위원장도 자리를 지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박봉주 내각 총리를 수장으로 하는 경제부처 장관들도 대부분 유임됐습니다. 특별한 인적쇄신이 없으니 장성택 인맥 퇴진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장성택 처형 후 대대적인 물갈이라는 표현도 실없는 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국과 전문가들이 이번 회의 결과와 관련해 ‘변화보다 안정 선택’이라는 하나마나한 평가를 내린 것까지는 그렇다고 칩시다. 오판에 대해 모르쇠 작전을 펴는 것도 그렇다고 칩시다. 그 이후가 가관입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예측불가능한 체제임이 드러났다고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이 무슨 강아지 풀 뜯는 소리입니까? 자칭 대북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자기가 오판해 놓고는 그게 맞지 않은 이유로 북한이 따라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세상에 적반하장도 유분수입니다. 오만의 극치일 따름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북한은 파워엘리트의 경우 인적쇄신이나 세대교체를 잘 하지 않는 편입니다. 북한은 혁명전통과 사회질서를 중히 여기기에 이른바 노․장․청(老․長․靑)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편입니다. 젊은피 수혈이니 세대교체니 하는 것은 드뭅니다. 하더라도 소리소문없이 하거나 유연하게 합니다. 북한의 파워엘리트에 대한 이 같은 입장만 이해를 해도 김영남 퇴진과 같은 무리한 판단은 안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벌써 새로운 오판과 오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이번에 최룡해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오른 것을 두고 세간의 일치된 평가를 보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최룡해가 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이어 장성택의 빈자리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까지 3대 핵심 요직을 차지하면서 명실공한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 말입니다. 또 ‘2인자’ 타령이 시작된 것입니다.

북한에 2인자란 없습니다. 있다면 1인자만 있을 뿐입니다. 유일지도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장성택이 2인자다”며 떠들다가 숙청당하자, “2인자도 처벌하나?” 하며 북한의 예측불가능성을 성토하는 우를 또다시 범해선 안 됩니다. 북한엔 김정은이 중심에 있고 그리고 숱한 김영남, 김영대, 양형섭, 김영주, 박봉주, 최룡해가 동일한 반지름으로 원을 그리며 위치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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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희생 4.9통일열사 추모제

인혁당 희생 4.9통일열사 추모제
 
“현 정권 맞서 다시 떨쳐 나서야 한다”결의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4/04/11 [08:54]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추모식장에는 박정희 정권의 음모로 사법살인을 당한 여덟명의 통일열사들의 여정이 모셔져 있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39년전 박젛의 독재정권 아래에서 벌어진 사법살인 사건으로 세계를 경악시킨 소위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제가 열렸다.

(재)4.9통일평화재단과 (사)4.9인혁열사계승사업회는 지난 9일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지하 성당에서 각계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추모제를 엄숙히 진행했다.

4.9통일열사 추모제는 열사들에 대한 묵상을 시작으로 추도사 추모 문화제 순서로 진행되었다.

인혁당 사법살인을 고발하고 희생당한 열사들의 통일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해 온 이해동 목사는 추도사에서 “39년이라는 긴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처절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고 분노를 삭일 수 없다.”며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그렇거늘 하물며 따스한 체온과 피를 나눈 가족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느냐. 그 한 맺힌 세월을 어찌 견디며 살아왔느냐”며 사법살인을 저지른 자들에대한 분노와 함께 열사들의 한 맺힌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냈다.
 
▲ 인혁당 희생자 유족들과 추모객들이 통일열사들을 추모해 묵상하고 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이해동 목사는 “황당했던 유신독재 시절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던 그 무시 무시한 중앙정보부 제6국에 난생 처음 붙들려 간 곳도 바로 인혁당 동지들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한 탁이었다.”며 “1975년 4월 0일 목요기도회장은 바로 전날인 9일 새벽 전격적으로 실행한 여덟 분의 사형집행으로 인해 분노와 슬픔이 뒤범벅이 된 눈물 바다였다.”고 회고했다.

이목사는 계속된 추도사에서 “남악한 박정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인혁당 관련 여덟분의 희생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된다.”며 “우리 역사에사에서 길이 반드시 기억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옥울한 죽임이 일어나지 못하도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도사는 “우리의 현대사는 수많은 허위와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박근혜 정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민주주의도, 서민경제도, 민족간의 화해와 협력 관계도 어처구니없게 망가져 버리는 위기를 맞이하였다.”고 비난했다.

추도사는 이어 “우리 모두 다시 떨치고 일어서 거꾸로 치닫는 박근혜 정권의 역사적 퇴행을 막아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 모두는 박정희 유신독재의 그 잔학한 만행들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똑똑히 기억하여 오늘에 알리고 그 교훈을 내일에 이어주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추모식장에는대형 추모 그림이 놓여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추모식은 평통사 청년들의 노래와 함세웅 신부의 이야기, 상황극등 추모 문화제로 막을 내렸다.

4.9 통일열사는 다음과 같다. 서도원 선생, 도예종 선생, 송상진 선생, 우홍선 선생, 하재완 선생, 김용원 선생, 이수병 선생, 여정남 선생, 장석구 선생, 이재문 선생, 전재권 선생, 유진곤 선생, 조만호 선생, 정만진 선생, 이태환 선생, 이재형 선생, 나경일 선생 등이다.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 1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41명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이 인민혁명당을 결성하여 국가전복을 도모했다고 발표한 사건.

약칭 인혁당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위기에 직면하던 중에 발생했다. 중앙정보부는 발표에서 "인민혁명당은 북괴의 노선에 동조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괴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포섭, 당조직을 확장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한 것"이라고 수사의 경위를 발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발표 직후 한국인권옹호협회는 특별조사단을 구성, 고문사실과 사건의 진상규명에 나서는 동시에 무료변론을 맡기로 했다. 중앙정보부에서 예심을 마친 사건 피의자들은 8월 17일 검찰에 송치,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 검사들의 수사를 받았는데, 이 사건을 둘러싸고 검찰 내부도 의견이 대립되었다. 이 사건의 기소가치 여부로 공안부 검사들과 검찰 고위층의 견해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되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또한 피의자들에 대한 고문진상이 폭로되면서 검찰은 재수사에 나섰다. 재수사 결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된 26명 가운데 학생을 포함한 14명에 대해서는 공소를 취하하고 나머지 12명에 대해서는 공소장을 변경, 국가보안법 대신에 반공법 4조 1항을 적용시켰다. 1965년 1월 20일 서울지방법원 선고공판에서 도예종(징역 3년)·양춘우(징역 2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5월 29일 서울고등법원 형사부는 원심을 파기,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선고를 내리고 도예종·양춘우 외에도 박현채를 비롯한 5명에게 징역 1년, 나머지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정보부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활용하여 정치적 반대세력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한 사례로 거론되어 왔다. 이에 따라 '국가정보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약칭 진실위)는 이 사건의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재조사를 실시하여 2005년 12월 그 결과를 발표했다. 진실위는 박정희 정권이 각각 민정이양 직후와 유신체제 출범 직후에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가운데, 다양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여러 활동들 가운데 가장 치열하거나 또는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한 경우에 북과 직접 연결되거나 조총련 등 국외공산계열의 배후조종을 받는 반국가단체로 몰고 간 대형 공안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학생시위로 인한 정권의 위기상황 속에서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사건의 실체가 매우 과장되었고 짜맞추기 수사로 이 단체를 무리하게 반국가단체로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불리한 진술을 강요하는 과정이나 핵심인물들의 소재를 찾기 위해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자행되었다고 발표했다.

한편 이사건 관계자들은 재심을 통해 대부분 무죄를 선고 받고 국가배상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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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연합, 기초 공천하기로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4/04/10 11:07
  • 수정일
    2014/04/10 11:0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공천 53.44% vs 무공천 46.56%

안철수 "당원의 뜻이라면 따르겠다"... 국민여론조사는 무공천이 박빙 우세14.04.10 09:28l최종 업데이트 14.04.10 10:34l이주연(ld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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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공천 철회, 눈 감은 안철수 기초선거공천폐지 투표결과가 발표된 직후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10일 오전 국회 당대표실에서 빠져 나오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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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표실 빠져나오는 김한길 기초선거무공천철회 투표결과가 발표된 직후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10일 오전 국회 당대표실에서 빠져 나오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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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10일 오전 9시 50분]

새정치민주연합은 기초 선거에서 공천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석현 여론조사관리 위원장은 10일 오전 "'여론조사 + 권리당원 투표'를 실시한 결과 '공천해야 한다'는 의견이 '무공천 해야 한다'는 의견보다 많았다"고 밝혔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창당 고리였던 '기초 선거 무공천' 방침을 전격적으로 철회한 것이다. 이로써 새정치민주연합 기초 선거 후보자(구청장, 구의원 등)들은 '기호 2번'을 달고 선거를 뛰게 됐다.

여론조사와 권리당원 투표를 합산한 결과 공천해야 한다는 의견은 전체의 53.44%, 공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46.56%로 나왔다.

이에 대해 안철수 새정치연합 공동대표는 "대표는 위임된 권한에 불과하다, 그것이 당원의 뜻이라면 따르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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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에 촛점을 맞춰라' 10일 오전 새정치민주연합 6.4지방선거 공천 방식을 묻는 '여론조사+권리당원 투표' 결과 54.44:46.56으로 '공천한다'로 결정된 가운데, '무공천'을 주장해왔던 안철수 공동대표가 국회 대표 회의실앞으로 나오자 수십명의 사진기자들이 취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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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정치민주연합 'D-55' 앞두고 '공천' 결정 새정치민주연합 이석현 여론조사관리 위원장이 10일 오전 국회에서 6.4지방선거 공천 여부에 대한 '여론조사+권리당원 투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투표 결과 '공천해야 한다'가 53.44%, '공천을 하지 말아야 한다'가 46.56%로 나왔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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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전, 새정치민주연합은 '기초 선거 공천' 여부를 두고 조사를 벌였고 '권리당원 50% + 국민여론조사 50%'를 반영해 이날 오전 결과를 집계했다.

권리당원 투표에서는 총 35만 2152명 대상자 가운데 25.5%인 8만 9826명이 응답했고, 공천 해야 한다는 응답률은 57.14%(5만 1323명), 공천하지 않아야 한다는 응답은 42.86%(3만 8503명)으로 나타났다.

국민여론조사 결과에서는 공천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조금 앞섰다. 두 개의 여론조사 기관 조사를 합산한 결과, 공천해야 한다는 의견은 49.75%, 공천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은 50,25%로 집계됐다. (A 기관 : 공천 48.59% - 무공천 51.41%, B 기관 공천 50.91% - 무공천 4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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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두 교황

조현 2014. 04. 09
조회수 777 추천수 0
 

 

 

요한23세-.jpg 

81세에 누구도 예상치못한 제2차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해 1600년간 닫힌

교회의 현대화를 시직한 요한23세 교황 사진 <요한23세 성인교황>(가톨릭출판사)

 

 

 

바오로6세 사진-.jpg 

요한23세에 이어 제2차바티칸공의회를 마무리해 교회 쇄신의 초석을 놓은 바오로6세 교황

 

 

 

2차 바티칸공의회 회의장면-.jpg 

로마 성베드로성당에서 거행된 제2차바티칸공의회 회의 모습

 

 

 

교황 요한23세의 공의회 서명-.jpg 

제2차바티칸공의회 개최에 서명하는 요한23세

 

 

요한바오로1세-.jpg 

요한23세와 바오로6세의 제2차바티칸공의회 정신 계승을 위해 전임 두 교황의 이름을 합쳐 

요한바오로를 택한 `미소 교황' 요한바오로1세. 바티칸은행 비리 조사를 시작한 그는 교황 선출

33일만에 의자에 앉은채로 의문사했다.

 

 

 

라칭거와 요한바오로2세-.jpg  

교황 요한바오로 2세(오른쪽)와 그를 충실히 따른 라칭거 추기경(베네딕도 16세 교황)

 라칭거추기경은 신앙성장관으로서 이런 보수노선을뒷받침했고, 요한바오로2세에 이어 교황으로 즉위해

요한바오로1세의 성인 추대작업을 역사상가장 빠른 시일내에 추진했다.

요한바오로2세는 1991년부터 파킨스씨병을 앓았으나 교황이미지훼손을 우려하고, 

그를 활용하려는 교황청내 보수세력에 의해 12년간 외부에 파킨슨씨 발병 사실을

감춘채 교황직을 유지했다.

 

바티칸광장-.jpg 

로마 바티칸광장.   사진 조현

 

 

요한23세 주검-.jpg 

바티칸 성베드로성당 안에 가장 가운데 모두가 볼 수 있게 공개돼 있는 요한23세의 주검

 

 

 요한바오로2세 무덤-.jpg

서거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곧 성바오로대성당 안으로 옮겨진 요한바오로2세 무덤.  사진 조현

 

 

요한바오로1세 알현 2세-.jpg 

요한바오로1세를 알현하는 카를 보이티와 추기경. 요한바오로 1세가 33일만에

의문사하자 보이티와 추기경은 교황으로 선출되고, 그는 전임과 같은 요한바오로란

즉위명을 택했으나, 전임 세교황의 교회 쇄신과 정반대의 노선을 갔다.

 

 

 [조현의 통통통]

 

 가톨릭에서 두 교황이 오는 27일 ‘성인’(聖人)으로 공포된다. 제261대 요한 23세(1881~1963, 재위 1958~63)와 제264대 요한 바오로2세(1920~2005, 재위 1978~2005)다. 가톨릭의 본산 로마의 베드로대성당안엔 수많은 성인들을 제치고 이미 그 둘의 주검 또는 무덤이 요지를 차지하고 있다. 둘은 20세기 최고 스타 교황들이다.  

 

 그러나 둘은 정반대의 인물이다. 요한 23세는 제2차바티칸공의회(1962~65)를 통해 1600년간 닫힌 교리의 문을 활짝 열고 개방한 현대화의 주역이다. 반대로 요한바오로2세는 바티칸의 철문을 다시 닫아 건 인물이다.

 

 1958년 아무리 교황복을 입혀놓아도 시골 노인네로밖에 보이지않는 77세의 ‘소작농의 아들’이 교황이 됐다. 그 요한23세는 “내가 임시 교황이 될 

것이라지만 내 할 일을 해야겠다”며  ‘아조르나멘토’(현대화)를 선언했다.

 

 불과 50년 전이지만 그 전까지 전세계 가톨릭 성당에서 사제들은 제단을 향해 신자들에겐 등을 돌린채 라틴어용어로만 미사를 드렸다. 공의회에선 ‘하느님의 백성’을 인류 전체로 확대하고, 선교의 개념을 신자수 늘리기에서 ‘인간의 존엄성 증진과 인류 공동선 실현’으로 변화시켰다.   

 

 요한23세의 뒤를 이은 262대 교황 바오로 6세(1897~1978, 재위 1963~78)는 미완의 공의회를 성실히 마무리했다. 김수환을 추기경에 앉히고, 미국의 베트남전을 반대했던 교황이다. 1978년 그가 선종하자 ‘벽돌공의 아들’인 65세의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됐다. 

 

그는 즉위명을 요한23세와 바오로6세의 이름을 합친 ‘요한바오로1세’를 택했다. 개혁을 계속하겠다는 뜻이었다. 교황은 다스리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라며 ‘짐’이란 말도 거부한 그는 대관식 때 머리에 쓰는 삼층관을 빈민자선사업가에 선물해버렸다.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하느님의 미소’또는 ‘미소 교황’으로 불린그는 33일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어 등장한 게 공산권 폴란드 출신의 요한바오로2세였다. 455년 만의 비이탈리아 출신이자 58세로 20세기 최연소 교황이었다. 그는 전임 세교황에 불만을 품고 반격을 노린 보수의 부름에 출실하게 부응했다. 교회 내부에선 변화를 막고, 세상에선 폴란드 자유노조를 지지하며 동구 공산권에 변화를 촉구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서방의 승리를 위한 선봉장이었다.

 

하지만 독재의 반대자들을 공산주의로 몰아세워 살육을 일삼았던 제3세계 독재자들에겐 우호적이고, 피압박민들의 눈물을 외면했다. 서방언론은 그런 이중성을, 그의 본명을 따 ‘보이티와 시스템’으로 불렀다. 

 

특히 그가 해방신학을 와해시킨 남미에선 가톨릭의 냉담자가 급증하고 개신교세는 급증했다. 가톨릭의 전근대성에 유럽의 성당도 비어갔고, 젊은 백인 사제와 수녀들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요한바오로2세의 충복으로 전례가 없이 그가 죽자마자 성인 추대작업을 이끈 베네딕도16세는 고국 독일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빠져나가는 현상에 사임을 결심하지않을 수 없었다. 가톨릭은 다시 기로에 서있다.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미래로 갈 것인가.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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