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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려해상까지 덮친 기름띠 해경 "16만4천 리터 유출"

[현장] 유조선, 접안 시도하다 항로이탈... "오동도 찾은 관광객 두통 호소"
14.02.03 09:44l최종 업데이트 14.02.03 10:50l
황주찬(ysh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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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동도 검은 기름과 얇은 유막이 사고 지점에서 약 11킬로미터 떨어진 한려해상국립공원 오동도 인근 바다와 방파제를 파고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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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기물 관계기관들이 합동으로 기름 유출 확산을 막고 있지만 오동도까지 밀려오는 기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피해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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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3일 오전 10시 6분]

"2일 오전, 기름이 밀려와 오동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머리 아파했습니다. 이날 오후에는 기름이 남해 쪽으로 밀려갔는데, 지금은 많이 없어져 상태가 나아졌습니다."(배용숙, 70, 오동도 '섬사랑유람선' 선장)

한 려해상국립공원 오동도와 여수세계박람회장이 기름에 뒤덮였습니다. 지난 1월 31일 발생한 전남 여수 낙포부두 기름 유출 사고의 여파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난 2일 오전, 휴일을 맞아 오동도를 찾은 관광객들은 역한 기름 냄새 때문에 코를 틀어막아야 했습니다.

검은 기름과 얇은 유막이 사고 지점에서 약 11km 떨어진 한려해상국립공원 오동도 인근 바다와 방파제에 파고들었습니다. 오동도에서 방제작업 중이었던 곽혜경(44, 여수지방해양항만청)씨는 "오늘(2일) 하루 기름 유출을 막기 위해 수거한 폐기물이 800kg"이라며 "오전부터 항만청 직언 30명이 작업하고 있다"고 현장 상황을 전했습니다.

2 일 현재, 방제작업은 사흘째를 맞았습니다. 관계기관들이 힘을 모아 기름 유출 확산을 막고 있지만, 오동도까지 밀려오는 기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습니다. 피해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여수해경은 정확한 기름 유출량과 피해 규모 그리고 유출물질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고 직후 업체가 유출한 기름양을 축소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습니다. 여수 기름유출 사고를 일으킨 배는 '우이산'(WU YI SAN)호로 싱가포르배입니다. 우이산호는 원유를 실어나르는 배인데 무게가 약 16만 톤입니다. 사고 당시 유조선에는 27만8584톤의 원유가 실려 있었습니다.

유조선 우이산호, 접안 시도 시 항로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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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돌 흉물스럽게 찌그러진 배관의 크기는 각각 36인치, 26인치, 18인치입니다. 파손된 배관 3곳에는 원유와 나프타가 들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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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유 2부두 무게가 약 16만 톤, 싱가포르 국적의 ‘우이산(WU YI SAN)’호가 기름유출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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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이산호는 지난해 12월 9일 영국 하운도포인트항에서 원유를 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월 30일 오전 6시 30분쯤 전남 여수시 남면 소리도 동쪽에 정박했다가 다음날인 1월 31일 오전 8시 18분께 여수 앞바다에 있는 대도(제1도선점)에서 도선사 두 명을 태우고 접안선 네 대의 도움을 받아 여수시 낙포각 원유 2부두에 접안을 시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조선이 정상 항로에서 왼쪽으로 약 30도가량 벗어나 부두로 돌진했습니다. 이때 GS칼텍스 소유의 송유관을 들이받았습니다. 여수해경에 따르면, 사고 직후인 1월 31일 오전 10시 45분께 GS칼텍스 측은 '곧바로 송유관을 잇는 밸브를 잠갔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수해경은 밸브를 잠근 정확한 시간을 두고 수사를 벌일 계획입니다.

파손된 배관 세 곳에는 원유와 나프타가 들어 있었는데, 이 기름이 뒤섞이며 바다로 흘러들었습니다. 찌그러진 배관의 지름은 각각 36인치, 26인치, 18인치입니다. 현재 현장의 방제작업은 여수해경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름 800여 ℓ 흘렀다?... 여수해경 "16만4000리터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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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염 광양만을 포함해 남해까지 기름이 번지고 있습니다. 광양 컨테이너부두와 광양제철소 원료부두에서도 얇은 기름띠가 확인 됐고 경남 남해시 남해대교 인근에서도 기름띠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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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수해경은 지난 1일 원유유출 비상상황대책본부를 구성했습니다. 여수 인근 해양경찰서 여덟 곳(울산·부산·통영·창원·완도·목포·군산·제주)에 있는 방제정과 3000톤급 대형경비함정 등 총 40여 척의 경비함정을 추가 투입해 기름 유출 확산을 막고 있습니다.

관계기관의 노력에도 기름 유출 피해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사고 직후 석유업체와 여수시는 송유관에서 흘러나온 기름의 양이 미미하다고 밝혔습니다. 이들은 유출된 기름의 양이 드럼통 네 개 분량인 800여 ℓ로 추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여수해경은 3일 오전 10시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유출된 기름의 양은 약 16만4000리터(820드럼)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전문가들에게 유출량 산출을 의뢰해 나온 결과입니다. 여수시와 석유업체가 밝힌 유출량과 여수해경이 발표한 유출량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한편, 유출된 기름(원유)은 조류를 타고 사고 지점을 중심으로 폭 1km, 길이 4km에 이르는 해상까지 퍼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광 양만을 포함해 남해까지 기름이 번지고 있습니다. 광양 컨테이너부두와 광양제철소 원료부두에서도 얇은 기름띠가 확인됐고, 경남 남해시 남해대교 인근에서도 기름띠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엷은 기름막(유막)은 사고 지점에서 11km가량 떨어진 한려해상 국립공원 오동도 주변까지 확산됐습니다.

"유조선 규정속도 위반... 무리하게 접안 시도하다가 사고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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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제 사고 현장에서 4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신덕마을 인근에 형성된 굵은 기름띠는 3일간의 방제작업으로 대부분 제거됐지만 엷은 기름막이 사고 지점에서 1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한려해상 국립공원 오동도 주변까지 확산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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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범위가 수십 km 밖까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여수해경은 유조선 선장 김아무개(38)씨와 유조선에 탔던 도선사 그리고 석유업체 관계자를 상대로 사고원인과 기름 유출량 등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수사는 유조선 접안 당시 정상 항로를 벗어난 원인에 집중되고 있는데, 여수해경은 3일 중간 수사결과 발표 때 "유조선은 규정속도를 위반해 7노트 속도로 무리하게 접안을 시도했다"고 사고 원인을 밝혔습니다.

또 여수해경은 유조선이 정상 항로를 벗어났을 때를 대비한 '안전사고 지침'이 마련돼 있었는지 파악하고 있으며, 이 지침을 사고 당시 정확히 지켰는지 조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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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유출 현장' 윤진숙의 망언-노무현의 분노


가족과 함께 설 연휴를 행복하게 보내야 할 전남 여수시 신덕마을은 기름 유출 사고로 악몽의 날을 보냈습니다. 1월 31일 싱가포르 선적 16만 톤급 유조선이 오전 10시 여수시 낙포동 원유부두로 입항하다가 송유관과 충돌, 원유 10㎘가 (해수부 주장) 바다에 유출됐기 때문입니다.

여수시 신덕마을 주민들은 기름 유출로 설날 연휴를 가족과 함께 보내지도 못하고, 황급히 나와 기름 제거 작업을 했습니다.

정부는 2월 1일 해양수산부 윤진숙 장관이 신덕마을을 방문했지만, 주민들 앞에서 냄새난다고 코를 막는 모습을 보여 오히려 주민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이 기름 유출 현장에서 냄새가 난다고 코를 막은 모습도 문제이지만, 아직 해양수산부와 정부는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하나씩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 담당 해수부 장관, 하루가 지나서야 오다니'

신덕마을 주민들은 단순히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이 기름 유출 사고로 악취가 나서 코를 막은 행위 그 자체를 비난하거나 항의를 한 것만은 아닙니다.

신덕마을 주민들이 제일 분통이 터졌던 것은 바다 기름 유출 사고의 직접적인 관리 감독 기관인 해수부 장관이 사고가 벌어지고 나서 만 하루가 지나서야 왔기 때문입니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1월 31일 사고 직후, 윤진숙 해수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가능한 자원을 총동원해 원유 유출 피해가 확산되지 않도록 힘써 달라'며 적극적인 대처를 요구했습니다.

국무총리의 전화에도 불구하고 윤진숙 해수부 장관은 다음 날 12시에나 신덕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알다시피 원유 유출 사고는 신속한 방제 작업이 관건입니다. 물론 해양수산부가 방제 작업에 돌입은 했지만, 총리의 전화에도 불구하고 담당 해수부 장관이 사고 난 다음 날에서야 현장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주민들의 분노를 자아낸 것입니다.

' 심각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믿은 해양전문가?'

기름 유출 사고가 나고 하루가 지난 뒤에 나타난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은 가만히 있었으면 괜찮았을텐 데, 기름에 불을 끼얹는 발언을 했습니다.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은 신덕마을 주민들이 늦장 방문에 대해 항의를 하자,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었는데'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주민들은 심각하지 않다는 윤 장관의 발언에 더 화가 났고, 해양수산부는 '1차 방제가 마무리됐다고 보고를 받은 상황에서 현장을 방문했더니 현장은 심각해서 위로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변명을 했습니다.

해수부 장관은 심각하지 않다고 보고를 받았고, 현장은 심각하다면 도대체 무슨 보고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따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고 관련 해수부 보고 내용

○ 1월 31일
오전 10:05 유출 사고
오전 10:30 송유관 밸브 차단
오전 11:00 해양수산부 여수청 사고수습 대책본부 설치
오일펜스 설치 (5km),해경정 등 선박 74척 동원, 해상 방제 70% 완료.
마을 주민 등 230명 동원 해안부착유 제거 작업 완료

○ 2월 1일
해경정, 관공선 등 선박 70척 동원 해상 응급 방제 작업 실시
여수시청, 항만청 직원 200여명 여수,남해안 일대 해안가 부착유 방제작업 실시.


해양수산부 홈페이지에도 정확한 사건 관련 보고 내용이 없기 때문에 해수부 페이스북을 토대로 대략적인 보고 내용을 구성해봤습니다.

해수부에 따르면 여수 원유 유출 사고가 난 1월 31일 방제가 이미 70% 완료됐고, 신덕 마을 해안부착유 작업도 이날 완료가 됐다고 나왔습니다.

<문제점의 시작: 도대체 언론과 해수부가 주장하는 원유 유출량이 제각기입니다. 어떤 언론은 10만 킬로리터, 어떤 언론은 800리터이고, 해수부는 10킬로리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보고 자체가 엉터리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수부와 해경은 방제 작업이 70% 완료됐으며 기름 부착포 작업도 대부분 완료됐다고 하지만 실제 기름띠는 광양만으로 한려해상공원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보고를 엉터리로 했다는 의혹이 드는 대목입니다. 또한, 문제는 해양 전문가라는 윤진숙 장관의 안일한 태도입니다.

16년 동안 해양연구에 매진했다는 해양 전문가라는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이 상황이 심각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그대로 믿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 태안 기름 유출 사고 현장에서 벌어진 노무현의 분노'

2007년 12월 7일 충청남도 태안군 앞바다에 허베이 스피릿호와 삼성 1호가 충돌하여 원유가 유출되는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유조선 탱크에 있던 12,547㎘의 원유가 태안 지역 인근 바다와 해안가를 오염시켰고, 자원봉사 100만여 명이 태안을 방문하여 추운 날씨에 기름 제거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12월 11일, 노무현 대통령은 태안 기름 유출 현장을 방문했고, 이 자리에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분노한 이유는 당시 상황실에서 이루어진 해양경찰청장의 상황보고 때문이었습니다.

기름 확산을 막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청장은 날씨가 문제라는 말만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은 답답한 듯 몇 차례 얘기를 한 뒤 '어떤 악조건에서도 확산을 막는다'고 목표를 가지라고 합니다.


이어진 방제 작업 관련한 부분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분노가 폭발하기도 합니다.
 

▷해양경찰청장: 소형 선박 많이 필요하지만 보험사 비용 문제 때문에 힘듭니다.
▶노무현 대통령: 그런게 어딨어요? 물론 걱정해야죠.(청장이)비용을 혼자서 좌지우지 할 수 없기 때문에 보고가 상당히 조심스러운데,그러면 안 됩니다. 나중에 비용을 받고 못 받고는 재판에 맡길 일이고, 지금 당장은 필요한 만큼은 다 동원해야 합니다.
 

남북으로 확산되는 걸 막으라 하니까 대답을 머뭇 거리는데...예? 펜스가 시원찮으면 두 벌치고, 세 벌 치고, 네 벌 치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걸 (확산 막는 것) 기준으로 해서 자원을 총동원 하라는 것입니다. 방제 펜스 성능 좋은 것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중국이든, 일본이든 가서 빌려 오든, 사오든, 불가항력이라는 말 나오지 않도록 총동원하세요.


태안 기름 유출 사고가 그리 만족할만한 보상과 해결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사건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날씨 탓', '비용 탓'을 하는 정부 관계자에게 그런 변명보다 확실하게 기름 유출 확산을 막으라고 강력하게 지시했습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정부 관계자에게 요구한 것은 그저 말뿐인 '최선을 다하겠다'는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8개월간의 짧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의 경험을 통해 기름 유출이 얼마나 어민과 국민에게 피해를 주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떻게든 국민의 피해를 막겠다는 절박함에 따른 현실적인 대책을 기름 유출 사흘 만에 담당 공무원에게 요구했었습니다.
 

 


신덕마을은 1995년 씨프린스호 원유 유출 사고가 난 지역이었고, 당시 해역의 밑바닥에서는 10년이 지난 2005년에도 기름띠가 발견됐습니다.

즉, 원유 유출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16년 경력의 해양 전문가라는 해양수산부 장관이 모르고 '심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기름 유출을 막기 위해서 펜스를 두 벌, 세 벌, 네 벌 치라고 요구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조건에서라도 기름 유출을 막지 못하면 '이젠 국민이 용서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름 유출이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악취가 난다고 코를 막는 장관이나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민을 돌보겠다는 말보다, 돈 걱정하지 말고 어서 빨리 기름 유출을 막으라는 아버지의 묵묵한 사랑이 생각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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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만이 <토니 밀라노>에게 답을 할 수 있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4/02/02 11:59
  • 수정일
    2014/02/02 11:5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왜(倭)와 우리가 남이가?!
 
박근혜만이 <토니 밀라노>에게 답을 할 수 있다
 
꺾은 붓 | 2014-02-02 09:40:0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5천만이 당하는 이 국제적 수모, 어찌 답해야 된단 말인가? 상반된 외신 2개를 전합니다.

첫날 관람객 3천명 넘어 성황…초중고생 단체 관람도 이어져(앙굴렘<​프랑스>=연합뉴스) 박성진 특파원 = "당신의 고통은 나의 고통입니다. 절대 잊히지 않을 겁니다. 인류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세요"31일(현지시간) 프랑스 앙굴렘시 앙굴렘 극장.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한국기획전 개막 이틀째인 ~

위 주소의 외신은 프랑스 앙글렘만화제에서 프랑스와 유럽인들이 왜군에 의하여 조선소녀의 위안부 강제동원 실상을 알리는 만화제를 관람하며 심한 충격을 느끼고 일본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하여 전 유럽인들이 공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뉴스이다.

또 하나 아래 주소의 외신은 미국의 극렬 친일파 <토니 밀라노>라는 양키가 일본으로부터 뒷돈을 받고 있는지 영혼과 양심을 팔아먹고 위안부를 희화화하는 행위와 한국인을 극도로 자극하는 궤변을 일삼다 마침내 한국의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원색적으로 한국인을 비하하면서 조롱을 하고 있는 것을 전하는 외신이다.

 

'위안부 조롱' 미국인 "소녀상 배후에 중국" 막말
"강제동원 사실이면 박근혜 대통령 왜 뽑았나"(애틀랜타=연합뉴스) 김재현 특파원 = 미국에서 극우 친일 언행으로 물의를 빚은 토니 마라노(65)씨가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공원에 위반부 소녀상이 세워진 배후에 중국이 있다며 망언을 이어갔다.텍사스주 댈러스 인근 머스킷에 사는 그는 최근 현지 한인 매체인 ~ 

유럽인이라고 해서 다 영혼이 똑바로 박혀있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고, 양키라고 해서 다 <토니 밀라노> 같이 돈 몇 푼에 영혼과 양심을 팔아먹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토니 밀라노>도 왜군에 의한 위안부만행의 실상과 내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가 눈에 안 보이게 찔러 넣어 주는 돈 몇 푼에 양심과 영혼을 팔아먹고 일본인이 직접 나서는 것 보다 제 3자인 양키가 나서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임을 간파하고 왜의 나팔수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문제는 저 양키 <토니 밀라노>의 위안부문제에 대한 궤변에는 너무나도 확실한 물증과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님들이 아직도 생존해 계시니 얼마든지 양키의 궤변을 문질러 버릴 수 있으나, <토니 밀라노>가 한국인을 향하여 내뱉는 마지막 한마디 질문에는 한국인으로서도 입이 열 개라도 대답할 마땅한 말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소녀들이 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것이라면 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런 일본 군대에 장교로 지원했는지, 왜 한국 국민들은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또 그런 사람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는지 의아하다”

저 <토니 밀라노>라는 양키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 날름거리는 독사 혓바닥을 잡아 당겨 가위로 혀를 싹둑 잘라내 왕모래가 뒹구는 콘크리트바닥위에 놓고 구두 뒤축으로 밟고서 한 바퀴를 팽-돌아 고깃가루를 만들고, 두 눈에 손가락을 쑤셔 박아 두 눈깔을 파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입속에 우겨넣고 잘근잘근 씹어 삼키고 입술가의 피를 옷소매로 쓱- 문지르고 나서 사지를 칼도 아닌 손톱으로 각을 떠서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저 양키가 5천만을 향하여 던지는 마지막 질문에는 딱히 대답할 만한 마땅한 말이 없다는 것이다.

위안부문제에 대하여 같은 인류로서 치를 떨며 왜의 위안부만행에 자신이 직접 당한 일과 같이 분노를 느끼는 미국인들조차도 <토니 밀라노>가 한국인을 향하여 던지는 저 마지막 질문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인들이 주장하는 위안부만행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그게 사실이라면 박정희는 독립운동을 한 독립군 장교이고, 박근혜는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의 딸로 얼마든지 오해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토니 밀라노>가 푸른 두 눈깔로 5천만 한국인을 노려보며 히죽거리며 내뱉는 저 마지막 질문에 뭐라고 답을 할 것인가?

머리를 쥐어짜 짜내도, 머리를 세탁기 탈수 통속에 집어넣고 뺑-뺑- 돌려도 마땅한 답변이 떠오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혹자들은 박근혜를 국민들이 뽑은 게 아니라, 개표기가 뽑았다는 답변을 하자고 하고 나올지도 모른다. 지난 대선의 투개표과정을 되돌아보면 과히 틀리는 대답은 아니다.

내가 <토니 밀라노>이고 그런 답변을 들었다면 당장 이렇게 쏘아붙일 것이다.

“너희 나라 코리아에서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선출할 때 사람이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개표기가 투표를 하느냐?”

“그리고 설사 개표기 조작으로 당선되었다고 쳐도, 그런 세월을 1년 이상 방치하는 너희 코리아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있고, 왜의 위안부만행을 꾸짖을 자격이 있는 민족이냐?”

“내 행위와 말 고깝게 듣지 말고 너희 앞가림부터 잘 하고, 왜를 탓하던 나를 꾸짖던 하거라, 이 못난 것들아!”

5천만 누구도 여기에 궁색한 답변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단, 한 사람, 박근혜만에 <토니 밀라노>에게 답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박근혜의 그 답변은 아래와 같을 것 같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고 내세운 정책이 원래 조선과 왜는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거기에 충실하게 따랐고 저도 그렇습니다.”

“왜와 우리가 남이가!?”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3&table=c_jaehak&uid=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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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최초’ 프리츠커상 받은 건축가 자하 하디드

 

등록 : 2014.02.01 12:19수정 : 2014.02.01 13:39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 중 하나인 알 와크라 스타디움.

구본준의 거리 가구 이야기

‘여성 최초’ 프리츠커상 받은 건축가 자하 하디드

서울에도 동대문운동장터에 ‘DDP’ 설계해 화제

# 뜻밖의 연상작용-이 디자인의 모티브는?

 

 

지난해 연말, 묘한 기사 하나가 해외 토픽란을 장식했습니다.

 

2022년 열리는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 중 하나인 알 와크라 스타디움이 민망하게도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닮았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건축가가 미치지 않고서야 여성 성기 모양으로 디자인을 했을리는 겠죠. 더군다나 건축가는 여성이었습니다.

 

건축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리고 <타임>과 한 인터뷰에서 성차별을 주장했습니다.

 

"남성 건축가가 이번 프로젝트를 맡았다면 이런 비교는 없었을 것이다. (중략) 구멍만 있다면 여성 생식기를 연장하자는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럼 저 경기장의 디자인 모티브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랍 지역 어부들과 진주 조개잡이들이 쓰는 `다우'라는 배의 돛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 디자인에서 뜻밖의 것을 떠올렸던 것이죠.

 

 

이 황당한 논란에 빠졌던 이 건축가가 자하 하디드(64)입니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64)

 

 

자하 하디드는 우리 시대 가장 유명한 건축가 중 한 명입니다.

 

아마도 사담 후세인을 빼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라크 사람일 겁니다.

 

언제나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여성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건축가입니다.

 

 

# 남성들만 독점하던 스타 건축가의 세계에 입성에 정상에 올라선 여성 건축가

 

 

건축은,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 건축가들의 세계는 완벽하게 남성들만의 리그입니다.

 

일급 건축은 엄청난 돈이 들고 건축가를 결정하는데 가장 강력한 권력이 작용하기에 여성 건축가들이 이 네트워크를 뚫고 들어가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자하 하디드는 이 어려운 고지를 뚫고 올라선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스타 건축가들의 세계에서도 요즘 가장 잘나갑니다. 건축가들이 평생 한 번 설계하기도 어려운 국가대표급 건물들을 줄줄이 설계하고 있습니다.

 

 

2020년 열리는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도 자하의 작품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가상도를 보시겠습니다.

 

 

자하 하디드의 다른 작품인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

 

 

카타르 경기장이 여성 성기를 연상시킨다면, 이 경기장은 가오리를 연상시킬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월드컵과 올림픽 경기장을 모두 설계하는 건축가, 실로 대단한 성공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세계 주요 도시들은 `건축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스페인의 빌바오 시가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지은 것이 낙후된 지역을 활성화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세계 도시들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스타 건축물'을 지어 도시를 재생하는 열풍에 빠져듭니다. 곧 `문화가 돈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발상은 일견 맞기도 하지만, 건축을 디자인 오브제처럼 활용하는 마인드라는 많은 비판도 불렀습니다. 실제 건물 하나로 도시가 살아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많은 도시들은 명품 브랜드를 구매하듯 건축 스타일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낸 스타 건축가들을 불렀습니다. 이른바 `스타키텍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살판이 납니다. 몰려드는 일감에, 엄청난 설계비에, 굽신굽신 떠받드는 도시들의 환대까지 스타 건축가들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 정점에 자하 하디드가 있습니다.

 

 

지금 세계 주요 도시들은 경쟁적으로 자하 하디드의 건축을 수집중입니다.

 

위의 두 스타디움 그림을 보셔서 알 수 있듯, 자하의 건축은 각이 진 직선은 찾아보기 어렵고, 물이 흐르듯 유선형인 디자인, 그리고 대칭과 비례 등 건축의 기존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비정형 디자인입니다.

 

보기만해도 눈길을 끄는 이런 디자인으로 자하 하디드는 랜드마크를 추구하는 도시들에게 `일급 해결사'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 형태와 용도를 짐작조차 어려운 이 건물은 지난해 완공된 자하 하디드의 최신작입니다.

 

 

 

 

이 건물은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 들어선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입니다.

 

 

 

 

옆에서 보면 이 건물의 특징이 더욱 강력하게 드러납니다. 땅과 건물은 하나로 연결되고, 건물은 벽과 지붕의 구분이 없고, 게다가 주름이 잡힌 양탄자처럼 휘어있습니다.

 

 

조금 더 위에서 내려다 본 각도입니다.

 

 

 

 

마치 상어를 닮은 묘한 건물입니다. 유선형 비정형 디자인으로 승부를 거는 자하 하다드의 특성이 극명합니다.

 

그리고, 하디드의 건축은 그 내부가 외부 이상으로 파격적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건물도 그렇습니다.

 

 

 

 

또다른 반전은 바로 이곳. 건물 외관처럼 유선형 곡선들이 지배하는 내부의 모습입니다.

 

 

 

 

이 작품에 앞서 화제가 되었던 건축은 중국 광저우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입니다.

 

 

 

 

역시 비정형의 건물이 수면에 반영되며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자하의 다른 건물보다 곡선처리는 덜합니다만, 내부는 특유의 백색 공간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역시 공연장 모습이 압도적입니다.

 

 

 

 

이번에도 가오리의 내장 속으로 들어온 듯한, 곡선이 물결치는 공간입니다.

 

 

이런 하디드의 건축은 강력한 대신 반감도 부릅니다. 지나치게 디자인만을 위한 디자인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디드가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건축가가 된 것은 현대적인 어떤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일 겁니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이처럼 파격적인 건물은 구현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컴퓨터를 통해 3차원 입체 시뮬레이션이 뛰어나졌고, 새로운 재료와 기술들이 속속 건축에 도입되면서 하디드는 빛을 발할 수 있었습니다.

 

 

#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은 집념-화려한 데뷔로 스타가 되다

 

 

그러나 하디드가 처음부터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하디드는 실제 지어지지는 않는, 도면만으로 존재하는 건축인 `페이퍼 아키텍트'로 이름을 알려나갔습니다. 새로운 개념, 파격적인 시도와 구상을 가상으로 선보이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아쉽게도 그에게 건축을 맡기는 건축주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 꼭 20년쯤 전 드디어 하디드에게 기회가 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 가구업체 비트라에서 자기네 공장에 소방서 건물 설계를 맡깁니다. 그 소방서는 실로 독특했습니다.

 

 

 

 

자기에게 찾아온 데뷔의 기회를 하디드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걸어 완성한 출세작은 놀라웠습니다.

 

소방서가 아니라 조각 작품 같은 이 건물 하나로 하디드는 단숨에 세계 건축계에서 유명해집니다. 지금의 유선형 건축 이전 날카롭고 역동적인, 그래서 긴장감과 묘한 흥미를 자아냈던 하디드의 스타일이 이 건물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후 하디드는 점점 더 독특한 건물들을 선보입니다. 예각의 뾰족함과 부드러운 완만함이 섞이고, 새로운 기술들을 앞서 선보이면서 가장 화끈한 건물을 만드는 건축가로 자리잡았습니다.

 

 

 

 

2005년작인 독일 볼프스부르크 파에노 과학센터입니다. 독일을 중심으로 작품들이 줄줄이 이어졌고, 점점 거대해져갑니다.

 

 

 

 

스페인 사라고사에 이런 독특한 다리 파빌리온을 디자인하는 등 다양한 장르와 제품 디자인까지 넘나들게 됩니다.

 

 

이런 전방위적인 인기와 활동은 그의 작품이 앞서 말씀드린대로 현대적인 이미지를 물씬 풍기기 때문입니다.

 

첨단의 재료와 기법, 새로운 형태가 어우러지는 그의 스타일이 유동적으로 연결되면서도 거침없이 변화해가는 현대의 느낌을 담아내는 것으로 보이기에 그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하는 건축보다 제품 디자인에 더욱 뛰어나다 생각됩니다. 테이블부터 신발까지 여러 작업들을 선보였는데,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디자인이 자하 하디드 건물의 축소판처럼 보이면서 더욱 명쾌하게 드러납니다.

 

 

자하가 서울을 모티브로 설계한 ‘서울 테이블', 그리고 영국의 유명 디자인그룹으로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과 협업을 하는 것으로 주목받아온 이스태블리시드 앤 선즈와 함께 만든 아쿠아테이블입니다.

 

다른 테이블로는 이런 것도.

 

 

 

 

 

다른 디자인으로는 요즘 빙하가 흘러내리는 형상의 테이블과 의자 등 시리즈를 주로 만드는데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형태만큼 가격도 놀라운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구 이상으로 자하 하디드의 특성이 나타나는 품목은 `신발'입니다.

 

이런 신발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네, 신발 맞습니다. 킬힐입니다.

 

 

# 드디어 완성된 이 건물, 과연 한국의 반응은?

 

 

이런 최신작에 이어 올해 3월21일 자하 하디드의 최신작이 또 하나 등장합니다.

 

하디드의 작품 중 역대 최대, 아니 `세계 최대의 비정형 건물'이라는 건물,

 

바로 서울 동대문운동장터에 완공되어 내부 공사중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앤 파크'입니다.

 

 

줄여서 DDP로 부르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앤 파크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최고 역점사업으로 추진한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습니다. 디자인에 관한 각종 행사와 전시 등이 가능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문제는 오세훈 시장이 지나치게 이 프로젝트를 강행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건물이 한국에 필요한지, 지으면 어떤 내용으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의견을 모으고 고민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임기의 치적으로 강행한 점이었습니다. 게다가 건물 건립 비용은 자그마치 5000억원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거대 건축물이었습니다.

 

 

한국 건축계에선 서울의 역사와 환경,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명품 가방 쇼핑하듯 외국 유명 건축가의 엇비슷한 작품을 들여온다는 비판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서울시청 신청사와 함께 디디피처럼 욕을 많이 먹은 건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강행했고, 건물은 이런 모습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땅 속에서 솟아오른 거대 영지버섯 같기도 하고, 외계 우주선 같은 모습입니다. 과연 이런 건축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기존 건물들과는 다른 저 디자인이 2007년 당선작으로 뽑혔고, 동대문운동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7년6개월 뒤, 지금 저 자리에는 이렇게 건물이 등장했습니다.

 

 

 

 

최근 이 건물을 운영하는 서울디자인재단이 처음으로 건물 내부를 공개하면서 디디피에 다녀왔는데, 저 모습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건물 가상도와 실제 모습이 놀랍도록 일치하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건축물을 짓기 전 보여주는 가상도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치장을 많이 해 실제 모습과 느낌이 너무나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 건물은 싱크로율이 매우 높았습니다.

 

 

자하의 사무실이 세계적 사무실이 된 것은 구상한 가상의 이미지를 실제로 구현하는 기술을 지닌 수많은 협력 업체와의 네트워크 능력을 갖춘 덕분일텐데, 그런 능력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낮과 밤이 또한 크게 달라집니다. 밤이 되면 저 은박을 씌운 표면에 불이 들어와 이렇게 빛납니다.

 

자하는 건물의 용도보다는 폼나게 연출하는데 역시 선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타트렉에 나올법한 저 모습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어떨지 더 두고봐야겠습니다만, 자하의 작품이 늘 그랬듯 좋다는 의견과 싫다는 의견은 뚜렷하게 나뉠 것으로 예상됩니다.

 

 

위에서 보면 이 건물의 유기적 형태를 더 확실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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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도감에 나오는 선형동물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보시면 뒤쪽으로는 옛 동대문운동장의 조명탑 등의 흔적이 남아있고, 앞서 문을 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있습니다. 그 앞쪽에 패션타운을 마주보면서 디디피가 들어섰습니다.

 

 

굽이치는 외벽은 사이사이 묘한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바로 이런 장면입니다. 쇠로 만든 종유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

 

 

 

 

자세히 보시면 알루미늄 패널의 모양이 다 다릅니다. 건물이 곡선인 탓입니다. 건물 벽을 덮은 저 패널의 숫자는 모두 4만5000장. 하나하나 다르게 설계해 순서대로 아귀가 맞게 붙이는 일은 실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금속빛이 반짝거리는 벽과 콘크리트 구조체가 교차하고,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중간 공간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앞으로 장터 등이 열릴 공간이라고 합니다. 느낌이 묘하고 나름 매력적인 이 공간이 어떻게 쓰이고 어떤 활동이 펼쳐질지 궁금해집니다. 앞선 사진들이 디자인재단서 제공한 것이어서 깔끔한데, 이 사진은 제가 찍은 것이어서 좀...

 

 

 

 

이 건물에 대한 비판은 너무나 많이 거론된 것이고, 금요일치 <한겨레>에 제가 기사(▷ 관련기사 : 서울 한복판 우주선? 불시착일까 연착륙일까)로 다뤘기에, 이번 포스트에서는 건축 디자인 측면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 건물은 건축적으로만 볼 수 없는 건물입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건물은 들어섰고, 동대문 일대의 풍경은 이렇게 바뀌었고, 남은 것은 이 5000억짜리 괴물 같은 건물을 잘 쓰는 수밖에 없을테니까요.

 

 

그러면 미리 소개하는 것이 이번 포스트의 취지이니 내부를 본격적으로 보시겠습니다.

 

 

 

 

디디피는 서로 다른 구역으로 구획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각종 제품 발표회 등이 열릴 ‘알림터'입니다.

 

이런 유선형 거대 단일 공간은 이전에 없었기에 그 느낌은 무척이나 특별했습니다.

 

 

 

 

여기는 디자인 관련 비즈니스 영역인 ‘살림터’입니다. 백색 공간 안에 콘크리트 구조체가 들어선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아마도 개장 이후에는 방문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공간이 될 듯합니다.

 

 

 

 

저 실내 육교 같은 계단 다리 위에 올라가서 찍은 컷입니다.

 

 

디디피의 특성이자 매력이자 약점은, 건물에 창문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전시 기능을 하는 건물의 속성이기도 합니다만, 내외부가 완벽하게 분리되어 별천지에 들어간 느낌입니다. 온통 하얗고 물결치는 공간의 느낌은 처음에는 강렬한데, 자꾸 보면 답답해질 우려도 있습니다.

 

 

 

 

여기는 디자인 전시관,

 

 

 

 

여기는 `디자인 둘레길'. 이런 모습은 정말 우주선 내부 같습니다. 아직 표지판 등이 붙지 않은 상태여서 더욱 하얗기만 해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는 `상상놀이터'라고 합니다.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체험 공간으로 쓰일 예정입니다.

 

 

 

 

분명히 디디피는 전에 없던 새로운 공간을 체험하게 됩니다.

 

곡선이 많다보니 시공은 무척 힘들었을 듯합니다. 거푸집을 일일이 다 다르게 짜야 하고, 또 면과 면, 재료와 재료가 만나는 부분들의 디테일은 mm단위로 섬세하게 구현해야만 하는 까다로운 건물입니다.

 

 

시공 완성도는 아직 말하기 어렵지만 일단 잠깐 본 것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청에서 최악의 디테일을 보여줬던 삼성물산이 이 건물에선 훨씬 나아진 것일까요?

 

시청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이니 미리 판단하긴 어렵습니다만, 잘 해냈다면 좋은 일이죠. 이런 건물을 지으면서 생기는 노하우는 엄청날테니까요.

 

 

자하 하디드는 자신의 디자인 어휘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건물을 물결치게 하고, 기둥을 옆으로 비틀면 누가 봐도 자하 하디드 것으로 인식해주는 점입니다. 본인은 기본 컨셉만 만들거나 직원들의 것에서 좋은 디자인은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디드풍으로 사무실에서 기둥을 틀고 벽을 휘게 해서 만들면 됩니다.

 

 

디디피는 앞으로 적어도 100년 이상 서울에 존재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건물이 욕을 먹은 이유이자,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디자인은 오브제가 아니다'라는 사실, 그리고 건축은 땅에 박혀 존재하는 것이므로 더욱 신중하게 판단하고 정성껏 짓고 잘 활용해야 하는 확실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진리입니다.

 

 

디디피는 건물부터 짓고 채울 내용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건물을 짓는 목적과 내용인 소프트웨어는 정하지도 않고 하드웨어인 건물을 용도도 불분명하게 먼저 짓는 현실, 그리고 그것도 단 7년여만에 짓는 과정, 정말 한국적인 현실입니다.

 

정치인이 자기의 치적을 보여주기 위해 건축을 앞세우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이어져온 것이지만, 이처럼 무리하게 추진한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논란을 뒤로 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논쟁적 건물 디디피는 이미 지어졌고, 이 건물을 잘 쓰는 것은 오롯이 서울의 숙제로 남았습니다. 과연 이 건물이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지는 이제부터 풀어나가야할 어려운 미래입니다. 앞으로 시민의 혈세가 더 들어갈 것이란 우려도 큽니다.

 

이 난제들을 `문화의 힘'이 극복해내주기를 기대해봅니다.

 

 

구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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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강공’, 그러나 아베 신조는 바보가 아니다

반-아베 동맹 돌파, 보통국가 그리고 개헌까지의 노림수
 
편집국  | 등록:2014-02-01 10:18:25 | 최종:2014-02-01 12:05:0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독도 강공’, 그러나 아베 신조는 바보가 아니다
반-아베 동맹 돌파, 보통국가 그리고 개헌까지의 노림수

김민하 기자  |  acidkiss@gmail.com

일본 문부성이 독도는 일본의 고유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을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기술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에 따라 동아시아 정세가 급격하게 얼어붙고 있다. 우리 정부와 중국은 일본 측의 입장에 유감을 표하고 공식적으로 항의의 뜻을 전달했으나 일본 정부는 기존 입장에서 물러설 의사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일본에서 전해진 소식에 격앙된 TV 뉴스들. (화면 캡쳐)

국내 언론의 반응은 한껏 격앙돼있다. TV뉴스와 신문에서 이 소식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으며 이외의 각종 매체들은 앞다투어 일본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느라 여념이 없다. 인터넷 공간에서 네티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일본은 왜 저럴까?

   

▲ 아베 신조 일본 내각총리대신. (연합뉴스)

하지만 우리가 잘 대응하고 있는 것일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서 백번을 지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이상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분노하고 말면 될 일은 분명 아니다. 일본 정부가 저런 행동을 왜 하는지 이해하고 이에 맞는 논의를 해가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일본 정부의 결정을 이해하는 데 대한 최대의 걸림돌은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없다는 거다. 영토분쟁에 대한 자국의 입장을 교과서에 기술하면 주변국들의 반발을 불러온다는 것은 굳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 정부의 영토에 대한 입장 표명을 일본 국민들이 열렬히 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일본인들은 영토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29일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은 민주당에서 중의원을 2번이나 역임한 인사를 섭외해 인터뷰를 했다. NHK특파원 출신이기도 한 하라다 요시쓰구 전 의원은 교과서 내용을 개정하는 지도지침은 10년마다 바뀌므로 2018년에 바뀌게 되는데 그 2년 전인 2016년에나 논의할 내용을 이 시기에 발표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하라다 요시쓰구 전 의원은 “중국과 한국이 굉장히 반발하고 있는 이 시기에 왜 이렇게 앞서서 그런 발표를 했는지 일본(정부)의 정치적 판단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발언은 일본 내의 상식으로서도 일본 정부의 행위를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일본 정부를 이끌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는 총리를 2번이나 한 데다 집권 여당의 원내총무, 간사장 대리, 총재, 내각의 관방장관을 역임한 인재이다. 세이케이대학교와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똑똑한 사람이다. 이런 똑똑한 사람이 해봐야 주변국들의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 행위를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했을 리가 없다.

위안부 문제와 영토분쟁은 다르다

이해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는 NHK 신임 회장인 모미이 가쓰토 발언 논란과 이번 교과서 논란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모미이 가쓰토 회장의 “위안부는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는 발언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됐다. 첫 번째는 공정보도가 의무화돼있는 NHK 회장이 아베 내각의 강력한 선호에 의해 취임한 이후 극우파적 입장을 공공연히 내비친 행위의 부적절함이다. 두 번째는 국제방송을 송출하는 NHK의 회장이 외교적 차원에서 정부가 공식화한 일이 없는 주장(아베 내각이 무라야마 담화 등을 전면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자)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표명한다는 것의 부적절함이다. 따라서 모미이 가쓰토 회장은 NHK 전 직원에서 사과문을 발송해야 했다.

하지만 영토분쟁에 대한 문제라면 이런 두 가지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행보가 가능하다. 최소한 일본에서 책임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인사라면 영토분쟁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입장을 고려하고 발언하지 않을 수 없다. 중의원 출신으로서 한국 방송에 출연한다는 결단을 내린 하라다 요시쓰구 전 의원 역시 “일본 정부는 다케시마 독도가 일본의 고유의 영토다 라고 결정해놨기 때문에 그 자체를 교과서에 명기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한국도 독도가 한국의 고유의 영토다 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 역시 함께 병기해야 한다”고 발언하며 공동교과서 작성 등의 대안을 제시했는데 이 정도 수위가 공산당 등의 소속이 아닌 일본의 주요 정치인으로서는 한계이다.

자민당과는 앙숙지간인 민주당 중의원 출신의 인사가 이럴진대 하물며 일본유신회나 모두의 당과 같은 극우적 노선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라면 어떨까? 아베 신조 총리는 NSC창설, 특정비밀보호법안 의결 강행으로 형성된 반-아베 포위망을 극우주의적 행보를 강화해 정면돌파 하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전격적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결행하고 2014년 자민당 주요 활동 목적에서 ‘부전(不戰)의 맹세’를 삭제한 것 역시 이런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민당 소속이지만 늘 좌충우돌해온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도쿄도지사 재선거에서 탈핵을 고리로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를 지지하기로 하면서 반-아베 포위망의 불씨를 되살리려 하는 것 역시 아베 신조 총리의 입장에서는 극우적 노선을 강화시켜야 할 이유가 된다. 어쨌든 이 국면에서 밀리면 안 되는 것이다.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 (연합뉴스)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의 최근 발언은 아베 내각의 이러한 행보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지사는 현재 자민당과 연립내각을 이뤄 집권하고 있는 공명당을 대신해 일본유신회가 연립을 모색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았다. 이는 일본유신회 내의 또 다른 유력한 하시모토 도루 전 오사카 시장이 생활당, 묶음의 당, 민주당 일부 등과 함께 야권재편을 모색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이다.

반 아베 포위망 돌파위한 극우주의 행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에 대해 이시하라 신타로 도지사는 분당을 각오하겠다는 언급까지 내놓았다. 사뭇 비장한 발언이지만 분당을 고려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하시모토 도루 전 시장이 앞서 언급된 모미이 가쓰토 NHK 회장의 발언에 동조하면서 다시 극우적 성향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베 신조 내각이 2016년에 논의해도 될 교과서 지침(정확히는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기술 내용. 학습지도요령은 법적 효력이 있지만 해설서는 효력이 없다)에 대한 입장을 2014년에 굳이 표명한 이유는 전선에서 이탈하고 있는 극우세력을 일본의 보통국가화와 평화헌법 개정의 기치 아래 하나로 묶고 한시가 다르게 좁혀오는 포위망(사실은 보잘것 없는)을 돌파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아베 신조 자신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행보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일본이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 센카쿠 열도(다오위댜오)에 외국 항공기가 접근할 경우 인근 섬에 강제 착륙시켜 조사하게 하는 항공자위대 지침을 작성하도록 하겠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증대되는 외교적 리스크는 미국의 지정학적 곤란을 지렛대로 활용하거나 북한의 유화적 제스쳐를 고리로 한 6자회담 진행 등으로 해소하는 카드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조망해보면 아베 신조는 바보이기보다는 차라리 이상적인 정치인에 가깝다.

   

▲ 일본의 만행에 분노하는 한겨레의 29일자 지면.

따라서 이런 능구렁이 같은 인물을 상대해야 하는 한국의 정치세력으로서는 아베 신조를 매도하는 데 힘을 쏟아부을 것이 아니라 아베 신조의 명백한 우경화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일본 내의 세력과 손을 잡고 교류를 모색하는 소박한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방사능 피해가 한국에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해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마침 도쿄도지사 재선거에서 ‘탈핵’이라는 좋은 핑계가 떠오르고 있지 않은가?

출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812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3234&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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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 지목 방역활동, AI확산 부추겨”

AI 관련 국제TF “철새 지목 방역활동, AI확산 부추겨”
“야생조류서 고병원성 발견? 역학적 증거 부족”…“습지 방역은 생태계 파괴”
 
입력 : 2014-02-01  15:27:46   노출 : 2014.02.01  16:22:56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달 28일 최근 국내에서 발생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는 야생 철새로부터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같은 날 AI 관련 국제협력기구는 “야생조류를 바이러스의 근원지로 지목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류인플루엔자와 야생조류 학술대책위원회(Scientific Task Force on Avian Influenza and Wild Birds)는 이날 한국의 가금류와 야생조류에서 발생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5N8)에 관한 성명서를 내고 “야생조류가 고병원성 AI의 근원지라는 증거는 현재까지 없어 이들을 바이러스의 매개체가 아닌 피해자로 간주해야 한다”며 “야생조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실제 근원을 벗어나 효율적인 질병 통제라고 할 수 없으며, 생물다양성보전에도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책위는 지난달 16일 전북 고창에서 고병원성 AI H5N8 발생이 처음 보고된 후 오리와 닭의 가금류 농장에서 집단 살처분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야생조류에서 고병원성 AI 바이러스가 검출된 것은 보통 가금류 농장과 유통과정에서 저병원성 바이러스가 변이 과정을 통해 고병원성으로 변환하는 것과 비교할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농장 간 가금류와 가금류 제품, 사람과 장비의 이동뿐만 아니라 오염물질의 배출 등으로 인해 가금류와 야생조류에 바이러스가 확산됐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대책위는 “비록 많은 사람이 AI 바이러스를 야생조류가 전파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있지만 지금까지 세계 야생조류 감시활동에서는 야생조류에서 H5N8이 발견된 적이 없고, 이 주장은 지금까지 역학적 증거로도 뒷받침되지 않았다”며 “가창오리는 수십만 마리가 군집생활을 하므로 만약 이 바이러스가 철새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더 높은 사망률이 이전에 이미 발생했을 텐데, 지난가을에 도착한 가창오리에선 질병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 조류인플루엔자(AI) 관련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 공식홈페이지
 
한국 정부에서 AI 확산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철새 도래지에 방역작업을 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도 대책위는 “야생조류를 보호하고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금류 농장에 대한 철저한 관리와 방역 기간 동안 야생조류들이 서식하는 환경, 특히 습지환경이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습지에 방역을 실시하는 것은 바이러스 확산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생태계에 해로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책위는 “H5N1 고병원성 AI가 발생했을 때와 같이 바이러스 유입의 책임을 야생조류에게 전가하는 것은 AI 질병 확산의 근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행동이고 효율적인 질병 통제 활동보다는 바이러스의 잠재적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언론과 학계, 동물보건단체들은 야생조류의 역할과 조류인플루엔자를 고려해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하며,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 야생조류를 바이러스의 근원지로 지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조류인플루엔자와 야생조류 학술대책위원회는 국제연합환경계획(UNEP)과 이동성 종의 보존에 관한 협약(CMS),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와 함께 AI와 야생조류 간 역학조사를 실시하고, AI가 야생조류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지난 2005년 설립된 국제협력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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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기름유출로 주민들 두통과 구토, 어지럼증 호소

[현장] GS칼텍스 유출된 기름성분 인체 피해 여부 빨리 밝혀야

14.02.01 17:12l최종 업데이트 14.02.01 21:02l
유성애(findhope) 황주찬(yshjc)

 

 

[2신 : 1일 오후 8시 40분]

신덕마을 주민들, 기름유출 방제 작업 일시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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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오후 5시, 여수해양경찰서 회의실에서 김상배 서장이 '여수산단 낙포각 원유 2부두 기름 해상유출'과 관련해서 브리핑을 열었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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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후 5시, 여수해양경찰서 회의실에서 김상배 서장이 '여수산단 낙포각 원유 2부두 기름 해상유출'과 관련하여 브리핑을 열었습니다. 김 서장은 브리핑에서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 법적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김 서장은 "사고 경위 파악 및 안전관리소홀 여부를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김 서장은 해상 오염에 대해 "묘도에서 국동항까지는 엷은 유막이 분포해 있고, 묘도에서 오천동 앞 해상까지는 갈색 유막이 있으며, 낙포부두에서 모사금해수욕장까지는 엷은 갈색 유막과 검은색 기름띠가 10여 개소 정도 발견된다"고 말했습니다.

해안가 오염에 대해 "GS칼텍스에서부터 오일허브코리아와 신덕마을 해안가에 갈색 기름이 부분적으로 부착됐다"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김 서장은 기름 유출량과 유출된 물질 그리고 기름유출에 따른 피해액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복잡한 지휘체계 단순화 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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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5시, 삼일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신덕마을 주민과 해양수산부 관계자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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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가스 발생 여부에 대해서는 "GS칼텍스와 전문가 집단에 설명을 의뢰했다"며 "조만간 정확한 유출량이 밝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시간인 오후 5시, 삼일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신덕마을 주민과 해양수산부 관계자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민 대표 조현근 마을 이장은 "방제 작업하다가 머리가 아파서 철수했다"며 "목숨 내놓고 작업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조 이장은 "관계기관이든 사고 회사든 주민들에게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지 정확히 얘기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방제작업과 관련해서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복잡한 지휘체계를 단순화 시켜 달라"고 말했습니다. 

간담회에 참석한 김상일(삼일·묘도·주삼동 시의원) 의원은 "해상오염은 해경이 맡고 해안가 오염은 자치단체가 맡고 있어 사고 현장이 어수선하다"며 "최근 여수에 설치된 화학재난 합동방제센터내에서 해양오염 사고와 관련된 부서도 만들어 체계를 단일화 하는 방안도 고민하라"고 임송학 해양수산부 해양환경정책과 과장에게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에대해, 임송학 과장은 "주민들 의견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신덕마을 주민들은 1일 오후 3시 30분부터 그동안 진행하던 오염 방제작업을 중단한 상태입니다.

[기사수정: 1일 오후 6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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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 신덕마을 현장회의에서 윤장관은 주민들에게 신속한 방제 작업과 피해 조사를 약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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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냄새 때문에 마을 어르신 몇 분이 병원에 입원했다."
"설 명절이 어디 있나. 아이들은 모두 각자 집으로 돌려보냈다."
"잊을 만하면 기름유출사고가 터지는데 환장하겠다."

여수 신덕마을 주민들이 또 다시 터진 기름유출사고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1일 오후 4시 50분께 마을주민 4명이 여수성심병원을 찾아가 두통과 어지럼증, 구토 등을 호소했고 30분간의 문진을 거쳐 오심억제제와 두통완화제를 처방받았습니다.

1일 오후부터 마을주민들은 여수시 삼일동 주민센터에 모여 여수해양항만청 사고수습대책본부 관계자들과 만나 이번 기름유출사고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31일 오전 10시, 전남 여수 신덕마을 앞바다로 검은 기름이 밀려왔습니다. 싱가포르 국적 유조선(선박명:WU YI SAN, 278,585톤)이 GS칼텍스 원유2부두에 접안 중 워크웨이(잔교) 배관을 들이 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원유가 바다로 유출돼 신덕마을까지 밀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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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돌 싱가포르 국적 유조선(선박명:WU YI SAN, 278,585톤)이 GS칼텍스 원유2부두에 접안중 워크웨이(잔교) 배관을 들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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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신덕마을은 GS칼텍스 원유2부두로부터 약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250세대 700명이 살고 있는 조용한 어촌 마을입니다. 설을 맞아 마을을 찾은 가족들은 마을 앞바다로 밀려온 기름 때문에 정든 집을 급히 떠났습니다. 유출된 기름에서 올라오는 냄새로 머리가 아프고 구토하는 사람까지 생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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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덕마을 신덕마을은 S칼텍스 원유2부두로부터 약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250세대 700명이 살고 있는 조용한 어촌 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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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1일에 이어 다음날인 2월 1일까지 마을 청년들과 어르신들은 온종일 바다에 나가 기름을 제거했습니다. 어르신들은 자식들 세배도 못 받았습니다. 조현근 마을 이장은 "우리 마을은 설을 폐쇄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김민철 마을 청년회장은 "간밤에 한숨도 못 잤다"며 "역한 기름 냄새와 가스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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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제 전남 여수 신덕마을 앞바다로 검은 기름이 밀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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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름유출 마을 청년들과 어르신들은 온종일 바다에 나가 기름을 제거했습니다. 자식들 세배도 못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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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용 의원 "GS칼텍스, 인체 유해한 성분 없는지 빨리 밝혀라"

1일 오전 11시 30분,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과 주승용 국회의원 그리고 김충석 여수시장이 전남 여수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윤 장관은 사고 발생 지점인 GS칼텍스 원유2부두와 기름 피해를 직접 입은 신덕마을을 둘러봤습니다.

신덕마을 현장회의에서 윤 장관은 주민들에게 신속한 방제 작업과 피해 조사를 약속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참석한 주승용 국회의원은 "GS칼텍스는 유출된 기름이 어떤 기름인지 밝혀야 한다"며 "원유라면 인체에 유해한 성분은 없는지 빨리 밝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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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의 2월 1일 오전 11시 30분,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과 주승용 국회의원 그리고 김충석 여수시장이 전남 여수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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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름제거 마을 주민들이 기름제거에 나섰습니다. 간밤에 역한 기름냄새로 한숨도 못 잤습니다. 변변한 마스크도 없습니다. 인체에는 무해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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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는 "기름 확산을 막는 방제작업이 가장 중요하지만, 어떤 기름이 흘렀느냐에 따라 방제 방법도 달라진다"며 "방제 작업에 동원된 주민들이 두통을 호소하고 있는데 방제 작업시 어떤 마스크를 써야 하는지, 인체 피해도 고려하며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편, 31일 GS칼텍스 원유2부두에 접안중 워크웨이(잔교) 배관을 들이받아 발생한 기름은 조수 흐름에 따라 여수 신덕마을에서 부터 여수산단 앞바다에 위치한 묘도동을 휘감고 광양만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해경과 관계기관은 방제 작업과 사고 원인 및 기름 유출양을  파악중입니다. 

GS칼텍스(대표이사 허진수) 측은 이번 사고의 원인이 '운항 중 조작 미숙' 탓으로 보인다면서, 현장으로 인력 110여명을 급파하는 등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중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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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만 GS칼텍스 원유2부두에 접안중 워크웨이(잔교) 배관을 들이받아 발생한 기름은 조수 흐름에 따라 여수 신덕마을에서 부터 여수산단 앞바다에 위치한 묘도동을 휘감고 광양만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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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거쳐 박근혜 시대 맞은 ‘대안언론’ 어떻게 살고 있나

뉴스타파·국민TV 언론인 충원하고 TV개국 준비하며 확장세, 유튜브 플랫폼 한계…
1세대 대안언론 프레시안·오마이뉴스·미디어오늘 ‘악전고투’
 
입력 : 2014-01-29  15:20:01   노출 : 2014.02.01  12:34:19
정철운 기자 | pierce@mediatoday.co.kr  

 

 

2012년 1월 27일 노종면·이근행 등 해직언론인들은 역사적인 뉴스타파 첫 방송을 내보냈다. 이명박정부는 언론장악과 함께 ‘대안언론’이란 씨앗을 뿌리고 퇴장했다. 박근혜정부도 대안언론 씨앗을 키우고 있다. 박근혜정부 첫 해인 2013년 4월 1일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 라디오방송이 개국했다. 대선 전후로 팩트TV·고발뉴스 등 매체들이 활기를 띄었다. 시민참여방송 RTV는 케이블채널 531번에서 뉴스타파와 고발뉴스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 탄생한 대안언론은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 후원이나 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아 정부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한 공통점이 있다. 지난해 탐사저널리즘센터로 새롭게 태어난 비영리법인 뉴스타파와 오는 4월 1일 TV개국을 준비 중인 국민TV가 대표적인 대안언론이다. 이들 언론사가 KBS·MBC·YTN 등 공정성이 무너진 공영방송을 대체할 수 있을까.

탐사저널리즘 뉴스타파, 잘 만드는 데 보는 사람 적어
 
   
▲ 뉴스타파 제작진 ⓒ 뉴스타파
 
전국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회 내 제작단으로 출발해 비영리 탐사보도전문매체로 진화한 뉴스타파는 ‘한국형 프로퍼블리카’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성장했다. 지난해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조세피난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전두환의 차남 전재국씨 등 유령회사(페이퍼컴퍼니)로 비자금을 빼돌린 이들을 공개해 전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뉴스타파는 지상파뉴스에 등장했고, 언론인들이 인정하는 매체로 자리 잡았다.

뉴스타파 성원 32명의 중심은 공영방송 출신이다. KBS 탐사보도팀장 경력의 김용진 대표를 비롯해 최경영·김경래·박중석 기자 등 KBS 출신과 YTN 출신 정유신·권석재·최기훈 기자, <PD수첩>의 상징이었던 최승호 MBC PD와 이근행 PD가 뉴스타파를 이끌고 있다. 처음엔 해직언론인 위주에서 점차 사표를 내고 자발적으로 합류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EBS에 사표를 내고 객원 PD로 참여 중인 김진혁 PD도 그 중 한명이다.

뉴스타파의 플랫폼은 홈페이지·유튜브·팟캐스트·포털사이트·RTV다. 회원수는 31,994명이다. 회원수는 큰 감소 없이 유지되는 추세다. 평균을 내긴 어렵지만 회원 1명당 1만 원 정도의 회비를 내고 있다. 올해는 회원들을 위해 달력을 만들어 배포했다. 후원회비 외의 새로운 수익모델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운영상 재정적인 어려움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광고자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

2월 중에는 경력기자를 충원한다.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는 “우리의 강점이 데이터분석인데, 워낙 다양하고 방대한 데이터가 많아 인력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올해는 예산과 정책분야에도 집중할 계획”이라고 설명한 뒤 “앞으로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제에 집중해 국민의 알권리를 확장시키고 탐사보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밝혔다.

뉴스타파의 고민은 확장성이다. 총선·대선이 있던 시기에 비해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나오지 않는다. 뉴스타파를 지지하는 언론인 중에서도 뉴스타파를 챙겨보는 이는 소수이며 챙겨보더라도 끝까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다. 그러나 뉴스타파 현재 형식을 바꿀 계획은 없다. 김용진 대표는 “웹사이트를 기본 플랫폼으로 소셜미디어 기반을 더 다져서 확장성을 넓힐 것”이라고 전했다. SBS취재파일 방식의 취재후기를 늘리는 등 텍스트 기사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국민TV 뉴스방송, 노종면과 협동조합의 도전
 
   
▲ 국민 TV 개국광고 ⓒ 국민 TV
 
1월 28일 현재 미디어협동조합의 조합원은 2만 1144명, TV개국을 위한 출자금은 35억 6800만원이다. 회원이 정체된 뉴스타파와 달리 조합원이 조금씩이라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TV개국에 대한 기대감때문으로 보인다. 지난해 4월 1일 개국한 라디오방송의 경우 인기 프로그램은 20만 명 이상이 청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용민 국민TV PD는 “라디오방송은 미디어협동조합의 비전을 보여주기 위한 모델하우스”라고 설명했다.

국민TV는 지난해 하반기 노종면 전 YTN 해직기자를 영입하며 본격적인 TV개국 준비에 나섰다. 드디어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노종면 기자는 지난해 11월부터 국민TV 개국TF 단장을 맡았다. 노종면 기자는 뉴스타파에 이어 국민TV에서도 ‘개국공신’을 맡았다. 국민TV는 지난해 11월 20여명의 신규인력을 채용했으며, 현재 확보한 TV제작인력은 22명이다. 오는 4월 1일부터 1시간 분량의 데일리생방송뉴스를 구상하고 있으며 구상안은 2월 중순 조합원설명회 자리에서 공개된다.

노종면 단장은 “적은 자본으로도 방송뉴스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노종면 단장은 뉴스전문채널 출신으로 YTN <돌발영상>을 성공시킨 전례가 있어 뉴스타파·JTBC메인뉴스와 차별화된 콘텐츠를 내놓을 것이란 기대가 높다. 이와 관련 노 단장은 “상식과 합리라는 기조 아래 출입처 제도 등 기존 관행은 아예 지울 생각”이라고 밝혔다.

국민TV의 주요 플랫폼은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과 PC다. 국민TV 초기 논의됐던 셋톱박스에 의한 TV시청은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셋톱박스가 내장된 스마트TV시대가 오면 자연스럽게 유튜브 기반 콘텐츠도 TV속으로 진입할 것이란 설명이다.

박근혜 정부에선 케이블 진입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김용민 국민TV PD는 “JTBC뉴스와 CBS시사프로그램도 틈만 나면 편파적이라고 괴롭히는 상황에서 지상파나 케이블 진입이 가능하겠나. 당분간은 법외방송의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김 PD는 “지상파 플랫폼의 벽을 뛰어넘을 스마트미디어의 환경이 점차 다가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대안언론 1세대,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미디어오늘 ‘악전고투’

참여정부 시절 대안언론으로 성장했던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미디어오늘 등은 네이버 뉴스캐스트체제에서 증가한 온라인광고수익으로 이명박 정부를 버텼지만 네이버 뉴스스탠드 도입 이후 온라인 트래픽이 급감하며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프레시안은 지난해 7월 주식회사를 없애고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조합원은 1월 현재 2600여명이다. 전체 운영비의 6분의 1 정도가 조합비로 충당되고 있다. 최근에는 독립언론네트워크를 설립해 지역 대안언론과 기사를 교류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만드는 온라인 웹진과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평생교육사업과 각종 강연도 계획 중이다.

이대희 프레시안 협동조합 팀장은 “현재 7개 지역신문과 네트워크 되어있다. 서울 중심의 낙하산저널리즘을 깨고 각 지역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뉴스를 조합원에게 제공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고 밝혔다. 이대희 팀장은 “조합원들의 언론활동을 북돋우자는 취지에서 등장한 온라인웹진은 사이트 구축을 준비 중이며 오픈소스를 기반으로 할 것”이라 전했다.

오마이뉴스는 ‘10만인 클럽’ 정기후원과 각종 강연·교육 사업 등으로 수익을 얻고 있으나 10만인 클럽의 경우 대선직후 늘었다가 다시 줄어드는 추세다. 1월 현재 10만인 클럽은 8200여명 수준이다. 오마이뉴스의 한 기자는 “진영논리가 강한 사람들이 10만인 클럽 후원을 많이 하는데 야당 비판기사를 쓰면 항의나 탈퇴가 이어진다”며 “후원으로 인해 오히려 기자들이 진영논리에 갇힐 우려도 있다”고 전했다.

오마이뉴스는 수익모델을 다각화하는 과정에서 최근 지자체로부터 무리한 용역사업을 받으며 논란을 빚기도 했다. 올해만 해도 ‘안양 시민 희망 아카데미’ 강연행사를 주최하며 안양시로부터 행사 위탁에 따른 1950만원의 지원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양시에서 작성된 ‘2014년 언론사별 예산요구 현황’에 따르면 오마이뉴스는 ‘고양 누리길 종합 활성화 연구용역’ 사업 명목으로 5천만 원을 요구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이 같은 모습은 광고수익 감소에 따라 자생적 생존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오늘도 최근 유료독자 ‘미오친구’서비스를 도입해 수입구조 다변화를 꾀하고 있으나 아직 해당사업을 본격 궤도에 올려놓지 못하고 있다. 또한 보수우파진영에서 주간 미디어오늘의 광고에 대한 견제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등 광고 수주에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밖에도 2002년 야심차게 개국했던 시민참여방송 RTV(스카이라이프 가입자 대상 531번)는 2009년부터 한 해 20억수준의 방송발전기금 지원이 중단되고 공익채널선정에서도 탈락해 방송국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다. 2008년 40명 수준이었던 인력은 상근직원 2명으로 급감했다.

결국 관건은 콘텐츠… 플랫폼 확장과 수익모델 연구도

한국사회 언론지형은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에서 위축된 언론자유를 대체하기 위해 대안언론이 성장하고 있는 모양새다. 시민들은 후원금과 조합 가입으로 언론의 공정성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현재까지 모인 열망으로는 대안언론이 공영방송만큼의 영향력을 확보하기엔 난망한 상황이며 현실은 온라인에서 적극적으로 뉴스를 소비하는 화이트칼라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콘텐츠 소비가 이뤄질 뿐이다. 때문에 대안언론이 기성주류언론의 대체제가 되기 위해선 플랫폼 확장과 수익 증가에 대한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

MBC의 한 중견 시사교양PD는 “뉴스타파는 재원구조와 시청층에서 시스템적 완결성이 있어 미국의 프로퍼블리카처럼 잠재력이 있지만 유튜브 형식의 매체플랫폼으로 확장성을 확보하기에는 TV라는 장벽이 만만치 않다”고 평했으며, “국민TV는 인터넷방송 수준을 뛰어넘는 질적 전환문제에서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 PD는 그러나 “대안언론을 바라보며 공영방송 구성원으로서 자괴감을 느낀다. 대안언론이 성장해 언론지형의 정상화에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뉴스타파·국민TV등 대안언론의 전파범위는 안타까울 정도로 미약하다”고 전제한 뒤 “우선 대안언론사끼리 공조체제를 통해 취재의 깊이를 높이고 좋은소비 캠페인을 통해 진보적인 언론 가운데 한 곳을 구독·후원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대안언론이라면 단순히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콘텐츠의 품질이 좋아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뉴스타파의 경우 1분 전후의 현장성 있는 리포트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대안방송의 현실 가능한 모델, PBS
최진봉 교수 “지역방송이 거미줄처럼 연결되면 전국방송 가능”

뉴스타파와 국민TV가 지상파로 진입하게 된다면, 롤 모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해외 비영리 저널리즘의 현황을 연구했던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대안적인 지상파 방송으로 미국 공영방송 PBS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PBS는 비영리 민간법인 공영방송사로 1970년 개국했다. 미국 전역에 있는 356개 지역 방송국을 통해 뉴스를 포함한 문화·어린이·교육·역사·사회 등 다양한 공익프로그램을 제작·편성하고 있다. 지난 14일에는 <비밀의 국가 북한>을 방영하며 한국에도 소개됐다. 시청률은 FOX 등 민영방송에 비해 낮지만 뉴스신뢰도는 민영방송보다 높다.  

 
   
▲ 미국공영방송 PBS ⓒ PBS
 
PBS는 광고방송이 금지되어 있으며 재원의 90%가 각종 기금과 지원금으로 충당된다. 2008년 말 기준 수입의 26%는 시청자들의 자발적 후원금이었다. 정부보조금은 30% 수준에서 부시정부 들어 10% 초반까지 감소했다. PBS 이사회는 35명으로, 공식적으로 정부인사는 없다. 최진봉 교수는 “주요 지역방송국의 대표들이 선발돼 이사회를 구성한다”며 “PBS가 공영방송이지만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 배경은 높은 후원금 비중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미국 정부가 공영방송에 후원하면 비영리단체 후원과 동일한 소득공제 혜택을 주기 시작하며 후원금을 내는 비율이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PBS모델이 한국에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최 교수는 “PBS시스템으로 가려면 지역마다 소출력 방송사들이 생겨나야 한다. 아마 10여명 안팎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지역방송들이 거미줄처럼 전국을 연결하게 되면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으면서 전국방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처음부터 큰 방송사를 만들기는 어렵다. 처음엔 소출력 방송으로 시작해 전국망을 연결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1987년 한겨레신문을 창간할 당시의 사회적 열망처럼, 소출력 방송들을 기반으로 대안적인 공영방송 모델에 대한 열망을 모으면 ‘한국형 PBS’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최진봉 교수는 “뉴스타파와 국민TV처럼 인터넷·유튜브 플랫폼만 갖고 가는 경우 그들만의 리그에 봉착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PBS와 미국 공영라디오 NPR이 뉴스타파·국민TV와 다른 점은 지상파라는 사실이다. 대안미디어도 기성매체로 진입해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플랫폼을 소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한된 시청자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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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자들이 빼앗지 못한 희망, 설날

[한도숙 칼럼] 지배자들이 빼앗지 못한 희망, 설날

한도숙 한국농정신문 대표
입력 2014-01-29 14:44:20l수정 2014-01-31 1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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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은 희망의 농사준비를 알리는 명절이다.

1895 년 갑오년 다음 해 을미개혁으로 설날은 없어졌다. 서양력을 공식화한 탓이다. 그러나 수천년을 내려온 문화와 풍습이 하루아침에 법령 하나로 사라질 것인가. 백성들은 관행대로 음력 1월 1일 설날을 챙겼다. 그도 그럴 것이 설날은 새해를 맞이하는 첫날이다. 그러나 양력으로는 1월 1일이 입춘과 한 달이나 떨어져 있다. 반면에 음력 1월 1일은 입춘절 전후로 들어 태양의 운행질서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농경사회에선 입춘절이 한해의 시작이 된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입춘절로부터 보름 정도 지나면 얼었던 땅이 녹고 푸릇한 싹들이 밀려 올라온다. 농사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니 새해는 입춘절과 함께 하는 것이 순리지 싶다. 

일 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양력을 채용했다. 그것을 우리에게도 강요하다시피 한 것이다. 이후 을사늑약과 한일 병탄으로 설은 말 그대로 서러운 날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공동체 문화를 말살하고 민족혼을 훼손하려 설을 쇠지 못하도록 했다. 가래떡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차례를 지내지 못하도록 했다. 꼭 저 70년대 통일벼를 심으라며 공무원들이 재래 나락 모판을 밟아버린 것처럼 떡판을 밟아버리기도 했단다. 그러나 민족혼은 더욱더 설날을 강하게 기억하도록 만들고 소극적이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설날을 쇠기도 했다. 

해 방되고 이승만 대통령은 서구의식으로 설을 복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민중들은 왜놈 설이라며 신정에 대해 반감을 품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가정의례준칙을 발표하고 설을 쇠지 못하도록 했다. 이른바 이중과세 금지였다. 없는 살림에 두 번씩 설을 쇠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며 경제발전에 매진하자는 것이었지만 당시 박정권의 존망은 식량 자급에 달려 있었다. 해서 한 톨의 양식도 아껴야만 정권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설 날은 정월 초하루이지만 보통 보름까지 설 기간으로 잡고 세시행사를 한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양도 많고 일을 하지 않으니 박정희는 그것을 바꿔보려 한 것이다. 많은 공무원 가족과 부유층이 신정을 쇠기도 했지만 신정은 설날을 대체할 수 없었다. 거대한 민족 문화의 뿌리는 잘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막 산업화가 시작 되며 고향을 등졌던 사람들이 구정이면 귀성으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1969년인가로 기억되는 서울역 참사사건은 당시 설을 쇠러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의 설렘에 찬물을 뒤집어씌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도 그때뿐 다음 해엔 더 많은 귀성객이 서울역을 메웠다. 

일 제가 뭐라던 박정희가 뭐라던 민중들은 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고향엔 어른이 계시고 자신의 삶의 근거가 있다. 거기서 설을 쇠어야만 그동안 유리된 채로 살아온 산업사회의 파편들이 공동체로 잠시나마 복귀해 위로받고 상처를 아물리게 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민속의 날인가로 설을 인정하다가 89년인가 설은 제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번 설에도 귀성으로 인한 교통대란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설 고향가는 KTX를 타러 이동하는 시민들

설연휴를 하루 앞둔 29일 오전 서울역에서 귀성객들이 고향으로 출발하는 KTX를 타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희망이 거론되지 못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설 날은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차례가 끝나면 성묘를 하거나 세배를 다닌다. 아이들이야 세뱃돈 욕심에 멀고 가까운 친척을 가리지 않는다. 가까운 이웃의 어른과 먼 곳의 친척까지도 보름 전까지 세배를 드린다. 그리고 연을 날린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연을 만들고 날린다. 지금은 다양한 연들이 개발되어 날리지만 예전에는 주로 방패연이었다. 방패연은 역사가 길다. 이미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며 김유신 장군도 연을 이용해 신호했다고 하니 군사용으로 개발되어 민간 풍속으로 정착된 것 같다.

세 시풍속은 다양하다. 연날리기, 윷놀이, 여자들은 널뛰기 등 공동체 놀이가 중심이다. 우선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린다. 차례를 지낸 후에 떡국을 반드시 먹었는데 떡국은 꿩고기를 넣는 것이 정석이다. 꿩이 없으면 닭고기를 넣는데 ‘꿩대신닭’이라는 속담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하얀 가래떡을 동그랗게 썰어 넣어 엽전을 연상케 했다. 돈이 많이 들어오라는 기복 풍습이다. 세배는 웃어른에 대한 예의다. 세배를 받은 웃어른은 세뱃돈을 나누어 줬는데 이 또 한 돈이 많이 생기라는 의미의 복돈이다. 글을 아는 어른들은 토정비결을 봐주었다. 올해 생기게 될 운세를 점쳐주는 것으로 아녀자들에겐 인기 만점이라 너도나도 그 어른께 세배 드리러 간다. 

토 정비결은 아산현감을 지낸 토정 이지함이 지은 것으로 일종의 예언서이다. 여기엔 태세(太歲), 월건(月建), 일진(日辰) 등을 숫자로 따지고 주역(周易)의 음양설(陰陽說)에 근거하여 일 년의 신수를 보는 것이다. 지금도 토정비결은 한해 운세를 점치는 대중적인 놀이처럼 유행하고 있다. 토정 선생은 마포 근처에 흙으로 정자를 짓고 기거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호이다. 토정 선생은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는 모습을 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도록 유도하기 위해 비결을 지어 퍼트린 것이다. 

개 인의 운세를 토정비결이 점쳤다고 한다면 한해 해운은 무엇으로 아는가. 그것은 책력에 나와 있다. 해마다 운세가 다른 것은 천지간의 조화다. 지구의 움직임, 별들의 흐름, 태양의 변화들을 종합하여 나타낸 것이다. 농경시대엔 이런 천지간의 조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농민들에게 해운을 미리 알림으로서 대비하고 정치적으로는 이데올로기화하여 근면한 생활을 유도했음이다. 

임 금이 신하에게 설날 새 달력을 나누어주면 그것으로 해운을 점치고 백성들에게 알렸다. 이것은 토정비결을 보는 개인의 행불행을 점치는 것보다 먼저였다. 세상이 변해 산업사회가 되다보니 해운은 간데없고 토정비결만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어선지 곳곳에 점집이 늘어가는 추세다. 미신이라고 터부시하던 60년대를 능가하는 점집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다.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다. 점집들이 호황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출마를 예정하는 사람들이 본인은 아닐지라도 배우자나 가족들이 운세를 보기 위해 점집 문턱을 닳게 할 것이 분명하다. 

사 회변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으니 점치는 양반들도 이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 해운까지 참고한다면 개인의 행불행이 사주팔자에만 묶이지 않고 사회 전체의 상황과 천지간의 조화까지도 담아냄으로써 전체 사회의 행복도 미리 점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 같다. 

자 그럼 올해 태세를 짚어보도록 하자. 올해는 용이 세 마리다. 말이 다섯 마리, 소가 열두 마리다. 거기에 신(辛)일이 열흘이나 된다. 그럼 각자의 역할을 보자. 용은 치수를 담당한다. 일반적으로 용이 많으면 비가 많다고 풀이한다. 말은 수확물을 운반을 담당한다. 말이 수가 많을수록 수확물이 많다고 본다. 소는 경전을 담당한다. 소가 많을수록 더 많은 밭을 갈 수 있다. 신일은 모든 씨받이 생명의 수분수정이 가능한 날수다. 수분일이 길수록 열매가 많이 달린다고 해석한다. 

독 자들께서도 해석해 보시라. 이 네가지 경우의 수가 서로 견제하면서 해운이 결정 나기에 해석 여하에 따라 해운을 잘못 짚을 수도 있다. 이렇게 개인과 사회의 욕구와 희망을 정서적으로 아우르고 극대화하는 날이 어느 민족에게나 있었을까. 세시에 행하는 모든 행위가 농사를 제대로 지어보려는 민중들의 염원이 녹아들어 있다.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고 대사이기에 설을 통해 강조하고 다짐을 두고 소원했다. 

이 렇듯 설날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세우는 날이었다. 모든 새로 만든 것으로 조상에게 예의를 차리고 또한 동고동락의 사람들과 서로 나누어 먹고 서로에게 희망의 덕담을 나누어주고 하는 세시풍속의 모든 것이 새로운 희망들을 만들어 내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 희망의 장을 가두고 이중과세하지 말자는 표어와 정책으로 눌러버린 지배자들의 놀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아 보인다. 

농 사가 죽어버린 우리에겐 지금 희망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니 희망을 말할 수 있는 마당이라는 구조 공동체가 없어져 버렸다. 희망이 거론되지 못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입춘절 양지 바른 곳에서 흙을 밀고 올라온 푸릇한 기운들을 보고 희망을 만들어 세웠던 설. 우리가 시급히 복원해야 할 희망의 마당은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농업의 새로운 판짜기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저 갑오년의 농민들이 희망을 갈구하며 일어선 것처럼 우리의 입으로 희망을 말할 수 있도록 판짜기를 해야 한다. 이번 설은 그런 설이 되어야 한다. 설, 잘들 쇠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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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김낙중, 사형선고만 다섯 번…후회하지 않는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강천(剛泉) 김낙중 "나는 여전히 '무기수'"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31 07:33:53

 

 

 

 

 

 

이쪽은 착한 편, 저쪽은 나쁜 편이라 했다. 이 선을 분명 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저쪽을 넘나드는 한 녀석이 있다. 한 대 콕 쥐어박아도 소용이 없다. 동무들도 그 존재가 귀찮다. 여러 번의 지적에도 변함없는 걸 보니 저 녀석은 문제아가 틀림없다. 순결한 우리, 바닥에서 돌멩이를 찾아 꼭 쥐어라. 저 선을 넘은 더러운 아이에게 힘껏 던져야 한다.  
 
아이는 전쟁 가운데 다시 전쟁이 나던 시절 태어났다. 화약 냄새를 맡으며 그것이 원래의 풍경인 듯 자라난다. 청소년 시절 폐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깊은 의문에 빠진다. 부처님에게 자비를, 예수님에게 사랑을, 공자님에게 인을 배운다.

 

"일요일 아침엔 새문안 교회를 갔다가 2시에는 조계사에 가고, 4시에는 YMCA에서 하는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장자 강의를 들었다. 무엇이 참된 삶의 의미일까를 물었다. 그 와중에 6.25가 터진 것이다. 나는 인민군 치하에서 의용군에 나가서 국군을 죽이기를 요청받았고, 9.28 수복 후 국군 치하에서 나는 다시 국군에 나가서 인민군 죽이기를 요청받았다. 그러나 내가 왜 의용군에 나가서 국군에 나간 중학교 동창들을 죽여야 되는지? 또 나는 왜 내가 국군에 나가서 의용군으로 나간 고향 국민학교 동창 친구들을 죽여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우리가 왜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 거다. 그러면서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 일단락된 후 모두가 북진 통일을 외칠 때 이제 청년이 된 소년은 혼자서 평화를 외친다. 그가 배운 것은, 그가 지켜야 할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메말라 버린 마음들에 대고 감히 눈물을 찾는다.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이 난리 통에 감성팔이를 해 대는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이다.

 

"'탐루(探淚, 눈물을 찾는다)'라고 등불에 적어 혼자 평화시위를 했다. 삭발을 하고 소복을 입고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제 전쟁 그만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느냐. 도대체 눈물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없느냐. (통일을) 평화적으로 하자는 사람이 없느냐'고 거리에 나가 외쳤다."

 

청년은 진심은 모두에게 통하는 것이라며 겁도 없이 지난 시절 형제였을지언정 지금은 속이 시꺼먼 놈들로 가득할 북한으로 건너간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통일방안을 만들었기에 전해 주겠다고 한다.

 

"남북한의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서로 죽이라고 강요를 당했는데 그럴 게 아니라 공존을 통해 같이 살 수 있고 통합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이 제안서의 내용은 20세 미만의 청년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에서 제외하고, 이를 주축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이들이 자치적으로 운영되게 양쪽 국가가 공동으로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제안서를 남한에도 북한에도 전달해 주면 되겠다 싶었다."

 

청년은 무려 1년이나 그곳에 있었다. 그는 어떤 세뇌를 받아왔을까. 어떤 잔인한 북한의 지령을 들고 와 우릴 잡아먹으려 할까. 이미 속이 시꺼먼 간첩임이 틀림없는 저놈은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이 분명하다.
   
“1년 동안 북에 있으면서 무슨 간첩교육을 받았느냐는 취조를 집중적으로 받았다. 나를 이렇게도 매달고 저렇게도 매달아 물속에 집어넣고 별짓을 다 했다. 고통스러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저 ‘예, 예’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예’라고 하려고 해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그냥 ‘아니오’만 하니까 온갖 방법으로 고문을 당했다.”

 

결국 그 문제아 바보 빨갱이는 양쪽 모두에 버림받고 다섯 번의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18년간의 수감 생활을 한다. 청년은 이제 83세의 온통 머리가 하얀 노인이 되었다. 그는 ‘무기수’이며, 투표권도 없고, 해외여권도 나오지 않는 부자유한 신분의 소유자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나라를 전복하려 하는 간첩이라고 손가락 질 한다. 모진 삶 가운데 겹겹이 쌓인 원망이 그의 시야를 다 막아 버렸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보는 여전히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이 땅에 눈물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난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굳이 '평화통일'을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아도 젊은이들이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살고 있잖아요. 세상은 그렇게 가고 있는 거예요. 눈물을 가진 이들이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것처럼 말이지요.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여 사랑의 인류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으로 생각해요. 아직 살아서 이렇게 젊은이들을 마주하고 있으니 참 기뻐요."

 

노인의 여직 맑은 눈망울엔 아직 다 쏟아내지 못한 눈물이 있다. 진짜 까만 것은 누구에게 있었던가. 잘못된 것은 그 인가, 우리인가, 혹은 이 사회인가. 깊이 주름진 그의 눈 안에 통일 동산을 뛰어놀던 해맑은 소년이 있다. 탐루(探淚)를 외치며 혼자 시위를 하던 열정 가득한 청년이 있다. 그의 눈에서 '평화'를 읽어낸다.

나는 슬며시 내 손안의 돌멩이를 내려놓는다.

 

 

- 1931년 일제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서 태어나셨다고 들었다.

 

내가 태어난 해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전쟁 통에 태어나 화약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6살 때는 일본 비행기들이 중국을 향해 날아다녔다. 그 후 일제 말기에 지금은 서울농업대학이 된 경성농업이라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일본이 태평양전쟁 중에 일반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모두 근로동원으로 보냈다. 반면 농업학교의 학생들은 학교 실습지에서 일을 하고 기숙사에서 숙식을 했기 때문에 동원에서 제외됐다. 그래서 일부러 농업학교에 갔다. 그러다 거기서 폐병에 걸려 잠시 고향 파주에 내려갔다가 회복 된 후에 다시 서울로 와서 서울중학교 2학년에 입학해서 학교를 다녔다.

 

- 광복 후 1950년 당시 스무 살이던 시절 6.25전쟁이 있었다. 우리는 간혹 전쟁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쓰곤 하는데 선생님이 직접 겪으셨던 전쟁이란 무엇이었나?

 

나는 8.15를 '광복'이나 '해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8.15는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것이 끝난 것뿐이다. 조국해방이 아니라 일제보다 힘이 센 나라들에 의해서 남북으로 분할 점령된 것이다. 일제의 점령지에서 다시 미소의 점령지로 바뀐 것을 마치 우리가 해방된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더구나 수백 년간 함께 살았던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미국은 미국이 원하는 정권을, 소련은 소련이 원하는 정권을 세웠다. 각각 자기들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서로를 괴뢰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냥 ‘8.15’라고 말하는 게 맞다.

 

내가 스무 살 때 6.25가 터졌는데 당시 서울중학교 5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부모님이 계시는 파주에 갔다. 걸어서 무악재 고개를 넘어 파주로 가는데 가다 보니 여기도 시체, 저기도 시체가 즐비했다. ‘왜 이렇게 서로 싸우면서 죽여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려갔다. 고향에 도착해 아버지를 도와 밭도 매고 책도 보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의용군을 모집했다. 난 당연히 의용군 모집대상이었다. 내 초등학교 동창들은 거의 다 의용군에 나가서 3분의 1 이상 죽었다. 나는 그 길로 도망을 쳐서 산골짜기에 땅굴 파고 숨어서 살았다. 밤이면 몰래 밥을 가져다 먹으며 한 3개월쯤 살았다. 그러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어 미군과 국군이 올라온 것을 보고 혹시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을까 하고 굴에서 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학교는 미군이 주둔해 철조망이 쳐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영어 선생님이었던 분이 나와서 왜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공부를 하려고 왔다고 하니 전쟁 중에 학교가 언제 개학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대신 미군부대에서 접시 닦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다시 고향에 내려가는 것보다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 뒤로 1.4 후퇴가 시작되기 전까지 3개월쯤 접시를 닦았다.

 

그러다 중공군과 인민군이 서울까지 내려와 나도 미군 꽁무니를 따라 부산까지 내려갔다. 부산에 있으면서도 계속 미군부대 안에서 접시닦이를 하면서 먹고 살았다. 부대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국군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면 몇 살이냐고 물어보고 죄다 국군으로 잡아갔다. 그러던 중에 학교의 학생들은 국군 징집 보류라는 광고가 나왔다. 중학교든 대학교든 학교에 등록하면 합법적으로 군대를 안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받은 월급으로 당시 부산으로 옮겨 온 서울중학교에 다시 등록했다. 학교에 들어와서 보니 권세가 있거나 돈 있는 집 자식들은 다 부산에 피난 와서 학교에 다니면서 합법적으로 징집보류를 받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중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낮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는 학교를 다녔다. 매일 일선에서 밀려오는 죽은 젊은이들의 시체와 부상자들을 보면서 나는 학교에 갔다. 이 모든 현실이 너무 참혹하고 비참했다.

 

거기서 졸업을 하고 대학은 서울대 사회학과로 갔다. 인생이 무엇인지 따져보기도 전에 서로 죽이는 사회 속에서 살다 보니 이것을 좀 이해하고 싶었다. 도대체 이놈의 사회가 무엇인데 사람을 서로 죽이라고 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 1954년 부산에 있을 때 삭발을 하고 소복을 입은 채 '탐루(探淚)'라고 적힌 등불을 들고 단독 평화 시위를 했다.

 

당시 부산에서 이승만 박사가 휴전이 성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휴전반대, 북진통일' 데모를 시켰다. 나는 내 스스로 미군부대에서 통역하고 학교에서 공부한답시고 군대도 가지 않았으면서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의용군도, 국군도 아니고 그저 도망꾼일 뿐이었다. 이렇게 비겁하게 살 바에는 하루를 살아도 떳떳하게 살다가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깨끗이 목욕하고 머리도 박박 깎고 속옷도 갈아입었다. 백의민족이란 말에 따라 하얀 한복으로 갈아입고 등불 하나를 들고 거기에 눈물을 찾는다는 뜻인 '탐루'라는 글을 쓰고 광복동거리로 나갔다. 남과 북 양쪽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누구 하나 전쟁을 그만하고 같이 평화롭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죽음을 결심하고 "도대체 눈물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없느냐? 평화적으로 같이 살길을 찾자는 사람은 하나도 없느냐?"고 하면서 외치고 다녔다.

 

눈물의 의미를 아는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얼마나 아프길래, 얼마나 슬프길래?' 하고 그 눈물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얼'이다. 사람의 얼이 병들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너나 할 것 없이 얼이 병들어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더러 '통일운동가'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통일운동가 이전에 평화주의자다. 통일보다 우선 평화가 중요하다. 자기가 싫어하는 원수를 전부 없애고 먼저 통일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얼이 건강해서 서로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때 같이 살 수 있게 된다.

 

- 왜 혼자 그런 시위를 하신 건가? 당시 생각을 같이 하던 사람들은 없었나?

 

대학 동기들 몇몇 사람에게 눈물을 찾는 조직을 만들자고 했는데 함께 한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너의 말은 맞지만 그걸 지금 어떻게 할 수가 있느냐”라면서 다 뒤로 물러나는 분위기였다. 지금까지도 북쪽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언급하면 '종북(從北)'이라고 몰아세우는데 그때는 더 심각했다. 그러니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북한과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시위를 단독으로 하게 됐다.

 

- 청년들을 위한 통일 방안을 만들어 당시 이승만 정부에 정식으로 제출했다고 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나?

 

부산경찰서에서 등불시위를 하던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내게 "평화적 통일을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게 뚜렷한 대안이 없었다. 그 길로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뒤져가며 1년에 걸려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만들었다. 그것의 핵심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젊은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면 그냥 따로 살면서 교류하고 평화적으로 살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거다. 일본과 미국이 과거에는 서로 싸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지금은 두 국가가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평화롭게 산다. 독일과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코리아는 한번 싸운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지금도 으르렁거리며 타도를 주장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이제껏 서로 죽이라고 강요를 당했는데 그럴 게 아니라 공존을 통해 같이 살 수 있고 통합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주장이었다.

 

1955년 봄에 정식으로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이승만대통령이 있는 경무대에 제출했다. 헌법에 있는 청원의 권리로 청원서로 보냈다. 일주일 만에 치안국에서 나를 불러 취조를 했다. 나보고 타도해야 할 북이랑 같이 살자고 하는 것을 보니 "너 빨갱이가 아니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한 적도 없고, 사적소유를 없애자고 주장한 적도 없다. 다만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면 따로 살면서, 자식들한테만은 서로 죽이라고 가르치지 말고 같이 살길을 만들어 가자고 이야기한 것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결국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 아직 전쟁의 잔상이 크게 남아 있던 시기에 독단적으로 북한에 갔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나?

 

결국 치안국에서 우리 아버지를 불러 나를 정신병원에서 인계받아 가게 했다. 그렇게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치안국에서 "김일성이 또 전쟁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 "북으로 가자. 가서 직접 한번 알아보고 내가 구상한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제안하자"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파주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지금껏 이런 생을 살지 않았을 거다. 운명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가재 잡고 헤엄쳐 놀던 곳이 바로 고향 파주에 있는 통일동산이었다. 통일동산 앞에 임진강과 한강이 합쳐지는 조강이 있는데 이 조강과 그 앞에 바다에는 휴전선이 없다. 휴전 협정상에 통일동산에서 한 3∼4km 올라와서 임진강으로 내려가는 샛강이 있다. 여기서부터 휴전선을 그린 것이다. 다만 휴전 협정상 조강 쪽은 현재 지배하고 있는 남과 북이 알아서 하라고 되어 있다. 이 조강을 따라 북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내가 단독 북진을 하던 날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하필 그날이 6월 25일이었다. 에어매트리스에 바람을 넣어서 강을 따라 둥둥 떠내려갔다. 오른쪽이 이북이고 왼쪽이 이남이어서 혹시 서해로 떠내려갈까 봐 오른쪽으로 붙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좁은 데로 떠내려가야 하는데 한강하구의 밀물이 올라와 출렁하는 바람에 매트리스를 놓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오른쪽에 도착했다. 나지막한 철조망이 있고 그 뒤쪽으로 보리밭이 있었다. 보리밭을 가로질러 갔더니 민가가 있어 들어가니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내가 "평양에 가는 사람인데 잠시 쉬어 가도 되느냐"라고 하니, 아랫목 뜨듯한 데서 쉬라고 했다. 한 30분쯤 쉬고 있는데 "손들어!" 하면서 인민군들이 들어왔다. 할머니가 날 쉬게 하고 나가서 신고한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닐에 싸서 고무줄로 차고 왔던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보여주며 "이것을 평양에 전달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니 풀어주었다.

 

- 그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선고 집행 없이, 1년이나 있다가 다시 내려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평양에 간 지 일주일 만에 방학세 내무상에게까지 갔다. 그가 내게 누가 보냈느냐고 해서 보낸 사람이 없이 스스로 왔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남한 군인들과 북한 군인들에게 한 번도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을 믿지 않았다. 자기들이 잔뜩 지뢰를 묻어놓았는데 어떻게 안 터지고 왔느냐는 거였다. 나는 잘 모르겠고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했다. 결국 고작 몇 분을 만나고, 평양 예심처라고 하는 감옥에 보내졌다. 바로 옆방에 박헌영 씨도 있었는데 그의 심복 부하들이 김일성을 죽이려는 반역을 꾀했다는 의심으로 2년이 가깝게 갇혀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국가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 씨도 의심을 못 풀어서 2년이 되도록 못 나가고 있는데 나 같은 피라미 대학생이 암만 우연이라고 말해도 통하겠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를 했다. 정신을 집중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결론은 그들이 믿고자 하는 대로 남쪽에서 보내서 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백하겠다고 했더니 자세히 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뭘 잘 알아야 쓰지 어떤 것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여기 오기 전 경무대에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냈을 때 나를 잡아다 취조한 치안국 사람들이 생각나면서 나를 치안국 중앙분실장이 보내서 왔다고 썼다. 거짓말로 가득 쓴 것이다. 그랬더니 나보고 "진즉 썼으면 이렇게 고생 안하지 않느냐"라면서 다음날 나를 기소했다. 이제는 간첩으로 사형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당시 북으로서는 남쪽에서 평화적 통일방안을 가져온 사람을 없애는 것이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었다. 당시 북한도 국제사회에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나를 이용해서 다시 남한으로 보내자는 결정을 한 것 같다. 죽이려고 머리까지 다 깎아놓고는 결국 죽이지 말자고 결정하고 며칠 후에 나를 다시 부른 것이다. 그들은 "휴전선에 데려다 줄 테니 남쪽으로 가서 너를 보낸 사람한테 가서 네가 가져온 평화통일방안을 그대로 동의는 못하지만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전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내 꼴을 보니 머리는 박박 깎였지, 단식하는 바람에 살이 많이 빠졌지 이 몰골로는 바로 남한에 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면 남한 치안국에서 '그것 봐라, 네가 다 죽게 되어서 돌아오지 않았느냐'라면서 미친놈 소리밖에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더 있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며칠을 토의한 후 나를 지금의 압록강 하구의 황금평에 있는 상의군인병원으로 후송했다. 거기서 머리도 자라고 건강도 회복된 후에 딱 1년 만에 남한으로 오게 됐다. 내가 6.25 한국전쟁 날에 건너갔고, 그다음 해 6월 22일에 그들은 나를 휴전선에 데려다 놓았다.

 

- 간첩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가 아니었나. 남한에 다시 돌아왔을 때 많은 의심을 받았을 것 같다.

 

휴전선에서 나를 먼저 발견한 것은 미군이었다. "Stop!(멈춰!)" 하고 총을 들이댔다. 내가 "I'm a citizen of Seoul!(난 서울 시민이다)"이라고 했더니, 나를 태워 미군 수용소로 데려갔다. 3개월에 걸친 취조를 받았다. 그곳에서 나는 "왜 자꾸 너희가 나를 취조하느냐? 날 한국에 넘겨라"라고 요구했다. 그랬더니 "그래, 남한 경찰로 가면 좋을 거다"라며 나를 남한 치안국에 특수정보과 중앙분실에 넘겼다. 그때가 1956년 가을쯤이었다.

 

치안국으로 옮겨진 후 미군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대한민국의 고문사를 쓰라면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50년대 고문, 60년대 고문, 70년대 고문, 90년대 고문을 다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통을 주는 방법은 같으나 자국이 안 남게 하는 방식으로 고문 기술이 달라졌다. 그때의 고문은 일제시대에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서 고문하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했다. 결국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가 돼 경찰로 넘어갔다. 여기서 1년 동안 북에 있으면서 무슨 간첩교육을 받았느냐는 취조를 집중적으로 받았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 병원에서 지냈을 뿐이었다. 북에서 잡혔을 때는 남한의 치안국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치안국에서 보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아는 게 없었다.

 

취조를 하면서 나를 이렇게도 매달고 저렇게도 매달아 물속에 집어넣고 별짓을 다 했다. 고통스러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저 '예, 예'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예’라고 하려고 해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그냥 '아니오'라고만 하니까 온갖 방법으로 고문을 했다. 이후 검찰에 넘겨져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었다. 재판 결과 간첩죄는 무죄로 판결되었으나 국가 보안법 위반죄로 1년 징역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을 뒤엎을 생각도 없었고 군사기밀을 갖다 준 것도 없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상고했더니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됐다. 집행유예도 억울하다고 해서 대법원에 상고하니 1960년 4.19가 난 직후에 면소판결(免訴判決)이 났다. 이렇게 이 사건은 끝났다.

 

당시 남과 북의 집권자들을 보면서, 입으로는 자유를 말하고 평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는 국민들의 자유, 공산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없는 인민들의 평등이란 자기의 부와 권세를 확장하기 위한 감언이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화통일이 진정으로 필요한 민중들에게는 강력한 외국을 등에 업은 권력자들의 요구를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당국들의 권력투쟁을 위한 동포 간의 상쟁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했다. 

 

- 간첩죄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이후 다시 투옥되고 사형까지 구형받은 것이 여러 번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1961년에 5.16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에 대해 고려대 학생들이 데모를 했다. 당시 나는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석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려대는 내가 일전에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내기 전에 서울대를 자퇴한 후 다시 들어간 학교였다. 4.19 혁명 전 4.18 때도 고려대에서 데모가 있었고, 5.16 때도 먼저 고려대에서 데모가 일어나니 박정희 정권이 이것을 때려잡기 위해서 무언가 명분이 필요했다. 그들은 '김낙중이 북에서 간첩교육을 1년간 받고 돌아와 그 내용을 바탕으로 고려대 애들을 뒤에서 선동하고 있다'는 묘책을 세웠다. 각종 신문에 '간첩 김낙중을 체포했다'고 대서특필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이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아버지가 간첩이라고 TV에 크게 나왔던 거다. 이 사건으로 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느닷없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은 반정부 운동이 조용해지자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군사 정부가 학생 탄압용으로 나를 이용한 것이었다. 

 

징역형을 복역한 뒤에 노동문제연구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산업화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노동자로 변하면서 문제가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를 직장으로 삼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교육을 하고,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협동 교육을 했다. 그런데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장기 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이에 반대해 학생들이 유신반대 투쟁을 시작했는데, 정부 당국은 학생들을 공포 분위기로 진압하기 위해 다시금 간첩사건이 필요해졌던 것이다. 나는 또다시 간첩으로 지목을 받았다. 그즈음 독일 에버트 재단의 초청을 받아 독일의 노동문제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여권을 신청했었는데, 그 기록을 가지고 '간첩 김낙중이 독일로 가서 동독을 거쳐 북한으로 탈출하려했다'라는 소설을 구체적으로 썼다. 그 사건으로 '간첩예비죄'라는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7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 이후 실제로 북한 사람과의 접촉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만남이 수차례 이어졌고 심지어 돈을 받아 남한에 북한의 지령을 받은 친북 정당을 세우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전에 모의 된 것이 아니라면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나?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없었나? 

 

수감 생활 후 '민족통일촉진회'라는 단체에서 정책위 의장으로 일했다. 1989년 국회 주최 한 통일관련 공청회에 참석해 '한꺼번에 통일하려고 하지 말고 단계적으로 이뤄가자'는 4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며칠 뒤 어떤 30대 중반의 한 젊은이가 내게 전화를 했다. 자기를 부산의 어느 대학 강사라고 소개하면서 내가 북에 왜 갔는지 쓴 <굽이치는 임진강>이라는 책을 열 번을 읽었고 나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 젊은이 두 명이 정말로 나를 찾아왔고, 함께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국회에서 발표하신 단계적 통일방안에 대해서 전적으로 좋은 생각이라고 하시면서 '평화통일을 위해서 협력해주시길 바란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하는 거다. 나는 처음에는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날 떠보기 위해서 이 사람들을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당신들,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 나온 거 아니오?"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더라. 그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어서 갸우뚱하니 그 젊은이가 "제가 선생님께서 옛날 평양에 와서 말씀하신 자술서의 내용을 다 읽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선생님께서 남한으로 돌아오셔서 당했던 일들을 보니 과거에 북에 오신 것이 남쪽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나는 이 사람들이 진짜 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남한에 와서는 내가 이북에서 허위진술을 하고 왔다는 말을 한마디도 안했기 때문이다. 그러곤 헤어졌다.
 
한국의 실정법상 북한에서 온 사람과는 허가 없이 접촉할 수 없으며, 신고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받는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신고를 하면 그들에게는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선고될 것이 당연했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가 걱정됐지만, 결국 나는 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방문한 그들과 함께 여러 가지 민족 문제들을 토의했다. 물론 나와 북측 당국의 의견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나는 당시 민중당 사무총장이었던 이재오의 끈질긴 설득으로 민중당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민중당 대표를 하면서 당시 갈라져 있던 야당 세력들을 합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난번에 찾아왔던 젊은이가 또 나를 찾아와 "선생님 민중당 대표를 축하합니다. 열심히 해주십시오"라고 하더니, "정치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해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하고 보따리를 주고 갔다. 그가 간 뒤에 펴보니 달러로 한 200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돌려줄 새도 없이 가버려 남겨진 돈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때 한국 정치는 정말 돈이 없으면 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다들 돈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생긴 돈 공적으로 잘 쓰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남대문시장에 가서 달러를 한화로 바꿔 당시 몇몇 정치인들이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장독 밑에 숨겨뒀다. 우리 할멈한테 지금까지 구박을 받는 것은 그 달러를 잔뜩 묻어놓고도 자기를 위해서 선물 하나도 사다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웃음). 생전 돈 한 푼 제대로 벌어다 준 적 없으면서 달러를 쌓아두고도 내색하지 않았으니 서운해했던 거다.(웃음) 단지 그 돈은 나나 우리 가족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가지 않아 1992년 남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사형을 구형받아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었다. 이북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온 것이 사실이었고, 이번에는 이북에서 달러를 받고 나라를 전복하려는 지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다시 감옥에 투옥되었고,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 의해 형집행정지로 집에 오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무기수'이며, 투표권도 없고, 해외여권도 나오지 않는 부자유한 신분의 소유자다. 지금도 나에게 나라를 전복하려 하는 '간첩'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있다. 나에게만 그치면 괜찮은데 우리 가족들도 쉴 틈 없이 괴롭혀 왔다. 그것이 마음 아프다.

 

 

- '정답사회'에 사는 우리이다. 남들과 다른 행보는 용납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다른 어떤 신념이 있으셨던 건가?

 

중학교 시절 폐병에 걸렸을 때 나는 '인간은 죽을 건데 왜 태어났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그 당시 폐병이면 거의 죽었다. 매일 남대문 도서관에 가서 ‘인생은 무엇이고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면서 종교와 철학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래도 답을 얻지 못해, 일요일 아침 10시에는 새문안교회를 갔다가 2시에는 조계사에 가고, 4시에는 YMCA에서 하는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장자 강의를 들었다. 기독교, 불교, 유교를 다니면서 무엇이 참된 삶의 의미일까를 물었다. 그런 와중에 6.25가 터진 것이다. 전쟁이 터지면서 '우리가 왜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 거다. 그러면서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살자고 결심했다.

 

지금도 신문을 보거나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다. 상대방을 서로 인정을 하지 않는 상태다. 내가 60년간 한결같이 한 일은 서로를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하고 같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 길을 찾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평화통일시민연대'라는 곳에서 상임고문으로 일하고 있고 국회에서 여야와 시민단체가 함께하는 '한반도평화통일시민단체협의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왔다 갔다 활동하다 보니 누군가는 나보고 기회주의자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귀가 두 개가 있는 이유는 이쪽 얘기도 듣고 저쪽 얘기도 들으라고 있다고 믿는다. 양쪽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것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 음양이 하모니를 이루면 오케스트라가 된다. 조화를 시키면 아름다운 교향악이 되고, 조화를 못시키면 잡음이 된다.

 

'구동존이(求同存異)'라고 말이 있다. 다르지만 같은 것을 찾아서 서로 조화의 길을 찾아가자는 거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서로 부딪힌다. 다름을 전제로 하고 하모니를 만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결혼이다. 여자는 이리로 가자고 하고 남자는 저리로 가자고 하는 모순이 있는데, 이 모순을 조화롭게 극복하는 것이다. 이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 혹시 다름에서 오는 속상한 일이 있으면 서로 다른 걸 인정하고 함께 길을 찾아가야 된다. 그렇게 나는 나의 길을 걸어왔다.

 

- '과연 통일을 꼭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통일을 해서 뭐하냐"라고 하는데 그게 맞다. 지금 통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남한은 아직 남북통일을 얘기할 자격이 못된다. 남쪽사회 내부에서 계층 간 지역 간 갈등부터 해결하고 그러고 나서 남북을 얘기해야 한다. 북한사회에서 못 살겠다고 도망 나온 탈북자들이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 와보니 바닥에서 살 수가 없는 거다. 남북통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더불어 살려면 아픔을 서로 느낄 수가 있어야 한다. 옆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데 몇백 억 불을 쌓아두고 외국은행에 빼돌려 자기 새끼만 물려주려고 하는 것은 얼이 병들어 있는 것이다. 남한사회 내부에서조차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통일이 아니라 평화가 선행이다. 네 가족, 내 가족, 박 씨네 가족, 이 씨네 가족 다 다르니까 따로 살 수 있다. 다르지만 크게 보면 같은 민족이다. 저 미국에 사는 흑인도 같은 한 겨레다. 한겨레의 입장에서 보면 '니 꺼, 내 꺼'라고 하면서 서로 죽일 일이 없다. 가족, 씨족이라는 좁은 범위를 넘지 못해서 서로 자기네 가족만 챙기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 가족도 안 챙기고 자기만 챙긴다. 내게 통일이란 민족통일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통일의 문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류가 하나가 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코리안의 임무라는 것이다. 인류가 하나 되는 일에 코리아만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는 지금껏 다른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침략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3.1운동 정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우리는 독립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거다. 평화라고 하면 제일가는 민족이 지금 남북 간에 갈등을 겪고 있다. 이 갈등을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해결할 수 있다. 언론이 아무리 차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으로 소통하게 되어있다. 우리가 살 길은 갈등을 폭발시키는 게 아니고 갈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남과 북이 조화하는 것만이 같이 상생하는 길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코리아가 소련의 탱크나 미국의 비행기, 누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서로를 용납하면서 하나의 길을 찾아갈 때에 선구자 역할을 할 것이다.

 

함석헌 선생님은 코리아를 '세계문명의 쓰레기통'이라고 강조했다. 고려시대에는 인도문명에서 들어온 불교, 이것이 폐단이 생겼고 조선시대에는 유교, 도교라는 중국문명이 들어와서 살았다. 근데 이것도 노론 소론 싸워서 끝이 났다. 그리고 뒤에 일제가 들어오면서 지중해의 서양문명이 들어왔다. 나일 강에서 흐른 이집트 문화와 로마 문화가 합쳐져 대서양으로 가서 영국으로 갔다가 미국을 통해서 남쪽으로 왔다. 육지로는 동유럽을 통해서 러시아를 통해서 북쪽으로 들어왔다. 세계문명이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음양이다. 이 양과 음이 코리아에 들어와 만나 싸울 것인가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결정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인도문화권, 중국문화권, 지중해문화권이 코리아 역사 속에 흘러들어와 다 겪으며 살았다. 우리의 DNA 속에 다 들어 있다. 통일은 하나의 지배체제를 만든다는 것인데, 하나의 지배체제가 필요한 게 아니다. 같이 더불어 사는 게 필요한 거다. 코리아가 세계사 속에서 자기 구실을 할 때가 온다고 생각한다.

 

-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

 

남쪽에서의 문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거다. 부동산과 현금의 소유 분포를 그려보면 상위층 10%가 모든 부동산과 현금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제도를 부인하면서 사유재산제도를 없애야 된다고 하면서 지적한 것이 사유재산제도를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공산주의의 문제는 권력이다. 모든 것을 권력 가진 자가 결정한다. 권력이 있으면 자유가 있고 권력이 없으면 다 노예가 되는 것이다. 북은 권력독재고 남쪽은 금(金)력독재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인데 어떤 권력자나 부자에 의해서 노예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1989년에 통일이 되기 전에 서독에 갔다. 의료, 교육 다 공공이어서 국가가 다 부담했다. 의료비, 교육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동독을 보니까 정부가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국유화를 했는데 권력을 쥔 사람들이 맘대로 하는 거다. 결과적으로 서독에 비해 동독은 3분의 1밖에 못살더라. 동독사람들이 서독을 보니 이게 진짜 사회주의라는 생각을 했다. 돈이 없이도 의료혜택을 받는 것이 사회주의가 아니고 무언가. 이렇게 해서 동독사람의 민심이 서독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남북이 갈라져서 서로 싸울 궁리만 하고 자기가 쌓아놓고 있는 재산은 나눌 생각을 안 한다. 미국도 빈부격차가 심하기는 하지만 재벌들이 자진해서 사회로 환원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은 가족주의가 심해서 돈을 벌면 자기 새끼한테 물려주려고 외국으로 빼돌린다. 지긋지긋하게 갈등이 심하다.

 

남한사회 내부에 갈등이 심하게 많은 이유는 그 갈등의 밑바닥에 물질적 욕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이 재산제도에 있어서 ‘공동상속제도’의 도입이다. 한집안에서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의 공동상속 제도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무개의 재산이 몇조 원이라고 하면 그것을 공동상속의 대상으로 보고, 적어도 몇백 억 원은 사회의 공동상속기금에 내놓고 이 기금을 새로 자라나는 18세 혹은 20세의 젊은이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어서 사유화하는 것이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그들의 자식은 똑같이 공동상속을 받는 거다. 상속의 형태는 회사의 주식형태도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느 회사의 사원이면, 그 공동상속기금에서 그 주식을 사서 주면 회사는 내 회사가 되는 것이다.

 

- 전쟁 이후 6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휴전 상태 속에 살고 있다. 이 긴 싸움의 종결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미소(美蘇)냉전이 끝난 것은 고르바초프가 수상이 되면서 무기경쟁을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무기를 줄이면서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이미 충분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역시도 현재에 있는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남북이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다. 북은 생존을 위해 핵을 절대로 포기 안 할 거다. 카다피도 핵을 포기했다가 망했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북한과 전쟁할 것도 아니면서 그 많은 무기들을 어디다 쓰려고 계속 사들이는지 모르겠다. 국방부에서 수조를 들여서 무기를 사들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미국의 군수산업이 가장 많은 로비자금을 쓰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군비 경쟁으로 서로를 위협하는 일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이미 충분한 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눈치를 보며 계속해서 사들이는 것도 그만해야 한다. 평화통일을 하자고 하면서 서로를 믿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끊임없이 공격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가.

 

- 누군가에게는 ‘평화주의자’라는 존경을,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악마 같은 존재'라고 손가락질 받았다. 한 사람의 비난에도 쉽게 쓰러지는 우리이다. 참 모진 삶이 사셨다는 생각이 드는데. 삶이 원망스러웠던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에 삶의 바른길을 찾아가는 게 내 임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갈림길이 참 많았다. 그때마다 앉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 마음으로 결정하고 선택하면서 갔다. 여기에 있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진리요 생명의 길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사명이다'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나는 찬송가 중에서 '내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찬양과 '참 아름다워라'라는 찬양을 좋아한다. 내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때, 무엇을 할 수가 없을 때 ‘내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찬송을 한다. 그리고 이전에 간첩으로 몰려서 사형을 받았다가 사형은 면하고 감옥에 갇혔을 때 본 풀하나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풀, 나무, 새소리 등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게 나를 지켜온 내 생활의 자세인 것 같다. 물론 지난 세월 녹록하지 않았다. 사형을 다섯 번이나 구형받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돌아보니 백 년, 천 년을 살았던 것처럼 까마득하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83년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살아서 청년들을 마주하는 것이 또 얼마나 기쁜가.

 

- 더불어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한마디 해 주신다면?

 

이 사회에 참 많은 갈등들이 있다. 갈등이라는 것은 욕망과 욕망의 부딪힘이다. 부처는 욕망을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욕망을 버리라고 하지는 않을 거다. 욕망은 필요한 거다. 하지만 욕망을 부리게 하는 엑셀레이터가 있다면 욕망을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갈등이 생겼을 때 브레이크를 잡을 때가 있고 엑셀을 밟아야 할 때도 있다. 인생의 행로는 이 둘을 잘 조화롭게 작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모니를 만들어야 한다. 혼자서는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이 사회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가는 거다. 그런 그림을 만들어 주시기를 부탁한다.

 

- 김낙중에게 자유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 자유다. 노예라는 것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국가의 국민이 자기 의사에 의해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유의 전제 조건은 각자 저마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강제하지 않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없는 사람의 자유는 고용주의 자유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권력 가진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사는 거다. 피동적으로 사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사람들마다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게 민주주의인데 어떤 말을 하면 ‘너는 빨갱이다, 반동이다’라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얘기를 해도 설득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대화다. 설득이 제대로 먹히려면 이 의미를 서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비판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입장을 바꿔보고 이해하려는 노력, 다름을 받아들이려는 용납의 자세가 자유인의 필수조건일 것이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전공 김예리 씨가 진행하고, 정리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연구원과 조경일 연구원이 맡았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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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유일의 한인타운, 산티아고가 슬픈 이유

[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 36]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의 수도, 칠레 산티아고

14.01.31 18:25l최종 업데이트 14.01.31 18:25l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의 수도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넘나들던 험난한 일정을 끝내고, 마침내 칠레의 중심부인 산티아고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마음씨 좋은 숙소의 안주인은 안전을 당부하며 다음에 올 때 가게에 걸어둘 태극기를 잊지 말라는 인사를 전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바람을 채워주면 좋으련만. 

이제 파타고니아를 떠나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눈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 있는 두꺼운 점퍼를 마치 숨기기라도 하듯 가방 제일 깊숙한 곳에 처박은 뒤에 우리는 기나긴 버스여정길에 올랐다.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까지는 국경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지만 우리는 말도 안통하는 그 곳에서 단 한 번의 사건사고도 없이 버스에서 제공되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떼우며 각자 지난 몇 주간의 얼음의 세게를 되새김질 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인다라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조금씩 가까워지는 선명한 빛깔의 호수가 나를 완전히 집어삼킬 때 즈음, 나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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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도심 중심에서 휘날리는 대형 칠레국기. 가로로 넓게 칠해진 붉은색은 스페인으로 부터의 독립을 상징한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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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버스 맨 앞좌석의 위력. 다시 눈을 떠보니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하나둘씩 드러나는 높은 건물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 자동차들의 행렬과 시끄러운 소음, 수트를 입은 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데스 산맥을 제외하면 서울의 어느 도심이나 마차가지다 싶은 순간 대형 칠레 국기가 창 밖을 스쳐지난다.  

도착한 산티아고 버스터미널의 아침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양손 가득 짊어진 짐을 버스에 싣기 바쁜 가족들, 터미널 안에 가득찬 상가들은 하나씩 문을 열면서 도시를 깨우고 검은 수트에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은 앞뒤로 커다란 가방을 들쳐맨 독특한 차림의 여행자는 투명인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휙휙 지나친다. 버스터미널만 해도 세개나 있는 대도시 산티아고를 보고 있자니 일 주일 전 우리를 죽음에 가깝게 한 빙하의 땅, 토레스 델 파이네와 같은 나라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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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하와 사막과 바다와 도시. 어찌보면 칠레는 여행자들에게 종합선물세트 같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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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수도는 독특한 이미지를 하나씩 갖기 마련인데, 사실 칠레는 지구에서 가장 긴 나라다. 지구본 상의 모습을 보면 폭은 겨우 175km 밖에 안되지만 길이가 무려 4300km에 달하는 독특한 나라다. 언젠가 '칠레를 가려면 한국에서 지구 반대편으로 땅을 파고 뛰어드는 것이 가장 빠르다'라는 농담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장 북쪽에는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인 아타카마 사막이 진을 치고, 남쪽은 눈과 빙하로 덮힌 산맥이 장벽을 쌓았다. 왼쪽은 태평양이고 오른쪽은 안데스 산맥이 가로 막고 있으니 어찌보면 빠져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는 칠레의 상황을 잘 표현한 말이다. 산티아고는 불의 사막과 얼음의 빙하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구어낸, 어쩌면 신기루와도 같은 도시인 것이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산티아고에서 찍었노라 사진을 보여주면 돌아오는 대답은 '아, 여기가 그 순례길이구나?'다. 스페인 남부에 있는 순례의 도시 산티아고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와 글자와 발음까지 똑같지만 이는 우연이 아니다. 

남미의 여느 대도시가 그렇듯, 1540년 스페인 정복자 발디비아가 이끈 군대에 의해 토착 원주민들은 몰락하고 그 땅 위에 새로 지어진 도시가 바로 지금의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Santiago)다. 한 나라의 수도가 외세의 침략에 의해 지어진 도시라니. 이상한 느낌이 든 건 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온 여행자의 기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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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아르마스 광장에는 정복자 발디비아(좌)의 동상과 자신들의 땅을 침략한 발디비아를 죽인 칠레 원주민 마푸체족 지도자의 초상을 새긴 석상(우)이 모두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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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중심가인 아르마스 광장에 들어서자 나의 기우는 깊어졌다. '정복자'와 '침략자'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발디비아의 동상과 유럽풍의 교회들은 오늘날 눈부신 발전을 이룬 산티아고의 위상을 나타내지만 보란듯이 광장의 다른 한 켠에는 침략자에 맞섰던 원주민 독립전쟁 지도자의 초상이 돌로 새겨져 있다. 광장의 한쪽에는 정복자의 동상이, 반대쪽에는 독립전쟁의 지도자의 석상이라니. 칠레는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일까.

한눈에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칠레의 원주민 마푸체 족은 지금도 제법 그 수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칠레 국기의 빨간색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원주민들이 흘렸던 피를 상징하는 반면, 그 후손들은 유럽풍의 도시에서 스페인어를 국어로 쓰며 살아가고 있으니 역사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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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국적인 풍경을 간직한 문화도시 산티아고의 다양한 모습들. 한국의 대도시와 비교해도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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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산티아고는 남미 제일의 문화도시로 손꼽힌다. 언제나 붐비는 아르마스 광장의 한 켠에 가득한 예술가들과 오래된 유럽의 고성 같은 모습의 중앙우체국, 바로크 양식을 본 뜬 대성당에 구 시가지를 벗어나면 마주치는 아기자기한 카페들까지, 산티아고는 과거의 상처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답다. 

거기에 일년에 300일 이상 맑은 날만 이어지니,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산티아고는 남미에서 유럽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쉬어가는 그런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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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궁인 모데나 궁전. 정원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장미 공예는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죽어간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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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과거는 묻어둔 채 앞으로 나아가던 산티아고에도 한 때 혹독한 비가 내린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미국 9·11테러와 같은 날짜인 1973년 9월 11일, 수도 산티아고 국영 라디오에서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라는 방송을 반복해서 내보냈고 미국 CIA와 피노체트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그들의 작전명이었던 셈.

지금은 평화롭게만 보이는 저 모네다 궁전은 장갑차와 탱크로 포위당했고 결국 궁전과 함께 통째로 날아가버린 산티아고의 평화의 끝에는 피노체트의 긴 독재가 이어졌다. 1년에 300일 이상 맑은 날이 이어지던 도시가 1년 내내 '비'가 내리는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까지도 피노체트의 추종자들이 시위를 열고 그의 악랄했던 정치를 미화하여 사건사고를 일으키고 있으니 어쩌면 칠레 사람들이 겪어야 할 정체성의 혼란은 스페인 정복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를 일으켰던 피노체트일지도 모른다.
 
간략여행정보
한국에서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가는 항공편은 파리, LA, 토론토 등을 경유해야 하기 때문에 24시간이 넘게 걸리는, 쉽지 않은 여정이다. 스페인의 영향을 받았던 중남미의 모든 대도시는 '아르마스' 라는 이름을 가진 광장이 꼭 있는데 이는 도시의 중심임과 동시에 여행의 시작점이다. 산티아고 역시 마찬가지. 모든 관광안내소와 숙소, 오래된 대성당들이 모여 있으며 광장에는 언제나 여행객과 거리의 예술가들이 뒤섞여 활기가 넘친다. 

서울만큼이나 큰 대도시인 산티아고에서는 특별히 무언가를 한다기 보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쉬어가기에 좋다. 남미에서 제일가는 문화복지 도시답게 세련된 건물들이 옛 시가지와 조화를 이루고 잘 정돈된 거리 곳곳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은 여행자에게 활력을 불어넣는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면 유네스크 세계 문화유산도시로 지정된 발파라이소가 2시간 거리에 있다. 이외에도 세계3대 와인 생산국인 칠레의 대표 와이너리, 해변도시 비냐델마르도 가까우니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좋으며 남미에서는 유일하게 한인타운이 생성되어 있어 한국의 다양한 식품의 구매도 가능하다.

좀 더 자세한 칠레 산티아고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2258853
태그:세계에서가장긴나라, 칠레, 산티아고 태그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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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KN-08)’ 그 불편한 진실

북한 이동식 ICBM 이미 실전 초기 배치… 킬체인 효과 있을까?
 
김원식 | 2014-01-31 14:34:2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지난해 7월 정전협정 60주년 열병식에 다시 등장한 KN-08

미국의 국가 정보를 총괄하고 있는 국가정보국(DNI)의 제임스 클래퍼 국장은 지난 29일(아래 현지시각) 북한의 군사력과 관련한 중대한 발언을 했다. 그는 "아직 (발사) 실험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북한이 이미 이동식(road-mobile)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KN-08)의 (실전) 배치가 초기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한다"고 밝혔다. 
(We assess that North Korea has already taken initial steps towards fielding this system, although it remains untested,)

클래퍼 국장의 이러한 발언은 그가 이날 미 의회 상원 정보위원회에 서면으로 제출한 증언을 통해 드러났다. 그는 이날 증언에서 북한이 영변에 있는 핵 관련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 시설 규모를 확충하고 있으며 플루토늄 원자로도 재가동에 들어갔다고 확인했다. 한국의 대다수 언론들은 '북한 원자로 재가동'을 미국 국가정보국장이 확인했다는데 방점을 두어 보도했다.

하지만 관련 보도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북한의 원자로 재가동은 북한도 이미 가능성을 언급했으며 우리나라 정보기관도 재가동을 확인했고 관련 전문가들도 여러 위성 사진을 통하여 재가동 사실을 확인한 사례이다. 물론 미국 국가정보국장이 이를 공식 확인했다는 의미는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북한 전문 누리집인 '38노스(38north)'에 올라온 북한 군사시설 관련 평가서에도 이 KN-08이 언급되었다. 이 평가서는 북한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이 확장 공사를 거듭하고 있다는데 초점이 맞추어졌지만, 북한이 지난해 초에 이어 12월에서 올 1월 사이에도 이 KN-08의 엔진 실험을 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날 클래퍼 국장이 공식적으로 실전 초기 배치를 확인한 북한의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KN-08, 일명: 화성 13호)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동안 각국의 정보기관은 물론 여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모조품(mock-up)' 혹은 '가짜(fake)'논란을 빚어온 북한의 KN-08의 실전 배치가 가지는 불편한 진실의 의미를 살펴보자.


'도발 원점 타격' 그러나 원점이 이동한다면... '킬체인' 유명무실 가능성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KN-08의 등장은 타격 사거리(6천km에서 1만km 이상까지 분석이 다양하다)가 넓어졌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보다도 바로 대륙 간을 횡단할 수 있는 즉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고정된 미사일 기지가 아니라 이동식 장착 차량에 의해서 이동이 가능해 어느 때이든 알 수도 없는 곳에서 발사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ICBM 등 이른바 '비대칭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도입하겠다는 것이 '킬체인(Kill Chain, 일명: 타격순환체계)'이다. 전문 용어로 표현하면 이른바 '시한성 (긴급) 표적(Time Sensitive Target)에 대한 표적화 과정(Targeting steps)'을 '킬체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동식 미사일의 발사 징후가 포착되면 해당 표적을 탐지하고 대응 공격 여부 등을 결정한 후 공격 후에는 제대로 목표물에 적중했는지 등을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리 국방부가 2015년까지 조기에 구축하겠다는 이러한 '한국형 킬체인'은 북한의 이동식 탄도미사일을 탐지한 후 최소 30분 내에 선제 타격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한•미의 정찰위성과 정찰기 등 감시 및 정찰자산으로 1분 내에 위협을 탐지' '1분 내에 위협 식별' '식별된 정보를 바탕으로 3분 내에 타격을 명령' ' 25분 내에 목표물을 타격을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이른바 '한국형 킬체인'이 실행 과정의 여러 기술적인 문제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과연 도발 원점을 파괴할 수 있는 선제공격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이미 전문가뿐만 아니라 국방부 출신 인사들도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일례로 윤연 전 해군 작전사령관은 지난해 10월 8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 ('킬체인-한국형MD'의 허와 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1일 건군 제65주년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킬체인(kill chain)과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체계 완비로 북한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대응능력을 조기에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킬체인은 북한 탄도미사일을 탐지-식별-결심-타격이 가능한 선제공격을 말한다. 얼핏 보면 자신감 넘치는 계획으로 보인다. 그러나 킬체인에는 허점이 있다. 우리 조기경보체제가 북한 미사일을 공격 전에 탐지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설사 탐지했다 해도, 결심해서 적을 타격하는 것은 많은 정치•군사적 어려움이 있다)


미국, 가장 우려하는 사항이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이동식 ICBM

우리 국방부가 미국의 정찰 위성 등 미국 정보•군사력을 활용하겠다고 밝혔듯이 그렇다면 미국은 이러한 이동식 탄도미사일 특히, 지금 가장 우려가 되고 있는 KN-08의 등장에 관해 '킬체인' 등을 통하여 선제타격할 수 있다고 안심하고 있을까. 답은 '아니다'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1월 17일, 미 중앙정보국(CIA) 소식통을 인용하여 "미국은 이전에 북한의 이동식 미사일 발사체(KN-08)가 실전에는 배치되지 않았다고 보았지만, 최근 정보는 이미 이 발사체가 전국 각지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쉽게 은폐가 가능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북한의 미사일 능력이 미국의 안보에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는 것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고 특종 보도했다.

다시 말해 미국의 정보기관은 이미 일 년 전에 이러한 KN-08의 실전 배치와 이에 따른 위협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난 2012년 4월 15, 평양 김일성 광장에 처음 등장한 KN-08 이동식 탄도미사일을 일부는 종이 수준의 모조품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미 정보 당국은 실제로 미국을 위협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더욱 북한의 지난 (2013년) 동계 군사 훈련 중에 이 이동식 미사일이 북한 전역에서 기동하는 장면이 미 CIA 첩보 위성을 통해 관측됨에 따라 미국 정보기관에 비상이 걸렸다"고 보도함으로써 사안의 심각성을 전했다.

이는 기존 핵시설과 미사일 발사기지 등은 얼마든지 선제 타격이나 대응 공격으로 정밀 파괴할 수는 있지만, 이동과 은닉이 가능한 새로운 미사일 발사체가 북한 전역에서 등장하자 미국이 대응책 마련에 골머리를 않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새로운 이동식 탄도미사일이 남한이나 미국 기지가 있는 괌 정도가 아니라 바로 미국 본토를 핵 타격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차마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 은하 3호 계열 미사일의 미 본토 타격 능력을 설명하는 CNN

하지만 지난해 3월 16일, 미 국방부의 제임스 윈네펠드 장성은 미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4월 열린 열병식에서 관측된 북한의 KN-08 이동식 탄도미사일에 대한 우려가 증대하고 있다"며"이 KN-08은 이동과 은닉이 쉬워 발사 지점에 대한 파악을 어렵게 하며 이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밝힘으로써 미국 정보 당국이나 국방부가 이 사항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잘 나타났다.

지난해 북한이 이 KN-08 탄도미사일보다 한 단계 아래 급인 이른바 이동식 '무수단 미사일'을 마치 한•미 정보 당국의 위치 탐지 능력을 테스트라도 하듯이 이리저리로 이동해 다니면서 시험 발사 위협을 시도함으로써 긴장을 몰고 왔던 사례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이동식 탄도미사일의 탐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반증하고 있다.

따라서 종합해 보자면 이렇게 미국이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사실을 일 년이 훨씬 지나 이번에 클래퍼 국장이 의회 보고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그가 이 보고서에서 쓴 "'이미(벌써, already)' 실전 초기 배치되었다"에서 '벌써'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북한 미사일 기술 향상은 '전략적 인내' 정책의 결과물"... 협상 나서라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미국에 주는 위협은 간단하다. 아무리 완벽한 '킬체인'이 구축되어 있더라도 (이도 100% 완벽할 가능성도 없지만) 단 한 대의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에서 핵무기가 발사되어 미 본토를 타격한다면 이는 아무리 선제 혹은 대응 공격으로 북한을 전멸시켜도 그와 똑같은 타격 효과를 미국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 핵무기와 이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의 대량 파괴 능력이 어쩌면 상호 간의 이른바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유지하며 전쟁 억지력을 가지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의 핵 능력의 고도화는 특히, 동북아 정세의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북한은 이만큼 핵 자위력과 군사력을 보유했다고 선전할지 모르나, 국제사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루기 힘든 또 하나의 강력한 핵무장 국가가 등장한 것은 굳이 일본 핵무장론이나 한국의 핵무장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북한의 이러한 핵무장이 바로 전임 부시 행정부 시절부터 현재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대북 정책으로 견지하고 있는 이른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의 결과물이라는 비판에서 미국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의 이른바 '전략적 인내'는 현실적으로는 대화와 협상도 거부하는 이른바 '전략적 무시(strategic negligence)' 정책으로 일관되어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는 아무런 평화 체제 구축도 이루지 못한 채 오히려 북한은 더욱 강력하게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개발에 치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북한과 대화를 하는 것은 오히려 핵무기를 고도화할 시간만 벌어주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협상을 하지 않는 것도 시간을 벌어주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우세한 '킬체인'과 초정밀 고도의 선제 맹폭을 감행한다 해도 북한 전역에 이미 최소 6대에서 20대까지 배치된 것으로 알려진 이 KN-08 미사일 중 살아남은 한 대가 혹은 두 대가 핵무기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누가 할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이번 미국 국가정보국 클래퍼 국장의 북한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KN-08)의 실전 초기 배치 확인은 군사적 의미에서도 즉, 군사적 긴장 해소와 대량살상무기(WMD) 감축 협상을 위해서라도 미국과 북한 간 그리고 한국과 북한 간 더 나아가 동북아 관련국을 대표하는 '6자 회담'이 조속히 개최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더하고 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1&table=newyork&uid=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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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설 단상>북의 화려한 유화공세는 또 하나의 강력한 대미공격
 
한성 
기사입력: 2014/01/31 [15:07]  최종편집: ⓒ 자주민보
 
 

1-북의 집요한 대미공격
북의 대미공격이 지속적으로 쉼 없이 전개되고 있다. 북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대미공격의 맨 앞장에 서 있다.
 
"푸에블로호 사건 때보다 더 비참한 신세를 면치 못할 것"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 46주년인 지난 23일 노동신문은 미국이 '도발 책동'을 계속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이는 계기별 사안에 대한 정치적 언급으로 된다. 특별할 리가 없다. 원칙적인 것이라 할 만했다. 그렇지만 그 원칙은 보다 구체적인 것들을 짚어나가기 위한 첫 출발이 된다는 것을 노동신문은 보여준다. 
27일,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무력을 증강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신냉전을 불러오는 것이라고 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에 대한 공격이었다. ‘아시아로의 회귀’에 대한 북의 공격은 단순히 미 군사정책에 대한 반발이 아니다. 미국이 중동지역을 포기하고 새롭게 수립한 미 세계지배전략에 대한 공격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아태지배전략에 대한 공격이었다. 북이 미 아태지배전략을 공격하는 것은 미국이 아태지배전략의 기둥으로 한미일3각동맹을 설정하고 있다는 판단을 해서일 것이다.
노동신문은 28일에는 미국이 특수전 무력을 증강하는 것을 북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반발하는 것으로 대미공격을 이어갔다. 
29일에는 대미공격의 본령에 맞추어졌다. 2월 말부터 시작될 것으로 보이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겨냥한 것이다. 한미군사연습으로 한반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자주 있는 공세이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의례적인 것으로 볼 수가 없다. 
27일 미국의 ‘아시아로의 회귀’에 대한 공격이 있었던 뒤라 미국의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미국의 아태지배전략과 결부하여 공세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미 아태지배전략의 기둥을 한미일3각군사동맹이라고 할 수 있다면 수십년 동안 지속강화되어왔던 한미합동군사훈련은 한미일3각군사동맹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받고 있을 것이다. 북의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한 공격이 언제라도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미국 아태지배전략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에 걸맞는 위상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이유이다. 
글 제목은 '조선반도에 끊임없는 위협과 도발을 몰아온 주범'이었다.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해 “긴장한 조선반도 정세를 최악의 사태로 몰아가는 위험천만한 도발행위”라고 규정을 했다. 노동신문은 특히 ‘키 리졸브’가 평양 공격을 염두에 둔 미국의 ‘도발’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신문의 집중적인 대미공격은 유엔주재 신선호 대사의 기자회견과 결부됨으로써 보다 화려해졌다. 1월 25일이었다. 신선호 대사는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과 한국이 키 리졸브와 독수리 훈련을 실시할 경우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파괴한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며 미국을 공격했다.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미국의 ‘책동’을 더 이상 허용하지말 것을 주문했다.
사람들이 신선호 대사가 대미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지난해 였다. 신 대사는 지난해 6월 21일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에 주둔 중인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하는 것이 한반도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긴장완화와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 요구라는 내용의 발언문을 발표했었다.
신 대사는 발언문에서 유엔군사령부는 조직 초기부터 유엔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유령기구이며 본질에 있어서 미군사령부라고 주장함으로서 기자회견의 모든 내용을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했다.

지재룡 주중 북 대사 역시 반미공격의 대열에 동참하고 나섰다. 
29일 중국 베이징 주재 북 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신년사 내용과 지난 16일 국방위원회가 발표한 중대제안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 뒤 한미 연합 군사훈련의 중단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우리정부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 대사는 기자회견에서 북핵문제 관련 언급을 함으로써 대미전선을  선명하게 쳤다. 
"우리는 6자회담의 재개를 지지한다"
지 대사는 "우리가 6자회담이라는 쪽배에 먼저 타고 자리를 잡았으니 나머지 참가국들이 빨리 타서 이 쪽배가 출항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지 대사는 한반도의 비핵화는 북의 변함없는 정책적 목표라는 것을 강조했다. 방식은 북의 일방적인 선핵포기가 아니라 동시행동이라고 했다.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원칙을 다시 강조한 셈이다. 이어 지 대사는 9·19 공동성명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국에게 책임을 돌렸다. “미국 등 일부 다른 참가국들이 저들의 책임은 회피하고 우리의 의무만 부각시키면서 이행문제를 떠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계속되는 한 핵문제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지 대사는 자신들의 핵무기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과 핵공격 위협의 산물임을 그리고는 북핵문제의 해결 방도를 그렇듯 명확히 밝혔다.
지 대사가 북핵문제와 관련해 밝힌 입장에는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북이 세워놓고 있는 기존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북 대사가 직접 외국에서 외신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북 대사관 안에서 기자회견이 열린 것은 지난 2007년 이후 6년 반 만이다. 이것들은 지 대사의 기자회견이 대미공격을 하기 위해서 조직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2-유화공세는 대미압박 없이는 성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북의 집요한 대미공격들이 일반적인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북의 유화공세가 끊임없이 그것도 화려한 수준에서 구사되고 있는 것과 직접 맞물려있다는 것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북미대결전에서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흥미로운 양상이다. 
"북은 왜, 우리정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유화공세를 펴면서도 미국에 대해서는 공격의 고삐를 잔뜩 움켜쥐는 것일까?"
많은 대북전문가들이 던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그랬다. 화두 급 문제의식이었다. 
이에 대한 답은 29일 주재룡 대사의 기자회견에서 그 기미를 찾을 수가 있다. 
기자회견에 외신 기자만 받겠다던 당초 언급을 깨고 SBS를 비롯한 일부 한국 언론의 입장을 허용한 것은 단연 주목할 만했다. 한국기자들을 자신의 안방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은 국내언론들이 크게 취급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극히 중요한 조처이다. 북의 유화공세에 대해 한국의 일부 언론들이 위장유화공세라고 했던 말을 일거에 무색하게 해버리기에도 충분했다. 
다음으로 지 대사가 자신들의 핵개발과 관련, "철두철미하게 미국의 핵위협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동족을 공갈하고 해치기 위한 수단은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 말은 북핵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의 결과물이라고 강조하는 것 그리고 한미합동군사훈련 취소를 촉구하는 말과 연동되어 나온 것이었다. 
  
지 대사의 기자회견은 유엔에서의 신선호 대사의 기자회견과 함께 북의 유화공세가 우리정부를 뛰어넘어 국제적 범주로 확장되는 등 점점 화려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음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북의 유화공세가 우리정부를 뛰어넘어 국제적 범주로까지 확장되는 데에서 중요하게 확인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북의 화려한 유화공세가 강력한 대미압박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북이 우리정부에 대해서 연일 유화공세를 펴면서 지난 1월 16일 국방위원회를 통해 ▲상호 비방중상 행위 중지 ▲상호 군사적 적대행위 전면중지 ▲핵재난 막기 위한 상호조치 등을 골자로 하는 중대제안을 발표했었다. 
이를 객관적으로 접근해보면 우리정부가 취할 수 있는 조치로는 첫 번째 내용밖에 없다. 나머지 사안은 우리정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인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정부에 대한 북의 유화공세에서 성과가 나느냐 안나느냐는 우리정부가 아니라 미국이 결정적으로 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그 어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현실은 그르든 그르지 않든 상관없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냉엄한 현실은 북이 유화공세를 국제적 범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 대미압박전술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북이 유화공세를 펴면서도 대미공격을 집요하게 구사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적확한 설명임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다음처럼 던지는 말은 언제라도 중요하다. 
“북의 화려한 유화공세 그리고 대미공격에 미국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우리민족이라면 남과 북이든 함께 즐기는 설명절을 보내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민족끼리’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한편, 미국의 태도를 주시하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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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日 전 총리 “아베 신사참배는 매국행위”

무라야마 日 전 총리 “아베 신사참배는 매국행위”

디지털뉴스팀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전 총리가 30일 아베 신조 총리의 작년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매국행위’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31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무라야마 전 총리는 전날 도쿄에서 열린 사민당 회합에 참석,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왜 나쁜 일이 될 것을 알면서 참배하는가’하고 격노했다”고 소개한 뒤 “본인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라를 파는 것 같은 총리가 있는가”라고 말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자민당 내 (아베 총리의) 측근으로 불리는 총리 관저 인사에게 ‘왜 당신들이 막지 않는가’라고 물으면 ‘뭐가 잘못됐는가. 이것이 국민의 마음이지 않나’라며 내게 반론한다”고 말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는 “차분히 생각해보면 역시 전범들이 (야스쿠니에) 합사돼 있다”며 “일본이 일미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조약)을 받아들여 국제사회에 복귀했으니 그 약속을 생각하면 총리가 참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과거 자국 태평양전쟁 전범들을 단죄한 ‘도쿄재판’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사회당(현 사민당) 출신인 무라야마 전 총리는 ‘자민당은 잘못됐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야당이 보이지 않는다고 개탄하면서 “앞으로는 국민들 목소리뿐”이라고 말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자민당 장기 집권체제 붕괴로 연립여당이 구성된 1994년 6월부터 1996년 1월까지 총리를 역임했다. 재임 중인 1995년에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사죄하는 내용의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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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맞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쉼터, 나눔의 집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4/01/31 16:43
  • 수정일
    2014/01/31 16:4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빼앗긴 청춘"…명절도 눈물 쏟는 '아흔 소녀' 아리랑

[르포] 설 맞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쉼터, 나눔의 집

서어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빨리 가야지 이제는 너무 지쳐.”

밑지고 파는 거라는 장사꾼의 말, 시집 안 간다는 말과 젊은 여성의 말, 그리고 이젠 가야지라는 노인의 말이 3대 거짓말이라고 한다. 노인은 습관처럼 “죽어야지” 소리를 했다. 능청을 떨며 “에이 할머니, 여전히 정정하신데요”라고 했다. 노인은 빙긋 웃고는 “그래” 했다.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아니라 지금 제 앞에 앉은 젊은 아가씨라는 걸.

 

 

▲나눔의 집 입구를 서성이는 할머니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나눔의 집 입구를 서성이는 할머니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내 청춘 돌려다오… 오늘도 눈물 쏟는 아리랑”

올해 아흔을 넘긴 배춘희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다. 배 할머니는 아홉 분의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위안부’ 피해 여성 쉼터 ‘나눔의 집’에 살고 있다. 1997년 이곳에 처음 왔으니, 이번은 나눔의 집에서 17번째 맞는 설이다.

28일 오후 두 시. 평소 같으면 점심을 먹고 방에서 쉴 시간이지만, 이날은 느긋하게 쉴 틈이 없었다. 명절을 앞두고 손님들이 몰려오는 탓이다. 고령의 할머니들은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짚고 거실로 나와 손님을 기다렸다. 거실 한쪽엔 선물꾸러미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화장지, 과일, 김 박스. 조억동 경기도 광주시장이 보낸 선물이라고 했다.

선물보다 늦게 도착한 조 시장과의 만남은 짧았다. 안부 인사 한두 마디, 두 번의 기념촬영이 끝나자 조 시장이 일어섰다. 할머니들은 “놀다 가라”고 성화였다. 배 할머니와 이옥선 할머니는 서로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조 시장은 “다음에 꼭 듣겠다”며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손님이 왔다 간 자리가 휑했다. 잠시 들떠 보였던 할머니들은 다시 입을 닫았다.

삼십여 분 후 다음 손님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손자 손녀 40여 명. 인근 지역 고등학교 봉사동아리 학생들이다. 의자에 앉은 할머니들 앞에 둘러앉아 질문세례를 퍼붓더니, 이젠 재롱잔치를 하겠다며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를 부른다. 잔뜩 부끄러워하며 노래하던 학생들이 맹랑하게 이젠 할머니들 차례라며 마이크를 넘긴다.

풍류에 일가견 있기로 소문난 배 할머니가 냉큼 마이크를 잡았다. 시장님 앞에서 노래를 못한 한을 풀 기회가 왔다. 배 할머니는 가사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했다.

“봉숭아꽃 꽃잎 따서 손톱 곱게 물들이던 내 어릴 적 열두 살 그 꿈은 어디 갔나. 내 어릴 적 13살 내 청춘은 어디 갔나. 내 나라 빼앗기고 이내 몸도 빼앗겼네. 타국만리 끌려가 밤낮없이 짓밟혔네. 오늘도 아리랑 눈물 쏟는 아리랑. 내 꿈을 돌려다오 내 청춘 돌려주오."

할머니의 아리랑은 구성지다 못해 구슬펐다. 이 노래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 ‘소녀 아리랑’이었다. 할머니가 노래를 불러준다기에 까르르 웃으며 신나하던 학생들은 어느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19살에 중국 만주로 끌려갔다는 배 할머니는 유독 ‘옛날 얘기’를 꺼렸다. 다른 할머니들은 매주 열리는 수요시위에서, 또 언론 인터뷰에서 끔찍한 그 시절에 대해 고발하고 일본 정부를 꾸짖는다. 그러나 배 할머니는 말수가 적은 것도 아니면서 옛일을 증언하기를 거부했다. 과거 참상을 또다시 떠올리고,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이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가 이런 일을 당했었다’며 속 시원히 말하는 대신, 늘 이렇게 노래를 하며 속을 풀곤 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도 노래뿐이다. 자식도, 손자 손녀도 없는 배 할머니는 명절에도 나눔의 집에 남아있을 예정이다.

“난 공부도 못 하고, 노래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 TV에서 나오는 노래 따라 부르다 보면 금세 시간이 가.”

 

 

 

▲ 학생들에게 과거 증언을 하는 강일출 할머니. ⓒ프레시안(최형락)

▲ 학생들에게 과거 증언을 하는 강일출 할머니. ⓒ프레시안(최형락)


“아흔 다 됐지만 엄마, 아빠 생각만 하면” 

 


“나도 어렸을 땐 독창도 잘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노래를 못해.”

강일출 할머니는 배 할머니를 옆에서 부러운 듯 쳐다봤다. “난 노래만 부르려고 하면 엄마, 아빠 생각이 나서 부를 수가 없거든. 목이 갈라지고 떨려서.”

열두 남매 중 막내딸이라 무척 여렸다던 강 할머니는 씩씩한 할머니가 됐다. 배 할머니가 나눔의 집 공식 가수라면, 강 할머니는 자타공인 공식 웅변가다.

“우리는 나라가 힘이 없어서 중국으로 끌려갔어. 중국에 부모님도, 친척도 없었어. 그런데 할 수 없이 끌려갔어. 그러다 2000년에 한국 정부에서 나를 찾아주고 생활을 다 책임진다고 해서 아들 둘 딸 하나 손자들을 데리고 한국 왔어. 나는 고향이 곶감 나고 대추 밤 많이 나는 경상북도 상주인데, 와서 보니 엄마 아빠도 죽고 오빠들도 다 죽었어. 그게 너무 슬프지만 가족들이 없어도 우리나라 정부가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야.”

학생들 세배를 받고 덕담 한마디 한다는 게 말이 조금 길어졌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빨려 들어갈 듯 강 할머니 얘기를 들었다. 

“중국에 살면서 내가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었는지 몰라. 나라를 지키려면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해야 돼. 그럼 우리들처럼 이렇게 강제로 끌려가지 않을 거야. 일본놈들이 말야. 아베 (총리)도 보면, 지금도 배상도 안 하고 고개를 쳐들고 다니잖아. 이런 걸 안 보려면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국 땅을 밟았지만, 강 할머니의 가족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중국에 함께 ‘공출’로 보내졌다가 나눔의 집에서 다시 만난 벗도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지난 2008년 돌아가신 고(故) 문필기 할머니 얘기다.

“길림성 장춘이라는 곳에 있는 위안소에 같이 있었어. 그 사람하고 나하고 거기서 ‘언제가 되면 우리가 고향에 가보갔나’ 이런 얘기를 했어. 그러다가 할매 돼서야 여기 왔는데, 그 사람은 죽었잖아. 가끔 생각나.”

 

 

▲설을 앞두고 나눔의 집에 배달된 선물 꾸러미들. ⓒ프레시안(최형락)

▲설을 앞두고 나눔의 집에 배달된 선물 꾸러미들. ⓒ프레시안(최형락)

 

 

 

"이제 몇 명 안 남았는데 저기선 헛소리만"


강 할머니는 지난 26일 돌아가신 고(故) 황금자 할머니 얘기도 꺼냈다.

“그 사람이랑은 수요집회 가서 많이 봤지. 이렇게들 다들 가. 정말 몇 명 안 남았어.”

강 할머니와 배 할머니 모두 ‘위안부’ 할머니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다고 했다.

“우리도 얼마 안 남았어. 이제 지쳤어. 몸도 예전 같지가 않아. 다들 빨리 죽어야지….”

할머니들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크고 작은 명절 선물들이 끊임 없이 배달됐다. “선물을 받으니 기분 좋으시겠다”고 했다. 배 할머니는 “고맙다”면서도 “죽을 때 다 되어서 선물 받아야 뭣해. 모아두기만 하지.”라고 말했다. 배 할머니는 선물들을 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방에 차곡차곡 쌓아뒀다.

할머니들이 받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아니, 받아야 할 게 있다. 바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이다.

“저기선(일본에선) 헛소리만 하고 있으니, 어찌 될는지….”

강 할머니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237명 가운데 이제 생존자는 단 55명. 이들은 앞으로 몇 번 더 있을지 모를 설을 맞이했다.

     

서어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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