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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교수의 『한반도 평화경제론』

한반도가 동북아의 여의주가 되려면<서평> 이찬우 교수의 『한반도 평화경제론』
정영철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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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23  09: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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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철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세계를 시야에 넣고,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는 책사(策士)되기’

1970년 11월 13일 청계시장 한 복판에서 한 청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기고 분신하였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이었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채로 독학으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 쓰러졌다. 그가 했다는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고 있었다면....’이라는 말은 배우지 못한 채 홀로 독학을 하며 어려운 법조문을 한 자 한 자 읽어가야 했던 자신을 책망하는 말이자, 세상의 지식인을 향한 의미심장한 경종의 외침이라 할 수 있다. 전태일의 분신에는 사회적 약자에게로 향하지 못했던 지식인도 절반쯤은 책임이 있지 않았을까?

시대를 거슬러 1910년 8월 29일, 비록 고종황제가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한 경술국치에는 어땠을까? 당시 열강의 한반도 침략이 하루가 다르게 이리저리 형세를 바꾸어가며 진행되던 시기, 세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를 둘러싼 각 국의 이해관계를 냉철하게 분석하여 대책을 세웠던 이가 있었을까?

고종도 아마 ‘나에게 세계를 독해할 수 있는 책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하는 회한을 품었을 법하다. 경술국치 역시 힘없는 국력의 결과이지만, 거기에 단단히 한몫 했던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지 않을까? 요즘에야 그러한 지식인의 분열을 ‘당쟁’이라 부르기도 하고,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친중파 등등으로 이름하지만, 국제적인 시야를 상실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민감했던 속 좁은 사익 추구란 측면에서 공통적이라 하겠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보면 고종이 느꼈을 것 같은 감정과 유사한 느낌을 받게 된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북한은 무엇을 꿈꾸고 있고, 우리를 둘러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는 어떤 생각으로 한반도에 발을 걸치고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아직까지 속시원한 해명과 분석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계속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일 것이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것이 끝나지 않는 지식인의 책무가 아닐까 한다.

물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야가 한반도에 갇혀있어서는 안되고, 더욱이 한반도 남단의 좁은 울타리에서 이편저편의 편협한 정치적 이익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특히 지식인은 툭하면 뱉어내는 외국어로 된 화려한 개념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정치적 이해관계의 틀에 가두어놓고 한반도를 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이러한 사고방식에 아주 익숙했다.

분단선에 갇힌 섬나라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대륙적 사고는 고사하고, 한반도 전체를 시야에 넣고 철학과 역사를 논하지 못해왔다. 세계사는 잘 알았지만 한반도 북단까지를 포함하는 우리의 역사와 철학 탐구, 전한반도적 사고, 전체로서의 관점은 부재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이나 일본의 눈을 통해 특히, 미국의 눈을 통해 한반도를 바라보고, 한반도의 미래를 설계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상상해왔다. 이래서는 고종이 갈망했을지도 모를 ‘세계를 시야에 넣고, 우리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던 책사되기’는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너무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사실에 가까운 ‘현실’이 아닌가 한다.

한반도가 중심이 돼 동북아 정세 흐름을 주도할 수 있을까?

한 권의 서평에 이렇게 긴 서두를 앞뒤 문맥도 없이 갖다 붙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책 속의 내용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설명하는 서평을 쓰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온 감상이기 때문이다.
 

   
▲ 『이찬우 교수의 한반도 평화경제론 -동북아의 심장을 누가 쥘 것인가』(역사인) 표지.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찬우 교수가 펴낸 『동북아의 심장을 누가 쥘 것인가』는 어려운 이론도 없고, 요란한 각주도 없이 마치 동북아시아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여기에 한반도의 이러 저러한 사회 현상을 뜯어보면서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용’, ‘여의주’, ‘등골’, ‘숨통’ 등의 용어를 통해 각 국가의 이해관계와 우리의 과제를 서술하고 있다. 책의 내용도 마지막 대담을 합쳐 대략 270페이지 내외 밖에 되지 않는다. 중간 중간 이해를 돕는 지도와 도표와 그림이 있어서 하루 몇 시간만 투자하면 끝을 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단순한 책에서 너무 거창한 감상과 무거운 주제를 뽑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소 내 스스로도 그렇지만, 우리의 지식인들이 세계를 논하면서도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이데올로기적 해석이나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북한을 포함한 우리의 문제를 너무 지나치게 북한의 ‘운명’(북한의 붕괴, 변화 등)으로 귀착시켜 사고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느끼는 문제점 때문에 더욱 위와 같은 감상을 무겁게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자인 이찬우 교수는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지금은 일본 테이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지난 25년 동안 멀리 몽골부터 중국 동북3성, 일본, 그리고 한국을 수 없이 오고갔다. 이러한 답사와 연구를 통해 이 교수가 주장하는 핵심은 지극히 단순하다.

오늘날 중국의 부상에서 볼 수 있듯이, 동북아시아 지역은 세계 경제의 핵심 발전지역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의 지역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앞으로 더 강화될 것이다. 여기에 일본은 미국 편으로 확실히 기울어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그런 미국을 견제하고 있고, 우리는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 편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중국과 북한은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고, 러시아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 흐름은 한반도에 그리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단지 강대국에 의한 남북한의 의존적 관계의 지속이자, 그 틀에 갇히는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우리가 이니셔티브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표현이라면, 여의주가 되기 위해서는, 나아가서는 숨통을 쥐기 위해서는) 남북의 평화 및 경제협력이 필수적이다. 남북의 협력은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넘어, 자주적 권리의 회복이자 동시에 지역협력의 올바른 추진이라는 것이다. 이게 한반도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 주장에 등장하는 키워드는 평화(peace), 발전(development), 자주(independence), 지역협력(regionalization)이다. 오늘날 동북아시아를 표현하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발전이라 할 것이다. 전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중동 지역과 더불어 가장 긴장도가 높은 지역이지만, 한편으로는 지역 협력체가 존재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그런데 발전의 결과 오늘날 중국은 세계를 미국과 더불어 지도하는 대국의 지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여전히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일본이 존재하고 있으며, 자원부국으로 새롭게 강한 러시아를 표방하는 러시아 극동이 자리하고 있고, 또 다른 자원부국이지만 아직은 힘에 부친 몽골이 있다. 또한 지리적인 범주를 벗어나 동북아시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미국이다. 여기에 동북아시아의 가장 뜨거운 감자라 할 한반도가 위치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이 동북아시아 지역에 한반도는 마치 용의 여의주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런데 한반도가 ‘용의 여의주’가 되기 위해서는 남북의 협력이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북아 각 국의 책략과 이해관계 분석

이 책의 제1부는 주로 현재의 동북아시아 각 국가의 이해관계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중국의 부상으로부터 시작하여, 러시아의 극동지역, 한반도와 몽골, 그리고 일본까지 여기에 앞으로의 중국의 책략과 미국의 책략을 덧붙이면서, 이 상황에서 남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결론은 남북한의 경제가 균형성장하는 것, 혹은 남북의 경제협력과 공동 번영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담보하고, 지역 협력도 올바르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길임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한반도가 역동적인 동북아시아에서 ‘여의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정치적 화해와 경제공동체 구축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 시절의 남북관계의 악화와 겨우 숨통만 붙어있는 개성공단의 현실은 이러한 동북아시아의 역동성에 정확히 역행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의 박근혜 정부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고 있는 이 구조는 미국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며, 이들의 궁극적인 혹은 최선의 시나리오인 한반도 분단의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것이다.

현재 이러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일본이다.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으로 완전히 경사된 일본의 오늘날은 결국 자주적이지도, 평화지향적이지도,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에 기여하지도 못하며, 퇴행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미래를 예고한다고 한다.

제1부가 주로 현재의 동북아시아 지형에 대한 분석이라면, 제2부는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2011년 합의된 중국과 북한의 공동 경제특구 개발 즉, 일구양도(一區兩島) 구상 등에서 볼 수 있는 중국과 북한의 경제전략에 대한 설명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해석인 북한의 중국 ‘동북4성’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주고 있다. 역시 북한이 의욕적으로 추구했던 신의주 특구개발의 좌절은 북-중간의 협력이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치열한 국가 이익이라는 냉철한 논리가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을 통해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크게 3가지의 관계 즉, 당 대 당의 관계, 국가 대 국가의 관계, 그리고 지정학적인 접경지역의 관계로 보아야하며, 이 중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당 대 당의 관계’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복합적인 관계를 종합적으로 보아야하며, 동시에 오늘날의 기본적인 관계를 봐야만 북-중간의 기본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제2부는 이처럼 북-중관계를 기본적으로 살펴보면서, 오늘날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 그리고 동북공정에 대한 시론적 생각 등을 담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마지막 대담을 통해서 오늘날 북한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경제 개선 조치와 현상에 대해 검토한 대목이다. 사실, 제2부에서의 서술은 우리가 바라보는 북-중관계에 대한 일면적 분석에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 중심 내용으로 다가온다. 보수가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예를 들면, 북-중의 당 대 당 관계), 아니면 보수가 쳐놓은 울타리에 스스로가 갇혀있거나(예를 들면, 북한 경제의 중국 의존론, 일명 중국 역할론 vs 중국견제론: 중국 역할론은 대체로 보수의 입장이며, 중국 견제론은 진보의 입장이다) 하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북한이 중국의 기업에 토지 사용 50년 임대권을 주었을 때, 이를 우리는 북한 경제의 중국 종속화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우리 기업이 중국으로부터 토지 50년 임대권을 얻는다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예를 통해 우리가 북한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북-중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지극히 남한 중심적이거나 북한에 대한 우월적 시각이거나 주관적 희망(흔히 말하는 wishful thinking)에 사로잡힌 시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지금도 우리는 북-중 관계를 한번도 대등한 관계로 인식한 적이 없다. 물론 이것은 국력의 대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대등함이다.

이 책은 대체로 2012-13년까지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북-중간의 경제협력에서도 마치 금방 진행될 것 같았던 나진-선봉(라선시), 황금평, 위화도에 대한 공동 개발과 관리가 아직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오히려 최근에는 북한과 러시아 간의 경제협력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중국을 제치고 러시아가 북한과의 협력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변화를 주도하는 형국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국제관계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는 당연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지금’의 상황까지는 담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이 주장하는 동북아의 기본 틀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중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과 일본, 여기에 한반도가 놓여있고, 이들이 만들어 가는 구조적 관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동북아 정세인식의 기본틀과 사고의 전환

우리는 한반도 특히 북한과 관련된 현상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극히 민감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러한 민감함은 대체로 주관적 희망이 투영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북한과 중국의 관계 소원–북한 경제의 어려움–북한의 고립화 심화–북한의 도발적 행동 혹은 양보’ 등과 같은 우리 자체의 시나리오를 그리거나 혹은 ‘북-중관계의 소원–북한의 위기–중국의 대북한 압박 강화(한중 관계 강화를 통해)-북한의 변화’ 등을 상정한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시나리오는 한반도 실현된 적도 없지만, 북한과 중국의 생각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오히려 우리의 외교적 고립이나 역량 약화만을 초래했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한미동맹 우선, 대북 강경책 등이 한중관계의 약화를 초래했고, 남북관계를 망가뜨렸으며, 결국 한반도에서의 우리의 발언권을 약화시켰던 것을 기억하면 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익숙한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 시야를 동북아시아로 넓혀 한반도를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시기적으로 ‘지금 이 시간’까지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구조와 관점에서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70여 년간 대륙과 해양을 넘나들며 한반도의 위치를 사고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서는 익숙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반도에 갇힌 사고이거나 아니면 미국의 시각(혹은 서구의 시각)으로 한반도를 바라봐 왔다. 이제는 이러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또한, 한반도만의 국가주의적(혹은 편협한 민족주의적) 사고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세계를 시야에 넣고, 동북아시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을 고민하는 지식인의 책무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며, 특별한 이론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동북아시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 문제를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저자 자신의 남북 화해와 협력, 평화와 지역공동체의 발전이라는 바람이 담겨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동북아시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를 그려보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그리고 남북의 화해를 바라는 일반 독자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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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공격에 궤멸된 미육군 극동공군과 미해군 2개 함대

 
 
한호석의 진보담론 <150>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5/02/23 [11:24]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사진 1> 필리핀 바탄반도에 고립되어 혹심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미국-필리핀연합군 76,000명은 1942년 4월 9일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미국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친 뒤로 마지막 지탱점인 커리지도어 지하기지에 남아서 승산 없는 전투를 지휘하던 미국-필리핀연합군 사령관 조너던 웨인롸이트도 1942년 5월 6일 휘하병력 13,000명과 함께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필리핀에 주둔하던 미군군은 '세계 최강'이 아니라 오합지졸이었다.     © 자주민보

 

 

오합지졸로 전락한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

 

미국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스런 역사 가운데는 1941년 12월부터 1942년 5월까지 필리핀과 하와이에서 일본과 격돌하며 겪었던 패전경험도 있다. <사진 1> 당시 일본군은 필리핀과 하와이를 선제공격하여 그 두 지역에 주둔하던 미국군을 거의 궤멸시켰다. 당시 일본은 선제공격으로 대승을 거두었으나, 군사전략적 한계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미국으로부터 반격을 받고 결국 패망하였다. 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지속된 태평양전쟁은 미국의 반격을 받은 일본이 3년 9개월 만에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격돌한 미국과 일본은 명실상부한 제국주의국가들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본만 제국주의국가였다고 생각하고, 당시 미국은 제국주의국가가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오다. 명백하게도, 태평양전쟁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영토확장을 위한 무력침공을 노리던 두 제국주의국가들이 충돌한 식민지쟁탈전이었다. 태평양전쟁의 배경과 원인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조선을 침공하여 갑오농민전쟁(1894년)과 항일의병전쟁(1895-1909)을 살육무력으로 진압하였고, 1910년에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하였으며, 조선을 발판으로 삼고 아시아대륙을 침략할 기회를 노렸다. 그에 뒤질세라 미국도 1898년 하와이왕국을 병합하였고, 필리핀-미국전쟁(1899-1902)이 막판에 들어선 1900년에는 서둘러 필리핀을 식민지로 강점한 뒤에, 필리핀을 발판으로 삼고 아시아대륙을 침략할 기회를 노렸다. 당시 미국이 식민지로 강점한 필리핀에 주둔하면서 중국침공을 노린 침략선견대의 역할을 수행한 무력이 바로 미해군 아시아함대(Asiatic Fleet)다.


1899년부터 1900년까지 기간에 ‘중국문호개방(Open Door in China)’이라는 미국판 아시아침략정책의 설계자는 제37대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 1838-1905)였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일본판 아시아침략정책의 설계자는 제34대 내각총리대신 고모에 후미마로(近衛文麿, 1891-1945)였다.   
1905년 7월 27일 일본 도쿄에 나타난 미국 전쟁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 1857-1930)와 일본 내각총리대신 가츠라 다로(桂 太郞, 1848-1913)가 합의한 밀약에서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강점하고,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하기로 이미 합의한 바 있었으나, 미국의 아시아침략정책과 일본의 아시아침략정책은 중국을 누가 강점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중국강점문제를 놓고 두 제국주의국가의 상호대립이 차츰 격화되는 가운데,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한 뒤 북진을 계속하여 1934년에 만주국을 세우고 1937년에는 중국을 침공하였다. 미국이 눈독을 드린 중국을 일본이 먼저 침공하자 미일관계는 적대적으로 돌변하였다. 미국은 강력한 경제제재와 외교고립의 고삐를 틀어쥐고 일본을 압박하였다.


일본의 숨통을 조이려는 미국의 압박공세는 석유수출중단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은 석유수요량의 80%를 미국에서 수입하였으니, 미국의 석유수출중단이 유발한 일본의 유류난은 일본의 산업가동률과 전쟁수행력을 급속히 저하시켰을 뿐 아니라, 차츰 일본의 국가적 생존마저 위협할 지경이었다. 그런 생사존망의 갈림길에서 일본의 선택은 동남아시아 유전지대를 강점하여 석유자원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동남아시아 유전지대를 강점한다고 해도, 미해군 아시아함대와 태평양함대가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오가는 해상수송로를 차단해버리는 경우 동남아시아에서 약탈한 석유를 수송할 방도가 없었다. 동남아시아 유전지대를 강점하려던 일본은 미해군 아시아함대와 태평양함대부터 무력화시켜야 하였다. 당시 일본은 필리핀에 주둔하는 미해군 아시아함대와 하와이에 주둔하는 미해군 태평양함대를 힘껏 밀어붙이면 그 두 함대가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로 퇴각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오가는 해상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한편, 북태평양의 해양패권까지 장악하게 되리라고 타산하고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그로써 태평양전쟁은 불가피해졌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겉으로는 압박공세로 일본에게 호령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일본과 막후협상을 벌여 전쟁을 피해보려고 하였다.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자국의 오래된 외교문서를 인용한 <아사히신붕> 2013년 3월 7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군이 필리핀과 하와이를 동시에 공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인 1941년 12월 7일(일본 현지 날짜) 정오에 일왕에게 보내는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미국 대통령의 친서가 도쿄중앙전신국으로 타전되었는데, 그 친서에는 전쟁을 피하자는 제안이 담겼다고 한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41년 당시 미국은 공군을 별도의 군종으로 창설하지 못했고, 육군 산하에 공군부대를 두었다. 미육군 극동공군(Far East Air Force) 산하에는 제5공군, 제7공군, 제13공군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제5공군과 제13공군은 필리핀에 전진배치되었고, 제7공군은 하와이에 배치되었다.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는 필리핀에 주둔하는 미육군 극동공군 주력부대였다. 1941년 12월 8일 오후 12시 40분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96식 육상공격기’ 27대로 편성된 폭격편대가 당시 일본의 점령 하에 있던 대만에서 이륙하였다. 그 폭격편대는 필리핀 루손섬(Luzon Island)에 있는 미육군 극동공군 클락비행장(Clark Airfield)을 기습폭격으로 파괴하였고, 거의 동시에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1식 육상공격기’ 54대로 편성된 폭격편대의 공습이 필리핀 아이바비행장(Iba Airfield)을 강타했다. 잠시 후,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1식 육상공격기’ 26대로 편성된 폭격편대가 2차 폭격으로 클락비행장을 또 다시 파괴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공습에 사용된 폭격기는 전범기업 미쯔비시(三菱)가 생산한 두 종류의 프로펠라형 단엽기였다. ‘96식 육상공격기’는 최고비행속도가 시속 375km이고, 항속거리는 4,400km이며, 폭탄 800kg을 실었다. ‘1식 육상공격기’는 최고비행속도가 시속 428km이고, 항속거리는 2,852km이며, 폭탄 800kg을 실었다.


1941년 12월 8일 오후 약 45분 동안 계속된 일본해군항공대 폭격편대의 두 차례 기습폭격을 받은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은 전투기와 폭격기 절반을 잃었고, 그 이후 이틀 동안 계속된 일본해군항공대의 추가폭격으로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기습폭격 개시일로부터 사흘째 되던 12월 11일 미육군 극동공군은 필리핀 방어를 포기하였고, 간신히 살아남은 프로펠라형 중폭격기 B-17 14대를 챙겨 오스트레일리아로 황급히 달아났다.


일본해군항공대가 클락비행장과 아이바비행장을 맹폭하던 시각, 일본육군 제14군 보병부대는 루손섬에서 북쪽으로 190km 떨어진 바탄섬(Batan Island)에 상륙하였다. 필리핀에서 벌어진 미일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선제공격을 받고 정신을 잃은 미국에게는 연속퇴각과 집단투항의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커리지도어(Corregidor)지하기지로 피신했던 당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1942년 3월 12일 자기 아내를 비롯한 측근 몇 사람을 어뢰정 4척에 태우고 탈출하여 필리핀 남쪽 민다나오(Mindanao)로 줄행랑을 쳤고, 거기서 폭격기 B-17로 갈아타고 4,000km나 떨어진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쳤다. 극동군 총사령관이 저 혼자 살겠다고 다른 나라로 멀리 도망쳐버렸으니, 그 휘하의 군대가 집단투항으로 궤멸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필리핀 바탄반도(Bataan Peninsula)에 고립되어 혹심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미국-필리핀연합군 76,000명은 1942년 4월 9일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맥아더가 도망친 뒤로 마지막 지탱점인 커리지도어 지하기지에 남아서 승산 없는 전투를 지휘하던 미국-필리핀연합군 사령관 조너던 웨인롸이트(Jonathan M. Wainwright)는 1942년 5월 6일 휘하 병력 13,000명과 함께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그 날 일본군에게 사로잡힌 웨인롸이트는 필리핀, 대만, 만주의 포로수용소들로 끌려다니다가 만주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8월 16일 소련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필리핀 주둔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이 궤멸되는 바람에 항공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필리핀 주둔 미해군 아시아함대의 운명도 처참하였다. 미해군 아시아함대는 개전 나흘 뒤인 1941년 12월 12일 인도네시아 자바(Java)로 황급히 퇴각하였는데,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한 일본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당시 미해군 아시아함대 소속 전투함선들 가운데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격침되거나 파손된 전투함선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미해군 최초의 항공모함  랭글리호(USS Langley),  중순양함 휴스턴호(USS Houston), 구축함들인 엣설호(USS Edsall), 포프호(USS Pope), 피어리호(USS Peary), 필스베리호(USS Pillsbury), 포함들인 애쉬빌호(USS Asheville)와 오하우호(USS Oahu), 군수보급함 페코스호(USS Pecos)가 격침되었다. 구축함들인 스투어트호(USS Stewart)와 패럿호(USS Parrott), 잠수함모함 캐노퍼스호(USS Canopus)는 대파되었다. 치욕스러운 참패를 당한 미해군 아시아함대는 1942년 2월에 결국 해산되었다. 

 

▲ <사진 2> 이 사진은 1941년 5월 8일 필리핀 주둔 미국군이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커리지도어 지하기지가 함락되어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필리핀에서 벌어진 5개월 동안의 미일전쟁에서 미국은 전사자 25,000명, 부상자 21,000명, 포로 100,000명을 내고 패퇴하였다.     © 자주민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벌어진 150일 동안의 격전에서 미국군 전사자는 25,000명, 부상자는 21,000명, 포로는 100,000명이었고, 일본군 전사자는 9,000명, 부상자는 13,200명, 실종자는 500명이었다. 150일 동안의 전투에서 미국군이 100,000명이나 포로로 붙잡힌 것은 그들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 오합지졸이었음을 말해준다. <사진 2>


미국군과 일본군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벌인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주목하는 것은,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의 무력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싸운 일본군보다 훨씬 더 우세했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대패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확인하는 것은, 현대전의 승패가 우세한 무력보다 선제공격 성공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 <사진 3> 1941년 12월 7일 미국 하와이 힉컴공군기지에 주기된 미육군 제7극동공군 소속 전투기들이 일본해군항공대 폭격편대의 선제공격을 받고 파괴된 모습이다. 하와이에 주둔하던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는 선제공격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 자주민보

 

 

선제공격에 궤멸된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0분 일본해군 항공모함 6척에서 일제히 이륙한 쌍발함상폭격기 189대가 미국 하와이를 동시다발기습공격으로 파괴하였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쌍발함상폭격기 161대의 2차 공습이 하와이를 또 다시 강타했다. 


태평양전쟁에 등장한 일본의 폭격기는 항공모함에 이착륙하는 함상폭격기와 육상비행장에 이착륙하는 육상공격기로 대별되는데, 그 종류는 12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빠른 폭격기는 최고속도 시속 660km로 비행하는, 태평양전쟁 후반부에 자폭공격에 내몰린 ‘영식 함상전투기’였고, 가장 먼 거리를 날아가는 폭격기는 항속거리 5,370km를 비행하는 ‘15식 폭격기’였고, 가장 많은 폭탄을 실은 폭격기는 폭탄 2,900kg을 적재한 ‘4식 폭격기’였다.


일본의 육상공격기는 중국침공에 동원되었고, 일본의 함상폭격기는 필리핀-하와이침공에 동원되었다. 일본이 필리핀-하와이침공에 동원한 함상폭격기에는 항공어뢰(areal torpedo)가 1발씩 실렸다.


일본산 ‘93식 항공어뢰’는 미국산 어뢰 ‘마크(Mark) 14’보다 성능이 훨씬 더 우세하였다. ‘마크 14’의 최장사거리는 7km밖에 되지 않았는데, ‘93식 항공어뢰’의 최장사거리는 36km나 되었고, 폭약도 ‘마크 14’보다 두 배나 더 많이 내장되었다. 함상폭격기가 타격목표 2km 전방에서 투하한 항공어뢰는 해수면 위 7m의 저고도까지 내려가 타격목표를 향해 돌진하였다. 


1941년 12월 7일에 2시간 20분 동안 계속된 일본해군항공대의 하와이 선제공습으로 진주항 해군기지(Pearl Harbor Naval Base), 캐너해군항공기지(Kaneohe Naval Air Station), 윌러공군기지(Wheeler Air Force Base), 이와공군기지(Ewa Air Force Base)가 파괴되었다. 당시 미육군 제7극동공군의 각종 전투기 402대 가운데 155대가 이륙하지도 못하고 공습을 받았다. 402대 가운데 188대는 지상에서 완파되거나 공중에서 격추되었고, 159대는 지상에서 반파되거나 공중에서 격상되었다. 그에 비해, 선제공습에 동원된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함재기 414대 가운데 29대가 격추되었는데 첫 번째 공습에서 9대, 두 번째 공습에서 20대를 잃었을 뿐이다. 지상포화를 맞고 격상된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함재기는 74대였다. <사진 3>


미육군 제7공군은 일본해군항공대의 선제공습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현대전의 승패가 무력우세보다 선제공격 성공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미국 하와이의 진주항 해군기지에 주둔하는 미해군 태평양함대에 대한 일본군의 선제공격은 기습폭격과 어뢰공격을 배합한 공중-수중동시공격이었다. 당시 일본해군 지휘부는 ‘어뢰특공대’의 어뢰공격으로 미해군 태평양함대를 타격하기로 결정하고, 작전명을 ‘하와이작전’으로 정했다.


그런데 진주항 해군기지의 수심이 너무 얕아 일본해군의 3,500t급 잠수함은 그 해군기지 안으로 수중침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해군 지휘부는 46t급으로 특수제작한 초소형 2인승 침투잠수정을 3,500t급 잠수함에 싣고 하와이 인근해역으로 가서 내려놓으면, 초소형 잠수정이 진주항 해군기지 안으로 수중침투하여 전함들을 어뢰로 파괴하는 어뢰특공전법을 생각해냈다. ‘하와이작전’에 동원된 일본해군 잠수함대는 2인승 침투잠수정을 각각 1척씩 실은 3,500t급 잠수함 5척으로 편성되었다.

 

▲ <사진 4> 이 사진은 진주항 해군기지 앞바다 수심 365m 해저에서 2002년에 발견된 일본해군 잠수정 잔해를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에 나타난 2인승 침투잠수정 잔해는 1941년 12월 7일 진주항해군기지를 기습하기 위해 진주항 앞바다에 들어가 수중매복하고 있었던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침투잠수정 5척 가운데 하나다. 이 침투잠수정은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함상폭격기들이 진주항해군기지를 공습하기 직전 진주항 앞바다를 순찰하던 미해군 태평양함대 소속 소해정에게 해수면 위로 내놓은 전망탑 상층부가 포착되는 바람에 매복위치가 노출되어 미해군 구축함 워드호의 폭뢰공격으로 격침되었다.     © 자주민보


1941년 11월 19일 새벽 2시 15분 ‘어뢰특공대’를 실은 일본해군 잠수함 5척이 일본 히로시마(廣島)현 쿠레(吳市)항에서 비밀리에 출항하여 하와이로 향했다. 12월 7일 진주항 해군기지에서 약 10~20km 떨어진 바다밑으로 접근한 그 잠수함들에서 침투잠수정 5척이 일제히 분리배출되었다. 그 침투잠수정들에는 어뢰가 2발씩 실렸다. <사진 4>


태평양전쟁에 등장한 일본의 ‘95식 어뢰’는 사거리가 12km이고, 무게 405kg의 고폭탄두를 장착하였고, 최저속도 시속 83km, 최고속도 시속 94km로 타격목표를 향해 돌진하였는데, 그런 어뢰를 척당 2발씩 탑재한 잠수정 5척은 공중-수중동시공격시각을 대기하며 수중매복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어뢰공격이 개시되었을 때, 작전능력이 뒤떨어진 침투잠수정들은 공격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일본해군 ‘어뢰특공대’ 소속 침투잠수정 5척 가운데 4척은 격침되었고, 1척은 좌초되는 바람에 미해군에게 나포되었다. 5척 침투잠수정 가운데 단 1척만 어뢰 2발을 쏘고 격침되었는데, 1발은 31,000t급 전함 애리조나호(USS Arizona)에 명중하였고, 다른 1발은 33,000t급 전함 웨스트버지니아호(USS West Virginia)에 명중하였다. 
어뢰 1발과 폭탄 4발을 맞은 애리조나호는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였고, 어뢰 1발, 폭탄 2발, 항공어뢰 6발을 맞은 웨스트버지니아호도 침몰하였다.  

 

▲ <사진 5>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항 해군기지에 정박해 있던 미해군 태평양함대 소속 31,000t급 전함 애리조나호는 일본해군항공대 폭격편대가 투하한 폭탄 4발과 일본해군 침투잠수정이 발사한 어뢰 1발을 맞고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였다. 그날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은 하와이 주둔 미국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 자주민보


그것만이 아니었다. 33,000t급 전함 테네씨호(USS Tennessee)가 파손되었고, 32,000t급 전함 캘리포니아호(USS California)가 침몰하였고, 32,000t급 전함 매릴랜드호(USS Maryland)와 31,000t급 전함 펜실배니아호(USS Pennsylvania)가 각각 파손되었고, 27,000t급 전함 오클라호마호(USS Oklahoma)는 전복되었고, 27,000t급 전함 네바다호(USS Nevada)와 23,000t급 퇴역전함 유타호(USS Utah)는 각각 좌초되었다. 경순양함들인 헬레나호(USS Helena)와 랠레이호(USS Raleigh), 구축함들인 쇼우호(USS Shaw)와 캐씬호(USS Cassin)가 각각 파손되었고, 구축함 다운스호(USS Downes)는 곁에 있던 피격 구축함들에서 불이 옮겨 붙었다. 기뢰부설함 오글라라호(USS Oglala)는 좌초되었고, 정비함 비스틀호(USS Vestal)는 불탔고, 항공지원함 커티쓰호(USS Curtiss)는 파손되었다. 그 전투에서 미국은 사망자가 2,403명, 부상자가 1,178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사진 5>


미국군과 일본군이 하와이에서 벌인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주목하는 것은,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의 무력이 하와이를 공격한 일본군보다 훨씬 더 우세했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대패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확인하는 것은, 현대전의 승패가 우세한 무력보다 선제공격 성공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 <사진 6> 1942년 9월 15일 미해군 19,000t급 최신형 항공모함 와스프호가 일본해군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 6발을 맞고 화염에 휩싸여 침몰하고 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항공모함도 잠수함 어뢰공격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 자주민보

 

 

전반부에 대승을 거둔 일본은 후반부에 왜 항복하였을까?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필리핀과 하와이를 강타한 일본군의 동시선제공격은 ‘세계 최강’이라던 미국군에게 치욕스러운 참패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후반부에 가서 일본군은 미국군의 거센 반격을 받고 패배를 거듭하다가 결국 항복의 백기를 들었다.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대승을 거두었던 일본군은 왜 후반부에 전세가 역전당하여 항복하였을까? 일본군의 패인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군의 패인은 전략적 실수에 있었다.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일본군은 필리핀에 주둔한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 하와이에 주둔한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를 거의 궤멸시켰으나, 미해군 함대의 주력을 제거하지 않고 철수해버린 실수를 저질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미해군 함대의 주력은 항공모함이다. 미해군 항공모함을 격침시켜야 태평양전쟁에서 완승할 수 있었으므로 일본의 대미공격은 무엇보다도 항모공격에 집중되었어야 하였다. 1941년 12월 당시 하와이에 배치된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모함들은 25,000t급 엔터프라이즈호(USS Enterprise), 36,000t급들인 렉싱턴호(USS Lexington)와 쌔라토가호(USS Saratoga) 3척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하기 이틀 전에 항공모함 렉싱턴호는 그 해군기지에서 출항하여 서쪽으로 항해하였는데, 일본군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할 때, 그 항공모함은 하와이에서 2,100km 떨어진 미드웨이섬(Midway Island)에서 동남쪽으로 930km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 일본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할 때, 항공모함 쌔라토가호는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의 최남단 쌘디에고(San Diego) 해군기지에 입항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할 때, 하와이 인근에 남아있었던 항공모함은 엔터프라이즈호밖에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일본해군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추적하여 공격해야 하였으나, 그들은 항모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일본해군이 항모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한 것은,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패하였던 미해군이 전투력을 차츰 복원하여 반격에 나설 수 있게 허용한 전략적 실수였다. <사진 6>


둘째, 일본군의 패인은 미국군이 하와이에 건설한 대형조선소, 선박수리시설, 유류저장시설을 파괴하지 않고 철수한 것에 있었다. 당시 ‘하와이작전’에 참가한 일본해군항공대 지휘관들은 3차 공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기했는데도, 일본해군제독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1887-1944)는 3차 공습을 명령하지 않았다. 그들이 대형조선소, 선박수리시설, 유류저장시설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미해군이 나중에 하와이를 거점으로 전투력을 차츰 복원하여 반격에 나설 수 있게 허용한 전략적인 실수였다.


셋째, 일본군의 패인은 미국 본토를 공격할 능력이 없었다는 데 있다. 필리핀과 하와이는 미육군 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 및 태평양함대의 전략거점들이지만, 미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전진배치거점들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완승하려면, 전진배치거점들은 물론 미국 본토까지 공격해야 하였다. 만일 당시에 일본군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장거리타격력을 갖고 있었다면, 전세는 일본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에게는 미국 본토를 공격할 타격수단이 전혀 없었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사용한 가장 위력적인 타격수단은 폭탄과 어뢰였고, 그것의 운반수단은 항속거리가 짧아 미국 본토의 심장부까지 날아가지 못하는 쌍발폭격기였다. 당시 일본해군의 잠수함은 미국 본토 해안까지 접근할 수는 있었으나, 수중에서 어뢰를 발사하는 대함공격력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폭탄과 어뢰는 미국 본토의 심장부를 공격할 타격수단이 아니었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력을 갖지 못한 일본군의 군사전략적 한계가 미국의 반격과 일본의 패망을 불러온 결정적 요인으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이 보유한 최강의 무기는 노래다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미국의 팔과 다리만 공격하고 급소는 공격하지 못한 채 미국의 반격을 받고 패망하였다. 태평양전쟁이 그런 식으로 끝난 때로부터 어느덧 70년 세월이 흐른 오늘, 미국은 자기의 명줄을 쥐고 흔드는 새로운 강적을 만났다. 그 강적은 미국에게 이미 최후결전을 선포해놓고 총공격명령을 기다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조선이 미국에게 선포한 최후결전은 70여 년 전 일본군의 원시적인 폭탄-어뢰공격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최첨단 공중-수중동시공격으로 전개될 것이다. 조선인민군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은 조선이 선포한 최후결전에서 최첨단 공중-수중동시공격이 전개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을 과대망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선인민군은 미국군에게 참패를 안겨주기에 충분한 선제공격력을 갖추었다. 조선이 말하는 선제공격력이란 전술핵탄과 정밀타격수단의 결합을 뜻한다. <로동신문> 2013년 5월 21일 보도에서 밝혀진 것처럼, 조선은 핵탄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정밀화를 완성하였다. 공격징후를 노출하지 않는 조선의 지하발사기지들 안에서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정밀화된 전술핵탄이 정밀타격수단과 결합되어 24시간 격발대기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전술핵탄미사일들에는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을 뚫고 들어가는 각개조준다핵탄두(Multiple Independently Targetable Nuclear Warheads)가 장착되었다.


조선이 공격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군사전략거점들을 동시기습하기에 충분한 선제공격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지난 2월 16일 <자주민보>에 실린 나의 글 ‘조선의 대미핵공격력과 미국의 대북전쟁기획자들’에서 상세히 논한 바 있다.
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9384


물론 미국도 조선을 선제공격하기 위한 전쟁계획을 작성해놓고, 그 전쟁계획에 의거하여 다양한 실전연습을 실시해왔다. 하지만 미국이 언제가도 해결하지 못할 난제는 그들이 조선을 선제공격하기 전에 조선이 그들의 공격징후를 먼저 포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하군사기지들 안에서 최후결전의 총공격명령을 대기하는 조선인민군은 공격징후를 노출하지 않은 동시다발 초탄발사로 교전상대의 급소를 기습타격할 빨찌산식 핵전법을 연습하는데, 그런 그들을 상대할 미국군은 항모타격단(CSG) 같은 방대한 무력을 시차별로 동원하는 정규군식 핵전법밖에 모른다. 정규군식 핵전법은 공격징후를 노출할 수밖에 없으며, 현대전에서 공격징후노출은 선제공격을 자초하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된다.

   
둘째, 조선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군사전략거점들을 파괴할 선제공격력만 보유한 게 아니라, 조선의 대미선제공격에 뒤따라올 미국의 보복핵공격을 억제하기에 충분한 전략핵무력도 보유하였다. 미국의 심장부를 파괴할 대미핵공격력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밖에도 더 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3종의 탄도미사일과 3종의 발사장비가 바로 그러한 전략핵무력의 실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은 수직갱발사대에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로이동식 8축16륜 자행발사대(TEL)에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 4,000t급 공격잠수함에 탑재한 수중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비롯한 충분한 핵억지력을 보유한 것이다.


조선이 위와 같은 전략핵무력을 보유함으로써 대미핵공격력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대해 미국은 자기들이 파악한 비밀정보를 통해 진작부터 알았으면서도, 그와 관련된 민감한 군사정보를 외부에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대북군사정보은폐는 조선의 핵무력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소평가를 유발하였다.


그런데 아시아태평양지역 군사전략거점들에 대한 조선의 선제공격을 받은 미국이 만일 상황을 오판하여 조선에게 보복핵공격을 감행하는 경우, 조선은 위에 열거한 강력한 전략핵탄들을 발사하여 미국 본토를 그야말로 ‘불바다’로 만들 것으로 보인다. 이미 조선은 자기 영토에 불꽃 한 점이라도 떨어지면 미국 본토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한 바 있는데, 그것을 허풍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선의 핵무력과 핵사용의지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소평가가 유발한 착각이다.


조선이 미국의 보복핵공격을 억제하기에 충분한 핵공격력을 갖추었으므로,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산재한 자기의 군사전략거점들이 조선인민군의 빨찌산식 핵전법으로 파괴되어도 발만 동동 구를 뿐 감히 반격에 나서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것이 조선의 최후결전이 초단기속결전으로 될 것이라는 나의 거듭되는 주장의 논거다.  


셋째, 이전에 각종 자료를 분석하여 쓴 나의 글들에서 여러 차례 지적한 것처럼, 지금 조선은 전쟁의 격렬화, 장기화를 피하고 매우 짧은 시간에 ‘순간충격전법’으로 전쟁을 끝내면서 전쟁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해 초단기속결전의 준비와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다. 조선에서는 이것을 ‘싸움준비 완성’이라 하는데, 조선인민군은 이미 자기의 싸움준비를 완성하였다. 지난해부터 그들은 “싸움준비를 더욱 완성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 <사진 7> 조선인민군의 특징은 '노래하는 군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조국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들의 정신세계가 '최후결전의 노래' 속에 응축되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인민군의 '최후결전'에 등장할 최강의 무기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될 것이다. 이 사진은 2014년 3월 11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관람하는 가운데 진행된 조선인민군 제1차 예술선전대경연의 한 장면이다.     © 자주민보


넷째, 조선인민군의 특징은 ‘노래하는 군대’라고 할 수 있다. <사진 7> 물론 다른 나라 군대들도 군가나 유행가를 부르지만, 다른 나라들에서 군대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일상적인 군사복무생활이 아니라 특별한 계기에만 주어진다. 그런데 조선에서 나온 관련자료들을 보면, 조선인민군 각급 단위들에서는 군인예술선전대의 순회노래공연과 병사들의 화면반주음악 노래부르기가 일상화되었을 뿐 아니라, 군인들, 군인가족들, 후방가족들이 일상생활에서 ‘일심단결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불타는 포연 속에서도 ‘화선공연’을 열고 ‘승리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심지어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순간에도 ‘신념의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에서 노래는 음악애호활동의 일부가 아니라 전군, 전민의 사상정신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되었다.


다른 나라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조선은 그들이 말하는 최후결전에서 자기들이 부를 노래가 핵탄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정신적 폭발력을 분출시킬 것으로 믿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조국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들의 정신세계가 ‘최후결전의 노래’ 속에 응축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무기의 대결 이전에 사상정신의 대결이라고 보는 것이 조선에서 말하는 독특한 전쟁관이며, 사상정신의 대결에서 이겨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조선에서 말하는 전승의 비결이다. 조선인민군의 ‘최후결전’에 등장할 최강의 무기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세계 최강’의 자아도취에 빠진 미국의 극동공군, 아시아함대, 태평양함대는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연속퇴각과 집단투항으로 궤멸되었지만, 오늘날 아시아태평양지역 곳곳에 배치된 미국군이 조선인민군의 상상을 초월한 선제공격을 받는 경우 연속퇴각과 집단투항이 아니라 무조건 항복으로 내몰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미국은 선제공격에 궤멸된 치욕스런 과거경험을 망각하고 오늘도 여전히 ‘세계 최강’의 자아도취에 빠져있다. 그런 까닭에 미국은 자기들이 북침전쟁연습을 강행하면 조선의 최후결전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후결전을 선포한 조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세계 위에 군림하는 아메리카제국은 그런 착각 위에 세워진 거대한 모래집으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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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이곳 학교는 완전 달랐다

산만한 학생에게 "약 먹이세요"
서울과 이곳 학교는 완전 달랐다

[창간 15주년 기획 - 행복한 학교③]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

15.02.22 21:31l최종 업데이트 15.02.23 08:12l

 

 

<오마이뉴스>는 올해 창간 1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2000년 2월 22일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창간한 뒤, 보수일변도의 언론지형에서 '열린 진보'의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습니다. 여기 <오마이뉴스>와 나이가 같은 닮은꼴이 있습니다. 바로 혁신학교입니다. 2000년 남한산초등학교에서 시작된 학교 개혁 운동은 2009년 혁신학교이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된 뒤, 전국으로 확산됐습니다. 혁신학교는 무너진 공교육을 되살리는 행복한 학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을 행복한 학교에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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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열린 제68회 졸업식장에 졸업생이 선생님에게 쓴 감사의 편지가 걸려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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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열린 제68회 졸업식장에 졸업생이 쓴 감사의 편지가 걸려있다. 글을 쓴 학생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 학생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주신 선생님에게 감사하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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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도 많이 치고 장난도 많이 치고 양심도 없었지만,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난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 졸업식장. 이곳에 졸업생 52명의 편지가 내걸렸다. 그 중에서 김정민(13, 가명)군이 쓴 편지가 눈에 띄었다. 정민군의 어머니 최미진(42)씨는 "이 편지에 저도 감동을 받았다"라면서 "아이가 조현초에서 보낸 시간은 인생의 큰 디딤돌이자 큰 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민군은 2학년 때인 2010년 서울에서 이곳으로 왔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 정민군의 서울 학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수업시간에 앉아 있지 못하고 산만한 행동을 보이자, 교사들은 정민군에게 고함을 치거나 무시로 일관했다. 최미진씨는 "학교에서 매일 전화가 왔다"라면서 "선생님은 부모 책임이라며, 아이에게 약을 먹이라고 했다"라고 말했다. 

반면, 조현초 교사들은 정민군에게 약을 끊으라고 했다. 정민군은 "제가 산만한 행동을 하면, 선생님들은 수업을 멈추고 저에게 신경을 써주셨다"라고 말했다. 교사들은 주말에도 정민군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최미진씨는 "선생님들이 제 수고의 절반을 짊어졌다"라면서 "결국 아이는 약을 끊었고 자기 조절이 가능할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라고 전했다. 

담임인 김성환 교사는 "약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정민이는 더 많은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어 과잉행동을 한 것이다,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줬더니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최미진씨는 "다른 아이들도 서울에서는 아팠는데, 이곳에서 좋아졌다"라면서 "조현초야말로 진정한 혁신학교"라고 강조했다.

졸업생 입에서 나온 말, 행복·존중·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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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열린 제68회 졸업식에서 졸업하는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다가와 포옹하자, 선생님이 제자를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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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열린 제68회 졸업식에서 졸업하는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다가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포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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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열린 제68회 졸업식에서 선생님들이 졸업생 52명 학생을 일일이 안아주며 진학을 축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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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5학년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과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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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초 졸업식의 주인공은 졸업생이다. 졸업식장에는 졸업생들의 편지가 내걸렸다. 모든 졸업생들은 한 명씩 단상에 올라 졸업장과 상장을 받았다. 이때 담임교사는 졸업생의 학교생활과 꿈을 일일이 소개했다. 이후 모든 졸업생들은 마이크를 잡고 교사, 학부모,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송채린양은 "이 세상에 조현초보다 행복하고 참된 사람의 자세를 배울 수 있는 학교는 없다, 조현초 선생님은 제 인생 최고의 선생님이었다"라며 "이곳에서 느낀 행복은 제가 힘들 때 딛고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됐다"라고 흐느꼈다. 정유진양은 "선생님은 감사, 존중 등 여러 가지를 알려주셨고,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셨다"라고 전했다. 

졸업식에 참석한 김주식 양평군학교운영위원회 연합회장은 "모든 학생들이 꿈을 가지고 있는 모습에 상당히 놀랐다, 큰 희망을 느꼈다"라면서 "'누가 누가 잘하나'보다 모든 학생들이 함께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교육철학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배려를 배운 것 같다"라고 말했다. 

졸업식이 끝나자, 졸업생들은 차례로 단상 밑으로 내려왔다. 교사들이 한 줄로 서서 졸업생을 맞았다. 졸업생들은 교사들을 와락 껴안았다. 졸업생과 교사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봄방학을 맞는 다른 학년 교실도 '눈물바다'였다. 5학년 3반 교실 앞에서는 학생들이 담임인 최탁 교사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 최 교사의 손을 꼭 잡고 계단을 걸어내려온 김지은(12)양은 "6학년 올라가면 자주 못 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라고 말했다.  

학생수 3배 이상 늘어난 시골학교...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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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오마이뉴스> 기자를 향해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조현초등학교는 학생들이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고 더불어 나누는 삶의 자세,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가르치는 것을 교육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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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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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졸업식을 마친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 담임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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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졸업식을 마친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 그동안 함께했던 친구들과 헤어지기 아쉬워하며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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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에는 새로운 교육을 찾는 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곳에는 세월·수입·정배초등학교 등 많은 혁신학교가 있다. 양평에는 폐교 위기의 작은 시골 학교를 살려보자는 교사들의 노력이 있었고, 현재는 혁신교육의 중심지가 됐다. 그중에서도 조현초는 가장 주목받는 학교다. 

2007년 98명이었던 이 학교의 학생수는 지난해 345명으로 늘었다. 최근 매년 20~60명의 전학생이 오고 있다. 시골 학교 학생수가 단기간에 3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교실이 부족해지자, 최영식 교장은 냉난방이 안 되는 간이 건물로 교장실을 옮겼다. 이 학교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7년 3월 이 학교에 부임한 박성만 교사는 충격을 받았다. 박 교사는 "이곳에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월말고사가 있었다, 또한 중학교 반 배치고사에서 이 학교 졸업생들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도록 교사들은 오후 9시까지 학생들을 공부시켰다, 학생들은 겨울방학 때도 나와 문제집을 풀었다"라고 말했다. 

2007년 9월 평교사 출신의 이중현 교장이 교장공모제를 통해 이 학교에 부임한 뒤, 변화가 시작됐다. 이 교장은 교사들에게 조현초를 농촌지역의 공교육 모델로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교사들과 머리를 맞댔다. 

이중현 교장과 교사들은 밤늦도록 회의를 이어가기 일쑤였다. 2008년 이중현 당시 교장의 요청에 평교사로 이 학교에 첫발을 내디딘 최영식 교장은 "'시골 학생들은 기가 많이 죽어있으니, 이 지역에 어울리고 아이들의 삶과 연결되는 교육과정을 만들어 배움의 열의를 불러일으켜보자'고 결정했고, 교육과정을 재구성했다"라고 전했다. 

양평에는 도시와 달리 사교육이나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 교사들은 수업 과정을 이들 학생들에게 맞추는 디딤돌 학습 등 아홉 가지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이후 기초 학력 미달 학생이 크게 줄었다. 최 교장은 "모든 학생들에게 잠재적인 재능을 발현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생태학습 등을 진행했더니, 학교에 활력이 돌았다"라고 밝혔다.

학생들의 자치 활동을 뜻하는 어울마당은 학교가 자랑하는 교육과정이다. 박성만 교사는 "학생들은 지난해 학급·학년·학교 어울마당에서 '수업시간에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말자'고 정했고, 그 후 이를 어기는 학생은 없었다"라면서 "교사가 개입하거나 통제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스스로 결정할 때 효과가 크다"라고 설명했다.

학교, 마을교육공동체의 중심에 서다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은 2009년 보궐선거에서 남한산초·조현초 등을 모델로 한 혁신학교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다. 그해 처음으로 지정된 혁신학교에 조현초가 포함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학부모가 학교 문을 두드렸다. 현재 학생의 다수는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다. 이는 적잖은 문제를 야기했다. 원주민과 이주민이 잘 어울리지 못한 것이다. 

박성만 교사는 "이주민이 늘자, 마을의 구심점이었던 학교가 마을과 따로 떨어진 섬이 됐다"라고 지적했다. 교사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마을공동체를 복원하기로 했다. 먼저 학생들이 벼농사, 양평시장 체험, 마을탐사 수업, 마을 어르신 인터뷰 등을 통해 마을과 더욱 가까워지도록 했다. 

교사들은 학부모들의 융합에 큰 신경을 썼다. 학부모 체육대회를 열었다. 이주민들의 시골 생활을 돕는 강좌를 열었다. 또한 이주민들은 학교가 임대한 논에 농사를 지었고, 이는 원주민들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들은 또한 자신의 재능을 살려, 학교가 파한 뒤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두레교육'에 나섰다. 조현초는 어느새 마을교육공동체의 중심에 섰다. 학부모들은 협동조합을 꾸려, 방과 후 수업 강사로 나설 예정이다.

조현초 구성원들에게 고민이 있다. 조현초에 자녀를 보내려는 이주민이 늘면서, 이곳 집값·전셋값이 치솟은 것이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원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밀려났다. 또한 학교 주변에 전원주택이 지어지면서, 숲이 파헤쳐졌다. 최탁 교사는 "다른 지역에도 혁신학교가 자리를 잡아, 이곳에 오지 않고도 혁신학교의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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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초등학교 주변에 신축한 단독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교사와 학부모, 주민들은 학교가 대외적으로 알려지자, 학교 주변에 이주민과 전원주택이 늘면서 집값이 치솟는 점을 걱정했다. 주택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원주민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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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창간 15주년 기획 : 행복한 학교]

[①-1 남한산초] "대학 안 가고 하고 싶은 일 하니 행복해요"
[①-2 남한산초] 무허가 사설 강습소, 혁신학교의 시작이었다 
[② 선사고] 졸업식장에 조폭이...학교가 '완전'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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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정권의 ‘실상’을 보고 대화하라


<칼럼>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 원장
전현준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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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23  08: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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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준(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 원장)


2015년 2월 현재 한반도 통일기상도는 매우 흐림이다. 이미 예견된 것이기는 하지만 마음이 우울하다. 그 이유는 우울한 전망이 틀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자연의 날씨는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인간의 날씨는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것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등장 이전부터 수많은 ‘맑은 날씨’를 예보하였다. 박근혜 후보와 정부를 지지한 사람이나 반대한 사람이나 모두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점점 절망으로 변하고 있다. ‘맑은 날씨’는 고사하고 먹구름이 일어나며 뇌성이 울리고 있다. 곧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질 기세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벼락’이다. ‘인간의 벼락’은 인간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인간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의 여하에 따라 벼락이 치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여기에서 왜 ‘인간벼락’이 박근혜 정부만의 책임이냐라는 반문이 일어날 수 있다. 옳다. 모든 것이 박근혜 정부만의 책임은 아니다.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등도 일면 책임이 있다. 북한핵 문제가 정말 사활적인 문제라면 관련 정상들이 모든 것을 작파하고 북한핵에 매달려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관련국들이 북핵 문제가 다급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핵문제를 이유로 북한과의 모든 대화를 끊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여기에서는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쥐어야 할 박근혜 정부가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판단 하에 김정은 정권의 실상을 규명해 보고 왜 박근혜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해보려 한다.

첫째, 박근혜 정부는 북한에 대해 ‘갑’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늘 남북관계의 비정상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북한을 혼내주고”, “남과 북의 갑을관계를 바로 잡았다”라고 자랑했다. 박 대통령도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논리가 그 증거이다. ‘끌려다니지 않았다’면 ‘끌고 다녀야’하지 않을까? 이제 이명박 전 대통령 말대로 ‘갑’이 되었으면 ‘갑’답게 ‘을’을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슬슬 피하면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갑다운’ 행동은 아니다.

그렇다고 ‘을’을 윽박지르는 것만이 ‘갑다운’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제사회로부터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처럼 비난받기 십상이다. 정상적인 ‘갑을 간’ 거래를 하라는 의미이다. 모든 협상은 ‘주고받기’라는 것은 상식이다. ‘밀고당기는’ 협상을 함에 있어서 ‘주는 것’을 패배로 여기고 끌려 다녔다고 인식하는 것은 협상의 기본을 모르는 것이다. 어차피 남북 문제도 협상에 의해 해결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준 만큼 받으면 될 일이다.

둘째, 김정은 정권의 변화 때문이다. 북한의 변화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그러나 적어도 김정은 등장 이후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김정일과는 다르게 개방적이고 주민들의 생활양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수령독재는 지속되고 있지만 최소한 ‘절차적 독재’를 수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군을 약화시키고 노동당에 의한 통치를 강화하고 있다. 이것은 김정일 때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지난 18일에도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김정은 등장 이후 세 번째로 열렸다. 김정은은 이 자리에서 정치사상 공세 강화, 유일적 영도체계 옹호고수, 세도.관료주의 및 부정부패행위 타파 등 3대 과제를 내세웠다. 부정부패 문제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강조한 것은 그만큼 관료부패가 심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시인할 것은 시인하자는 입장이다. 김정은도 관료부패를 청산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을 것임을 안 것이다. 김정은은 장성택을 ‘종파와 부패수괴’로 몰아 처형하여 주민들의 환심을 샀으나 아직도 부패가 만연해 있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이란 것을 간파한 것이다.

북한은 지난 1월 미국과의 싱가포르 접촉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해 (훈련은 인정하되) 훈련 강도를 약화시킬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의 ‘교시’없이 일개 대표가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정은 나름대로 큰 변화를 한 것이다. 북한은 자신이 남한에 비해 못산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김정은은 남한처럼 잘살기 위해 ‘포전제’를 개선하고 “잘살아 보세!”를 외치고 있다. 김정은은 이미 19개의 지방급 경제개발구를 만들고 외부투자를 원하고 있다.

한편으로 김정은 등장 이후 북한 주민들의 생활도 놀랍게 달라지고 있다.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고 부동산 중개업을 필두로 전당포, 계주 등 자본주의식 다양한 직업이 생기고 있다. 주민들의 의식은 이미 자본주의 초입에 들어서 있다. 박근혜 정부가 정말 북한을 변화시킬 생각이 있다면 이러한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김정은 정권은 점점 안정화되어 가고 있고 장기집권기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도 장기적인 포석과 전략하에 김정은 정권을 상대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일은 반드시 보수성향의 박근혜 정부가 해야 하고 시간은 금년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는 일부 탈북자가 전하는 북한의 허상이 아닌 실상을 보고 정책을 펴야 한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 원장) 
 
   
 
1953년생으로서 전남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북한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통일연구원에서 22년간 재직한 북한전문가이다. 
2006년 북한연구학회장 재직 시 북한연구의 총결산서인 ‘북한학총서’ 10권을 발간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 동안 통일부 자문위원, NSC자문위원, 민주평통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민화협, 경실련 등 시민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현재는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김정일 리더쉽 연구」, 「김정일 정권의 통치엘리트」, 「북한 체제의 내구력 평가」, 『북한이해의 길잡이』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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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공무원 47명이 말하는 ‘국정운영’

등록 : 2015.02.22 21:37수정 : 2015.02.2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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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월 1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새해 기자회견에서 “장관들과 독대 또는 대면보고 자리를 늘릴 의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배석한 국무위원들을 돌아보고 있다. 뒤쪽으로 김기춘 비서실장이 앉아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고위공무원 47명이 말하는 ‘국정운영’
“청와대 가면 부처 인사·정책 뒤집혀…이유는 몰라”
“지시만 있고 토론 없어, 뭐든지 ‘그분’ 말씀 따라야”

[박근혜 정부 2년 진단] ① 국정운영

 

 

 

 

<한겨레>는 박근혜 정부 출범 2년을 앞두고 정부 주요 부처 공무원 47명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평가해달라는 질문을 던졌다. 공직사회가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국정운영 방식에 가장 민감한 집단이라는 점을 고려해 이를 통해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을 평가해보자는 이유에서다. 대상은 주로 국장급 고위공무원이었지만 일부 과장급 공무원과 사정기관 간부들도 포함됐다.

 

편집자

 

 

 

<한겨레>가 박근혜 정부 출범 2년을 계기로 정부 주요 부처 고위 공무원 47명에게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평가하는 질문을 던져 22일 취합한 결과를 보면, 박근혜 정부가 공직사회를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박근혜 정부 들어 잦은 정책 혼선과 번복 등 공직사회가 갑자기 왜 이렇게 무능해졌는지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지난 2년 국정에서 무엇이 가장 큰 문제였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44명 중 15명이 ‘인사 실패’를 꼽았다. ‘소통과 조율 부족’이 12명으로 그다음이었고, 이어 ‘권위주의적 국정운영’과 ‘정책적 유연성 부족’이 각각 7명, ‘단기 성과 집착’ 3명 등의 차례였다. 그동안 민심과 일반 여론의 지적과 거의 차이가 없다. 공무원들의 답변 중에는 “생동감이나 활력이 사라졌다. 손을 놓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무기력과 위기감을 토로하는 경우가 특히 많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부각된 ‘관피아’ 논란에 대한 불만도 컸고, 정권의 인사 무능과 불통뿐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통치 행태를 꼬집는 구체적인 답변들도 이어졌다.

 

■ 과도한 인사 개입, 늑장 인사…“이해할 수 없는 인사, 예측 불가”

 

공무원들이 비판하는 인사상의 문제들은, 통상 언론이 자주 언급했던 ‘수첩 인사’나 ‘밀실 인사’ 등과는 다소 결이 달랐다. 주로 고위 공직자들이 답변을 했기 때문인지, 각 부처 인사에 대한 청와대의 과도한 간섭과 개입을 비판하는 이들(7명)이 많았다. 상습적인 늑장·지연 인사로 업무 공백을 호소한 이들(4명)도 있었고, 인사 방향이나 내용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는 지적(3명)도 나왔다.

 

전직 장관급 인사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인사 개입과 늑장 인사 사례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산하기관장 인사 때 청와대에서 온 명단은 대부분 충성하겠다는, ‘말이 안 되는’ 인사들뿐이었다. (인사안이) 청와대에 올라가면 (확정하는 데) 두 달 이상 걸리는데, 빨리 되는 게 있다. (특정 인사가 찾아와) 인사 청탁을 해서 안 받아줬더니 (청와대) 비서실장 통해서 얘기하겠다고 하더라. 다음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검찰 등 권력기관 내부 인사도 마찬가지다. 검찰의 검사장급(차관급) 간부는 “(인사를) 몇몇이 좌지우지한다는 느낌이 들긴 한다. 실무진에서 뭘 어떻게 결정해서 올려도 그냥 블랙홀처럼 삼켜버리고 마니까 인사 작업이 안 된다”고 말했다. 세종시에서 근무하는 한 고위 공무원도 “우리 부처에서도 (청와대 3인방의) ‘문고리 권력’에 의해 인사가 좌우되는 걸 봤다. 부처 내부에서 결정한 인사를 가지고 청와대를 다녀오더니, 내용이 확 달라지더라. ‘(청와대가) 이렇게까지 일일이 간섭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 정부 들어 인사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문화체육관광부는 내부 직원들이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의 유명한 인사 문제 사례가 즐비하다. 지난해 말 국외 문화원장으로 내정된 인사가 외교관 비자를 받고 송별회까지 했는데, 엉뚱한 산하기관으로 발령이 나고 대신 외부 인사가 낙점됐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 인사는 역량평가 기준에 미달하는 바람에 해당 문화원장 자리는 현재도 1년 이상 장기 공석 상태다.

 

늑장 인사로 인한 업무 공백과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경제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인사 속도가 너무 늦다. 책임장관제 하겠다면서 부처 인사나 공기업 인사를 청와대가 꽉 쥐고 있다. (청와대에서) 오래 걸리다 보니 1년 이상 공석인 경우도 있었다. 업무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정부 초기 장관이나 총리 인선 때 ‘밀봉 인사’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예측하기 어려웠던 청와대의 인사 결정 방식이 청와대가 개입하는 개별 부처 인사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다. 사회 분야 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이 정부 인사는 정말 알 수 없다. 99% 결과를 확신해도 또 달라질 수 있어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현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던 한 인사는 “자신이 경질 대상인지, 왜 경질되는지도 모른 채 기분 나쁘게 나가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일하는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회 분야 부처의 또다른 공무원도 “관료들은 적임자가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자리에 가는 예측 가능한 인사를 해야 자신의 진로를 계획하며 조직에 충성할 수 있는데, 이 당연한 생리를 지금 정부가 너무 모른다. 단순한 선입관이나 왜곡된 정보만 믿고 부처의 세세한 인사까지 챙기려다 난맥상이 도지고 있다고 본다”고 꼬집었다.

 

 

“청와대 부속실서 하라면 하고 
말 없으면 그저 기다려”

 

장관발언 무시·수석대표 교체
통일부 상실·자괴감 가장 심해
교육·복지·기재부도 유사경험
“컨트롤타워 부재·실력부족 탓”

 

상명하복·권위주의 시대 온 듯
“종편 자막 고쳐라” 주문하고
윗분 눈치에 장관 인터뷰 불방
대검·공안부에도 간섭 많아져

 

 

■ 소통과 조율 부재…“불통 원인은 무능?”

 

정부 부처 중 통일부는 청와대와의 ‘소통 부재’로 인한 상실감과 자괴감이 가장 심한 곳으로 꼽힌다. 정부 초기부터 장관의 발언이 청와대에서 뒤집히는 일이 잦더니, 2013년엔 남북실무회담 3차 회담 중 수석대표가 전격 교체되고 지난해엔 청와대 안보전략비서관으로 임명된 통일부 핵심 인사가 8일 만에 교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지금도 우리는 당시 수석대표와 비서관이 교체된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이제는 청와대 지시 없이는 통일부 자체(판단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청와대의 정확한 지침을 받고서야 일을 시작한다. 당연히 대응이 늦을 수밖에 없다”고 답답해했다.

 

교육부나 보건복지부도 지난 2년 비슷한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다. 지난해 11월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시·도교육감들에게 ‘누리과정 예산 5000여억원 국고 지원’을 약속했다가 친박근혜계 여당 지도부의 반대로 단박에 없던 일이 됐고, 기초연금과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편을 준비했던 복지부의 의견이 청와대에서 뒤집힌 것도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기획재정부의 한 공무원도 “지난해 2월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발표 때 초안을 만들어 기자들에게 배포까지 했는데,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바꿔 혼란이 가중됐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인데, 공무원 사기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직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사기’ 문제와 상관없이 ‘지시’받은 일 외에는 하지 않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불통의 원인을 컨트롤타워 부재와 능력 부족 탓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경제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증세나 복지, 구조개혁 이런 논의를 하면서 정확한 진단 없이 너무 막연하게 이야기한다. 증세라고 하더라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영업자, 근로소득자 다 제각각이어서 그걸 다 정밀하게 분석하고 유형화한 다음에 논의해야 하는데 그런 게 잘 안된다”고 지적했다. 사회 분야 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컨트롤타워 부재를 지적하며 “정부 3.0의 취지대로 부처 간 협업, 소통·개방 등을 하라고 해놓고 (정책 관련 정보를) 공개해서 국회나 언론이 지적하면 책임을 따지고 혼내니, 추진이 제대로 안된다. 열심히 하자는 분위기가 안 생긴다”고 진단했다.

 

외교안보 분야 공무원들의 답변 중엔 현 정부의 ‘불통’이 박 대통령 특유의 ‘원칙주의’와 이에 따른 유연성 부족에서 비롯됐다는 의견도 나왔다. “물밑 접촉을 통해 합의를 해야 남북관계에 물꼬를 틀 수 있는데, 대통령은 정당한 절차가 아니라는 생각이 워낙 강하다. 이 때문에 관료들도 (더이상)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외교안보 분야의 또다른 공무원도 “원칙도 좋은데 한번 정해지면 그냥 고집불통이다. 대북전단은 표현의 자유고, 청와대 상공의 삐라는 안 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이중잣대라는 생각을 안 한다”고 답답해했다.

 

■ 지시만 있고 토론은 없다…“권위주의 회귀, 가만히 있을 수밖에”

 

현 정부에서 장관급 직책을 맡았던 한 인사는 “세월호 참사 이후 권위주의적인 방식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예를 들어 해양경찰청 해체 같은 결정도 사전 논의가 전혀 없었다. (박 대통령이) 보고서를 보다가 궁금한 게 있어야 전화를 하니, 토론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수석들이 직접 보고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보고서를 부속실을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한다. 부속실에서 ‘그대로 하세요’ 하면 진행하는 거고, 반응이 곧바로 오지 않으면 하염없이 기다리는 구조”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지시와 이행’만 있을 뿐 ‘설명과 토론’이 없는 권위주의적 국정과 피드백이 상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구조가 굳어지면서, 국정과제를 추진하는 정부 부처에도 연쇄적인 여파를 미치고 있다. 중앙부처의 한 국장급 인사는 “부처에서 올린 안이 청와대에 올라가서 바뀌어서 내려왔는데, 왜 바뀌었는지 부처에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경제부처의 국장급 공무원도 “공무원들이 정책 전문가이고 가장 많은 자료가 있으니 위에서 내려온 지시에 대한 상식과 판단이 있다. 하지만 그런 상식과 판단에 근거한 의견 수렴의 여지가 없다. 오직 오더, 주문만 성립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공무원들의 답변 중엔 이처럼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나 가능했던 상명하복식 국정운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의외로 컸다. 세종시에서 근무하는 한 고위 공무원은 “지난 (이명박) 정부가 지나치게 임기응변으로 일관했다면, 이번 정부는 상명하복과 규율이 너무 강해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사안에 대해 지나치게 원칙적·교조적으로 접근하고, ‘그분’ 말씀에만 따라야 한다. 뭐든 문제가 없이 하려니까 시기를 놓쳐 국민의 기대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편 보도를 보고 청와대에서 연락이 많이 온다. 기사 관련해 보도 자막을 고쳐달라는 건데, 옛날처럼 언론에 ‘올려라, 내려라’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언론 환경이 많이 바뀌어 옛날처럼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을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일하는 한 공무원이 전한 말이다. ‘시대착오적 언론관’으로 비판받으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렀던 이완구 국무총리의 식사 자리 발언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한 고위 공무원은 사회문화 분야 한 장관의 방송 인터뷰가 불방된 사례를 전하기도 했다. 해당 장관이 방송과 인터뷰까지 했는데, 당시 청와대 내부 분위기가 인터뷰 내용과 달라 방송사에 방송을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실제 인터뷰는 방송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분야 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우리 부처 업무 관련 발표도 청와대에서 미리 얘기하지 말라고 한다. 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털어놨다. 김기춘 비서실장 체제 이후 ‘보안’을 강조하며 정보를 통제하는 청와대의 분위기가 각 부처에도 그대로 반영됐던 셈이다. 검찰의 한 간부도 “예전에 비해 검찰 조직의 총의를 모아가는 방식이 더 강화됐다. 특수부는 대검에 중수부가 사라지면서 시시콜콜 간섭이 많은 편이고, 공안 쪽도 법무부 쪽의 그립이 꽤 강해졌다”고 전했다.

 

세종시의 한 고위 공무원도 “업무와 인사, 두 분야 모두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일을 열심히 잘해도 청와대 등 위에서 보는 방향과 엇나가면 물을 먹는다. 청와대 시각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고, 많은 직원과 간부들이 어떻게 일해야 잘하는 건지 혼란스러워한다”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청와대의 일방통행식 정책 추진을 날 선 어조로 비판하던 한 국장급 공무원은 “이렇게 말하는 게 사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부처에서는 ‘(위에서) 계속 밀고 내려오니 어쩔 수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석진환 기자, 편집국 종합 soulfat@hani.co.kr

 

 


 

“원칙주의·사심 없음” 긍정평가도

 

“미·중 외교 안정적으로 풀어가
복지공약 지키려 그래도 노력”

 

박근혜 정부 출범 2년을 맞아 고위 공직자들을 상대로 한 22일 <한겨레>의 조사 결과(47명 대상)를 보면, 응답한 공무원들 가운데 10명이 ‘2년 동안 원칙을 유지하며 꾸준히 정책을 추진했다’며 비교적 좋은 점수를 줬다. 경제·복지 분야의 공무원 6명은 ‘복지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는 평가를 내놨다. 5명은 남북관계나 외교 분야에서 ‘안정감’을 준 점을 높이 평가했으며, 외부 전문가를 수혈하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도 있었다.

 

세종시에 근무하는 한 고위 공무원은 “원칙이 많이 강조되고, 본인이 정한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간다. 증세 논란도 그렇고, 말한 것을 반드시 지키려고 한다”며 “현 정부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세우고 공기업 개혁이나 공무원연금 개혁 등 필요한 일을 종합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 정부는 4대강과 자원외교만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경제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도 “대통령이 사심이 없는 것 같다”며 “지난 정부 때는 대통령과 친한 이들이 금융권을 장악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고 외부의 압력도 없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대기업들이 후원하는 지역별 혁신센터 개소식에 매번 직접 참석하며 ‘창조경제’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혁신센터 업무를 맡고 있는 한 공무원은 “처음엔 좌초되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까지 있었지만, 의지를 갖고 계속 협업을 하니 여러 생태계가 조성되면서 이렇게 성과가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안정감’을 꼽은 이들은 외교안보 분야의 ‘원칙’에 주목했다. “북한에 대해 단호하게 대북 정책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잘하는 것 같다”, “대북 메시지에 일관성이 있고, 안보 관련해선 중심을 잘 잡는 것 같다”, “미·중 관계를 잘 풀어가고 있다” 등의 평가가 외교안보 분야 고위 공무원들 사이에서 일부 나왔다.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많은 상황에서도, 지금껏 추진해온 기초연금이나 4대 중증질환 보장성 강화 등 복지 정책에 후한 점수를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복지분야 업무를 맡고 있는 한 공무원은 “보수 정권이지만, 복지 부분은 어느 정부보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초연금 등 일정 부분 후퇴가 있었지만, 그래도 역대 어느 정권도 이 정도까지 밀어붙이진 못했다”고 말했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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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7가지 아이디어

뉴스전문 포털, 뉴스를 나열하지 말고 차별화 포인트를 잡아라… 아이튠즈 전략·신디케이트 플랫폼도 주목
 
입력 : 2015-02-23  03:16:12   노출 : 2015.02.23  03:16:12

 

이정환 기자 | black@mediatoday.co.kr 

 

한국 언론과 포털, 특히 네이버와의 관계는 적대적 공생관계에서 기생적 공생관계로 변이하고 있다. 네이버를 무찌르자던 언론사들이 네이버와 전재료를 올려달라는 개별 협상에 성공하자 은근슬쩍 발을 뺐고 모바일에서만큼은 네이버에 주도권을 내줄 수 없다고 버티던 언론사들도 조용히 네이버에 들어왔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일부 언론사들은 다시 세력을 규합해 네이버와 전면전을 벌일 태세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최근 펴낸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독자들은 종이신문의 퀄리티를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지만 정작 종이신문에 비용을 지불할 의사는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놀랍게도 오히려 포털 뉴스는 유료 서비스를 이용할 의향도 높고 지불 가능 금액도 더 컸다. 개별 언론의 브랜드 전략이 먹혀들지 않는 시대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김위근 연구원은 이 보고서에서 해외의 탈 포털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뉴스 전문 포털 사이트로 출범했던 미국의 온고닷컴은 유력 신문사들의 출자를 받아 출범했지만 결국 문을 닫았다. 여러 언론사에서 고급 뉴스를 선별해 광고 없이 유료로 서비스한다는 개념이었는데 기대와 달리 유료 가입자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기본 패키지가 6.99달러부터 시작했는데 무료로 볼 수 있는 콘텐츠를 비싸게 판다는 인식을 깨지 못했고 여러 단계의 복잡한 구독료 옵션을 둬서 귀찮게 만든 것도 실패 요인으로 지적됐다.

온고닷컴은 이용자 경험을 강조했지만 전통적인 페이월 방식을 고집해 차별화에 실패했다. 저널리즘의 아이튠즈를 표방한 네덜란드의 브렌들은 약간 다른 전략을 선택했다. 제휴 언론사들의 콘텐츠를 긁어와 개별 기사 단위로 판매하되 판매수익의 70%를 언론사가, 30%를 브렌들이 갖는 구조다. 브렌들 역시 같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기사를 읽고 싶으면 돈을 내라, 그런데 기사를 읽기 전에 제목만 보고는 읽을 만한 기사인지 알 수가 없다.

일본의 47뉴스는 야후와 구글에 맞서는 지역 언론의 생존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47은 일본의 도도부현(지방자치단체) 숫자다. 한 마디로 지역 뉴스 전문 포털인데 양보다 질 전략으로 한 신문사에서 1건의 기사만 메인 페이지에 걸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제목을 클릭하면 발문이 뜨고 여기서 클릭을 한 번 더 하면 개별 언론사 사이트로 넘어가는 아웃링크 방식이다. 직원은 15명, 실제 운영은 교도통신에 위탁하고 있다.

47뉴스는 월 평균 페이지뷰가 2000만건 수준, 야후재팬의 58억3000만건과 비교하면 큰 규모는 아니지만 지역언론 입장에서는 티끌이라도 소중한 트래픽이다. 많지는 않지만 애드센스 등 광고수익도 배분한다. 그러나 지역신문 가운데서도 좀 규모가 큰 언론사들이 야후재팬 등에 직접 기사를 공급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 입장에서는 딱히 차별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아직은 느슨한 연대 수준이라 사이트 관리도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찌감치 지난 2008년 아라타니스라는 뉴스 전문 포털 사이트가 실패한 사례가 있다. 아사히와 요미우리, 니혼게이자이 등 3대 신문이 공동 출자해서 만든 포털이었는데, 야후재팬의 순방문자가 2239만명, 이 세 신문의 순방문자를 더하면 1370만명으로 절반이 넘었다. 포털에 뉴스 공급을 끊고 공동 전선을 펼치면 붙어볼 만하다는 전략이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공유지의 비극이 일어났다.

세 신문사는 아라타니스를 키우기 보다는 아라타니스의 트래픽을 자기네 사이트로 끌어오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겠지만 그나마 아라타니스의 트래픽도 형편 없었다. 색깔도 모호했고 무엇보다도 편집 전략이 부재했다는 평가다. 아라타니스의 사례는 한국 상황에 주는 시사점도 크다. 한국에서도 언론사들의 탈 네이버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다. 여러 차례 네이버를 상대로 공동 전선을 펼치기도 했지만 결집력이 따르지 못했다.  

   
 
 

뉴스 신디케이트 서비스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스크리밍미디어나 아이신디케이트, 모칠라 등 여러 콘텐츠를 수집해 취합해 분배하는 뉴스 서비스가 늘어나고 있다. 동영상 콘텐츠를 고객 언론사들의 콘텐츠와 연계해 서비스하는 뉴스룩이나 특파원을 파견해 여러 신문과 방송에 뉴스를 공급하는 글로벌포스트 같은 언론도 주목할만하다. 정치전문 뉴스 사이트 폴리티코는 직접 폴리티코미디어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신디케이트 서비스를 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200건 정도의 뉴욕타임즈 기사를 신디케이트 방식으로 내보낸다. 제휴 언론사들은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받아 브랜드로 재가공해서 사용할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블룸버그나 포린폴리시 등의 기사를 함께 서비스한다. 공신력 있는 대형 언론사들이 한국의 연합뉴스 같은 뉴스 에이전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유럽에서는 지역신문들이 전국단위 신문들의 콘텐츠를 면 단위로 전재하는 계약이 일반화 돼 있다.

최근에는 전문 분야에 특화된 뉴스 신디케이트 서비스가 늘어나고 있다. 2002년 스페인 연안에서 미국 유조선 기름유출 사고가 발생한 뒤 이 지역 신문인 라보스델갈리시아는 일련의 환경 관련 탐사 보도에서 전문성을 쌓아 신디케이트 서비스를 시작한 경우다. 150명 가운데 100명 정도를 해양 분야 전문기자로 키운 덕분에 이 신문의 기사가 전국단위 신문과 방송에 전재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

김위근 연구원은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유통채널을 확보하고 콘텐츠의 확산 기회를 늘리는 게 중요하다”면서 “저작권과 수익배분 등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자체적으로 개발하지 않은 유통 플랫폼이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한국은 너무 많은 행위자가 거의 비슷한 비즈니스 모델로 각축을 벌이고 있다”면서 “필요하다면 주력 영역을 바꾸는 것도 검토해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 연구원은 “디지털 뉴스 콘텐츠 시장은 범용재 시장이라 이용자의 눈길이 가장 먼저 오래 머무는 곳에 뉴스 콘텐츠를 배치하는 게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이지만 그러기에는 경쟁이 너무 심하다”면서 “유료화 모델의 도입을 위해서라도 프리미엄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범용재 시장 뿐만 아니라 고급재 시장에 대비하는 디지털 뉴스 콘텐츠 유통전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과거에도 한국신문협회를 중심으로 뉴스 전문포털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액션 플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김 연구원은 “개별 언론사들의 이해관계를 정리해 하나로 모으는데 실패했고 연합뉴스 등 뉴스통신사들이 포털에 계속 뉴스를 공급하는 현실도 한 원인이었다”면서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뉴스 포털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독립적인 뉴스 전문 포털 사이트를 만들려면 가장 기본적인 검색 뿐만 아니라 콘텐츠 패키지를 포괄적으로 제공하고 이용자의 관심을 붙들어두는 콘텐츠 생태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연구원은 “웹 사이트가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를 메인 플랫폼으로 잡거나 특정 분야에 특화된 전문 포털을 모색하거나 큐레이션을 활용한 개인 맞춤 포털을 구축하는 전략도 고려해볼만 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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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납해라, 평창올림픽! 박정희도 했다!

 

[정희준의 어퍼컷] 올림픽, 알고 보니 '국고 먹튀'?

정희준 동아대 교수 2015.02.23 04:40:53

 

요상하게 돌아간다. 평창동계올림픽 말이다. 분명 IOC가 분산개최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 측에서는 못 한다고 한다. 세상에, IOC가 하라는데 감히 이를 거부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까지 평창조직위 측은 어땠나. 가급적 기존 시설 활용해야 하고, 새로 짓더라도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작게 지어야 한다고 아무리 충고를 해도 들은 체 만 체 했다. 오히려 거꾸로 갔다. 무조건 새로 짓는다. 그리고 최대한 크게 짓는다. 그러면서 매번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던 게 바로 "IOC 지시사항"이기 때문, 또 "IOC를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IOC가 분산개최를 하라는데 지금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외국에서는 올림픽 준비를 하면서 가급적 기존 시설을 활용하고 새로 짓더라도 작게 짓는다. IOC도 경기장 위치, 규모 등 거의 모든 것을 협상을 통해 조정한다. 그래서 있는 게 바로 '조정위원회'다. 지난달 강릉에서 열린 회의에서 IOC의 린드버그 평창올림픽조정위원장도 "분산개최는 비용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썰매 종목을 치르는 슬라이딩센터는 유지비용도 많이 든다"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그럼에도 평창 측은 분산개최도 안 되고 슬라이딩센터도 새로 지어야 한다고 우겨서 결국 관철시켰다. 고광헌 한림대 교수의 표현대로 IOC와 평창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 IOC는 살림 줄이라고 설득하는데 평창 측은 싫다고 거부하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가. 

원하는 게 '올림픽'인가 '돈'인가 

평창올림픽의 본색이 드러났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스포츠 이벤트' 올림픽이 아니었다. 강원도가 '대회반납'을 불사하며 분산개최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은 올림픽이 이들에겐 스포츠가 아닌 '토목개발 이벤트,' '국고예산 따먹기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원하는 건 올림픽을 빌미로 앞세워 중앙정부 예산을 최대한 많이 따내는 것이다.  

올림픽은 스포츠이벤트가 아니다. 문화체육부가 확정한 올림픽예산 13조 중 경기장 건설 예산은 약 7500억 원 밖에 안 된다. 그러니까 올림픽예산은 결국 거의 모두 토목공사비용인 것이다. 강원도 내 올림픽 유치론자, 분산개최 반대론자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강원도에 건설경기가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저기 공사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근 땅값이 오르는 것이다. 사실은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의 땅값이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올림픽을 준비하는 평창조직위나 강원도 측은 예산 절감을 위한 모든 제안에 "이미 늦었다"는 것을 핑계를 내세우며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고, 강원도가 빚더미에 올라앉는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카드인 분산개최에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이 좋은 걸 나눠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중에 어찌 되는지는 신경 쓸 바 아니고 지금 당장 경기장을 짓고 공사판을 벌여야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원도에 거대한 빚더미를 안겨줄 게 뻔한데도 왜 이들은 분산개최를 거부하는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평창동계올림픽은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를 정점으로 하는 지역 기득권집단을 위한 돈잔치이기 때문이다. 국가경제에 적신호가 켜지고 서민경제가 어려워도 상관이 없다. 강원도의 토호세력과 평창 인근에 땅투기를 한 서울의 부자들에게 올림픽은 '한탕' 해 먹을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주체할 수 없는 국고 폭탄과 사방에서 벌어지는 공사판은 그들과 그 자식들까지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올림픽 폐막 후 강원도가 떠안게 될 거대한 재정적자와 도민들이 대를 이어 갚아야 할 빚더미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남의 일일 뿐이다. 

 

 

▲알펜시아 경기장 ⓒ녹색연합

▲알펜시아 경기장 ⓒ녹색연합  

 
 
 
 
평창올림픽 집중 취재 기사 보기 

 

 
나가노 올림픽 뒤 빚만 17조 원…평창은? 

 
"평창올림픽, 지자체 재정파탄 초래할 것" 

 


부자들은 만세 부르고 강원도민들은 대를 이어 빚 갚아야 

이런 대학들이 있다고 하자. 신입생도 줄고 재정도 적자인데 자꾸 큼직한 건물을 지어올린다. 이유는 뻔하다. 돈 빼돌리기에 건물 짓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건설사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기는 학교 설립자(패밀리)는 부자가 된다. 학생들만 불쌍하다. 감시 기능을 수행해야 할 총학생회도 사실은 한통속이다. 같이 나눠먹는다. 학교가 결국 문을 닫아도 설립자는 엄청난 부를 챙긴다. 학생들만 속은 것이다. 

이게 지금 강원도의 현실이다. 재정은 이미 파탄상태로 달려가고 있는데 강원도의 '빚더미 질주'는 멈출 줄을 모른다. 재정자립도가 2014년 18.7%로 전국 최하위권인 강원도는 올림픽 때문에 앞으로 매년 1000억 원 가량의 지방채를 발행해 거의 1조 원의 빚더미에 오른 상태에서 올림픽을 개막할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강원도의 미래는 알펜시아라는 괴물을 봐야한다.  

일년 예산이 3조 원 남짓인 강원도는 그놈의 올림픽을 유치하겠다고 물경 1조7000억 원을 쏟아 부어 평창에 알펜시아리조트를 짓는 바람에 순식간에 1조 이상의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콘도 한 채 값이 30~40억 원이라는 이 리조트는 완공된 지 몇 년이 지났건만 팔리지 않아 결국 중앙정부에 사달라고 조르고 있다. 강원도는 알펜시아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하루 1억3000만 원을 이자로 허공에 날리고 있다. 이게 수년째이니 이자비용만 이미 수천억 원이다. 

끝이 아니다. 지금 강원도에는 돈벼락이 폭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다. 중앙정부가 경기장, KTX, 복선철도, 고속도로 등의 건설을 위해 퍼붓고 있는 국고 13조 원의 '국고 폭탄'에 강원도민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엔 덫이 있다. 그 사업들 중 강원도 내에서 벌어지는 사업은 강원도가 25~40%의 예산을 책임져야 한다. 이게 또 몇 조가 될까. 

이제 끝인가? 강원도의 빚더미 질주는 끝이 없다. 새로 지어지는 6개의 올림픽 경기장은 폐막 후 적어도 20억에서 많게는 50억 원 가까운 유지관리비를 필요로 한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매년 200억 원에 가까운 유지관리비가 필요하다. 이 돈을 낼 사람은 정해졌는가? 아니다. 조직위원회, 강원도, 평창군, 강릉시 간 이에 대한 결론은 아직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시설들은 도대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자, 이제 강원도가 올림픽으로 인해 떠안게 될 재정적자 견적을 내보자. 견적이 나오겠는가?
 

ⓒ녹색연합

ⓒ녹색연합  

 
 

과연 누구를 위한 올림픽인가 

내가 체육인이고 체육학과 교수지만 올림픽에 반대하는 분명하고도 많은 이유들이 있다. 올림픽을 개최했다고,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메달을 땄다고 해서 생활체육이 활성화되는 것도 아니고 내 제자들이 취직이 잘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올림픽은 이제 스포츠행사가 아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올림픽이란 오직 기득권 집단을 위한 올림픽으로 변질됐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주는 이벤트다. 평범한 사람들이 수십, 수백 년을 살아온 고장에서 쫓아내는 게 올림픽이다. 서민이 가져야 할 몫을 빼앗아 소수의 부자들에게 옮겨다 주는 게 올림픽이다. 능력 없는 지자체장들이 뭔가 업적을 만드는 게 난망해지면 들고 나오는 게 스포츠이벤트 유치다.

특히 스포츠이벤트를 빌미로 천금과도 같은 국고를 빼내 '눈먼 돈'으로 만들어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게 낭비했던 역사가 이미 수차례 반복되어왔다. 전남의 F-1이 그랬고, 충주의 세계조정선수권대회가 그랬으며, 인천의 아시안게임이 생생한 사례가 되어 그 어처구니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고작 6시간을 쓸 1000억 원 가까운 개폐막식장을 인구가 고작 4000명인 횡계리에 새로 짓는 문제가 논란이 되자 한 강원도민이 인터뷰에서 그랬다. 

 


"올림픽 치르는데 그 정도 돈도 안 써요?" 

무주 등 기존 시설을 활용하자는 제안에 대해 평창조직위측이 이렇게 답했다.

"기존 시설을 활용할 거면 올림픽 개최를 할 도시가 어디 있겠느냐." 

평창동계올림픽. 도대체 누구를 위한 올림픽인가. 진정 무엇을 위한 올림픽인가. 그 지저분한 속내가 다 까발려진 올림픽, 차라리 반납하는 것이 답이다. 2011년 유치 확정 이후 조직위원회는 그야말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바람에 어느 언론의 표현대로 이대로 가다가는 '200% 실패'할 게 뻔하다. 도대체 지난 4년간 뭘 했는가. 정말 나쁜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이 올림픽은 MB정부의 4대강 보다 더 많은 혈세를 낭비할 가능성이 크다. 올림픽 예산 13조 원은 2018년 개최 때가 되면 분명 20조를 넘어설 것이다. 안 그런 국책사업이 드물다. 일단 삽질 시작하면 두 배, 세 배로 뛰는 국책사업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다른 나라들도 유치 신청 철회한다. 우리가 선망하는 유럽과 미주의 도시들이 그랬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반납이 무책임하다고? 반납을 무책임하다고 하는 바로 그 사람이 무책임한 사람이다. 올림픽 폐막 후의 문제를 남의 일 보듯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무책임하다.

반납이 답이다. 미국의 덴버가 동계올림픽 반납한 바 있고 우리나라도 박정희 대통령 때 아시안게임을 벌금까지 물고 반납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 덴버가 있는 콜로라도주는 세계 최대, 최고의 겨울리조트가 됐고 우리나라는 박정희 때 최고의 경제성장을 일군 바 있다. 

반납은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분산개최가 답이다. 단 사흘의 행사를 위해 500년 보존해온 가리왕산 깎지 말고 IOC와 협상을 해 덕유산이나 용평에서 하면 된다. 북한의 마식령스키장도 있다. 슬라이딩센터는 일본의 나가노가 있다. 아이스하키는 서울 태릉이나 목동에서 하면 된다. 개폐막식은 원래 계획대로 강릉의 경기장을 리모델링 해서 하면 된다. 새로 경기장 지었다가 부술 게 아니라 평창에서 30분 거리인 원주에 지어서 계속 쓰면 된다. 

왜 우리가 수십조 원을 쓰고 IOC 좋은 일만 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수십조 원에 달하는 빚감당을 해야하는가.

 

* 최근 팟캐스트 '이이제이'에서도 필자가 출연해 평창올림픽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 방송을 들어보시기 바란다. (방송 듣기)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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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이렇게 쓰고 버리는구나…매일 울었다”

등록 : 2015.02.22 10:35수정 : 2015.02.2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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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노동자들에 비합리적 노동 강요하는 기업들
인턴 3개월 꽉 채우자 ‘황당한 사유’ 내세워 해고
“사람을 이렇게 쓰고 버리는구나…매일 울었다”

패션업계의 ‘열정페이’에 항의하는 패션노조의 한 노조원이 팻말을 들고 있다.
[경제의 창]

 

 

케이블방송사 계약직인 ㄱ(34)씨는 올해 4월 정규직 전환 심사를 앞두고 있다. 정규직 전환을 의심치 않았는데 최근 인사이동으로 자신과 업무가 겹치는 사람이 같은 부서로 오면서 부쩍 신경이 쓰인다. 방송제작 일을 하는 그는 야근이 잦다. 퇴근시간은 늘 들쑥날쑥이다. 하지만 출근시간은 오전 9시 고정이다. 야근 다음날 출근시간이 탄력적으로 조정되던 이전 회사들과 달리 지금 회사는 새벽 4시에 일이 끝나도 9시까지 ‘칼출근’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휴일수당·야근수당을 주는 것도 아니다. 급여명세서의 고정급 이외에 수당은 일절 없다. 심지어 동의한 적 없음에도 급여계좌에서는 매월 기부금 명목으로 5000원씩 빠져나가고 있다. 이 모든 부당함에 그는 입 한번 뻥긋해보지 못했다. “일방적 해고를 통보받고 나가는 이들을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불안한 고용에 답답한 기업문화까지 더해져 그는 이직을 고민중이다.

 

 

새벽근무에 칼출근, 장시간 노동
수당 제대로 안주고, 임금체불도

 

정규직 전환 걸려있어 입 못 열고 
성희롱·폭언, 괴롭힘에도 쉬쉬

 

문화예술, 패션, IT 소기업이 많아
청년유니온, 보고서 내고 전면전

 

“7월에 ‘청년착취대상’ 선정”
블랙기업 법안 마련도 고민중

 

 

지난해 11월9일 민주노총과 함께 ‘한국판 블랙기업 운동’을 시작한 청년유니온에 접수된 ‘블랙기업’ 사례다. 일본에서 건너온 표현인 ‘블랙기업’은 청년노동자들에게 비합리적인 노동을 강요하는 기업을 가리킨다. ‘정규직 희망고문’ ‘저임금’ ‘인격모독’ ‘수당 없는 야근’ ‘계약직 차별’ ‘장시간 노동’ 등을 일삼는 기업들이다. 최근 정규직 채용과정서 구직자 전원을 불합격처분해 논란을 빚은 위메프, ‘열정페이’만 주고 노동을 착취한 디자이너 이상봉의 회사를 블랙기업이라고 볼 수 있다.

 

청년유니온은 블랙기업 운동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블랙기업 고발 사이트를 열어 청년들의 사례를 모았다. 석달간 63건의 고발이 접수됐다. 업무 부적응이란 명목의 부당해고·임금체불·인격모독 등 청년들을 울리는 블랙기업의 수법은 아주 악랄하고 다양했다. 특히 장시간 노동, 고용 불안정, 직장내 괴롭힘이 주된 유형으로 나타났다. 청년유니온은 블랙기업 고발 사례와 청년들의 일자리 설문조사 등의 분석을 거쳐 ‘청년의 노동경험에 근거한 한국형 블랙기업 지표개발 연구보고서’(블랙기업 보고서)를 냈다. 서울시 청년허브의 연구용역으로 만든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적된 문제 중 가장 많은 유형은 장시간 노동(69.8%)이었다. 이어 연장수당 미지급(36.5%), 임금 체불(31.7%), 폭언(23.8%) 등이 뒤따랐다.

 

블랙기업으로 신고된 업체들은 주로 문화예술, 패션, 정보기술(IT) 분야의 소기업이 많았다. 대기업으로는 통신업체나 통신업체와의 간접고용 형태 업체들이 눈에 띄었다. 소기업일수록, 청년노동자가 어릴수록 블랙기업의 폭력은 두드러졌다. 기본적인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않아 청년노동자들이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이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픽 이임정 기자 imjung@hani.co.kr (※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공연기획사에서 일했던 ㄴ(27)씨의 주된 업무는 사무실 청소, 우편물 정리, 포스터 배포, 공연장 앞 티켓 확인 등의 잔일이었다. 공연기획 일을 배우러 들어갔지만 허드렛일을 더 많이 했다. 정직원이 5명인 회사는 인턴 월급으로 90만원을 줬다. 인턴이 끝나면 정직원으로 채용해주겠다는 말을 믿고 근로계약서도 안 썼다. 정규직 될 날만 기다렸는데 인턴 3개월을 꽉 채우자 회사는 그를 해고했다. 해고 사유는 “너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좋지 않다”였다. 어이없는 해고 통보를 받고 그는 몇날을 울었다. “사람을 이렇게 쓰고 버리는구나 싶어” 억울하고 서러웠다.

 

해고를 당하고 나니 알 수 없던 일련의 일들이 이해가 갔다. 직원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그를 왕따시켰다. 밥을 먹을 때도, 주요 업무를 볼 때도 그를 배제했다. 사무실 벽 달력에는 3개월마다 각기 다른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알고 보니 3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살다 간 인턴들의 이니셜이었다. ㄴ씨는 “5인 이상 직원을 두면 세금이 달라진다고 하더니 회사가 직원을 늘리지 않으려 인턴을 3개월마다 쓰고 버렸다”며 “인턴은 어차피 나갈 사람이니 기존 직원들이 아예 정을 주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ㄴ씨는 회사를 나온 뒤 줄곧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강렬한 취업의 고통에 소규모 예술공연기획사는 입사할 생각을 아예 접었다.

 

생애 첫 노동의 좌절은 청년 시기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경력을 쌓는 데 상처가 된다. 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은 “블랙기업은 인턴이나 계약직 청년을 생애 첫 노동현장의 문턱에서부터 주저앉게 만든다”고 말했다. 청년유니온이 19~34살로 취업상태에 있거나 일시적 실업상태에 처한 청년 30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노동자의 근속 평균 기간은 1년2개월로 겨우 1년을 넘겼다. 현재 또는 최근 직장과 유사한 업종에서 일한 전체 기간은 2년4개월이었다. 이들의 평균 이직 횟수는 2.8번으로 나타났다. 정 국장은 “직장생활을 할 때 반복적인 상처를 겪고 이탈을 경험하다 보면 부당한 권리침해에도 무뎌져 침묵하게 되고, 나중엔 방관자가 돼 조직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고용상태가 불안정한 이들은 성폭력 등 인권침해에도 쉽게 노출된다. 조명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중견기업에 입사했던 ㄷ(29)씨는 회사를 다니던 1년2개월이 지옥 같았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 하혈까지 하고 나서야 안 되겠다 싶어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회사는 성폭력에 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다. 회식은 그에게 고문의 시간이었다. 옆 부서 팀장은 회식 때마다 다가와 “넌 누구를 닮았다”며 추파를 던졌다. “널 보고 있으면 간통죄가 없어졌으면 해”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했다. 심지어 그 팀장의 아내에게 전화를 받은 날도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남자직원이 여사원들에게 야한 동영상을 메일로 돌렸다. 여사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징계를 담당해야 할 인사팀에선 “여사원들이 평소에 어떻게 했길래…”라며 남자사원을 두둔했다. ㄷ씨는 회사의 이런저런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듯 “차라리 백수가 되는 게 낫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ㄹ(가명·26)씨는 첫 직장에서 한달 내내 폭언을 들었다. 신생 엔터테인먼트회사에서 홀로 홍보마케팅 일을 맡은 그에게 연관부서의 팀장은 수시로 트집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이게 사람이 쓴 거냐?”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다. 멱살을 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처음 취직한 회사에서 잘해보고 싶었던 그는 온갖 모욕을 꾹 참았다. 어떻게든 배움의 기회로 삼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월급이 아깝다” 같은 변함없는 폭언이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지자 그는 4개월 만에 회사를 관뒀다. 자신의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듯해 우울함이 오래갔다. 지금은 종교만이 유일한 위로다.

 

블랙기업은 악덕기업일까. 정 국장은 “블랙기업을 악덕기업이라고 해버리면 그렇지 않은 기업을 찾기가 더 힘들 것”이라며 “그래서 블랙기업 지표 연구를 통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청년유니온은 블랙기업 지표로 고용 불안정, 장시간 노동, 직장내 괴롭힘, 폐쇄적 소통구조 네 분야를 꼽고, 정규직 희망고문, 근로계약 자체의 무질서, 실적관리를 위한 압박 등 구체적인 10개 항목을 그 안에 담았다. 블랙기업 체크리스트를 상반기에 시민들에게 배포하고 구조적인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도구로 제공할 계획이다. 지표로 굳이 체크하지 않더라도 취업 때 수입을 과장하고 허세를 떠는 기업은 초장부터 의심해야 한다는 게 청년유니온의 설명이다.

 

만일 내가 다니는 회사가 블랙기업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참지 말고 드러내라’는 게 청년유니온의 조언이다. 정 국장은 “각종 시민단체에 노동상담부터 받아보라”고 권한다. 임금체불 등 법령 내부의 문제라면 행정적 절차를 밟을 수 있고, 외부의 문제라면 사회에 알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 참고 견디는 것은 개인과 기업,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정 국장은 “우리 경제를 떠받칠 산업의 미래를 만들어갈 청년노동이 부정적인 경험으로 뒤범벅돼 성장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개인이 홀로 참고 견디다 자살하는 극단적 상황은 더 큰 절망으로 가는 징후”라고 설명했다.

 

청년유니온은 사례 접수 사이트를 노동신고센터로 전환해 지속적으로 블랙기업 노동사례 취합 및 상담을 진행할 예정이다. 오는 7월에는 블랙기업을 업종별·분야별로 나눠 ‘청년착취대상’ 시상식도 열 계획이다. 블랙기업을 양산하는 노동시장을 규제하고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한 블랙기업 법안 마련도 고민중이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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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김정은, 서해 섬 화력타격 및 점령 연습 지도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2/22 12:22
  • 수정일
    2015/02/22 12:2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 SA-2 지대공 미사일 등 발사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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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21  21: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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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서해 섬 화력타격 및 점령연습을 지도했다고 21일 북한 매체들이 전했다. [캡쳐-노동신문]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서해에서 섬 화력타격 및 점령연습을 지도했다고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21일 보도했다. 이날 화력타격연습에는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 SA-2 지대공 미사일, 122mm 방사포 등이 동원된 것으로 확인됐다.

통신은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기어이 성취하려는 일당백장병들의 멸적의 의지가 용암마냥 타번지는 격동적인 시기에 섬화력 타격 및 점령을 위한 연습이 진행되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 제1위원장이 타격연습을 직접 제의했다면서 "적들의 기를 꺾어버리며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원수들이 도사리고있는 섬을 강력한 화력타격으로 초토화하고 질풍노도같이 점령하기 위해 세운 작전전투계획의 현실성을 확정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 화력타격연습에 동원된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 [캡쳐-노동신문]

 

이날 연습에는 서남전선 최전방에 위치한 무도영웅방어대, 장재도방어중대, 군 제4군단 예하 포병부대 및 구분대가 참가했으며, 김 제1위원장이 연습 개시명령을 내렸다.

이에 경고사격에 이어 화력타격 연습이 진행됐으며, 반함선로케트(지대함미사일)가 포위치 발견용 탐지기, 포병 및 유도무기진지, 지원함선 등을 집중 타격했다고 통신이 전했다.

이날 연습에 대해 김 제1위원장은 만족을 표하고, "훈련에서 형식주의를 완전히 뿌리뽑으며 현대전에서 제기될 수 있는 여러가지 정황들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현실적인 훈련들을 많이 진행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전군에 백두산훈련열풍이 용암처럼 끓어번지게 하여 모든 군인들을 펄펄 나는 일당백싸움꾼, 백두산호랑이로 준비시키라"면서 "일단 적들이 덤벼들면 미처 정신을 차릴새없이 놈들을 묵사발만들고 반미대결전을 총결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 SA-2 지대공 미사일. [캡쳐-노동신문]

 

한편, 이날 연습에 사용된 미사일은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과 SA-2 지대공 등이며, 122mm 방사포자주포 등 도 동원된 것으로 북한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공개한 사진을 통해 확인됐다.

실크웜미사일은 사거리 83~95km로, 차륜형 실크웜 미사일은 이동속도가 빨라 우리 함정에 위협이 되는 무기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실크웜미사일을 공개한 것은 이례적이다.

SA-2 지대공 미사일은 사거리 48km로 북한은 180여 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군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122mm방사포는 사거리 20여km로 북한 4군단 예하 포병부대에 60여 문정도 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연습에는 황병서 총정치국장,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리영길 총참모장, 오일정, 한광상 당 부장, 리병철 제1부부장 등이 동행했으며, 리성국 제4군단장, 리영철 군단 정치위원 등이 맞이했다.

 

   
▲ 김 제1위원장이 지도를 보고 있다. [캡쳐-노동신문]

 

 

   
▲ 122mm 방사포. [캡쳐-노동신문]

 

 

   
▲ 122mm 방사포. 북한 4군단 예하 포병부대는 약 60여 문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캡쳐-노동신문]

 

 

   
▲ 화력타격연습 목표지점. [캡쳐-노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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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신부 특강 - 한반도 평화통일, 어떻게 해야하나?

함세웅 신부 특강 - 한반도 평화통일, 어떻게 해야하나?
 
 
 
주권방송 
기사입력: 2015/02/22 [02:21]  최종편집: ⓒ 자주민보
 
 

 

 

평화통일시민연대 초청특강

한반도 평화통일, 어떻게 해야하나?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함세웅 신부

 



주권방송 615tv@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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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재기 열사] 천막농성 등 본격투쟁 돌입…특별교섭 촉구

유족 대표·대책위 “김창규 사장 조문태도 분노…유족 앞에 책임 있는 사과해”

 

지난 16일 ‘분신 사망’한 고 김재기씨 유족들이 21일 오후 금호타이어 사측을 규탄하며 투쟁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 김씨의 부인과 처남, 형님들이 함께 하고 있다.
지난 16일 ‘분신 사망’한 고 김재기씨 유족들이 21일 오후 금호타이어 사측을 규탄하며 투쟁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 김씨의 부인과 처남, 형님들이 함께 하고 있다.ⓒ김주형 기자
 

지난 16일 사측의 도급화 계획을 막기 위해 ‘분신 사망’한 故 김재기씨 유족들이 투쟁의 전선에 나선 가운데 “유서에 남긴 뜻을 이뤄주고 싶다”고 시민들의 관심을 호소해 눈길을 끌었다.

유족들과 ‘비정규직 철폐, 도급화 철회, 故 김재기열사 투쟁대책위원회’(대책위)는 21일 오후 1시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창규 사장의 태도에 분노하며, 유족 앞에 책임지고 사과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열사의 염원대로 도급화가 철회될 때까지 농성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천막농성 등 사측과 투쟁을 선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유족 대표인 고 김재기씨 부인 정아무개씨, 형, 처남 등 5명과 박봉주 민주노총 광주본부장, 심종섭 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장, 허용대 금호타이어지회 대표지회장을 비롯해 150여명이 함께 했다.

“故 김재기 뜻 잇고자 천막농성 돌입…사측, 특별교섭 나서라”

유족 대표와 고 김재기 열사 투쟁대책위원회는 21일 오후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측이 유족 앞에 사과할 것, 도급화 계획 철회 할 것 등을 촉구하고 있다.
유족 대표와 고 김재기 열사 투쟁대책위원회는 21일 오후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측이 유족 앞에 사과할 것, 도급화 계획 철회 할 것 등을 촉구하고 있다.ⓒ김주형 기자

이들은 “도의적 책임만 이야기할 뿐 이번 일에 대한 책임 있는 사과는 찾아볼 수 없었다”며 지난 20일 빈소를 찾은 김창규 금호타이어 사장의 조문 태도를 비판(본지기사:김창규 금호타이어 사장 고 김재기씨 조문…“회사 직원 사망해서 찾았을 뿐 참조)”하면서 “회사는 이번 사태에 현장 도급화를 밀어붙인 엄연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워크아웃을 빌미로 도급화를 추진했던 명분조차 워크아웃 졸업 이후 사라졌다”며 “노동자를 벼량 끝으로 내몰았음에도 사측은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고 있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들은 이런 김창규 사장과 사측 태도에 대해 “명색이 대표이사가 5일이 지나도록 사태 파악도 못할 만큼 무능한 것인지, 아니면 유족을 우롱하겠다는 건지, 사측의 무책임한 태도에 우리는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끝으로 “회사는 현장도급화 강행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책임 있는 사과를 선행해야 한다. 그리고 열사가 요구했던 ‘현장의 도급화 정책을 즉각 철회’하고 비정규직(도급화) 정규직화 정책으로 즉각 전환해야 한다”며 “故 김재기 열사의 ‘제가 죽는다 해서 노동세상이 바뀌진 않겠지만 우리 금타만은 바뀌어졌으면 하는 제 바람’이라는 유서의 뜻을 잇고자 천막농성에 돌입한다”고 선포했다.

故 김재기씨 부인 “남편이 하던 싸움 이제부터 제가 하겠다”

고 김재기씨 부인이 기자회견에서 유족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준비해온 원고를 읽는 도중 혈압이 올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오열하며 읽고 있다.
고 김재기씨 부인이 기자회견에서 유족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준비해온 원고를 읽는 도중 혈압이 올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오열하며 읽고 있다.ⓒ김주형 기자

기자회견에 앞서 유족대표로 고 김씨 부인 정아무개씨가 직접 준비해온 원고를 낭송했다. 정씨는 “사장은 우리가 피눈물 쏟으며 보냈던 설명절. 남편이 죽은지 5일만에 나타나서 왜 죽었는지, 회사에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조사해 보겠다고 한다”며 “아빠를 잃은 아이들 앞에서, 유족들 앞에서 사장은 우리를 우롱했다. 연기를 했다”고 울분을 토해냈다.

나아가 “제 남편이 남긴 유서대로, 남편이 하던 싸움을 이제부터는 제가 할 것”이라는 결심을 밝히면서 “그의 유서대로 이루어주지 않으면 편히 잠들지 못하고 저 세상에서도 잠못들고 싸운다고 했기 때문”이라 강조했다.

끝으로 “저희에게 관심을 가져주십시오. 제 남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저희 유족들에게 힘과 용기를 모아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박봉주 민주노총 광주본부장은 “이제부터 싸우겠다. 김재기 동지의 죽음이 얼마나 큰 부메랑이 되어 금호자본에게 돌아가는지 보여주겠다”면서 “유족들의 눈물 우리들이 닦아주겠다. 대책위가 닦아 드리겠다”고 다짐했다.

故 김재기씨 부인의 유족대표 발언 내용 전문

고 김재기씨 부인이 기자회견에서 유족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준비해온 원고를 읽는 도중 혈압이 올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오열하며 읽고 있다.
고 김재기씨 부인이 기자회견에서 유족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준비해온 원고를 읽는 도중 혈압이 올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오열하며 읽고 있다.ⓒ김주형 기자

제가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서 몇 자 적어왔습니다.
김재기 대의원은 저의 남편입니다.
고2 올라가는 아들과 중2 올라가는 딸아이의 아빠입니다.
그런데 제 남편은 열사가 되었습니다.
무슨 분노가 그리 컸는지, 제 남편은 제 딸에게 “엄마 말 잘 들어라” 울먹이는 말을 끝으로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겼습니다.
평소에 싫은 소리 한 마디 안 했고, 늘 잘했다는 소리만 했던, 성실하디 성실한 저의 남편은 너무나 엄청나고 모질게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저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20년을 넘게 가정보다는 회사라며 다녔던 이 사람을, 회사가 죽음으로 몰아냈다는 것을 뒤늦게사 크게 깨달았습니다. 생전에도 회사가 표적삼아 나를 잡으려 한다, 사장이 나를 죽이려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너무나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장은 우리가 피눈물 쏟으며 보냈던 설명절. 남편이 죽은지 5일만에 나타나서 왜 죽었는지, 회사에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조사해 보겠다고 합니다. 아빠를 잃은 아이들 앞에서, 유족들 앞에서 사장은 우리를 우롱했습니다. 연기를 했습니다.

저는 모질게 마음 먹었습니다.
제 남편이 남긴 유서대로, 남편이 하던 싸움을 이제부터는 제가 할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김재기의 마음으로 할 겁니다. 그의 유서대로 이루어주지 않으면 편히 잠들지 못하고 저 세상에서도 잠못들고 싸운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습니다. 노동자가 왜 그렇게 억울했는지, 왜 그렇게 분노하고 싸웠는지 조금은 알게 됐습니다. 남편이 분신했다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부부싸움 때문에 분신했다는 기사가 났고 아직도 그 기사가 버젓이 남아 있습니다. 옥상에서 투신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그렇게 애타게 찾았던 핸드폰은 경찰이 갖고 있으면서 가족에게 말 한 마디 안했습니다. 우리 남편이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이런 분노였겠구나 했습니다.

남편이 남긴 뜻을 꼭 이루고 싶습니다. 나쁜 도급을 없애라고 했습니다. 유서대로 이루어 주겠습니다. 아빠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사람이었는지, 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따라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길도 아닙니다.
저희에게 관심을 가져주십시오. 제 남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저희 유족들에게 힘과 용기를 모아주십시오.

 

기자회견을 마친 참석자들이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쪽을 향해 뒤로 돌아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
기자회견을 마친 참석자들이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쪽을 향해 뒤로 돌아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김주형 기자
고 김재기 열사 투쟁대책위원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마친 뒤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정문 앞에서 천막농성에 들어가고 있다.
고 김재기 열사 투쟁대책위원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마친 뒤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정문 앞에서 천막농성에 들어가고 있다.ⓒ김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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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광화문 농성장서 설맞이 촛불 문화제...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2/22 09:24
  • 수정일
    2015/02/22 09:2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우리만 남지 않을까..."
세월호 아빠의 새해 소원은?

[현장] 광화문 농성장서 설맞이 촛불 문화제... '세월호 진실 규명' 소원지 불태워

15.02.21 21:31l최종 업데이트 15.02.22 01:0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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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유가족을 대표한 '민우 아빠' 이종철씨(왼쪽)와 '영석 아빠' 오병환씨가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열린 설맞이 촛불문화제에서 새해 소원지를 낭독한 뒤 촛불에 태우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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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빗줄기도 세월호 가족들의 불타는 염원을 꺼뜨리진 못했다. 설 연휴 막바지인 21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농성장에선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주말 촛불 문화제가 어김없이 열렸다. 

꽉막힌 귀경 행렬을 뚫고 광화문을 찾은 100명 남짓한 시민들은 저마다 노란색 소원지에 자신들의 새해 소망을 담아 불태웠다.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세월호 완전 인양,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남은 실종자가 하루빨리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은 한결 같았다.

"정부·정치권·언론 거짓 일관... 새해엔 진실 밝혀지길"



세월호 유가족을 대표한 '민우 아빠' 이종철씨와 '영석 아빠' 오병환씨는 "2015년 새해가 왔지만 아무 것도 밝혀진 게 없다"면서 "세월호 진실이 밝혀지도록 국민들이 뜻을 모아 달라"고 소망했다.   

"세월호 진실 규명은 우리들의 소원입니다. 실종자 완전 수습, 세월호 완전한 인양, 철저한 진상 규명. 2014년 4월 16일, 2015년으로 해가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습니다. 분명한 건 정부와 정치권, 언론 누군가는 참사 당시부터 계속 거짓으로 일관하며 무엇인가 감추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밝혀야 할 분명한 건 우리 아이들이 지난해 4월 16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죽어야만 했는지 입니다. 지난해 600만 명의 서명과 3만 명의 국민 단식으로 확인한 것처럼 세월호 진실 규명은 모든 국민들의 한결같은 간절한 바람입니다. 2015년 새해에는 기필코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지도록 국민들이 뜻과 마음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민우 아빠 영석이 아빠가."

특히 오병환씨는 "언젠가는 광화문에 우리 둘만 남지 않을까 얘기하곤 한다"면서도 "국민들이 우리를 잊지 않고 따라 준다면 민우 아빠와 나는 가지 않는다, 우리가 힘이 빠지지 않도록 끝까지 도와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세월호 가족 위한 힐링 콘서트...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엄마 아빠"

이날 한 시간 넘게 진행된 촛불 문화제는 자식을 잃고 300여 일 넘게 투쟁해온 세월호 엄마 아빠를 위한 '힐링 콘서트'였다. 

고3 시절부터 세월호 농성장을 찾아 '영석 아빠' 오병환씨와 친해졌다는 장한나(20, 여)씨는 오씨가 좋아한다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연이어 불렀다. 특히 장씨는 떠나간 연인을 그리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사가 자식을 잃은 자신들의 심정과 똑같다고 했다는 오씨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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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열린 설맞이 촛불문화제에서 장한나(20)씨가 세월호 엄마 아빠들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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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엄마들을 위한 노래도 빠뜨리지 않았다. 장씨는 '엄마도 아리따웠던 때가 있었겠지, 그 모든 걸 다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는 노래 가사에서 청와대 앞 청운동 농성장과 광주 재판 현장에서 만난 세월호 엄마들 모습이 떠올랐다며 '엄마로 산다는 것은'(SBS 'K팝스타4' 출연자 이설아 자작곡)을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2월 한 달간 '농성장 지킴이'를 자청한 대학생 가수 최믿음씨도 에릭 클랩튼의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에 이어 자작곡인 '마음아 너는 어디로'와 '그대 빛나는 사람'으로 참가자들의 마음을 달랬다. 

최씨는 "한 달 전 농성장에서 처음 공연하고 나서 매일 공연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민우 아빠에게 겨울이라 농성장을 지킬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거의 매일 농성장에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오병환씨는 "오늘 비가 와서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설 쇠고 우리 걱정해서 많이 온거죠"라고 묻고는 "덕분에 힘이 난다, 올해 제대로 싸워보겠다"고 다짐했다. 촛불 문화제를 마친 참가자 50여 명은 비를 맞으면서도 소원지를 태운 촛불을 든 채 인사동까지 '달빛 행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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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 때 벗겨낸 제2기 민주주의 건설해야

등록 : 2015.02.2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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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시민들이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현수막을 들고 거리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민들의 요구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지만 이들이 원했던 진정한 민주화는 아직 요원한 상태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정치혐오증’ 만연하고 제3세력 등장하지 못해

‘반독재’에 입각한 대립으로 존재감 찾는 야당,
87년 체제의 실패 극명하게 드러내

‘권위주의’ 때 벗겨낸 제2기 민주주의 건설해야

[한겨레21]

 

 

지난 2월8일 신임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에 문재인 의원이 선출됐다. 문 의원은 첫 일성으로 “민주주의 서민경제를 계속 파탄낸다면 박근혜 정부와 전면전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취임 2년 동안 인사 참사, 복지 공약 후퇴, 측근의 국정 개입 의혹 등을 일으키며 지지율 최저 상황을 맞고 있는 박 대통령에 대한 선전포고인 셈이다. 표면적인 모습만 놓고 보면 2012년 대선 당시에 벌어졌던 선명한 여야 대결 구도가 다시 돌아온 듯하다. 그러나 지금 새정치연합 앞에 놓인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는 전체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12월 헌법재판소에 의해 통합진보당 해산이 결정된 뒤 진보세력은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제1야당인 새정치연합은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제대로 된 대안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도 지지율 급락 등 박근혜 정부 들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유권자들은 이들 모두에게서 등을 돌린 채 무당층으로 돌아서는 상황이다. 2015년은 진보세력에게는 물론 여야 두 거대 다수당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다.

 

<한겨레21>은 여야를 포함해 한국의 정치체제가 이처럼 위기를 맞고 있는 원인을 ‘권위주의’에서 찾았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정당 간 자율 경쟁이 본격화되는 등 민주주의의 제도화는 어느 정도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사회’라는 데 토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제도만 바뀌었을 뿐 한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권위주의는 제대로 청산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정당체계는 권위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보수적 양당체계’가 더욱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폐쇄적인 정당체계 안에서 우리나라 정당은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제대로 받아안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지난 28년간 누적돼온 정당정치의 문제점을 분석해봤다. _편집자

 

 

1987년 6월 항쟁에서 거리로 뛰쳐나와 ‘독재 타도’를 외쳤던 사람들은 민주화가 이뤄지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독재를 청산하고 대통령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다면 사회는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꿈은 민주화 이후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노동자, 중소상공인, 취업준비생 등 서민들의 고통은 날로 심해지고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정당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민주화 이후 자율적인 정당 경쟁이 시작된 뒤에도 명실상부한 제3당으로 성장하지 못한 진보세력의 실패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고통받는 시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받아안지 못한 새정치민주연합과 새누리당 등 대한민국 정당 전체의 실패다.

 

사실상 보수만 있는 정치적 대표 체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이러한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보수적 민주주의’라고 정의했다. 그는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보수적 민주주의라고 정의하는 것은 1980년대 거대한 사회운동을 통해 이루어진 한국의 민주화가 제기했던 여러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계기들은 점차 약해진 반면 변화를 거부하는 힘들은 보다 조직화되고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1997년 처음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2월 대통령 취임식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최 교수는 또한 한국의 정치체계를 ‘보수적 양당체계’로 규정했다. 그는 같은 책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매우 협애한 이념적 대표 체제, 사실상 보수만을 대표하는 정치적 대표 체제에 있다고 본다. 내용적으로 보수 편향의 정치 구조는 민주화 이후에 변화되기보다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한국 정당체계 안에서 민주노동당 출범이나 안철수 신당 등 제3당을 만들려는 세력들의 시도가 끊임없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거나 군소 세력으로 남았다. 그 결과 2015년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새정치연합과 새누리당이라는 ‘보수 양당체계’가 더욱 공고하게 자리잡았다. 이는 우리나라의 정당체계가 1987년 이전의 ‘보수 양당체계’(한국민주당·민주정의당)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각에서는 새정치연합의 이념 성향은 보수가 아니라 중도 혹은 진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의원들의 이념 성향을 조사해보면 새정치연합에선 자신을 진보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이 당 밖으로 표출될 때는 대북관계라는 분야 외에 사회·경제적으로는 보수인 새누리당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견해가 대다수다. 박찬표 목포대 교수는 “경험 자료를 통해 일치되는 견해는 ‘(두 당 사이에) 이념적 차이는 있는데 그게 대북정책, 남북정책이라는 분야에 한정됐다’는 것이다. 사회·경제 정책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새정치연합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받아들인 부분이나, 노무현 정부에서 경제성장에 집착하면서 양극화를 심화한 것도 이들의 보수성을 설명해준다. 현재 정치권에서 불거지는 ‘증세’ 논란만 봐도 누가 새정치연합이고 누가 새누리당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막연한 정서, 반정치주의, 제한된 다원주의…

 

지난해 7월 세월호 유가족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 협상에 유가족 참여 등을 요구하며 침묵 연좌 농성을 벌이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에서 여야 두 정당은 유가족 등 국민을 대표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정치적 무능함을 보였다. 김경호 선임기자 ae@hani.co.kr

 

새정치연합이나 새누리당의 이념적 특성이 보수든 중도든 ‘권위주의’라는 측면에서 더 중요한 것은 두 당 사이의 이념 성향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다. 스페인 정치학자 후안 린스는 권위주의의 특징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분명한 이데올로기 없이 막연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사고방식(Mentality)에 의존하는 것이고, 둘째는 시민들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반정치주의를 동원하는 것이고, 셋째는 야당을 집권의 범위 밖으로 두는 ‘제한된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현재의 한국 정당체계는 서로 이념적으로 구별되지 않고 당 스스로도 정체성이 모호한 두 개의 당이 정치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의 첫 번째 특징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더해 유권자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정치혐오증’과 제3세력이 정치권에 등장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 또한 우리나라가 아직 권위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이런 권위주의적 구도는 어떻게 해서 굳어지게 됐을까. 다양한 이념 차이 속에서 경쟁하고 협의하는 ‘다원성’을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심지 못하고 오히려 권위주의로의 역행을 불러오게 된 데는 무엇보다 제1야당인 새정치연합의 책임이 가장 크다. 새정치연합이 제1야당으로서 보여온 행태는 여전히 30년 전의 독재 대 반독재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오로지 새누리당에 반대하는 데만 집중해온 것처럼 보인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담론에서 (새정치연합은) 여전히 ‘반독재 민주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이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됐으면 상대방을 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경쟁자로 봐야 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독재로 밀어붙이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게 새정치연합의 모습이다”라고 비판했다.

 

새정치연합이 이렇게 독재 대 반독재 구도에 매달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새누리당과의 이념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념적으로 차이를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쪽으로 더 심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서로의 이념 간극이 적음에도 양극화 정치는 더욱 심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누가 집권세력과 대통령을 더 세게 공격하느냐 하는 ‘외부화 경쟁’이 ‘양극화 정치’를 부추겨왔다. 다수 유권자를 설득할 수 있도록 대안 정부로서 조직적 준비를 하기보다는 누구든 상대를 공격하려는 열정만 지배하는 게 지금의 새정치연합의 모습이다”라고 지적했다.

 

새정치연합이 최근 새로운 지도부를 꾸리면서 ‘선명 야당’이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이런 점에서 오히려 우려스럽다는 지적도 있다. ‘선명 야당’이라는 구호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자신들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경미 정치발전소 정책팀장은 “새정치연합은 ‘박근혜 정부가 나쁘다’는 구호를 자신들의 무능력함에 대한 핑계로 삼아왔다. 새정치연합이 최근의 연말정산 논란이나 지난해 세월호 사태 등에서 내놓은 대안이 하나도 없지 않나. 이명박 정부 이후 야당이 이슈를 선점한 적은 없고 ‘4대강’ 등 정부 비판만 해왔다. 이것은 일종의 권위주의의 유산이면서 새정치연합을 허약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고 분석했다. 상대방을 적이 아닌 협의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대안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으로 대립각을 세울 때라야 ‘다원성’을 특징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성숙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폐쇄적으로만 발달해온 한국의 정당‘체계’

 

새정치연합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평가받는 또 다른 이유는 잘못된 방향의 정당 조직 개혁이다. 새정치연합은 2000년대 초반에 ‘권위주의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집단지도 체제, 완전국민경선제도, 의원 자율성 강화 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대대적인 당 개혁에 나선 바 있다. 이 방식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논쟁이 있지만 최장집 교수, 박상훈 대표, 박찬표 교수 등은 이러한 당 개혁이 당의 리더십을 약화하고 당의 조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분석한다. 박상훈 대표는 “정당체계(한 사회에 나타나는 정당들의 분포)는 사회의 다원적 갈등 구조에 맞게 ‘폭넓은 구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정당체계와 달리 ‘정당조직’은 ‘유기적으로 구조화’돼야 한다. 한마디로 단단하게 조직돼야 한다는 말이다.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정당체계’와 동시에 ‘응집적이고 강한 정당조직’이 민주주의의 가치에 상응하는 정당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간 한국 정치에서 정당체계는 더욱더 폐쇄성이 심화된 반면, 정당조직의 개방성은 정당 자체를 작동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아무렇게나 실험되었다. ‘체계’에 맞는 개혁의 원리(개방적이어야 한다)와 ‘조직’에 맞는 개혁의 원리(응집적이어야 한다)가 서로 거꾸로 적용된 탓이다”라고 지적했다.

 

박찬표 교수도 ‘민주 개혁파의 정당 개혁론 비판’(<논재으로서의 민주주의>)이라는 글에서 과거 열린우리당의 개혁 실험은 당 조직을 해체시키고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책에서 “개혁파는 (국민경선제도 등을 통해) 당원 및 지지자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당의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지만, 제도화의 수준이 취약한 상태에서 지나치게 이상주의적 대안을 급속히 추구한 결과 당 자체의 정체성을 위기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개혁파는 권력 분산을 민주화의 핵심으로 이해하고 당정 분리, 집단지도 체제, 투톱 체제, 원내 정당화, 의원 자율성 강화 등을 추구했는데 이는 결국 정당 리더십 해체로 인해 당의 정체성과 응집성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도 “국민경선은 편법이다. 물론 국민의 의견을 받아안는다는 개방성의 측면도 중요하지만, 선결돼야 하는 과정이 당원에 기초한 정당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걸 아예 제쳐버리고 인기 있는 사람이나 당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뽑게 되면 당내 분란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청와대와 지역 기반에 의존하는 새누리당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채진원 교수는 ‘완전국민경선제도’가 정당을 약화한다는 주장에 대해 “현실은 국민 참여와 개방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그것을 막고 자꾸 진성당원 중심으로 가자고 하면 안 된다. 진성당원이 생기면 좋겠지만 생기지 않는 현재의 조건에서 이를 계속 추진하면 특정 지역이 과두 대표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네트워크 정당 모델과 오픈프라이머리는 (당원이 중심이 되는) 대중정당의 한계를 보완하자는 의미다. 당원 공급이 안 되니 바깥에 있는 집단지성의 참여를 빨아들여서 정당의 정체성을 더 강화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당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이후 새정치연합은 정체성의 혼란과 함께 심각한 리더십의 부재를 겪으면서 유권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박상훈 대표는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그럴듯한 논리로 정당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해 ‘여론이 지배하는 정치’였다. 여론조사가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되면서 시민을 구성하는 계층과 집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고 무정형의 ‘국민 여론’만 부각됐다”고 진단했다. 정당의 역할이 국민을 대표할 사람을 공천하고 선거를 통해 이에 책임을 지는 것인데, 공천을 일반에 맡겨버리면서 정당의 역할 자체가 사라지고 책임 또한 없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결국 ‘권위주의 청산’을 기치로 내건 개혁의 방향이 거꾸로 한국 정당체계의 민주주의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지적이다.

 

“새누리, 위기를 다룰 줄 아는구나”

 

2010년 말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단독 예산안 처리를 막기 위해 국회 의장석을 차지하고 있던 야당 의원이 단상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고 있다. 과거 여야 의원들의 몸싸움은 시민들에게 ‘정치혐오증’을 불러일으켰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그렇다면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권위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것에 새누리당의 책임은 없을까. 새누리당은 그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집권을 놓지 않았던 세력이다. 이들은 권위주의 시대부터 집권여당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누려왔던 ‘힘’을 여전히 내려놓지 못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은 정치뿐 아니라 사법부와 행정부 등 온 사회의 구석구석에 뻗어 있다. 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이나 지난해 ‘정윤회 문건 의혹’에서 드러난 정치 검찰의 행태, 헌법재판소의 유례없는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등의 사건은 집권여당이 가진 권력 자원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밖에도 박근혜 정부 이후 2배로 늘어난 불심검문 등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권위주의의 유산도 여전히 건재하다. 김경미 팀장은 “새누리당은 지금까지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힘을 써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권위적인 정부의 힘에 의해 검찰·국회·관료·재벌·언론까지 단단히 뭉쳐 (국가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자체의 행태로 놓고 봤을 때도 새누리당은 집권여당으로서 청와대에 종속적인 ‘위성 정당’의 역할만을 해왔다는 점에서 여전히 권위주의 시대의 관행을 놓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청와대에 휘둘려 제대로 된 책임정치를 하지 못해왔다는 점과, 지역 기반 외에 자율적으로 새누리당의 당원임을 밝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당의 기반은 매우 취약하다.

 

그러나 최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당선은 그동안 당이 청와대의 ‘오더 정치’에 이끌리는 등 권위주의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근거가 되면서 동시에 새누리당이 이런 권위주의를 극복할 준비가 돼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최근 <경향신문>에 쓴 칼럼에서 “역시 새누리당은 위기를 다룰 줄 아는 정당이다. …총선을 1년여 앞둔 2015년 2월 예기치 않게 엄습한 위기, 새누리당은 위기 탈출의 해법으로 유승민 카드를 선택했다. 2004년 17대 총선과 2012년 19대 총선 때의 위기 돌파와 같은 해법이다. …열린우리당 시절 위기 앞에 남 탓 공방에 당내 갈등만 키워 결국 무너졌던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으로선 엄두도 내기 어려운 터닝이고 기율이다. 선당후사를 외치는 건 새정치민주연합인데, 실제 그 정신이 작동하는 건 새누리당”이라고 분석했다. 이제 새누리당도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진정한 보수주의로 가는 길을 걸어야 할 시점에 놓였다.

 

한국에서 공고하게 자리잡은 두 개의 정당은 이렇듯 여전히 권위주의의 유산을 끌어안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를 극복해야 할 시점에 놓였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지금이 미완의 ‘87년 체제’를 청산하고 ‘권위주의’의 때를 완전히 벗겨낸 제2기의 민주주의를 건설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대한민국 정치체제의 제2기가 건설돼야 할 시점이다. 2기 체제는 어느 한 주체가 독자적으로 만들기보다 상호작용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당체계 차원에서) 일종의 빅뱅 같은 것이 올 수도 있고 (정당) 내부가 전반적으로 교체될 수도 있다. 아니면 지금 저 틀대로 좀더 유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체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것이다. 진보는 망가졌는데 새정치연합만 살아난다거나, 새누리당만 살고 새정치연합과 진보는 무너진다든지, 이런 방식보다는 당분간은 각자도생하면서도 서로 맞물리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계층을 대변하는 다양한 정당이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합의점을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의 정당체계를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현재로서는 폐쇄적인 한국의 정치체계를 단번에 뒤엎어줄 정치 기획자나 정치적 리더를 찾아내는 일도 요원해 보인다.

 

‘정당의 복원’, 정공법이 해답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정공법이 해답일 수 있다. 바로 ‘정당의 복원’이다. 박상훈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비판적 무당파들이 진짜로 바라는 것은 제대로 된 정치, 제대로 된 정당이지 정당이 아닌 정치, 나아가 정치가 아닌 다른 수단이나 대안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야당 내 정당 개혁론은 공천권을 행사할 당권과 차기 대선에 나설 대권 후보 선출 문제를 둘러싼 제도 논쟁으로 일관해왔다. 왜 정당 개혁론을 말하는 누구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열정적 팀으로서 강한 정당을 만드는 문제, 집권 정부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야당을 만드는 문제, 유능한 미래 정부가 되기 위해 예비 내각을 갖춘 대안 정당을 만드는 문제, 일상의 시민 삶을 보호하는 생활 지킴이 정당을 만드는 문제, 함께 교육하고 함께 정책을 만드는 당원과 적극적 지지자들의 자랑스러운 정당 만들기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할까.”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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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운명 재촉한 '살인 물가'의 추억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8> 경제 개발, 열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0∼1970년대 경제 개발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사안 중 하나가 바로 노동 문제다. 오늘날 다수의 평범한 한국인이 매일 감당해야 하는 현실과 맞닿은 문제이기도 하다.
 
서중석 : 이 시기 한국 경제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정부가 노동자를 통제하고 노동조합도 통제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 재벌을 비롯한 기업들이 그런 정부에 의존해서 노동자를 압박하고 노조를 어용화해 이윤을 높이려는 쪽으로만 신경을 많이 쓰게끔 하는 면이 1970년대에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10인 이상 고용한 기업에서 일한 노동자를 보면 1970년에 108만4063명으로 집계됐는데 1975년에는 151만여 명이 된다. 1980년에는 이게 297만여 명이 된다. 전체 고용 노동자는 1970년에 378만 명, 1980년에 648만 명이다. 그러니까 한국이 고도 산업 사회로 들어간 것은 중화학 공업 때문만이 아니다. 이러한 노동자 상황을 보더라도 한국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산업 사회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걸맞은 노동 정책이 있어야 하고 적절한 노동 운동도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업도 살고 노동자도 사는 건강한 사회로 한국이 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의 경우 권력이 그 길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이분이 분신자살하면서 노동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영세 기업들에선 근로기준법이 있는지도 1970년대에 거의 몰랐다고 돼 있고, 어느 정도 규모가 큰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근로기준법을 과연 제대로 지켰느냐고들 이야기하고 있다. 
 
주당 근로 시간도 한국이 유난히 길었다. 1965년에 한국은 주당 57.0시간인 데 비해 필리핀은 45.6시간, 대만은 44.3시간이었다. 우리하고 대만은 비슷하게 발전했는데도 그랬다. 1970년에 한국은 52.3시간, 대만은 그보다 무려 10시간 가까이 적은 43.3시간이었다. 1975년을 보더라도 한국은 50.5시간인데 대만은 더 낮아져서 38.8시간으로 됐다. 1980년에는 한국이 53.1시간, 필리핀이 46.0시간, 그리고 싱가포르는 50.9시간으로 높게 나왔다. 그런데 대만은 41.1시간이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한국과 대만이 성장률에서 같은 페이스로 가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 이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 분신이 상징하는 참혹한 노동 조건, 박정희 정권이 부추겼다
 
▲ 남양주 모란공원에서 이소선 여사 3주기 추도식이 열린 2014년 9월 3일, 전태일 열사 동상의 눈에서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 남양주 모란공원에서 이소선 여사 3주기 추도식이 열린 2014년 9월 3일, 전태일 열사 동상의 눈에서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문제가 훨씬 심각했던 1960∼1970년대 기록들을 보면, 참혹하다는 말이 결코 지나치지 않은 노동 조건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놓여 있었다. 
 
서중석 : 전태일 분신 44주년이던 2014년에 한 신문이 1970년대 의류 제조업체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 상황에 대한 기사를 실었는데 그걸 한 번 보자. "하루 노동 시간이 13시간에서 16시간, 휴일은 한 달에 이틀가량", 이건 전태일 전기(<전태일 평전>)를 읽어보거나 그 시기 청계천 피복업체에 대한 다른 여러 기록을 봐도 아주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정말 눈물 나는 게 얼마나 많나. "임금은 일당이 약 60원에서 100원, 그러니까 한 달에 1800원에서 3000원 정도 했다. 이때 신문은 20원, 새마을 담배는 10원, 서울 시내버스비는 10원이었다." 그 당시 작업 조건이 얼마나 나빴나. 폐결핵이 만연하고 한 사람이 수많은 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런데도 건강 검진은 과연 제대로 받을 수 있었나? 그 시기 기록들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지 않나. 
 
이러한 열악한 노동 조건을 부추긴 건 정부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 '수출 자유 지역 설치법'이 만들어지고, 그해에 외국인 투자 기업의 노동조합과 노동 쟁의를 규제하는 임시 특례법이 또 만들어지지 않나. 그러면서 1971년에 악명 높은 국가보위법이 탄생하는데, 여기서는 단체 교섭권, 단체 행동권을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율성을 빼앗아 단체 교섭, 단체 행동을 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에 더해 1972년 유신 쿠데타가 일어난 후 비상국무회의에서 1973년에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 같은 것들이 다 개정되지 않나. 비상국무회의라는 건 도대체가 법적으로 있을 수도 없고 헌법상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인데, 거기서 그렇게 했다. (법 제정 및 개정은 국회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한 후, 비상국무회의에서 국회의 권한을 행사하게 만들었다. 비상국무회의 의장은 물론 박정희 본인이 맡았다. '편집자') 이런 것들을 통해 국가 권력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노조 활동, 노동 운동을 통제할 수 있게끔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래서 유신 시대에는 단체 행동권이란 건 전면 규제된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정말 불가사의하다고 해야 할까, 신기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할까 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뭐냐 하면 1972년, 1973년, 1974년 자료들을 보면 집단 노사 분규 발생 상황이 0으로 처리돼 있다. 그런 건 전혀 없다는 식이다. 한국노총 관련 자료에도, 다른 데에도 그렇게 돼 있다. 단체 행동권이 전면 규제된 상황이니까 집단 노사 분규가 발생할 수 없다고 연역한 모양이다. 그래서 공식적으로건 비공식적으로건 발표되지 않아 0이 돼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노동자가 많은 사회에서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 아닌가. 그러니까 이제 또 발표가 된다. 1975년에 133건, 1976년에 110건 이런 식으로 나온다. 
 
중앙정보부·경찰·노동청 등을 총동원해 노사 관계에 개입 
 
프레시안 : 노사 갈등 상황을 0으로 처리하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는 유신 쿠데타 세력이 어떤 사회를 원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노동자를 통제하려 했나.
 
서중석 : 사실 1960년대에는 정부가 임금 교섭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1971년부터 적극 개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임금에 적극 개입할 뿐만 아니라, 이제 노조를 과거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회유하는 정책으로 나아갔다. 노동청 등 정부 기관이나 경찰, 중앙정보부 등을 통해 일상적으로 노사 관계에 개입했다. 중앙정보부는 노총 및 각 산별 노조에 담당관을 두고 주기적으로 사찰했다. 또 일부 간부를 매수하거나 후원했고 그들과 긴밀히 결탁했다. 요직이던 노총 사무총장, 그리고 산별 노조 위원장급들에게 매월 기밀비를 지급했다. 그러면서 노동자 동태를 일일 보고하게 하고, 주요 노동 문제에 개입했다. 중앙정보부 요원은 노총 중앙위원회나 각종 회의에 동석했다. 그러면서 회의 안건을 미리 받거나 성명서, 담화문 같은 걸 사전에 검토하는 걸 볼 수 있다.
 
노사 분규가 일어나면 유신 정권은 바로 기동 경찰을 투입했다. 대규모 공단 등 산업 지대에는 관할 경찰서의 정보과를 중심으로 노사 관계 사찰을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회사 경영진이 알려주면 해당 노동자라든가 그 노동자의 가족, 친구, 동료까지 조사했다. 윤진호 교수가 쓴 글에 의하면 수출 자유 지역 경찰과 경영진 대표가 매일 회의를 통해 친노조 성향 노동자를 색출했다고 그런다. 그리고 노동 운동 회유, 보상 정책으로 노동절이 되면 노조 간부들을 포상하거나 그들에게 훈장을 줬고, 중앙정보부 등에서는 노조 지도부의 개인 비리를 캐서 압박하고 회유하고 친정부적 인물이 위원장에 당선되도록 하는 작업을 벌였다. 
 
프레시안 : 사회 전체를 커다란 병영으로 간주하고 구성원들을 틀어쥐려는 시도였다.
 
서중석 : 1970년대 유신 체제는 병영화된 사회라고 얘기할 수 있다. 제일 먼저 학원 병영화가 강력하게 추진됐고, 그와 함께 병영화 현상이 공장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장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그러한 병영화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 전문가 이원보가 쓴 글을 보면 공장 새마을운동은 1940년 일제의 산업보국회와 유사하다고 돼 있다. 1977년까지 3개소의 공장 새마을 연수원이 상공부 소속으로 지정돼 운영됐다고 한다. 왜 공장 새마을 연수원이 상공부에 속했는지도 의문인데, 하여튼 여기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무려 3만8797명이라고 돼 있다. 놀라운 일이다. 
 
이 공장 새마을 연수원에서 교육받은 한 여성 노동자가 쓴 글을 보면, 운동장에서 군대식으로 점호를 했고 교관 호령에 맞춰 같이 달렸다고 한다. 공장 새마을운동은 정부 방침 하에 경영 측에서 일방적으로 지휘, 명령하는 것이었다. 봉건적, 온정적, 권위주의적 가족주의 아래서 노사 협조 의식을 주입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노사 간 대립의 본질을 은폐하고, 기업 주도 아래서 노동 시간을 연장하고 열악한 작업 조건을 감내하면서 품질 향상에 힘쓰도록 하고, 생산성 향상 운동을 벌이도록 무보수로 노동자를 동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 공장 새마을운동이라고, 그 시기에 섬유노조 간부였고 그 후 노동 전문가로 활약하는 이원보 씨 글에 나와 있다.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이렇게 노동자와 노조를 통제 대상으로만 봤다. 그 때문에 노동자들은 아주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하면서 저임금을 받았다. 물론 중화학 공업은 꼭 저임금은 아니었다. 1970년대에 임금도 많이 오른 때도 있었다. 작은 사업장일수록 저임금이었다. 양면을 다 봐야 한다.
 

 

와우아파트와 김현옥, 그리고 '작은 박정희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은 작업장에서 이처럼 노동자들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작업장 바깥을 살펴보면, 박정희 정권의 서민 정책은 어떠했나. 
 
서중석 : 이런 노동 정책을 썼으니까 서민을 위한 정책은 어땠겠느냐는 불문가지인데, 몇 가지만 이야기하자. 1960∼1970년대 하층 노동자, 빈민 등과 관련 있는 서민 정책을 상징하는 것으로 두 가지를 많이 이야기한다.
 
하나는 와우아파트 도괴(倒壞) 사건이다. 1970년 4월, 5층 아파트 건물이 성냥갑 무너지듯 폭삭 주저앉아서 33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다쳤다. 이 와우아파트 사건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히 '서민 아파트가 이렇게 무너져내렸다', 이것만이 아니다. 그 아파트를 짓게 한 사람이 바로 김현옥 서울시장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불도저 건설'을 한 사람으로 아주 유명하다. 박 정권 경제 정책을 상징하는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가장 쉽게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마도 이 김현옥 시장이 아닐까 싶다. 김현옥은 군인 출신으로 부산에서 이미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했고, 그걸 바탕으로 서울시장으로 올라온 사람이다. 이 사람은 와우아파트 사건 때문에 해임을 당하지만 바로 내무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이런 걸 보더라도 김현옥이 얼마나 상징적인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김현옥 서울시장 때 만든 시민 아파트를 보면 전부 다 언덕바지에다가 아파트를 지어 놨다. 서울이 언덕바지로 돼 있는 도시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렇게 한 게 아니었다. 그 당시 서울시 간부였고 나중에 교수가 되는 분이 쓴 글에 그 이유가 나와 있는데, 언덕바지에 지어 놔야 박정희 대통령이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잘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계 고가 도로, 이것도 박 대통령한테 잘 보이기 위해 지었다고 돼 있다.
 
프레시안 : 불도저 시장 하면 김현옥 외에 떠오르는 인물이 또 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이다. 서울시장 시절 MB도 그렇게 불렸다. MB식 불도저가 공공성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는 토건 자본의 배만 불리고 생태계를 망가뜨린 4대강 사업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MB건 김현옥이건 그 행태와 방식을 보면 '작은 박정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비싼 수업료를 치른 한국인들이 그런 '작은 박정희들'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지가 한국 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변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오면, 박정희 정권의 서민 정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서중석 : 또 하나는 1971년 8월에 일어나는 광주 대단지 사건이다. 다 알다시피 당시 서울에는 엄청나게 많은 무허가 빈민 주거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한편으로는 시민 아파트 같은 걸 지어서 거기에 살게 하기도 했고 무허가 주택을 양성화하는 작업도 했지만, 제일 큰 정책 중 하나는 이 무허가 주민들을 서울 밖으로 나가서 집단 거주하게 한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장소가 지금은 성남으로 불리는 광주 대단지였다. 5만여 명이나 그리로 몰아냈다. 정부에서 이주만 시켜놓고 방치하자, 이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 각종 세금 면제, 토지 불하 가격 인하, 실업자 구제 등을 요구했다. 양탁식 서울시장이 약속을 어기고 나타나지 않자, 이 사람들이 성남 출장소에 방화하고 사업소 본부 건물과 차량을 불태우고 지나가는 차량을 빼앗아 거리를 질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게 박정희 정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한 건 아니었지만, 그 당시 굉장히 큰 사건이었고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줬다. 특히 운동권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이 시기 빈민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는 조세희가 1978년에 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난쏘공'), 우리나라에서 최장기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그 책에 잘 드러나 있다. 언덕바지 서울과 서울 주변의 그 많은 언덕바지, 개천가, 뚝방촌 같은 데에 얼마나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았나. 
 
ⓒ이성과힘

ⓒ이성과힘

 
 
프레시안 : '난쏘공'은 2005년 200쇄를 돌파했다. 그해 조세희 작가는 비정규직과 농민 문제를 이야기하며, 200쇄 출판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운 기록"이라고 말했다. 비참한 시대를 기록한 소설이 200쇄를 돌파하며 계속 읽히는 것은 작품의 밑바탕이 된 시대의 불행이 여전하기 때문이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카메라를 들고 투쟁 현장을 찾아다니며 시대의 아픔과 함께한 작가다운 이야기였다. 다시 돌아오면, 박정희 정권 시기의 급격한 공업화는 환경 문제도 불러일으켰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 때는 지금과 달리 환경 문제는 고려하지 않았다. 환경 문제를 얘기하면 '사치다. 지금 그런 얘기를 꺼낼 때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고 그랬다. 공해 대책이라는 걸 세우던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장이 들어선 공단 등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공해가 크게 문제가 됐다. 
 
예컨대 진해화학을 보면, 진해 주변에 수많은 공해 물질이 배출돼 큰 어려움을 줬다. 서울 주변인 안양천 일대도 그랬다. 특히 제일 큰 공단이 들어선 울산은 대기 오염, 폐수 등으로 농수산물 피해가 아주 컸다. 그래서 울산 일대에 대한 기자들의 긴 취재 기사, 원고 매수가 200∼300매에 이르는 취재 기사도 나오고 그랬다. 서울 대기 오염은 1965년보다 1967년에 5배, 1969년에 8배가 증가하는 걸 볼 수 있고, 1967년에 한강물의 34퍼센트가 상수도로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오염돼 있었다. 또 소음 공해도 아주 심각했지만, 이런 것을 돌본다는 건 사치라고 여기던 사회였다.
 
중화학 공업이 이러한 공해를 더 가중시키는 역할을 했다. 당시 중화학 공업은 공장에서 나오는 부산물 재처리라든가 공해 방지 시스템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기술적 어려움도 따랐겠지만 '기업 비용이 늘어나면 빨리빨리 성장하는 데 어렵다', 이런 것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1978년을 보면 황이산화물 배출이 아주 높아진 것으로 돼 있는데, 그렇게 된 원천을 공장에서 50.4퍼센트나 제공한 것으로 나와 있다.
 
박정희 이어받은 전두환도 투덜거린 박정희 집권기 '살인 물가' 
 
프레시안 : 박정희 집권기 경제 개발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물가 문제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 시대에 물가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심하게 했나. 이게 1979년 10월 부마항쟁을 불러일으킨 큰 요인 중 하나였다. 또 엄청난 투기를 불러일으킨 중요 요인이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런 부분들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전두환 정권 이래 지금까지 30년 넘게 우리는 한 자릿수 물가에서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자릿수 물가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특히 서민, 노동자, 빈민들을 살기 어렵게 하는 것인지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 겪어본 사람들은 그 고통을 잘 안다.
 
한 정치가가 유신 시대에 박정희 정권은 3대 환상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성장률은 높을수록 좋다', '수출 실적은 많을수록 좋다', '모든 가격은 억제할수록 좋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성장, 수출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한국은 인플레이션 중병에 걸린 것이다. 이것도 대만과 큰 차이가 나는 걸 볼 수 있다. 1970년대에는 성장을 위해 환경만 희생한 게 아니라 물가도 희생했던 것이다. 중단 없는 대외 의존적 성장 지상주의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이다. 
 
이와 달리 대만은 가격 안정 그리고 농촌 개발에 상당히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서, 성장에 집착한 박정희 대통령과는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대만을 통치하던 국민당이 박정희 정권과 아주 다르게 부정부패를 철저히 추방하려고 했던 것도, 부패 때문에 중국 본토에서 쫓겨난 경험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들 이야기하지 않나. 이와 더불어 국민당은 본토에서 패배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인플레이션 만연이었다고 분석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때로는 성장 속도를 제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한 1977년에 대만은 93억 달러를 수출했다. 인구가 우리나라의 반절밖에 안됐는데 굉장한 것 아닌가. 또 이해 성장률 역시 한국만큼 높지는 않았어도 8.1퍼센트를 기록했다. 그런데 도매 물가 상승률은 2.8퍼센트, 소매 물가 상승률은 7퍼센트였던 것으로 돼 있다.
 
그러면 한국은 어떠냐. 이미 1960년대에도 물가 상승률이 두 자릿수인 때가 많았는데 특히 1970년대에는 아주 심각했다. 도매 물가 상승률을 보면 1974년에 41.9퍼센트, 1975년에 26.1퍼센트를 기록했다. 1980년에는 38.9퍼센트를 기록했는데, 이게 초기 자료에는 40퍼센트가 넘는 것으로 나오나 보더라.
 
그래서 <전두환 육성 증언>을 보면 물가 얘기도 많이 나온다. '정권을 맡게 됐을 때 물가 때문에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느냐. 1980년에 도매 물가 상승률이 40퍼센트를 넘었다', 전두환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유신 체제 말기와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건 1971년에서 1980년 사이에 도매 물가 상승률이 연평균 18.8퍼센트였다. 서울 소비자 물가는 같은 기간에 연평균 16.4퍼센트씩 올랐다. 이 시기에 물가 문제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프레시안 : 그 정도면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이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 시대에 있었던 엄청난 물가 상승은 노동자, 서민들의 생활을 크게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비생산적인 경제 활동에 의해 부를 축적하겠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투기가 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성장력을 억압하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키워 결국 박정희 유신 정권의 운명을 재촉하게 되지 않나. 
 
비정상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었는데도, 박정희 정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도성장을 하겠다고 집착했다. 그러다가 결국 부마항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박정희 정권 시대의 물가 통계는 정부의 물가 안정 정책에 따른 강력한 가격 규제를 기초로 작성됐기 때문에 실제 물가가 온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든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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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 맞는 사람과 마시면 천 잔도 부족하고

여러분은 ‘또 다른 나’를 찾으셨는지요?
 
정운현 | 2015-02-20 20:43:5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
酒逢知己千杯少(주봉지기천배소) 
話不投机半句多(화불투기반구다)

술은 마음 맞는 사람과 마시면 천 잔도 부족하고 
말은 마음이 맞지 않으면 반 마디도 많은 법이다

중국 당(唐)대의 시선(詩仙) 이백과 시성(詩聖) 두보가 당나라 수도 뤄양(洛陽)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두 천재 시인은 만나자마자 ‘첫 눈에 반한 남녀(一見鍾情)’처럼 한 눈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자 둘은 곧 의기투합하였습니다. 백년을 만나도 손님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천년을 사귄 듯이 친근한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호방한 기백의 낭만파 시인 이백과 고지식한 서민형 시인 두보. 둘은 어찌 보면 닮은 점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시(詩)를 통해 두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있었으며, 인생과 문학을 얘기하며 밤새 술판을 벌였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다 보니 그들에겐 ‘천 잔의 술’도 아마 부족했을 것입니다. 이날 밤 두 사람은 술에 취해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잤다고 합니다.

                   이백                                 두보

중국 사람들은 오랜 친구를 ‘라오 펑요우’(老朋友)라고 부릅니다. 오랜 벗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흔히 입에 올리는 속담이 바로 ‘지우펑즈지, 첸베이샤오’(酒逢知己千杯少)입니다. 그리고 이 말 끝에 뒤따라 나오는 말이 바로 ‘화 뿌터우지 빤쥐뚸’(話不投机半句多)입니다. 말하자면 대구(對句)인 셈이지요. 반가운 벗과는 천 잔의 술도 작지만 마음 맞지 않는 사람과는 반 마디 말도 싫다는 뜻입니다.

술 얘기 나왔으니 이백 얘기 하나 더 보태야겠습니다. 시선(詩仙)보다는 주선(酒仙)으로 더 잘 알려진 이백은 ‘달빛 아래서 혼자 술을 마시다’(‘月下獨酌’)이란 시에서 자신이 술을 좋아하는 이유를 두고 “하늘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술별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고(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땅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마땅히 술샘이 없었으리라(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라고 했습니다. 역시 이백답군요.


2. 
酒逢知己千杯少(주봉지기천배소) 
人生得己死无憾(인생득기사무감)

술은 마음 맞는 사람과 마시면 천 잔도 부족하고 
살면서 또 다른 나를 찾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

위와 비교할 때 첫 구절은 둘 다 같습니다만, 뒷 구절이 다릅니다. 혹자는 이렇게 댓구로 짝을 짓기도 하더군요. 제가 보기엔 이렇게도 어울리는 듯합니다. 여기서 공통점은 ‘사람’입니다. 전반에서는 ‘마음 맞는 사람’, 후반에서는 ‘나 같은 사람’입니다. 내용이야 그게 뭐가 됐든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밤새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이며, 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마 그럴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지기(知己), 지우(知友), 즉 나랑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명심보감> 교우편(交友篇)에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풀이하자면, ‘얼굴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나,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은 그 몇이리오.’라는 뜻입니다. 서로 인사하고 같이 밥 먹고 차 마신다고 해서 다 ‘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중에서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요, 한 사람이 일생에 만나는 사람은 대략 5000명 정도라고 합니다. 보기 나름이겠지만 적은 숫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생에서 만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우선 가족과 친인척, 학창시절 스승과 교우, 직장동료, 그 외 각종 인연들... 5000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옷깃만 스쳐도’식의 ‘인연’은 물론 대상이 아닙니다.

그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랑 잘 통하는 사람도 적거니와 나와 같은 사람, 즉 ‘또 다른 나’를 찾기란 참으로 어려운 노릇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란 두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런 친구 정도는 돼야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 ‘친구’란 동성일 수도, 이성일 수도 있으며, 이런 친구를 찾는다면 세상을 얻었다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또 다른 나’를 찾으셨는지요?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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