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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용역' 컨택터스 SJM폭력 행사 당시 경찰 신고 7건 녹취록 전문 입수

"경찰이죠? 사람들, 용역한테 맞고 있는데..."
"누가 맞아요? 세콤은 뭐하고 있는 거예요?"

[단독] '폭력용역' 컨택터스 SJM폭력 행사 당시 경찰 신고 7건 녹취록 전문 입수

12.09.17 17:28l최종 업데이트 12.09.17 17:28l
 
 
지난 7월 27일 직장폐쇄로 용역업체가 들어간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의 자동차 부품업체 에스제이엠(SJM). 컨택터스라는 용역업체가 고용한 인력들이 공장 후문을 막고 서 있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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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자 : 아무런 조치를 못하고 있고요. 경찰이 그 용역업체를 전경이라고 하는데요.
경찰 : 그 내용도 해가지고 보냈고요.
신고자 : 어이없지 않습니까?
경찰 : 여기다 따지시면 안 되고.
신고자 : 그럼 어디에다가 따지죠? 몇 번이죠. 몇 번이죠?
경찰 : 기다려 보세요. 거기 목래동이라고 했죠?
신고자 : 어이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어이가
경찰 : 어이가 없는 건 거기가 어이가 없는 거지 여기가 어이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신고자 : 그쪽 사람들(조합원들)은 그 사람들(용역)한테 맞고 있는데
경찰 : 누가 맞고 있어요?
신고자 : (용역들이) 행패부리고 차 파손시키고 기물 파손하고 사람 때리고 그러는데 (경찰은) 아무것도 못하지 않습니까?
경찰 : 그럼 세콤은 뭐하고 있는 거예요?
신고자 : 네?
경찰 : 세콤은 뭐하고 있어요?
신고자 : 공권력은 뭐 있죠? 공권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도와 달라는 거잖아요. 예?

경찰은 없었다. 검정 옷에 용역들이 곤봉과 방패를 들고 자신들을 흉내 내며 사람을 패는 모습을 지켜만 봤다. 용역 전투화에 짓밟히는 노동자들의 절규를 듣고만 있었다. 심지어 그 용역을 '전투경찰'이라고 칭하며 공권력의 폭력을 당연시했다. 지난 7월 27일 새벽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 자동차부품업체 에스제이엠(SJM)에서 발생한 일이다.

<오마이뉴스>는 17일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을 통해, 112종합상황실에 접수된 SJM 관련 신고 녹취록을 입수했다. 당시 경찰신고 정황이 일부 알려지기는 했지만 신고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전문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사건은 민간군사기업을 표방한 용역업체 '컨택터스'가 에스제이엠의 직장폐쇄 과정에서 조합원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러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현재 컨택터스 업체 관계자 4명과 SJM 임원 1명이 구속돼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녹취록에 따르면 사건 당일 오전 4시 55분부터 5시 27분까지 32분 동안 노조 조합원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사설경비업체(세콤)의 신고가 7번 있었다. 녹취록에서는 현장에 경찰이 출동했지만 "아무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 수차례 반복됐다. 용역업체의 폭력행위가 눈앞에서 벌어져도 '경찰이 꼼짝하지 않았다'는 정황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또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이 사설경비업체의 항의에 용역들을 "전경(전투경찰)"이라고 둘러댄 사실도 확인됐다. 폭력을 방관하는 모습에 항의하자 용역들의 폭력을 공권력으로 포장한 것이다.

"빨리 와주세요, 지금 죽겠어요, 사람 죽게 생겼어요"

지난 7월 27일 직장폐쇄로 용역업체가 들어간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의 자동차 부품업체 에스제이엠(SJM). 30일 오후 용역업체 컨택터스의 인력들이 공장 후문을 막고 있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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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신고가 접수된 시각은 27일 오전 4시 55분. 조합원으로 보이는 신원 미상의 신고자는 "여기 지금 깡패들이 와가지고, 지금 전 경력인 줄 알았어요. 전경인 줄 알았어요, 전경같이 복장을 하고 한 삼백여 명이 지금 와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곧 충돌이 있을 거 같으니까, 안에 지금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을 지금 밀어내려고 하니까 빨리 출동 좀 해주세요"라고 전달했다.

오전 5시 1분에 접수된 두 번째 신고는 SJM 공장의 사설 경비업체 측에서 이뤄졌다. 현장 소식을 보고받은 경비업체 근무자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신고를 한 전화다. 그는 "저희 직원이 아직 도착한 것은 아니고요, 저기 관리자 경비 아저씨 있죠"라며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있답니다"라고 신고했다.

4분 뒤 세 번째 신고가 현장에서 걸려온다. 역시 조합원으로 보이는 신원 미상의 신고자는 "사람들 맞고 지금 피흘리고 싸우고 있는데 지금 빨리 안 오냐고요, 빨리 좀 와주세요 지금 죽겠어요, 지금 사람 죽게 생겼어요"라고 급박한 상황을 전달했다. 이에 경찰은 "지금 순찰차 거의 도착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오전 5시 23분, 두 번째 신고를 했던 사설경비업체가 현장에 도착해 다시 신고를 한다. 현장에 출동한 경비업체 직원은 "경찰이 대응을 못하고 있어서요"라며 "저기 경찰이 용역업체랑 전경이랑 구분을 못해 가지고요, 자기네들이 불렀다고 하는데요"라고 말했다. 그는 "분명히 전경이 아닌데요, 용역업체가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용역업체 직원을 전경이라고 지금 얘기하고 있거든요"라고 반복해서 설명했다.

이에 112종합상황실 경찰은 "그건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게 확인해야 되요, 여기서는 그냥 경찰관을 파출소 직원을 보내드리는 거거든요"라고 말했다. 신고자가 "다시 그 쪽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문의하자 경찰은 "여기는 확인하는 데가 아니에요, 접수받아 그냥 보내기만 하는 데에요"라고 말했다.

오전 5시 26분에 걸려온 다섯 번째 신고자는 "(용역이) 현장 내에 지금 들어 와가지고 지금 흉기를 막 집어 던지고 있어요, 지금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거든요"라며 "제품이 엄청 날카로운데 그 제품들 지금 집어던지면서 막 그래서 지금 단원병원에 후송되고 그랬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는 "빠른 조치 좀 부탁 바랄게요"라고 덧붙였다.

공권력 포기한 경찰... "세콤은 뭐하고 있어요?"

지난 7월 27일 새벽 SJM 측이 공장에서 부분 파업 농성 중인 노조 조합원들을 강제로 내쫓기 위해 300여 명의 용역들을 투입한 가운데 한 여성 조합원이 용역들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붕대 등으로 응급치료를 한 모습.
ⓒ 금속노조 경기지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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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시 27분, 현장에서 경찰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자 사설경비업체가 다시 신고를 했다. 경비업체 직원은 "용역업체를 경찰이 전경이라고 하는데요, 어이없지 않습니까?"라는 항의를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경찰은 "왜 이렇게 성질을 부립니까"라며 "세콤은 뭐하고 있어요?"고 반문한다. 이에 신고자는 "공권력은 뭐 있죠? 공권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도와 달라는 거잖아요, 예?"라고 되물었다.

같은 시각, 마지막 신고 전화를 건 조합원으로 보이는 신고자의 말에는 현장의 공포가 그대로 전달됐다. 신고자는 "지금 사람들 맞고 지금 피 흘리고 싸우고 있는데 지금 빨리 안 오냐고요", "여기 깡패들이 쇠 덩어리 살인 무기를 막 던져가지고 사람들이 생명이 위협한데 빨리 와주세요"라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신고 녹취록에 따르면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의 사태 방관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용역 직원들을 "전경"이라고 말하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경찰의 소극적인 자세 지적을 넘어 용역업체와 경찰이 협력관계에 있다는 의심까지 제기될 수 있다.

진선미 의원실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현장에서 경찰이 용역을 전경이라고 한 게 명확하게 드러났다"며 "이것은 책임자를 징계하거나 사표를 쓰게 할 게 아니라 경찰과 SJM, 용역업체 컨택터스의 유착관계를 수사해야 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사건이 있은 직후 신고 녹취록을 경찰에 요구했지만 경찰은 각 신고에 대해 한 줄로 요약해 보내왔다"며 "수차례 급박한 상황이 신고 됐음에도 경기경찰청의 지휘라인은 손을 놓고만 있었다, 신고녹취록을 감추려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진 의원실에 따르면, 경찰은 현재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우문순 안산단원경찰서장의 징계를 진행하고 있다. 우 전 서장은 행정안전부에 사표를 제출한 상황이다. 징계나 유착관계에 대한 수사 없이 우 전 서장의 사표 수리로 마무리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한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오는 24일 용역업체 컨택터스의 폭력과 관련해 '산업현장 폭력 용역 청문회'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는 SJM의 김용호 회장 등 사측 관계자와 박종태 컨택터스 대표 등이 증인으로 채택됐다. SJM은 폭력 사태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아직까지 직장폐쇄를 계속하고 있다.

아래는 진선미 의원실에서 공개한 112신고 녹취록 전문이다.

[전문] 112신고 녹취록
SJM 112신고 녹취록1
접수번호 : 1747
접수시간 : 2012. 7. 27.(금) 04:55:50~(1분 13초)
신고번호 : 010-9XXX-XXXX
접 수 자 : 112종합상황실 경사 김○○

경 찰 : 경찰입니다.
신고자 : 여보세요
경 찰 : 네, 신고내용 말씀하세요
신고자 : 아. 경찰이죠?
경 찰 : 네
신고자 : 네, 여기 반월공단 안에 에스제이엠 밀런데요
경 찰 : 반월공단
신고자 : 네네, 목내동
경 찰 : 안산 목내동이요
신고자 : 네네
경 찰 : 안산 목내동 반월공단 내에 어디라구요?
신고자 : 네, 반월구 목내동 여기가 주소는 모르겠고, 402-3번지
경 찰 : 목내동 402-3번지라는거에요?
신고자 : 네네 그 앞에 에스제이엔라는 회사인데요
경 찰 : 에스젠
신고자 : 에스제이에이
경 찰 : 에스제이엔
신고자 : 네
경 찰 : 네네
신고자 : 여기 지금 깡패들이 와가지고, 지금 전 경력인줄 알았어요. 전경인줄 알았어요 전경같이 복장을 하고 한 삼백여명이 지금 와 있거든요
경 찰 : 삼백여명이 와있어요?
신고자 : 네 여기 충돌, 지금 굉장히 충돌될거 같으니까 곧 충돌이 있을거 같으니까 안에 지금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을 지금 밀어낼려고 하니까 빨리 출동 좀 해주세요
경 찰 : 아. 일하는 사람들을
신고자 : 아니 그러니까 예측이 되는데 지금 깡패들이 지금 중무장을 하고 지금 와 있기 때문에 빨리 와주세요
접수자 : 그래요 알았습니다.

SJM 112신고 녹취록2
접수번호 : 1763
접수시간 : 2012. 7. 27.(금) 05:01:10~(1분 19초)
신고번호 : 02-1XXX-XXXX
접 수 자 : 112종합상황실 경사 김○○

경 찰 : 예, 경찰입니다.
신고자 : 죄송합니다. 확인 신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세콤 사무실의 이○○입니다.
경 찰 : 예, 말씀하세요.
신고자 :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이고요.
경 찰 : 목
신고자 : 목내동
경 찰 :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
신고자 : 401-5번지
경 찰 : 401-5번지
신고자 : 반월공단 6블럭 20호입니다.
경 찰 : 반월공단
신고자 : 6블럭 20호
경 찰 : 6블럭 20호하면 다 아나요
신고자 : 회사명은 에스제이엠입니다.
경 찰 : 에스
신고자 : 제이엠
경 찰 : 제이엠
신고자 : 회사로 용역업체에서 지금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답니다.
경 찰 : 용역업체에서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데요?
신고자 : 네네
경 찰 : 몇 명이나요
신고자 : 급하셔 가지고 그거 까지는 파악 못하였습니다.
경 찰 : 출동자 전화번호요
신고자 : 010입니다. 9XXX 3XXX번입니다.
경 찰 : 3XXX번이요, 혹시 무전으로 안 되나요?
신고자 : 네.
경 찰 : 무전으로 확인해 볼 수 없어요?.
신고자 : 저희 직원이 아직 도착한 것은 아니고요, 저기 관리자 경비 아저씨 있죠. 에스제이엠
경 찰 : 뭐라고 전화 왔던가요. 용역원들이 들어왔다고....
신고자 : 네,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있답니다.
경 찰 : 네, 몇 명인지는 말하지 않고요.
신고자 : 네, 급하셔 가지고 끊으셨습니다. 위급하신 것 같습니다.
경 찰 : 용역원들이 들어와서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요.
신고자 : 네. 네.
경 찰 : 여보세요.
신고자 : 제가 전화를 한 것입니다.
경 찰 : 알았습니다.
신고자 : 네.
경 찰 : 감사합니다.

SJM 112신고 녹취록3
접수번호 : 1775
접수시간 : 2012. 7. 27.(금) 05:05:06~(27초)
신고번호 : 010-9XXX-XXXX
접 수 자 : 112종합상황실 경사 김○○

경 찰 : 네, 경찰입니다.
신고자 : 여보세요 여보세요
경 찰 : 네 네
신고자 : 여기 왜 경찰안와요?
경 찰 : 아. 지금 순찰차 거의 도착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가지고
신고자 : 지금 다 들어가라고 사람들 맞고 지금 피흘리고 싸우고 있는데 지금 빨리 안오냐고요
경 찰 : 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신고자 : 빨리좀 와주세요 지금 죽겠어요 지금 사람죽게 생겼어요
경 찰 : 네, 알겠습니다.

SJM 112신고 녹취록4
접수번호 : 1835
신고시간 : 2012. 7. 27.(금) 05:23:08~(1분 19초)
신고번호 : 02-1XXX-XXXX
접 수 자 : 112종합상황실 경위 노○○

경 찰 : 예, 경찰입니다.
신고자 : 예, 감사합니다. 에스엠 세콤입니다.
경 찰 : 예, 불러보세요.
신고자 : 저희 지금,, 경찰이 지금 도착했는데요. 아무런 대응을 못해 가지고요,
경 찰 : 예.
신고자 : 예, 다시 지금 연락을 드린겁니다.
경 찰 : 대응을 못한다니요, 무슨 얘기에요?
신고자 : 혹시 집회 신고 들어온 것 있습니까? 반월
경 찰 : 여기는 확인이 안되요. 관할 경찰서로 하시면 됩니다.
신고자 : 예, 관할 경찰서요.
경 찰 : 예.
신고자 : 저기 용역업체랑 경찰이 전경이랑 구분을 못해 가지고요, 자기네들이 불렀다고 하는데요.
경 찰 : 예.
신고자 : 전경 차량에 시크리트라고 써 있을리 없거든요. 50명이 지금 용역업체가 들어왔다고 하는데요. 이거 다시 한번..
경 찰 : 거기 경찰관 출동했다면서요?
신고자 : 출동을 했는데....
경 찰 : 예.
신고자 : 분명히 전경이 아닌데요. 용역업체가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용역업체 직원을 전경이라고 지금 얘기하고 있거든요.
경 찰 : 예.
경 찰 : 그건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게 확인해야 되요.
경 찰 : 여기서는 그냥 경찰관을 파출소 직원을 보내드리는 거거든요.
신고자 : 그 쪽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면 안되겠습니까.
경 찰 : 여기는 확인하는데가 아니에요, 접수받아 그냥 보내기만하는데에요
신고자 : 이거 저희가 한번 확인해 가지고, 만약에 알겠습니다 우선
지령실 : 거기 관할이 어떻게...

SJM 112신고 녹취록5
접수번호 : 1841
접수시간 : 2012. 7. 27.(금) 05:26:48~(1분 7초)
신고번호 : 010-5XXX-XXXX
접 수 자 : 112종합상황실 경위 김○○

경 찰 : 여보세요 경찰입니다. 말씀하세요
신고자 : 예, 경찰서죠?
경 찰 : 예 예 예, 경찰서가 아니고 112신고센터에요
신고자 : 예, 여기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 401-5번지 인데요
경 찰 : 잠깐만요 잠깐만 선생님 목내동 401-5번지
신고자 : 예, 에스제이엠 사업장 내 거든요
경 찰 : 자 401-5번지 에스..에스 머요
신고자 : 에스제이엠요
경 찰 : 에스제이엠
신고자 : 네
경 찰 : 예, 예
신고자 : 네 지금 용역들이 들어 와가지고
경 찰 : 아, 용역들이 들어와서
신고자 : 네, 현장 내에 지금 들어 와가지고 지금 흉기를 막 집어 던지고 있어요 지금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거든요
경 찰 : 아 용역들이 들어 와서 흉기를 집어 던지고 있다
신고자 : 네 제품이 엄청 날카로운데 그 제품들 지금 집어던지면서 막 그래서 지금 단원병원에 후송되고 그랬거든요
경 찰 : 알겠습니다.
신고자 : 빠른 조치 좀 부합... 바랄게요
경 찰 : 예 알겠습니다. (이거 이거죠 예 맞아요 에스..에스엠)

SJM 112신고 녹취록6
접수번호 : 1846
접수시간 : 2012. 7. 27.(금) 05:27:47~(2분 8초)
신고번호 : 02-1XXX-XXXX
접 수 자 : 112종합상황실 경위 노○○

경 찰 : 경찰입니다
신고자 : 감사합니다. 에스원 세콤입니다
경 찰 : 네 불러보세요
신고자 : 목래동 이구요
경 찰 : 목래동 이요?
신고자 : 안산시 단원구 목래동
경 찰 : 잠깐만요 안산시 단원구 목래동 목래동이요
신고자 : 401-5번지입니다.
경 찰 : 401-5
신고자 : 용역업체가 50명이 들어와서
경 찰 : 그거 보냈잖아요
신고자 : 보냈는데, 아무런 조치를 못하고 있고요
경 찰 : 그 내용 해가지고 보냈어요
신고자 : 그리고 경찰이 그 용역업체를 전경이라고 하는데요
경 찰 : 그 내용도 해가지고 보냈고요
신고자 : 어이 없지 않습니까?
경 찰 : 여기다 따지시면 안되고
신고자 : 그럼 어디에다가 따지죠? 몇 번이죠. 몇 번이죠?
경 찰 : 기다려 보세요 거기 목래동이라고 했죠?
신고자 : 네
경 찰 : 안산 단원경찰서요
신고자 : 몇 번 입니까?
경 찰 : 여기서 가만 있어보자
신고자 : 그것도 파악 안되나요?
경 찰 : 왜 이렇게 성질을 부려요, 여기다
신고자 : 네?
경 찰 : 여기다 이렇게 성질을..
신고자 : 어이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어이가
경 찰 : 어이가 없는건 거기가 어이가 없는거지 여기가 어이가 없는건 아니잖아요
신고자 : 그쪽 사람들은 그 사람들한테 맞고 있는데
경 찰 : 누가 맞고 있어요
신고자 : 행패부리고 차 파손시키고 기물 파손하고 사람 때리고그러는데 아무런 못하지 않습니까 그사람들은 우리들 한테는...
경 찰 : 그럼 세콤은 뭐하고 있는거예요?
신고자 : 네?
경 찰 : 세콤은 뭐하고 있어요?
신고자 : 공권력은 뭐 있죠? 공권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도와달라는거 잖아요. 예?
경 찰 : 여기 단원 경찰서 전화 해보세요, 8040에
신고자 : 이름이 어떻게 되죠?
경 찰 : 0329에요
신고자 : 8040
경 찰 : 8040에 0329요
신고자 : 0329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경 찰 : 노○○ 경위에요
신고자 : 노 동자
경 찰 : 노○○ 경위라고요
신고자 : 노 순자, 여보세요
경 찰 : 아, 노○○ 경위라고요 여기 녹음 다 되어 있어요
신고자 : 음, 알겠습니다.

SJM 112신고 녹취록7
접수번호 : 1847
접수시간 : 2012. 7. 27.(금) 05:27:53~(1분 3초)
신고번호 : 010-8XXX-XXXX
접 수 자 : 112종합상황실 경사 이○○

경 찰 : 예, 경찰관입니다 여보세요
신고자 : 여보세요
경 찰 : 예, 예 경찰관입니다
신고자 : 여기 에스엠이라는 회사인데요
경 찰 : 에스엠요?
신고자 : 에스제이엠이요
경 찰 : 예예 무슨 일인가요
신고자 : 네 여기 깡패들이 들어 와가지고 쇠 덩어리 살인 무기를 막 던져가지고 사람들이 생명이 위협한데 빨리 와주세요
경 찰 : 거기가 그 반월동인가요?
신고자 : 예, 여기 목래동 451-5
경 찰 : 잠깐만요
신고자 : 지금..
경 찰 : 우리 경찰관이 안나가 있나요 그 반월공단 6블럭 말씀 제일
신고자 : 예 지금 거 하나 나와 있는 거 같은데 지금 경찰 병력이 안나와 가지고 지금 깡패들이 살인 무기를 던지고 있다고요 쇠 덩어리를
경 찰 : 아, 예
신고자 : 빨리 나와 보시라고요
경 찰 : 예, 알겠습니다.
신고자 : 지금 전화 받으시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경 찰 : 이○○ 경사입니다.
신고자 : 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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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핵강국의 조용한 등장 알려주는 사진

 

 

 

제4핵강국의 조용한 등장 알려주는 사진
 
[한호석의 개벽예감](30) 2006년 “세계최대 잠수함대 북에 있다”던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버웰 벨의 발언의 의미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2/09/17 [11:06] 최종편집: ⓒ 자주민보
 
 

버월 벨의 청문회 발언은 사실이었나?

2006년 3월 9일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 버월 벨(Burwell B. Bell)이 미국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하였다. 청문회에서 한반도 군사상황을 거론하던 그는 인민군 전력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함대(the world's largest submarine fleet)”가 북에 있다고 하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인민군과 첨예하게 맞선 무력대치상태에서 한미연합군을 지휘하는 버월 벨은 가장 많은 대북군사정보를 알고 있는 야전사령관인데, 그런 그가 미국 연방하원 청문회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함대가 북에 있다고 언급한 것은 그냥 스쳐갈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영어 표현으로는 잠수함 보유척수가 가장 많은 것(the largest in number)도 가장 큰 잠수함대라는 뜻이고, 잠수함대의 총배수량이 가장 큰 것(the largest in total displacement)도 가장 큰 잠수함대라는 뜻이므로, 버월 벨의 그 발언은 좀 모호하게 들린다.

지금까지 세계 각국 군사전문가들은, 버월 벨의 그 발언을 인민군 잠수함대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잠수함을 보유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해왔다. 그런 식의 해석이 일반화된 까닭은, 영국 런던에 있는 국제전략문제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가 펴내는 연례보고서 ‘군사균형(The Military Balance)’에 나온 인민군 잠수함대에 관한 정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 군사전문가들 사이에 유포된, ‘군사균형’을 비롯한 몇몇 군사정보들은 인민군 잠수함대에 관한 이런 정보를 전해준다.

첫째, 인민군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소련으로부터 위스키급(Whiskey class) 잠수함 4척을 도입하였다. 1950년대에 소련에서 건조되었고, 1980년대에 퇴역한 위스키급 잠수함은 수중배수량이 1,350t급인 디젤-전기 잠수함이다. 북이 도입한 위스키급 잠수함은 4척 뿐이다. 도입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북의 위스키급 잠수함 4척은 너무 낡아서 고철로 해체되었거나 초년병 훈련용 또는 기만전술용으로 쓰일 것이다. 따라서 위스키급 잠수함 4척은 인민군 잠수함대 보유량에서 제외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세계 각국 군사전문가들은 인민군이 아직도 위스키급 잠수함 4척을 운용하고 있다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둘째, 인민군은 1960년대 후반에 소련으로부터 로미오급(Romeo class) 잠수함 3척을 도입하였다. 로미오급 잠수함은 수중배수량이 1,830t급인 디젤-전기 잠수함이다. 소련은 중국에게 로미오급 잠수함 설계기술을 지원하여, 중국도 로미오급 잠수함을 자체로 건조하였는데, 1970년대 초에 북은 중국이 건조한 로미오급 잠수함 4척을 도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 소련은 북에게도 로미오급 잠수함 설계기술을 지원하여, 북도 중국처럼 로미오급 잠수함을 자체로 건조하였다. 이미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로미오급 잠수함 7척을 도입한 북은 1980년대에 동급 잠수함 5척을 자체로 건조하여 총 12척을 보유하였고, 1990년대에는 동급 잠수함 10척을 더 건조하여 2000년 현재 총 22척의 로미오급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었다.

셋째, 인민군은 수중배수량이 370t인 상어급(Sang-o class) 잠수함 40척, 수중배수량이 130t인 연어급(Yono class) 잠수정 10척을 현재 운용하고 있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인민군 잠수함대에는 로미오급 잠수함 22척, 상어급 잠수함 40척, 연어급 잠수정 10척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인민군 잠수함대에 배치된 잠수함 62척과 잠수정 10척의 수중배수량을 모두 합하면 56,360t이다. 그런데 미국군 잠수함대에 배치된 로스앤젤레스급(Los Angeles class) 잠수함 42척의 수중배수량을 모두 합하면 290,934t이고, 러시아군 잠수함대에 배치된 타이푼급(Typhoon class) 잠수함 3척의 수중배수량을 모두 합하면 144,000t이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인민군 잠수함대가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함대라는 버월 벨의 말은 수중배수량이 아니라 보유척수가 가장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버월 벨의 그런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군 잠수함대에 배치된 핵추진 잠수함도 72척이나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민군 잠수함대가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함대라는 버월 벨의 말은 북의 군사적 위협을 부풀리려는 과장발언이었을까?

지금 세계 각국 군사전문가들이 알고 있는 인민군 잠수함대에 관한 정보 가운데서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북이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로미오급 잠수함을 더 이상 건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북이 건조한 잠수함은 상어급 잠수함을 개량한 소형 잠수함과 연어급 잠수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은 왜 20년이 넘도록 로미오급 잠수함을 건조하지 않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평양에 있는 조선혁명박물관에 보존된 한 장의 오래된 사진에서 찾을 수 있다.


보존사진이 말해주는 놀라운 사연

2012년 7월 14일 세계 최대의 동영상 누리집 <유투브(You Tube)>에 ‘련속참관기 - 장군님과 동지,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아서 (9)’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방영 동영상이 실렸다. 조선혁명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령도사적’에 관해 해설해주는 그 동영상은, 인민군 무력강화사업에 충실하였던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김광진 차수의 실화를 담은 동영상자료다. 김광진 차수는 1984년 12월에 인민무력부 부부장에 임명되었고, 1992년 4월에 차수 칭호를 받았고, 1997년 불치의 병에 걸려 7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동영상에 나오는 해설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광진 차수에게 “(인민군 무장장비를) 우리나라의 지형조건에 맞게 현대화할 과업을 주시였다”고 하며, 김광진 차수는 그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여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동영상에 나오는 조선혁명박물관 보존사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잠수함 모형 앞에서 김광진 차수로부터 보고를 받는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동영상에 나오는 해설강사의 말에 따르면, 그 사진은 1995년 4월 25일에 촬영된 것인데, 4월 25일은 인민군 창건 기념일이다.

무력강화사업을 책임진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이 인민군 창건 기념일에 잠수함 모형을 앞에 놓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잠수함에 관해 보고하는 그 사진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1995년 4월 당시 북은 이미 신형 잠수함 건조사업을 추진 중이었던 것이다. 그 사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광진 차수로부터 신형 잠수함 건조사업에 관한 보고를 받는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그 사진이 말해주는 것처럼, 1995년 4월 당시 북이 신형 잠수함 건조사업을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리 늦어도 2000년대 초에는 건조사업을 마쳤을 것이고,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오늘까지 북은 1990년대에 개발한 신형 잠수함을 계속 생산하여 실전배치하였을 것이다. 북이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로미오급 잠수함을 더 이상 건조하지 않은 까닭은, 신형 잠수함을 건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의 신형 잠수함은 어떤 잠수함일까? 그 사진에 나타난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신형 잠수함 모형을 앞에 놓고 김광진 차수로부터 보고를 받았으므로, 북이 건조한 신형 잠수함은 바로 그 모형과 똑같이 생긴 잠수함이 분명한데, 신형 잠수함 모형은 함체도색과 함체구조가 인민군이 운용해오던 기존 잠수함과 크게 다르다.

첫째, 신형 잠수함 모형은 함체 위에 상층부를 한 층 더 얹어놓은 것 같이 생긴 2층 구조다. 이러한 2층 구조는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잠수함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외부형태다. 함체 위에 상층부를 한 층 더 얹어놓은 것 같이 보이는 그 부분이 바로 탄도미사일 수직발사대가 설치된 공간이다. 길이가 긴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을 잠수함 안에 수직으로 세워놓아야 하므로 위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같은 잠수함 강국이 운용하는 전략잠수함들 가운데 그렇게 생긴 잠수함이 흔하다.

사진에 나타난 신형 잠수함 모형은 특히 러시아군의 델타(Delta) 4급 잠수함과 아주 비슷하게 생겼다. 양자 사이의 차이점은, 인민군 신형 잠수함 모형의 경우 탄도미사일 수직발사대 공간이 전망탑(sail) 앞에 있는 데 비해, 러시아군 델타 4급 잠수함은 탄도미사일 수직발사대 공간이 전망탑 뒤에 있는 것이다. 미국군이 지난 시기 운용하였고 지금은 퇴역한 벤자민 프랭클린급(Benjamin Franklin class) 잠수함도 델타 4급 잠수함처럼 탄도미사일 발사대 공간이 전망탑 뒤에 있다.

인민군 신형 잠수함 모형은 실물 축소판이므로, 실물 잠수함의 길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잠수함 전망탑 길이와 잠수함 함체 길이의 비율을 계산하면 전체 길이를 추산할 수 있다. 사진에 나타난 신형 잠수함 모형의 함체 길이는 전망탑 길이의 약 8배다.

어느 나라에서나 잠수함 전망탑을 터무니 없이 길게 만들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나라 잠수함 전망탑 길이와 잠수함 함체 길이의 비율을 계산하여 그것을 인민군 신형 잠수함의 동종 비율과 비교하면 인민군 신형 잠수함 길이를 추산할 수 있다. 외형이 인민군 신형 잠수함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러시아군의 델타 4급 잠수함이 비교대상으로 적합하다. 러시아군의 델타 4급 잠수함은 1985년 12월에 취역하였는데, 그 동안 모두 7척을 건조하였고, 지금도 운용 중이다. 델타 4급 잠수함 함체 길이는 전망탑 길이의 약 10배다. 이런 비교결과를 보면, 인민군 신형 잠수함 길이가 러시아군 델타 4급 잠수함보다 조금 짧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델타 4급 잠수함 함체 길이는 167m이므로, 그보다 길이가 조금 짧은 인민군 함체 길이는 약 140m일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사진에 나타난 신형 잠수함 모형은 전부 진록색으로 칠해졌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김광진 차수로부터 신형 잠수함 모형을 놓고 보고를 받았던 때로부터 17년이 지난 2012년 3월 14일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도로 진행된 인민군 육해공군 합동타격훈련에 진록색 잠수함 1척이 등장하였다. 북이 공개한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께서 조선인민군 륙해공군 합동타격훈련을 지도하시였다’라는 제목의 기록영화에 나온, 진록색 잠수함은 전망탑만 수면 위로 내놓고 기동하면서 어뢰 1발로 표적함선을 날려버린다. 그런데 전망탑만 수면 위로 내놓았기 때문에, 그 진록색 잠수함이 17년 전 보고현장에 모형으로 전시되었던 진록색 잠수함과 같은 급의 잠수함인지 확인하기는 힘들다.

러시아군이 운용하고 있는 델타 4급 잠수함은 수중배수량이 18,200t이고, 수심 400m까지 내려갈 수 있으며, 승조원 130명을 태우고 80일 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계속 잠항할 수 있다. 또한 그 잠수함은 90메가와트급 가압경수로 2기가 공급하는 20,000마력의 추진력으로 수중에서 시속 40~44km로 잠항한다. 이런 정보를 살펴보면, 인민군이 운용하고 있는 신형 잠수함의 수중배수량은 10,000t 정도로 추정되며, 승조원을 100명쯤 태우고 2개월 이상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계속 잠항하는 잠수함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민군이 운용하고 있는 신형 잠수함은 북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소형 가압경수로가 설치된 공격형 핵추진 잠수함이라는 사실이다. 북이 경수로 기술을 이제껏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개발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이 글에서 재론하지 않는다.

나는 2012년 2월 23일 <자주민보>에 기고한 글 ‘종적을 감춘 핵잠수함은 어디로 갔을까?’에서 북이 러시아군 태평양함대의 11,500t급 공격형 핵추진 잠수함 ‘양키 놋취(Yangkee Notch)’ 2척을 1993년에 도입하여 개조하고, 이를 실전배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2012년 7월 북에서 공개된 위의 사진 한 장으로 나의 그런 추정은 5개월만에 전면 수정될 수밖에 없다. 다만 북이 러시아로부터 1993년에 도입했던 핵추진 잠수함 2척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핵추진 잠수함 설계기술을 확보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기술을 가지고 1995년에 자체로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북은 공격형 핵추진 잠수함을 자체로 건조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잠수함 강국인 것이다.


김광진 차수가 1990년에 남긴 말

1997년 10월 21일 미국 연방상원 정무위원회 산하 국제안보, 확산 및 연방업무 소위원회가 개최한 북의 미사일 확산문제에 관한 청문회에 불려간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통역자 출신 탈북자가 청문회에서 털어놓은 대북군사정보가 워싱턴 정가에 파문을 일으켰다.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당시 직책)을 수행한 중국 방문길에서 그는 북이 사거리 4,000km 이상의 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이미 끝내고 현재 생산 중이라는 김광진 부부장의 말을 직접 들었다고 털어놓았던 것이다.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인민군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한 때는 1990년 10월이다. 이것은 북이 이미 1990년 10월에 사거리 4,000km 이상의 중거리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놀라운 정보다.

무력강화사업의 책임을 맡은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해외방문 중에 자기 수행원에게 사실이 아닌 것을 말했을 리는 없으므로, 위의 정보에 따르면 북은 이미 1990년에 사거리가 4,000km가 넘는 중거리 미사일을 실전배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세상에 알려진 북의 중거리 미사일 생산시기보다 무려 10년 이상 앞선 이른 시기에 북이 중거리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정보에 따르면, 인민군의 미사일 전력에 관한 국제사회의 기존 관념은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사거리가 4,000km로 추산되는 인민군 중거리 미사일이 미국 정찰위성에 처음 포착된 때는 2003년 9월이다. 그런데 김광진 차수가 1990년 10월에 언급한 사거리 4,000km 이상의 미사일과 미국 정찰위성이 2003년 9월에 포착한, 사거리 4,000km로 추산되는 미사일은 같은 종류의 중거리 미사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두 미사일에 관한 정보가 각각 알려진 시점 사이에 무려 13년이라는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차를 감안하면, 북은 김광진 차수가 1990년 10월에 언급한 사거리 4,000km 이상의 1세대 중거리 미사일을 미국 정찰위성이 2003년 9월에 포착한 사거리 4,000km의 2세대 중거리 미사일로 개량한 것이 분명하다.

북이 개량한 2세대 중거리 미사일이 바로 화성 10호 미사일이다. 화성 10호 미사일은 2010년 10월 10일 당창건 경축 인민군 열병식에서 6축12륜 발사차량에 실려 웅장한 자태를 드러냄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북의 2세대 중거리 미사일인 화성 10호 미사일은 다른 미사일과 달리 탄두부가 뾰족하지 않고 뭉툭한 우유병 꼭지처럼 생겼다. 뭉툭한 탄두부에 핵탄두가 여러 발 들어있는 다탄두 미사일인 것이다. 또한 화성 10호 미사일은 다른 미사일과 달리 미사일 동체에 꼬리날개가 달리지 않았다. 이것은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다탄두 핵미사일임을 말해준다.

핵추진 잠수함을 지상 열병식에 등장시킬 수 없었던 북은 핵추진 잠수함 수직발사대에 있는 사거리 4,000km의 타탄두 미사일 화성 10호를 지대지 중거리 미사일을 싣는 6축12륜 발사차량에 임시로 실어 열병식에 등장시킴으로써 인민군이 강력한 핵추진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화성 10호 미사일의 등장은, 북이 1990년 10월 김광진 차수가 생산 중이라고 언급하였던 1세대 지대지 중거리 미사일을 최첨단 기술로 대폭 개량하여 2세대 중거리 미사일인 잠수함 발사 다탄두 미사일을 만들어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1995년 4월 25일 인민군 창건 기념일에 김광진 차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설명한 그 진록색 잠수함 모형은 장차 화성 10호를 탑재할 핵추진 잠수함 모형이었던 것이며, 지금 조선혁명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그 사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추진 잠수함 건조사업에 관한 보고를 받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러시아군의 델타급 핵추진 잠수함에는 미사일 16발이 들어가는 수직발사대가 설치되었고, 533mm 어뢰 4발이 들어가는 어뢰발사관도 설치되었다. 다른 핵강국들이 보유한 핵추진 잠수함도 미사일 16발짜리 수직발사대와 533mm 어뢰 4발짜리 어뢰발사관을 공통적으로 설치하였으므로, 인민군이 보유한 신형 잠수함도 당연히 그런 수준의 강력한 무장을 갖추었을 것이다.

<자유아시아방송> 2010년 10월 13일 보도기사에서 미국의 군사전문가 브루스 벡톨(Bruce Bechtol)은 북이 2010년 10월 10일에 공개한 6축12륜 발사차량에 실린 중거리 미사일을 약 200기 실전배치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벡톨의 추정에 따르면, 북은 핵추진 잠수함에 실을 약 200기의 화성 10호 중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두 가지 일정만 남았다

북의 핵추진 잠수함은 바다로 통하는 해안동굴식 잠수함 건조기지에서 건조되고, 평소에도 해안동굴식 잠수함 기지에서 물 속으로 드나들며, 해안동굴식 잠수함 정비소에서 정비를 받기 때문에, 미국 정찰위성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 미국 정찰위성에 노출된 일반 해군기지에 정박하였다가 이따금 어디론가 사라지는 인민군 잠수함들은 모두 로미오급 또는 상어급 잠수함들이다.

미국은 북이 핵추진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을까? 미국은 북의 핵추진 잠수함을 본 적은 없으나, 여러 정보를 분석하여 북이 핵추진 잠수함 보유국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중요한 군사기밀은 알아도 안다고 밝히지 않는 법이다.

북은 파키스탄에서 1998년 5월에 한 차례, 그리고 함경북도 길주군 핵실험장에서 2006년 10월과 2009년 5월에 각각 한 차례씩 모두 세 차례나 지하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하였을 뿐 아니라, 경수로 기술을 실물로 입증하였고, 2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 13호 6기를 2012년 4월 15일 열병식에 등장시켜 자국이 핵보유국임을 당당히 선포하였다. 1998년부터 2012년까지 14년 동안 자기의 핵억지력을 순차적으로 세상에 공개해온 북은 녕변핵시설 단지에 건설 중인 소형 경수로를 완공하고, 핵추진 잠수함을 세상에 공개하는 마지막 두 가지 일정만 남겨두고 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미국이 독점해온 전략무기는 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추진 잠수함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추진 잠수함을 모두 갖춰야 진정한 핵강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지금 그 두 가지 전략무기를 모두 갖춘 핵강국은 전 세계에서 미국, 러시아, 중국 세 나라밖에 없다. 영국과 프랑스는 핵추진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으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보유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추진 잠수함을 모두 보유한 제4핵강국이 조용히 부상하였다. 동방의 사회주의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바로 그 제4핵강국이다. 제4핵강국의 등장은,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군사대결을 북미대결관계로 집약시킨 대사변이다.

북이 핵억지력 부문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앞지르면서 미국, 러시아, 중국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제4핵강국으로 부상하였으므로, 세계 핵전력 균형은 사실상 깨지고 말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제4핵강국의 핵추진 잠수함이 세상에 공개되는 대충격의 날이 오면, 세계 안보지형과 국제정치관계는 뒤집히게 될 것이다. 지금 태평양과 대서양 어느 바다속을 소리 없이 누비며 대양순찰활동을 벌이고 있을 제4핵강국의 공격형 핵잠수함들은 미국의 선제핵공격위험을 강력히 짓누르면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조국통일대전 명령’을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미국과 일본은 북을 자극하는 경거망동을 멈추어야 할 것이다.(2012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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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중위가 정신질환자? 국방부 해도 너무 한다

김훈 중위가 정신질환자? 국방부 해도 너무 한다

'화약흔 검출' 실험결과 꼼수로 부정... 비열한 진실왜곡 중단해야

12.09.17 14:21l최종 업데이트 12.09.17 14:21l
고상만(rights11)

 

 

고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육군 중장이 '뇌관 화약 잔사 확인 시험'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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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8년 판문점에서 의문사한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중장으로부터 밤 늦은 시각에 전화가 왔습니다. 1998년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활동가로 일할 당시 아들의 의문사를 호소하고자 찾아온 아버지와 처음 만났으니 어느덧 14년째 이어져온 인연입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까맣게 타버린 아버지의 절박한 심경이 전화를 통해 울려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난 14년간 김훈 중위에 대해 국방부가 내린 3차례의 자살 결론에 대해 지난 8월 국민권익위원회가 '순직 처리'하도록 요구한 후 한결 아버지의 시름이 덜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시냐"고 묻는 말끝에 그 아버지가 전해준 사실은 다시 한번 저를 충격에 빠지게 합니다.

국방부, 김훈 중위 또 다시 자살 결론? 원인은...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권익위의 '순직 처리' 권고와 달리 국방부가 또다시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며 4번째 결론을 내리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나아가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로 처리하려 하고 다만 권익위의 권고에 따라 그 결과는 '업무 연관성을 인정하여 순직으로 처리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국방부의 '비열한 거짓말'이며 '참을 수 없는 꼼수'입니다.

권익위가 국방부에 김훈 중위를 '순직 처리'하라고 권고하게 된 배경을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2011년 9월 권익위가 김훈 중위 사건에 대해 조사를 착수하게 된 것은 유족의 진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객관적 근거도 없이 국방부는 그동안 모두 세차례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주장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국방부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을 한 김훈 중위 유족은 최후 수단으로 권익위에 민원을 제출합니다. '사건 재조사후 순직인정을 받게 해달라'는 취지였습니다.

한편, 이같은 진정을 받은 권익위는 사전 조사를 통해 김훈 중위 사건이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1998년 2월 24일 낮 12시경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김훈 중위에 대해 국방부가 '자살'로 결론을 내린 시각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국방부는 국방부 출입기자들에게 "김훈 중위가 판문점에서 자살했다"며 보도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그 시간은 당일 오후 2시경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국방부가 '보도자료'를 배포하던 그 시점은 아직 군 수사관이 사건 현장에 도착도 하지 못한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수사가 시작도 안 된 그 때 이미 국방부는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국방부의 자살 예단은 이후 그 어떤 객관적 타살 의혹에도 불구하고 '김훈 중위 자살'이라는 국방부의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그러다보니 이후 '국회 국방위 김훈 중위 사망 소위'와 '대법원', 그리고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등 3개의 국가기관이 국방부의 주장과 달리 자살로 볼 수 없다며 의견을 제시했지만 이 역시 국방부는 모두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권익위는 대표적인 '군 의문사 사건'인 김훈 중위 사건에 대해 추가 조사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이에 따라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게 됩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화약흔 없는 '김훈 오른손의 진실'

미군 수사관이 현장에서 촬영한 고 김훈 중위의 시신. 좌측 상단 청바지 차림의 미군 수사관 다리가 보이고 김 중위의 양손에는 화약 잔재를 채취하기 위해 봉투가 끼워져 있다. (유족의 양해를 얻어 김 중위의 사진을 공개합니다)
ⓒ 김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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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권익위가 김훈 중위 사건에서 발견된 많은 의혹 중 가장 핵심적인 의혹으로 주목한 것이 바로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 얽힌 논란이었습니다. 바로 스스로 권총을 발사하여 자살했다는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 검출되지 않은 '화약흔'을 둘러싼 공방이었습니다. 만약 국방부의 주장대로 김훈 중위가 스스로 권총을 쏴 자살했다면 응당 그의 오른손에는 '안티몬과 바륨' 등 화약흔 성분이 검출되었어야 합니다.

실제로 권총에 의한 사망사건이 빈번한 미국의 경우 두 명의 사람이 사망한 채 발견된다면 수사기관이 가장 먼저 하는 조치는 이들 사망자들의 손을 면봉으로 닦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화약흔 검사를 실시하여 누구의 손에서 화약흔이 발견되느냐에 따라 결론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즉, 화약흔이 검출된 사람이 가해자인 것으로 특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국방부의 논리가 맞으려면 문제의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방부의 주장과 달리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는 검출된 화약흔이 전혀 없다는 것이 지난 14년간 끊임없이 제기된 의혹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논란이 가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사실 앞에서 궁색해진 국방부는 황당한 주장을 시작합니다. "화약흔이 나올 수도, 안 나올 수도 있어 김훈 중위의 손에서 화약흔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국방부의 주장에 대해 미국의 저명한 법의학자인 노여수 박사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그는 '작은 권총'과 탄창이 돌아가는 '피스톨 권총'의 경우 화약량이 적어 국방부의 말처럼 그럴 가능성이 있으나 김훈 중위가 사용한 '베레타-9' 권총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권총으로서 격발시 반드시 화약흔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작은 권총과 큰 권총을 구분하지 않고 말하는 국방부의 주장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은 김훈 중위가 스스로 총을 격발하여 사망하지 않은 명백한 증거라고 그의 타살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권익위는 이 논란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이 논란만 제대로 규명한다면 김훈 중위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진실은 알아내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김훈 중위가 사망시 사용했다는 문제의 권총으로 직접 발사 실험을 하고 정말 화약흔이 나오나 그렇지 않은가를 확인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국방부의 주장처럼 발사자의 손에서 화약흔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는 '김훈 중위가 자살한 것이 맞다'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발사자의 손에서 모두 화약흔이 검출된다면 이는 국방부의 주장과 달리 김훈 중위가 스스로 권총을 발사했다고 할 수 없으므로 그가 '자살했다는 국방부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권익위는 즉각 국방부에 이같은 권총 발사에 따른 화약흔 실험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실험 과정에 대한 주도권 역시 국방부에게 전부 위임했습니다. 즉, 국방부가 원하는대로, 하고 싶은대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권익위의 깊은 고심이 깔려 있는 조치였습니다. 만약 차후 이 실험 결과가 국방부가 원하는 바와 다르게 나오더라도 자신들이 주도한 이 결과는 부정하지 못하겠지 싶은 마음으로 초강수를 둔 것입니다.

그래서 받아들인 국방부의 조건은 너무나 특이했습니다. 처음 그들의 요구를 전해들은 저는 그야말로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실험에 참여하기로 한 권총 발사자 10명 중 5명은 정상적인 격발 자세인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나머지 5명은 기상천외하게도 첫 번째 손가락인 '엄지'로 방아쇠를 당기게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가 했습니다. 육사를 제대한 장교가 엄지 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게 하자는 국방부의 발상이 너무나 황당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확인해보니 국내 저명한 모 법의학자가 이같은 제안을 국방부에 제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국방부의 주장에 동조해 온 사람이었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 화약흔이 없는 이유가 '엄지 손가락을 이용한 격발 때문'일 수 있다며 국방부에 제안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훈 중위 아버지는 이처럼 말도 안되는 국방부의 요구에 대해 저에게 어찌해야 할지 의견을 물어왔습니다. 제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만약 권익위가 국방부 요구를 수용한다면 우리 역시 이를 따르자고 했습니다.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손가락으로 당기든 터진 화약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모 법의학자의 '이상한' 주장이 과연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저 역시 몹시 궁금했습니다.

2012년 3월, 드디어 지난 14년간 이어져 온 이 사건 '김훈 중위 자, 타살 논쟁'의 분수령이 될 역사적인 실험이 이뤄진 곳은 모 특전여단 사격장이었습니다. 이날 국방부의 주도 아래 14년 전 사고 현장이었던 판문점 241GP 3번 벙커를 그대로 재현한 상태에서 실험에 참여한 사수 10명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피가 마를 정도로 긴장된 그때였습니다.

밝혀진 화약흔의 진실, 국방부 '실험 결과 부정'

그리고 마침내 지난 6월. 석달여를 기다려온 화약흔 실험 결과가 밝혀졌습니다. 밝혀진 진실은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유족이 옳았습니다. 국방부의 주장이 틀린 것입니다. 당연한 상식의 승리였습니다.

국방부가 주장한 '엄지를 이용한 격발'이든 아니면 '정상적인 두 번째 손가락을 이용한 격발'이든 상관없이 이날 실험에 참여한 사수 10명 모두의 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된 것입니다. 즉, 어떤 방식의 권총 격발이든 상관없이 권총 방아쇠를 당긴 사람의 손에서는 '화약흔이 검출된다'는 상식이 과학적 실험을 통해 확인된 것입니다.

마침내 길고 힘든 14년간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김훈 중위 아버지 김척 예비역 장군은 저에게 전화하여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이겼어. 마침내 우리가 이겼어. 그동안 주장해온 것이 모두 사실이었던 거야. 국방부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이제 명백히 드러난 거라고. 고상만씨. 정말 수고했어.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지난 14년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기쁨이었습니다. 이것을 기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 저 역시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 오랜 14년간에 걸친 국방부와 얽힌 그 끔직한 고뇌의 시간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니 그 묘한 감정은 그야말로 무엇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설마하며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은 이같은 우리의 자축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습니다. 우려해왔던 국방부의 실험 결과 부정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막은 이랬습니다. 이미 확인한 것처럼 총기 발사자 10명의 양쪽 손바닥과 손등에서는 모두 '화약흔이 검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단 1명의 우측 손등에서 "화약흔은 검출되었으나 그 양이 적어 이른바 국제 기준에 맞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방부는 '이를 화약흔 검출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다 정확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며 따라서 기존의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본질에는 변한 것이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만약을 위해 모든 것을 다 국방부가 주관하도록 해주고 또한 그들의 요구에 따라 말도 안되는 엄지 손가락 발사까지 다 수용했음에도 그들의 주장은 참으로 뻔뻔하다는 말 외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국방부는 10명의 사수 중 단 한 명에게서 확인된 한쪽 손등의 '특이 상황'을 이유로 실험 결과 자체를 '별 의미 없는 것'이라며 격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같은 국방부의 주장은 참으로 뻔뻔한 논리입니다. 발사자 10명의 좌우 손바닥과 손등을 합치면 모두 20개입니다. 그런데 그중 19개에서 다량의 화약흔이 검출되고 다만 1개에서 검출 기준보다 미달하는 화약흔이 나왔다 하여 이 모두가 의미 없다는 국방부의 주장은 그야말로 너무나 야비한 주장입니다.

정말 궁금한 것은 만약 국방부가 제안했던 문제의 엄지 손가락 발사 결과에서 자신들이 주장한 것처럼 화약흔이 과반수 이상 검출되지 않은 결론을 얻었다 해도 이처럼 실험 결과를 부정했을까요.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같은 국방부의 행태가 얼마나 치사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명백한 '진실 왜곡'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그들이 문제 삼는 발사자 1명의 우측 손등에서 검출된 화약흔은 정확히 말해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미 검출'이 아니라 검출은 되었으나 그 기준에 미달한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김훈 중위는 이와 '완전히 다른 사례'입니다. 즉, 기준 미달이니 뭐니가 아니라 김훈 중위의 오른손은 화약흔이 전혀 검출되지 않은, 그야말로 '깨끗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준 미달이든 뭐든 상관없이 '김훈 중위가 스스로 권총을 발사하지 않았다는 진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권익위는 이같은 권총 화약흔 실험 결과와 국방부의 초동수사 잘못을 확인한 후 다음과 같이 육군 참모총장을 상대로 권고한 것입니다.

"피신청인에게(육군 참모총장에게) 군 수사기관의 초동수사 과실 등으로 인해 사망 원인이 불분명하게 된 신청인의 子, 故 김훈의 순직 여부에 대해 재심의하여 순직으로 인정할 것을 시정 권고한다."

국방부, 권익위 권고 따라 김훈 중위 사건 처리해야

그는 아버지를 잇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장교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그를 '파파보이' 의지가 나약한 한심한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김훈 중위의 동기생은 말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육사 출신 장교였다고 말이다.
ⓒ 김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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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같은 권익위의 권고를 받은 국방부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또다시 김훈 중위를 상대로 진실을 왜곡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 세 번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며 진실을 왜곡해 온 국방부가 이제 또 다시 네 번째 그를 자살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국방부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요?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을 그 유족에게 안겨줘야 그들의 성에 찬다는 것입니까? 14년 전 처음 만날 때 50대 후반의 신사였던 그 아버지 김척 예비역 중장은 어느덧 70대를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할 때마다 제 앞의 밥공기가 다 비워졌는데도 정작 아버지는 사건 설명을 한다며 제대로 식사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난 14년간 듣고 또 들은, 어쩌면 젊은 제가 더 많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그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은 혹여 제가 이 사건에 관심을 버릴까 걱정되는지 멈출지를 모릅니다. 그런 아버지가 권익위의 '진상규명 불능에 따른 순직 권고'에도 불구하고 국방부가 재차 진실을 조작하려 하자 다시 새까맣게 타버린 얼굴로 절규합니다. 차마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그 아버지의 절규는 제 가슴을 다시 먹먹한 슬픔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국방부가 너무 야비해. 정말 너무해. 도대체 이럴 수 있는거야. 이게 내가 청춘을 다 바쳐 충성해온 국방부라니 정말 너무나 슬프고 비참해. 정말 이렇게까지 야비하고 치사할 줄 몰랐어."

그러면서 아버지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국방부가 김훈 중위에 대해 또다시 자살로 결론 내린다면, 그것도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로 결론 내리면서 '순직 처리'로 하겠다면 그 결과를 절대 수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반드시 권익위의 권고와 같이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되어야 것입니다. 그래야만 언제든 다시 김훈 중위 사건에 대해 재조사할 수 있는 길이 있기에 절대 양보할 수 없다며 아버지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 지난 14년간 처절하게 싸우며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필요하다면 또 14년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버지와 저 역시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끝내 이 결과를 보지 못하고 먼저 돌아가신다면 살아남은 저라도 반드시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자 싸울 것입니다. 김훈 중위 한 명을 위한 싸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해 100여 명씩 자살로 처리되는 이 나라의 현실에서 김훈 중위처럼 또 다른 제2, 제3의 억울한 군 의문사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김훈 중위 사건은 반드시 진상 규명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살한 것은 '김훈 중위'가 아니라 '국방부의 양심'입니다. 하다 하다 이제는 '정신질환자'로 몰아가는 이같은 행위는 결코 양심이 있는 집단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지난 14년간 단 한 번도 언급한 적도 없는 난데없는 '정신질환자' 주장이 왜 나온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국가 권력의 폭력이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을 폭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저는 '자살해버린 국방부의 양심'에 애도를 표합니다. 그리고 간곡히 호소합니다. 더 이상 김훈 중위의 유족에게 이와 같은 '참담한 고통'을 줘서는 안됩니다. 지난 14년간 준 고통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칩니다. 죽고 싶어도 차마 죽지 못하고 살아온 그들의 지난 세월입니다. 숨쉬고 있다고 해서 살아온 지난 14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14년 전 억울한 사인 끝에 죽어간 김훈을 정신질환자로 만드는 저 국방부를 뭐라고 규탄해야 할지 마땅한 말조차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37년간 국가와 군을 위해 살아온 늙은 노병에게 주는 국방부의 선물이라면 도대체 누가 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하겠습니까. 특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방부만 빼고 모든 국가기관이 다 확인해 준 '사인 진상규명 불능' 결정과 권고에 따라 처리하라는 이 당연한 요구를 왜 끝끝내 외면한단 말입니까.

정말이지 국방부는 김훈 중위에 대한 '비열한 진실 왜곡'을 중단해야 합니다. 권익위가 권고하고 사실상 내부적으로 합의한 것처럼 '육군 전, 사망 심의위원회'를 통해 김훈 중위의 명예를 조속히 회복시키는 '순직 처리'를 조건없이 추진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나마 지난 14년간 국방부가 해온 잘못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이며 당연한 도리임을 김관진 국방부 장관에게 강력히 촉구합니다.

25살에 죽어 이제 살았다면 39살이 되었을 김훈 중위. 그의 안타까운 넋에 또다시 흰 추모의 국화꽃을 올리며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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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비정규직 이 씨는 왜 스스로 목을 매야 했나?

현대차 비정규직 이 씨는 왜 스스로 목을 매야 했나?

[현장편지] 불법파견 문제에 현대차·정치권·정규직노조 나서줬다면…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 전 금속노조 비정규국장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9-17 오후 1:26:54

 

9월 15일 새벽,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가 목을 매달았습니다.

9월 14일 과거사 논란에 휩싸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는 청소노동자들을 만나 "월급이 원청하고 차이가 나면 안 되는데"라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새벽, 현대자동차에서 원청의 절반도 안되는 월급을 받으며 11년 동안 자동차를 만들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스로 목을 매 숨졌습니다.

새누리당 조윤선 대변인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환경미화원과의 대화를 시작으로 다양한 분야와 업종에 걸친 현장을 찾아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직접 만나 대화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바로 다음날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는 박근혜 후보는커녕 새누리당 당직자 한 명 만나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불법파견을 은폐하고 사내하청을 합법화하는 법안이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정몽구 보호법'이라고 불리는 '사내하도급 보호법'을 올해 꼭 통과시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음 날, 정규직 전환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현대차 '사내하도급' 노동자는 병든 아버지와 어린 누이를 남겨두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문재인 후보가 14일 열린 TV 토론에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800만 명에 달하는 비정규직을 점차 정규직화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노동부가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한 2004년부터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난 올해까지 8년 동안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싸웠던 노동자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 지난 5월 새누리당이 민생법안 1호로 불법파견을 합법화하는 '사내하도급법'을 내놓자 노동시민단체는 반발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박근혜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난 다음날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이재환 조합원(32)이 스스로 목을 맸다는 소식이 전해진 토요일, 그를 잘 아는 노동자들이 경주의 장례식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왜 병환 중이신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10년을 넘게 일했던 현대자동차에서 정규직화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목을 맬 수밖에 없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주고받았던 문자나 통화 기록도 없었습니다. 그가 속한 시아테크라는 업체에서 전체 조합원에게 일괄 발송한 문자조차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의 핸드폰에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최근 대화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비정규직노조 조합원 자살 소식에 당황하던 현대차와 하청업체는 유서가 없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겁니다. 하청업체에서 "특근을 신청하는 등 최근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문자를 노동자들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두 번의 대법원 판결과 노사교섭으로 어느 때보다도 정규직 전환의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왜 그에게는 살아야 할 희망이 없어진 것일까요?

현대자동차에서 11년 동안 청춘을 바쳐 일했던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은 병든 아버님과 어린 동생, 그리고 빚을 독촉하는 카드명세서 뿐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를 11년 만든 비정규직 노동자가 남긴 것

그는 2002년 울산 2공장에 들어와 11년 동안 비스토, 투싼, 산타페, 아반떼, I(아이)40를 만들었습니다. 자동차 운전석 정면에 있는 '크래쉬패드'를 조립하는 일을 했던 그는 2004년 겨울 노동부에서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1만 명에 대해 불법파견이라는 판정이 나오고 2005년 비정규직노조가 정규직화 투쟁을 벌이자 노조에 가입했습니다.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거나 더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정규직의 절반도 되지 못하는 임금을 받으며 차별과 멸시에 시달렸던 그에게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은 정규직 전환에 대한 첫 번째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비정규직 노조 간부들의 구속과 해고만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노동자의 친구라던 노무현 정부는 이들의 가슴에 분노와 절망을 아로새겼습니다.

5년의 시간이 흘렀고,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은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으로 생산되는 제조업 생산 공정은 불법파견이기 때문에 2년 이상 근무한 사내하청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간주된다"며 '합법도급'이라는 고등법원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정규직 전환에 대한 두 번째 희망이 생겨난 것입니다.

2010년 11월 15일부터 25일 동안 5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공장 점거농성을 벌였고, 그가 속한 2~3공장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파업을 벌였습니다. 비정규직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의 손을 거부했고, 싸움은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노조 간부들에게는 구속과 해고, 손해배상이라는 형벌이, 그에게는 정직이라는 고통이,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슴에는 정규직노조의 배신이라는 각인이 새겨졌습니다.

정규직화에 대한 세 번의 기회

1년 6월의 시간이 흘러 올해 2월 23일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나오고, 현대차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위해 싸우겠다고 약속했을 때 세 번째 희망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을 배신했던 집행부를 이긴 '민주집행부'가 들어섰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대는 어느 때보다도 높았습니다.

다리를 크게 다쳐 3개월의 병가를 보내고 공장으로 돌아온 그에게 비정규직노조의 파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파업에 참가했고, 집회와 농성을 벌였으며, 용역경비의 폭력 앞에서 당당하게 만장을 들고 싸웠습니다. 2005년과 2010년 패배의 아픈 기억이 있었지만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내놓은 것은 불법파견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3천명 신규채용안이었습니다.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신규채용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고, 흔들린 일부 조합원들이 파업 현장을 떠나갔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3000명 신규채용안을 '쓰레기안'이라며 거부하자,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안만을 남기고 임금협상을 타결했습니다. 2700만원이 넘는 성과급 돈 잔치 앞에서 '비정규직 연대'라는 가치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그의 세 번째 희망, 마지막 희망은 이렇게 사그라지고 있었습니다.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마지막 희망

"알려드립니다. 현재 진행 중인 불법파업, 불법행위를 중단바라며 이에 따른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음을 통보드립니다.(시아테크 대표)"

비정규직노조의 파업에 참여했던 그와 조합원들에게 하청 사장이 보낸 문자입니다. 정규직 임금 협상이 끝나자 하청 사장은 그의 동료들 4명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는 해고는 말도 안 된다며 다시 파업을 하자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오랜 노동조합 경험으로 그는 정규직 전환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을 매달기 전날 점심시간에 공장 식당에서 그의 친구에게 기록되지 않은 '유서'를 남겼습니다.

"요즘 우리 조합도 많이 힘들제? 이번에는 정규직 전환에 대한 기대가 높았는데, 어려울 것 같다. 내가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친구는 그에게 그런 농담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 현대자동차가 불법 파견 인정 대신 사내하청 일부 신규 채용안을 내놓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3000명 신규채용안과 사라진 마지막 희망

현대자동차가 대법원 판결에 따라 지난 10년 간 불법을 저질러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 전환에 대해 노사교섭에서 전향적인 태도로 나왔다면 그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2010년 대법원 판결 이후 노동부와 검찰이 명백한 불법노동에 대해 정몽구 회장사용자들의 책임을 묻고 현장조사와 특별근로감독을 비롯한 조치를 취했다면 이 젊은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파견법과 비정규직법을 만들어 900만 비정규직의 고통과 절망을 양산했던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를 비롯한 대권주자들이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망과 고통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였다면 그가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을까요?

회사와 정부와 정치권이 나섰다면

3000명 신규채용안에 대해 회사는 "특히 불법파견 논란을 마무리하고 동시고용 유연성을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현행 근로자파견법을 피해 아무 때나 쓰고 버릴 수 있는 노동자들로 사용하겠다는 뜻입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 때 현대차에서 1천명이 넘는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해고했던 것처럼, 앞으로 경제위기가 심화되거나 판매가 부진할 경우 언제든지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쫓아낼 수 있는 '고용 유연성'을 확보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현대차지부 문용문 지부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간담회에서 3000명 신규채용안을 수용하라며 조합원이 절대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고,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은 계속될 것이며, 설령 3천명 안에 들지 못하더라도 이후에도 계속 채용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업체 인원을 우대할 것이고, 해고자 문제도 전향적으로 풀 것이라고 했습니다.

"재환이가 이번에는 정규직노조에 기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3000명 신규채용안이 나오고, 정규직노조 태도를 보면서 기대가 사라지게 된 겁니다. 우리처럼 초기에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들은 분위기를 보면 알잖아요. 재환이가 정규직이 되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는데…."

고 이재환 조합원의 친구가 전한 얘기입니다.

어쩌면 이재환 조합원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버티지 못하고 끝내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정말 무엇일까요?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 전 금속노조 비정규국장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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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대선 후보 문재인, 그가 넘어야 벽들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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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2/09/17 07:25
  • 수정일
    2012/09/17 07:2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민주당 대선후보로 문재인 후보가 선출됐습니다. 문재인 후보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기쁨도, 안타까움도 느꼈습니다. 아스팔트가 아닌 돌밭을 내딛으면서 정치인 문재인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기뻤지만, 가는 걸음마다 그를 공격하고 순탄하지 않은 외부적인 요인을 보면 정치를 시작한 그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후보의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넘어가야 할 담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어제 그가 민주당 후보로 당선된 만큼 이제 앞으로 그가 할 일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민주통합당, 구태의연한 정당 정치를 넘어야 한다'

왜 국민은 민주통합당에 많은 실망을 할까요? 말로는 정치 개혁을 외치지만 결국 그들의 모습을 보면 구태의연한 기성 정치인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민주당은 내부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경선 과정에서 보여준 계파 간의 헐뜯기는 그 도를 넘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민주당 대선 후보로 문재인 후보가 선출됐으니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그를 지지하고 성원해줄까요?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현재 민주당 지도부에서는 최고위원회의 권한을 대선 후보에게 위임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선 기간 내내 담합설과 지도부 사퇴를 요구한 일부 후보 지지자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순조롭게 이런 지도부의 뜻을 따를지 의문입니다.

문재인 후보는 경선에 참여했던 후보들과 연대 이전에 그들이 가졌던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해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최고위원회의 권한을 줬다고 해도 반지도부가 계속해서 지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밑에서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문재인 후보가 용광로 같은 선대위를 만든다고 하는데, 여기서 두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대위는 말 그대로 대선을 위한 조직적으로 한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다른 계파에서 온 인물들이 그럴 수 있느냐는 점과, 선대위가 인수위 등으로 이어지는 사례에서 보듯이 선대위에 참여하려는 기득권 세력을 어떻게 정리하느냐입니다.

그리고 가장 우려되는 것이 바로 대선 후보 흔들기입니다. 단순히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는 원색적인 일들도 발생할 수 있겠지만, 더 큰 문제는 민주통합당 의원이지만 안철수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서 속칭 간을 보는 민주통합당 의원입니다.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 안철수 원장을 지지하고 그를 돕는 일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사람이 있는데 소속 의원이 안철수를 지지하고, 한마음으로 정당 대선 후보를 돕기보다 오히려 단일화 이전에 그를 위해 뛴다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단일화 이후는 상관없겠지만, 두 사람의 단일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반드시 각자의 자리에서 그들의 몫을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민주당의 개혁입니다. 민주당은 정당정치의 구태의연함을 아직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친재벌,관료적인 부패 인물도 있습니다. 이런 인물들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그들을 등용한다면 국민과 지지자,유권자 모두를 실망하게 할 것입니다.

문재인 후보가 민주당을 개혁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국민이 민주당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대선 지지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민주당은 존중하되, 그 안에 있는 쓰레기는 싹 청소하고 국민에게 깨끗한 모습으로 변화된 민주당을 선보여야만 대선을 치를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힘이 생깁니다.

' 모바일 민심이 전부가 아니다'

민주당 경선 과정 내내 모바일 투표에 참여한 민심은 당심이 아니라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분명히 민주당 모바일 경선에 참여한 선거인단은 당심과 민심이 합친 거대한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12월 대선은 온 국민이 참여하는 선거입니다. 그 안에는 노년층도 있을 것이고, 주부, 보수 세력,중도 세력 등 다양한 계층이 있습니다. 57만 표의 모바일 민심이 (문재인 후보는 336,717표) 대한민국 대선을 이길 수 있는 전부는 아닙니다. 대선운동의 시작은 될 수 있으나 부족합니다. 나중에 대선 전에 유권자 분석을 통해 다시 한번 언급하겠지만, 민주당 모바일 민심만을 믿으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유권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도세력과 보수 이탈 세력을 끄집어낼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난 17대 선거에서 50-60대의 투표율은 76%를 넘었습니다. 50-60대가 투표율이 높았기 때문에 이들을 무조건 공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선거인의 연령대를 보면 50-60대는 33.7%이고, 20-40대는 64.6%입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초박빙의 승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20-40대만 끌고 간다는 전략을 펼치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대선은 종이투표를 사용하는 선거입니다. 모바일과 참여 방식이 다르므로 모바일에 참여했던 젊은 세대만을 믿고 가기에는 부족합니다. 이 부족함을 채우고 넘어가야 12월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조중동과 같은 야만의 언론, 어떻게 이길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참여했던 공범자로 저는 언론을 제일 손꼽습니다. 그들이 만든 언론공작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도 저는 봅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 만약 SNS가 있었다면 과연 노무현 대통령이 가슴 아픈 결심을 했겠느냐는 생각도 합니다.)

참여정부 내내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왜곡했고, 그를 공격했으며, 그를 아예 범죄자로 처음부터 만들어 놓고 뒤에서 사악함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사례가 있었기에 이번 대선은 처음부터 새누리당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를 막는 전담팀 이전에, 언론 네거티브 공세를 이길 수 있는 태스크포스팀이 빨리 만들어져야 합니다.

어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는데 벌써 너무 빠른 걱정이 아니냐고 생각하십니까?

 

 

▲ 민주당 경선 다음날인 오늘 9월 17일 조선일보 기사.

 


오늘 아침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신문 1면 전체를 (하얀색 부분은 광고) 문재인 후보 검증으로 도배됐습니다. 문구가 아주 교묘합니다. '노정권때 매출 3배로 뛴','문재인 아들','불법건축물'등의 문구를 통해 철저하게 도덕성 잣대를 무차별적으로 들이대고 있습니다. 이런 조선일보의 기사를 접한 일부 시민들은 문재인 후보도 마치 기성 정치인과 똑같은 부패한 정치인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왜 조중동과 같은 야만의 언론이 무서운지 아십니까? 바로 공격의 칼날을 들이댈 때는1%의 팩트에 99%의 거짓말을 더해 거짓을 100% 진실처럼 둔갑시키는 언론조작 정치의 특수전과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후보가 이런 언론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기느냐에 따라 대선에서의 승패가 갈릴 수도 있습니다.

 

 

 


안철수와의 단일화를 문재인이 넘어야 할 벽으로 생각하십니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재인과 안철수, 이 두 사람의 싸움을 부추기는 존재는 바로 새누리당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사람은 넘어야 할 벽이 아니라, 함께 손을 잡을 존재라고 믿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우리가 도와줘야 합니다.

분명 안철수와의 단일화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단일화가 이루어지는 시기까지 이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정책과 비전을 각자의 자리에서 국민에게 보여주고 국민의 선택만을 기다리면 됩니다. 그 안에는 싸움도 네거티브 논쟁도 모두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사람의 정책 토론과 같은 TV 프로그램 동반 출연은 어떨까도 생각해봅니다.

자꾸 새누리당이 만든 프레임에 속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든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 두 사람이 서로 싸우고 결선에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간교함을 깨뜨려야 합니다. 단일화 과정이나 방법은 남아 있지만, 이 두 사람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각 캠프 관계자들이 기득권을 내세우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기만 하면 됩니다.
 

 

 

 


문재인 후보가 정치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개인적인 정치보복은 하지 않아도 정권 심판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올바른 사법부를 만들어 제대로된 법을 가지고 법을 어겼던 범죄자들을 모두 엄벌에 처하는 단호함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문재인 후보는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벗을 수가 있습니다. 친노라는 딱지도 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선 과정에서 혹독한 시련을 통해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 우뚝 섰고, 국민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줬던 정치개혁이 이제 문재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완성되리라 봅니다.

문재인이 노무현의 그늘 아래서 대선후보가 되었다고 폄훼하는 분들, 그는 비록 노무현의 그늘 아래서 출발을 했을지는 모르나, 지금의 문재인은 국민의 그늘 아래서 대선후보가 되었고, 국민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는 큰 나무가 될 것이다. <레인메이커 ‏@mettayoon>

그에게는 넘어야 할 벽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벽을 혼자서 넘을 수는 없습니다. 지도자는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함께 손을 잡고 벽을 넘어,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야 합니다. 그가 이제 국민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손을 잡고 벽을 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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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인터뷰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인터뷰

조회수 618추천수 02012.09.15 12:22:45

카페에서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서울 중구 순화동 염천교 사거리에서 자세를 취한 박노자 교수. 그는 어떠한 사적인 질문도 공적인 답변으로 전환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강재훈 선임기자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9월 초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려고 잠시 귀국한 박노자 교수와 어렵게 약속을 잡고, 그의 글에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모아 질문지를 준비했지만, 그의 입으로 개인사를 듣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소문대로 그는 어떤 사적인 질문도 공적인 답변으로 전환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포그롬(유대인 박해)으로 고생한 집안 어른들의 고통스런 삶을 물으면 20세기 초반 유대계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와 분파에 대한 강의가 이어지는 식이었습니다. “지식인이 공공이익과 상관없이 개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몸을 파는 어릿광대짓”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래도 대화는 유쾌하고 유익했습니다. 높은 톤의 목소리에 실린 놀랍도록 풍부한 그의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미리 준비한 가벼운 질문들은 아예 써먹을 틈이 없었습니다. 메뉴판의 ‘아메리카노’를 보자마자, 유시민씨에 대한 생각이 줄줄 흘러나왔습니다.

 

“유시민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타협이 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창씨개명까지는 봐줄 수 있지만, 학병 나가라는 강연은 용서할 수 없잖아요. 유시민은 이라크 파병 연장에 찬성함으로써 반민중적 폭력과 연관되어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죠.”

 

정규직 되려 노르웨이 갔어요
러시아·한국 시간강사들은
아직도 생계가 어려운데
혼자만 잘사는 게 미안하죠

 

동료들은 4시면 퇴근해요
밤늦게까지 일하는 저에게
동료들은 묻곤 했어요“언제 이혼하냐,
왜 근로기준법을 어기냐”

 

유시민과 공지영을 보는 시각
-박노자가 좌파라면 유시민은 리버럴일 텐데, 좌파와 리버럴의 본질적인 차이는 뭔가요?

 

“좌파는 원칙상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를 지향합니다. 리버럴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죠.”

 

-공지영 선생처럼 노동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도우려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까지 차가운 눈으로 바라봐야 하나요?

 

“공지영 작가는 사회운동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이 있고 이는 당연히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문제는 인권, 민주주의 등을 내세워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은폐하는 혹세무민의 논리입니다. 리버럴들은 관용, 다양성, 참여정치, 다문화사회 같은 말을 즐겨 씁니다. 다 좋은 말인데 그 안에는 ‘재벌들의 생산수단 사유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말라,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도 건드리지 말라’는 생각이 담겨 있어요. 본질을 흐리는 리버럴들의 프로파간다죠. 그런 의미의 혹세무민입니다. 케케묵은 새누리당보다 호소력 있는 리버럴이 더 위험한 거죠.”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늘 비판적이었죠?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가 다를 게 없으니까요. 노 대통령은 노동자에 대한 악질적 탄압, 파병 범죄, 에프티에이(FTA), 평택미군기지 등 많은 문제가 있었죠. 강경진압을 용인하여 두 명의 농민을 죽게 한 건 일종의 간접살인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박노자에게 이번 대선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게 제일 두려운 질문인데요. 이번 대선에 민중 후보가 나타나서 얼마나 선전할 것인지가 저의 관심입니다. 마르크스가 ‘마구간과 같은 부르주아 국회를 우리 연단으로 사용하자’고 말한 것처럼 이 선거에서 말할 기회를 잡는 게 중요합니다. 그 연단에서 ‘재벌 기업이 노동자와 사회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 주주들의 사유권을 몰수해야 한다,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꾸어야 한다, 남북 공존을 위해서 군대를 줄여야 한다, 자영업자나 알바들을 보호할 파격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대놓고 얘기해야죠.”

 

-자칫 보수의 집권 연장을 돕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까요?

 

“박근혜의 세계관이 극도로 국가주의적이라서 좌파 지식인을 탄압하는 공안 광풍이 걱정되기는 합니다. 박근혜가 되면 안 되죠. 그러나 노동자는 노동자 후보를 지지해야 합니다. 차악보다는 선이 먼저니까요.”

 

-오슬로대학의 교수생활은 어떻습니까? 연구업적에 쫓기는 삶인가요?

 

“노르웨이는 위대한 초일류국가 대한민국만큼 선진화가 안 됐잖아요.(웃음) 동료들은 4시면 퇴근해요. 밤늦게까지 일하는 저에게 동료들은 두 가지를 묻곤 했어요. 언제 이혼하냐, 왜 근로기준법을 어기냐?(웃음) 누가 시킨다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처럼, 연구도 직업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기가 좋아서 해야죠. 국가나 학교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연구는 성매매와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미국의 권위있는 잡지에 논문이 실리면 몇천만원씩 주기도 한다면서요? 정신분열입니다. 자기 영혼을 그렇게 파는 교수는 성매매보다 백배 천배는 나쁜 짓을 하는 거죠.”

 

1973년 소련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변전기 설계사인 아버지와 미생물학 교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박노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극동사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 모스크바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친가는 제정러시아 시절 박해와 학살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이주와 고등교육의 기회를 얻어 1930년대 레닌그라드에 정착한 유대인 집안입니다. 우크라이나계로 일찍이 볼셰비키 지지자가 되었던 친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RP) 성향의 외가는 1905년 학살 때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숨겨주기도 했습니다. 민족을 타파하자는 소련 초기의 국제주의에 충실했던 외할아버지는 유대계 외할머니와 결혼해 어머니를 낳았습니다. 모계를 중시하는 유대 전통에 따르자면 어머니도 유대인 아니냐고 묻자, 그는 “반 정도는 그렇죠. 근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국제주의자다운 태도였습니다. 어린 시절 유대인으로 놀림받은 경험을 물었습니다. 사적인 질문이었지만 답변은 역시 공적인 내용으로 바뀌었습니다.

 

“소수자들이 어디서나 겪는 일이죠. 민중 속에 널리 퍼진 반유대주의 편견을 사회주의도 완전히 씻어내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공식적 이데올로기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폭력에 많이는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폭력에 민감해요. 조화 속에서 동지애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집단 안에서는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청년 공산당조직이 잘 통제했죠.”

 

 

샤란스키와 장준하의 비극, 비교가 됩니까
-비밀경찰의 통제 아래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 아니었나요?

 

“1930년대 스탈린의 숙청 때는 그랬죠. 제가 자랄 때는 전혀 아니죠. 저희 동네 경찰은 무기도 안 가지고 다녔어요. 경찰이 무기를 들고 다닌 것은 망국(그는 소련의 해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후입니다.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에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양심수를 석방했는데 그 수가 200명이었어요. 양심적 병역거부자, 불법출국을 시도한 사람들, 과격 민족주의자를 모두 합쳐도 그 정도였죠.”

 

-이스라엘로 이주해 장관까지 지낸 나탄 샤란스키 같은 사람의 자서전을 보면 소련을 상당히 끔찍한 사회로 묘사하던데요? 사하로프 박사의 경우도 그렇고요.

 

“사하로프가 받은 끔찍한 탄압이라고 해봐야 거주지 이전 명령으로 모스크바를 떠나 6년을 지낸 건데, 도시 안에서 돌아다니는 건 자유로웠어요. 과격한 유대민족주의자였던 샤란스키는 13년 형을 받았지만 고문당한 적은 없어요. 장준하나 김남주가 당한 의문사, 고문, 탄압을 생각해 보세요. 비교가 됩니까? 적어도 말기의 소련은 남한의 파쇼정권처럼 고문과 살인으로 지식인 집단을 다스리지는 않았어요.”

 

-90년대 초반 러시아의 엄청난 경제난 속에서 한-러 통번역, 여행 가이드 등 다양한 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러시아 보따리장수들을 데리고 하도 많이 다녀서 남대문은 눈 감고 돌아다닐 수도 있어요.(웃음) 명예 박사학위를 받으러 러시아에 온 수많은 총장·교수들의 통역도 맡았죠. 썩어빠진 어느 지방 사학재단 총장이 학술논문 하나 없이 석사논문만을 근거로 명예 박사학위를 받는 것도 봤어요. 저보다는 고려인 통역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여자 구해 달라고 하고, 반말하고, 성추행하고, 개돼지 대접을 했거든요. 백인에게는 조심하면서도, 못사는 동족에게는 극단적인 멸시와 차별을 하는 ‘지엔피(GNP) 인종주의’였어요. 고려인 후배 중에는 ‘관광객 안내를 계속하다가는 한국 문화까지 싫어져서 한국학을 그만두게 될 것 같다’고 가이드 노릇을 중단한 친구도 있었죠. 망국 이후의 러시아는 정상적인 사회 작동을 멈춘 상태였고요.”

 

-망국의 아픔을 실감하셨군요?

 

“공산정권이 통제를 하기는 했지만, 지식인들 먹여 살리고 지식 인프라를 늘리고 인문학 발전을 위한 기반은 만들었어요. 망국 이후 제일 먼저 무너진 게 도서관이에요. 망국 이전에는 대학 도서관만 가면 언제든지 <뉴욕 타임스>, <워싱턴 타임스>, 외국 과학잡지를 볼 수 있었거든요. 그런 걸 읽지 않으면 서방에 뒤진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망국 이후의 새로운 자본주의 정권은 과학과 인문학에 아무 관심이 없었고, 수많은 과학, 인문학 노동자들이 굶어죽었습니다. 그걸 방치한 정권은 살인자들이었죠.”

 

-그 시기에 러시아로 유학 온 아내를 만났죠? 양가의 결혼 반대는 없었나요?

 

“옐친의 자유화로 물가가 백배쯤 뛰어버려 장학금으로는 빵 몇 조각도 못 사던 시절이에요. 그때 몇 년은 알바 한 기억밖에 없어요. 음악원에서 통역을 했는데 남한 유학생들이 소련인들을 많이 멸시했죠. 개인 레슨을 받으면서도 ‘저 교수에게는 10불 이상 주지 마라. 버릇 나빠진다’고 가난한 사람을 타자화하고 차별했어요. 아내는 소련 사람을 덜 멸시했죠. 망국 이후 아버지는 실직하고 어머니는 연금생활자였기 때문에 우리 집은 결혼을 반대할 여력도 없었어요. 굶어죽는 게 걱정이었으니까.(웃음) 아내 쪽은 처음에 좀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따뜻하게 맞아주셨어요.”

 

97년부터 3년간 경희대에서 비정규직 교수로 러시아어를 가르친 박노자는 주말이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사를 강의했습니다. 일요일을 같이 보내지 않는다고 아내의 불만이 많았지만, 인도·네팔에서 온 노동자들과 신라 불국토 사상을 함께 토론할 수 있었던 “너무 재미있는” 자원봉사였습니다. 99년에는 로버트 할리, 이한우와 함께 <한겨레>에 ‘서울 돋보기’라는 제목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필자들이 한국의 음식과 문화를 다룬 가벼운 글을 주로 쓴 데 반해, 박노자는 처음부터 박정희 독재, 베트남 파병, 양심적 병역거부 등의 무거운 주제를 들고나왔습니다. 논객 박노자의 화려한 등장이었습니다.

 

“한국이 특별히 나쁘다는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인간의 정상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어요. 제가 소련에서 군사교육 시간에 불교경전을 읽다가 쫓겨난 적이 있어요. 당장 군대로 끌려가지는 않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병역면제를 받았죠. 베트남 파병 글을 쓸 때는 어머니 친구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와 매우 친했던 베트남 유학생이 나중에 호찌민시 대형병원의 원장이 됐는데 80년대까지 소식을 주고받았거든요. 그분이 보내준 노역된 베트남 고전을 읽으면서 자라났기 때문에 베트남 사람을 형제처럼 생각했죠. 양심적 병역거부도, 베트남도, 남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비판적 글을 쓰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월드컵을 지배층의 속임수라고 <오마이뉴스>에서 비판했을 때는 댓글의 절반쯤이 죽이겠다는 얘기였어요. 한국에서는 밥 먹듯이 하는 말이잖아요.(웃음) 언어폭력이나 잘리는 건 두렵지 않아요. 고문이나 테러 같은 물리적 폭력은 두렵죠.”

 

(※클릭하면 이미지가 확대됩니다.)

 

제 얘기가 그렇게 근본주의로 들리나요?
-2000년 노르웨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정규직이 되고 싶었어요. 국민의료보험과 연금이 있는, 소련과 비슷한 사민주의 사회에서 살고 싶기도 했죠.”

 

-2001년 출간한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억대 인세를 ‘아시아의 친구’라는 단체에 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인세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몰라요. 노르웨이에서 받는 월급이 있고, 정규직이니까 먹고사는 데 지장 없잖아요. 이민자 차별에 저항하는 단체와 연대하고 싶었고요. 저작권은 원칙적으로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큰돈을 기부하고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는 않나요?

 

“아내에게 많이 미안하죠. 그래도 요즘 집안 노동을 많이 해서 죄악을 씻고 있어요.(웃음) 첫째가 2002년생, 둘째가 2011년생인데, 비정규직일 때는 아이 낳을 생각을 못했어요. 언제 쫓겨날지 모르니까요. 비혼과 무자녀가 비정규직의 유일한 무기잖아요. 비정규직 탈출하려면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아기가 있으면 불가능하죠. 비정규직 양산이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차단하고 인구 재생산을 막는 겁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는 제가 육아노동을 열심히 합니다. 그 전에는 아내가 오랫동안 혼자 고생했죠. 저도 죄인이라 말하기 뭣하지만, 지식인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 집안일을 안 하고 공부만 하는 거예요.(웃음)”

 

-한국과 노르웨이를 오가며 많은 글을 쓰고 있는데 그 힘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미안함이죠. 제가 망국 후 러시아를 떠나지 않았습니까? 러시아에 남은 동료와 후배들은 시간강사 해도 생계가 되지 않아서 엄청난 고생을 해요. 한국에서 비정규직 생활을 같이 한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혼자 잘사는 게 미안하죠.”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은?

 

“애들 때문에 쉽지 않아요. 노르웨이에서 자란 첫째 아이에게는 한국의 불평등과 인권침해가 매 순간 충격이거든요. 아이는 저에게 한국에서의 활동을 접으라고도 해요. ‘한국 사회의 일상적 보수성을 보면 사회주의로 가기가 불가능하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노르웨이의 적색당 활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하죠.”

 

-반대편의 이야기도 들을 기회가 있나요?

 

“한국 올 때마다 택시운전사들과 이야기해요. 일부는 보수적인 분들인데, 제가 한국말을 한다고 신기해하시면 ‘진보신당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살짝살짝 물어보죠. 대부분 당 이름도 몰라요.(웃음) 그래도 노동하는 분들과 얘기하면 늘 좋죠.”

 

인터뷰를 마치며 박 교수는 걱정스런 얼굴로 “제 얘기가 그렇게 근본주의로 들리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진보신당 사람들은 늘 올바른 이야기를 하지만, 가끔은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당인데도 제가 선뜻 표를 주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저의 그런 우려에 박 교수는 “지식인의 삶의 유일한 기준은 죽음에 임박해 자기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30년대 말의 조선 지식인들을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뜨끔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든 아니든,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수자로 태어나 평생 약자에 대한 따뜻한 감수성과 냉철한 이성을 벼려온 박노자의 존재는 ‘지엔피 인종주의’에 빠져 외국인과 소수자 차별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그의 아들 율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더 오랜 시간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 인터뷰였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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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북한에 특사 보내 취임식에 초청할 것"

 

문재인 "북한에 특사 보내 취임식에 초청할 것"
대선후보 수락연설서 '평화와 공존의 문' 제시 <전문>
 
 
2012년 09월 16일 (일) 17:35:17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민주통합당 문재인 제18대 대통령 후보. [사진출처-민주통합당]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문재인 후보는 16일 수락연설문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한에 특사를 보내 취임식에 초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당시에도 북한 고위층 사절단을 초청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한설이 흘러나왔지만 실현되지 못한 바 있어 문 후보의 이같은 구상이 실현될지 주목된다.

문재인 후보는 이날 오후 1시부터 고양체육관에서 개최된 서울지역 순회투표에서 158,271표(60.61%)를 얻어 누적득표율 56.52%로 과반을 넘겨 결선투표 없이 대통령 후보로 최종 확정됐다.

문 후보는 수락연설에 나서 “새로운 시대로 가는 다섯 개의 문이 우리 앞에 있다”며 △일자리 혁명의 문 △복지국가의 문 △경제민주화의 문 △새로운 정치의 문 △평화와 공존의 문을 제시했다.

특히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다섯 번째 문은 평화와 공존의 문”이라며 “분단 극복은 우리 민족의 과제이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문 후보는 먼저 “지난 5년, 한반도는 대결과 긴장의 연속이었다”며 “6.15, 10.4 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남북경제연합을 통해 경제 분야에서부터 통일을 향해 나아가겠다”며 “남북경제연합은 우리 대한민국을 ‘30-80시대’로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30-80’은 소득 3만 달러와 인구 8천만 이상을 의미하며 미국, 독일, 일본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저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한에 특사를 보내 취임식에 초청할 것”이라고 밝히고 “임기 첫 해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재확인했다. 나아가 “대통령 선거 전이라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이명박 정부의 요청이 있다면 우리당과 함께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적극적 입장을 밝혔다.

문 후보는 대외정책으로 “남북대화와 6자회담을 복원할 것이다.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을 함께 추진하겠다”며 “미국과는 동맹관계를 공고하게 하는 가운데 주변 국가들에 대해서도 균형외교를 펼치겠다”고 약속했다.

이 외에도 문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관련, 재벌의 특권과 횡포를 용납하지 않고 골목상권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정치개혁과 관련 책임총리제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고 정당책임정치를 구현하겠다고 공약했다.

문 후보는 당면한 대선에 대해서는 “더 널리, 새로운 인재들이 함께하는 열린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겠다”며 “그 힘으로 우리 민주통합당이 중심이 된 정권교체의 길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정권교체, 정치교체, 시대교체, 반드시 해내겠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꼭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서울지역 순회투표에서는 손학규 54,295표(20.79%), 김두관 30,261표(11.59%), 정세균 18,322(7.02%)를 득표했으며, 누적 득표율은 문재인(56.52%)-손학규(22.17%)-김두관(14.30%)-정세균(7.00%) 순으로 집계됐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문>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문을 열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당원 동지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변화를 선택하셨습니다.
정권교체를 선택하셨습니다.
민주통합당의 승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저 문재인을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내는 주역이 되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저는 두렵지만 무거운 소명의식으로 민주통합당의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부여된 막중한 책임을 반드시 이루어낼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여러분의 지지와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1년 전만 해도 저는 현실정치로부터 멀리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민주통합당의 대통령후보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먼저,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국민참여시대를 열었던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대통령이 계십니다.
저의 오늘은 두 분의 역사 위에 서있습니다.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이 계셨습니다. 저에게 큰 용기가 되었습니다.
변화에 대한 그분들의 간절함이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국민경선에 함께 한 100만 명의 시민들이 계십니다.
저에게 정권교체에 나서도록 힘을 모아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당원 동지들의 격려가 있었습니다.
경선기간 내내 저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습니다.
저는 자랑스러운 민주통합당의 후보입니다.
그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세 분 후보님이 끝까지 경선을 함께 했습니다. 위로의 인사와 함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쟁이 저를 거듭나게 했습니다. 소명과 책무를 더욱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 분 후보님과 손을 잡겠습니다. 민주통합당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습니다. 수년 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유럽이 재정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세계경제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시장만능주의와 성장지상주의가 빚어낸 결과입니다.
곳곳에서 보통사람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대한민국도 위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 경제는 개발독재와 정경유착으로 파행적인 압축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경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안팎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성장만을 외치며 달려오는 동안 특권과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독선과 아집이 횡행했습니다. 갈등과 반목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이 구시대 문화가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시대는 질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쟁과 효율’에서 ‘상생과 협력’으로의 전환입니다.

‘불통과 독선’의 리더십은 구시대의 유산입니다.
권위주의 시대의 역사의식으로는 새 시대를 열 수 없습니다.

‘협력과 상생’이 오늘의 시대정신입니다. 저는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을 발휘하겠습니다.
‘공감과 연대’의 리더십을 펼치겠습니다. 저 문재인이 변화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국가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느끼십니까?
나의 어려움을 함께 걱정해주는 정부라고 생각하십니까?

보통사람들의 현실은 불안하고 아프기만 합니다.
힘겨운 직장생활에도 가계는 여전히 빚투성이입니다.

40대, 50대 가장들은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몰라 불안합니다.
자영업자들은 이미 포화상태입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수명은 많이 늘어났는데, 노후 대책이 없습니다.
불공평 속의 빈곤과 사회안전망의 부족이 우리나라를 자살률 1위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청소년들은 끔찍한 성적 경쟁으로 인한 좌절과 절망 속에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어두운 밤길이 무섭습니다. 주부들은 자녀들의 등하굣길을 살펴야 합니다.
집에 있는 아이들의 안전도 걱정해야 합니다. 범죄가 만연하지만 치안은 무력합니다.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는 끝이 없습니다.
기득권 정치, 정치 검찰, 재벌이 손을 잡고 있습니다.
이 특권 카르텔의 횡포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5년이 시대를 과거로 돌려놓았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도 후퇴되었습니다.
국민들은 불안 속에서 절망하고, 좌절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가 계속 후퇴할 것이냐, 다시 전진할 것이냐,
지금 우리는 그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바꿔야 합니다. 변화의 새시대로 가야 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다시 돌려놓아야 합니다.
저 문재인이 앞장서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사람이 먼저입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이 말이 국정철학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존엄한 세상입니다. 돈과 지위의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직업과 신분의 차별도 학력과 학벌의 차별도 없을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이 함께 기회를 가지는 나라’
‘상식이 통하고, 권한과 책임이 비례하는 사회’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 나라’
‘힘없는 사람에게 관대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는 사회’

출마 선언 때 시민들이 제게 주셨던 ‘공평’과 ‘정의’에 대한 요구들이었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공평’과 ‘정의’가 국정운영의 근본이 될 것입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것을 국정운영의 원칙으로 바로 세우겠습니다.

특권과 반칙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권층이나 힘 있는 사람들의 범죄는 더욱 엄중하게 처벌할 것입니다.

권력형 비리와 부패를 엄단하겠습니다.
재벌이 돈으로 정치와 행정을 매수하여 특권을 키우지 못하도록 특별히 경계하겠습니다.
병역의무를 회피한 사람이 고위공직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민간 분야도 반부패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맑고 투명한 사회로 거듭나도록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새로운 시대로 가는 다섯 개의 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것은 일자리 혁명의 문입니다.
복지국가의 문입니다.
경제민주화의 문입니다.
새로운 정치의 문입니다.
그리고 평화와 공존의 문입니다.
우리는 이 다섯 개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야합니다.

첫 번째는 일자리 혁명의 문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일자리가 민생이고, 성장이고, 복지입니다.
범정부적인 일자리 혁명을 추진하겠습니다.

대통령 직속으로 ‘국가일자리위원회’를 설치해서 직접 챙기겠습니다.
지방의 일자리 마련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특히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문턱이 높아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청춘들에게 무한 책임을 느낍니다.
청년이 바로 국가의 미래입니다.
‘국가일자리위원회’ 안에 ‘청년일자리특별위원회’를 두어 특별히 청년실업 문제를 챙길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더 이상 스펙에 매달릴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두 번째 문은 복지국가의 문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복지는 투자입니다. 성장의 동력입니다.

민주정부 10년은 복지국가의 시작이었습니다.
복지재정이 크게 늘었습니다.
제도의 기본 틀도 갖춰졌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많이 모자랐습니다.

이명박 정부 5년이 격차를 확대시켰습니다.
격차 해소가 국정의 최우선 목표가 될 것입니다.
소외되고 그늘진 곳이 없도록 살필 것입니다.
노인복지에도 관심을 쏟겠습니다.
고령화 사회, 고령사회에 대비하겠습니다.

복지국가를 위한 임기 중 계획은 물론 중장기계획도 세우겠습니다.
시혜적이고 선별적인 복지를 뛰어넘겠습니다.
보편적 복지가 계획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복지국가 대한민국’의 5년, 10년, 20년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한 번의 실패가 낙오로 이어져서는 안됩니다. 재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저 문재인은 ‘힐링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국민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겠습니다.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세 번째 문은 경제민주화의 문입니다.
경제민주화는 시대적 명제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경제 분야부터 ‘공평’과 ‘정의’를 바로세우겠습니다.
승자독식의 ‘정글의 법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상생과 협력’의 경제 생태계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경제입니다.
포용적 성장, 창조적 성장, 협력적 성장, 생태적 성장을 통해 일자리 창출, 복지확대, 지속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습니다.

공정한 시장 질서를 만들겠습니다.
재벌 관련 제도를 확실히 정비하겠습니다.
재벌의 특권과 횡포는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재벌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길을 찾겠습니다.
골목상권을 보호하겠습니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공존·공생’을 통해 일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받게 하겠습니다.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네 번째 문은 새로운 정치의 문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저는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겠습니다.
대통령이 권한 밖의 특권을 갖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한만을 행사할 것입니다.
결코 초심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책임총리제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겠습니다.
정당책임정치를 구현하겠습니다.
대통령은 당을 지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당은 정책을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하겠습니다.
시민들의 소통과 참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겠습니다.

국가균형발전정책으로 지방을 살리겠습니다.
본격적인 지방분권시대를 열겠습니다.
특정세력이나 지역에 편중되지 않은 균형인사를 하겠습니다.
품격 있는 정치를 하겠습니다. 편 가르기와 정치보복,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야당과도 외교·안보에 관한 정보를 공유할 것입니다.
이를 토대로 정책을 협의할 것입니다.
특히, 선거 때 공통으로 한 공약은 인수위 때부터 그 실행을 협의해 나가겠습니다.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다섯 번째 문은 평화와 공존의 문입니다.
분단 극복은 우리 민족의 과제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지난 5년, 한반도는 대결과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민주정부 10년이 공 들여 쌓아온 남북 간의 신뢰가 모두 무너졌습니다.
평화는 실패했고 안보는 무능했습니다.

6.15, 10.4 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튼튼한 안보의 바탕 위에서 평화와 공존의 한반도를 실현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는 평화가 경제입니다.
남북경제연합을 통해 경제 분야에서부터 통일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합니다.
북한은 한반도 경제를 넘어 대륙경제로 진출하는 기회의 땅이 될 것입니다.
남북경제연합은 우리 대한민국을 ‘30-80시대’로 이끌 것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와 인구 8천만의 한반도시장을 의미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미국, 독일, 일본에 이어 네 번째 ‘30-80’ 국가가 될 것입니다.
북한도 함께 발전하는 공동번영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한에 특사를 보내 취임식에 초청할 것입니다.
임기 첫 해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겠습니다.
대통령 선거 전이라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이명박 정부의 요청이 있다면 우리당과 함께 적극 협력할 것입니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 경쟁과 갈등의 파고가 높습니다.
한·일 간에는 독도와 역사문제를 놓고 대립이 있습니다.
중·일 간에는 영토분쟁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G2 국가로 성장했고, 미국도 아시아로의 회귀를 선언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도 미일편중외교와 대외전략의 부재로 일관했습니다.
한국외교의 방향타를 잃었습니다.
저는 남북대화와 6자회담을 복원할 것입니다.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을 함께 추진하겠습니다.
미국과는 동맹관계를 공고하게 하는 가운데 주변 국가들에 대해서도 균형외교를 펼치겠습니다.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협력을 이끄는 평화선도국가의 역할을 당당하게 해 나가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당원 동지 여러분.

우리는 이명박 정부에서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대통령을 잃었습니다.
두 분 대통령의 서거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파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었습니다.

저를 현실정치로 이끈 것은 국민들의 고통에 대한 책임감이었습니다.
참여정부가 더 잘해서 이명박 정부의 출범을 막아냈어야 했다는 뼈아픈 책임감이었습니다.

그 책임감이 저를 야권대통합운동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저는 두 분 대통령의 헌신과 희생을 딛고 새로운 민주정부시대를 열겠습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 그리고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여는
새시대의 맏형이 될 것입니다.

저 문재인, 늘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국민과 손잡고 동행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국민이 기대고 싶을 때 어깨를 내어주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당원동지 여러분

지금 정치권 밖에서 희망을 찾는 국민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또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의 표현입니다.
저와 우리 민주통합당이 반성해야 할 대목입니다.
그러나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 당이 과감한 쇄신으로 변화를 이뤄낸다면 새로운 정치의 열망을 모두 아우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권교체의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승리로 가는 길목에서 꼭 필요한 것은 우리의 단결입니다.

오늘 이 시점부터 우리 민주통합당은 하나입니다.
더 널리, 새로운 인재들이 함께하는 열린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겠습니다.
당내 모든 계파와 시민사회까지 아우르는 ‘용광로 선대위’를 만들겠습니다.
그 힘으로 우리 민주통합당이 중심이 된 정권교체의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우리 민주통합당과 함께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주십시오.
정권교체, 정치교체, 시대교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꼭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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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배은망덕’과 모순된 역사관

 

 
박근혜의 ‘배은망덕’과 모순된 역사관
 
[23년 전 박근혜 일기] 자기 아버지 억울한 것은 바로잡자고 외치면서
 
김욱 | 2012-09-15 11:09:3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박근혜 수필집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표지

 

 

 

 

 

 

 

 

 

 

박근혜의 책 중에 자주 인용되는 책이 하나 있다. 1993년에 출간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라는 책으로, 박근혜의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일기를 모아 펴낸 수필집이다. 중반과 후반은 개인적인 감상이고 앞부분은 박정희 10주기 추도식을 준비하고 치르는 과정에서 부모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내용인데 언론에서 주로 인용하는 부분은 바로 앞부분이다. 이 책에 실린 1989년 10월 27일자 일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제 10주기 행사는 온화하고 청명한 날씨 속에 무사히 끝났음을 하늘에 감사드리는 마음이다. 묘소까지 가는 도중 마음의 울렁임을 참기 힘들었다. 10년만의 추도식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추모사에서 '아 아버지!' 하고 부르고 나서 감정이 폭발하면 자제키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 안에서 어머니께 기도 드렸다. 감정을 억제하게 해주십사하고."

87년 이전까지 박근혜 남매는 아버지의 추도식을 할 수 없었다. 전두환 정권이 추도식을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이날 박근혜가 감정 폭발을 자제키 어려울 정도로 격한 감정에 휩싸였던 건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10주기 추도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근혜는 같은 해 12월 30일 일기에서 1989년은 "수년 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한 해"라고 말하며 감격에 겨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가 그렇게 바랬던 추도식은 박정희가 탄압한 민주화 덕분에 가능했다. 박근혜는 책에서 추도식을 가질 수 있었던 데 대해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대상은 '민주화'가 아니었다. 89년 11월 19일 일기에서 박근혜는 "한을 풀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과를 가져온 오늘이 있도록 해주신 하늘에 감사를 올리는 마음이다"라고 쓰고 있다. 박근혜에게 민주주의는 인간의 투쟁에 의해 쟁취된 게 아니라 하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썼다.

박근혜는 지난 9월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서 '인혁당 피해자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왔다며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냐고 답했다. 여기엔 인혁당 사건이 독재정권에 의한 '사법살인'이 아니라 유신정권 시절 사법부의 판결대로 피해자들에게 죄의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인혁당 피해자 8명은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20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심지어 피해자들의 시신은 강제로 화장되었는데 시신 부검으로 고문 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한 조치가 아니고선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인혁당 피해자들이 사형된 날을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까지했다. 인혁당 사건은 32년 뒤인 2007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인혁당 희생자들은 민주화의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투쟁이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그리고 6.10 항쟁까지 이어졌고 그리하여 오늘의 민주화를 이루었다. 박근혜가 인혁당 피해자들을 모욕한 것은 민주화의 뿌리를 모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 원하던 아버지의 추도식을 가능하게 해줬던 '민주화의 뿌리'에 대해 박근혜는 배은망덕한 짓을 한 것이다. 인혁당 피해자들은 그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도 그 딸에게 은혜를 베풀었건만 또 다시 모욕을 받았다.
 

▲ 박정희 대통령 10주기 추도식 관련 기사(동아일보, 1989.10.26)

▲ 1989년에 열린 박정희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인파

박근혜의 10월 25일과 11월 9일 일기를 보면 역사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때 그의 역사관은 우리와 비슷하다. 다만 다른 것은 그의 아버지 부분이다.

"아! 10주기! 이날을 잘 맞기 위해 나는 지난 1년 여 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노력이 없었을 때 과연 아버지는, 역사는 어찌 되었을 것인가. 다만 아찔한 생각이 들 뿐이다." (10월 25일)

"아버지에 대한 그 시절 역사에 대한 왜곡이 85% 정도 벗겨졌다고들 말한다... 역사가 바로 잡혀야 사회질서가 바로 잡히게 되는 이치를 생각해볼 때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리시지 않았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12월 30일)

바로잡혀야 할 역사가 자신의 아버지 부분이라고 한 건 문제 삼지 않겠다. 우리가 궁금한 건 박근혜가 왜 이 때의 역사관과 지금의 역사관이 달라졌나 하는 것이다. 박근혜는 '박정희 독재'의 과오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항상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답했다.

그런데 23년 전 박근혜는 아버지의 일을 역사에 맡기지 않고 바로잡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왜 박근혜는 자신의 아버지는 바로 잡겠다고 하면서 남의 아버지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할까. 다같이 역사의 판단에 맡기던가 아니면 다같이 바로잡던가 해야할 거 아닌가?

박근혜는 89년 12월 30일자 일기에서 80년대를 두고 "마음의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두번 다시 돌아다 보기도 싫은 소름 끼치는 연대"라고 쓰고 있다. 80년대 박근혜에게 아픈 상처를 준 건 전두환 정권일 것이다.

그리고 이 아픔을 끝낸 건 바로 민주주의다. 지금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고 하고 유신정권은 불가피했다고 하는 박근혜는 민주주의와 싸우고 있다. 만약 박근혜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이긴다면 우리의 2010년대는 소름끼치는 연대가 될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박근혜 후보가 생각을 바꾸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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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신화의 바다 헤험친 박경숙 박사

인도 신화의 바다 헤험친 박경숙 박사

조회수 548추천수 02012.09.15 12:26:50

 

 

집 벽에 그린 아그니 신 앞에 선 <마하바라타> 번역자 박경숙씨. “구전문학인 <마하바라타>는 텍스트가 일관성이 없어, 맥락을 설명하는 주해를 상세히 달고, 매끄럽게 번역문을 다듬는 것이 어려웠다”고 했다.

 

<마하바라따 1~5>
박경숙 옮김/새물결·각 권 2만2000~2만7000원

 

“이거 고교생 큰딸 두레가 아궁이 벽에 그린 겁니다. 솜씨가 어때요?”

 

지리산 기슭의 농가 집 벽에 그려진 불의 신 ‘아그니’ 앞에서 그는 털털한 웃음을 터뜨렸다. 지리산에 온 지 5년째라는 인도 고전 문헌 연구자 박경숙(49)씨는 수더분한 시골 아줌마 같았다. 옆을 따라다니는 작은딸 두메(15·중3)와는 인도 고전 구절들을 소재로 삼아 줄곧 농담을 주고받는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장항리. 박씨의 집은 실상사 들머리에 자리잡은 ‘노루목’ 마을에 있다. 멀리 천왕봉과 반야봉, 뱀사골 계곡이 아스라이 보이는 거처에서 나물 캐고 고추 농사를 짓는 그는 최근 국내 학계를 놀라게 하는 성과물을 내놓았다. 세계 최고 최대의 전쟁 서사시로 꼽히는 고대 인도의 고전명작 <마하바라타>를 세계 3번째로 완역하고 전체 20권 분량 가운데 1차분 5권을 <마하바라따 1~5>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것이다.

 

고대 인도 바라타 왕족 사촌 형제들 무리인 ‘판다와’와 ‘카우라와’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 전쟁담을 뼈대로 하는 전체 18장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원본은 어렵기로 악명 높은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있다. 약 10만개의 시구로 이뤄진 운문체 원본을 20여년 동안 우리말로 풀어 옮긴 번역 초고 물량만 에이(A)4 용지로 5만여장이다. 방바닥부터 쌓으면 천장까지 올라갈 정도다. 21년 전인 1991년 인도 푸네대학에 유학 가서 틈틈이 시작한 번역 초고 작업은 이미 2007년 끝냈다고 한다. 이 산고의 기간 동안 그는 인도의학을 연구하던 남편과 현지에서 만나 결혼해 두 딸을 낳았고, 푸네대학에서 인도 신에 대한 산스크리트·팔리어 고전 연구로 박사학위(2007년)를 받았으며, 그 직후 귀농해 농부가 됐다. 완역본은 인도(현대어)와 미국(영어)에서만 나온 <마하바라타>를 우리말로 풀어낸 박씨의 이력이 궁금해 지난 10일 그의 집을 찾았다. 박씨와의 대화는 <마하바라타>의 장강 같은 서사처럼 꼬리를 물고 거듭되는 인도 고전 이야기의 성찬이었다.

 

<마하바라따 1~5> 박경숙 옮김/새물결·각 권 2만2000~2만7000원

 

산스크리트어 원본 완역 결실
“텍스트 너무 재미있어 끌렸죠
어려운 문제 풀릴때 희열느껴”

 

“왜 번역했냐구요? 원래 제가 싫은 거 안 해요. 사실 텍스트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시작한 겁니다. <마하바라타>는 이 드넓은 세상 자체니까요. 유학 가서 원문을 보니까, 중국의 고전 <삼국지>와 아주 비슷해요. 주인공들 성격도 그렇고. 같이 비교해서 보면 참 흥미롭겠다 싶더라구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모습을 이 대작에서 투영해봤으면하는 생각도 했지요. ”

 

서양의 고전 서사시 <일리아드><오디세이>를 합친 것의 8배나 되는 분량을 옮기는 과정은 분명 고통과 인내가 요구되는 과정이었을 터다. 그런데도 “그런 적은 정말 거짓말처럼 없었다”며, 되레 “게으른 사람이 하기에 딱 좋다”고 그는 웃었다. “저처럼 한꺼번에 여러가지 사고를 못하는 사람한테는 낮엔 농사일하고 틈나는 대로 번역하는 일이 좋아요. 스스로 숱한 인간군상들의 생각과 음모, 행동들이 출몰하는 텍스트에 빠져들었죠. 아,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 이런 묘사를 할까. 제 번역이 문장으로 이어지고 문법이 굉장히 어려운 텍스트가 풀렸을 때의 희열 같은 것들이죠. 사실 원전이 길기 때문에 일이 계속 있잖아요. 하염없이….”

 

<마하바라타>의 진정한 가치는 집착하는 교훈이 없다는 데서 나온다고 그는 일러준다. 전쟁을 벌이는 무사 아르주나 같은 판다와 형제들과 적수인 두료다나를 비롯한 카우라와 형제들이나 그 과정에 개입하는 크리슈나를 비롯한 여러 신들, 반인신, 아수라·락샤사(악귀), 성자들의 행동과 생각들은 세속적 인간들과 거의 똑같다. 선악과 흑백 논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얼핏 신들의 아들인 판다와 형제가 선의 세력이고, 그들을 노름에서 이겨 숲으로 쫓아내고 나중에 전쟁을 벌이는 카우라와 형제가 악의 세력처럼 묘사되지만, 실제 전쟁에서는 판다와 쪽이 신과 공모해 야비하고 음흉한 전술을 밥 먹듯 구사하는 모습이 숱하게 묘사된다는 점도 그렇다. 박씨는 “신이나 성자들도 극악무도하고 속세에 찌든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다”며 그 단적인 예로 판다와 형제의 용맹한 화살 장수 아르주나를 이끌어주는 지혜의 신 크리슈나를 들었다.

 

“인도 사상의 진수를 담은 <바가바드기타>의 원전이 된 <마하바라타> 6장에서 크리슈나는 동족을 죽여야 하는 현실 앞에 번민하는 아르주나에게 ‘전쟁을 해야 하는 너의 다르마(의무·도리·법이란 뜻)에 충실하라’고 채근하며, 살육을 부추기지요. 카우라와 형제들을 이기려고 갖은 비열한 술법과 책략을 부립니다. 유명한 <바가바드기타>덕분에 성스러운 신으로 알려진 크리슈나의 본모습은 너무 달라요. 여자들을 유혹해 무려 1만6000명의 부인을 두었던 호색한이기도 하고요. 신들의 제왕 인드라신도 성자들이 지위를 빼앗을까봐 요정 압사라스를 시켜 미인계로 그들을 파계시키곤 하죠.”

 

속세에 찌든 캐릭터 많이 등장
선악과 흑백논리 없는게 특이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별세계”

 

“<마하바라타>의 내용들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는 지금 한국인들에게도 삶의 다양한 갈래와 가능성들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또 하나 강조한 건 ‘이야기의 재미’였다. <마하바라타>에는 ‘날탄’(미사일)과 핵전쟁에 비견될 만한 암흑세상의 진언, 비행기와 탱크·장갑차에 해당하는 기기묘묘한 전쟁 무기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바라타 왕족의 모태가 된 여인 샤쿤달라의 보석반지 연애담, 그리스 신화를 압도하는 신들의 투쟁담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진다. 그는 “상투적 수식어나 복잡한 인명 등의 잔가지를 쳐내면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별세계를 접할 수 있다”며 “이 서사시가 ‘포켓몬’ 게임이나 숱한 할리우드·인도 영화들의 모티브가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 유학을 결행한 것은 대학 시절 어느 스님에게 들은 인간 붓다의 매력을 제대로 이야기로 풀어보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도에서 두 딸까지 키우면서, 고대 산스크리트 고문헌들과 씨름한 끝에 <마하바라타>의 산맥을 넘었지만, 내처 인연의 힘으로 풀려나간 자신의 학문 역정은 언제나 물 흐르듯 편안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박씨는 초역은 했지만, 어려운 용어나 인명들을 우리말로 다듬어 풀어내는 완역본 발간까지는 앞으로도 최소한 4~5년은 잡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일단 내년까지 10권을 출간해 숨고르기를 한 뒤 해석이 가장 난해하다는 12장 ‘평화’와 13장 ‘교훈’을 포함해 판다와 형제들이 승전 뒤 출가수행을 떠나는 나머지 부분에 도전할 참이다. “언제까지라고 목표를 세우진 않았어요. 그렇게 하면 농사짓는 재미를 뺏기니까….”

 

남원/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판다와 군과 카우라와 군의 마상전차 전투를 그린 인도의 세밀화. 도판 제공 새물결

인도 고전 ‘마하바라타’는

기원전 10세기 전쟁실화담 모태
신과 성자·악귀 골육상쟁 얘기
인도의 사상과 우주관 녹아들어

 

‘위대한 바라타(고대 인도의 왕족 이름)인들의 이야기’란 뜻을 지닌 <마하바라타>는 ‘신화의 밀림’이자 ‘이야기의 아마존’이다. 인도인의 정신과 사상, 지식과 지혜, 신화와 전설, 윤리관과 우주관 등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얽힌 모든 것들이 잡탕처럼 이 고전에는 녹아들어 있다. 10만개의 시구에 등장하는 인명도 3000개에 육박한다. 4세기께 위야사라는 고대 선인이 최종 편집했다고 전하지만, 위야사가 ‘편집인’이란 보통명사로도 쓰여, 실제로는 문학을 담당했던 계급인 브라만들과 민중의 구전담이 1000년 이상 축적된 결과로 본다. 따라서 이 대작을 읽는 것은 나름 인내도 필요하지만, 어떤 형식으로 특정되는 작품이 아니기에 복잡하고 다채로운 구성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독해의 지름길이다.

 

<마하바라타>의 구성은 장강 대하와 그 언저리의 숱한 지류들에 비유할 수 있다. 기원전 10세기께 전쟁 실화담을 모태로 하여 엄청난 수의 신과 성자, 반인신, 악귀 등이 북인도 대륙을 무대로 삼아 출몰하며 펼치는 골육상쟁의 전쟁 이야기가 본류에 해당한다. 여기에 고대 창조신화와 대홍수, 불로불사의 영약을 얻기 위한 신들과 아수라의 줄다리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류들이 가지처럼 얽혀서 거대한 서사를 이룬다. 내용 전개 또한 이야기 속에 이야기들이 거듭 나타나면서 펼쳐지는 얼개다.

 

원문에서는 모두 18장의 서사시를 가객 우그쉬라와스와 위야사의 제자인 브라만 와이샴파야나, 그리고 전쟁에 패한 카우라와 일족의 왕 드르타라슈트라의 측근 산자야가 화자로 나서 시 형식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원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5장(이번 1차 번역본은 1~3장까지를 다룬다)은 태초 세상의 창조, 전쟁 대결을 벌이는 판다와·카우라와 형제들의 탄생과 성장, 노름(내기)에서 비롯된 두 형제 간의 갈등 과정을 다룬다. 6~11장은 전쟁의 진행과 판다와의 승리로 끝나는 비참한 전쟁 상황이 핍진하게 묘사된다. 12장 ‘평화’와 13장 ‘교훈’, 14장 ‘말희생제’는 <마하바라타>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장이다. 전쟁에 이겼지만, 일가친척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판다와의 유디슈티라 왕에게 성자 비슈마가 역경과 해탈의 도, 궁극의 진리를 일러주는 내용이다. 마지막 15~18장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왕국과 판다와들이 출가수행을 떠나 마음을 다스리는 이야기다.

 

간디와 함석헌의 주해로 유명한 <바가바드기타>는 <마하바라타>의 6장 ‘비슈마’에 있는 철학적·종교적 시구들을 간추린 것으로, 전쟁터에서 동족의 살상에 번민하는 판다와족 전사 아르주나에게 수호신 크리슈나가 던지는 지혜의 잠언 등이 담겨 있다. 흔히들 <바가바드기타>를 인도 고대 사상의 정수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절반만 맞는 말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은 12, 13장을 핵심으로 간주하며 지금도 해석을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번역자 박경숙씨도 앞으로 진행될 전작 완역본 출간 과정에서 가장 험난한 산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문외한인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2권 말미 부록에 실린 해설을 먼저 보고, 전체 내용을 이해한 뒤 흥미로운 전쟁담이나 신화 등의 구절을 취향대로 골라 읽는 것이 좋겠다. <마하바라타>가 기승전결로 설명할 수 없는 온갖 명상과 사고·일화 등이 뒤섞여든 이야기의 거대한 그물망이기 때문이다. “<마하바라타>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인도인들의 경구가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이 거작의 구성 자체가 온갖 망상과 잡념, 환상과 욕망에 가위눌리고 유혹당하는 복잡무쌍하고 불가사의한 인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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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타이밍 적절했던 5.18묘역 참배

타이밍 적절했던 5.18묘역 참배
처녀보살 아웃 시킨 인혁당사건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2-09-15)


 

일출이 일몰을 잉태하듯 매사는 때가 있는 게 아닐까.

주사위는 던져졌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 광주 국립 5·18민주묘역에 참배하면서 언론들은 일제히 안 원장의 행보가 사실상 대선출마를 뜻하는 것이라며 대서특필 하기 시작했다. 안 원장이 간접화법으로 '개인적인 일로 5·18민주묘역을 참배'했다고 말했지만 그의 발언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안 원장이 5·18민주묘역을 참배하면서 사실상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선출하는 본격적인 대선 시즌이 도래했다고 볼 수 있으며 안 원장 또한 사실상의 출마선언이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참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가 싶다.

안 원장이 5·18민주묘역을 전격 참배한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난 직후였지만, 안 원장이 결정은 유신독재자 박근혜('그녀'라 부른다)의 인혁당사건 망언이 국민적 뭇매를 맞으며 여론이 최악의 상태에 이를 때였다. 따라서 박근혜의 지지율은 곤두박질 치며 민주당 문재인 예비후보와 안철수 원장에게 추격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등 지지율이 역전 당하는 시기였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지지율 급락이 문재인과 안철수의 지지율을 동반 상승시킨 것이다. 인혁당사건 때문이었다. 여론조사 결과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지만,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양자대결에서 박근혜45.4%-안철수45.1%, 박근혜46.1%-문재인42.7%으로 오차 범위내에서 접전 중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5.16 군사쿠데타 망언에 이은 인혁당사건의 망언이 불러온 역풍은 어떠한 지 다시 한번 살펴볼까.

그녀의 대선행보 발목을 붙든 인혁당사건의 끔찍한 사실 등은 유신독재자 박정희와 그녀는 물론 새누리당을 통째로 한 통속으로 묻어버린 실로 무지막지한 사건이었다. 캄보디아에 킬링필드란 사건이 있었다면, 유신독재시대에는 인혁당사건이 대표적인 살륙사건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법부가 조작질된 기소 내용에 따라 사형선고가 내려진 지 20시간 만에 전격 사형에 처해진 8명의 유가족들의 가슴을 쥐어뜯는 울부짖음이 세상에 파다했다. 관련 포스트에서 언급한 5.16처녀보살의 한풀이로 비견되는 그녀의 대선 행보 망언 때문이었다. 아직도 글쓴이의 머리 속에는 유가족들의 가슴 속에 또아리 틀고있는 인혁당사건 트라우마가 그대로 남아있다. 이랬다.

"...사형은 새벽에 집행됐지만, 시신은 오후 6시가 지나서야 넘겨받았다. 죽은 이의 몸뚱이에는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등이 다 시커멓게 타 있었어요. 손톱 10개, 발톱 10개는 모두 빠져 있었고, 발뒤꿈치는 시커멓게 움푹 들어가 있었어요." 그날을 회고하던 아내 이씨는 "당국이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어버린 다른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며 치를 떨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끔직하고 악랄한 만행이 유신독재자 시절에 저질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 동안 사진 찍기에 바빳다. 대략 한 달 여 시간 동안 그녀는 전방 부대를 시찰하며 언론들로 부터 광폭행보 평가를 듣는 듯 했다. 그러나 인혁당사건 유가족들이 울부짖음은 결코 5.16처녀보살의 한풀이 굿판을 용납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의 애비 박정희로 부터 그녀로 이어지는 살풀이가 우려된 것 때문 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애비가 남겨준 DNA를 고스란히 물려 받으며 사람들의 바람을 묵살하고 있었다. 그녀의 애비 박정희가 김재규로 부터 총살을 당하기 직전까지 사람들은 "이제 그만 물러날 때가 됐다"라고 했지만 뿌리친 것 처럼, 그녀는 사람들이 과거사를 합리화 하는 발언을'해서는 안 된다'라며 말리는 충고를 멀리하고, 징징거리는 내시에 둘러싸여 안하무인 광폭행보를 하며 나락으로 떨어질 차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굿발'이 안 받는 이유가 일찌감치 그녀 내부의 적 한풀이로 부터 시작되었다고나 할까.

나이 60세에 이른 노처녀에 사생아 루머와 사람들로부터 '수첩공주' 내지 '할미공주' 등으로 비아냥을 받아 온 그녀는, 어느모로 따져 보나 머리에 든 게 없어 보였다. 대통령이라는 직이 반드시 머리 속에 수 많은 지식과 내공이 필요한 게 아니란 건 이명박 대통령을 통해 익히 학습한 바 있지만, 그래도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 정도는 갖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수첩할미는 습관에 따라 특정 사건 등에 대해 최소한의 논리를 갖추지 못했으며 역사관 내지 국가관 따위는 일찌감치 국밥에 말아먹었는 지 툭 하면 '역사에 맡기자'고 말했다. 아울러 그녀 스스로 초법적인 존재가 되어 사법부의 결정을 뒤흔드는 망언을 일삼으며 국민들을 심히 절망에 빠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철수 원장이 이런 호재에도 불구하고 쉽게 대선 행보에 발을 내딛지 못했다. 민주당의 예비경선 불협화음이 적지않았으며 이대로 가다간 문재인 후보 등과 치루어 낼 야권후보 단일화 등의 일정에 차질이 빚을 정도였다. 안 원장이 등단할 타이밍이 점차 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우신조인 지 처녀보살의 망언 내지 주둥이질이 인혁당사건을 부활 시키며 안 원장의 등단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녀는 인혁당사건 망언 때문에 지지율을 다 까먹고 방방 뛰고 있었던 것이며, 굿발이 안 받는 배경에는 광폭행보를 가로막고 선 거대한 벽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안철수의 벽이자 상식의 벽이며 보통사람들이 꿈 꾸는 차기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애비가 남긴 유산 다수를 차지하고도 유독 5.16군사쿠데타 내지 정수장학회 문제나 인혁당사건 유산은 거부한 그녀. 그래서일까. 시사IN의 시사터치에 등장한 그림 속에서 5.16처녀보살이 내 건 한풀이는 결국 망신살로 뻗치며 '안철수 암초'를 자초한 형국이 됐다.

그녀의 굿판은 대선인지 한풀인 지 조차 모르고 방방 뛰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인혁당사건 때문에 대선레이스에서 레드카드를 받으며 아웃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직도 기회가 있다고 말하지 말기 바란다. 사형선고 20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민주인사 유가족들에게 그저 입으로만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풀이 굿판을 접고 고향땅으로 발길을 돌리라. 그게 현명한 처신이자 범국민적으로 신뢰를 받고 있는 차기 대통령 후보에게 아름다운 길을 내 주는 일이다. 처녀보살은 '지는 해'라는 거 한시라도 잊지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꿈꾸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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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초월, 가을 밤하늘 수놓은 '윤민석 대합창'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세대 초월, 가을 밤하늘 수놓은 '윤민석 대합창'

[자발적 콘서트] 전대협 - 한총련 - 탄핵 - 촛불 세대 한자리 모였다

12.09.15 23:12l최종 업데이트 12.09.16 01:04l
강민수(cominsoo)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참가자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한채, 작곡가 윤민석씨가 작곡한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이날 음악회는 민중가요 작곡가 윤민석씨가 최근 아내 양윤경씨의 암투병 치료비 부족을 호소하자, 시민들이 그를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기획·공연 되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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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참가자들이 작곡가 윤민석씨 부인 양윤경씨의 빠른 쾌유를 빌며 휴대폰 불빛을 밝힌채, 윤씨가 작곡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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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정혜신 박사가 최근 윤민석씨가 작곡한 '이또한 지나가리라'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한동준씨가 '너를 사랑해'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류금신씨가 윤민석씨의 '오 통일이여'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 윤민석씨가 작곡한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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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한총련세대 100인 합창단이 윤민석씨가 작곡한 '날아라 한총련'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문진오씨가 윤민석씨의 '광주여 무등산이여'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김조광수 영화감독이 한총련세대 100인 합창단과 함께 윤민석씨가 작곡한 '전대협진군가'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서기상씨가 윤민석씨의 '강'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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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년 동안 윤민석이 보여준 치열한 삶과 그의 노래 때문에 우리는 거리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뛰어난 정치가 몇명보다도 윤민석 한 사람이 더 소중할 수 있습니다."

작곡가 윤민석이 있어 그들은 행복했다. 80년대 전대협 세대든, 90년대 한총련 세대든, <너흰 아니야>를 불렀던 2004년 탄핵 세대든, <헌법 제1조>를 불렀던 2008년 촛불 세대든, 윤민석은 쉬지 않고 그들 곁을 지켰다. 때문에 그와 그의 노래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윤씨에게 빚진 그들이, 윤씨를 위해 콘서트를 열었다. 윤씨의 팬 1000여 명은 15일 늦은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 모였다. 20대에서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의 노래가 가진 폭넓은 대중성이 느껴지는 자리였다.

사회를 맡은 방송인 권해효씨와 최광기 토크컨설팅 대표는 유쾌한 입담으로 청중을 즐겁게 했다. 노동자 노래단이 나와 <서울에서 평양까지>를 부르자 최광기씨는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데 가요무대 보는 것 같았다"며 "박수치는 여러분도 한 템포씩 늦는 것도 똑같다, 모두가 늙어간다"며 웃음을 자아냈다. 권해효씨도 "여러분이 과도한 팔뚝질로 통증을 호소할 줄 알았다"며 "좋은 가을 밤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놓쳤던 귀한 것들을 위해서 마음을 모아달라"고 말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상담하고 있는 정혜신 정신과 의사도 무대에 올랐다. 그는 "오늘 여기 모이신 분들의 좋은 기운이 암 투병중인 (윤씨의 부인) 양윤경씨에게 전달될 것"이라며 "여러분 모두는 치유자"라고 말했고, 이에 청중들은 환호성으로 답했다.

점점 콘서트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사회자 최씨가 "준비되셨습니까?" 물었다. 이어 "윤민석과 함께,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우리가 희망이다"고 외치자, 청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파도타기를 연출했다. 예전에는 라이타 불빛을 번쩍였지만, 지금은 핸드폰 불빛을 흔들었다. 어어 나온 <서울에서 평양까지>에 맞춰 모두들 어깨를 들썩였다.

3시간 가까이 이어진 콘서트에서는 윤씨의 노래 10여 곡이 가을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영화감독 김조광수씨가 <전대협진군가>를, 정혜신 박사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손병휘씨가 <사랑하는 동지에게>, 우리나라가 <경의선타고>, <헌법 제1조>를 공연했다. 콘서트는 윤씨의 대표곡 <지금 우리가 만나서>와 <헌법 제1조>의 대합창으로 마무리됐다. 예정에 없던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깜짝 출연해 <소리없이 흰 눈은 내리고>를 부르기도 했다.

아내의 암 투병을 간호하고 있는 윤씨는 콘서트에 참석하지 못했다. 윤씨는 30년 가까이 민중가요에 전념했지만, 아내 양윤경씨의 계속된 투병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왔다. 결국 그는 '아내를 살리고 싶다'며 SNS을 통해 도움을 요청했고, 이 소식이 블로그와 SNS를 타고 퍼져 2주 만에 1억 5천여만 원이 모였다. 이날 콘서트도 자발적으로 기획·공연됐다.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참가자들이 작곡가 윤민석씨가 작곡한 '경의선 타고' 노래에 맞춰 기차놀이를 하고 있다. 이날 음악회는 민중가요 작곡가 윤민석씨가 최근 아내 양윤경씨의 암투병 치료비 부족을 호소하자, 시민들이 그를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기획·공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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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문성근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참가자들이 작곡가 윤민석씨가 작곡한 '경의선 타고' 노래에 맞춰 기차놀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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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임수경 민주통합당 의원과 명진 스님, 문정현 신부 등 참가자들이 작곡가 윤민석씨 부인 양윤경씨의 빠른 쾌유를 빌며 파도타기 응원을 펼쳐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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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출연해 윤민석씨 부인의 쾌유를 기원하며 인사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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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원창연 연극배우가 윤민석씨의 '그이가 동지라네'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민족춤패인 출이 윤민석씨가 작곡한 '전사의 맹세' 노래에 맞춰 멋진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김현성씨가 '이등병의 편지'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조국과 청춘이 윤민석씨가 작곡한 '통일이 되면' 노래를 열창하며 멋진 공연을 펼치고 있다.(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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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신동호 시인이 윤민석씨 부인의 쾌유를 빌며 시낭송을 하고 있다.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일부 참가자들이 무대공연을 더 잘 지켜보기 위해 담장에 올라 연호하고 있다. 노래마을의 이정열, 손병휘, 한경탁, 정은주가 '그대 고운 내사랑'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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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한 학생이 작곡가 윤민석씨를 응원하며 적은 편지를 모금함에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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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참가자들이 작곡가 윤민석씨를 격려하며 후원금을 모금함에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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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에서 민주화세력이 산업화세력과 사활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이유

 

민주주의를 위하여
<기고> 대선에서 민주화세력이 산업화세력과 사활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이유
 
 
2012년 09월 14일 (금) 17:22:06 한상권 tongil@tongilnews.com
 

한상권(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 전국언론노동조합, 참여연대 등이 2010년 5월 서울광장에서 ‘표현의 자유수호 문화제’를 열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올해는 6월민주항쟁 25주년이면서 10월유신이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게다가 총선과 대선 등 두 차례 선거가 있어, 6월민주항쟁의 이념을 계승하는 민주화세력이 10월유신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산업화세력과 한판 승부를 겨루어야만 하는 운명의 해이기도 하다. 오는 12월 19일에 있을 18대 대통령선거는 우리사회가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사회적 경제적 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을지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에 의해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동력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에서 민주진보세력이 패배할 경우, 이후 민주화의 확장에 타격을 입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자신의 선택에 따라 민주주의가 진전 또는 퇴행할 것이며, 또한 그에 따라 삶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2012년은 역사적으로 참으로 중요한 해이다.

1.
 

 

   
▲ 마스크를 쓰고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른바 ‘신지호법’을 반대하는 네티즌들이 2008년 12월 신지호(한나라당, 도봉갑) 의원 사무실 앞에 모여 마스크를 쓴 채 침묵시위를 벌였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해방 이후 반세기 가량 지속되어 온 권위주의체제가 종식되었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대한 전 국민적 저항이었던 6월항쟁은 멀리는 갑오농민전쟁과 3.1독립운동 그리고 4.19혁명, 가깝게는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한 부마항쟁과 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한 광주민중항쟁 등 우리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반봉건·반외세·반독재 저항정신을 계승한 역사적인 민중항쟁이었다. 6월항쟁의 승리로 군부독재세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군부독재세력은 ‘산업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 언론에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독재는 잘못이지만 산업화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근대화의 공과론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해방 직후 친일파가 반공세력으로 변신하여 살아남는데 성공했던 것처럼, 군부독재세력 역시 산업화세력으로 탈바꿈함으로써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이후 이들은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이라는 프레임을 구사하면서 반독재, 반독점 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 무력화시켜왔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 Lakoff)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프레임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레이코프의 프레임이론에 따르면, 전략적으로 짜인 틀(frame)을 제시해 대중의 사고 틀을 먼저 규정하는 쪽이 정치적으로 승리하며, 이를 반박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프레임을 강화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화 대 민주화 프레임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뉴라이트세력이 이후 등장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60년사를 '건국의 시대'(1948~1960), '산업화의 시대'(1961~1987), '민주화의 시대'(1988~2007)로 구분하고 2008년 이후를 '선진화의 시대'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건국의 시기에 이승만 정부, 산업화의 시기에 박정희 정부, 민주화의 시기에 노태우 정부, 선진화의 시기에 이명박 정부를 각각 자리매김하였다.

뉴라이트는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의 4단계 발전론에 입각하여, 산업화세력이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산업화가 되었기에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1987년 6월민주항쟁에 대거 참여하면서 민주주의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선 산업화, 후 민주주의’ 도식으로, 이에 따르면 노동자나 농민 등 민주화운동세력이 아닌 독재자나 재벌이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제시한 단계적 발전론은 허구에 불과하다. 민주화와 산업화는 선후관계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선 성장, 후 민주화’ 담론은 비현실적 논리이며 비상식적 도식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사실상 민주화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성장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양자의 병행 발전은 사회적 비용을 덜 들일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민주화를 통해 사회구성원의 동의와 자발성을 촉진하는 사회 환경이 조성되면 노동생산성이 높아지고 사회적 비용이 감소한다. 경제발전이라고 할 때 외형적인 경제성장의 속도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지속가능성, 내적 토대의 안정성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민주화의 뒷받침이 중요하다. 민주주의 없는 경제발전은 정치, 사회적으로도 문제이지만, 경제적으로도 문제를 야기한다. 왜곡된 분배구조는 궁극적으로 경제발전을 저해하며, 그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이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역사적 상식이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분리해서 보는 뉴라이트 입장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산업화가 되어야 민주화가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면, 산업화를 일구었다고 주장하는 박정희 독재정치 하에서 자행된 각종 불법적인 압수, 수색, 구금, 연금, 고문 등의 인권탄압과 초법적인 납치, 테러, 암살 등 야만적인 폭력들이 모두 민주화를 위해 불가피했던 것으로 합리화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시기에 자신들의 생존권 확보, 또는 경제민주화나 사회변혁을 위해 희생한 노동자 농민들 투쟁의 역사는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뉴라이트는 산업화 시기 이른바 민주화운동으로 자처한 좌익 세력들의 발호가 산업화의 걸림돌이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은 경제상 비용손실만 초래하여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식민지시기 항일독립운동이 근대문명화의 길로 발전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2.
 

 

   
▲ 2008년 10월 국가보안보안법으로 구속된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최한욱 집행위원장의 부인(왼쪽)이 상복 차림에 쇠사슬을 온몸에 두르고 아이와 함께 행진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2월 취임사에서 지난 10년 '이념의 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실용의 시대'로 나가겠다고 선언하였다. 건국 60년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기반으로 ‘선진화’를 이루어야 하며, 이제는 투쟁의 시대를 끝내고 동반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대통령이 말하는 이념의 시대=투쟁의 시대 10년이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집권기를 가리킨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립한 공로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파악하는 대통령의 역사인식은 뉴라이트의 4단계 발전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명박정부와 뉴라이트는 역사인식 면에서 일란성쌍생이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에서 잘 드러난다. 2011년 8월 9일 교과부가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사회과 교육과정”을 고시하면서, 개발 연구진도 모르게 ‘민주주의’란 용어를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하였다.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교과부는 “일부 심의위원들과 역사학회 전문가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교과부가 말한 ‘역사학회’는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대거 포진한 ‘한국현대사학회’였다. 이에 대해 교육과정 개발을 담당한 ‘역사 교육과정 개발정책 연구위원회’ 위원들은 성명을 내고,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 충분한 개념이며 가능하면 그에 대한 제한이나 수식을 피하는 것”이 좋으며, “현행 교육과정에서도 초⋅중⋅고교 한국사의 단원명과 성취기준에 모두 ‘자유민주주의’ 아닌 ‘민주주의’를 그 내용으로 삼고”있으므로, “시민 사회와 학계의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지금까지 헌법정신에 따라 수행되어 온 역사 교육의 핵심 개념을 변경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교과부는 작년 12월 30일 ‘고등학교 한국사 집필기준’을 확정 발표하면서, “자유민주주의,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 독재 관련 표현 등은 중학교 집필기준과 동일한 원칙에 따라 서술하였다”라고 밝혀, 8월 9일 발표한 중학교 역사교육과정과 11월 8일 발표한 중학교 역사 집필기준에 대해 역사학계가 시정을 촉구한 내용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결국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명시할 것”이라는 뉴라이트 계열의 한국현대사학회의 건의를 교과부가 전격적으로 수용 고시하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2차 세계대전 후 냉전 상황에서 미국 중심의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체제수호의 이념으로 널리 사용되고 전파되었다.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주요 내용은 보통선거제도, 정당제도, 대의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국가권력의 제한, 개인주의, 다원주의, 시장주의, 재산권의 강조 등이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존중하고, 다원성과 다양성의 존중을 기본으로 하는 리버럴 데모크라시(liberal democracy)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민주주의에 담긴 개혁성과 혁명성을 탈각시키기 위해 민주주의에 ‘자유’를 덧씌워 민주주의를 옥죌 뿐이었다. 뉴라이트는 자유를 반공으로, 민주주의를 반공주의와 동일어로 오용하여, 자유민주주의를 ‘냉전반공주의’와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그 증거로 뉴라이트 자신들이 쓴 글에서 “이승만의 정치이념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였다.”라고 주장하여,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짓밟으면서 12년간 장기 집권한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미화하였다. 다 아다 시피 이승만은 독재정치와 부정선거로 일관하다가 4.19혁명을 통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4.19혁명 당시 구호는 “민주주의를 사수하자!”였으며, 이승만 독재정권을 물리친 4.19혁명은 한국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발적으로 전취한 자유민주주의혁명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전혀 자유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이승만을 뉴라이트가 자유민주주의자라고 하는 추켜세우는 까닭은, “자유민주주의에 철저했던 만큼,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라는데 있다. 이처럼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뉴라이트에게 있어, 자유민주주의는 반북·멸공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단지 반공주의가 갖는 부정적이고 진부한 뉘앙스를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긍정적 뉘앙스로 대체해보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뉴라이트는 자유민주주의를 냉전반공주의로 치환하면서 고유의 성역을 만들었다. 이들은 반북주의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찬양하고 독재정권을 미화한다. 그리고 의회정치를 부정한 이승만의 독재, 초헌법적인 박정희의 유신쿠데타가 북한공산집단으로부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변호한다. 자유민주주의는 반북과 멸공을 통한 수호의 대상이지, 결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할 민주주의로 간주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더 민주화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가자는 주장을 하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체제부정론, 혹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친북용공론으로 몰아가 탄압하였다.

뉴라이트의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주의를 기본 동력으로 하며 억압과 배제를 기본 속성으로 하는 전투적 민주주의다. 체제수호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사고는 물론 역사의 진실까지도 지배한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인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고, 지배체제에 무조건 복종하기를 요구한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며, 적과는 사생결단의 한바탕 싸움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저러한 적대범주를 제멋대로 설정한 다음, 누구든지 이 범주에 든다고 추정되면 설사 헌법의 틀 안에서 합법적으로 행동하더라도 관용의 손길을 거둔다.

3.
 

 

   
▲ 2009년 5월 광주 전남대학교에서 금남로까지 범민련은 제 시민사회단체와 대학생들과 함께 민주주의 등을 요구하며 '5.18 자주통일대행진'을 진행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뉴라이트의 주장과는 달리, 대한민국이 제헌헌법을 통해 표방한 민주주의는 단순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아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한국적 현실을 반영한 역사성이 있는 민주주의인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제하의 민족운동이나 해방 이후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꾸준히 발전되고 숙성되어온 역사적 실체로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 전통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민주공화국 수립을 향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해해야 한다.

오랜 역사 동안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적 담론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이념은 공화주의와 균등 즉 평등주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원 선거를 한데 이어 전문 10조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심의·통과시켰다. 임시헌장은 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하여, 왕정복고를 거부하고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은 이후 여러 차례(1925, 1927, 1940, 1943, 1944) 개정되었지만,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원칙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은 1948년 제헌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2조)라 하여, 민주공화국 및 인민주권을 선포하는 데로 이어졌다. 이처럼 식민통치기에 인민주권과 민주공화국에 대한 합의, 즉 군주주권과 왕정복고에로의 반동적인 흐름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사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3․1운동을 분수령으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가시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로 정의, 인도, 자유, 평등 등이 시대이념으로 등장하였다. 한용운이 조선독립의 이유로 “자유는 만유(萬有)의 생명”이라고 천명했던 것도 이런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다른 하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모든 사회세력들이 자신을 자각하고 자아실현이라는 공동 이상을 표출하였기 때문이다. 민중은 민족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 노동자는 계급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 여성은 성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을 분출하였다. 그리고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노동자는 계급적 자각을 통해 노동권 생존권 확보를, 민중은 민족적 자각을 통해 국권회복을, 여성은 성적 자각을 통해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3․1운동을 직접 체험하였던 청년 김산은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를 쟁취하였다”라고 시대분위기를 전하였다. 이처럼 개인이 자신의 인격을 자각하고 자유와 평등이 시대정신이 된 사회분위기 하에서 왕정복고사상은 발붙이기 힘들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은 민주공화국을 선포한데 이어, 3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이라 하여, 새로 건국할 민족국가의 기본 방향이 평등사회 건설에 있음을 선언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공화주의의 전통을 이어 균등, 평등, 재산의 공공성을 강조하였으며, 인민의 기본권을 자유보다는 ‘균등의 원칙’에 두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통해 균등한 사회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등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보존되어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과 관련된 사회경제적 권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민주주의이다. 임시정부의 정강과 헌법의 이념을 제공한 조소앙(1887-1958)에 따르면 우리는 고래로 이러한 이념과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국가 건설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 전통은 유학과 실학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이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강자를 존중하고 약자 보호를 거부하는 제국주의 원리는 분명 자본주의와 통하는 것이었다. 이에 맞서는 독립운동의 정신은 일본인의 침탈에서 조선인을 해방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강자의 침해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는 방향을 중시하고 있었다. 1930년 이후 중국 관내(關內)에서 활동하던 주요 독립운동단체 간에 이념적 차이는 없었으며, 그 이념을 건국강령(建國綱領)이 대변하였다. 건국강령에서 밝힌 삼균주의(三均主義)가 평등사회 구현을 위해 제시된 구체적 실천방안이었다.

건국강령은 대일 선전포고를 앞둔 시점에서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합의한 미래사회의 준칙이었다.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와 평등을 기본원리로 하여 작성된 건국강령은 정치적 평등[均權], 경제적 평등[均富]과 함께 교육의 균등[均智]을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3대 기본권리로 간주하였다. 정치적 평등이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즉 국민주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에 가까운 개념인 반면, 경제적 평등과 교육의 균등은 평등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건국강령은 중소기업만 사영으로 하고, 토지혁명을 통해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제도로 환원하고, 대생산기관‧대기업을 국유화 하며, 광산‧어업‧농림 등 자원성(資源性) 기업과 운수산업‧은행‧전신‧교통 등 국가기간 시설을 국유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토지의 국유와 대기업의 국유화 방침이 가능했던 것은 좌우파의 구별 없이 독립운동의 공통이념으로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1948년에 제정된 제헌헌법의 기초위원이던 유진오박사가 헌법을 기초할 때 참고한 10가지 문서 가운데 임시정부의 건국강령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이 제헌헌법에 직접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뉴라이트처럼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배타적으로 사용하여 개항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민주주의 운동의 역사를 파악할 경우, 우리나라 근·현대 민주주의운동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역사를 제대로 포괄할 수 없다.

4.
 

 

   
▲ '민주주의 사수' 바람은 정치권에도 강하게 불었다. 2010년 2월 서울역에서 진행된 ‘이명박 정권 규탄대회’ [통일뉴스 자료사진]

 

해방 공간에서 민주주의는 민족주의와 대칭되는 진보적인 구호였으며, 그 내용은 미국식 형식적·정치적 민주주의와는 다른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였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것은 바로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일찍이 독립운동세력이 끈질기게 추구해 왔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이었다.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의 국제(國制)가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체제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박사는 대한민국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함께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입국의 기본으로 채택하였다”고 하였다. 자유방임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대한민국의 근본이념으로 채택했다는 것이다.

제헌헌법은 형식적·정치적 민주주의가 경제적 약자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보고, 실질적·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채택하였다. 헌법이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사회적 약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였다. 대한민국은 출범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해 사회복지국가를 지향한 것이다. 정부수립 당시 ‘경제적 민주주의의 수립’은 ‘우리나라 헌법의 가장 큰 특징’으로 불렸는바, 제헌헌법은 전문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고 천명, 근본적인 헌법정신부터 균등경제를 추구하였다.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박사는 우리 헌법의 기본이념이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라고 하였다.

제헌헌법이 수용한 사회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을 국가권력의 책임으로 규정하고,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 보장과 자유·평등·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사회적 정의, 사회적 안전, 사회의 통합을 이념적 지향으로 삼는다. 사회적 정의란 법적 평등을 기회의 균등을 통하여 보충하여 시민들이 기본적으로 보장된 자유를 현실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사회적 안전이란 개인의 능력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개인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전제들 즉 사회보험, 노동력 보호, 가정의 보호 등을 창출 또는 확보해주는 것이다. 사회의 통합이란 사회 경제적으로 필요한 자들을 보호하고 지나친 사회적 차이를 균형화 시켜 사회를 통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제헌헌법에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 확립, 사회적 약자의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 사회적 강자의 재산권의 자유제한 등이 수용되어 있다.

사회주의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시장경제체제를 이식하려는 미군정의 점령정책에 맞서, 대한민국은 사회(통합)국가의 원리를 채택하였다. 사실상 북유럽 복지국가-사회적 시장경제-사회민주주의의 모델을 반세기 전부터 이미 상세하게 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민주권주의와 3권 분립의 틀 속에서 사회권과 복지국가 개념을 폭넓게 부여한 바이마르헌법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그러나 제헌헌법은 바이마르헌법에 비해 국가의 역할이 훨씬 더 크고 평등주의 요소도 강하다. 중요산업 국유화 조항(87조)이나 노동자의 사기업이익 분배균점권 조항(18조) 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억압과 착취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우리 헌법의 경제 질서는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자유시장 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에 수반되는 갖가지 모순을 제거하고 사회복지·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적 규제와 조정을 용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 헌법은 자유시장 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 사회국가 원리를 수용하여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아울러 달성하려는 것을 근본이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판단하였다.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로 형성되는 것을 일차적으로 하나, 경제를 개인과 기업에만 맡겨둠으로써 발생하는 소득불균형, 경제력 남용, 경제주체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가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하여 경제에 관한 국가의 보충적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시장은 ‘자유주의 시장’이 아니라 ‘조정된 시장’으로서 ‘사회민주주의 시장’이라는 것이다.

5.
 

 

   
▲ 민주개혁진영의 대통합을 최종 목표로 한 ‘민주통합시민행동’이 2009년 9월 창립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이명박정부 들어 친일·독재세력을 산업화세력으로 미화하고, 민주주의를 냉전반공주의로 축소·왜곡하는 그릇된 역사인식이 우리 사회에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일본 극우세력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뉴라이트가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조중동 등 수구·냉전 언론과 어용관변 단체가 그 논리를 확산시키며, 교과서 집필기준 개정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정부가 나서서 정책적으로 지원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일은 보수 세력의 여망을 안고 대권 주자의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의 역사인식 역시 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퇴영적이라는 점이다.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한 일에 대해서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던 반면, 일본 우익의 사관을 방불케 한다는 평을 받은 뉴라이트 ‘대안교과서’에 대해서는 출판기념회 참석해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걱정을 덜었다”라는 축사를 하였다(2008.5.26.). 그는 최근 대선주자 초청토론회에서 "5·16이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초석을 만들었다고 본다.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2007년 대권 도전 때에도 5·16군사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며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을 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어, 이승만 독재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였다. 이로 볼 때, 독재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짓밟은 5.16이 “구국의 혁명”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군사쿠데타를 찬양하는 행위는 헌법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범죄인 것이다. 또한 역사교과서에서도 5·16을 군사혁명으로 기재한 것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등 군사독재 시절에 국한됐을 뿐, 김영삼 정권 이후부터는 모두 쿠데타(군사정변)로 기록하고 있어 5.16에 대한 역사적 판단은 이미 오래전에 내려졌다.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을 위해 노력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다. 헌법정신에 따라 국가를 이끌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는 다짐이다. 이는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 공동체가 합의한 최고의 가치규범인 헌법을 수호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민주적인 헌정질서를 물리력을 동원하여 뒤엎은 5.16군사쿠데타를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며 헌법유린을 정당화하는 박 후보가 과연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후보는 8월 20일 새누리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직후 후보수락연설에서 “국민대통합의 시대”를 열어가겠다고 선언한데 이어, 다음날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에 참배하고, 그 다음날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5.18국립묘지, 전태일 재단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이에 대해 박 후보 캠프측은 ‘분열된 대한민국’, ‘일부를 위한 대한민국’이 아니라 ‘100% 대한민국’, ‘하나 된 대한민국’을 위해 다양한 계층을 포용하고 함께 손을 잡기 위한 노력이라고 하였다. 조중동 등 수구언론 역시 국민대통합을 위한 광폭행보라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친일분단세력과 군부독재세력 등 수구·냉전세력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박근혜 후보의 민주화세력 방문은 프레임 경쟁에서 자신의 약점인 민주주의를 선점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제스처일 뿐이다. 산업화는 이미 선점했으니 이번 기회에 민주화세력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 대통령이 된다면, 모든 억압, 착취, 배제, 차별 등에 대해 저항해온 민주주의의 자랑스러운 전통까지 장악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항일독립운동이 추구했던 공화주의와 평등주의의 정신은 사라지고 약육강식의 자유방임주의가 판을 칠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제헌헌법이 수용했던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로의 확장은커녕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냉전반공주의로 축소·왜곡될 것이다. 참으로 민주주의의 절체절명의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채 100일도 안남은 대선국면에서 민주화세력이 이른바 산업화세력과 사활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원고는 9월 말 발간예정인 <역사교육> 가을 호와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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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에 주역 가르친 한양원 도인

문선명에 주역 가르친 한양원 도인

 
조현 2012. 09. 13
조회수 278추천수 0
 

 

한양원 회장-.jpg

 

 

 

청학동’을 통해 널리 알려진 ‘갱정유도회’ 소속인 민족종교협의회 한양원(88) 회장은 문선명 총재에게 직접 주역을 가르쳤다고 한다. 주역은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아 동양학문의 왕도로 일컬어진다.

 

 한 회장은 1957년 갱정유도회 선배 두 사람과 함께 서울 왕십리 판자촌교회에서 6개월 동안 문선명 총재에게 주역을 가르쳤다. 한 회장은 “그곳에서 밥해주고 빨래까지 해주며 가르침을 청했는데, 문 총재는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으며, 양은 어디서부터 왔고, 음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지독하게 묻고 배웠다”고 회고했다.

 

 한 회장은 그러나 한 사건을 계기로 문 총재와 거리를 두게 됐다고 한다. 한 회장은 “당시 경성제대 출신으로 문 총재와 함께 주역 강의를 들은 유효원(1914~70·초대 기독교통일신령협회장)씨가 통일교 원리를 주도적으로 만들었다는데, 얼마 뒤 서울 경운동 천도교총본부 옆 시천주교당을 지나던 중 통일교 원리강론을 한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어서 들어가봤더니 우리에게 배운 것이 모두 통일교원리로 둔갑해 있어서 선배들이 ‘주역을 배웠으면 주역으로 가르쳐야지, 엉뚱한 것으로 둔갑시킨 지식 도둑 아니냐’면서 현장에서 지팡이로 강사를 두들겨 팼다”고 전했다.

 

갱정유도회의 도정(최고 정신지도자)인 한 회장은 흩어진 15개 민족종교들을 하나로 모아 민족종교협의회를 출범시켜 20년 넘게 이끌어오고 있다.

 

한복과 갓을 벗지 않아 걸어다니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그는 구순을 한 해 남겨둔 나이에도 매일 민족종교협의회 사무실에 나와 노익장을 과시하며 ‘겨레얼 살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편 그는 통일교쪽에서 연락이 와 조문을 부탁해 "죽은 사람에게까지 척을 질 필요는 없어 9일 빈소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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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의원들, "통일부에 평화와 통일 맡길 수 없다"

 

민주당 의원들, "통일부에 평화와 통일 맡길 수 없다"
 
 
 
2012년 09월 13일 (목) 14:47:41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인재근, 우상호, 홍익표(왼쪽부터) 의원이 13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북 수해지원이 무산된데 대해 성명을 발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정부는 북한의 의사와 무관한 일방적인 생색내기용 수해지원을 추진했다.”

민주통합당 우상호, 인재근, 홍익표 의원은 13일 오후 2시 10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날 북한이 우리 정부의 대북 수해지원을 거부한데 대해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수해지원에 대한 북한의 거부의사 표명은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무능력한 정부인지 스스로 재입증 한 것”이라며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고 비판했다. “작년의 사례를 비추어 볼 때 북한의 수해지원 거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이것은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진정성이 없으며, 동시에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능력도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며 “수해지원을 통해 남북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졌으며,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이명박 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나아가 “통일부는 수해지원에 대한 북한의 거부의사 표명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수의 고위공무원을 포함하여 통일부 직원들이 동원된 관제행사인 ‘통일항아리 국토대장정’을 바로 오늘 시작했다”며 “북한이 붕괴될 때를 대비해 기금을 쌓아두겠다는 통일부의 ‘통일항아리’ 정책이 현재 정부가 사활을 걸고 있는 유일한 통일정책 아니냐”고 따졌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무기력, 무책임으로 일관한 통일부에게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며 “이번 대북수해지원을 사실상 무산시킨 것이 이명박과 청와대라는 점에서 역사는 지난 5년 동안 남북관계를 후퇴시키고 한반도의 미래를 능동적으로 열지 못한 현 정부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우상호 최고위원은 “이번에 똑같은 방식을 반복한 것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했고, 그래서 그만큼 무능했고, 아니면 의도적으로 방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며 “이번 남측 당국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고 참으로 경솔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상호 의원은 “수해 피해 특성상 피해가 발생한 즉시에는 마른 옷가지, 긴급 식량이 필요하지만 피해가 발생한지 오래된 지금 같은 상황에는 오히려 복구와 관련된 지원이나 당장 북쪽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들이 인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익표 의원은 “이번 수해지원 과정에서 양측의 전통문이 북측이 2번, 우리가 2번 왔다갔다 했는데 이 과정을 통일부가 소상히 밝힐 필요가 있다”며 “이번 사태는 통일부가 차라리 제기 안 한만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마치 남북관계에서 형식적으로 통일부가 ‘이렇게 했다’ 생색내기용 대북수해지원 제안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떨굴 수 없다”며 “지난 수년간 지속된 현 정부의 진정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의구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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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주재 미국대사는 왜 살해됐나?

 

리비아 주재 미국대사는 왜 살해됐나?
 
‘무슬림들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은 대체 어떤 영화인가
 
임병도 | 2012-09-13 07:35:5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9월11일 밤(현지시각)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 3명이 리비아 동부 뱅가지 시에서 로켓 공격에 사망했습니다. 당시 미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은 벵가지 내 미 영사관 단지가 리비아 시위대의 공격을 받자 급하게 벵가지 소재 미 영사관을 떠나 더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하던 중에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국 대사가 공격을 받기 전부터 미 영사관 단지는 수백 명의 시위자들이 몰려와 미국 국기를 찢고 불태우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 시위대가 미국 국기를 찢으며 담을 넘는 장면 출처:로이터 통신

 

시위대는 미국 영사관 단지의 담장을 넘거나 주변을 돌며, 미국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의 규모는 대략 2,000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집트 카이로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가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급격히 늘어났고, 시위 또한 격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 무장시위대가 총을 들고 리비아 주재 미 영사관 단지를 공격하는 장면. 출처:로이터 통신

저녁이 되면서 무장 시위대가 합류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총을 쏘면서 벵가지 소재 미 영사관을 공격했습니다. 이 총격으로 직원 1명이 살해됐으며,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 대사가 세이프티 공간으로 이동을 시작했고, 미국 대사가 탄 차량이 무장시위대의 RPG(휴대용 로켓포)공격을 받았습니다. 차에 타고 있던 미국 대사와 경호원들은 로켓 공격으로 전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로이터 통신의 동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을 보면 총성이 계속 들리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미 영사관 단지를 둘러쌓고 시위를 벌이며 직접적인 사격을 가했으며 시위대에 의해 미 영사관 단지는 온통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원래 리비아 미 영사관 단지에는 리비아인 경비원들이 있었지만, 계속되는 시위대의 집중사격과 방화에 모두들 철수했고, 시위대는 단지 내로 수제폭탄을 투척하는 등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무슬림들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이라는 영화가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슈퍼 경찰이라고 불리는 세계 최대 강국의 미국 대사가 피살되는 사태가 벌어진 배경은 단 한 편의 영화가 발단이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부동산 업자였던 이스라엘계 미국인 샘 바실은 100명의 유대인이 500만 달러를 기부해 '무슬림들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이라는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그는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슬람은 암덩어리"라고 비난했는데, 그의 말처럼 이 영화는 온통 이슬람인들의 폭력성을 보여주거나, 무하마드를 동성애자이자 탐욕스럽고 피에 굶주린 불량배로 묘사했습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영화의 트레일러 영상을 보면, 이집트인이지만 기독교를 믿는 가정을 약탈하는 이슬람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방화와 약탈을 수수방관하는 현지경찰과, 방화를 주도하는 이슬람 지도자도 등장합니다.

이슬람의 예언자로 추앙받는 무하마드를 아동 학대,혼외정사 옹호자,폭군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무하마드를 형상화하는 것조차 금지하는 이슬람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목숨과 같은 신앙심을 짓밟고 훼손한 엄청난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트레일러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가자마자 이슬람인들은 분노했고, 이집트 TV에서 뉴스로 다루면서, 이집트를 비롯한 이슬람권에서는 미국과 제작에 참여했던 유대인들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 카이로를 시작으로 이슬람인들은 거리로 나왔고, 이들을 미국 국기를 찢고 태우며 미국 영사관을 향해 시위를 벌였고, 결국 미국 대사 사망이라는 참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코란을 불태웠던 테리 존슨 목사'

사실 이 영화는 제작됐다고 그리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언론과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한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테리 존슨 목사입니다.

 

▲ 테리 존슨 목사의 코란방화 장면. 출처:유스트림

 

테리 존슨 목사는 도브 세계 회관이라는 단체를 운영하는 인물입니다. 50명 정도의 신도를 거느린 존슨 목사가 주목받은 것은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이슬람은 악 (Islam is of the Devil)'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부터입니다.

9.11 테러가 일어나면서 이슬람에 대한 미국인들의 정서가 반감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그리 극단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불태우자, 많은 이슬람인들 분노했고, 언론은 이를 자극적으로 보도했습니다.


9.11 테러 추모일은 물론이고 이란에서 기독교 목사가 투옥하는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존슨 목사는 코란과 무하마드 초상을 불태웠는데, 이런 테리 존슨 목사가 또다시 주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 9.11 테러가 일어난 무역센터와 이슬람 센터가 건립되는 지역 출처:mcclatchydc.com

 

현재 미국에서는 '그라운드 제로'라고 불리는 9.11테러가 발생한 세계무역센터로부터 2킬로 떨어진 곳에 이슬람문화센터가 건립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슬람인들이 저지른 9.11 테러 때문에 수백 명이 사망했는데, 그 아픔의 현장에서 불과 2킬로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이슬람 문화 센터가 건립된다는 소식은 미국인들의 분노를 유발했고, 이를 테리 존슨 목사는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다시 많은 사람과 언론에 노출됐습니다.

테리 존슨 목사는 이슬람 문화 센터를 현재 그라운드 제로 근처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고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코란을 태우겠다고 경고했습니다. 또한, 존슨 목사는 '무슬림들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이라는 영화를 가리켜 " 이 영화는 무슬림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파괴적 이념을 알리기 위한 영화이며, 무하마드의 삶을 풍자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라는 말과 함께 적극 영화를 홍보했습니다.

'정치와 언론, 그리고 종교'

필자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단순히 이슬람인들이 모두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는 이분적 사고방식을 조금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몇 가지 미국의 상황을 보면 스스로 느낄 수 있습니다.

○ 종교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나

우리가 볼 때에 목사가 코란을 불태우는 행위는 그저 보수우익이 북한 인공기를 불태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란은 명백히 이슬람교의 성스러운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타 종교에서 성경을 불태우는 행위를 기독교가 가만둘리가 없다는 맥락과 비슷합니다.

존슨 목사가 코란을 태우는 행위를 미국 헌법에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 수정 헌법 1조에는 표현과 신념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종교를 내세울 권리가 있다면 타 종교의 권리 또한 보장해줘야 하는 부분도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종교가 타 종교를 배척하고 억압하고 모욕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와 함께 타인을 침범하는 행위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 이라크 주둔 미군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 출처:미국 백악관

 

○ 모든 사건에는 정치가 개입되어 있다.

존슨 목사의 코란 방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미국 국방성 장관은 코란을 태우는 행위는 아프카니스탄을 비롯한 중동 지역에 주둔한 미군을 위태롭게 할 것이며, 이는 알카에다가 모이는 동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코란 방화를 중단하라고 요청했습니다.

미국 대선이 본격화되면서 롬니 공화당 후보는 이전부터 오바마 정부의 대이란 정책을 비난했었습니다.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가 피살되자 롬니는 "오바마 정부의 첫 반응이 미국 외교관을 향한 공격에 대한 비난이 아닌, 공격한 이들에 대한 동정이었다는 점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오바마를 공격했고, 백악관은 롬니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슈퍼경찰 행위가 언제나 영웅적인 면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행동은 군수산업,로비스트,정치인들이 모여 만든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정치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국제 정세가 변하고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도 놓치면 안 됩니다.

 


▲ 미국 폭스 뉴스가 보도한 뉴스 장면 출처:폭스 TV

 

○ 언론이 만드는 여론?, 그 불편한 진실

우리가 흔히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뜻밖에 보수주의가 만연한 국가 중의 하나입니다. 클린턴의 미국 국민 건강보험이 실행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이런 보수주의자들이 언론을 장악했던 점도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폭스TV는 한국의 조중동처럼 언론을 조작하고 왜곡하며 보수주의자들이 열광적으로 시청하는 대표적인 미국의 보수언론입니다.


정당을 지지하는 언론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언론의 본질에는 항상 팩트가 있어야 하지만, 그 팩트를 변질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여론을 조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는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 무슬림의 순진함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과 아프카니스탄 주둔 미군 병사의 모습

 

'무슬림의 순진함'이라는 영화에는 이슬람인이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는 이집트 기독교인을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는 십자가 목걸이를 건채로 죽은 여인의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줍니다. 이는 기독교인이라면 충격과 공포에 떨 수밖에 없는 화면입니다. 아프카니스탄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도 전사했지만, 아프카니스탄 주민들도 미군에 살해당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번 사건은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의 죽음을 아파하기에는 그 안에는 복잡한 배경이 얽혀져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생각하며 고민해야 합니다.

종교와 정치,언론은 항상 사람들의 나은 삶과 진실을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쟁과 아픔을 조장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그들의 추악함을 바꿀 수 있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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