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문재인 "북한에 특사 보내 취임식에 초청할 것"

 

문재인 "북한에 특사 보내 취임식에 초청할 것"
대선후보 수락연설서 '평화와 공존의 문' 제시 <전문>
 
 
2012년 09월 16일 (일) 17:35:17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민주통합당 문재인 제18대 대통령 후보. [사진출처-민주통합당]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문재인 후보는 16일 수락연설문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한에 특사를 보내 취임식에 초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당시에도 북한 고위층 사절단을 초청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한설이 흘러나왔지만 실현되지 못한 바 있어 문 후보의 이같은 구상이 실현될지 주목된다.

문재인 후보는 이날 오후 1시부터 고양체육관에서 개최된 서울지역 순회투표에서 158,271표(60.61%)를 얻어 누적득표율 56.52%로 과반을 넘겨 결선투표 없이 대통령 후보로 최종 확정됐다.

문 후보는 수락연설에 나서 “새로운 시대로 가는 다섯 개의 문이 우리 앞에 있다”며 △일자리 혁명의 문 △복지국가의 문 △경제민주화의 문 △새로운 정치의 문 △평화와 공존의 문을 제시했다.

특히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다섯 번째 문은 평화와 공존의 문”이라며 “분단 극복은 우리 민족의 과제이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문 후보는 먼저 “지난 5년, 한반도는 대결과 긴장의 연속이었다”며 “6.15, 10.4 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남북경제연합을 통해 경제 분야에서부터 통일을 향해 나아가겠다”며 “남북경제연합은 우리 대한민국을 ‘30-80시대’로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30-80’은 소득 3만 달러와 인구 8천만 이상을 의미하며 미국, 독일, 일본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저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한에 특사를 보내 취임식에 초청할 것”이라고 밝히고 “임기 첫 해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재확인했다. 나아가 “대통령 선거 전이라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이명박 정부의 요청이 있다면 우리당과 함께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적극적 입장을 밝혔다.

문 후보는 대외정책으로 “남북대화와 6자회담을 복원할 것이다.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을 함께 추진하겠다”며 “미국과는 동맹관계를 공고하게 하는 가운데 주변 국가들에 대해서도 균형외교를 펼치겠다”고 약속했다.

이 외에도 문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관련, 재벌의 특권과 횡포를 용납하지 않고 골목상권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정치개혁과 관련 책임총리제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고 정당책임정치를 구현하겠다고 공약했다.

문 후보는 당면한 대선에 대해서는 “더 널리, 새로운 인재들이 함께하는 열린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겠다”며 “그 힘으로 우리 민주통합당이 중심이 된 정권교체의 길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정권교체, 정치교체, 시대교체, 반드시 해내겠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꼭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서울지역 순회투표에서는 손학규 54,295표(20.79%), 김두관 30,261표(11.59%), 정세균 18,322(7.02%)를 득표했으며, 누적 득표율은 문재인(56.52%)-손학규(22.17%)-김두관(14.30%)-정세균(7.00%) 순으로 집계됐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문>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문을 열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당원 동지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변화를 선택하셨습니다.
정권교체를 선택하셨습니다.
민주통합당의 승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저 문재인을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내는 주역이 되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저는 두렵지만 무거운 소명의식으로 민주통합당의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부여된 막중한 책임을 반드시 이루어낼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여러분의 지지와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1년 전만 해도 저는 현실정치로부터 멀리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민주통합당의 대통령후보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먼저,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국민참여시대를 열었던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대통령이 계십니다.
저의 오늘은 두 분의 역사 위에 서있습니다.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이 계셨습니다. 저에게 큰 용기가 되었습니다.
변화에 대한 그분들의 간절함이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국민경선에 함께 한 100만 명의 시민들이 계십니다.
저에게 정권교체에 나서도록 힘을 모아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당원 동지들의 격려가 있었습니다.
경선기간 내내 저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습니다.
저는 자랑스러운 민주통합당의 후보입니다.
그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세 분 후보님이 끝까지 경선을 함께 했습니다. 위로의 인사와 함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쟁이 저를 거듭나게 했습니다. 소명과 책무를 더욱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 분 후보님과 손을 잡겠습니다. 민주통합당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습니다. 수년 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유럽이 재정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세계경제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시장만능주의와 성장지상주의가 빚어낸 결과입니다.
곳곳에서 보통사람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대한민국도 위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 경제는 개발독재와 정경유착으로 파행적인 압축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경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안팎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성장만을 외치며 달려오는 동안 특권과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독선과 아집이 횡행했습니다. 갈등과 반목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이 구시대 문화가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시대는 질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쟁과 효율’에서 ‘상생과 협력’으로의 전환입니다.

‘불통과 독선’의 리더십은 구시대의 유산입니다.
권위주의 시대의 역사의식으로는 새 시대를 열 수 없습니다.

‘협력과 상생’이 오늘의 시대정신입니다. 저는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을 발휘하겠습니다.
‘공감과 연대’의 리더십을 펼치겠습니다. 저 문재인이 변화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국가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느끼십니까?
나의 어려움을 함께 걱정해주는 정부라고 생각하십니까?

보통사람들의 현실은 불안하고 아프기만 합니다.
힘겨운 직장생활에도 가계는 여전히 빚투성이입니다.

40대, 50대 가장들은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몰라 불안합니다.
자영업자들은 이미 포화상태입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수명은 많이 늘어났는데, 노후 대책이 없습니다.
불공평 속의 빈곤과 사회안전망의 부족이 우리나라를 자살률 1위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청소년들은 끔찍한 성적 경쟁으로 인한 좌절과 절망 속에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어두운 밤길이 무섭습니다. 주부들은 자녀들의 등하굣길을 살펴야 합니다.
집에 있는 아이들의 안전도 걱정해야 합니다. 범죄가 만연하지만 치안은 무력합니다.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는 끝이 없습니다.
기득권 정치, 정치 검찰, 재벌이 손을 잡고 있습니다.
이 특권 카르텔의 횡포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5년이 시대를 과거로 돌려놓았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도 후퇴되었습니다.
국민들은 불안 속에서 절망하고, 좌절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가 계속 후퇴할 것이냐, 다시 전진할 것이냐,
지금 우리는 그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바꿔야 합니다. 변화의 새시대로 가야 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다시 돌려놓아야 합니다.
저 문재인이 앞장서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사람이 먼저입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이 말이 국정철학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존엄한 세상입니다. 돈과 지위의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직업과 신분의 차별도 학력과 학벌의 차별도 없을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이 함께 기회를 가지는 나라’
‘상식이 통하고, 권한과 책임이 비례하는 사회’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 나라’
‘힘없는 사람에게 관대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는 사회’

출마 선언 때 시민들이 제게 주셨던 ‘공평’과 ‘정의’에 대한 요구들이었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공평’과 ‘정의’가 국정운영의 근본이 될 것입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것을 국정운영의 원칙으로 바로 세우겠습니다.

특권과 반칙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권층이나 힘 있는 사람들의 범죄는 더욱 엄중하게 처벌할 것입니다.

권력형 비리와 부패를 엄단하겠습니다.
재벌이 돈으로 정치와 행정을 매수하여 특권을 키우지 못하도록 특별히 경계하겠습니다.
병역의무를 회피한 사람이 고위공직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민간 분야도 반부패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맑고 투명한 사회로 거듭나도록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새로운 시대로 가는 다섯 개의 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것은 일자리 혁명의 문입니다.
복지국가의 문입니다.
경제민주화의 문입니다.
새로운 정치의 문입니다.
그리고 평화와 공존의 문입니다.
우리는 이 다섯 개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야합니다.

첫 번째는 일자리 혁명의 문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일자리가 민생이고, 성장이고, 복지입니다.
범정부적인 일자리 혁명을 추진하겠습니다.

대통령 직속으로 ‘국가일자리위원회’를 설치해서 직접 챙기겠습니다.
지방의 일자리 마련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특히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문턱이 높아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청춘들에게 무한 책임을 느낍니다.
청년이 바로 국가의 미래입니다.
‘국가일자리위원회’ 안에 ‘청년일자리특별위원회’를 두어 특별히 청년실업 문제를 챙길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더 이상 스펙에 매달릴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두 번째 문은 복지국가의 문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복지는 투자입니다. 성장의 동력입니다.

민주정부 10년은 복지국가의 시작이었습니다.
복지재정이 크게 늘었습니다.
제도의 기본 틀도 갖춰졌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많이 모자랐습니다.

이명박 정부 5년이 격차를 확대시켰습니다.
격차 해소가 국정의 최우선 목표가 될 것입니다.
소외되고 그늘진 곳이 없도록 살필 것입니다.
노인복지에도 관심을 쏟겠습니다.
고령화 사회, 고령사회에 대비하겠습니다.

복지국가를 위한 임기 중 계획은 물론 중장기계획도 세우겠습니다.
시혜적이고 선별적인 복지를 뛰어넘겠습니다.
보편적 복지가 계획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복지국가 대한민국’의 5년, 10년, 20년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한 번의 실패가 낙오로 이어져서는 안됩니다. 재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저 문재인은 ‘힐링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국민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겠습니다.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세 번째 문은 경제민주화의 문입니다.
경제민주화는 시대적 명제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경제 분야부터 ‘공평’과 ‘정의’를 바로세우겠습니다.
승자독식의 ‘정글의 법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상생과 협력’의 경제 생태계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경제입니다.
포용적 성장, 창조적 성장, 협력적 성장, 생태적 성장을 통해 일자리 창출, 복지확대, 지속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습니다.

공정한 시장 질서를 만들겠습니다.
재벌 관련 제도를 확실히 정비하겠습니다.
재벌의 특권과 횡포는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재벌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길을 찾겠습니다.
골목상권을 보호하겠습니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공존·공생’을 통해 일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받게 하겠습니다.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네 번째 문은 새로운 정치의 문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저는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겠습니다.
대통령이 권한 밖의 특권을 갖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한만을 행사할 것입니다.
결코 초심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책임총리제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겠습니다.
정당책임정치를 구현하겠습니다.
대통령은 당을 지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당은 정책을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하겠습니다.
시민들의 소통과 참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겠습니다.

국가균형발전정책으로 지방을 살리겠습니다.
본격적인 지방분권시대를 열겠습니다.
특정세력이나 지역에 편중되지 않은 균형인사를 하겠습니다.
품격 있는 정치를 하겠습니다. 편 가르기와 정치보복,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야당과도 외교·안보에 관한 정보를 공유할 것입니다.
이를 토대로 정책을 협의할 것입니다.
특히, 선거 때 공통으로 한 공약은 인수위 때부터 그 실행을 협의해 나가겠습니다.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다섯 번째 문은 평화와 공존의 문입니다.
분단 극복은 우리 민족의 과제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지난 5년, 한반도는 대결과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민주정부 10년이 공 들여 쌓아온 남북 간의 신뢰가 모두 무너졌습니다.
평화는 실패했고 안보는 무능했습니다.

6.15, 10.4 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튼튼한 안보의 바탕 위에서 평화와 공존의 한반도를 실현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는 평화가 경제입니다.
남북경제연합을 통해 경제 분야에서부터 통일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합니다.
북한은 한반도 경제를 넘어 대륙경제로 진출하는 기회의 땅이 될 것입니다.
남북경제연합은 우리 대한민국을 ‘30-80시대’로 이끌 것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와 인구 8천만의 한반도시장을 의미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미국, 독일, 일본에 이어 네 번째 ‘30-80’ 국가가 될 것입니다.
북한도 함께 발전하는 공동번영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한에 특사를 보내 취임식에 초청할 것입니다.
임기 첫 해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겠습니다.
대통령 선거 전이라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이명박 정부의 요청이 있다면 우리당과 함께 적극 협력할 것입니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 경쟁과 갈등의 파고가 높습니다.
한·일 간에는 독도와 역사문제를 놓고 대립이 있습니다.
중·일 간에는 영토분쟁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G2 국가로 성장했고, 미국도 아시아로의 회귀를 선언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도 미일편중외교와 대외전략의 부재로 일관했습니다.
한국외교의 방향타를 잃었습니다.
저는 남북대화와 6자회담을 복원할 것입니다.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을 함께 추진하겠습니다.
미국과는 동맹관계를 공고하게 하는 가운데 주변 국가들에 대해서도 균형외교를 펼치겠습니다.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협력을 이끄는 평화선도국가의 역할을 당당하게 해 나가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당원 동지 여러분.

우리는 이명박 정부에서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대통령을 잃었습니다.
두 분 대통령의 서거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파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었습니다.

저를 현실정치로 이끈 것은 국민들의 고통에 대한 책임감이었습니다.
참여정부가 더 잘해서 이명박 정부의 출범을 막아냈어야 했다는 뼈아픈 책임감이었습니다.

그 책임감이 저를 야권대통합운동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저는 두 분 대통령의 헌신과 희생을 딛고 새로운 민주정부시대를 열겠습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 그리고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여는
새시대의 맏형이 될 것입니다.

저 문재인, 늘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국민과 손잡고 동행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국민이 기대고 싶을 때 어깨를 내어주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당원동지 여러분

지금 정치권 밖에서 희망을 찾는 국민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또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의 표현입니다.
저와 우리 민주통합당이 반성해야 할 대목입니다.
그러나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 당이 과감한 쇄신으로 변화를 이뤄낸다면 새로운 정치의 열망을 모두 아우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권교체의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승리로 가는 길목에서 꼭 필요한 것은 우리의 단결입니다.

오늘 이 시점부터 우리 민주통합당은 하나입니다.
더 널리, 새로운 인재들이 함께하는 열린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겠습니다.
당내 모든 계파와 시민사회까지 아우르는 ‘용광로 선대위’를 만들겠습니다.
그 힘으로 우리 민주통합당이 중심이 된 정권교체의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우리 민주통합당과 함께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주십시오.
정권교체, 정치교체, 시대교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꼭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근혜의 ‘배은망덕’과 모순된 역사관

 

 
박근혜의 ‘배은망덕’과 모순된 역사관
 
[23년 전 박근혜 일기] 자기 아버지 억울한 것은 바로잡자고 외치면서
 
김욱 | 2012-09-15 11:09:3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박근혜 수필집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표지

 

 

 

 

 

 

 

 

 

 

박근혜의 책 중에 자주 인용되는 책이 하나 있다. 1993년에 출간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라는 책으로, 박근혜의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일기를 모아 펴낸 수필집이다. 중반과 후반은 개인적인 감상이고 앞부분은 박정희 10주기 추도식을 준비하고 치르는 과정에서 부모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내용인데 언론에서 주로 인용하는 부분은 바로 앞부분이다. 이 책에 실린 1989년 10월 27일자 일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제 10주기 행사는 온화하고 청명한 날씨 속에 무사히 끝났음을 하늘에 감사드리는 마음이다. 묘소까지 가는 도중 마음의 울렁임을 참기 힘들었다. 10년만의 추도식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추모사에서 '아 아버지!' 하고 부르고 나서 감정이 폭발하면 자제키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 안에서 어머니께 기도 드렸다. 감정을 억제하게 해주십사하고."

87년 이전까지 박근혜 남매는 아버지의 추도식을 할 수 없었다. 전두환 정권이 추도식을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이날 박근혜가 감정 폭발을 자제키 어려울 정도로 격한 감정에 휩싸였던 건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10주기 추도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근혜는 같은 해 12월 30일 일기에서 1989년은 "수년 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한 해"라고 말하며 감격에 겨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가 그렇게 바랬던 추도식은 박정희가 탄압한 민주화 덕분에 가능했다. 박근혜는 책에서 추도식을 가질 수 있었던 데 대해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대상은 '민주화'가 아니었다. 89년 11월 19일 일기에서 박근혜는 "한을 풀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과를 가져온 오늘이 있도록 해주신 하늘에 감사를 올리는 마음이다"라고 쓰고 있다. 박근혜에게 민주주의는 인간의 투쟁에 의해 쟁취된 게 아니라 하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썼다.

박근혜는 지난 9월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서 '인혁당 피해자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왔다며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냐고 답했다. 여기엔 인혁당 사건이 독재정권에 의한 '사법살인'이 아니라 유신정권 시절 사법부의 판결대로 피해자들에게 죄의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인혁당 피해자 8명은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20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심지어 피해자들의 시신은 강제로 화장되었는데 시신 부검으로 고문 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한 조치가 아니고선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인혁당 피해자들이 사형된 날을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까지했다. 인혁당 사건은 32년 뒤인 2007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인혁당 희생자들은 민주화의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투쟁이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그리고 6.10 항쟁까지 이어졌고 그리하여 오늘의 민주화를 이루었다. 박근혜가 인혁당 피해자들을 모욕한 것은 민주화의 뿌리를 모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 원하던 아버지의 추도식을 가능하게 해줬던 '민주화의 뿌리'에 대해 박근혜는 배은망덕한 짓을 한 것이다. 인혁당 피해자들은 그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도 그 딸에게 은혜를 베풀었건만 또 다시 모욕을 받았다.
 

▲ 박정희 대통령 10주기 추도식 관련 기사(동아일보, 1989.10.26)

▲ 1989년에 열린 박정희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인파

박근혜의 10월 25일과 11월 9일 일기를 보면 역사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때 그의 역사관은 우리와 비슷하다. 다만 다른 것은 그의 아버지 부분이다.

"아! 10주기! 이날을 잘 맞기 위해 나는 지난 1년 여 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노력이 없었을 때 과연 아버지는, 역사는 어찌 되었을 것인가. 다만 아찔한 생각이 들 뿐이다." (10월 25일)

"아버지에 대한 그 시절 역사에 대한 왜곡이 85% 정도 벗겨졌다고들 말한다... 역사가 바로 잡혀야 사회질서가 바로 잡히게 되는 이치를 생각해볼 때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리시지 않았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12월 30일)

바로잡혀야 할 역사가 자신의 아버지 부분이라고 한 건 문제 삼지 않겠다. 우리가 궁금한 건 박근혜가 왜 이 때의 역사관과 지금의 역사관이 달라졌나 하는 것이다. 박근혜는 '박정희 독재'의 과오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항상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답했다.

그런데 23년 전 박근혜는 아버지의 일을 역사에 맡기지 않고 바로잡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왜 박근혜는 자신의 아버지는 바로 잡겠다고 하면서 남의 아버지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할까. 다같이 역사의 판단에 맡기던가 아니면 다같이 바로잡던가 해야할 거 아닌가?

박근혜는 89년 12월 30일자 일기에서 80년대를 두고 "마음의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두번 다시 돌아다 보기도 싫은 소름 끼치는 연대"라고 쓰고 있다. 80년대 박근혜에게 아픈 상처를 준 건 전두환 정권일 것이다.

그리고 이 아픔을 끝낸 건 바로 민주주의다. 지금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고 하고 유신정권은 불가피했다고 하는 박근혜는 민주주의와 싸우고 있다. 만약 박근혜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이긴다면 우리의 2010년대는 소름끼치는 연대가 될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박근혜 후보가 생각을 바꾸길 바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도 신화의 바다 헤험친 박경숙 박사

인도 신화의 바다 헤험친 박경숙 박사

조회수 548추천수 02012.09.15 12:26:50

 

 

집 벽에 그린 아그니 신 앞에 선 <마하바라타> 번역자 박경숙씨. “구전문학인 <마하바라타>는 텍스트가 일관성이 없어, 맥락을 설명하는 주해를 상세히 달고, 매끄럽게 번역문을 다듬는 것이 어려웠다”고 했다.

 

<마하바라따 1~5>
박경숙 옮김/새물결·각 권 2만2000~2만7000원

 

“이거 고교생 큰딸 두레가 아궁이 벽에 그린 겁니다. 솜씨가 어때요?”

 

지리산 기슭의 농가 집 벽에 그려진 불의 신 ‘아그니’ 앞에서 그는 털털한 웃음을 터뜨렸다. 지리산에 온 지 5년째라는 인도 고전 문헌 연구자 박경숙(49)씨는 수더분한 시골 아줌마 같았다. 옆을 따라다니는 작은딸 두메(15·중3)와는 인도 고전 구절들을 소재로 삼아 줄곧 농담을 주고받는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장항리. 박씨의 집은 실상사 들머리에 자리잡은 ‘노루목’ 마을에 있다. 멀리 천왕봉과 반야봉, 뱀사골 계곡이 아스라이 보이는 거처에서 나물 캐고 고추 농사를 짓는 그는 최근 국내 학계를 놀라게 하는 성과물을 내놓았다. 세계 최고 최대의 전쟁 서사시로 꼽히는 고대 인도의 고전명작 <마하바라타>를 세계 3번째로 완역하고 전체 20권 분량 가운데 1차분 5권을 <마하바라따 1~5>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것이다.

 

고대 인도 바라타 왕족 사촌 형제들 무리인 ‘판다와’와 ‘카우라와’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 전쟁담을 뼈대로 하는 전체 18장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원본은 어렵기로 악명 높은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있다. 약 10만개의 시구로 이뤄진 운문체 원본을 20여년 동안 우리말로 풀어 옮긴 번역 초고 물량만 에이(A)4 용지로 5만여장이다. 방바닥부터 쌓으면 천장까지 올라갈 정도다. 21년 전인 1991년 인도 푸네대학에 유학 가서 틈틈이 시작한 번역 초고 작업은 이미 2007년 끝냈다고 한다. 이 산고의 기간 동안 그는 인도의학을 연구하던 남편과 현지에서 만나 결혼해 두 딸을 낳았고, 푸네대학에서 인도 신에 대한 산스크리트·팔리어 고전 연구로 박사학위(2007년)를 받았으며, 그 직후 귀농해 농부가 됐다. 완역본은 인도(현대어)와 미국(영어)에서만 나온 <마하바라타>를 우리말로 풀어낸 박씨의 이력이 궁금해 지난 10일 그의 집을 찾았다. 박씨와의 대화는 <마하바라타>의 장강 같은 서사처럼 꼬리를 물고 거듭되는 인도 고전 이야기의 성찬이었다.

 

<마하바라따 1~5> 박경숙 옮김/새물결·각 권 2만2000~2만7000원

 

산스크리트어 원본 완역 결실
“텍스트 너무 재미있어 끌렸죠
어려운 문제 풀릴때 희열느껴”

 

“왜 번역했냐구요? 원래 제가 싫은 거 안 해요. 사실 텍스트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시작한 겁니다. <마하바라타>는 이 드넓은 세상 자체니까요. 유학 가서 원문을 보니까, 중국의 고전 <삼국지>와 아주 비슷해요. 주인공들 성격도 그렇고. 같이 비교해서 보면 참 흥미롭겠다 싶더라구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모습을 이 대작에서 투영해봤으면하는 생각도 했지요. ”

 

서양의 고전 서사시 <일리아드><오디세이>를 합친 것의 8배나 되는 분량을 옮기는 과정은 분명 고통과 인내가 요구되는 과정이었을 터다. 그런데도 “그런 적은 정말 거짓말처럼 없었다”며, 되레 “게으른 사람이 하기에 딱 좋다”고 그는 웃었다. “저처럼 한꺼번에 여러가지 사고를 못하는 사람한테는 낮엔 농사일하고 틈나는 대로 번역하는 일이 좋아요. 스스로 숱한 인간군상들의 생각과 음모, 행동들이 출몰하는 텍스트에 빠져들었죠. 아,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 이런 묘사를 할까. 제 번역이 문장으로 이어지고 문법이 굉장히 어려운 텍스트가 풀렸을 때의 희열 같은 것들이죠. 사실 원전이 길기 때문에 일이 계속 있잖아요. 하염없이….”

 

<마하바라타>의 진정한 가치는 집착하는 교훈이 없다는 데서 나온다고 그는 일러준다. 전쟁을 벌이는 무사 아르주나 같은 판다와 형제들과 적수인 두료다나를 비롯한 카우라와 형제들이나 그 과정에 개입하는 크리슈나를 비롯한 여러 신들, 반인신, 아수라·락샤사(악귀), 성자들의 행동과 생각들은 세속적 인간들과 거의 똑같다. 선악과 흑백 논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얼핏 신들의 아들인 판다와 형제가 선의 세력이고, 그들을 노름에서 이겨 숲으로 쫓아내고 나중에 전쟁을 벌이는 카우라와 형제가 악의 세력처럼 묘사되지만, 실제 전쟁에서는 판다와 쪽이 신과 공모해 야비하고 음흉한 전술을 밥 먹듯 구사하는 모습이 숱하게 묘사된다는 점도 그렇다. 박씨는 “신이나 성자들도 극악무도하고 속세에 찌든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다”며 그 단적인 예로 판다와 형제의 용맹한 화살 장수 아르주나를 이끌어주는 지혜의 신 크리슈나를 들었다.

 

“인도 사상의 진수를 담은 <바가바드기타>의 원전이 된 <마하바라타> 6장에서 크리슈나는 동족을 죽여야 하는 현실 앞에 번민하는 아르주나에게 ‘전쟁을 해야 하는 너의 다르마(의무·도리·법이란 뜻)에 충실하라’고 채근하며, 살육을 부추기지요. 카우라와 형제들을 이기려고 갖은 비열한 술법과 책략을 부립니다. 유명한 <바가바드기타>덕분에 성스러운 신으로 알려진 크리슈나의 본모습은 너무 달라요. 여자들을 유혹해 무려 1만6000명의 부인을 두었던 호색한이기도 하고요. 신들의 제왕 인드라신도 성자들이 지위를 빼앗을까봐 요정 압사라스를 시켜 미인계로 그들을 파계시키곤 하죠.”

 

속세에 찌든 캐릭터 많이 등장
선악과 흑백논리 없는게 특이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별세계”

 

“<마하바라타>의 내용들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는 지금 한국인들에게도 삶의 다양한 갈래와 가능성들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또 하나 강조한 건 ‘이야기의 재미’였다. <마하바라타>에는 ‘날탄’(미사일)과 핵전쟁에 비견될 만한 암흑세상의 진언, 비행기와 탱크·장갑차에 해당하는 기기묘묘한 전쟁 무기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바라타 왕족의 모태가 된 여인 샤쿤달라의 보석반지 연애담, 그리스 신화를 압도하는 신들의 투쟁담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진다. 그는 “상투적 수식어나 복잡한 인명 등의 잔가지를 쳐내면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별세계를 접할 수 있다”며 “이 서사시가 ‘포켓몬’ 게임이나 숱한 할리우드·인도 영화들의 모티브가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 유학을 결행한 것은 대학 시절 어느 스님에게 들은 인간 붓다의 매력을 제대로 이야기로 풀어보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도에서 두 딸까지 키우면서, 고대 산스크리트 고문헌들과 씨름한 끝에 <마하바라타>의 산맥을 넘었지만, 내처 인연의 힘으로 풀려나간 자신의 학문 역정은 언제나 물 흐르듯 편안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박씨는 초역은 했지만, 어려운 용어나 인명들을 우리말로 다듬어 풀어내는 완역본 발간까지는 앞으로도 최소한 4~5년은 잡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일단 내년까지 10권을 출간해 숨고르기를 한 뒤 해석이 가장 난해하다는 12장 ‘평화’와 13장 ‘교훈’을 포함해 판다와 형제들이 승전 뒤 출가수행을 떠나는 나머지 부분에 도전할 참이다. “언제까지라고 목표를 세우진 않았어요. 그렇게 하면 농사짓는 재미를 뺏기니까….”

 

남원/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판다와 군과 카우라와 군의 마상전차 전투를 그린 인도의 세밀화. 도판 제공 새물결

인도 고전 ‘마하바라타’는

기원전 10세기 전쟁실화담 모태
신과 성자·악귀 골육상쟁 얘기
인도의 사상과 우주관 녹아들어

 

‘위대한 바라타(고대 인도의 왕족 이름)인들의 이야기’란 뜻을 지닌 <마하바라타>는 ‘신화의 밀림’이자 ‘이야기의 아마존’이다. 인도인의 정신과 사상, 지식과 지혜, 신화와 전설, 윤리관과 우주관 등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얽힌 모든 것들이 잡탕처럼 이 고전에는 녹아들어 있다. 10만개의 시구에 등장하는 인명도 3000개에 육박한다. 4세기께 위야사라는 고대 선인이 최종 편집했다고 전하지만, 위야사가 ‘편집인’이란 보통명사로도 쓰여, 실제로는 문학을 담당했던 계급인 브라만들과 민중의 구전담이 1000년 이상 축적된 결과로 본다. 따라서 이 대작을 읽는 것은 나름 인내도 필요하지만, 어떤 형식으로 특정되는 작품이 아니기에 복잡하고 다채로운 구성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독해의 지름길이다.

 

<마하바라타>의 구성은 장강 대하와 그 언저리의 숱한 지류들에 비유할 수 있다. 기원전 10세기께 전쟁 실화담을 모태로 하여 엄청난 수의 신과 성자, 반인신, 악귀 등이 북인도 대륙을 무대로 삼아 출몰하며 펼치는 골육상쟁의 전쟁 이야기가 본류에 해당한다. 여기에 고대 창조신화와 대홍수, 불로불사의 영약을 얻기 위한 신들과 아수라의 줄다리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류들이 가지처럼 얽혀서 거대한 서사를 이룬다. 내용 전개 또한 이야기 속에 이야기들이 거듭 나타나면서 펼쳐지는 얼개다.

 

원문에서는 모두 18장의 서사시를 가객 우그쉬라와스와 위야사의 제자인 브라만 와이샴파야나, 그리고 전쟁에 패한 카우라와 일족의 왕 드르타라슈트라의 측근 산자야가 화자로 나서 시 형식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원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5장(이번 1차 번역본은 1~3장까지를 다룬다)은 태초 세상의 창조, 전쟁 대결을 벌이는 판다와·카우라와 형제들의 탄생과 성장, 노름(내기)에서 비롯된 두 형제 간의 갈등 과정을 다룬다. 6~11장은 전쟁의 진행과 판다와의 승리로 끝나는 비참한 전쟁 상황이 핍진하게 묘사된다. 12장 ‘평화’와 13장 ‘교훈’, 14장 ‘말희생제’는 <마하바라타>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장이다. 전쟁에 이겼지만, 일가친척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판다와의 유디슈티라 왕에게 성자 비슈마가 역경과 해탈의 도, 궁극의 진리를 일러주는 내용이다. 마지막 15~18장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왕국과 판다와들이 출가수행을 떠나 마음을 다스리는 이야기다.

 

간디와 함석헌의 주해로 유명한 <바가바드기타>는 <마하바라타>의 6장 ‘비슈마’에 있는 철학적·종교적 시구들을 간추린 것으로, 전쟁터에서 동족의 살상에 번민하는 판다와족 전사 아르주나에게 수호신 크리슈나가 던지는 지혜의 잠언 등이 담겨 있다. 흔히들 <바가바드기타>를 인도 고대 사상의 정수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절반만 맞는 말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은 12, 13장을 핵심으로 간주하며 지금도 해석을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번역자 박경숙씨도 앞으로 진행될 전작 완역본 출간 과정에서 가장 험난한 산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문외한인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2권 말미 부록에 실린 해설을 먼저 보고, 전체 내용을 이해한 뒤 흥미로운 전쟁담이나 신화 등의 구절을 취향대로 골라 읽는 것이 좋겠다. <마하바라타>가 기승전결로 설명할 수 없는 온갖 명상과 사고·일화 등이 뒤섞여든 이야기의 거대한 그물망이기 때문이다. “<마하바라타>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인도인들의 경구가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이 거작의 구성 자체가 온갖 망상과 잡념, 환상과 욕망에 가위눌리고 유혹당하는 복잡무쌍하고 불가사의한 인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노형석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안철수, 타이밍 적절했던 5.18묘역 참배

타이밍 적절했던 5.18묘역 참배
처녀보살 아웃 시킨 인혁당사건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2-09-15)


 

일출이 일몰을 잉태하듯 매사는 때가 있는 게 아닐까.

주사위는 던져졌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 광주 국립 5·18민주묘역에 참배하면서 언론들은 일제히 안 원장의 행보가 사실상 대선출마를 뜻하는 것이라며 대서특필 하기 시작했다. 안 원장이 간접화법으로 '개인적인 일로 5·18민주묘역을 참배'했다고 말했지만 그의 발언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안 원장이 5·18민주묘역을 참배하면서 사실상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선출하는 본격적인 대선 시즌이 도래했다고 볼 수 있으며 안 원장 또한 사실상의 출마선언이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참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가 싶다.

안 원장이 5·18민주묘역을 전격 참배한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난 직후였지만, 안 원장이 결정은 유신독재자 박근혜('그녀'라 부른다)의 인혁당사건 망언이 국민적 뭇매를 맞으며 여론이 최악의 상태에 이를 때였다. 따라서 박근혜의 지지율은 곤두박질 치며 민주당 문재인 예비후보와 안철수 원장에게 추격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등 지지율이 역전 당하는 시기였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지지율 급락이 문재인과 안철수의 지지율을 동반 상승시킨 것이다. 인혁당사건 때문이었다. 여론조사 결과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지만,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양자대결에서 박근혜45.4%-안철수45.1%, 박근혜46.1%-문재인42.7%으로 오차 범위내에서 접전 중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5.16 군사쿠데타 망언에 이은 인혁당사건의 망언이 불러온 역풍은 어떠한 지 다시 한번 살펴볼까.

그녀의 대선행보 발목을 붙든 인혁당사건의 끔찍한 사실 등은 유신독재자 박정희와 그녀는 물론 새누리당을 통째로 한 통속으로 묻어버린 실로 무지막지한 사건이었다. 캄보디아에 킬링필드란 사건이 있었다면, 유신독재시대에는 인혁당사건이 대표적인 살륙사건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법부가 조작질된 기소 내용에 따라 사형선고가 내려진 지 20시간 만에 전격 사형에 처해진 8명의 유가족들의 가슴을 쥐어뜯는 울부짖음이 세상에 파다했다. 관련 포스트에서 언급한 5.16처녀보살의 한풀이로 비견되는 그녀의 대선 행보 망언 때문이었다. 아직도 글쓴이의 머리 속에는 유가족들의 가슴 속에 또아리 틀고있는 인혁당사건 트라우마가 그대로 남아있다. 이랬다.

"...사형은 새벽에 집행됐지만, 시신은 오후 6시가 지나서야 넘겨받았다. 죽은 이의 몸뚱이에는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등이 다 시커멓게 타 있었어요. 손톱 10개, 발톱 10개는 모두 빠져 있었고, 발뒤꿈치는 시커멓게 움푹 들어가 있었어요." 그날을 회고하던 아내 이씨는 "당국이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어버린 다른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며 치를 떨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끔직하고 악랄한 만행이 유신독재자 시절에 저질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 동안 사진 찍기에 바빳다. 대략 한 달 여 시간 동안 그녀는 전방 부대를 시찰하며 언론들로 부터 광폭행보 평가를 듣는 듯 했다. 그러나 인혁당사건 유가족들이 울부짖음은 결코 5.16처녀보살의 한풀이 굿판을 용납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의 애비 박정희로 부터 그녀로 이어지는 살풀이가 우려된 것 때문 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애비가 남겨준 DNA를 고스란히 물려 받으며 사람들의 바람을 묵살하고 있었다. 그녀의 애비 박정희가 김재규로 부터 총살을 당하기 직전까지 사람들은 "이제 그만 물러날 때가 됐다"라고 했지만 뿌리친 것 처럼, 그녀는 사람들이 과거사를 합리화 하는 발언을'해서는 안 된다'라며 말리는 충고를 멀리하고, 징징거리는 내시에 둘러싸여 안하무인 광폭행보를 하며 나락으로 떨어질 차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굿발'이 안 받는 이유가 일찌감치 그녀 내부의 적 한풀이로 부터 시작되었다고나 할까.

나이 60세에 이른 노처녀에 사생아 루머와 사람들로부터 '수첩공주' 내지 '할미공주' 등으로 비아냥을 받아 온 그녀는, 어느모로 따져 보나 머리에 든 게 없어 보였다. 대통령이라는 직이 반드시 머리 속에 수 많은 지식과 내공이 필요한 게 아니란 건 이명박 대통령을 통해 익히 학습한 바 있지만, 그래도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 정도는 갖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수첩할미는 습관에 따라 특정 사건 등에 대해 최소한의 논리를 갖추지 못했으며 역사관 내지 국가관 따위는 일찌감치 국밥에 말아먹었는 지 툭 하면 '역사에 맡기자'고 말했다. 아울러 그녀 스스로 초법적인 존재가 되어 사법부의 결정을 뒤흔드는 망언을 일삼으며 국민들을 심히 절망에 빠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철수 원장이 이런 호재에도 불구하고 쉽게 대선 행보에 발을 내딛지 못했다. 민주당의 예비경선 불협화음이 적지않았으며 이대로 가다간 문재인 후보 등과 치루어 낼 야권후보 단일화 등의 일정에 차질이 빚을 정도였다. 안 원장이 등단할 타이밍이 점차 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우신조인 지 처녀보살의 망언 내지 주둥이질이 인혁당사건을 부활 시키며 안 원장의 등단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녀는 인혁당사건 망언 때문에 지지율을 다 까먹고 방방 뛰고 있었던 것이며, 굿발이 안 받는 배경에는 광폭행보를 가로막고 선 거대한 벽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안철수의 벽이자 상식의 벽이며 보통사람들이 꿈 꾸는 차기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애비가 남긴 유산 다수를 차지하고도 유독 5.16군사쿠데타 내지 정수장학회 문제나 인혁당사건 유산은 거부한 그녀. 그래서일까. 시사IN의 시사터치에 등장한 그림 속에서 5.16처녀보살이 내 건 한풀이는 결국 망신살로 뻗치며 '안철수 암초'를 자초한 형국이 됐다.

그녀의 굿판은 대선인지 한풀인 지 조차 모르고 방방 뛰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인혁당사건 때문에 대선레이스에서 레드카드를 받으며 아웃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직도 기회가 있다고 말하지 말기 바란다. 사형선고 20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민주인사 유가족들에게 그저 입으로만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풀이 굿판을 접고 고향땅으로 발길을 돌리라. 그게 현명한 처신이자 범국민적으로 신뢰를 받고 있는 차기 대통령 후보에게 아름다운 길을 내 주는 일이다. 처녀보살은 '지는 해'라는 거 한시라도 잊지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꿈꾸는 그곳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세대 초월, 가을 밤하늘 수놓은 '윤민석 대합창'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세대 초월, 가을 밤하늘 수놓은 '윤민석 대합창'

[자발적 콘서트] 전대협 - 한총련 - 탄핵 - 촛불 세대 한자리 모였다

12.09.15 23:12l최종 업데이트 12.09.16 01:04l
강민수(cominsoo)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참가자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한채, 작곡가 윤민석씨가 작곡한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이날 음악회는 민중가요 작곡가 윤민석씨가 최근 아내 양윤경씨의 암투병 치료비 부족을 호소하자, 시민들이 그를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기획·공연 되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참가자들이 작곡가 윤민석씨 부인 양윤경씨의 빠른 쾌유를 빌며 휴대폰 불빛을 밝힌채, 윤씨가 작곡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정혜신 박사가 최근 윤민석씨가 작곡한 '이또한 지나가리라'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한동준씨가 '너를 사랑해'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류금신씨가 윤민석씨의 '오 통일이여'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 윤민석씨가 작곡한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한총련세대 100인 합창단이 윤민석씨가 작곡한 '날아라 한총련'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문진오씨가 윤민석씨의 '광주여 무등산이여'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김조광수 영화감독이 한총련세대 100인 합창단과 함께 윤민석씨가 작곡한 '전대협진군가'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서기상씨가 윤민석씨의 '강'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지난 25년 동안 윤민석이 보여준 치열한 삶과 그의 노래 때문에 우리는 거리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뛰어난 정치가 몇명보다도 윤민석 한 사람이 더 소중할 수 있습니다."

작곡가 윤민석이 있어 그들은 행복했다. 80년대 전대협 세대든, 90년대 한총련 세대든, <너흰 아니야>를 불렀던 2004년 탄핵 세대든, <헌법 제1조>를 불렀던 2008년 촛불 세대든, 윤민석은 쉬지 않고 그들 곁을 지켰다. 때문에 그와 그의 노래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윤씨에게 빚진 그들이, 윤씨를 위해 콘서트를 열었다. 윤씨의 팬 1000여 명은 15일 늦은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 모였다. 20대에서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의 노래가 가진 폭넓은 대중성이 느껴지는 자리였다.

사회를 맡은 방송인 권해효씨와 최광기 토크컨설팅 대표는 유쾌한 입담으로 청중을 즐겁게 했다. 노동자 노래단이 나와 <서울에서 평양까지>를 부르자 최광기씨는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데 가요무대 보는 것 같았다"며 "박수치는 여러분도 한 템포씩 늦는 것도 똑같다, 모두가 늙어간다"며 웃음을 자아냈다. 권해효씨도 "여러분이 과도한 팔뚝질로 통증을 호소할 줄 알았다"며 "좋은 가을 밤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놓쳤던 귀한 것들을 위해서 마음을 모아달라"고 말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상담하고 있는 정혜신 정신과 의사도 무대에 올랐다. 그는 "오늘 여기 모이신 분들의 좋은 기운이 암 투병중인 (윤씨의 부인) 양윤경씨에게 전달될 것"이라며 "여러분 모두는 치유자"라고 말했고, 이에 청중들은 환호성으로 답했다.

점점 콘서트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사회자 최씨가 "준비되셨습니까?" 물었다. 이어 "윤민석과 함께,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우리가 희망이다"고 외치자, 청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파도타기를 연출했다. 예전에는 라이타 불빛을 번쩍였지만, 지금은 핸드폰 불빛을 흔들었다. 어어 나온 <서울에서 평양까지>에 맞춰 모두들 어깨를 들썩였다.

3시간 가까이 이어진 콘서트에서는 윤씨의 노래 10여 곡이 가을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영화감독 김조광수씨가 <전대협진군가>를, 정혜신 박사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손병휘씨가 <사랑하는 동지에게>, 우리나라가 <경의선타고>, <헌법 제1조>를 공연했다. 콘서트는 윤씨의 대표곡 <지금 우리가 만나서>와 <헌법 제1조>의 대합창으로 마무리됐다. 예정에 없던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깜짝 출연해 <소리없이 흰 눈은 내리고>를 부르기도 했다.

아내의 암 투병을 간호하고 있는 윤씨는 콘서트에 참석하지 못했다. 윤씨는 30년 가까이 민중가요에 전념했지만, 아내 양윤경씨의 계속된 투병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왔다. 결국 그는 '아내를 살리고 싶다'며 SNS을 통해 도움을 요청했고, 이 소식이 블로그와 SNS를 타고 퍼져 2주 만에 1억 5천여만 원이 모였다. 이날 콘서트도 자발적으로 기획·공연됐다.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참가자들이 작곡가 윤민석씨가 작곡한 '경의선 타고' 노래에 맞춰 기차놀이를 하고 있다. 이날 음악회는 민중가요 작곡가 윤민석씨가 최근 아내 양윤경씨의 암투병 치료비 부족을 호소하자, 시민들이 그를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기획·공연 되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문성근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참가자들이 작곡가 윤민석씨가 작곡한 '경의선 타고' 노래에 맞춰 기차놀이를 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임수경 민주통합당 의원과 명진 스님, 문정현 신부 등 참가자들이 작곡가 윤민석씨 부인 양윤경씨의 빠른 쾌유를 빌며 파도타기 응원을 펼쳐보이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출연해 윤민석씨 부인의 쾌유를 기원하며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원창연 연극배우가 윤민석씨의 '그이가 동지라네'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민족춤패인 출이 윤민석씨가 작곡한 '전사의 맹세' 노래에 맞춰 멋진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김현성씨가 '이등병의 편지'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조국과 청춘이 윤민석씨가 작곡한 '통일이 되면' 노래를 열창하며 멋진 공연을 펼치고 있다.(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신동호 시인이 윤민석씨 부인의 쾌유를 빌며 시낭송을 하고 있다.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일부 참가자들이 무대공연을 더 잘 지켜보기 위해 담장에 올라 연호하고 있다. 노래마을의 이정열, 손병휘, 한경탁, 정은주가 '그대 고운 내사랑'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한 학생이 작곡가 윤민석씨를 응원하며 적은 편지를 모금함에 넣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윤민석 음악회-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에서 참가자들이 작곡가 윤민석씨를 격려하며 후원금을 모금함에 넣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선에서 민주화세력이 산업화세력과 사활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이유

 

민주주의를 위하여
<기고> 대선에서 민주화세력이 산업화세력과 사활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이유
 
 
2012년 09월 14일 (금) 17:22:06 한상권 tongil@tongilnews.com
 

한상권(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 전국언론노동조합, 참여연대 등이 2010년 5월 서울광장에서 ‘표현의 자유수호 문화제’를 열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올해는 6월민주항쟁 25주년이면서 10월유신이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게다가 총선과 대선 등 두 차례 선거가 있어, 6월민주항쟁의 이념을 계승하는 민주화세력이 10월유신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산업화세력과 한판 승부를 겨루어야만 하는 운명의 해이기도 하다. 오는 12월 19일에 있을 18대 대통령선거는 우리사회가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사회적 경제적 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을지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에 의해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동력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에서 민주진보세력이 패배할 경우, 이후 민주화의 확장에 타격을 입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자신의 선택에 따라 민주주의가 진전 또는 퇴행할 것이며, 또한 그에 따라 삶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2012년은 역사적으로 참으로 중요한 해이다.

1.
 

 

   
▲ 마스크를 쓰고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른바 ‘신지호법’을 반대하는 네티즌들이 2008년 12월 신지호(한나라당, 도봉갑) 의원 사무실 앞에 모여 마스크를 쓴 채 침묵시위를 벌였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해방 이후 반세기 가량 지속되어 온 권위주의체제가 종식되었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대한 전 국민적 저항이었던 6월항쟁은 멀리는 갑오농민전쟁과 3.1독립운동 그리고 4.19혁명, 가깝게는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한 부마항쟁과 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한 광주민중항쟁 등 우리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반봉건·반외세·반독재 저항정신을 계승한 역사적인 민중항쟁이었다. 6월항쟁의 승리로 군부독재세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군부독재세력은 ‘산업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 언론에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독재는 잘못이지만 산업화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근대화의 공과론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해방 직후 친일파가 반공세력으로 변신하여 살아남는데 성공했던 것처럼, 군부독재세력 역시 산업화세력으로 탈바꿈함으로써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이후 이들은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이라는 프레임을 구사하면서 반독재, 반독점 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 무력화시켜왔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 Lakoff)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프레임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레이코프의 프레임이론에 따르면, 전략적으로 짜인 틀(frame)을 제시해 대중의 사고 틀을 먼저 규정하는 쪽이 정치적으로 승리하며, 이를 반박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프레임을 강화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화 대 민주화 프레임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뉴라이트세력이 이후 등장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60년사를 '건국의 시대'(1948~1960), '산업화의 시대'(1961~1987), '민주화의 시대'(1988~2007)로 구분하고 2008년 이후를 '선진화의 시대'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건국의 시기에 이승만 정부, 산업화의 시기에 박정희 정부, 민주화의 시기에 노태우 정부, 선진화의 시기에 이명박 정부를 각각 자리매김하였다.

뉴라이트는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의 4단계 발전론에 입각하여, 산업화세력이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산업화가 되었기에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1987년 6월민주항쟁에 대거 참여하면서 민주주의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선 산업화, 후 민주주의’ 도식으로, 이에 따르면 노동자나 농민 등 민주화운동세력이 아닌 독재자나 재벌이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제시한 단계적 발전론은 허구에 불과하다. 민주화와 산업화는 선후관계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선 성장, 후 민주화’ 담론은 비현실적 논리이며 비상식적 도식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사실상 민주화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성장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양자의 병행 발전은 사회적 비용을 덜 들일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민주화를 통해 사회구성원의 동의와 자발성을 촉진하는 사회 환경이 조성되면 노동생산성이 높아지고 사회적 비용이 감소한다. 경제발전이라고 할 때 외형적인 경제성장의 속도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지속가능성, 내적 토대의 안정성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민주화의 뒷받침이 중요하다. 민주주의 없는 경제발전은 정치, 사회적으로도 문제이지만, 경제적으로도 문제를 야기한다. 왜곡된 분배구조는 궁극적으로 경제발전을 저해하며, 그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이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역사적 상식이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분리해서 보는 뉴라이트 입장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산업화가 되어야 민주화가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면, 산업화를 일구었다고 주장하는 박정희 독재정치 하에서 자행된 각종 불법적인 압수, 수색, 구금, 연금, 고문 등의 인권탄압과 초법적인 납치, 테러, 암살 등 야만적인 폭력들이 모두 민주화를 위해 불가피했던 것으로 합리화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시기에 자신들의 생존권 확보, 또는 경제민주화나 사회변혁을 위해 희생한 노동자 농민들 투쟁의 역사는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뉴라이트는 산업화 시기 이른바 민주화운동으로 자처한 좌익 세력들의 발호가 산업화의 걸림돌이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은 경제상 비용손실만 초래하여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식민지시기 항일독립운동이 근대문명화의 길로 발전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2.
 

 

   
▲ 2008년 10월 국가보안보안법으로 구속된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최한욱 집행위원장의 부인(왼쪽)이 상복 차림에 쇠사슬을 온몸에 두르고 아이와 함께 행진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2월 취임사에서 지난 10년 '이념의 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실용의 시대'로 나가겠다고 선언하였다. 건국 60년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기반으로 ‘선진화’를 이루어야 하며, 이제는 투쟁의 시대를 끝내고 동반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대통령이 말하는 이념의 시대=투쟁의 시대 10년이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집권기를 가리킨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립한 공로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파악하는 대통령의 역사인식은 뉴라이트의 4단계 발전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명박정부와 뉴라이트는 역사인식 면에서 일란성쌍생이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에서 잘 드러난다. 2011년 8월 9일 교과부가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사회과 교육과정”을 고시하면서, 개발 연구진도 모르게 ‘민주주의’란 용어를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하였다.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교과부는 “일부 심의위원들과 역사학회 전문가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교과부가 말한 ‘역사학회’는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대거 포진한 ‘한국현대사학회’였다. 이에 대해 교육과정 개발을 담당한 ‘역사 교육과정 개발정책 연구위원회’ 위원들은 성명을 내고,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 충분한 개념이며 가능하면 그에 대한 제한이나 수식을 피하는 것”이 좋으며, “현행 교육과정에서도 초⋅중⋅고교 한국사의 단원명과 성취기준에 모두 ‘자유민주주의’ 아닌 ‘민주주의’를 그 내용으로 삼고”있으므로, “시민 사회와 학계의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지금까지 헌법정신에 따라 수행되어 온 역사 교육의 핵심 개념을 변경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교과부는 작년 12월 30일 ‘고등학교 한국사 집필기준’을 확정 발표하면서, “자유민주주의,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 독재 관련 표현 등은 중학교 집필기준과 동일한 원칙에 따라 서술하였다”라고 밝혀, 8월 9일 발표한 중학교 역사교육과정과 11월 8일 발표한 중학교 역사 집필기준에 대해 역사학계가 시정을 촉구한 내용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결국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명시할 것”이라는 뉴라이트 계열의 한국현대사학회의 건의를 교과부가 전격적으로 수용 고시하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2차 세계대전 후 냉전 상황에서 미국 중심의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체제수호의 이념으로 널리 사용되고 전파되었다.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주요 내용은 보통선거제도, 정당제도, 대의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국가권력의 제한, 개인주의, 다원주의, 시장주의, 재산권의 강조 등이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존중하고, 다원성과 다양성의 존중을 기본으로 하는 리버럴 데모크라시(liberal democracy)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민주주의에 담긴 개혁성과 혁명성을 탈각시키기 위해 민주주의에 ‘자유’를 덧씌워 민주주의를 옥죌 뿐이었다. 뉴라이트는 자유를 반공으로, 민주주의를 반공주의와 동일어로 오용하여, 자유민주주의를 ‘냉전반공주의’와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그 증거로 뉴라이트 자신들이 쓴 글에서 “이승만의 정치이념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였다.”라고 주장하여,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짓밟으면서 12년간 장기 집권한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미화하였다. 다 아다 시피 이승만은 독재정치와 부정선거로 일관하다가 4.19혁명을 통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4.19혁명 당시 구호는 “민주주의를 사수하자!”였으며, 이승만 독재정권을 물리친 4.19혁명은 한국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발적으로 전취한 자유민주주의혁명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전혀 자유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이승만을 뉴라이트가 자유민주주의자라고 하는 추켜세우는 까닭은, “자유민주주의에 철저했던 만큼,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라는데 있다. 이처럼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뉴라이트에게 있어, 자유민주주의는 반북·멸공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단지 반공주의가 갖는 부정적이고 진부한 뉘앙스를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긍정적 뉘앙스로 대체해보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뉴라이트는 자유민주주의를 냉전반공주의로 치환하면서 고유의 성역을 만들었다. 이들은 반북주의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찬양하고 독재정권을 미화한다. 그리고 의회정치를 부정한 이승만의 독재, 초헌법적인 박정희의 유신쿠데타가 북한공산집단으로부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변호한다. 자유민주주의는 반북과 멸공을 통한 수호의 대상이지, 결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할 민주주의로 간주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더 민주화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가자는 주장을 하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체제부정론, 혹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친북용공론으로 몰아가 탄압하였다.

뉴라이트의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주의를 기본 동력으로 하며 억압과 배제를 기본 속성으로 하는 전투적 민주주의다. 체제수호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사고는 물론 역사의 진실까지도 지배한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인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고, 지배체제에 무조건 복종하기를 요구한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며, 적과는 사생결단의 한바탕 싸움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저러한 적대범주를 제멋대로 설정한 다음, 누구든지 이 범주에 든다고 추정되면 설사 헌법의 틀 안에서 합법적으로 행동하더라도 관용의 손길을 거둔다.

3.
 

 

   
▲ 2009년 5월 광주 전남대학교에서 금남로까지 범민련은 제 시민사회단체와 대학생들과 함께 민주주의 등을 요구하며 '5.18 자주통일대행진'을 진행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뉴라이트의 주장과는 달리, 대한민국이 제헌헌법을 통해 표방한 민주주의는 단순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아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한국적 현실을 반영한 역사성이 있는 민주주의인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제하의 민족운동이나 해방 이후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꾸준히 발전되고 숙성되어온 역사적 실체로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 전통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민주공화국 수립을 향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해해야 한다.

오랜 역사 동안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적 담론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이념은 공화주의와 균등 즉 평등주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원 선거를 한데 이어 전문 10조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심의·통과시켰다. 임시헌장은 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하여, 왕정복고를 거부하고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은 이후 여러 차례(1925, 1927, 1940, 1943, 1944) 개정되었지만,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원칙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은 1948년 제헌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2조)라 하여, 민주공화국 및 인민주권을 선포하는 데로 이어졌다. 이처럼 식민통치기에 인민주권과 민주공화국에 대한 합의, 즉 군주주권과 왕정복고에로의 반동적인 흐름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사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3․1운동을 분수령으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가시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로 정의, 인도, 자유, 평등 등이 시대이념으로 등장하였다. 한용운이 조선독립의 이유로 “자유는 만유(萬有)의 생명”이라고 천명했던 것도 이런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다른 하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모든 사회세력들이 자신을 자각하고 자아실현이라는 공동 이상을 표출하였기 때문이다. 민중은 민족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 노동자는 계급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 여성은 성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을 분출하였다. 그리고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노동자는 계급적 자각을 통해 노동권 생존권 확보를, 민중은 민족적 자각을 통해 국권회복을, 여성은 성적 자각을 통해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3․1운동을 직접 체험하였던 청년 김산은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를 쟁취하였다”라고 시대분위기를 전하였다. 이처럼 개인이 자신의 인격을 자각하고 자유와 평등이 시대정신이 된 사회분위기 하에서 왕정복고사상은 발붙이기 힘들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은 민주공화국을 선포한데 이어, 3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이라 하여, 새로 건국할 민족국가의 기본 방향이 평등사회 건설에 있음을 선언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공화주의의 전통을 이어 균등, 평등, 재산의 공공성을 강조하였으며, 인민의 기본권을 자유보다는 ‘균등의 원칙’에 두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통해 균등한 사회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등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보존되어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과 관련된 사회경제적 권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민주주의이다. 임시정부의 정강과 헌법의 이념을 제공한 조소앙(1887-1958)에 따르면 우리는 고래로 이러한 이념과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국가 건설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 전통은 유학과 실학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이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강자를 존중하고 약자 보호를 거부하는 제국주의 원리는 분명 자본주의와 통하는 것이었다. 이에 맞서는 독립운동의 정신은 일본인의 침탈에서 조선인을 해방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강자의 침해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는 방향을 중시하고 있었다. 1930년 이후 중국 관내(關內)에서 활동하던 주요 독립운동단체 간에 이념적 차이는 없었으며, 그 이념을 건국강령(建國綱領)이 대변하였다. 건국강령에서 밝힌 삼균주의(三均主義)가 평등사회 구현을 위해 제시된 구체적 실천방안이었다.

건국강령은 대일 선전포고를 앞둔 시점에서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합의한 미래사회의 준칙이었다.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와 평등을 기본원리로 하여 작성된 건국강령은 정치적 평등[均權], 경제적 평등[均富]과 함께 교육의 균등[均智]을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3대 기본권리로 간주하였다. 정치적 평등이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즉 국민주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에 가까운 개념인 반면, 경제적 평등과 교육의 균등은 평등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건국강령은 중소기업만 사영으로 하고, 토지혁명을 통해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제도로 환원하고, 대생산기관‧대기업을 국유화 하며, 광산‧어업‧농림 등 자원성(資源性) 기업과 운수산업‧은행‧전신‧교통 등 국가기간 시설을 국유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토지의 국유와 대기업의 국유화 방침이 가능했던 것은 좌우파의 구별 없이 독립운동의 공통이념으로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1948년에 제정된 제헌헌법의 기초위원이던 유진오박사가 헌법을 기초할 때 참고한 10가지 문서 가운데 임시정부의 건국강령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이 제헌헌법에 직접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뉴라이트처럼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배타적으로 사용하여 개항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민주주의 운동의 역사를 파악할 경우, 우리나라 근·현대 민주주의운동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역사를 제대로 포괄할 수 없다.

4.
 

 

   
▲ '민주주의 사수' 바람은 정치권에도 강하게 불었다. 2010년 2월 서울역에서 진행된 ‘이명박 정권 규탄대회’ [통일뉴스 자료사진]

 

해방 공간에서 민주주의는 민족주의와 대칭되는 진보적인 구호였으며, 그 내용은 미국식 형식적·정치적 민주주의와는 다른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였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것은 바로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일찍이 독립운동세력이 끈질기게 추구해 왔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이었다.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의 국제(國制)가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체제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박사는 대한민국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함께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입국의 기본으로 채택하였다”고 하였다. 자유방임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대한민국의 근본이념으로 채택했다는 것이다.

제헌헌법은 형식적·정치적 민주주의가 경제적 약자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보고, 실질적·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채택하였다. 헌법이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사회적 약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였다. 대한민국은 출범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해 사회복지국가를 지향한 것이다. 정부수립 당시 ‘경제적 민주주의의 수립’은 ‘우리나라 헌법의 가장 큰 특징’으로 불렸는바, 제헌헌법은 전문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고 천명, 근본적인 헌법정신부터 균등경제를 추구하였다.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박사는 우리 헌법의 기본이념이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라고 하였다.

제헌헌법이 수용한 사회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을 국가권력의 책임으로 규정하고,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 보장과 자유·평등·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사회적 정의, 사회적 안전, 사회의 통합을 이념적 지향으로 삼는다. 사회적 정의란 법적 평등을 기회의 균등을 통하여 보충하여 시민들이 기본적으로 보장된 자유를 현실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사회적 안전이란 개인의 능력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개인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전제들 즉 사회보험, 노동력 보호, 가정의 보호 등을 창출 또는 확보해주는 것이다. 사회의 통합이란 사회 경제적으로 필요한 자들을 보호하고 지나친 사회적 차이를 균형화 시켜 사회를 통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제헌헌법에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 확립, 사회적 약자의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 사회적 강자의 재산권의 자유제한 등이 수용되어 있다.

사회주의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시장경제체제를 이식하려는 미군정의 점령정책에 맞서, 대한민국은 사회(통합)국가의 원리를 채택하였다. 사실상 북유럽 복지국가-사회적 시장경제-사회민주주의의 모델을 반세기 전부터 이미 상세하게 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민주권주의와 3권 분립의 틀 속에서 사회권과 복지국가 개념을 폭넓게 부여한 바이마르헌법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그러나 제헌헌법은 바이마르헌법에 비해 국가의 역할이 훨씬 더 크고 평등주의 요소도 강하다. 중요산업 국유화 조항(87조)이나 노동자의 사기업이익 분배균점권 조항(18조) 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억압과 착취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우리 헌법의 경제 질서는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자유시장 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에 수반되는 갖가지 모순을 제거하고 사회복지·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적 규제와 조정을 용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 헌법은 자유시장 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 사회국가 원리를 수용하여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아울러 달성하려는 것을 근본이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판단하였다.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로 형성되는 것을 일차적으로 하나, 경제를 개인과 기업에만 맡겨둠으로써 발생하는 소득불균형, 경제력 남용, 경제주체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가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하여 경제에 관한 국가의 보충적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시장은 ‘자유주의 시장’이 아니라 ‘조정된 시장’으로서 ‘사회민주주의 시장’이라는 것이다.

5.
 

 

   
▲ 민주개혁진영의 대통합을 최종 목표로 한 ‘민주통합시민행동’이 2009년 9월 창립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이명박정부 들어 친일·독재세력을 산업화세력으로 미화하고, 민주주의를 냉전반공주의로 축소·왜곡하는 그릇된 역사인식이 우리 사회에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일본 극우세력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뉴라이트가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조중동 등 수구·냉전 언론과 어용관변 단체가 그 논리를 확산시키며, 교과서 집필기준 개정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정부가 나서서 정책적으로 지원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일은 보수 세력의 여망을 안고 대권 주자의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의 역사인식 역시 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퇴영적이라는 점이다.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한 일에 대해서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던 반면, 일본 우익의 사관을 방불케 한다는 평을 받은 뉴라이트 ‘대안교과서’에 대해서는 출판기념회 참석해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걱정을 덜었다”라는 축사를 하였다(2008.5.26.). 그는 최근 대선주자 초청토론회에서 "5·16이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초석을 만들었다고 본다.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2007년 대권 도전 때에도 5·16군사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며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을 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어, 이승만 독재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였다. 이로 볼 때, 독재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짓밟은 5.16이 “구국의 혁명”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군사쿠데타를 찬양하는 행위는 헌법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범죄인 것이다. 또한 역사교과서에서도 5·16을 군사혁명으로 기재한 것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등 군사독재 시절에 국한됐을 뿐, 김영삼 정권 이후부터는 모두 쿠데타(군사정변)로 기록하고 있어 5.16에 대한 역사적 판단은 이미 오래전에 내려졌다.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을 위해 노력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다. 헌법정신에 따라 국가를 이끌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는 다짐이다. 이는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 공동체가 합의한 최고의 가치규범인 헌법을 수호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민주적인 헌정질서를 물리력을 동원하여 뒤엎은 5.16군사쿠데타를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며 헌법유린을 정당화하는 박 후보가 과연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후보는 8월 20일 새누리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직후 후보수락연설에서 “국민대통합의 시대”를 열어가겠다고 선언한데 이어, 다음날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에 참배하고, 그 다음날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5.18국립묘지, 전태일 재단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이에 대해 박 후보 캠프측은 ‘분열된 대한민국’, ‘일부를 위한 대한민국’이 아니라 ‘100% 대한민국’, ‘하나 된 대한민국’을 위해 다양한 계층을 포용하고 함께 손을 잡기 위한 노력이라고 하였다. 조중동 등 수구언론 역시 국민대통합을 위한 광폭행보라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친일분단세력과 군부독재세력 등 수구·냉전세력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박근혜 후보의 민주화세력 방문은 프레임 경쟁에서 자신의 약점인 민주주의를 선점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제스처일 뿐이다. 산업화는 이미 선점했으니 이번 기회에 민주화세력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 대통령이 된다면, 모든 억압, 착취, 배제, 차별 등에 대해 저항해온 민주주의의 자랑스러운 전통까지 장악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항일독립운동이 추구했던 공화주의와 평등주의의 정신은 사라지고 약육강식의 자유방임주의가 판을 칠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제헌헌법이 수용했던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로의 확장은커녕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냉전반공주의로 축소·왜곡될 것이다. 참으로 민주주의의 절체절명의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채 100일도 안남은 대선국면에서 민주화세력이 이른바 산업화세력과 사활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원고는 9월 말 발간예정인 <역사교육> 가을 호와 함께 실립니다.

 
한상권의 다른기사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문선명에 주역 가르친 한양원 도인

문선명에 주역 가르친 한양원 도인

 
조현 2012. 09. 13
조회수 278추천수 0
 

 

한양원 회장-.jpg

 

 

 

청학동’을 통해 널리 알려진 ‘갱정유도회’ 소속인 민족종교협의회 한양원(88) 회장은 문선명 총재에게 직접 주역을 가르쳤다고 한다. 주역은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아 동양학문의 왕도로 일컬어진다.

 

 한 회장은 1957년 갱정유도회 선배 두 사람과 함께 서울 왕십리 판자촌교회에서 6개월 동안 문선명 총재에게 주역을 가르쳤다. 한 회장은 “그곳에서 밥해주고 빨래까지 해주며 가르침을 청했는데, 문 총재는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으며, 양은 어디서부터 왔고, 음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지독하게 묻고 배웠다”고 회고했다.

 

 한 회장은 그러나 한 사건을 계기로 문 총재와 거리를 두게 됐다고 한다. 한 회장은 “당시 경성제대 출신으로 문 총재와 함께 주역 강의를 들은 유효원(1914~70·초대 기독교통일신령협회장)씨가 통일교 원리를 주도적으로 만들었다는데, 얼마 뒤 서울 경운동 천도교총본부 옆 시천주교당을 지나던 중 통일교 원리강론을 한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어서 들어가봤더니 우리에게 배운 것이 모두 통일교원리로 둔갑해 있어서 선배들이 ‘주역을 배웠으면 주역으로 가르쳐야지, 엉뚱한 것으로 둔갑시킨 지식 도둑 아니냐’면서 현장에서 지팡이로 강사를 두들겨 팼다”고 전했다.

 

갱정유도회의 도정(최고 정신지도자)인 한 회장은 흩어진 15개 민족종교들을 하나로 모아 민족종교협의회를 출범시켜 20년 넘게 이끌어오고 있다.

 

한복과 갓을 벗지 않아 걸어다니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그는 구순을 한 해 남겨둔 나이에도 매일 민족종교협의회 사무실에 나와 노익장을 과시하며 ‘겨레얼 살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편 그는 통일교쪽에서 연락이 와 조문을 부탁해 "죽은 사람에게까지 척을 질 필요는 없어 9일 빈소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민주당 의원들, "통일부에 평화와 통일 맡길 수 없다"

 

민주당 의원들, "통일부에 평화와 통일 맡길 수 없다"
 
 
 
2012년 09월 13일 (목) 14:47:41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인재근, 우상호, 홍익표(왼쪽부터) 의원이 13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북 수해지원이 무산된데 대해 성명을 발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정부는 북한의 의사와 무관한 일방적인 생색내기용 수해지원을 추진했다.”

민주통합당 우상호, 인재근, 홍익표 의원은 13일 오후 2시 10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날 북한이 우리 정부의 대북 수해지원을 거부한데 대해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수해지원에 대한 북한의 거부의사 표명은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무능력한 정부인지 스스로 재입증 한 것”이라며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고 비판했다. “작년의 사례를 비추어 볼 때 북한의 수해지원 거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이것은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진정성이 없으며, 동시에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능력도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며 “수해지원을 통해 남북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졌으며,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이명박 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나아가 “통일부는 수해지원에 대한 북한의 거부의사 표명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수의 고위공무원을 포함하여 통일부 직원들이 동원된 관제행사인 ‘통일항아리 국토대장정’을 바로 오늘 시작했다”며 “북한이 붕괴될 때를 대비해 기금을 쌓아두겠다는 통일부의 ‘통일항아리’ 정책이 현재 정부가 사활을 걸고 있는 유일한 통일정책 아니냐”고 따졌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무기력, 무책임으로 일관한 통일부에게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며 “이번 대북수해지원을 사실상 무산시킨 것이 이명박과 청와대라는 점에서 역사는 지난 5년 동안 남북관계를 후퇴시키고 한반도의 미래를 능동적으로 열지 못한 현 정부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우상호 최고위원은 “이번에 똑같은 방식을 반복한 것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했고, 그래서 그만큼 무능했고, 아니면 의도적으로 방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며 “이번 남측 당국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고 참으로 경솔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상호 의원은 “수해 피해 특성상 피해가 발생한 즉시에는 마른 옷가지, 긴급 식량이 필요하지만 피해가 발생한지 오래된 지금 같은 상황에는 오히려 복구와 관련된 지원이나 당장 북쪽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들이 인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익표 의원은 “이번 수해지원 과정에서 양측의 전통문이 북측이 2번, 우리가 2번 왔다갔다 했는데 이 과정을 통일부가 소상히 밝힐 필요가 있다”며 “이번 사태는 통일부가 차라리 제기 안 한만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마치 남북관계에서 형식적으로 통일부가 ‘이렇게 했다’ 생색내기용 대북수해지원 제안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떨굴 수 없다”며 “지난 수년간 지속된 현 정부의 진정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의구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리비아 주재 미국대사는 왜 살해됐나?

 

리비아 주재 미국대사는 왜 살해됐나?
 
‘무슬림들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은 대체 어떤 영화인가
 
임병도 | 2012-09-13 07:35:5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9월11일 밤(현지시각)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 3명이 리비아 동부 뱅가지 시에서 로켓 공격에 사망했습니다. 당시 미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은 벵가지 내 미 영사관 단지가 리비아 시위대의 공격을 받자 급하게 벵가지 소재 미 영사관을 떠나 더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하던 중에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국 대사가 공격을 받기 전부터 미 영사관 단지는 수백 명의 시위자들이 몰려와 미국 국기를 찢고 불태우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 시위대가 미국 국기를 찢으며 담을 넘는 장면 출처:로이터 통신

 

시위대는 미국 영사관 단지의 담장을 넘거나 주변을 돌며, 미국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의 규모는 대략 2,000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집트 카이로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가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급격히 늘어났고, 시위 또한 격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 무장시위대가 총을 들고 리비아 주재 미 영사관 단지를 공격하는 장면. 출처:로이터 통신

저녁이 되면서 무장 시위대가 합류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총을 쏘면서 벵가지 소재 미 영사관을 공격했습니다. 이 총격으로 직원 1명이 살해됐으며,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 대사가 세이프티 공간으로 이동을 시작했고, 미국 대사가 탄 차량이 무장시위대의 RPG(휴대용 로켓포)공격을 받았습니다. 차에 타고 있던 미국 대사와 경호원들은 로켓 공격으로 전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로이터 통신의 동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을 보면 총성이 계속 들리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미 영사관 단지를 둘러쌓고 시위를 벌이며 직접적인 사격을 가했으며 시위대에 의해 미 영사관 단지는 온통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원래 리비아 미 영사관 단지에는 리비아인 경비원들이 있었지만, 계속되는 시위대의 집중사격과 방화에 모두들 철수했고, 시위대는 단지 내로 수제폭탄을 투척하는 등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무슬림들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이라는 영화가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슈퍼 경찰이라고 불리는 세계 최대 강국의 미국 대사가 피살되는 사태가 벌어진 배경은 단 한 편의 영화가 발단이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부동산 업자였던 이스라엘계 미국인 샘 바실은 100명의 유대인이 500만 달러를 기부해 '무슬림들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이라는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그는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슬람은 암덩어리"라고 비난했는데, 그의 말처럼 이 영화는 온통 이슬람인들의 폭력성을 보여주거나, 무하마드를 동성애자이자 탐욕스럽고 피에 굶주린 불량배로 묘사했습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영화의 트레일러 영상을 보면, 이집트인이지만 기독교를 믿는 가정을 약탈하는 이슬람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방화와 약탈을 수수방관하는 현지경찰과, 방화를 주도하는 이슬람 지도자도 등장합니다.

이슬람의 예언자로 추앙받는 무하마드를 아동 학대,혼외정사 옹호자,폭군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무하마드를 형상화하는 것조차 금지하는 이슬람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목숨과 같은 신앙심을 짓밟고 훼손한 엄청난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트레일러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가자마자 이슬람인들은 분노했고, 이집트 TV에서 뉴스로 다루면서, 이집트를 비롯한 이슬람권에서는 미국과 제작에 참여했던 유대인들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 카이로를 시작으로 이슬람인들은 거리로 나왔고, 이들을 미국 국기를 찢고 태우며 미국 영사관을 향해 시위를 벌였고, 결국 미국 대사 사망이라는 참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코란을 불태웠던 테리 존슨 목사'

사실 이 영화는 제작됐다고 그리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언론과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한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테리 존슨 목사입니다.

 

▲ 테리 존슨 목사의 코란방화 장면. 출처:유스트림

 

테리 존슨 목사는 도브 세계 회관이라는 단체를 운영하는 인물입니다. 50명 정도의 신도를 거느린 존슨 목사가 주목받은 것은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이슬람은 악 (Islam is of the Devil)'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부터입니다.

9.11 테러가 일어나면서 이슬람에 대한 미국인들의 정서가 반감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그리 극단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불태우자, 많은 이슬람인들 분노했고, 언론은 이를 자극적으로 보도했습니다.


9.11 테러 추모일은 물론이고 이란에서 기독교 목사가 투옥하는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존슨 목사는 코란과 무하마드 초상을 불태웠는데, 이런 테리 존슨 목사가 또다시 주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 9.11 테러가 일어난 무역센터와 이슬람 센터가 건립되는 지역 출처:mcclatchydc.com

 

현재 미국에서는 '그라운드 제로'라고 불리는 9.11테러가 발생한 세계무역센터로부터 2킬로 떨어진 곳에 이슬람문화센터가 건립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슬람인들이 저지른 9.11 테러 때문에 수백 명이 사망했는데, 그 아픔의 현장에서 불과 2킬로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이슬람 문화 센터가 건립된다는 소식은 미국인들의 분노를 유발했고, 이를 테리 존슨 목사는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다시 많은 사람과 언론에 노출됐습니다.

테리 존슨 목사는 이슬람 문화 센터를 현재 그라운드 제로 근처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고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코란을 태우겠다고 경고했습니다. 또한, 존슨 목사는 '무슬림들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이라는 영화를 가리켜 " 이 영화는 무슬림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파괴적 이념을 알리기 위한 영화이며, 무하마드의 삶을 풍자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라는 말과 함께 적극 영화를 홍보했습니다.

'정치와 언론, 그리고 종교'

필자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단순히 이슬람인들이 모두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는 이분적 사고방식을 조금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몇 가지 미국의 상황을 보면 스스로 느낄 수 있습니다.

○ 종교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나

우리가 볼 때에 목사가 코란을 불태우는 행위는 그저 보수우익이 북한 인공기를 불태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란은 명백히 이슬람교의 성스러운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타 종교에서 성경을 불태우는 행위를 기독교가 가만둘리가 없다는 맥락과 비슷합니다.

존슨 목사가 코란을 태우는 행위를 미국 헌법에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 수정 헌법 1조에는 표현과 신념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종교를 내세울 권리가 있다면 타 종교의 권리 또한 보장해줘야 하는 부분도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종교가 타 종교를 배척하고 억압하고 모욕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와 함께 타인을 침범하는 행위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 이라크 주둔 미군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 출처:미국 백악관

 

○ 모든 사건에는 정치가 개입되어 있다.

존슨 목사의 코란 방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미국 국방성 장관은 코란을 태우는 행위는 아프카니스탄을 비롯한 중동 지역에 주둔한 미군을 위태롭게 할 것이며, 이는 알카에다가 모이는 동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코란 방화를 중단하라고 요청했습니다.

미국 대선이 본격화되면서 롬니 공화당 후보는 이전부터 오바마 정부의 대이란 정책을 비난했었습니다.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가 피살되자 롬니는 "오바마 정부의 첫 반응이 미국 외교관을 향한 공격에 대한 비난이 아닌, 공격한 이들에 대한 동정이었다는 점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오바마를 공격했고, 백악관은 롬니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슈퍼경찰 행위가 언제나 영웅적인 면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행동은 군수산업,로비스트,정치인들이 모여 만든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정치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국제 정세가 변하고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도 놓치면 안 됩니다.

 


▲ 미국 폭스 뉴스가 보도한 뉴스 장면 출처:폭스 TV

 

○ 언론이 만드는 여론?, 그 불편한 진실

우리가 흔히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뜻밖에 보수주의가 만연한 국가 중의 하나입니다. 클린턴의 미국 국민 건강보험이 실행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이런 보수주의자들이 언론을 장악했던 점도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폭스TV는 한국의 조중동처럼 언론을 조작하고 왜곡하며 보수주의자들이 열광적으로 시청하는 대표적인 미국의 보수언론입니다.


정당을 지지하는 언론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언론의 본질에는 항상 팩트가 있어야 하지만, 그 팩트를 변질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여론을 조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는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 무슬림의 순진함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과 아프카니스탄 주둔 미군 병사의 모습

 

'무슬림의 순진함'이라는 영화에는 이슬람인이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는 이집트 기독교인을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는 십자가 목걸이를 건채로 죽은 여인의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줍니다. 이는 기독교인이라면 충격과 공포에 떨 수밖에 없는 화면입니다. 아프카니스탄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도 전사했지만, 아프카니스탄 주민들도 미군에 살해당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번 사건은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의 죽음을 아파하기에는 그 안에는 복잡한 배경이 얽혀져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생각하며 고민해야 합니다.

종교와 정치,언론은 항상 사람들의 나은 삶과 진실을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쟁과 아픔을 조장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그들의 추악함을 바꿀 수 있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한계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2/09/15 16:51
  • 수정일
    2012/09/15 16:5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국민은 배부르면 돼? 누굴 돼지로 아나

[정연주의 증언 86]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한계

12.09.13 15:28l최종 업데이트 12.09.13 21:03l
정연주(jung46)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지난 2월 21일 오전 서울 상암동 '박정희 기념·도서관'에서 열리는 개관식에 참석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국민은 배만 부르면 만족하는 돼지로 보이는 모양이다. 유신과 인혁당 관련자들 사법살인 등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 새누리당의 이한구 원내대표나 홍사덕 전 의원이 행한 발언을 들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오만과 독선이 참으로 대단하다.

이한구 "다들 배가 부른가 보다"

"그게 그렇게 관심이 큰 것인가. 다들 배가 부른가 보다."
- 이한구 원내대표 9월 11일 오찬간담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해 유신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와이셔츠와 가발을 만들고 쥐와 다람쥐까지 잡아 팔아서 1971년까지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지만, 100억 달러는 중화학공업 육성 없이는 불가능했다. 유신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 달러를 못 넘었을 것이다."
- 홍사덕 전 의원, 8월 29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배만 부르게 해주면 어떤 일도 용납될 수 있다는 투다. 그리고 이제는 배가 불러서 5.16 쿠데타니, 유신이니, 인혁당이니,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떠든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런 논리라면 북한의 세습 체제와 역사상 온갖 독재와 파시즘을 어찌 비판할 수 있을까. 국민들 배만 부르게 하면 무슨 정치체제든 별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으니.

그러면서 박정희 시대를 비판하면, 으레 과거에 매달려서 무얼 하자는 거냐고 묻는다.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의 노력을 그렇게 비판했고, 군부독재 시절의 가해자들이 그 시절의 피해자들에게 '과거는 모두 묻고 이제는 화해·대통합을 해야 한다'며 과거사 문제를 청산·극복하자는 주장을 분열과 증오, 한풀이로 보았다.

그런 생각이라면 일본에 대해서도 '과거사 문제'를 제기할 이유가 없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묻어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박근혜의 생각과 주변 인사들의 '종박적' 자세

박근혜 의원의 핵심 측근들 생각이 이 모양인 것은 그 중심에 있는 박근혜 의원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 자신이 이런 역사관과 인식의 수준을 그동안 일관되게 보여 왔기 때문이며, 그의 주변 인사들은 박정희 시대처럼 그렇게 박근혜 의원에 대해 추종적이기 때문이다. 친박(親朴)이 아니라 종박(從朴)이다. 그의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조아리는 사진들을 보면 지금의 수평시대의 인간관계가 아니라 왕조시대 군신 간의 알현처럼 보인다.

유신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박근혜 의원의 5.16 쿠데타와 유신, 인혁당 사법살인 등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떠한지 그의 발언을 한번 보자.

그가 5·16 쿠데타를 '구국의 결단'이라 말한 것은 1989년 5월에 이미 시작됐다. 1989년 5월 19일 밤, 그는 MBC TV의 '박경재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 박정희를 말한다'에 출연해 "5·16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했다. 이 방송이 나간 뒤 며칠 뒤인 5월 24일 <동아일보> '독자의 편지' 난에는 다음과 같은 독자편지가 실렸다. 이 편지를 쓴 이는 경북 안동에 사는 권인수씨였고, 독자 편지 내용을 보면 그는 박근혜씨와 대학 동창이다.

"5·16은 구국" 운운 어불성설
박근혜씨 TV 발언에 분노

지난 19일 밤 MBC TV 박근혜씨와의 대담을 보면서 분노를 금치 못했다. 나만이 아니라 많은 시청자들도 같은 뜻이었으리라. 착각은 자유라는 말은 있지만, 어쩌면 딸이 저렇게도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5·16이 구국이었다니 말이 되는가. 5·16은 군사쿠데타였고, 권력에 눈이 어두운 정치군인들이 합법적인 정부를 뒤엎고 만행을 부린 행위였음에도, 국민앞에 사죄는커녕,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었다니, 가난을 구제한 지도자라니, 하는 망언을 일삼는 박근혜씨의 언동은 참으로 뻔뻔스럽고 오만불손했다. 대학동창생으로 부끄럽게 여긴다."

박근혜의 일관된 생각 "5·16은 구국의 결단"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2월 21일 오전 개관한 서울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다. '5.16쿠데타'를 '5.16혁명'으로 미화한 전시장에 내걸린 사진을 향해 한 관람객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관련사진보기


박근혜 의원은 "5·16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말을 그 뒤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해왔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도 박근혜 후보는 "5·16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견해를 일관되게 밝혔다.

올 7월 16일 새누리당 경선 때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에서도 표현은 조금 달랐으나 5·16에 대한 평가에는 변함이 없었다. "5·16은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8월 8일 청주에서 열린 새누리당 대선주자 TV 토론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5·16을 옹호했다. 비박(非朴) 주자들이 박근혜 후보의 역사관을 비판하자 "과거에 사시네요"라며 비꼬았다. 그리고 5·16 쿠데타가 헌법 질서를 유린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나라 전체가 공산화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없어질 수 있어서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5·16은 쿠데타가 "아니다"라고까지 했다. 그러면서 "역사적 평가에 맡겨야 한다"는 기존 생각을 고수했다.

9월 10일, 박근혜 의원은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5·16 쿠데타, 유신체제,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다시 밝혔다.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 평가에 대해서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유신에 대해서도 "당시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까지 하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고 말함으로써, 유신까지도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완강한 자세를 보였다.

5·16과 유신에 대한 그의 일관된 완강한 태도는 딸로서 아버지 박정희를 절대 추종하면서 생긴 확신, 이로 인한 폐쇄적 독선, 거기에 우리 사회 수구기득권 세력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은 오만, 여기에 역사와 사건 내용에 대한 무지까지 모두 겹쳐진 것으로 보인다.

인혁당 사건에서 보인 치명적 무지와 독선

이렇게 완강한 태도를 보인 그는 인혁당 사건에서 치명적인 무지와 독선을 보였다. 최근 방송 출연 등에서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 대표적인 사법살인인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나.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도 여러 증언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발언에서 사건 자체뿐 아니라 사법체제에 대한 무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인혁당 사건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 있고, 민청학련 배후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몰아세운 '2차 인혁당 사건'이 있다. 박근혜 의원이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도 여러 증언을 하고 있다"고 한 말은 바로 '인혁당 1차 사건'을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군부독재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는 사건은 1차 사건이 아닌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8명에 대해 대법원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다. 당시 국제법학자협회가 사형집행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할 만큼 국제사회의 비판도 거셌다. 사형집행을 당한 8명은 혹독한 고문으로 신체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며, 그래서 사형집행 뒤 유족에게 시신이 바로 전달되지 않고 화장처리된 뒤 전해졌다.

유신 치하의 꼭두각시 사법부가 사형판결을 내렸던 인혁당 사건에 대해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는 유신정권 때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한마디로 가치 없는 모함"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의 인혁당 조작 발표가 있은 뒤 2005년 12월, 법원은 이 사건의 재심을 수용했고, 2007년 1월 서울지방법원은 이미 형이 집행된 피고인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박근혜 의원은 1975년 유신 때의 꼭두각시 법원에 의한 사형 판결과, 그것이 잘못되어 '무죄' 판결을 내린 2007년의 판결을 별개로 보고 있다. 앞의 판결이 잘못된 것이어서, 뒤의 재심에서 그것을 바로 잡았는데도, 별개의 판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법에 대한 무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게다가 그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말로 2007년의 무죄 판결을 수용할 수 없다는 완강한 독선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박근혜의 근원적 한계, 아버지 박정희

12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고 송상진씨 부인 김진생씨, 고 김용원씨 부인 유승옥씨, 고 우홍선씨 부인 강순희씨가 울부짖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박근혜 의원이 이처럼 인혁당 사건을 평가하자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은 울부짖으며 그들의 피맺힌 한과 고통을 이야기했다. 이들은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유족들은 "박근혜가 우리를 두 번 죽이고 있다"며 오열했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새누리당은 12일 대변인 공식 브리핑을 통해 박근혜 대선후보의 인혁당 평가 발언 논란에 대해 사과했다. 새누리당 홍일표 대변인은 이날 국회 정론관 브리핑에서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면서 "(박 후보의) 역사 관련 발언이 미흡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경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은 이날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원외당협위원장 워크숍 참석 후 홍일표 대변인의 브리핑 소식을 접하고 "홍 대변인과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고 했다. 박근혜 의원의 뜻을 전달한 이상일 대변인은 "홍 대변인의 개인 견해인지는 몰라도 박 후보와 전혀 얘기가 안 된 상태에서 나온 브리핑"이라면서 "(박근혜) 후보는 전혀 모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이날 밤 이상일 대변인은 "박 후보의 생각은 과거 수사기관 등 국가 공권력에 피해를 입은 분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은 끝내 '사과'는 하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사태 과정을 지켜보면, 박근혜 의원은 인혁당 사건에 대한 인식에는 변화가 없음이 거듭 확인된다. 그러기에 그가 인혁당 피해자들에 대해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를 전한다는 말에도 진정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참혹한 사법살인 사건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냉혹한 태도를 취하는 박근혜 의원의 모습에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보인 그 단기와 결기, 독선과 오만이 고스란히 겹쳐진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그냥 속담이 아니다. 뼛속까지 유신과 박정희의 디엔에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박근혜의 문제는 결코 연좌제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본질의 문제인 것이다.

[참고] <한겨레> 9월 10일자 정연주 칼럼 '종박의 추억 - 유신괴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에너지 위기 돌파할 서해유전협력

에너지 위기 돌파할 서해유전협력
(우리사회연구소 / 곽동기 / 2012-09-13)


대선을 앞두고 40년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항간에 “경제대통령”이라고 알려져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그러나 다음의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5.7%

놀랍게도 1980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다. 1979년 도매 물가상승률은 무려 20%, 1980년은 44%로 훌쩍 뛰어넘었다. 1979년까지 100만원에 들여오던 나일론이 1980년이 되자 144만원으로 폭등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박정희 정권 20년간, 미국만 쳐다보며 “차관”에만 매달린 나머지 제2차 석유파동이 오자 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피해를 받은 것이다.

한국. 기록적인 에너지 소비대국

박정희 시절, 경제를 미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지탱하다보니 원료와 에너지도 해외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고착된 기록적인 에너지 수입은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에너지 정치센터는 “정의로운 에너지 프로젝트” 최종보고서(2010)에서, 산업자원부의 2007년 자료를 근거로 에너지 해외의존도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표1> 에너지 해외의존도 및 석유수입 중동 의존도

 

 

* 출처: 산업자원부(2007)

총 수입 가운데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대에 15.6%로 다소 개선되는가 했지만, 2000년대 들어 다시금 25%를 훌쩍 뛰어넘었다. 한국은 에너지 소비가 세계 9위로, 2007년 반도체(391억달러)와 자동차(373억달러)의 수출액(764억달러)보다 에너지수입액(950억달러)이 더 많으며, 전체 수입액 3,568억달러의 26.6%가 석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이다. 특히 원유 수입은 세계 5위, 천연가스 수입은 세계 2위라고 언급하였다. 한국경제의 에너지 수입비중이 높은 것은 경제의 주력이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에너지 과소비업종이며 에너지효율도 대체로 낮기 때문이다.

정부는 에너지 해외개발을 대안으로 주장한다. 이명박 정부는 2011년, 아랍에미레트 유전개발계약을 선전하면서 2008년 4% 수준이던 우리의 석유·가스 자주개발률이 15%로 높아지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의로운 에너지 프로젝트” 최종보고서에 의하면, 에너지 자주개발률은 확보 가능성을 기준으로 한 “광의의 개념”과 국내에 도입한 물량을 기준으로 한 “협의의 개념”으로 나뉘는데, 정부는 광의의 개념을 사용한다고 한다. 쉽게 말해 해외에서 원유를 뽑아 한국에 가져오지 않고 다른 나라로 수출해도 “자주개발”에 포함되므로 거품이 낄 수 있다는 말이다. 통계수치도 국민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기업이익 중심인 것이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는 최근 비효율의 진원지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첫 ‘자원외교의 결실’이라고 선전한 “쿠르드 유전개발사업”은 경제성이 없어 투자비용 4400억 원은 고스란히 손실로 돌아왔다. 2012년 2월, 헤럴드경제는 이명박 정부가 자원외교 최대치적으로 홍보한 아랍에미리트(UAE) 10억 배럴 개발 양해각서(MOU)도 단지 ‘자격이 있는 한국기업들에게 참여 기회를 준다’는 정도의 수준인지라 MOU 체결 이후 1년여가 다 돼가지만 UAE와의 협상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다고 보도하였다.

에너지 전쟁이 가시화되는 마당에, 해외개발은 해법이 될 수 없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능성있는 해외유전은 이미 서구자본이 선점하고 있다. 이재승은 “한국 에너지 정책 패러다임의 고찰(2009)”에서 해외 에너지개발이 에너지 안보를 전적으로 담보해 줄 수 있는 대안인가 자문하면서 해외의 에너지개발이 의도하는 만큼 효과를 내는 데 많은 위험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대안은 1경 5000조원의 서해유전

그런 측면에서 북한 서해유전은 우리 정부가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에너지 자립의 활로를 열어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북한은 전국적으로 유전 매장지대가 많다. 이 가운데 북한 서한만 분지 일대는 북한 내 석유매장 가능 지역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북한 서해는 중국의 보하이 유전이 존재하는 보하이만(발해만)에 인접해 있다. 보하이만의 대륙붕 지층이 북한서해까지 연결되어 있어 서해유전의 매장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 북한의 석유 매장 가능 지역

 

서해유전의 매장 추정량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지난 1997년, 북한 당국은 서해유전지대에 50억-400억 배럴의 원유가 있다고 발표했다. 2005년 10월 중국 해양석유총공사는 660억 배럴의 원유가 묻혀있는 거대한 원유저장지를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2011년 5월 30일, 무역협회 남북교역투자협의회 고문인 김영일 ㈜효원물산 회장은 ‘남북경제협력 활성화 방안’ 정책토론회(미래희망연대 송영선 주최)에서“서한만과 연결된 중국 보하이만 대륙붕 유전지대에는 200억여톤에 해당하는 원유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채취 가능량을 매장량의 3분의 1 수준인 70억∼80억톤으로 잡는다면, 대략 중국이 30년가량 소비할 수 있는 규모”라고 지적했다. 김영일 회장의 언급이 사실이라면 북한의 잠재매장량은 1470억 배럴로 전세계 매장량의 10%, 현재 유가로 개산할 때 잠재가치는 1경 5800조원이다. 이 가운데 경제성있는 채굴량을 1/3으로 잡아도 5000조원 이상의 가치를 추정해볼 수 있다. 한국이 약 60년 가량 사용할 수 있는 막대한 원유가 북한바다에 매장되어 있다.

서해유전의 최고강점은 채굴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 대다수 유전은 이미 석유독점자본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졌으며 남아있는 유전은 극지방, 심해 등 채굴비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들어가는 지형밖에 남아있지 않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현재 해외유전개발 사업의 성공률은 5% 내외로 상당히 떨어져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 서해바다는 미국의 경제제재로 지난 60년간 사실상 “봉쇄”되어 석유독점자본이 구경해보지 못한 유일한 지역이다. 그러하기에 북한 유전소식은 군사적 대치상태에도 불구하고 연일 흘러나오고 있다. 서해유전의 성공가능성을 최근 유전개발로 추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서해유전협력, 무조건 남는 장사

상황이 이렇다보니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북한 서해유전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대북적대발언으로 유명한 송영선 의원이 서해유전 토론회를 주최하는 것은 그 실례이다.

보수세력은 북한 서해유전을 빼앗아 점령하고 싶겠지만 사실상의 핵보유국인 북한의 유전을 빼앗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해유전은 북한 영해의 유전이므로 북한당국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결국 한국이 서해유전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남북간 군사적 대치를 종식시키고 평화협력으로 나가는 것이 유일 대안이다.

서해유전을 눈앞에 두고도 연간 1000억 달러, 110조원 이상의 막대한 석유를 수입하는 이명박 정부는 그야말로 반북대결에 이성적 판단이 마비되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물론, 북한의 서해유전을 한국정부 마음대로 퍼갈 수는 없겠지만 서해유전 개발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한국이 에너지 전쟁에 대비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10년간 북한에 협력한 규모라고 해봐야 고작 2조원, 연간 2000억원이 조금 넘는 규모지만, 한국정부가 북한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서해유전 개발사업은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투자금을 허공에 날리지 않는다. 지금껏 정부의 해외자원 개발은 정부의 지원 아래, 기업이 이윤을 획득하는 “성공불융자” 제도에 기초해왔다. 성공불융자 제도란, 유전개발 투자금의 60%를 15년간 정부가 지원해서, 개발에 성공하면 대출금을 돌려받지만 개발에 실패할 경우에는 원금을 대폭 깎아서 갚게 해주는 제도이다. 지식경제부의 2009년 자료에 따르면 2008년 총 48건, 2억 8천만 달러어치의 석유시추 사업 모두가 성공불융자 조건으로 자금을 대출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구반대편의 해외유전개발과 달리, 남북협력사업의 소중한 경험은 남과 북이 신뢰를 회복하는 소중한 경험이다. 유전개발 투자금은 안보위기 해소로 회수 가능하다. 서해유전 공동개발 사업은 2007년 10.4 선언에서 합의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확고히 뒷받침하므로 절대로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 무조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것이다.

국방비용과 에너지 수입,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비결이 서해유전에 있다.

 

곽동기 / 상임연구원


출처

: http://www.urisociety.kr/sub.php?board=C1&id=25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만약,1979년에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인혁당','5.16 군사 쿠데타' 등에 관한 발언으로 언론에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박근혜 후보는 MBC 라디오 '손석희 시선집중'에 출연해 박 후보는 "(유신과 5ㆍ16의 경우) 그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만약에 내가 지도자였다면, 이런 입장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이나 판단을 했을까 생각하며 객관적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도 논란이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다"며 "그런 부분은 객관적으로 역사가 판단해 나아가지 않겠나. 그것은 역사의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박 후보는 특히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셨다"며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함축돼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녀의 말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진실은 박근혜 후보의 말과 너무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박정희가 과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떳떳했던 인물인지, 그가 죽었던 1979년 상황을 돌이켜보면서, 우리 각자가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1979년, 그 암울했던 경제 상황'

박정희를 일컬어 산업화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칭찬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그럴 순 있습니다. (그 당시 독재자들이 어느 정도 산업화를 통해 경제력을 키웠던 시대 상황으로만 본다면) 그러나 그가 죽었던 1979년을 보면 산업화의 장본인, 경제 성장의 아버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대한민국은 경제난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 1979년 6월4일자 동아일보 기사

 


1979년은 서민을 비롯한 자영업자, 중소기업 모두가 힘든 시기였습니다. 6월인데도 벌써 '물가 연말억제선'이 무너졌다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1979년 5월 도매 물가는 10.5%,소비자 물가는 12.3%의 상승률을 기록해 정부가 정해놓은 물가억제선 도매 10%, 소비자 12%를 모두 넘었습니다.

1978년은 식료품가격이 올라 물가인상으로 서민이 고통받았다면, 1979년은 수입원자재와 공산품까지도 가격이 올라, 소상공인을 비롯한 중간 계층의 경제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1979년의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 나빠졌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2차 오일쇼크가 왔던 요인도 있지만, 석유제품의 가격은 59%, 전력요금은 35%까지 올라가 버렸습니다. 가장 문제가 됐던 점은 바로 부동산 투기로 인한 빈부격차가 최고조로 달했다는 사실입니다.

1970년대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부동산 투기는 1979년 토지가격을 무려 49%나 급등하게 했고, 이 때문에 집 없는 서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박정희가 산업화를 위해 농촌의 인력을 대거 도시로 끌고 와 나라 경제를 살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그의 정권 통치기간 내내 소모품으로 살면서 일의 대가조차 받지 못하고, 도시 극빈층으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박정희의 산업화가 왜 문제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재벌만을 위했던 그의 경제 정책입니다.
 

 

 


1979년 대한민국 제조업 출하액을 보면 상위 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6.3%, 10대 재벌의 경우 22.7%, 2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30.3%였습니다. 대한민국 제조업은 재벌들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는 박정희가 정경유착을 통해 정치자금을 받고, 이를 통치자금으로 활용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1961년부터 잘살아보세를 외쳤지만 18년 동안 재벌만 잘살았던 것입니다.)

재벌은 특혜 금융을 통해 자신들의 재산은 늘렸지만,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아 사회 빈부의 격차를 늘려놓았습니다. 아직도 박정희의 산업화 때문에 잘살게 됐다고 믿는 사람을 보면 '당신이 아닌, 재벌이었다'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당시 경제는 재벌을 위한,재벌만의 경제 정책이었습니다.

 

▲1978년에 발생한 삼성조선의 '산업스파이'사건, 삼성조선은 대한조선공사의 설계도와 기밀 서류를 빼돌리다 적발됐다.출처:1978년 4월17일자 동아일보

 


박정희가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켰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당시 재벌들이 정부 보증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상위 5대 재벌이 되느냐 10대 재벌이 되느냐가 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재벌들이 자기 자본 없이 무조건 정부의 금융특혜로 기업을 키웠는데, 당시 중화학산업의 평균자기자본비율은 22%에 불과했고, 1979년 5월은 총투자규모의 30%가 투자 보류 내지는 중지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재벌이 정당하게 기업 활동을 했다면 박정희의 산업화가 인정을 받았겠지만, 정치자금을 내고 금융 특혜를 받으며, 기술력보다는 비리를 통해 재산을 늘리면서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한 재벌의 모습은 독재국가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에 불과했습니다.
 

 

▲ 1965년부터 1983년까지의 물가지수. 출처:통계청

 

1970년부터 급등하기 시작한 물가는 점점 가면 갈수록 서민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경제 성장률은 1976년 14.1%,1977년 12.2%였다가 1978년 9.7%로 계속 내려갔습니다.

박정희가 사망했던 1979년 경제성장률은 6.5%였고, 국가채무는 200억 달러를 넘어 국가부도 사태까지 제기될 정도였습니다.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지 않았어도, 그는 결국 국가 경제의 부도로 하야했을 정도로 당시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 1979년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박정희의 죽음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1979년 '부마항쟁'입니다. 이 부마항쟁을 보면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재 여부와 그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통치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성중이던 YH여공들의 구호와 신민당사에서 경찰에 끌려나가는 여공들.경찰의 진압과정에서 김경숙이 숨졌다.

 

부마항쟁을 김영삼 제명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YH무역 여공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YH무역이 공장문을 닫아 기숙사에서 잠자던 여공들이 쫓겨 나와 간 곳이 신민당사였습니다. 노동자들이 정치를 통해 유신독재의 경제정책 결과인 배고픔을 탈출하고자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노동자가 야당과 연대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민당사를 공격했고, 경찰진압과정에서 숨진 YH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을 절대 언론에 보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고 하면서 박정희의 산업화를 칭송하는 이들은 당시 배부른 돼지는 서민이 아닌 재벌뿐이었고, 대한민국 노동자와 서민은 굶주림과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예였다는 사실을 절대 알고 싶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필자가 앞서 1979년 경제 상황을 말한 이유는 박정희가 만든 경제허상의 실체를 국민이 인식하고 반발하는 시점이 1979년이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고도성장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수없는 부조리. 그중에서도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 금융이 ....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권력층과 결탁하여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시장질서를 교란시켜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대중의 가계를 핍박케 ...그뿐만 아니었다. 정부나 기업은 보다 많은 수출을 위하여는 저임금 외의 값싼 공급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생계비 미달의 지불...극심한 소득분배의 불 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보라!” 10월16일 부산대 선언문 중에서


김영상의 제명 이후 불거진 부마항쟁은 유신이라는 정치적 독재 상황도 중요했지만, 당시 대다수 국민의 삶이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는 점도 원인으로 봐야 합니다.

 


 

▲ 부마항쟁 당시 비상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가 도심에 진주하자 시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탱크를 바라보고 있다. ⓒ김탁돈

 

재벌과 박정희 산업화의 노예로 전락했던 국민이 경제허상을 자각하고 일어서는 시점에서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단순히 위수령과 비상계엄령 등의 무력통치로 진압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것이 그동안 일어났던 학생운동과 본질에서 차원이 다른 사태라는 점을 파악했습니다.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국민,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고, 급기야 부산, 마산사태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 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 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대의 경찰차와 수십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당시 본인이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일촉즉 발의 한계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김재규의 증언)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학생데모가 아닌 민란으로 규정했을 정도입니다. 만약 10.26으로 박정희가 죽지 않았더라면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물가고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발생한 부마항쟁의 끝은 사태가 잠잠해진 이후 다시 전국적으로 항쟁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고, 이는 4.19처럼 박정희가 하야하는 사태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요?
 

 

▲굶주리고 억압받는 국민이 자유와 빵을 달라고 외치는데 총을 쏘겠다는 자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독재라고 해야 하는가?

 


김재규가 부마사태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할 것이라고 하자, 박정희는 화를 내며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자유당에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는가”라고 말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백만명 죽인다고 까딱있겠습니까”라고 큰소리쳤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아마 광화문 네거리는 피바다가 됐을 것이고, 무력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던 박정희는 차지철을 통해 한반도 역사상 가장 최악의 학살을 자행했을 것입니다.

1979년은 대한민국 국민이 일어설 수밖에 없던 시기였습니다. 재벌과의 정경유착으로 정치자금 모으기, 언론통제를 통한 우민화 정책과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유신체제를 위한 사법 살인으로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던 박정희 정권을 국민은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고, 이는 그가 죽음으로 끝이 났었을 뿐입니다.

' 박정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가 유신을 종식하고 민간인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통해 그를 판단한다면, 박정희는 결코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권이양을 하겠다던 박정희의 기자회견,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해부터 국민에게 거짓말을 누차 반복했던 독재자였습니다. 군사혁명정부는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떠나겠다고 했지만, 그의 말은 채 1년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거짓말은 통치 기간 내내 계속됐습니다.

○ 혁명정부가 사용했던 복지국가

지금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내거는 공약 중에 복지국가, 경제 민주화가 있습니다. 그 말의 어원은 박정희입니다. 박정희는 혁명정부 기자 회견이나 언론보도를 통해 복지국가라는 말을 항상 사용했는데, 그가 복지를 "국민의 기본인권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경제생활에 국민이 그들의 욕구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유신체제에서 국민의 기본인권이 지켜진 적이 있습니까? 인혁당 사건만 봐도 명백한 사법살인이었습니다. 고문과 투옥, 언론통제가 이루어진 나라, 재벌에게 특혜를 주고 노동자들은 분신자살과 경찰 진압으로 사망한 정권이 박정희 정권이었습니다.

박정희는 복지를 내세우며 혁명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을 복지국가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만든 나라는 억압과 독재, 인권 유린의 땅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인혁당 사건 8명은 판결이 내려지고 불과 18시간 후에 사형이 집행됐으며,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인간의 자유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후보 라디오 연설에서 "외국대사관 앞에서 데모하는 것은 자유다 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유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자주,자립의 민족적 이념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박한 자유민주주의 인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1971년 대통령 담화에서는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가지고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떠드는 사람이 추앙하는 박정희의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가 언제라도 박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러했습니다. 인혁당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박정희는 형법에 국가원수 모독죄를 제정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했습니다.

○ 이번이 마지막?

박정희는 군사쿠데타가 끝나자마자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당당히 국민앞에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뻔뻔하게 대통령 선거에 계속 출마했습니다.1971년에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 연설 관련 기사 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후보 유세연설에서 "이번에 또다시 박 대통령이 당선되면 총통제를 만들어 박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하련다고 말하고 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여러분에게 대통령으로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둔다."라며 '이번이 마지막 대통령 출마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해 6년 연임제를 통과시키고,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5선에 성공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이라고 외쳤던 것은 국민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마지막이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 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대통령 후보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내 재산이 문서로 발견되면, 그 돈을 도시의 판잣집을 기와집으로 고치거나 농민들의 영농자금에 쓰도록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10.27일 전두환은 합수부를 통해 박근혜와 함께 청와대 비서실에 있는 '금고2'를 열었고, 여기에서 자기앞 수표 1천만원짜리 수십장, 5백만원짜리 수십장등 9억5천여만 원과 박근혜,박지만,박근영의 적금 통장을 별견했습니다.

전두환은 현금 6억 원은 박근혜에게 줬고, 비자금 장부와 나머지는 자신이 챙겼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집무실에 있던 '금고1'은 박근혜가 챙겼다고 하는데, 과연 그 돈이 얼마인지 아직도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박정희 사망당시 궁정동 안가의 모습과 MBC드라마에 나온 장면.

 

필자가 지금 이 나이에 박정희의 죽음을 맞이했다면 9살 어린 나이 때와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비밀 안가에서 젊은 여자를 안고 술마시다 죽은 독재자의 죽음을 슬퍼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의 공과를 말하면서 그를 칭송하며 역사의 판단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점을 그의 공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재벌과 독재자를 위해 밤을 새우며 미싱을 돌린 대가가 '배고픔', '인권유린','자유의 억압과 탄압'이었는데 무엇을 칭송해야 합니까?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는 1991년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의 경제성장을 분석한 책 '네 마리의 용'에서 한국 경제 성장의 원인으로 북한의 위협으로 만든 사회적통합과 훈육된 인력, 국가에 대한 인식,엄청난 교육열을 손꼽았습니다. 박정희는 그저 18년간의 독재자였다는 말뿐이었습니다.
 

 

▲ 박정희와 전태일 열사 묘비,출처:인터넷


1979년 박정희가 후계자에게 권력을 물려줄 가능성이나 독재를 끝내겠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일본군 출신 박정희는 일본군인의 단기(短氣:‘한다고 했으면 하는 성격)를 품에 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1979년 국민 대다수가 참고 참다가 마지막으로 일어설 전국적인 민주화 항쟁을 어떻게 진압했을지는 뻔합니다.

박정희는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했습니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놓으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각기 다른 인생을 살다 죽은 두 사람을 보면서 누구의 죽음을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안철수 '대선출마 임박' 야권 단일화 방식은?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2/09/15 16:40
  • 수정일
    2012/09/15 16:4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안철수 원장이 어제 (14일) 광주의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습니다. 안 원장은 이날 오전 10시 40분 경 민주묘역을 찾아 5.18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배가 있는 유영봉안소와 추모탑, 추모관을 방문하여 헌화하고 분향했다고 합니다.

이날 안 원장의 5.18 민주묘지 참배는 측근 일행만 참석한 방문으로 유민영 대변인은 "오래전부터 5.18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조용히 다녀오기를 원했다'는 설명처럼 사전에 언론에 노출도 안 시킨 비공개 일정이었습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처럼 기자들을 잔뜩 끌고 가서 사진을 찍거나 언론용으로 참배를 한 것이 아님은 분명했습니다.

안철수 원장 쪽은 민주당 대선 후보가 결정되면 이후에 대통령 출마 여부를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5.18민주묘지 참배 이전에는 서울시청을 방문하여 박원순 시장과 독대를 했습니다. 이렇게 일련의 과정을 보면 안철수 원장의 대선 출마 여부가 결정짓는 시기가 임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남아있는 것은 민주당 대선 후보와 어떻게 단일화를 할 것인가를 고민(?)해 봐야 합니다. 오늘은 야권 단일화 방식에 대해 함께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 기존 방식의 야권 단일화 선출'

그동안 야권 단일화 후보 결정은 경선과 여론조사가 포함된 방식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최근에 치렀던 서울시장 야권단일화 경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1년 10월3일에 열렸던 서울시장 야권 단일 후보 경선은 시민여론조사 30%, TV토론 배심원 평가 30%,국민참여 경선 40% 방식으로 치러졌습니다. 당시 박원순 시민단체 후보는 총합계 52.15%로 45.57%를 얻은 민주통합당 박영선 후보를 이겨, 서울시장 야권 단일 후보로 확정됐습니다.

이때 경선을 보면, 국민참여 경선에서는 민주당의 조직표 동원이 수월했던 박영선 후보의 득표율이 높았지만, 시민여론 조사에서 박원순 후보가 많은 득표를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원장이 나온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에서 모바일 투표 지지율이 높았던 문재인 후보가 국민참여 경선은 높을 수 있지만, 여론조사를 통한 지지율은 현재 안철수 원장이 약간 높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놓고 보면 초박빙의 승부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조국 교수의 '원샷 담판' 단일화 방식'

민주당 대선 경선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야권단일화 후보 방식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상황에서 조국 서울대 교수가 야권 단일화 방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습니다.

9월14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조국 교수는 "보통 사람들이 단일화를 하게 되면 양측이 모여 '여론조사를 몇 % 할 것이냐, 국민 참여 몇% 할 것이냐' 이런 걸 따지는 테이블을 만드는 걸 상상하지만, 그런 단일화는 최악의 단일화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조국 교수는 "민주당 후보와 안 원장이 각자 열심히 뛰셔서 각자의 지지층을 확보하고 쭉 나아가다가 일정 시점이 되면 후보 간에 담판을 하는 것이 최고다"라면서 일명 '원샷 담판' 단일화 방식을 주장했습니다.
 

 

 


조국 교수의 '원샷 담판' 단일화 방식은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정말 안철수 원장이 대선에 출마한다는 가정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문재인 후보가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안철수 원장과 문재인 후보가 나와야 조국 교수의 '원샷 담판'이 가능한 이유는 각 캠프의 정치적 논리보다 이 두 사람은 정권교체를 위한 시민들의 단일화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국 교수는 자신이 이런 야권단일화 과정에서 가교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조국 교수는 그동안 안철수 교수와 문재인 후보와 함께 여러 차례 콘서트를 함께 진행한 바 있기에 충분히 중간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 야권단일화 일정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과 내일이면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선출이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만약 문재인 후보가 50% 과반 득표율을 넘지 못한다면 결선투표까지 가겠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마 일요일이면 대선 후보가 결정되리라 전망합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야권단일화 논의가 시작될 것으로 봅니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선출이 끝나면 안철수 원장은 대선 출마를 공식화할 것이고, 곧바로 안철수 원장과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만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만남으로 '원샷 담판'이나 단일화 경선 방식이 결정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그것은 대선 후보가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관계의 정리가 필요하기에, 지난번 서울시장 야권 단일화 경선처럼 야권 연대의 모임이 우선 결성되지 않겠느냐고 보입니다.
 

 

▲ 2011년 국회에서 열린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선출 방법을 위한 야권 협약식 출처:미디어 오늘 류정민,

 


시민단체와 민주통합당이 함께 하는 범야권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협약식 내지는 모임이 결성되고, 여기서 안철수 원장과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잠정적으로 합의한 방식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어떤 가이드 라인을 정확히 결정하리라 봅니다.

필자가 이런 방식의 모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난 서울시장 야권 단일 후보 결정에서 이 모임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됐고, 이런 모임을 통해 야권이 하나로 힘을 합쳐 새누리당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결국, 안철수 원장과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두 사람도 중요하지만, 야권이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처럼 실패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외부적으로 환경을 조성하고, 시민들이 압력을 행사하는 점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아이엠피터, 너는 누구 편이냐?'

가끔 저에게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아이엠피터 너는 문재인이냐, 안철수냐?'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저는 문재인 후보가 정치에 나오기도 전에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입니다. 왜 문재인이냐 묻는다면 그에게 '권력욕'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재인과 안철수, 두 사람 모두를 제가 존중하는 이유입니다. 앞서 조국 교수의 '원샷 담판'도 문재인 후보 이외의 인물이 나온다면 불가능합니다. 대선 캠프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후보들의 대권을 위해 뜁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사람 100%가 그저 후보가 좋아서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는 않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수많은 사람들의 논공행상이 이루어질 것이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보는 그런 여러가지 상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대선 후보가 자기 뜻대로 무엇을 하려고 해도, 각 캠프 진영에서는 자신들이 손해 보는 일을 절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원장은 그런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는 할 수 있어도 최후의 결정을 그런 정치공학적인 셈법으로만 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정치] - 결선투표 수용을 보여준 진짜 '대인' 문재인

지금 안철수 원장과 문재인 후보가 많은 국민에게 지지를 받는 이유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계파와 정치적 논리보다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을 국민이 알아보고 그들을 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가 어떤 정치공학적 계산법과 논리를 가져와도,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이 두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리라고 아이엠피터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서울시장 야권 단일화 경선은 국민에게 감동을 줬습니다. 서로 간의 방식에 대한 합의도 순조롭게 이어졌고, 그 방식을 후보자들이 겸허히 받아들였습니다. 유불리를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정치판입니다. 내가 조금 불리해도, 국민이 원한다면 그것을 따르는 마음, 그것을 어찌 국민들이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

정치는 시작이 좋아도 끝이 안 좋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시작부터라도 아름답고 기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정치 논리보다 국민의 뜻을 우선하여 따르겠다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국민의 뜻에 맡기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정권을 잡아도 정책을 항상 국민의 편에서 만들고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안철수,문재인 누가 더 좋고, 누구를 지지하느냐를 아이엠피터에게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더 국민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인지 알려달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현재는 두 사람 모두가 국민을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엠피터는 이 두 사람을 보면 항상 흐믓합니다.

안철수도 좋고, 문재인도 좋고, 누구를 뽑을지 참 고민되는 모습, 기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을 국민에게 되돌려 줄 사람이 많다는 것은 앞으로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야권단일화 과정 자체를 우리 모두 축제처럼 즐깁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도가니 검사와 길 위의 목사, 그리고 유신의 그녀

도가니 검사와 길 위의 목사, 그리고 유신의 그녀
(블로그 ‘사람과세상사이’ / 오주르디 / 2012-09-14)


 

▲<임은정 검사와 박형규 목사>

 

5.16과 유신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귀에 거슬려도도 참으려 했다. 역사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여당의 대선후보에 실망하면서도, ‘자식이 어찌 대놓고 부모를 비난할 수 있겠느냐’며 그나마 분을 온정으로 삭이려 했다. 많은 국민들이 이랬다.


진실 앞에 고개 돌리는 여당 대권 후보

맞아 보니 별것 아니다 싶었나. 정신 줄 놓은 듯 한참 더 나가고 말았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 있다고 주장했다. 무죄를 선고한 재심판결을 부정하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는 말이다. 유신반대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날조한 것으로 결론이 난 사건을 마치 실체가 있는 간첩사건인 것처럼 말해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이 ‘인혁당 재건위’의 배후조종을 받아, 반정부 운동을 전개해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며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1024명을 체포한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이들 중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불과 18시간 후인 4월 9일 새벽 사형이 집행된다. 억울한 시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울부짓는 유족들/1975년 4월 9일>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탄압위해 날조된 사건으로 밝혀졌다. 2007년 이후 올해까지 재심을 통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던 피해자들 모두 무죄를 선고 받았다. 2007년 8월 서울지방법원은 인혁당 사건 희생자 유족들에게 국가가 총 637억여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2004년 8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인혁당 사건 유족과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형판결 등은) 법적으로 결론이 난 사항들”이라며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사건이 날조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검사가 선고공판에서 “무죄 내려달라”, 사법사상 초유의 일

지난 6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 받았던 박형규 목사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검사가 피고인에게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임은정 검사는 검사의 직분을 망각한 양 재판장에게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청했다.

임 검사가 무죄를 구형하며 한 말이다. 매우 감동적이다. ‘권력의 검’이 아닌 ‘정의의 검’을 쥔 검사를 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기뻤다.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을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간 사람들이 있었다. 몸을 불살라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 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다.

그러니 무죄를 내려달라.”

 

재판부도 임 검사와 뜻을 같이 했다. 재판부는 “장구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울였을 노력 등이 이 판결을 가능하게 하였음을 고백한다. 이 판결이 부디 피고인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우리 사법에 대한 안도로 이어지길 소망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임은정 검사, 그는 ‘도가니 검사’였다

임은정 검사. 그 이름이 낯설지 않다. 2011년 9월 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아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가 전국을 후끈 달구던 때, 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라온 글 하나가 화제가 된 바 있다. 사건의 1심 공판검사가 그 영화를 본 뒤 수사 당시(2007년)에 썼던 일기를 공개한 것이다.

 

 

▲<PD수첩 화면 갈무리>

 

“어제 도가니를 보고 그때 기억이 떠올라 밤잠을 설쳤습니다”는 말로 착잡한 심경을 밝히며 공개한 임 검사의 일기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2007년 3월12일

....법정을 가득채운 농아자들은 수화로 이 세상을 향해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어렸을 때부터 지속된 짓밟힘에 익숙해져 버린 아이들도 있고, 끓어오르는 분노에
치를 떠는 아이들도 있고.... 눈물을 말리며 그 손짓을, 그 몸짓을 그 아우성을 본다.
변호사들은 그 증인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데, 내가 막을 수가 없다.
....피해자들 대신 세상을 향해 울부짖어 주는 것, 이들 대신 싸워주는 것.
그리하여 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볼만 한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것....

............

2009년 9월20일

도가니가....베스트셀러라는 말을 익히 들었지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잘 아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알기에...서점에 들렀다가 결국 구입하고 빨려들듯 읽어버렸다.
가명이라 해서 어찌 모를까? 아 ! 그 아이구나. 그 아이구나....
신음하며 책장을 넘긴다....1심에서 실형이 선고되었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는 뉴스를 들었다.
...정신이 번쩍든다. 내가 대신 싸워줘야 할 사회적 약자들의 절박한 아우성이 밀려든다.
그날 법정에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말려가며 한 다짐을 다시 내 가슴에 새긴다.
...정의를 바로 잡는 것. 저들을 대신해서 세상에 소리쳐 주는 것.

난 대한민국 검사다.

 

임 검사는 2011년 10월 국회 국감장에 증인으로 출석해 당시 공판 분위기와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는 아동 성폭력 수사에 대한 지침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증인 심문과정에서 피해자 아동이 ‘거짓말쟁이’로 몰려 억울해 하는 것을 제대로 살펴주지 못해 아쉬웠다고 술회했다.


검사로부터 ‘무죄’ 구형받은 박형규 목사, 그는 누구?

그런 그가 사법사상 초유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피고인 박형규 목사는 어떤 사람일까. 그를 ‘길위의 목사’로 부르기도 한다. 현대사의 아픈 현장에서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평생을 헌신한 사람이다.

4.19혁명 즈음 결혼식 주례를 보고 오던 길에 피 흘리는 학생을 보고 “엉터리 목사로 살아온 것을 뉘우치고 진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박 목사. 그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에게서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었다.”

 

 

유신 반대 투쟁에 앞장서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을 주도했다. 4월 22일 새벽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 6만 여명의 신도가 운집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주의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등의 민주회복과 언론자유를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이는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박 목사는 내란예비음모죄로 기소됐고, 이후에도 반독재 투쟁을 벌여 6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평생 인권과 민주운동, 깡패 동원 예배 방해해 6년간 노상예배 드리기도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박 목사는 정권으로부터 감시당하던 학생들에게 마음껏 ‘거사’를 도모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했다. 그와 학생들이 모였던 곳은 서울 변방의 한 신학교. 고 김근태 고문 등이 그곳을 자주 들락거렸다. 박 정권은 시위하다 붙들린 젊은이들을 고문하는 현장에 그를 불러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했다. 이렇게 말하며 말이다. “당신 때문에 저렇게 당하는 거야!”

 

 

▲<끌려가는 박형규 목사>

 

아흔을 바라보는 노목사와 그 신학교와의 인연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성공회대학교는 지난 4월 박 목사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장로교 교단 소속 목사가 성공회대 최초의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박 목사가 아예 목회를 하지 못하도록 탄압을 했다. 매번 깡패를 동원했다. 그가 목회하고 있던 서울제일교회에 침입해 난동을 부리고 마구 폭력을 휘둘렀다. 교회에서 예배할 수 없게 되자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 교인들과 일반인까지 참여하는 노상 예배를 서울 6년 동안 드렸다. 이 사실이 외신에 의해 보도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MB는 기독교 욕되게 했다” “박근혜 지지는 독재정권 다시 보자는 것”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도 따금하게 일갈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였을 때 박 목사를 만나 “나도 민주화 운동을 했고, 나도 크리스천이다”라고 자랑했단다. 하지만 박 목사는 이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한다 “크리스천이라는 간판만 달고 기독교를 욕되게 했다.”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는 “그를 지지하는 건 독재정권의 그림자를 다시 보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긴급조치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1975년 2월>

 

달라도 참 다르다. 한쪽에서는 과거의 암울한 역사를 치유하고, 그를 교훈삼아 더 나은 민주사회를 만들려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어떻게 하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려고 안달이다. 한쪽은 시대정신에 철저하고, 다른 쪽은 시대정신에 역행한다.


저들의 눈에 임 검사와 박 목사는 어떻게 보일까?

‘도가니 검사’와 ‘길 위의 목사’는 인권과 정의라는 시각으로 과거를 보는데, 박근혜 후보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은 ‘박정희 프레임’에 갇혀 뒤집힌 시각으로 과거를 본다.

진실은 하나다. 대법원 판결이 하나인 것처럼 진실도 두 개가 될 수 없다. 극과 극을 형성하는 두 시각, 한쪽이 진실이면 한쪽이 거짓일 수밖에 없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게 옳은 일인가? 어느 쪽이 거짓인지 또렷해도 너무 또렷하다.

5.16쿠데타, 유신독재,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장준하 선생의 죽음 등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보는 저들의 눈에 임은정 검사와 박형규 목사가 어떻게 보일까?

 

오주르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목 잘리고 피 흘리는 추한 진보 vs. '안철수 우파' 등장!

목 잘리고 피 흘리는 추한 진보 vs. '안철수 우파' 등장!

[정치 몰입, 2012] <지금 여기의 진보>·<우파의 불만>

홍명교 영화 노동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9-14 오후 6:42:32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신해욱,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중


그 놈의 장례 행렬 참 길기도 하다. 한참 전에 죽은 것을 믿지 못하고 안고 업어 달려오다 보니 죽어 있어서, "이 놈은 죽었습니다!" 선언했지만, 누구는 그것을 죽어도 믿지 않고 또 누군가는 죽어도 내 자식 아니겠느냐고 끌어안아서, 장례 행렬은 아직 끊이지 않고 있다. 나 역시 그를 만나고 온몸에 이고 달려온 무수한 사람들 중 하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작 1년 만에 나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2003년 11월 노동자대회 즈음에 말이다.

배달호, 이현중, 이해남, 이용석, 김주익, 곽재규 열사. 그 해에만 여섯 명의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부와 자본에 맞선 저항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전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불 붙었지만 어떤 노동 운동 관료들의 선택은 투쟁을 전면화하는 것보다 '이듬해 총선'에 있었다. 총선에서 노동자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열사들의 한을 풀자는 것이었다. 투쟁은 급격히 소강기로 접어들었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듬해인 2004년 4월. 민주노동당은 열 명의 국회의원을 원내로 진출시켰다. 그것은 '정치'의 시작인가? 정치라는 것을 '사회 운동'과 철저하게 분리시켜 사고하는 '정치학 박사' 박상훈은 바로 그 점에 역점을 두어 '진보 정치'에 대한 악평을 늘어놓는다. 그는 정치를 '정당 정치' 혹은 '의회 정치'라는 협의 안에 가둠으로써 현실이란 얼마나 고단한 것이며 여러 가지 차악을 선택하는 지난하고 복잡한 과정인지 훈계한다.

좌파는 '운동'은 참 열심히 하고 잘 하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너무 아마추어적인데다 몽매하고 정파 정치의 패권으로 인해서 오늘날 '진보'가 이 모양 이 꼴이 난 것이라는 얘기다. 진보 정당의 정치인들이 아마추어적이라는 지적은 일면적 차원에서는 일리 있는 말일 것이다. 또한 특정 정파의 패권주의가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큰 해악으로 작용됐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통합진보당 사태의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시안(손문상)

며칠 전 통합진보당 탈당을 선언하고 '혁신 모임' 구성을 통해 "새로운 대중적 진보 정당을 건설할 것"임을 밝힌 심상정-유시민-조준호 등의 진보적 자유주의 혹은 노동 운동 우파 계열의 스펙트럼에 위치한 정치 그룹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태에 대한 반성적 제스처 없이 또 다시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다.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상정은 지난날 민주 노조 운동의 성과를 끊임없이 의회 내로 수렴시키고자 했던 전형적인 의회주의 정치인이다. 의회 내 그녀의 생산적 역할 중 의미 있는 일도 없지 않았겠으나 패권주의적 정치 기획으로 진보 진영의 정치적 위신을 전국적으로 추락시킨 '경기 동부 세력'과 지난 정권 신자유주의의 첨병 노릇을 했던 국민참여당 계열과 합종연횡에 동조하고 2011년 9월 진보신당 당 대회 결정을 어기고 탈당한 장본인이다.

또 조준호는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 현장에서 일었던 비정규직 노동자 조합원들과 현장 활동가들의 울분 섞인 요구들을 무시로 일관했던 대표적인 중앙 관료 중 하나다. 비정규직-여성 노동자 중심의 노동자 운동의 변화를 도모해야할 오늘날에 있어서 그는 혁신의 주체이기는커녕 혁신되어야 할 상징적 대상 중 하나인 것이다. 박상훈이 이런 주요한 원인에 대해 침묵하는 이상 그가 말하는 진보 정당 운동 위기의 원인 진단은 엇나갈 수밖에 없다.

물론 소위 "'운동권'들이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식의 비판이 합당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 부르주아 정치 질서에서의 온갖 장황한 술책들을 늘어놓는 것으로서의 '전문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진단은 설득력을 갖추기 어렵다. 오히려 '운동'에 있어서 원칙을 끈기 있게 지켜왔다면 오늘날 노동자 운동이 이런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진보 정치의 실패는 1987년 이후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민주노총으로 이어온 민주 노조 운동의 기반 자체를 모조리 의회 정치의 성과로 수렴시키고자 했던 것에 더 가까이 있다. 이른바 진보 정치의 스타 정치인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볼멘소릴 하는 것처럼 노동자 운동에 휘둘리기보다 끊임없이 노동자 운동의 체제 내로의 수렴과 '타협'을 선도했다.

이쯤이면 모두 눈치 챘겠지만 우리가 아직도 끌어안은 채 놓지 못하는 그 죽은 아이는 바로 '진보'다. 언젠가 배우 고수가 영화 <고지전>에서 전우인 신하균에게 비틀거리며 이미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했듯, 나는 진보가 아주 오래 전에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새로운 것을 도래시키지 못하고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도 그것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
btn
▲ <지금 여기의 진보>(박상훈·심보선·장석준·홍기빈·이택광·하종강·서동진·엄기호·박경신·홍세화 지음, 이음 펴냄) ⓒ이음
<지금 여기의 진보>(이음 펴냄)는 정치학 박사 박상훈을 비롯해 심보선, 장석준, 홍기빈, 이택광, 하종강, 서동진, 엄기호, 박경신, 홍세화 등 예술, 경제, 정치, 노동, 교육, 법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진보 진영의 명사 혹은 이론가들이 저마다의 입장에서 진보의 현재에 대해 늘어놓은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전문적인 분석과 입장들이지만 이중 어떤 글들에 대한 인상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다른 영역이지만 저마다 전제로 하는 이념과 역사적 평가가 조금씩 다르고 종종 상충되는 견해들도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각각 경제, 예술, 생태, 정치 등 다른 영역의 코드를 논제로 삼고 있기에 논쟁의 핀트를 맞추기 쉽지 않다.

기획에 있어서 실패가 아닌가 모르겠다. 아무리 다양하게 끌어안는다고 하더라도 아귀는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독자들은 '지금 여기의 진보'의 의제들이 다종다기하게 늘어진 채 어떤 정치적 헤게모니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를테면 홍세화는 "자칭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다름 아닌 그 자유주의자들이 오늘날 소위 '배제된 노동'을 더욱더 배제하면서 동시에 노동 운동 상층부의 관료들과는 밀착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지적한다. 이와는 다르게 박상훈은 정당 정치 중에서도 전문가적인 전술 구가의 필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역설하는 방식으로 자유주의 정치를 옹호한다. 위기의 원인을 서로 다르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 변호사 박경신은 진보 진영이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갖고 있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태도에 대해 지적하면서 그것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그러기 위해 그가 요청하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는 신자유주의가 아닌 근원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자유주의다.

이처럼 각자가 소환하는 '자유주의'가 상이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고 진보의 위기로 짚는 원인들도 다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이것의 맥락적 차이들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은데 그것이 개별 영역의 논의로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논쟁을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논의의 폭이 너무나 엷기에 대체 어디서부터 맞춰 이야기해야 할지 맥이 잡히지 않는다.

아마 이 책에 실릴 글들이 강연문으로 나왔던 일련의 강연들을 청취했던 사람들에겐 그것이 아주 혼란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결국 '지금 여기의 진보'의 잔해들이 이토록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는 걸 확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홍세화가 끊임없이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노동 운동 상층 관료들을 향해 일갈하는 것은 자못 '홍세화다운' 태도다. 그는 몇 주 전 국회 앞 기자 회견을 통해 발표한 진보신당의 대선 사회 연대 후보에 대한 회견문에서도 지난 시절의 '노동 운동'을 비판하며 그것을 '조직노동'이라고 뭉뚱그려 비판한 바 있다. 나는 당원 게시판, SNS 등 온라인상에서 그런 식의 수사로 가하는 비판이 별로 맞지 않다고 비판한 적 있다.

그리고 홍세화가 계몽주의적 태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운동의 경향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조적인 분석과 아래로부터의 실천을 통해 가능한 것일 텐데, 그는 각기 다른 운동들에 대한 시차적 관점을 가지려 노력하기보다 '선생님'의 자리에 머무르려 한다. 실제 진보 정당 정치인들이나 우경화된 노동 운동의 상층 관료들이 홍세화가 지적한 관료주의적이고 우경화된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조직 노동'이라고 애매하게 설정했을 때에는 아예 엉뚱한 층위에서 불필요한 오해와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선 오늘날 우경화된 노동 운동의 흐름은 충분히 조직적이지 못해 항상 문제였지 '조직 노동'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 한 바 없었다. 만약 민주노총이 한진중공업이나 현대자동차 하청 노동자 파업,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 해고에서부터 자본에 의해 자행된 일련의 금속 사업장 파괴 공작에 조직적으로 맞섰다면 우리는 노동자 운동의 추락에 대해 이토록 한탄할 일 없었을 것이다.

지난 시기 진보 정당이 노동 운동의 성과로서 모조리 수렴되면서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현장의 강화를 통해 조직적으로 유지되고 쇄신되어야 할 노동조합 운동이 그 힘을 상실해왔기 때문이다. 만약 홍세화가 '배제된 노동'이라고 칭하고 있는 '불안정 노동자' 조직화의 전략을 강조하고 싶다면 더더욱 적극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피력했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모든 공력을 가하고 있는 현장 활동가들은, 대선 정국에서 '선거 연합'을 도모해야 하는, '조직 노동'의 전망에서 활동하는 일련의 좌파 정치 조직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하종강이 끊임없이 피력하는 노동조합 운동의 중대성은 누차 강조해도 모자란 이야기다. 어떤 면에선 그의 우직한 일관성과 어렵지 않은 해설이 가장 현명해 보이기까지 하다.

한편, 장석준이 던지는 '녹색 사회주의'의 의제는 흥미로울뿐만 아니라 논쟁적이다. 오늘날 전 지구적 생태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좌파가 선택해야 할 전략은 녹색 사회주의임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유럽에서 얼마나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 그리고 전술적으로 무엇이 강조되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글들과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따로 또 존재하는 듯한 인상이 든다.

충돌 지점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홍기빈의 몽매하고도 정념적인 비판들일 것이다. 홍기빈은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성에 빠진 진보 세력이 다시금 경제 문제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이른바 '살림살이 경제학'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그가 가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의 항목들은 대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내용 안에 갇혀 있다.

생산력주의와 역사적 진화주의의 한계에 갇힌 현실 사회주의 운동이 역사적 곤경에 쳐했던 것을 거론하며 반복적으로 그것의 비실용성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다. 일정한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나는 그가 피력하는 '교조성'에 대한 우려를 아예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무오류의 신화라는 환상은 지난날 사회주의 운동이 빠진 곤경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화의 문제의식을 견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홍기빈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완전한 기각을 주장하며 구체적인 비판은 생략하고 그것이 변증법적 무오류의 논리성 안에 갇혀 결국 교조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만 주장한다. 그가 삶에서 만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말 그렇게 우격다짐으로만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진화주의적 역사 발전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힌 사회민주의자들이 설득력 있는 논거를 지닌 역사유물론자보다 훨씬 많듯이 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항상 실천에 있어서 세상을 일거에 혁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몽매하게 반복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지독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오늘날 좌파들은 도시 공동체에서, 노동조합에서, 학교와 미디어에서 다양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도모해왔다고 말하는 게 훨씬 정확하다.

반면 홍기빈이 예로 드는 스웨덴이나 영국의 비마르크스주의 제도주의 좌파들이 오늘날의 체제의 기로 앞에 선 세계 좌파들에게 별다른 귀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페이비어니즘이 득세했던 영국에서는 왜 노동당 스스로 변질되어 신자유주의 개혁을 주도했었는지, 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복지 국가 시대의 명성을 구가했던 스웨덴은 왜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오늘날 추락하고 있는가?

조만간 방한하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주창하는 세계 체계론의 시각에서 이런 '기적'은 스웨덴의 배후에 경제 식민지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가능케 하는데, 홍기빈은 이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하다. 이 지면에서 구체적으로 비판하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

물론 나는 오늘날 좌파들이 새롭게 도전해야할 과제들이 산더미처럼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자본의 음모로 돌리며 전위 정당 중심의 국가 전복의 필요성을 반복해서 피력하는 것은 전통적 '전략'이 될 순 있을지언정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와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적 공백을 뒤엎을 만큼 구체적 실천의 지표를 던져주진 못한다.

그러나 유럽의 지나간 역사와 비교해 이런 특수한 정세에서 시도되었던 이론을 현실의 간극에 대한 고려 없이 들이대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못하다.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대중 운동과 정치 그 자체가 파괴되고 진보적 이념이 대중화되지 못한 채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홍기빈이 제시하는 살림살이 경제학의 실천의 가능성을 십분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협동조합 같은 제3섹터의 조직 역시도 신자유주의적 '협치(governance)'의 블랙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홍기빈이 말하는 '살림살이 경제학'이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고 독립적이며 변혁적인 전망 속에서 어떤 활력을 제공할 수 있으려면 세계 체계의 변동과 국민 국가 내의 복합적인 이데올로기를 아우르는 사회 운동 정치 전략 역시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때 현재에 걸 맞는 얼굴을 찾은 마르크스주의는 '몫 없는 자들' 노동자 계급에게 여전히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미래에 어떻게 '새로운 길'을 물을 것인가? 심보선은 지난 희망 버스 운동에서 '신신좌파'의 탄생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가 회고하기에 그것은 '지도자 없는 리더십', '조직 없는 조직화'의 과정이었다. 희망 버스의 주체들은 자율성의 장소를 분쟁적인 공공 영역의 형태로 발견하고 또 발명했다.

그러나 희망 버스 운동을 무언가 자생적이면서도 새롭게 등장한 무엇으로 평가했을 때 놓치게 되는 역사적 기인도 있다. 한진중공업 정리 해고 철폐 투쟁의 기원이 지난 시기 민주 노조 운동의 역사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 말이다. 김진숙이라는 투사를 낳은 것도 85호 크레인이라는 상징과 열사들의 목소리를 남긴 것도 모두 민주 노조 운동이라고 명명된 노동자 운동의 바람직한 지향 속에서 가능했던 것임을 쉽게 넘겨선 안 된다.

더불어 희망 버스 운동에 대한 요청이 그간의 사회 운동 활동가들 사이에서 일었던 것 역시 민주노총이라는 기제가 더 이상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가운데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면서 이루어졌음을 기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들이 거세된 채 어떤 새로운 현상을 평가할 경우 '기적'에 대해 단순한 자생성과 어떤 아나키하고 포스트모던한 흐름에 기인한 것으로 오판하기가 쉽다. 이데올로기와 정세에 대한 면밀하고 정확한 역사적 평가가 요구되는 이유다.

*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글인 서동진의 '전진하는 미학 : 사회와 정치 그리고 예술의 동요'는 위와 같은 낭만주의적 인식을 겨냥하면서 비판적 미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글은 신자유주의 금융화 시대의 예술이 빠진 곤경과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 미학의 오류를 비판하며 예술에서 우리가 아직 새로운 정치를 발굴할 수 없다면 "잠시 예술을 잊어도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예술은 자신의 정치적 상상력과 해후할 때 다시 재림하고 또 부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배적인 질서에 파묻히고 싶지 않다면, 더디더라도 지난한 관계 속에서 '정치'를 굴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예술이 그 자체로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없듯, 또한 정치가 어떤 새로운 상상력과 모험 없이는 결코 구제될 수 없듯, 오늘날 예술과 정치의 분리 속에서 어떤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좌절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btn
▲ <우파의 불만>(김민하·김진호·최태섭·박연·박권일·이택광 지음,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이 글이 현실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선 비판에 충실하듯이 이택광과 박권일을 비롯해 여섯 명의 필자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우파의 불만>(글항아리 펴냄)은 한국 사회에 새롭게 출현한 우파들과 그 주위의 불안한 징후들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택광은 그간 꾸준하게 지적해왔던 것처럼 영화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을 통해 중산층이 아닌 '중간 계급'이라는 새로운 우파의 등장과 그들의 불만을 차근차근 분석한다. 두 영화에 대한 예상치 못한 환호를 통해 중간 계급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사회를 인식한다. 즉 "아무도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히스테리적 인식을 통해 사회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 것이다.

또한 이택광은 오늘날 진보의 문제가 더 이상 정당 정치 안에서 작동되지 않고 축출당했다고 말하며 이러한 상황에서의 진보의 재구성이란 당연하게도 정당 정치 바깥의 정치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 여기의 진보>에 실린 서동진의 견해와도 어느 정도 상통한다.

그밖에 다른 다섯 명의 필자들은 이런 문제의식과 공명하는 가운데 경제 개혁에 있어서의 신자유주의적 흐름, 기독교 우파, 인문 우파, 멘토로 명명되는 우파 이데올로그, 반이주민 정서의 확산 속에서 드러나는 '네오-라이트(neo-right)' 노동 담론을 다루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역사적 배경이나 인문학에 대한 기이한 환호 현상, 멘토로 대변되는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반이주민 정서를 둘러싼 노동 담론에 대해 분석한 박권일의 글이 가장 흥미로웠다.

얼마 전 광화문역 인근을 지나가다가 다문화 정책 반대 시민 단체의 소규모 시위 현장을 보았던 충격적인 경험 때문이었다. 박권일이 말하는 것처럼 반이주민 정서는 애국주의자로서의 자기규정을 기본으로 해 민족주의 담론, 경제 담론과 결합되어 복잡한 사회적 적대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네오-라이트'들의 불만이 끊임없이 사회적 적대로 재생산되고 일자리 부족과 계급 내 경쟁에 대한 피로감으로 노동자 계급 내의 단결을 저해할 경우 우리는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몇 년 전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정주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뺏고 있는데 이에 대한 민주노총 차원의 대처가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 모 상층 활동가가 했다는 악명 높은 망언이 있다.

"그렇습니다. 정말 심각하죠. 이주노동자들의 유입이 굉장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런 곤경을 극복하고 인종주의적인 반이주민 정서를 돌파하려면 노동자 운동의 확장과 인종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적 대응과 더불어 그것이 이주 노동자 운동과 조우해야만 한다. 최근 이주 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에 대한 제한이 주어져 이주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구할 때 고용주들에게만 명단이 돌아가고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고용주들의 명단이 주어지지 않는, 말 그대로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사업장 선택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브로커 개입 방지를 위한 사업장 변경 제도 운영 개선 내용'이 발표되었는데 이런 사안에 대한 국제주의적 시야에 입각한 국내 노동자 운동과 사회 운동의 연대가 절실하다.

얼마 전 용역깡패들에 의해 침탈되어 폭력을 당했던 SJM 안산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녀들이 공장 밖으로 쫓겨나오게 되었을 때 SJM 남아프리카공화국 현지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견되어 대체 인력으로 투입하게 된 사태를 맞이하였다. 이때 남아공의 금속노조가 보인 연대가 바로 국제주의적 연대의 모범이 아닐까 생각한다. SJM 자본이 한국으로 보낸 남아공 노동자들을 돌려보내지 않을 경우 남아공 금속 노동자 총파업을 벌이고 거래처인 현대자동차를 압박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런 연대의 경험 속에서 노동자 계급이 갖고 있는 인종주의, 반이주민 정서를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의 양상, 우파의 불만을 통해 재현되는 불안의 징후들은 사회의 주체적 구성원들인 노동자들이 모종의 대안 이념과 사회를 재구성해나갈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 이택광은 사회 체제의 모순은 존재하는데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새로운 우파의 불만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간극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위기에 처한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제하는 것에 그 가능성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노동자 계급의 민주주의를 통해 간극 자체를 다시 응시하고 질서 재편을 도모하고자 하는 좌파적 도전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런 도전이 성공하려면 좌파에게나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에게나 각자도생의 길이 열려야 한다. 불만의 주체로 등장한 '새로운 우파'에겐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장이 열려야 하고, 노동자 계급에겐 불안정한 노동과 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 계급적 단결과 정치적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이런 노정 속에 대선이 놓여 있다. 이 두 권의 책을 덮은 후 우리는 무엇을 도모할 것인가? 그때 저마다 진보라는 기표가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서 말이다. 차라리 그때 우리는 '진보' 대신 다른 이름을 필요로 할는지도 모른다. 장석준은 그것이 '녹색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용에 있어서 좌파가 '생태주의'와 결합을 이뤄내는 것은 필연적인 과제일 게다. 그러나 당면한 정세에서 이름을 짓는 것에 앞서 중요한 것은 흩어져 있는 제 좌파가 우경화된 노선에 빠져 있던 대중 조직과 함께 힘을 모으고 2013년 이후 계급 투쟁의 비전이 있는 길로 '진보 진영'을 견인하는 것이다.

노동자 민중 대선 후보 전술에 대한 좌파 단위들의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다고 한다. 아무쪼록 '공동선'을 찾는 것에 주력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노조 조직률 10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의 노동조합도 없는,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민주통합당의 두 자유주의적 경향의 대선 후보 가 "저녁이 있는 삶"(손학규)이나 "사람이 먼저다"(문재인)라는 다소 모순적이며 인간주의적인 제스처를 내밀었던 것의 모순성을 있는 그대로 폭로할 수 있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위기와 생존 불안의 위기에서 좌파적인 대안이란 어떤 것인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드러내는 슬로건을 말이다.

바로 그 '공동선'을 찾아나가는 과정 속에서 '지금 여기'의 진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얼굴은 끔찍한 형상이었다. 2013년 이후 세계의 경제 상황과 급변하는 정세는 '진보'의 새로운 얼굴과 아래로부터의 꾸준한 실천을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최근에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노동자 운동의 혁신'에 대한 과제와 '민중의집', '태일이네', '노동자회관' 등의 이름을 한 사회 운동들이 그 양 날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홍명교 영화 노동자 메일보내기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