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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고구려 의상 벽화통해 생생히 재현

 

북, 고구려 의상 벽화통해 생생히 재현
 
평양민속공원서 전시회 열려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5/28 [07:59] 최종편집: ⓒ 자주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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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고구려시기의 고분벽화자료에 근거하여 새로 복원한 당시의 의상들이 재현 전시돼 관심을 끌고 있다고 조선신보가 전했다.

재일동포 신문인 조선신보는 “민속학연구사들은 세계문화유산인 고구려벽화무덤들을 비롯한 벽화들에 새겨진 인물풍속도들을 연구하는 과정에 당시 사람들의 기호와 풍속을 반영한 의상들을 제작하였다.”며 재현된 의상이 모두 40여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조선신보는 “태양절경축 고구려의상전시회가 4월 13일부터 평양민속공원에서 계속 열리고 있다.”며 “고구려인민들이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독특한 형태와 무늬, 색깔의 우아하고 소박한 옷들이 전시 되었다. 이번에 전시된 평민옷차림과 짧은치마저고리옷차림, 달린 옷차림, 귀족남녀옷차림 등은 고구려인민들의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고 소개했다.

이신문은 “어려서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를 비롯한 무술을 통하여 조국방위에 튼튼히 준비해온 고구려 사람들의 씩씩하고 늠름한 기상들이 호위무사들의 옷차림과 사냥꾼들의 옷차림들에서 나타나고 있다.”면서 “독특한 색깔로 목깃을 직선으로 따로 뽑고 허리띠를 졸라매게 한 옷차림은 전시회 참관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악대와 교예놀이를 즐긴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을 반영하여 예술인의상들도 복원 전시하였다“고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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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형형색색인 연주가의 옷, 뿔나팔을 부는 남자의 옷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고증한 독창가수의 옷, 남녀춤꾼의 긴 옷과 짧은 옷, 교예사의 옷, 불자춤꾼의 옷 등도 이채롭다.”며 “탈춤꾼의 옷과 남녀어린이옷, 머리 수건을 쓴 사냥꾼 옷, 푸른 나관과 뿔이 둘달린 책(모자)을 쓴 문관의 옷과 의장기수의 옷 등도 독특하면서 소박한 인상을 준다.”고 고구려 시대의 의상의 종류와 특성을 설명했다.

또한 “이번에 전시된 여자색동치마옷차림과 시녀와 귀족부인, 귀족들의 옷차림에 볼 수 있는 무지개색채와 벽돌무늬, 기와무늬, 고사리무늬들은 이전시기에 학술적으로 밝히지 못했던 것들이며 처음으로 복원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백라관을 쓴 왕의 옷차림과 배자에 초롱무늬를 반영한 왕비의 구름무늬치마는 고분벽화자료의 원색을 그대로 반영하여 우아하고 화려한 형태와 색깔로 완성하였다.”며 “의상의 복원은 고국원왕무덤벽화, 약수리 무덤벽화, 수산리 무덤벽화, 덕흥리 무덤벽화, 안악1, 2호무덤벽화 등의 자료에 근거하였다.”고 고증 자료의 출처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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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보는 “중국 길림성에서 발굴된 세칸 무덤벽화와 장천1호 무덤벽화, 춤 무덤벽화, 씨름무덤벽화 등의 자료들도 복원에 이용되었다.”고 전했다.

신문은 “민속학연구사들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봉건왕조의 의상들도 새로 고증하여 현물로 복원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알려 역사자료에 의한 고증을 걸쳐 전통 복식문화를 계승 할 것임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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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이 지경인데 한국은 어떨까?’

<서평> 우케루 저,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강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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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27 17: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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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 전 동국대 교수

아주 친한 고등학교 동기 중 일본 삿뽀로 대학에서 조선현대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있다. 그는 제주 4.3항쟁 당시 그 어린 나이에 토벌대에 의해 어머니께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이 천추(千秋)의 한을 안고 결국 고등학교 때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는 ‘만경대사건’ 이후 나에게 미국을 ‘건드리지 말라’라는 충고를 누누이(屢屢—) 해 왔다. 왜 그렇게 미국에 대해 ‘지나친’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국을 ‘건드리지 말라’라는 충고를 이해하게 되다

 

   
▲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표지 (마고사키 우케루 지음/양기호 옮김, 메디치: 2013)
그러나 나는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일본의 사례, 1945-2012년』, 이 책을 읽고는 그가 왜 나에게 그토록 간곡한 우려를 계속해 왔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아예 싹을 잘라버린다’는(crush in the bud) 말과 분할통치(divide and rule)라는 말이 무척 애용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원칙이 국제정치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적용된 나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국이 지배하는 일본인 것을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일부에서는 또 미국음모론이냐고 힐난할지 모르겠다. 마치 <아사히신문>이 처음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음모론으로 몰고 갔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독자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첫 서평을 철회했던 사례처럼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 외무성에서 영국, 소련, 이란 대사 등과 국제정보국장 등으로 36년간 재직했던 전직 ‘자주파’ 외교관이다. 퇴임 후에는 방위대학 교수, 대학 강사, 국제문제 언론해설자, 하토야마 수상의 외교브레인 등을 역임했다.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자료를 뒷받침하여 이 책을 펴낸 것으로 그의 주장과 논증이 충분히 객관화 될 수 있다고 본다.

일본에서는 수상이 왜 그렇게 자주 바뀔까?

이 책이 확인하고 시사 및 암시해 주는 미국의 일본 예속화를 위한 음모와 공작(주로 국무성과 CIA 등)의 중요 사례를 몇 가지 선택적으로 나열해 보겠다. 이 사례는 내가 평소에 의문을 품어 왔던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수상이 왜 그렇게 자주(9개월짜리 등) 바뀔까?

왜 일본은 독도, 댜오위다오, 쿠릴열도, 류쿠 등 영유권 분쟁이 많고, 지금 이 시점에서 동아시아 영토분쟁이 더욱 촉발되는가?

지진 일등국에 핵발전소가 세계 3위가 될 정도로 그렇게 많은가?

일급 전범들이 왜 면죄부를 받고 오히려 권력의 중심에 앉았는가?

왜 아시아 중시론자 정치인은 중도에 하차하고 마는가?

다나까 수상, 거물 정치인 오자와, 대(對)북한 수교에 앞장섰던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 등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았지만 결국 무죄로 귀결되는가?

대미 추종일변도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중시정책을 기치로 자민당 50여년 독재를 무너트린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이 왜 9개월 만에 하차하고, 함께 한 중국 중시론자인 오자와도 검찰의 공작에 의해 기소되었다 결국 무죄로 귀결되었지만 정치생명은 거의 끝나고 말았는가?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을 계승한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수상 등은 기존 당의 노선과 180도 회전해 친미와 종미(從美) 일색의 정책을 펼쳤나? 등등

미국의 공작과 음모에 의해 종미사회로 순치된 일본

이러한 의문들이 이 책을 통해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더 큰 소득은 일본이 이 지경인데 한국은 어떨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 점이다. 더 나아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과 민족자주를 위해서는 한국사회가 대미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더욱 절박하게 고민하게 했다. 한국의 정치, 군사, 외교, 학술, 언론, 경제 등의 권력들이 지금처럼 마냥 종미(從美) 일색으로 갔을 때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지를 이 책은 제대로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그는 오늘의 일본은 미국의 공작과 음모에 의해 사회 전체가 순치되어 종미사회로 생체화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 사회에 대미 자주파의 수상을 끌어내려 대미 추종파로 바꾸려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검찰이다... 다음으로 언론이다.”

또, 그는 미국의 공작에 의해 희생되는 일본 권력의 유형을 몇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점령군 지시의 경우, 검찰 기소와 언론 띄우기 경우, 내각을 붕괴시키는 경우, 당내 반대세력을 강화시켜 축출하는 경우, 대중 동원으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경우, 선거 패배 유도의 경우 등이다(370-371쪽).

이들은 주로 주일미군, 주일미군기지, 군사관련 일, 대중국 수교와 관계개선, 대북한 관계개선 등에서 미국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죄목’으로 공작의 대상이 되었다. 곧 미국에 ‘불경죄’를 저지른 탓이다.

이러한 불경죄의 범위는 1951년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앞두고 당시 미 국무장관 덜레스란 자가 그 기준을 제시한 것 같다. 그는 “미국이 일본에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만큼 주둔시킬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8쪽) 했다한다. 이게 관철된 게 바로 미·일안보조약이고, 주일미군 관련 지위협정이란다.

완전 닮은꼴이 바로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8월1일 덜레스가 체결하고 1954년에 발효시킨 한·미상호방위조약이고 이를 위한 한·미합의의사록이다. 60년이 지난 지금 이 조약과 의사록에 의거한 한미동맹은 박근혜 정부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자발적 의지에 의해 ‘자주적’으로 순치된 한국?

일본은 미국의 음모와 공작에 의해 종미사회로 순치되었다면, 한국은 이승만 이후 최고위 당국자 대부분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자주적’으로 순치되고 있는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7일 미국에서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아 동맹을 ‘21세기 전략동맹’으로 격상하기 위한 3대 비전을 제시했다. 한미동맹을 ‘통일한국 주춧돌동북아협력 기둥지구촌 번영의 지붕’으로 만들겠단다.

그러나 통일의 주춧돌은 민족자주여야 하고, 동북아협력은 비동맹 중립화를 기반으로 해야 하며, 지구촌 번영은 패권구조 타파여야 가능하다는 것을 이 책은 확인해 주는 듯하다. 또 3대 비전은 비전이 아니라 민족사 파탄의 길이란 우려가 더욱 더 나의 뇌리에 꽉 차 오른다.

끝으로, 미국에 대한 자발적 예속주의자들로 가득 찬 것으로 보이는 남한의 외교국방 고위관료 중에서도 이런 종류의 책을 펴낼 수 있는 굳세고 정의감 넘치면서 자주지향적인 ‘제2의 우케루’를 기대해 본다.

이 서평은 평통사 <평화누리 통일누리>(통권 125호)와 동시게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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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조금만 가져도 살 수 있는 방법

돈 조금만 가져도 살 수 있는 방법

 
임락경 목사 2013. 05. 26
조회수 170추천수 0
 

예부터 농사꾼들은 농산물 팔려고 농사짓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려고 농사지었습니다. 먹다 남으면 이웃끼리 나누어 먹고 그래도 남으면 다른 물건과 바꾸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물건끼리 바꾸다보니 불편해서 돈이 생긴 것입니다. 돈이란 처음부터 기계로 찍어 낸 것이 아니고 조개껍질(貝)을 대신해서 사용했습니다. 사람이(人) 거꾸로 서면(⼔) 변화가 됩니다(化). 조개껍질도(貝) 형태가 변하면(貨) 화패(貨貝)가 됩니다. 이것이 구리로 대신하다가(錢) 종이로(紙) 바뀌면 지폐가 되지요(紙貝). 이것을 우리말로 돈이라 합니다. ‘돈’이란 터진 입구(⼕) 밑에 망할 망자(亡)를 씁니다. 아무리 먹어도 입은 다물지 않고 많이 먹으면 망하는 것이지요. 돌고 돌면 돈입니다. 돈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면 됩니다.
 
농사한겨레류우종기자.jpg
*한겨레 류우종 기자
 
돈이 꼭 필요한 곳이 크게 3가지이지요. 병원비와 교육비와 노후 생활비입니다. 병원비는 병이 안 나면 됩니다. 정농만 잘하면 병이 안 납니다. 누구든지 병이 났다는 것은 정농을 잘못한 것입니다. 또 병이 났다면 병원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고칠 수 있는 병이 몇 가지 안 됩니다. 요즈음 제일 흔한 병인 아토피, 관절염, 암, 치질 병 모두 고치지 못합니다. 고쳐도 재발합니다. 병원 문제만 해결하면 돈이 별로 없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아닙니다.
 
그다음 학비 문제입니다. 학교 이제는 좀 다시 생각할 때가 왔습니다. 농사지으려면 그렇게 교육 많이 받지 않아도 됩니다. 정부에서 의무적으로 배우라는 교육을 무료로 가르쳐 주는 학교만 마치면 됩니다. 더 배우고 싶으면 정농인들 끼리 서로 배우고 가르치면 됩니다. 같이 모여서 생각(연구)할 일 있으면 이번에 모이는 여름 수련 장소를 활용하면 됩니다. 돈 없어도 배울 수 있고 돈 안주어도 가르칠 수 있는 정농인들 끼리 서로 모여서 생각하는 곳이 필요해서 그렇게 활용할까 합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아닙니다.
 
세 번째가 노후 생활 문제이지요. 농사짓고 있으면 늙은 줄 모릅니다. 늙어 80세 넘어도 농사일 잘 하고 사시는 정농회 노인들 많습니다. 움직이지 못할 때 몇 달만 자녀들이 돌보아 주면 됩니다. 그 자녀들이 농사짓고 있으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누구든지 자녀를 농부 만들기에 힘써야 합니다. 자녀들을 농부 만드는 정농인들은 성공한 정농인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실패한 정농인이라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아닙니다.
 
이렇게 3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돈은 조금만 가져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차비 없으면 정농회도 나오지 마십시오. 회비 없으시면 회비도 내지 마십시오. 바른 농사만 짓고 사시면 서로 찾아갑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아닙니다.
 
이제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상입니다. 수입농산물 안 먹으면 됩니다. 먹으면 병이 납니다. 농산물이란 유통기간이 무척 짧습니다. 시골에서 서울 가는데 하루는 너무 긴 시간입니다. 깻잎 따서 서울 가는데 반쯤 시들었습니다. 미국 중국에서 오려면 약품 처리해야 하지요. 말린 농산물이나 가공농산물은 방사선 조사(放射線照射, radiation irradiation)를 한답니다. 조사란 검사가 아니고 비칠 조(照) 쏠 사(射) 자를 씁니다. 무슨 광선을 비치고 화살처럼 쏜답니다. 60억조의 미세한 화살로 쏜답니다. 이 농산물은 살을 맞아 싹도 나지 않고 곰팡이도 피지 않고 썩지도 않는답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지요. 더욱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먹으면 병이 고쳐지지 않고 더 심해진다고 합니다. 수입농산물 먹지 않으면 간단합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아닙니다.
 
공부 적당히 하고 병원은 꼭 필요할 때만 가되 가능하면 가지 말고 병들지 말고 늙으면 간단합니다. 그렇지만 해결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정농회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바른 농사만 지으면 멸망하지 않고 오래오래 살(永生) 것이다.
 
농사함양군제공.jpg
*출처 : 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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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락경 목사
개신교 목사. ‘맨발의 성자’로 불렸던 이현필(1913~64)과 류영모의 제자인 영성 수도자이다. 30년째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는 사회복지가이자 유기농 농부 겸 민간요법계의 재야 의사. 군인으로 복무했던 강원도 화천에 터를 잡아 1980년부터 시골교회를 꾸려가면서 중증장애인 등 30여명을 돌 보는 한편 유기농 된장과 간장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메일 : sigolzzi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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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충'도 자신들 주장이 거짓인 것 알고 있다"

[이철희의 이쑤시개]<19> 한홍구·서해성, '일베'와 '5.18'을 논하다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5-26 오전 10:58:20

 

 

지난 22일, 형사들이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 아주 작은 박물관에 들이닥쳐 압수수색 영장을 들이밀었다. '정의로운 시민행동'이라는 이름단체 대표를 자처하고 있는 정 모 씨가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기부금법)' 위반 혐의로 평화박물관고발한 사건 때문이었다.

평화박물관은 지난해 유신을 기억하자는 취지로 홍성담 화백의 이른바 '박근혜 풍자 그림'을 전시했다. <골든타임-닥터 최인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경례하다>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박근혜 대통령 지지 단체 및 새누리당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맞았다. 평화박물관을 고발한 정 씨는 '고발 전문가'인 것처럼 보인다. 정 씨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는 그간 정 씨가 고발했던 단체들과 관련된 '고발 접수증 인증샷'들이 다수 올라와 있다. 노무현재단,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도 등도 역시 정 씨의 '고발'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는 이 같은 시민사회 단체들을 "종북 좌파" 세력으로 규정하고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관련 기사 : '박근혜 출산' 풍자 그림 논란)
 

 

▲ 홍성담_<골든타임-닥터 최인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경례하다> 194×265cm, 캔버스에 유채, 2012. ⓒ평화박물관


평화박물관의 상임이사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그는 지난 24일 <프레시안>이 제작하는 팟캐스트 <이철희의 이쑤시개>에 소설가 서해성 성공회대 외래교수와 함께 패널로 출연해 "평화박물관 압수수색은 박근혜 정부 하 사정기관의 창조적 압수수색"이라고 비판했다.

서해성 교수는 "평화박물관은 평화 운동문화 운동을 겸하는 조직인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게 표현 활동이다. 몇십 만 명 동원해 데모하는 곳도 아닌데, 압수수색을 하는 것은 결국 표현 활동 위축시키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 교수는 관련해 "법적인 대응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씨는 왜 고발했고, 경찰은 왜 압수수색을 했을까. 사실상 그 단초를 제공한 것은 대선 기간에 전시됐던 홍성담 화백의 그림이다. 한 교수는 이 그림을 전시하게 된 배경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유신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와 관련해 전시회 기획을 했다. 당시 홍성담 화백에게 '그런 그림을 그려달라'고 한 것도 아니다. 다만 '대중들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이 된다면 그것은 유신의 부활을 알리는 것이라는 의미의 그림이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는 했다. 그리고 그림을 전시했다. 이후 나는 그 (그림 속에 담긴) 컨셉을 가지고 무수히 많은 강연을 했다. '박근혜의 당선은 유신의 부활이고 박정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박정희가 부활하는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런 말들을 했는데 (그 그림의 의미를 말로 한 나는) 아무 일이 없었다. 제 생각에 예술작품을 전시 공간에 건 것을 선거법으로 도저히 걸수 없으니까 그 사람이 엉뚱한 것으로 저희 단체를 걸게 된(고발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홍구 교수는 이어 "이 정권(박근혜 정부)이 출발할 때도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등) 엄청난 범법 의혹들이 나와서 고발되고 했는데, 그에 합당한 정도의 압수수색 조치가 있었나"라고 반문한 후 "우리는 재정과 관련해 홈페이지에 다 공개하고 있다. 이미 공개돼 있는 것을 두고 압수수색을 하니까 과잉수사라고 하는 것이다. 앞으로 법의 형평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볼 것"이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경찰이나 검찰은 (기부금법을) 아주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투명하게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수사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은 하지 않는다"면서 "다만 회원 여러분께 송구하다. 저희는 더 열심히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 위축되지 않고 평화와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아주 창조적인 압수수색이었다.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컴퓨터 뜯어가지 않고 서랍을 다 열어보고 그렇지는 않더라"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서해성 교수는 "이 일로 한 교수나 평화박물관이 법원에 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고발 및 수사)을 통해 평화박물관에 회원 가입을 못 하도록 하는 것을 노리는 것 아니겠느냐. 박근혜 정부 출범하고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는데, 시민단체에 대한 첫 번째 선물이 압수수색이었다. 시민사회 단체도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의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해성 교수는 "만약 경찰 등 사정기관의 논리라면 (회비 받고 있는) 보수단체들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계 모임 등 다 고발당해야 한다. 앞으로 등산 갈 때도 돈 걷으면 안된다"고 지적하며 "그분들의 정치적 해프닝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공권력이 움직였다는 게 문제다.
 

 

"'일베충'도 자기 주장이 '거짓'인 것 알고 있다"?

한 교수와 서 교수는 <이철희의 이쑤시개>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베(일간베스트)' 문제에 대한 분석과 함께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뒷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특히 서 교수는 '일베'에 대해 "'일베'의 중요한 특성은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도 그게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재밌다"라고 말했다.

"87년, 광주항쟁의 진실이 대선의 중요한 화두가 됐었다. 당시 야당은 노태우 후보가 광주 학살의 주범이라고 공세를 폈다. 그때도 (노태우 지지자) 사람들은 '에이 그랬겠느냐'고 했다. 노태우 지지자는 안 믿고자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광주 이야기는 전 국민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태우를 지지해야 하니까, 그런 사람들은 광주를 알면서도 처음에는 '아닐 거야' 하는 것이다. '아닐 거야'가 '아닌 거야'로 됐다가 '아니잖아' 이렇게 바뀌는 거다. (일베) 사람들도 광주에 대해 알고 있지만 비아냥거리는 행위 자체를 (서로) 인정을 한다. 최초에는 죄를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재밌어한다. 그러다 보면 사실이 아닌 것을 믿어주는 사람이 생긴다. 그러면 본인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일베' 사람들도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서 교수의 분석이다. '일베', '5.18', '임을 위한 행진곡' 등 5월을 맞아 논란이 됐던 '역사 논쟁', 보다 자세한 내용은 팟캐스트 <이철희의 이쑤시개>에서 들을 수 있다.

<이철희의 이쑤시개> 바로가기 클릭! http://pressian.iblug.com/index.jsp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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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역사훼손 신고센터'에까지... 무차별적인 일베의 막말

실명 인증에도... "5·18은 폭동이야, 홍어들아"

'5·18 역사훼손 신고센터'에까지... 무차별적인 일베의 막말

 

 

기사 관련 사진
광주광역시 누리집에 마련된 5.18 민주화운동 역사왜곡,훼손사례 신고센터의 게시글 제목이다. 일베에서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과 5.18 희생자들을 '홍어'로 비하하는 등의 내용과 비슷하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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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구한 전 장군 만세~ 5.18 효과적으로 진압 안 했으면 제2의 6.25 일어났음"
"5.18은 폭동이야 홍어들아. 팩트로 봐도 폭동이고"
"원래 폭동이었던 걸 민주화운동으로 왜곡해놨으니 바로잡으려는 거지"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의 게시글이 아니다. 광주광역시 누리집에 마련된 5·18 민주화운동 역사왜곡·훼손사례 신고센터(이하 신고센터) 게시글의 제목이다. 신고 내용과 이름은 비공개지만 제목을 보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쉽게 파악된다. 일베에 게재된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과 5·18 희생자들을 '홍어'로 비하하는 등의 글의 내용과 유사하다.

'5·18 역사훼손 신고센터'를 향한 '일베'의 역습

광주시는 '5·18역사왜곡대책위원회(가칭)'을 발족한 뒤, 인터넷과 종합편성채널 등에서 자행되고 있는 역사왜곡을 근절하고자 신고센터를 개설했다. 특히 사법적 대응에 필요한 증거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지난 24일 오후 6시부터 열린 신고센터에는 26일 정오까지 총 1100여 건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신고자 대부분은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내용이 게시된 블로그와 인터넷 댓글, 개인 운영 사이트 등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1100여 개 중 일부 20여 개는 이같이 5·18을 왜곡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항해 일부 누리꾼들이 "신고센터 생기니 보란 듯 더하는 것은 무슨 심보", "지금 여기서 나대는 일베충들은 실명제라는거 모르나?"라며 이들을 맹비난했다. 하지만 다시 "졸렬하게 여기서 여론몰이하지 말고 걍 바로 일베로 쳐들어와라ㅋㅋ", "광주 여러분 그렇게 떳떳하면 우리한번 재조사할까요?", "아따 니 의견이 내와 다르면 왜곡이랑께~"라며 맞불을 놓았다.

최근 일베는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국이 개입했다고 왜곡된 주장을 펼치는가 하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사진을 유포하는 등 위험수위를 넘어선 몰상식한 행동으로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다. 일베와 함께 '5·18 북한군 개입설'을 보도했던 종합편성채널 <채널A> <TV 조선>은 이를 사과했지만 일베 이용자들의 행태는 여전하다.

실명 인증 거치고도 막말? 주민번호 도용 가능성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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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는 '5.18역사왜곡대책위원회(가칭)'을 발족해 인터넷과 종합편성채널 등에서 자행되고 있는 역사왜곡을 근절하고자 5.18역사왜곡·훼손사례 신고센터를 개설했다. 특히 사법적 대응을 위한 증거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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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같은 글이 실명인증을 거쳐 작성됐다는 점이다. 신고센터에 글을 등록하려면 이름과 주민번호를 확인하거나 공공 I-PIN 인증을 해야 한다. 일베에서는 신분인증 없이도 게시글 등록이 가능하지만, 신고센터에선 신분인증을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같은 글을 게시했다는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이런 글을 게재한 이용자들이 주민번호를 도용했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광주시청 관계자는 "본인 인증이 필요없는 일베와 다르게 인증을 통해 책임감 있는 사례를 신고 받으려고 했지만 무책임한 막말이 게시됐다"며 "IP분석을 통해서 이용자를 추적한 후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신고센터에 남겨 놓은 일베의 막말도 5·18 역사훼손의 사례로 수집해 활용하겠다"고 덧붙였다.

"예상 가능했던 일...조롱으로 신고센터 무력화하려는 것"

이같은 일베의 활동이 예상가능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베 이용자들의 행동 방식을 살펴보면 신고센터에서의 활동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베 이용자들은 일베를 비판하는 뉴스, 게시글에 댓글을 달아 이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일베 비판을 무력화한다는 것이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 NGO학과 교수는 26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일베 막말의 주요 정서는 조롱"이라며 "일베 입장에서 광주시가 신고센터를 만든 것은 일종의 대결을 선언한 셈"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일베가 신고센터에 글을 올려 조롱함으로써 센터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민 교수는 일베 이용자의 주민번호 도용 가능성은 낮다고 지적했다. 민 교수는 "누리꾼들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념, 역사 문제에서 신분을 밝혔던 경우가 많았다"며 "일베 이용자의 신고센터 글도 자신을 직접 까발려 놓고 글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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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비자금 수사팀, 알고 보니 변호사와 한솥밥 먹던 사이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5/27 08:35
  • 수정일
    2013/05/27 08:3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CJ그룹 오너 일가의 비자금 조성 의혹 수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비자금을 가지고 벌인 해외 조세회피처를 통한 재산은닉과 주가조작, 국세청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 등에 관한 수사와 함께 이재현 회장 등 CJ그룹 오너에 대한 수사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CJ그룹 비자금 관련 수사가 연일 언론에 나오고 있지만, '아이엠피터'는 과연 이들에 대한 수사가 철저하게 진행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재벌그룹 회장에 대한 수사는 제대로 된 사법처리와 구형 결과가 국민이 납득할 수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CJ그룹 이재현 회장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CJ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여부를 판단하는 자료를 조사해봤습니다.

' 역대 최대 규모의 막강 변호인단이 나섰다'

CJ그룹은 검찰이 진행하고 있는 차명 자금은 비자금이 아니라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이재현 회장 개인 재산이었으며, 검찰이 주장하는 CJ그룹의 비자금 주가 조작은 단순한 주가 관리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검찰이 비자금 조성뿐만 아니라 비자금을 움직여 더 많은 이익을 만들었던 정황까지 포착하고 나오자 CJ그룹은 재벌을 타겟으로 하는 표적 수사라면서 이를 막아내기 위해 역대 최대 규모의 막강 변호인단을 구성해 방어에 나서고 있습니다.

CJ그룹은 지난 5월 21일 검찰의 압수 수색이 이루어지자마자,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과 광장에 변호를 의뢰했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김앤장과 광장 모두가 CJ그룹 비자금 수사 변호에 나선 것입니다.

특히 CJ그룹은 부산고검장을 지낸 박상길 변호사를 팀장으로 막강 변호인단을 구성했는데, 이들 변호인단을 보면 거의 환상에 가깝습니다.


 


CJ그룹 변호인단을 보면, 검찰총장 후보까지 올랐던 천성관 전 서울지검장,차동민 전직 대검차장, 박용석 전직 대검차장, 박철준 서울지검 1차장,남기춘 서울서부지검장,지익상 인천지검차장 등 대부분 검찰 최고 간부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CJ그룹 변호인단은 단순히 검찰 고위 간부 출신 변호사가 아닙니다. 특히 재벌 수사를 전담했던 전직 대검 중수부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박용석 변호사는 태광그룹 수사를 했던 검사이고, 박철준과 남기춘 변호사는 한화그룹 비자금을 지익상 변호사는 삼성비자금을 각각 수사했던 검사들이었습니다.

결국, 검찰이 진행했던 재벌 수사의 수사팀이 모두 변호인단으로 구성됐다는 사실은 그들이 어느 변호사들보다 검찰 수사를 잘 막아낼 수 최고의 방어막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기춘 사단, 수사 노하우를 알려준 선후배'

검찰 내에는 '남기춘 사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CJ그룹 비자금 수사 변호인단에 합류한 남기춘 변호사의 검찰 시절 별명 중의 하나입니다.

남기춘 변호사는 검찰 강력부, 특수부,중수부 등에서 수사했던 검사 출신으로 2002년 한나라당 대선자금을 수사했으며, 삼성구조본부의 압수 수색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2010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을 수사했던 인물로, 당시 수사에서 가혹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신뢰가 두터웠던 인물입니다.

검찰에서는 남기춘 검사의 수사 방식이 체계적이면서 독종이기에 그의 수사 기법을 따라 하거나 남기춘 수사팀에 있던 검사들을 가리켜 '남기춘 사단'이라 부르며 그들의 수사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CJ그룹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윤대진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과 검찰 내 특수라인들은 대부분 '남기춘 사단'에 속했던 인물로, 현재 진행하고 있는 CJ그룹 수사 기법 또한 사실은 남기춘 변호사가 검사 시절 전수해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검찰이 잘 쓰고 있는 무기를 전수해준 인물이 변호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번 수사를 지휘하는 조영곤 서울지검장과 박정식 3차장 검사는 박용석 변호사의 경북고,서울대 후배이기도 합니다.

학연,지연,전관예우까지 갖춘 CJ그룹 비자금 변호인단의 구성을 보면 검찰의 CJ그룹 비자금 수사가 과연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조사한다고 해도, 검찰 내부를 뻔히 알고 있는 인맥을 활용한다면 아마도 검찰 수사 방향에 대한 변호인단의 방어를 검찰이 넘지 못하리라는 예상도 할 수 있습니다.

' 검찰, 그들만의 성공 노하우'

원래 남기춘 변호사는 검찰에서도 신뢰받는 검사였습니다. 2003년 한나라당 대선자금을 수사했던 안대희 중앙수사부장은 남기춘 검사를 가리켜 "남기춘 같은 애들을 챙겨야 해서 내가 검찰을 못 떠난다"면서 남기춘 검사를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독종','특수통'이라고 불렸던 이들이 검찰을 떠나면서 간 곳은 뜻밖에 그들이 수사했던 새누리당이었습니다.

 

 

▲남기춘 위원장은 '전관예우 금지법'이 발효되는 날에 서울서부지검장을 사퇴하고, 한 달만에 서울서부지검 사건 변호를 맡기도 했다.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은 정치쇄신특별위원회를 조직 운영했습니다. 위원장으로는 전 대법관 안대희가 위원에는 남기춘 전 서울서부지검장이 활동했었습니다. '차떼기당'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준 검사가 새누리당에 들어가서 정치를 쇄신하겠다고 수사했던 범죄자 집단에 들어간 것입니다.

새누리당 '클린정치위원장'을 맡았던 남기춘 변호사는 남기춘 사단'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재벌을 수사했던 강직한 검사로 새누리당 이미지에 이바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남기춘 변호사는 자신이 수사했던 한화그룹,태광그룹을 변호하는 '김앤장'에 합류했으며, 또다시 CJ그룹 비자금을 수사하는 후배와 특수부 검사들을 막기 위해 CJ그룹 변호인단에 합류한 것입니다.

 

 

▲CJ그룹 비자금 변호인단에 합류한 박철준 변호사 이력, 출처:법무법인 광장 홈페이지

 


이번에 CJ그룹 비자금 변호인단에 합류한 박철준 변호사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수사에서 사전 구속영장까지 청구했던 재벌 수사 검사였습니다. 그런데 퇴임하고 법무법인 광장에 합류한 그의 이력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무죄 선고 받은 사례에 보면 저축은행 대표이사의 거액 배임수재 수사 등이 있었으며, 대기업 회장을 비롯한 대기업 전문 변호사라고 나와 있습니다. 재벌을 수사했던 풍부한 경험이 결국 퇴임 이후에는 대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공공의 적2'를 보면 강철중 검사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검찰 내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학 재벌 범죄자를 잡아내는 독종 검사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받았습니다. 현실에서는 어떠할까요?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검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사회의 거악을 척결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특수사건 수사를 많이 할 경우 개인적으로 어려운 경우에 처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지만 검사들은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수사에 대해 자부심을 잃지 말고 의무를 등한시하면 안된다"

위의 말은 지익상 전 인천지검장이 검찰을 떠나면서 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익상 검사는 어디에 있을까요? 법무법인 '김앤장'에 있으면서 이번 CJ그룹 비자금 변호를 맡았습니다.

CJ그룹의 비자금 수사를 보면 주가조작,세금 포탈, 로비,조세 회피 등 사회의 거악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악을 척결하는 임무를 맡았던 검사가 이제 그들을 위해 엄청난 돈을 받고 변호에 나선 것입니다.

재벌 수사 검사에서 정치계로 또다시 재벌 변호인단으로 변신하는 이들을 보면서 과연 지금 CJ그룹을 수사하고 있는 수사팀도 언젠가는 똑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CJ그룹 비자금 수사보다 검찰을 먼저 개혁하지 않으면 법치국가라는 말은 무색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법보다 돈이 무지무지 센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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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년, 한미동맹 60년

정전 60년, 한미동맹 60년

 

<칼럼> 노중선 통일뉴스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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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27 0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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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선 / 통일뉴스 상임고문

전쟁과 냉전의 쌍생아적 산물

올해는 정전 60년이고 한미동맹 60년이다. 그것은 곧 8.15에서부터 정전까지의 8년이 분단 설정 과정이었다면 그 이후 정전 및 한미동맹 60년은 내외적 한반도 분단 세력에 의한 분단 고착화 기간이었다. 한편 한반도 분단세력과 평화적 자주통일세력의 대립 갈등으로 이어진 남북 및 북미간 대결의 60년이기도 하다.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모두 한반도의 전쟁과 냉전을 모태로 해서 불과 10여일의 시차를 두고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의 한반도 지배 정책의 쌍생아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8월 8일 서울에서 가조인된 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되었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됐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규정의 핵심은 제2조 13항의 군사인원 증원 금지 및 각종 군사 장비와 탄약의 한반도 영내 반입 금지, 그리고 제4조 60항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한 참전국 정치회담을 3개월 내에 소집하여 외국군대 철거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협의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미 당국은 정전협정의 금지 규정에도 불구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래서 그에 따른 미군의 상시적 남한 주둔, 핵무기 등 각종 군사장비 반입과 연례적인 한미합동군사훈련 강화를 불러왔고 이는 필연적으로 남북갈등과 적대적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한반도 평화 정착의 길이 가로 막혀 평화협정 문제와 관련해서는 논의조차 해보지 못한 채 늘 긴장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내용은 한미 양국 중 어느 1국이 외침 위협을 받을 때 그에 대한 방지 조치, 외침에 대한 공동투쟁 전개 선언, 그리고 “양국은 미 육․해․공군을 한국 영토에 배치하는 권리에 대해 한국은 이를 허용하고 미국은 이를 수락한다”, “이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며 이 조약을 폐기하고자할 때는 그 의사를 상대국에 통고한지 1년 후에라야 폐기할 수 있다”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한미동맹은 남한에서 주한미군의 영구주둔과 무기한적 기지 사용이 가능하게 하였고 그 결과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미국은 유엔에서의 토의 및 결정의 절차 없이도 즉각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분단 유지의 두 축

이와 같이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두 축의 버팀목이 한반도에서 전쟁도 평화도 아닌 불안정한 분단 상태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전협정에서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즉 한미동맹에서는 남한 역대정권의 외세공조가 한반도 분단 유지의 본질적 요건으로 되고 있다.

그래서 북에 대한 변치 않는 적대감을 갖고 있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은 곧 우리 민족의 분단과 그 이후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한 긴장 및 전쟁위기의 출발점이었다.

이 같은 적대 관계 60년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며, 냉전종식 직후 이른바 4강에 의한 교체승인론에 따라 소련과 중국은 남한 정권과 수교를 했지만 미국과 일본은 오늘에 이르도록 북과 수교를 하지 않고 있는 것에서도 대북관계의 불공정성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또한 이승만의 분단 정권 이래 현 정권의 ‘한미동맹 60주년기념 공동성명’에 이르기까지 대미의존적 한미동맹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곧 남한 역대정권의 대미예속화를 의미한다.

이 같은 대미의존적 예속화는 군사작전권까지도 주둔외국군 사령관에게 넘겨져 그야말로 세계적 유례가 없는 치욕일수밖에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통일을 이루어 함께 살아가야할 한 핏줄의 동족을 적대하는 나라와 동맹관계라면 이미 남한 정권에서의 통일문제 거론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탈냉전 시대와 민족 공조

분단과 그 유지 과정에서 비롯된 우리 민족의 불행한 모습은 두 가지 현상에서 확인된다.

우선 정전과 한미동맹은 60년 전 전쟁과 냉전의 산물이고, ‘냉전종식’은 1989년 12월 미국과 소련의 정상이 몰타에서 합의 선언한 이후 20여년이 지난 이미 낡은 유물이다. 그런데도 한반도 정전체제는 아직도 평화협정으로 대체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6.15남북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10.4선언에서는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 한다”라고 이미 남과 북의 선임정권 최고지도자들은 ‘우리민족끼리’와 ‘평화체제 구축’을 합의 선언했는데도 아직도 민족공조는 요원한 형편이다.

그렇다면 이제 “평화협정 체결하여 평화체제 수립하자”는 각계의 절규와 대중적 의지를 반영하여 탈냉전과 ‘우리민족끼리’의 시대에 걸맞게 한반도의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시급히 구축해야할 시점이다.

여기에서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언제가 됐건 우리 민족의 문제는 ‘우리민족끼리’의 화해와 협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결코 외세와의 동맹을 통해서는 명실상부한 평화적 자주통일을 기대할 수 없음이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엄중한 현실은 동족에 대한 적대정책과 외세와의 공조는 곧 긴장 격화와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대적 역행의 길이고 ‘우리민족끼리’의 화해와 협력의 이행 실천은 평화 정착의 길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냉전시대의 정전협정은 통일시대의 평화협정으로 대체가 화급하고, 그것은 소수 집단의 희망이 아니라 21세기 미래를 향한 다수 대중 요청이다. 따라서 그 어떤 패권적 강대국이나 분단유지 세력이라고 하더라도 더는 미루거나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다.

앞으로 한반도 평화 정착과 우리 민족의 통일은 반드시 ‘우리민족끼리’의 기초위에서 다수 민족구성원 대중의 단합과 헌신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개성공단이든, 금강산 관광이든, 또 다른 어떤 형태로의 남북교류이든 그리고 정권 당국간의 교류 접촉이든, 남북공동행사든 ‘우리민족끼리’의 기조는 유지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오늘과 같은 전쟁위기에 직면한 다수 대중의 절박한 요구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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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을 방문한 사연

 

[한호석의 개벽예감](64) 어느 쪽이 특사파견 요청했을까?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3/05/26 [02:03] 최종편집: ⓒ 자주민보
 
 

어느 쪽이 특사파견을 요청하였을까?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자신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한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2013년 5월 24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예방하고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를 전하였다.

최고지도자가 파견한 고위급 특사가 방문국의 최고지도자를 예방하고 친서를 전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외교관례다. 그런 외교관례의 의전절차는 특사파견 이전에 양측 사이에서 합의되어야 하며, 만일 의전절차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특사를 파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남측 언론매체들은 이번에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런 ‘예측’이야말로 국제적 외교관례도 모르고, 북과 중국의 특별한 우호관계도 모르는 무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중국 국가주석이 파견한 특사가 평양에 가는 경우에도, 김정은 제1위원장을 예방하고 친서를 전하게 되는 것이다. 북과 중국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그 두 나라 사이의 특사파견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외교관례에 따라 진행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최룡해 총정치국장을 자신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한 것은 국제적 외교관례에 따른 특사파견을 사전에 요청하고 그 요청이 수락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과 중국 가운데 어느 쪽이 특사파견을 요청하였고, 어느 쪽이 특사파견 요청을 수락하였을까 하는 문제다.

2013년 5월 24일 <뉴욕 타임스>는 중국 분석가들의 견해인 것처럼 얼버무리면서 “지난 몇 달 동안 북이 베이징 회동을 요청해왔으나, 중국 지도부가 그 요청을 거부해왔다”고 서술함으로써 마치 북이 중국에게 특사파견을 간청해오다가 이번에 중국의 허락을 받아 특사를 보낸 것처럼 보도하였지만,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른 엉터리 보도다. 그런 엉터리 보도와는 정반대로, 특사파견을 요청한 쪽은 중국이었고, 특사파견 요청을 수락한 쪽은 북이었다.

이번 특사파견을 어느 쪽에서 요청하였는지에 관한 정보는 북에서나 중국에서 전혀 보도되지 않았지만, 아래와 같은 작금의 동향을 분석해보면 중국이 북에게 특사파견을 요청한 것이 자명해진다.

북은 중국에 특사를 파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북은 이미 ‘조국통일대전’을 선포하였고, 그것을 위한 결전돌입태세를 취하고 있으며,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병진시키는 전략노선을 내외에 천명한 바 있다. 북의 이러한 단호한 태도와 결심은 북이 중국에 특사를 보내는 외교적 행동단계를 완전히 넘어섰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러한 북과 달리, 중국은 북을 상대로 특사외교를 펼쳐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떠밀려갔다. 중국이 처한 상황은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첫째, 누구나 짐작하는 것처럼, 중국은 북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중국은 미국의 북침전쟁도 당연히 반대한다. 전형적인 양비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은 자기의 양비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지는 못한 채, 북과 미국이 서로 충돌을 자제하면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식으로 말해왔다.

그런데 중국은 자기의 양비론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말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미국이 지난 몇 달 동안 대북적대정책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북을 극도로 자극하였고, 미국의 그런 극단적인 적대행위를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북은 미국과 최후 결전을 벌일 태세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최후 결전에 관한 북의 발언들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한 중국은 얼마 전 미국이 두 달에 걸쳐 감행한 대북전쟁연습을 끝내자, 이제 북이 최후 결전을 개시할 때가 임박하였구나 하는 심각한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절감한 당면과제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대화와 협상을 재개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북미관계에 조성된 전쟁위험부터 일단 막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 처한 중국으로서는 북측 고위급 특사의 중국 방문을 요청하여 물리적 충돌 직전에 이른 북미관계의 살벌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 2013년 5월 23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이 오는 6월 하순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고 발표하였고, 이튿날 청와대도 같은 내용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중국이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관해 발표하기 하루 전인 5월 22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특사로 파견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우연하게 이어진 시간적 연속이 아니다.

중국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가 자국에 도착한 직후에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예정되었음을 발표한 것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대북관계와 대남관계를 적절히 조절하는 중국의 외교술이었던 것이다.

2013년 5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은 언론사 정치부장들과 함께 만찬을 나눈 자리에서 “중국이 방문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이른 시점에 중국을 방문하려고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박근혜 대통령도 바라고 있었던 일이고 중국도 바라고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만일 북과 중국이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리면, 중국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북의 6자회담 폐기와 핵보유 문제를 둘러싸고 북과 중국이 갈등을 빚고 있다고 하면서 두 나라 사이를 이간하려는 여론이 미국과 남측에서 일렁이고 있는 판에, 만일 북과 중국이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리면 미국과 남측은 북과 중국의 전통적 우호관계가 완전히 깨졌다는 선전공세를 퍼부을 것이고, 중국으로서는 그 공세에 반박할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다.

북의 6자회담 폐기 및 핵보유 문제와 ‘조국통일대전’ 선포 문제를 둘러싸고 북과 중국 사이에 심각한 이견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두 나라 사이에서 그런 외교갈등은 이번에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그 두 나라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비록 전통적인 우호관계라고 하더라도 양측의 국가적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외교갈등을 겪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상사’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시기 북과 중국 사이에서는 오늘 양측이 겪고 있는 견해충돌보다 훨씬 더 심각한 갈등도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외교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북과 중국이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저버리는 것은 아니며, 두 나라는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저버리고 싶어도 저버릴 수 없는 ‘숙명적 관계’에 있다.

그렇지만 북을 고립상태에 몰아넣으려는 미국은, 이번에 북과 중국 사이에서 일어난 견해충돌을 전통적 우호관계의 파탄이라고 왜곡선전하여 북을 고립시키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그런 속셈을 모를 리 없으며, 미국의 그런 속셈을 못 본 척하고 방치할 리도 없다. 바로 이것이 중국이 남측과 한중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북에게 고위급 특사방문을 서둘러 요청한 배경이며, 북의 고위급 특사가 베이징에 도착한 이튿날 중국이 한중 정상회담이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한 배경이다.

셋째, 중국의 <인민일보> 2013년 1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1월 23일 박근혜 당선인 특사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희망한다. 중국은 대화와 협상을 통해 당사국들의 관심사가 균형 있게 해결되고 반도의 비핵화와 장기적 안정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넉 달이라는 시차를 두고 있지만, 중국은 자기의 6자회담 재개의사에 대한 동의를 남과 북 양측으로부터 모두 받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넷째,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3년 6월 7∼8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게 되는데, 그 회담은 그가 국가주석에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되는 미중 정상회담이다. 따라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첫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미관계에 조성된 전쟁위험을 완화하고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다시 협상으로 끌어낼 어떤 현실적인 제안을 꺼내놓아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런 제안을 꺼내놓으려면,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우선 북과 의견을 교환해야 하며, 북으로부터 6자회담 재개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야 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서둘러 요청한 것이다.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인 북의 외교술

위에서 언급한 맥락을 살펴보면, 이번에 남측과 한중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북에게 고위급 특사방문을 서둘러 요청한 중국이 북의 고위급 특사방문에서 기대한 것은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에 동의를 표시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중국이 북에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요청하였으므로, 베이징에 도착한 북의 고위급 특사를 최상의 예를 갖춰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로 특별비행기를 타고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중국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부부장을 공항에 보내 영접하게 하였고, 대외연락부 부장과 회담하고, 정치국 상무위원과 회담하고,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과 회담하고,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하는 순으로 방문일정을 진행하였다. 중국으로서는 최상의 예를 갖춘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고위급 특사를 파견해달라는 긴급 요청을 받은 북은 중국이 특사파견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2013년 5월 23일 인민대회당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류윈산 상무위원을 만나 회담하면서 “조선은 중국과 함께 조중관계를 부단히 발전시켜나가기를 희망한다. 중국이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 조선반도 문제를 대화의 궤도로 올려놓기 위해 기울인 거대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조선은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련국들과 대화에 나서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북이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화에 나서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북이 최후 결전 태세에 진입한 상태에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흔들림 없이 추구하겠지만,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이 바라는 대화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발언에 담긴 뜻은, 만일 중국의 건의가 없었다면, 북은 대화에 나설 용의를 표명하지 않았을 텐데, 중국이 대화를 재개할 것을 북에게 건의하였기 때문에 대화에 나설 용의를 표명한다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그 발언은 대화 재개를 요청한 중국의 체면을 세워준 외교적 발언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이튿날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하면서 “조선은 유관국들과 공동으로 노력하여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6자회담을 통해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하지 않고,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한 것이다.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과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한 것은,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기 바라는 중국의 입장에 부합되는 게 아니다.

북은 이미 오래 전에 6자회담이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하고, 6자회담에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였으므로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또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채택하고, 핵보유국의 지위를 자국법으로 공고히 하였으므로 미국과 중국이 바라는 북의 핵무기 폐기는 북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다.

그렇지만 북은 6자회담 재개를 절실히 바라는 중국의 요구를 외교석상에서 전면 거부할 수는 없으므로, 문제 해결의 방식을 거론하면서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외교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논거는, 2000년 10월 12일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고위급 특사로 미국에 파견한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워싱턴 방문 중에 미국 측과 합의하여 발표한 북미 공동코뮈니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미 공동코뮈니케에는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4자회담 재개는 당시 미국이 북에게 요구한 것인데, 북은 미국의 요구로 진행하다가 미국의 무성의한 태도로 중지된 4자회담을 재개할 의사가 조금도 없었지만, 고위급 특사를 워싱턴에 파견한 외교활동에서는 미국의 4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라는 문구를 북미 공동코뮈니케에 집어넣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2000년 10월의 대미 특사파견에서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대중 특사파견에서도 북은 6자회담을 재개할 의사가 전혀 없지만, 고위급 특사를 파견한 외교활동에서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어째든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외교적 발언으로 북은 6자회담 재개의사에 동의를 표시해주기 바라는 중국의 기대에 외교적으로 부응한 셈이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한 자리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를 전하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 내용을 사실상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 우호관계에 있는 중국을 대하는 북의 세련된 외교술이 돋보인다.

북은 중국의 기대에 외교적 발언으로 부응함으로써 중국의 체면을 세워주었고, 시진핑 국가주석이 며칠 뒤 오바마 대통령을 만날 때 6자회담을 재개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할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이로써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강력한 정치적 요구를 받게 될 상황으로 밀려간 것이다. 전통적 우호관계에 있는 중국을 움직여 전통적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을 압박하는 북의 세련된 외교술이 돋보인다.

미국이 직면한 양자택일, 정치적 항복이냐 군사적 항복이냐

외교적 발언은 어디까지나 외교술에 한정되는 것이므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을 6자회담 재개의 가능성이 살아났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북의 의중을 읽지 못하고 엉뚱한 상상에 빠지는 어리석은 짓이다. 고위급 특사의 외교적 발언이 북측 최고영도자의 결심이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북을 이끄는 조선로동당의 정치노선과 북측 정부의 대외정책이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외교술은 외교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상황을 아전인수 격으로 읽기 좋아하는 남측 언론매체들은 중국을 방문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으로 마치 한반도 정세가 대결에서 대화로 돌아서는 극적인 전환국면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심지어 미국의 주요 언론매체들과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도 이번에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하여 6자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2013년 5월 10일 북측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 기자가 제기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조선반도 정세격화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미국 대통령의 궤변을 비난”하면서 “미국이 우리에 대한 적대행위를 그만두고 적의를 버리지 않는 한 긴장의 근원은 없어질 수 없으며 정세악화와 충돌의 위험은 반드시 재발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다른 누구의 <변화>를 칭얼거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그릇된 관점부터 제때에 돌이켜보고 교정할 대담성 정도는 가져야 할 것”이라고 따끔하게 책망하였다.

그보다 앞서 북측 국방위원회 정책국은 2013년 4월 18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미국이 “진실로 대화와 협상을 바란다면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는 용단부터 내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첫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북에 대한 “모든 도발행위들을 즉시 중지하고 전면 사죄”하고, “유엔안전보장리사회 <제재결의>들을 철회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두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북을 “위협하거나 공갈하는 핵전쟁연습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것을 세계 앞에 정식으로 담보”하는 것이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세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남조선과 그 주변지역에 끌어들인 핵전쟁수단들을 전면적으로 철수하고 재투입 시도를 단념할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전제조건은 북이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한 것이다. 세계 정치사에서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하면서 최후 결전 태세에 진입한 나라는 오직 북밖에 없다.

6자회담을 재개하기 전에 북이 먼저 핵무기 포기의사부터 밝혀야 한다고 요구한 미국의 전제조건을 북이 받아들일 리 만무한 것처럼, 미국도 북이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하는 세 가지 전제조건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북과 미국의 적대관계에서 대화와 협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어느 한 쪽이 정치적으로 항복하는 길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북에서는 최후 결전 진입태세를 갖추고 모란봉악단과 은하수 관현악단을 내세워 ‘결전의 노래’를 계속 부르는 중이고, 그에 맞선 미국은 북에서 예고한 ‘최후 결전의 날’에 하루하루 다가서는 참으로 고달픈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정치적 항복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쪽이 마지막에 취하는 행동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북의 정치적 항복 요구를 끝내 거부한다면, 미국에게는 북에서 말하는 최후 결전에서 패하여 군사적으로 항복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미국이 대북관계에서 직면한 양자택일은 정치적 항복이냐 군사적 항복이냐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2013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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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을 기부합니다

표정을 기부합니다

 
법인 스님 2013. 05. 25
조회수 493추천수 0
 

 

 

라다크의 소년들-.jpg

히말라야 잔스카르의 오지마을 소년들의 순진무구한 미소. 사진 조현

 

 

어느 날 우연히 서울의 큰 빌딩 앞에서 본 생경한 아침 풍경 하나가 잊히지 않는다. 회사의 수위 아저씨는 아주 밝은 얼굴 가득히 상쾌한 소리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좋은 날입니다.” 옆에서 보는 내가 저절로 기운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 인사였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는 그 자리가 무언가 낯설고 어색했다. 그 까닭은 다름 아닌 일방적 인사였다. 그 회사의 직원들 대부분이 수위의 인사에 그저 고개만 숙여 대응할 뿐, 눈을 마주하지도 않고 간단한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다. 표정 없는 마주침이다. 분명 수위와 직원들은 한 발쯤의 거리인데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를 벗어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시스템과 매뉴얼만 있고 인간의 온기가 사라진 관계가 일상적으로 발견된다. 백화점, 호텔, 항공기, 열차, 고급 음식점 등에서 보게 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곳에는 종사하는 직원들의 미소와 깍듯한 인사가 있다. 그런데 그곳의 손님들은 대부분 인사와 미소에 응답하지 않는다. 일방적 관계가 당연한 관행인 듯하다. 성의 있는 눈길의 마주함과 마음 있는 표정의 부딪침에서 기쁨과 사랑이 발생하는 법인데 사이가 이러하니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계는 소통을 하고 있는데 인간은 불통을 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긴장과 억압의 일방적 관계 또한 곳곳에서 발생한다. 최근 큰 기업과 대리점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감정노동자는 서글프고 경제적 약자는 억울하다. 그래도 ‘갑’에게 ‘을’은 자신의 표정을 숨겨야 한다. 당장에 ‘밥줄’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존엄한 인간이 밥 때문에 속내를 드러내는 맨얼굴을 숨기고 무표정하거나 비굴한 표정으로 화장까지 해야 한다. 이 모두가 돈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본의 횡포라고 할 수 있다.

 

 

고래-이임정-.jpg

미소는 미소를 전파시킨다. 고래의 미소. 그림 이임정

 

 

그러나 생각해 보자. 돈의 시선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깊이 생각해 보자. 존엄해야 할 우리들의 ‘밥’과 ‘마음’이 돈에 휘둘리고 있는 현실을, 그리하여 돈으로 친절과 복종을 사고 그 사이에서 잠시 우쭐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이웃 사람의 감정을 억압하고 존엄을 짓밟아 얻는 행복은 얼마나 초라하고 서글픈 것인가.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돌이켜야 할 지점에 있다. 우리, 서로, 모두가, 존엄해지기 위해서, 이웃에 대한 나의 표정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표정을 살리기 위해서 먼저 이웃에 대한 시선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먼저 나에 대한 시선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너에 대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서로가 갑과 을이라는 허망한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하면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너에 대한 시선이 열릴 것이다. 그 열린 눈에 비친 너와 나는 거래의 관계가 아닌 도움과 은혜로 얽힌 고마운 관계로 오지 않겠는가.

 

언젠가 식당에서 본 흐뭇한 일이 생각난다. 일이 바빠 급하게 움직이다가 종업원이 손님의 옷에 음식을 쏟았다. 종업원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손님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집에 가서 세탁기에 돌리면 됩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나는 그때 그 남자의 얼굴에서 미안해하는 이웃의 마음까지 헤아리고 따뜻하게 보듬는 마음을 보았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웃는 얼굴은 번역과 통역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이다. 그날 그곳에서 돈이 들지 않는 표정을 기부한 그 남자, 그 자리에 갑과 을은 존재하지 않았다.

 

법인 해남 일지암 암주

 

법인스님-.jpg

필자 법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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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오자, 송전탑공사 일시 중단...할머니들 오랜만에 ‘웃음’

참가자들 “할머니들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김백겸 수습기자
입력 2013-05-25 16:17:23l수정 2013-05-25 16:43:33

즐겁게 공연 보는 밀양 송전탑 할머니들

25일 오전 경남 밀양 단장면 바드리 한국전력 89번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공사 중단을 촉구하며 농성 중인 마을 주민들이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의 장기자랑을 보며 박수치고 있다.ⓒ양지웅 기자

희망버스 오자, 송전탑공사 일시 중단...할머니들 오랜만에 ‘웃음’

참가자들 “할머니들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민‧환경단체로 구성된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밀양에 도착해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에 들어가면서 한전은 25일 하루 공사를 중단했다.

환경운동연합, 나눔문화, 녹색당, 에너지정의시민연대 등 탈핵희망버스 참가자 250여명은 24일 밤 밀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송전탑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밀양시 4개면(부북면, 상동면, 산외면, 단장면)으로 흩어져 25일 새벽부터 공사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에 들어갔다.

탈핵희망버스는 핵발전소 건설과 이로 인한 대규모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뜻을 담고 있으며, 지난해 3월에도 밀양에 왔었다.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 주민들과 함께 하는 시간 가져

이날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 학생 일부와 핵 없는 사회 공동행동 회원들은 주민들과 함께 127번 송전탑 건설 현장으로 올라가는 부북면 화악산 입구를 지켰다. 화악산에 위쪽에 위치한 공사 현장에는 성미산학교 학생과 지도교사, 통합진보당 경남도당 당원들이 일부 주민과 함께 올라 탈핵희망버스 행사를 진행했다.

탈핵희망버스가 도착과 함께 한전의 공사가 일시 중단되자 고령의 주민들은 밝은 미소를 보이면서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날 한전 쪽 직원들은 탈핵버스 참가자들을 지켜보며 127번 송전탑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127번 송전탑 현장 입구를 지키던 공혜원(18) 양은 “저번 탈핵 도보여행에서 알게 된 할머니들이 다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며 “여기 말고 다른 마을도 걱정되고 한 분이라도 다치지 않을까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말했다.

탈핵희망버스에 참가한 환경운동연합 안재훈 에너지기후팀 간사는 “전기를 편하게 쓰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앞으로 어떻게 전기를 적게 쓰고 정의롭게, 착하게 쓸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밀양의 할머니들이 던져주고 있다”고 말했다.

단장면 바드리골 89번 송전탑 건설 현장에는 대구환경운동연합 회원들과 청도 송전탑 반대주민들 15명이 공사현장에 올라 탈핵행사를 진행했다.

대구에서 온 신혼부부인 장우석(37)씨와 황정화(35)씨는 할머니들 앞에서 “(할머니들을) 돕는 흐름이 끊기지 않게 될 때까지 이곳에 와야 겠다”며 “이곳에 송전탑보다 예쁜 집을 지어 살고 싶다”고 ‘님과 함께’를 불러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지난해 1월 송전탑건설을 반대하던 이치우 할아버지가 분신한 산외면 보라마을로 간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보라마을회관 등에서 숙식을 하고 108번, 109번 송전탑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이들은 차를 타고 산 중턱까지 이동한 뒤 1시간30여분을 걸어 건설현장으로 향했다.
 

밀양 송전탑 '웃음 가득한 할머니들'

25일 오전 경남 밀양 단장면 바드리 한국전력 89번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공사 중단을 촉구하며 농성 중인 마을 주민들이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의 장기자랑을 보며 박수치고 있다.ⓒ양지웅 기자



종교계, 외신 등 관심이 이어져

이날 종교계의 방문도 이어졌다.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거룩한 말씀의 회, 천주교 창조보전연대 소속 수녀 17명이 127번 송전탑 건설현장에 방문에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둘러봤다.

불교 조계종 환경위원회로 한전 밀양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사 중단과 전문가협의체 구성 등을 촉구했다.

외신기자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에 관심을 보였다. 이날 부북면을 찾은 동경신문‧중일신문 기자 쯔지후치 사토시는 “탈핵희망버스가 밀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둘러보러 왔다”며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사건 때문에 핵발전소를 반대하는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송전탑 공사 막는 밀양 평밭마을 주민들

25일 오전 경남 밀양 부북면 평밭 127번 송전탑 공사현장 앞에서 마을 주민들과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공사중단을 촉구하며 농성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시민‧환경단체로 구성된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밀양에 도착해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에 들어가면서 한전은 25일 하루 공사를 중단했다.

환경운동연합, 나눔문화, 녹색당, 에너지정의시민연대 등 탈핵희망버스 참가자 250여명은 24일 밤 밀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송전탑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밀양시 4개면(부북면, 상동면, 산외면, 단장면)으로 흩어져 25일 새벽부터 공사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에 들어갔다.

탈핵희망버스는 핵발전소 건설과 이로 인한 대규모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뜻을 담고 있으며, 지난해 3월에도 밀양에 왔었다.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 주민들과 함께 하는 시간 가져

이날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 학생 일부와 핵 없는 사회 공동행동 회원들은 주민들과 함께 127번 송전탑 건설 현장으로 올라가는 부북면 화악산 입구를 지켰다. 화악산에 위쪽에 위치한 공사 현장에는 성미산학교 학생과 지도교사, 통합진보당 경남도당 당원들이 일부 주민과 함께 올라 탈핵희망버스 행사를 진행했다.

탈핵희망버스가 도착과 함께 한전의 공사가 일시 중단되자 고령의 주민들은 밝은 미소를 보이면서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날 한전 쪽 직원들은 탈핵버스 참가자들을 지켜보며 127번 송전탑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127번 송전탑 현장 입구를 지키던 공혜원(18) 양은 “저번 탈핵 도보여행에서 알게 된 할머니들이 다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며 “여기 말고 다른 마을도 걱정되고 한 분이라도 다치지 않을까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말했다.

탈핵희망버스에 참가한 환경운동연합 안재훈 에너지기후팀 간사는 “전기를 편하게 쓰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앞으로 어떻게 전기를 적게 쓰고 정의롭게, 착하게 쓸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밀양의 할머니들이 던져주고 있다”고 말했다.

단장면 바드리골 89번 송전탑 건설 현장에는 대구환경운동연합 회원들과 청도 송전탑 반대주민들 15명이 공사현장에 올라 탈핵행사를 진행했다.

대구에서 온 신혼부부인 장우석(37)씨와 황정화(35)씨는 할머니들 앞에서 “(할머니들을) 돕는 흐름이 끊기지 않게 될 때까지 이곳에 와야 겠다”며 “이곳에 송전탑보다 예쁜 집을 지어 살고 싶다”고 ‘님과 함께’를 불러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지난해 1월 송전탑건설을 반대하던 이치우 할아버지가 분신한 산외면 보라마을로 간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보라마을회관 등에서 숙식을 하고 108번, 109번 송전탑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이들은 차를 타고 산 중턱까지 이동한 뒤 1시간30여분을 걸어 건설현장으로 향했다.

 


25일 오전 경남 밀양 단장면 바드리 한국전력 89번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공사 중단을 촉구하며 농성 중인 마을 주민들이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의 장기자랑을 보며 박수치고 있다.ⓒ양지웅 기자

종교계, 외신 등 관심이 이어져

이날 종교계의 방문도 이어졌다.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거룩한 말씀의 회, 천주교 창조보전연대 소속 수녀 17명이 127번 송전탑 건설현장에 방문에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둘러봤다.

불교 조계종 환경위원회로 한전 밀양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사 중단과 전문가협의체 구성 등을 촉구했다.

외신기자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에 관심을 보였다. 이날 부북면을 찾은 동경신문‧중일신문 기자 쯔지후치 사토시는 “탈핵희망버스가 밀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둘러보러 왔다”며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사건 때문에 핵발전소를 반대하는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25일 오전 경남 밀양 부북면 평밭 127번 송전탑 공사현장 앞에서 마을 주민들과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공사중단을 촉구하며 농성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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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에 대한 동상이몽

 

CJ 비자금수사 경제민주화와 연결 말아야
 
경제민주화에 대한 동상이몽
 
편집부 | 등록:2013-05-26 08:36:28 | 최종:2013-05-26 09:32:55

 

 

 

<조세피난 한국인명단을 발표한 뉴스타파 기자회견>

 


돈에 발이 달렸나?

 

뉴스에서 처음 조세피난처(tex haven)란 단어를 듣고 잠시 멍해졌습니다. 조세, 즉 세금을 피해 도망간 행위를 ‘피난’이라 표현하는 순간 대한민국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은 6.25때 남침한 북괴군과 동급이 되어버립니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합니다. 언론들이 저런 범죄자들의 표현을 직역해서 받아 쓸 이유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같은 단어를 ‘조세회피처’, ‘조세도피처’로 바꿔 사용하기로 한 한겨레와 참여연대의 결정을 칭찬합니다.

 

지난 4월 한국인들이 세계적인 조세회피처 버진 아일랜드에 숨겨 놓은 은닉자산의 규모가 870조에 이른다는 국제 탐사보도 언론인협회(ICIJ)의 보도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조세를 북괴군만큼이나 무서워했던 한국의 기업가들은 완전한 ‘피난’에 실패한 것 같습니다. 뉴스타파가 이들의 명단을 입수∙공개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뉴스타파의 조세회피자 명단발표가 있기 하루 전 검찰은 해외비자금 운용 혐의로 CJ그룹을 전격 압수수색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터진 두 가지 이슈로 인해 한국사회는 다시 한번 재벌들의 비자금조성과 조세포탈에 대해 공분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민주화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는(되어야 할) 지금의 시기에 터져 나온 조세피난처와 재벌비자금 이슈는 뭔가 찜찜합니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동상이몽

 

대선이 끝난지 반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경제민주화'는 관념적인 개념입니다. 이런 모호한 단어는 해석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규정됩니다. 시장주의자들은 경제민주화를 공정거래감시나 비자금감시 정도로 온건하게 해석하는 반면 사민주의자나 진보주의자는 이것을 비정규직해소 문제와 최저임금문제, 정년연장문제에까지 확대시켜 해석합니다. 같은 것을 두고 각자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으니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4월 임시국회에서 대표적인 경제민주화 법안인 가맹사업법(프랜차이즈법)과 공정거래법(공정거래위원회 전속 고발권 폐지)이 여야간의 이견으로 무산된 것 역시 이런 해석의 문제에서 비롯됐습니다. 경제민주화가 정치구호를 넘어 현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정부와 여권은 이것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경제민주화관련 법안들에 무리한 측면이 있어 기업활동을 억누를 수 있다 - 박근혜 대통령

기업 경영 자율성을 해치는 법안은 정부가 수용하기 어렵다 - 현오석 경제부총리

경제민주화는 경제를 살리는 경제민주화가 돼야 한다 -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

환자가 기초체력이 안 되는데 무조건 수술부터 하는 상황이 생긴다 - 김기환 정책위 의장

 

 

 


경제민주화를 가장 앞장서서 환영해야 할 공정거래위원장(노대래)마저 "경제 민주화의 개념을 확장해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정부의 속도조절론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 '과연 박근혜 정부하에서 경제민주화가 가능한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듭니다. 이런 시점에서 터진 조세회피처와 재벌비자금 이슈가 자칫 경제민주화의 의미를 애써 협소하게 규정하려는 여권의 노력에 도움을 줄까 우려됩니다.

 

 

<CJ비자금 경제민주화와 연결말아야>

 


분명한 선긋기 필요

 

두 사건이 경제민주화에 미칠 영향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재벌가의 부도덕이 국민적 지탄을 받음으로써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이 환기되는 측면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재벌비자금사건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켜 추진동력을 얻게 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입니다. 국민들의 관심이 재벌가의 비자금문제에 매몰되면서 경제민주화의 참 의미가 퇴색∙은폐되는 경우입니다. 재벌의 불법∙탈법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은 경제민주화의 개념과는 무관한 정부의 기본적인 역할이자 사명일뿐입니다.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인 시대에 이런 탈세와 조세회피 행위는 끝까지 추적 조사해 일벌백계함이 마땅하다. - 5.24 국회 경제민주화포럼

 

경제민주화 제도화의 선봉에 서있는 '국회 경제민주화포럼'이 조세회피와 비자금문제를 경제민주화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우려스럽습니다. 지난 대선을 뜨겁게 달궜던 경제민주화라는 것이 고작 재벌의 탈세방지를 말하는 것이었다면 허탈합니다.

 

분명한 선긋기가 필요합니다. 재벌의 비자금조성과 역외탈세를 처벌하지 않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경제민주화와는 무관한, 기존의 법률로도 충분히 처벌가능한 차원의 문제들입니다. 굳이 여기에다 경제민주화라는 개념을 끌어다 쓸 경우 경제민주화의 개념이 기존의 법질서에 매몰될 위험이 생깁니다. 이미 존재하는 법과 도덕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에 매몰되다보면 새로운 법과 질서의 탄생은 요원해집니다.

 

만약 정부가 두 사건을 통해 형성된 재벌비자금 규탄 분위기를 이용해 경제민주화의 범위를 재벌의 탈세감시 정도로 축소시킨다면 경제민주화는 결국 서민의 삶과는 무관한 수준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진정 경제민주화를 새로운 시대정신이라 여긴다면 대기업의 순환출자금지, 부당거래 금지와 같은 경제정의의 구현은 물론 수평적 갑을관계 정립, 임금격차 해소, 비정규직 해소와 같이 서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책에까지 전향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6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4월 임시국회때 미뤄졌던 경제민주화 법안들을 두고 여야간의 치열한 격돌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이 이번에도 경제민주화 입법에 반대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공약이 사기공약이었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세력이 무슨 이유로 경제민주화를 반대하는지 6월 국회를 관심 갖고 지켜봐야 할 이유입니다.

 


( * 시사블로거 다람쥐주인님이 25일 자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필자의 동의하에 소개합니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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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전설의 빨치산'이었다

[공모-나의 아버지] 평생 한량이었던 아버지, 하지만 나쁘지 않다

13.05.25 20:58l최종 업데이트 13.05.25 21:08l

 

 

 

기사 관련 사진
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부군>(1989)의 한 장면
ⓒ 남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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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우리 마을 전설의 빨치산이다. 그가 빨치산 부대원으로 복무한 기간은 대략 일주일가량이었다. 당시 마을 인근의 험준한 산맥의 최고봉인 말봉산 자락에는 여순반란사건의 잔류세력인 제14연대 소속 빨치산 부대가 주둔 중이었다. 아버지는 남태인 대장이 지휘하는 부대에 강제 입산 당해 일주일 동안 그의 '동무'로 사상개조를 받은 바 있는 빨치산 출신이다.

전쟁 막바지 끝까지 결사 항전한 진정한 전사들은 거의 잊혀졌지만 고작 일주일 '병영체험'이 전부인 아버지는 우리 마을 전설의 빨치산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가, 일주일 동안 산에 머물면서 한 일이란 어떡하면 무서운 빨치산 대장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무사히 산을 내려갈까 하는 고민에 몰두한 것이 전부였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첩첩산중 우리 마을도 어지러운 전란의 소용돌이를 비켜 갈 수는 없었다. 인민군과 군인들이 엎치락뒤치락 번갈아 가며 마을을 장악하는 가운데 현명한 주민들은 양 세력에 적절하게 동조, 부역함으로써 아슬아슬한 등거리 전략으로 생존을 모색했다. 인근에서 가장 큰 동네인데다, 엄청난 인구과밀지역인 우리 마을이야말로 인민군도, 국군도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첨예한 분쟁지역이었다.

제주 양씨, 하동 정씨. 양대 성씨가 주류를 이루는 씨족 마을에서 한 성씨는 군인 쪽에, 한 성씨는 인민군들에 호의적이면서 좌우의 균형을 유지했다. 빨치산 보급투쟁의 작전 내용은 군량미 비축과 생필품 확보에도 있었지만 특별히 농사 일로 잔뼈가 굵은 신체 건강하고 억센 농촌청년들의 모병에도 주력했다. 한 명의 전사라도 더 확보하기위해 그들은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스무 살이 된 아버지도 어느날 밤, 마을을 급습한 '산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입산하게 되었다.

빨치산 부대원들 눈에 유독 거슬렸던 아버지

빨치산은 주로 야밤에 암약했다. 그날 아버지와 마을 청년들을 대량 나포한 빨치산의 보급투쟁도 한밤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고 젊은 남자는 닥치는 대로 끌고 가기에 바빴다. 그렇게 행해진 간밤의 무리한 작전이 약간의 차질을 빚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침이 되어 지난 밤 마을을 돌며 차출해온 서른 세 명의 청년들을 앞마당에 도열해 놓고 보니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데려온 청년들 중에는 빨치산 전사로 길들이기에는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을 지닌 이들이 다소 섞여 있었던 것이다. 아직 나이가 한참 어려 엄마를 찾으며 징징 울어대는 미성년자가 없질 않나 다리를 심하게 저는 사람, 팔이 한 쪽 없는 사람,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약간 정신연령이 모자라 보이는 사람 등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 외, 정상등급을 받은 청년들을 따로 분류해 놓고 보니 거기에도 또 한 명의 청년이 유독 부대원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는 육안으로 봤을 땐 특이한 신체적 결함은 없었다. 허우대도 멀쩡했다. 그런데 유난히 흰 얼굴과 굼뜬 행동이 문제였다. 깔끔한 외모에 단정한 용모는 높이 살 만 했지만 장차 빨치산 전사에게 요구되는 신체조건은 아니었다. 다른 청년들은 지금 당장 총을 쥐어줘도 혁명전사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농촌청년들 사이에서 그 청년만이 유독 출신성분이 의심되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농부는 아닌 것 같고 필시, 사상개조가 시급히 요구되는 '먹물' 든 인간이 분명해 보였다.

"쟤는 뭐하다 왔나? 학교 교직원인가 아니면 면서기인가?"
"아닌데요. 쟤도 우리랑 같이 농부인데요."
"우린 척보면 안다. 그러니까 바른대로 대라. 공무원인가 아니면 선생인가. 그럼 혹시 경찰? 딱 봐도 농부는 아니고 도대체 정체가 뭐야!"
"걘 원래 일은 안 해요. 그냥 놀아요. 그렇지만 공무원은 아니고 선생도 아닙니다. 농부가 맞습니다."

빨치산 간부들의 집요한 의심도 당연했고 친구들의 말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공무원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농부가 맞긴 하지만 일은 거의 하지 않는 농부였다. 한 마디로 처치 곤란한, 보급투쟁의 '실패작'이었다.

그는 함께 잡혀온 농촌청년들처럼 체격이 다부지지도, 행동이 날렵하지도 않았다. 생전 힘든 일이라곤 거의 해본 적 없는 허약한 심신은 빨치산 부대에서 요구하는 신체조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약한 성격에 굼뜬 행동은 군인들과 첨예하게 대치중인 빨치산 부대의 신임 전사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였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누구보다 아버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입산 첫날부터 그는 줄곧 하산할 궁리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예리한 눈빛의 저 빨치산 대장이 호락호락 하산을 허락해 줄 리는 만무했다. 탈영은 꿈도 못 꿀 일이었고 아버지는 그럴 용기도 없었다. 오로지 누군가 붙잡고 하소연 하는 수밖에. 그러나 분위기는 살벌하고 규율은 엄했다. 빨치산 부대에서 하산은, 나이 어린 미성년자이거나 팔 한 쪽이 없거나 다리를 심하게 절거나 정신연령이 모자라는 등 심각한 결격 사유에 한하여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위의 사항에 해당되지 않는 멀쩡한 사람의 하산 요구는 탈영으로 간주되어 곧바로 처형감이었다.

아버지가 산에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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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부군>(1989)의 한 장면.
ⓒ 남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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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빨치산 대장은 달려가는 고라니를 가볍게 쫓아가서 잡아올 만큼 행동이 날렵했다. 작고 다부진 체격에 상대방을 쏘아보는 듯한 눈빛은 강렬했다. 꼭 다문 입술에 과묵한 표정으로 부대를 순시하는 그는 감히 근접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렇지만 부대 내에서 유난히 인자한 표정의 한 간부를 아버지는 눈여겨보았다. 더군다나 그 사람은 알고 보니 같은 성씨 동성동본이었다. 아버지는 그 인정에 약해 보이는 빨치산 간부를 집중 공략했다.

"전 우리 집 삼대독잡니다. 아버지는 병환이 깊어 제가 가장이나 다름없으니 제발 내려 가게 해 주십시오. 제가 아니면 부모님과 동생들은 당장 굶어 죽습니다."

잡혀온 서른 세 명 청년들 중 저마다 집안의 삼대독자거나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거나 아님 처자식이 달렸다거나 하는 절박한 사연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개인 사정을 일일이 봐주다간 빨치산 전선은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애처로운 하소연에 서서히 마음이 약해진 빨치산 간부는 아버지의 하산계획에 그만 동조해 버리고 말았다. 살벌한 빨치산 진지에서 아버지는 마음 약한 간부의 동정심을 유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너처럼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이 하산하겠다면 탈영으로 간주되어 당장 총살이야. 그러니까 넌 지금부터 밤눈을 아예 못 본다고 둘러 대라. 우린 밤에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빨치산에게 야맹증은 치명적이거든. 그러니까 이제부터 밤눈 어두운 행세를 잘 해야 해. 알겠지?"

아버지는 그때부터 그가 시키는 대로 야맹증 환자 행세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입산한 밤부터 산 중턱의 보초병으로부터 이상한 정보가 들려왔다. 아래 산중턱에 밤마다 한 여자가 나타난다는 내용이었다. 그 산은 감히 남자들도 오르기를 꺼려하는 험준하고 으슥한 곳이었다. 하물며 여자가 혼자서 밤에. 산 생활에 익숙한 빨치산 전사들도 오싹할 일이었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 졸지에 삼대독자 아들을 산사람들에게 빼앗겨버린 할머니는 밤마다 산중턱에 서서 부대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이다.

빨치산 부대는 한 여인의 출현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더군다나 그 여인은, 하산을 설득한 보초병을 향해 오히려, '아들을 돌려주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노라' 빨치산 대장을 향해 포고를 했다는 전갈이었다. 남편은 병들고 어렵게 얻은 삼대독자가 산으로 끌려간 마당이라 할머니는 빨치산 대장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오로지 귀하디귀한 삼대독자를 무사히 데려가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집념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연이은 일인시위와 아버지의 가짜환자 행세는 급기야 강철 같은 빨치산 대장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입산 일주일 만에 팔이 하나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 등 등급 외의 신체부자유자들과 더불어 의가사제대를 했다. 멀쩡한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하산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말봉산 자락에 제14연대 빨치산 부대가 주둔한 이래 사지 멀쩡한 사람이 아무 조건 없이 하산을 허락받은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동네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뒤로 한 채 아버지는 그렇게 하산을 했다.

아버지의 귀가로 마을은 술렁였다. 생떼 같은 자식을, 남편을 산으로 보내놓고 노심초사하던 동네 사람들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 사람들'은 한 번 데려간 사람을 아무런 하자도 없는데 그냥 돌려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유례없는 하산으로 인해 '전설의 빨치산'이 되었다. 당시 뒤에 남겨졌던 신체 건강한 친구들은 훈련을 통해 전사가 되었거나 작전 중 전사 하거나 훗날 토벌대의 소탕작전으로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다.

"산 사람들이라고 보는 눈이 왜 없었겠냐. 저 양반을 데려다 어따 쓰겠냐, 골치만 아프지. 너희 할머니는 밤마다 아들 내놓으라고 울어쌓고."

엄마 말은 일리가 있었다. 평생 한량으로 유유자적한 아버지 인생을 짚어보면 만약 그때 산에 남았더라면 심각한 '고문관' 병사로 빨치산 부대에 두고두고 민폐를 끼칠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가정경제와는 담쌓은, 아버지는 '천상 한량'

아버지는 '전설의 빨치산' 외에도 '천상 한량'이라는 칭호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게으른 농부에 불성실한 가장이었다. 가정 경제는 일찌감치 상황을 간파한 엄마 몫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한 여름이면 시원한 모시 한복을 차려 입고 한가하게 마을 앞을 배회하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낮잠을 청하곤 했다. 아니면 말쑥하게 양복을 갖춰 입고 바깥출입을 했다.

양복을 멋있게 입고 나선 아버지의 출입처는 주로 관공서였고 늘 공사다망했다. 마을에는 그가 처리해야 할 미해결 사안들이 산적해 있었다. 지지부진한 신작로 막바지 공사 건으로 이장 대신 면사무소에 압력 넣기, 삽질도 못하고 있는 신설저수지 건으로 주민들 설득하고 면장하고 담판 짓기, 졸업장 없는 이웃집 총각 청탁으로 중학교 서무과에 위조서류 만들러 가기, 새로 부임한 초등학교 교장하고 학교 상수도 건설 건 의논하기, 군청 과장한테 모종의 건으로 줄 대러 가기 등등.

그는 면소재지, 군청, 학교, 대도시 광주, 서울 등지로 몇날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열과 성을 기울이는 그 모든 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가정경제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명예직 관련 업무들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이웃과 마을과 사회의 미해결 사건을 처리하러 다니는 동안 우리 집 돼지우리는 다 쓰러져서 돼지가 튀어 나와 마당을 활보하고 다니고 부려만 놓고 타작을 미처 못 한 볏단은 비에 홀딱 젖어 일 년 농사를 망쳐버리곤 했다. 타인과 사회를 향한 그의 멸사봉공 정신은 길이 칭송받을 일이지만 결코 바람직한 가장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또 농촌문화에 어울리지 않게 지독한 활자 중독자였다.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읽을거리가 변변찮은 시골에서 독서는 그다지 좋은 취미가 아니었다. 정 읽을 것이 궁해지면 하다못해 <농민신문>이라도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렸다. 한 번은, 그런 유약한 아버지 옆에서 언니가 교과서에 실린 소설 한 편을 소리 내어 읽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에 매료당한 아버지는 새벽마다 감동적인 그 소설, 황순원 <소나기>를 같이 읽자고 우릴 깨워댔다. 그럴 때마다 우리 자매들은 아버지랑 나란히 누워서 언니가 대표로 낭독하는 <소나기>를 조용히 경청해야 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읽어서 다음 장면을 다 외고 있음에도 아버지는 바야흐로 죽어가는 소녀의 유언에 다시금 눈시울을 붉힐 것이고 우린 그런 아버지의 감동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다.

다른 어른들은 진즉 일어나서 거름 지게를 지고 들에 나갈 시간에 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 속 주인공의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부엌아궁이에서 엄마가 지피는 새벽 군불소리가 타닥, 타닥 정겹게 들려왔는데, 그렇게 평화로운 정경만큼 무능한 가장이 방치한 가정경제는 그때쯤 바닥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그는, 뜻 맞는 마을 청년들과 연극공연을 한다고 어울려 다녔는데 그 자신이 직접 연극 대본을 집필하느라 몇날 며칠 밤을 새는가 하면, 마을에 공식 지정곡이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길이 남을 마을 찬가를 짓는다고 고심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명 아마추어의 손을 거쳐 탄생한 '마을 찬가'는 악보도 없이 현재까지 구전되어 오고 있다. 비공식 마을의 지정곡으로 채택되어 마을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는 관광버스 안에서 음주가무가 시작되기 전 첫 순서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난 어렸을 적에 어른이라면 누구나 그처럼 공자와 논어를 무시로 외고,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줄줄이 꿰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간파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그가 지은 시가 일본인 선생의 눈에 띄어 지방신문에까지 실렸다는 회고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가정경제에 드리운 그늘을 한 번도 자책하지 않은 아버지

'무능한 가장'이라는 원성을 달고 사는 그였지만 다양한 사회활동 외에도 조상을 섬기고 가문을 보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는 충만해 있었다. 유서 깊은 정씨 문중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마을의 상대 성씨인 제주 양씨를 은근히 견제하고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의, 가문에 대한 의무감은 남달랐다. 정씨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선양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특히 그가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과년한 문중 처자들을 외부의 음흉한 청년들로부터 무사히 지켜내는 것이었다.

마을의 우편배달부는 수신인이 정씨로 되어 있는 모든 편지와 서류에 한해서 아버지에게 먼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마을 입구에 버티고 선 아버지의 철통같은 검열을 마친 편지들만이 비로소 수신인에게 배포 될 수 있었다. 내용이 의심되는 모든 편지는 가차 없이 아버지 손에서 개봉되어 그 민망한 사연이 낱낱이 드러나곤 했다. 익명을, 가명을 사용한 청년들의 교묘한 위장편지도 아버지의 예리한 시선을 비켜가진 못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아버지는 그 모든 부고와 문서로 위장한 연애편지들을 여지없이 가려냈다.

그렇게 적발된 불온한 편지의 여파는 컸다. 사건의 전모를 들켜버린 큰댁언니는 마을 밖 출입이 금지되었고 발신인으로 지목된 청년은 끝까지 추적하여 감히 하동 정씨 가문을 능멸한 죄 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아버지 한 사람의 고독한 몸부림에도 과년한 일가 처자들은 계속 자라났고 혼자서 연애의 진원지인 그 많은 물방앗간을 통제하는 일은 점점 버거워졌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해이해진 기강과 유교문화에 기반 한 씨족사회의 붕괴를 한탄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야말로 남의 청춘사업에 개입하여 연애편지를 붙들고 부들부들 분노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자신도 마을의 전쟁 미망인으로 부터 날이면 날마다 구구절절 구애의 편지를 받는 수신인이었던 까닭이다.

집에서는 소설 속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에 눈물 흘리던 아버지는 학교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운동회나 어버이날 행사에서 아버지는 항상 내빈석 중앙에 교장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학생들의 사열을 받았다. 아버지가 앉아 있는 육성회장 자리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영진이 아버지나 경숙이 아버지 같은 분들이 더 어울림직했다. 그러나 고졸 학력의 그들은 들에서 열심히 쟁기질을 하느라 바빴고 육성회장 자리는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아버지가 차지했다. 학교 상수도시설추진위원장, 마을 개발위원장, 신설저수지담당총무, 농협비상근명예이사 등 모호한 이름의 감투를 그는 평생 몇 개씩 달고 있었다.

아버지의 지나친 대외활동으로 인해 우리 집 가정경제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논에는 벼보다 피가 많이 자랐고 제때 손보지 않은 무논은 끄떡하면 방천이 나서 논두렁이 비에 휩쓸려갔다. 수확시기를 놓친 농작물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당연히 단위면적당 소출이 형편없었다.

"한나절만 '출입' 안 하고 피를 뽑으면 될 것을. 내가, 나락 적게 나올까 이러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논에 피가 끓으면 남 보기가 민망해서 그러요. 눈 딱 감고 한 나절만 피를 뽑으면 안 되겄소?"
"어허, 이 사람이. 나도 다 생각이 있다니까. 지금 '우루구아이 라운드'협상이 한참 진행 중이란 말이지. 난 그거 결과 나오는 거 보고 농사지을 거니까 귀찮게 말라구."

도대체 시골의 소농규모 농부에게 논에 피 뽑는 거하고 우루과이라운드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아버지는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는 채 엄마 말을 단번에 묵살해 버렸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바라는 바는 소박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장을 하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밖으로 돌아다닐 바에야 이장이라도 하고 있으면 그러려니 포기하고 살겠다는 것이 엄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가장 재미없어 하는 일이, 직책이 바로 그 이장이었다. 이장도 싫지만 학교선생도 지서경찰도 심지어 면장, 농협조합장도 아버지가 한심해 하는 직업군들이었다. 그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하는 골치 아픈 일들을 극도로 꺼렸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애덤스미스가 제시했던 '푸줏간 주인의 이기심, 빵집 주인의 이기심, 양조장 주인의 이기심'이라는 명제는 내 아버지의 경우에 적용되지 않는 이론이다. 아버지가 방치한 우리 집 가정 경제는 엄마의 극심한 희생과 이웃 친척 아저씨들의 자발적인 박애심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유교적 성향이 짙은 씨족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엄마는 평생 재봉틀 앞을 떠날 수 없었고 이웃 친척들은 십시일반으로 가장이 해야 할 일을 거들어 주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무능으로 인해 가정경제에 드리운 그늘을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았다. 그에게 인생이란 항상 즐겁고 행복하고 순조로운 평탄대로였다. 그래서 특유의 유머와 낙천적 기질을 유지할수 있었다.

양지만 밟아온 아버지의 유일한 불행은 '세월'

이제 82살의 아버지는 예전의 훤칠했던 풍모를 대부분 상실한 채 틀니를 낀 볼품없는 노인으로 늙어가고 있다. 과거 한때 한 전쟁미망인 아주머니를 지독한 상사병으로 몰고 갔다는 그 잘생긴 외모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평생을 양지만 밟으며 살아온 그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불행이란 비켜 갈수 없는 '세월'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공사다망하다.

"아가. 김 서방이 김해 김씨 무슨 파였더라? 이번에 우리가 종회에서 큰돈 들여 족보를 갱신하는데 새 족보에는 사위들도 모두 올리기로 했다. 그러니까 김 서방이 정확히 김해 김씨 어디 누구 자손 몇 대손인지 적어서 모레까지 보내주라."
"어? 저, 김 서방하고 끝까지 살지 말지 아직 생각중인데 족보에 올려버리면 어떡해요?"

부녀지간에 예사로 오가는 농담을 보면서 가족들은 나야말로 아버지 기질을 쏙 빼 닮았다고 '지적'한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억울한 누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를 닮아서 한량 기질이 다분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평생 한량이었던 아버지 말년이 크게 잘못돼 보이지 않는 점이 내게는 위안이 된다.

"저 잘난 인물에, 저 인품을 지녀서 가장 노릇까지 잘했으면 내가 복에 겨워서 또 뭔 일을 당할지 알았겄냐. 암, 세상이 공평한 법인데 그런 과한 복을 내가 바라면 쓰겄냐. 저 인물 에 바람 안 피고 돈 안 망해 먹은 것만도 사하지. 난 평생 그 마음으로 살았다."

엄마는 거의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 훤칠한 외모에 잘생긴 얼굴을 하고 늘 밖으로 나돌면서 그 숱한 유혹에도 여자문제, 돈 문제 안 저지르고 살아준 것만도 엄마는 감사하단다. 그런 체념이 없었다면 그 오랜 세월에 걸친 가장의 무능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이웃과 공익에 재능기부 한 아버지

일주일 만에 빨치산 부대를 의가사제대 했던 아버지는 이듬해 장가를 들어 다섯 자식을 낳았다. 하산을 하던 날, 각각 팔 하나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정신연령이 낮은 하산 예정자들을 앉혀 놓고 빨치산 대장이 했다는 작별 인사를 아버지는 지금도 종종 회고하시곤 한다.

"동무들. 오늘은 우리가 아쉽게 작별하지만 곧 해방정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여러분들이 피치 못할 사정, 부자유스런 신체조건 때문에 이렇게 하산을 하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해방의 그날까지 동무들 검둥개, 노랑개들한테 동조하지 말고 부디 목숨 부지하고 살아남기 바라오. 우리는 산에서 혁명과업 완수를 위해 투쟁할 테니 동무들은 후방에서 지상낙원 건설을 위해 노력해 주기 바라오. 곧 해방을 맞을 준비를 하시오. 그때 다시 만납시다."

그러나 곧 도래할 것으로 장담했던 사회주의 국가는 오지 않았다. 이후 펼쳐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아버지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대대적인 토벌작전에도 그 빨치산 대장의 행방은 끝내 묘연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야맹증이라는 병역면제 사유를 제공해줬던, 인정에 치우친 빨치산 간부는 훗날 오랜 세월이 지나 해후했다.

하산하던 날 혁명과업을 위해 매진해 달라고 당부했다는 빨치산 대장의 당부를 아버지는 어느 정도 실천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총 대신 특유의 낙천적 성격과 유머를 무기로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한 열성분자였다. 우리에겐 무능한 가장이었으나 빨치산 대장의 당부대로 자신의 능력과 지식, 낙천적 기질과 유머로 이웃과 공익을 위해 재능기부 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이 험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무혈혁명의 전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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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세계 비핵화는 미국부터 시작해야”

 

 
 
"오바마 '핵무기없는 세상'은 조선 비핵화 노린 기만술"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5/26 [10:21] 최종편집: ⓒ 자주민보
 
 

한국의 언론과 정치권이 조선의 6자회담 가능성을 점치며 “진정성 있는 태도가 전재되어야 한다”는 등의 논평까지 내고 있는 상태에서 실질적 당사자인 북은 “한반도 비핵화가 아니라 세계비핵화를 위해서는 미국의 비핵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6자회담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 가능성을 부인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관지인 우리민족끼리는 “오바마대통령의 〈핵무기없는 세상〉을 〈한〉반도에서 먼저 실현하겠다.‘”라고 말한 박근혜 대통령의 미상하원 의회에서의 발언을 언급하며 “한마디로 공화국이 핵을 포기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세계비핵화의 첫 꼭지를 떼겠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다. 언젠가 미국대통령도 이런 소리를 했다. 남조선집권자가 미국에 가서 그 말을 앵무새처럼 되받아 외운 것”이라고 비난했다.

우리민족끼리는 “얼핏 듣기에는 요란해 보이는데 따지고 보면 세계의 비핵화를 이루는 순차, 조선반도핵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하고 천진난만한 생각이 아닌가 한다.”며 “

《핵무기없는 세상》을 제창한 것은 미국이다. 물론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면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미국이 바라는 것이 진정 핵무기 없는 세상인가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이른바 《세계의 경찰관》으로서의 미국의 행세는 핵무기보유와 함께 시작되었다. 인류사상 처음으로 핵무기를 만든 미국은 그것을 휘둘러 미국중심의 유엔을 축으로 한 세계질서를 만들어내고 국제무대에서 자국의 리익실현을 위한 침략과 전횡을 일삼아왔다.”면서 “미국의 세계지배는 본질에 있어서 핵무기독점에 기초한 것이며 바로 이 핵무기의 절대적인 우위를 믿고 미국은 힘으로 다른 나라들을 마구 억누르며 자기의 침략적 요구를 강요하여왔다. 침략과 간섭, 전쟁을 생리로 하는 미제국주의에 있어서 핵무기야말로 없어서는 안 되는 생존수단, 지배수단으로 되고 있는 것”이라고 미국의 핵독점 야욕을 고발했다.

신문은 “하다면 미국의 《핵무기없는 세상》구상은”이라는 물음표를 찍고 “그것은 한갖 사탕발림의 눈속임수이다. 핵무기들을 철페하는 척하면서 자기 나라 핵무기들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핵무기들을 없애버리려는데 주되는 목적을 두고 있다. 미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공화국을 비롯하여 반미자주적인 나라들의 손에 핵무기가 쥐여지는 것이다. 미국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조선반도에서 먼저 실현하겠다고 떠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공화국의 핵이 침략과 살륙을 꾀하는 미국에 제일 위협으로 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아메리카대륙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겨 침략과 전쟁으로 살쪄온 그 《초대국》”이라면서 “지금껏 다른 나라들을 마음대로 침략하고 세계도처에서 전쟁을 무시로 일삼아오면서도 자국영토에는 단 한발의 포탄도 떨어지지 않아 전쟁을 말 그대로 기쁨과 쾌락으로 여겨온 그 미국이 자기도 핵 불바다에 잠길 수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 잡혀본 적이 과연 있었던가. 지금 미국이 그 공포를 한껏 느끼고 있다. 그것이 선군조선의 핵이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이 조선의 핵무기를 없애버리기 위해 그토록 혈안이 되여 날뛰고 있는 것도 이 때문(미국의 핵 독점을 통한세계 재패 야욕)”이라며 “그런즉 세계의 비핵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조선반도의 비핵화가 아니라 미국의 비핵화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비핵화를 주장해온 공화국이 끝내 핵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것도 수십년간 갖은 핵위협공갈을 가해온 미국”이라고 피력했다.

아울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비핵화》가 《먼저》라고 떠드는 것은 무엇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라며 “미국이 비핵화 되어야 세계의 비핵화가 이루어지고 조선반도의 비핵화도 이루어지는 법이다. 이것은 엄연한 과학적 이치이고 정의와 양심, 시대와 역사가 내리는 판단”이라고 미국의 비핵화가 선행 되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우리민족끼리는 “남조선의 집권자는 자기 손을 가슴에 얹고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핵무기없는 세상〉을 〈한〉반도에서 먼저 실현하겠다.》고 한 발언이 미국의 지배주의적인 이익에 부합되는 것인지, 조선민족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인지.”라며 “공화국이 보유한 핵은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대대손손 굳건히 지켜나가며 통일조국의 융성번영을 영원히 담보하는 민족공동의 귀중한 재부”라며 핵무력 건설의 병진 노선을 굳건히 할 것임을 표명했다.

이 신문은 “민족의 존엄이고 생명인 정의의 핵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은 결국 자기 민족자신을 해치려드는 매국행위”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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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번식 나서는 홍도 괭이갈매기 미스터리

한겨울에 번식 나서는 홍도 괭이갈매기 미스터리

 
조홍섭 2013. 05. 24
조회수 1174추천수 0
 

1월초 홍도에 들러 둥지 손보고 짝 찾아…번식 여러달 전에 왜 하는지는 의문

고양이 울음소리에 새우깡 좋아하는 익숙한 새는 '수수께끼의 새'이기도

 

gull2.jpg » 경남 통영 홍도에 날아드는 2만여 마리의 괭이갈매기 떼. 이들의 정확한 행동 이유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에만 분포하는 괭이갈매기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바닷새이다. 주로 작은 물고기나 연체동물, 갑각류, 또는 죽은 바다 생물을 먹거나 다른 바닷새의 먹이를 빼앗아 먹지만 배를 잘 따라다니며 ‘새우깡’을 잘 받아먹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갈매기는 동료를 부를 때 고양이 소리를 내 ‘괭이갈매기’란 이름을 얻었다. 일본에서는 비슷한 의미로 ‘바다 고양이’라고 부른다. 드물게 이 새가 나그네새로 들르는 영어권에서는 ‘검은 꼬리 갈매기’라고 형태적 특징에 주목했다.
 

이 흔하디 흔한 괭이갈매기에 무슨 숨겨진 비밀이 있을까 싶다. 사실 권영수 국립공원연구원 철새연구센터장이 지난해 이들의 번식행동을 조사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그랬다.
 

그때까지 알려진 괭이갈매기의 번식행동은 이렇다. 해마다 4월 중순께 홍도, 독도, 난도 같은 무인도에 큰 집단이 모여 둥지를 틀고 번식한 뒤 7~8월이면 번식지를 일제히 떠나 섬이나 해안가에서 겨울을 나는 텃새라는 것이다.
 

gull1.jpg » 홍도에 내려앉은 괭이갈매기.

 

권 박사는 정확한 이동시기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 2월 한려해상국립공원 홍도에 무인카메라를 설치해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번식은 예년보다 9일쯤 이른 4월4일 시작했지만, 예상과 크게 어긋난 건 아니었다.

 

흥미로웠던 건 갈매기 무리가 2월에도 섬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섬에 왔다 떠나는 행동을 되풀이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권 박사는 올해는 아예 1년 내내 무인카메라로 갈매기의 도래를 조사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한겨울인 1월 초부터 괭이갈매기들이 섬에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번 오더니 차츰 방문 횟수를 늘려 하루 3번까지 왕복하더라고요. 산란시기인 4월이 가까워지면서 드나드는 횟수가 점점 잦아졌습니다.”

 

번식기를 여러 달 앞두고 무엇 때문에 번식지에 찾아드는 걸까. 처음 권 박사는 좋은 둥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서 그럴 것으로 짐작했다.

 

홍도는 국내 최대의 괭이갈매기 번식지로서 2만여 마리가 이 섬에서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고, 그 결과 번식지로 향하는 시기가 점점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gull4.jpg » 홍도에 둥지를 튼 괭이갈매기.

 

gull3.jpg » 괭이갈매기의 알. 보통 2~3개를 낳는다.

 

하지만, 관찰 결과는 그런 가설을 쉽게 무너뜨렸다. 괭이갈매기는 이전에 자신이 번식했던 둥지를 또 찾아가 알을 낳았던 것이다. 그럼 대체 왜 이렇게 일찍 번식지를 찾는 것일까. 권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기 둥지를 찾아 부서진 곳을 보수하고 또 헤어졌던 짝을 찾는 일도 그 많은 갈매기 떼 속에서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몇 달씩 일찍 찾아올 이유가 되지는 않아 앞으로 중요한 연구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gull5.jpg » 홍도에서 2만여 마리의 괭이갈매기가 일제히 둥지를 틀고 번식에 나선 모습.

 

 

겨울 바다를 구경하러 바다에 가도 괭이갈매기는 있다. 이들은 홍도 등 번식지로 떠나지 않은 3년 미만의 어린 개체일 확률이 높다고 권 박사는 설명한다. 또 번식지에서도 먹이 터를 왕복하기 때문에 겨울부터 괭이갈매기가 일제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괭이갈매기가 번식을 모두 마치고 섬을 일제히 떠난 날은 지난해의 경우 7월30일이었다. 그 전해의 8월3일보다는 많이 당겨진 것이지만 올해 또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른다.
 

어쨌든 해안가에서 괭이갈매기를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기간은 8월부터 12월 사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머지 7달 남짓을 괭이갈매기는 외딴 번식지에서 주로 보낸다. 그 이유는 아직 무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흔하고 친근한 바닷새는 수수께끼의 새이기도 하다.

 

글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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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박통' 맞은 진중권, 파란만장 '스타트렉'!

 

[노정태의 논객시대] 미학자이자 논객(이었던) 진중권의 책들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5-24 오후 6:49:28

 

1.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며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서문을 인용해도 식상하지 않았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저 문장이 어떤 용도로 어떻게 쓰였는지 안다면 이건 너무 지겨운 인용이다. 반면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대체 저 뜬금없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하늘의 별'이나 '가야만 하는 길' 같은 아름다운 비유가 너무도 허공에 붕 떠버린 탓이다.
 

 

▲ <미학오디세이>(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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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해방되어야 할 노동자 계급이 있었고, 외세에 의해 반으로 쪼개졌지만 결국 다시 하나가 되어야만 할 조국이 있었고, 쟁취해야 할 민주화의 과제가 있었고, 직선제 개헌 이후에도 남아있던 이른바 '앙시엥 레짐'과의 최후의 결전이 다가왔다고 모두가 믿었던 그런 때가 있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앞서 나열한 문제들이 해결되거나 해소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우리는 저러한, 혹은 저기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들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런 때가 있었다. 저 문제들을 문제로 똑바로 바라보고,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당위를 향해 나아가자고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일이, 지금처럼 어색하고 머쓱하지 않았던 그런 때가, 루카치가 말하는 '별'이 하늘에 떠있어서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그런 때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루카치가 말하는 '별'은 공산주의 혁명의 텔로스이고,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을 가리킬 것이다. 전략적으로 돌아갈 수는 있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궁극의 목표를 뜻할 터이다. 그럼에도 저 비유는 너무도 아름답고, 시적이며, 어떤 식으로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강한 영감을 준다.

1990년대의 어느 날 밤, <미학 오디세이>의 원고가 되었을지 모를 글을 쓰다가 밤하늘을 바라본 청년 진중권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속으로 나직하게 저 문장을, 어쩌면 그가 능통한 독일어로 읊었을지 모르겠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책을 쓰며 지새우던 밤. 자판기 커피를 뽑으러 나와서 올려보던 하늘의 희미한 별들만 기억에 남아 있다. 여느 '386 세대'처럼 당시 나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내적으로 방어하던 중이었다. 거의 10년 동안 나를 지탱해주던 하나의 신념체계가 무너졌다. ('작가의 말',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작가 노트>(휴머니스트 펴냄, 2004년))

<미학 오디세이>는 이렇듯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충격 속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청년 진중권 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에게 역사의 종착점, 텔로스 노릇을 하던 사회주의가 거대한 역사적 실험 끝에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 민주 공화국, 즉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된 것은 1990년, 소비에트 연방이 몰락한 것은 1991년, 진중권이 <소비에트 연방의 유리 로뜨만의 구조기호론적 미학 연구>로 미학 석사 학위를 받은 것은 199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은 1993년의 일이었다.
 

 

▲ 2011년 반값 등록금 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촛불집회 현장에 나온 진중권. ⓒ프레시안(최형락)


2.

박사 학위를 따지 못한 상태로 국내에 돌아오게 된 1999년까지, 진중권은 독일에서 다양한 국적친구들을 사귀고,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고, 심지어 애도 낳았다.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 중 안 그런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진중권 역시 자신의 유학 시절을 즐겨 곱씹고 다양한 방식으로 칼럼 등에 인용하며, '한국사회'의 문제를 마주쳤을 때 판단의 준거로 삼는다.

이것은 단지 그가 '선진국'에 유학을 다녀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선진국 중에서도 구 동독의 한복판에 있던 베를린 자유대학을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스탈린주의로 악명이 높았던, 문화적으로 그리 별 볼 일 없던 소련이 아니라, 동구권 국가 중 가장 선진국이었던 동독이 서독에서 쏘아 보내던 TV 전파 때문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을 때, 진중권은 실로 큰 충격을 받았다. 진중권이 1991년이 아니라 "1989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줄줄이 몰락하는 것을 본 후, 약 1~2년간의 숙고 끝에 공산주의라는 '주의'를 포기"(<생각의 지도>(천년의 상상 펴냄, 2013년), 171쪽)했다는 말은 연도를 잘못 표기한 게 아니다. 진중권의 머릿속에서 공산주의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그날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내 생각은 우리가 1980년대에 '유로코뮤니스트'라 비웃던 서유럽 사민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유학을 통해 동서독 체제를 비교할 기회를 가졌던 게 계기였다. 트라비(Trabi)를 타고 연 30일 휴가를 보내는 동독의 노동자와 폭스바겐(Volkswagen)을 타고 연 40일 휴가를 보내는 서독의 노동자. 어느 쪽이 더 사회주의적일까? 당시에 접한 소련-스웨덴의 비교연구도 이른바 사회주의적 가치의 모든 측면에서 외려 스웨덴 사회가 소련보다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같은 곳)

진중권은 공산주의의 최고 선진국 동독에 가고 싶었지만 베를린 장벽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베를린 장벽의 가짜 잔해를 판매하는 기념품 상인들만이 주위를 맴돌던 그런 시절이었다. 독일에서 비트겐슈타인과 발터 벤야민을 공부하고, 유럽을 두루 돌며 관광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그 중 한 친구와 연인을 넘어 부부로 발전하고, 아들을 낳고, "교포 자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07년), 181쪽)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진중권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민주의자'가 되어서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3.
 

 

▲ <시칠리아의 암소>(진중권 지음, 다우출판사 펴냄). ⓒ다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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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혹은 '장기 20세기'가 시작되던 무렵, 독일에서 돌아와 조국의 문제와 싸우기 시작한 진중권은 숱한 명문을 흩뿌리기 시작했는데, "별자리 진보"도 그 중 하나다. 이 텍스트가 주는 진한 울림은 저 루카치의 메타포 아래에서 온전히 이해 가능하다. 만약 <소설의 이론>의 서문을 모른 채 "별자리 진보"를 접했던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저 위에 인용된 문장을 음미한 후, 다음 인용문을 읽어보도록 하자.

최근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바라보며 나는 별자리를 생각한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깜깜한 사회, 거기에서 갖가지 이름의 별들이 서로 연결되더니 별자리를 만들어낸다. 까만 밤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별자리, 나는 거기에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결사체. 그것은 별자리를 닮았다. 시민연대는 총선이 끝나면 별자리를 해체하고 다시 별들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일이 생기면 따로따로 빛나던 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또다시 새 별자리를 짜고, 그러다가 또 흩어지고……. (<시칠리아의 암소>(다우출판사 펴냄, 2000년), 64쪽)

물론 이것은 루카치의 비유와 1:1로 대응되지 않는다. 루카치가 말한 '별'은 역사의 텔로스, 공산주의 혁명이지만, 진중권은 "자유로운 개인"들 각각이 '별'이 되자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루카치의 '별'이 목적어라면 진중권의 '별'은 주어다. 루카치는 '별'을 통해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밖에 없는 목적지를 가리키고자 한다면, 진중권의 "별자리 진보"는 한시적이고 임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개인들의 창발적 연대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 텍스트를 잇는 거대한 정서적 끈을 감지할 수 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진보'에의 희망을 품는 지식인의 선량한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다. 1993년 독일로 훌쩍 떠났던 진중권이, 귀국하여 대표적인 '안티조선' 논객으로 활약하던 그 시절의 분위기는 아무튼 그랬다. 단 하나의 북극성이건, "밤하늘에 그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그려져 있지 않"(63쪽, 같은 책)은 별자리이건, 어쨌건 '우리'는 별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 캄캄한 밤을 헤치고 신중하게 한 걸음씩 전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년의 운동권 진중권은 당시 활발히 진행되고 있던 진보정당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1997년 대선에 노동자 후보를 내기 위한 운동이었던 국민승리21이 명맥을 이어가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진지하게 대선에 임하고 총선에서 의석을 획득하여, 현실 정치를 통해 현실에 개입하고자 했다. '혁명의 전초기지'를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 그때까지 진보진영에서 이른바 '부르주아 정당'이라고, 자본가들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리기 바빴던 의회정치에 직접 뛰어들어 구체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시도가 벌어지고 있었다.

진중권이 계간 <사회비평> 2002년 여름 호에 기고한 '적, 녹, 흑: 진보정당을 중심으로'는 바로 그 당시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역작이다. 별도의 단행본으로 편집된 바 없지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바로 찾을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진 이 글에서, 진중권은 당시까지의 진보 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21세기에도 생존이 가능한 세 가지 이념을 추려내어, 사민주의와 생태주의와 무정부주의(즉 자율주의)를 진보정당 운동의 고갱이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런데 당연히, 한 사람이 완전한 사민주의자이면서 생태주의자이고 동시에 무정부주의자일 수는 없다. '적, 녹, 흑'의 이념이 진보정당 안에 구현되기 위해서는, 그 각각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 할 공동의 선을 구현하기 위한 조직을 형성해야 한다. 즉, '별자리 진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간의 시간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러므로 저 두 텍스트는 서로 상보적으로 독해될 수 있다. 총선연대 뿐 아니라, 안티조선이 됐건 진보정당 운동이 됐건, '역사의 텔로스', 혹은 북극성을 상실한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각자의 빛을 뿜어내고, 별자리를 형성하며, 또 그 별자리를 읽어냄으로써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한 걸음씩이라도 진보를 이룩해 나가는 것이다. 비단 진보정당 운동이 아니어도,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어떤 이념이 허락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민주의, 생태주의, 무정부주의의 느슨한 결합 정도일 것이다. 진중권은 그러한 꿈을 꾸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활자 매체와 인터넷을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글을 쏟아 부었다.

4.
 

 

▲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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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폭풍의 세월을 어느 정도 보내고 난 후, 자신이 쓴 글 중 단행본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 묶던 진중권은 문득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박정희 망령은 물러갔고, <조선일보>는 제 몫을 찾았고, 한나라당은 몰락했고,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진출에 성공했다. 모든 게 내가 원하던 대로 된 셈이다. 그런데도 까닭 없이 느껴지는 이 허탈함의 정체는 뭘까?"(머리말, <빨간 바이러스>(아웃사이더 펴냄, 2004년))

2013년 5월 현재 이 문장을 보면 "모든 게 내가 원하던 대로" 되었다는 등의 소리를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진중권이 저 글을 쓰던 시점이 2004년 6월이라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야당으로 전락하고, 신생 여당 열린우리당이 탄핵 역풍을 타고 과반수 의석을 획득했다. 정당투표제가 도입되면서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에서 무려 8석을 얻어, 지역구의 2석을 합쳐 총 10석으로 심지어 구 민주당도 앞지르며 원내 3당이 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기존 언론의 영향력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는 인터넷의 활약이 도드라진 것은 물론이다.

하여 진중권은 선언한 것이다. '다 이루었다.' 심지어 그는 "4월 15일, 당사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을 들으며 [나는] 4년 동안 견지해 왔던 이 당에 대한 지지를 비로소 접을 수 있었다."(같은 곳)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진중권은 계속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진보정당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들을 쏟아냈지만, 2004년 이후에 출간된 책들의 목록을 통해 그의 정치적 입장의 변화를 더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2004년 6월 출간된 <빨간 바이러스>의 다음 책은 2005년 3월에 나왔다. 그 제목은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휴머니스트 펴냄, 2005년)이었는데, 본문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이 책은 그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원고를 묶어서 만든 것이었다. 안티조선운동이 <조선일보>를 넘어 '조중동'에 대한 포괄적 거부로 나아갔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을 만도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당시는 모두가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시기이기도 했고, 책 그 자체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칼럼집이 아니라 미학을 다루는 것이기에 그리 큰 논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한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으로서 진중권의 이력에 중요한 기점이 된다. 한국 사회를 향해, 뭔가 '돈벌이'가 될 수 있는 방향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최초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직전에 출간된 책의 제목이 <빨간 바이러스>였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고 보니 더욱 역설적으로 느껴지지만 아무튼 사실이 그렇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1인칭 전지적 진중권 시점으로 말하자면, 스마트폰 시대를 선취한 책인 것이다. 진중권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상상력의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미래의 생산력은 상상력이 될 것이다."('상상력 혁명',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라는 문구에 등장하는 "힘"은, 뒤따라 이어오는 "미래의 생산력"에서 말하는바 '생산력'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돈으로 수렴하게 된다. 물론 마르크스가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경기침체보다는 경제성장을 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 녹, 흑"의 저자가 '놀이, 예술, 상상력'을 통해 "미래의 생산력"을 증진해야 한다고 말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어쨌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진중권은 '정치'를 경유하지 않고, 곧장 '사회'를 향해 발화할 수 있는 지점을 획득했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키워서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미학적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인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놀이'와 '상상력'을 강조함으로써, 이른바 '구시대적 좌파'들과 한층 더 확실하게 선을 그을 수 있게 된 것도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공장 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에만 집착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한 이론적 초석을 다져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표명을 함부로 '우경화'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진보 혹은 좌파야말로 전통적으로 기술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상력'을 자신의 주요 화두 중 하나로 삼는 것이, 그가 즐겨 인용하는 벤야민의 말마따나 "유행하는 책을 유행이 지난 후 읽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2009년 <괴짜 사회학> 출간 기념 공개 대담에 참석한 진중권. ⓒ프레시안(최형락)


5.

총선 결과를 본 후 본인이 추구했던 사회적 목표들이 전부 완수되었음을 확인하고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을 쓴 진중권의 판단은, 당시로서는 타당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남은 3년 반 가량의 시간이 얼마나 스펙터클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력이 부족한 독자를 위해 진중권의 타임라인에서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두 가지 사건만을 언급해보자. 본인이 수십조 달러의 가치를 지니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던 한 과학자가 있었는데, 그 연구 결과라는 것이 포토샵을 이용한 사진 조작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났다. 또한 본인이 수백억 달러의 흥행을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던 한 영화감독이 있었는데, 그 영화가 개봉하고 나니 수많은 관객들이 극심한 재미없음과 당혹감을 호소하며 극장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 <첩첩상식>(진중권 지음, 새움 펴냄). ⓒ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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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황우석 사건을, 후자는 심형래의 <디 워> 개봉을 둘러싼 논란을 다소 장황하게 늘여서 써본 것이다. 황우석 사건은 진중권의 내면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고, 그렇게 비틀거리던 그는 <디 워> 사태를 통해 훗날 '촛불 스타'로 떠오르게 될 초석을 닦았다. 두 사건 모두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대중의 열광이 드러났는데, 전자는 진중권이 "지금 나는 썩어가고 있다"(<첩첩상식>(새움 펴냄, 2006), 17쪽)는 쓰라린 자기 선언을 하게 그를 몰아붙인 반면, 후자는 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사상 최초로 대중들에게 "횽(형)" 소리를 듣는 지식인이 되게 만들었다.

일단 2005년 말부터 2006년 초까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황우석 사건으로 먼저 들어가 보자. 진중권에게 결정타를 안긴 것은 2006년 4월 24일 벌어졌던 이른바 '감금 사건'이 아니었다. 그가 경남 창원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나오려는데 황우석의 지지자 30여명이 들이닥쳤고, 4시간가량 옴짝달싹 못하도록 강의실을 봉쇄하고 있었던 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중권 본인의 설명을 들어보자.

내가 진짜 상처를 받은 것은 그때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거의 모든 국민이 황우석을 신봉하고, MBC의 광고를 끊어버리고, 황우석 비판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언어적 폭력을 가하던 상황. 솔직히 그때 무서웠다. 이른바 '노빠'와 '박빠'가 '황빠'로 뭉쳐서 함께 퍼붓는 애국적 언어폭력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가공할 수준이었다.

웬만한 욕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나지만, 그때 퍼부어진 욕은 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입은 심리적 상처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후유증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 프로그램의 청취자 게시판에 올라온 욕설 중에는 나와 절친했던 학교 후배가 제 실명을 걸고 써놓은 것도 있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첩첩상식>, 16쪽)


6.

"혹시 국민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07년), 9쪽)

황우석 사건을 취재하던 일본 방송사 PD가 진중권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한다. 물론 그 자리에서는, '민족성', '국민성' 등의 개념을 거론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독일식 사고방식의 소유자답게 "국민성 같은 게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는 답을 돌려주었지만, 저 질문이 진중권의 뇌리에 오래 남아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건 그에게 있어서 "황우석 사태는 이 이념의 대립 너머에 존재하는 분열의 새로운 차원"에, "이념보다 더 깊은 차원의 대립, 한마디로 서로 다른 인성의 대립"(같은 책, 109쪽)이 존재함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2006년 무렵의 인터뷰 기사 등을 짚어볼 때, 그 무렵부터 진중권은 월터 옹이 만들어낸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대립구도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마 진지하게 미디어아트 등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월터 옹, 마샬 맥루한 등을 (다시) 읽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월터 옹이 만들어낸 저 개념이 대단히 유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황우석 사태와 같이 기존의 개념 틀로 해석이 안 되는 사태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진중권에게는 차라리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그는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출간하기 전, 2006년 6월경에 논객으로서 절필 선언을 했다. 이후 또 절필 선언을 하기 때문에 이것을 '1차 선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1차 선언'이 이루어진 곳은 그와 다른 진보 논객들이 자주 칼럼을 연재하던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코너였다. 그는 "이제는 규범을 말하고 지키는 논객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기술하는 기록자나 허구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이고 싶다"며, 라디오 진행자를 그만두고, 정치·사회적인 의견을 게시하기 위한 지면을 반납하고,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들어버린 아비투스(습속)가 무엇일지 고민하며, 비행기 조종을 배우기 시작했다.

<호모 코레아니쿠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출현한 책이기 때문에,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만큼이나 그의 오랜 독자들에게는 다소 뜬금없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몸은 한국에 살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독일에 있던 진중권이, 심지어 술에 취하면 영어 불어 독어로 술주정을 한다는 믿기 어려운 전설이 나돌기도 하는 그 진중권이, 갑자기 이 무슨 한국인 타령이란 말인가. 그와 오래전 틀어졌을 뿐 아니라 사실 글 쓰는 방식과 성향 등 많은 부분에서 다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점까지 꾸준히 같이 거론되고 비교되었던 강준만이 2006년 <한국인 코드>라는 책을 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이상해 보였다.

앞서 우리는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 이전까지 진중권의 글을 읽어오던 이들에게 의아한 기분을 안겨주는 책이라고 확인했다. 그런데 <호모 코레아니쿠스> 역시 그랬다. 특히 전자보다 후자가 안겨주는 이질감이 매우 컸다. 비록 그 내용을 뜯어보면 '신체'에 대한 현대철학의 논의를 검토하는 것이 절반, 그 논의들을 적용해볼 수 있는 현대 한국 미술 작가들의 작업을 검토하는 것이 절반 정도지만, 애초에 제목과 주제가 '한국인'으로 잡힌 책을 낸다는 것은 당시의 진중권이 거느리고 있던 독자들이 아는 '그 진중권'이 할 행동은 아니었던 것이다.

두 개의 오답을 합친다고 해서 하나의 정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통해 진중권은, '앞으로는 이걸 밀어야지'라고 점찍어둔 '구술문화 대 문자문화'의 구도를, 앞으로 자신의 독자가 되어줄 한국인들에게 과감하게 적용했다.

한국의 선진적인 인터넷 인프라는, 역설적이게도 역사적 후진성의 덕분이다. 한국의 경우 해방 직후 문맹률이 90퍼센트에 달했다고 하니 문자문화로 진입한 지 채 60년이 안 된 셈. 당연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구술문화의 습속이 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한국인들 역시 급속히 익명화, 원자화되어갔다. 하지만 오랜 촌락공동체 생활에서 형성된 인격적 접촉의 열망까지 사라지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사라져가던 촌락공동체 문화는 인터넷을 만나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는다. (같은 책, 192쪽)
 

 

▲ <호모 코레아니쿠스>(진중권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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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한국문화사 서술은, '구술문화'를 '전근대'로, '문자문화'를 '근대'로 치환하고 읽으면, 근대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포스트모던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기존의 담론과 사실상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이른바 '압축적 근대화'로 인해 제대로 된 근대를 형성하지도 못했고, 그 상태에서 다시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서, 그 두 단계를 모두 착실히 밟은 서양 사회에서 모두 거쳐 간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다는 그런 종류의 진단 말이다.

하지만 단어를 바꿈으로써 얻게 된 것이 없지는 않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다음에는 '영상문화', 혹은 '디지털문화'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은 바로 그 구술문화적 성격으로 인해 인터넷 보급률이 순식간에 높아졌고, 따라서 문자문화 단계에 오래 머물러있는 다른 서구권 국가에 비해, 비록 문자문화 자체는 부실하기 짝이 없지만, 다음 단계로 비교적 빨리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자문화에 밀려 사라졌던 영상문화와 구술문화가, IT(정보기술)에 힘입어 문자문화의 이후에 다시 주요한 소통매체로 되돌아오고 있다. 아직 문자문화가 충분히 무르익지 못한 후진성이 외려 문자문화 '이후'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잔혹하기 짝이 없었던 역사가 한국에 보여주는 약간의 공정함이랄까? (같은 책, 187쪽)

그런데 앞서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패기 있게 선언된 바와 같이 21세기는 상상력이 곧 경쟁력인 시대다. 우리에게 문자문화가 부족한 대신 문자문화 '이후'를 만들어갈 원동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이 단지 '영상문화' 차원에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앞서나갈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이 된다.

2006년에서 2007년 사이 진중권이 구체적으로 표현해낸 '영상문화-상상력'의 논의 구조는 상당히 건설적이고 발전적이며 미래 지향적이기도 하다. 그를 단지 '모두까기 인형'이나 tvN의 <SNL 코리아>의 '진중건'처럼 오직 네거티브한 논의만을 펼치고 남을 깎아먹기 급급한 누군가로 치부하는 이들의 생각과 달리, 진중권의 머릿속에는 한국 사회가 어떤 형태를 띠고 굴러가야 할지에 대한 대략적인 큰 밑그림이 들어있는 것이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위에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포개보면, 기왕 넘어가버린 영상문화를 긍정하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폐단을 모두 피해가는 그런 사회가 보인다. 그 영상문화의 힘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백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높은 문화의 힘을 갖추고, 그것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여 높은 소득도 올리는 그런 나라의 청사진이 나오는 것이다.

동시에 미디어아트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진중권 본인도 이제는 거리낌 없이 포스트모던의 원리를 자신의 글쓰기와 삶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이라고 안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 장벽이 이론적 근거를 통해 제거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적어도 '우리 포스트모던 똑바로 하자'보다는, '우리 영상문화 시대에 올바르게 적용해보자'가 좀 더 그럴듯한 말처럼 들리는 것이다.

7.

문제는 이번에도 진중권이 유행 지나간 책을 늦게 읽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좀 많이 늦었다는 데 있다. 영상매체와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함께 던지면 <쥬라기 공원>이 떠오를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 한 편이 올린 수입이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몇십만 대를 수출한 것과 같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난다면, 당신은 나와 비슷한 연배거나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문화적 상상력으로 높은 수입을 올린다는 발상 자체만큼은, 전혀 상상력과는 무관한, 일종의 클리셰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 심형래 감독의 <디 워>. ⓒ영구아트무비


그 클리셰를 가장 진지하게 실천에 옮기고 있던 사람이 바로 심형래였다. <디 워>를 만든 바로 그 심형래 말이다. 진중권이 2006년에 이르러서야 '상상력이 곧 경쟁력'이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심형래는 <쥬라기 공원>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오래도록 공룡 특촬물을 만들며 근성 있게 기술을 갈고 닦은 끝에, 김대중 정부에 의해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디 워> 논란은,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이론가가 주창하기 시작한 것을 진작부터 실행에 옮기고 있던 한 창작자가 있다. 그런데 그 창작자의 결과물을 보고, 이론가는 진저리를 내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소리를 외치기 시작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마법소녀의 주문 같기도 하고 뭔가 묘한 매력이 있다고 느낀 대중들은 이론가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하며, 이론가는 기존의 독자층을 벗어나 대한민국 최초로 자신을 '횽'이라고 부르는 일군의 팬 집단을 거느리게 된다.

물론 심형래라는 한 창작자가 내놓은 결과물이 후지다고 해서, 창조성이 곧 경쟁력이라는 진중권의 테제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2007년 9월 14일 <디 워>가 개봉하던 그날까지, 진중권이 제시한 창조성과 상상력으로 경제드라이브를 거는 모델을 가장 잘 실행하고 있던 사람이 심형래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칸트의 말처럼, 개념 없는 직관은 공허하고 직관 없는 개념은 맹목적이다. 진중권은 스티브 잡스가 '붐' 하면서 꺼내들었던 아이폰이 국내에 정식 출시되고 성공하기 전까지, 마음 편하게 어떤 사례를 지칭하며 '내가 말하는 상상력이 힘이 되는 경제는 이런 거지, 하하'라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난점을 제하고 나면, <디 워> 논란은 진중권의 인생에 역전의 기회를 제공해줬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디 워>의 스토리를 설명하기 위해, <100분 토론>에 출연했던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고전적인 서사의 개념을 들이밀었고, 그것이 아직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국내에서 활성화되기 전 주로 '디시인사이드'에 모여 있던 '잉여' 청년들의 감수성에 제대로 꽂혔다. 진중권은 본인 스스로가 '소스'가 됨으로써, 텍스트가 아니라 이미지로 사유하는 새로운 신체를 가진 '호모 코레아니쿠스'들이 존재함을 입증한 것이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외치는 진중권 짤방.

이 '짤방'을 독해해보자. 진중권의 얼굴을, 당시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16세의 몸에 대충 합성하고, 위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써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대략 세 가지 사실을 즉각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1) 이 짤방을 만든 사람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딱히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2) 이 짤방을 만든 사람은 그러나, 하필이면 교황과 진중권을 합성했다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 말이 어느 정도 권위 있(어 보이)는 표현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3) 그런데 누군가 그런 말을 하면 아무튼 웃겨 보인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합성은 '발로 한' 것처럼 낮은 퀄리티로 이루어져 있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이행하고, 문자문화에서 다시 영상문화로 이행하는데, 심형래처럼 구술문화적 힘을 이용해 영상문화에서 한몫 잡으려는 사람을 한 차례 걸러내 보자. 그러면 이렇듯 문자문화가 요구하는 지적 능력이나 교양은 부족한 상태로, 다만 보고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네티즌이 나온다. 그런데 이 네티즌이라는 것은, 1999년 귀국한 이후 진중권이 신물이 나도록 상대해온 바로 그놈들이다.

영상문화는 이미 와 있었다; 다만 돈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8.

진중권이 진저리를 내건 말건 <디 워>는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진중권은 그러한 결과를 전혀 원치 않았겠지만,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4년 총선 이후 '역사의 종언'을 보고,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생각하며, 근대적 기준만을 고집하지 않고 탈근대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재주조해낸 진중권은 다른 여느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센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다음 선거에서 한국 유권자의 '38.6퍼센트가 중도적인 정부를 원했고, 다음으로 34.2퍼센트가 진보적이기를, 20.1퍼센트는 보수적이기를 바랐다'고 한다.(<시사저널>, 2006/10월/03) 하지만 '누가 가장 진보적인 후보냐'는 설문에 '이명박'이라고 대답하는 게 한국의 정치 상식이니, 이런 설문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같은 책, 177쪽)
 

 

▲ <생각의 지도>(진중권 지음, 천년의상상 펴냄). ⓒ천년의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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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진중권 본인은 한국에 구술문화만 충만하고 문자문화는 부족하다고 말했지만, 본인이 다소 '포스트모던'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어쨌건 예전에 비해 구술문화가 아닌 문자문화적 요소가 늘었다는 낙관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우리의 조국은 언제나 우리의 눈높이를 훌쩍 뛰어넘어, 대중은 '가장 진보적인 후보'라는 단어를 들으면 '이명박'을 떠올렸다. 반면 그 이명박에 맞서 선거를 해야 할 민주당, 아니 대통합민주신당은 내부 계파 싸움으로 분열되어, 이른바 '친노' 계열은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고, 그 와중에 내세워진 후보는 17대 총선에서 '노인 발언'으로 잘 나가던 선거에 큰 위기를 불러왔던 정동영이었다. 그 정동영이 얻은 득표수는 고작 600만 표 가량으로, 이는 <디 워>의 관객 수인 780만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사회가 한 발자국, 혹은 반 발자국이라도 '모던'으로 향할 것이라는 믿음 하에 '포스트모던'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더니, 대한민국은 더더욱 현란한 탈근대의 경지로 훌쩍 뛰어 들어간 것이다. 100명이나 읽을까 말까한 미학 책을 쓰고 싶다는 진중권의 삶은 그 이후로 더욱 바쁘고 정신없고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2008년 촛불시위, 그는 '아프리카 TV'로 생중계되는 시위 현장에서 진보신당의 <칼라 TV> 리포터가 되어 체스를 두는 자동인형이 되는 체험을 한다. 그 과정에서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진중권이 촛불시위 당시 누렸던 인기는 향후 그 어떤 지식인도 쉽게 넘볼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본인이 설명하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요소가 결합된 영상문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진중권이다. 열정적으로 뛰어다니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밴 예의가 바르기 때문에 마땅히 흠 잡을 구석이 없자, 일군의 노인들이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담배 똑바로 피우라'고 훈계를 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대립이다. 그러자 그 상황이 녹음된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영상문화의 네티즌들은 '진중권 담배 송'(바로가기☞)을 만들어 화답했다. 이렇게 철저히, 자신이 대중에게 소개한 이론이 자신을 통해 육화되는 것을 경험한 지식인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 너무 잘 나간다 싶었다. 그러더니 그를 겸임교수로 임명하고 있던 중앙대학교에서 문득 진중권을 해고해버렸다. 더 이상 국내에서 버티기 힘들겠다는 판단을 한 그는, 기왕 배우기 시작한 비행기 조종을 완벽하게 만들 겸, 영어 회화도 익힐 겸, 필리핀 항공학교에 등록을 하고 3년을 기한으로 잡아 출국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가 관심을 갖지 않아도 상대편에서 집착하는 누군가에 의해 제기된 소송들이 얽혀있었고, 그로 인해 꾸준히 재산과 체력과 정신을 갉아 먹히게 된다.

결국 본인이 꿈꿨던 것처럼 3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진중권은 한국에 돌아왔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몇몇 미학 서적을 출간하고, <씨네21>에 연재했던 철학적 에세이들을 모아 <아이콘>(씨네21북스 펴냄, 2011년)이라는 제목으로 묶어서 내고, 꾸준히 비행기 연습을 하며 필리핀 사람들이 즐겨 먹는 '발롯(balut)'을 음미하며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곱씹었다. 뇌물수수 혐의로 교육감 직을 상실하게 된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다, 다시 한 번 논객을 그만두겠다며 '2차 선언'을 했지만, 대선을 앞두고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한 이상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12월 19일, 즉 대선 당일까지만 하겠다는 한시적 조건을 걸고, 진중권은 다시 한 번 논객으로서 시동을 걸었다.

9.
 

 

▲ <아이콘>(진중권 지음, 씨네21북스 펴냄). ⓒ씨네21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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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싸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중권은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고, 특유의 순발력과 언어감각 및 기존의 인지도로 인해 이른바 '파워 트위터리안'이 되어 대선 정국에 개입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쌓여가는 트윗만큼이나 숱한 '흑역사'를 적립했는데, 그 모든 내역을 일일이 기입하기에는 이 지면이 모자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의 정치적 판단만을 기억해보기로 하자.

대학에 들어가 운동권이 된 후 진중권은 단 한 번도 NL, 그 중에서도 특히 주사파와 가까워진 적이 없었다. 현재 확인 가능한 그의 텍스트에서 주사파가 긍정적으로 묘사된 경우는 없다. 이것은 단지 대학 시절 운동권에서 조직이 달랐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특히 독일 유학을 기점으로 내면의 근대화를 이룩한 그는 북한을 한국의 대안으로 여기며,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신처럼 모시고, 온갖 유교 봉건적 습속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주사파와 도저히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가 없는 사이인 것이다.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당 간 이합집산이 극심해졌다. 민주노동당은 이미 주사파에게 점령당한지 오래였고, 자신들이 일궈놓은 정당을 빼앗긴 이들은 탈당을 하여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한편 남아있던 민주노동당 다수 세력은 구 민주당 계열에 정착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유시민의 '국참계'와, 진보신당에서 탈당한 심상정, 노회찬 등과 손을 잡고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그것이 2011년 12월의 일이다.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 통합진보당에서 총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경선을 진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관악을 선거구에 출마한 이정희 의원 측이 모바일 투표에 나이와 성별 등을 속이고 참여하라는 문자를 보낸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정희 의원은 구 민주노동당 출신으로 이른바 '주사파'로 간주되는 인물이었다.

진보정치는 옳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정당한 과정을 통해 획득되어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던 진중권은, 게다가 그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이른바 '주사파'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우호적으로 이정희 측을 감싸고 나섰다. 이정희와 상대방인 김희철이 재경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이정희가 경선 과정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았고, 그 증거가 당시로서는 명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의 뜻은 한결같았다. 원래 NL은 도덕성을 무기로 삼는 자들이 아니니, 이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재경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한 벌이 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진중권의 이러한 발언은 그의 오랜 독자, 혹은 팬 층을 실망 내지는 충격에 빠뜨렸다. 사실 그의 취지가 무엇인지는 모를 수가 없다. 부정경선을 하다가 적발되었는데 재경선을 하라는 것은, 커닝하다 들켰는데 재시험을 보게 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만약 또 다른 진중권이 보고 있었다면 반드시 지적했을 것이다. 다만 '파워 트위터리안'이 된 진중권은, 야권연대가 깨지고 선거 결과 형편없이 패배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을 따름이다.

이후 대선 과정에서 보인 모습 역시, 놀라우면서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는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단일화가 되지 않으면 통합진보당의 후보인 심상정을 찍겠다는 취지의 트윗을 올렸다. 강준만과 유시민이 그 어떤 식으로 공격하고 회유해도 넘어가지 않고 민주노동당의 깃발을 지키던 그 진중권이 아니었다. 어차피 구 민주노동당 자체가 형해화된 상황이긴 했지만, 그 다음의 진보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대신, 진중권은 12월 19일 선거 이후에는 아예 세상이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단일화와 정권교체라는 한 가지 이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중권은 스스로 선언한 논객으로서의 마지막 날을 맞았고, 그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섰던 '야권'은 패배했다.

10.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진중권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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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던 글쓰기는 이런 게 아니었다."('들어가는 말', <시칠리아의 암소>(다우 펴냄, 2000년)) 본인이 원치 않게 청탁을 받아 쓴 정치적 글을 모아 책으로 엮으면서, 진중권이 저자 서문에 내놓은 첫 문장이다. 그에 따르면, "원래 내가 생각하던 글쓰기는 '책'을 쓰는 것이었"지, 이렇게 구성도 안 되고 다만 대충 그러모아서 주제별로 묶어놓는 것이 최선인 그런 글을 쓰는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진중권은 술회한다. "요즘은 가끔 삶이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런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독일에 있을 때 받은 어떤 원고 청탁에서 비롯한 것이다."(같은 곳) 그 원고 청탁은 아마도, 이인화가 편집위원으로 있었던 잡지 <상상>에서 '악마주의'에 대해 원고를 써달라고 했던 그것일 터이다. 진중권은 열심히 원고를 준비했는데, 알고 보니 그 원고는 이인화가 박정희를 '낭만주의적 악마'로 묘사하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기왕 원고를 쓴다고 했으니 쓰되, 반론할 수 있는 지면도 요구했고, <상상> 측에서도 허락했다.

그런데 이인화의 심기가 불편했던지 진중권의 원고는 아예 실리지도 않았고, 대신 그것을 고스란히 살려 <문학동네>에 기고했는데, <조선일보>를 비판한 문단이 삭제된 채 글이 실렸다. 한 번은 쓰게 웃고 넘어갔는데, 비슷한 주제로 쓴 다른 글이 거부당하자, 진중권은 <조선일보>를 겁내지 않는 언론을 찾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강준만이 만든 '저널룩' <인물과 사상>이었다. 그 지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진중권은 그 작업을 쭉 이어나갔고, 그렇게 만들어진 원고가 모여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개마고원 펴냄, 1998년)가 되었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전략은 매우 단순하다. 진중권은 "대한민국 우익들이 쓴 텍스트에서 뽑은 인용"을 서로 충돌시킨다. "즉 나는 이들의 논리를, 이들 자신이 내세우는 논리로 반박하려는 거다. 이게 내 전략이다."(<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권, 27쪽) 하여 진중권은 자신의 책을 "순문학으로 이해한다."(28쪽) "한국 민중문화의 풍자적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 내가 개척한 새로운 문학 장르", "20세기의 김삿갓", "논문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포스트모던"(같은 곳)을 자처하는 것이다. 독일 유학생이던 진중권의 혈기와 재기가 한껏 느껴지는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같은 사람이 15년 후에 쓴 또 다른 서문을 살펴보자. 그는 <씨네21>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묶으며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붙인다. "여기에 묶인 글들은 논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필도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논문과 수필을 뒤섞어 놓은, 아주 특정한 의미에서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생각의 지도>, 5쪽)

본인의 '풍자문학'이 "논문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포스트모던"이라고 스스로를 조롱했던 이가, 15년이 지난 후에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글을 "굳이 말하자면 논문과 수필을 뒤섞어 놓은, 아주 특정한 의미에서 '에세이'"로 소개한다. 전자는 '놀이'로 '포스트모던'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굳이 말하자면) '일'로 '포스트모던' 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글을 모아서 책을 내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2000년의 진중권은 "내가 생각하던 글쓰기는 이런 게 아니"라고 절규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의 '잡문'을 하나씩 흩뿌린 후 '별자리'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실패한 유학생 진중권이 개척한 길은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것이었다. 그는 인터넷이라는 광장에서 질펀하게 뛰어노는 지식인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자신이 동경하는 디오게네스에 가장 잘 부합하는 지식인을 단 한 사람 꼽자면,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진중권을 따라올 자가 없다. 자동차 면허증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항공기 면허증은 있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많은 글을 쓰지만 가장 선호하는 작업실은 대한민국 어디서나 반경 2킬로미터 안에 하나씩은 있는 PC방이며, 음악에는 조예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울적할 때에는 샹송을 듣는 그런 지식인의 모습을 진중권은 만들어냈다. 그것을 우리는, 그가 선호하는 표현대로라면, '존재미학'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미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진중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한국에서 독일로, 다시 독일에서 한국으로 던져진 자신의 삶이 비루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것을 견뎌내기 위한 작은 보루로서 존재미학을 꺼내들었다.

내 꿈은 삶의 예술가(lebenskünstler).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생존 예술가(Überlebenskünstler). 앞으로도 전망이 좋아 보이지 않지만,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누구 허락받지 않고 책을 번역할 자유, 누구에게 욕먹지 않고 책을 쓸 자유,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인정사정 보지 않고, 소위 분위기라는 이름의 상황 논리, 대중이란 이름의 평균성에 구애받지 않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할 자유. 이 귀중한 자유의 대가라 생각하면 그뿐. 물론 나도 남 잘사는 거 보면 배가 아프다. 이 현실적 결핍감을 심리적 풍족감으로 보상하는 방법. '존재 미학'. 객관적으로 보잘것없는 내 삶을 주관적으로 심오하게 포장해주는 사적 이데올로기. (<시칠리아의 암소>, 269쪽)

그러나 진중권이 본인의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를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라 진지한 학문적, 문예적 실천으로 간주하게 되었을 때, '존재미학'의 크기도 한없이 커졌다. 이제 그것은 단지 초라한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사적 이데올로기에 머물지 않는다. '포스트모던'해진 관계로, 어떤 정치적, 도덕적 당위를 타인에게 강요할 수도 없게 된 진중권이, 궁극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최종 심급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삶에 의미를 주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공약을 해야 한다. 공약을 한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부담 역시 기꺼이 지겠다는 선언이다. 하지만 이를 귀찮은 의무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공약을 통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자신을 형성하는 존재미학의 실천이다. 그림을 그릴 때에 화면에서 미적 필연성을 따르면서도 우리가 그것을 제약으로 느끼지 않듯이, 공약의 부담을 지는 것도 자유로운 행위가 될 것이다. (<생각의 지도>, 190쪽)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그들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방법론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 '공약'과 그것을 지키는 '존재미학'이다. 진중권의 지적 체계 속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회적 원칙은 궁극적으로는 이것뿐이다. 마치 원칙과 공약을 잘 지킬 것 같은, 약속과 신뢰의 존재미학 그 자체였던 정치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지금, 이 구절은 더욱 씁쓸하게 다가올 뿐이다.

11.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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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04년의 그때로 돌아가 보자. "박정희 망령은 물러갔고, <조선일보>는 제 몫을 찾았고, 한나라당은 몰락했고,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진출에 성공"했던 그 때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박정희는 별개의 인격체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당선을 박정희 망령의 귀환으로 바라보고 있다. <조선일보>는 제 몫의 종편을 찾았다.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개명하고 붉게 타올랐다. 민주노동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다. 그때의 성취 중 지금까지 제 모습을 하고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철학과 미학의 텍스트에서 배운 내용과,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통해 익힌 문자문화적 습속을 가지고 왔던 진중권은, 어쨌건 이 세상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생각을 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자신의 완강한 모더니즘을 서서히 털어냈다. 그는 스스로가 '포스트모던' 하게 글을 쓴다는 것을 시인하고, 서양의 철학적 개념을 한국의 현실에 적용하는 '잡문'을 평생 써야만 하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는 '포스트모던'을 모던한 문체로 설명하는 작가가 되었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달랐다. 어차피 그것이 전부 유희일 뿐이므로, 지금도 보기 힘든 '미치광이 같은' 문체 실험이 마구 쏟아졌다. 동음이의어, 특수문자, 한자, 알파벳 등 온갖 '비-한국어'의 요소들이 끼어들었고, 인용문과 인용문이 서로 헐뜯었으며, 모든 페이지가 현란한 지성과 능란한 조롱으로 폭발했다. 강고한 모더니스트가 쓴, 최고의 포스트모던 텍스트였다고 우리는 그 책을 기억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언제나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으면 다행이었다. 진중권은 또 다른 진중권이 되면서 우리에게서 진중권을 빼앗아갔다. 그의 초창기 활동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가장 올바르고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그를 잃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촛불시위 이후 스타가 된 진중권만을 아는 이들은, '비판적 지지' 논쟁을 하며 게시판에서 밤을 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네티즌의 속을 긁어대는 진중권을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진중권은 예전의 진중권이 아니다. 하지만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닌 것은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날렵한 논객과 함께 논객시대를 살아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프레시안(손문상)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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