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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발하는 한반도 관련 속보, 추락하는 시청률

 

CNN, “한반도 전쟁 직전” 보도… 그 속내는?
 
[분석] 빈발하는 한반도 관련 속보, 추락하는 시청률
 
김원식 | 2013-04-06 09:47: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연일 한바도 위기를 보도하는 CNN 4월 5일자 누리집

 

미국에서 보도 전문 채널의 대명사인 CNN, 요즘 CNN만 보고 있으면 한반도에는 이미 전쟁이 발발했다는 판단을 할 정도로 CNN의 한반도 정세 관련 보도가 '전쟁 일보 직전'을 주제로 극에 달하고 있다.

CNN은 5일(이하 한국시각)에도 누리집은 물론이고 해당 뉴스를 진행하면서 전문가를 동원해 한반도 전쟁 발발 시 어떠한 공격이 진행될 것인지를 그래픽을 동원해 보도하는 등 한반도 상황이 전쟁을 앞두고 있다고 연일 속보나 특집으로 보도하고 있다.

거의 보름을 넘게 이어오는 한반도 관련 특집 보도이다. 일례로 5일 저녁 10시 40분경에도 갑자기 CNN의 누리집에는 속보(Breaking News)가 떴다. 내용은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대(launcher)에 장착(load)했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는 한국의 <연합뉴스>가 한국군 관계자의 정보를 인용해 이러한 사실을 보도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연합뉴스>의 보도 내용 뉘앙스는 달랐다.


익명 전제 먼저 속보 보도… 이후 재탕, 재인용을 통한 위기 가중 보도

오히려 CNN이 5일 오전에 먼저 미 국방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며 "북한이 동해안으로 탄도미사일과 발사대 등을 이동시키고 있다"고 속보로 전했다. 그리고 CNN이 이러한 내용을 보도했다는 것을 <연합뉴스>가 다시 중요 기사로 보도했다.

이후 <연합뉴스>가 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한미 정보당국은 북한이 이번 주 초 사거리 3천∼4천㎞의 무수단 중거리미사일(IRBM) 2기를 동해안 지역으로 옮기고 난 뒤 발사대가 장착된 차량 2대에 각각 탑재한 사실을 포착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연합뉴스>는 “이들 차량은 이후 갑자기 정보 당국의 감시망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며 북한의 이러한 정보 노출이 기만전술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를 CNN은 다시 ‘북한 미사일 발사대에 장착 보도(Report: North Korea loads missiles onto launchers)’이라는 제목으로 속보로 보도하며 “한국의 준관영 통신인 <연합뉴스>는 군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북한에서 중거리 미사일 두 기가 이동식 발사대에 장착되었다고 보도했다”고 속보로 전했다.

보도 내용의 순서만 놓고 본다면 CNN이 미군 관계자의 정보를 이용해 북한 미사일의 동해 쪽으로 이동을 특종 보도하고 이를 다시 <연합뉴스>가 인용 보도하고 <연합뉴스>가 한국 측 정보를 이용해 이를 다시 보도하면서 기만전술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도했으나, CNN은 마치 이제는 한국 언론에서도 (한국군 관계자도) 북한 미사일의 이동과 장착을 확인했다는 것으로 재탕과 확대 재생산을 거듭하고 있다.


다른 언론과는 달리 유독 CNN만 ‘한반도 위기 상황 조성’…이유는?

CNN은 5일에도 간판 앵커인 앤드슨 쿠퍼가 진행하는 메인 시간대 방송에서 은퇴한 미군 전문가를 초빙하여 남북한의 전쟁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지를 관련 그래픽을 동원하며 실감 나게(?) 보도했다.

 

북한이 어떻게 한반도를 공격할 것인지를 전문가를 초빙해 보도하는 CNN

 

한반도 상황의 긴장이 급격히 조성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왜 유독 CNN은 이렇게 연일 한반도가 전쟁 일보 직전의 상황이라고 보도하고 있을까?

한반도 상황에 관해서는 다른 주요 외신들도 전쟁 위험성에 관한 보도도 하고 있지만, CNN처럼 이렇게 과도하게 확대하고는 있지 않다. 5일 비슷한 시간대에 <뉴욕타임스>는 “북한의 긴장이 한국 경제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한반도 위기가 한국 경제에 미칠 가능성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도하였다.

<워싱턴포스트>도 “평양의 긴장 추구에도 남한은 차분”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한국 사람들은 북한이 예전에도 늘 그렇게 해왔다며 의외로 차분히 대응하는 모습이다”라는 주제의 기사를 내 보냈다.

AP통신도 “북한이 긴장을 강화하자 남한 불안(jitter)의 첫 신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의 일상에 별다른 변화가 없으나 북한이 1990년대 이후 최고의 강도 높은 위협적 발언들을 연이어 하고 있어 한국인들이 불안해하는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라는 주제의 기사를 전 세계로 타전했다.

하지만 CNN은 5일만 하더라도 누리집에 “북한은 미국이 순하다(soft)고 생각할까?” “왜 북한은 자살과는 거리가 멀까?” “김정은이 미치지 않은 이유” 등 무려 10여 개의 북한 관련 기사들이 누리집 최상단을 자치하고 있다.


추락하는 CNN의 시청률… 또 다른 전쟁이 필요?

보도 전문 채널인 CNN이 1990년 발생한 ‘걸프전’을 생중계하면서 일약 최고의 보도 채널로 자리매김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종료되면서 CNN의 시청률 추락은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의 다른 보도 전문 채널인 ‘팍스 뉴스(Fox News)’에 1위 자리를 내어준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이며 이제는 2위 자리도 'MSNBC'에 내어주고 끝없이 시청률이 추락하고 있다.

CNN이 고전하는 이유가 보수-진보의 대립 구도가 심화되고 있는 미국 정치환경에서 사실 중심의 보도에 치중하며 중립적 논조를 고수한 것이 시청자들에게 외면을 받았다는 분석도 있지만 그만큼 해당 보도에 대한 분석과 기획력이 떨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거지고 있는 한반도의 위기 상황은 어쩌면 CNN에게는 다시 시청률은 만회할 수 있는 호기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 위기 상황의 조성과 이러한 전쟁 발발의 보도가 시청자들을 영원히 잡고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지난 CNN의 역사가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더구나 연일 관계자의 익명 보도를 기반으로 한반도 관련 위기 상황을 확대하고 있는 CNN의 보도 태도가 과연 CNN이 바라고 있는 시청자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한반도 전쟁 억제와 평화 조성을 위한 여러 관련 보도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가중하는 한반도 위기 상황에 관한 여러 분석이나 체계적인 기획 보도 없이 그저 위기 상황 발발에 일희일비하는 CNN의 최근 보도 태도를 보면서 CNN의 시청률이 끝없이 추락하는 또 다른 이유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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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환의 <한글의 시대를 열다>

국어 올바로 쓰자 했더니, '북 괴뢰'라 모함을!

[프레시안 books] 정재환의 <한글의 시대를 열다>

김기협 역사학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4-05 오후 6:33:13

 

저자가 개그맨 출신 방송인이라는 사실, 그가 우리말글 사랑운동을 펼쳐온 사실, 그리고 40세 나이에 학부에 입학해 13년간 일과 공부를 병행한 끝에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따기에 이른 사실을 이 책을 보고야 알았다. 하나하나 의미가 큰 이 사실들을 엮으면 좋은 기사가 될 것도 같지만, 내 몫이 아니다. 책 내용에 관한 생각만 적더라도 한 꼭지 글에 담기가 벅차게 느껴진다.
 

▲ 정재환 씨. ⓒ프레시안(전홍기혜)

지난 연말 통과된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한 이 책 <한글의 시대를 열다 - 해방 후 한글학회 활동 연구>(정재환 지음, 경인문화사 펴냄)는 부제와 같이 해방 후 10년간 한글학회(1949년 9월 이전은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조선어학회-한글학회는 하나의 민간단체이지만 1920년대 이래 민족의 말과 글에 관련된 활동이 이 학회에 집중되어 있던 사정을 놓고 본다면, 이 학회의 활동은 해방된 민족과 새로 세워진 국가의 어문정책을 전면적으로 비춰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에 세워진 두 정권의 성격을 어문정책의 차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독자로서 큰 소득이었다.

북한 건국과정에서 제2인자 역할을 맡은 김두봉이 주시경을 사사한 한글학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북한 정권이 어문정책을 중시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인민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 서울대 사학과 교수 김성칠이 적은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민공화국의 일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한글 전용이다. 그러나 이상스러운 건 한글을 전용하면서도 한문에서 나온 문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새 문자들을 만들어서까지 쓴다. '독보회'라는 건 늘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그밖에 "창발성을 제고하여서"라든가 "견결히 반대한다"라든가 "경각성을 높여서"라든가 "청소한 우리 인민공화국"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잘 쓴다. 모두 귀에 생소한 말이다. (…)

이북에는 적어도 김두봉 씨, 이극로 씨, 김병제 씨 들이 있는데, 그리고 문장가로도 이기영 씨, 이태준 씨를 비롯하여 한설야, 안회남, 김남천, 임화, 이원조 등 다사제제(多士濟濟)한데, 어쩌면 그렇게도 진부한 표현 방식을 언제까지고 답습하고 있는 것일까. 설사 의식적인 어떠한 움직임이 없더라도 오랫동안 한글을 전용하노라면 저절로 말씨가 부드러워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인데, 갈수록 어려운 한문 문자투성이가 되어감은 대체 어찌한 때문일까. (<역사 앞에서>(김성칠 지음, 창비 펴냄) 1950년 9월 10일)

 

▲ <한글의 시대를 열다>(정재환 지음, 경인문화사 펴냄).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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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의 어문정책에 큰 기대를 건 근거로 김두봉과 함께 이극로와 김병제의 존재를 제시했다. 이극로(1893-1978년)와 김병제(1905-1991년)는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 남북협상 후 평양으로 옮겨간 '월북' 학자들이다. 김성칠이 9-28 서울 수복을 앞두고 북쪽으로 떠나는 친구 하나를 배웅한 뒤 적은 일기를 보면 당시 남한의 문화정책이 빈약하여 많은 문화인들이 북쪽을 향하는 실정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리하여 자꾸만 없어지는 문화인과 기술자들, 몇십 년을 길러야 하는 이들을 하루아침에 다 떠나보내고 앞으로 대한민국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려는 것인지?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 심지어 음악가-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 학계로 말하여도 신진발랄한 사람들이 많이 가고 우리같이 무기력한 축들이 지천으로 남아 있다. 간 그들이 모두 볼셰비끼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사람들 또는 양심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죄다 가버렸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깊이 반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간 그들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남의 밥에 있는 콩이 더 굵어보이는 심리도 있었을 것이고, 턱없이 현실에 불만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는 젊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런데다 이북의 선전공작이 강력하고 또 좋은 미끼로서 나꾸었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뿐일까. 이남의 분위기는 과연 그들에게 유쾌한 기분으로 일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그들의 생활이 안정되었었나 함을 생각해볼 때, 결국은 그들의 등을 떠밀어서 38선 밖으로 몰아낸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정책이 너무나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같은 책, 1950년 9월 26일)


해방에서 전쟁에 이르기까지 남북 간에 많은 인구 이동이 있었다. 상황에 몰려 본의 아니게 옮긴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발적 선택으로 고향이나 활동하던 곳을 떠나 건너편으로 간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이것을 월남 또는 월북이라 한다. 월남 인구가 월북 인구보다 훨씬 더 많았으나 문화예술인과 민족주의자 중에는 월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정황으로 보아 당연한 사실이다. 해방 직후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은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점령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역할을 맡은 반면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은 조선인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하고 자치 권한을 키워주었다. 이남에 대한 미국경제원조가 컸기 때문에 생계를 위한 월남이 많았지만, 민족-문화 정책에서는 이북이 유리한 입장이었다.

미군정에게는 조선인의 민족주의가 통치의 방해 요소였기 때문에 친일파 처단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경찰과 군정청에 적극 등용하여 권한을 쥐어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친일파가 '건국 주도세력'으로 자라났고, 그 세력을 발판으로 세워진 이승만 정권은 겉으로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민족주의를 등지는 성격과 민족문화를 경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민족문화의 중심 요소인 말과 글을 아끼는 사람들의 모임인 조선어학회는 1921년 창립 이래(1931년까지는 '조선어연구회') 학회의 형태이면서도 민족주의운동의 성격을 가진 단체였다. 더욱이 1942년 10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제 말기 최대의 민족주의 탄압이었기 때문에 해방 당시 50여 명의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그 회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민족주의 지도자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해방 때까지 함흥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4인의 회원이 해방 이틀 후 출옥하여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조선어학회 재건 작업이 시작된 것은 해방된 민족의 문화 사업을 요구하는 상황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학회의 정치적 중립을 표방한 것은(1945년 10월 26일 간사회 결정) 분단 점령과 좌우 대립의 상황 속에서 학회 사업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를 이끈 이사(1946년 2월까지는 '간사')진은 위의 4인 및 함께 옥고를 겪다가 먼저 출옥했던 장지영과 이극로, 그리고 옥사한 이윤재의 사위인 김병제로 구성되었다. 학술적 권위와 민족주의적 명망을 겸비한 진용이었다.

학회본부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학회 간부들이 미군정에 협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장지영(1887~1976년)과 최현배(1894~1970년)가 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 들어가 어문정책에 관여했고, 조선어학회가 지켜 온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관철된 것은 그들의 역할 덕분이었다. 그러나 공개적 정책 검토 없이 실무적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기 때문에 훗날 이승만이 '간소화 파동'을 일으킬 빌미를 남겼다. 미군정의 적극적 어문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 활동은 민간 차원과 회원들의 개인 차원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북에서는 정권 지도부에게 적극적 어문정책의 의지가 있었지만 그를 뒷받침할 전문 인력이 아쉬운 형편이었다. 이극로와 김병제의 월북이 이북의 필요에 부응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황인데, 저자는 이 사정을 분명하게 밝혀냈다. 특히 박지홍 교수의 인터뷰에서 매우 의미가 큰 증언을 끌어낸 것이 눈길을 끈다.

"1948년에 남북협상 있기 전에 이극로 박사가 정재표 선생을 만나자고 그래. 그렇게 약속을 해가지고 우리가 책을 같이 내기로 했는데, 내가 북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그 이유는 김두봉 선생이 편지를 했는데 나라가 두 쪼가리 나더라도 말이 두 쪼가리 나서는 안 된다. 그러니 사전 편찬이 중한데 북에 사람이 없다. 남쪽에는 최현배 선생만 있어도 안 되나? 그러니 당신은 북으로 와 달라. 그래서 내가 응낙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북으로 가게 되면 정 선생님에게는 은혜를 잊지 못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거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북으로 가게 되면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래 남북협상 때 안 돌아왔어요. 못 돌아온 게 아니라 벌써 뭐 식구들을 다 보냈다 그러더구먼요. 그래 그 분이 정말로 우리 국어학을 우리 국어를 우리말을 위해서 갔나? 그게 아니면 북쪽의 정치를 위해서 갔나? 모두 오해를 하고 있거든. 그런데 분명히 북에 갈 때 자긴 정재표 선생한테 얘기할 때 난 오직 거기 가서 조선말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서 간다고." (59~60쪽)

김두봉이 이극로에게 와서 무슨 일을 해달라고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는 것은 정황으로 봐서 매우 그럴싸한 일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58년이 지난 2006년에 와서야 간접 증언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이다. 수십 년 반공독재 기간 동안 '월북자' 이극로에 대한 연구는 물론, 언급조차 못하고 있던 상황 때문에 의미 있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짤막한 증언 하나에서만도 여러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김두봉이 이극로를 초청한 사실 외에도 이극로가 북으로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북행 계획을 비밀로 해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비밀로 하면서도 원고를 주기로 했던 출판인에게는 의리상 알려주지 않을 수 없는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사실까지 이 증언에 담겨 있다. 간접 증언이기는 하지만 원로 학자의 자발적 진술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

늦게나마 이런 증언을 열심히 모은 저자의 노력을 치하한다. 텍스트에 매여 사는 역사학도로서는 손이 가기 어려운 분야인데 방송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어 반갑다.

연구 대상 인물의 인간성에 대한 접근에서도 방송인의 감각이 좋은 효과를 가져오는 것 같다. 박지홍 교수의 위 증언에서도 이극로의 인간성이 살짝 드러나는데, 박 교수의 글에서 재인용한 이극로의 아래 발언은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여러분! 우리 학회가 낸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최현배 선생의 문법 체계가 그 토대가 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략) 최현배 선생의 문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큰 사전의 체계를 이렇게 빨리 세울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훌륭한 체계를 세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물론 명사, 대명사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최현배 선생이 굳이 이름씨, 대이름씨로 해야 하겠다고 우기신다면, 우리는 그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맞서서 명사-대명사로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흡사 남이 다 지어 놓은 집에 가서 벽지는 무슨 색깔로 하라, 못은 어디에 치라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최현배 선생은 왜정 때 생명을 걸고 우리말의 문법을 집대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선생이 세운 체계를 두고 용어만은 우리 생각에 맞게 고치겠다고 하겠습니까?" (53쪽)

이극로의 활동 범위를 대략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1947년 <조선말큰사전> 첫 권 발간을 앞둔 토론에서의 이 발언을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은 껍데기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그가 조선어학회의 중심 사업인 사전편찬 사업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된 경위도 이 발언이 보여주는 자세에서 석연히 이해가 된다.

최현배는 한국어 문법 연구의 업적 못지않게 고집 세기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순 우리말에 대한 그의 집착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한편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름씨, 그림씨 등 문법 용어의 고집이 그 단적인 예다. 1947년 조선어학회의 토론 분위기도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대다수 회원이 그의 급진적 주장을 난감해 하는데도 그는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극로는 돌파구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용어 자체로는 '이름씨'보다 '명사'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문법을 세워준 최현배가 고집한다면 그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존중의 마음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최현배로서도 자기 주장의 급진성을 인정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물러설 수 있었을 것이다. 성향이 서로 다른 동년배 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표현이 오고가는 것이 존경스럽고도 사랑스럽다.

이극로는 학회 간부 중 이례적으로 정치활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 이전의 사전 편찬 사업에서도 당대 일류 명사들과 교분을 가진 그의 '섭외'능력이 특출한 역할을 맡았고, 그 교분이 해방 후 그를 정치활동으로 끌어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활동은 민족운동의 범위를 지켰고, 파당적 정치활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1947년 가을 조선 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어 분단건국의 위험이 짙어지면서 이극로의 정치활동이 활발해졌다. 홍명희, 김병로,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이 이끄는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해서 남북협상을 제창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홍명희, 백남운 등과 함께 북쪽에 눌러앉았다.

이극로가 북한의 첫 내각에서 무임소상을 맡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실제로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밝힌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이다. 평양에서 그의 활동 내용은 바로 초기 북한의 어문정책 그 자체였다. 김두봉이 그를 부른 뜻, 이에 응해 그가 북으로 향한 뜻이 모두 이뤄진 셈이다. 그들이 내다본 것처럼 북한 정권이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문화정책을 꾸준히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의 꾸준한 어문정책에 대비되는 것이 이 책 뒤쪽에서 다룬 남한의 '한글맞춤법 간소화 파동'이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날 담화 중 한 대목에 '간소화 파동'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국문을 쓰는 데 한글이라는 방식으로 순편한 말을 불편케 하든지 속기할 수 있는 것을 더디게 만들어서 획과 음을 중첩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한글 초대의 원칙이라 할지라도 이 글은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니 이 점에 깊이 재고를 요하여 여러 가지로 교정을 하여서 우리글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340쪽)

이 메시지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이승만은 이듬해 한글날 담화에서도 같은 메시지를 되풀이했다.

"근래에 이르러 신문 게재나 다른 문화 사회에서 정식 국문이라고 쓰는 것을 보면, 이전 것을 개량하는 대신, 도리어 쓰기도 더디고 보기도 괴상하게 만들어놓아 퇴보된 글을 통용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이것을 교정하지 못하면 얼마 후에는 그 습관이 더욱 굳어져서 고치기 극난할 것이매 모든 언론기관과 문화계에서 특별히 주의하여 속히 개정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340쪽)

이승만은 문제를 꺼내놓기만 한 채로 몇 해 동안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국회 내 세력도 약하고 전쟁으로 경황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그가 재선 후 국회에 안정 기반을 확보한 1953년 봄 이 문제를 꺼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4월 27일 백두진 국무총리가 각 부처 장관과 각 도 지사에게 보낸 훈령으로부터 한글 간소화 파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우리 한글은 원래 사용의 간편을 안목으로 창조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온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철자법은 복잡 불편한 점이 불소함에 비추어 차를 간이화하라는 대통령 각하의 분부도 누차 계시기에 단기 4286년 4월 11일 제32회 국무회의에서 정부 문서, 정부에서 정하는 교과서, 타이프라이터용 철자는 간이한 구 철자법을 사용할 것을 의결하였던 바, 기중 교과서, 타이프라이터에 대하여는 준비상 관계로 다소 지연되더라도, 정부용 문서에 관하여는 즉시 간이한 구 철자법을 사용하도록 함이 가하다고 사료되오니, 이후 의차 시행하기 훈령함. (343쪽)

1년 남짓 이어진 파동 속에서 벌어진 별의별 우스운 일, 웃지 못 할 일을 훑어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여기서는 넘어가고, 1954년 7월 하순 이승만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면서 파동도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7월 24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행 맞춤법이 옳다고 하는 것은, 학생들이나 또는 언론인들이 한글의 이치가 어떻게 된지도 모르면서 습관에 따라 사용하기 때문이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여도 좋다." (377쪽)

이승만의 '간소화' 주장의 본질은 '문법 폐지'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받침, 철자, 띄어쓰기 등 일체의 규제를 풀어 "소리 나는 대로" 적자는 것이었다.

청년 이승만이 국내에서 활동할 때는 조선어학회도 생기지 않았고 한글맞춤법 통일안도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그 시절의 문자생활에만 익숙하던 그가 "옛날 성경처럼 적으면 될 것을 왜 그렇게 까다롭게 만들었냐?"고 한글학자들의 그 동안 업적을 몽땅 갖다 버리라는 것이었다. 민족문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독재자의 자의적 판단으로 인해 어문정책이 1년 넘게 마비되는 그런 국가가 초기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식민지시대에 민간-학계의 민족운동으로 추진되던 <큰사전> 편찬 사업은 건국 후에도 한글학회의 민간사업으로 계속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업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간소화 파동으로 지체시키기까지 하고, 심지어 미군정 시기부터 받아온 록펠러재단의 지원까지 받기 어렵게 만든 사태조차 있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이승만 정권은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그것이 입에 발린 민족주의였다는 사실을 한글 간소화 파동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1953년 파동이 시작될 때 문교부장관 김법린과 편수국장 최현배는 한글운동에 오랫동안 노고를 바쳐 온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파동 속에서 자리를 떠나야 했다. 남쪽의 어문 사업은 아무개가 있으니 자기는 마음 놓고 북행할 수 있다고 이극로가 말했던 그 최현배, 그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모두 6년간 편수국을 맡아 어문정책에 열과 성을 다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의 뜻을 키워주지 않았다.

누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나? 김법린이 비운 문교부장관 자리를 맡은 이선근은 1954년 7월 12일 국회 질의 중 간소화 정책에 대한 의원들의 비판에 대해 "수일 전 북한괴뢰들이 방송할 때 사용한 말과 같다."고 대꾸했다고 한다.(372~373쪽) 아, 이 더러운 기시감!

 
 
 

 

/김기협 역사학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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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개시 되면 담숨에 남한 전역과 제주도까지 해방"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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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3/04/07 07:56
  • 수정일
    2013/04/07 07:5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북, 미국 3대핵타격 막대기보다 못한 무용지물
 
"전쟁 개시 되면 담숨에 남한 전역과 제주도까지 해방"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4/07 [07:32] 최종편집: ⓒ 자주민보
 
 

▲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 F-2A 스텔스 전투기 그러나 조선은 이 전투기와 3대 핵전략무기들을 막대기보다 못한 무용지물이라고 평했다. ©이정섭 기자
조선이 한미 양국에 대한 강경 자세를 누그려 뜨리지 않고 미국의 3대 핵타격 수단은 무용지물이라고 밝혔다.

조선로동당기관지인 로동신문은 “조선반도에서 핵전쟁의 발발은 시간문제로 되고 있다. 날로 엄중해지는 핵전쟁위험에 대처하여 우리 공화국은 정부,정당,단체들의 특별성명을 통하여 천금을 주고도 살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조국통일대전의 최후승리를 이룩 할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내외에 다시금 엄숙히 천명하였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로동신문은 “적들이 핵으로 위협하면 그보다 더 위력한 정밀핵 타격수단으로 맞받아치고 부정의의 침략전쟁에는 정의의 전면전쟁으로 대답하는 것이 우리의 고유한 대응 방식”이라면서 “특별성명에는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철옹성같이 수호하고 이 땅위에 기어이 번영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고야말려는 우리 군대와 인민의 신념과 의지가 힘 있게 맥박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신문은 “정의의 조국통일대전은 민족의 운명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한 정당한 선택”이라며 “조국통일은 장구한 분열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 민족이 일일천추로 바라고바라는 간절한 소원이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이 근 70년 동안이나 외세에 의해 둘로 갈라진 나라의 지맥을 잇지 못하고 온갖 불행과 고통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더없는 수치”라고 피력했다.

신문은 “분열의 비극사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은 결코 통일을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라며 “그것은 전적으로 이 나라의 절반 땅을 타고앉아 저들의 철저한 식민지로 만들고 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꾀하는 미국과 침략적인 외세를 등에 업고 민족의 이익을 송두리 채 팔아먹으며 동족대결에 미쳐날 뛴 남조선괴뢰들의 악랄한 반공화국 책동때문”지적했다.

또한 “미국이 추구하는 대조선적대시정책은 날로 승승장구하는 우리의 사회주의를 해치고 남조선의 식민지체제를 북반부에로 확대함으로써 조선민족을 현대판노예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 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틀어쥐려는 침략야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흉심으로부터 미국은 우리 민족끼리 손을 잡고 자주통일에로 나아가는 것을 덮어놓고 반대하였을뿐 아니라 남조선의 친미주구들을 부추겨 동족간에 불신과 대결을 야기 시키고 북침전쟁소동을 강화하면서 조선반도정세를 항시적으로 긴장 시켰다.”고 미국을 고발했다.

이어 “‘국지지 도발대비계획’에 맞도장을 찍어줌으로써 군사 불한당들을 우리와의 전면대결과 군사적 도발에로 적극 내몰고 있는 것”이라며 “지금 상전의 부추김을 받고 북침열에 들뜬 남조선의 괴뢰보수패당과 군부깡패들, 극우보수언론들은 연일 극단적인 반공화국대결소동과 북침 전쟁광기를 부리며 정세를 일촉즉발의 초긴장상태에로 몰아가고 있다.”고 폭로했다.

아울러 “모든 사실은 미국과 괴뢰호전광들의 핵전쟁광증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엄중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실증해준다.”면서 “우리 민족과 인류의 운명을 위협하는 방대한 핵타격수단들과 침략무력이 집결되어있는 남조선에서 자그마한 전쟁의 불꽃이라도 튕기는 경우 그것이 국지전에만 그치지 않고 삽시에 전면 전쟁으로, 열핵전쟁으로 번지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며 “미국과 괴뢰 호전광들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운명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 땅위에 핵전쟁의 불구름을 몰아오는 극악한 도발자,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단죄했다.

로동신문은 “조국통일대전은 민족의 지향이고 천만군민의 의지이며 시대의 요구이다. 참을성과 자제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라고 단호함을 드러내고 “지금 원수들에 대한 우리 군대와 인민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복수심은 날이 갈수록 더욱 무섭게 폭발하고 있다. 이제는 침략자들과 말로써가 아니라 선군총대로 총결산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 천만군민의 확고부동한 의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미국은 시대가 달라졌으며 우리 인민도 어제날의 인민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천금을 주고도 살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조국통일대전의 최후승리를 이룩하고야말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절대로 빈말이 아니”라면서 “우리는 지구상 그 어디든 침략자들의 본거지들을 모조리 초토화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타격수단들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 무진 막강한 위력 앞에서 괴뢰 호전광들이 호신부처럼 여기는 미국의 《3대핵타격수단》따위도 막대기보다 못한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 위력한 무력이 있음을 분명히했다.

로동신문은 “우리는 강 위력한 억제력과 함께 세상에 없는 일심단결을 가지고 있다. 강자에게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으며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문제를 놓고 우리가 주저할 것은 더욱 없다.”며 “공화국정부, 정당, 단체 특별성명은 현 북남관계는 전시상황에 처해있으며 쌍방사이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가 그에 준하여 단호하게 처리된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이것은 그 어떤 사소한 적들의 도발적 행위에도 예고 없는 무자비한 보복의 불벼락이 뒤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전시상황에 놓여 있음을 상기 시켰다.

신문은 “우리의 조국통일대전이 일단 개시되면 오래 끌 것도 없으며 그것은 침략자들이 미처 후회할 사이 없이 남조선의 전지역과 제주도까지 단숨에 타고 앉는 벼락같은 속전 속결전으로 될 것”이라고 자신하고 “이 정의의 성전은 조국통일을 바라는 북과 남의 온 겨레가 참가하는 전민항쟁으로 될 것이며 최후승리는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목숨 바쳐 수호하려는 우리 군대와 인민, 온 민족에게 있다.”며 승리를 확신했다.

신문은 끝으로 “우리 민족은 조국통일대전에 산악같이 일떠서 극악한 대결광신자들과 호전광들, 인간쓰레기들을 비롯한 반역자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가차 없이 벌초해버리고 분열과 대결, 전쟁의 악순환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통일된 조국 땅에서 우리 겨레가 세기와 세기를 이어오며 쌓이고 쌓인 한을 가슴 후련히 풀 역사의 그 시각은 바로 눈앞에 있다.”며 대결이 임박했음을 시사해 주목된다.

한편 한미 양국의 당국자와 국회 일부에서는 강력응징 등의 강경자세에서 대화와 협상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고 있어 앞으로 정세가 어떻게 흐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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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대권 시동 거나?... 서울시장 당선 후 첫 '정치강연'

 

박원순, 대권 시동 거나?... 서울시장 당선 후 첫 '정치강연'
 
박근혜의 '창조경제'에 대해 쓴소리도...
 
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13/04/06 [11:32]
 
 
 
박원순 서울시장이 5일 국회에서 공개 강연을 하며 '정치인'으로서의 행보에 시동을 걸고 있다. 2011년 보궐선거로 서울시장에 오른 이후 '정치 강연'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박원순 시장
'정치인 박원순'이라는 브랜드를 강화하는 한편, 서울시장을 넘어 차기 대권을 향해 보폭을 넓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아시아 경제(http://www.asiae.co.kr/news/) 보도에 따르면 박 시장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원순씨, 정치를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특별 강연을 했다. 특강은 민주통합당의 시민사회단체 출신 보좌진 모임인 '새정치연구회'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GH의 '창조경제'에 대해 쓴소리

박 시장은 "창조경제를 멀리 하늘에서 찾는 것 같은데, 우리 가까이에 있다"면서 "재미있게 살고 삶이 즐거우면 모든 것이 창조경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공공기관이 보유한 빅데이터를 공개해 시민들이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 수많은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면서 "이것이 창조경제"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30일 열린 당정청 워크숍에서 창조경제의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청와대 고위 공직자들을 비판하는 한편, 박 대통령도 방향을 잘못 잡고 있다는 지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면서 박 시장은 서울시청 1, 2층의 시민참여 공간인 서울시민청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민원을 하는 '소셜미디어센터' 등을 창조적 사례로 들었다.

정치개혁에 대해 박 시장은 "정치개혁의 핵심은 정당에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처럼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면서 "정당이 시민들의 진정한 대변자가 되고, 시민을 당의 주인으로 모시는 제도와 노력이 함께 되면 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강연이 끝난 뒤 박 시장은 "차기 대선 주자로서 행보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제 모든 관점은 서울시정에 있다. 99.9% 그렇다"면서도 "민주당 당원이고 정치인이기도 하니까 그런 정도는 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어 국회 본청에서 진주의료원 폐업에 반대하며 단식 농성 중인 김용익 민주당 의원을 방문해 "건강이 상할 정도로는 안 했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

박 시장은 여야 모두에서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재선에 충분히 성공할 것이라는 예상에도 이견이 없다. 민주당 관계자들도 "박 시장은 당 내 적이 없고, 서울시장을 통해 행정 노하우를 크게 얻었다"면서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라고 평가했다.

그런가 하면 민주당 5·4 전당대회에 출마를 선언한 예비후보들은 너도나도 박 시장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이용섭 의원이 서울시청을 방문해 박 시장을 만난 데 이어 김한길, 강기정 의원도 곧 박 시장과 만날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청사 코 앞에 위치한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농성장 철거에 가슴 아픈 심정을 밝히며 조속한 사회적 해결책 마련을 촉구했다.

박 시장은 5일 밤 늦게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집앞 목련이 살포시 제 얼굴을 드러내고 웃던 그저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데, 어제 오늘 내내 제 마음은 다시 겨울로 되돌아간 듯 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겨울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을까?"라며 "이미 22명이라는 소중한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났다. 더 이상의 비극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시장은 특히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가 그들의 절규에 귀 기울여야 한다"며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은 그곳에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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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료원 사태, 공공의료의 시장편입 막아야

 

 
 
[분석] 수익을 내는 공공재라면 국가가 소유할 이유가 없다
 
편집부 | 등록:2013-04-05 15:17:53 | 최종:2013-04-05 16:02:0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 * 시사블로거 다람쥐주인님이 5일자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글을 필자의 동의하에 소개 합니다 - 편집자 )


▲ 공공의료에 대한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드러낸 런던올림픽 개막식. 경향신문

작년 런던올림픽 개막식 도중 난데없이 수백 개의 병상과 간호사들이 등장했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레이트 오르몬드 스트리트 어린이병원(GOSH)과 무상의료제도(NHS)를 600여명의 건강보험직원들과 어린이들이 경쾌한 춤을 통해 형상화 한 퍼포먼스였습니다. 무상의료제도에 대한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보여준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2차 대전 직후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전국민 무상의료제도를 도입했던 영국의 사례는 재정난 때문에 의료민영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시장주의자들의 주장을 옹색하게 만듭니다. 물론 완벽한 제도는 없기에 영국의 NHS역시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국민은 없어야 한다’는 정신만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지난 2월 26일 경상남도는 진주의료원을 폐업한다는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홍준표 지사가 밝힌 폐업의 근거는 ‘적자’입니다. 공공의료기관을 운영상의 적자를 이유로 폐업한다니 도통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각계의 비난이 쏟아지자 홍 지사는 지난 1일 “공공의료를 빙자해 진주 의료원을 강성 노조의 해방구로 만들어 도민의 혈세로 노조원들만 배불리게 하는 것은 사회정의에 반한다”며 폐업의 원인을 노조에 돌렸습니다. 홍 지사의 발언은 여러차례 보도된 대로 사실관계가 전혀 맞지 않을 뿐더러, 이는 ‘해방구’와 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해 반노조정서를 이용하고자 하는 계산된 발언입니다. 그가 노련한 정치인임을 환기시켜주는 대목입니다.

다리짓는데 수백억씩 쏟아붓는 경남도가 연간 10억 남짓한 공공의료시설의 적자를 감당못한다는 주장이 엄살로 들리는건 당연합니다. 모든 공공재는 운영상의 ‘적자’에 기초합니다. 수익을 내는 공공재라면 국가가 소유할 이유가 없습니다. 홍 지사는 어째서 이 간단한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수익을 내는 공공재라면 국가가 소유할 이유가 없다

철저한 시장주의자인 홍준표 지사는 의료라는 영역을 시장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장주의자에게 적자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진주의료원 폐업에 반대하는 이유는 의료분야를 국가가 마땅히 최소의 가격으로 제공해야 할 공공재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한 이래 이러한 공공재와 시장의 힘겨루기는 어디서든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주의료원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어딘가 특별합니다. 논리로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의료라는 영역이 다른 영역과는 달리 인간의 생명과 관계되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진주의료원 폐업은 한국 공공의료 붕괴의 신호탄이 될지도

국가는 가정의 지불능력을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훌륭한 기초교육과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것은 좌파지식인이나 노동운동가의 말이 아닙니다. 전세계 시장주의자들의 어머니이자 민영화의 화신인 마가렛 대처의 저서 <국가경영(Statecraft)> 중 가장 앞쪽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1982년 국영 화물회사를 시작으로 영국통신(1984), 영국항공(1987), 영국석유(1987), 영국철강(1988), 영국수도(1989), 영국전력(1990), 영국석탄(1994) 등 국가의 기간산업을 모조리 민간에 팔아치운 ‘철의 여인’ 대처지만 그녀조차 의료분야 만큼은 손을 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건강과 교육은 시장에 맡기는 것보다는 국가가 책임지는 게 훨씬 낫다”라는 그녀의 스승 아담 스미스의 말에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시장주의를 창시한 학자와 역사상 이를 가장 충실히 실행했던 정치인조차 의료서비스만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공공의료의 개념을 굳이 멀리서 찾을 이유도 없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동서대비원과 혜민국을, 조선시대에는 활인서를 설치해 국가가 빈자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능력없으면 끊어”

흡연자라면 자주 들어봤을법한 ‘자본주의적 농담’입니다. “능력없으면 먹지말아라”, “능력없으면 입지말아라”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능력없으면 죽어라”라는 말을 쉽게 뱉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공공의료란 말을 쉽게 이야기하면 ‘능력이 없어도 죽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공공의료의 개념은 굳이 그 역사나 정의를 모르더라도 측은지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진주의료원 입원 환자와 가족, 진주시민, 지역 정치권과 보건복지부까지 폐업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홍 지사의 고집은 완강합니다. 진주의료원은 지난 3일 한달간의 휴업을 시작했고, 휴업이 끝나는대로 폐업에 들어간다는 계획입니다. 경남도는 "공공의료법의 개정으로 민간병원도 공공의료서비스를 할 수 있기 때문에"라며 공공의료법 개정을 진주의료원 폐업의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경남도의 설명과는 달리 지난해 2월 개정된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은 오히려 공공의료의 확대를 위한 취지로 도입된 법률입니다. 이를 근거로 공공의료시설을 폐업한다는 것은 법의 취지를 반대로 해석한 아전인수입니다.

물론 경남도측의 설명처럼 진주의료원이 폐업한다 해서 당장 그곳의 환자들이 죽는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00년넘게 전문 공공의료기설로 기능해 온 진주의료원을 민간병원이 대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공의료의 시장편입을 뜻하며, 의료원의 폐업으로 인한 민간병원의 대폭 수가인상도 예견되는 상황입니다. 설사 운영상의 불합리한 점이 있다 해도 불과 5년전에 큰 돈을 들여 신축이전한 병원을 폐업하는 것은 답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폐업을 위한 폐업입니다.


홍준표의 ‘공공 병원 죽이기’, 진짜 목적은 1000억 원? http://bit.ly/YzkK28

진주의료원의 폐업이 더욱 우려스러운 이유는 이것이 한국 공공의료의 붕괴를 촉진하는 신호탄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국 34의 지방의료원 중 27개의료원이 적자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중 하나가 만성적자를 이유로 사라진다면 아주 나쁜 전례가 되는 셈입니다.

▲ 홍준표 그는 행정가이기 이전에 정치인이다


경남도민들이 분명한 경고 보내야

홍 지사는 행정가이기 이전에 정치인입니다. 정치인은 표가 떨어질 행동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가 쇄도하는 비난을 감수하며 진주의료원 폐업을 밀어부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정치적 미래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치인의 비인간성은 그를 뽑아 준 유권자들의 비인간성에서 비롯됩니다. 홍 지사는 지난 선거에서 63%라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습니다. 경남지역의 정치지형을 볼 때 아마도 진주의료원 폐쇄보다 더한 파행을 한다 해도 그의 재선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정치인에게 표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제2, 제3의 홍준표는 계속 나올 것입니다.

김정은이 핵폭탄을 터뜨리는 와중에도 미국인들의 관심사는 온통 건강보험개혁에 쏠려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10년 이상 건강보험이 없는 수백만 명의 국민에 의료 혜택을 주기 위해 연간 2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개인 투자자들과 25만 달러 이상을 번 가구에 대해서 ‘투자수익세’를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적인 공공의료 후진국인 미국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죠.

오바마가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힘은 그를 뽑아준 유권자들로부터 나왔습니다. 미국인들은 공공의료확충을 약속한 오바마를 뽑았지만 경남도민들은 철저한 시장주의자인 홍준표를 도지사로 뽑았습니다. 홍 지사가 시장논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역시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들로부터 나옵니다.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홍 지사가 지독한 시장논리를 철회할 근거도 유권자들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경남도민들이 진주의료원폐업을 원치 않는다면 정치인 홍준표에게 분명한 ‘신호’를 보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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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총수부터 '나꼼수'까지, 김어준

아르마니 탐했던 소년, '진보 교주'로 부활하다!

[노정태의 논객시대] 딴지 총수부터 '나꼼수'까지, 김어준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4-05 오후 6:33:44

 

 

1.

1988년 서울올림픽의 모토는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급변하고 있었고, 동시에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1987년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시민사회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성취감을 얻었지만, 동시에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면서 기나긴 정치적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후, 그간 기층 단위에서 조직되었던 노동운동이 표면화되면서 이른바 789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공장의 말단 직원부터 중간 관리자까지, 전두환의 신군부가 억지로 찍어 누르고 있던 임금이 대폭 상승했다. 국민 모두가 이른바 '중산층'이 되는 그런 시대가 열렸다고, 다들 꿈꾸게 되었다.
 

▲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 ⓒ프레시안(최형락)

높아진 임금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서울로 몰려들었고, 부동산뿐 아니라 주식시장 등 온갖 금융 영역이 넘실거렸다. 더욱이 당시는 이른바 '3저(低) 호황'의 시절이기도 했다. 금리, 유가, 달러 환율이라는 세 가지 주요 경제 지표가 모두 낮아졌다. 누구나 쉽게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기름 값 부담 없이 자동차를 사고, 더 여유가 있으면 해외여행도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을 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사실상 좁은 섬 안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은 바야흐로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때 한 청년이, 3수 끝에 지망하던 서울대가 아닌 다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87학번이 되었어야 했을 그는 89학번이 되었고, 자신이 원하던 서울대가 아닌 홍익대에 들어갔으며, 학교 안에 정 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는 50개가 넘는 나라들을 들락거렸다. 본인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그렇게 배낭여행에 몰두한 것은 입시에 실패하였다는 자괴감을 "여행을 떠나 세계를 만나"면서 "내가 살던 동네가 얼마나 비좁은 공간인지 절감"하고, "그를 통해 내가 겪은 실패라는 게 사실은 대단한 게 아니라"(<건투를 빈다>(김어준 지음, 푸른숲 펴냄, 26쪽))고 확인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묘한 방식으로 때를 잘 만났다. 만약 본인의 뜻대로 서울대 87학번이 되었더라면, 87년 6월 항쟁의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가 대학교 새내기 시절을 보낸 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진 89년 무렵에는 이미 3학년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배낭여행을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배낭여행을 통해 경험하는 내용들로 자아를 형성하기에는 다소 때를 놓치는 모양새가 된다. 배낭여행에서의 경험을 '근원적 체험'으로 삼기에는 그 전에 겪은 일들의 무게가 너무 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어준은 3수를 했고, 87년 항쟁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절묘하게 비껴간 채, 민주주의와 역사의 흐름에 한 몫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2.

신문 칼럼, 강연, <딴지일보>에 본인이 쓴 글 등을 통해, 김어준은 배낭여행을 통해 얻은 원체험의 몇몇 굵직한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핵심적인 레퍼토리를 몇 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파리 오페라 극장 대로변 양복점에서 두 달 치 여비를 털어 BOSS 양복을 충동 구매한 이야기
(2) 이탈리아에서 다비드 상의 허리 라인을 보고 그것이 아르마니 양복과 쏙 빼닮았음을 깨닫고, 문화적 심미안을 가질 수 없었던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애를 느낀 이야기
(3) 독일에서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탄 채 버스를 탈 수 있도록 바닥이 기울어지도록 만들어진 버스를 본 이야기

각각의 내용을 간략하게 검토해보자.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기차에 타기 전날, 90년대 초반 배낭여행을 하던 김어준은 파리 오페라 극장 대로변에 있는 한 양복점의 쇼윈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양복에 말 그대로 '꽂혔다.' 뭔가에 홀린 듯 가게에 들어가 와이셔츠, 바지 등을 하나씩 착착 걸쳐가며, 그때까지 자신이 봐온 스스로의 모습을 훨씬 뛰어넘는 누군가를 보았고,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두 달 치 여비에 해당하는, 100만 원 가량. 냉큼 지르면 두 달 굶어야 할 상황이다. 김어준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절약한 100만 원을 향후 두 달간 숙소와 식량에, 합리적으로 소비한다면, 그럼 지금 당장의 이 환희는, 고스란히, 보상받을 수 있는 건가."(같은 책, 48쪽) 물론 대답은 '아니오'였고, 일단 옷을 산 그는 로마에서는 배낭여행객 숙소 '삐끼' 노릇도 했으며 부다페스트에서는 암달러상으로 여비를 벌기도 했다고 술회한다.

그 여행에서 겪은 일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피렌체에서, 김어준은 본인이 인솔하던 학생 관광객들을 우피치 미술관에 몰아넣은 후 고개를 들어 그 전까지 백 번은 넘게 마주쳤던 다비드 상을 보고, 모종의 깨달음을 얻어 벌떡 일어났다.

"쇼윈도 안에 진열되어 있던 '페라가모' 구두 뒤축에서 느꼈던 그거. '긴장감.' 동시에 돌멩이를 움켜쥔 오른팔의 늘어진 곡선 역시 낯익었다. 맞다. '야들야들.' '아르마니' 양복의 허리 라인이었다. 터무니없게도 말이다."(같은 책, 74쪽)

훗날 <한겨레>에 연재한 상담 칼럼 '그까이거 아나토미'를 묶어 <건투를 빈다>(푸른숲 펴냄)라는 제목의 책으로 내면서 이 기억을 곱씹던 김어준은, 온 세상을 쏘다니며 좋다는 명작들은 다 보고 다니면서도 왜 본인이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했는지, 왜 자신의 미적 감수성이 그렇게 '후지게' 세팅되어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그는 그 이유를, 명작들을 '외워서' '시험 보게' 만드는 한국의 공교육에서 찾고,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야 할 청소년기를 그렇게 보낸 스스로가 '인간의 말을 배울 시기를 놓친 늑대소년'과 다를 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후, 길든 짧은 여행에서 돌아와 국적 불명의 아파트로 가득 찬 대한민국의 도시를 다시 마주하는 순간마다, 떠오르는 단상이 하나 있다. 우리 유전자 어딘가에 몇 천 년을 축적해온 고유한 선과 면과 색에 대한 감각이 분명 존재할 텐데, 식민과 전쟁과 개발을 정신없이 겪어내느라 그 집단 기억을 상실해버린 무국적의 우리 도시들을 보고 있자면, 늑대소년으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잃고 으르렁거리는 것밖에 못 하게 만든 정글을, 떠올리게 된다. 난 이 콘크리트 정글에서 그렇게 늑대소년으로 길러졌던 게다. (같은 책, 76쪽)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달리 독일은 김어준의 문화적 감수성을 자극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독일에서, 굳이 말하자면 '정치적 올바름'의 한 기준을 얻게 된다. 장애인을 약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 바라보고, 그래서 대중교통이니까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대중들이 버스에 탈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혜주의적, 온정주의적 관점이야말로 더 큰 폭력일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고 대우하는 분위기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 <닥치고 정치>(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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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한겨레21>에서 김규항과 함께 누군가를 인터뷰하거나 두 사람이 방담을 나누는 형식의 코너 '쾌도난담'을 진행할 때, 장애인 인권 확보를 위한 전국청년학생연합 공동 대표인 박지주 씨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야기한다. "장애인을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고"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장애인이 "바라는 건 동정이 아니라 구성원으로 인정을 해 달라는" 것임을 명확히 하고, "아주 근본적인 이런 부분부터 뒤집어가야"(<쾌도난담>(김규항ㆍ김어준 대담, 고경태 정리, 태명 펴냄), 151쪽) 한다는 것이다. 대단히 모범적인,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적 발언의 구성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1) 본인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개인적 태도, 동시에 미래의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핑계로 현재의 쾌락을 유예하지 않는 자세. (2)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온 본인 및 한국 사회의 심미적 미발달에 대한 인식, 그러므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3) 타인의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약자로서 목소리를 높이는 포지션을 노리지 않고, 평범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요구하고 보장하는 정치적 태도. 이 세 가지를 조합하면, 주로 <건투를 빈다>에 수록되어 있는, 대중들이 '쿨'하다고 생각하는 김어준의 사고방식의 얼개가 나온다.

3.

자기 스스로 자기 삶에 책임을 지되, 엄숙하지 않고 유쾌하게 즐기며 사는 사람. 동시에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자기 인생의 미적 측면을 늘 생각하는 사람. 타인들을 자신과 똑같이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바라보고 바로 그 시점에서 연대할 수 있는 사람. 배낭여행을 다니며 얻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김어준이 스스로를 구성하고, 또 타인에게도 통용될 수 있을만한 어떤 '주체의 유형'으로 창출해낸, 말하자면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모델이다.

한국인들은 습관적으로 일본을 '섬나라'라고 부르곤 하지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휴전선으로 막힌 대한민국이야말로 사실상 일본보다 더 작은 조그마한 섬나라에 불과하다. 게다가 한국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 때문에 국민들에게 해외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늦은 시점부터 제공하였고,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모든 국민에게 해외여행이 '허락'된 것은 김어준이 대학에 들어간 1989년부터의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1987년에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을 누군가와 1989년에 대학물을 먹기 시작한 이가 걷게 되는 길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자가 굳이 말하자면 '구세대의 막내'였다면, 후자는 한국인 중 거의 최초로 '세계'를 본인의 자아 형성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신세대의 맏이'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첨단에 김어준이 서 있었고, 그는 5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을 일종의 역할 모델로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좀 더 개인사적인 맥락을 짚고 들어가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그는 1987년에 들어갔어야 할 대학의 문턱을 1989년에 밟았다. 1987년 6월 항쟁만 놓친 게 아니다. 재수를 안 하고 대학에 들어갔다면 온몸으로 즐겼을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혀 향유하지 못했다. 오히려 공부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눈과 귀가 쏠리는 자기 자신을 질책하거나,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스포츠 중계를 본 후 자꾸 고개를 드는 불안함을 어떻게든 달래야 했을 것이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88올림픽 슬로건을 두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웃긴 말"이라고, "세계가 우리만 달랑 빼놓고 자기들끼리 모여 만든 무슨 특설 링도 아니"(<건투를 빈다>, 56쪽)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모습에서, 눈앞에 열린 축제를 즐기지 못하면서 쪼그라드는 자존심을 추슬러야 했던 한 수험생의 번민이 인간 꼬리뼈처럼 남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영 생뚱맞은 일만은 아니다. 1988년에는 '세계'가 '서울'로 올 수는 있었지만, '서울'이 '세계'로 갈 수는 없었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당시에는 정말 세계가 "우리만 달랑 빼놓고 자기들끼리 모여 만든 무슨 특설 링"이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2002년 월드컵에 대한 김어준의 열광을 이해하기 위해 포석을 깔고 있다. 축구는 멋진 스포츠이며, 쿨한 코스모폴리탄이라고 해서 자기 나라 대표 팀의 경기에 열광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2년 한일월드컵을 보며 모종의 깨달음을 얻고, 그 기억을 끝없이 반추하며 김어준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캐릭터는, 앞서 우리가 말한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4.

2002년 6월 13일, 포르투갈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1대 0으로 힘겹지만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조별 예선 3라운드, 한국은 폴란드를 상대로 1승을 거두었고 미국과 비겼기 때문에, 기왕이면 이겨야 복잡한 계산 없이 꿈에 그리던 16강 고지에 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국 팀은 포르투갈을 이겼다. 이른바 '황금 세대'라고 하는, 당시 유명한 선수들을 망라하고 있던 우승 후보 포르투갈을 꺾고 자력으로 16강에 진출한 것이다.

문제는 그에 대한 언론 반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론들이 포르투갈 전을 보도하는 그 태도가 김어준의 내면에 잠들어있던 무언가를 건드렸다. 이틀 뒤인 6월 15일, 그는 자신이 '총수'로서 운영하던 사이트 <딴지일보>에 자신의 이름을 달고 한 편의 글을 올린다. 제목은 '우리는 강팀이다'.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와는 또 다른 하나의 캐릭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건투를 빈다>(김어준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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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포르투갈 대표팀은 한국을 이기지 못하면 16강 진출이 어려워질 상황이었다. 그래서 거칠게 플레이했고 반칙이 많이 나왔는데, 그러다가 당대 최고 수준의 스트라이커인 주앙 핀투가 퇴장당했다. 곧이어 또 한 명의 선수인 베투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 포르투갈은 9명, 한국은 11명이 경기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상황에서 박지성의 결정골이 터졌고, 포르투갈은 그 한 점 차이를 결코 만회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어쨌건 즐겁다는 분위기가 대세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지만, 김어준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이 홈 어드밴티지를 이용해서,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에 힘입어, 제 실력대로 하면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기고 16강에 올라갔다고 말하는 한국인이 어딘가에 있긴 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누구의 발언을 반박하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축구 전문가"가 누구인지에 대해 지금의 우리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아무튼 그런 태도,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 스스로 비겁한 승리를 했다고 생각하고야 마는 패배주의 근성을 김어준은 질타하기 시작했다.

이번 게임에선 우리가 이길 만하니까 이긴 거다. 우리가 정당하게 페어플레이해서 이긴 거 맞다. 그러니 우리가 비겁하게 승리를 뺏어낸 거라 생각하고 스스로 쪼그라들고 스스로 비아냥거리는, 만성적 패배주의에 찌들어 차분하기 짝이 없는 일부의 소심한 사람들아, 이제 제발 그만 차분해 하고 흥분해서 발광을 하며 날뛰는 주변의 정상적인 인간들이랑 어깨동무하고 같이 마음껏 난리치길 바란다. ('우리는 강팀이다', <딴지일보>, 2002년 6월 15일)

이탈리아 전에서도 역시, 세계 톱클래스 선수인 토티가 퇴장을 당한 후 한국이 이겼다. 마찬가지로 오심 논란이 있었고 홈 어드밴티지 논란도 있었다. 그에 대한 김어준의 대응도 역시 한결같았다. 그리고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한국팀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또 이겼다. 김어준은 그때까지도 남아있는, 혹은 본인의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는 '패배주의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그래서, 한편으론 정말 속상하다. 그동안 얼마나 이겨보지 못했으면, 얼마나 패배에 익숙해져 있으면, 얼마나 바깥의 눈치를 보고 살아왔으면…이렇게까지 작은 행운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도리질하고 있는 건가 말이다. 제발 이제부턴 익숙해지자. 승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라. ('믿어라! 우리가 강팀임을', <딴지일보>, 2002년 6월 24일.)

5.

2003년 9월 1일, <딴지일보>에 새로운 글이 하나 업데이트되었다. 제목은 '우리는 강팀이다 II'. 작성자는 당연히 김어준 총수였다. "승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라"고 권했던 그가, 자신이 남들에게 권한 바로 그 '승자의 시선'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 모종의 체계적인 세계관을 형성해내고자 노력한 결과물이 바로 그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상대한 수많은 나라 중, 김어준은 이탈리아 전에서의 승리를 각별한 것으로 꼽고 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는 축구도 잘하지만 유니폼도 멋진 그런 나라이기 때문이다. 전직 복서 출신의 스트라이커 비에리의 거대한 체구가 공포감을 자아내는 만큼, 그들이 입고 있는 파란색의 쿨한 유니폼 역시 김어준에게 깊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 편 태클은 기술이고 상대편 태클은 폭력으로 자동 해석되는 그 전쟁 상황에서조차, 도대체 그들 유니폼의 상대적 세련미는 부정하기는 힘들었다"며, "그리고 난 그 유니폼이, 비에리의 선제골만큼이나 부러웠다"('우리는 강팀이다 II', <딴지일보>, 2003년 9월 1일)며 김어준은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 본론의 내용 중 대부분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김어준의 주요 레퍼토리 중 (2)번을 수없이 확대재생산한 것이다. 어쩌면 (2)의 내용이 '우리는 강팀이다 II'를 쓰는 과정에서 그의 의식 속에 고착화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선후 관계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김어준이, 본인이 배낭여행을 다니며 '개인'으로서 느꼈던 문화적 격차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법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자신의 눈을 호린 이탈리아의 '명품'들이 수많은 가족 기업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 가족 기업에서 일하는 장인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일을 하는 것일 뿐인데 왜 그것이 나에게까지 아름답게 보이는가, 왜 나에게는 내가 익숙한 대로 하면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좋은 것이 될 수 있는 그런 전통과 문화적 맥락이 없는가 등을 고민하던 그는, 하릴없이 다음과 같은 '서론의 결론'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가 발명한 민족주의라는 허구의식으로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며 단군신화 파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스스로 몰랐던 우리네 가치와 새롭게 정립해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보다 세련되고 보다 당당하고 보다 자유롭고 보다 행복한 개인이 되자는 이야기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련다. (김어준, 같은 곳)

'우리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과 그것을 통해 "보다 자유롭고 보다 행복한 개인이 되"는 것 사이의 간극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당시 <딴지일보>를 열심히 보던 나 또한 김어준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며 자주 들어가 업데이트를 확인했지만, 단절된 역사적 지평 위에서 자아를 형성해야 하는 변방의 식자들이 겪는 공통의 문제에 대해, 김어준이라고 해서 뾰족한 해법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것'이 아닌 근대적 자아를 형성하고자 하면, 그것은 몸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사실 앞서 말한 '어설픈 근대적 자아'가 자신의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지평 위에 서있을 뿐,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흑인들의 음악인 힙합을 하면서 '미국인 흉내'를 내는 것만큼이나, 이미 전통이 단절된 지 오래라는 현실을 무시하고 '조선인 흉내'를 내고자 발버둥치며 '만들어진 전통' 위에서 국악을 하는 것 역시 애처롭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세계'의 존재를 실감한 모든 이들이 한번은 겪게 되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어준은 그 문제에 대한 태도와 축구 경기를 볼 때의 응원하는 자세, 한국팀의 승리를 당당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패배주의적인 태도 등을 잇는 어떤 '선'을 발견했다. 우리가 비겁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강팀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몸에 찌든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그렇다고, 승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버릇을 들이면 달라질 것이라고, 그는 믿었고 외쳤다. '이거 파시즘적인 구호 아냐?'라고 의심하지 말고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다 보면 언젠가 대한민국도 이탈리아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 있을 터였다.

6.

2003년 9월의 김어준이 사회진화론적 뉘앙스를 지니는 논의를 전개해가며 문명사적 고찰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2002년 12월 '역사의 후퇴'를 막아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면서 당시 축구협회의 회장이었던 정몽준은 갑자기 유력한 대선주자로 떠올랐고, 그때까지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려가던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 노무현은 위기에 빠졌다.

탁월한 연설 능력, 열성적인 핵심 지지자 층의 헌신적인 선거운동, 독보적인 정치적 감각과 타이밍 등을 통해 그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대선후보 경선을 승리로 이끌어내며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문제는 갑자기 정몽준이 등장하고 나니, 노무현이 차지하고 있던 '깨끗하고 신선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많이 빛을 잃었고, 온 나라를 휩쓸고 있던 축구 열기가 그에게 전혀 이롭지 않게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화 - 6인 6색 인터뷰 특강>(진중권 외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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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다시 한 번 창의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했다. 정몽준 측에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를 제안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여론조사가 정치의 도구로 전면화되었고, 동시에 '본선 경쟁력'을 이유로 후보들이 단일화하는 경향을 만들어내었는데, 이것은 모두 이후 10년이 넘도록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노무현은 정치적 도박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으로서의 정치인에 관심이 많았던 김어준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그를 인터뷰한 전적이 있었다. 노무현이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잠재력과 가치를 일찌감치 간파했다는 것은 김어준의 자부심 중 큰 부분을 구성한다. 김어준에게 노무현의 당선은 역사의 가치가 현실화된 것이었고,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퇴보할 일은 없을 터였다. 월드컵에서 당당하게 이탈리아를 무찔렀고, 대선에서 당당하게 '수구꼴통'들을 이겼으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강팀이라는 것을 아직도 못 믿는 패배주의자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전파하는 일 뿐이다.

그것이 2003년 9월의 일이다. 하지만 고작 반년이 지났을 뿐인 2004년 3월 12일,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물론 2004년 5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탄핵의 역풍으로 그가 자신의 지지 세력과 함께 만든 열린우리당은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는 쾌거를 누리게 되지만, 아무튼 노무현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국회에 의해 탄핵소추된 대통령이 되었다.

김어준뿐 아니라 다른 노무현 지지자들이 누리고 있던 '정신적 태평성대'는 바로 그 시점에 끝났다. 그들에 의해 막연하게 무리 지어진 '기득권', 혹은 '수구꼴통'이나 '조중동'으로 표상되는 거대한 악과의 투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터였다. 내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들은 '우리 대통령'을 공격한다. 내가 손을 놓고 있으면 '우리 대통령'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김어준의 머릿속에서 영원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7.

김어준은 축구가 전쟁의 대리물이라는 사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축구라는 대리전쟁에서 승리한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그의 언설 속에는, 마치 러일전쟁 당시 자국을 응원하고 승전보를 기뻐하던 일본 지식인의 그것과 비슷한 정조가 흐른다. 동시에 그에게 '우리'의 세상은 '저들', 즉 서양의 그것과는 달리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하지 못해 역사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자기 자신의 문화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도리어 부끄러워하는 경향을 띄고 있었는데, 그렇기에 모두 한마음이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며 국가대표 축구팀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과정은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근대적이지도 않은 파편화된 개인들이 '한국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응원하고 목소리를 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응원의 대상이 반드시 축구에 한정되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대입하거나 적어도 몰입할 수 있는 '섹시'한 대상과, 그 대상에 몰입하는 것을 추하다고 혹은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하면서 흥을 깨지 않는 것이 관건일 뿐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김어준에게 바로 그런 대상이었다. 황우석 박사가 <사이언스>라는, 서양의 합리성과 이성을 대변한다 할 수 있는 과학 전문지의 1면을 장식하는 것 역시, 김어준에게는 과학이 아닌 '우리'의 승리였다.

황우석 박사팀이 연구원의 난자를 이용해 배아줄기세포 배양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MBC 시사교양프로그램 <PD수첩>은 폭로했다. 2005년 11월 22일의 일이다. 이틀 뒤인 11월 24일 황우석 박사는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민국이 황우석 사태를 놓고 '둘로 갈라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황우석의 편을 들고 있었고, <PD수첩>과 <프레시안> 그리고 일부 지식인만이 황우석 팀의 연구 윤리 등을 지적했다. 그 '대부분의 사람들'에는 김어준,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시점에서 김어준은 <부산일보>에 '황우석 사태 관전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다. 11월 29일의 일이다. "황우석 사태, 생뚱맞게도, 월드컵이 오버랩 됐다"며 말문을 연 그는, "말하자면 <PD수첩>은, 2002년 안정환의 이태리전 결승 헤딩골은 카메라 사각이어서 제대로 잡히지 않아 그렇지 사실은 안정환의 핸들링이었다는 것을 온갖 자료를 동원해 증명해내고 또 손에 닿은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안정환은 거짓말쟁이라는 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입증한 꼴" ('황우석 사태 관전기', <부산일보>, 2005년 11월 29일)이라는 독창적인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11명의 태극전사가 축구를 하는 것과, 10여 명의 연구진이 실험실에서 배아줄기세포 복제 연구를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단번에 지워진다. "모든 이의 자부심과 뿌듯함"을 위한 것이므로,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보다 공통점이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줄기세포복제 연구 자체가 날조된 것이 아니라 그저 '연구 윤리 위반'이 문제인 것으로 여겨졌던 11월 말, 김어준의 입장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팀에게 유리한 편파 판정 논란이 일어났을 때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궤적을 그렸다. FIFA에서 새로 적용한 심판 규정 때문에 토티가 퇴장되었을 뿐이라고 우리가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듯이, "충분히 자발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경우, 연구원 난자기증 가능하단 것이 배아복제 실험과정에서 우리가 경험적으로 획득한 실험윤리라고 국제과학계에 주장하는 꼴 좀 봤음 한다"고 김어준은 말했다.

전쟁의 대리물로서의 축구.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전쟁. 하여 이제는 세상사 모든 일이 '감정이입'하고 '열광'할 수 있고 그래야 하는, 축구경기이자 곧 전쟁이 되어버렸다. 황우석의 연구 자체가 날조된 것임이 확인되어 본인의 패색이 짙어지자, 김어준은 <한겨레> 지면을 빌어 "황우석 사태, 이제 그만 닥치자"고 외친다. "대중의 감정이입을 멍청한 착각이고 위험한 파시즘이라고만 단정하는 게으르기까지 한 관성적 비판과, 영웅적 캐릭터로부터 위무 받고 대리만족 느끼던 대중을 간단히 애국주의로 괄호 치는, 그 야박하고 오만한 이성주의가 난 훨씬 더 재수 없다"('황우석 사태, 이제 그만 닥치자', <한겨레>, 2005년 12월 29일)고 한발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황우석 사태에 대해 순순히 "닥칠" 수 없던 것은 정작 김어준 자신이었다. 2006년 2월 2일 <한겨레> 지면에 오른 '황우석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김어준은 황우석과 미즈메디와 공동연구자 새튼과 또 다른 과학 전문 학술지 <네이처> 등을 소재로 삼아 이런 저런 음모론과 가설을 마구 던져놓는다. 물론 그 중 어떤 주장에도 책임을 질 수는 없기에, "나중에 바보 되면 내 배는 내가 알아서 째리라. 하지만 난 이 사건이 도대체 이상하다. 나만 그런가"('황우석 미스터리', <한겨레>, 2006년 2월 2일)라고 흐지부지 결론을 내리지만,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스타일은 이후 김어준의 활동 방향을 그대로 예상할 수 있게끔 한다.

8.

박지성에게 '두 개의 심장'이 있듯이, 우리는 김어준에게 '두 개의 자아-캐릭터'가 있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배낭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을 곱씹으며 만들어낸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가 한 편에 서있다면, 노무현의 당선과 2002년 한일월드컵, 노무현 탄핵, 황우석 사건, 이후 노무현의 검찰 조사와 자살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비극을 통해 확고해진 '음모론적 정치선동가'가 다른 한쪽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 양자 사이의 간극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개인주의자 김어준과 정치선동가 김어준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고의 프로세스를 가지고 움직인다. 개인주의자 김어준에게 조직이란 개인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며 삶을 방해하는 조직이 있다면 개인은 그것을 버리거나 바꿔야 한다. 하지만 정치선동가 김어준에게, 우리가 어지간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조직인 대한민국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하고 자랑스럽지 않아도 자랑스러워해야 할 당위를 내포하고 있는 무언가다.

음모론적 정치선동가 김어준이 황우석에게 '올인'했다가 황우석의 연구 조작이 드러나면서 큰 위기에 빠졌을 때, 한동안 발언권을 잡지 못했던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 김어준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한겨레>에 연재된 상담 코너 '그까이거 아나토미'는 김어준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개인주의적 감수성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고 시원시원하게 조언하는 '딴지 총수' 김어준을 보며, 사람들은 그가 <사이언스> 1면의 논문 게재를 안정환의 헤딩슛과 비교하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기억 저편으로 넘겨버릴 수 있었다.
 

▲ 2011년 11월 30일 서울 특별공연을 연 '나는 꼼수다' 팀 ⓒ프레시안(최형락)


그렇게 대중적 입지를 회복한 김어준은 2011년 <닥치고 정치>(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를 출간하고 그해 연말부터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를 시작하면서 완전한 대중적 스타로 떠올랐다. 임기 4년차에 접어들어 예전만큼 권력의 '말빨'이 먹히지 않게 된 대통령 이명박을 소재로 삼아, 정치선동가 김어준의 관심사인 온갖 음모론과 '시나리오'들이 가미되자, 특히 노무현의 자살 이후 정신적 공허감에 빠져있던 구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닥치고 정치>는 상당히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 1위를,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는 아이튠즈 전체 팟캐스트 중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개인주의자와 정치선동가의 묘한 동거는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닥치고 정치>를 펼쳐보자. 개인주의자 김어준은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시위의 배후로 노무현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놓고 "자기들 잘못을 정면으로 인정할 수 없는 초라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들이 가장 쉽게 매달리는 사고 패턴"이라며, "그런 자들은 일이 잘못되면 배후나 음모가 있어줘야"(<닥치고 정치>(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 104쪽)한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런데 책을 조금만 넘겨보면 이번에는 서태지와 이지아의 이혼 사실이 어떻게 언론에 알려졌는가에 대해, 김어준 본인이 바로 그런 "배후나 음모"를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른은 이명박의 법무적 경호실장"인데, "그런 바른이 이지아의 법적 대리인"이고, "그 재판의 정확한 성격을 알았던 사람은 이지아 측 변호인단밖에 없지 않느냐는 추론이 가능"(같은 책, 108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지적 가카 시점"이라는 유명한 유행어가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다시피, <닥치고 정치>와 '나는 꼼수다'의 상당 부분은 바로 그런 음모론에 할애된다. 그렇다면 음모론적 사고방식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대목이 책에 등장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개인주의적 자아가 남겨놓은 다잉 메시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9.

<건투를 빈다>의 김어준은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이고, <닥치고 정치>의 김어준은 '음모론적 정치선동가'라고, 따라서 우리는 후자를 버리고 전자를 취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직전에 살펴본 것처럼 <닥치고 정치>에서 김어준의 개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희미하게 엿볼 수 있듯, <건투를 빈다>에는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아르마니 양복 밑에 감춰져 있는 'Be the Reds'티셔츠의 땀자국이 남아있다. 양자는 떼어놓으려야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자아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얼굴이다. 그 부분을 확인해보자.

나이 70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물어본 김어준은, 기력이 쇠하고 난 후 동네에서 작은 식당을 하나 하고 싶다며 본인의 "70대 리스트" 중 일부를 공개한다. 그는 "그저 열 받는 것과 흥분되는 것이 공유되는 '꽈'가 같은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수다 떨며,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과 영 관련 없이 늙어가고"(<건투를 빈다>, 83쪽) 싶은 것이다.

하여 그런 거점으로 난 식당 하나를 열 게다. 그래서 35년 전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을 이야기하면서 어제 일처럼 같이 열광하고 30년 전 2008년 광우병 사태를 이야기하며 오늘 일같이 함께 흥분하는 사람들, 노년엔 그렇게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놀고 싶다는 거다. (김어준, 같은 곳)

자, 지금의 김어준이 볼 때, 35년 후의 김어준이 여전히 열광할만한 소재가 있다면 무엇인가?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이다. 30살을 더 먹은 김어준이 여전히, 분노의 뉘앙스로 흥분할만한 일은 뭘까? 2008년 광우병 사태가 그것이다.

잠깐, 2008년 광우병 사태라고? 이 말은 좀 이상하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솔직하지 못한 표현인 것 같다. '꽈'가 같아서,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 박사 사건은 인간이 저지른 과오를 악마적 의도라고 단정하는 진영 논리로, 저지른 잘못에 합당한 징벌을 상회하는 결과적 폭력이었다고 여기지만, 그래서 그저 생래적 보수성을 타고났을 뿐인 불완전한 인간 하나를 사회적 걸레로 용도 폐기하는 진보의 잔인한 비인간성을 목격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또 하나의 책이 만들어져야 하니까, 그건 그냥 내가 욕먹고 말게.(웃음) 다만, 국익 드립.(웃음) 난 황우석이 말한 국익에 전혀 관심 없어. 이해시키기 힘들다, 참. 끝.(웃음) (<닥치고 정치>, 299쪽)

반대로, 우리는 대체 "2008년 광우병 사태"의 그 무엇이 김어준을 그토록 흥분하게 하는지, 그런데 그 흥분을 대중들과 나눌 수 없어서 굳이 개인 클럽까지 열어가며 통하는 사람들에게만 속삭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광우병 사태의 악역은 이명박이요 선량한 희생자는 <PD수첩>과 국민들이었다. 혹시 김어준은 광우병을 다루던 <PD수첩>의 '취재 윤리'가, 마치 황우석 사태 때의 그것처럼,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대세에 휩쓸려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인가? 대중의 심기를 거스르고 이명박을 감싸 안으며 '<PD수첩>, 광우병, 씨바 왜 그따위로 검증하냐'고 따질 생각이었던 것인가?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김어준이 지금까지도 분노하는 사건은 황우석 사건이지 광우병 사태가 아니다. 겁먹은 개인을 대중과 미디어가 몰아가서 벼랑 끝으로 밀어낸 사건. 앞서 인용된 것처럼 김어준은 황우석 사태를 그렇게 이해한다. 우리나라를 위해 뛰는 선수가 핸들링을 했다고, 한국인들이 FIFA에 제소해서 그의 선수 자격을 박탈해버린 사건. 우리가 우리 편을 구석으로 몰아붙인 사건. 개인을 도구로 삼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는 진보의 잔인함을 드러낸 사건. 그리하여, 노무현의 탄핵 및 자살과 어렴풋이 겹쳐 보이는 사건.

월드컵에서 황우석으로 이어지는 김어준의, 말하자면 '흑역사'를 그의 단행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각각에 대한 언급이 이러한 형태로 '은폐'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이것이이야말로 의미심장한 일이며,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에 들린 단행본을 열쇠삼아 인터넷을 검색하게 되었고, 김어준이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나머지 반쪽의 자아를 확인함과 동시에, 그가 살아온 시대의 밑그림을 얻게 된 것이다.

10.

김어준은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얼마 전, 국내에서 가장 많은 월급을 주는 포스코에 입사했지만 6개월 만에 퇴사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그 일마저도 끊기게 되어 하릴없이 만든 것이 <딴지일보>였고, 이후 그는 지금까지 '<딴지일보> 총수'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대학 시절을 배낭여행으로 보내고도 국내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주는 직장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이 그것을 박차고 나와 "인생은 비정규직"이라고, 삶에 보직은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애초에 정규직이 될 가능성조차 너무도 희박해서 한 줌의 지푸라기를 쥐고자 그가 말하는바 '초식동물'의 삶을 감내하는 이들은, 부러움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난 다음부터, 기존에 정의되었던 표준적인 삶의 모델들이 하나씩 허물어졌다. 직장은 더 이상 직원들을 지속적으로 챙겨주지 않는다. 노동자는 쓰고 버리는 건전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고, 김어준이 유럽에서 보던 으리으리한 명품들은 이제 서울 시내 백화점만 가도 손쉽게 구경할 수 있다.
 

▲ 김어준. ⓒ프레시안(김하영)


김어준이 만들어낸 개인의 모델,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는 그래서 더욱 불안해진다. 삶이 통째로 비정규직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 칼날이 언제 내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개인주의자이고, 따라서 기존 정당과 노동운동의 조직 등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약하디 약한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감정이입과 열광뿐일 것이다.

정치선동가 김어준은 바로 그 결여를, '나는 대중들에게 열광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자아-캐릭터를 통해 채워 넣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마약 중독자이기도 한 마약 딜러처럼, 음모론적 정치선동가로서의 김어준은 정치인을 연예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 선별하여 대중들의 앞에 던져놓는다. 본래 서울대 조국 교수를 '띄우기' 위해 <닥치고 정치>를 기획했지만, 간을 보고 아니다 싶어서 문재인으로 갈아탄다는 그 모든 과정이 책에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치선동가로서의 김어준은 무책임해질 수밖에 없다. 김어준이 선동하는, '닥치고' 문재인을 지지하자는 그 '정치'는, 경제적 굴레 앞에서 자발적으로 복속하지 않을 수 없는 현재 앞에,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그저 '박근혜는 아니지 않느냐', '공동체의 최소한의 염치가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수준에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문재인을 닥치고 찍어봐야, 어차피 우리 모두의 인생이 비정규직이다. 대통령 바뀌었다고 해서 너와 나의 직장만 정규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삶의 조건이 과연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대통령을 바꿀 수 있지만, 결국 인생은 알아서 사는 것이므로, 대통령은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없다. 대통령 뿐 아니라 모든 '정치'가 그렇다. 정치를 향한 참여와 열광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지난 10여 년간, 반대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실제의 삶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들어만 갔다. 결국 2012년 대선은 박근혜와 문재인이 아니라 박정희와 노무현이 맞붙는 상징계의 싸움이 되어버렸고, '나는 꼼수다'의 열광은 세대별 인구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 결과 앞에서 '멘붕'했던 김어준은, 마이크도 채 끄지 않은 채 스튜디오를 떠났고, 스스로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늘 하던 대로 아침에 카페 가서 에스프레소 한잔 마시며 유럽·미국 뉴스 훑고, 알아둘 기사 있으면 그쪽 기자에게 연락해 뒷이야기 듣고, 관계 맺고 자료 조사하고, 구상"(<시사IN> 290호, 39쪽)했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음모론적 정치선동가가 패배를 곱씹는 사이,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페르소나가 팬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11.

1987년 민주화 투쟁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모두 놓친 한 청년은 이 좁은 세상이 너무도 갑갑했다. 때마침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루어지고, 또 3저 호황의 결과로 국내에서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만한 여비를 손쉽게 마련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그 청년의 20대는 더욱 우울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좋은 시점에 대학에 들어갔고, 사실상 '배낭여행 1세대'로서 개척 세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만끽했다.

<한겨레>에서 주관한 인터뷰 형식의 특강에서, 김어준은 늘 그렇듯 젊은이들에게 여행을 많이 다니고 연애를 하라고 조언했다. 문제는 그 여행 경비를 마련하는 방법이다. 김어준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다른 나라의 여행 여건과 편의시설 등을 소개하는 비디오를 찍어주는 대신 여행사에서 자신에게 항공권을 제공하는 '딜'을 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자기가 처한 상황 안에서 애를 써서 방법을 찾다 보면 방법은 무수히 많다고 생각"(<화 - 6인 6색 인터뷰 특강>(진중권 외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289쪽)한다고, 그러니까 각자 알아서 방법을 찾아서,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구글 지도로 파리와 뉴욕과 런던의 뒷골목까지 헤집고 다닐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구글 스트리트 뷰로 에베레스트와 킬리만자로까지 구경할 수 있게 된 지금, 이런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김어준이 처음 여행을 다니던 그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세계'의 물꼬가 트였고, 가장 먼저 뛰쳐나간 사람들은 또 누구보다 빨리 한국에 돌아와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세계'의 모습을 소개하고 전파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낭만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아직까지는 세계가 덜 평평했던 그런 시대의 모험담인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캐릭터가 김어준을 '쿨'한 존재로 만들어줬다면, 88올림픽을 즐길 수도 없었던 한 청년이 2002년 월드컵을 보며 개인에서 '우리'로 도약한 후 몇 번의 질곡을 거쳐 주조해낸 음모론적 정치선동가의 캐릭터는 그를 '핫'하게 만들었다. 얼핏 보기에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개의 입장이 한 사람의 몸에, 모종의 담론적 굴절을 통해 안착해 있다.

그 둘을 떼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치선동가가 이끌어낼 수 있는 대중적 팬덤은 개인주의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지만, 정치선동가가 삐끗할 때면 언제나 개인주의자가 구원투수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자유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21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두 개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열광의 정치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파시즘의 이상향으로 서서히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김어준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부모에게 인생을 저당 잡히고 살아가서는 안 될 개인이면서, 동시에 국가대표 축구팀의 경기를 보고 함께 환호해야 마땅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늙은 몸을 인질로 삼아 자식들의 삶을 침범하는 부모와 싸우는 청년의 건투를 빌어주지만, 그 청년이 닥치고 문재인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김어준은 그를 '겁쟁이 유인원' 쯤으로 낙인찍을 것이다. 김어준이 말하고 실현하는, '인생은 비정규직'이기에 오는 자유는, 그의 자유를 동경하는 수십만 비정규직 청취자들의 비자발적 자유가 없다면 성립할 수조차 없다. 이 간극과 양면성이야말로, 늑대소년이 PC방에 앉아 이번 시즌 아르마니 수트를 검색하고 있어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그 자체다.
 

본 원고는 비정기 문화 잡지인 <DOMINO> 3호에 실렸던 '늑대소년은 이탈리아에서 무엇을 보았나'를 수정·증보한 것입니다.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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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탈출 러시, 그래도 못 떠나는 사람들은…

 

 
[르포] “헬리콥터 소리만 들어도 무서워요”… 군(軍)은 못 미덥고 언론은 위기만 조장
강성원 기자 | sejouri@mediatoday.co.kr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날씨는 완연한 봄이지만 마음은 봄 같지가 않다. 연일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 위협과 북미 간, 남북 간 긴장 상황 때문에도 왠지 마음 놓고 봄을 즐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민 반응일까. 그렇다면 이미 수차례 북한의 도발과 직접 공격을 경험했던 연평도 주민들의 심정을 어떨까.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 개에게 물려본 사람은 짖는 개를 두려워한다. 기자가 연평도에서 만났던 주민과 아이들도 여전히 ‘그날’의 공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저희 반 친구 중의 한 명은 군인들 사격훈련 소리가 조금만 들려도 대피소로 뛰어가자고 그래요. 헬리콥터 소리를 들어도 무서워해요. 다른 친구들도 예전엔 헬리콥터를 보면 손을 흔들면서 ‘저도 태워가요’ 그랬는데 이젠 아무도 그러지 않아요.”

연평성당 앞에서 만난 연평초등학교 6학년 방지혁(가명·12)군은 북한이 포격을 가했을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지혁군은 그날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북한 포격이 쏟아지자 무척 당황하고 놀랐다고 한다. 지혁군은 부모님과 함께 그날 바로 어선을 타고 인천으로 대피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무섭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혁군은 “그냥 포 쏘는 건 괜찮은데 우리집이 맞을까 봐 무서워요”라고 대답했다. 지혁군은 앞으로도 포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안심하고 쉴 수 있는 ‘우리집’을 걱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집과 가족을 산산이 파괴할 수 있는 전쟁의 공포를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 연평성당 안에 세워져 있는 '기적의 성모상' 뒤편으로 북한 포격 당시 표적이었던 탄약고가 있다.
ⓒ강성원
 


불안한 주민들 대피소 가져갈 가방 싸 놓기도

2010년 11월 23일 오후 북한의 무차별 포격으로 피해를 입었던 연평성당에서도 무너진 사제관은 다시 복구됐지만 당시의 아픔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성당 안에 세워진 성모상은 불과 100m 정도 떨어진 탄약고를 등지고 마을 주민을 향해 있었다. 그날 이후 이 성모상은 북한의 포화 속에서도 주민을 지킨 ‘기적의 성모상’이라고 불린다.

미사를 드리러 성당을 찾은 한 주민은 “상처를 받은 아이들과 주민들을 위해 심리치료와 힐링 프로그램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며 “보건소에서 약 처방 정도만 해줄 뿐이지 주민들을 실질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연평도 주민들은 이제 군(軍)과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다. 불안하지만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만약을 대비해 대피소로 가지고 갈 가방을 싸 놓기도 했다. 홍성훈 연평성당 신부는 “주민들의 불안감은 높지만 정부가 국민을 안심시키는 대책은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며 “일부 언론들이 상황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위기감을 조장하는 것도 문제”고 지적했다. 홍 신부는 이어 “그제 탈북자가 꽃게잡이 배를 타고 나갈 때도 군에서는 좋은 자리 찾으러 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며 “밤 10시가 넘어서 나갔으면 출항금지 시간인데 그대로 뒀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무차별 포격으로 피해를 입은 주택이 보존돼 있다.
ⓒ강성원
 

기자가 연평도에 도착한 5일에 앞서 지난 3일 밤, 탈북자 이혁철(28)씨가 연평도에서 일하던 어선을 훔쳐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월북했다. 5일 불안해하는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연평면에 방문한 조윤길 옹진군수는 연평 주민과 간담회를 갖고 주민들의 요구가 중앙 정부에 반영될 수 있도록 대통령과 자리를 주선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연평도 주민들은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박태원(53) 주민대책위원장은 “다수의 노인들과 주민들은 불안감에 떨고 있다”고 말했고 주민 김영식(62)씨는 “주민들의 불안은 연평도에 거주하는 동안 계속될 것이며 정부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아직 주민들이 받았던 고통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최근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 정부와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마련해 달라는 부탁이다.

외부 시선이 더 걱정…관광객 감소에 상권 침체

연평도 주민들이 느끼는 또 하나의 위협은 ‘생계 불안’이다. 4월부터 본격적인 꽃게 철이 시작됐지만 남북 간 갈등 상황이 더 고조돼 어업통제가 이뤄질까 봐 걱정이다. 아직은 바다에 꽃게잡이용 어구만 깔아 놓은 상태지만 5월부터는 꽃게 수확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최근 북한이 도발 위협 수위를 높이면서 어선에서 일할 인부들이 부족한 상황이다.

겨울에 일거리가 없어 연평도를 떠났던 노동자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광객의 발길도 끊겼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지 않았을 때 많게는 600명이 넘었던 주말 관광객 수도 요즘은 100명이 넘기 힘들다. 안보 교육을 위한 학생들의 견학 신청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식당과 민박 등 지역 상권은 계속해서 불경기다.
 

 

   
▲ 연평도 종합운동장 피폭 장소에는 벽화 사진이 그려져 있다.
ⓒ강성원
 

기자가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할 때도 연평도로 들어가는 사람보다 나오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편의점에서 만난 한 마을주민은 관광객이 많이 준 것 같다는 물음에 “요새 관광객이 어딨느냐”고 반문했다. 그나마 한동안 머물렀던 언론사 취재진도 거의 다 나가고 없었다. 연평리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송영옥(52)씨는 북한의 도발보다 연평도를 바라보는 외지 사람들의 시선이 더 걱정스럽다고 말한다.

“언론에서는 매일같이 전쟁 위기다, 북한이 도발한다 그러는데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연평도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위험한 곳, 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오히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뉴스를 보고 안부 전화를 해요.”
 

 

   
▲ 연평중·고등학교 지하에 설치된 대피소.
ⓒ강성원
 

연평도 주민들은 과거의 상처를 가슴에 묻고 지금도 군부대 포격 훈련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곤 하지만 이곳을 떠나길 바라지 않는다. 다만 안심하고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게끔 정부의 지원과 관심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서해 상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대피소만 늘릴 게 아니라 주민들의 행복과 삶의 터전을 지켜줄 혜안이 절실하다. 1959년 사라호 태풍 사고 이후 붙여진 ‘눈물의 연평도’의 재앙은 더는 일어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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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간 만에 끝날 해상전 시나리오

 

10시간 만에 끝날 해상전 시나리오
 
[한호석의 개벽예감](57) 연안해전 능력 키워온 인민군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3/04/05 [21:42] 최종편집: ⓒ 자주민보
 
 

2013년 3월 25일, 함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2013년 4월 1일 <교도통신> 기사 한 편이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 기사는 그 날 한국군 2함대 사령관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한 업무보고 내용 가운데 일부를 인용보도한 것인데, 2013년 3월 마지막 주에 황해남도 해안의 갱도진지들에 배치한 인민군 해안포 부대들이 포구를 개방하고 사격태세를 취하고 있는 가운데, 인민군 서해함대 함선들이 ‘북방한계선(NLL)’ 인근까지 남하하여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였다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지난 시기에도 서북해역(북측에서는 서남해역)에서는 ‘북방한계선’ 문제가 촉발한 세 차례의 서해해전과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났고, 특히 요즈음에는 일촉즉발 상태로 격화된 전쟁발발위기가 팽배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민군 서해함대가 그처럼 긴장된 서북해역에서 해안포 사격태세를 취하면서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긴박한 상황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뉴시스> 2013년 3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3월 28일에는 인민군 서해함대와 동해함대가 각각 서해와 동해에서 “동시다발적인 해상훈련을 실시(하면서), 고속정 기동훈련을 비롯해 우리쪽(남측을 뜻함-옮긴이)을 향한 실사격훈련도 감행했다”는 것이다. 위의 보도기사들이 말해주는 것은, 인민군 서해함대와 동해함대가 일촉즉발의 전쟁발발위기가 조성된 서해의 서북해역과 동해의 해상분계선 인근 해역에서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연속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실시하면서, 남측 해상을 향해 실탄사격까지 하였다는 사실이다.

위의 보도기사들이 충격을 안겨주는 까닭은, 정승조 한국군 합참의장과 제임스 서먼(James D. Thurman) 주한미국군사령관이 2013년 3월 22일 오전 10시에 ‘한미 공동 국지도발대비계획’에 서명하였다는 사실을 한국군 합참본부가 2013년 3월 24일에 공개하였기 때문이다. ‘공동대비계획’에 따르면, 만일 인민군이 군사분계선이나 ‘북방한계선’에서 무력을 행사하면 “한국군이 즉각 ‘응징’하고, 미국군의 전력지원을 받아 인민군 지휘소까지 타격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내용이 명문화된 ‘공동대비계획’이 서명, 발효되자, 친미수구언론들은 한국군이 인민군의 ‘국지도발유형’을 수십 가지나 정리해놓고 유형별로 세부적인 대비계획을 세워놓았다고 반기면서, “북한이 실제로 도발했을 때 강력히 응징해 도발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드는 의미가 있다”는 정승조 합참의장의 발언을 전하였다.

주목하는 것은, ‘공동대비계획’이 서명, 발효되었다는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지자마자 그 이튿날 인민군 서해함대가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까지 남하하여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울에서 ‘공동대비계획’이 서명, 발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한 인민군이 즉각 군사행동을 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과 남측의 대북적대행위에 맞선 북의 대응발언이 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 군사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그런 즉각적인 군사행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처럼 긴박한 상황이 조성되었을 때, 만일 한국군 2함대 수상함(surface ship)들이 서북해역에 나타나기만 하였어도, 격노한 인민군 서해함대는 그 함선들을 향해 불시에 기습타격을 퍼부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북에서 말하는 통일대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인민군 서해함대가 실탄을 장전한 채 한국군 2함대 함선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날, 2함대 함선들은 서북해역에 단 한 척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왜냐하면 인민군 서해함대가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까지 남하하여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는 극도로 급박한 상황이 조성되었는데도, 한국군 2함대 함선이 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사흘 전에 발효된 ‘공동대비계획’을 실행해야 하는 한국군 2함대는 그 작전계획에 따라 인민군 서해함대의 남하기동과 실탄사격훈련에 ‘보복응징’을 가하고 미국군의 작전지원을 받아 인민군 지휘소까지 타격해야 하였던 것인데, 이상하게도 그 날 서북해역에서 한국군 2함대는 무슨 ‘응징’은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처럼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한국군 2함대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국방일보> 2013년 3월 25일 보도기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 날 한국군 2함대에 소속된 초계함 세 척이 폭뢰를 투하하는 대잠훈련과 해상표적물에 사격하는 대함사격훈련을 실시하였고 한다. 인민군 서해함대가 대규모 실탄사격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던 날, 한국군 2함대는 초계함 세 척만 출동시켜 일상적인 수준의 훈련만 실시하고 끝난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문제는, 해상기동훈련이 벌어진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인민군 서해함대는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까지 남하하여 실탄을 사격하는 대담무쌍한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였는데, 한국군 2함대 초계함 세 척은 ‘북방한계선’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격렬비열도 인근 해상에서 일상적인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였다. 2013년 3월 25일 기동훈련을 서해 격렬비열도 인근 해상에서 실시할 것이라는 한국 해군 발표는 <국방일보>가 3월 21일에 보도한 바 있다. 서해 격렬비열도는 충청남도 태안군에 있는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서남쪽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다. 2010년 12월 2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한국군 합참본부 사진자료에 따르면, ‘해상사격 훈련구역’이라고 표시된 네 구역이 서북해역에 표시되었는데, 그 중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넓은 ‘D구역’은 ‘북방한계선’ 남쪽에 붙어 있는 접속수역이다. 그런데 한국군 2함대는 자기의 해상사격 훈련구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20km나 밀려난 것이다.

그러면 동해를 작전구역으로 하는 한국군 1함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국방일보> 2013년 4월 2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 제1함대는 3월 28일부터 4월 1일까지 “동해 작전구역에서 전대급 기동 및 실사격 훈련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1함대의 동해 작전구역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연합뉴스> 2013년 3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동해안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속초 앞바다가 1함대 작전구역이다.

인민군 서해함대가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까지 대규모 남하하여 기동하면서 실탄사격훈련을 실시하는 극도로 긴박한 상황이 조성되었는데도, 그 현장에 함대를 출동시키지 못하고 아주 멀리 떨어진 남쪽 해상에서 초계함 세 척이 폭뢰 몇 발 투하하고, 함포 몇 발 쏘는 식의 빈약한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한 것은, 한국군이 무슨 ‘응징’이니 ‘지휘소 타격’이니 하면서 ‘공동대비계획’을 거창하게 발표해놓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허풍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국군은 왜 긴급대응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그처럼 후방에서 허풍만 떨었을까? 한국군 함대는 인민군 함대와 실전을 벌일 경우 자기들이 패할 것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다.

연안해전능력 극대화한 인민군 해군

일주일에 한 차례씩 <자주민보>에 발표하는 나의 글들 가운데는 2013년 3월 16일에 게시된 ‘3일 만에 끝날 단기속결전’이라는 제목의 글(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2190)도 있다. 그 글에서 나는 지상전 시나리오에 대해서만 논하였고, 해상전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북이 말하는 통일대전은 대규모 전면전이므로, 그런 대규모 전면전을 시나리오로 예상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래서 지상전 시나리오와 해상전 시나리오를 각각 따로 논할 수밖에 없다.

만일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지면 인민군 지상군부대들은 한미연합군 지상군부대들이 지키고 있는 방어진지들을 돌파하여야 하지만, 서해와 동해에는 그런 방어진지가 없다. 쌍방 함대가 바다에서 격렬하게 맞붙는 대규모 해상전만 있을 뿐이다.

만일 서해와 동해에서 해상전이 벌어진다면, 대양해전이 아니라 연안해전이 될 것이다. 원거리 대양해전에서는 순양함, 구축함, 호위함, 초계함 같은 큰 군함들이 요구되지만, 그와 달리 근거리 연안해전에서는 몸집이 크고 육중하여 민첩성이 떨어지는 대형군함들은 별반 쓸모가 없다. 태평양에서 벌어진 대양해전에서나 작전능력을 발휘할 그런 대형군함이 한반도 연안해전에 나서면, 전쟁상대의 지대함 미사일과 중어뢰에 맞아 격침당할 위험만 커질 뿐이다.

근거리 연안해전에 요구되는 것은, 몸집이 작고 날렵하여 민첩하게 기동하는 소형함정이다. 적함을 단방에 격침시킬 타격수단으로 무장한 소형함정을 많이 건조하여 강력한 연안작전능력을 갖춰야 근거리 연안해전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남측의 친미수구언론과 엉터리 평론가들은 일본에 주둔하는 미국의 7함대 항모강습단이 한반도로 출동하면 북이 겁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친미사대주의가 빚어내는 무지와 억측이다. 항모강습단을 연안해전에 동원하는 작전방식은 1960년대의 베트남 전쟁에서나 가능한 것이었으며, 인민군이 지대함 미사일과 공대함 미사일을 배치하고, 잠수함작전과 정밀핵타격작전을 준비하여 해군무력을 결정적으로 강화시킨 이후, 한반도에서 미국의 항모강습단 작전은 베트남 전쟁의 색바랜 전쟁신화로 남았다.

현 시기 미국이 한반도 연안해전에 동원할 타격수단은, 북의 군사전략거점을 향해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불시에 쏠 수 있는 핵추진 잠수함이다. 한해에도 몇 차례씩 한반도 연안에 출동하는 7함대 대형 수상함들은 평시 무력시위 이외에 거의 작전적 가치를 상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불리한 상황을 간파한 미국은 최근에 연안전투함(littoral combat ship)을 부랴부랴 개발하였지만, 미국이 새로 개발한 연안전투함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최남단 항구 샌디에고(San Dieo)를 모항으로 하는 프리덤호(USS Freedom), 인디펜던스호(USS Independence), 포트워스호(USS Fort Worth) 세 척뿐이다.

지난 60년 동안 미국 해군의 절대적 영향과 지도를 받으며 미국식을 따라해온 한국 해군은 미국 해군처럼 대양해전을 꿈꾸며 연안해전에 필요한 작전능력 배양을 소홀히 여겼다. 한국 해군이 연안해전에 필요한 작전능력을 배양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6월 29일 제2차 서해해전에서 패한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와 완전히 다르게, 인민군 해군은 처음부터 소련식을 따르지 않고 ‘우리식 해군무력’ 건설에 달라붙었다. 북에서 말하는 ‘우리식 해군무력’ 건설이란 연안해전의 근거리 작전능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된 것이다. 북측 자료를 분석해보면, 인민군 해군이 개발한 ‘우리식 해상전술’의 핵심은 고속돌진전술과 화력집중전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인민군 해군무력도 당연히 고속돌진전술과 화력집중전술에 맞게 강화, 발전되어 왔으며, 해상기동훈련도 그 두 전술에 맞게 실시하며 실전능력을 키우고 다져왔다. 그들이 그렇게 60년 동안 노력을 기울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실전능력은 얼마나 강해졌을까? 인민군이 실전배치한 각종 해군함선들 가운데 강력한 연안해전능력을 지닌 일곱 종류의 함선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2012년 3월 8일 김정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해군 제123군부대를 시찰하는 보도사진에는 어느 군항에 계류된 함정들이 보인다. 그 함정들은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배수량이 220t이고 항해속도가 시속 63km인 고속미사일정이다. 북에서 그 고속미사일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은 ‘서주급 미사일정(Soju-class missile boat)’이라 부른다. 인민군 고속미사일정은 사거리 100km인 함대함 미사일 4발, 30mm 쌍열 고사포 2문으로 무장하였다.

둘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배수량이 160t이고 항해속도가 시속 80km인 고속어뢰정이 있다. 북에서 그 고속어뢰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은 ‘셔센급 어뢰정(Shershen-class torpedo boat)’이라 부른다. 인민군 고속어뢰정은 533m 중어뢰 4발, 30mm 쌍열 고사포 2문으로 무장하였다.

셋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배수량이 82t이고 항해속도가 시속 74km인 고속방사포정이 있다. 북에서 그 고속방사포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은 ‘차호급 로켓정(Chaho-class rocket boat)’이라 부른다. 고속방사포정은 사거리가 30km인 40련장 122mm 방사포 1문, 23mm 고사포 1문, 14.5mm 쌍열 고사포 2문으로 무장하였다.

넷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선체 길이가 약 40m이며 항해속도가 시속 90km인 스텔스 고속정이 있다. <조선일보> 2010년 5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이 스텔스 고속정은 1990년대 말 북에서 생산되었다. 북에서 그 스텔스 고속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은 스텔스 수상효과함선(stealth surface effect ship)이라 부른다. 인민군 스텔스 고속정은 57mm 함포 1문, 30mm 쌍열 고사포 1문으로 무장하였다.

다섯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배수량이 200t이며 항해속도가 시속 80km인 스텔스 고속미사일정이 있다. 북에서 그 스텔스 고속미사일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은 수상효과 고속미사일정이라 부른다. 인민군이 실전배치한 스텔스 고속미사일정은 사거리 120km인 초음속 함대함 미사일 8발, 85mm 함포 1문, 30mm 쌍열 고사포 2문으로 무장하였다.

여섯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배수량이 80t이고 항해속도가 시속 74km인 스텔스 고속어뢰정이 있다. 북에서 그 스텔스 고속어뢰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스텔스 고속어뢰정은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인민군 스텔스 고속어뢰정은 533mm 중어뢰 2발, 30mm 쌍열 고사포 1문으로 무장하였다.
일곱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무인고속어뢰정이 있다. 2011년 8월 22일 남측 주요 언론매체들은 북이 신형 무인어뢰정을 2011년 초에 개발하였고, 8월에 실전배치하였다고 일제히 보도하였다. 작전능력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2013년 3월 24일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제1501군부대를 시찰하였는데, “그 군부대에서 자체로 연구제작한 첨단전투기술지재들을 보아주시였다”고 한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2012년 5월 23일 그 군부대를 찾아가 “현대전의 요구에 맞는 첨단전투기술기재들을 연구개발할 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는데, 그 과업을 받은 제1501군부대에서는 “그 어떤 전투정황 속에서도 적들의 급소를 무자비하게 타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현대적인 첨단전투기술기재들을 자체로 연구제작하는 성과를 이룩하였다”고 한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적진을 향해 명중탄을 날리며 맹렬히 돌진하는 모습이 선히 보이는 것만 같다”고 묘사한 그 첨단무기는, 북측 보도사진에 상층부 일부만 나타난 모습을 보면, 무인화된 고속미사일정인것으로 보인다. 이미 2011년 8월 초에 무인고속어뢰정을 실전배치한 북은 무인고속미사일정도 건조하였다.

위에 열거한 정보를 살펴보면, 인민군 해군무력은 연안해전에 최적화한 각종 함선을 고속기동화, 선체소형화 및 경량화, 화력집약화, 스텔스화하였고, 최근에는 현대식 무기개발의 최고 수준인 무인화 단계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그처럼 강력한 연안해전 해군무력을 건설한 나라는 북 이외에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남측 언론매체들은 위와 같은 사실을 외면하고 인민군 해군이 낡은 경비정이나 몇 척 가지고 있는 것처럼 왜곡해왔다. 북에서 그런 낡은 경비정은 실전에 쓸 함정이 아니라, 해양순찰과 어로지도에 쓰는 함정이다. 북에는 해양경찰이 따로 없으므로, 해군이 해경임무까지 맡아본다. 그러므로 북의 해양경찰급 함정만 보고 인민군 해군무력을 평가하면 너무 크게 오판하는 것이다.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의 추산에 따르면, 인민군 함대가 운용하는 각종 수상함은 동해함대에 약 470척, 서해함대에 약 300척이 배치되었다. 770척 수상함이 동해함대 19개 해군기지와 서해함대 7개 해군기지에 배치된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인민군 해군무력의 중추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잠수함대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을 기준으로 인민군 잠수함이 88척이었으니, 올해 2013년에는 90척이 넘었을 것이다. 인민군 잠수함대의 특징은 시속 370km의 초고속으로 13km 밖에 있는 적함을 격침하는 533mm 초공동어뢰(supercavitating torpedo)로 무장한 스텔스 잠수함들을 많이 보유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2012년 6월 17일 <자주민보>에 발표한 나의 글 ‘미 항공모함은 왜 동해에 들어가지 못할까?’(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9872)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또한 주목하는 것은, 배수량이 100,000t이 넘고, 함재기를 90대나 싣고 다니는 미국 해군의 니미츠급(Nimitz-class) 초대형 항공모함을 한 방에 격침시킬 폭발력 15킬로톤급 핵어뢰(nuclear torpedo)로 무장한 초강력 스텔스 잠수함이 실전배치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 2010년 12월 5일 보도에 따르면, 북은 2009년에 시작한 핵어뢰 개발사업을 2012년까지 완료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올해는 이미 실전배치하였을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군 함대는 구축함 15척, 초계함 21척, 미사일고속정 12척, 참수리급 고속정 75척을 합하여 모두 122척의 수상함을 실전배치하였고, 잠수함 12척을 실전배치하였다. 인민군 해군무력에 비해, 격차가 너무 커 보인다.

10시간 만에 끝날 해상전 시나리오

만일 실전상황에 돌입하는 경우, 인민군 해군무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의식하여 북상공격을 사실상 포기한 한국군 함대는 동해와 서해에서 해상방어진을 세 겹으로 쳐놓고 인민군 함대의 남하기동을 저지하려고 할 것이다. 한국군 함대의 해상방어진은 고속정대, 초계함대, 구축함대 순으로 배치해놓은 3중대형이다. 한반도 연안해전 시나리오를 예상하면 아래와 같다.

한반도 연안해전이 벌어지면 인민군 함대도 당연히 손실을 입겠지만, 700여 척 수상함들이 고속돌진과 화력집중으로 삼면공격을 해오는 인민군 함대의 압도적인 공세를 한국군 함대 122척이 막아내는 것은 누가 봐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한국군 함대는 미사일고속정 12척과 참수리급 고속정 75척으로 서해와 동해 최전방에 제1방어진을 칠 것이다. 그에 대응하여 인민군 함대는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비밀병기인 무인고속어뢰정 편대와 스텔스 고속정 편대를 선봉에 세워 제1방어진을 돌파할 것이다. 한국군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으면서 시속 90km로 나는 듯이 항해하는 스텔스 고속정 편대의 공격으로 한국군 함대의 제1방어진이 큰 혼란에 빠지면, 그 방어진을 강력한 화력집중전술로 격침시키는 타격임무는 40련장 122mm 방사포를 퍼붓는 막강한 화력을 갖추고 고속남하하는 고속방사포정 편대와 고속어뢰정 편대가 맡게 될 것이다.

인민군 함대의 선봉무력이 한국군 함대의 제1방어진을 격파하면, 한국군 초계함 21척이 구축한 제2방어진이 인민군 함대의 남하기동을 가로막을 것이다. 인민군 함대의 고속어뢰정 편대와 고속미사일정 편대는 고속기동전술과 화력집중전술로 한국군 함대의 제2방어진을 사면팔방에서 공격하게 된다. 노후한 초계함 21척이 구축한 제2방어진은, 고속정 87척이 구축한 제1방어진보다 더 취약하다. 한국군 함대의 노후한 초계함 21척은 인민군 고속어뢰정 편대의 중어뢰 공격과 인민군 고속미사일정 편대의 함대함 미사일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전멸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후한 초계함 21척이 구축한 제2방어진이 무너지면, 그 뒤에 구축함 15척이 구축한 마지막 제3방어진이 버티고 있다. 한국군 구축함 15척 가운데 4척은 미국 해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쓰다가 노후화되어 버리게 된 것을 넘겨받은 ‘구호물자’여서, 바다에 떠다니는 고철덩어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실전에서 작전능력을 발휘할 한국군 구축함은 11척이다.

시속 56km의 느린 속도로 기동하는 한국군 구축함 11척은 시속 80km로 민첩하게 기동하는 인민군 스텔스 고속미사일정 편대가 집중발사하는 사거리 120km의 초음속 함대함 미사일을 피하기 힘들다. 혹시 그 미사일타격을 용케 피해 살아남은 구축함 몇 척은 인민군 스텔스 고속어뢰정 편대가 발사하는 533mm 중어뢰를 맞고 격침될 것이다.

한미연합군 전투기들이 서해와 동해에 출동하여 남하기동하는 인민군 함대에 공대함 미사일을 발사하여 한국군 함대를 지원하지 않겠는가 하고 예상할 수 있지만, 북이 전면전을 개시하면 남측 공군기지들을 순식간에 미사일로 파괴하고, 특수전 병력이 기지포위공격으로 기지 자체를 점령하려고 할 것인데, 그처럼 격렬한 이중공격을 용케 피해 출격한 한미연합군 전투기들은 비좁은 한반도 상공에서 인민군 전투기들과 상상을 초월한 공중전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한미연합군 전투기들이 전멸위험에 빠진 한국군 함대를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와 같은 한반도 해전시나리오를 예상하면, 서해와 동해에서 벌어질 해상전에서 한국군 수상함 122척은 개전시각으로부터 10시간 안에 전부 격침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격렬한 해전 중에 인민군 수상함도 일부 격침될 것이다. 그러나 북은 그들이 말하는 ‘정의의 조국통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으므로, 수상함 일부가 격침당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민군 함대와 맞붙은 해전에서 한국군 함대의 수상함들이 거의 궤멸되는 것과 달리, 한국군 잠수함 12척은 쉽게 격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 잠수함 12척은 90척이 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잠수함대를 상대로 마지막 전투를 해야 한다. 잠수함을 격침시킬 가장 위력적인 무기는 잠수함이다. 인민군 잠수함들은 한국군 잠수함기지 바깥이나 한국군 잠수함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미리 사전침투하여 엔진을 끄고 바다 밑바닥에 내려앉는 착저매복전술로 한국군 잠수함을 격침시키려 할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한국군 잠수함 12척은 인민군 대잠헬기의 추적망과 인민군 수상함 편대의 폭뢰투하망을 뚫고 살아남아야 한다.

잠수함이 잠항할 때 발생하는 소음을 줄이지 못한 한국군 함대의 손원일급 잠수함 3척은 살아남기 힘들지만, 그보다 신형인 장보고급 잠수함은 생존율이 높기 때문에 9척 가운데 몇 척이 끝까지 살아남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살아남은 잠수함은 전쟁이 이미 끝난 것을 알지 못한 채 캄캄한 바다 속을 헤매고 다니게 될 것이다.

위에서 논한 전쟁시나리오를 예상하면, 한반도 지상전과 달리 한반도 해상전은 10시간 만에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초단기해상전이 인민군 함대의 승리로 끝나자마자, 인민군 륙전대(남측에서는 해병대)가 공기부양정과 상륙함을 타고 고속으로 남하하여 남측 후방지역 해안 곳곳에 상륙할 것이다. 특히 서해에서 고속공기부양정을 타고 남하한 인민군 륙전대 정예병력은 아라뱃길을 통해 서울 도심으로 직행하고, 동해에서 고속공기부양정을 타고 남하한 인민군 륙전대 정예병력은 강원도 동해시에 상륙한 뒤에 동해안 7번 국도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직행할 것으로 보인다. 고속공기부양정과 상륙함은 북측 항구에서부터 각각 인천과 동해시까지 계속 왕복하면서 인민군 륙전대 병력을 남측에 실어나를 것이다. 인민군 동해함대와 서해함대에는 상륙함 131척과 공기부양정 136척이 즉각출동을 대기하고 있다.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3년 3월 25일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동해안에서 인민군 해군 제597대련합부대 상륙훈련을 지도하였다. 제597대련합부대는 동해함대로 알려졌는데, 상륙훈련에 참가한 륙전대 병력은 공기부양정을 타고 “해안으로 련이어 벼락같이 돌입”하였고, “해안에 등륙한 일당백 전투원들은 평시에 련마한 전투동작으로 <적>진을 향해 비호같이 달려들었다”고 한다. 실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실시한 상륙연습으로 보인다.(2013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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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미사일 위기’에 비춰본 한반도 위기

먼저 ‘큰 나라’에 도전한 ‘작은 나라’ 쿠바 1962, 그리고 북한 2013

이정무 기자 jmlee@vop.co.kr
입력 2013-04-04 17:39:40l수정 2013-04-04 21:54:30

 

미국의 유력지인 USA투데이는 2일자에서 군사전문가인 미국 랜드연구소의 블루스 베넷 선임연구원을 인용해 북한의 위협과 이에 미국이 반응하는 태도가 “쿠바 미사일 위기와 비슷하다”고 보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옛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려 하면서 발생했던 냉전시대의 최대 전쟁위기였다.

쿠바는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친미 정권을 몰아낸 이후 미국과 국교가 단절됐다. 케네디 행정부는 2년 뒤인 1961년에는 쿠바인 망명자들을 주축으로 해서 이른바 ‘피그만 상륙작전’을 펼쳤으나 카스트로 정권 전복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국에 대한 쿠바의 역공이었다. 카스트로는 소련과 손잡고 핵미사일을 도입하기 위한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은 이를 포착하자 쿠바를 미 군함으로 봉쇄한 후, 미사일을 싣고 오던 소련 화물선과 대치했다. 미국 내 강경파들은 쿠바에 대한 공습을 주장하기도 했다.

위기가 지속되면서 강온을 오가던 케네디는 결국 소련과의 타협을 선택했다. 소련도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는 대신 화물선을 되돌림으로써 쿠바 미사일 위기는 12일 만에 마무리됐다. (자세한 내용은 '간추린 쿠바 미사일 위기' 참조)

미국, ‘전략적 인내’ 대신 무력 시위
 

미국이 주도한 대북조치

미국이 주도한 대북조치ⓒ민중의소리 유동수 디자인실장

미국이 이번 위기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여러 당국자들의 말로 표현되고 있다.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은 3일 “그들(북한)은 지금 핵 능력(nuclear capacity)을 갖고 있으며, 미사일운반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면서 “북한의 위협은 괌에 있는 우리 기지를 직접 겨냥했고, 하와이와 본토 서부해안을 위협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또 B-52, F-22 스텔스 전투기, 핵추진 잠수함 샤이엔 등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무기들을 한반도 주변에서 공개함으로써 ‘무력시위’를 벌였다. 미 국방부는 또 몇 주일 내에 고고도방어체계(THAAD)를 괌에 배치할 예정이다. 북의 무력시위에 더 큰 무력시위로 맞선 것인데, 이는 그 동안 오바마 행정부가 견지해 온 ‘전략적 인내’ 노선과는 다르다.

유럽과는 달리 자국 내에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미국은 본토에 대한 공격 가능성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다룬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역시 미국으로부터 140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쿠바에 적대국의 핵미사일이 배치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더욱이 북한은 당시 쿠바처럼 ‘국가 차원에서’ 반미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군사적 능력 문제는 미국으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공습을 주장하는 매파와 세계대전을 우려해 소련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비둘기파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2기 오바마 행정부에서 가장 큰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먼저 ‘큰 나라’에 도전한 ‘작은 나라’ 북한

쿠바는 미국에 비교할 수 없는 ‘작은 나라’다. 북한 역시 미국에 비할 수 없는 ‘작은 나라’다. 미사일 위기 전후로 쿠바와 미국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격렬하게 대립했던 것도 북미 사이의 오랜 정치군사적 대립과 비견할 만하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북한은 이스라엘이나 인도, 파키스탄과 같은 다른 핵개발국과 전혀 다르다.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지원 혹은 비적대적인 관계 위에서 핵무기를 개발한 반면, 북한은 처음부터 미국을 겨냥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해왔다.

‘작은 나라’가 먼저 ‘큰 나라’에게 도전했다는 것도 쿠바 미사일 위기와 현재의 한반도 위기가 비슷한 점이다. 이럴 때 ‘작은 나라’의 행동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상황 변화’의 의지다. 상대를 압도할 수는 없지만 상대에게 치명적 피해를 줄 수 있음을 보여줘서, ‘일방적 약자’의 위치를 벗어나보겠다는 것이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지난 달 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연설에서 “(미국이) 세계최대의 핵보유국이고 항시적으로 핵위협을 가해”왔지만, “(상대가) 지구상 그 어디에 있든 핵무기로 정밀 타격할 수 있는 능력만 든든히 갖추면 그 어떤 침략자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 제1비서는 또 “정밀화, 소형화된 핵무기들과 그 운반수단들을 더 많이 만들며 핵무기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나가겠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대외적으로는 ‘선제핵공격’을 거론하지만 실제에서는 핵 보유고를 늘리는 데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 방향으로 중,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첨예하고 장기적인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최종적으로 소련과의 타협을 선택했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미사일 기지 건설 중단을 맞바꾼 것이다. 이번에 북미 간에 조성된 위기에서 이런 ‘맞바꾸기’는 가능할까? 현재로서는 낙관하기 어렵다.

우선 북한의 핵 보유 의사가 완고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달 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핵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재확인했다. 탈냉전 이래 지속된 미국의 절대적 우위 상황을 바꿔보겠다는 북한의 의지는 ‘전쟁 불사’를 호언할 정도다. 1962년 당시 쿠바는 소련이라는 후견국이 있었지만 지금 북한에게는 미국에 비견할 수 있는 후견국이 없다. 한 발 물러설 여지가 적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미국은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을 용인할 수 있을까? 만약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논리적으로는 북한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는 방법과 더 큰 ‘대가’를 치르고 북한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방법만 남게 된다. 미국이 이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전면전과 국지전의 버튼은 누가?' 참조)

미국의 선택이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북미 양측의 긴장은 더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전쟁이건 협상이건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행동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번 한반도 위기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비해 첨예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장기화될 가능성이 점쳐지는 것은 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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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위기 '정점'... 지금이 미국에 "NO"라고 말할 때

[주장] 박근혜 정부를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조언

13.04.04 17:53l최종 업데이트 13.04.04 17:53l

 

 

박근혜 대통령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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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와 함께 시작된 박근혜 정부의 총체적 위기. 예상보다 빠르고, 파괴적이다. 국정수행 지지율 41%, 역대 대통령들 임기 말 지지율이다. 부패, 부정으로 인선과 동시에 낙마하기 시작한 국무위원들, 17초 '하도급' 사과 성명으로 대표되는 소통 부재, 대대적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복지 공약. 그 중 전쟁 위기는 가히 '백미'라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위기 원인은 크게 내부 요인과 외부 요인으로 나눌 수 있다. 민심이반을 촉발하는 측근들의 '부정부패', 보수우익 진영마저 불만 갖게 만드는 '유신(維新)형 불통 리더십',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빈부격차, 민생파탄'은 내부 요인이다. 그리고 갈수록 노골화되는 '갑을(甲乙) 관계형 한미동맹', 극한대결로 치닫는 '남북관계 파탄', 한층 악화된 '미 국가재정위기', 동아시아 분쟁 부추기는 '일본 극우화'가 외부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두 요인들은 서로 상호보조를 맞춰가며 위기를 심화하고 있다.

2일 보도된 <연합뉴스> 기사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미국 정부는 한국 쇠고기시장을 전면개방시킨다는 방침을 밝혔으며 동시에 미 무역대표부(USTR) 이름으로 발간된 <2013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비합리적이고 불필요한 규제가 외국 금융업체들을 곤란하게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미 국가재정위기'가 '갑을관계형 한미동맹'을 통해 한국의 '민생파탄'을 가속화하는 전형적 사례다.

현재 박근혜 정부를 둘러싼 채 벌어지는 외부 위험 요인들의 증폭은 현 정권이 단순히 '실패한 정권'으로 기록되는 것을 넘어 국가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는 공포마저 들게 할 정도로 그 양상이 대단히 파괴적이다. 외부 위기 요인들은 현재 상호 복합적 작용을 통해 한반도를 '전쟁위기'라는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또한 이 모든 요인들은 절묘하게도 전통적 우방 미국과 연관되어 있다.

첨단무기 내세우는 미국의 '속내'... 믿었다간 큰일

따라서 박근혜 정부가 현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한미관계를 진지하게 돌아봐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외부 요인들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첫째, 미국 국가재정위기의 심화다. 미국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양적 완화조치'로 대변되는 달러 방출을 통해 경제를 지탱하려 했으나 폭증하는 연방정부의 빚은 결국 미국을 예산자동삭감 '시퀘스터' 상황까지 내몰았다. 최대 20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들이 무급휴가로 사실상 해고당하게 되었으며 미국 내 경제시책들이 차례로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강력한 경제적 잠재력을 가진 동북아를 떠난다는 것은 세계 달러 패권을 영원히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다. 동북아에는 미국과 경제정책 궤를 함께하는 일본이 있으며 미국 연방정부 채권의 최대구매자인 중국이 있다.

결국 미국이 대북제제를 중단하고 위기고조 행위를 멈춘다는 것은 미 달러경제패권의 핵심 기둥을 포기하는 것으로, 미국은 설사 본토가 핵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대두되더라도 순순히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경제위기 돌파를 위해 선택한 '아시아로의 귀환' 정책의 본질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세계 패권국이 외부의 공격가능성 때문에 스스로 패권을 내려놓은 전례는 없다. 독점자본을 주축으로 한 역대 패권 국가들은 합리성이 거세된 무모한 침략과 도발을 통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곤 했다. 히틀러의 독일과 히로히토의 일본이 대표적 사례다. 이는 패권 국가들을 유지할 물질적 토대가 사실상 군사 침략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인데 현재 미국이 처해 있는 상황이 이와 같다. 미국은 인디언을 학살하며 건설된 이래 520년 동안 2년 이상 전쟁을 중단한 적이 한 차례도 없다.

둘째, 점차 노골화되고 있는 갑을관계 형태의 한미동맹이다. 미국제 첨단무기가 국내에 들어와 뽐내듯 연습하는 현재의 '핵우산' 정책은 이러한 한미동맹이 결국엔 우리의 목줄을 겨누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B-52 출격 하루 전 서울을 방문한 미 국방부 부장관은 이례적으로 B-52 폭격훈련 사실을 밝히며 첨단 무기의 위대성을 설파했다. 하지만 한 발만 쏘아도 수백만 명이 핵 참화 속에서 타죽게 되는 전략핵 타격의 피해는 남한이라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인민군의 요격미사일에 맞아 격추되거나 방해전파에라도 걸려 방향을 잃은 미사일이 한반도 남쪽에 떨어진다면 단 한 발로도 도시 10개 이상이 박살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핵우산 정책의 본질은 '우방국에 대한 보호'가 아닌 '자국 무기의 실험'과 '판매를 통한 이권 획득'에 있다. 이는 80년 전 일본이 '미영귀축(美英鬼畜)의 위협'을 막고, 이 땅에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한다는 미명 아래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뒤, 동북아 패권 확장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았던 것의 재판에 불과하다.

온갖 결함에도 불구하고 새로 구입할 차세대 전투기로 거론되는 미국제 F-35, 핵우산 강화의 명목으로 도입한다는 미국산 벙커버스터는 그 구입비용만도 천문학적이며 실제 국방력 강화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역으로 우리 국방력을 무장 해제시키는 길로 이끌게 된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F-35의 경우 구매에 총 17조 원이 소모되는데 이는 2013년 국방예산의 절반이며 공군의 5년간 무기도입 예산 전부에 해당한다. 구입 후에는 30년간 운영비로 30~90조 원을 조달해야 하며, 만약 재정난으로 인해 차기전투기사업이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공군 전력은 2018년에 절반으로 줄어드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첨단 고가 무기 강매에 의한 자체적 국방력의 '구조적 해체'를 의미한다.

최근 5년간 미국이 한국에 '무기를 팔아 벌어들인 돈'보다 '정비비로 벌어들인 돈'이 무려 5배나 된다는 미 국무부 2012년 연례 보고서는 갑을관계 형태의 한미동맹에 의한 핵우산 정책이 결국은 우리의 국방력을 와해시키며 오직 미국 군수업체의 배만 불리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실제로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2일 정례 브리핑에서 잇따른 첨단무기 배치에 대해 "서울에게 가해지는 '독자행동'의 압력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또한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반응은 북한의 반응이 아니다. 주로 동맹국들이 미국에게 의지해 군사충돌을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이는 첨단무기 찬양 일색인 언론 보도에 홀려 현실을 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게 해준다.

개성공단 폐쇄 수순... 북-미 전쟁은 '언제 하느냐'의 문제
 

▲ 합참 대항군 전쟁수행모의본부, 키리졸브 연습에 첫 가동 3월 15일 합동참모본부는 2013 키리졸브 연습기간 중 대항군 전쟁수행모의본부(경기도 수원)를 공개 했다. 이번 연습에 한국측 230여명, 미국측 30여명 등 총 260여명의 중원전력이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첫 가동에 들어갔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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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일본의 군국주의 야망이다. 1990년부터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일본 경기의 장기 침체 현상은 현실 자본주의 쇠락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지금도 그 회복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는 '쇼와 시대 부흥'을 기치로 내건 우익 아베 정권이 들어섰다 하더라도 변치 않는 사실로, 결국 아베 정권은 이 국면을 돌파하고,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한국을 대상으로 각종 도발 및 정치적 행동들을 벌일 것이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 보수우익들이 벌이고 있는 '북한에 대한 강경 발언', 통합진보당 의원들에 대한 자격심사를 필두로 진행되고 있는 각종 '종북몰이'와 유사한 수법으로 내부의 불만을 외부의 약자 및 정적에게 전가하는 우익 진영 전통의 위기 모면 방식이다. "한국 여자를 강간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는 혐한 시위의 확산 및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한 교과서 개정 증가 등은 이미 일본이 한국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들을 개시했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러한 일본의 우경화가 우리나라에 실질적, 제도적 피해까지 미칠 지경까지 왔다는 데 있다. 2012년 여름, 뜨거운 논란이 되었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추진은 일본의 식민지 강점에 대한 사죄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 민족적 분노가 여전한 상황에서 '일본군'과 '군사정보'를 교류하겠다는 반민족적 발상으로, 이명박 정부의 김관진 장관이 이를 비밀리에 추진하다 발각되어 결국 무산된 바가 있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적 반감에도 불구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추진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 정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을 더욱 견고하게 다지는 것이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을 계기로 급부상한 김관진 장관은 군부의 대표적 매파이자 친미파로 이 협상을 주도한 장본인이다.

문제는 작년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매개로 한국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하다 실패한 '일본의 한반도 군사개입'이 지난달 체결된 '한미 국지도발 공동대비계획'을 통해 덜컥 실현됐다는 점이다. 마치 미국이 북한의 국지도발 관련해 크게 시혜를 베푼 것처럼 보도된 이 협정은 사실상 '미국이 작전통제권 전체를 행사하게 된다'는 군사주권의 확장된 이양을 뜻하는 것으로, 일본과의 연관을 부담스러워한 한국의 입장을 배제한 채 국지도발을 핑계로 주일미군 개입 조항을 넣음으로서 미국의 전략적 숙원이 달성됐음을 의미한다.

이제 한반도는 우경화하는 일본과 원치 않는 상황에서도 군사적으로 엮이게 됐으며 앞으로 발생할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입지가 좁아져버렸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전범국가 일본을 다루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협정'에서 일본의 요청에 따라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서 독도를 제외시켰으며, 오히려 무인도로 만들어달라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한국인이 살고 있던 독도를 총 세 차례 폭격, '30여 척'의 배와 '150여 명'의 어민들을 사살해 무인도로 만들어버린 전력을 가지고 있다.

각 국의 손익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국제 관계에서 독도 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국이 한국의 손을 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한국전쟁은 신이 내린 전쟁"이라 말한 요시다 전 일본 수상의 말처럼 한국전쟁 후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룩한 일본은 장기 저성장의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한반도 위기를 더욱 부추길 것이 분명하다.

넷째,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다. 북한이 개성공단의 입출경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개성공단은 단순한 경제협력지구의 의미를 넘어 남북을 잇는 '평화유지'의 최후 보루였다. 개성공단이 폐쇄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는 이 같은 결정은 북한과 미국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박근혜 정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북한에 김정은 지도부가 들어선 이후 눈여겨볼 만한 지점은, 북한이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강력하게 비난하였지만 박근혜 정부를 향해서는 지금까지도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김정은의 북한이 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체제보장'과 '평화협정', '경제발전'이다. 60년 넘게 이어지는 미국의 대북 압박 정책을 이제는 청산하고, 한반도에서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 경제 부흥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워딩만 외쳤을 뿐 남북간의 대화를 위한 그 어떤 행동도 보이고 있지 않다. 또한 북한의 태도 변화만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도발에는 응징이라는 호전적 언사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이번 개성공단 사태에서 보여준 정부의 태도는 외교의 기본에도 못 미치는 함량미달 대응으로 도대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가지고 있는지, 한반도 안정에 관심이 과연 있는지 의심을 살 정도이다. 2012년 7월에 발간된 중국경제주간에 따르면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의 월급은 11만~17만 원, 중국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의 월급은 평균 27만 원이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개설한 목적이 '돈보다 평화와 교류'라는 데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다. 개성공단이 문 닫을 경우 한국 기업이 입는 피해는 2012년 기준, 5164억 원으로 북한이 개성공단을 통해 얻는 수익인 900억 원의 6배에나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위협은 하면서 달러박스인 개성공단은 유지하려 한다"는 조롱을 일삼고, 막상 개성공단 출입경을 통제하자 국가안보장관회의를 긴급 소집해 한다는 말이 "우리 국민을 억류할 경우 군사적 대응을 하겠다"는 정도이다. 북한을 그리도 모른단 말인가? 북한은 북쪽으로의 출입만 막았을 뿐 남아 있는 남측 인력들을 내려가라고 하는 실정이다.

박근혜 정부에게 남은 카드는 바로 '대북 평화특사'뿐

이렇듯 무지에 기초하고, 미국의 입장에 보조만 맞추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은 마치 불에 기름을 부은 형국으로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키고 있다. 북한은 4일을 기준으로 미국과 펜타곤 앞에 선전포고를 한 상황이며 '전쟁이 나느냐 마느냐'가 아닌 '언제 나느냐'만 남아 있다고 발언하였다. 태국과 필리핀은 한국 내 자국민 소개 계획을 수립, 주의 발령을 내렸으며 북한 내 ICBM 이동 움직임을 포착한 중국은 북중 국경지대의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경계 태세를 내린 상황이다. 누가 보아도 한반도는 전쟁전야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내외의 위험 요인들로 인해 사면초가에 몰려 있는 박근혜 정부에게도 기회는 있다. 알렉산더의 일화가 말해주듯 얽히고설킨 실타래는 일일이 푸는 것보다 문제의 중심을 잡고 한 번에 내려치는 것이 때로는 효과적이다. 박근혜 정부와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위기의 중심은 현재 초유의 '전쟁 위기'로 표면화 되고 있으며 그 이면에 '미국이라는 우방'이 자리 잡고 있다.

감정적 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경각에 달린 정권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에 숨통을 틔우자는 실리적 제안을 하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그러했듯 박근혜 대통령 역시 당선 직후 가장 먼저 미국에 '정책협의대표단' 이름으로 정권의 핵심 인사들을 파견하였다. 그만큼 미국과의 친선을 중시한다는 의미로 박근혜 정권의 입장에서 쉽사리 미국에 반하는 행보를 벌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운 좋게도 박근혜 정권 앞에는 4월 '한미 원자력 협정'과 5월 '한미 정상회담'이 놓여 있다. 또한 한미 원자력 협정은 핵 재처리를 불허한다는 미국의 일방적 통보 때문에 현재 교착 상태에 빠져 있으며 박근혜 정권도 이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역시 이 문제 관련하여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이례적으로 존 케리(John F. Kerry) 국무장관 대신 톰 도닐런(Thomas E. Donilon)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파견하여 축하의 격을 떨어뜨리는 등 양국 관계에 훈풍만 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잇따라 터진 주한미군 강력 범죄와 그로 인해 높아진 국민적 반감도 박근혜 정권의 대미 협상력을 제고할 계기가 된다. 게다가 한국 문제 관련하여 미국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APARC)는 오바마 행정부가 새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에게 '북한 문제와 관련한 이니셔티브(주도권)를 넘겨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북한 문제와 한국 리더십의 필요성>이란 정책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 국무부와 의회에 제출한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반드시 잘 활용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한미 정상회담 전인 4월 중순, 대북 특사를 파견하여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협의를 진행하는 것과 동시에 '한-미 원자력 협정에서의 고압적 태도', '고가의 무기 강매', '주한미군 범죄', '한반도 위기 고조'와 관련하여 미국에 냉정과 자제를 촉구하며 동맹 관계에 있어서 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현재의 위기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평생을 공산주의 반대 이념을 가지고 살아온 백범 김구 선생도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일갈하며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통일을 위한 남북지도자 연석회의 참가를 위해 38선을 넘어 방북하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김구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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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아마겟돈' 출구는…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4/05 08:13
  • 수정일
    2013/04/05 08:1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정욱식의 북핵이야기] 한미 외교적 노력했는데 北이 도발?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4-04 오후 2:31:29

 

북한의 벼랑끝 전술과 미국의 무력시위, 그리고 남북한 사이의 설전(舌戰)이 악순환을 그리면서 한반도에 극도의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다. 위기 지수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 위기에서 벗어날 출구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도 위기는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양상이 다르다. 과거에는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갈등의 직접 당사자들이 대화에 나서면서 위기를 수습하곤 했다. 당사자들의 대화가 여의치 않을 때에는 중재자가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화는 없고 대결만 난무하고 있다. 마땅한 중재자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의 위기가 더욱 심각하게 와 닿는 까닭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외교 무용론'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비핵화 의제를 협상 테이블에서 치워버리면서 '전쟁이냐, 평화냐 양자택일하라'며 한국과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면서도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하지 않겠다"며 모호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북한이 먼저 도발적 언행을 중단하고 비핵화의 진정성을 보여야 대화에 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서 달성해야 할 목표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박근혜 정부 역시 미국의 입장과 별 차이는 없다.

대북 외교의 실패, 원인은?

대북 외교가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을 '한미 양국이 충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는데 북한이 도발로 응수했다'는 일방적 인식에 두어서는 안 된다. 북한도 합의를 위반했지만, 한국과 미국도 북한과의 합의를 위반한 사례는 많다. 또한 합의와 이행에 대한 해석의 차이 역시 다반사로 일어났다. 그 차이를 대화를 통해 해소하려는 노력보다는 한미 양국은 대북 제재로, 북한은 도발적 언행으로 응수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오히려 대북 외교의 실패 원인은 외교의 결핍에서 찾아야 한다. 외교의 결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평화협정 문제이다.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에서는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기 위해 별도의 포럼을 열기로 했지만, 오늘날까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북한은 여러 차례에 걸쳐 평화협정 논의를 요구했지만, 한미 양국은 철저하게 이를 외면했다. 오늘날 북한의 극단적인 언행의 배경에는 이에 대한 강한 불만이 깔려 있기도 하다.
 

▲ 북핵문제 해결의 이정표를 세운것으로 평가받는 9.19 공동성명이 나온지 7년이 지났지만 북핵 문제 해결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사진은 성명 합의 직후 6자회담 참가국 수석대표들이 손을 맞잡은 모습. 왼쪽부터 당시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알렉산드로 알렉세예프 러시아 외무부 차관. ⓒ연합뉴스


6자회담도 2008년 12월 결렬 이후 한 차례도 열리지 않고 있다. 당시 6자회담이 결렬된 데에도 한-미-일의 책임이 크다. 세 나라는 기존 합의에도 없었던 북한의 핵 신고서에 대한 검증을 요구했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북한이 이를 거부하면서 결렬된 것이다. 이후 6자회담은 산소마스크를 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9년에는 북한이, 2010년 이후에는 한국과 미국이 6자회담 개최를 꺼려했다. 남북대화는 사실상 완전히 단절됐고, 북미 대화도 별로 없었다. 이 사이에 북한의 핵과 로켓 능력은 크게 강화되어왔다.

지난 5년간 한국과 미국이 대북 외교에 소극적이었던 본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뇌 관련 질환으로 쓰러지자 '북한은 오래 못 갈 것'이라며 흡수통일 망상에 사로잡혔다. 출범 직후 대북 포용에 적극 나설 조짐을 보였던 오바마 행정부는 2009년 4월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자, 한-미-일 3각 관계 강화로 방향을 선회했다.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대북 협상에 나서느니, MB 정부는 흡수통일을 추진하고, 오바마 행정부는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김정은과의 '화학 반응' 일으켜야

북한의 도발적인 언행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중차대한 문제가 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금융제재로 응답하라(Answer North Korea with financial sanctions)"고 썼다. 실제로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대북 금융제재가 강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방코델타이시아(BDA)식 제재를 통해 북한 엘리트의 돈줄을 옥죄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BDA의 역효과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만약 미국이 BDA 제재를 부과하지 않았더라면, 9.19 공동성명의 이행은 대단히 빨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대북 제재와 무력시위는 북한의 언행을 변화시키는데 별다른 할 효과가 없다. 북한 지도부가 아픔을 느낄 만큼 압박이 강할 지도 의문이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아픔을 느낀 북한 지도부는 굴복하기보다는 더욱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기 때문이다. 북한의 움켜쥔 주먹을 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도 함께 주먹을 펴겠다는 확고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미국이 B-52, B-2, F-22 등 막강한 무력을 동원하는 방식보다 특사 파견 등 고위급 회담을 재개해 평화협정을 체결할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앞으로 한국과 미국의 외교는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을 직접 겨냥해야 한다. 집단 사고(group thinking)에 익숙한 북한 체제의 특성상 북한의 언행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최고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의 핵군비경쟁에 정점에 달했던 1980년대 초중반, '글로벌 아마겟돈', '핵 겨울(nuclear winter)' 단어가 지구촌을 배회한 적이 있었다.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불렀던 도날드 레이건 대통령과 미국이 핵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한 소련 지도부 사이의 불신도 극에 달했다. 그러나 레이건의 변신과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에 힘입어 두 나라는 총성 한방 울리지 않고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두 지도자 사이의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통한 '화학적 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코리아 아마겟돈'을 막을 수 있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김정은과의 화학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외교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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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니머스, 조중동도'우리민족끼리' 회원으로 확인

 


해킹그룹으로 유명한 '어나니머스'가 북한 대남선전용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해킹한 뒤, 회원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했습니다. 어나니머스는 4일 북한 '우리민족끼리'에 회원 정보 9000여개를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아이디,성별,이름,비밀번호,이메일 주소 등이 모두 공개되어 있습니다.

어나니머스는 4월 2일 '북한의 인트라넷, 메일 서버와 우리민족끼리 사이트를 해킹하여 회원 계정 1만5천개등 많은 데이터를 확보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또한, 어나니머스는 다음과 같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사이버 전쟁을 불사하겠다'며 지속적인 북한 사이트 해킹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 북한 정부의 핵 개발 및 핵위협 중단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 사임
▲ 즉각적인 자유-직접 민주주의 시행
▲ 모든 시민의 정부 통제나 검열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인터넷 사용

'어나니머스는 누구인가?'

북한 사이트를 해킹한 어나니머스는 국제적인 해킹 그룹입니다. 일부 국가의 해커들이 아니라 전 세계 해커들이 익명을 사용해 활동하는 대표적인 해커그룹 중의 하나입니다.

2011년 아동포르노 사이트를 해킹해 사용자들의 명단을 FBI에 넘기기는 식으로 정부가 영장이 없이 할 수 없는 일을 해킹을 통해 정보를 얻어 범죄 행위를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정부기관이나 페이팔,뱅크오브아메리카,소니 등의 기업도 해킹해 FBI와 인터폴의 수사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 인터넷 검열을 반대하고 있는 '어나니머스'

 



어나니머스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중국 정부의 자국 인터넷 검열에 항의, 중국 정부 웹사이트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인터넷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운동도 전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번 북한 대남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공격하면서 북한에 '모든 시민의 검열 없는 인터넷 사용'을 요구사항으로 내걸기도 했습니다.

해킹그룹 '어나니머스'에 대한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인터넷 검열과 같은 부분은 '아이엠피터'도 필요한 부분이라 동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해킹 자체를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습니다.

' 조중동도 종북세력으로 국가보안법 처벌받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정부의 승인 없이 북한 주민을 접촉하거나 방북하는 행위,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거나 가입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을 받습니다. 국가보안법은 워낙 범위가 넓어 북한과 관련한 정보를 얻는 행위 자체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북한 대남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한국에서는 접속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북한의 공식적인 웹사이트를 보지 못합니다. 정부에서 남한에서 북한 사이트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한에 대한 자료가 필요한 언론사나 연구소, 대학에서는 우회 아이피를 이용해 북한 사이트에 접속하기도 합니다.

이번 '우리민족끼리'에 회원으로 등록된 사람들이 모두 국가보안법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일부 보수언론의 기사도 있지만, 사실 북한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했다고 무조건 국가보안법의 처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런 논리라면 '우리민족끼리' 회원에 가입한 조중동 메일 사용자도 국가보안법의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나니머스가 공개한 '우리민족끼리'에 가입한 회원 명단을 보면 한나라당과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의 메일 주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북한 대남선전 사이트에 가입한 사람을 모두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거나 이들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한다면 조선,중앙,동아일보도 모두 '종북세력'이자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으로 회원에 가입했다고 해서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북한에 대한 정보를 무슨 이유로 수집했는지에 대한 과정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학술적인 목적이나 취재, 그리고 단순 관심으로 '우리민족끼리' 사이트에 회원에 가입한 경우는 국가보안법 처벌 대상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민족끼리'에 나온 글과 자료를 다른 곳에 퍼트리거나 글을 찬양하는 행위를 반복했다면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나니머스가 공개한 '우리민족끼리'에 회원 리스트에 있다고 이들을 무조건 처벌하거나 '종북세력' '간첩'으로 낙인찍을 수는 없습니다.

' 어나니머스의 북한 해킹으로 발생한 억울한 피해자들'

어나니머스의 '우리민족끼리' 회원 명단이 공개되자,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일베'에서는 회원 명단에 올라온 사람들을 '죄수번호'라 부르며, 이들에 대한 신상털기를 시작했습니다.

 

 

▲일간베스트에 올라온 죄수번호 관련 글목록. 출처:일간베스트 캡처 이미지.

 

일간베스트 (일베)에는 어나니머스가 공개한 회원명단에 나온 메일주소를 근거로 구글링을 시작해 이들이 '종북세력'이고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베가 주장하는 '우리민족끼리' 회원 자체가 '종북세력'이나 '간첩'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민족끼리 회원 명단에 들어있다고 본인이 가입했다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끼리 회원가입 양식, 주민등록번호 대신에 생년월일과 메일주소만 있다. 출처:일간베스트 캡처 이미지.

 

'우리민족끼리' 사이트 회원가입 양식을 보면 이름과 생년월일,전화번호,이메일 주소만 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인터넷을 검색하면 이름과 메일 주소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과거 한국에서 수차례 해킹 사건이 일어나 금융정보와 주소,실제 휴대폰 번호까지 돌아다니고 있으며, 메일주소와 이름이 담긴 명단은 마케팅 사이트에 가보면 너무 간단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민족끼리' 회원이라고 등록된 메일 주소와 이름이 동일하다고 그 사람이 직접 우리민족끼리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우리민족끼리 사이트에 회원 명단에 있다고 일베에서는 실제 전화번호와 학교, 사진까지 버젓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리민족끼리 회원 명단에 있던 사람을 대상으로 이뤄진 일베 신상털기로 공개된 개인 신상정보. 출처:일간베스트 캡처 이미지.

 

일베 사이트에서는 '우리민족끼리' 회원 명단에 있던 메일 주소를 근거로 이들의 싸이월드,SNS를 공개하면서 얼굴이 노출된 사진을 올리거나, 과거 게시판 등에 올렸던 글을 토대로 휴대폰 번호까지 공개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메일주소가 왜 '우리민족끼리' 회원 명단에 있는지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일베 유저들은 저들을 무조건 '간첩'이나 '종북세력'이라고 규정하는데 그 이유들을 보면 단순히 '전남대'에 다닌다는 식의 무분별하고 어처구니없는 사례가 많습니다.

특히 사진뿐만 아니라 과거 평범한 사이트에 올렸던 게시글을 그대로 올리면서 휴대폰 번호를 공개, '카톡으로 연락해라'식의 2차 피해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민족끼리 회원 명단에 올라온 사람을 국정원에 신고했다고 밝힌 일베 게시물. 출처:일간베스크 캡처 이미지.

 


일베 유저들은 신상털기에 그치지 않고 이들을 국정원에 갑첩,좌익사범으로 신고하고 있는데, 그들이 신고했다면 국정원은 그런 빌미를 계기로 그들을 조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메일 주소를 도용당한 사람들은 억울한 3차 피해까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민족끼리' 회원 명단에 올라온 사람들이 단순히 명의를 도용당한 사람인지, 진짜 사이트에 가입했다고 해도 그것이 단순 관심이나 학술적인 이유에서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식의 '신상털기'는 철저히 개인의 인권을 유린하고 폭력에 가까운 행위입니다.

 

Enjoy these few records as a proof of our access to your systems (random innocent citizens, collateral damage, because they were stupid enough to choose idiot passwords), we got all over 15k membership records of http://www.uriminzokkiri.com and many more.
(어나니머스 성명서에 나온 무고한 민간인 피해에 대한 문구, 비밀번호 해킹으로 명의가 도용됐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다)


진짜 '자유민주주의'에는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고 인권을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이런 행동이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다시는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일보는 4월 5일자 신문 1면에 '우리민족끼리' 회원으로 통진당,전교조 회원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마치 자신들은 회원 명단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선,중앙,동아,한나라당도 엄연히 '우리민족끼리' 회원 명단에 있습니다.

철저히 이기적이며 왜곡된 편파적인 기사와 무분별한 신상털기와 공안 수사는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는 발생하기 어렵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며 자행되는 '인권침해'를 오히려 수사 당국이 수사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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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상처입은 '레미제라블' 십자가의 길에서 눈물 흘리다

4.3 상처입은 '레미제라블' 십자가의 길에서 눈물 흘리다

 
조현 2013. 04. 04
조회수 69추천수 0
 

부활절 앞둔 제주 4·3평화공원서
천주교 제주교구 ‘십자가의 길’ 공연
사제와 유가족 등 1천여명 함께해
 
군인 총에 숨진 소년의 죽음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아픔 담아
“비극의 기억, 교훈으로 끌어내야”
 
 
43.jpg
*지난달 29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천주교 제주교구 청소년사목위원회가 ‘십자가의 길’ 공연을 펼치고 있다. 예수의 고난이 1948년 4·3 당시 제주도민들의 과거와 겹쳐졌다. (왼쪽부터) 4·3 당시 군인과 희생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예수와 부둥켜안은 4·3 희생 소년과 소녀, 십자가 위의 예수를 재현한 공연 장면.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인 지난 3월29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언덕 위에 있는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다. 천주교 제주교구 청소년사목위원회가 준비한 ‘십자가의 길’ 공연을 보러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공원에 새겨진 4·3 희생자 비석 곁을 지나던 60대가량의 한 여인은 위령비에 머리를 비비며 “불쌍한 우리 아버지!”라며 신음을 토했다. 가톨릭 순례자들을 안내해 이곳에 도착한 이창준(68)씨도 비석에서 자기 아버지 이름을 찾아 가리켰다. 그가 5살 때 아버지 ‘이시형’씨는 33살로 세상을 떴다. 예수가 숨질 때와 같은 나이였다. 이씨는 “훗날 아버지가 산 채로 수장을 당한 사실을 들었다”며 눈물을 훔쳤다.
 
1949~54년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인 3만여명이 숨진 ‘제주 4·3사건’은 요즘 영화 <지슬>로 상영돼 재조명되고 있다. 그런데 희생자 가족들에게 ‘4·3’은 역사나 시나리오가 아닌 현실이었다.
 
한라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셌다. 하늘은 한치도 어김없이 봄을 가져다주어 제주는 벚꽃과 유채꽃이 만발했지만,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동토다. 눈 위에서 죽어가는 모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비설’(飛雪)상에서 모녀는 여전히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공원 중앙의 위령탑 주위에선 1천여명의 관객이 둘러싼 가운데 야외공연이 펼쳐졌다. 국내에 영화로 상영돼 화제를 모은 대형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연상시킬 만한 대작이다. 원래 ‘십자가의 길’은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매달린 채 숨져 무덤에 묻히기까지 머문 14곳을 차례로 순례하며 묵상하는 예루살렘의 순례길이다. 그러나 이날 ‘십자가의 길’은 예루살렘이 아닌 ‘4·3’ 죽음의 현장인 한라산에서 시작됐다. 동굴 안에 숨어 있기가 너무도 답답해 뛰쳐나간 어린 여동생을 뒤쫓아나간 소년 앞에 총을 든 군인들이 나타났다. 군인이 어린 소년을 보고 발포를 망설이자 상관이 “빨리 쏘라”며 군인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댄다. 그 순간 소년이 쓰러진다.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소년의 주검 앞에서 군인은 “나는 죽이고 싶지않았다”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예수가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사형 선고를 받은 예수는 골고다 언덕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십자가를 진 예수 뒤를 따르는 이는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만이 아니었다. 죽은 소년과 그 어머니와 딸, 군인과 그 어머니 등 ‘4·3’의 희생자와 가해자들이 함께 뒤따랐다. 또 강우일 주교와 사제·수도자들, 관객들의 물결이 꼬리를 물었다.
 
이 행렬 주위로 ‘4·3’에서 희생된 이들의 비석이 줄지어 있었다. 예수가 지나는 옆 비석엔 희생자가 갓난아이였음을 보여주는 ‘1세’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로마군의 채찍에 예수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부르튼 예수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소년을 죽인 군인은 세상의 죄악과 폭력을 대신해 짊어진 예수를 향해 “주님, 저 때문이라고요? 제발 그만하세요!”라고 절규했다.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예수가 또 쓰러졌다. 쓰러진 예수를 안아일으킨 것은 ‘4·3’의 상처를 안은 소년 소녀였다. 상처 입은 예수와 4·3의 희생자들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뒤따르던 수도자들과 관객들은 남몰래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예수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머리에 씌워진 가시가 눈을 찌르고, 옷까지 벗겨진 예수는 사형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개구리처럼 예수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여전히 우리의 대지와 형제자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우리의 폭력에 관객도 가슴에 손을 댄 채 신음했다. 강우일 주교는 이 공연에서 “비극의 기억으로만 가둬둔 4·3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을 수 있게 힘차게 끌어내야만 인간의 탐욕과 무관심·인권유린·파괴·폭력·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강정마을 미사-.jpg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현장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사제 수도자 신자들
 
 
 
강주교 세족식1-.jpg
한 노인의 발을 씻어주고 있는 강우일 주교
 
 
강 주교는 전날인 28일엔 또다른 ‘고난의 현장’인 해군기지 건설 터인 강정마을 계곡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10년 전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제주도민들의 가슴에 대못이 박힌 채 뽑히지 못한 4·3의 아픔을 직시한 그였다. 1901년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으로 천주교인 수백명이 제주 원주민들에 의해 몰살당하는 박해를 받았음에도, 그는 제주 가톨릭의 대표로서 종단의 원한을 내세우기보다는 4·3 희생자의 아픔을 먼저 보듬고 나섰다. 그는 제주를 동북아시아의 상징적인 ‘평화의 섬’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기도해왔다. 그러나 강정마을엔 대못보다 더욱 거대한 쇠말뚝들이 이미 박혀 있었다. 그는 미사에서 ‘증오를 증오로, 폭력을 폭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며 ‘예수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이 득실대는 예루살렘으로 스스로 걸어가 증오를 사랑으로 이겨냈다’는 내용의 강론을 했다.
 
강론 뒤 강 주교는 이날 미사에 온 수도자와 주민들의 발을 계곡에서 씻어주었다. 세족식이었다.
모두가 부활의 눈부신 영광에 사로잡혀 있을 때,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은 고난과 죽음을 새기며 함께 눈물 흘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 눈물의 계곡에서 이들은 서로 상처와 아픔의 족적을 씻어주었다.
 
제주/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전문 휴심정(we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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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뉴스타파 앵커가 말하는 한국 언론의 길

"퇴임하는 MB에게 4대강 직접 따져 물으니… "

[열린 인터뷰] 최승호 뉴스타파 앵커가 말하는 한국 언론의 길

이대희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4-03 오후 5:11:01

 

 

새로운 대안 매체로 떠오른 뉴스타파가 3번째 시즌의 출발을 알린 후 곧바로 주목받고 있다. 국정원의 지난 대선 여론조작 의혹을 집중 보도하고 나섰고, 전 정권의 핵심 사업이었던 4대강 문제를 추적 보도해 성과도 거뒀다.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쉽게 보기 힘들어진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를 집중 부각시킨 것도 성과다.

본격적으로 독립
언론의 길을 걷기 시작한 뉴스타파 시즌3에는 반가운 얼굴도 있다. 지난해 MBC 노조 파업 당시 불분명한 이유로 해직된 최승호 PD가 주인공이다. 오랜 기간 <PD수첩>에서 굵직한 사건을 취재하며 한국 탐사저널리즘의 대표 주자로 손꼽힌 최 PD는 해직 후 뉴스타파에 합류, 2년여 만에 다시금 취재노트를 열게 됐다. 복귀 후 그는 곧바로 뉴스 전달 프로그램인 <뉴스타파N>의 앵커를 맡았고, 스페셜 프로그램인 <뉴스타파S>에서는 <PD수첩> 이후 다루지 못한 '4대강, 수심 6m의 비밀' 2편을 '마침내' 내보냈다.

<프레시안>은 지난 1일 저녁 7시 30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프레시안 1층 강의실에서 4월 '열린 인터뷰'를 최 PD와 가졌다. 인터뷰의 주된 줄거리는 뉴스타파의 성과와 현재, 그리고 김재철 전 사장 퇴임을 전후한 MBC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이를 통해 한국 언론의 안타까운 자화상도 짚어보았다.

최 PD는 한국 언론의 오늘을 "질문이 없는 저널리스트만 있는 시대"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 공백을 뉴스타파가 메우고 있노라고 자평했다. 실제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한 날,
논현동 사저 앞에서 최 PD만이 이 대통령에게 4대강 관련 질문을 던진 모습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 PD는 언론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권력 견제라고도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의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정부의 이야기를 옮겨 싣기에 바쁜 오늘날 한국 언론의 현실을
고발했다.

공영
방송, 즉 KBS와 MBC 등 지난 정권에서 낙하산 사장 문제가 불거졌던 공중파 방송사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사장 선임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도 최 PD는 말했다. 뉴스타파가 비록 힘을 내고 있고 여러 독립 언론이 언론으로서 소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방송의 영향력이 워낙 커, 이들이 진정 해외 공영방송처럼 정권으로부터 독립해야 한국의 언론이 발전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최 PD와의 열린 인터뷰는 시종 진지한 분위기로 진행됐으나, 간간이
웃음이 터지는 장면도 많았다. 웃음의 원인에는 거짓말 같은 한국 언론의 현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터뷰 진행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맡았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MBC에 있었다면 이런 취재 못 했겠죠." 최승호 PD. ⓒ프레시안(최형락)


"지금 참 좋아요"

프레시안 : 뉴스타파가 지난 3월 27일 뉴스타파가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서 개소식을 가졌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갔습니다. 축하합니다. 최 PD는 뉴스타파 합류로 오랜만에 현업에 복귀하셨죠? 얼마 만입니까?

최승호 : 한 2년 넘게 프로그램을 못 만들었죠.

프레시안 : 참여를 결심하게 된 계기를 알려주시죠.

최승호 : 사실 제가 해고되자마자 바로 '뉴스타파로 오라'는 얘기가 있었어요. 당시는 이근행 PD(MBC 전 노조위원장)가 뉴스타파에 있던 때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제가 참여를 결정하기는 좀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제가 MBC에서 해고됐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였거든요. 워낙 그 상황이 말이 안 돼서 '금방 사태 회복되고 복귀하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대선이 끝나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상당히 사태가 길어지게 됐고, 그 때문에 다시 제의가 왔을 때는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참여를 결심했죠.

프레시안 : 작년 6월 해고되셨죠. 사측에서 따로 사유를 알려주던가요?

최승호 : '직장 내 질서문란'입니다. 파업에 참여했다는 것 말고는 그분들이 특별히 저한테 얘기한 건 없어요.

프레시안 : 김재철 사장이 사퇴하셨어요. '조금만 더 버틸 걸'하는 후회, 혹시 안 하셨나요?

최승호 :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물론 새로운 사장이 오면 MBC 분위기도 바뀌겠죠. 설사 좋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하더라도 정상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프로그램을 못 만든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후회 안 합니다. 지금 참 좋아요.

프레시안 : 뉴스타파에서는 앵커뿐만 아니라 본업이라 할 수 있는 취재도 하시죠. MBC 때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취재환경이 좀 열악할 것 같네요. 좋은 점과 아쉬운 점, 뭐가 있습니까?

최승호 : 일단 아쉬운 점부터 얘기하죠. 여러 가지로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스태프 구성부터 딸리죠. MBC는 인원이 갖춰져 있으니 각 부문 스태프들이 준비를 다 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사람이 여러 일을 해야 하죠. 하다못해 취재 나갈 때도 MBC 때는 운전기사가 있고 렌트카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죠. 차를 준비한다손 치더라도 우리 조연출이 직접 운전까지 해야 하고요.

인터뷰를 거절당하는 일도 아무래도 많죠. '6m의 비밀'을 찍을 때 절실히 느꼈는데, 정부 관계자가 '뉴스타파는 등록 언론사가 아니니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당당하게 거부하더군요. 참 웃긴다 싶더군요. 자기들이 인터뷰를 안 한 상태로 방송이 나가면 그들에게도 좋을 게 없어요. 저희가 오보를 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상관 없다는 거죠.

좋은 점은 명확합니다. '6m의 비밀'이나 국정원 사태와 같은 걸 취재할 수 있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질문할 수 있습니다. MBC에 있었다면 이런 취재를 못 했겠죠. 이런 프로그램을 MBC에서 만들었다한들 바로 사장이나 본부장한테서 직접 압력이 들어왔을 겁니다.

비단 MBC뿐만이 아닙니다. 이처럼 정치권에서 직접 방송사 경영진에 압력을 가하고, 그 경영진이 취재를 막는 사태가 불 보듯 뻔하니, 기자나 PD들이 질문을 안 해요. 당장 이 전 대통령의 논현동 사저 퇴임식, 얼마나 취재하기 좋은 상태였습니까. 언론사 기자들이 100명은 와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저 중요한 사람에게 질문을 안 했어요.

프레시안 : 취재도 하고 앵커도 하십니다만, 현재 직접 취재하신 건 '6m의 비밀' 한 편입니다. 다음 <뉴스타파S>는 뭘 준비하고 계신가요?

최승호 : 그건 영업비밀이라서…. (웃음) 준비하는 건 있습니다.

프레시안 : 뉴스타파 시즌3가 벌써부터 이런 몇몇 보도 덕분에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국정원 댓글 관련 뉴스타파 보도를 봤는데요, 뉴스타파 기자들도 해킹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상황을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시죠.

최승호 : 최기훈 기자라고, YTN에서 해직된 기자가 관련 보도를 했어요.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사건을 취재하면서 트위터에서 국정원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계정 여러 개가 선거운동을 한 사실을 알게 됐죠. 그 계정들을 조사해보니, 특정 계정이 여당 후보를 칭찬하고 야당 후보를 깎아내리는 식의 글을 올리면 다른 계정이 일제히 이 글을 퍼 나르는 상황이 반복되더라고요.

제가 '국정원이 했다'고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런 취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특정 세력 혹은 개인이 최 기자 이메일을 해외를 통해 우회해서 해킹하려 했더군요. 이 친구가 평소 보안의식이 철두철미해서 비밀번호를 잘 관리해서 실패했습니다만.

이건 우리 뉴스타파 보도에서도 안 밝힌 내용인데, 저도 해킹 당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시도했더라고요? 제 계정은 접속 성공했더군요. 무슨 정보를 가져간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메일 계정에는 대단한 정보가 있진 않았습니다.

프레시안 : 누가 했는지는 모르신다는 거죠?

최승호 : 그렇죠.
 

▲뉴스타파는 새로운 대안 방송으로의 출발을 알렸다. <뉴스타파N>에서 앵커로 활약하는 최 PD. ⓒ뉴스타파


"박근혜 정부 아래 뉴스타파 잘 될 것 같아요"

프레시안 : 뉴스타파란 이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뉴스로 사이비 언론을 타파하자',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제가 살펴보니, 이 단체 공식 명칭은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더군요. 미국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온라인 대안 언론 <프로퍼블리카>가 탐사보도를 지향하는데, 뉴스타파도 탐사보도를 기치로 내건 것 같습니다. 뉴스타파의 보도 철학은 뭐죠?

최승호 : 보통 언론의 원칙이랑 같습니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본은 권력 견제입니다. 이를 위해 저희는 탐사보도를 지향합니다. 권력이 감추려는 걸 추적해서, 캐내서 대중에게 알리는 거죠.

불행히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은 중계보도에 매몰돼 있습니다. 출입처가 다 정해져 있고, 그곳에서 일방적으로 건네는 정보를 그냥 대중에 옮겨주는 수준이죠. 우리가 굳이 탐사저널리즘센터라고 이름을 정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중계보도는 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이를 위해 경력이 오래 된 기자들이 뭉쳤죠. 김용진 대표부터 말이죠. 현재 일하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

최승호 : 현재 28명입니다. 시즌2에 비해 두 배 정도로 늘어났죠. 국정원을 보도한 최기훈 기자도 시즌3부터 합류했습니다. 새로 기자를 뽑았는데, 신입에 더해 경력자도 뽑았죠. 앞으로 우리가 영속하는 체제로 간다는 걸 공표한 겁니다.

프레시안 : 제가 경영자의 입장에서 바로 드는 생각인데 말이죠, 우리나라 언론 대부분이 광고수입에 의존합니다. 광고수입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30명 가까운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지, 저는 좀 걱정이 되네요.

최승호 : 걱정해주시는 분이 많아서 잘 되지 않겠어요? (웃음) 후원회원들이 굉장히 열정이 넘치십니다. 결국 우리 하기 나름이죠. 저는 앞으로 더 잘 될 거라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을 굳이 꼽자면,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처럼 하지 않고 언론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웃음) KBS와 MBC가 다시 제 자리를 찾는다면 뉴스타파는 힘들어지겠죠. 그러나 현재 정부 상태를 보자면, 뉴스타파는 잘 될 것 같네요.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뉴스타파는 후원회원의 힘으로 운영 됩니다. 현재 2만8000여 명이더라고요. 저희도 후원회원의 도움을 얻고 있어서 그런지 남 일 같지 않습니다. 현재 어려움은 없나요?

최승호 : 현재로서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만 더 심도 있는 취재를 위해서는 인력이 더 필요한데, 그건 부족해서 아쉽죠. 지금은 기자들이 매주 프로그램 하나씩은 무조건 만들어야 하니 좀 더 깊이 있는 취재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서 신입으로 들어온 친구들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으면, 보다 제대로 된 탐사보도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프레시안 : 현재 뉴스타파 프로그램은 인터넷과 RTV로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접근도가 좀 낮은 편인데요, 시청자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최승호 : 열화와 같습니다. 방송이 나간 후 일요일에는 포털사이트 게시판에서 하루 종일 반응들을 보는데요,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오갑니다. 저희 프로그램을 유튜브에서 구독하시면, 자동으로 저희가 새 프로그램을 업로드할 때마다 이메일을 통해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구독해주세요.

왜 김재철 사장은 그리 질주했을까


프레시안 : 이제 MBC 얘기로 돌아가보죠. 공영방송이 망가지지 않았다면 뉴스타파도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김재철 사장의 3년, 어땠습니까? 왜 김 전 사장이 그처럼 철저하게 노조와 대결구도를 이어갔을까요?

최승호 : 저도 처음에는 그 정도의 사람일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분이 현업에 있을 때도 '훌륭한 기자'라는 소리는 잘 듣지 못했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얘기도 없었거든요. 오히려 후배들 잘 챙기고, 사람 좋다는 평가 받던 분이에요.

결국 낙하산으로 들어온 다음 자기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나간 것 아닌가 싶어요. 정부가 자신에게 준 역할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한 거죠.

김 전 사장이 그렇게 된 데는 서로 주고받는 부분도 있었다고 봅니다. MBC 구성원의 저항이 워낙 강하다보니 김 전 사장도 웬만한 강압으로는 저항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거죠. 그러다보니 이 분도 끝까지 가 버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프레시안 : MBC에 있는 지인에게 전해 듣기론 김재철 사장이 오시면서 '각 국의 가장 무능한 사람이 국장으로 승진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단순히 MBC 보도가 엇나간 수준을 넘어서 아예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진단이 나오더라고요. 이런 말까지 나올 정도인데, 26년 동안 MBC에 몸 담은 사람 입장에서 어떠신가요.

최승호 : 네…. 그 말씀이 일정 부분 맞아요. 평시 조직원들이 보기에는 한 부서의 장이 되기 어렵다 싶었던 분들이 다 승진했어요. 한편으로는 그런 인사가 이해되는 면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시는 분이라면, 김 전 사장의 지시에 충성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많았거든요.

여기 와주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직장인이라는 게 다 자식 키우고, 가정생활 걱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웬만큼만 하면 어느 정도 따라가려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김 전 사장이 그런 타협마저 힘들 정도로 일을 하셨어요. 자연히 정상적인 사람은 보직을 맡기 어려운 상황이 돼 버렸죠.

개인적인 소감을 들자면 '저 사람은 무능하긴 해도 사람은 참 좋다'는 생각을 한 분이 계셨는데요, 그 분이
완장을 찬 다음에는 바로 얼굴이 달라지더군요. 웃던 인상에 주름이 팍 생기면서 눈에 긴장감이 생긴 거죠. '권력이 얼굴을 성형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공영방송 독립성을 지키는 방법

프레시안 : 좀 껄끄러운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MBC가 이명박 정부의 표적이 된 결정적 계기가 <PD수첩>의 광우병 관련 보도였다고들 합니다. 당시 여권에서는 'MBC가 노영방송이다' '노조에 점령당했다' 'MBC가 민주당 편이다' 이런 비난이 많이 쏟아졌습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승호 :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다만 그런 인상을 주는 부분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봅니다. 이른바 보수 쪽 분들이 보셨을 때는 MBC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마침 MBC 출신은 정계 진출해도 다 민주당으로만 가고 한 거죠. 그래서 저는 엄기영 전 사장이 한나라당에 갔을 때 '차라리 잘 됐다' 싶더라고요. MBC에서도 한나라당 가는 사람이 있으면 적어도 '민주당 방송'이라는 소리는 덜 듣지 않겠습니까.

광우병 보도의 경우, 제가 할 말은 이겁니다. 기본적으로 <PD수첩>은 노무현 정부 때도 청와대와 굉장히 껄끄러운 관계였습니다. 당장 황우석 사건 때를 기억하시면 될 겁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 여러 차례 신랄하게 비판했죠. 그래서 노무현 정부 당시 홍보수석실의 회의 주제로 '다음 주 <PD수첩> 주제는 뭐냐'는 게 올라올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는 마치 MBC가 민주당 방송인 것처럼 분칠하고, 마침 그쪽이 권력을 갖고 있어서 더 확산되니 상당수 국민은 또 그렇게 알아듣고….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황우석 사건이 터졌을 당시 최문순 전 사장이 <PD수첩> 불방 결정을 내리기도 했죠. 확증이야 없지만 당시 저는 '청와대 압력이 있었나' 싶기도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MBC가 항상 민주당에 협조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제 김재철 사장도 물러났고, 이로써 MBC 정상화의 길이 열렸습니다. 다시 MBC가 공영방송의 소임을 다 할 가능성이 열렸다고 보십니까?

최승호 : 단순히 특정 인물이 한 명 물러난다고 해서 바뀌진 않을 겁니다. 근본적으로 공영방송 사장을 선임하는 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MBC 사장 선임 구조만 보면,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의 여당 추천과 야당 추천 이사 비율이 6대 3입니다. 과반수만 넘으면 사장이 당선되고요. 이 상황에서는 죽어다 깨어나도 야당 측 주장은 관철 안 됩니다. 어느 정권이 와도 마찬가지예요. KBS도 이런 구조는 마찬가지고요.

이걸 바꿔야 합니다. 공영방송 이사진 배분을 여야 5대 5로 하거나 최소한 6대 4 정도로 한 다음 절대 다수, 예를 들어 이사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할 때만 사장 선임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합의에 따라 사장이 나올 것 아닙니까. 해외 상당수 공영방송도 이런 규칙을 갖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 저는 개인적으로 제도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당 추천 이사라 하더라도 기자와 PD의 자율성을 확대해주면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김대중 정부 당시 김중배 사장이 적절한 예가 되리라고 봅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실제로는 김중배 전 사장을 낙점한 건 아니었다고 들었어요. 어찌됐든, 마지막 질문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와 다른 정책을 펼까요?

최승호 : 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새 정부가 정말 달라졌다면, 제 생각에는 김재철 사장 해임안이 일방적으로 방문진에서 통과됐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6명 여당 측 이사 중 두 분 정도가 겨우 독립적으로 판단해서 통과됐습니다. 네 분은 여전히 김재철 사장을 지키려고 한 거죠.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정부 쪽의 전화를 받은 여당 측 이사도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현 정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긍정적 판단을 내리기는 좀 이르지 않나 싶습니다.

 
 
 

 

/이대희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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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인질 '특전사 구출' 시나리오,가능할까?

 


 

북한이 4월3일 개성공단 근로자의 서울 입경은 허용하고 있지만, 개성공단 출입은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치는 북한이 개성공단을 폐쇄하겠다는 위협을 한 지 4일만입니다.

북한은 개성공단 출입에 필요한 출입경 승인 통보를 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개성공단으로 들어가려는 남측 근로자 484명과 차량 371대가 개성공단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개성공단에는 남측 근로자 861명과 외국인 근로자 7명 등 모두 868명이 머물고 있으며, 조업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의 개성공단 폐쇄 위협과 개성공단 출입을 승인하지 않자, 김관진 국방장관은 3일 새누리당 당사에서 열린 '북핵안보전략특별위원회' 회의에서 "(북한) 앞으로 개성공단을 폐쇄할 수 있다. 국방부는 국민 신변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서 ,만약 사태기 생기면 군사 조치와 더불어 만반의 대책도 마련돼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김관진 국방장관의 발언과 국방부 군당국자의 말을 인용하면 개성공단에 인질 사태가 발생하면 특전사를 통해 구출하겠다고 하는데 이런 발언과 작전은 실효성이 굉장히 낮으면서 위험한 발상이기도 합니다.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은 인질 구출 작전'

우리가 영화와 인질 구출 작전 성공 사례만 봐서 인질이 억류되어 있을 때, 쉽게 구출할 수 있을 듯 보이지만 실제로 인질 구출 작전은 굉장히 위험하면서 실패할 확률이 높은 작전 중의 하나입니다.

적지를 타격하거나 폭파하는 작전은 최후의 수단으로 동귀어진처럼 자기 목숨을 바쳐 작전을 수행하면 되지만, '인질 구출'이 목적인 경우 전투를 벌이면서 인질을 구출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습니다.
 

 

▲엔테베 구출작전과 뮌헨올림픽 '검은9월단'을 다룬 영화.

 


인질 구출 작전의 성공 사례로 손꼽히는 작전이 '엔테베 구출작전'입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출발한 에어프랑스 139 항공기기 승객 248명과 승객 12명이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소속 테러범들에 의해 납치돼 우간다 엔테베 국제공항에 기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육군 최정예인 제35공수여단과 특수부대 ‘사이렛 매트칼(Sayeret Matkal)’ 등에서 선발한 대원으로 특공대를 조직해 1분45초 만에 인질범을 사살하고 인질을 구출합니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 '검은 9월단'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들이 올림픽 이스라엘 선수촌에 난입하여 11명의 인질을 잡았고, 서독경찰의 어설픈 작전으로 인질 9명 전원 (2명은 이미 살해) 경찰관 1명, 범인 5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바슬란 초등학교에 폭탄을 설치하며 어린 학생들을 인질로 삼은 체첸 무장괴한 (위) 러시아 특수부대 (아래 왼쪽) 진압작전 중에 희생된 민간인 시신 (아래 오른쪽)

 


2004년 북오세티아 공화국 베슬란의 한 초등학교에 체첸 반군무장괴한 30명이 1,128명의 학생과 교사,주민 등을 인질로 삼고 러시아 특수부대, 경찰과 대치를 합니다. 8시간에 걸친 치열한 인질 구출 작전을 벌였지만, 어린이 186명을 포함 민간인 334명과 인질범 32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이 사건으로 693명이 병원 치료를 받았고, 40명의 어린아이들이 불구가 된 상태로 대규모 인질 구출 작전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를 보여준 사례입니다.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을 다룬 영화 '아르고'

 


1979년 이란 테헤란에서는 팔레비 왕의 소환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주 이란 미국 대사관에 난입하여 점거, 미국인 50여명이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를 다룬 영화 '아르고'를 보면 영화 촬영을 하면서 일부 인질을 구출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인질은 1981년 1월까지 무려 444일 동안 억류됩니다.

영화와 다르게 실제 미국은 주 이란 미국 대사관에 억류된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이란 사막에 기지를 설치하고 RH-53D 시 스탤리온 헬기를 동원한 작전명 '독수리 발톱 작전 (Operation Eagle Claw)' 인질 구출작전을 벌입니다. 그러나 기지가 발각당하고 모래바람에 헬리콥터가 고장 나서 구출작전을 펼치기도 전에 철수하고 이 과정에서 오히려 미군 8명만 사망합니다. 결국, 나중에 협상을 통해 인질이 풀려나기는 했습니다.

이처럼 인질 구출 작전은 영화처럼 멋지게 끝날 수도 있지만, 인질이 사망하는 결과도 나올 수 있을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질 구출 작전은 치밀한 작전과 실제 모형을 토대로 하는 가상 훈련, 외교적인 지원 등이 합쳐지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개성공단 구출 작전은 특전사와 미군이 합쳐도 불가능'

국방부는 개성공단에 남측 근로자가 억류될 경우, 한.미 연합으로 '인질 구출 작전'을 감행하겠다고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파치 헬기와 특수작전용 MH-47,MH-60 헬기를 이용해 특전사 707특임대와 미군이 지원하여 개성공단 인질을 구출하겠다는 이 시나리오는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868명에 해당하는 대규모 인질 때문입니다. 인질이 소수인 경우 기습작전을 펼쳐 충분히 가능하지만, 868명을 안전한 지대로 구출하기 위해서는 여러 대의 인질 수송용 헬기와 수십 대의 버스를 동원해야 하는데, 이런 작전은 거의 실패합니다.
 

 

▲페루주재 일본 대사관 인질사건은 현장에 있던 카메라로 생생하게 중계되기도 했다. 출처:MBC 뉴스

 


물론 1996년 일어난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 인질 구출 작전처럼 7백여명의 인질을 상대로 펼친 구출 작전이 성공한 사례도 있습니다. 1996년 12월 17일 아키히토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 파티가 일본에서 열렸는데, MRTA라는 무장 게릴라 14명이 대사관에 있던 각국 외교관 7백여명을 인질로 잡습니다.(이중에는 한국 대사 이원영씨도 포함)

페루 당국은 많은 인질 때문에 즉각적인 인질 구출 작전을 벌이지 않고 협상을 통해 일부 인질이 풀려났으며, 도청기와 무선 송신기 등을 대사관 안으로 반입하며 대사관과 동일한 모형 세트에서 특수 부대를 훈련하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땅굴을 파서 통로를 확보하며 작전명 "차빈 드 완타르"(지하 땅굴에 있는 유적 이름)를 감행합니다. 이 작전으로 인질범 14명이 전원 사살됐고, 인질 1명, 특공대원 2명이 사망하는 등의 구출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 구출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질범의 규모를 처음 7백명에서 72명으로 줄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적지가 아닌 페루 내에서 벌였기 때문에 장기간 땅굴을 파는 등의 치밀한 구출 작전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즉 최소의 인원이라면 특전사 707특임대가 침투하고 미군이 엄호하면서 빠른 시간 안에 구출이 가능하지만, 대규모 인질이 억류된다면 개성공단 인질 구출 시나리오는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개성공단에 숨어 있는 군사적 의미'

개성공단에 남측 근로자가 억류됐을 경우 대규모 인질 때문에 구출작전이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미군의 막강한 화력으로 개성을 점령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모합니다.
 

 

▲개성공단에 있던 북한군 위치를 표시한 위성사진.

 


2003년 12월 착공됐던 개성공단은 원래 2군단 6사단이 주둔했던 지역입니다. 개성 시가지를 포함해 이 지역을 관할하는 인민군 부대는 2군단 6사단. 크게 4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 탱크대대와 경보병대대입니다. 이들이 주둔했던 지역이 지금의 개성공단 자리입니다.

북한군이 개성공단이 생겼다고 멀리 간 것이 아닙니다. 개성공단 후방으로 옮기기는 했지만 즉각적으로 개성공단에 투입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개성은 주변으로 북한 인민군 5개 사단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처럼 북한이 개성 주변에 많은 병력을 배치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울까지 빠른 시간 안에 돌파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입니다. 이는 개성공단이 북한군의 남한 침략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국전 당시 개성,문산 전투를 담당했던 한국군 1사단 전투 지도와 현재 북한 지상군 배치도

 


개성지역은 군사적 요충지의 하나입니다. 유사시 인민군 지상전력이 가장 빠르게 수도 서울로 내려오는 이동경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먼점을 사이에 두고 개성,문산 지역은 한반도 전체에서 군사전력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이유로 개성공단이 처음에 생길 때 북한 병력이 북상한다는 사실만으로 수도 서울에 대한 방어가 손쉬워졌다는 평가도 나올 정도였습니다.물론 어떤 이들은 개성공단을 만들면서 수도 서울까지의 거리가 더 빨라졌다는 위험성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개성공단이 어떤 군사적 완충지대로의 역할을 할 때에는 전쟁의 위험성이 줄어들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더 어렵다는 말이 됩니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북한군을 개성공단으로 이동한다면 전면전의 위험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개성공단에 남측 근로자가 인질로 억류될 경우 대규모 구출 작전을 벌인다면 전면전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4월2일 청와대에서 김관진 국방장관,류길재 통일부 장관,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외교안보장관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현재 우리의 안보상황이 매우 엄중하다"라며 "외교,군사적 억지력으로 북 도발을 못하게 하는게 중요하다"고 당부했습니다.

문제는 지금 외교적인 채널도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군사적 압박은 과거에도 그리 효용성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북한이 개성공단 폐쇄, 미사일 발사,장거리 사정포 등의 군사적 위험을 높이지만 한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황을 박근혜 대통령이 안다면 그저 말뿐이 아니라 대북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정책을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적지에서 벌이는 작전의 위험성은 높습니다. 여기에 대규모 인질 구출 작전은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인질 구출 작전'을 벌이겠다는 강경책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대북 외교 협상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해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안을 하루빨리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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